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 그리그도 누구신가?
1. 들어가는 말
기독교가 한국에 전래된 것은 약 170여년 전이라고 한다. 그런데 지금도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정확한 이해가 미급하며, "구세주"라는 말에 시쿵둥하는 반응을 보인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는 누구인지 ?, 그분과 우리라는 인간들과는 어떠한 관계가 있는지 알고 싶다. 그렇다고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를 모두 캐고 낱낱히 시시비비를 가리자는 것은 아니다. 그리스도와 인간 관계를 바로 알고 구원받지 못한 사람의 위치에서 구세주의 구원계획을 살펴보고, 거듭나는 것이 무엇인지를 규명하여 모든 사람이 구원받고 진리의 지식에 이르기를 기원 한다.(딤전 2:4)
2. 전개되는 말
예수 그리스도는 누구인가 ?
1. 예수 그리스도 출생에 대한 예언들
1) 성경은 이스라엘의 메시야로 오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초림에 대한 48가지의 예언을 하고 있다.
한 사람의 생애에 있어서 그가 태어나기 전에 짧게는 400년 전부터 길게는 2000년 전에 기록된 48가지의 예언이 일어날 확률은 10의 157승 분의 1이다. 그러나 이 우주에 널려 있는 전자의 수를 다 합쳐도 이 만큼은 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우리가 성경에 대해서 말할 때 그것은 우리가 오늘날 미국에 있는 그 어떤 과학적인 시도보다도 더 높은 수준의 것을 얘기하고 있는 것이다. 휴스턴 우주센타라 할지라도 하나님의 말씀을 견뎌 낼 그 어떤 과학자도 없는 것이다. 8이나 9의 제곱근을 손가락 계산으로 셀 수 있는 그 어떤 수학적인 천재라 할지라도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는 어린애 장난에 지나지 않는다. 성경은 그리스도가 태어나기도 400년 전에 48가지의 예언을 하고 있다. 대학교 내의 어떤 교과 과정이나 어떠한 교과서도 이런 엄청난 사실을 다루는 곳은 없다. 과거에도 없었으며 앞으로도 없을 것이다.
성경은 그리스도가 태어나시기도 전에 그에 대한 48가지의 예언을 했고 모두 성취되었으며 아직도 미래에 일어날 500가지 이상의 예언을 하고 있다.
그리고 이것은 수트라(Sutras), 베다(Vedas), 트리피타카(Tripitaka), 혹은 프라나(Purana) 같은 책들은 꿈도 꾸지 못할 일이다. 예언에 있어서 코란 같은 책을 성경에 비교한다는 것은 에베레스트 산과 그 옆에 있는 언덕을 비교하는 것과 같다. 물론 이 언덕은 너무나도 납작해서 거의 평지같이 보인다. 나는 지금 허풍을 떨고 있는 것이 아니다.
예를 들면 <킹제임스성경>은 아직 성취되지 않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500가지 이상의 예언을 하고 있다. 당신은 500가지 이상의 예언이 정확히 성취될 확률이 얼마나 되는지 아는가? 성경의 예언은 단 한 번의 실패도 없었다. 스스로 “과학적인 책”임을 자랑하던 5마일이나 늘어선 책들은 성경의 예언 앞에서는 어린애 장난에 불과하다. 만약 성경의 예언들이 단지 우연히 일어난 일에 불과하다면 그것은 진화론자조차도 상상하지 못했던, 우연치고는 실로 엄청난 우연인 셈이다. 성경의 예언은 “과학적인 사실”들에 의해서 철저히 입증되는데도 불구하고 진화론자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거부하고 다윈과 자신들의 상상력을 믿고 있다.
2) 예를 들어 여기 그리스도의 기원과 그리스도의 생애에 관한 몇 가지 예언들이 있다. 이 예언들이 한 사람의 생애에 모두 이루어질 가능성은 10의 97승 분의 1정도가 된다고 할 수 있다.
당신은 0이 97개가 붙은 것이 어떻게 생겼는지 상상이나 할 수 있겠는가? 그 확률을 짐작이나 하겠는가? 그것은 사모아에서 모래 한 알을 집어서 다른 해변에다 3m 땅을 판 후 섞어 넣은 것을 찾을 수 있는 것의 확률과도 같다. 당신은 그것을 찾을 수 있는 확률이 얼마나 된다고 생각하는가? 성경의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예언이 성취될 확률이 바로 이것과 같으며 이것이 바로 다른 경전들이 감히 성경에 도전하지 못하는 이유이다.
그리스도는 이스라엘로부터 오실 것이다(민 24:17-19).
그리스도는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자손이 될 것이다(창 12:3; 17:19, 민 24:17).
그리스도는 다윗의 가문에서 태어나실 것이다(창 49장, 사 11장).
그리스도는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실 것이다(미 5:2).
그리스도는 처녀에게서 태어나실 것이다(사 7:14).
그리스도께서 태어나실 때는 상세히 예언되어 있다(단 9:25).
그리스도의 오심은 그의 선두주자에 의해서 선포될 것이다(사 40:3-5).
메시야는 육신으로 나타나신 하나님이시다(사 9:6).
그는 어린 시절을 이집트에서 보내실 것이다(호 11:1).
그는 고난을 받고 속죄를 이루실 것이다(사 53장).
그는 나귀의 새끼를 타고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실 것이다(슼 9:9).
그가 고통 중에 있을 때 쓸개즙과 식초가 주어질 것이다(시 69:21)
그의 뼈는 부러지지 않을 것이다(시 34:20).
사람들은 그의 옷을 나눠 갖기 위하여 제비를 뽑을 것이다(시 22:18).
그는 죽음의 고통 가운데서 그가 태어나기도 전에 기록된 어떤 말들을 할 것이다(시 22:1).
그는 죽은 자들로부터 일으켜질 것이다(시 16:10).
그리스도는 친구에 의해 배반당할 것이다(시 41:9).
그는 은 삼십에 팔릴 것이다(슼 11:12).
그는 거짓 증인에 의해 모함받을 것이다(시 35:11).
그는 침뱉음을 당하고 사람들에게 맞을 것이다(사 50:6).
그는 이유 없이 미움을 받을 것이다(시 35:19).
그는 멸시와 조롱을 당할 것이다(시 22:7,8).
이제 설명해 보라! 이 예언들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탄생하기 최소한 400년 전에 기록된 것들이다. 당신은 이 모든 것들이 다 예수 그리스도에게 성취됐다는 것을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19세기의 그라프-벨하우젠 그룹의 극단적 비평가라 할지라도 구약성경이 침례인 요한 이후에 쓰여졌다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정통 유대인들은 <킹제임스성경>에 제시된 이 예언들을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시기 200년 전부터 회당에서 읽고 있었기 때문이다.
2. 예언들이 얼마나 구체적으로 실현되었는가 ?
1) 민수기 24:17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한 별이 야곱에게서 나올 것이며 한 홀이 이스라엘에서 일어나서...』 이것은 마태복음 1:1-17에서 성취되었다.
㉠ 마1:1『다윗의 아들이요, 아브라함의 아들인 예수 그리스도의 세대에 관한 책이라.』
마태복음 1장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가 나오는데, 이 계보는 “메시야의 계보”(the Messianic line)이다.이 계보는 예수 그리스도의 왕권의 정통성을 설명해 준다. 그리고 그 정통성은 조그마한 불순물도 섞이지 않은 순수한 왕적혈통임을 나타낸다. 여기서 순수하다고 한 것은 ‘왕적’(royal) 혈통이라는 관점에서 순수하다는 것임을 주목해야 한다.왜냐하면 ‘경건한 혈통’(godly line)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는 더럽기 그지없기 때문이다.
㉡ 〔16 야곱은 마리아의 남편 요셉을 낳았으니, 마리아에게서 그리스도라 하는 예수가 나시니라. 17 그러므로 전체 세대는 아브라함에서 다윗까지 십사 대요, 다윗부터 바빌론으로 잡혀간 때까지 십사 대요, 바빌론으로 잡혀간 때부터 그리스도까지 십사 대라.〕(마 1:16-17)
2) 창세기 49:10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홀이 유다에게서 떠나지 않을 것이며...』 이것은 누가복음 1:31-33에서 성취되었다.
〔 31 보라, 네가 너의 태 안에 임신하여 한 아들을 낳으리니 그의 이름을 예수라 하라. 32 그는 위대하게 될 것이며, 가장 높으신 분의 아들이라 불릴 것이요, 또 주 하나님께서 그에게 그의 조상 다윗의 보좌를 주실 것이며〕(눅 1:31-33).
3) 미카 5:2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러나 너 베들레헴 에프라타야, 네가 비록 유다의 수천 가운데서 작을지라도 이스라엘을 통치할 자가 너로부터 내게로 나오리라. 그의 나오심은 예로부터요, 영원부터였느니라.』 이것은 누가복음 2:4-7에서 성취되었다.
㉠그러나 너 베들레헴 에프라타야... 이스라엘을 통치할 자가 너희부터 내게로 나오리라』(2절).
