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차 대각성 운동 및 그 후의 부흥운동
18세기가 끝날 무렵 미국에서는 많은 변화가 있었다. 1776년에 독립을 선언한 식민지는 1783년 미합중국이란 이름으로 새로운 나라가 되었다. 그 후 유럽에서 많은 이민자들이 몰려왔다. 처음에 13개 주였던 미합중국은 12개의 새로운 주를 더해서 그 영토가 미시시피 강까지 확장되었다. 증기 기관의 발명으로 탄생한 배나 기차 등의 교통수단은 새 나라의 문물을 더욱 발전시켜 주었다. 전세기보다 훨씬 복합적인 상황은 신앙생활에도 큰 영향을 미치고 있었다.
1. 신앙의 침체기
독립 전쟁과 프랑스 대혁명의 여파는 불신앙을 불러왔다. 전쟁은 언제나 사람들의 도덕률을 저하시킨다. 전쟁은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군인들은 광란 중에 사람들을 마구 죽였고 무슨짓이라도 서슴지 않았다. 여기다가 이신론은 전통적인 신앙에 근본적인 회의를 갖게 했다.
결국 새로운 시대는 신앙적으로 어두운 기간이었다. 믿음의 역군을 교육시키기 위해 설립된 프린스턴 대학이지만 1782년, 단지 두 명만이 그리스도인임을 고백하였다. 대학의 분위기는 회의주의적이었고 교수들도 거의가 신앙에는 관심이 없었다. 조상들의 청교도 정신은 이미 오래 전에 사라지고 말았다. 술과 각종 부도덕이 일반화되어 사람들의 수준은 저하되었다.
불신앙은 일반적인 것이었다. 특히 상류층에는 이신론이 편만하였다. 그러므로 전에 활발했던 부유한 지역의 교회들은 성도 수가 격감하고 있었다. 서부 개척 운동과 새로이 밀려들어오는 이민자들의 각기 다른 종파는 전의 개신교 일색의 분위기를 바꾸어 놓았다. 특히 아일랜드에서 온 이민자들은 거의가 가톨릭교도들이었다. 문화나 전통의 동질화도 당시로는 심각한 문제였다.
1791년에는 국가와 교회는 분리되어야 하며 모든 종교는 다 자유하다는 법이 통과되었다. 하지만 신앙심이 저하된 시기의 미국 교회는 그 성도 수가 급격히 줄고 있었다. 적어도 20년 동안 예배에 참석하는 사람 수는 대단히 적었다. 열성적인 감리교회의 경우도 1794년 한 해 동안 신자 수가 4천 명이나 줄었다.
24명의 뉴잉글랜드 목사들은 교인들에게 부흥을 위해서 열정적으로 기도해 줄 것을 공식적으로 발표하였다. 그 기도는 1800년까지 지속되었다.
2, 예일대학교 등 뉴잉글랜드에서 일어난 각성운동
18세기 말엽부터 미국 뉴잉글랜드에서 소위‘두 번째 대각성운동’(Second Great Awakening)이라고 불리는 부흥운동이 일어났다.
요나단 에드워즈(Johathan Edwards)의 외손자 디모데드와이트(Timothy Dwight)가 1795년 예일 대학교의 총장이 되면서 예일 대학교 학생들 가운데 신앙의 각성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드와이트의 도전적인 복음적 설교가 학생들의 마음을 크게 감동하여 1802년에는 전교 학생의 1/3이 공중 앞에서 회개하며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을 고백했다.
