제목: 삼위일체인가 일체삼위인가? - 유해무 교수
우리가 성부,성자,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음에도 불구하고 일상적인 우리의 신앙생활은 단일신론으로 나타난다는 지적이 있습니다. 여러분들께서 교과서적 지식으로 세계종교 가운데서 유일신적 성격을 가진 종교가 무엇이냐 하자면 대표적으로 세 종교를 열거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그야말로 교과서적인 지식이고 왜곡된 교과서입니다. 왜냐하면 유대교나 회교의 야웨나 알라는 우리가 믿고 있는 삼위하나님이 아닙니다. 이점에서 단일신론이라는 것 자체가 오해된 용어라는 것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차제에 고대 동방교회에 대한 관심이 크게 고조되어 있고 더러는 삼위일체론 신학의 부흥이라는 이야기가 쓰여지고 있습니다. 이렇게 된 배경으로는 신교의 대표신학자인 칼바르트, 그리고 그에 버금가는 구교의 신학자로 칼 라너를 언급할 수 있는데, 이 사람들이 묘하게도 삼위일체론을 자기들의 신학의 중심으로 삼았기 때문입니다. 이외에도 러시아 혁명이후에 파리로 도망을 왔던 망명객 러시아 신학자들이 삼위일체론 신학에 대한 중요성을 서방신학계에 알려주었는데 이 러시아가 동방신학의 전통을 따르고 있습니다. 또 세계교회 협의회가 구성되어지면서 러시아 교회가 이에 참여하게 되고 이들에게서 잘 전수되어졌던 특별히 그 성령론, 성령론을 중심으로 한 삼위일체적 신학이 서방교회에 알려지기 시작했습니다. 이런 와중에서 특별히 세계 개혁교회 연맹 신학분과가 러시아와 동구에 있는 몇몇 동방 정교회들과 함께 신학적인 집담회를 가지면서 신학 집담회의 주제로 삼위일체를 삼았습니다. 특이한 것은 루터교회에서도 동일한 이야기를 시작하면서 신격화, 데이타치오 즉 데오시스 신격화 문제를 주제로 삼았고 구교도 그와 같은 일을 하면서 필리오케, 기독론 가운데서 성령론 가운데서 가장 난점으로 알려져 있는 성령께서 과연 성부로부터만 나오시느냐 그리고 성자로부터, 필리오케 이 문제를 주요 관심으로 삼았고 영국 성공회 같은 것은 잡다한 교회론의 문제를 가지고 주제를 삼았습니다. 개혁교회가 삼위일체론을 주요주제로 삼을 때에 이것을 주도했던 사람이 토른스라는 사람인데 이분은 여전히 아직까지 생존해 있습니다. 이분의 원래 전공은 고대교부들인데 바젤에서 칼 바르트와 쿨만의 지도를 받아 속사도 교부들의 은혜론에 대한 논문으로 학위를 받았습니다. 어쨌든 토른스와 같은 개신교도들의 영향으로 갑바도기아 교부들 우리 성경에는 갑바도기아로 나타나는 지금의 터키 중북부 지역에 있는 그 지역에서 삼백년대에 활동했던 교부들에 대한 관심이 점차 많아지게 되어졌고 토른스 같은 사람은 그중에서도 나지안주스의 그레고리의 삼위일체론에 주목하면서 그레고리우스가 아타나시우스와 니케아 회의의 삼위일체론을 따르고 있다고 지적을 했습니다. 요약된 글의 두 번째에 보면 이 서방교회의 삼위일체론에 문제점이 많다는 지적이 되고 있는데, 칼 라너에 의하면 토마스 아퀴나스 이후의 서방전통은 일체에 관하여를 삼위에 관하여에 선행시킨다고 지적하고 있습니다. 바로 여기에서 오늘 강의의 제목을 따왔습니다. 일체가 선행되고 삼위가 그 뒤를 따라온다면 우리가 공식적으로 사용하고 있는 삼위일체라는 용어가 아니고 실제는 일체삼위라는 말이 합당한 것이죠. 여기에서 우리 스스로 한번 자문해 볼 수 있어야 겠습니다. 