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경 보전에 대한 신학적 근거
임 성 빈
(장신대, 신학과)
1. 들어가는 말:
1994-5년의 그 무더웠던 여름들은 '지구가 더워지고 있다'는 경고를 심각하게 받아들이는 데에 큰 역할을 하였다. 그 더위 이후로도, 계속되고 있는 여러 가지 기상이변의 현상들은 우리로 하여금 그 이전보다는 더욱 심각하게 생태계의 위기를 호소하는 경고들에 관심을 기울이도록 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 특별히 가뭄으로 인한 물의 부족으로 인하여 식수 및 공업용수의 공급이 중단되는 상황과, 낙동강을 비롯한 4대강 유역의 수질이 수질측정이 시작된 이후에 최악의 수치를 기록하고 있다는 보도들을 접하게 되면서 우리는 점차로 환경오염의 심각성과 환경보전의 절박함을 피부로 느끼게 되었다. 우리가 지구의 온난화 현상, 오존층 파괴, 산성비, 대기오염, 수질 및 토양오염, 열대우림의 파괴와 사막화 등의 문제들에 대하여서 벌써부터 이 시대의 선지자들로부터의 많은 경고들을 받아 왔지만, 사실 그러한 문제들에 우리의 관심을 기울일 여유가(?) 우리들에게는 없었다.
"우리도 한번 잘 살아보세"라는 국가적 정서는 온 국민의 관심을 오로지 발전과 개발에만 집중하도록 유도하였다. 그리하여 환경문제들에 대하여 경고하는 이들은 우리의 '잘 살아보세'를 방해하는 이상주의자들내지는 사상적으로 불순한 자들일 것이라는 편견을 갖도록 하는 사회적 분위기를 조성하였었다. 결국 환경보호를 호소하던 이들은 '반체제인사'로서 처벌받는 상황에까지 이르렀던 것이다.
그러나 이제 사회적인 인식이 근본적으로 변화하기 시작하였다. 점차로 우리들은 지구는 하나뿐이라는 주장이 함의하는 바의 의미를 깨닫기 시작하게 되었다. 이제는 많은 이들이 공해 및 환경파괴의 재앙이 우리들과 우리들의 후세들에게 가져다 줄 폐해에 대하여 보다 심각한 관심을 갖기에 이르렀다. 많은 집에서는 수도물보다는 생수를 구입하여 마시고 있으며, 먹거리도 무공해 . 무농약 먹거리가 인기리에 판매되고 있다.
그런데 생수를 사 먹는 것과 무농약 . 무공해 먹거리를 구입하는 것 등은 결코 환경보전을 위한 근본적인 대책이 될 수 없다. 오히려 이러한 현상은 빈익빈 . 부익부의 현상이 초래하는 사회적 부조리를 더욱 근본적인 영역, 즉 먹거리의 영역으로 확대시키고 마는 결과를 낳는다. 왜냐하면 비싼 생수와 무농약 . 무공해 먹거리를 구입해 먹을 수 있는 사람은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는 사람들 뿐이기 때문이다. 또한 어떤 이들은 환경오염을 피하여 보다 환경보존이 잘 되어 있는 곳으로 삶의 자리들을 옮김으로써 나름대로의 대책을 마련하고 있다. 이러한 현상 역시도, 거시적인 차원에서와, 사회통합적인 차원에서 그렇게 바람직한 현상인 것만은 아니다.
이러한 상황을 접하면서 우리는 환경보전의 문제가 결코 일시적인 먹거리의 해결이나 자연으로의 도피적인 생활로써 해결될 수 없는, 보다 근본적인 문제임을 지적할 수 있다. 과연 우리가 환경오염에 대항하여서, 즉 환경보전을 위하여 기울일 수 있는 보다 근본적인 관심과 대책은 무엇이겠는가? 나와 나의 가족뿐만이 아닌, 나의 모든 이웃들을 함께 생각하며, 실천할 수 있는 그것은 무엇일까? 나뿐만이 아닌, 자연을 포함한 나의 현재의 이웃들과 (고아와 과부와 같은 자들, 즉 무농약 . 무공해의 먹거리와 자연에서의 전원주택을 소유할 수 없는 가난한 자들을 물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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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함하면서) 우리 자신의 후손을 포함하는 미래의 이웃들을 함께 생각하여야 한다는 점에서 환경보전의 문제는 신학적인 문제이다. 또한 환경보전의 문제는 우리의 기본적인 가치관, 세계관과 직결되어 있는 문제라는 점에서, 또한 그 문제가 함의하고 있는 책임성의 범위가 전-우주적이라는 점에 있어서 신학적인 문제가 된다. 신학적이라 함은 하나님 앞에서의 우리의 전 존재들과 그것의 실존적 문제들에 대하여 성서를 기준으로 비판적으로 반성하는 모든 활동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2. 신학적 환경보전을 지향하며 :
(1) 환경보전을 위한 여러 노력들 : 그러나 환경보전의 문제에 있어서 기독교는 매우 미묘한 입장에 처하여 있다. 사실, 많은 이들이 현재의 환경파탄의 주범 내지는 주요 원인 제공자가 기독교의 신학이었다는 지적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어떤 이들은 기독교는 제국주의적인 종교라고 하면서 보다 자연친화적인 동양의 종교 및 신비사상들에서 환경보전의 지혜를 배워야 한다고 주장한다. 또한 어떤 이들은 이러한 종교적 논쟁들에 관심하기 보다는 실제적으로 또한 직접적으로 환경보전의 문제의 해결은 과학기술의 진보 및 발전에 따라서만이 가능하여 질 것이라는 낙관적인 견해를 주장하기도 한다. 먼저 이러한 기술낙관주의에 입각한 환경보전에 대한 견해를 살펴보기로 하자.