1806년에는 윌리암스 대학교(Williams College)에서 괄목할만한 복음적 각성과 선교운동이 일어났다. 다섯 명의 학생이 단풍나무 숲에 모여 함께 기도하곤 했는데, 1806년 여름 어느 날 함께 모여 기도하던 중 갑자기 소나기가 내려 비를 피하기 위해 건초더미 밑에서 기도하는 가운데 5명의 학생이 선교에 대한 열정에 불붙게 되어 이교 세계의 복음화를 위한 헌신을 서로 다짐하게 되었다. 이 건초더미 밑에서 일어난 기도와 선교의 불길은 그 후 계속 뉴잉글랜드의 여러 대학교 안에(Andover, Princeton,Washington, Amherst 등등) 복음의 각성과 선교운동을 불러 일으켰는데, 부흥운동 연구의 권위자인 오르(Orr) 박사는 지적하기를 ‘이 건초더미 확약(Haystack Compact)으로부터 현대 미국 선교 운동이 태동되었다.’고 강조해서 말했다.
3. 중남부 지역에서 일어난 각성운동
뉴잉글랜드에서 고요하고 진지한 부흥 운동이 대학생들 가운데서 일어나던 무렵 알리게니(Allegheny) 산맥 서부의 개척지 즉 켄터키, 테네시. 오하이오 주 등 미국 중남부 지역에서는 보다 열광적인 부흥운동이 일어나고 있었다. 1797년 켄터키 주 남부 지역에 모여 살던 불량배들이 스코틀랜드계 장로교 목사 매그리디(James McGready)의 도전적인 설교를 듣고 회개하면서 부흥운동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1799년에도 켄터키 주 남부에서 괄목할 만한 부흥운동이 다시 일어났는데 이 때에는 장로교, 감리교 및 침례교의 목사들이 매그리디 목사와 합세했다. 그리고 이 때의 부흥집회에서는 극심한 감정적 폭발현상이 동반했다. 1800년에는 곳곳에 천막집회가 열리게 되었고, 1801년에는 켄터키 주 동북부 케인 릿지(Cane Ridge)에서 대부흥운동이 일어났다. 1801년 8월에 열린 케인 릿지 천막집회는 한 주간 동안 계속되었는데 많이 모일때에는 20,000여 명이 집회에 참석했다. 감정적인 흥분과 육체적 기현상이 동반되었는데 ‘죄책으로 말미암은 신음과 비명소리 그리고 기쁨에 사무친 고함소리가 뒤범벅되었으며’ 대부분의 사람들이 감정에 북받쳐 ‘넘어지고’(falling) 또는‘진동’(jerking)했으며, 어떤 사람들은 ‘소리 내어 짖고’(barking), ‘달리고’(running), ‘뛰고’(jumping), 또는 ‘무아지경에 빠지기’(trancing)도 했다. 켄터키 주의 부흥 운동은 테네시 주, 서부 케롤라이나 주, 조지아 주 및 오하이오 주에까지 계속 퍼져 나갔는데 이 부흥운동으로 인하여 서부의 교회들이 괄목할 만한 성장을 경험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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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영국에서 일어난 각성운동
19세기 초 미국 곳곳에서 일어난 천막집회와 부흥운동에 대한 소식이 영국에 전해지자 영국에서도 비슷한 부흥운동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젊은 감리교인 휴 번(Hugh Bourne)은 미국에서 일어난 부흥운동에 대한 소식을 듣고 크게 감동되어 1805년경부터 부흥 집회를 인도하기 시작했다. 1807년 감리교 총회가 옥외 천막집회를 금했음에도 불구하고 휴 번은 계속 옥외집회를 인도하며 부흥운동을 크게 일으켰는데, 결국 감리교에서 출교를 당해‘원시 감리교단’(Society of Primitive Methodists)을 창설하게 되었다.
원시 감리교단은 급격히 성장하여 반세기 안에 15만여 명의 신도를 가지게 되었고, 영국 교회와 사회에 깊은 영향을 미쳤다. 19세기 중엽 원시 감리교회에 의해 개종하여 위대한 설교자가 된 사람이 유명한 찰스 스펄전(Charles H. Spurgeon)이었다. 그는 원시 감리교단에 머물러 있지 않고 침례교단에 가입하여 평생을 칼빈주의 신학적 확신을 가지고 복음을 전하는 가운데 영국 교회에 큰 부흥을 가져왔다.
