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

하나님의 사역들

하나님아들 2022. 1. 21. 17:38
하나님의 사역들









4. 작정과 예정
4-1. 작정
4-2. 예정
4-3. 선택
4-4. 유기


5. 창조
5-1. 창조의 주체
5-2. 창조의 시간
5-3. 창조의 대상
5-4. 창조의 방법
5-5. 창조를 부정하는 이론들
5-6. 창조의 목적


6. 섭리
6-1. 섭리의 요소와 범위
6-2. 섭리의 방식
6-3. 섭리와 죄 문제
6-4. 섭리의 목적


7. 후대 기적의 문제
7-1. 성경의 초자연적 은사들은 영속적인가?
7-2. 오늘날의 은사운동에 대하여




4. 작정과 예정
하나님이 어떠한 분이신가를 생각했으므로 이제는 하나님이 무슨 일을 하시는가를 생각해보자. 하나님의 하시는 일들 곧 그의 사역들은 작정과 창조와 섭리라는 말로 요약된다. 첫째로, 신학에서, 작정(作定)은 이 세상 모든 일들에 대한 하나님의 영원하신 계획을 가리키는 말로 사용되고, 이와 구별하여 예정(豫定)은 사람의 구원에 대한 하나님의 영원하신 계획을 가리키는 말로 사용된다.


4-1. 작정
작정(作定, decree)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3:1은 작정에 대해 다음과 같이 잘 진술한다: "하나님께서는 영원 전부터 가장 지혜롭고 거룩한 자신의 뜻의 계획에 의해 무엇이든지 일어날 일들을 자유롭고 불변적이게 정하셨다. 그러나 그것에 의해 하나님께서 죄의 조성자(造成者)이지 않으시며, 피조물들의 의지가 침해되지도 않으며, 또한 제2 원인들의 자유나 우연함이 제거되지도 않고 오히려 확립된다."
하나님의 의지에 관해, 흔히 하나님의 비밀한 의지와 하나님의 계시된 의지를 구별한다. 전자는 하나님의 작정적 의지(decretive will)로서 반드시 성취되지만, 후자는 율법과 복음에 계시된 하나님의 명령적 의지(preceptive will)로서 사람에게 의무와 책임을 부과할 뿐이며 반드시 성취되는 것은 아니다. 신명기 29:29, "오묘한 일[은밀한 일들]은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속하였거니와 나타난 일[일들]은 영구히 우리와 우리 자손에게 속하였나니."
작정의 진리에 대한 증거는 무엇인가? 합리적으로 생각해 볼 때, 하나님의 지혜는 하나님의 영원한 작정을 암시한다. 사람도 무슨 일을 하기 전에 자세한 계획을 세운다. 하물며 전지 전능하신 완전자 하나님께서 우주를 창조하실 때 완전한 계획을 가지셨음은 지극히 합당하다. 특히, 사물을 미리 보시고 미리 아시는 하나님의 능력은 확실성을 내포하고 그 확실성은 작정을 내포한다. 이 확실성의 근거가 우연이나 인간의 자유일 수 없음은 하나님이 주권적이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선하심도 작정의 개념을 지원한다. 하나님께서 우주의 진행과 미래를 불확실한 우연과 인간 자유에 둔다는 것은 그의 선하심과 배치된다.
그러나 성경은 더욱 다음의 여러 구절들에서 작정의 진리를 명백하게 그리고 충분하게 증거한다. 시편 115:3, "우리 하나님은 하늘에 계셔서 원하시는(카페츠) 모든 것을 행하셨나이다." 시편 135:6, "여호와께서 무릇 기뻐하시는(카페츠) 일을 천지와 바다와 모든 깊은 데서 다 행하셨도다." 이사야 14:24, 27, "만군의 여호와께서 맹세하여 가라사대 나의 생각한 것이 반드시 되며 나의 경영한(야아츠) 것이 반드시 이루리라. . . . 만군의 여호와께서 경영하셨은즉(야아츠) 누가 능히 그것을 폐하며 그 손을 펴셨은즉 누가 능히 그것을 돌이키랴?" 이사야 38:26, "이 일들은 내가 태초부터 행한 바요 상고부터 정한 바로서 이제 내가 이루어." 이사야 41:4, "이 일을 누가 행하였느냐? 누가 이루었느냐? 누가 태초부터 만대(萬代)를 명정(命定)하였느냐? 나 여호와라." 이사야 46:10, 11, "내가 종말을 처음부터 고하며 아직 이루지 아니한 일을 옛적부터 보이고 이르기를 나의 모략(에차)이 설 것이니 내가 나의 모든 기뻐하는 것(카페츠)을 이루리라. . . . 내가 말하였으즉 정녕 이룰 것이요 경영하였은즉(에차) 정녕 행하리라." 다니엘 4:35, "땅의 모든 거민을 없는 것같이 여기시며 하늘의 군사에게든지, 땅의 거민에게든지 그는 자기 뜻대로 행하시나니." 로마서 11:36, "이는 만물[모든 것]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작정의 성격은 어떠한가? 작정의 성격에 관하여, 신앙고백서는 다음과 같이 진술한다: "하나님께서는 영원 전부터 가장 지혜롭고 거룩한 자신의 뜻의 계획에 의해 무엇이든지 일어날 일들을 자유롭고 불변적이게 정하셨다. 그러나 그것에 의해 하나님께서 죄의 조성자(造成者)이지 않으시며, 피조물들의 의지가 침해되지도 않으며, 또한 제2 원인들의 자유나 우연함이 제거되지도 않고 오히려 확립된다."
우선, 하나님의 작정은 영원적이다. 창조와 섭리는 논리적으로 작정 후에 그리고 시간 세계 속에서 생각될 수 있을 뿐이다. 또한 하나님의 작정은 주권적이다. 그것은 그의 기쁘신 뜻이다. 그것은, 피조물들의 어떤 조건들에 의존하지 않는, 그의 절대적 무조건적 행위이다. 또한 하나님의 작정은 불변적이다. 작정은 확고히 정해진 계획을 의미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작정은 하나님이 자기 마음대로 아무렇게나 하시는 어떤 전횡적 행위가 아니고, 하나님의 지극히 지혜로우시고 거룩하시고 선하신 뜻에 근거한 행위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작정은 지극히 거룩하고 선하다.
그러나 성경에 계시된 하나님의 작정 진리는 세상의 소위 운명론(fatalism)과는 다르다. 운명론은 세상의 모든 일들이 미리 결정되어 있어 인간의 노력으로도 변경될 수 없다고 믿는 사상이다. 그러나 성경이 계시하는 하나님의 작정은 인간의 자유적, 자발적 행위와 그것에 따른 책임을 부정하지 않고 오히려 긍정한다.
잠언 16:33, "사람이 제비는 뽑으나 일을 작정하기는 여호와께 있느니라." 에스겔 36:37, "그래도 이스라엘 족속이 이와 같이 자기들에게 이루어 주기를 내게 구하여야 할지라." 마태복음 7:7,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빌립보서 2:13, "너희 안에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로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 요한계시록 22:12, "내가 줄 상이 내게 있어 각 사람에게 그의 일한 대로 갚아 주리라."
또한, 성경은 사람편에서 볼 때 세상에 우연한 일들이 있음을 부정하지 않고 긍정한다. 룻기 2:3, "[나오미의 며느리 모압 여자 룻은] 우연히 엘리멜렉의 친족 보아스에게 속한 밭에 이르렀더라." 열왕기상 22:34, "한 사람이 우연히 활을 당기어 이스라엘 왕 [아합]의 갑옷 솔기를 쏜지라."


작정의 범위는 어떠한가? 작정은 우주의 모든 일들을 포함한다. 로마서 11:36,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에베소서 1:11, "모든 일을 그 마음의 원대로 역사하시는 자의 뜻을 따라 우리가 예정을 입어."
심지어 죄의 문제까지도 하나님의 작정 속에 포함된다. 하나님의 뜻과 인간의 죄와의 관계는 이해하기가 매우 어렵지만, 그러나 성경은 인간의 죄까지 하나님의 작정 속에 포함시킨다. 이 세상의 그 어떤 것도 하나님의 뜻 밖에 있지 않다.
창세기 45:8, "나를 이리로 보낸 자는 당신들이 아니요 하나님이시라." 사무엘상 2:25, "[엘리의 아들들이] 그 아비의 말을 듣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그들을 죽이기로 뜻하셨음이었더라(카페츠)." 잠언 16:4, "여호와께서 온갖 것을 그 씌움에 적당하게 지으셨나니 악인도 악한 날에 적당하게 하셨느니라." 누가복음 22:22, "인자는 이미 작정된 대로 가거니와 그를 파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으리로다." 로마서 9:17, 22, "성경이 바로에게 이르시되 내가 이 일을 위하여 너를 세웠으니 . . . . 만일 하나님이 그 진노를 보이시고 그 능력을 알게 하고자 하사 멸하기로 준비된 진노의 그릇을 오래 참으심으로 관용하시고."
죄에 대한 하나님의 작정은 흔히 '허용적 작정'이라고 표현된다. 이 말은 죄까지도 하나님의 주권적 작정 속에 있으나 죄의 책임은 하나님께 돌릴 수 없음을 나타낸다. 하나님은 지극히 거룩하시므로 죄의 조성자가 되실 수 없다. 죄는 오직 피조물에게서만 나온다. 하나님께서 마귀의 존재와 활동들도 작정 속에 두셨으나, 마귀를 마귀 되게 하신 자는 아니시다. 마귀는 스스로 타락하였다. 하나님께서 그것을 허용하셨으나, 우리가 그 허물과 책임을 하나님께 돌릴 수는 없다.  


작정의 목적은 무엇인가? 작정의 궁극적 목적은 하나님 자신의 영광을 위해서이다. 창조와 구속과 심판의 궁극적 목적도 그러하다. 시편 19:1, "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요한계시록 4:11, "우리 주 하나님이여, 영광과 존귀와 능력을 받으시는 것이 합당하오니 주께서 만물을 지으신지라." 이사야 48:11, "내가 나를 위하며 내가 나를 위하여 이를 이룰 것이라. 어찌 내 이름을 욕되게 하리요! 내 영광을 다른 자에게 주지 아니하리라." 에베소서 1:6, 12, 14, "[예정, 구속, 중생의 목적은] 그의[하나님의]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는 것이라." 로마서 11:36, "이는 만물[모든 것]이 주[하나님]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영광이 그에게 세세에 있으리로다. 아멘."


4-2. 예정
예정(豫定, predestination, foreordination)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예정은 사람의 구원에 대한 하나님의 영원하신 계획을 가리킨다. 예정의 개념은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3:3, 4에 다음과 같이 잘 진술되어 있다: "하나님의 작정에 의하여 그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하여 어떤 사람들과 천사들은 영원한 생명에 이르도록 예정되었고, 다른 이들은 영원한 죽음에 이르도록 미리 정해졌다"; "이렇게 예정된 이들 천사들과 사람들은 개별적으로 그리고 불변적으로 계획되어진 것이며 그들의 수는 매우 확실하고 명확해서 더해지거나 감해질 수 없다."
예정의 주체는 주로 성부에게 돌려지며, 예정의 대상은 모든 사람들과 천사들이다. 특히, 사람을 향하신 하나님의 예정은 선택과 유기(遺棄, 버리심)의 두 요소로 구성된다.