이렇게 할 경우 하나님의 본성과 속성은 구속역사가 아니라 철학적이고 형이상학적으로 다루게 됩니다. 로스키라는 현대 동방교회의 신학자는 하나님의 일체성에서 출발하는 것은 철학적인 자연신학이다 그렇게 혹평을 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현대 그리스 신학자인 치치울라스는 아우구스티누스와 토마스 아퀴나스의 삼위일체론을 아주 강하게 비판했습니다. 즉 하나님의 본질이 지닌 비관계론적인 일체론성을 중심부에 두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이 비관계론적이라는 말은 일체에서는 교제가 있을 수 없습니다. 삼위는 교제가 가능하지만 일체는 교제를 할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서방전통은 이 비관계론적인 일체를 전면에 또는 중심부에 두었다는 주장인데, 이 주장은 칼라너의 비판과 맥을 같이 합니다. 그런데 그는 갑바도기아 교부들의 입장을 주목하면서 하나님 안에는 위격이 본성에 선행한다는 명제를 발진시켰습니다. 갑바도기아 교부들은 역사상 처음으로 하나님의 존재에다가 원인개념을 도입하여서 하나님의 존재를 일체가 아니라 한 위격, 곧 성부에게 있다고 보았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하나님 되게 하는 원인은 신적본체가 아니라 성부의 위격이라고 사고하였습니다. 이런 식으로 그들은 위격에다가 본체론적 우선권을 주었고 본체나 자존자의 논리적 필연성으로부터 실존을 해방시켰다...아마 한국글로 그대로 읽었습니다만 여러분들이 쉽게 이해하기 어려울 겁니다. 여기에서 본질은 실존은..이라는 이야기에서 실존철학 특별히 장 폴 사르트르와 같은 사람의 이야기를 연상시키는 그런 말이기도 합니다마는 어쨌든 서방전통은 일체라는 하나님의 본성을 항상 우선시하면서 거기에서 성부,성자,성령을 이야기하지만 동방전통은 치치울라스에 의하면 성부 하나님의 위격을 전면에 내세워서 위격이라는 실존을 전면에 내세우면서 그 위격이 성자, 성령과 관계를 가지게 되어짐으로서 서방전통을 능가하는 그리고 치치울라스의 말에 의하면 본체나 본질을 실존에 우선시키는 헬라전통을 역사상 처음으로 깨트린 사람들이 갑바도기아 교부들이고 그들의 삼위일체론이 그렇게 했다는 것입니다. 여기에 제가 문제를 제기하려고 합니다. 네 번째로 치치울라스의 갑바도기아 교부들에 대한 해석이 과연 정당한가? 여기에 언급되어지고 있는 갑바도기아 교부들은 일반적으로 세사람입니다. 나지안주스가 있고 그 형제인 대 바실리우스와 닛사의 그레고리우스 입니다. 그 연대를 보시면 알겠지만 나지안주스와 바실은 동갑입니다. 그럼에도 대 바실리우스의 권위 때문에 나지안주스는 동료보다는 바실리우스를 선생으로 대하는 관계였고 도리어 동생인 닛사와 나지안주스는 친구로서 지냈습니다. 나지안주스는 381년의 콘스탄티노플 종교회의의 의장을 맡았습니다. 제가 보기에는 무더기로 갑바도기아 교부들을 이런식으로 치치울라스가 평가하는 것은 합당하지 않다는 것이 저의 입장입니다. 이 양자간에 미미하지만 중요한 의견차이가 있다는 것을 치치울라스는 간과하고 있습니다. 즉 나의 질문은 ‘과연 신존재의 원인이 성부이며 유일한 주권도 성부에게 속하기 때문에 유일한 하나님은 아우구스티누스나 중세신학자가 주장하듯 본체가 아니라 성부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그리고 다섯 번째 나오고 있는 유노미우스라는 사람은 이름만 알려져 있지 그의 저작은 현존하고 있지 않습니다. 