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론 요약
보수신학회 하나님과 인간에 대한 성경의 가르침을 점검해 본 결과 범죄한 인간은 자신의 힘만으로는 도저히 하나님의 공의를 만족시킬 수 없음을 알 수 있었다. 따라서 인간 구원을 위하여서는 중보자되시는 그리스도의 도움이 절대적으로 요청된다. 그리스도의 존재와 사역을 요약한 기독론은 과거 무수한 이단의 공적에서 점검되고 체계화 된 교리이다. 1. 그리스도의 이름 1) 예수 탄생 직전 천사가 동정녀 마리아에게 계시한 이름으로(마1:21;눅1:30,31) 예수의 특별 직무를 보여주는 '구원하다'라는 뜻을 지녔다. 구약 시대에 모세의 후계자이며 계시사적인 측면에서 볼 때 예수의 예표가 될 만한 여호수아의 이름 뜻과 같다. 2) 그리스도 구약의 메시야와 동일하게 '기름부음을 받은 자'란 의미를 지녔다(요4:25,26). 구약시대에는 하나님으로부터 신성한 임무를 부여받은 왕(삼상10:1)과 제사장(출29:7)과 선지자(왕상19:16)가 기름부음을 받았는데 여기서 기름은 성령을 상징하며(사61:1;슥4:1-6), 기름부음은 성령이 임하는 것을 상징한다(삼상10:6,10). 3) 인자(人子) 단7:13에서 유래되었으며 예수가 자신을 지칭하는 말로서 그리스도의 인성과 신성 그리고 낮아지심과 높아지심을 동시에 나타내주는 명칭이다(마16:27,28;24:30;26:64). 4) 하나님의 아들 성령으로 잉태되었으며(눅1:35), 메시야로서 하나님의 후사, 즉 하나님의 자녀들인 성도들의 대표자이며(롬8:17), 삼위 가운데 제2위라는 의미에서 하나님의 아들로 불려졌다(마6:8,14,15;11:27;16:16;26:63,64). 5) 주 단순히 존경의 의미로 사용되기도 하였으나(마8:2;20:33), 어떤 사물에 대한 소유권이 있으며(마21:3;24:42-46). 특히 부활 승천하셔서 하나님과 같이 높아지신 그리스도의 신분을 나타내는 호칭이다(행2:36;고전12:3;빌2:11). 6) 기타 이외에도 그리스도는 '임마누엘'(마1:23), '알파와 오메가'(계1:17,18;22:13), '말씀'(요1:1), '본체의 형상'(히1:3),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고전1:24)로 불리워졌다. 2. 그리스도의 본성 Top♤Back 신성과 인성을 동시에 지니신 그리스도의 본성을 인간의 이성으로 규명하기는 힘들다. 그리스도의 본성은 오늘에 이르러서도 여전히 하나의 신비로 남아 있다. 1) 그리스도의 본성에 대한 여러 견해 교리사는 그리스도의 본성에 관한 잘못된 견해로 인해 이단으로 빠질 많은 군상들을 보여준다. (1) 에비온파(Ebiontes) 그리스도는 하나님과 특별한 관계는 가지나 단순한 인간에 불과하다고 보고 그리스도의 신성을 부정하였다. (2) 도게데파(Docetae) 물질은 악하므로 그리스도는 육체를 지니지 않으셨다. 그리스도의 육체를 환영(幻影)으 으로 보는 이 주장은 인성을 부정하는 것이다. (3) 아리안파(Arians) 그리스도는 피조물 가운데는 최고의 존재이나 인간성을 지녔으므로 완전한 신성을 가지 지 못하였다. (4) 나폴리나리안파(Apollinarians) 그리스도의 영은 로고스로 대치되었으며, 그 육체는 매우 승화되어 거의 인간의 육체가 아니라고 인성의 완전성을 부인했다. (5) 네스토리안파(Nestotians) 그리스도 안에 신성과 인성이 유기적으로 연합됨을 부인하였다. (6) 유티키안파(Eutychians) 그리스도안에 신성과 인성이 유기적으로 연합됨을 부인하고 2성이 연합된 제3의 다른 성이 있음을 주장했다. (7) 칼레톤 회의의 정통 교리 그 이전에 있었던 잘못된 견해들을 불식하고 그리스도의 한 인격안에 인성과 신성의 2 성이 있으며 각 성은 완전하고 유기적이어서 결코 나눌 수 없음을 확인했다. 즉 그리스 도는 2성 1인격을 가졌다는 정통 교리가 확립된 것이다. 2) 그리스도의 신성 하나님(롬9:14;빌2:6;딛2:13)이며 동시에 하나님의 아들(마16:16)이신 그리스도는 만왕의 왕이며 만주의 주(계19:16)로서 전능하시며(마28:18) 전지하시고(요1:48) 무소부재하신(마18:20) 신적 속성을 지녔으며, 창조(요1:3)와 보조(골1:17), 죄의 용서(눅7:48)와 심판(요5:27)의 신적 사역 및 성령을 보내시고(요15:26) 죽은 자를 살리심으로(요5:25) 완전한 신이심을 나타내보이셨다. 그리스도의 신성은 아래 사실로 증명된다. (1) 구약의 예언 구약은 오실 메시야를 '전능하신 하나님'(사9:6), '여호와의 해'(렘23:5,6), '하늘로부터 오신 인자'(단7:13), '언약의 사자'(말3:1,2) 등으로 표기하여 그리스도가 하나님이심을 보여준다. (2) 예수의 자의식 예수는 자신을 하나님의 아들로 인식했을 뿐만 아니라(마11:27;요17:1), 그를 하나님과 동등한 자로 여기셨다(요5:18,21;12:44,45). (3) 신약의 저자들과 사도들의 증언 신약 가운데는 마태(마1:23;3;17), 누가(눅1:31,32,35), 사도 요한(요1:1), 세례 요한(요 1:34), 베드로(마16:16), 도마(20:28) 그리고 바울(롬1:4;행9:19,20;골1:15;2:9)이 예수의 신성을 증언했다. (4) 예수의 선재(先在) 세상이 창조되기 이전부터 계신 분으로 묘사되어 있다(요1:1;17:5,24;골1:15,17;미5:2) 3) 그리스도의 인성 성경은 그리스도가 '완전한 인간'인 동시에 무죄한 인간임을 밝히고 있다. (1) 완전한 인성에 대한 증거 ㉠ 구약의 증언 - 구약은 예수께서 여자의 후손으로 오며(창3;15), 아브라함의 씨로 오 며(창22:15-18), 다윗의 혈통을 이어 받으며(삼하7:12,13), 아기로 탄생할 것이라 고 예언하였다(사7:14;9:6). ㉡ 예수는 스스로 인간이라는 의식을 가지셨다(요8:39,40). ㉢ 신약의 저자들(마1:1-17;눅3:23-38)과 바울이 그리스도의 인성을 진술했다(롬5:15;고 전15:21;딤전2:5). ㉣ 예수께서 인간과 마찬가지로 육체(요1:14;딤전3:16;요일4:2,3)와 영혼을 가지신 것으로 묘사되어 있다(마27:50;눅23:46). ㉤ 예수는 보통 인간과 동일한 성장 과정을 거치셨다(눅2:40,52;히5:8). ㉥ 예수는 인간이 가지는 배고픔(마4:2)과 피곤함(마8:24)과 희노애락의 감정(막3:5;요 11:35;눅22:44)을 가지셨다. ㉦ 예수는 인간적인 제약을 받으셨다(마24:36;눅7:9). (2) 무죄한 인성에 대한 증명 그리스도는 완전한 인간이었으나 모든 인간이 지니고 있는 죄성(罪性)은 가지지 않으셨 다. 이에 대한 성경의 언급은 다음과 같다. ㉠ 성령으로 말미암아 동정녀를 통하여 출생하였으므로 인간의 유전적 부패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눅1:35). ㉡ 죄의식이 없었으며 다른 사람으로부터 죄로 인하여 책잡히지 않았다(:46). 다른 사람 에게는 죄사함과 중생이 필요함을 강조했으나(눅23:34;요3:3,5) 자신에게는 적용하 지 않으셨다. ㉢ 무죄함이 직접 언급되어 있다(고후5:21;히4:15;벧전2:22;요일3:5). 4) 그리스도의 이성(二性)의 필요성 그리스도는 죄인을 대표하기 위하여 필연적으로 인간이어야 했으며, 구속자가 되기 위하여는 반드시 하나님이어야 한다. 5) 그리스도의 단일성 참신성과 참인성을 동시에 지닌 그리스도는 완전한 인간이며 하나님이었으나 통일된 인격을 가지셨다. 3. 그리스도의 비하(卑下) 신분 Top♤Back 인간 구속 사역을 위하여 우주의 주권적 통치자이신 그리스도께서 신적 위엄을 버리고 인성을 취하여 율법의 제정자가 오히려 율법의 요구와 저주 아래 놓인 상태를 가리킨다. 1) 성육신(成肉身) 제2위(성자), 즉 영원 전부터 로고스(말씀)로 존재하셨던(요1:1,14;요일1:1,2) 하나님의 아들께서 이미 구약에 예언되어 있던 대로(사7:14;9:6;렘23:5,6;미5:2) 동정녀 마리아를 통해서(마1:16) 인류의 일원이 된 것을 의미한다(요1:14;고후8:9;빌2:6-8;딤전3:16;히2:14). 그리스도의 성육신의 목적은 아래와 같다. ㉠ 하나님을 인간에게 나타내기 위해(요1:18) ㉡ 죄인을 불어 구원하시려고(딤전1:15) ㉢ 죄를 대속하는 희생제물이 되기 위해(히10:1-10) ㉣ 마귀의 일을 멸하기 위해(요일3:8) ㉤ 자비로운 대제사장이 되기 위해(히5:1,2) ㉥ 다윗과의 언약을 성취하기 위해(눅1:31-33) ㉦ 높이 들리움을 받기 위해(빌2:9) 2) 율법에 대한 복종 성육신하신 그리스도는 모든 율법을 기쁘신 뜻에 따라 자발적으로 혹은 인간에게 영생을 주기 위하여 대리적으로 복종하심(갈4:4,5;롬5:19)으로 율법의 제정자가 율법의 제한을 받는 위치로 낮아지셨다. 3) 수난 그리스도는 예언된 대로(사53:4) 전생애를 통하여 육체적으로(마2:14,15;4:2;요4:6) 뿐만 아니라 영적으로도 심한 고통을 당하셨으며(마26:38;요12:27;히5:7), 마귀로부터 시험을 받고(마4:1-3;눅22:28;히4:15), 하나님의 뜻에 따라 수난받았으며(눅9:22;17:25;22;37;마26:53,54), 우리죄로 인한 하나님의 진로를 받아 모진 어려움을 겪으셨다(사53:12;마27:46;고후5: 21). 4) 사망 비하의 절정인 사망(빌2:8)은 구속의 효력을 지닌 법정적 선고에 의한 사망이었고, 불명예스러운 십자가를 통한 수치와 저주의 죽음이었다(갈3:13). 이 죽음은 돌발적인 사건이 아니라 구속사의 전개에 있어서 반드시 필요한 과정이었으므로 이미 구약에서 여러 번 예언된 바 있다(시22:;1:6-8,17,18;69:21) 5) 장사(葬事) 무덤에 들어가신 것은 비하의 마지막 단계이며 다른 면으로는 다음에 이어질 승귀의 전주곡이다. 그리스도는 비록 죽음을 맛보셨으나 몸이 썩어지지 않았으며 사망의 종노릇을 하지 않았다(행2:25-32;갈6:8). 