[1] 기술 낙관주의에 근거한 이들의 주장은 다음과 같이 요약되어 질 수 있을 것이다.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주신 가장 큰 선물은 생명이지만 생명 다음으로 사람에게 주신 선물은 기술이다"1) 여기에서의 기술이란 단순히 무엇을 만들고 생산하는 수단을 뜻하는 'techne'가 아닌 'techne'와 'logos'라는 단어의 합성으로 이루어진 'technology'를 의미한다. 그러므로 테크놀로지로서의 기술은 이미 생존을 위한 기술만이 아니라 'logos'가 전제된 것임을 이들은 강조한다.2) 그들은 "기술이란 원래 자연속에 파묻혀 있는 본래의 아름다움을 드러내 놓는 일"이었으며, 그렇기 때문에 "자연속에서 그 어떤 아름다움을 노래하는 시의 세계와도 일맥상통했던 것"3)임을 논한다. 그러나 현대의 기술문명은 자연과의 조화를 이루는 기술의 본질을 망각함으로써 잘못되기 시작하였다는 것이다. 현재의 잘못됨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기술발달의 역사를 발전적으로 아래와 같이 묘사함으로써 낙관적인 미래를 말한다.
먼저, 선사시대나 초기 유사시대의 기술은 '우연의 기술 (technology of chance)'이었다고 한다. 즉 그때의 기술은 깊은 생각과 체계적인 연구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었으며, 그저 우연한 일상적인 삶에서의 놀람을 통하여 특이한 현상을 목격하게 되고, 또한 그것이 일상생활에 편리함을 주게 됨에 따라 인간의 일상생활속으로 들어 오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 다음의 단계는 '기능인(technician)의 기술시대'로서 이전 시대와는 달리, 기술이라는 개념이 성립되었고 각 기술에 따르는 직업이 사회에서 보장되는 시대였다고 한다. 세 번째의 단계는 오늘의 '과학기술시대'로서 처음의 두 단계에 비하여 계획자와 노동자가 분리되는 현상이 나타나게 되는 단계임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고 한다.4) (바로 이러한 계획자와 노동자의 분리가 노동자의 소외현상을 유발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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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본원인이 되었을 것이다.) 그런데 기술낙관주의적인 견해를 갖고 있는 이들은 매우 진보적이며 낙관주의적인 입장에서 앞으로의 21세기의 기술시대에는 지금까지의 시행착오를 극복하는 보다 새로운 전형의 과학이 출현할 것임을 믿고 있다.
우리는 하나님이 주신 귀한 선물인 기술로써 또 앞으로의 역사를 이어나갈 것이다. 그러나 그 기술은 'Ge-stell'로서의 기술도 아니요, 계획자와 노동자가 완전히 분리된 그런 기술도 아닐 것이다. 그것은 또 다른 새로운 창조질서를 향한 새로운 패러다임의 기술일 것이다. 이 새로운 패러다임의 기술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맡기신 이 에덴동산을 보다 더 아름답게 가꾸어 갈 것이다.5)
그러나 이러한 낙관적인 주장을 하는 과학자들에게 우리의 환경문제를 전적으로 의존하기에는 많은 어려움을 느끼게 된다. 무엇보다도 근본적인 것은 그들이 주장하는 바, 새로운 기술로 가능하여질 환경보전에 대한 낙관성을 담보하여 줄 수 있는 구체적인 증거가 너무도 부족하다는 것이다. 과학의 발달로 인하여 가속화되어가는 환경오염을 이미 경험하였고 또한 현재에도 경험하고 있는 우리들로서는 환경오염의 결정적 요인이었다고 할 수 있는 그 과학기술에 막연한 기대를 건다는 것이 얼마나 순진한 것인가를 잘 알고 있다. 그러한 과학기술에 대한 순진한 믿음은 참으로 비역사적이며, 비과학적인 우상적인 행위이다.