4-3. 선택
예정의 첫번째 요소는 선택이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3:5은 선택에 관하여 이렇게 진술한다: "인류 중에서 생명에 이르도록 예정된 자들을, 하나님께서는 세상의 기초가 놓이기 전에 그의 영원하시며 불변하신 목적과 그의 은밀한 계획과 기쁘신 뜻에 따라 오직 그의 값 없는 은혜와 사랑으로, 영원한 영광에 이르도록 그리스도 안에서 선택하셨고; 신앙이나 선행들이나, 혹은 그것들 중에서 끝까지 견딤이나, 혹은 피조물 안의 다른 어떤 것을 조건들로 혹은 그를 그것으로 이끄는 원인들로 미리 아심이 없이 하셨으며; 모든 것이 그의 영광스러운 은혜의 찬송이 되게 하셨다."
선택에 대한 성경적 증거들은 다음과 같다. 요한복음 6:39, "내게 주신 자(판 호 데도케 모이)." '주신'이라는 원어(데도케)는 완료시제이며 하나님의 선택이 확정되어 있음을 보인다. 요한복음 17:6, "세상 중에서 내게 주신 사람들에게 . . . 저희는 아버지의 것이었는데 내게 주셨으며." 요한복음 17:9, "내가 비옵는 것은 세상을 위함이 아니요 내게 주신 자들을 위함이니이다." 사도행전 13:48,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된 자(테타그메노이--완료 수동태)는 다 믿더라." 로마서 8:29,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로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에베소서 1:3-5,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 . .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베드로전서 1:2, "하나님 아버지의 미리 아심을 따라 성령의 거룩하게 하심으로 순종함과 예수 그리스도의 피뿌림을 얻기 위하여 택하심을 입은 자들에게."
선택의 성격들은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하나님의 선택은 영원적이다. 에베소서 1:4, "창세 전에 . . . 우리를 택하사." 하나님의 선택은 또한 불변적이다. 하나님의 작정이 그러하듯이, 그의 예정도 불변적이다. 요한복음 6:39,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않고." 사도행전 13:48,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된 자는 다(호소이) 믿더라." 로마서 8:30,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디모데후서 2:19, "하나님의 견고한 터는 섰으니 인침이 있어 일렀으되 주께서 자기 백성을 아신다 하며."
하나님의 선택은 또한 주권적, 무조건적이다. 만일 그렇지 않고 그것이 사람의 회개나 믿음에 근거한다면, 그것은 하나님이 사람을 선택한 것이라기보다, 사람이 하나님을 선택한 것이라고 말해야 할 것이다. 요한복음 6:37, "아버지께서 내게 주시는 자는 다 내게로 올 것이요." 예수께 오는 자 곧 예수를 믿는 자가 하나님께서 예수께 주시는 자 곧 하나님의 선택을 받는 자가 아니고, 반대로 하나님께서 예수께 주시는 자 곧 선택받은 자가 예수께 나아와 믿는다. 요한복음 10:26, "너희는 내 양이 아니므로 믿지 아니하는도다." 예수를 믿지 않기 때문에 예수의 양이 아닌 것이 아니고, 예수의 양이 아니므로 예수를 믿지 않는다.
로마서 9:11, "그 자식들이 아직 나지도 아니하고 무슨 선이나 악을 행하지 아니한 때에 택하심을 따라 되는 하나님의 뜻이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 오직 부르시는 이에게로 말미암아 서게[이루어지게] 하려 하사." 로마서 9:15, 16, "모세에게 이르시되 내가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히 여기고 불쌍히 여길 자를 불쌍히 여기리라 하셨으니, 그런즉 원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달음박질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음이니라." 로마서 9:18, "그런즉 하나님께서 하고자 하시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고 하고자 하시는 자를 강퍅케 하시느니라." 에베소서 1:5,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에베소서 1:11, "모든 일을 그 마음의 원대로 역사하시는 자의 뜻을 따라 우리가 예정을 입어." 디모데후서 1:9,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사 거룩하신 부르심으로 부르심은 우리의 행위대로 하심이 아니요 오직 자기 뜻과 영원한 때 전부터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하심이라."
하나님의 선택 안에는 구원의 수단들도 포함된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3:6,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들을 영광에 이르도록 정하셨을 때, 그는 그의 뜻의 영원하고 가장 자유로운 계획에 의해 그것을 위한 모든 수단들도 예정하셨다. 그러므로 아담 안에서 타락하였으나 선택함을 입은 그들은 그리스도에 의해 구속(救贖)되고; 정한 때에 활동하시는 그의 영에 의해 효력 있게 부르심을 받아 그리스도를 믿고; 의롭다 하심을 얻고 양자(養子)가 되고 거룩해지고 그의 능력으로 믿음을 통해 구원에 이르도록 보존된다. 오직 선택된 자들 외에는, 아무도 그리스도에 의해 구속되고 효력 있게 부르심을 받고 의롭다 하심을 얻고 양자가 되고 거룩해지고 구원을 받지 못한다."
특히 하나님의 선택은 그리스도 안에서 즉 그리스도의 속죄 사역의 공로에 근거한 것이다. 죄인들의 구원 선택은 전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에 근거한 하나님의 은혜이다. 에베소서 1:4,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디모데후서 1:9, "자기 뜻과 영원한 때 전부터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하심이라."
이와 같이 하나님의 선택은 자동적인 무엇이 아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 사역과 성령의 중생과 성화 사역, 그리고 전도, 회개와 믿음, 순종 등 인간편에서의 자발적인 행위들을 통하여 성취된다. 하나님의 예정 진리에 대한 많은 이들의 오해는 이 점에 대한 무지에 기인한다.
선택과 타락의 관계는 어떠한가? 시간적으로, 하나님의 선택이 창세 전이므로 타락 전이라는 것은 의문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논리적으로, 하나님이 사람들을 선택하실 때 그들을 무죄 상태의 사람들로 보시면서 선택하셨는가, 아니면 이미 타락한 자들로 보시면서 선택하셨는가 하는 문제가 제기되었다.
선택의 예정을 창조와 타락 허용보다 앞에 두어, 하나님이 사람들을 선택하실 때 그들을 무죄 상태의 사람들로 보시면서 하셨다는 견해는 전택설(前擇說, supralapsarianism)이라고 한다. 이 설은 하나님의 절대 주권을 강조하여 유기[버리심]를 하나님의 기쁘신 뜻으로 간주한다. 이 설의 근거들은 토기장이의 비유(롬 9장) 등에서 나타난 하나님의 절대주권의 말씀들, 보다 논리적이게 보임, 그리고 천사들의 선택의 경우에 맞음 등이다.
한편, 창조와 타락 허용의 작정 후에 선택의 예정을 두어, 하나님이 사람들을 선택하실 때 그들을 이미 타락한 자들로 보시면서 하셨다는 견해는 후택설(後擇說, infralapsarianism)이라고 한다. 이 설에 의하면 유기된 자들은 하나님의 공의의 행위로 그렇게 되었을 뿐이다. 이 설의 근거는, 선택은 죄로부터의 구원의 선택이므로 타락을 전제해야 한다는 것이다. 에베소서 1:4,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은 후택설을 취하는 것 같다. 3:7, "인류의 나머지 사람들을, 하나님께서는 . . . 지나쳐버리시고 그들의 죄로 인한 수욕과 진노에 이르도록 작정하셔서." 개혁파의 주류는 후택설이다. 그러나 전택설과 후택설의 문제는 깊은 신비의 문제라고 보인다.
선택에 대한 다른 파들의 견해는 어떠한가? 루터파는 루터의 바른 견해를 저버렸다. 종교개혁자 루터 자신은, 칼빈과 동일하게, 인간의 전적 부패와 더불어 하나님의 절대적, 이중적 예정을 믿었다. 그러나 루터파의 전통은, 그들의 일치신조에 진술된 대로, 어거스틴주의적 절대 예정의 교리도, 반(半)펠라기우스주의적 신인(神人)협력설도 부정한다. 그들은 인간의 전적 무능력과 중생에서의 성령의 주권적, 단독적 사역을 긍정하면서도 사람이 하나님의 이 은혜를 거부하고 저항할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17세기초 화란에서 정죄된 알미니우스파(Arminianism)는 중세기의 반(半)펠라기우스주의적 신인협력설을 취하였다. 그들은 인간의 전적 무능력을 부정하고 신적 은혜와의 협력으로 구원을 얻음을 주장했다. 그 후 웨슬리-알미니우스주의(Wesleyan Arminianism)는 인간의 전적 부패와 무능력을 긍정했으나 예수 그리스도의 보편적 속죄 사역으로 인해 모든 사람의 원죄의 죄책과 무능력이 제거되어 이제는 모든 사람이 성령의 구원 사역과 협력할 수 있다고 주장함으로 알미니우스주의의 오류와 비슷하여졌다. 이들은 다 하나님의 주권적, 무조건적 선택을 부정하는 것이다.


4-4. 유기(遺棄)
예정의 두번째 요소는 유기(遺棄, 버리심, reprobation)이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3:7, "인류의 나머지 사람들을, 하나님께서는 그가 기뻐하시는 대로 긍휼을 베풀기도 하시고 거두기도 하시는 그 자신의 뜻의 측량할 수 없는 계획에 따라, 그의 피조물들 위에 가지는 그의 주권적 능력의 영광을 위하여 지나쳐버리시고 그들의 죄로 인한 수욕과 진노에 이르도록 작정하셔서 그의 영광스런 공의의 찬송이 되게 하기를 기뻐하셨다.
이 교리는 천주교회, 루터교회의 다수, 알미니우스주의, 웨슬리주의 등의 심한 반대를 받아왔으나, 어거스틴, 루터, 칼빈,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과 돌트 신조 등이 밝히 긍정했다. 칼빈의 말과 같이, "[하나님의] 선택 자체는 유기와 대조시키지 않고는 생각할 수 없다"(기독교 강요, 3. 23. 1).
선택의 진리는 논리적으로 유기(遺棄)의 진리를 내포한다. 하나님께서 어떤 이들을 선택하셨다는 것은 그가 나머지 사람들을 내버려 두셨다는 것을 내포한다. 또 모든 인류가 원죄를 가지고 태어났다는 사실은 유기의 진리의 기초이다.
뿐만 아니라, 유기에 대한 명백한 증거들이 성경에 많이 있다. 출애굽기 4:21, "내가 그의 마음을 강퍅케(카자크) 한즉." 출애굽기 7:3, "내가 바로의 마음을 강퍅케(카솨) 하고." 출애굽기 9:12, "여호와께서 바로의 마음을 강퍅케 하셨으므로(카자크)"(10:27; 11:10). 신명기 2:30, "여호와께서 그[헤스본 왕 시혼]를 네 손에 붙이시려고 그 성품을 완강케 하셨고 그 마음을 강퍅케 하셨음이라." 여호수아 11:20, "그들의 마음이 강퍅하여 이스라엘을 대적하여 싸우러 온 것은 여호와께서 그리하게 하신 것이라." 사무엘상 2:25, "그들이 그 아비의 말을 듣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그들을 죽이기로 뜻하셨음이었더라." 잠언 16:4, "여호와께서 온갖 것을 그 씌움에 적당하게 지으셨나니 악인도 악한 날에 적당하게 지으셨느니라." 이사야 6:9-10, "가서 이 백성에게 이르기를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 하여 이 백성의 마음으로 둔하게 하여 그 귀가 막히고 눈이 감기게 하라." 이 말씀은 신약 성경에 6번이나 인용되었다(마 13:14, 15; 막 4:12; 눅 8:10; 요 12:40; 행 28:27; 롬 11:9, 10).
마태복음 7:6, "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지 말며 너희 진주를 돼지 앞에 던지지 말라." 마태복음 13:11, "천국 비밀을 아는 것이 너희에게는 허락되었으나 저희에게는 아니되었나니." 요한복음 17:9, "내가 비옵는 것은 세상을 위함이 아니요 내게 주신 자들을 위함이니이다." 로마서 9:22, "만일 하나님이 그 진노를 보이시고 그 능력을 알게 하고자 하사 멸하기로 준비된 진노의 그릇을 오래 참으심으로 관용하시고." 데살로니가후서 2:11, 12, "이러므로 하나님이 유혹을 저희 가운데 역사하게 하사 거짓 것을 믿게 하심은 진리를 믿지 않고 불의를 좋아하는 모든 자로 심판을 받게 하려 하심이니라." 베드로전서 2:8, "저희가 말씀을 순종치 아니하므로 넘어지나니 이는 저희를 이렇게 정하신 것이라." 유다서 4, "저희는 옛적부터 이 판결[정죄]을 받기로 미리 기록된 자니."
유기(遺棄)에는 두 측면이 있다. 즉 간과(看過)와 정죄가 그것이다. 간과는 하나님께서 어떤 사람들을 구원에 들어오도록 선택하지 않으시고 지나쳐 버리시는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주권적 행위이며, 그 이유는 알려져 있지 않다.
한편, 정죄는 보다 적극적 행위인데, 간과된 자들은 그들의 죄 가운데 처해 있으므로 하나님께서 공의로 정죄하시고 형벌하시는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법정적(法廷的) 행위이며, 그 이유는 간과된 자들의 죄 때문이다. 이리하여 하나님께서 버리신 자들은 그의 진노와 형벌 아래 있게 된다. 사실상, 모든 자들이 하나님의 진노와 형벌 아래 있어야 마땅했으나, 그 중 일부는 하나님의 값없이 주시는 은혜로 구원되고, 나머지는 그들의 죄 가운데 그냥 버려져서 그 죄의 형벌을 받게 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구원 받은 택자들은 하나님의 은혜를 감사하고 찬송할 것밖에 없고, 유기되고 정죄된 자들은 공의의 심판에 대해 불평할 수 없다. 한편에선 하나님의 긍휼의 영광이, 다른 한편에선 하나님의 공의의 영광이 드러난다.
유기의 진리는 두려운 사실이지만, 모든 인간이 원죄 아래 있었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유기는 유기된 자에게 결코 불평의 이유가 될 수 없다. 하나님께서 모든 인류를 다 버리셨을지라도 불평할 수 없는 것이 우리의 처지이었다. 이 진리는, 비록 유쾌한 진리가 아닐지라도, 모든 신자가 마땅히 받아들여야 할 진리이다.
결론적으로, 예정의 교리는 사람의 구원의 궁극적 원인이 사람 자신에게 있느냐, 아니면 하나님께 있느냐 하는 근본적 문제에 관계된다. 역사상 이 문제는 어거스틴주의 혹은 칼빈주의 신학 체계와 기타 다른 체계들을 구분하는 주요한 점이 된다. 이것은 단순히 지엽적인 문제이거나 사색적인 문제가 아니고, 근본적 문제요 실제적 문제이다. 하나님이 참으로 사람을 구원하시는가? 구원의 능력이 참으로 하나님께 있는가? 그는 그의 주권적 능력으로 어떤 이들을 영생으로 선택하셨는가? 우리는 성경에 근거하여 '확실하게 그렇다'고 대답하며 따라서 이 심오하고 신비한 교리는 바르게 해설되고 강조되어야 한다고 확신한다.
예정 교리는 바르게 이해될 때 큰 유익들을 준다. 그것은 하나님의 긍휼과 공의의 영광의 찬송, 참된 겸손, 흔들리지 않는 위로 등을 공급해 준다. 우리의 구원은 우리의 변덕스럽고 변화무쌍한 결심에 근거하지 않고 영원불변의 하나님의 작정과 예정에 근거한다. 그것은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이다. 그러나 우리편에서 의와 선과 진실을 위해 성실히 노력해야 하는 것은 마땅한 의무이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3:8은 이렇게 진술했다: "예정이라는 이 높은 신비의 교리는, 그의 말씀에 계시된 하나님의 뜻을 주의하며 그것에 복종하는 사람들이 그들의 효력 있는 부르심의 확실함으로부터 그들의 영원한 선택을 확신하도록 특별히 신중하고 조심스럽게 다루어져야 한다. 그러면 이 교리는 복음을 진심으로 순종하는 모두에게 하나님을 찬송하고 경외하고 사모하게 하며 겸손케 하고 근면케 하고 풍성한 위로를 줄 것이다."


