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논문 소논문

인간과 동식물의 죽음에 대한 기독교 세계관적 해석과 통합

하나님아들 2021. 10. 11. 22:59

인간과 동식물의 죽음에 대한 기독교 세계관적 해석과 통합
Interpretation and Integration of the Deaths of Human, Animal and Plant from Christian Worldview


황희성
Hee Sung HWANG

밴쿠버기독교세계관대학원
Vancouver Institute for Evangelical Worldview
ACTS Seminaries of Trinity Western University
7600 Glover Rd., Langley, BC V2Y1Y1, CANADA
EMail: hsyellow67@nate.com


(Received April 29, 2015
Accepted May 31, 2015)


This essay deals with the deaths of humans, animals, and plants from Christian worldview. When it comes to the concept of 'salvation' in the Bible, the understanding of death as "the wages of sin Romans 6:23" has been overly biased to 'physical death.' This paper was conducted in the following order: First, I compare the secular understanding with the biblical understanding of deaths of humans, animals, and plants. Second, I try to deal with an integrated understanding of death with various concepts. Third, after discussing the relation of the deaths of humans, animals, and plants, and the uniqueness of it, I discuss the need for a comprehensive understanding of death. Fourth, I try to interpret the death, based on Christian worldview and a comprehensive understanding of death with the framework of the ‘Creation-Fall-Redemption’ Finally, I try to correlate the theological concept of death to the interpretation of the Christian worldview which shows an integrated understanding of death. From the research, I came to conclude that the death of humans, animals, and plants in the Bible has been emphasized only on the 'physical death' and it causes too negative evaluation of the death. The emphasis on physical death interferes with our integrated understanding of death. In addition, the negative view of death cannot explain the meaning of human's life and death 'now and here,' and it also makes us neglect the importance of nowness. In addition, I found the concept of similarity and distinction of the death of the human, animals, and plants. With such recognition, I came to know that the death of all creatures is also connected to the God's salvation plan, based on the Christian worldview. Furthermore, I could recognize the importance of accepting a balanced and integrated perspective of creation tand salvation theology so that we can interpret the death as the completion of God's salvation, having a way of the theological practice to be applied for a life. Finally, I realized that having good attitudes dealing with death in real life is important as much as comprehending the importance of an integrated biblical understanding of death. In addition, I came to have a gratitude and appreciation for the creatures.


I. 서론
II. 인간의 죽음에 대한 이해
1. 죽음의 의미
2. 죽음의 원인
3. 죽음의 결과
III. 동식물의 죽음에 대한 이해
1. 죽음의 의미
2. 죽음의 원인
3. 죽음의 결과
IV. 인간의 죽음과 동식물의 죽음 상관성
1. 연계성
2. 독특성
3. 통합적인 이해
V. 죽음에 대한 기독교 세계관적 해석
1. 창조-타락-구속의 구조에서 죽음
2. 통합적인 이해를 위한 신학적 적용
VI. 결론
참고문헌


I. 서론

성경은 모든 피조 세계에 존재하는 죽음에 대한 원인이 인간의 타락으로 인한 죄의 결과라고 한다. 그것에 대한 증거로써, “죄의 삯은 사망”(로마서 6장 23절)이라는 성경 구절과 다른 기타 성경 구절을 들고 있다. 하지만 ‘사망’(죽음)에 대한 해석이 너무나 육체적인 죽음에 대한 개념으로 치우쳐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하지만 성경에서 죽음은 단순하게 육체적인 죽음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고통, 불행 등의 의미도 포함되어 있다.

무엇보다도 성경은 인간의 범죄로 인한 죽음에 대한 언급, 즉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를 먹을 경우에는 반드시 “죽으리라”(창세기 2장 17절)는 본문에서 말하는 그 죽음이 단순하게 육체적인 죽음만을 의미하는 것처럼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선악과를 먹지 않았다면 영원히 죽지 않았을 텐데(육체적으로) 먹었기 때문에 죽음(육체적인)이 찾아왔다는 것이다. 하지만 “죽으리라”(창세기 2장 17절)는 죽음의 의미는 하나님과의 관계적인 죽음인 것으로 보인다. 아담과 하와는 죄를 범한 후에 육체가 죽은 것이 아니라 에덴동산에서 추방되어 하나님과의 교제에서 죽음(단절)을 가져왔다. 만약에 “죽으리라”는 것이 육체적인 죽음에 한정되었다면, 아담과 하와가 바로 죽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여전히 육체적으로 오랫동안 살았다. 그러므로 그들이 경험하게 된 죽음은 육체의 죽음만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의 죽음, 교제하지 못하는 영적인 죽음이기도 했다. 그러한 관계적이고 영적인 죽음으로 인하여 인간은 삶의 고통과 인생의 불행을 겪게 되는 것이다.

사망(죽음)과 관련하여 육체적인 죽음에만 집중하고 강조하는 경향은 그 적용에 있어서도 영향을 미치게 되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구속사역이 마치 죽은 육체가 살아나서 영원히 죽지 않는 존재가 될 것이라는 지속성의 개념만 강조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영원히 죽지 않게 된다는 것이 진정한 구속일까? 신약 성경에서 말하는 영생은 육체의 지속성보다는 유일하신 하나님과 예수님을 아는 것, 즉 경험하는 것을 말한다(요한복음 17장 3절 참조). 그분과의 관계가 단절된 육체적인 지속성은 의미가 없다.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 사건은 육체적인 생명의 지속성을 강조하기보다는 죄 용서로 인한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과 새로운 피조물로서 교제를 통한 영생, 즉 하나님을 경험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동식물의 죽음은 어떠한가? 먼저, 식물의 경우를 살펴보자. 식물은 처음부터 이미 하나님 창조의 아름다움의 법칙 속에서 인간과 동물을 위한 “먹을거리”(창세기 1장 29절)가 됨으로 죽음(썩어짐)이 결정됐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 식물을 만드시고 보시기에 좋았다고 하셨다. 예수님도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썩지 않으면) 열매를 맺을 수 없다고 하셨다(요한복음 12장 24절 참조). 이처럼 식물의 썩어짐은 인간과 동물에게 생명을 지속하도록 하는 것이고, 열매를 맺게 하는 것이다. 이러한 식물의 죽음(썩어짐)이 인간의 범죄와 타락 이전에 이미 정해진 하나님의 법칙이라면, 그 썩어짐은 인간의 죄로 인한 심판이라고 할 수 없다. 그것은 하나님 지혜의 결과이다. 성경은 더 이상 그 부분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는다. 물론 식물의 썩어짐은 동물이나 인간의 죽음과는 다른 특징을 가진다고 말할 수 있지만, 적어도 “먹을거리”가 되는 것은 희생임에는 틀림없다.