교회역사를 보면 이단에 관한 교회의 대책은 분명하고 강했기 때문에 이단의 저작은 거의 남아있지 않습니다. 대표적으로 오리게네스와 같은 사람의 대표저작인 케리그 아르콘과 같은 원리에 대한 책은 어떤 부분은 라틴어만 남아있고 어떤 부분은 라틴어와 헬라어로 복원되어져 있는 것을 보게 되는데 결국은 헬라어로 쓰여있던 원문이 당대에는 라틴어로 번역되었다가 이사람이 이단으로 지명되게 되자 이사람의 저작들을 분서갱유해버린 것이죠. 우리가 잘 아는 대표적인 이단 아리우스도 신앙고백이 있고 여러 가지 저작이 있지만 남아 있는 것이 없습니다. 아리우스와 입장을 같이 하고 있는 이 유노미우스라는 사람도 저작은 남아있지 않고 그를 비판하고 있는 갑바도기아 교부들의 글들 ’반 유노미우스‘ 라는 글들에서 인용되어 있는 것을 재구성할 수 밖에 없는 형편입니다. 유노미우스는 하나님의 본체를 비출생성으로 보았고 성자는 출생하였기 때문에 성자는 하나님의 본체로부터 유래한다는 결론을 도출합니다. 즉 성자는 영원하지 않다. 성자는 하나님이 아니다 라는 것입니다. 이런 아리우스와 유노미우스의 주장을 논박하기 위해 갑바도기아 교부들은 하나님 안에서 본체와 위격을 구분하였습니다. 바실리우스는 비출생성을 본체가 아니라 위격과 관련시켰습니다. 하나님이 성부나 비출생자로 명명될 경우 그는 본체가 아니라 위격과 연관되어 그렇게 거명됩니다. 하나님의 본체에 관해서는 본체가 유일하며 단순하고 비복합적이라는 말외에는 달리 할 말이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가지성이 아니라 불가해성을 지시하는데 이것은 동방신학에 자리잡고 있는 부정신학의 뿌리가 됩니다. 언급되어질 수 있는 하나님의 속성이 있다면 오직 하나님의 위격성, 즉 성부의 비출생성, 성자의 출생성, 성령의 나오심이라는 겁니다. 바실리우스의 이 입장을 평가하면서 치치울라스는 삼위의 이런 비공유적 속성들은 상관적으로 거론되어져야 한다고 말합니다. 갑바도기아 교부들은 위격을 관계나 스케이시스라고 칭했습니다. 어떤 위격이라도 다른 두 위격과 상관없이 거론되지는 않습니다. 여기의 비공유적 속성에 대한 바실리우스의 입장이나 이 비공유적 속성들을 상관적으로 이해해야 한다는 입장이나 그리고 어떤 위격이라도 다른 두 위격들과 상관없이 언급되어지지는 않는다는 입장은 우리가 항시 받아들일 수 있고 받아들여야 하는 중요한 입장입니다. 즉 성부하나님이 언급되어질 경우 혹 설교 처음부터 끝까지 성부에 대한 설교를 불가피하게 한다 하더라도 그 성부하나님은 성자와 관계하시며 성령의 나오심을 주도하는 그런 성부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비공유적 속성을 전면에 내세우면서 이제는 존재의 일체성과 위격의 동등성이 문제가 되어집니다. 여기서부터 문제가 발단됩니다. 신적인 일체성을 보장하기 위해서 그들은 성부를 성자와 성령의 원천과 원인이라고 불렀습니다. 헬라어로는 페게이 또는 아이티온 또는 리자, 뿌리라는 말을 씁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런 묘사에 있어서 성부는 관계 뿐만 아니라 존재의 원인자가 되심입니다. 