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대교 영성
기독교 영성의 내용의 많은 부분과 병행하는 것이 유대교 안에 존재하지만, 유대인들은 “영성”이라는 단어를 잘 사용하지 않으며, 분명하게 다루지도 않는다. 탈무드 시대의 유대교에서는 하나님의 뜻을 행함으로써 거룩함을 얻는다.
그것은 다음과 같은 말로 시작되는 유대교의 축복 공식에서 지적된다: “우주의 왕, 우리 주 하나님을 찬양하라. 그분의 명령을 행함으로써 우리가 거룩하게 되며…”여기서 언급되는 명령들은 성경에서 파생되고 16세기에 조셉 카로(Joshep Caro, 1488-1575)의 Schlcham aruch에 명시된 613개의 명령이다. 그것은 이 권위있는 법적 논문이 유대교 신비주의자의 저술임을 지적해준다.
유대교 영성과 기독교 영성에서 달리 강조하는 점들은 다음과 같다:
1. 유대교의 작가들은 하나님과의 개인적인 관게에 대한 친밀한 이야기들을 그리 많이 다루지 않는다.
2. 유대교 신비주의의 가장 위대한 저서인 조하르(The Zohar)에는 아가서에 대한 주석이 포함되어 있지만, 일반적으로 환상적이고 에로틱한 용어는 피한다.
3. 율법, 철학, 또는 신비주의라는 제목 하에 영성을 다룬다.
4. 일부 중세 시대의 문헌을 제외하고는, 보통 영은 육에 반대되지 않으며, 동일한 용어들이 에로스와 아가페를 표현한다. 그리고 악을 의인화하지 않는다.
5. 유대교 영성에서는 아빌라의 테레사가 묘사한 “주부적 기도”(infused prayer)와 같이 감정의 단계나 상태를 상술하지 않는다.
6. 유대교는 성육신의 가능성을 거부하므로, 연합이 유대교 영성의 목표가 될 수 없다. 그러므로 유대교에서는 획득할 수 있는 최고의 상태를 “하나님께 굳게 매달림”으로 여기고, 그것을 위해 노력한다.
7. 이 주제와 관련하여 일종의 주저함이 야기된다. 그것은 주관적인 것으로 느껴지며, 율법의 성취보다는 율법에 대한 도덕률폐기론적인 반대로 이어질 수 있다.
랍비 유대교에서 영적 극치를 향한 지름길은 율법 연구이다.
그러나 율법 연구를 “당신 자신의 중요성을 나타내기 위한 왕관”으로 사용해서는 안된다. 이 영적 독서는 모든 사람의 의무이며, 하나의 영적 즐거움이다. 그리고 기도보다 더 중요한 것이 될 수도 있다. 여기에서 요구되는 헌신은 미쉬나에 묘사되어 있다:
“이것은 토라의 길이다!
당신은 소금을 넣은 빵 한 조각을 먹을 것이며, 일정량의 물을 마실 것이며, 땅에 누울 것이며, 당신 앞에는 어려운 삶이 전개될 것이다. 그리고 당신은 토라 안에서 수고할 것이다. 이렇게 한다면, 당신은 이 세상에서 행복할 것이며, 다음 세상에서 당신은 행복할 것이다.” 연구되는 법적인 문제들은 교묘하고 복잡했다. 그것들은 실질적인 타당성 때문에 중요한 것이 아니라 경건함을 불러 일으키기 때문에 중요하다고 간주되었다.
이 영적 독서는 모든 사람들이 행해야 하는 것이었으며, 하루에 세 번 의무적으로 행하는 기도, 끊임없는 축복, 계명들의 준수와 함께 유대교의 삶에 일종의 영적 지지물을 제공해 주었다. 결혼 역시 의무였다. 이 영성은 예시바(탈무드 학원)에서 가장 집약된 형태를 취했다. 현대 히브리 시인 비알릭(Bialik)은 The Matmid(영원한 학생)이라는 시에서 “율법에 헌신한” 삶 및 그에 따르는 희생을 묘사한다.
이 민주적 영성의 형태와 방법은 다양했다. 성구함(聖句函)은 필수적인 것이었다. 예배자가 호세아서 2:21절을 낭송하는 동안 성구함으로 손가락 주위에 반지 모양을 만들었다. 가정에서의 의식들은 가족들을 거룩하게 하고, 식탁을 제단으로 만들고, 가장과 아내를 제사장과 여제사장으로 만들었다. 각각의 방에 하나님이 임재하신다는 것을 나타내기 위해 문설주에 신명기의 몇 절을 적은 양피지를 달아 놓았다. 풍부한 짧은 축복들이 이 세상의 삶을 영원한 삶과 연결해 주었다. 음식과 의복도 의식적으로 적합한 것이어야 했으며, 의식적인 목욕(Mikveh)으로 청결은 물론 의식적인 정결을 확보했다. 오늘날도 이러한 랍비 영성의 표현들이 통용되고 있다.
모든 사람들을 구속하는 이 민주적 영성과는 상관없이, 유대교의 신비적 전통이 카발라에 기초를 둔 영성의 학파들이 생겨났다. 18세기에 하시딤 운동에 의해 많은 신비적 교리와 관습들이 대중화되기 전에는 유식한 엘리트들만이 이 카발라 무리에 속했으며, 그들의 가르침은 개인적인 것보다는 견신론적이었다. 그들은 창조의 문제, 즉 하나님 안에 있는 선과 악의 근원이라는 문제, 그리고 에스겔이 본 병거, 즉 하나님께로 올라감이라는 문제에 대해 깊이 생각했다.