예수 그리스도의 출생 장소에 관련된 위대한 메시야에 대한 예언이다. 실로가 오시기까지 홀이 유다에게서 떠나지 않는 것은(창 49:10) 스불룬이 아니라 유다에 있는 베들레헴이다(창 35:19). 이것은 우주 전체의 역사에서 자신이 출생하기 전에 자신이 출생할 장소를 말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 있는 것이다. 자신을 따르는 사람이 얼마나 많든지 얼마나 많은 권력을 가지고 있든지 상관없이 어느 종교 지도자라도 이런 일은 할 수 없다.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선지자들을 통해(벧전 1:9-11) 자신의 출생지뿐만 아니라(본문) 자신의 출생 시기(단 9:25,26), 자신의 출생 방법(사 7:14), 자신이 어떻게 죽을 것인지(사 53:1-12), 자신의 부활(막 10:34)을 예언하셨다는 사실을 안다면 모하메드를 1억 5천만명이 따른다 해도 예수 그리스도와 같은 선상에 있는 “선지자”라고는 도저히 말할 수 없게 된다.
㉡ 〔4 요셉도 갈릴리 나사렛 성읍에서 유대 다윗의 성읍, 즉 베들레헴이라는 곳으로 가니 (이는 그가 다윗 가문의 계열이기 때문이더라.) 5 그가 자기와 정혼한 아내 마리아와 함께 조세등록하러 갔는데, 그녀는 아이로 인하여 배가 불렀더라. 6 그들이 그곳에 있는 동안 날이 차서 그녀가 해산하게 되었더라. 7 그리하여 그녀가 자기의 첫 아들을 낳아 그를 포대기로 싸서 구유에 누이니, 이는 여관에 그들이 들 방이 없었기 때문이라.〕(눅 2:4-7)
4) 이사야 7:14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러므로 주께서 친히 한 표적을 너희에게 주시리라. 보라, 한 처녀가 임신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의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이것은 마태복음 1:18에서 성취되었다.
㉠ 마태복음 1:18-20, 『 이제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은 이러하니라. 그의 모친 마리아가 요셉과 정혼하였으나 동침하기 이전에 성령으로 잉태된 것이 그녀에게 나타났더라. 그녀의 남편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라, 그녀를 공개적인 본으로 삼기를 원치 않고 은밀히 버리려고 작정하더라. 그가 이 일들을 생각하고 있을 때에, 보라, 주의 천사가 꿈에 그에게 나타나 말하기를 "너 다윗의 아들 요셉아, 네 아내 마리아를 네게 데려오는 것을 두려워 말라. 그녀에게 잉태된 아기는 성령으로 된 것이라.』
본문은 예수 그리스도의 동정녀 탄생을 말하는 것으로서, 그분의 신성에 대한 가장 뚜렷한 증거가 되는 구절이다. 이것은3년 반 동안 제자들이 보았던 모습이라든가, 그분의 모든 이적들보다도 더욱 분명하게 그분의 신성을 증거한다. 그분에게는아담의 성품을 가진 인간 아버지가 없었다. 신정통주의자들은 “동정녀탄생”이라는 말대신 “신적 잉태”라는 말을 사용하기좋아하지만, “신적 잉태”라는 말은 반드시 동정녀 탄생이 아니더라도 가능한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의 특별한도우심으로 탄생하신 정도가 아니라 인간 아버지가 전혀 없는 상태에서 탄생하신 것이다. 『동침하기 이전에』라는 말씀은그들의 모든 이론을 분쇄시킨다. 이와 같은 내용을 다루고 있는 누가복음 1:34에서는 『내가 남자를 모르는데』(Iknow not a man)라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RSV에서는 “내게 남편이 없는데”(since I have nohusband)라고 말함으로써, 예수님을 여자가 남편 없이 아이를 낳은 사생아로 취급해 버리고 있는 것이다. 여자는 남편없이 아이를 낳을 수 있다. 하지만 남자를 모르고는 절대로 아이를 낳을 수 없다. 특별히 “처녀”라는 말에 해당하는헬라어 단어는 “파르테노스”παρθένος parthenos (par-then'-os)인데, 이는 단순히 ‘젊은 여자’ 정도가 아니라, 오직 문자적인, 생물학적인 처녀를 말할 때만사용되는 단어이다.
㉡ 『그가 이 일들을 생각하고 있을 때에, 보라, 주의 천사가 꿈에 그에게 나타나 말하기를』(마 1:20)
“주의 천사”(the Angel of the Lord)라는 말을 주목하라. 성경에서 “주의 천사”는 매우 독특한 존재다.특별히 구약에서 주의 천사는 성육신하기 이전에 현현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말한다. 그는 하나님처럼 나타났고, 하나님처럼불렸고, 하나님처럼 대우받았다(창 16:13; 19:18; 32:27, 판 6:11-22; 13:18,22, 갈4:14, 행 27:23). 그는 하나님처럼 취급받으면서 육체로 나타났다. “주의 천사”라 함은 “주님의 현현”을말한다. 그래서 사람들은 주의 천사에게 “주여”라고 불렀던 것이다.
자, 이렇게 해서 예수 그리스도는 탄생하시게 되는데, 이 탄생은 철저히 예언에 근거한 것이다. 직접적인 예언은 이사야 7:14의 예언으로 마태복음 1:23에 인용되어 있지만, 보다 앞서 이 탄생은 아브라함의 언약(AbrahamicCovenant)과 다윗의 언약(Davidic Covenant)을 성취하시는 것이다. 그러나 21절을 주목하라.
『21 그녀가 한 아들을 낳으리니 너는 그의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들에서 구원할 것이기 때문이니라."고 하니라.』
5) 다니엘 9:24,26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칠십 주가 네 백성과 네 거룩한 도성에 정해졌나니... 육십이 주 후에는 메시야가 끊어질 것이나...』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정확히 그 시간에 못박히셨다.
이사야 9:6에서 예수님은 "능하신 하나님"이라고 불린다. 요한복음 1:14에서는 그분의 신성이 증명된다.
㉠ 『칠십 주가 네 백성과 네 거룩한 도성에 정해졌나니, 허물을 끝내고 죄들을 종결시키며 죄악에 화해를 이루고 영원한 의를 가져오며 그 환상과 예언을 봉인하고 지극히 거룩한 이에게 기름부으려 함이라』(단 9:24).
『칠십 주』가 이스라엘과 예루살렘에 정해졌는데, 그 목적은 다음 일곱 가지다. 첫째, 『허물을 끝내고』, 둘째, 『죄들을 종결시키며』, 셋째, 『죄악에 화해를 이루고』, 넷째, 『영원한 의를 가져오며』, 다섯째, 『그 환상』을 『봉인하고』, 여섯째, 『예언을 봉인하고』, 그리고 『지극히 거룩한 이에게 기름부으려 함』이 그 일곱 번째 목적이다. 이렇게 볼 때, 이 『칠십 주』가 차는 때야말로 모든 것들이 종결되는 실로 장엄한 시점이 아닐 수 없다. 문제는 이 『칠십 주』가 과연 언제 다 끝나게 되느냐 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을 언제로 보느냐에 따라 성경 해석은 완전히 달라지게 된다. 그래서 지금부터 우리는 이것을 바르고도 완전하게 이해하기 위하여 좀 지루할 정도로 긴 시간을 소비해야 한다.
㉡ 예수 그리스도께서 갈보리에서 『죄악에 화해를 이루』셨다는 것은 사실이다. 나는 이 사실을 부인하지 않는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기름부음을 받으셨다는 사실 또한 나는 인정한다. 그러나 『허물을 끝내고 죄들을 종결』시키는 것도 이미 과거에 이루어졌다든지, 『영원한 의를 가져』오시는 것도 이미 과거에 이루어진 일이라고 주장한다면, 문제는 다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초림하셨을 때 『영원한 의』는 성취되지 못했다. 『영원한 의』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초림 때 오셨으되, 그 당시 세대에 의하여 거부되었고 배척된 나머지 이 땅에 머무르지 못하신 채 다시 셋째 하늘로 “귀향”하셔야만 했기 때문이다. 『그는 사람들에게서 멸시받고 거부되었으며 슬픔의 사람이요 질고에 익숙한 사람이라. 우리가 우리의 얼굴을 그로부터 숨긴 것같이 그는 멸시받았고 우리는 그를 존중하지 아니하였도다.』(사 53:3)라고 성경은 분명히 말씀한다.
후천년주의자들이나 무천년주의자들이 24절을 이처럼 모두 과거에 이루어진 일로 해석하는 것은 바로 다음에 이어지는 25절에서 성경 자체가 내려주고 있는 해석을 무시했기 때문이다.
육십이 주 후에는 메시야가 끊어질 것이나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요』(26절).
예수 그리스도께서 갈보리 십자가에서 “끊어지신” 것이 그리스도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었음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그분께서는 나를 위해서, 그리고 당신을 위해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다(벧전 2:24). 그분께서 죽으신 것은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었던 것이다.
가브리엘 천사는 마리아에게 나타나 그분께서 다윗의 보좌를 하나님께로부터 받게 될 것이라 말했었다. 그리고 침례인 요한도, 예수님 자신께서도, 그리고 그의 제자들 역시 “천국이 가까왔다.”고 선언했다. 그렇지만 그분께서는 왕국을 받지 못하셨고, 그분의 머리에는 왕관 대신 가시관이 씌워졌으며 또 죽으셨다. 다니엘은 이것을 내다보고 『육십이 주 후에는 메시야가 끊어질 것이나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요』라고 예언해 두었던 것이다.
㉢ 『또 장차 올 그 통치자의 백성이 도성과 성소를 파괴하리니』(26절).
