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신학

수도원(동방수도원과 서방수도원)

하나님아들 2022. 10. 2. 21:38

수도원(동방수도원과 서방수도원)

 

수도원 단체

 

 

1. 수도원제도의 발생과 근원

수도원 운동은 동방수도원과 서방수도원으로 나눌 수 있다. 동방수도원의 대표적인 인물은 안토니우스가 있으며 서방수도원의 대표적인 인물은 베네딕트가 있다.

 

동방수도원은 약 250년경에 더베의 바울과 안토니우스가 애굽에서 시작하여 전 로마제국, 팔레스타인, 수리아, 소아시아, 유럽으로 확산되었다. 많은 사람들이 바울과 안토니우스를 본받았다. 동방에서는 각자 자기의 동굴과 통나무집이나 기둥 위에서 살았다. 세상과는 격리된 지극한 금욕주의를 추구 함께 사는 공동체적인 생활보다는 사막에서 개인적 고행과 명상 기도생활을 강조했다.

 

초기 그리스도교 수행자들이 생기게 된 것은 3세기에 벌어진 이교도들의 그리스도교 박해와 관련이 있다. 네압볼리의 주교를 역임한 카에르몬 같은 이집트인들과 데베 출신인 바울 등은 이교도 관리들의 핍박을 피해 사막으로 피신했다. 그곳에서 속세의 짐을 벗어나 자유와 고독이 주는 행복감을 체험한 그들은 박해의 시기가 끝난 뒤에도 계속 고독한 생활을 추구하기로 결심했다.

 

유럽에서는 수도원이라는 사회를 만들어 일하는 시간과 수도를 하는 시간을 나누어 생활했다. 수가 매우 많아지자 수녀 사이에 많은 계급이 생겼다. 이들의 목적은 세속과 분리하여 거룩한 생활을 하기 위함이었다. 유럽의 수도사들은 수도원에서 살았으며 중세시대 교회를 위하여 문학, 교육, 농업 등 많은 일을 했다 그러나 부유해지자 매우 부도덕해졌다.

 

서방수도원은 수도원 규율을 체계화하였는데 이것은 빠른 속도로 로마를 중심으로 한 서방교화에 퍼져나갔다. 베네딕트 규율은 가장 권위 있는 수도 법칙을 보여준다. 많은 호응을 얻은 서방 수도원은 금욕과 성경연구를 강조했다. 가까운 도시 수도원도 설립해 로마주교를 포함한 많은 사람들의 호응을 얻게 돼 서방 수도원의 완벽한 조직과 형태를 갖추게 되었다.

 

서방 수도원은 귀족들의 도움을 받아 풍요로운 생활환경에다 신분 상승을 꾀하는 유망한 젊은이들이 다투어 지원함으로써 신학과 학문연구의 중심지로 부각되었다. 많은 토지에서 얻어지는 풍부한 곡식은 수도원에 막강한 경제권을 가져다주었고 수도원 학교를 세워 수도사들은 교사의 역할도 하였다. 빈민규제, 사회사업, 수도사들의 중요업무인 성경과 고전필사는 유실될 뻔했던 귀중한 성경사본들과 고대문헌들을 보급 보존하는 계기가 되었다.

 

 

2. 동방수도원과 수도사들

 

1) 안토니우스

초기 이집트 금욕주의자들 중에 가장 유명한 사람은 최초의 수도사로 신앙심 깊은 안토니우스였다. 수도 생활의 창시자이며 사막의 교부로 불린다. 그의 삶 자체가 수도원제도의 여러 특징들의 본보기가 되었다. 그가 명성을 얻은 주요 이유 중에는 알렉산드리아의 주교이자 신학자로 유명한 아타나시우스가 그를 기념하여 전기를 썼다는 점도 있다.

 

이 전기에 의하면 부유하고 젊은 지주였던 안토니우스는 어느 일요일 교회에서 마19:21을 읽는 소리를 들었다. 이 구절의 의미를 깊이 생각한 뒤 그의 모든 재산을 팔고 누이동생을 처녀 공동체에 위탁하고 자신은 광야에서 기도생활에 전념하기로 결정했다. 처음에는 연장자인 금욕주의자와 같이 생활을 했다.

 

그러다가 혼자 은거할 것을 결심하고 무덤 안에서 수행했다. 무덤 안에서 악마들을 퇴치하며 대부분의 시간을 보냈다고 한다. 악마들이 안토니우스에게 신체적인 공격을 가하여 해를 끼쳤으나 이에 굴하지 않고 고독한 수행을 접지 않았다. 마침내 광야 속으로 더 깊이 들어가 나일강에 있는 버려져 있는 성채 안에 자리를 잡고 은둔생활을 한다. 그는 극히 적은 양의 빵을 먹고 지낸 20년간의 수도생활 끝에 사람들 앞에 나타났다.

 

안토니우스의 전통을 잇는 수도원들은 독신, 기도, 노동 등 금욕주의의 수도생활을 했다.