6) 지옥에 내려가심 그리스도의 비하 신분에 대하여 개혁파의 일반적 견해는 성육신, 수법(受法), 수난, 사망, 장사의 5단계로 보고 있다. 그러나 개혁파의 일부 학자 및 다른 교파에서는 그리스도의 지옥 강하(降下)를 비하의 최종 단계로 본다. 즉 카톨릭은 장사된 그리스도께서 선조(先祖) 림보에 내려가서 구약의 성도들을 구속하셨다 하고 루터파는 지옥에 내려가서 흑암권세에 대한 승리를 선포하셨다고 주장한다(엡4:9;벧전3:18,19;4:4-6;시16:8-10) 그러나 대부분의 개혁파 학자들은 지옥 강하를 ㉠ 겟세마네와 십자가상의 고통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말이거나 ㉡ 장사된 3일 간의 상태를 비유적으로 묘사된 것으로 해석하고 있다. 4. 그리스도의 승귀(昇貴) 신분 Top♤Back 가장 낮은 인간의 위치로 비하하셔서 구속 사역을 수행하신 후 다시 신적인 본래의 위치로 돌아가심을 가리킨다. 1) 부활 기독교가 성립하는 데 가장 중요한 기초가 되는 부활(고전5:14)은 이미 구약과(시16:10) 그리스도 자신에 의해서도 예언되었다(마16:21;20:17-19;막8:31,32). 혹자는 그리스도의 부활과 관련된 빈 무덤에 관한 성경의 기록을 '기절설', '시체 도난설', '착각설' 등으로, 또한 부활한 예수의 목격을 '환상설','강령설' 등으로 설명한다. 그러나 부활에 대한 구약과 그리스도 자신의 예언 뿐만 아니라 사복음서 저자들의 증언(마28장;막16장;눅24장;요20장)과 부활한 그리스도를 목격한 많은 사람의 증언(마28:1,9;요20:19-29;눅24:13;고전15:6-8) 및 죽음을 불사하고 이 부활의 목음을 증거한 사도들의 전도 사역에서도 부활의 확실성은 충분히 입증된다. 이 부활로 인간 구원의 조건이 만족되었고, 성도 부활의 표징이 되었으며(롬6:4;8:11;빌3:21). 성도 구원의 길이 열렸으며(롬4:25;5:11;벧전1:3,4). 2) 승천 예수의 예언(요6:62;14:2,12;16:5,28;20:170과 누가의 증언(눅24:50,51;행1:9-11) 및 사실을 보증을 받는 그리스도의 승천은 인성과 신성을 포함한 전위(全位)의 승천이며 성경에 기록된 문자 그대로의 유형적 승천이었다(행1:9-11;계1:7). 이 승천은 다음과 같은 의의를 지닌다. ㉠ 원래 신의 처소인 하늘로 올라가신 것이다(신성증명) ㉡ 구속 사역의 온전한 완성을 보여 준다 ㉢ 그리스도의 왕국이 궁극적으로 하늘에서 이루어질 것을 보여 준다(요18:36) ㉣ 하나님 앞에서 대언자가 되셔서(요일2:1) 대제사장적 사역으로 하나님과 성도 사이를 화목하게 한다. ㉤ 구원 사역을 위한 성령을 보내시기 위해 승천하셨다(요16:7) ㉥ 성도들이 장차 누릴 영광을 보여 준다(요17:24;엡2:6) ㉦ 성도들이 장차 거할 처소를 만든다(요14:2,3) 3) 하나님 우편에 앉으심 예수의 예언(마26:64)과 베드로(행2:35,36;5:31;벧전3:22)와 바울(엡1:20) 및 요한의 증언(계22:1)으로 확실시되는 이 사건은 장소적인 의미로 해석되어서는 안되며 하나님으로부터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위임받은 상태로 이해되어야 한다. 여기서 그리스도는 성령을 보내어 진리를 깨닫게 하는 선지자적 사역과(요14:26;마10:19,20)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는 제사장적 사역(히7:11,12;8:1,2,6;10:19-22;요일2:1) 및 교회의 머리가 되시며 모든 것을 다스리는 왕적 사명(엡1:20-22;빌2:9-11)을 수행하신다. 4) 재림 혹자는 성령강림을 그리스도의 재림과 동일시하기도 하나 성경은 그리스도의 재림의 양상을 인격적이며 유형적이며 영광스러운 것으로 가르치고 또한 미래에 일어날 일로 묘사하고 있으므로(고전1;7;4:5;빌3:20;골2:4;계1:17) 분명히 구분하여야 한다. 재림의 목적은 다음과 같다. ㉠ 인간의 부활을 위하여(요5:28,29) ㉡ 성도의 공중 들림을 위하여(살전4:15-17) ㉢ 성도의 상을 위하여(딤후4:8) ㉣ 심판을 위하여(마24:36-51) 5. 그리스도의 직임 Top♤Back 유일한 중보자이신 그리스도는 인간에게 하나님의 뜻을 전달하는 선지자직과 하나님께 인간을 대신하여 속죄 제사를 드리는 제사직 그리고 하나님으로부터 우주를 통치하는 권한을 위임받아 발생하는 완직을 동시에 가졌다. 그리스도의 직임은 한마디로 중보자라고 할 수 있다. 중보자는 인간을 대신하여 하나님으로부터 벌을 받아야 하므로 반드시 사람이어야 하고(히2:14,15), 구원을 위하여 택한 사람들의 죄 값을 단번에 지불하며 그들에게 영원한 대속을 주기 위해서는 반드시 하나님이어야 하며(히9:25,26,28), 다른 사람의 죄 값을 대신 지불하기 위하여는 반드시 무죄한 인간이어야 한다(롬3:10). 이러한 조건을 만족시키는 사람은 그리스도밖에 없다. 한편 그리스도의 중보직은 다음 3가지로 구분 할 수 있다. 1) 선지직 선지자는 성령의 감동으로 하나님의 특별계시를 받아 인간에게 전달하는 자이다. 이들은 하나님의 세우심을 받아야 하며(렘1:5), 계시를 받은 것만 전달해야 하는(신18:20) 수동적 요소와 더불어 하나님의 말씀을 적극적이며 자발적으로 선포해야 하는 능동적인 요소도 갖는다(렘20:8,9) (1) 그리스도의 선지자적 특성 구약에 자주 등장하는 일반적인 의미의 선지자이기도 했으나(신18:15;요1:19-21;행 3:22,23) 다음과 같은 특수한 일면도 지닌다. ㉠ 자기에게 임한 하나님의 뜻을 전달하는 단순한 선지자가 아니라 자신이 갖고 있는 신으로서의 능력을 대변하는 창조적 선지자이다(사61:1). ㉡ 하나님의 종이 아니라 아들이신 전지자이다(마21:31). ㉢ 다른 선지자와는 비견될 수 없는 완벽한 측면에서 유일한 선지자이다(마23:8,10). ㉣ 다른 선지자는 부분적으로, 점진적으로 계시했으나 그리스도는 계시를 완성하신 완전 한 선지자이다. (2) 선지직 수행의 여러 단계 성육신 이전과 지상 생애 동안은 물론 승천 후에도 선지직을 계속하신다. ㉠ 성육신 이전 - 성육신 이전에도 로고스로 존재하셨던 그리스도는 때로는 여호와의 사자로(창31:11-13;삿13:18;사9:6), 때로는 계시의 영으로 나타나셔서(벧전1:10,11) 하나님의 뜻을 전달했다. ㉡ 지상 생애 동안(눅6:19;요8,38,58). ㉢ 승천 후 - 지상 교회가 선지 사명을 수행할 수 있도록 역사한다. ㉣ 천국에서 -천국의 성도들에게 하나님의 영광을 보여 준다(요16:25;17:24;고전13:12). 2) 제사직 하나님 앞에서는 인간의 대표자로서(출28:9,10,29) 인간 중에서 선출되며(히5:1) 하나님으로부터 임명받아(히5:4) 하나님께 거룩하게 바치도록 성별된 제사장은(레12:4-6) 하나님께 예물을 드리며 기도하는 자이다(히5:1;7:1). (1) 그리스도 제사직의 특징 구약 제사장은 그리스도의 모형이며 예표였다(히8:4,5;9:23). 그러나 유일한 중보자이며 (딤전2:5) 참제사장이신 그리스도는 다음과 같은 특징을 지닌다. ㉠ 무죄이신 그리스도만이 하나님앞에 나아갈 수 있다(롬3:23) ㉡ 그리스도의 제사만이 죄를 제거하는 지속적 효력을 지닌다(히10:11:14) ㉢ 그리스도만이 하나님과 인간을 화목하게 만들 수 있다(롬5:10,11). ㉣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하나님의 사랑이 온전히 전달된다(롬5:8;요일4:9). (2) 그리스도의 헌제(獻祭) 사역 참제사장이신 그리스도는 중보 사역과 더불어 제사드리는 사역을 수행하신다. 후자, 즉 그리스도의 헌제 사역은 이미 구약에서 각종 제사의 제물과(히10:8-12,24) 유월절 희생 양(출12:1-4)으로 예표된 바 있다(요1:29;고전5:7;벧전1:19). 그리스도 헌제 사역의 특징 은 다음과 같다. ㉠ 그리스도는 제사장이면서 동시에 제물이 되셨다(사53:5,6;롬3:25;엡5:2). ㉡ 그리스도가 드린 제사는 구약 시대 때 하나님을 향한 전적인 헌신과 봉사를 의미하 는 번제, 충성과 감사를 상징하는 소제, 친교를 나타내는 화목제, 하나님 앞에 지은 죄를 용서받기 위한 속죄제, 인간에게 지은 죄와 관계된 속건제 등 5대 제사의 의 미가 모두 포함되어 있다. ㉢ 단 한번의 제사로 인간의 모든 죄를 영원토록 완전히 사하는 제사이다. (3) 그리스도의 중재대언(仲裁代言) 사역 제사장이신 그리스도는 참소자인 사단으로부터 택한 자를 보호하시기 위하여 영원한 대 언자가 되신다(히6:20;7:21). 3) 왕직 구약은 오실 메시야를 왕으로, 그리고 그가 다스릴 나라를 왕국으로 예언하였으며(삼하7:16;사9:6;시2:6;단7:13,14;미5:2;슥9:9). 신약 역시 이를 수긍하고 있다(마3:2;막1;14,15;눅1:31-33) 이와 같은 그리스도의 중보적 왕권은 영적 왕권과 우주적 왕권으로 구분된다. (1) 영적 왕권 교회의 머리되신 그리스도께서 택한 백성들의 구원을 위하여 행사하시는 통치권을 의미 하며 그 영역을 여다. 이 왕국은 이미 현세의 성도들의 마음에 이룩되어 있고(마12:28; 눅17:20,21;골1:13,14) 그리스도 재림으로 인하여 미래에는 완전히 완성될 것이다(마7: 21;19:23;고전6:9;15:20;딤후4:18;벧후1:11). (2) 우주적 왕권 하나님께서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그리스도에게 주심으로(마28:18;엡1:20-22;빌 2:9,10) 영적 왕국 건설의 기초를 놓으셨다. 6. 그리스도의 속죄 사역 Top♤Back 하나님께서는 독생자 그리스도의 희생을 통하여 속죄 사역을 완성하셨다. 