물론 환경보전을 위하여 우리는 과학기술의 도움을 절실히 필요로 한다. 보다 환경친화적이며 인간친화적인 과학기술의 발달은 환경보전에 있어서 필수적이다. 그러나 소위 세계화시대, 즉 무한경쟁으로 상징되는 세계시장경제체제(Global Market Economy)의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들로서는 환경보전을 위한 과학기술이 경제논리안에서 운영될 수 밖에 없는 현실을 직시하여야만 한다. 즉 아무리 환경보전에 도움이 되는 기술이라 하더라도, 그것의 경제성이 뒷받침되지 않을 때, 그것이 사회적으로 받아들여 지지 않는 것이 현실인 것이다. 사실상 이 시대를 지배하는 것은 경제 이데올로기라고 볼 수 있다. 경제의 논리란 곧 선택과 배분의 논리를 뜻한다. 한정된 자원으로서 최대의 효과를 보려는 경제활동에 있어서 효율성에 입각한 선택에 있어서의 우선순위와 정의로운 생산재화의 분배는 정의 사회 구현을 위하여 필수적이다. 그러나 선택의 우선순위와 분배의 정의로움은 그것을 행하는 개인이나 공동체의 가치관에 의하여 좌우된다. 개인이나 공동체의 가치관은 곧 그들의 신념체계, 나아가서는 그들의 세계관과 직결되게 된다. 이러한 의미에서 경제 행위는 곧 신앙적인 행위이다. 사람들은 자신들이 최고의 가치로 신뢰하는 것에게 충성을 다하기 위하여, 그 가치를 기준으로 선택의 행위를 지속하여 나가는 것이다.
그러므로 과학기술의 방향성도 신앙적인 차원에서 그 방향이 결정되어 진다고 볼 수 있다. 즉, 과학기술이 환경친화적인 역할을 감당할 수 있는가의 여부는 그것의 경제적인 차원에서의 판단과 직결되어 지는 것이며, 경제적인 차원은 곧 신앙적인 차원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과학기술과 환경보전의 관계성이 신앙적인 차원에서의 반성으로 확장되어야 하는 당위성을 잘 말해 주는 것이다.
[2] 신앙적인 차원에서의 제안들 : 환경보전의 문제에 있어서 신앙적인 차원이 결정적인 문제가 된다는 것을 간파한 이들은 여러 측면에서의 제안들을 제시하였다. 이 때에 쟁점이 되는 것은 환경파괴의 주범으로서 서양의 과학기술문명이 지목되고 있다는 것과 그 배후에는 기독교의 발전적 역사관 및 자연정복을 정당화하여 주는 소위 문화명령이 있다는 비판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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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명한 중세역사가인 린 화이트가 1967년에 발표하였던 "우리가 처한 환경위기의 역사적 근원"이라는 짤막한 글이 기독교가 환경위기를 초래한 주요한 역할을 하였다는 일련의 계속되는 비판의 도화선을 마련하였다고 볼 수 있다. 화이트는 현대과학기술의 자연에 대한 착취의 근원은, 자연에 대한 인간의 우위를 선언하고 있는 창세기 1:28절의 "정복"명령에서 유래하고 있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므로 환경보전을 위하여서는, "사람을 구원하기 위한 목적을 제외하고서는 그 존재의 이유가 전혀 없는 자연"이라는 기독교의 전통적 인간 중심적 자연관을 이제 버려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기독교인들의 자연에 대한 오만"을 버려야 한다고 주장한다. 전통적인 기독교에 대하여 일련의 혹독한 비판을 가한 후에, 그는 "우리가 새로운 종교, 혹은 옛 것에 대하여서도 새롭게 다시 생각하지 않고서는 아무리 과학과 기술이 발달한다고 하더라도 지금의 환경위기에서 벗어날 수 없을 것이다. . . 히피들은. . .원래의 기독교에서 나타나는 사람과 자연과의 밀접한 관계를 표현하고 있는 선불교와 힌두교와의 밀착을 통하여 건전한 본능을 보여주고 있다"고 주장한다.6)
화이트의 뒤를 이어서 오늘 날에는 수많은 이들이 동양사상과 신비사상, 또는 가이아(Gaia)이론등을 빌어 환경보전에 실패한 기독교를 대신할 대안으로 소개하고 있는 실정이다. '무위자연'을 논하는 노장사상과 '연기설'및 '윤회설'을 논하는 불교의 사상은 인간을 우주의 유일한 주체로 부각시킴으로써 자연을 정복하여야 할 대상인 객체로서 전락시켜 버린 기독교에 비하여서 자연과 인간의 합일을 말함으로써 환경보전을 위하여 유익한 세계관을 제공한다는 것이 이러한 주장들의 핵심을 이루고 있다. 또한 대지의 여신을 뜻하는 가이아라는 상징으로서 지구의 살아있음을 주장하는 가이아 이론7)은 지구 생태계를 하나의 신적(神的) 실체로 보는 경향을 가진다. 가이아, 즉 지구생태계는 "생명의 가장 큰 형태의 구현물"이요, "하나의 단일한 생명체"이며, "생명의 기원에서부터 시작하여 생물이 살아 남는 최후의 순간까지 시간적으로 연속성을 갖는 실체"이며 "불멸의 존재"를 말한다. 또한 가이아는 하나의 유기체이며 인간은 그 유기체를 이루는 여러 세포무리의 하나와 같다고 한다.8)
지금까지 언급한 동양사상과 가이아 이론 등이 주장하는 바의 요점은 종래의 인간중심적인 관점을 유지하였던 기독교 및 과학기술이 전제하였던 자연대 인간의 주객도식을 극복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즉, 자연의 일부로서의 인간임을 자각할 때, 인간은 자연에 대한 횡포를 자제할 수 있을 것이며 근본적으로 환경보전의 과업을 이루어 갈 수 있으리라는 것이다. 물론 위와 같은 주장을 펴는 이들에게는 환경이라는 단어 자체도 환영받지 못 하는 단어이다. 그 단어 자체에 인간중심적인 사고가 전제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환경보다는 '생태'등의 단어가 더욱 선호되어진다.
