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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성신학의 이해

하나님아들 2022. 1. 12. 15:33

영성신학의 이해

*출   처|  목회연구소
            


1. 기독교영성의 정의

영성은靈性(영성) 이라고 한문으로 표현하며, 영어로는 Spirituality 라고
표기한다. 이말의 사전적인 의미는종교적인 가치에 붙잡혀서 사는 영적인 삶의
상태를 가리킨다. 또한 영성이란 전인격적인 의미에서의 인격과 그의 소산,
학문,문화, 시대정신, 주의들을 지칭하는 말이다.
기독교적 영성은 서방교회의 영성, 동방교회의 영성, 개신교회의 영성,
카톨릭의 영성, 루터교의 영성, 성결교회의 영성, 장로교의 영성으로 말할 수
있다.
영성은 자기가 판단할 때, 가장 이상적이요 최고의 덕과 가치를 가지고 있으며
분명한 인생의 목표를 제시해 주는 하나의 정신을 받아드려 그 정신을 실천하기
위해 살고 죽는 것을 의미한다.

기독교 영성은
첫째, 기독교 영성은 역사적 예수의 삶과 인격과 정신을 본받아 살며 그의
성품을 그리스도인 속에 형성하는 것이다.
둘째, 기독교 영성은 예수 그리스도의 삶을 본받아 작은 예수가 되어 살려고
힘쓴다.
셋째, 기독교 영성도 훈련을 강조하며 그 훈련은 영성교육이다.

기독교 영성의 독특성은
첫째는 기독교 영성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 산다는 점입니다.
둘째는 역사적인 예수의 정신과 삶을 계승하려는 인본적인 요소를 가질 뿐만
아니라 친히 하나님이신 예수와 수직적인 교제와 하나님 중심의 영성인 것이다.

기독교 영성의 독특성을 부연하면 첫째 기독교 영성이 주 예수님과 영적인
교제라는 사실을 강조하고,둘째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와의 인격적인 교제는
삶의 변화를 가져오며, 셋째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임을 강조한다.
그러므로 진정한 영성은 묵상과 기도와 예식과 성서공부를 통해서 영적 삶을
개발하는 것이요, 하나님의 사랑을 가지고 세상으로 들어가 사람들에게 그
사랑을 말하며 실천하는 삶의 과정이라고 말한다.

결국 영성은
첫째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서 형성되는 독특한 차원의 관계성과 관련성을
총칭하고/
둘째 역사적 상황 속에서 인간들이 실제로 보고 듣고,느낀 여러 유형의
체험이며/
셋째 하나님에 관한 특징보다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통해 얻게 된 인간의
경험적 특징을 의미하는 용어로 사용되고 있다.

실천적 차원에서 홈즈(Urban T.Holmes,Ⅲ)는
①영성이란 초월적 존재와의 관계를 바라는 인간의 보편적 지향성이며
또한 그와 관련된 잠재능력이다.
②영성이란 인간의 감각능력을 초월하는 존재에 의해 겪게 되는 초월적인
경험이다.
③초월적 경험은 인간 자신의 노력의 결과로 얻기 보다는
기다림,신뢰,수용성과 같은 확장된 의식에 의해서만 포착될 수 있는 것이다.
④영성은 확장된 의식에 의해 포착된 추월적인 경험을 하는 사람의 역사적
상황속에서 이해되고 실현되는 것이다.
⑤영성의 체험이나 확장된 의식은 불가피하게 인간의 행동으로 표출되는데
그 행동이란 이 세상에서 창조적 행위를 통해 그 자신을 드러내는 초월적 존재에
의해 생겨나는 것으로 묘사될 수 있다.

2. 영성의 어원적 이해

구약/히브리어 루아흐(ruach) 신약/헬라어 퓨뉴마(pnuma)
a. 루아흐(ruach)의 의미
ruach 은 성령을 표기하는 구약성서의 히브리어이다.
ruach는 바람, 숨, 생명력, 영(Spirit), 정서, 의지력 등을의미한다.ruach
이라는 단어는 구약에 389회 나타나는데 이중에 378회는 히브리어, 11회는
아람어로 기술되어 있다. 이것들을 분석해 보면 세가지 중요한 의미가 있다.
첫째는바람을 일으킨다 는 뜻으로 113회,
둘째는 사람과 우상들의 정신이나 영들 이라는 말로 129회,
셋째는 하나님과 관계된 성령 으로 136회가 사용되고 있다.


b. 퓨뉴마(pnuma)의 의미
헬라어 동사에서 나온 말로써 바람이 불다. 숨을 쉬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퓨뉴마의 의미는 바람이 임의로 불어 공기가 흐르는 것과 같이 숨을
들어마시고 내쉬는 생명력을 의미한다. 이것은 자연의 바람, 인간의 숨결,
생명의 원인과 함께 사람들이나 짐승 그리고 사탄의 영이나 영들, 정신등을
나타내는 말이다.
신약성서에서는 복음서에서 105회, 사도행전에서 69회, 바울서신에서 161회,
공동서신에서 27회, 계시록에서 23회등 모두 385회 사용되었다.