여기서 『통치자』란 물론 마귀를 말하고 『그 통치자의 백성』이란 로마를 일컫는다. 로마의 티투스는 A.D. 70년 예루살렘 도성과 성전을 파괴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마귀를 “이 세상의 통치자”라고 언급하셨다(요 14:30; 16:11). 로마의 티투스는 역사적으로 실재했던 세계 제국의 통치자로서 다니엘 9:26의 예언을 부분적으로 성취했던 적그리스도의 예표이기는 했지만, 그의 예루살렘 파괴는 교리적으로 볼 때 예언의 전면적인 성취는 아니었다. 이것은 바빌론의 느부캇넷살에 의한 예루살렘 파괴도 마찬가지였다. 따라서 이 구절에서 언급하는 『통치자』는 로마의 티투스나 바빌론의 느부캇넷살이 아니라 마귀를 일컫는다. 이 『통치자』는 예루살렘을 파괴하러 A.D. 70년에 왔던 게 아니다. 그는 장차 대환란 때 나타나 예루살렘으로 들어가 그 거룩한 도성을 짓밟게 될 것이다(계 11:2). 적그리스도에 의한 이때의 예루살렘 파괴는 대환란 중간에 있게 될 것이다. 이로써 예루살렘 파괴는 바빌론과 로마에 이어 세 번째로 적그리스도에 의해 이루어질 것이다. 이런 점에서 대환란 기간 동안 적그리스도에 의해 이루어질 예루살렘 파괴는 느부캇넷살과 로마의 티투스에 의한 예루살렘 파괴의 결정체라고 말할 수 있다. 이런 점에서 장차 있게 될 적그리스도의 예루살렘 파괴는 전혀 새로운 일이 아니다(전 1:9). 그러므로 당신이 적그리스도가 어떤 존재인지 알고 싶다면, 느부캇넷살의 바빌론과 티투스의 로마가 복합된 존재를 연상하면 된다. 로마를 일컬어 성경에서 『신비라, 큰 바빌론이라,』(계 17:5)고 일컫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로마가 『땅의 창녀들과 가증한 것들의 어미라.』고 불려지는 것 역시 로마가 『신비라, 큰 바빌론이라』는 언급의 연장 선상에 있기 때문이다.
『그 끝은 홍수로 뒤덮일 것이요 그 전쟁의 끝에는 황폐함이 정해졌느니라』(26절).
이것은 대환란과 그리스도의 재림을 말하는데, 여기서 “홍수”란 요한계시록 12장에서 언급되는 홍수를 말한다. 『그 용이 자기가 땅으로 쫓겨난 것을 알고서 사내 아이를 출산한 그 여인을 박해하더라. 그때 그 여인이 큰 독수리의 두 날개를 받았는데, 이는 그녀가 광야에 있는 자기 처소로 날아가서 그곳에서 그 뱀의 낯을 피하여 한 때와 두 때와 반 때를 부양받으려 함이더라. 그 뱀이 여인 뒤에다 자기 입에서 물을 홍수같이 쏟아 그 여인을 홍수에 떠내려가게 하려 하되 그 땅이 그 여인을 도와 그 입을 벌려 용이 그 입에서 쏟은 홍수를 삼켜 버리더라』(계 12:13-16).
㉣ 『그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므로,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으로)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요 1:14).
여기서도 역시 영어 <킹제임스성경>에서는 『말씀』을 대문자 “W”를 사용하여 “Word”로 표기하고 있고 <한글킹제임스성경>에서는 『말씀』이라고 고딕체로 표기하여 이분이 바로 하나님께서 육신을 입고 우리 가운데 오신 예수 그리스도이심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이 구절의 말씀은 침례인 요한의 증거가 아니라 『우리가』 본 것이다. 요한이 증거한 것은 15절에 나온다.
『15 요한이 그에 관하여 증거하며 외쳐 말하기를 "이분이 내가 말한 그분이라. 내 뒤에 오시는 그가 나보다 앞선 것은 그분이 나보다 먼저 계셨음이라."고 하더라.』
6) 호세아 11:1은 예수님께서 어린 시절을 이집트에서 보내실 것에 관해 예언하고 있으며 이것은 마태복음 2장에서 성취되었다.
『이스라엘이 아이였을 때 내가 그를 사랑하여 내 아들을 이집트에서 불러내었도다.』(호 11:1)
이스라엘은 민족적인 단위로 하나님의 '아들"이다. 하나님께서는 이집트의 아들들을 죽이고 이스라엘의 아들들은 살리셨다. 또한 이스라엘은 종이다. 마찬가지로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아들이시며 종이시다. 이스라엘과 예수님이 둘 다 같은 이름을 취한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이 사실에 눈을 가리고 있기 때문에 "주의 고난받는 종" (사 49-53장)과 이스라엘 민족을 혼동하고 있다.
그래서 이 구절은 마태복음 2장에서 성취된다.『헤롯이 죽을 때까지 그곳에 있었으니 이는 선지자가 주에 관하여 말씀하신 바 "내가 이집트에서 내 아들을 불렀노라." 하신 그 말씀이 이루어지게 하심이라』(마 2:15). 예언의 이중적용을 주목하라. 이 구절이 역사적으로는 이스라엘의 출애굽에 적용되지만, 예언적으로는 두 번, 즉 예수님의 초림 때, 이집트로 피난갔다가 돌아오시는 것과 대환란 때 유대인들이 광야에 갔다가 돌아오는 것에 적용될 것이다.
7) 구약성경(사 53장)에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속죄를 위해서 고난을 받으실 것이 묘사되어 있으며 이것은 마태복음 26장과 27장에서 성취되었다.
26장과 27장은 예수님의 지상사역이 마무리되는 장이다. 26장에서 예수님은 “최후의 만찬”을 행하신 후 잡히시고, 27장에서 주님은 십자가에 못박히신다. 특별히 26장의 “최후의 만찬”에서는 “새 언약”(New Testament)의 피가 언급되는데(28절), 신약성경은 마태복음 1장부터 시작되지만 진정한 신약은 마태복음 26장부터이다. 왜냐하면 히브리서 9:16-17에서 유언은(testament) 유언한 사람이 죽어야 효력이 있다고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새로운 유언인 “신약”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을 증거하는 26장의 “새 언약의 피”로부터 시작한다. 이에 따라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은 왕국 복음에서 은혜의 복음으로 전환된다. 25장까지는 왕국 복음이 중심내용이었으나,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이 나타나는 26장부터는 은혜의 복음이 중요하게 나타난다. 고린도전서 15:1-4에 따르면 은혜의 복음에 포함되는 요소는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묻히심과 부활이다. 마태복음 26장에는 이 세 요소들이 모두 발견되는데,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이 구체적으로 제시되었고, 한 여인이 예수님께 향유를 부음으로써 예수님의 장사가 언급되었으며(12절), 32절에는 부활이 언급되었다. 특별히 “새 언약의 피”는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죄사함의 피라고 말해진다(28절). 이 피는 한 상인이 매우 값진 진주 하나를 사기 위해 팔아 버린 그의 모든 소유와 같다(마 13:45-46). 세상의 모든 사람은 이 피를 통해 죄의 용서함을 받고 구원을 받는다. 왜냐하면 이 피는 많은 사람을 위해 흘리는 주님의 새 언약의 피이기 때문이다.
8) 우리는 스카랴 9:9에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귀의 새끼”를 타고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실 것이라는 예언을 읽는다. 그리고 이 예언은 마태복음 21:2-5에서 정확하게 성취된다.
㉠ 21장은 예수 그리스도의 예루살렘 입성, 즉 그분의 지상 생애의 마지막 부분이 시작되는 장이다.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은 그분께서 3년 반 동안 사역하신 일에 대한 절정이다. 이 사건에 대해서는 4복음서 모두에서 다루고 있으며, 4복음서는 바로 이 사건을 향하여 전개되고 있다. 예수님은 자신이 왕이시라는 것을 말로나 행동으로나 지속적으로 전파하셨으며, 그분의 왕국에 대해서도 여러가지 표적으로 전파하셨다. 실로 많은 사건이 그분의 생애 동안 펼쳐진 후,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드디어 “왕으로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동시에 십자가의 죽음이라는 최후를 향해 달려가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입성 후 사역은 그분의 왕으로서의 위치를 깍아 내리지 못한다.