성경은 인간의 범죄와 타락으로 인한 하나님 심판의 결과로 인간이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가 되었다고 말한다. 그리고 인간에게 주어진 심판은 거기서 그치지 않고 피조 세계 전체에도 죽음을 가져왔다고 말한다. 하지만 성경은 인간의 육체적인 죽음이 죄를 범한 결과로서 주어진 것뿐만 아니라 자연적인 죽음을 맞이하는 것에 대해서도 말하고 있다. 그리고 죽음의 결과에 대해서도 대부분 부정적인 견해만을 강조하고 있는데, 성경은 죽음에 대한 의미뿐만 아니라 죽음의 유익에 대해서도 말하고 있다. 그러므로 죽음에 대한 성경적인 개념에 있어서 통합적인 이해가 필요하며, 그것은 하나님의 창조와 그리스도의 구원 의미를 더 풍성하게 가져올 수 있을 것이다.

인간과 동식물을 포함한 피조 세계의 죽음에 대한 성경적이고 통합적인 이해에 가장 걸림돌이 된 것 가운데 하나는 죽음을 너무 구원론적인 차원에서만 강조하는 것이다. 물론 ‘구원’이라는 주제는 ‘생명’이나 ‘죽음’과 관련하여 성경 신학의 큰 주제이지만 그렇다고 전적인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죽음’이라는 주제는 구원 보다는 먼저 ‘창조’와 관련이 있기 때문이다. 순서상으로 보자면, ‘구원’보다는 오히려 ‘창조’가 더 앞서는 개념이다. 하지만 ‘복음’과 ‘영혼 구원’이라는 교회적이고 현실적인 필요가 더 앞서다 보니, ‘창조’의 중요성과 필요성은 관심에서 멀어지게 되고, 학문적인 영역에서도 제대로 다루어지지 않으며(구원과 비교하여), 심지어 삶과 사역에서조차 소홀하게 된다. 이런 현실적인 상황에서, 가장 먼저 필요한 해결책은 ‘생명’과 ‘죽음’에 대한 성경적이고 통합적인 이해와 성경 전체를 아우르는 기독교 세계관적인 해석을 시도하는 것이라고 본다.

본 논문은 인간과 동식물의 죽음 의미에 대한 통합적인 이해와 기독교 세계관적인 해석과 적용을 위해 논문들과 관련 서적을 통하여 인간과 동식물의 죽음에 대한 다양한 이해와 상관성에 대해서 살펴볼 것이다. 또한, 그러한 이해를 바탕으로 해서 죽음이라는 주제를 ‘창조-타락-구속’의 틀을 기초로 하는 기독교 세계관적 해석을 시도할 것이며, 그러한 통합적인 이해와 해석을 통하여 어떻게 신학적인 적용으로 나아갈지를 다룬다.


II. 인간의 죽음에 대한 이해

1. 죽음의 의미

죽음이란 무엇인가? 죽음에 대해서 종교적인 영역에서 살펴보면 종교마다 많이 다름을 볼 수 있다. 불교에서는 죽음을 단순한 물리적 현상이 아닌 마음의 문제로 보았으며, 존재의 끝이 아닌 전생의 업보(業報)에서 기인한 이생의 삶에서 후생의 삶으로 가는 관문으로 여긴다. 또한, 죽음을 일종의 해탈(解脫)로 받아들이고 있는데, 자신이 모든 사물에 대한 욕심에서 벗어나 무아(無我)가 되는 것을 죽음으로 본다. 이슬람교에서의 죽음은 종말이나 파괴가 아니고, 생명에 대한 손상도 아니며, 단지 생명이 지금의 현 상태에서 훨씬 가치 있고 숭고한 차원의 다른 상태로 이전하는 것이라고 본다. 그리고 힌두교에서는 죽음을 윤회(輪廻), 즉 태어남과 죽음의 순환적 반복의 한 과정으로 본다. 또한, 유교(儒敎)에서의 육체적 죽음은 단절이 아니며, 죽음을 생(生) 일부로 받아들이기 때문에 죽음 자체가 큰 문제로 인식되지 않으며, 그러한 모든 것이 하늘의 소관이기에 죽음을 하늘에 순종하는 것으로 본다. 도교(道敎) 역시 마찬가지로, 죽음은 단지 자연 변화의 일부이며, 도(道)에 의해서 지배되는 것으로 이해한다. 이와 같은 제종교의 사망 관(死亡觀)에는 윤회 혹은 환생(還生)의 개념이 포함되어 있는데, 이러한 윤회적인 죽음의 개념은 근본적으로 사람과 동물의 본질적 차이를 없앤다는 점에서 다분히 현대 진화론과 통하는 점이 있다. 이러한 종교적인 영역에서의 죽음에 대한 이해를 통하여 세속적인 종교의 죽음이 기독교의 죽음과 어떤 차이를 가지고 있는지에 대해서 분명하게 이해할 수 있다.