존재의 원인자가 된다는 이것이 제가 생각할 때에 풀어야 되는 갑바도기아 교부들의 신학이 지닌 가장 큰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성부는 완전한 존재시며 따라서 성자와 성령의 뿌리와 원천이 된다는 것입니다. 신적 위격안에 그 관계성 속에 인과성이 도입이 되어졌습니다. 그런데 나지안주스는 다른 두 교부들과 달리 주권이 한 위격에만 국한될수 없다는 것을 강변합니다. 각 위는 스스로 살필 때 하나님이며 이것은 성부에게 해당되듯 성자와 성령에게도 해당된다. 만약 함께 살피면 일체시다. 각 하나님은 공통 본체시며 주권으로 인하여 한 하나님이시다. 나는 한 분을 삼위의 휘광으로 재빨리 휘감지 않고는 생각할 수 없으며 삼위를 구별할 때는 즉시로 한분에게로 옮겨진다. 이말은 여하한 묘사를 능가하는 탁월한 표현입니다. 나지안주스는 삼위내에 완전한 동등성을 주장했습니다. 다른 두 교부들에 의하면 이 동등성은 보장이 되어지지 않죠. 한 위격의 원인성은 다른 위격을 손상시키기 때문에 이 원인이라는 말 조차도 두려워했습니다. 성부로부터 동등성과 동등자들의 존재가 나아오기에 나는 성부가 더 크다고 말하고 싶다. 그러나 나는 근원이라는 말을 사용하기가 두렵다. 성부를 열등자의 원인으로 만들고서 존귀의 순서로 성부를 훼손하지 않으려고 하기 때문이다. 그로부터 나오는 이를 낮추는 것은 그 원천에게 영광이 되지 못한다. 나지안주스의 다음 발언은 그의 주장을 더욱 분명하게 합니다. 아리우스는 성부에게서 나온자를 신성에 있어서 열등하다고 함으로서 성부를 존귀케하지 못했다. 그러나 우리는 성부의 한 영광을 인정하고 독생자의 동등성과 성자와 성령의 한영광을 인정한다. 삼위의 한위를 밑에 정의시키는 것은 전체를 폐지한다는 입장을 견지한다. 우리는 그들을 고유성에서는 삼위요 신성에 있어서는 일체이심을 인정하고 예배한다. 이 마지막 문장은 아주 중요한 문장입니다. 즉 성부의 주권은 한 순간도 아리우스의 주장대로 이해되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즉 주권은 성부만의 주권이 아니라 삼위의 공유라는 결론을 얻게 됩니다. 그러므로 성부의 주권은 불가분리인 존재안에서 성자와 성령과의 관계에서만 거론되어질 수 있습니다. 신학역사에 보면 군주론이라는 게 있습니다. 모나르키아 이것을 군주론 또는 주권론이라고 번역할 수 있는데, 이 주권론은 그 성격상 종속설입니다. 종속설이라는 것은 삼위안에 위계질서를 두어서 한 최고의 존재자로부터 다른 두 위 또는 분을 설명하는 것입니다. 이 종속설 중의 하나인 이 주권설은 성부만이 하나님으로서의 주권을 지니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 주권을 가지고 성자와 성령에게 나누어 준다고 말하고 있는데, 나지안주스는 분명하게 하나님의 주권은 성자와 성령과의 관계에서만 거론되어질수 있다고 함으로서 성부만의 독주로서의 주권이라는 것은 없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즉 유일하신 하나님은 삼위하나님이시다. 이것이 하나님의 존재이다. 성부의 근원은 성자와 나누어서는 생각될 수 없다. 주권은 삼위와 동일하며 일체성, 단일성도 삼위와 동일하다.