(2) 신학적 관점에서 파악되는 문제점들 : 그러나 이러한 자연주의적 주장들은 모두 심각한 문제점들을 그들이 주장하는 논리 안에 가지고 있다. 즉 이들의 방법들을 가지고서는 환경보전의 문제를 해결하기에 근본적인 한계가 있다는 것이다. 우리가 이와 같은 판단을 내리게 되는 것에는 다음과 같은 이유들이 있다.
먼저, 우리는 위와 같은 자연주의적 주장들에서 발견되는 생명 자체에 대한 본질적 가치개념을 주목하여야 할 것이다. 그들의 주장을 한 마디로 요약하여 본다면 자연 그 자체, 즉 전체로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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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삶의 과정이 우선되는 가치의 자리라고 하는 것이다. 삶의 과정 안에 참여하고 있는 모든 것들은 나름대로의 본질적 가치를 지니며, 그 본질적인 가치는 그들의 존재함, 그 자체로 인하여 비롯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나름대로의 가치를 지니고 있는 모든 개체들은 그 나름대로의 생명을 보존할 수 있는 권리를 모두 가지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이때 동물의 권리를 옹호하는 사람들은(animal rights acti vists) 인간의 권리보다 동물의 권리가 열등하다고 볼 수는 없다고까지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적자생존의 자연도태를 통한 자연의 보존을 인정하는 대부분의 자연주의적 생명중심주의자들은(biocentrists) 이성이나 언어 혹은 지각력 등의 소유 정도에 따라서 개체의 존재가치가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그 개체가 속한 부류나 종(class or species)에 의하여 그 고유의 가치가 인정되어져야 한다고 주장한다.9) 물론 이것은 인간이 자연에 대하여 가치를 부여하는 입장에 있지 않다는 것을 말해 주는 것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인간의 생존권리와 동.식물 및 광물의 생존권리가 갈등상황에 처하게 될 때, 어떠한 기준이 적용되어야 할 것인가? 쉬바이쩌와 같은 사람들은 '생명의 경외'를 주장하면서 상대방이 자신의 생명을 위협하는 경우를 제외하고서는 어떠한 살생도 금할 것을 주장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우리가 먹는 소와 돼지, 닭의 생존권, 나아가서는 식물의 생존권은 인간의 기본적인 생존권과의 갈등 관계에 있어서 어떻게 관계되어 질 수 있겠는가?등의 질문은 자연주의적인 주장들의 모순점을 적나라하게 나타내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고기를 안 먹는 채식주의자들에 있어서도 이러한 갈등과 모순에 관한 질문은 예외없이 물어질 수 있을 것이다. 동·식물 및 모든 생태계와의 공생(symbiosis)이란 과연 어떠한 삶을 이야기 하는 것인가? 과연 우리는 인간의 주도적인 책임성을 배제한 채로 생태계의 문제, 즉 환경보전의 문제를 다룰 수 있을 것인가?