21장에서 그리스도께서 입성하시는 것은 “왕으로서”의 입성이다. 그러므로 이 사건은 재림에 대한 강력한 모형이 된다. 왕국이 임할 수 있는 모든 조건이 초림 때에 준비되었다는 것과, 유대인들이 주님을 왕으로 받아들였다면 왕국이 당시에 임할 수 있었다는 사실은 앞에서 반복하여 설명하였다. 우리가 마태복음 1장부터 20장까지 차근히 그분의 왕되심의 관점으로 공부하였다면, 21장의 이 사건을 대할 때 마치 왕이 대관식에서 왕관을 받기 위해 도성으로 행진해 들어가는 것과 같은 모습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 【 2 그들에게 말씀하시기를 “너희 맞은편 마을로 가라. 그러면 곧 나귀 한 마리가 그 새끼와 함께 매여 있는 것을 보리니, 풀어서 내게로 끌고 오라. 3 만일 누가 너희에게 무슨 말을 하거든 ‘주께서 그것들을 쓰신다.’고 말하라. 그러면 그 사람이 즉시 보내리라.” 하시더라. 4 이 모든 일이 일어난 것은 선지자를 통하여 말씀하신 것이 이루어지게 하려 함이라. 말하기를 5 “너희는 시온의 딸에게 말하라. 보라, 너의 왕이 네게 오시나니, 그는 온유하여 나귀와 나귀 새끼인 어린 수나귀 위에 타셨도다.” 하였더라.】(마 21:2-5)
여기서 예수님께서 “두” 제자를 보내셨다는 것은 중요하다. “둘”은 예수님의 재림과 관계가 있다. 구약에서도 모세가 팔레스타인 땅에 보낸 정탐꾼들 중에 믿음이 있었던 정탐꾼은 “둘”이었다. (그 둘만이 천년왕국을 상징하는 팔레스타인 땅으로 들어간다.) 여호수아도 여리코를 무너뜨릴 때 두 명의 정탐꾼을 보냈다. (여호수아는 재림하시는 예수님의 유형이다. 히 4:8) 기드온과 함께 미디안 군의 진영으로 들어간 정탐꾼들도 두 명이었으며, 사울에게서 도망다닐 때, 다윗에게도 두 명의 정탐꾼이 있었다. 더우기 두 명의 증인이 계시록 11장에서 재림을 선포한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때에 왕이 되지 못하셨다. 왕으로 입성하신 주님은 앞으로 삼 일 동안 지금까지 당하셨던 것 보다 더 심한 거부를 당하셨다. 결국 왕의 대관식은 2000년 뒤로 연기된 것이다.
㉢ 마태복음 21:5에서 인용한 말씀은 스카랴 9:9의 예언이다. 다른 선지자들의 글에서와 마찬가지로 스카랴도 초림과 재림을 한꺼번에 예언했다. 마태복음에 예언된 것은 스카랴 9:9의 초림에 관한 말씀인데, 스카랴 9:10은 재림에 관한 말씀이다. 『또 내가 에프라임으로부터는 병거를, 예루살렘으로부터는 말을 끊어 버릴 것이며, 전쟁의 활도 끊어지리라. 그리고 그가 이방에게 평화를 말하리니 그의 다스리심이 바다로부터 바다까지이며 강으로부터 땅 끝까지 되리라』(슼 9:10). “교회의 골짜기”를 본 구약의 선지자는 없었다. 이에 대해서는 베드로전서 1:10-12에서 잘 설명한다. 초림과 재림이 함께 제시되었다고 해서 두 개의 오심이 동일한 것은 아니며, 예수님께서 거부당하셨음에도 불구하고 초림 때에 왕국이 세워진 것도 아니다.
두 번의 오심을 구분하지 못하여 오류를 범한 두 종류의 사람들이 있다. 첫째는 예수님의 초림 때의 유대인들이다. 그들은 문자적 왕국만을 알고 영적인 왕국은 몰랐다. 둘째는 이 시대에 있는 카톨릭과 개신교인들이다. 그들은 영적인 왕국만 알고 문자적인 왕국은 알지 못한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초림 메시야를 거부했고, 카톨릭과 개신교회는 재림 메시야를 거부할 것이다.
여기서 예수님은 나귀를 타셨다. 이 모습은 우리의 구원을 위해 영적으로 적용할 만한 모습이다. 여기서 나귀는 영적으로 죄인의 모습이다(욥 11:12).
나귀는 묶여 있다(롬 6:16-20).
그는 묶임에서 풀려야 하나 그를 풀려고 할 때 방해하는 자가 있다(막 1:5, 딤후 2:25,26).
그러나 주님께서 그를 필요로 하신다(막 11:3, 행 9:15).
나귀는 문 옆에 있다(막 11:4, 요 10:7).
그리고 그 곳은 길이 갈라지는 곳이다(신 30:19, 막 11:4).
그러나 그는 예수님께 이끌려 왔고(막 11:6, 요 1:42), 옷으로 입혀졌다(막 11:7, 사 61:10).
그리고 주님은 그를 통제하신다(롬 12:1-3).
㉣ 마태복음에서 나귀는 두 마리가 끌려온다. 그러나 마가복음에서는 한 마리의 나귀 새끼만 끌려온다. 이것 또한 모순이 아닌 것은 마가가 사건의 자세한 묘사를 기록한다면 마태는 숫자의 정확성을 기한다는 사실을 기억하면 무리가 없다(마 8:28; 20:30과 막 5:2; 10:46을 비교할 것).
마태복음 21:5 『너희는 시온의 딸에게 말하라. 보라, 너의 왕이 네게 오시나니, 그는 온유하여 나귀와 나귀 새끼인 어린 수나귀 위에 타셨도다.』
스카랴 9:9 『오 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하라. 오 예루살렘의 딸아, 소리지르라. 보라, 네 왕이 네게 오시나니 그는 공의로우시며 구원을 지니셨고, 겸손하시며 나귀를 타시리니 나귀의 새끼인 어린 나귀니라.』
마태복음 21:5은 스카랴 9:9인데, 성령께서는 의도적으로 마태에게서 『공의로우시며 구원을 지니셨고』라는 부분을 제하셨다. 그 이유는 여기에서의 구원은 신약적 의미의 “혼의 구원”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재림하실 때 이스라엘에게 가져올 민족적인 구원이기 때문이다. 스카랴 9:10,11에는 재림 때의 상황이 나와 있다. 이 사건은 분명히 초림 때에 일어날 사건이 아니므로 성령께서는 의도적으로 초림의 상황 속에서 그 부분을 빼놓고 인용하신 것이다. (RSV의 경우는 “구원”을 “승리”로 바꾸었다.)
9) 구약성경 시편 69:21에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위에서 돌아가실 때 사람들이 쓸개즙과 식초를 줄 것이라는 예언을 보게 되는데 이것도 마태복음 27:34에서 성취된다.
『쓸개즙을 탄 식초를 그에게 주어 마시게 하려 하였으나, 주께서 맛을 보신 후 마시려 하지 않으시더라』(34절)
이 구절은 시편 69:21의 성취이다. 『쓸개즙을 탄 식초』는 마가복음 15:23에서 『몰약을 탄 포도주』라고 정의된다. 그러므로 그 식초는 발효된 술(wine)이었다. 우리는 마태복음 26장에서 “새 포도주”를 다루면서 발효된 포도주가 유대인들에게 금해져 있었다는 사실을 다루었다. 더욱이 잠언 31:4에서는 『술을 마시는 것은 왕이 해야 할 것이 아니며, 독주를 마시는 것은 통치자들이 해야 할 것이 아니니』라고 되어 있다. 왕으로서 예수님께서는 죽음의 순간에서도 잠언 31:4을 기억하셨다.
27:34절 새로운 번역본들의 근거가 된 세 개의 가장 변개되고 부주의하게 복사된 필사본들인 바디칸 사본(B), 시내 사본(א ), 칸타브리겐시스 사본(D)은 예수님께서 발효된 술을 마셨다는 것을 입증하려고 『식초』 를 "포도주"로 바꾸었다.
10) 구약성경(출 12:46, 시 34:20)에서는 그리스도께서 돌아가실 때 그분의 뼈가 부러지지 않을 것이라는 예언을 보게 되며 이것은 요한복음 19:33에서 성취되는데 이러한 일은 매우 이례적인 것으로 그 당시에는 십자가에 못박혔던 죄인들의 뼈를 그들의 죽음을 확인하기 위해서 항상 꺾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은 어째서 그리스도의 다리는 꺾지 않았는가? 유대인들의 주된 처형 방법은 돌로 쳐서 죽이는 것이다.
㉠ 『그러나 그들이 예수께 이르러서는 그가 이미 죽은 것을 보고 주의 다리는 꺾지 아니하였으나』(33절). 그분께서는 이미 숨을 거두셨다.
이 구절에서 우리는 이 사실을 아주 주의 깊게 살펴볼 필요가 있다. 여기 33절에서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미 죽은 것』이 확인되었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은 빌라도까지 친히 확인해 보았다. 마가복음 15장을 보라. 『빌라도는 그가 벌써 죽었을까 하고 놀라 백부장을 불러서 그가 죽은 지 오래 되었는가 물으니라. 그가 백부장으로부터 들어 그 일을 알고 난 후 그 시체를 요셉에게 주더라』(막 15:44,45). 성경에 의하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숨을 거두신 것은 30절에서였다. 그렇다면 새 언약(the new testament)이 효력을 발생한 시점은 언제일까? 신약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숨을 거두신 30절에서 그 효력이 발생하기 시작했다.
㉡ 새 언약은 그분의 죽으심과 함께 그 효력이 발생하도록 되어 있었다. 『이런 연유로 그는 새 언약의 중보자이시니, 이는 첫 언약 때에 범죄한 것들을 구속하시려고 죽으심으로써 부르심을 받은 자들로 그 영원한 유업의 약속을 받게 하시려는 것이라. 유언이 있는 곳에는 유언한 자의 죽음도 필연코 따라와야 하리니 유언은 사람이 죽은 후에야 효력이 있으며 유언한 자가 살아 있는 동안에는 전혀 효력이 없느니라』(히 9:15-17). “언약”이라는 의미의 “testament”는 원래 “유언”이라는 뜻을 담고 있다. 유언은 유언자(testator)가 죽어야만 그 효력이 있는 법이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새 언약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함께 그 효력이 발생되었고 그 시점이 바로 요한복음 19:30이다. 새 언약이 무엇인가?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그분을 구주로 영접하면 누구든지 구원받고 영생을 얻게 된다는 것이다. 이 새 언약은 30절에서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숨을 거두심과 함께 효력이 발생했던 것이다.