5. 피니의 각성운동
미국에서 일어난‘두 번째 대각성운동’의 제1기를 18세기 말엽부터 1812년까지로 잡고, 제2기를 1822년부터 1842년까지로 잡는데, 제2기의 부흥운동을 이끌어간 뛰어난 지도자가 찰스 피니(Charles G. Finney, 1792-1875)였다.
피니는 1792년 코네티컷 주 리치필드 카운티 워런에서 평범한 농부였던 아버지 실베스터 피니와 어머니 레베카 라이스 피니의 일곱 번째 아이로 태어났다. 그의 가족은 2년 후 뉴욕주 서부로 이사가게 되었으며, 피니는 그곳에서 법률 교육을 받아 총명하고 유망한 청년으로 인정을 받게 되었다.
그는 홀로 성경을 연구하고 기도하다가 1821년 10월 10일에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한 후 자신이 복음 전하는 사람으로 부름 받았음을 깨달았다. 피니는 2년 후 1823년 6월 25일 세인트 로렌스 노회의 배려로 자신이 다니던 교회의 담임이던 프린스턴 신학교 출신의 조지 게일 목사의 문하에서 신학 수업을 시작해 6개월 후인 그해 12월 30일 강도사 자격을 얻었고, 다시 6개월 후 1824년 7월 1일 장로교 목사로 안수를 받았다. 그리고 1824년 봄부터는 서부지역여선교회의 후원을 받으며 뉴욕주 북부 지역 정착민을 상대로 선교 사역을 시작하였다.
그로부터 50년 동안 그는 미국, 영국, 스코틀랜드 등지를 다니며 부흥회를 열었다. 부흥사로서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은 그는 여러 도시에서 여러 해 동안 끊이지 않고 계속적인 부흥회를 진행하였다. 뉴욕이건 필라델피아건 일단 부흥회를 시작하면 일년 이상 계속하였다.
그의 설교는 능력이 있어 청중들로 하여금 죄를 뉘우치고 그리스도를 영접하게 만들었는데, 1830년 뉴욕 주 롯체스터에서 가진 전도 집회 때는 롯체스터 시민 10,000여 명 중 1/10이 회개했고, 1,200명이 교인으로 새로 등록하게 되었으며, 1831년 한 해 동안에 십만 여명의 성도가 생기기도 하였다.
1832년 뉴욕의 친구들은 극장을 하나 사서 그를 위한 전용 부흥회 장소로 제공하였다. 여기서 2년 동안 일곱 그룹의 신자들이 모여서 교회를 설립하게 되었다. 이 때쯤에 피니는 장로교를 떠나서 독립 교단을 만들었다. 장로교의 예정론을 받아들일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가 볼 때 구원은 인간의 결단이지 본인의 의사와 관계없이 예정된 자에게 일어나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피니의 부흥을 위한 위와 같은 신학은 당시 칼빈주의적인 입장과 상당히 다른 것이었다. 그는 신앙 부흥을 위한 인간의 역할을 대단히 강조하였다. 그가 보기에 부흥은 전적으로 인간에게 책임이 있었다. 인간이 부흥을 원하고 부흥을 위한 준비를 하고 그렇게 함으로써 부흥은 당연히 일어나는 것이었다. 피니는 인간의 타락한 본성은 그냥 내버려두면 자연히 악으로 나타난다고 보았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인간 속에 있는 감정에 강한 감동을 일으키신다. 그러면 그때부터 타락한 인간도 순종하게 된다. 물론 감동은 신앙이 아니다. 하지만 신앙을 유지하고 발전시키는 것은 감동된 욕구와 감정이다. 대개의 경우 의지도 감정에게 복종하는 것이 인간이라고 그는 보았다.