여기에는 하나님의 사랑(요3:16;롬5:18;8:32;요일4:9,10)과 더불어 기쁘신 뜻(롬8:29;엡1:4,5)이 잘 드러나 있다. 1) 속죄의 성질 속죄는 제물되신 그리스도의 죽음 속에 포함된 '제사'의 의미(히9:11,12), 죄인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를 가라앉히는 유화(宥和)의 의미(롬3:25;요일4:10),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담을 허무는 화목의 의미(롬5:10,고후5:20),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택한 자를 죄 가운데서 건지시는 구속의 의미(엡1:7;골1:14)를 포함하고 있다. 2) 속죄의 완전성과 범위 속죄는 그리스도의 죽으심으로 생겨난 역사적이며 객관적인 사건이고 또한 단 한번으로 종결되었으며 그 자체 안에 사죄의 능력을 갖는 내재적 효능성을 지녔다(롬5:19,21;히10:14). 그러나 이는 모든 사람에게 적용되지 않고 오직 하나님께서 영원전부터 특별히 선택하셔서 사랑한 자에게서만 해당된다(마1:21;눅19:10;요6:37;10:15,26-28). Top♤Back 인쇄 구독 밴드 북마크 블로그 보내기 덧글 쓰기 엮인글 구약 아이북뱅크아람출판사, 한국톨스토이, 통큰세상, 그레이트북스, 한국헤르만헤세, 출판사무료배송www.ibookbank.co.kr 64 알라딘 서점1권도 무료당일배송, 제휴카드 25%할인, 5% 추가적립, 카카오페이로 간편결제!www.aladin.co.kr 한국에듀원격평생교육원교과부학점인정기관, 등록금반에반값, 신학, 사회복지2급과정, 100%온라인수업.www.koredu.or.kr Ads by NAVER | 가입신청 마르틴 루터의 구원론에 대한 소고 기독론 2013.05.19. 00:02 복사 http://blog.naver.com/kimcheolhwi/120190222523 전용뷰어 보기 A Brief Study on Martin Luther's Doctrine of Salvation 바로 찾아가기 서론 1. 마르틴 루터의 고민 2. 마르틴 루터의 각오(覺悟) 3. 마르틴 루터의 의인론 결론 각주 참고서적 서론 카톨릭교회의 교권과 왜곡된 성서 해석의 진흙 속에 묻혀 수 백년 동안 빛을 보지 못했던 기독교 신앙의 보물인 '이신칭의'를 발굴한 신학자는 수도승 마르틴 루터(Martin Luther)였다. 신앙과 신학의 코페르니쿠스적 발견인 마르틴 루터의 '이신칭의'의 토대 위에 마침내 개신교가 이룩되었고, 조직신학의 한 자리인 구원론의 뼈대를 형성하게 되었다. 이런 이유로 인해서 마르틴 루터의 구원론에 대한 연구는 대단히 중요하다. 특히 기독교의 순수성이 성공주의와 물량주의에 희석되어져 가는 오늘의 현실을 돌이켜 볼 때, 루터의 순수한 신앙심과 학문에 대한 열의와 교회개혁의 의지는 병들어 가는 오늘의 교계를 진단하고 치료하는데 크게 도움이 되리라 본다. 이 짧은 연구는 먼저 카톨릭교회의 사제로서 루터의 고민이 무엇이었는지, 시편과 로마서 그리고 갈라디아서를 연구함으로써 얻어진 루터의 깨우침이 무엇이었는지, 그리고 종교개혁과 더불어 시작된 그의 의인론은 무엇이었는지를 살펴보는 것이 될 것이다. 1. 마르틴 루터의 고민 마르틴 루터는 1483년에 태어나 1546년에 사망한 독일의 종교 개혁가이다. 그는 어린 시절을 주로 강압적이고 엄격한 가정 및 학교 환경 속에서 보냈으며, 14세 이후로는 줄곧 집을 떠나 학업을 계속하였다. 1501년에 에어푸르트(Erfurt) 대학에 입학하여 1502년에 마쳤고, 1505년에는 M.A.학위를 받았다. 이후 에어푸르트에서 법학을 전공하던 중에 뜻하지 않은 체험으로 수도사가 되기를 결심하고 에어푸르트에 있는 어거스틴 수도원에 입원하게 된다. 수도사가 된 루터는 여러 가지 종교적 질문을 갖기 시작하였고, 특별히 구원문제에 대해서 심각하게 고민하기 시작하였다. 루터가 고민했던 문제 가운데 가장 심각한 것은 어떻게 의로우신 하나님 앞에 정죄함을 받지 않고 오히려 하나님의 은총을 입어 구원에 도달할 수 있겠는가 이었다. 루터는 이 고민을 풀기 위해서 수도원의 모든 규율을 필요 이상으로 철저히 지켰다. 그는 완벽한 삶을 통해서 하나님 앞에 거룩함을 얻고자 혼신의 힘을 쏟았던 것이다. 어떻게 하면 의로우시고 준엄하신 하나님 앞에 거룩하게 설 수 있겠는가? 이것이 수도사로서 갖는 루터의 최대의 관심사였다.(1 가. 중세교회의 구원론 루터의 고민을 이해하기 위해서 중세교회의 구원의 교리를 조금 설명할 필요가 있으리라고 본다. 중세교회는 다음과 같이 가르쳤다. 인간은 죄 때문에 하나님 앞에 완전하게 순종할 수 없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인간에게 올바로 순종할 수 있는 어떤 도움을 주시는 데, 이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도움을 은혜라고 한다. 이 은혜를 '성화케 하는 은혜'(sanctifying grace), '후속은혜'(subsequent grace), '공동협력 은혜'(cooperating grace), '효능 은혜'(efficacious grace), 또는 '성화를 가능케 하는 능력'이라고 부른다. 그런데 문제는 인간이 이 은혜를 받기 위해서 하나님 앞에 일정한 공덕을 쌓아야 한다는 것이다. 종교 개혁 이전의 프랜시스컨 수도승 신학은 죄인도 이 은혜를 받아 낼 능력이 있다고 믿었고, 마르틴 루터가 몸담았던 어거스틴 수도승 신학에서는 인간이 완전히 무능하기는 하지만 하나님께서 '선 은혜'(prevenient grace)를 부여하심으로서 성화케 하는 은혜를 받을 수 있는 일정한 공덕을 쌓도록 한다고 믿었다. 여기서 선 은혜란 '작용하는 은혜'(operating grace) 또는 '충족한 은혜'(sufficient grace)라고 하며, 의지를 새롭게 하고 이해를 조명하기 위해서 성령께서 주시는 믿음이나 회개를 말하며, 이로서 죄인은 하나님의 복음을 수용하여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일정한 수준에 도달하게 된다. 또 여기서 말하는 '일정한 수준' 또는 '일정한 공덕'이란 중세교회가 가르쳤던 '합일치 공덕'(meritum de congruo)을 말한다.(2 합일치 공덕이란 성화케 하는 은혜를 받기 위한 일정한 수준의 행위로서 이를 불완전한 공덕 혹은 절반공덕(half-merit)이라고도 한다. 죄인은 하나님께 부여받은 자유의지 즉 선과 악을 분별하여 행할 수 있는 선택의 의지를 가지고 있다고 보았다. 그러므로 이 성화케 하는 은혜 없이도 죄인은 적어도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과 형벌을 피하기 위해서라도 마음에서 우러나는 진정한 회개(contrition)는 아니라 할지라도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과 형벌을 피하기 위한 회개(attrition)를 할 수가 있고, 하나님의 뜻대로는 아니지만 그가 주신 율법도 순종할 수 있다고 가르쳤다. 또 이렇게 함으로써 인간은 하나님의 은혜 즉 성화케 하는 은총을 받을 수도 있고, 이기심 없이 하나님을 사랑할 수도 있다고 가르쳤다. 그러므로 합일치 공덕이란 하나님께서 은혜로 보상할 수 있는 지점에까지 죄인이 행위로서 스스로의 힘과 노력으로 도달하는 것을 말한다. 이를 카톨릭교회는 "자신 속에 있는 것을 행하는 자에게 하나님께서 은혜 주기를 거절하지 아니하신다"(Facienti quod in se est, Deus non denegat gratiam=To the one who does what is in him, God does not deny grace)라는 말로써 표현한다. 그러므로 은혜는 구원의 근원 또는 기초가 아니라, 인간의 예비행위에 대한 열매이다. 먼저 인간의 일정수준의 공덕이 선행되어야 비로소 하나님의 은혜를 부여받는다.(3 이제 합일치 공덕으로 인하여 부여받은 은혜를 성화 시킬 수 있는 능력 즉 선행을 가능케 할 수 있는 능력이라고 부른다. 이 은혜는 인간의 영혼에로 수급된다. 이 은혜는 죄를 사하고 죄를 제거한다. 죄가 선 행위를 방해하기 때문이다. 이 은혜 즉 성령의 능력을 통해서 죄인은 혼자의 노력이나 수고로써가 아니라, 이제는 이 은혜 즉 성화케 하는 능력과 보조를 맞추어 전보다는 좀더 수월하게 실질적인 공덕을 쌓게 된다. 다시 말하면, 죄인은 성화케 하는 은총으로 말미암아 좀더 용이하게 실질적인 의에 도달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를 완전공덕(meritum de condigno)이라고 한다. 이 지점에 이를 때에 죄인은 비로소 영생에 이르게 된다. 그리고 중세교회에서는 이를 칭의(稱義/justification)와 동등시 취급했지만, 실제로는 오늘날의 개신교에서 말하는 점진성화(聖化/sanctification)의 의(義/ righteousness)를 말하고 있다. 만일 이 중세교회의 공덕개념이 성서적 교리라면, 인간은 결국 자신의 의로운 행위로써 하나님 앞에 서게 될 것이며, 실질적인 거룩함에 도달했을 때만이 인간은 구원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우리의 구원은 은혜가 아닌 보상이 될 것이다.(4 중세교회는 그리스도의 공덕만을 온 인류를 위한 충족한 행위로 보지 않았고, 그리스도의 공덕은 물론 성자들의 공덕, 그리고 개개인의 공덕과 병합하여 구원의 교리를 주장하였다. 그리스도나 성자들은 자신들을 구원하고도 남는 공덕을 행하였으므로 이 여분의 공덕을 쌓아 둔 창고(treasury of merits)가 있다고 주장하여 면죄부 판매의 당위성을 주장하였다.(5 카톨릭 사제들의 면죄특권은 요한복음 20장 23절인 "너희가 뉘 죄든지 사하면, 사하여 질 것이요. 뉘 죄든지 그대로 두면 그대로 있으리라"는 예수의 말씀에 근거하고 있다. 