여기에서 제가 첫째로 나지안주스와 다른 편으로는 바실리우스와 그의 동생 닛사의 입장에 차이가 하나 있다는 것을 지적했습니다. 이 차이가 있다는 것을 치치울라스는 전혀 고려하지 않고 있습니다. 둘째 또한 치치울라스가 이야기하면서도 고려하지 않고 있는데 그는 이 존재의 양식, 토로소스 히프락세우스 라는 말을 바실리우스나 닛사의 그레고리우스와 막시무스 콘페소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사람은 신앙을 고백하다 죽은 사람입니다. 신앙을 고백하다 죽었기 때문에 막시무스 콘페소라는 고백자 막시무스라는 별명을 가진 사람인데 이 세사람은 존재의 양식이라는 말로 위격을 정의한다고 치치울라스가 말합니다. 이 용어와 원인개념이 결합하면 성부에게는 이 위격이라는 정의가 해당되지 않음을 알게 됩니다. 즉 신성의 원인인 성부로부터 성자는 출생을 하고 성자는 나오심으로 존재를 하게 됩니다. 바로 이 존재방식 이 존재방식을 이야기 하기 위해 성자의 출생성이라는 존재방식과 성령의 나오심이라는 존재방식을 이야기하는데 항상 그 기준이 성부이기 때문에 성부의 비출생성을 이야기 한다 하더라도 그것은 다른 성자와 성령의 존재방식과는 구별이 되어집니다. 이때 성부의 고유성은 비출생성이지만 존재의 양식으로서는 그 위격이 해명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이 트로포스 히프락세우스의 이것은 항상 원인개념 무엇무엇으로부터 나오다 라는 개념이 항상 있기 때문에 성자에 대해서 성령에 대해서는 성부로부터 출생하고 나온다는 개념이 가능한데 성부의 비출생성에 대해서는 어디로부터 비출생성이 나오는가에 대해서는 할말이 없는 것이죠. 이것은 결국 원인성을 신격 속에 도입한 것이기 때문에 불가피하게 쓸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특이한 것은 치치울라스도 침묵하고 있지만 바로 이 나지안주스가 바로 이 원인으로 인해서 사용될 수 밖에 없는 존재의 양식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삼위간의 호모우시오스 즉 하나님의 동등성을 말하는 아타나시우스를 따르면서 나지안주스는 각 위격이 굳이 다른 위격과의 관계에서가 아니라 스스로 하나님이라고 주장합니다. 이 스스로 하나님이라는 말은 어거스틴이 자주 쓰는 말인데 아우토 호 떼오스라는 말입니다. 그 스스로 하나님이시다. 존재와 연관하여 원천이 성부가 성자보다 크다는 입장을 나지안주스는 기필코 거부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성부를 기원이라고 말할 경우 우리는 또다른 반응을 양립해야 된다는 입장입니다. 성부를 기원이요 원천이요 뿌리요 원천이다 라고 말할 때 그것은 결코 존재의 기원이요 존재의 원천이요 존재의 뿌리라고 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될 경우 신생성론이 문제가 됩니다. 즉 이 두 교부들과 그 외 몇몇 교부들이 따르고 있는 성부가 성자의 원인이라고 얘기할 때 결코 존재의 원인이 되어서는 안된다는 것이 우리의 입장입니다. 신적 위격들의 내적 관계에 있어서 순서의 원리는 불가피하게 있습니다. 즉 성부가 먼저요 성자가 둘째요 성령이 셋째라고 봅니다. 이것은 순서나 경륜의 연고입니다. 성부가 어떤 의미에서는 기원인 것을 인정해야겠지만, 아버지의 보냄을 받았다. 이것은 아버지의 의중에 있기 때문에 아들은 모른다 이런 경륜적 발언을 고려해야 되기 때문에 성부가 신성이 아니라 순서에 있어서는 기원이라는 말을 조심스럽게 써도 된다는 것이 저의 입장입니다. 즉 성부는 존재가 아니라 순서에 있어서 신성의 원리다라는 말을 할 수가 있습니다. 이것은 칼빈의 말입니다. 성자가 성부와 관계속에서 말해지면 성부는 응당 성자의 기원입니다. 그러나 성부와 관계없이 단순히 성자를 말하려면 성자는 하나님이다..