㉢ 그런데 왜 구약의 예언자는 『주께서 그의 모든 뼈를 간수하사, 그 중에 하나도 부러지지 않게 하시는도다.』(시 34:20)라고 했는가? 유대인들의 주된 처형 방법이 돌로 쳐서 죽이는 것인데도 불구하고 어떤 사람이 십자가에 달려서 처형당했다면 그 확률은 얼마나 되겠는가? 게다가 그의 뼈는 하나도 부러지지 않아야 한다. 당신은 그 확률을 짐작할 수 있겠는가?
11) 구약성경의 시편 22:1에서는 그리스도께서 다음과 같이 울부짖으실 것이 예언되어 있다.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주께서는 나를 버리셨나이까?』 그리고 이 예언은 마가복음 15:34에서 성취되었다.
우리는 시편 16:10에서 다음과 같은 예언을 읽게 된다. 『이는 주께서 내 혼을 지옥에 버려 두지 아니하시며, 주의 거룩하신 분으로 썩어짐을 보지 않게 하실 것임이니이다.』 그리고 베드로와 500명의 증인들은 이것이 사실임을 확인하게 된다(행 1:3). 당신은 “그것은 단지 그들이 날조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라고 할 것이다. 그러나 정말 그런가? 오백 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모두 거짓말을 했다는 것인가? 당신은 법정에서도 그들이 단지 거짓말을 했다고 몰아붙임으로 오백 명의 증인들을 무효화시킬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당신은 미국의 재판에 관한 다음과 같은 법률에 대해서 알고 있는가? 만약 직접 목격한 증인들이 그들이 직접 보고 직접 참여했던 어떤 일을 증언했고 그것이 기록됐다면 그것은 증인들이 모두 거짓말쟁이이거나 그 증언의 기록 속에 어떤 오류가 발견될 때까지 절대적으로 무오한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이 세상의 모든 “과학자”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뼛조각을 찾으려고 노력하는 이유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지 않았다는 유일한 증거는 그분의 뼈조각을 하나라도 찾아내는 것이다.
그들은 뼈를 찾아서 20세기의 시간을 보낸 것이다. 이것은 마치 그들이 달을 조사하여 달에서 어떠한 생명의 흔적을 찾아냄으로써 다윈의 이론을 정당화시키려 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그들은 창세기 1장이 틀리다는 것을 입증하려고 벌써 2억 5천만 달러를 낭비해야만 했다. 왜냐하면 만약 창세기 1,2,3장이 사실이라면 그들은 꼭 거듭나야만 하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들은 자신들이 지금 왜 대학에 다니고 있는지 생각해 보지도 않고 비싼 등록금만 내면서 대학에 다니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
12) 구약성경에는 그리스도의 사역에 대해서 수십 개의 예언을 하고 있다. 구약성경에는 그리스도를 대적해서 거짓 증거를 할 사람인 적그리스도에 대해서도 예언을 하고 있다. 구약성경에는 군인들이 그리스도의 옷을 제비뽑는 것에 대한 예언 외에도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위에서 “내가 목마르다”라고 소리치시는 예언까지 담고 있다.
물론 구약성경에서는 이런 것들 외에도 그리스도의 죽음에 대한 다음과 같은 예언도 하고 있다. 『개들이 나를 에워싸고 악인의 무리들이 나를 둘러쌌으며 그들이 내 손과 내 발을 찔렀나이다』(시 22:16).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실 때 『...그들은 그들이 찔렀던 나를 쳐다볼 것이며...』(슼 12:10)라는 예언이 성취될 것이다.
13) 우리는 동정녀 탄생에 관해서 『여자가 남자를 두르리라.』(렘 31:22)는 것을 읽는다. 사실은 여자에게는 어떠한 씨도 없는데 말이다. 물론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여자의 씨로 오실 것에 관한 예언이다(창 3:15).
창 3:15, 『내가 너와 여자 사이에, 또 네 씨와 그녀의 씨 사이에 적의를 두리니, 그녀의 씨는 너의 머리를 부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부술 것이라.” 하시고』
㉠ 여자의 씨 vs. 뱀의 씨
하나님께서는 뱀에게는 아무런 질문을 하지 않으셨다. 하나님께서는 이 “신사양반”을 전에 다루신 적이 있었기 때문이었다(창세기 6:1- 6을 보시오). (누군가 말하기를 만약 뱀이 다른 누군가를 비난할 수 있었더라면 뱀은 하나님을 비난하고 나섰을 것이라고 했다). “가축”과 관련해서는 창세기 3:1의 주석을 보기 바란다. “네 배로 다닐 것이며 네 평생토록 흙을 먹을지니라” 이 예언은 이사야 65:25에서도 되풀이되고 있는데 그곳의 문맥은 천년왕국이다.
“빛의 천사”와 기어다니는 뱀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 것인가? 두 가지의 가능성이 있을 수 있다. 사탄이 실제의 뱀을 통하여 이브에게 말을 걸었거나 (이것은 그리 가능성이 높은 것 같지 않다) 아니면 뱀은 이브에게 말을 건넨 존재의 예표(type)일 것이다. 후자의 경우가 가능성은 더 높지만 이 경우는 만약 하나님의 저주의 말씀이 빛의 천사에게 해당되는 것이라면 14절 말씀을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가 문제로 남는다. (14절은 실제적인 동물로서의 뱀에 관한 말씀인 것 같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사탄은 “우는 사자”처럼(벧전 5) 돌아다니고 있지 뱀처럼 기어다니고 있지 않으며 그의 활동영역도 이 지구상에서 흙을 먹는 것에 국한되지 않기 때문이다.
㉡ 15절 말씀은 “메시야 예언들”(즉 오실 메시야에 관한 예언들)로 알려진 일련의 성경구절들 중 첫번째 것이라고 평가되고 있다. 그러나 좀더 정확히 말하자면 창세기 1:20절(다섯째 날에 나타나는 “생명”)이 최초의 메시야 구절이 될 것이다. 왜냐하면 이 구절은 그리스도의 초림시기를 보여주고 있으며 이 초림은 그분의 죽으심(창 5:5)과 관련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성경을 “깊이있게 연구”하는 것을 싫어하는 사람들의 머리로서 이런 수준의 계시는 감당할 수 없을 것이다. 그래서 대부분의 주석가들은 창세기 3:15절을 최초의 메시야 예언 구절로 보고 있다. 창세기 3:15절의 핵심은 다음과 같다.
1. 여자와 뱀은 잘 지내지 못할 것이다.
2. 여자는 씨를 갖게 될텐데 그 씨는 “it”로서 중성명사로 되어있다(영어성경에 그렇게 되어있음).
3. 뱀은 여인의 씨와 적대관계를 갖게 될 씨를 갖게 될 것이다.
4. 뱀은 여자의 씨의 발꿈치를 부술 것이다.
5. 여자의 씨는 뱀의 머리를 부술 것이다.
㉢ 뱀은 여자의 씨의 발꿈치를 부술 것이다. 이 구절이 적용될 수 있는 유일한 사건은 갈보리 십자가이다. 마귀의 권세는 갈보리 이후 어느 정도 축소되었으며(요 14:30; 16:11, 골 2:14,15), 그리고 재림시에는 천년동안 소멸될 것이다. 그는 천년왕국이 끝날 무렵에 조차도 결코 완전히 권세를 회복하지 못하게 될 것이다(계시록 20장 주석을 볼것).
14) 우리는 구약성경에서 그리스도께서는 희생제물의 어린 양과 같다는 것을 들었으며 출애굽기 12장에서는 이스라엘 집은 “어린 양”을 잡아야 살 수 있다는 것을 보게 되는데(출 12:4) 그것은 곧 “너희의 어린 양”(출 12:5)으로 불리며 희생제에서는 어린 양이 요구된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러나 오직 “한 마리”의 양만이 언급되는 것에 주목하기 바란다. 성경은 『어린 양 한(a) 마리를 취할지니』(출 12:3)라고 하는데 그것은 바로 “the Lamb”인 것이다. 그리고 그 양은 바로 당신을 위하여(출 12:5 - your Lamb) 잡은 것이기에 유월절 양이 되시는 그리스도의 피가 당신에게 효과가 있는 것이다. 당신은 이 “a”(3절)와 “the”(4절)와 “your”(5절)을 어떻게 설명할 셈인가?
당신은 창세기 22장의 그의 아버지가 늙어서 낳은 독자(2절)가 그의 등에 나무를 지고 언덕을 오르는 모습(6절)에 대해서 -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받으실 고난의 모형인 것이다 -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15) 당신은 출애굽기 12:7에서 어린 양의 피를 문의 양편에 바르라는 것과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위에서 돌아가실 때 양옆에 못박혔던 구원받지 못한 두 강도가 구원의 문이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피를 흘리시며 그들의 중앙에 못박히셨다는 것을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 당신은 나에게 어떤 사람이 태어나기 400-2000년 사이에 예언된 48가지의 예언들이 그 사람에게 어떻게 해서 일어날 수 있는가를 설명해 줄 수 있겠는가? 당신은 그것을 논리적으로 그리고 과학적으로 증명할 수 있겠는가? 만약 당신이 그렇게 할 수 있다면 나는 내 성경을 쓰레기통에 던져 버릴 수도 있다. 그러나 당신이 입증된 과학적인 증거로 증명하기 전에는 나에게 당신의 이교적인 망상을 강요하지 말라. 우리 거듭난 사람들은 어떤 사람의 상상이나 망상이나 “종교적인 체험” 따위는 전혀 신뢰하지 않는다. 우리 거듭난 사람들은 과학자들이 컴퓨터가 무엇인지도 모를 때부터 컴퓨터보다 훨씬 더 정확한 과학적인 사실들을 믿고 있는 것이다.