그리고 이 면죄(indulgence)는 이미 사함 받은 죄로 인해서 받는 일시적 형벌(temporal punishment)에 대해서 교회로부터 면죄함을 받은 것을 말한다. 바꾸어 말하면, 고해성사를 통해서 죄사함을 받지만, 죄로 인한 상처는 그대로 남기 때문에 일시적 형벌을 통해서 치유함을 받는다고 한다. 그리고 이 일시적 형벌을 받는 곳이 연옥(purgatory)이다. 그러므로 연옥은 믿고 구원받은 자들만이 가는 곳이요. 완전하지 못한 것을 완전케 하고, 죄로 인한 불결을 정화하며, 죄로 인한 상처를 치유하는 곳이다. 따라서 면죄(indulgence)는 형벌을 사하는 것이요. 연옥에서의 정화과정을 면케 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 면죄특권은 또한 교회의 영적 창고(spiritual treasury of the church) 즉 그리스도의 완전한 율법의 요구충족, 마리아 또는 성자들의 완벽한 삶, 그리고 순교자들의 잉여공덕 창고에 근거하고 있다. 교황의 면죄특권은 바로 이 잉여공덕 창고에 쌓인 성자들의 공덕을 희사함으로써 연옥에서의 일시적 형벌을 면케 한다는 것이다.(6 따라서 중세교회는 인간의 행위 공덕으로써 일곱 가지 성례전을 강조하였고 시혜하였다. 중세교회는 수혜자가 영적 방해를 가하지 않는 한 교회의 올바른 성례는 수혜자에게 은혜를 실어온다고 말한다. 이것을 ex opere operato 즉 "베풀어진 성례에 의해서"라고 부른다. 이 말은 믿음에 관계없이 교회에 의해서 베풀어진 성례 자체로써 구원하는 은혜에 족하며, 작용하는 능력(virtus operativa)을 갖는다는 말이다.(7 여기서 말하는 성례전이란 성만찬(Lord's Supper), 침례(Baptism), 고해성사(Penance), 견진례(Confirmation), 혼례(Marriage), 안수례(Ordination), 그리고 종부성사(Extreme Unction)를 말한다. 중세교회는 이들 성례를 은혜를 받는 통로(channels)로 또는 객관적 실재라고 주장하였다. 이들 성례전은 구원의 능력을 실어 오며, 그리스도의 옆구리에서 흘러 마리아의 손을 거쳐 성례를 통해서 우리에게 전달되는 은혜의 통로라고 말한다. 또는 그리스도의 구원의 열매로 인하여 고인 은혜의 저수지로부터 은혜의 유입을 받는 수로(水路)가 성례라고 말한다. 물론 성례는 행위를 수반한다. 또 성례 그 자체가 행위이다(opus operatum).(8 나. 개신교회와 중세교회의 구원론의 비교 이제 카톨릭교회의 구원의 교리를 확실하게 알고, 카톨릭교회의 칭의 개념이 개신교회의 것과 어떻게 다르며, 또 앞으로 전개될 루터의 칭의 개념을 비교해 보기 위해서 개신교회의 의인론을 카톨릭교회의 것과 비교해 보고자 한다. (1)개신교회 1. 칭의(稱義)는 의롭다고 간주하는 것을 의미한다. 2. 칭의는 그리스도의 의(義)의 전가(轉嫁)로 이루어진다. 3. 하나님의 은혜는 그리스도를 믿는 신자를 받으실 만하게 하며, 하나님 보시기에 기쁘시게 한다. 4. 인간은 오직 믿음을 통하여 칭의 된다. 5. 하나님께서는 아직 구원받지 못한 신자를 칭의 하신다. 6. 칭의는 그리스도의 인성 속에 있는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무죄선언이다. 7. 죄인은 하나님의 전가된 의에 의해서만 칭의 된다. 8. 칭의는 하나님께서 죄인을 마치 의인처럼 취급하게 하신다. 9. 신자는 대속자이신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앞에 의롭게 드러나셨기 때문에 의롭다고 선포된다. 10. 칭의는 인간의 자리에 대신 서신 예수께서 의롭다는 사실에 대한 선언이다. 11. 칭의는 하나님께서 신자의 심령에 중생과 성화(聖化)를 가져오게 하신다. 12. 죄는 칭의와 중생 후에도 인간의 본성에 여전히 남는다. 13. 신자는 하나님의 가능케 하는 은혜로 말미암아 이루어진 선행에 대해서 어떠한 공덕도 주장할 수 없다. 선행은 그리스도의 전가된 의의 중보를 통해서만 받으실 만하며, 그리스도의 전가된 의는 신자의 선행에서 나타나는 모든 인류의 행함의 부족을 충족시킨다. 14. 신자는 언제나 대속자이신 그리스도의 인성 속에서 받아 드려진다. (2)카톨릭교회 1. 칭의는 의롭다고 만드는 것을 의미한다. 2. 칭의는 은혜의 유입으로 이루어진다. 3. 신자 속에 있는 성화케 하는 은혜는 신자를 하나님께 받으실 만하게 만든다. 4. 인간은 자신의 실질적인 의에 의해서 칭의 된다. 5. 하나님께서는 오직 중생한 자만을 칭의 하신다. 6. 칭의는 인간 속에 있는 하나님의 중생 시키는 행위이다. 7. 죄인은 전가된 의에 의해서만 칭의 될 수 없고, 그의 심령 속에 부어진 의에 의해서만 칭의 될 수 있다. 8. 칭의는 죄인이 실제로 의롭게 만들어지는 것을 의미한다. 9. 신자는 은혜의 성령께서 신자를 의롭게 만드셨기 때문에 의롭다고 선포된다. 10. 칭의는 인간 자신 속에 있는 실재성에 대한 선언이다. 11. 중생케 하는 은혜는 하나님께서 신자를 의롭게 하도록 한다. 12. 칭의는 죄를 전체적으로 박멸시킨다. 오직 정욕과 연약함만이 남을 뿐이다. 13. 성화케 하는 은혜는 신자 속에 있는 것과 함께 연합하여 하나님께서 받으실 만한 선행을 행한다. 14. 성화케 하는 은혜는 신자 속에 있는 것과 함께 연합하여 신자를 하나님께 받으실 만하게 만든다. 여기서 살펴 볼 수 있는 것은 개신교회의 칭의는 무죄선언 즉 법정개념의 칭의를 말하고 중세교회는 개신교회가 말하는 성화를 칭의 개념으로 보는 데서 상당한 차이를 보이고 있다. 위의 비교에서는 개신교회의 성화의 개념이 설명되어 있지 않으나, 사실상 중세교회의 칭의 개념이 이를 설명해 주고 있기 때문에 성화에 대한 긴 설명이 필요 없을 것으로 본다. 다만 개신교회가 죄인의 소망을 하나님의 무죄선언에 두고 있고, 성화의 정도에 두지 않는다는 점은 거듭 강조되어야 할 중요한 점이다. 다. 개신교회의 칭의론과 성화론의 비교 루터의 의인론을 정확히 밝히기 위해서 루터가 기초를 놓고 그 기초 위에서 발전된 개신교회의 칭의와 성화에 대해서 잠시 살펴봄으로써 개신교회와 중세교회의 차이점과 루터와 중세교회 또 현재의 개신교회 사상과 어떻게 다른지를 살펴보는 도구로 삼고자 한다. 개신교회에서는 칭의를 법적문제로, 성화를 우리의 상태 즉 본질 문제로 취급한다. 따라서 칭의는 위법에 따른 유죄성에 문제로, 성화는 위법의 결과인 부패성의 문제로 취급한다. 칭의는 외적, 객관적 선포에 의한 의로써 하나님은 재판장으로써의 역할을 담당하시며, 성화는 내적, 개인적 만들어진(보상된) 의로써 성령은 치유자로써의 역할을 담당하신다. 물론 그리스도는 대속자로써 우리의 죄를 친히 담당하시고 화목제물이 되신 중보자이시다. 이는 하나님께서 친히 계획하시고 실천하신 지극하신 하나님의 사랑의 표현이시며, 하나님의 의로움이시다. 하나님의 의는 하나밖에 없는 독생자로 하여금 친히 원수된 인간들과 화목하시기 위해서 제물로 삼으신 하나님의 사랑 속에서 나타나고 있다. 이 하나님의 의가 즉 그리스도의 대속의 공덕이 전가된 의를 칭의라고 부르며, 하나님 앞에서 오직 믿음으로써 의롭다 하심을 받는다. 이는 죄인에게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이며, 칭의의 순간에 모든 죄가 사하여지며, 침례 가운데서 성령에 의한 중생의 씻음과 새롭게 하심을 입는다. 이를 초기성화라고 한다. 여기서 믿음은 구원하는 믿음을 말하며 행위가 수반되는 순종의 믿음을 두고 말하지 않는다. 구원하는 믿음은 예수를 그리스도로, 하나님의 아들임을 동의하는 것이요, 또 그를 구세주로 신뢰하는 것을 말한다. 한편, 성화는 이미 하나님 앞에서 무죄선언을 받고 구원함을 입는 자가 그리스도와 함께 날마다 육과 정을 십자가에 못박는 생활을 말하며 점진적으로 성화 되어 가는 삶을 말한다. 이를 우리가 만들어진 의 또는 보상된 의라고 부르는 실질적인 의이다. 로마서가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있는 구원의 길은 이러한 사실들을 확증하고 있다. 이러한 사실로 볼 때, 중세교회의 칭의 개념은 성화교리에 대한 잘못된 교리이며, 성화는 상급의 문제는 될 수 있어도 구원의 문제가 될 수 없다는 것이 개신교회의 가르침이다. 이 점에 있어서 성서와 개신교회가 이신칭의를 주장하는 반면, 중세교회는 행위를 주장하였다. 따라서 행위교리를 주장하는 중세교회의 수도사 마르틴 루터의 고민은 더할 나위 없이 큰 것이었음을 알 수 있다. 어떻게 하면 하나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수 있을까? 행위로써는 인간이 아무리 노력하여도 하나님 앞에 완벽하게 설 수 없다는 강박관념이 루터를 괴롭혔다. 중세교회는 하나님의 은혜와 도움을 받기 위한 통로로써 일곱 가지 성례전을 체계화시키고 있었다. 특별히 고해성사는 죄인들에게 위안이 되는 성례였다. 죄인으로써 받을 수 있는 단 하나의 성례는 고해성사뿐이었다. 따라서 죄인들은 모든 죄과를 고백하고 용서를 구하여야 했다. 루터는 혼신의 노력을 다하여 죄과를 고백하려고 하였다. 그는 할 수만 있으면 자주 심지어는 매일 고해하다시피 하였다. 한 때는 여섯 시간까지 죄과를 고해한 적이 있었다고 한다. 루터에게는 크고 작은 죄가 문제가 아니라, 과연 하나라도 빼놓은 것 없이 모두 고백했느냐에 있었다. 인간의 기억력이 허락치 않은 한 반드시 고백하지 못한 죄가 있기 마련이며, 고백하지 못한 죄는 용서받지 못하며, 용서받지 못한 죄가 있는 한 구원받지 못한다는 논리가 루터에게는 더없이 고통이었다. 수도승들로써는 이러한 루터의 발버둥이 여간 성가신 것이 아니었다. 그래서 수도원 원장이었던 스타우피츠(Staupitz)는 루터에게, 정말 그리스도께서 그의 죄를 사하여 주시기를 기대한다면, 사소한 일로 찾아오지 말고, 살인이나, 간음 또는 신성모독과 같은 중한 일로 찾아오도록 충고하였다고 한다.