종교와 더불어 죽음은 또한 학자들의 연구영역이기도 하다. 죽음에 대한 학문적 정의를 살펴보면 세계철학 대사전에서는 “죽음이란 자연적, 우발적 또는 자각적으로 다가오는 생(生)의 종말이라고 말한다. 그것은 또한 유기체로부터 무기체로의 전화(change, transformation)로서 그 특징은 모든 생명현상에 필연적으로 닥쳐오며 아무도 그것을 자각적으로 체험할 수 없다.”고 정의한다. 이처럼 철학에서는 죽음의 실체에 대한 규명보다는 사변적인 차원에만 머물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의학에서는 해결해야 할 다양한 논란이 있지만, 일반적으로 호흡과 심장 박동이 정지되고 눈동자의 빛에 대한 반사현상이 소실되어 정지된 상태가 되면 이를 임상적으로 죽음이라고 한다. 한편, 법률학에서는 죽음을 어떤 시간의 한순간에 일어나는 사건(event)으로 이해하는데, Black's Law Dictionary에서는 “죽음은 생명이 끝나는 순간에 일어나는 것이며, 심장박동과 호흡이 정지하기 전까지는 일어나지 않는다. 생명의 정지, 존재의 끝남, 의사들이 정의한 바로는 혈액 순환의 완전한 정지, 그리고 그에 따른 호흡이나 맥박과 같은 생물적 생명기능의 정지가 바로 죽음”이라고 설명한다. 이러한 학문적인 영역에서의 죽음에 대한 이해를 통하여, 인간의 이성과 경험에서 도출된 죽음에 대한 이해의 현실적인 한계를 적실하게 깨달을 수 있다.

앞에서 살펴본 여타 종교나 학문의 영역에서 살펴본 죽음의 정의를 요약하면, 인격체의 기능을 상실한 것을 죽음으로 보는 입장과 생물학적 통합기능이나 생물체로서의 모든 기능을 상실한 것을 죽음으로 본다. 어쨌든 종교적인 영역과 학문적인 영역에서의 죽음에 대한 세속적인 정의에서는 인간의 이성과 종교성에 의한 인본주의적이고, 인간 중심적인 이해를 바탕으로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처럼 죽음에 대한 인간 중심적인 이해는 죽음의 본질과 가치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기 때문에 인간의 생명을 경시하거나 왜곡하는 결과를 가져올 수도 있다. 게다가 죽음에 대한 인간의 한계성을 인정함으로 불가지론적인 태도를 갖게 되어 죽음에 대한 두려움과 강박관념을 가질 수도 있다. 이러한 세속적인 관점의 죽음에 대한 이해는 자연스럽게 성경적인 관점의 죽음에 대한 이해의 필요성과 중요성으로 인도한다.

그러면 죽음에 대한 기독교 세계관적, 혹은 성경적 의미는 무엇인가? 밴쿠버기독교세계관대학원 양승훈 교수는 기독교 세계관적인(성경적인) 죽음의 의미는 하나님에 대한 인간의 죄의 결과이며, 죽음은 소멸이 아니며, 사후 세계가 있다는 것과 죽음은 절망이 아니라는 것과 죽음 후의 세계는 독립적인 것이 아니라 땅 위에서의 삶과 밀접한 연속성의 관계를 갖는 것이라고 했다.

전 장신대학교 기독교 교육학 임창복 교수는 죽음에 대한 성경적인 의미의 네 가지 전제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데, 요약해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물리적인 전제로서의 죽음은 생명력의 중심 붕괴 혹은 해체이며, 의학적 의미의 죽음과 연관되는 것으로서 인간의 신체기능 정지와 관련된다. 둘째, 사회적인 전제로서, 죽음이란 그 공동체 안에서 충분한 기능을 할 수 있는 회원자격을 잃는 것으로 의미한다. 셋째, 신학적인 전제로서의 죽음은 언약의 관계를 상실하는 것을 의미한다. 넷째, 역사적인 전제로서, 죽음이란 사회적, 세속적, 정치적, 공공 용어 등의 결정과 요구의 관계 속에서 참여할 수 있는 능력이 없는 것을 뜻한다. 이러한 죽음에 대한 성경적인 이해는 죽음에 대하여 인간 중심적인 사고에서 하나님 중심적인 사고로 전환할 수 있도록 한다.

먼저, 구약 성경에서의 죽음에 대한 우선적인 특징은 인간의 죽음에 대한 양면적인 이해이다. 고대 히브리인들은 죽음을 양면적이거나 모호한 현상으로 이해했다. 즉, 죽음은 삶에 대한 자연스러운 끝이면서도 또한 극복해야 할 원수였다. 이러한 죽음에 대한 양면성 혹은 모호성은 구약 성경에 나타나는 삶에 대한 대비 속에서 잘 드러난다. 이러한 양면적인 특성에 대해서, 임창복은 죽음을 창조의 일부 혹은 창조 후에 세상에 들어온 어떤 것으로 설명하는데, 창세기 2장과 3장은 죽음과 관련해서 원인을 제공하는 소재지로서, 두 개의 원형에 대한 이야기를 보여준다고 한다. 하나의 원인은 죽음을 하나님께 불복종한 것에 대한 벌을 암시하고, 다른 하나의 원인은 죽음이란 인간을 위한 본래의 계획 중의 일부라고 이해하는 것이다. 그러나 구약 성경은 어떤 원인이 적합한지에 대해서는 암시해 주고 있지 않다고 한다.