㉡ 한 사람, 예수 그리스도에게 성취된 48가지의 예언들이 있다. 만약 당신이 이것들로도 충분하지 않다면 여기 구약성경 창세기 37장과 50장 사이에 등장하는 요셉과 예수 그리스도의 지상생애 동안의 삶을 비교했을 때 정확히 일치하는 152개의 사항들이 있다. 그는 목자였고, 형제들에게 미움을 받았으며, 형제들로부터 시기를 받았고, 형제들에게 배반을 당했으며, 형제들에 의해서 팔렸고, 그것도 형제들에 의해서 이방인들에게 팔렸으며, 형제들은 그 값으로 은을 받았고, 그래서 그는 감옥에 갇혔었으며, 감옥에서 새 포도주와 빵과 연관이 있으며, 같이 감옥에 갇혔던 두 명의 죄수 중에 한 명은 죽임을 당했고 다른 한 명은 살게 되었다.
㉢ 어떤 사람이 태어나기도 전에 제시한 152가지의 성취된 예언과 앞으로 성취될 500가지가 넘는 예언을 기록한 책에 대해서 설명해 보라! 할 수 있겠는가?
2.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사실인가 ?
1) 부활의 증거들이 있다.
㉠ 빈 무덤이다. 천사는 누가복음 24:6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그분은 여기에 계시지 않고 살아나셨느니라...』 마태복음 28:6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그분은 여기에 계시지 않고 말씀하셨던 대로 살아나셨느니라. 와서 주께서 누우셨던 자리를 보라.』 『들어가 보니 주 예수의 시체가 보이지 아니하므로』(눅 24:3). 우리는 천사들의 증거를 가지고 있다. 누가복음 24:5,6에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구절을 볼 수 있다. 『그들이 무서워서 땅에 엎드려 있을 때에, 두 사람이 말하기를 “어찌하여 너희는 살아 계신 분을 죽은 자들 가운데서 찾느냐? 그분은 여기에 계시지 않고 살아나셨느니라. 주께서 갈릴리에 계셨을 때에 너희에게 어떻게 말씀하셨나 기억하라.』
㉡ 그리스도가 부활하신 후에 그분과 대화한 사람들이 있다.
베드로와 마리아, 클레오파스와 도마가 있다. 예수 그리스도는 먹고 마셨으며 그들에게 자신의 상처를 보여 주시기도 하셨다(눅 24장). 또 한꺼번에 오백 명에게 자신의 모습을 보여 주셨다(고전 15:6). 주님은 후에 스테판이 순교할 때에 자신을 보이셨으며(행 7:56), 다마스커스의 도상에서 바울에게도 보이셨다(행 9:5). 그때 바울은 말하기를 『주여, 당신은 누구시니이까?』라고 물었다. 주님은 그에게 말씀하시기를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라. 가시채를 걷어차는 것이 네게 고통이라.』
㉢ 우리는 <킹제임스성경>의 사도행전 1:3에서 보는 것처럼, 그분이 살아계신 구세주임을 증명하는 『여러 가지 무오한 증거들』이 있다.
현대의 배교한 역본들, 특히 NASV와 NIV를 비롯한 여러 역본들은 ‘무오한’(infallible)이란 말을 ‘많은’(many)이란 말로 바꾸어 버렸다. 그러나 정확한 역본인 <킹제임스성경>은 “여러 가지 무오한” 증거라고 말하고 있다.
옛날에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믿지 않는 두 변호사가 부활의 증거들을 조사해 달라는 부탁을 받았다. 한 목사님이 그들에게 마태, 마가, 누가, 요한복음에 나오는 부활의 기사를 읽도록 했다. 그리고 바울의 회심을 읽으라고 권고했다. 이 두 변호사는 그 때부터 약 3개월간 이 두 문제를 열심히 조사해 보았다. 그들은 길에서도 서로서로 피해 다니면서 자신들의 연구를 거듭했다. 그들은 자신들이 직접 조사한 연구와 자료를 토대로 예수 그리스도를 자신들의 개인적인 구세주로 영접하기로 결정했다. 3개월 후에 둘 다 그리스도인이 되었다.
부활의 증거는 이 나라의 모든 법정에서도 인정을 받는다. 미국의 법률에 따르면 만약 증인이 증언을 하고 그 증언에 동의하면 그 증언은 기록된 문서로 남으며 이 문서를 분명히 반박할 수 있는 증거가 나오기까지는 취소되거나 폐기될 수 없다. 예수 그리스도가 부활한 이래로 예수 그리스도가 죽은 자들로부터 부활하지 않았다는 결정적인 증거가 나오지 않은 관계로 미국의 현행 법정에 이 문제를 상정해도 여전히 부활은 유효한 것이다.
㉣ 우선 그 몸은 살과 뼈를 가지고 있었다(눅 24:39). 그 몸은 영광스러운 몸이었다(빌 3:21). 그 몸은 불멸의 몸이요, 결코 죽지 않는 몸이었다(롬 6:9).
그 몸은 영적인 몸이었다(고전 15:44). 그 몸 안에는 피가 없었으며 영광스런 살과 뼈만 있었다(고전 15:39-41, 눅 24:39). 이 영적인 몸은 두꺼운 벽을 통과할 수 있었으며(요 20:19), 마음대로 보였다가 사라질 수도 있었다(눅 24장). 그리스도인들이 입게 될 이 부활한 몸은 죄 없고 완전한 33세 반의 피 없는 남성의 몸이다(롬 8:29).
그리스도는 말씀하시기를 『나의 손과 나의 발을 보라, 바로 나니라. 나를 만져 보라. 영은 살과 뼈가 없지만 너희가 보는 바와 같이 나는 있느니라.”고 하시고』(눅 24:39), 바울은 말하기를 『우리의 천한 몸을 그분의 영광스러운 몸같이 변모시키리라』(빌 3:21). 『육신의 타고난 몸으로 심겨서 영적인 몸으로 일으켜지느니라』(고전 15:44). 『혈과 육은 하나님의 나라를 상속받을 수 없으며 썩을 것은 썩지 아니하는 것을 상속받을 수 없느니라』(고전 15:50).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들로부터 일으켜지셨을 때, 우리는 요한복음 20:19에 기록된 대로 주님께서 다음과 같은 말씀을 하신 것을 볼 수 있다. 『그리하여 그 주의 첫날, 그 날 저녁에 제자들이 모인 곳에는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문들이 잠겨 있었는데 예수께서 오셔서 그 가운데 서서 그들에게 말씀하시기를 “너희에게 평강이 있으라.”고 하시니라.』
위의 말씀은 우리에게 부활한 몸이 어떠한 몸인가를 잘 보여 준다. 여자는 남자로부터 나왔으며 여자의 이름은 ‘이브’가 아니라 ‘아담’이었으므로(창 5:1-3) 구원받은 여자는 그리스도의 형상대로 변모되어 33세의 죄 없는 남성의 몸을 입게 된다. 우리는 로마서 8:29을 통해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의 아들의 형상과 일치시키려고 예정해 놓으셨음을 알 수 있다. 『사랑하는 자들아, 이제는 우리(여자 성도들도 포함된다)가 하나님의 아들들이라. 우리가 어떻게 될 것인지는 아직 나타나지 아니하였으나 그가 나타나시면 우리가 그와 같이 되리라는 것을 아노니, 이는 우리가 그분 그대로 그분을 볼 것이기 때문이라』(요일 3:2).
우리의 부활할 몸이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몸과 일치하는 것은 그분이 많은 형제들 가운데 맏아들이 되시기 때문이며(롬 8:29), 이 몸은 33세의 죄 없는 남성의 모습인 것이다. 그래서 하늘에서 그들은 시집도 장가도 가지 아니하고 하늘에 있는 하나님의 천사들과 같이 된다(마 22:30)고 하신 것이다. 성경에 있는 모든 천사들은 33세의 남성이다. 구약이나 신약에서 중성인 천사는 없으며 창세기에서 요한계시록까지 날개를 가진 천사도 없다. 이 부문에 대해서는 천사론과 마귀론에서 더 자세히 다룰 것이다. 성경에 있는 천사론과 마귀론은 지난 300년간 근본주의 학자들이 쓴 책에서 볼 수 있는 천사론과 마귀론과는 뚜렷한 차이를 보여 줄 것이다.
예수님은 어떻게 죽은 자로부터 부활했는가? 그는 아버지의 능력(행 2:24)과 그리스도 자신의 능력(요 2:19)과 성령의 능력(벧전 3:18)으로 일어나셨다.
2) 부활의 결과는 무엇인가 ?
㉠ 부활은 하나님의 존재를 분명히 증거했다.