(9 한편 스타우피츠는 루터가 너무 어렵게 신앙생활을 하고 있음을 보여 주려고 노력했다. 그는 루터에게 필요한 단 한가지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라고 가르쳤다. 그러나 루터는 진노의 불꽃이신 하나님을 어떻게 사랑할 수 있겠는가라는 강한 의구심을 떨쳐 버리지 못하였다.(10 또 다른 루터의 고민은 설사 모든 율법의 요구 조건들을 다 지켰다고 해도 하나님의 은혜를 받기에 족한 내적 변화가 일어나겠는가라는 문제였다. 성화케 하는 은혜를 소유한 사람은 자신의 죄를 진정으로 뉘우치며,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유지할 수 있는 온전한 회개(total contrition)를 할 수 있다고 중세교회는 주장하였고, 어렵기는 하지만 하나님께서 우리를 자원하셔서 사랑하시는 것과 같이 우리도 상당한 정도는 마음에서 우러나서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다고 가르쳤다. 그러나 루터는 자신할 수가 없었다. 이러한 가르침 속에서는 그의 행위로나 태도로 볼 때, 구원에 대한 소망을 가질 수가 없었다. 노력을 하면 할 수록 오히려 실망과 좌절을 체험하게 되었고,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 아니라, 진노의 하나님으로 비추어지게 되었다.(11 이러한 루터를 돕기 위해서 스타우피츠 원장은 루터로 하여금 계속해서 공부하여 박사학위를 얻도록 하였고, 교수로써, 설교가로써, 상담가로써 병든 심령들을 치료토록 하였다. 스타우피츠는 루터가 남의 심령을 치료하는 과정에서 자신의 고민도 해결하리라고 믿었기 때문이다.(12 2. 마르틴 루터의 각오(覺悟) 한편 루터는 1508년 비텐베르그(Wittenberg) 대학으로 전근하여 철학을 강의하던 중 신학을 연구하기 시작하였고, {피터 롬바드의 경구집}(Sentences of Peter the Rombard)을 강의하기 위해서 에어푸르트(Erfurt)에 다시 전근된다. {피터 롬바드의 경구집}은 중세기 신학의 근간을 형성하는 성경, 교부들, 그리고 스콜라철학자들의 경구들을 주제별로 수집한 책이었다. 그는 다시 1511년 비텐베르그(Wittenberg)대학으로 전근되어 그곳에서 박사학위를 받게 된다. 그리고 1513-1515년에 시편을 강의하게 되고, 1515-1516년에 로마서, 1516-1517년에 갈라디아서, 1518년에 다시 시편을 강의하게 된다. 이러한 연구와 강의를 통해서 루터는 1513-1519년에 거쳐 복음에 대한 새로운 사실들을 깨닫게 된다. 그리고 이 시대의 그의 깨달음을 "탑 속 경험"(tower experience)이라고 하는 데, 비텐베르그의 어거스틴 수도원에 있는 탑 속에서 복음에 대한 새로운 사실들을 깨달았기 때문이다.(13 종교개혁으로 인한 루터의 공헌은 하나님의 의에 대한 성서적 의미의 재발견이다. 일반적으로 중세교회는 하나님의 의를 하나님의 정의 즉 반드시 죄인과 불의한 자를 처벌하시는 정의로 그 뜻을 풀고 있었다. 때문에 루터는 하나님의 의를 미워하였다. 그러나 그가 하나님의 의를 믿음으로 얻는 하나님의 선물로 발견하였을 때, 그는 하나님의 의를 사랑하게 되었다. 이 때부터 루터는 하나님의 의를 근본적으로 하나님의 자비로써 이해하게 된다. 이러한 극적인 깨달음은 세 가지 단계로 설명될 수 있다.(14 중세교회가 하나님의 의를 반드시 불의한 자들과 죄인들을 처벌하시는 정의로써 풀이할 때, 문제는 어떻게 인간이 그와 같은 하나님 앞에 바로 설 수 있겠는가 였다. 중세교회는 물론 자기 자신의 의로써 하나님 앞에 바로 설 수 있다고 믿지는 않았다. 오히려 인간은 진지한 의도와 성화케 하는 은혜를 받는 합일치 공덕과 인간의 출생부터 죽음까지 관련을 맺고 있는 성례의 실재들의 병합의 덕택으로 하나님의 의로움 앞에 서기를 바랐다. 이것이 첫째 단계인 중세교회의 상황이었다. 둘째 단계는 이해의 단계이다. 시편강의나 로마서 강의를 통해서 깨달은 바는 하나님의 의는 더 이상 불의한 자를 벌하시고 징계하시는 엄격한 심판의 의가 아니었다. 오히려 믿음을 통해서 우리를 의롭다고 칭하시는 하나님의 자비요, 변화시키는 은혜요, 거져 주시는 선물이었다. 하나님의 의는 율법의 요구가 충족되어야 하는 그래서 죗값에 대한 처벌이 선행되어야 하는 거래행위가 더 이상 아니었다. 따라서 인간의 행위는 인간의 운명에 대한 하나님의 결정에 어떠한 영향도 미치지 않는다. 오직 은혜만이 인간으로 하여금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도록 하게 한다. 물론 중세시대에도 어거스틴의 전통을 대표하는 인물들에 의해서 이러한 견해는 어느 정도 공유되었다. 그러나 루터에 의해서, 이 견해는 좀더 성서적이고 복음적인 교리로 재 천명되었다. 셋째 단계에서 루터는 하나님의 의와 하나님의 은혜를 완전히 동일시하였다. 하나님의 은혜는 더 이상 인간을 의롭게 만드는 성화케 하는 은혜가 아니었다. 오히려 하나님의 의는 인간이 어떠한 상태에 있든지 간에 그 인간을 의롭다고 취급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이다. 인간이 의로우신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는 것은 오직 하나님의 은총에 의해서만이 가능하다.(15 은혜에 대한 이러한 깨달음이 종교개혁을 탄생시켰으며, 중세교회의 성례전들이 도전을 받기에 이르렀다. 인간과 의로우신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어서 행위나 실질적인 의의 유입에 의존하는 따위의 견해는 사라지게 되었으며, 그 대신 오직 은혜만이 우뚝 서게 되었다. 가. 마르틴 루터의 [95개조의 의제] 루터의 의인론은 그가 면죄교리에 대해서 토론의 기회를 마련키 위해서 1517년 10월 31일 비텐베르그 대학에 있는 캐슬(Castle)교회 문에다 라틴어로 쓴 [95개조의 의제](The Ninety-five Theses)를 붙일 때만해도 아직 충분하게 발전되지 못했다. 다만 시작에 불과하였다. 제 1조에서 루터는 마태복음 4장 7절의 회개가 "신자들의 총체적 삶이 회개의 삶이며," 제 2조에서는 사제들에 의한 고해성사 즉 고백(confession)과 고행(satisfaction)에 대한 언급은 아니라고 믿었다. 회개는 단 한번의 행위이기보다는 거룩하시고 자비로우신 하나님의 임전에서 갖는 일종의 계속적인 심정이며, 마음에서 우러나는 결단이다. 그러므로 루터는 [95개조의 의제]를 통해서 중세교회의 면죄교리의 잘못된 주장이나 실행을 공격하였던 것이다.(16 또한 루터는 [95개조의 의제에 대한 해설]에서 고해성사의 당위성을 입증하는 데 인용된 제롬의 라틴어 불가타(Latin Vulgate)의 성서 본문이 잘못된 번역이라는 사실을 발견하였다. 마태복음 4장 17절에 대한 라틴어는 penitentiam agite 즉'do penance'이다. 그러나 에라스무스(Erasmus)가 만든 헬라어 성경은 단순히 'be penitent'라는 것을 발견하였다. 헬라어 성경의 'Metanoeite'는 문자적으로 '마음을 바꾸다'라는 의미일 뿐이다.(17 앞서 설명한 바와 같이 면죄(indulgence)는 죄는 이미 사함 받았지만 하나님께 죗값을 치르며(satisfation), 피할 수 없는 형벌 즉 일시적 형벌을 면하기 위해서 그리스도와 성자들의 잉여공덕을 적용하는 방법이다. 선 행위와 함께 교회에 일정한 액수의 돈을 바치면, 모두는 아니더라도 상당한 양의 연옥에서의 형벌은 면하게 된다고 가르쳤다. 이 면죄를 보증하는 증서가 교황의 대사에 의해서 발급되었다. 이를 면죄부라 한다. 이와 같이 교황의 면죄특권은 살아있는 자신에게 뿐만 아니라, 이미 죽은 자를 위해서도 유익하다고 믿었다. 역사적으로는 이 면죄특권이 십자군 전투에 참여한 용사들에게 적용되었고, 그 후에는 교회에 바치는 기부금에 적용을 시켰다. 루터가 [95개의 의제]를 캐슬교회 문(게시판) 앞에 부착한 것도 도미니컨 수도승 요한 테젤(Johann Tetzel)이 면죄부 구입을 촉구하는 설교를 하였기 때문이었다. 로마에 있는 성 베드로 성당 건립에 필요한 재원을 충당키 위해서 로마당국은 성직매매를 공공연히 자행하였고, 성직을 구입한 자들은 매입자금을 충당키 위해서 면죄부 판매를 허락 받고 있었다. 테젤은 그의 설교에서 면죄부를 구입한 자는 죄사함은 물론 형벌을 면하게 된다고 약속하였다. 그러나 [95개조의 의제]에서 루터는 "교황 자신은 죄를 사할 수 없다"(6조). "이 때문에 면죄부를 구입하도록 설교하는 자들이나 교황의 면죄부를 구입하는 사람은 모든 형벌로부터 사함 받고 구원함을 받는다 라고 말하는 것은 잘못이다"(21조). "동전이 연보함 바닥을 땡그랑하고 때리자마자 영혼이 연옥으로부터 날아 오른다는 설교는 하나님께서 그 당위성을 인정치 않고 있다"(27조). "면죄부 구입으로 구원함을 받는다고 확신하는 자들은 그들의 교사들과 함께 영원토록 저주를 받을 것이다"(32조). "진정으로 참회하는 그리스도인이라면 누구라도 형벌과 죄로부터 완전한 사함을 누리며, 이 축복은 면죄부 없이 주어진다"(36조). 그러므로 "면죄부에 따른 구원에 의존하는 것은 헛된 것이다"(52조)라고 강력하게 주장하고 있다.(18 나. 마르틴 루터의 [하이델베르그 논의를 위한 의제] 1517년 10월 31일의 [95개조의 의제]가 중세교회의 면죄부 판매를 바로 시정하려는 데서 그 의의를 찾는다면, 1518년 4월 열린 하이델베르그 어거스틴 수도승 독일 총회를 위해서 마련한 [하이델베르그 논의를 위한 의제](Theses for the Heidelberg Disputation)는 죄, 자유의지, 은총과 같은 신학문제에 초점을 맞춘 최초의 개신교 사상이란 점에서 그 의의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19 여기서 루터는 "하나님의 율법은 가장 건전한 생활 교리이긴 하지만 인간을 의로움에 인도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방해가 된다"(1조)고 하였다. "인간의 행위는 언제나 매력적이고 좋아 보이지만 결국 그것들은 치명적인 죄로써 둔갑한다"(3조). 