성서는 분명하게 환경보전의 문제의 핵심에는 인간의 책임이 자리하고 있음을 증거하고 있다. 물론 지금까지의 신학들과 신앙의 유형들 중에는 인간을 자연에 대한 폭군으로 유도하거나 또한 그러한 약탈적 행위들을 정당화하여 주는 기능을 한 것이 있음도 사실이다. 혹자는 기독교보다는 르네상스 이후로 발흥하여 계몽주의에 이르러 그 절정기를 맞이하기 시작한 인본주의의 진보적 역사관이 자연에 대한 인간의 폭정을 촉발하였던 주요한 요소였다고 주장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순환적인 역사관을 가지고 있었던 고대근동의 세계와 그리이스 문화권에 직선적인 역사관을 소개한 것은 역시 기독교의 독특한 공헌이었다. 그대까지 자연에 대하여 신화적인 사고를 함으로써 소외되어 있던 인간들은 이제 비로소 자연으로부터의 소외에서 벗어나게 되었다고 볼 수도 있다. 지금까지는 자연에 의하여 부정의한 지배를 받아 왔던 인간들이 이제부터는 자유를 향한 해방의 발걸음을 내딛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연의 부정의하며 신화적인 지배로부터 인간이 자유하게 되었다는 사실에 대하여 어떠한 거리낌을 느낄 이유가 없는 것이다. 사실 기독교가 환경파괴의 주범이라면 기독교 탄생 이전에 존재하였던 이집트와 페르시아, 로마와 아즈텍 문명이 자행하였던 자연파괴는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 것인가? 또한 현대의 과학기술을 낳은 것도 기독교의 영향만은 아닌 것이다. 오히려 고대 희랍의 분석적인 철학정신이 이성적인 신을 강조하였던 중세기의 철학을 거쳐서 계몽주의의 영향으로 꽃피운 것이 현대 과학기술의 올바른 계보가 아닐까?10)
여기에서 우리가 주장하고 싶은 것은 오늘날의 환경위기의 문제에 있어서 기독교가 아무런 책임이 없다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기독교인들의 이 세상의 청지기(Steward)로서의 직무유기를 우리는 매우 유감스럽게 생각한다. 그러나 보다 분석적으로 이야기한다면 지금의 환경위기는 인류전체의 공동책임이라는 것이다. 또한 그 위기의 발원지는 인간본성에 있다고 말할 수 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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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11) 즉 오늘의 환경위기는 너무도 총체적이며 근본적인 것이어서, 특정한 누구 누구에게만 그 책임을 돌릴 수 없는 문제라는 것이다. 만약 기독교에 책임이 있다면 그것은 자신들의 유익을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보다 앞세웠던 많은 기독교인들의 신앙적이지 못한 이기적 행위 때문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기원 후 3-4세기에 걸쳐서 이집트와 시리아의 사막에 흩어져서 수도생활을 하였던 사막의 교부들과, 성 패트릭으로 대표되는 중세의 셀틱 성인들(Celtic Saints), 너무나도 유명한 아씨시의 성 프랜시스와 베네딕트, 마태 폭스, 프랜시스의 후계자인 빙겐의 힐데가르드(1098-1179), 마그데부르그의 메치틸드(1210-1280), 마이스터 에카르트(1260-1329), 쥬리안 놀위치(1342-1415), 퀘이커등으로 이어지는 자연을 너무도 사랑하였던 교회사적 계보는 기독교의 환경위기와의 관계성을 일방적으로 규정하는 것은 너무도 문제를 단순화한 것이었음을 확인할 수 있는 것이다.12)
(3) 신학적 환경보전의 근거 : 그러나 우리는 환경오염의 주원인이 기독교에 있는 것이 아니라는 변명의 차원에서 우리의 논의를 그칠 수는 없다. 우리는 보다 적극적으로 환경보전의 삶에 참여하여야 한다. 그러나 그 이유는 기독교가 범하였던 과거의 잘못에 대한 반성때문만은 아니다. 그보다는 무엇보다도 우리의 하나님과의 관계성, 즉 신앙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지어 주신 자연에 대한 우리의 청지기로서의 책임을 다할 것을 끊임 없이 요구하고 있기 때문이기도한 것이다.
[1] 창조신학적인 토대 위에서 : 하나님과 우리사이의 관계맺음의 출발점인 창조에 대한 우리의 성찰, 즉 창조신학은 이러한 의미에서 환경보전을 위한 신학적 근거의 초석을 이룬다. 종래에는 자연세계에 대한 인간의 소유권과 지배권 혹은 통치권을 뜻한다고 해석되어 왔던 '하나님의 형상(Imago Dei)'도 창조신학의 맥락안에서는 그 의미가 다른 방향에서 해석되어 질 수 있다. 즉, 창세기 1:1절로부터 증언되고 있는 하늘과 땅과 해와 달과 별들과 새와 물고기와 동물들에 대한 창조이야기는 하나님은 인간인 우리의 하나님만이 아닌 모든 피조물의 창조주임을 선포하고 있는 것이다.13) 그러므로 모든 자연의 주인은 엄연히 하나님 한분 뿐이며, 결코 인간이 될 수 없다는 것이다. 우리가 전통적으로 고백하는 사도 신경과 니케아 신조의 첫 문장이 하늘과 땅을 지으신 하나님의 창조주되심에 대한 신앙고백으로 시작되고 있다는 사실은 기독교인들에게 있어서 창조신앙이 매우 기본적인 것임을 상징하는 좋은 예이다. 창조신앙의 고백은 곧 그 분의 초월적인 주권과, 우주적인 섭리와 그 분께로의 피조물의 필연적인 의존성을 인정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창조신앙을 고백하는 인간의 자세는 결코 같은 피조물로서의 자연에 대하여 억압적인 그것일 수가 없는 것이다. 오히려 매우 겸손한 자세를 동반하게 되는 것이다.