만약 하나님이 없다면 그리스도께서 어떻게 부활했겠는가? 살아 계신 하나님이 부활시켰기 때문에 주님은 부활한 것이다. 하늘에 하나님이 살아 계신다면 그분은 죽은 자를 살릴 수 있다. 만약 하늘에 하나님이 계신다면 이 땅에 있는 모든 사람들은 이 세상에서 살았던 삶에 대해 그분께 직접 설명해야 한다. 죽은 자들이 하나님 앞에 서서 재판을 받을 수 있는 것은 부활을 통해서이다. 이것이 모든 무신론 철학자들이 육체의 부활을 배척하는 이유이다. 플라톤, 소크라테스, 데모크리토스, 프로타고라스와 모든 철학자들이 육체의 부활을 부정했다. 그들은 자신들의 오만하고 이기적인 탐욕, 부도덕한 생활에 대해 설명할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성경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 『그는 현명한 자들로 그들의 간계에 빠지게 하시며...』(욥 5:13). 『주께서는 현명한 자들의 생각을 아시는데 그들의 생각은 헛된 것이라』(고전 3:20). 『하나님의 지혜에 있어서는 세상이 그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였기에 하나님께서 복음 전파의 어리석음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느니라』(고전 1:21). 하나님이 계시다면 심판도 있는 것이다. 심판이 있다면 육체의 부활도 있다.
㉡ 부활은 그리스도의 신성을 증명한다.
바울은 말하기를 예수 그리스도는 『...죽은 자들로부터 부활하여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선포되셨으니』(롬 1:4)라고 말했다. 부활은 이미 이루어진 과거의 사실이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죽으실 때 구원을 완성하셨으며, 부활하실 때에 이것을 확정하셨다. 진정한 구원은 “어떤 일을 이루라.”에 있지 않고 “이미 이루었다.”는 사실에 기초한다. 행위로 지옥에 도달하려고 노력하는 모든 사람들은 마치 하늘 나라에 갈 것처럼 행세한다 그러나 그들은 결코 구원받지 못했다. 야고보서 2장, 사도행전 2장, 히브리서 6장을 붙들고서 하늘 나라에 가려고 애쓰는 사람들은 바보 천치나 다름없다. 하나님의 구원과 인간의 구원과의 차이는 매우 단순하다. 인간은 스스로를 의롭게 되기 위해 애쓰며, 늘 하나님이 행하신 일들을 정면으로 배척해 버린다. 성경적 구원이란 당신이 그리스도께서 당신을 대신해서 행하신 일들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은 구원을 얻기 위해서 일하지 않는다. 그리스도인은 구원에 머물기 위해서 일하지도 않는다. 그리스도인은 구원받았기 때문에 일한다.
㉢ 부활은 모든 사람이 부활할 것을 보장한다. 의인은 생명의 부활로, 악인은 심판의 부활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부활은 예수께서 요한복음 14:3에서 “내가 다시 와서...”라고 말씀하셨을 때 바로 이 약속을 성취하시기 이전 단계인 것이다.
3. 예수님은 적극적으로 중보사역을 담당하신다.
1) 히브리서 7:25은 『그러므로 그는 또한 자기를 통하여 하나님께 나아오는 자들을 끝까지 구원하실 수 있으니, 이는 그가 항상 살아 계셔 그들을 위하여 중보하심이라.』고 말씀하고 있고, 히브리서 9:24에는 『이는 그리스도께서 실물의 모형인 손으로 만든 성소에 들어가지 아니하시고, 바로 그 하늘 자체에 들어가셔서 우리를 위하여 하나님의 면전에 지금 나타나 계시기 때문이라.』고 말씀하고 있다.
또 그리스도의 몸 안에 내주하고 계시는 성령께서도 중보 사역을 하고 계심을 로마서 8:26을 통해 알 수 있다. 『...이는 우리가 마땅히 기도해야 할 것을 알지 못하나 성령께서 친히 말할 수 없는 신음으로 우리를 위하여 중보하시기 때문이라.』 오늘날 주 예수 그리스도는 승천하셔서 하늘에서 성도들을 위해서 중보하고 계신다. 그분은 제사장으로서 죄인들을 대신해서 의로우신 하나님께 중보하고 계신다.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자도 한 분이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시라』(딤전 2:5).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중보자는 한 분 예수 그리스도(마리아가 아님)이시다. 레위기 4:16에 따르면 제사장은 주님께 피의 희생제물을 갖다 바칠 수 있다. 욥의 소망은 중보자를 얻는 것이었다. 『우리 사이에 중재인도 없으니 우리 둘에 손을 얹을 자도 없도다』(욥 9:33). 욥이 원했던 것은 법정에서 자신을 대신해서 말해 줄 법정 대리인과 같은 사람을 얻는 것이었다. 욥은 법정에서 자신을 대신해서 재판장에게 변호해 줄 어떤 사람을 원했다. 그는 재판장이 법정에서 자기를 대리할 누군가를 임명하기를 원했다. 그렇게 되면 그가 반대측과 욥 둘 위에 손을 얹어 중재할 수 있기 때문이다.
2)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사람이 아무도 없느니라』(요 14:6).
우리는 때때로 베들레헴에서 성육신하신 주님께 감사를 드린다. 또 갈보리에서 우리를 대신해 죽으신 그분께 감사한다. 하지만 더욱 감사드려야 할 한 가지가 바로 현재도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 앉으셔서 우리를 대신해서 기도하고 계시는 그분의 중보 사역이다. 우리의 대제사장 되신 그분은 날마다 우리를 대신해서 하나님께 기도하고 계신다. 성경은 우리에게 다음과 같이 말해 주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은혜의 보좌로 담대히 나아가자. 이는 우리가 자비를 얻고 필요한 때에 도우시는 은혜를 발견하기 위함이라』(히 4:6).
그리스도의 속죄 사역은 이 땅에서 완성되었다. 십자가 위에서 주님은 『다 이루었다.』고 말씀하셨다(요 19:30). 다시 말해서 우리의 구원은 이미 완료되었다. 당신은 거기에 아무것도 더할 필요가 없다.
죄는 십자가 위에서 의롭게 처리되었으며, 예수님은 다시 죄를 위해서 죽지 않으신다. 히브리서 9:24-28에서 이 부분을 명확하게 밝히고 계시다. 『이는 그리스도께서 실물의 모형인 손으로 만든 성소에 들어가지 아니하시고 바로 그 하늘 자체에 들어가셔서 우리를 위하여 하나님의 면전에 지금 나타나 계시기 때문이라. 뿐만 아니라 대제사장이 해마다 다른 것들의 피를 가지고 거룩한 곳에 들어가는 것처럼 여러 번 자신을 드릴 필요가 없으니, 그리하면 세상의 기초가 놓인 이래로 그가 여러 번 고난을 당하셨어야 될 것이지만 이제 그는 자신을 희생제물로 드려 죄를 없애시려고 세상 끝에 한 번 나타나셨느니라. 한 번 죽는 것은 사람들에게 정해진 것이고 그 뒤에 심판이 정해진 것같이 그리스도께서도 많은 사람의 죄들을 담당하시려고 한 번 드려지셨고, 두 번째는 자기를 바라는 자들을 구원에 이르게 하시려고 죄 없이 나타나시리라.』
3)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은 단번(once for all)에 드려진 것이며, 영원히 드려진 것이며, 결코 반복되거나 되풀이되지 않는다. 카톨릭에서처럼 매주 일요일 11시에 미사를 드리며 갈보리의 희생제를 반복하는 것은 성령을 모독하는 것이며, 성경을 모독하는 것이다.
영국 국교회가 제정한 39개항의 규례 31조에는 매우 흥미 있는 내용이 있다. “로마카톨릭 교회의 미사에 대한 교리는 매우 위험한 기만과 신성 모독적인 사기”라고 규정하고 있다. 오늘날 사람들을 위험한 기만과 신성 모독적인 사기극의 장본인인 로마카톨릭으로 이끌고 있는 은사주의 운동 또한 단호히 배격해야 할 것이다
우리에겐 대제사장이 있지만 이 땅 위에 계시지 않는다. 그분은 영광 가운데 올라가셨다. 그리스도는 대제사장이 되실 조건을 충족시키셨다. 그래서 그분은 사람들 가운데서 들려 올라가신 것이다. 히브리서 5:1은 이 점을 분명히 말씀하고 계신다. 『사람들 중에서 택함을 받은 대제사장마다 사람들을 위하여 임명을 받아 하나님께 속한 일들을 하게 되나니, 이는 그로 예물과 속죄를 위한 희생제물을 드리게 하려는 것이라.』 이 말씀대로 그분은 택함을 받아 그 일을 수행하도록 임명되었다.
4) 그리스도 예수는 자신을 임명하신 하나님께 신실하셨다(히 3:2).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에 의해 부르심을 받아 그 직무를 수행하신다(히 5:4). 그분은 하나님과 관련된 일들을 하셨다(히 2:17). 이는 자비롭고 신실한 대제사장이 되셔서 백성의 죄들을 위해 화해를 이루기 위함이다. 주님은 죄들로 인해 예물과 희생제물을 드리셨다. 히브리서 5:1대로 예수 그리스도는 자신을 제물과 예물로 내어 놓으셨다. 그 제물은 한 번 영원히 드려졌으며 최종적이며 영원한 속죄였다(히 10:8-12).
이, 그리스도는 하나님이시기에 영원히 살아서 우리를 위해 중보하신다. 이 점에서 예수님은 구약에 나와 있는 또 다른 유명한 제사장 직분의 모형을 따르신 바 그것은 곧 멜케세덱의 계열을 따르신 것이다. 이 멜키세덱은 영원한 제사장이다(히 5:6).