구약 성경에서의 죽음에 대한 또 다른 특징은 인간의 죽음이 ‘창조주 하나님과 피조물인 인간’이라는 관계를 통한 이해이다. 인간의 생명은 하나님과 분리된 독립적인 것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기인한 것이며, 오직 하나님과의 교제 안에서만 발견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구약 성경에서의 죽음은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가 끊어진 것을 의미하는데, 이러한 죽음에 대한 이해는 하나님께서 인간 생명의 창조주시고 통치자이심을 분명하게 한다. 성경에 의하면, 생명이란 단순히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그분의 은혜를 받는 관계적인 존재로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죽음이란 단순한 육체적인 죽음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의 (관계적인) 분리인 것이다.

구약 성경에서의 죽음이 하나님과의 관계의 차원에서 이해해야 하는 이유는 성경이 죄가 관계상에서 즉, 여러 측면에서 관계가 깨어지는 모습으로 드러나는 것임을 분명히 보여주기 때문이다. 이처럼 세상에서 죄의 힘은 네 가지 기본적인 관계, 즉 인간과 하나님의 관계, 자신과의 관계, 인간과 인간 사이의 관계, 인간과 피조물의 관계를 붕괴시킨다. 이러한 관계적인 죽음에 대한 이해는 단순하게 육체적인 죽음으로 제한하는 견해를 수용하지 않는다. 죽음은 관계적인 분리를 포함하는 영적인 죽음을 가져오기 때문이다. 또한, 아담의 죄와 죽음에 대한 해석학적 고찰을 통해서 일차적으로는 인간의 생물학적 유한성의 지표인 육체적인 죽음으로 볼 수 있으나, 로마서에서 바울은 아담으로부터 시작된 죽음이 ‘죄’와 결합하여 있고(로마서 3장 16절 참조), 죽음은 ‘영원한 생명’과 대조를 이루기 때문에(로마서 5장 21절 참조), 죄에 의한 죽음은 결국 하나님과의 분리를 뜻하는 영적인 죽음을 가져온다고 볼 수 있다.

구약 성경에서의 죽음에 대한 세 번째 특징은 영혼이 육체를 떠나 하나님께로 돌아가고, 육체 역시 지은 바 된 흙으로 돌아간다는 것이다. 즉, 죽음은 누구도 피할 수 없는 이 땅에서 마지막으로 겪는 필연적인 과정인 것이다. 이러한 죽음에 대한 이해를 통하여 인간은 자신의 보편적인 죽음 현상을 부인할 수 없게 되며, 따라서 무한하신 창조주 하나님과 대조되는 유한한 피조물임을 인정하게 되는 것이다.

구약 성경에서의 죽음에 대한 네 번째 특징은 ‘스올’에 대한 개념이다. 성경에서의 ‘스올’은 일반적으로 ‘죽은 자의 영역’을 의미하는데, 히브리인들은 장소와 관련된 표상들을 사용하였지만, 실제로는 상태인 것으로 인식하기도 했다. 흥미로운 것은 ‘스올’에 내려간다 할지라도 현세에서의 정체성이 그대로 유지되는 것을 보여주는 본문도 있기에, ‘스올’은 현재와 단절된 것이지만, 삶의 완전한 끝은 아니라는 것이다. 죽은 자들의 상태에 대해서는 부정적이지만, ‘스올’에 직면했을 때의 한 소망이 구약 성경에 표현되어 있으므로, 구약의 이스라엘 신앙 공동체는 사망과 ‘스올’의 세력이 삶에서 최종적인 것은 아니라고 결론을 내리게 되었다.

위에서 살펴본 것처럼, 구약 성경에서의 죽음의 특징은 양면적이며, 관계적이며, 유한하며, 소망하는 성격을 동시에 가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신약 성경의 죽음에 대한 이해는 하나님의 전적인 지배권을 인정하는 구약 성경에 동의하면서도, 동시에 상징적으로 혹은 생물학적으로 죽음을 예수 그리스도와의 관계적인 것으로 이해하고 있다.

첫째, 신약 성경은 죽음을 하나님이 본래 계획하셨던 일부가 아니라고 본다. 왜냐하면, 성경은 “죄의 삯은 사망”(로마서 6장 23절)이며, 죽음은 사람을 통해서, 좀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한 사람을 통해서 오게 되었기 때문이다(고린도전서 15장 21절). 죽음은 죄를 통해서 왔으며(로마서 5장 12절), 이 죽음은 하나님의 심판과 연결된 것으로 나타난다. 하지만 신약 성경에서는 그 죽음이 심판으로만 머물러 있거나 그렇게 끝나는 것만은 아니다. 그 죽음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로 패배하였고, 정복되었다는 것을 강조하기 때문이다.

둘째, 신약 성경은 죽음을 예수 그리스도의 관점에서 이해하는데, 예수 그리스도는 죽음으로부터 부활하셨기 때문에 그리스도와 함께 거하는 것으로 설명되는 죽음은 유익한 것으로도 나타난다. 특히, 죽음을 육체적인 사망이 아니라 오히려 잠든 것으로 표현하는 본문이 매우 있기 때문이다(마태복음 9장 24절, 마가복음 5장 39절, 누가복음 8장 52절, 고린도전서 11장 30절, 15장 18절, 에베소서 5장 14절 등). 이처럼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은 죽음에 대한 새로운 영역을 드러나게 했다.

셋째, 신약 성경에서의 죽음은 예수 그리스도로 인하여 삶의 종점(終點) 이상을 의미하기도 한다. 사람은 살아 있는 동안에도 죽음을 경험하기도 한다는 것인데, 즉 바울의 고백을 통해 알 수 있듯이, 살아있는 동안의 죽음 혹은 사망의 몸을 경험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로마서 7장 24절 참조). 이처럼 어떤 의미에서는 개인적으로 그리스도를 만난 사람은 이 세상을 사는 동안에도 영생을 가졌다고 말할 수 있다.