신약성서에서 다양하게 나타난 영성의 구심점은 항상 예수 그리스도라 할 수
있는데 그런 의미에서 신약의 영성의 근거는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체험 그리고
제자들의 부활체험과 초대교회의 성령 강림사건에 있다고 볼 수 있다.

3. 영성의 역사적 이해

a. 초대교회 시대
초대 기독교 시대는 30년경부터 콘스탄틴 대제하에서 기독교가 로마의 종교로
공인 (313) 받을 때까지 이다.
초대교회 교인들은 약속하신 성령을 기다렸다.
(고전 12, 13, 14장 및 로마서 12장).

바울에 의하면 성령은 그리스도를 개인의식안에 계시하는 신적인 작용을 하고
새 생활을 가능케 하는 모든 은총의 근원이 되기도 한다.
(롬 5:5, 7:6, 8:2 ; 고전 2:4 ; 엡 1:7, 4:23)

요한은 그의 복음서와 서간에서 독특한 성령론을 발전시켰다. 그에 의면
성령의 소임은 그리스도를 신자에게 계시하고 그에게 영광을 돌리며 그리스도의
교훈을 기억시키고 가르치며 신자들을 완전한 지식에로 이끌고 간다.
초대교회의 과제는 세계선교와 함께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바른 지식의
정립이었다.

2세기 중엽에 나타난 몬타너스의 성령운동과 재림설교의 실패는 기독론의
지식이 미숙한 까닭이었다. 몬타너스주의는 성신강림, 예언적 열성을 합해
말세의 박두를 외쳤는데 그것은 당시 교회의 세속화에 대한 반동이기도 했다.

어거스틴은 바울을 따라 하나님과 이웃에 대한 사랑이 율법을 완성시켰다고
생각하여 율법대신에 사랑을 강조하며 영성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으로
생각하였다. 그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영적인식과 영적생활에서 필수적인 것은
영혼 깊은데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일이었다. 바울에서와 같이 어거스틴에게
있어서도 가장 중요한 경건과 영성은 믿음이라기 보다는 사랑이다.

어거스틴은 저서 독백의 서두에 만물이 하나님께로 와서 하나님에게로
돌아간다는 경건한 기도를 드리고 있다. 이러한 철학적, 이론적 노력도 인간의
종교적 영성운동으로서 경건해질 수 있다고 하였다. 즉, 하나님과 이웃에 대한
사랑이 율법을 완성 시켰다고 생각하여 율법대신에 사랑을 강조하므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영성이라 생각하였다.

b. 중세교회 시대
중세교회의 영성운동의 두 맥락은 초대교회때부터 있었던 수도원과 강력한
서방 로마카톨릭 교회라는 체제였다. 중세의 수도원 운동은 도피적인 은둔적
정신운동이며, 개인주의 운동일뿐 아니라 성서의 말씀과는 거리가 먼
금욕주의적인
고행주의를 중심으로 한 비복음적 운동이라고 비난하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진정한 수도원 운동을 통한 영성훈련은 교회갱신, 사회정화, 구제사업, 교육제도
발전, 농축기술 개발, 종교 사상가 배출 등으로 형식적 형태만 남은 교회에
새로운 생명력을 부어 넣은 활력소가 되었다.

수도원 운동의 시조인 안토니는 중앙 이집트의 코마에서 토착민의 혈통을 받아
250년경 출생하였다. 부자 청년에게 하신 그리스도의 말씀에 깊은 인상을 받은
그는 그의 소유를 포기하고 그의 고향마을에서 금욕생활을 시작하였다. 안토니를
모방하려는 사람도 많이 생겨 독거를 고집하기도 하고, 어떤이들은 집단거주에
들어가기도 하였다.

수도원 운동의 위대한 개혁자는 누르샤의 베네딕트였다. 480년에 출생한 그는
잠시 동안 로마에서 수학하였으나 그 도시의 죄악에 아연하여 로마 동편
수비아코에 있는 산속의 동굴에 들어가 은거하였다. 베네딕트의 유명한 규범은
그의 인간 본질에 대한 깊은 이해와 조직에 대한 로마적 능력을 보여 주었다.
그것은 엄격한 생활이긴 하였으나, 보통 성실한 사람이면 절대로 불가능하지
않은 생활이었다.

베네딕트 수도원 운동의 안정되고 온건한 이상과는 매우 대조적으로, 켈트
형식의 수도원 운동을 신비주의 정신에 입각하여 훈련되지 않는 무모성과 엄격한
금욕생활의 특색을 가지고 있었다. 이 운동의 뛰어난 공헌은 열성적인
선교활동과 학문에의 헌신에 있었다.

c. 종교개혁 시대
종교개혁 정신은 프로테스탄트 원리 로서 잘못된 신앙을 거부하고 올바른
성서적 신앙으로 돌아가자는 교회의 갱신운동이다. 여기서 신-인간의 관계는
존재론적인 아래로부터의 당연한 획득된 관계가 아니라 위로부터의 하나님의
은혜의 강림이며 은총으로 시작되어, 지속되며 끝난다는 것이다.