 

2) 파초미우스와 생활 공동체적 수도원제도의 발생

4세기 초에 이집트 광야에 나타나 수행자는 첫 번 째 부류와 다른 모습을 띄운다. 파초미오스는 이교도 가정에서 태어났다. 로마의 내란으로(리키니우스황제와 막시미누스황제 사이의 전쟁) 로마군대에 징집되어 애굽의 수도 데베에 주둔하는 동안 현지그리스도교들의 자선활동에 큰 감명을 받았다.

 

군무를 마친 후 그리스도교 신앙을 배우고 세례를 받았다. 그는 수도원을 건립하여 하나님만이 아니라 사람을 섬긴다는 그의 사명을 이행하였다. 상 이집트의 타벤네시스에 한 공동체를 세웠다. 어떤 면으로는 그의 군대 근무 경력은 수도원 생활에 영향을 주었다. 병영을 닮은 수도원이 강조한 것은 개인의 영적추구라기보다는 규율과 복종이었다.

 

그리하여 4세기 초에 수도원 제도가 서로 다른 현격한 차이를 보이는 두 흐름으로 발전하였다. 이 전통을 잇는 수도원들은 금욕생활 기도보다는 복종과 일치를 강조했다. 이 두 가지 흐름이 함께 후기 비잔틴의 수도원 전통 속에 깃들어있으며 모두 다 교인들의 생활방식으로 적합한 것으로 인정되었다.

 

 

3) 가이사랴의 바실과 소아시아 수도원제도의 발생

주교이자 신학자였으며 삼위일체론을 발전시키는데 크게 이바지하였다. 329년경 터어키의 북동쪽 중앙 소아시아에서 대가족의 지주의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의 삶의 대부분을 갑바도기아에서 보내지만 아테네의 아카데미에서 고전 언어들과 철학 등 교육을 받았다.

 

355년과 358년 사이에 이집트 팔레스타인 시리아등을 순회하는 긴 여행길에 오른다. 이집트에서 파초미오스 방식의 수도원을 보고 감명을 받아 소아시아로 돌아왔으며 그가 세운 다수의 수도원들이 파초미오스 방식의 질서정연하고 조직적인 구조에 따라 세워졌다. 그가 남긴 대작‘아스케티콘’은 수도원생활에 대한 질의와 답변들을 모은 책과 그의 저서들은 훗날 동방과 서방교회의 수도원 제도를 발전시켜나가는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3. 서방 수도원과 수도사들

 

중세 시대 초기에 이오나와 린다스파른에 있던 수도원들은 선교훈련과 배움의 전당으로 이름을 날렸다.

 

이름 설립자  
베네딕트수도회
(AD529년 세움)
누르시아의 베네딕트
(AD480-550)
서방수도원의 아버지
몬테카시노에 세워졌으며 성 베네딕트의 수도규칙인 청빈서원, 정기적인 예배, 육체노동, 신학적인 영적 훈련에 따라 지적 영적인 삶을 추구하였다.
시토수도회
(AD1908년 세움)
시토의 로버트 시토에 세워졌으며 성 베네딕트의 수도 규칙을 엄격하게 준수하였다. 소박한 수도원의 모습을 추구하였다. 평신도수도사들을 양성하였으며 수도규칙 사랑의 헌장을 제정하였다.
클뤼니수도회 아퀴뗑의 공작 윌리엄 베네딕트의 규칙에서 벗어나 가난한 자들에 대한 돌봄을 추구하여 개혁하는 수도원으로 여러 수도원의 모범이 되었다.
프란시스코 수도회
(AD1210년 무렵 설립)
 
원래는 ‘작은 형제회’라고 불렀으며 사도적 청빈 생활을 강조했다.
앗시시의 프란시스코 탁발 수도원
세상제물의 포기와 신학적 훈련에 전념
교황 이노센트 3세의 인가를 받고 운영하였으며 교단원이 1221년에 교단원이 삼천 명이었으며 귀족 학자 부호들이 많이 입단하였다.
도미니크 수도회
(AD1216년 설립)
 
원래는 ‘설교자들의 수도회’라고 불렀으며 설교를 통한 선교와 학문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오스마의 도미니크
(스페인 태생)
탁발 수도원
프랑스 프루유에 설립한 수도회로 학문과 청빈을 중시하고 복음을 전파하는 선교 활동을 목적으로 한다. 특정한 성당에 소속하지 않고 곳곳을 편력하며 설교를 하였고 고정수입을 바라지 않고 헌물을 받아 의식을 해결하는 등 전혀 새로운 형태의 수도회였다.

 

 

{탁발교단=걸식교단}

탁발 수도회는 크게 둘로 나뉜다. 도미니크가 창설한 수도회와 프란체스코가 창설한 수도회이다. 탁발이란 개념은 민중들 사이에서 걸식을 하고 돌아다니며 설교를 한다고 해서 탁발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프란체스코 수도회}

프란체스코 수도회는 아사시의 성 프란체스코에 의해 설립되었으며 첫 회칙을 1209년 4월 교황 이노센트3세에게 승인받았다. 초기의 탁발수사들은 거리의 설교자로서 갖은 노동으로 생계를 유지했다. 그들은 간단한 설교를 하고 가난하고 병든 자들, 특히 나병환자들을 돌보았다. 그런데 탁발수사들이 그릇된 길로 빠지지 않기 위해 회칙을 강화해 조직을 단속할 필요성이 제기되었다. 하지만 일각에서는 그 필요성을 인정하면서도 자칫 그것으로 말미암아 수도회의 원래 정신이 훼손될지도 모른다고 우려했다.