넷째, 신약 성경에서의 죽음은 죄의 삯이나 저주의 결과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과의 새로운 관계를 누리는 영원한 생명에 대한 가능성을 여는 것이기도 하다.

이상으로 신약 성경에서의 죽음에 대해 요약하자면, 그것은 죄의 삯이지만 정복당한 것이며, 잠든 것이며, 삶의 종점을 넘어서 영원한 생명으로 나아가는 가능성을 여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대표적인 복음주의 신학자이며 윤리학자인 스탠리 그렌즈는 성경의 신학적인 주제 역시 죽음의 의미를 이해할 수 있는 배경을 제공해 주는데, 이러한 현상을 올바르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죽음에 대한 관점 역시 성경적인 근거를 분명하게 갖고 있어야 하며, 그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은 죽음 역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계시된 피조물에 대한 하나님의 궁극적인 의도라는 관점에서 보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의 주장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생물학적인 차원에서 경험되는 죽음에 대한 현상은 인간을 포함한 모든 피조물이 죽는다는 것이다. 물론 그러한 현상은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야 하지만 그렇다고 그러한 현상이 처음부터 그렇게 되도록 결정된 당연한 귀결은 아니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신학적인 관점에서 볼 때 죽음은 부자연스러운 것이기 때문이다.

둘째, 신학적인 의미에서의 죽음과 반대되는 개념은 단순하게 물리적인 생명 또는 생물학적인 기능이 아니다. 그것은 영원한 생명을 의미하는데, 그것은 하나님과 함께 살아가는 실존이다. 그렇기에 죽음은 그저 물리적인 생명을 잃어버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의 분리이다. 또한, 이 분리의 개념은 인간의 개인적인 차원만이 아니라 공동체의 상실을 의미하기도 한다. 그러므로 죽음은 공동체의 단절이다.

셋째, 죽음의 궁극성이라는 특징에 대한 설명인데, 죽음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 사건으로 인하여 더는 피조물에게는 궁극적인 대적이 아닐 뿐만 아니라 죽음이 가지고 있던 궁극성을 상실하였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제 죽음은 피조물에 있어서 존재의 끝이 아니라 오히려 종말론적 갱신에 참여하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인간에게 있어서 육체적인 죽음은 인간에게 부자연스러운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생물학적이고 육체적인 죽음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분리를 의미하는 관계적, 전인적, 공동체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다. 그뿐만 아니라 그 죽음은 마침내 예수 그리스도로 인하여 극복되어 종말론적 갱신과 회복에 참여하도록 하는 하나님 계획의 완성으로 나아가게 한다는 것이다.

2. 죽음의 원인

첫째, 성경은 인간 죽음의 원인을 죄로 인한 심판으로 이해하고 있다. 구약 성경은 인간이 타락한 피조물임을 분명히 하고 있다. 이러한 인간의 보편적 죽음이 인류 조상 아담과 하와의 범죄로 말미암았다는 사실과 사망은 죄를 범한 인류에게 하나님이 내리신 형벌이며, 대가(代價)요 죄의 결과임을 선언한다(창세기 2장 17절, 3장 19절).

하나님이 허락하신 에덴동산에서의 아담과 하와는 자신들의 의지적인 불순종으로 인한 범죄로 인해 저주를 받게 되었고, 그 저주로 인해 그들의 후손인 인류는 이 땅에서 죽음과 고통의 삶을 살게 되었다. 이처럼 인간의 죽음과 고통은 하나님의 법을 어기고 하나님께 불순종한 죄에 대한 형벌이다. 숭실대학교 강수진은 자신의 학위논문에서 죽음의 원인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에덴동산에서 하나님을 대면하면서 친밀함 가운데서 함께 거닐었던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과 분리되어서 느꼈을 ‘실낙원’(失樂園)에서의 고통은 창조주와 피조물 간의 관계 단절에 대한 표지이다. 다시 말해 고통과 죽음의 원인은 하나님의 형상을 지니고 있던 인간의 불신으로 인한 피조물의 타락에 있었다. 피조물이 자신의 근원인 창조주와의 교제를 상실했을 때, 그 단절이 고통, 고뇌, 멸망의 원인이 된 것이다.

하나님이 아담과 하와에게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창세기 2장 17절)고 분명하게 경고하셨지만, 그들은 뱀의 유혹과 자신들의 욕심으로 인하여 불순종을 선택하였다. 그 불순종과 인간의 의지적인 선택이 바로 죽음이 세상에 들어오는 직접적 원인이 되었다. 창조 기사에 대한 이야기를 상상력을 동원해서 시적 이미지를 가지고 보면, 에덴동산에서 아담과 하와는 동산 내의 다른 모든 과실나무와 생명나무에도 접근할 수 있었으며, 그들은 그 나무의 열매를 먹고 영원히 생명을 위한 선택을 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들은 하나님께 불순종하고 동산 내에 있는 선악을 알게 하는 금단의 열매를 먹기로 스스로 결정했다. 인간이 생명나무 열매에 접근할 수 있었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본래 인간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시려 했음을 보여 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인간의 죽음은 처음부터 인간에게 주어진 자연스러운 경험이나 법칙이 아닐 뿐만 아니라 하나님 본래의 계획에서도 존재하지 않았다.

또한, 태초에 하나님께서 만드신 피조 세계는 엔트로피 제로의 상태, 즉 완벽한 질서 가운데 운행되고 있었다. 그 세계 안에는 전혀 무질서함이나 무용한 에너지는 없었고, 모든 것은 창조 시의 하나님의 보시기에 좋았던 모습 그대로 제자리에 있었으며, 만물은 조화 가운데서 운행되고 있었으나 인간의 타락으로 인해 피조 세계의 질서는 더는 처음 모습과는 다르게 여러 부분에서 어그러지기 시작했으며, 생명으로 풍성했던 피조 세계에는 죽음이 찾아오게 되고, 그로 인해 모든 생명체는 탄생의 순간부터 죽음을 향해 달려가게 되었다. 이처럼 죽음이 인류의 역사에 들어오게 된 근원적인 이유는 인류의 조상인 아담과 하와의 불순종으로 인한 범죄임을 분명히 하고 있다.