5. 창조
작정은 하나님의 영원적, 내향적(內向的) 사역인 반면, 창조는 하나님의 시간적, 외향적(外向的) 사역이다. 창조는 우주와 인류 역사의 시작이다. 성경은, "태초에[맨 처음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는 말씀으로 시작된다(창 1:1). 창세기 1, 2장에는 천지와 인간의 창조에 대해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하나님의 중요한 계시 진리들이 다 그러하지만, 창조도 이성이나 과학에 의해 증명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오직 성경 계시에 의존하여 고찰되어야 할 주제이다. 창세기 1, 2장의 창조 기사는 비유적으로 해석되어서는 안된다. 왜냐하면 창세기 1, 2장은 전체적으로 시나 비유의 문체가 아니고 명백히 역사적 서술이며, 또한 역사적 진술인 책인 창세기의 한 부분이기 때문이다.
창조에 대하여,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은 진술하기를, "아버지, 아들, 성령 하나님께서는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지혜와 선하심의 영광을 나타내기 위하여 태초에 육일 동안에 세계와 그 안에 있는 모든 것들 곧 보이는 것이든지 보이지 않는 것이든지 간에 다 무(無)로부터 창조하기를 기뻐하셨는데, 그것들은 다 매우 좋았다"고 하였다(4:1).


5-1. 창조의 주체
창조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행위이었다. 삼위 하나님은 창조에서 공동적으로 활동하셨다. 어느 한 위가 다른 위에게 의존하심이 아니었다. 즉 천지만물은 성부에 의하여 성자로 말미암아 성령 안에서 창조되었다. 성경이 창조의 사역을 주로 성부께 돌리는 것이 사실이지만, 또한 성자와 성령께도 돌린다. 고린도전서 8:6, "우리에게는 한 하나님 곧 아버지가 계시니 만물이 그에게서 났고 우리도 그를 위하며 또한 한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계시니 만물이 그로 말미암고 우리도 그로 말미암았느니라." 요한복음 1:3,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골로새서 1:16, "만물이 그에게(엔 아우토, '그에 의해') 창조되되 . . .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창세기 1:2, "하나님의 신[영]은 수면에 운행하시니라."


5-2. 창조의 시간
창세기 1:1,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여기에 '태초에'라는 말(베레쉬드)은 단순히 '맨 처음에'라는 뜻이다. 이것은 우주와 역사의 시작을 가리키는 말이다. 우주와 역사는 창조로부터 시작되므로, 인간의 시간 개념도 창조로부터 시작된다고 볼 수 있다. 그러므로 여기 태초는 시간의 시작이다. 태초 이전은 시간의 시작 전 곧 영원이다. 어거스틴은 세계가 '시간 안에서' 창조되었다기보다 '시간과 함께' 창조되었다고 말했다.
세계 창조 이전에 하나님이 오랫 동안 비활동적인 상태로 계실 수 없다고 상상하여 창조의 시간을 영원으로 보려는 자들이 있었으나 이것은 잘못이다. 성경은 하나님이 '영원 전에' 창조하셨다고 말하지 않고, '태초에' 창조하셨다고 말한다. 또한 하나님의 영원성은 단순히 시간의 무한한 연장이 아니고, 무(無)시간 혹은 비(非)시간이다. 하나님은 과거도 미래도 없이 영원한 현재로 존재하신다.
성경의 창조 6일을 24시간의 문자적 하루들로 해석한다면, 여기 '태초에'라는 시간은 성경 말씀에 근거한 문자적 연대 계산에 의하여 추정될 수 있다. 창세기 5장과 11장에 근거하면, 아브라함의 생애는 대략 아담후 1948-2123년경이다(만일 창세기 11:32과 12:4에 근거하여 데라가 130세에 아브라함을 낳았다고 가정한다면, 그의 연대는 2008-2183년경일 것이다). 야곱이 나이 130세에 애굽에 내려갔고(창 47:9) 그것은 아담후 2238년경이다. 출애굽 사건은 이스라엘 자손이 애굽에 거주한 지 430년이었고(출 12:40) 그 연대는 아담후 2668년경이다. 열왕기상 6:1에 "이스라엘 자손이 애굽 땅에서 나온지 480년이요, 솔로몬의 이스라엘 왕이 된 지 4년 시브월 곧 2월에 솔로몬이 여호와를 위하여 전 건축하기를 시작하였더라"고 증거했으므로, 솔로몬의 성전 건축의 시작은 아담후 3148년경이다. 솔로몬의 통치 연대를 대체로 주전 970-931년경으로 보기 때문에, 솔로몬 통치 4년은 주전 967년경이다. 따라서, 세상의 창조 연대는 3148년과 967년을 더한 숫자 곧 주전 4115년경이 된다.
창세기 1장의 6일은, 비록 하지와 쉐드 같은 어떤 이들이 지질학적 가설들의 영향 아래 그것들을 '긴 시대들'로 보았지만, 문자적 '하루들'로 보는 것이 가장 자연스럽다. 그 이유는, '날'(욤)이라는 말의 기본적 의미가 문자적 하루이며, '저녁이 되며 아침이 되니'라는 6번이나 반복되는 표현이 문자적 하루에 가장 적합하며, 창조후 안식하신 제7일이 문자적 하루이므로 그 전의 6일도 그러하다고 보는 것이 가장 자연스럽기 때문이다. 창세기 2:2,"하나님이 일곱째 날을 복주사 거룩하게 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그 창조하시며 만드시던 모든 일을 마치시고 이 날에 안식하셨음이더라." 출애굽기 20:11, "이는 엿새 동안에 나 여호와가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 가운데 모든 것을 만들고 제7일에 쉬었음이라. 그러므로 나 여호와가 안식일을 복되게 하여 그 날을 거룩하게 하셨느니라."
창세기 1:1,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는 말씀은 단순히 창조 사건의 제목이 아니고, 창조의 시작이다. 즉 그것은 제1일 창조에 포함된다. 만일 그것이 단순히 제목이라면, 히브리어 본문 2절 초두에 웨('그리고')라는 말은 적절히 해석될 수 없으며, 2절에 언급된 땅과 물('수면')도 첫째날의 창조 내용에서 제외될 것이지만, 그것은 분명히 부당한 일이다. 또한, 창세기 1:1을 3절 이하와 분리시켜 6일 창조를 3절 이하부터로 본다면, 천지 창조는 6일 동안의 창조가 아닐 것이다. 그러나 창세기 1:1 이하를 그렇게 해석할 이유가 도대체 무엇이겠는가?
어떤 이들은 창세기 1:1의 창조된 천지가 천사들의 타락으로 파괴되어 2절의 언급대로 혼돈하고 공허하게 되었으므로 3절 이하에 하나님의 재창조 혹은 회복의 사역이 있게 된 것이라고 말한다. 이것을 '회복설'(re- storation theory)이라고 한다. 그러나 이 생각은 성경의 명확한 진리에 근거하지 않은 하나의 추측에 불과하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엿새 동안에 천지와 만물을 다 창조하셨다'고 말씀한다(출 20:11).
창조의 6일의 각 내용을 살펴보자. 첫째 날에 하나님께서는 하늘 공간, 땅의 원소들과 물, 그리고 특히 빛을 창조하셨다. 창세기 1:2의 땅의 혼돈과 공허, 흑암, 수면 등은 천지 창조의 초기 상태의 모습을 묘사하는 것일 것이다. 그러한 상태에서 하나님께서 최초로 빛(오르)을 창조하셨다. 빛은 창조 세계의 질서의 시작이었다.
둘째 날에 하나님께서는 궁창 곧 하늘을 창조하셨다. '궁창 위의 물'이라는 말씀은 오늘날 과학적으로도 이해할 만하다. 지구 대기층에 있는 수증기의 양은 약 54조 4600억톤이며, 지구면에 내리는 비와 눈의 매년 총량은 약 30만 입방 킬로미터이어서 지구면을 3미터 깊이로 덮기에 충분하다고 한다(박형룡, 신론, 374쪽).
셋째 날에 하나님께서는 땅과 바다와 각종 식물들을 창조하셨다. 식물들은 풀과 채소와 과목(果木)의 3종류로 분류되었다. "각기 종류대로(레미노, '그 종류대로')"라는 표현이 3번 반복된다.
넷째 날에 하나님께서는 광명들('빛들,' 마오르) 즉 해와 달과 별들을 창조하셨다. 어떤이들의 추측과 같이, 천체(天體)가 첫째날에 창조되었다고 추상하는 것은 자연스럽지 않다. 과학적 '가설'에 조화시키려고 성경의 단순 명확한 진리를 수정해서는 안된다.
다섯째 날에 하나님께서는 물고기들과 새들을 창조하셨다. "그 종류대로"라는 표현이 2번 더 나온다.
여섯째 날에 하나님께서는 각종 동물들, 즉 가축, 기는 것, 들 짐승을 만드셨고 맨 마지막으로 사람을 만드셨다. "종류대로"라는 말이 5번 더 나오며, 1장에서 도합 10번이나 반복적으로 언급되었다.
창세기 2장의 내용은 1장의 것과 상충되는 것이 아니고 그것을 보충한다. 1장은 천지만물의 창조를 전체적으로 서술하고, 2장은 특히 사람 창조에 초점을 두어 그것을 자세히 서술한다. 또한 1장에 보충하여, 2장은 사람 뿐만 아니라 각종 들짐승들과 새들도 흙으로 창조되었음을 알려준다(7, 19절).
이러한 하나님의 창조 사역은 6일에 다 마쳤다. 창조는 종결되었다. 창세기 2:1, "천지와 만물이 다 이루니라." 창세기 2:2, "하나님의 지으시던 일이 일곱째 날이 이를 때에 마치니 그 지으시던 일이 다하므로 일곱째 날에 안식하시니라." 하나님의 창조 활동이 계속된다고 하는 관념은 성경과 조화되지 않는다고 본다.