즉, 창조신앙은 우리에게 인간중심적인 것이 아닌 하나님 중심적인 가치체계를 선포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은 그것의 하나님과의 관계성안에서 나름대로의 관계적 가치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 창조신학적인 고백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자연주의적인 생명 중심주의자들은 만물의 가치는 본유적인 것이라 하였지만, 창조신앙은 만물이 나름대로의 가치는 있으나 그 가치는 오로지 하나님과의 관계 안에서 결정되어 진다는 것임을 분명히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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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계약사상에 있어서의 환경윤리적 측면 : 노아의 무지개 언약(창. 9:8-17)은 환경윤리적인 관계적 책임성을 상징하고 있다. 사실 이스라엘의 구원신앙에 입각한 계약 사상 자체는 하나님의 주권이 이스라엘의 삶의 영역의 전체에 펴져 나가야 한다는 것을 매우 명확히 나타내어 주고 있다. 그런 중에서도 노아와의 무지개 언약은 그 당사자가 하나님과 노아와 그의 가족과 그의 후손뿐만이 아닌, 그들과 함께한 "모든 생물", 그들과 함께한 "모든 새와 육축과 땅의 모든 생물", "방주에서 나온 모든 모든 것 곧 땅의 모든 짐승"이었다는 점에서 환경보전의 측면에서 주목되어 져야 한다. 물론 이 언약에서 하나님은 일방적인 주도자이다. 하나님 한 분만이 주도자라는 것은 인간이 서야 할 위치를 잘 나타내어 주는 것이다. 그보다 더욱 주목하여야 할 것은 인간과 모든 생물과의 공동운명체성이다. 노아의 홍수로 인하여 모두가 같은 위기에 처하여 있었듯이, 하나님과의 언약으로 말미암아 모두가 함께 같은 은혜의 세계를 맛보고 살게 되었다는 것이다. 또한 이 언약사건은 우리의 환경보전의 책임영역이 우리의 후손들까지에 미쳐야 함을 강력히 암시하고 있다. 그러므로 환경보존을 게을리하는 것, 즉 오존층의 파괴와 지구온난화와 지표식물의 멸종등은 이러한 무지개 언약이 상징하는 하나님이 원하시는 환경이 보전되는 세계에 대한 반역적인 행위가 되는 것이다.14)
[3] 청지기직과의 관련 하에서의 하나님의 형상과 정복 명령 : 하나님의 형상과 정복명령은 자연파괴의 주범으로서의 기독교비판에 가장 자주 인용되는 전형적인 예증들이다. 고대 근동에 있어서 왕이 그의 상을 돌이나 나무에 새김으로써 자신의 영토됨의 표식을 삼았다는 예증은 하나님의 형상이란 곧 하나님을 대리한 이 세상에서의 지배자이자 소유자를 의미하는 것으로 해석되어 오곤 하였다.15) 또한 창세기 1장 26-28절에 나타나는 "땅을 정복하라"는 명령은 이 세계의 지배자요, 소유주로서의 인간을 더욱 강화시켜 주었다는 것이다. 몰트만에 의하면 이러한 사상들은 삼위일체로서의 하나님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군주신론적인 신관을 가지고 있었던 서방교회의 전통속에서 매우 억압적인 사회적 영향력을 발휘하였다. 고대의 군주제, 근대의 제국주의와 식민주의, 인종차별주의, 남성우월주의, 백인우월주의, 인간의 자연에 대한 우월주의가 모두 이러한 잘못된 신관 및 성서 해석의 결과물이라는 것이다. 그리하여 몰트만 자신은 매우 관계적인 의미를 강조하는 삼위일체로서의 하나님과 그의 나라를 논하고 있다. 이러한 논의를 접하다 보면 하나님의 형상과 정복명령이 성서의 핵심을 이루고 있는 사상이라는 인상을 받게 된다.