둘째, 성경에서는 인간의 죽음을 죄로 인한 심판이 아니라 창조주 하나님의 창조 질서로도 이해한다. 흔히 죽음은 인간의 타락으로 인한 결과로 생각하지만, 성경에서는 인간 존재의 근원이 흙이라는 것과 관련되어 있음을 강조한다. 즉, 인간은 흙으로 창조되었다가 다시 흙으로 돌아가는 것이 하나님의 창조 질서의 일부분이었다. 인간이 흙으로 돌아가는 것 외에 다른 어떤 결말을 암시하거나 내포하지 않는다는 점은 생명나무를 다루는 양상에서도 알 수 있다. 즉, 동산 중앙에 있던 생명나무에 대해서 히브리어 성경은 정관사를 사용하고 있는데, 이는 생명나무의 존재가 이미 아담과 하와에게는 잘 알려졌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이러한 창세기의 본문은 이들이 에덴동산에서 쫓겨나기 전에는 생명나무를 먹을 수 있었음을 전제하고 있다. 비록 사람은 흙으로 만들어진 존재이지만, 하나님께서 조성하신 생명나무가 그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누리도록 했을 거로 생각할 수 있다.

위튼 대학의 구약학자 존 월튼(John H. Walton) 교수는 그의 주석에서 창세기 3장 22절을 근거로 생명나무에 대한 두 가지 가능성에 관해 말하는데, 첫째는 만약 생명나무의 열매가 효과적으로 인간의 생명을 연장해 준다면, 그들이 나무에 정기적으로 접근하여 섭취함으로써 실제로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었을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그 열매를 한 번 베어 먹는 것이 즉각적으로 영원한 생명을 가져다주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둘째는 NIV 성경이 “forever"(영원)로 번역한 단어와 관련해서 생각해 볼 수 있는데, 그 단어는 무한성이나 영원성 그 자체를 가리키는 추상적인 용어가 아니라 양 끝이 열려 있는(open-ended) 것이라는 사실이다. 따라서 그 열매가 그들에게 계속해서 늙지 않도록 한다는 것을 암시하는 의미에서 해당하는 단어를 ‘영속하는 생명’(perpetual life)으로 번역하는 것이 더 나을듯하다고 하였다. 이처럼 생명나무는 에덴동산에 실제로 존재했었던 나무이지만, 그 나무는 특별히 영원한 생명과 관련된 상징적 의미를 지니고 있다. 결국, 에덴동산 생명나무의 존재는 인간이 먹지 않으면 영생할 수 없고, 먹음으로써 영생할 수 있었음을 말해 주고 있다. 그러므로 인간은 생명나무가 없이도 영원한 생명을 누릴 수 있는 존재로 창조된 것은 아니라는 주장은 가능하다고 할 수 있다.

또한, 랭햄 파트너십 인터내셔널(Langham Partnership International)의 국제 책임자이자 저명한 구약학자인 크리스토퍼 라이트(Christopher J. H. Wright)는 하나님의 창조 질서 안에 죽음이 포함되어 있다고 했다.

자연을 포함한 피조 세계의 자연적인 질서에 대하여 창조 세계는 그에 대한 하나님의 목적과 관련해서 선하다. 그 목적에는 인간의 역사뿐만 아니라 ‘자연의 역사’상의 발전과 성장과 변화가 분명하게 포함되어 있다. 이 관점에서 볼 때, 창조세계의 선함을 원래적이며, 시간과 무관하고, 변화하지 않는 완벽함의 일종으로 여겨서는 안 될 것이다. 시간과 변화가 창조된 실재의 구조 자체에 내장되어 있다. 따라서 거기에는 쇠퇴와 죽음도 있다.

느헤미야 기독연구원 김근주 교수도 인간의 죽음이 하나님 질서의 한 부분이라는 견해를 피력하고 있다. 즉, 인간의 죽음은 자연스러운 것이며 그것은 정해진 질서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창세기 1장 2절의 기사에서 하나님은 빛뿐만 아니라 어둠도 지으셨고, 그 빛과 어둠을 보시고 좋았다고 하셨다. 그런데 하나님은 빛만 보시기에 좋았다고 하신 것이 아니라 어둠도 좋았다고 하셨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빛 어둠 역시 하나님의 창조질서라는 것이다. 특히, 창세기 1장 2절의 ‘흑암’이라는 단어는 4절과 5절의 ‘어둠’이라는 단어와 같은 히브리어(&v,j)로 표기되었다. 둘 다 같은 어둠이지만, 하나님의 질서 안에 있을 때는 그것이 부정적인 것이 아니라 긍정적인 의미로 제자리를 차지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기에 생명은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고, 죽음은 부정적으로 배척해야 하는 개념이 아니다. 생명과 죽음은 빛과 어둠과 같이 하나님의 질서 가운데 하나라는 사실로 수용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처럼 죽음이 하나님의 저주나 하나님과 반대되는 개념이 아니라는 것을 수용한다면, 죽음을 보편적인 죄의 결과라고만 이해하는 것은 구약의 죽음에 대한 이해에서 볼 때는 옳지 않다는 것이다. 결국, 근본적으로 생명을 주시는 하나님은 죽음도 주신다는 것이다.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죽음의 원인은 죄로 인한 심판과 하나님의 창조 질서라는 두 개의 개념을 통합해서 살펴볼 필요가 있다. 성경은 인간의 죽음에 대해서 불순종의 죄를 범한 인간에 대한 하나님 심판의 의미로 이해하고 있는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그 죄로 인한 죽음이 단순하게 육체적인 죽음만을 의미하고 있지는 않다. 죄의 결과로서의 죽음은 육체적인 죽음뿐만 아니라 관계적이고 영적인 죽음도 포함하고 있다. 다른 한편으로 구약성경에서 인간의 죽음은 인간의 존재론적 한계로써 생명과 함께 자연스러운 하나님의 창조 질서 가운데 하나로 수용할 것을 요청한다. 어둠이 하나님의 저주가 아니듯이 죽음 또한 그렇다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구약성경에서의 죽음의 원인은 죄로 인한 심판이라는 개념과 자연적인 질서라는 개념에 대한 균형과 조화가 필요하다고 할 수 있겠다.