5-3. 창조의 대상
창조의 대상은 천지만물이다. 창세기 1:1,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여기의 '천지'는 우주의 공간과 땅의 원질을 가리킬 것이다. 창세기 2:1, "천지와 만물이 다 이루니라." 출애굽기 20:11, "이는 엿새 동안에 나 여호와가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 가운데 모든 것을 만들고." 요한복음 1:3, "만물이 그로 말미아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골로새서 1:16, "만물이 그에게[그에 의하여]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보좌들이나 주관들이나 정사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천지만물은 물질계나 영계를 막론하고 다 하나님에 의해 창조되었다. 그것들은 영원한 것이 아니다. 그것들은 창조되었으므로 하나님과 명백히 구별된다. 하나님과 피조 세계는 질적으로 다르다. 하나님과 피조물의 질적 차이를 무시하는 범신론적 사상은 배격되어야 한다. 또한 창조의 진리는 피조 세계가 독립적 존재가 아니고 의존적 존재일 수밖에 없음을 증거한다. 여기에 피조 세계의 자기 위치가 있다.
하나님의 창조의 대상물들 가운데 천사들도 포함된다. 시편 148:2, 5은, "그의 모든 사자여 찬양하며 모든 군대여 찬양할지어다. . . . 그것들이 여호와의 이름을 찬양할 것은 저가 명하시매 지음을 받았음이로다"고 증거한다. 바울 사도도 골로새서 1:16에서 "만물이 그에게[그에 의하여]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보좌들이나 주관들이나 정사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라고 말했다.
천사 창조의 시기에 관하여, 천사들은 하늘의 거주자이므로 아마 하늘과 함께 창조되었을 것이다. 시편 103:21은 천사들을 "여호와를 봉사하여 그 뜻을 행하는 너희 모든 천군(天軍)이여"라고 불렀다. 창조 이전은 영원 세계로 생각되므로, 천사의 창조가 창조의 6일 이전이기에는 어렵다고 본다. 욥기 38:7에는 "[내가 땅의 기초를 놓을 때에] 새벽 별들이 함께 노래하며 하나님의 아들들이 다 기쁘게 소리하였었느니라"고 말씀한다. 이 구절은 천사들이 땅의 창조 때 이미 하나님의 주위에서 찬양하고 있었음을 암시하는 것 같다.
천사는 영적 존재이다. 히브리서 1:14은 모든 천사들이 봉사하는 '영'이라고 증거한다. 천사는 영이므로 물질적 몸을 가지고 있지 않고 육신의 눈으로 볼 수 없고 또 서로 결혼함도 없다. 누가복음 24:39, "영은 살과 뼈가 없으되." 골로새서 1:16, "보이지 않는 것들과." 마태복음 22:20, "부활 때에는 장가도 아니가고 시집도 아니가고 하늘에 있는 천사들과 같으니라." 성경 역사상 천사들이 종종 사람들처럼 나타나 행동한 것은 하나님께서 계시로 주신 임시적, 초자연적 사건이었다. 천사들은 또한 제한된 공간에도 많은 수가 들어갈 수 있다. 마가복음 5:9, "내 이름은 군대니 우리가 많음이니이다." 그 귀신들이 한 사람에게서 나와 2천마리 돼지떼 속에 들어간 것을 보면, 한 사람 속에 2천명의 천사들이 들어가 있었다고 생각할 수 있다.
천사들은 뛰어난 지혜와 지식을 가지며 도덕성을 가진다. 이성적, 도덕적 성격은 영의 특질이다. 마태복음 24:36, "그 날과 그 때는 아무도 모르나니 하늘의 천사들도 모르고." 누가복음 4:34, "나는 당신이 누구인줄 아노니 하나님의 거룩한 자니이다." 베드로전서 1:12, "천사들도 살펴보기를 원하는 것이니라." 마가복음 8:38, "거룩한 천사들과 함께 올 때에." 에베소서 6:12,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
또한 천사들은 능력이 많다. 시편 103:20, "능력이 있어 여호와의 말씀을 이루며 그 말씀의 소리를 듣는 너희 천사여." 베드로후서 2:11, "더 큰 힘과 능력을 가진 천사들이라도." 데살로니가후서 1:7, "주 예수께서 저의 능력의 천사들과 함께 나타나실 때." 사도행전 5:19, "주의 사자가 밤에 옥문을 열고 끌어내어." 사도행전 12:7, "홀연히 주의 사자가 곁에 서매 옥중에 광채가 조요하며 . . . 쇠사슬이 그 손에서 벗어지더라." 에베소서 1:21, "모든 정사와 권세와 능력과 주관하는 자와." 에베소서 3:10, "하늘에서 정사와 권세들에게 하나님의 각종 지혜를 알게 하려 하심이니." 골로새서 1:16, "보좌들이나 주관들이나 정사들이나 권세들이나." 에베소서 2:2, "공중에 권세 잡은 자." 요한계시록 13:2, "용이 자기의 능력과 보좌와 큰 권세를 그에게 주었더라."
천사들의 수는 매우 많다. 그들은 하늘의 군대[천군]이다. 요한계시록 5:11, "둘러 선 많은 천사의 음성이 있으니 그 수가 만만이요 천천이라." 그들은 몇 부류들로 나뉘는 듯하다. 그룹(케룹)은 하나님을 호위하는 천사로 나타난다. 창세기 3:24, "에덴동산 동편에 그룹들과 두루도는 화염검을 두어 생명나무의 길을 지키게 하시니라." 출애굽기 25:18, "금으로 그룹 둘을 속죄소 두 끝에 쳐서 만들되." 시편 18: 10, "그룹을 타고 날으심이여." 스랍(쉐라핌)은 하나님을 찬양하는 천사들로 보인다(사 6장). '정사, 권세, 보좌, 주관자, 능력' 등의 명칭들은 천사 세계의 어떤 권위의 등급을 보이는 것 같다(골 1:16). 가브리엘과 미가엘 등은 천사들 가운데 어떤 개인들을 가리키는 듯하다. 가브리엘은 하나님의 계시를 전달하고 해석하는 직무를 가진 듯하며(단 8, 9장; 눅 1장), 미가엘은 천사장으로 불리운 자로서 하나님의 원수들과 싸우는 천사로 나타난다(단 10장; 유 9; 계 12:7). 요한계시록 12:7, "하늘에 전쟁이 있으니 미가엘과 그의 사자들이 용으로 더불어 싸울새."
천사의 직무는 무엇인가? 우선, 천사는 하나님께 경배하며 찬송하는 일을 한다. 이사야 6:3, "서로 창화하여 가로되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만군의 여호와여 그 영광이 온 땅에 충만하도다." 또한, 천사는 하나님의 뜻을 수행하는 일을 한다. 시편 103:20, 21, "능력이 있어 여호와의 말씀을 이루며 . . . 여호와를 봉사하여 그 뜻을 행하는 너희 모든 천군이여 여호와를 송축하라." 특히, 천사들은 하나님의 계시를 전달하며 하나님의 심판을 집행한다. 스가랴서에는 여러 번 '내게 말하는 천사'라는 표현이 나온다(1:9, 13, 19; 2:3; 4:1, 4, 5; 5:5, 10; 6:4). 또한 하나님께서는 소돔과 고모라를 멸망시키기 위해 천사들을 보내셨다. 창세기 19:1, "두 천사가 소돔에 이르니." 창세기 19:13, "여호와께서 우리로 이 곳을 멸하려 보내셨나니."
한 걸음 더 나아가, 천사들은 성도들을 위해 봉사하는 일을 한다. 히브리서 1:14, "모든 천사들은 부리는[봉사하는] 영으로서 구원 얻을 후사들을 위하여 섬기라고 보내심이 아니뇨?" 시편 34:7, "여호와의 사자가 주를 경외하는 자를 둘러 진치고 저희를 건지시는도다." 시편 91:11, "저가 너를 위하여 그 사자들을 명하사 네 모든 길에 너를 지키게 하심이라." 마태복음 18:10, "저희 천사들이 하늘에서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얼굴을 항상 뵈옵느니라."
천사들은 성도들을 위한 봉사자이므로 사람이 그들을 숭배하는 것은 옳지 않다. 요한계시록 22:8, 9, "이것들을 보고 들은 자는 나 요한이니 내가 듣고 볼 때에 이 일을 내게 보이던 천사의 발 앞에 경배하려고 엎드렸더니 저가 내게 말하기를 나는 너와 네 형제 선지자들과 또 이 책의 말을 지키는 자들과 함께 된 종이니 그리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 경배하라 하더라."


5-4. 창조의 방법
하나님의 창조는 무(無)로부터의 창조이었다. 무로부터의 창조란 우주가 아무 원인 없이 생성되었다는 뜻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아무 기존 재료의 사용 없이 우주만물을 창조하셨다는 뜻이다. 모든 것이 창조되었으므로 창조 이전에는 하나님 외에 아무도, 아무 것도, 아무 재료도 없었다. 요한복음 1:3,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히브리서 11:3, "믿음으로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우리가 아나니,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 아니니라." 보이는 세계는 그 자체가 영원하거나 다른 어떤 영원한, 물질적인 것에 의해 존재케 된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무로부터 온 우주를 창조하실 수 있었던 것은 그의 전지(全知)하심과 전능(全能)하심 때문이다. 창조는 하나님의 크신 지혜와 능력을 증거한다. 예레미야 10:12, "여호와께서 그 권능으로 땅을 지으셨고 그 지혜로 세계를 세우셨고." 로마서 1:20,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神性)이 그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게 되나니." 로마서 4:17, "그의 믿은 바 하나님은 . . . 없는 것을 있는 것같이 부르시는 이시니라." 이 구절은 하나님께서 무로부터 온 세상을 창조하실 수 있는 능력자이심을 증거한다.
성경은 또한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천지만물을 창조하셨다고 증거한다. 창세기 1:3, "하나님이 가라사대"(6, 9, 14, 20, 24절). 시편 33:6, "여호와의 말씀으로 하늘이 지음이 되었으며 그 만상이 그 입 기운으로 이루었도다." 요한복음 1:3, "만물이 그[말씀]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창세기 1장의 하나님의 말씀은, 요한복음 1장에 '말씀'(로고스)으로 표현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어떤 연관이 있다.


5-5. 창조를 부정하는 이론들
창조를 부정하는 몇 가지 이론들이 있다. 첫째로, 물질이 영원 전부터 존재했다는 생각이 있다. 이것을 물질영원설이라고 한다. 이 설에 근거한 이원론(二元論)은 우주에 하나님과 물질의 두 영원한 존재가 있다고 가정한다. 그러나 성경은 물질이 하나님에 의하여 창조되었음을 가르친다. 또한 신적이지도 자존적이지도 못한 물질이 영원하다는 것은 이성적으로도 불합리하다.
둘째로, 영계와 물질계를 포함하여 우주가 신에게서 유출되어 존재케 되었다는 생각이 있다. 이것을 유출설(流出說)이라고 한다. 그러나 이것은 성경의 창조 개념이 아니며, 하나님의 초월성과 주권을 부정하는 범신론적 관념이다.
셋째로, 생명이 자연 발생하여 가장 단순한 종류로부터 점점 더 복잡한 종류들로 진화(進化)되었다는 생각이 있다. 이것을 진화론이라고 한다. 이것은 주로 물질영원설에 근거한다. 그러나 진화론은 창조의 진리를 부정하는 것이다. 또한 물질영원설은 이성적으로도 불합리하며, 생명의 자연발생설이나 진화의 생각들은 가설적 신념들에 불과하다. 진화론은 결코 객관적 확실성을 가진 과학적 이론이 아니다. 종(種)들의 기원에 관한 다윈의 전제들은 오늘날 다 포기되었다. 한 종에서 다른 종으로 진화할 것이라는 가정은 단 하나의 실례도 가지고 있지 않다. 더욱이, 인간의 독특한 성질들, 예를 들어 인격성, 도덕성, 종교성 등의 기원은 진화의 개념으로는 설명될 수 없다. 오늘날의 과학자들이 증거하는 대로, 우주와 생명의 기원은 일반인들에게는 여전히 큰 신비이다(박형룡, 352쪽).
넷째로, 하나님께서 진화의 방법을 사용하여 우주를 창조하셨다는 생각이 있다. 이것을 유신진화론(有神進化論)이라고 한다. 그러나 성경의 창조 기사들은 진화의 개념과 결코 조화되지 않을 뿐 아니라, 진화론 자체도 위에서 언급한 대로 확증 없는 순전한 가설에 불과하다. 유신진화론은 '매우 위험한 잡종'이다(박형룡, 385쪽).


5-6. 창조의 목적
전지하신 하나님의 창조 사역은 어떤 목적과 계획을 가졌을 것임이 확실하고, 피조 세계의 현상을 살펴보아도 창조의 목적성 혹은 계획성이 있음이 확실하다. 그러면 창조의 목적은 무엇인가? 한마디로, 창조의 목적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영광을 나타내시기 위함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것은 단순히 그가 피조물들을 통해 영광을 받으시기 위함이 아니고, 그가 자신의 영광을 피조 세계에 나타내시기 위함이다. 성경은 다음 몇 구절들에서 이 점을 계시 혹은 암시한다.
이사야 43:7, "무릇 내 이름으로 일컫는 자 곧 내가 내 영광을 위하여 창조한 자를 오게 하라. 그들을 내가 지었고 만들었느니라." 이사야 43:21,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의 찬송을 부르게 하려 함이니라." 이사야 60:21, "네 백성이 다 의롭게 되어 영영히 땅을 차지하리니 그들은 나의 심은 가지요 나의 손으로 만든 것으로서 나의 영광을 나타낼 것인즉." 로마서 11:36,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영광이 그에게 세세에 있으리로다. 아멘." 골로새서 1:16,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에이스 아우톤) 창조되었고." 요한계시록 4:11, "우리 주 하나님이여, 영광과 존귀와 능력을 받으시는 것이 합당하오니 주께서 만물을 지으신지라. 만물이 주의 뜻대로 있었고 또 지으심을 받았나이다."
창조의 이러한 목적은 완전 충족자이신 하나님께 합당하다. 피조물의 행복은 창조의 궁극적 목적이 되기에 합당하지 않다.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사람들의 행복은 단지 창조의 부수적 목적이 될 수 있을 뿐이다. 또한, 하나님의 영광의 선포라는 목적만이 실제로 창조 세계의 현실에 맞다. 피조물들의 다수는 현실적으로 행복을 누리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신다는 점은 피조물의 행복과 불행 둘 다에 적용될 수 있다. 의인들의 구원과 악인들의 심판은 각각 하나님의 긍휼과 공의의 영광을 나타낸다. 그렇다고 창조가 단순히 하나님의 이기적 행위이거나 그의 어떤 결핍을 보충하는 행위는 아니다. 그는 충만한 영광 가운데 계신 완전 충족자이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영광 선포만이 창조의 목적으로 가장 적합하다.