그러나 "하나님의 사역은 언제나 매력도 없고 나빠 보이지만, 그 결국은 진실로 영생을 위한 공덕이다"(4조)라고 말하고 있다.(20 자유의지에 대해서 중세교회가 "자신 속에 있는 것을 행하는 자에게 하나님께서 은혜 주시기를 거절하지 아니하신다"라고 주장하는 것에 반하여 루터는 "자신 속에 있는 것을 행하는 한 그것은 치명적인 죄를 범할 뿐이며, 타락후의 '자유의지'는 말뿐이다"(13조)라고 주장하였다. "타락 후의 '자유의지'는 선행에 대해서 오직 실현할 수 없는 능력으로써의 가능성을 가지며, 악행에 대해서는 그러나 언제나 실현할 수 있는 능력으로써의 가능성을 가진다."(14조). "자유의지는 무죄의 상태를 실현할 수 있는 가능성으로써 남아 있을 수 없다"(15조). "자신 속에 있는 것을 행하므로 의로움에 이르고자 하는 자는 죄에 죄를 더할 뿐이며, 이중으로 유죄하게 된다"(16조). "율법은 또한 하나님의 진노를 야기한다. 그것은 그리스도안에 있지 아니한 모든 것을 죽이며, 욕하며, 정죄하며, 심판하며, 저주한다"(23조). "행함이 많은 자가 의로운 자가 아니라, 행함은 없지만,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많이 가진 자가 의로운 자이다"(25조). "율법은 '이것을 행하라'고하지만, 결코 행하여 지지 않으며, 은혜는 '이것을 믿어라'고하지만, 즉시 모든 것이 행하여진다"(26조). "그리스도의 사역은 마땅히 능동적 사역이라고 불리어져야 할 것이다. 그리고 우리의 행위는 수동적이며, 행하여진 자는 그리스도의 능동적인 사역 때문에 하나님께 기쁘시게 된다"(27조)고 주장하고 있다.(21 이후 1521년 보름스에서 열린 왕정회의(Diet at Worms)에 소환될 때까지 특별히 1519년 열린 요한 에크(John Eck)와의 라이프찌히(Leipzig) 토론을 통해서 얻은 바 확신은 그리스도인의 삶의 규범이 될 수 있는 것은 오직 성서뿐이라는 것이었다. 때문에 로마교황은 믿음의 문제에 있어서는 과오를 범할 수 없다는 주장이나 교황만이 성서를 해석할 수 있다는 주장을 반박하였다. 뿐만 아니라, 루터는 종교회의에서 얻어지는 결론들이 서로 다르다는 점을 들어 종교회의 자체도 신뢰할 수 없다는 결론에 도달하였다. 따라서 보름스 왕정회의가 루터에게 그 자신의 저술들을 잘못된 것으로 인정하라고 촉구했을 때에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존엄하시고 주되신 각하께서 간략한 답변을 요구하시므로 담담하게 답변을 드리겠습니다. 성서가 증거 하는 바가 아니거나, 분명한 이유가 있지 않은 한 (왜냐하면, 본인은 교황도 종교회의도 신뢰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교황이나 종교회의들은 종종 과오를 범하였으며, 상호 모순되기 때문입니다.) 본인은 본인이 인용한 성경말씀에 매이며, 하나님의 말씀에 사로잡혀 있으므로, 아무 것도 취소할 수도 취소하지도 않을 것입니다. 양심을 거슬려 가는 것은 안전하지도 옳지도 못하기 때문입니다. . . . 하나님 도우소서. 아멘.(22 1520년 교황청에서 내려진 교서에서는 루터의 모든 저술들을 저주하고 60일 이내에 루터가 자신의 주장을 모두 취소할 것을 명령하였다. 그러나 루터는 이 해에 많은 글을 발표하고 있다. {선행에 관한 논문}(The Treatises on Good Works), {로마 교황권}(The Papacy at Rome), {독일 국적의 지배계급에 보내는 호소}(An Appeal to the Ruling Class of German Nationality), {교황의 이방적 예속}(The Pagan Servitude of the Church), 그리고 {그리스도인의 자유}(The Freedom of a Christian)와 같은 내용의 글들이 1520년에 발표되었다.(23 3. 마르틴 루터의 의인론 이제 이들 루터의 저술들을 통해서 루터의 개혁사상을 알아보고자 한다. 루터의 의인론을 바로 알기 위해서는 앞에서 언급하고 제시한 바와 같이 중세교회의 구원관과 루터가 놓은 초석을 바탕으로 발전된 개신교회 사상을 먼저 바로 알지 않으면 안 된다. 뿐만 아니라, 루터가 즐겨 사용한 어휘들을 이해하지 못하고서는 그의 사상을 바로 알 수 없기 때문에 다음과 같은 다섯 개의 슬로건을 먼저 소개하는 것이 유익할 것이라 생각된다. 가. 개신교의 다섯 가지 슬로건 (1)오직 성서(Sola Scriptura) 교황이나 사도들의 전승을 성서와 동등하게 권위를 부여하여 그리스도인의 믿음과 실천의 규범으로 삼는 것을 반대하는 슬로건이다. 또한 사제들만이 절대적이고 오류 없는 권위로써 성서를 해석할 수 있다는 카톨릭교회의 주장을 반대하는 슬로건이다. 그러나 오직 성서만이 그리스도인의 믿음과 실천의 유일한 규범임을 주장하는 슬로건이다. (2)오직 은혜(Sola Gratia) 루터의 고민은 어떻게 준엄하시고 공의로우신 하나님 앞에 바로 설 수 있겠는가 였다. 하나님의 은혜를 의존하는 구원론의 재발견은 자신의 의를 통해서 구원에 이룰 수 없음을 알고 하나님의 의를 의존하는 복음의 진수이다. 오직 하나님의 은혜만이 죄인이 살길임을 외치는 슬로건이다. 은혜의 독특성은 죄인을 향한 하나님의 은혜로우신 태도와 그분의 자비로우신 행동에 있다. 하나님은 스스로 하나밖에 없는 외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화목제물로 삼으심으로써 진노하심에서 인류를 구원하셨다. 하나님의 스스로 취하신 태도와 외아들을 화목제물로 삼으신 행동은 하나님의 은혜의 속성에 근거하고 있다. 그러므로, 오직 은혜란 모든 인간의 공덕과 행위를 배제하고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로우신 구원의 사역에 의존하는 구원의 원인적 근원에 대한 슬로건이다. (3)오직 그리스도(Sola Christo): 그리스도만이 오직 죄인과 하나님 사이에 중보자이심을 가르치는 슬로건이다. 그리스도의 구원의 사역은 죄인을 구원하기에 100% 충분하며, 죄인의 구원을 위한 공덕적 근원이다. 따라서 마리아와 성자들의 중보는 사족에 불과하며, 사제들의 중보적 역할도 그 필요성이 전무하다. 인간의 공덕체제로써의 성례전을 부정하며, 미사의 피 없는 희생제사 제도를 배격한다. 오직 그리스도만이 십자가에 죽으심을 통해서 단번에 모든 율법의 요구를 충족시키셨으며, 인류구원을 위한 족한 화목제물이 되셨다. 그리스도만이 인간구원의 소망이다. (4)오직 믿음(Sola Fide) 오직 믿음으로써만 하나님 앞에 설 수 있으며, 그분의 은총을 입을 수 있다. 이는 중세교회의 공덕이나 성례전의 ex opere operato(=by the work performed)의 개념을 반박하는 슬로건이다. 이는 구원을 받는 수단이다. 구원하는 믿음은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는" 동의와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마음에 믿는" 신뢰를 말한다(롬 10:9). 따라서 오직 믿음의 실질적 원칙(material principle)은 중세교회의 사제들만의 제사장론을 배격하며, 만인 제사장론을 펼치는 슬로건이다. (5)오직 하나님께 영광을(Soli Deo Gloria) 인간 구원의 모든 계획과 사역의 주체자이신 하나님 한 분에게만 찬양을 드리며, 그 은덕에 감사하며, 영광을 돌리라는 슬로건이다. 하나님은 마땅히 영광과 찬송을 받으실 분이시다. 이들 슬로건들은 모두가 루터의 저술에서 쉽게 찾아 볼 수 있는 어휘들이다. 특히 오직 성서, 오직 믿음, 오직 은혜는 그의 저술에서 반복해서 사용되고 강조되고 있는 말들이다. 이들 슬로건들은 칭의의 본질을 설명하는 동시에 중세교회의 잘못된 교리를 배격하는 말들이다. 구원은 하나님의 말씀에서 나오는 믿음을 통해서 그리스도의 사역에서 드러난 하나님의 은혜로써만 가능하다는 강력한 주장이다. 나. 마르틴 루터의 공헌 마르틴 루터의 공헌은 오래도록 사장되었던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는다"는 성서적 가르침을 재발견한데서 찾을 수 있다. 마치 태양을 따라서 돌던 지구를 코페르니쿠스가 처음 발견하고, 그 사실을 세상에 알린 것과 같다고 할 것이다. 1520년 11월 출판된 {그리스도인의 자유}에서 루터는 "오직 믿음이 행위 없이, 의롭게 하며, 자유케 하며, 구원한다"고 말하고 있다.(24 우리가 이 긴 말을 축소해서 이신칭의(以信稱義)라고 하는데, 루터가 뜻하는 이신칭의는 어떤 것인가? 이것을 알기 위해서는 루터가 활동하던 당시의 중세교회의 구원론을 상기하지 않으면 안될 것이다. 왜냐하면, 루터 자신이 몸담았고, 또 배웠던 사상에서 루터 자신은 크게 물러설 수 없는 인간의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중세교회의 합일치 공덕, 완전 공덕, 성화케 하는 은혜의 개념은 루터에 의해서 믿음, 성령, 하나님의 은혜의 전가라는 개념으로 새롭게 바뀌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시의 루터에게는 오늘날 우리가 생각하는 법정개념으로써의 칭의 또는 초기성화와 인간본질의 상태의 변화를 말하는 점진성화의 개념은 갖지 못했으며, 또 당연한 것일지도 모른다. 루터가 생각한 칭의 개념은 오늘날 우리가 생각하는 법정개념의 무죄선언 즉 하나님께서 죄인의 믿음을 보시고 무죄로 선언하는 간주되고 칭의 되고 선포된 개념의 칭의와는 차이가 있음을 살피게 된다. 