3. 죽음의 결과

첫째, 인간에게 있어서 죽음의 결과는 긍정적인 면도 가지고 있는 것 같다. 죽음은 인간의 삶과 함께하는 것이다. 그것은 인생에 불필요한 요소가 아니라 인간에게 주는 유익이 분명히 있음을 경험적으로 알 수 있다. 삶의 경험을 통하여 겪게 되는 죽음과 고통은 불완전한 인간의 한계를 깨닫게 해주고, 전능하신 창조주 하나님을 향할 뿐만 아니라 그분을 의뢰하도록 이끌어준다. 또한, 인간의 죽음과 삶의 고통은 인간을 겸손함으로 인도하며, 인간의 영혼을 정화하는 통로가 되기도 한다. 그뿐만 아니라 죽음은 인간의 삶 속에서 친밀함을 가질 수 있음을 보여주며, 하나님 나라를 향한 소망과 동경을 갖도록 한다. 만약에 인간의 삶의 여정 속에서 죽음이 없다면, 삶은 실제적인 의미가 있게 되기보다는 피상적이 되거나 삶의 방향조차 확립되지 못할 것이며, 책임 의식 또한 상실되고 말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죽음이 가지고 있는 불가피성은 오히려 죽음의 필요성이 되기도 한다. 즉, 죽음이 있기에 삶이란 의미와 가치를 지닌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죽음은 인간이 삶의 마지막을 직감하게 하고, 자기의 정체성과 삶의 실체를 솔직하게 바라보게 한다. 게다가 죽음은 인간 존재의 깊이와 삶의 의미를 인식하게 하기에 실존의 거울이다. 무엇보다도 죽음은 인간의 삶이 당연히 주어진 어떤 것이 아니라 창조주로부터 주어진 선물이라는 것을 깨닫게 하기에 결론적으로 죽음은 인간의 삶에 긍정적인 측면을 가진다고 할 수 있다.

둘째, 죽음의 결과는 부정적인 측면도 역시 가지고 있다. 세계적인 복음주의 운동의 지도자였던 존 스토트(John R. W. Stott, 1921-2011)는 “사망은 맨 나중에 멸망 받을 원수”(고린도전서 15장 26절)라는 말씀을 예로 들면서 육체적인 죽음, 특히 어린 아이와 젊은이의 죽음에 대해서 말하기를 그것은 ‘침해’이며, 존재의 본질에 대한 이질적인 ‘훼방’임을 강조했다. 그에 의하면, “인간이 불순종하지 않았더라면 무슨 일이 일어날까 추측해 보는 것은 아무 소용이 없다. 분명한 것은 성경적 사고에서 죽음은 하나님의 창조 질서의 일부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것은 존재의 본질에 대한 불가사의하고 끔찍한 훼방”이다. 그 이유에 대해서는 아마도 너무 이른 나이에 죽을 수밖에 없는 것에 대해 인간적인 안타까움과 부정적인 감정의 표현에서 기인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인간은 ‘아담 안에’서 유기적 그리고 육체적으로 아담과 결속되어 있으므로 죽어서 부패할 수밖에 없는 존재라고 한다. 그러한 부패성에 대한 생물학적인 이해를 인간의 노화와 죽음에서 찾을 수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죽음이 생물학적으로 반드시 필요한 것은 아니라는 흥미로운 주장을 피력했다. 즉, 모든 살아 있는 세포와 유기체는 회복시키고 새롭게 해주는 필수기관을 갖고 있어서 생명을 지속할 수 있고, 영생이 생물학적으로도 가능하다는 것이다.

또한, 죽음이 죄와 관련이 있다는 것은 삶에 대한 비극적인 종말을 의미한다. 성경은 죽음을 인류의 적, 죄로 인하여 독침(sting)을 지니고 있는 권능이라고 한다(고전 15:57 참조). 이것과 관련하여, 밴쿠버 리젠트 대학(Regent College)의 교수였던 스탠리 그렌즈(Stanley J. Grenz, 1950-2005)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죽음은 살아 있는 자들 가운에서 활동하는 것의 종말이기에 죽음을 단지 좀 더 높은 실존으로 들어가는 입구라고 말한 많은 기독교적인 진술들은 비록 해로운 말들은 아니라고 할지라도 불행한 말들이다.

이처럼 죽음이 가져온 결과에 대해서도 긍정적인 면과 부정적인 면이 동시에 존재하고 있다. 인간의 범죄로 인한 하나님의 심판으로써 경험하는 죽음에 대해서는 부정적인 면이 강조되고 있지만, 반대로 죽음이 인간 삶의 여정에서 자연적인 하나님의 질서로써 경험하게 될 때는 죽음이 주는 유익한 것도 있음을 인정해야 할 것이다. 결국, 인간의 죽음의 원인에 대한 두 가지 측면에 대한 이해와 통합적인 해석을 적용할 때에 조화와 균형을 이룰 수 있을 것이다.