하나님이라는 이름은 삼위가 공동적으로 소유하지만 때로 이 하나님이라는 이름은 성부를 지칭할 수도 있습니다. 신약성경을 볼 때 하나님이라는 말이 나올 때 95퍼센트 이상이 성부하나님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라는 단순한 이름은 관계성을 내포하고 있지 않기 때문에 하나님에 대해 이렇다 저렇다 말할 수는 없습니다. 단일성 또는 일체성은 성부가 아니라 삼위의 공통본성에 있습니다. 물론 순서는 있지만 종속은 있을 수 없습니다. 삼위 중 한분을 격하시키는 것은 전체를 폐지하는 것이라는 나지안 주스의 항거를 우리는 항시 존중해야 합니다. 삼위의 동등성이 위험에 처하지 않는다면 어떤 위격이 첫째 둘째 셋째 나타나도 합니다. 즉 반드시 성부가 첫 번째 나와야 될 필요는 없습니다. 대표적인 것이 축복선언이죠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성자께서 먼저 언급될 수 있죠 그런데 원인론적으로 말할 때는 항상 성부가 먼저 나와야 되든지 아니면 성부가 우위를 점해야 된다는 주장을 하게 되는데 그것은 제가 볼 때 종속설의 마지막 꼬리가 아니겠느냐는 것입니다.
결론입니다. 치치울라스가 주장한대로 갑바도기아 교부들의 견해를 순진하게 수용하는 것은 충분하지 않다고 봅니다. 그리스 출신인 치치울라스는 자신의 출신배경을 십분 이용하지 못했습니다. 갑바도기아 교부들의 견해차를 최소화하려는 그의 태도는 만족스럽지 못합니다. 일단의 학자들은 서방 삼위론의 부족한 점을 보완하기 위해 그의 견해를 비판없이 원용하고 있습니다. 이 사람이 옥스퍼드에서 활동하기 시작했는데, 최근 한국에 조금 알려지기 시작한 콜린 건톤이라는 학자가 있습니다. 이 사람이 The promise of tritarian theology 라는 250페이지되는 책을 썼는데 이 책에 보면 건톤은 아우구스티누스나 토마스 아퀴나스 같은 사람들을 아주 신랄하게 비판을 하고 있습니다. 그 외에도 이 사람이 함께 세미나를 해서 너댓권의 책을 출판했는데 그 책의 중심 주제가 삼위일체론입니다. 그래서 저는 일단의 학자들이 서방 삼위론의 부족한 점을 보완하기 위해서 그의 견해를 비판 없이 원용하는데 이 사실 뿐 아니라 아우구스티누스를 막무가내로 비판하는 것은 결코 보완이나 진전일 수 없습니다. 동방교부들에 대한 근원적인 연구가 결여되어 있습니다. 현대의 논의들은 교부들을 직접 읽으면서 진행되기 보다는 교과서적인 수준에서 진행되고 있습니다. 우리는 근원적인 교부연구의 필요성을 주장합니다. 동서방 양 전통의 존재를 지적하는 것은 옳고 의미를 지닙니다. 그러나 이런 시도를 하기만 하면 양자를 극단적으로 대치시키고자 하는 위험이 항상 도사리고 있습니다. 필리오케가 아주 좋은 실례입니다. 교부들을 직접 연구하지 않고서 이런 투의 풍자식으로 말하는 것은 엄청난 거짓일 수도 있습니다. 삼위일체론의 부흥은 교부연구를 통해서만 그 뿌리를 바로 내릴 수 있는데 우리 종교개혁의 후예들은 이점을 더 유념해야 합니다. 우리가 아무리 개혁을 지지해도 개혁은 시작이 아니라 그릇된 길로부터의 회복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개신교 신학자 가운데서 구교신학자와 걸맞게 논의를 할 수 있는 신학자는 극소수입니다. 