그러나 사실 하나님의 형상과 정복명령자체는 성서에서 매우 한정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구약자체 안에서도 하나님의 형상은 그렇게 주도적인 이미지로서 자리 잡고 있지 못하며, 더욱이 신약성서에 이르러서는 오로지 10회 등장하고 있다. 그것도 그리스도와 그리스도에 대한 관계성을 표현하기 위하여서 일뿐이며, 결코 환경문제와의 직접적인 관련성은 찾아 볼 수 없는 맥락에서 이다. 정복이란 단어는 아예 신약성서에서는 등장하지 않고 있다. 교회사적으로 보더라도 정복은 축복의 맥락에서 해석되었지 결코 약탈이나 착취의 차원에서 다루어지지 않았음을 확인할 수 있다.16) 더욱이 우리가 창세기 1장 26절의 "다스리다(radah)"라는 동사의 어원적 유래가 '돌본다'는 뜻을 가진 이집트와 바빌론의 궁중언어였다는 점을 발견하게 되었을 때, 인간의 청지기됨, 즉 인간이 자연을 가꾸고 돌보아야 하는 존재로 창조되었음을 확인하게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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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정복하라"는 말도 그 문장이 속한 맥락에 대한 섬세한 관찰을 통하여 보다 통전적인 해석을 추구할 수 있을 것이다. 즉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라는 구절과의 연계성속에서의 "정복하라"는 결코 폭압적인 자연에 대한 파괴를 의미할 수가 없는 것이다. 창조주되시는 하나님과의 계약관계에 있는 인간이 어떻게 자의적으로 좋은 세상을 지어주신 창조주의 섭리와 뜻을 거스리는 행위를 할 수 가 있겠는가?17)
하나님의 형상에 대한 신약성서의 증언은 오히려 강력한 환경보전의 책임성을 증거하고 있다. 하나님의 형상으로서의 그리스도는(고후4:4; 골1:15; 히1:3; 요1:14-18) 우리의 윤리적 모범이 된다. 그런데 우리가 그에게서 배워야 할 것은 사랑이다(엡5:1-2). 즉 하나님의 형상의 본질은 사랑인 것이다.18) 즉 하나님께서 좋다 하신 그 세계를 보전하여야 책임의 원동력은 그 어떠한 강제나 의무감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우리가 배워야 할 사랑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창조신학을 토대로, 계약신학을 틀로 하여서 하나님의 형상과 정복의 명령을 하나님의 우주적인 주권의 실현이라는 맥락 안에서 구체화하는 청지기로서의 인간을 논할 수 있을 것이다. 어떤 이들은 청지기라는 말이 함의하고 있는 인간중심적인 사고와 온정주의적인(paternalistic) 색채로 인하여 이 용어의 사용을 꺼려 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지만, 우리는 하나님과 자연사이에서의 독특한 존재와 역할을 담보한다는 의미에서 여전히 유용한 신학적 용어임을 주장할 수 있을 것이다.
[4] 성육신과 환경보전 :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 ." (요.1:14). 우리는 초대교회를 어지럽혔던 최대의 이단이 영지주의자들이었다는 것을 다시 한번 상기할 필요가 있다. 그 영지주의자들은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는 증언을 받아 들일 수가 없었다. 그들에게 육신, 즉 물질의 세계란 구원받을 수 없는 영역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인간의 몸으로 이세계에 오셨다는 사실은 우리에게 이 세상에 대한 관심을 환기시킨다. 이 세상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오신 그 분의 뒤를 따라가는 우리들의 책임영역 역시도 이 세상을 포괄하여야 함은 너무도 자연스러운 추론인 것이다. 또한 성육신의 신앙은 우리에게 항상 겸손과 공동체성을 가르친다. 우리의 우리된 것은 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신이 되셨기 때문이며, 그의 육신됨은 나만을 위한 것이 아닌 우리를 위한 것이고 이 세상을 위한 것임을 동시에 상기 시켜 준다. 그러므로 환경보전의 문제는 성육신의 신앙을 믿는 이들에게는 당위적으로 관심을 기울여야 할 신앙적인 과제이다.