6. 섭리
하나님의 섭리란, 하나님께서 자신이 창조하신 온 우주만물을 친히 보존하시고 통치하시는 것을 말한다.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 제11문은 "하나님의 섭리의 일들이 무엇인가?"라고 묻고 대답하기를, "하나님의 섭리의 일들은 그의 모든 피조물들과 그들의 모든 행위들에 대한 그의 가장 거룩하고 지혜롭고 능력 있는 보존하심과 통치하심이다"라고 했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5:1은 섭리에 대해 좀더 자세히 진술한다: "만물의 크신 창조자 하나님은 그의 지극히 지혜롭고 거룩한 섭리에 의해 그의 무오(無誤)한 예지(豫知)와 그 자신의 뜻의 자유롭고 불변적인 계획을 따라 가장 큰 것부터 가장 작은 것까지 모든 피조물들과 행위들과 일들을 붙드시고 지도하시고 처리하시고 통치하셔서 그의 지혜와 능력과 의와 선과 자비의 영광을 찬송케 하신다."
구약성경에서 하나님을 '주'(아도나이, 창 15:2)라고 부르는 것은 그의 주권과 통치권을 나타내는 것으로서 하나님의 섭리를 잘 증거한다. 히브리어 아도나이의 어근(語根)이 되는 동사 둔은 '이기다, 통치하다'는 뜻이다.


6-1. 섭리의 요소와 범위
하나님의 섭리는 보존과 통치의 두 요소를 포함한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이 만드신 온 우주만물 특히 그의 모든 피조물들과 그 행위들을 보존하신다. 시편 36:6은 증거하기를, "여호와여, 주는 사람과 짐승을 보호하시나이다"라고 하였다. 또 느헤미야 9:6은 말씀하기를, "오직 주는 여호와시라. 하늘과 하늘들의 하늘과 일월성신과 땅과 땅 위의 만물과 바다와 그 가운데 모든 것을 지으시고 다 보존하시오니 모든 천군이 주께 경배하나이다"라고 하였다.
예수께서도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취게 하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리우신다'고 말씀하셨고(마 5:45), 또 '천부[하늘의 아버지]께서 공중의 새를 기르시고 들의 풀을 입히신다'고 말씀하셨다(마 6:26, 30). 바울 사도는 '만물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 함께 존재한다'고 말했고(골 1:17), 히브리서 1:3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능력의 말씀으로 만물을 붙드신다'고 증거했다.
하나님의 보존하심은 그가 우주만물을 단순히 자연법칙에 맡겨두는 것이 아니고 그의 적극적, 계속적 활동이시다. 그러나 하나님의 보존하심을 그의 계속적 창조의 행위이시라고 볼 것은 아니다. 또 세상이 죄로 인하여 부패되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아직도 그것을 보존하시는 것은 그가 택하신 사람들의 구원을 위해 인류에게 베푸시는 그의 일반적 은혜와 오래 참으심 때문이라고 말할 수 있다.
또 하나님께서는 자신이 만드신 온 우주만물 특히 그의 모든 피조물들과 그 행위들을 통치하신다. 시편 103:19은 증거하기를, "여호와께서 그 보좌를 하늘에 세우시고 그 정권으로 만유를 통치하시도다"라고 했다. 잠언 16:9은,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 걸음을 인도하는 자는 여호와시니라"고 말씀했고, 다니엘 4:17은 증거하기를, "인생으로 지극히 높으신 자가 인간 나라를 다스리시며 자기의 뜻대로 그것을 누구에게든지 주시며 또 지극히 천한 자로 그 위에 세우시는 줄을 알게 하려 함이니라"라고 했다. 예수께서는 심지어 말씀하시기를, "참새 두 마리가 한 앗사리온에 팔리는 것이 아니냐? 그러나 너희 아버지께서 허락지 아니하시면 그 하나라도 땅에 떨어지지 아니하리라"라고 하셨다(마 10:29).
하나님의 이러한 섭리는 온 우주만물과 모든 피조물들에 관계된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의 표현대로, 그는 '가장 큰 것부터 가장 작은 것까지 모든 피조물들과 행위들과 일들을 붙드시고 지도하시고 처리하시고 통치하신다.' 앞에서 인용했던 대로, 시편 103:19은 증거하기를, "여호와께서 그 보좌를 하늘에 세우시고 그 정권으로 만유를 통치하시도다"라고 하였다. '만유'라는 말은 '모든 것'이라는 뜻이다. 또 예수께서는 "참새 두 마리가 한 앗사리온에 팔리는 것이 아니냐? 그러나 너희 아버지께서 허락지 아니하시면 그 하나라도 땅에 떨어지지 아니하리라"고 말씀하셨다(마 10:29). 하나님의 섭리는 모든 일들을 포함한다. 하나님의 섭리에 포함되지 않는 일은 이 세상에 아무 것도 없다. 심지어 참새 한 마리가 땅에 떨어지는 것 같은 지극히 작은 일까지도 하나님의 섭리 속에 포함된다.


6-2. 섭리의 방식
하나님의 섭리의 방식에는 일반적 방식과 특별한 방식이 있다. 첫째로, 하나님의 섭리의 일반적 방식은 필연적 법칙들, 인간들의 자유, 및 우연한 일들을 사용하시는 것이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5:2은 진술하기를, "비록 모든 일들은 제1 원인이신 하나님의 예지와 작정과의 관계에서 불변적이고 무오하게 일어나지만, 동일한 섭리에 의해 그는 제2 원인들의 성질에 따라 그것들을 혹은 필연적으로, 혹은 자유롭게, 혹은 우연하게 일어나게 정하신다"고 하였다.
하나님께서는 필연적 법칙들을 사용하여 섭리하신다. 자연 법칙이 그 하나이다. 하나님께서는 노아에게 말씀하시기를, "땅이 있을 동안에는 심음과 거둠과 추위와 더위와 여름과 겨울과 낮과 밤이 쉬지 아니하리라"고 하셨다(창 8:22). 그 외에도, 잠언 10:4의 증거대로, '손을 게으르게 놀리는 자는 가난하게 되고 손이 부지런한 자는 부하게 된다.' 또한, 사도행전 27장에 보면, 하나님께서 바울을 구원하시는 방법은 뱃사공들을 사용함으로써이었다. 바울은 백부장과 군사들에게 말하기를, "이 사람들이 배에 있지 아니하면 너희가 구원을 얻지 못하리라"고 했다(행 27:31).
또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의 자유로운 계획과 소원을 사용하여 섭리하신다. 이 때 사람들은 기계들이 아니고 자유로운 인격적 행위자들이다. 잠언 16:9은 증거하기를,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 걸음을 인도하는 자는 여호와시니라"라고 했고, 잠언 21:1은, "왕의 마음이 여호와의 손에 있음이 마치 보(洑, 강)의 물과 같아서 그가 임의로 인도하시느니라"고 했다. 또 바울 사도는 말하기를,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로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느니라'고 하였다(빌 2:12, 13).
악한 일들도 하나님의 섭리 안에 있다. 요셉은 형들에게 말하기를, "그런즉 나를 이리로 보낸 자는 당신들이 아니요 하나님이시라"고 했다(창 45:8). 다윗은 자신을 저주하는 시므이에 대해 말하기를, "저가 저주하는 것은 여호와께서 저에게 다윗을 저주하라 하심이니"라고 했다(삼하 16:10). 미가야는 아합왕에게, '이제 여호와께서 거짓말하는 영을 왕의 이 모든 선지자의 입에 넣으셨나이다'라고 증거했다(왕상 22:23).
심지어 우연한 일들까지도 하나님의 섭리 속에 포함된다. 룻기 2:3은 증거하기를, '모압 여자 룻이 우연히 보아스에게 속한 밭에 이르렀다'고 하였다. 또한 열왕기상 22:34은 증거하기를, "한 사람이 우연히 활을 당기어 이스라엘 왕[아합]의 갑옷 솔기를 쏜지라"라고 하였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일반적 섭리는 필연적 법칙들이나 인간의 자유나 심지어 우연한 일들까지도 사용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섭리 개념이 자연 법칙만을 믿는 자연신론이나, 하나님과 자연만물을 동일시하는 범신론이나, 모든 일을 우연으로 돌리는 우연론과는 전혀 다르다. 그러한 사상들에서는 인격적 하나님의 섭리가 없다. 다른 한편, 섭리의 개념은, 인간의 자유와 책임을 부정하고 모든 것이 맹목적 운명의 지배를 받는다고 생각하는 운명론과도 전혀 다르다.
특히, 기독교는 소극주의나 정적주의(靜寂主義)가 아니다. 왜냐하면 섭리는 인간의 자유를 부정하는 개념이 아니기 때문이다. 인간의 자발적 노력과 하나님의 주권적 섭리는 서로 모순되는 것이 아니고 서로 조화된다. 신자는 기도하며 일하고, 일하며 기도해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주권적 섭리를 믿지만 동시에 열심히 일해야 한다. 우리는 주 하나님을 믿지만 동시에 현실 생활에 충실해야 한다. 그것이 하나님의 섭리의 일반적 방식들을 아는 자들의 바른 태도이다.
둘째로, 하나님의 섭리의 특별한 방식은 기적들을 사용하시는 것이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5:3은 진술하기를, "하나님께서는 그의 일반적 섭리에서 수단들을 사용하시지만 그의 기쁘신 뜻대로 그것들 없이, 그것들을 초월하여 그리고 그것들을 역행하여 자유롭게 활동하신다"고 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이러한 특별한 섭리를 기적이라고 부른다. 이와 같이, 기적이란 하나님께서 물질 세계에서 제2 원인들이나 자연 법칙을 사용치 않으시고 자신의 능력으로 직접 행하시는 일을 가리킨다.
기적은 가능하다. 하나님은 전능하시므로 하나님을 믿는 자들에게 기적은 결코 이상하거나 불가능한 무엇이 아니다. 단순히 기적이 자연 법칙의 위반이라는 이유 때문에 그것의 가능성을 부정하는 것은 전혀 전능하신 하나님을 고려치 않는 잘못된 생각과 태도이다. 비록 현재의 우리의 지식으로 기적이 어떤 고등한, 미지의 자연 법칙에 의한 것이라고 단정할 수 없을지라도, 하나님께서 무(無)로부터 말씀으로 천지만물을 창조하신 사실을 생각한다면 기적은 얼마든지 가능한 일이다.
성경에는 기적을 표현하기 위해 표적(오트, 세메이온), 기사(니플라오트, 모페트, 테라스), 능력(게부라, 뒤나미스) 등 세 단어가 사용되었다. 예를 들어, 사도행전 2:22에는 그 세 단어가 다 나온다: "하나님께서 나사렛 예수로 큰 권능과 기사와 표적을 너희 가운데서 베푸사." 이 세 단어 중, '기사'(奇事, wonder)는 사람에게 놀라움을 준다는 뜻이요, '능력'(power)은 피조물의 힘으로는 불가능한 신적 능력이 나타났다는 뜻이다.
예를 들어, 엘리사는 나무가지를 베어 물에 던져 물에 빠진 도끼를 떠오르게 하였다(왕하 6:6). 다니엘의 세 친구들은 풀무불에 던지웠으나 불이 그들의 몸을 해하지 못했고 머리털도 그슬리지 않았고 옷빛도 변하지 않았고 불탄 냄새도 없었다(단 3:27). 예수께서는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여자들과 아이들 외에 오천명을 먹이셨다(마 14:18-21). 이것들은 다 자연 법칙들로는 불가능하고 오직 하나님의 능력으로만 가능한 일들이었다.
하나님께서 역사상 기적들을 주신 목적은 무엇이었는가? '표적'(표, sign)이라는 말이 보이듯이, 기적은 하나님의 말씀과 진리를 확증하는 표로서 주어졌다. 신명기 4:35은 증거하기를,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애굽에서 그리고 출애굽한 후 광야에서 많은 기적들을 주신 목적은 여호와 하나님이 유일하신 하나님이심을 알게 하기 위해서라고 하였다. 사도행전 2:22은, "하나님께서 나사렛 예수로 큰 권능과 기사와 표적을 너희 가운데서 베푸사 너희 앞에서 그를 증거하셨느니라"고 말씀했다. 또, 히브리서 2:4은 "하나님도 표적들과 기사들과 여러 가지 능력과 및 자기 뜻을 따라 성령의 나눠주신 것으로써 저희와 함께 [복음 진리를] 증거하셨느니라"고 했다.
성경 역사를 보면, 하나님께서는 기적들을 주로 네 시대들에 주셨다. 첫째로, 모세와 여호수아의 시대는 이스라엘 종교와 구약 교회의 기초가 확립된 시대이었다. 특히,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통하여 법들을 주셨고 그것들을 책들에 기록하게 하셨다.
둘째로, 엘리야와 엘리사의 시대는 이스라엘 곧 구약 교회가 하나님의 진리를 떠나 배교(背敎)한 시대이었다. 하나님께 대한 참 신앙은 심히 쇠약하여졌고 이방인들이 섬기는 바알과 아세라 우상들의 숭배가 이스라엘 사회 속에서 널리 유행하던 시대이었다. 그 때, 주께서는 기적들을 통하여 하나님의 참되심을 이스라엘 백성에게 증거하셨다.
셋째로, 다니엘과 세 친구들의 시대는 이스라엘과 유다가 멸망하여 바벨론 포로생활을 하던 시대이었다. 또 다시 하나님의 지식이 쇠하고 이방의 신들이 참 하나님보다 크게 보였던 시대이었다. 그 때, 하나님께서는 기적들을 통하여 당신이 온 세상의 주이심을 증거하셨다.
넷째로, 예수 그리스도와 사도들의 시대는 하나님께서 구약의 예언대로 약속된 메시아를 보내신 시대이었다. 신적 메시아께서 친히 사람으로 오셨다. 이보다 더 큰 계시는 없었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특별계시 중의 특별계시이었다. 또 그의 제자들을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들과 그에 관한 사실들이 기록되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특별계시의 완성의 때에 기적들이 가장 많이 나타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6-3. 섭리와 죄 문제
하나님께서 사람들의 죄까지 섭리하신다는 사실은 신비한 일이어서 우리가 완전히 설명할 수는 없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주권자로서 인간의 죄 문제까지도 섭리하신다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다.
창세기 45:5-8, "당신들이 나를 이곳에 팔았으므로 근심하지 마소서, 한탄하지 마소서, 하나님이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나를 당신들 앞서 보내셨나이다. . . . 하나님이 큰 구원으로 당신들의 생명을 보존하고 당신들의 후손을 세상에 두시려고 나를 당신들 앞서 보내셨나니 그런즉 나를 이리로 보낸 자는 당신들이 아니요 하나님이시라." 출애굽기 4:21, "그러나 내가 그의[바로의] 마음을 강퍅케 한즉 그가 백성을 놓지 아니하리니." 열왕기상 22:23, "이제 여호와께서 거짓말하는 영을 왕의 이 모든 선지자의 입에 넣으셨고." 욥기 1:12, "여호와께서 사탄에게 이르시되 내가 그의 소유물을 다 네 손에 붙이노라, 오직 그의 몸에는 네 손을 대지 말지니라." 데살로니가후서 2:11, "이러므로 하나님이 유혹을 저희 가운데 역사하게 하사 거짓 것을 믿게 하심은."
그러나 사람들의 죄의 책임은 자신들에게 있다는 사실도 또한 부정할 수 없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지극히 거룩하시기 때문에 결코 죄의 조성자가 될 수 없으시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사람들의 죄들을 당신의 주권으로 허용하셨다. '허용적 섭리'라는 표현이 하나님의 주권과 사람들의 책임을 둘 다 긍정하는 의미로 사용될 수 있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5:4은 이렇게 진술한다: "하나님의 전능하신 능력, 측량할 수 없는 지혜, 그리고 무한하신 선이 그의 섭리에 크게 나타나, 섭리는 심지어 최초의 타락과, 천사들과 사람들의 다른 모든 죄들에까지 미치는데, 단순한 허용에 의해서가 아니고 그와 함께 자신의 거룩한 목적들을 위해 다양한 처리 방식으로 지극히 지혜롭고 강력하게 그것들을 제한하시고 다른 경우들에는 그것들을 정하시고 통치하심으로써이다. 그러나 그 죄악성은 오직 피조물로부터 나오며 하나님께로부터 나오지 않으니, 그는 지극히 거룩하고 의로우셔서 죄의 조성자나 승인자이시지도 않고 이실 수도 없다."
또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5:6은 이렇게 진술한다: "의로우신 심판자로서 하나님께서 이전의 죄들 때문에 어둡고 강퍅케 하신 저 악하고 불경건한 사람들에 관하여는, 그가 그것으로 그들의 이해를 밝히시고 그들의 마음에 역사하셨을지도 모를 그의 은혜를 단지 그들에게 주지 않으실 뿐만 아니라; 또한 그들이 가지고 있었던 은사들을 때때로 거두어 가시고 그들의 부패성이 죄의 기회로 삼는 대상들에게 그들을 드러내시며; 게다가 그들을 그들의 정욕들과 세상의 시험들과 사탄의 권세에 내어 주신다. 그래서 그들은 심지어 하나님께서 다른 사람들을 부드럽게 하기 위해 사용하시는 수단들 아래서도 자신들을 강퍅케 하는 일이 생긴다."