4. 어떻게 구원을 받나요 ?
1) 『...누구든지 그를 영접한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요 1:12)
㉠ 여기 요한복음 1:12 말씀은 『누구든지 그를 영접한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라고 분명하게 못박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하기만 하면 『누구든지』 하나님의 아들들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당신이 거듭나 구원받고 하나님의 아들이 되느냐 여부는 당신의 뜻에 따라 마음대로 되는 일은 결코 아니지만, 당신이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그분을 당신의 구주로 영접하기만 하면, 가만히 있어도 하나님께서는 당신을 구원하시고 아들로 삼아 주시는 것이다.
『그러나 누구든지 그를 영접한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즉 그의 이름을 믿는 사람들에게니라』(12절). 꼭 기억해 두어야 할 위대한 구절이다. 이것은 신약적 구원에 대한 핵심적인 내용을 담고 있는 구절로서 구원에 대해서 부질없이 이러쿵 저러쿵 말하는 모든 쓸데없는 논쟁을 일시에 잠재워 버리는 말씀이다. 당신이 어떻게 구원을 받았건, 당신이 무엇을 어떻게 믿었건, 당신이 물침례를 받았건 안 받았건, 당신이 그분의 이름을 믿고 그분을 영접하지 아니하였으면 당신은 여러 소리 할 것 없이 구원받지 못한 사람이다. 누가 뭐라고 당신을 속이고, 그릇되게 가르치고, 받았던 구원을 다시 상실할 수도 있다고 헛소리를 해대더라도, 중요한 것은 당신이 그분의 이름을 믿고 그분을 구주로 영접하였느냐 하는 것이고, 그분 안에서 그분을 신뢰하며 살고 있느냐 하는 것이다.
㉡ 『누구든지 그를 영접한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12절).
성경은 누가 무슨 “진리를 받아들인 사람에게는”이라고 말하지 않는다는 데에 주목하라. 성경은 『그를 영접한 사람들에게는』이라고 분명하게 말씀한다. 그 “무엇”이 아니라 누구인가 “사람”을 받아들인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아들들이 되는 권세를 주셨다고 말씀한다. 진리도 아니고, 무슨 메시지도 아니며, 어떤 교리나 종교나 성사나 무슨 교회를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그를,” 즉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여야만 구원을 받을 수 있다. 이처럼 구원은 “사람”이라는 토대에 근거한다. 『누구든지 그를 영접한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라는 말씀을 잊지 말라. 당신이 누구이며, 어떤 사람이냐에 상관없이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기만 하면, 하나님의 권세가 당신에게 작용하여 당신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아들이 되게 하신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는 것이 그분을 “영접”하는 것인가? 12절 안에 그 대답이 나와 있다. 『즉 그의 이름을 믿는』 것을 말한다. 『그의 이름을 믿는』다는 것은 곧 그분을 당신의 구세주로 받아들이고 절대적으로 신뢰하는 가운데 그분께 모든 것을 맡긴다는 것을 의미한다. 영어 <킹제임스성경>은 이 구절에서 “믿는다.”는 뜻을 나타내는 말을 단순히 “believe”라는 한 단어로 표현하지 않고 “believe on”이라는 숙어로 표현하여 “의존하다,” “신뢰하다.”의 의미를 함께 함축하고 있음을 유념하라. 당신이 좋은 의사를 진정으로 믿고 병을 고치도록 당신의 몸을 내맡기느냐, 그렇지 않느냐 하는 것은 단지 당신이 그 의사를 “신뢰”하고 모든 것을 그 의사에게 “의존”하느냐, 아니냐의 차이다. 단순히 “믿는 것”과 “신뢰하는 것”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을 수 있다.
2) 신약 시대에 살고 있는 당신이 구원받기 위해 할 일은 이처럼 간단하고 쉽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구주이심을 입으로 시인하되 부활의 능력으로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분이심을 마음으로 믿고, 또 마음으로 믿되 입으로 시인하기만 하면 된다.
㉠ 『네가 네 입으로 주 예수를 시인하고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들로부터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받으리라』(롬 10:9).
신약적 구원 체계를 설명하고 있는 지극히 간명한 서술이지만, 이것을 지극히 분명하고도 알아듣기 쉽게 천명하고 있는 위대한 구절이다.
『이는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고백하여 구원에 이르기 때문이라』(10절).
머리가 아닌 『마음으로 믿어』 당신은 의롭게 되고 입으로 고백하여 구원받는다. 머리로만 믿으면 어떤 사실을 알고는 있으되 완전히 신뢰하고 자신을 맡기지는 못한다. 그러나 마음으로 믿으면 무엇을 알 뿐만 아니라 그것을 온전히 신뢰하고 의지하며 당신 자신을 맡기게 된다. 당신이 자동차에 안심하고 몸을 싣는 것은 당신이 그 자동차를 마음으로 믿기 때문이다. 당신이 엘리베이터를 마음으로 믿지 않는다면 절대로 그 엘리베이터에 발을 들여놓으려고 하지 않을 것이다.
사람은 누구나 그리스도가 죽으셨음을 믿을 수 있고, 그분이 죽은 자들로부터 일으켜지셨음을 믿을 수 있으며, 그분의 동정녀 탄생과 그분의 재림까지도 얼마든지 믿을 수 있고, 산타클로스가 굴뚝을 타고 온다든지, 그리스도가 말채나무에 매달려 죽으셨다든지, 마리아가 평생 동안 동정녀였다든지, 아무튼 별의별 것들을 다 믿을 수는 있지만, 예수 그리스도가 당신의 구원을 위해 죽으셨음을 마음으로 믿어 그분께 당신 자신을 온전히 맡겨드릴 수가 없다면 당신은 여전히 지옥에 갈 수밖에 없다. 그분을 믿지 않고는 도저히 지옥을 면할 길이 없다는 것을 진정으로 깨닫게 된다면 당신은 그분을 머리로가 아니라 마음으로 믿을 수밖에 없게 될 것이다. 이 세상에 지옥에서 영원토록 불타기를 바라는 자가 어디 있겠는가? 이것은 생각하면 할수록 끔찍한 일이다.
무슨 일이 있어도 이것만은 모면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런데 이것을 모면할 수 있는 길은 딱 한 가지뿐이다. 그것이 곧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그분을 당신의 구주로 영접하는 일이다. 그렇다면, 그분께 당신을 통째로 맡기지 못할 이유가 뭐란 말인가? 이렇게 생각하는 순간 당신은 그분을 마음으로 믿고 입으로 그분이 당신의 구주이심을 고백하게 된다. 그리고 구원받게 되는 것이다.
입은 마음의 출구다. 입은 당신의 마음을 말한다. 무엇인가를 마음으로 믿는다는 것은 그 무엇이 어떠하다고 여기고 “신뢰하는 것”을 말한다. 누가 그리스도를 “믿는다”(believe)고 하면서 여전히 자기 행위에 미련을 갖고 있다면 그것은 주님을 마음으로 믿는 것, 즉 신뢰하는 것(trust)이 아니다. 그러니까, 이 경우 당신의 믿음은 거짓 믿음이다. 종교는 거짓 믿음에서 나온다.
㉡ 입의 고백은 마음으로 믿을 때 나타나는 일반적인 현상을 의미할 뿐 반드시 입의 고백이 반드시 믿음의 증거 요소가 되는 것은 아니다. 입으로 고백하지 못하는 벙어리는 마음으로만 믿어도 여전히 구원을 받는다.
말하거나 글로 쓰거나 읽을 수 없더라도 마음으로 믿기만 하면 구원받고 지옥에 가지 않는다. 벙어리가 아니더라도 마음으로 믿는 것을 입으로 말하지 않거나 말할 수 없는 경우도 있다. 마음으로 믿으면서 입으로 고백하지 않는다고 해서 구원받지 못한 것은 아니라는 예가 요한복음 12장에 나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급관원 중에서도 많은 자가 주를 믿었으나 바리새인들 때문에 그들이 주를 시인하지 못하였으니, 이는 그들이 회당에서 출회당하지 않기 위함이라』(요 12:42). 이처럼 마음으로는 믿으면서도 입으로 고백하지 못한 사람들이 한둘이 아니라 『많은 자』였다고 성경은 기술하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특수한 상황이었다. 이들이 입으로 주를 시인하지 못했다고 해서 그들이 구원받지 못했던 것은 아니었으되, 이처럼 마음으로 믿는 바를 일부러 마음속에 꼭꼭 숨겨 둔다는 것은 그리스도인에게 있어 일반적인 현상은 아니다.
그러나 온갖 죄들과 죽음으로부터 벗어나 영원한 생명을 얻고 지옥에 가지 않게 된 사람이 가령, “내가 구원받았다고 해서 무엇 때문에 사람들로부터 온갖 모욕과 비방과 박해를 받아야 한단 말인가? 마음속으로 믿고 있으면 됐지 겉으로 티를 낼 필요가 무엇이란 말인가? 입을 열어 겉으로 드러내지 않고도 장미처럼 은은히 향기를 풍기면 될 것 아닌가?”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없으란 법은 없다. 이런 사람들이 입으로 고백하지 않았다고 해서 그가 구원받지 못한 사람이라고 단언할 수는 없지만, 신실한 그리스도인이라면 이래서는 안 되는 것이다.
/출처ⓒ† : http://cafe.daum.net/cgsbo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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