3. 지금, 여기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것들 :
이상에서의 환경보전을 촉구하는 신학적인 증언들은 우리로 지금, 그리고 여기에서 결단하는 삶을 살도록 인도한다. 창조신학적인 토대는 우리에게 환경보전의 문제의 근본성, 하나님중심의 가치체계에 대한 개안을 하여 주며, 계약신학적인 틀은 하나님중심의 가치체계가 의미하는 바의 우주적인 하나님 주권의 영역이 곧 우리의 환경보전의 책임영역이라는 점을 밝혀 준다. 또한 환경보전의 근본적이며 광범위한 사역의 참여는 오로지 하나님의 형상된 그리스도의 사랑을 닮아갈 때만이 가능하며, 그러므로 환경보전을 이루어 가는 자세는 철저히 섬김의 청지지적 자세여야 한다는 점을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사건을 통하여 결정적으로 확인하였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는 인간중심적인 일방적인 사고에서 비롯되는 인간과 자연을 이분법적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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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 나누어 생각하는 사고에서 벗어나야 할 것이다. 또한 인간과 자연을 낭만적으로 동일시하는 동양사상 및 가이아이론 등에서 발견되는 인간의 자연에의 매몰도 경계하여야 한다. 하나님의 청지기로서 하나님이 좋다고 하신 이 피조의 세계를 잘 보전하여야 할 책임을 가지고 있는 존재라는 점에서 우리는 자연과 확연히 구별된다. 그러나 우리의 책임은 오로지 사랑과 섬김으로써 수행되어짐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섬김과 사랑으로서의 청지기직 수행은 지혜와 결단을 동시에 요구한다. 보다 구체적인 삶의 양태로서 우리는 경건과 절제의 삶을 논할 수 있을 것이다. 경건이라 함은 인간의 가치기준보다는 하나님의 명령, 즉 하나님의 가치기준을 앞세움을 뜻한다. 즉,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보다는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 삶이 경건한 삶일 것이다. 경건한 삶은 동시에 절제하는 삶을 의미한다. 절제는 특별히 환경보전이라는 맥락 안에서 더욱 필수적인 삶의 양태라고 볼 수 있다. 현재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환경의 위기는 인간의 한없는 욕망을 합리화시켜 주는 여러 형태의 경제논리에서 비롯되었다고 하더라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소비주의와 상업주의의 결탁으로 인한 인간의 무절제가 오늘날의 환경을 결정적으로 해치고 있다. 이제 우리는 절제하여야 할 때이다. 그러나 인간의 완악성은 도덕적인 설교의 형태를 띤 절제의 호소로는 극복되어 질 수 없다. 그러한 의미에서 우리는 절제를 유도할 수 있는 경제 제도의 정착및 법제화에도 관심을 기울여야 할 것이다. 즉 환경친화적 공정이나 인간친화적 공정을 실용화할 수 있도록 환경의 사용 비용을 실제의 생산비용에 첨가토록(full-cost pricing)한다든지, 환경오염을 유발하는 제품 및 업종에게는 대체기술을 촉진하도록 하는 세금제도의 고안 등을 들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이러한 노력은 일 국가적인 차원에서 이루어 질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무한경쟁으로 상징되는 세계 시장경제체제 내에서는 저개발국의 생존권을 담보할 수 있는 국제적인 협의와 합의가 필수적이다. (물론 개발과 환경보전은 두 마리의 토끼를 쫓는 것과 같은 것이지만)
교회가 시민 운동을 통한 시민들의 연대를 통한 환경보전을 위한 법제화 세제및 정책의 수립과, NGO의 활발한 활동을 통한 국제적인 연대와 국가간의 정의로운 협약들의 체결에 관심하고 참여하는 것은 환경보전을 위한 청지기적 삶의 실천이라는 점에 있어서 필수적인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사회윤리적인 차원의 강조와 함께, 근본적인 관심을 기울여야 할 일은 사람의 마음을 다스리는 것일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경건과 절제를 우선되는 품성교육의 덕목으로서 강조하면서 교육하여야 할 것이다. 물론 이러한 품성교육은 환경친화적인 사회문화의 정착을 목표로 한 공동체적인 인격 형성(Character-formation)이라는 맥락 안에서 진행되어야 할 것이다. 이러한 공동체적 인격교육을 통하여서 궁극적으로는 삶의 질(quality of life)에 대하여 보다 하나님중심적이며, 환경친화적인 새로운 안목을 가지게 될 것이라는 종말론적인 소망속에서. . .
1) 김용준, "자연에 대한 인간의 책임 : 기술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향하여", p. 22, 「기독교 사상」, 1991년 9월호
2) Ibid.
3) Ibid. p. 24.
4) Ibid.
5) Ibid., p. 25.
6) Lynn White Jr., "The Historical Roots of Our Ecological Crisis," Science, Vol. CLV. March 10, 1967. pp. 1203-1207.
7) James Lovelock, The Ages of Gaia: A Biography of Our Living Earth (New York, London: W·W·Norton & Company, 1988), p. 3.
8) 양명수, "가이아 이론을 극복한 기독교 생태윤리", p. 72, 「목회와 신학」 1992년 8월호, pp. 65-76.
9) Tomas Sieger Derr, The Challenge of Biocentrism, (Unpublished paper), pp. 8-10.
10) Ibid., pp. 3-4.
11) James A. Nash, Loveing Nature : Ecological Integrity and Christian Responsibility (Abingdon Press, 1991), p. 89.
12) Ibid., pp. 74-88.
13) Claus Westermann, Genesis 1-11 : A Commentary, trans. John J. Scullion, S. J. (Minneapolis : Augusburg, 1984), p. 176.
14) Ibid., p. 101.
15) 김균진, "생태계의 위기 앞에 서 있는 창조 신학", p. 57. 「기독교 사상」1991년 9월호, pp. 56-65.
16) Nash, op. cit., pp. 102-103.
17) 김균진, op. cit., p. 61.
18) Nash, op. cit., p. 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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