6-4. 섭리의 목적
하나님의 작정의 궁극적 목적도 그러하지만, 하나님의 섭리는 궁극적으로 당신의 영광을 나타내시기 위함이다. 세계와 인류 역사의 종말에, 하나님께서는 피조물들을 통하여 영광을 받으실 것이다. 로마서 11:36은 말씀하기를,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영광이 그에게 세세에 있으리로다. 아멘"이라고 하였다.
그러한 목적 아래, 하나님의 섭리는 또한 부수적으로 교회의 유익을 위한다. 하나님의 선택함을 입은 자들은 개인적으로 다 구원을 받고 이 세상에서 영적으로 자라가며, 또 그들의 모임인 교회는 단체적으로 그리고 전세계적으로 하나님의 구원의 은총 안에서 완전케 되어간다.
로마서 8:28, 30은 말씀하기를,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 . .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고 했다. 또, 로마서 11:25, 26은, "이 비밀은 이방인의 충만한 수가 들어오기까지 이스라엘의 더러는 완악하게 된 것이라. 그리하여 온 이스라엘이 구원을 얻으리라"는 놀라운 예언을 기록한다. 이 말씀은 이스라엘과 이방인의 구원을 포함한 하나님의 세계적 구원 계획을 보인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5:7은 진술하기를, "하나님의 섭리가 일반적으로 모든 피조물들에게 미치듯이, 그것은 아주 특별한 방식으로 그의 교회를 보살피며 모든 일들을 그것에 유익하도록 처리한다"고 했다.
또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5:5은 하나님께서 성도들의 죄를 허용하심도 그들의 유익을 위함임을 다음과 같이 진술했다: "지극히 지혜로우시고 의로우시고 은혜로우신 하나님께서는 때때로 자기 자녀들을 잠시 동안 여러 가지 시험들과 그들 자신의 마음의 부패성에 버려두시는데, 그것은 그들의 이전의 죄들 때문에 그들을 징계하시거나 그들의 마음의 부패성의 숨은 힘과 거짓됨을 그들에게 드러내셔서 그들로 하여금 겸손케 하시기 위함이며; 또 그들의 후원을 위해 자신을 더 친밀하고 계속적이게 의지하도록 그들을 일깨우시며, 미래의 모든 죄의 기회들에 대하여 그들로 더 깨어 있게 하시며, 기타 여러 가지 의롭고 거룩한 목적들을 위함이다."


7. 후대 기적의 문제
하나님께서는 성경 시대에 주셨던 기적들을 그 후 시대에도 계속 주셨는가? 기적들은 신약 교회 시대에 계속되었는가? 오늘날도 기적들은 가능한가? 후대 기적의 문제는 기적보다 범위가 좀더 넓은 성령의 초자연적 은사들 전반의 영속성 문제를 다룸으로써 대답될 수 있다.


7-1. 성령의 초자연적 은사들은 영속적인가?
성령의 은사들에는 자연적 은사들과 초자연적 은사들의 두 부류가 있다. 첫째로, 자연적 은사들이란 로마서 12:6-8에 증거된 대로 섬기는 일, 가르치는 일, 권위(勸慰)하는 일, 구제하는 일, 다스리는 일, 긍휼을 베푸는 일 등의 은사들을 가리킨다. 둘째로, 초자연적 은사들이란 고린도전서 12:8-10에 열거된 은사들을 주로 가리키는데, 지혜의 말씀, 지식의 말씀, 믿음, 병 고치는 은사, 능력 행함, 예언함, 각종 방언 말함, 방언들 통역함 등 아홉 가지이다.
성령의 초자연적 은사들의 목적은 무엇이었는가? 성령의 모든 은사들이 교회의 유익을 위하여 주어졌지만(고전 12:7), 특히 성령의 초자연적 은사들은 하나님의 특별계시의 전달과 확증을 위하여 주어졌다. 예를 들어, 지혜의 말씀, 지식의 말씀, 예언, 방언, 방언 통역 등은 하나님의 특별계시의 전달에 관계되고, 병고침, 능력 행함 등은 하나님의 특별계시의 확증에 관계된다.
사실, 성경 역사에서 말씀과 기적들은 하나님의 특별계시의 주된 방법들이었다. 그것은 구약 시대에 모세와 선지자들에게서 잘 증거되고 신약 시대에 사도들에게서도 그러하다. 특히 기적들은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주신 말씀이 참된 진리임을 확증하는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출 4:8, 30; 요 20:30, 31).
마가복음 16:17-20에 증거된 대로, 주 예수께서는 귀신을 쫓아냄, 방언, 뱀을 집거나 독을 마셔도 해를 받지 않음, 병 고침의 기적들을 통하여 사도들이 증거한 복음의 진리성을 확증하셨다. 히브리서 2:3, 4은 하나님께서 기적들과 성령의 은사들을 통해 그의 복음을 확증하셨다고 말씀한다. 이런 의미에서 성경은 기적들을 '표적들'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사도행전 2:43과 5:12에 보면, 사도 시대에 사도들을 통하여 기적들이 많이 일어났다. 기적들은 주로 사도들을 통하여 일어났다. 고린도후서 12:12은 기적 행함을 사도들의 표라고 말한다. 사도들이 교회의 기초를 닦는 자들이었으므로(엡 2:20),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성령의 초자연적 은사들을 많이 주셔서 자신의 뜻을 밝히 전달하시고 확증하셨던 것이다. 워필드, "성령의 초자연적 은사들은 특별히 사도들의 증명서이었다. 그것들은 교회를 설립하는 하나님의 권위적 도구들로서의 사도들의 신임장의 일부분이었다"(B. B. Warfield, Counterfeit Miracles, p. 6).
그런데, 성령의 초자연적 은사들과 기적들은 교회 역사상 사라졌다. 성령의 초자연적 은사들과 기적들이 역사상 사라졌다는 것은 교회의 전통적 견해이었다. 그러면 성령의 초자연적 은사들과 기적들은 언제 그리고 왜 사라졌는가?
교회역사는 성령의 초자연적 은사들과 기적들이 사도 시대의 특징이며 오직 초대 교회에 속하고 그 후시대에는 사라졌음을 증거한다. 따라서 교회들은 전통적으로 성령의 초자연적 은사들과 기적들이 초대 교회의 마침과 더불어 중단되었음을 인정하였고 그렇게 가르쳐 왔었다.
주후 4세기말 콘스탄티노플 교회의 수장(首長, Patriarch) 크리소스톰은 고린도전서 설교에서 방언은 이미 그쳤고 더 이상 일어나지 않는다고 말했고, 주후 5세기초 유명한 어거스틴도 요한일서 설교에서 방언은 유대 기독교인에게 주신 초기 표적이었고 이전 시대에 이미 사라졌다고 가르쳤다(David O. Beale, "Lecture Notes on the History of Doctrines", Bob Jones University). 칼빈도 사도행전 10:44 주석에서 "방언의 은사와 및 그 밖에 그와 같은 것들은 교회에서 오래 전에 중지되었다"고 말했다.
그러므로, 만일 이것이 역사적 사실이라면, 누구든지 성경의 말씀들에 근거하여(예를 들어, 고린도전서 12-14장 등) 성령의 초자연적 은사들과 기적들에 대한 이러한 역사적 사실을 반대하려 해서는 안될 것이다. 왜냐하면 만일 하나님께서 역사상 그렇게 섭리하셨다면, 우리가 그 사실을 겸손히 받아들여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면 성령의 초자연적 은사들과 기적들은 왜 사라졌는가? 우리는 성경에 의지하여 두 가지로 대답할 수 있다. 첫째로, 성령의 초자연적 은사들은 그 독특한 목적 때문에 사라졌다. 성령의 초자연적 은사들의 독특한 목적은 하나님의 특별계시들의 전달과 확증이었다. 그런데 그 목적은 사도 시대에 신약성경의 기록이 완성됨으로써 다 성취되었다.
요한계시록 22:18, 19은 하나님의 특별계시들이 성경에 충족히 기록되었음을 증거하기를, "내가 이 책의 예언의 말씀을 듣는 각인에게 증거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이것들 외에 더하면 하나님이 이 책에 기록된 재앙들을 그에게 더하실 터이요, 만일 누구든지 이 책의 예언의 말씀에서 제하여 버리면 하나님이 이 책에 기록된 생명 나무와 및 거룩한 성에 참여함을 제하여 버리시리라"고 하였다.
이와 같이 신약성경의 완성으로 하나님의 특별계시가 더 이상 주어질 필요가 없게 되었으므로, 자연히 성령의 초자연적 은사들과 기적들은 사라지게 되었다는 말이다. 워필드의 표현대로, "그것들의 기능이 그것들을 특별히 사도 교회에 제한시켰고 그것들은 필연적으로 그 교회와 함께 사라졌다."
사실, 이것은 과거 수천년 동안 자신의 뜻을 나타내신 하나님의 방식이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와 선지자들을 통하여 자신의 뜻을 계시하신 후에 그것을 책에 기록하게 하셨다. 그것이 구약성경이었다. 모세에게 주셨던 기적들은 그 후시대에 반복되도록 의도된 것이 아니었고, 모세에게 계시되고 확증된 하나님의 말씀이 성경에 기록되어 후시대에 전달되도록 의도된 것이었다.
둘째로, 성령의 초자연적 은사들은 그것들의 일시적, 초보적 성격 때문에 사라졌다. 성령의 초자연적 은사들의 독특한 목적은 또한 그것들의 일시적, 초보적 성격을 보인다. 그 은사들은 영속적인 무엇이 아니고, 또 하나님의 계시에 관한 한 온전한 무엇도 아니었다. 그것들은 단지 일시적이었고 부분적이었다.
고린도전서 13:8-12은 성령의 초자연적 은사들의 이러한 성격을 자세하게 증거하였다: "사랑은 언제까지든지 떨어지지 아니하나 예언도 폐하고 방언도 그치고 지식도 폐하리라. 이는 우리가 부분적으로 알고 부분적으로 예언하나 온전한 것이 올 때에는 부분적으로 하던 것이 폐하여질 것임이니라. 내가 어렸을 때에는 말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고 깨닫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다가, 장성한 사람이 되어서는 어린 아이의 일들을 버렸노라. 우리가 이제는 거울로 보는 것같이 희미하나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이제는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 때에는 내가 알려진 것같이 내가 알리라."
특히, 이 은사들은 '온전한 것'이 오면 사라질 것이었다. 여기에 이 '온전한 것'은 적어도 하나님의 계시에 관한 한 신약성경의 완성과 관계가 있다. 신약성경은 하나님의 충족한, 온전한 계시의 말씀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뜻의 충족하고 온전한 계시인 신약성경이 완성되었을 때, 성령의 초자연적 은사들 곧 일시적이고 부분적이고 초보적인 성격의 것들은 자연히 폐지되고 사라지게 된 것이다.
이것은 마치 건물을 지을 때 비계목을 설치하는 것에 비교할 수 있다. 비계목은 건물을 짓기 위해 일시적으로 설치하는 것에 불과하다. 일단 건물이 완성되면 비계목은 철거되어야 한다. 성령의 초자연적 은사들과 기적들도 그러하였다.
유명한 설교자 스펄젼은 성령의 초자연적 은사들과 기적들의 일시성, 초보성을 나무의 지지대에 비유하여, "만일 과수원에 나무를 심는다면 흔히 그 곁에 큰 지지대를 세워 붙들게 한다. 그러나 아무도 과거 50년간 있었던 사과나무를 지지하기 위해 기둥을 세우려고 생각하지 않는다. 오늘날 하나님의 교회는 기적과 이상(異像)의 지지가 필요치 않는 나무다. 여러분은 이상보다 나은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있다"고 말하였다.
성령의 초자연적 은사들 혹은 기적들과 신구약 66권의 성경 말씀과의 관계는 마치 유치원과 대학교의 관계와 같다. 성령의 그 은사들과 기적들은 마치 유아들을 위한 것이나 유아시절의 것과 같다. 그러므로 만일 신구약성경의 충만한 계시 진리들을 가지고 있는 자들이 그러한 일시적, 초보적 은사들을 구한다면, 그것은 마치 대학생이 유치원에 등록하여 무엇을 배우려는 것과 다를 바 없을 것이다. 오늘날 우리는 성령의 초자연적 은사들이나 기적들을 구할 것이 아니라, 신구약 66권의 말씀을 읽고 묵상하고 배움으로써 그 말씀에 정통하고 충만하려고 힘써야 한다.