피니는“사람들의 지식은 너무 부족하고 원칙은 너무 약해서, 감동되지 않으면 할 일을 하지 않고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일도 전혀 하지 않을 것이다.”그러기에 부흥회는 필요하다고 보았다. 세상이 여러 재미있는 일들을 통해서 사람들을 흥분시키고 신앙에서 멀어지게 하는 것처럼, 교회도 사람들이 하나님께 복종하도록 지옥과 형벌을 알려주고 말씀으로 감동시켜야 한다는 것이다.
피니는 1836년 오벌린(Oberlin) 대학교의 신학교수가 되었고 1851년에는 학장이 되었는데, 그는 계속 설교와 교수에 종사하며 여생을 보냈다. 피니가 사용했던 전도방법의 특징은 개인의 자의적 회개와 헌신을 강조하면서 전도를 위한 수단과 방법을 최대한으로 이용하는 것을 정당화 한 점이다. 피니의 적극적이고 인위적인 새로운 전도 방법(New Measures)이 그 방법을 따르는 자들 중 성령에 사로잡힌 자들에게는 큰 성과를 가져오게 했지만, 수단과 방법에만 지나친 관심을 기울인 직업적 전도자 들에게는 전도를 한갓 감정주의와 사업주의로 전락시키는 결과를 초래하기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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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무디의 부흥운동
1857년과 1858년에는 뉴욕시의 실업인들 가운데서 기도회를 통한 부흥운동이 일어났는데, 이 부흥운동은 점차 미국 전역과 캐나다에까지 널리 퍼지게 되었다.
19세기 후반기 부흥운동을 이끌어간 뛰어난 지도자는 디 엘무디(Dwight Lyman Moody, 1837-1899)였다. 피니가 훌륭한 교육을 받은 학자였음에 비해 무디는 무식한 구두 수선공이었으나, 전도에 대한 열의로 가득 찬 점에서 두 사람은 일치했다.
무디는 메사추세츠 노스필드에서 소작농이자 석수의 다섯째 아들로 출생하였다. 그의 아버지는 술을 지나치게 마셨다. 그 때문에 그의 아버지는 무디가 4살 되던 해 세상을 떠났다. 강한 어머니 밑에서 8식구의 가족은 가난하게 성장하였다. 무디는 농장에서 일해야 했다. 때문에 무디는 제대로 교육을 받을 수 없었다. 초등학교 교육도 겨우 받았다. 그의 어머니는 유니테리언 신자였다. 그러나 그의 형제들은 정통적인 삼위일체를 믿는 신앙인들이었다. 보스톤의 어느 교회 주일학교에 출석하던 무디는 1855년 4월 21일 그의 주일학교 선생님의 영향으로, 그리스도에게로 돌아서는 분명한 회심을 체험하였다. 1856년에 무디는 진취적인 대평의 신도시 시카고로 이주해 왔다. 그는 곧 제화점에 취직하였다. 그의 행복한 생활방식과 밝은 예의심, 그의 예리한 직업의식과 무한한 열정은 무디를 일약 백만장자로 만들어주었다.
무디는 1857-1858년 시카고에서 일어난 부흥운동에 크게 감화를 받아 1858년 시카고에서 주일학교(Sunday School)를 시작하여 전도에 종사한 결과 큰 성과를 거두었다. 처음에 무디는 말씀을 전하거나 가르치기에는 너무도 학력이 없다고 느꼈다. 그러나 무디는 성경을 가르치는 값진 은사가 자신에게 있음을
발견하였다. 1860년에 무디는 판매원 직업을 포기하고 전도운동에만 전적으로 헌신했고, YMCA 운동에 적극 참여했다(1865년에는 시카고 YMCA의 회장이 됨). 1862년에 무디는 영국 태생의 유그노 에마 레벨과 결혼하였다. 그녀는 자신을 내세우지 않는 겸손한 여인이었다. 그녀의 교양, 센스, 너그러움 그리고 신앙은 무디가 거대한 사역을 추진하는 데 활력을 제공해 주었다. 그들은 두 아들과 한 명의 딸을 두었다. 대단히 행복했던 무디의 가정 생활은 그의 사역과 전도여행의 가장 확고한 기초가되었다.