아마 이름을 꼽으라면 판넨베르크 정도 이외에는 아마도 구교신학자들과 대등하게 토론을 할 수가 없습니다. 이유가 간단합니다. 우리는 종교개혁에서 출발하기 때문에 중세를 무시해 버리고 고대에 대해서는 아예 무지합니다. 로마교회의 전통은 라틴어를 사용하기 때문에 중세를 꿰고 있고 그 중세의 입장에서 종교개혁을 보고 있기 때문에 우리가 종교개혁을 가지고 중세를 접근하는 것과는 그 관점이나 연구의 수준이 비교가 되지 않습니다. 게다가 현대교부의 연구를 동방교회가 주도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서방교회 즉 구교가 주도하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나와 있는 교부전집들은 개신교도들에 의해서 나온 것은 없습니다. 개신교도들이 기껏해야 한 것은 번역정도, 또는 한두 개인이 번역으로 나타내기에는 너무나 텍스트에 문제가 있기 때문에 그 텍스트를 대조시키는 정도일 뿐이지 권위를 가지고 있는 세 종류의 교부전집은 구교도들에 의한 것입니다. 이점에 있어서 우리 종교개혁의 후예들이 종교개혁을 어떤 경우에도 포기하지 못하고 추종한다 할지라도 무식한 입장에서 종교개혁을 지지하거나 옹호하는 잘못을 지금부터는 피해야겠다는 것입니다. 중세가 암흑시대라는 것은 종교개혁자들이 붙인 용어가 아니고 계몽시대에 만들어진 용어인데 그 관점에서 우리가 중세를 보고 무시하기 때문에 고대의 공교회적 전통을 잘 알지 못하게끔 되어 있습니다. 바로 그 점이 이 삼위일체론에 있어서 극명하게 드러나는데 이 논의를 여러분에게 잠깐 소개하면서 느끼는 저의 막막한 심정은 이것입니다. 우리가 넘어야 할 산이 구교라면 구교를 넘는다 하더라도 헬라어를 넘어야 되는데 전집을 우리가 어떻게 볼 것이냐? 전집이 수백 권 나와 있는데 우리가 그 전집을 어떻게 정확한 판본으로 인정을 할 것이냐는 문제 그렇지 아니할 경우 그러한 교부학을 장악하고 있는 구교도들이 신교도들의 주장에 대하여 교부적인 발언들 어록을 가지고 와서 개신교도들의 주장을 무시할 때 우리로서는 할말이 없습니다. 그중에 하나가 바로 마리아론입니다. 이 마리아론이 구교에서도 논의가 되어 있지만 교회사 초기부터 이 마리아론이 등장합니다. 루터는 마리아론을 끝까지 거부하지는 않았습니다. 물론 공개적으로 끝까지 지지하지도 않았지만.. 가령 이런 문제를 가지고서 우리가 무슨 이야기를 할 것이냐 즉 우리의 입장을 고수한다 하더라도 잘못하면 무식을 고수하는 어리석음에 빠진다는 사실을 생각하면서 막막한 기분을 버릴 수가 없습니다. 어쨌든 개혁은 그릇된 길로부터의 회복인데 이런 생각을 갖는데 훼방을 놓은 것이 19세기 독일신학입니다. 여러분들이 다 잘 알 듯이 역사변증적인 발전론 정반합을 따라 독일신학의 입장은 고대의 것은 무조건 틀린것입니다. 이런 생각 때문에 고대의 헬라교부들의 발언은 아주 무식하다고 보는 것이 독일 19세기 개신교 신학의 역사철학적으로 넘겨준 잘못된 유산입니다. 어쨌든 우리는 이런 악영향을 넘고서 고대교회의 공교회적 전통에 대한 관심 그리고 신학의 중심주제인 삼위일체론에 대한 관심을 가지고 직접적 연구를 할 수 있는 준비를 해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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