7-2. 오늘날의 은사운동에 대하여
오늘날 기독교회 안에는 성령의 초자연적 은사들이 역사상 계속 존재했고 오늘날도 존재한다고 생각하고 주장하는 자들이 있다. 20세기 초엽에 오순절 교단들을 형성한 자들뿐 아니라 전통적 교단들 내의 적지 않은 사람들이 그러하다. 기독교계 안의 이러한 움직임을 통틀어 은사운동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이러한 은사운동은 다음과 같이 비평되어야 한다.
☞ 첫째로, 은사운동은 성령의 초자연적 은사들 전반의 계속성 혹은 회복을 주장하기 때문에 원리적으로 성경의 충족성과 종결성에 모순된다. 하나님께서 과연 성경 외에 또 다른 계시들과 예언들을 주신다는 말인가? 우리는 그것을 신뢰할 수 없다. 우리는 신구약 66권의 성경말씀을 하나님의 충족한 말씀, 최종적 권위의 말씀으로 믿고 있다. 신구약성경만이 그리스도인의 신앙과 생활의 정확무오한 유일의 규범이다.
어떤 이는 하나님께서 성경과 동일한 내용을 누구에게 계시하신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리는 그러한 계시의 필요성이 무엇이냐고 반문하지 않을 수 없다. 하나님께서는 1900년 기독교 역사상 성령의 내면적 활동을 통해 그의 종들과 백성들에게 성경을 깨닫게 하시고 성경을 기억나게 하셨다. 그러므로 성령의 새 계시적 활동들을 통해 동일한 성경의 내용을 또다시 받는다는 것은 전혀 불필요한 일이 아닌가?
누가복음 16장에 보면, 주께서는 부자와 나사로의 이야기에서 성경말씀이 인간의 구원을 위해 충족하다는 사실을 밝히 증거하셨다. 그는 아브라함의 입을 빌어 말씀하시기를, "모세와 선지자들에게 듣지 아니하면 비록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자가 있을지라도 권함을 받지 아니하리라"고 하셨다(눅 16:31). 또한 앞에서 인용한 요한계시록 22:18, 19도 성경의 충족성과 종결성을 분명히 증거한다. 이 말씀에 무엇을 더하거나 빼는 것에 대하여 엄중한 징벌이 선언되어 있다.
물론, 아무도 하나님의 주권을 부정할 수는 없다. 주시는 이도 하나님이시요, 거두시는 이도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이 하시고자 하면 교회 역사상 거두신 은사들일지라도 다시 주실 수 있음을 부정할 자는 아무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이유가 있어서 1900년 동안 거두어 가신 은사들의 계속성이나 회복을 주장하는 것은 하나님의 섭리의 방식을 반대하는 일이 된다.
2천년 기독교 역사는 기적 행함의 역사가 아니고 십자가의 말씀을 전파한 역사이었다. 바울 사도는 말하기를,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 우리는 십자가에 못박히신 그리스도를 전한다"고 하였다(고전 1:22, 23). 물론 중생과 회개의 내면적 기적은 늘 일어났지만, 외적인 기적들은 오랫 동안 사라졌었다. 특별한 경우 기도의 응답으로 병고침을 받는 것 등은 예외적인 것으로 간주된다.
하나님께서는 성경의 충족한 말씀으로 그의 일을 진행해 오셨다. 성경은 사람의 구원과 새생활을 위해 충족한 수단이었다. 성경을 믿고, 성경대로 사는 삶은 조금도 부족함이 없는 삶이었다. 말씀을 통한 성령의 잔잔한 내면적 활동은 어느 시대든지 하나님의 백성들을 떠난 적이 없었고, 하나님의 그러한 섭리 속에 신자들은 만족을 누렸다.
그러므로 성령의 초자연적 은사들의 계속을 주장하는 은사운동은 성경의 충족성과 종결성에 모순되며 성경을 통해 역사하신 하나님의 섭리의 방식에 반대된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은사들이 아니고, 성경말씀에 대한 성실한 순종이다.
☞ 둘째로, 은사운동은 성령의 초자연적 은사들이 교회역사상 계속 존재했고 오늘날 교회 안에도 실제로 존재한다고 주장하지만 과연 그러한지 의문된다. 기독교회들은 성경에 증거된 계시와 예언, 방언, 병고침 등의 은사들을 계속 경험하여왔는가? 하나님께서 신실한 성도들과 종들에게 그런 은사들을 항상 주셨었는가? 또 오늘날 은사주의자들이 받았다고 주장하는 것들이 참으로 하나님이 주신 은사들이라는 어떤 증거가 있는가?
우선, 계시와 예언에 대하여, 성경은 기록된 책의 내용 외에 다른 어떤 것을 더하지 말 것을 엄히 명령하였다. 요한계시록 22:18, "내가 이 책의 예언의 말씀을 듣는 각인에게 증거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이것들 외에 더하면 하나님이 이 책에 기록된 재앙들을 그에게 더하실 터이요." 그렇다면 성경 외에 계시와 예언을 말하는 것은 시작부터 잘못된 것이다.
역사상, 초대교회에 몬타누스파들은 초자연적 은사들을 주장했으나 이단으로 정죄되었었다. 18세기 에드워드 어빙이 설립한 카톨릭 사도교회는 모든 사도적 은사들을 주장했고 예언도 했으나 어떤 예언들이 성경과 충돌하고 또 성취되지 않았으므로 정죄되었다. 19세기에 들어와서도, 안식교, 몰몬교, 및 여러 신비주의 집단들이 성경 외의 하나님의 계시와 예언들을 말하지만, 다 이단들 혹은 불건전한 단체들로 간주되고 있다.
또한, 방언에 대하여, 은사운동은 성령세례의 최초의 증거는 방언이라고 주장하며 이 은사는 거의 모든 성도들의 필수적 은사인 것처럼 생각하고 있다. 그러나 성경의 방언들이 외국어들이었다고 생각되는데 반해, 오늘날의 방언 현상들은 그렇지 않은 것 같다.
'방언'이라는 헬라어 글로싸는 단순히 '언어'를 가리킨다. 신약성경에서 글로싸라는 말은 50회 사용되었고 이 말과 비슷한 말인 디알렉토스는 단지 6회만 사용되었다. 구약성경에서 히브리어 라숀(114회)은 헬라어 70인역에서 91회 가량 글로싸로 번역되었고 2번만 디알렉토스로 번역되었다. 히브리어 사파(176회)는 5회, 아람어 릿솬(7회)은 전부, 글로싸로 번역되었다. 성경에서 '방언'이라는 원어는 단순히 '언어'라는 뜻이다.
더구나, 방언이라는 말은 빈번히 글로싸이라는 복수형으로 사용된다. 마가복음 16:17, "새 방언들을 말하며." 사도행전 2:4, "저희가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방언[방언들]으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 사도행전 2:11, "그들이 우리의 방언들로 하나님의 큰 일들을 말함을 우리가 듣는도다"(원문 직역). 사도행전 10: 46, "이는 방언들을 말하며 하나님 높임을 들음이러라." 사도행전 19:6, "바울이 그들에게 안수하매 성령이 그들에게 임하시므로 방언들도 하고 예언도 하니." 이러한 말씀들은 방언들이 여러 개의 언어들임을 나타낸다.
또한, 고린도전서 14장에 언급된 방언들이 사도행전에 증거된 방언과 다른 성격의 것이라고 추측할 이유는 없다. 고린도교회가 경험한 방언 은사는 사도행전에 언급된 방언 사실들과 동시대의 현상이며, 따라서 사도행전에 나타났던 방언 은사와 동일한 것이라고 보는 것이 가장 자연스럽다. 방언을 통역한다는 사실도 방언이 언어적 성격을 가졌음을 암시한다. 언어가 아닌 소리를 통역한다는 것은 불합리하다.
그러나 오늘날의 방언들은 대체로 외국어의 성격을 갖지 않는 것 같다. 벌딕은 오늘날의 방언의 특징들을 열거하기를, ① 반복이 매우 심하다, ② 방언과 방언하는 사람의 언어적 배경이 비슷하다, ③ 한 두 개의 모음을 지나치게 많이 사용한다, ④ 언어적 구조가 부족하다, ⑤ 방언에 비해 통역이 두드러지게 너무 길다, ⑥ 동일한 구절의 통역이 일치하지 않는다, ⑦ 방언의 영어 통역시 주로 17세기 초의 킹제임스 역 문체가 사용된다고 하였다(Donald W. Burdick, Tongues: To Speak or Not to Speak, p. 65). 미쉬간 대학교의 케넷 파이크와 미국 성서공회 관계의 유진 니다 등의 언어학자들도 오늘날의 방언들이 언어학이 다룬 어떤 실제 언어와도 비슷하지 않다고 지적했다(Richard C. Schwab, Let the Bible Speak about Tongues, p. 108).
더욱이, 방언 같은 현상들이 역사상 기독교의 이름을 가진 이단적 종파들 속에도 있었고 심지어 기독교 밖에도 있었다는 사실을 우리는 고려해야 한다. 초대교회의 몬타누스파들은 방언을 했다. 그 후 17세기 말까지 방언 현상은 교회역사에 나타나지 않는다고 한다. 그러다가 1776년 미국 뉴욕주 트로이 부근에 앤 리가 설립한 쉐이커 공동체는 남녀가 나체로 춤추면서 방언을 했다. 이단적인 카톨릭 사도교회에서도 방언을 했다. 몰몬교의 장로들도 미국 유타주의 그들의 성전을 봉헌할 때 방언을 했다(Robert G. Gromacki, The Modern Tongues Movement, pp. 5-29; Schwab, pp. 4-7). 그러므로 방언 같은 모든 현상들이 다 하나님께서 주신 참된 방언의 은사가 아니라는 것은 분명하다.
덧붙여서, 오늘날 은사운동에서 흔히 인위적 방언 훈련을 볼 수 있는데, 그것은 분명히 비성경적이며 마귀적이다. 예를 들어, 1987년 7월 미국 루이지애나주 뉴올리언스에서 모인 '성령과 세계전도에 관한 북미 대회'에 관한 한 보도에 의하면, 한 저녁 집회후 성령세례 받을 자들을 위한 집회에서 인도자는 자기의 '기도 방언'을 따라하게 함으로써 참석자들로 하여금 방언 현상을 체험케 했고 그들에게 그것이 성령의 세례이며 하나님이 주신 방언임을 믿도록 강요했다. 이러한 행위들은 제재되지 않았다(Dennis W. Costella, "Deceiving and Being Deceived," Foundation, July-Sept. 1987, p. 9).
그러나 성경의 방언 사례들은 결코 훈련을 통한 것이 아니었고 심지어 방언하기를 구한 것도 아니었다. 사도시대의 신자들은 믿는 자에게 성령이 오신 표로서 방언을 말하는 경험을 했었다. 그러므로 방언 훈련은 명백히 성경의 모범을 벗어난 행위요, 하나님의 성령의 일을 인간적 훈련으로 받게 하려는 거짓된 행위요 마귀적인 행위이다. 그런 행위가 하나님의 일일 수 없다는 것은 명백하다.