무디는 1867년에 영국에 가서 스펄젼, 뮐러 등의 복음주의 지도자들과 사귀는 가운데 1868년에는 무어하우스(Moorhouse)의 설교에 큰 감명을 받아 설교자로서의 획기적인 전환점을 가지게 되었다. 1870년에는 쌩키(Ira Sankey)를 만나게 되는데 그는 무디의 전도 집회 때마다 찬송을 불러 그의 전도사역을 도왔다. 1871년 뉴욕 집회 때 무디는 성령의 부으심을 강하게 체험했다. 1872년부터 1875년까지 두 번째 영국을 방문하여 영국을 비롯하여 스코틀랜드에 큰 부흥 운동을 일으켰다. 런던에서의 집회는 거의 20주간 동안 계속되었는데, 총 250여 만 명이 집회에 참석했다. 무디의 전도운동이 영국 사회에 미친 영향이 매우 심각했으니 공산주의 이론의 창시자의 한 사람이었던 엥겔스(Engels)는 당시의 전도운동을 평하여 영국의 중산계급이 무산대중을 지배하기 위해 미국의 부흥운동을 수입한 음모에 불과하다고 했다. 스코틀랜드에서의 전도운동은 6개월 안에 ‘국내에서 가장 강한 종교 세력’으로 발전했으며 에딘버러 대학생들에게 깊은 감화를 끼쳤는데 그 중 헬리드러먼드(Henry Drummond)는 그 후 영미 학생운동에 크게 공헌했다.
무디는 1875년 미국에 돌아와 부르클린, 필라델피아, 뉴욕시 등 대도시에서 전도집회를 개최했는데 수만 명이 참석하여 큰 성과를 거두었다. 1876년에는 시카고에서, 1877년에는 보스톤에서 집회를 인도했고, 1880-1881년에는 태평안 연안에까지 전도 집회를 인도했다.
무디는 1881년에서 1884년까지 세 번째 영국을 방문하여 에딘버러, 글라스고우, 캠브리지, 런던 등지에서 큰 부흥운동을 일으켰고, 1882년 캠브리지 방문시 스터드(C. T. Studd)를 비롯한 ‘캠브리지 7인’이 복음사역에 헌신했는데 이들은 영미 학생운동에 큰 공헌을 했다.
무디는 1885년부터 미국 각지에서 전도집회를 인도했고, 특히 1886년에는 메사추세츠의 헐몬산에서 두 주간 동안 대학생 집회를 가졌는데 이 집회에서 100여 명의 대학생들이 복음사역에 헌신했다.
무디는 1893년에 시카고에서 대전도 집회를 개최했는데 200여 만 명이 집회를 참석했다. 1899년 11월 미조리주 켄사스 시에서 무디는 그의 마지막 집회를 인도했는데, 이때의 전도 집회는 성공회, 침례교, 회중교, 감리교, 장로교 등 여러 교파의 대표들로 구성된 위원회에 의해 진행되었다. 피로에 지친 무디는 "
40여 년 동안 설교를 해 오는 동안 집회를 그만두어야 했던 일은 이번밖에 없었다.”고 이야기하고 집에 돌아가 잠시 머뭇거리다가 세상을 떠났다. 1899년 12월 22일의 일이었다.
1886년에 무디는 시카고에 무디 성경학교를 설립하고 토레이(R. A. Torrey)를 초대 교장으로 확보하였다. 수년 후 대학 교육을 받지 못한 수백 명의 남녀가 무디 성경학교에서 직업 기독교 사역자가 되기 위해 훈련을 받을 수 있었다. “내가 역사에서 사라질 때 나는 얼마의 위대한 남녀를 뒤에 남겨둘 것이다.”라고 한 무디의 말처럼, 그의 설교와 가르침에 영향을 받은 수백 명의 젊은이들이 세계 각 곳에 흩어져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파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