 

그래서 1221년 성 프란체스코는 회칙 개정의 필요성과 일부 형제들의 우려를 모두 수용하는 새로운 회칙을 제정하였다. 하지만 머지않아 수도회는 그의 타협안을 받아들이는 온건파와 그렇지 않은 열성파로 크게 나뉘고 그 후 서로 반목하게 되었다. 그 후로 즉위하는 교황마다 잇달아 후자를 단죄하는 법령을 제정하고 그들의 교의 중 일부를 이단으로 규정했다.

 

{도미니크 수도회}

공식명칭이 ‘탁발수사 설교자들의 수도회’인 도미니크 수도회는 1215년 스페인 태생의 도밍고 데 구스만(나중에 도미니크로 불림)에 의해 설립되었다. 그는 프랑스 남부를 여행하다가 그곳에 만연한 알비파의 위협을 깨댣고 그들을 개종시키기 위해 설교를 시작했다. 이렇게 시작된 수도회는 1217년 교황 호노리오3세에게 승인 받았다. 기도와 선교, 특히 학문과 설교에 중점을 두었다. 따라서 이 수도회는 초창기부터 멀리 해외로 선교사들을 파견했으며 뛰어난 신학자들을 배출했다, 그중에서 가장 알려진 학자는 대 알베르투스와 토마스 아퀴나스이다.

 

이와 같은 학문과 설교에 대한 특별한 관심 때문에 도미니크회는 가톨릭의 정통교리를 수호하고 이단을 뿌리뽑기 위해 설립된 조사단에 깊이 관여하게 되었다. 가장 악명 높은 조사관으로는 1483년 교황 식스토4세가 스페인의 종교 재판소 소장으로 임명한 토마스 데 토르케마다를 들 수 있다. 이 교단은 평신도를 위한 제 3의 수도회를 각각 설립했다. 그러나 프란체스코와는 달리 원래의 정신을 구수하는 무리와 변화를 수용하는 무리 사이에 분열이 일어나지는 않았다.

 

두 사람이 죽은 후 유럽 전역과 아시아로 급속하게 전파되어 13세기에 이미 서유럽 각지에 수도회가 설립되고 수사의 수도 수만 명에 이르렀다. 처음에는 프란체스코의 청빈사상을 이어받아 수도사들 자신이 노동을 통해 생계를 유지하고 부득이한 경우에만 의존하였으나 수도회의 규모가 커지면서 노동만으로는 생활할 수 없게 되자 갈수록 탁발(구걸)에 의존하는 경향이 짙어졌다.

 

13세기에는 새로운 스타일의 금욕생활이 탄생했다. 신비적 관조에 몰입하기 위해 인구가 많이 몰린 곳을 떠나는 것이 아니라 이들은 사도직의 기능을 근본적인 기능으로 삼았다는 점에서 전통적인 수도원과 달랐다. 고대의 수도원 생활을 변형시켜서 설교와 가르치는 일에 적합하게 만들었다. 이 시대는 사회적 경제적으로 상업발달과 도시발달로 새로운 형태의 사역을 요구하고 있었다.

 

이렇게 해서 전통적인 기독교의 한계를 넘어서서 새로운 선교의 장이 열렸다. 탁발교단은 청빈한 생활을 서약하고 엄격한 규율을 신앙이념으로 삼아 13세기이후 서유럽에서 널리 유행한 수도회이다.

 

 

[탁발교단의 영향]

1. 민중의 벗이 되었다. 당시 보통 수도사들은 민중의 생활을 도와주었고 그들의 고백을 듣고 설교하였다. 대학세력으로 확장으로 많은 대학교수들이 참가하였으며 13세기의 학자들은 거의 이 교단에서 배출되었다.

2. 프란시스코 수도회는 3인의 전도 대를 조직하여 각처에 파송하였다.

 

 

4. 선교사 파송

영성함양이라는 수도원 적 이상은 4세기부터 유지되어 온 가톨릭 신앙을 지탱하는 잠재이었다. 수도원의 성장으로 이 시대에는 많은 선교사들의 인력을 제공해 주었는데 특히 아일랜드와 이오니아 섬에서 많이 나왔다. 그러나 동방교회에서는 선교사들의 활동이 별로 없었고 이슬람교를 대항하여 스스로를 방어하는데 그쳤다.

 

 

5. 종교개혁과 수도원 운동

종교개혁이 일어나자 프로테스탄트국가에서 수도원은 자취를 감추고 가톨릭 국가에만 남아있게 되었다. 종교개혁자 루터에게는 믿음으로 모든 생활이 거룩해지기 때문에 수도원 서원은 의미를 갖지 못하였다. 수도원 삶은 단순한 인간적 행위로 이해했다. 그 결과 종교개혁이 일어난 후 수도원 개혁보다는 해체를 하였다. 이후 개신교 안에서는 수도원과 수도사 신분은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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