이와 같이 오늘날의 방언 현상들이 하나님이 주신 은사라는 분명한 표가 없다면, 그 현상들은 어떻게 설명해야 하는가? 물론 그것들 중의 일부는 하나님이 주신 방언들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1900년 동안 거두어 가셨던 은사들을 오늘날 정말 다시 주실 것인가? 하나님의 섭리의 방식과 성경의 충족성에 비추어 볼 때, 그러한 가능성은 매우 작아 보인다. 오히려, 오늘날의 많은 방언 비평가들은 현대의 방언 현상들이 심리적 현상이거나 위조품이거나 혹은 심지어 마귀에게서 기원한 것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고 있다(Gromacki, pp. 44-49; Schwab, pp. 104-108; Burdick). 특히, 오늘날 방언 현상들의 비(非)언어적 성격이나 방언운동 안의 인위적 요소들은 그것이 성령의 역사가 아님을 보인다. 성령의 역사가 아니면서도 그렇게 불같이 일어나는 것은 악령이 아니고 무슨 영의 역사이겠는가?
마지막으로, 병고침(신유)에 대해서도, 우리는 단순히 병고침의 현상들이 그것들이 성령의 은사임을 확증하지 않는다는 점을 말해야 할 것이다. 병고침의 현상들은 기독교 안팎의 신비주의적 집단들에서 있어 왔다. 신비주의 연구가 쿠르트 코흐(Kurt Koch)는 악령에 의한 신비적 치료의 많은 사례들을 제시했다(쿠르트 코흐, 사단의 전술전략, 22-101쪽).
더욱이, 성경에서 병고침의 사례들은 즉각적이고 비제한적이었는데, 오늘날의 병고침은 그렇지 않은 것 같다. 죤 맥아더는 예수님과 사도들의 병고침의 특징들을 열거하기를, ① 한마디의 말씀이나 한 번의 만짐으로 치료하셨다(막 8:22-26에서 소경에게 두 번 안수하신 예외는 있었음), ② 즉시 치료하셨다, ③ 완전히 치료하셨다, ④ 모든 사람을 치료하셨고 치료하실 수 있었다, ⑤ 신체 기관의 질병들도 고치셨다, ⑥ 죽은 자들을 일으키셨다고 하였다(John MacArthur, The Charismatics, p. 151). 그러나 오늘날 은사운동의 병고침과 신유의 은사들은 이러한 특징들을 가지는 것 같지 않다.
☞ 셋째로, 은사운동은 성경적 기독교의 말씀 중심의 신앙생활에 불만족하며 성령의 체험을 강조한다. 즉 은사운동은 체험적 기독교를 강조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신앙을 말씀보다 경험에 의존시킨다. 강조점이 말씀으로부터 경험에로 이동된다. 성경말씀으로 만족하던 신앙생활이 경험의존적인 신앙생활로 변하는 것이다.
그러나 전통적으로 개혁교회는 하나님의 진리에 대한 바른 지식과 그 진리대로 사는 바른 삶을 강조해 왔다. 그것은 옛길이다. 우리는 그것이 성경적인 건전한 길이라고 확신한다.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참된 영성(靈性)의 표는 그리스도인다운 인격과 삶이지, 어떤 은사 경험이나 행사가 아니다. 은사는 결코 영성의 표나 척도가 될 수 없다.
성경의 대표적 한 예는 고린도교회이다. 고린도교회는 은사들을 많이 경험하고 소유한 교회이었음에도 불구하고(고전 1:7) 영적 어린 아이라고 지적되었다. 고린도전서 3:1, "형제들아, 내가 신령한 자들을 대함과 같이 너희에게 말할 수 없어서 육신에 속한 자 곧 그리스도 안에서 어린 아이들을 대함과 같이 하노라."
이와 비슷하게, 1987년과 1988년에 미국 사회에 물의를 일으켰던 미국의 짐 배커와 지미 스웨거 같은 어떤 은사주의 T. V. 전도자들의 사치스럽고 부도덕한 생활들은 기독교계의 수치이었고, 그리스도인의 영성(靈性)이 은사 경험에 있지 않고 거룩한 인격과 생활에 있음을 많은 이들에게 다시 깨닫게 하는 일들이었다.
성경은 초자연적 은사들의 경험보다 바른 인격과 삶을 더욱 중시하고 강조한다. 신명기 13:1-5, "너희 중에 선지자나 꿈꾸는 자가 일어나서 이적과 기사를 네게 보이고 네게 말하기를 네가 본래 알지 못하던 다른 신들을 우리가 좇아 섬기자 하며 이적과 기사가 그 말대로 이룰지라도 너는 그 선지자나 꿈꾸는 자의 말을 청종하지 말라. 이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가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여 너희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는 여부를 알려 하사 너희를 시험하심이니라. 너희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를 순종하며 그를 경외하며 그 명령을 지키며 그 목소리를 청종하며 그를 섬기며 그에게 부종(附從)하고 그 선지자나 꿈꾸는 자는 죽이라."
이사야 8:20, "마땅히 율법과 증거의 말씀을 좇을지니, 그들의 말하는 바가 이 말씀에 맞지 아니하면, 그들 속에 빛이 없기 때문이라"(원문).
마태복음 7:22-23, "그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 때에 내가 저희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노니[알지 못했으니--원문]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고린도전서 13:1-7은, 성령의 어떤 은사보다도 중요한 것이 사랑의 인격과 생활임을 밝히 증거한다. 또한, 고린도전서 13:8-12은 성령의 초자연적 은사들이 초보적이고 부분적이며 어린 아이 시절의 것이고 장차 '온전한 것'이 올 것을 증거하였다(고전 13:8-12). 신구약 성경은 바로 그 온전한 것이다. 하나님이 주시는 초자연적 은사들이 있든지 없든지 간에, 성도들에게 중요한 것은 성경에 계시된 객관적 하나님의 말씀이다.
데살로니가후서 2:9-12, "악한 자의 임함은 사단의 역사를 따라 모든 능력과 표적과 거짓 기적과 불의의 모든 속임으로 멸망하는 자들에게 임하리니 이는 저희가 진리의 사랑을 받지 아니하여 구원함을 얻지 못함이니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유혹을 저희 가운데서 역사하게 하사 거짓 것을 믿게 하심은 진리를 믿지 않고 불의를 좋아하는 모든 자로 심판을 받게 하려 하심이니라."
그러므로 우리는 성령의 초자연적 은사들을 사모하지도, 구하지도, 중요하게 생각하지도 말고, 오직 성경 말씀을 연구하고 믿고 살며 그것을 전파하는 것으로 충분한 줄 깨닫자. 오늘날 성경 말씀의 교훈을 받지 않는 자들은 비록 기적을 볼지라도 믿지 않을 자들이다. 주께서는 누가복음 16장의 부자와 나사로 이야기에서 분명히 말씀하시기를, "모세와 선지자들에게 듣지 아니하면 비록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자가 있을지라도 권함을 받지 아니하리라"고 하셨다(눅 16:31).
☞ 넷째로, 은사운동은 전통적 교회들과 사역자들이 체험치 못한 성령의 초자연적 은사들을 체험했고 소유하고 있다고 자부하는 반면, 바른 교리들에 대해서는 별 관심이 없다. 그리하여 은사운동은 오늘날 배교적인 자유주의 교회들이나 우상숭배적인 천주교회를 분별력 있게 배격하지 않는다. 오늘날 은사운동은 오히려 모든 세계 교회들이 성령 안에서 하나됨을 강조하고 있다.
1987년 북미 성령 대회에서 한 예언자는 하나님의 이름으로 심지어 개신교회와 천주교회의 통합을 선언했다. 물론, 이 미혹의 예언은 그 대회에서 제재되지 않았다(Costella, pp. 16, 27). 우리 나라의 은사주의자들도 분별력이 없기는 마찬가지다. 예를 들어, 은사주의적 순복음 강남 신학원 교수진에 자유주의적 한신대, 감신대, 연대신대의 교수들이 포함되어 있다(크리스챤 저널, 1993년 5월, 96쪽).
이렇게 은사운동은 오늘날 잘못된 교회 연합 운동의 촉매로서 나타나 그 운동을 촉진시킨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현대 교회에 주신 부흥의 표가 될 수 있겠는가? 이것은 현대 교회의 영적 무지와 혼란을 추가시키는 일이다. 그렇다면, 그것이 성령의 일이 될 수 없다.
우리는 영적으로 메마른 신앙생활을 해서는 안되고 성령의 충만함 속에 살아야 한다. 성경은 신자의 삶이 이러한 영적인 삶이어야 함을 가르친다. 로마서 8:14,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그들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 에베소서 5:18,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 에베소서 4:30, "하나님의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말라."
그러나, 오늘날 은사운동은 앞에서 지적한 대로 하나님의 성령의 활동이라는 증거를 갖지 않는다. 도리어, 그 운동의 여러 가지 잘못된 요소들과 경향들은 그 운동에 대해 부정적 평가를 하게 만든다. 은사운동은 어떤 이들이 말하는 것처럼 결코 현대 교회의 영적 부흥의 표가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현대 교회에 불어닥친 추가적 영적 혼란의 일이다. 그러므로 참 교회들과 신자들은 마땅히 은사운동의 위험성을 인식하고 마땅히 그 운동을 경계해야 한다.
만일 현대 교회에 영적 침체가 있다면, 그것은 '전통적인 경직된 성령론' 때문이 아니라, 목사들과 신도들의 죄와 불순종, 특히 세상과 분리되기보다는 세상을 따라가며 세상과 타협하는 인본주의적 삶에 기인한다. 요한일서 2:15-17,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치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속에 있지 아니하니,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 즉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 생의 자랑이 다 아버지께로 좇아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 좇아 왔음이니라.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이는 영원히 거하느니라." 그러므로, 교회의 영적 부흥은 신자들의 성령세례 경험 같은 어떤 단회적 혹은 반복적 사건들에 있지 않고, 성경 말씀에 근거한 철저한 회개와 진실한 믿음, 그리고 일상 생활 속에서 성경 말씀대로 사는 온전한 순종의 삶에 있다.

[출처] 하나님의 사역들|작성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