물론 루터가 성화라는 어휘를 쓰지는 않았지만, 그의 칭의론은 성화론과 흡사하며, 중세교회의 구원론의 틀을 완전히 벗지는 못하고 있다. 루터에게 있어서 행위와 대조가 되는 것은 행위와 믿음, 성화케 하는 은혜와 하나님의 전가, 인간의 공덕과 하나님의 선물, 합일치 공덕과 형식적인 의(formal righteousness) 또는 외인의 의(alien righteousness), 완전 공덕과 실질적인 의(actual righteousness) 또는 당연 의(proper righteousness)와 같이 1단계, 2단계 형식의 개념의 틀을 이루고 있음을 본다. 따라서 믿음 그 자체는 행위와 매우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으며, 행위가 율법과 관련을 맺고 있듯이, 믿음도 율법과 관련을 맺고 있음을 보게 된다. 중세교회의 합일치 공덕이 성화케 하는 은혜를 입기 위한 인간의 의로운 행위를 말한다면, 루터의 믿음은 곧 율법의 요구를 성취하는 행위의 개념을 포함한다. 따라서 이 믿음은 연약하고 불완전한 것이 되며, 하나님의 전가된 의를 입는 1단계의 의 즉 외인에 의한 의 또는 형식적인 의에 해당된다. 그리고 이 부족한 의를 채우고 보충키 위해서 중세교회가 성화케 하는 은혜를 부여받게 된다고 가르치는 바로 그 자리에서 루터는 하나님의 의의 전가를 주장함으로써 궁극적으로는 인간구원의 모든 조건을 하나님의 선물로써 즉 은혜로써 설명하고 있다. {로마서 서문}에서 루터는 로마서 2장의 유대인 정죄에 대한 부분을 설명하면서 자신의 믿음에 대한 개념을 피력하고 있다. 바울이 "오직 율법을 행하는 자라야 의롭다 하심을 얻는다"(롬 2:13)라고 해놓고, "율법의 행위로 그의[하나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다"(롬 3:20)고 한 점에 대해서 루터는 유대인들이 율법을 지키지 않은 것이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니라, 마음에서 우러나와 진정한 마음으로 하지 못한 것이 문제가 된다고 말하고 있다. 형벌에 대한 두려움이나 보상에 대한 바람 때문에 겉모양으로나 행동으로는 율법을 지키지만, 자의(自意)나 율법에 대한 사랑에서는 아무 것도 하지 않으며, 오히려 마지못해서 억지로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마음속 깊은 곳에서는 율법을 미워한다는 것이다.(25 그러나 율법은 신령한 것이기 때문에 마음속 깊은 곳에서 우러나와서 하지 않은 것은 율법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만일 율법이 신령한 것이 아니라면, 우리의 행위는 율법의 요구를 충족시킨다는 것이다. 그러나 율법은 신령하며, 거룩한 것이기에 신령한 마음으로 또 진정한 마음으로 지켜야 하는 데, 인간으로써 다소나마 거리낌이나 마지못함이 없이는 율법을 지킬 수 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율법의 행위는 가식이며, 위선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의로써 간주하실 수 없으며, 우리가 율법을 싫어하고 억지로 한다면, 우리의 행위는 헛되고 무의미한 것이 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중세교회의 합일치 공덕의 가르침은 율법의 행위로 구원에 이르고자 하는 율법주의적 가르침이며, 무의미한 것이라고 말한다.(26 이런 맥락에서 1525년 출판된 루터의 {속박 의지론}(The Bondage of the Will)은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이 책은 인문주의자인 에라스무스(Erasmus)가 {자유 의지론}을 쓴 후, 그를 비판하기 위해서 쓴 글이다. {속박 의지론}에서 루터는 속박의지를 인간이 중요하고 의미 있는 결정을 할 수 없다거나 또는 인간이 돌이나 짐승이나 또는 악당에 지나지 않는다는 뜻으로 쓰지는 않았다. 그러나 어떠한 의지의 행동이나 능력으로는 하나님과 적절하고 적당한 관계를 유지할 수 없다는 뜻으로 사용하였다. 환언하면, 인간 자신의 결정과 노력으로는 하나님으로부터 소원된 관계를 극복할 수 없다는 것이다. 즉 칼뱅의 완전타락설과 같이 인간은 결정적인 존재문제에 이르러서는 완전히 무능하다는 것이다. 따라서 루터는 하나님의 은혜 없이는 자유의지는 전혀 자유하지 않으며, 죄악에 예속된 영구한 죄수이며, 노예라고 말하고 있다.(27 은혜가 없이는 자유의지의 능력은 전무하며,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무가치한 것이다. 때문에 자유의지는 오직 하나님께만 적용될 수 있는 용어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만이 하실 수 있고, 또 무엇이든지 그분이 원하시는 것은 다하시기 때문이다.(28 다만 인간은 구원과 저주문제에 있어서 자유의지를 가지지 아니하며, 하나님의 의지에나 또는 사탄의 의지의 포로이며, 죄수이며, 예속된 노예일 뿐이다 라고 하였다.(29 이는 인간이 가식이나 위선이 없이는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을 모두 다 해낼 수 없다는 뜻으로서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 한편 율법이 요구하는 것을 행하는 것과 율법을 성취하는 것은 별개의 문제이며, 율법의 성취는 오직 인간이 자유의지와 선택으로 율법이 요구하는 바를 행할 수 있을 때 비로소 이루어진다고 말한다. 이 율법의 성취를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오직 하나님의 말씀에서 나오는 믿음을 주시는 데, 이 믿음에서 진실로 선 행위가 나온다는 것이다. 율법을 기쁨으로 진실된 마음으로 지킬 수 있는 힘을 하나님의 성령께서 주시는 데, 이 성령은 율법의 요구와 우리를 동등하게 만드신다. 따라서 우리는 율법을 지키고자 하는 진정한 욕구를 가지게 되며, 두려움이나 억지로 하지 않고, 원하는 마음으로 모든 것을 행하게 된다. 율법은 신령한 것이기에 신령한 심령들에 의해서 사랑 받는다. 따라서 우리 마음에 하나님의 영이 없으면 죄는 남게 되며, 율법에 대한 증오감이 남게 된다.(30 그러므로, 오직 믿음만이 우리를 의롭게 하며, 율법을 성취하며, 믿음 때문에 이것은 그리스도의 공덕에 의해서 얻어진 영을 우리에게 가져오며, 이 영은 또한 율법이 목적으로 하는 행복과 자유를 우리에게 가져온다고 한다.(31 이상에서 보듯이, 믿음은 수단으로써 구원을 성취하기보다는 주체로써 구원을 성취하며, 율법을 완성한다. 이렇게 볼 때, 루터의 믿음은 다분히 행위적 개념과 밀접한 관련을 맺게 되며, 중세교회의 합일치 공덕의 개념을 믿음으로 대체(代替)시킨 결과를 보게 되는 것이다. 이런 개념에서 루터는 "오직 믿음만이 하나님의 말씀의 구원하는 그리고 효력 있는 이용이다"라고 했고,(32 "오직 믿음만이 행위 없이 의롭게 하며 자유케 하며 구원한다."(33 또 "오직 믿음과 하나님의 말씀만이 영혼에서 다스린다."(34 또 "오직 믿음만이 우리를 의롭게 하며 율법을 완성한다"고 말한다.(35 따라서 루터의 믿음은 구원하는 믿음으로써 법정개념의 무죄선언을 얻는다는 이신칭의의 개념보다는 순종의 믿음을 통한 점진적 성화의 개념이 두드러진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아래의 글에서 이러한 그의 개념을 뚜렷이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믿음은,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서 이루시는 어떤 것이다. 그것은 우리를 변화시키며, 요한복음 1장 13절의 말씀대로 우리는 하나님께로써 다시 태어난다. 믿음은 옛 아담을 죽음에 처하고, 마음과 정신과 모든 능력 가운데서 사는 아주 다른 인간들로 우리들을 만든다. 그리고 그것은 성령에 의해서 동반된다. 믿음은 살아있는 흔들리지 않은 확신이며, 하나님의 은혜 속에 있는 믿음은 매우 확실해서 인간이 그것을 위해서라면 천 번이라도 죽을 수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은혜 속에 있는 이런 유의 확신은 또 그것에 대한 이런 유의 지식은 우리를 즐겁게 하며, 우리의 정신을 고양시키며, 하나님과 또한 모든 인류와의 관계 속에서 열심을 내게 한다. 그것은 성령이 믿음을 통해서 이루시는 것이다. 때문에 믿음을 가진 인간은 그 같은 은혜를 보여주신 하나님의 사랑과 영광을 위해서 쫓김이 없이 기쁘고 자원함으로 모든 사람에게 선을 행하고자 하며, 모든 사람을 섬기며, 모든 종류의 고난을 참는다. 진실로 믿음으로부터 행위를 분리시키는 것은 마치 불로부터 열과 빛을 분리시키는 것이 불가능하듯이 불가능하다.(36 루터는 그의 "두 종류의 의"(Two Kinds of Righteousness)란 설교에서 이제 살펴본 바의 믿음의 단계를 "외인에 의한 의"(alien righteousness)라고 부른다. 이 의는 그리스도의 의이며, 침례 가운데서 주어지는 의이다. 이 그리스도의 의가 그리스도안에 있는 믿음을 통해서 우리의 의가 되며, 이 의는 곧 하나님의 의라고 한다. 그리고 이 의를 믿음 그 자체로 생각한다.(37 따라서 "이 의는 근본적이며, 그것은 우리 자신의 모든 실질적인 의에 대한 자료이다. 왜냐하면, 이것은 아담이 상실한 원래의 의를 대신해서 주어진 의이기 때문이다"라고 한다.