인용된 본문들은 성경이나 랍비의 문헌이지만, 가르침과 방법은 신플라톤주의에서 파생된 것이었다. 유대교 신비주의 전통에 속한 주요한 저서는 조하르(The Zohar)이다. 현대의 학자들의 견해에 의하면, 그것은 스페인에 거주하던 유대인 모세 데 레온(Meses de Leon, 1250-1305)이 편찬한 것이다. 전통적으로, 그것의 기원은 랍비 시몬 바르 요카이(Shimon bar Yochai)에게서 찾는다. 그 안에는 견신론 체계가 상세히 설명되어 있으며, 거기서는 방사의 체계 또는 Sephirot가 하나님과 그의 피조물, 무한자와 유한한 것들을 연결해준다. 피조 세계 안에는 신성(divinity)의 불티가 존재하며, 하나의 피조물인 인간은 그것들을 속량하여 하나님께로 들어올릴 수 있다. 정교한 묵상과 기도의 체계들은 예배자가 불티들을 재결합하는 데 도움을 준다.
이같은 카바나(Kavanah)의 고귀한 영성은 랍비 이삭 라우리아(Isaac Lauria, 1534-1572)의 삶과 저서들 안에서 가장 잘 드러난다. 이스라엘의 사페드에 있는 그의 무덤은 현재 많은 사람들이 찾는 순례지이다. 현대 유대교의 가장 큰 영성의 운동은 18세기에 폴랜드 남부에서 시작된 하시딤(Hasidim) 운동이다. 그 시대의 기독교 운동들과의 직접적인 관계를 증명할 수는 없지만, 웨슬리 형제의 감리교 운동, 정교회의 스타레츠 운동(Starets movement)과 유사한 점이 많다. 실제로 『카라마조프의 형제들』에 등장하는 조시마 신부의 모습은 하시딤 파 유대인 학교 교사(rebbe)의 모습과 매우 흡사하다.
이 경건 운동은 랍비 학교인 예시바에서 공부하는 것보다 카르파티아 산맥에서 독거하면서 묵상하는 편을 선호했던 카리스마적인 인물 바알 셈 토프(Baal Shem Tov, c. 1700-1760)에 의해 시작되었다. 그는 폴랜드 남부의 유대인 마을들을 유랑하면서 회당이 아니라 들판에서 모인 사람들에게 연설을 하면서 핵심적인 대중적인 영성을 지적해 주었다. 빌나의 엘리야(Elijah of Vilna)라는 랍비는 그의 가르침이 범신론적인 것이라고 정죄했으며, 황제의 측근들의 중재 덕분에 그는 추방을 면했다. 사막 교부들이나 아씨시의 프랜시스에 관해 여러 가지 전설과 이야기가 있듯이, 그와 그의 제자들에 관해서도 많은 전설과 이야기와 금언들이 생겨났다.
마틴 부버(1878-1965)는 그것들이 현대에 읽힐 수 있도록 예비하고 또 대중화했으며, 그들의 사랑, 웃음 경건 등을 강조하면서 그들의 사상을 체계적으로 제시했다. 보다 최근에, 게르솜 숄렘(Gershom Scholem)과 그의 제자들은 그들의 도덕률폐기론적 요소, 메시아적 요소, 카발라적 요소 등을 강조했다. 바알 셈의 가르침은 하나님의 내재성과 친밀성에 관심을 가졌다. 하나님은 특히 단순하고 무식한 사람들에게 가까이 계셨다. 그는 죄인들과 회개하는 사람들에게 대해 개방적이었다. 이러한 가르침에는 큰 열심이 동반되었다.
이 유대교 신앙부흥에서 기도는 노래와 음악으로 변화되었다. 하시딤 운동이 성장함에 따라 “의로운 사람들” 또는 Tsadikkim이라고 알려진 많은 교사들이 출현했다. 그들의 역할은 구루(guru)의 역할에 비교할 수 있으며, 그들 덕분에 제자들의 영혼이 고귀해질 수 있었다. 하시딤 파의 중요한 교사들 중에는 슈네우르 살만(Shneur Zalman of Lyday, 1747-1813)과 브라스틀라프의 나만(Nahman of Bratslave, 1772-1881)이 있다. 전자는 초기 하시딤의 카리스마적인 특성들을 랍비 연구서에 재결합했다. 후자는 바알 셈 토프와는 달리 하나님과 인간을 분리하는 거리, 악의 힘, 계시의 중요성, 그리고 메시아의 오심 등을 강조했다. 그는 자신의 신학과 영성을 심오한 상징적인 의미들이 가득한 이야기로 표현했다.
오늘날 정통주의, 경건, 영성 등을 가르치는 많은 하시딤 운동들이 있다.
각각의 운동은 그 창시자 및 그를 계승한 교사들에게서 기원한 나름의 접근 방법을 가지고 있다.
그 중에 몇 가지 예를 들면 다음과 같다:
1. 경건을 강조하는 루바비치 파(Lubavitcher).
이 파에서는 유대인에게 복음을 전파하며, 지금까지 관습을 지키지 않는 사람들을 환영한다.
2. 게레 파(Gerer). 학문적으로 유명하다.
3. 브라트슬라브 파(Bartslaver). 신비적이며, 접근하기가 쉽지 않다. 이 외에도 각기 나름의 교사와 특징적인 영성을 가진 운동들이 많다.
하시딤 파가 아닌 현대의 탁월한 교사로는 라프 쿡(Rav Kook, 1865-1935)와 요수아 헤셀(Joshua Heschel, 1907-1972)가 있다.
보수파에 의한 새로운 전례의 개정에서는, 개혁과 유대교 내의 진보적인 운동들, 개인적인 기도와 묵상 등이 크게 강조되었다.
Chavurah 운동은 새로운 형태의 예배와 종교적 조직에 관한 실험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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