은총의 현존은 계시사건으로 발생하고 인간이 하나님의 은총을 심령의 문을
열고 받아들일 때 믿음은 시작된다. 믿음이란 또 다른 교리의 지적 인지 행위가
아니라 신의 은총적 강림과 은총의 부어주심을 내가 죄인임에도 불구하고
받아들이고, 마음문을 열고 죄인을 용납하시는 은혜로운 자비의 아버지를 받아
모시는 것이다.

중세기의 기독교 신학의 특징은 세가지 사닥다리에 의해서 하늘에 올라가는
점이라고 할 것이다. 그것은 스콜라주의적 합리주의와 신비주의적 황홀경험과
일반적인 도덕주의이다. 합리주의는 이성을 근거로, 신비주의는 경험을 근거로,
도덕주의는 행위를 근거로 하여 신에게 나아가는 것이다. 그런데 종교개혁에
의한 교회사의 전환점은 어거스틴파의 한 수도사인 마틴 루터 (Martin Luther,
1483-1546)가 수도원의 어떤 방에서 체험했던 경험에서 이루어 졌다.루터는
로마체제를 뚫고 나아가서 세계를 변혁할 수 있는 돌파구를 열었던 사람이다.

그것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함을 얻는다는 그의 체험적 확신에서
였다.루터의 궁극적 목표인 의롭다함은 믿음으로 말미암는 것이며 그 믿음은
성서의 메시지의 전적수용이고 그것은 성령의 역사로만 가능한 것이다.
그리하여 루터의 신과의 관계는 객관적 관계가 아니고 인격적 신뢰의 관계가
된 것이다. 그러나 루터에게 있어서의 성령의 역사는 성서에 기록된 객관적
계시성의 주관적 신앙화 즉 성경을 통한 이신득의에 의한 신-인간에 있어서의
인격적 신뢰의 관계성립에 지나치게 치중한 나머지 그리스도인의 생활에 대한
언급에 있어서 소홀하였다.

그런가하면 칼빈은 한 걸음 더 나아가서 그의 기독교 강요의 성령론 안에서
신생( Regeneration)과 함께 그리스도인의 생활을 언급하고 있다.그에게 있어서
신생은 양면성을 동시에 다 가지게 되는데 한면은 회개로 인한 옛 사람의
수정이고 또 한면은 새로운 삶에로의 참여인 것이다.즉, 신생은 다름아닌
하나님의 형상으로의 회복이다. 이 회복은 성령의 역사로 가능하다.

c. 근대교회 시대
근세에 있어서의 기독교 영성운동은 웨슬레 (John Wesley)를 중심한 영국의
부흥운동이 그 주축이 된다고 할 것이다. 웨슬레가 회심하던 해인 1738년에
있어서 영국의 도덕과 종교는 일찌기 어느 기독교국에서도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극심히 부패되어 있었다.

사실상 18세기 초기의 영국의 부패는 종교, 특히 종교지도자들의 타락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이신론 (deism)의 영향에 의한 결과이었다.
이때
야말로 이신론이 모든 분야를 휩쓸었던 시대였다. 신의 존재는 부정하지 않으나
인간의 삶속에 역사하시는 존재로서의 하나님은 제거되어 버리고 저 하늘과 땅을
연결하는 계시의 다리를 부수어 버리며 성서의 권위를 형편없이 떨어뜨렸다.

웨슬레 신학의 중심은 확신 (assurance)과 완전 (perfection)의 두가지 교리이
다. 즉, 믿음으로 말미암은 신생과 사랑으로 인한 성화인 것이다.성령은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라는 사실을 우리의 심령속에서 증거 하신다. 그리하여 그는
스스로 확신이라고 칭하는 복된 체험의 기쁨을 맛보았을 뿐 아니라 전 세계의
모든 백성에게 이 기쁜 확신의 체험을 외쳤다.

이상과 같은 역사적 흐름 속에서도 개신교의 영성은 성경중심, 복음중심의
영성이며, 성령이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도록 하는 삶의 원천이며, 성령이
우리들로 하여금 예수 그리스도의 공동체의 일원으로 살도록 하는 영성생활이
현재에 이르기까지 추구되었다.

결론을 내리면 오늘날의 영성화의 목적은

①교회로 하여금 그리스도께서 그의 영이신 성령의 일깨우는 능력에 의하여
모이게 함으로써 신앙공동체가 되게 하는 일이다.
②교회로 하여금 그리스도에 의하여 그리고 성령의 생동케 하시는 능력으
로 말미암아 세워지고 성장되며 옹호되는 신앙공동체가 되는 일이다.
③교회로 하여금 그리스도에 의하여 그리고 그의 영이신 성령의 조명하는
능력으로 세상에 파송되는 신앙공동체가 되게 하는 일이다.

즉 교회를 교회되게 하며 개인생활과 사회 속에서 그리스도인으로 사명을
다하며 더 나아가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한 인간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교회속에서 자신의 역할을 강당하면서 시대와 역사속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하는데 목적을 두어야 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