(38 그리고 이 의는 하나님의 자비와 은혜로 말미암아 믿음을 통하여 우리의 의가 된다고 한다. "그리스도는 날마다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과 지식이 자라는 데까지 일치하여 더욱더 옛 아담을 몰아내신다. 왜냐하면, 외인에 의한 의는 단번에 모든 것이 부여되지 않으며, 그것은 시작이요, 발전되며, 죽음을 통하여 마지막 때에 결국 완성되는 것이기 때문이다"라고 말한다.(39 루터는 {갈라디아서 주석}에서 이 의를 형식적인 의(formal righteousness)라고 부르고 있다.(40 이 형식적인 의는 곧 믿음을 말하며, 이 의는 완전하지 못해서 믿음을 가진 후에도 여전히 우리의 육체에는 죄의 잔존이 남게 된다. 따라서 이 의는 불완전한 의이며, 연약한 의이다. 그리고 이 의는 하나님의 전가된 의를 받기 위한 초보적인 단계의 의에 지나지 않는다.(41 이러한 루터의 믿음에 대한 개념은 중세교회의 합일치 공덕의 개념에서 나온 것으로 보이며, 중세교회가 인간의 자유의지의 사용으로 하나님의 은혜 즉 성화케 하는 은혜를 받기 위해서 공덕을 쌓아야 한다고 가르친 점을 미루어 볼 때, 루터는 이 공덕의 개념을 믿음으로 대치(代置)하였으며, 이 믿음은 곧 하나님의 전가된 의를 받는 발판으로 삼고 있다. 따라서 이 믿음은 하나님의 선물이긴 하지만 불완전하며, 약하며, 결국 하나님의 의의 전가로 완성되어야 할 의로써 설명하고 있다. 마치 중세교회의 합일치 공덕이 불완전한 공덕이었던 것과 같으며, 성화케 하는 은혜로 완전공덕에 이르는 것과 같다. 따라서 루터는 그리스도의 의를 두 단계로 보았고, 두 종류의 의로써 설명하였던 것이다. 제 1단계인 믿음의 단계는 성령의 첫 열매는 소유하고 있는 단계이지만, 아직 죄악이 남아 있는 단계이며, 불완전한 의의 단계라는 것이다. 하나님은 이 불완전한 우리의 의를 완전한 의로 간주하신다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의 죄악을 무죄로 간주하신다는 것이다.(42 이것이 둘째 단계의 의이다. 이러한 루터의 개념은 오늘날 우리가 칭의와 성화의 단계로 나누어 설명하는 구원론과는 상당한 차이가 있으며, 칭의 개념이 아닌 중세교회의 성화의 논리를 엿볼 수 있는 개념이다. 루터의 제 2단계의 의인 실질적인 의는 또 "당연 의"(proper righteousness)라는 말로써 설명되고 있다. 이 의는 "우리만의 노력으로 그 의를 이루기 때문이 아니라, 첫째 의인 외인의 의와 함께 행하기 때문"이라고 말하고 있다.(43 이는 중세교회가 성화케 하는 은혜와 함께 완전공덕에 이른다고 가르치는 것과 같다. 루터의 제 2단계 의는 그리스도인의 성화의 의를 말하고 있다. 다만 이 의를 하나님의 전가된 의라고 말함으로써 오늘날 우리의 칭의의 개념이 하나님의 전가된 의라고 말하는 점과는 크게 차이가 있다고 하겠다. 루터가 말하는 이 당연 의 또는 실질 의 또는 오늘날의 개념으로 성화의 의는 루터에 의해서 그리스도인의 삶 속에서 나타나는 세 가지에서 두드러지고 있다. 첫째는 갈라디아서 5장 24절의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박았느니라"고 하신 말씀에 근거한다. 육체와 함께 정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박아 가는 삶, 이것이 첫째이다. 둘째는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며, 셋째는 하나님을 향한 온유함과 두려움 즉 경건의 삶이다.(44 이 의는 첫째 의인 외인에 의한 의의 산물이며 실제적 열매이며 결과라고 한다.(45 따라서 이 의의 열매는 갈라디아서 5장 22-23절의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이다. 그리고 이 의는 옛 아담을 멀리하고 죄의 몸을 멸함으로써 첫째 의를 이루려고 한다. 이 의는 죄를 미워하고 이웃을 사랑한다. 자기 자신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고, 다른 사람의 유익을 구한다. 이 의는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며, 자신에 대하여 근신하며, 이웃에 의로우며, 하나님께 대하여 경건한 삶을 살아간다. 이 의는 그리스도의 본을 따라 살며, 그의 형상으로 변화한다.(46 이 의는, 루터에 의하면, 그리스도인의 의를 구성하는 "마음의 믿음"과 "하나님의 전가" 가운데 전가의 의를 말한다. 마음의 믿음이 불완전하기 때문에 이 의는 그 부족함을 채워 완전하게 한다. 그리스도인의 의는 믿음에서 시작되어 하나님의 전가로써 완성된다. 마치 중세교회가 행위로 시작해서 성화케 하는 은혜로 완전공덕에 도달함과 같다. 믿음은 약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전가 없이는 완전하게 되지 못한다. 따라서 믿음이 의를 시작하고 하나님의 전가가 그리스도의 날까지 그것을 완성시킨다고 한다.(47 그리스도인의 의는 하나님의 선물이다. 중세교회가 인간의 공덕을 주장한 것과 정반대가 된다. 이 단계에서는 불완전한 우리의 의가 완전한 의로 받아드려지고 죄의 잔존에도 불구하고 죄를 죄로 간주하지 않으신다.(48 하나님은 죄의 잔존을 벌하시지 않을 것이다. 그것 때문에 저주하시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그것을 덮으시며 거저 용서하실 것이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은 의인이면서 동시에 죄인이며, 거룩하면서 불경스러우며, 하나님의 원수이면서 동시에 하나님의 자녀이다"라고 루터는 말하고 있다.(49 그리고 선 행위는 우리의 의가 믿음으로 된 의임을 입증하는 외적 표적이다. 선행은 믿음에서 나오며 좋은 열매가 좋은 나무에서 나오는 것과 같이 선행은 죄인이 하나님 앞에 의인된 사실을 입증하는 외적 표적이다.(50 결론 이상으로 루터의 구원론을 그가 처해있던 중세교회의 교리적 상황과 루터 자신의 고민과 갈등 속에서 알아보았고, 그의 구원론이 오늘 우리가 알고 있는 구원론과 어떻게 다른지를 살펴보았다. 하나님의 의에 대한 루터의 새로운 발견은 암흑시기의 인류에게 크나 큰 빛과 소망이 되었으며, 인간 중심의 행위 신앙에서 신 중심의 은혜의 신앙으로 바꾸어 놓은 위대한 업적으로 인정되고 있다. 루터야말로 위대한 신학자요, 개혁가였다. 그가 외친 오직 성서, 오직 믿음은 중세교회로 하여금 흑암의 두터운 껍질을 벗고 새로운 진리를 발견토록 하는 안목을 열어 주었다. 그러나 그의 구원론은 중세교회의 구원론의 틀을 완전히 벗지 못한 아쉬움을 남기고 있으며, 오늘날의 법정개념으로써의 칭의 개념이 인간본질의 개념인 성화의 개념과 구분되고 있지 않으며, 불신자의 구원하는 믿음이 신자의 순종의 믿음과 구분되지 않고 중첩되고 있다. 또한 중세교회의 합일치 공덕은 믿음으로, 성화케 하는 은혜와 연합으로 이루는 완전 공덕은 하나님의 전가로 대치시키고 있다. 그러나 루터는 중세교회의 공덕개념을 완전히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로 바꾸어 놓았으며, 구원을 하나님의 선물로 만들고 있다. 비록 루터에게서 무죄선언으로써의 칭의 개념은 없지만, 그의 이신칭의에 대한 확신은 결국 성서에 대한 주의력을 집중시켰으며, 성서로 돌아가게 하는 위대한 업적을 남겼고, 따라서 오늘 우리 성도들은 그의 덕택으로 바른 구원론을 발견케 된 것이다. 루터에게 있어서 구원의 근원은 하나님의 은총이며, 믿음은 그 구원에 이르는 도구이며, 침례는 구원을 받는 시간이며, 구원의 목적은 선행이다. 루터는 침수를 주장하였을 뿐 아니라, "의는 침례 가운데서 사람들에게 주어진다"고 했고,(51 "그리스도께서는 침례 가운데서 구원을 부여하신다"고 주장하였다.(52 또한 그리스도인의 참된 삶에 대해서 그는 "그리스도인은 모든 것에 대해서 완전하게 자유로운 주인이며, 아무에게도 예속되지 아니한다. 그리스도인은 모두에게 완전하게 의무를 가진 종이며, 모두에게 예속된다"고 했고,(53 "그리스도인은 자신 속에서 살지 아니하고, 그리스도 안에서 또 그의 이웃 안에서 산다. 그렇지 않으면 그리스도인이 아니다"고 하였다.(54 이것이 바로 루터가 가르치는 구원받은 자의 참다운 모습이다. 루터의 믿음은 모든 이에게 선을 행하는 믿음이요, 모든 사람을 섬기는 믿음이요, 모든 고난을 참아내는 믿음이었다. 루터의 의는 그리스도와 함께 인간의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박아 가는 삶이요, 이웃을 사랑하는 삶이며, 하나님을 섬기는 경건의 삶이었다. 따라서 루터가 말하는 의인은 죄를 멀리하고 이웃을 사랑하며, 자신의 유익보다는 남의 유익을 구하며 하나님께 대하여는 경건하며, 모든 것에 자유하면서 그 자유를 진정으로 누릴 줄 알고, 자신을 다스릴 줄 아는 왕이요, 모든 이의 종으로써 자신 속에 살지 아니하고, 이웃 속에 살면서 그들을 섬기는 제사장이요, 썩고 병들고 부패된 교회, 성직이 매매되고 면죄부가 판매되고 부도덕이 자행되던 교회에 의연하게 맞설 수 있었던 예언자였다. 오늘날 우리 교회에 하나님을 믿고 구원받은 일 천만 의인이 있다고 하지만 소돔과 고모라성에서 의인 열 사람을 찾을 수 없었던 그 기현상이 오늘 우리 사회에서 벌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감안할 때, 루터의 의인론은 우리에게 가르치는 바가 많다고 할 것이다. /출처ⓒ† : http://cafe.daum.net/cgsbong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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