III. 동식물의 죽음에 대한 이해

1. 죽음의 의미

인간의 죽음과 비교하여 볼 때, 동식물의 죽음 의미를 명확하게 다르게 표현하는 단어는 없는 것 같다. 왜냐하면, 죽음을 다룰 때는 인간을 포함한 피조물 전체에 대해서 죽음이라는 단어를 적용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일반적으로 식물이나 동물은 영어의 ‘perish'라는 동사를 사용하여 ’소멸‘이라고 표현하고, 인간에게는 ’die'라는 동사를 사용하여 죽음을 표현한다. 그렇게 표현하는 이유는 인간만이 죽음의 의미를 제대로 알고, 그 죽음을 이해할 수 있는 능력을 소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죽음의 의미를 알 거나 이해할 수 있는 능력은 인간이 가지고 있는 이성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식물은 말할 것도 없고, 생령“(living being)인 동물의 죽음이 인간의 죽음과 비교되는 것은 인격과 윤리와 이성이라는 것뿐만 아니라 부활과 관련해서도 차이가 있다. 왜냐하면, 성경에서 말하는 부활의 대상은 오직 인간만이 유일하기 때문이다. 동식물의 죽음이 인간의 죽음을 의미하는 ’die'가 아니라 ‘perish'(소멸)인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죽은 동물들은 다시 부활하지 않는다. 그래서 동식물의 죽음 의미는 소멸(消滅, perish)이다.

하지만 로마서 8장 21절에서 말하는 “썩어짐의 종노릇에서 해방”된다는 말은, “속박에서 자유로, 썩어짐에서 영광으로 들어가게 될 것”이라는 의미이다. 즉, 부패하는 것에서 부패하지 않는 것으로 된다는 말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동식물의 부활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말 그대로 자연 자체가 새롭게 될 것에 대한 비전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동식물의 죽음과 인간의 죽음에 대한 차이가 분명하게 드러난다고 할 수 있다. 즉, 동식물의 죽음은 부활을 기다리는 인간의 ‘죽음’(die)과는 다른 ‘소멸’(perish)일 뿐이다.

2. 죽음의 원인

먼저, 동식물의 죽음을 인간의 타락으로 인한 하나님의 저주와 심판으로 이해하는 것이다. 인간의 타락으로 인해, 인간 자신뿐 아니라 그 주변 세상도 변했고, 창조 세계는 하나님의 저주 아래 놓였으며, 조화가 깨지고 분열이 생겼다. 즉, 땅은 저주받은 모습을 드러냈고(창 3:17-19), 열매를 맺던 예전의 기름진 낙원은 고된 노동을 해야만 식량은 내는 가시덤불 땅이 되어 버렸다. 또한, 지구 자체에 대한 생태적 관계 역시 총체적으로 왜곡되고 어긋나게 되었다. 인간의 타락은 인간과 자연의 조화로운 관계를 무너뜨렸으며, 인간을 자연으로부터 소외시켰다. 그리하여 인간은 자연을 적대적으로 경험하고 있으며, 자연의 관계 안에 싸움과 폭력과 죽음의 요소들이 들어오게 했다.

바울은 로마서 8장 20절에서 피조물이 허무한 데 굴복했음을 말하는데, 이것은 분명한 하나님의 심판으로써 아담이 불순종한 후에 자연계에 임한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땅은 그로 인하여 저주를 받았고, 그것은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이며, 아담과 그의 후손들은 ‘종신토록 수고’하고 땀을 흘려야만 음식을 얻어 낼 수 있으며, 결국 그들은 자신들이 나온 흙으로 다시 돌아가게 된다. 21절의 ‘썩어짐’이라는 말은 마치 우주가 수명이 다해 가고 있다는 점뿐만 아니라, 자연은 반복되는 순환의 과정을 거치면서 수태와 탄생과 성장을 거듭하지만 결국에는 퇴보, 썩어짐, 분해의 과정이 따른다는 사실을 의미하는 것 같다. 이러한 ‘무익함, 속박, 썩어짐, 고통’은 피조물이 심판 아래에서 혼란한 상태에 있음을 나타내기 위해 사용하는 단어들이다. 이처럼 동식물을 포함한 피조 세계의 죽음은 바로 인간의 불순종으로 인한 저주로부터 기인한 것을 말해주고 있다.

반면에, 동식물의 죽음의 원인을 하나님의 자연법칙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동식물의 죽음과 관련하여, 하나님이 창조하신 자연의 균형, 즉 생태계의 사슬이라는 개념은 과학적인 기초를 얻기 이전에 먼저 신학적인 기초를 가지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왜냐하면, 그러한 자연법칙은 하나님의 완전하신 계획안에 속한 것이기 때문이다. 즉, 만약에 생태계와 관련하여 먹이 사슬 가운데 하나라도 제거된다면 위험하다는 인식은 그러한 믿음에서 연유한 것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하나님은 자연 안에 믿을 수 없을 만한 회복과 재생의 능력을 확립해 놓으셨는데, 그러한 생물학적 힘의 역동적 평형 상태는 자연법칙들로 인한 것이다. 동식물의 죽음 역시 이러한 자연법칙으로 인한 것이다.

크리스토퍼 라이트는 하나님의 창조 세계 안에서 경험하는 동식물의 생물학적 의미의 죽음은 처음부터 지구 위에 존재하는 생명의 일부였다는 사실은 이론(異論)의 여지가 없는 것 같다고 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채집하거나 잡아서 먹고 먹히는 섭생관계는 애초부터 그렇게 되도록 창조된 듯하며, 지구상에서 과거에는 그렇지 않았다는 증거도 전혀 없다. 지구가 움직여 나가는 방식에서 정서적으로나 심지어 도덕적으로 당혹스럽게 보이는 많은 다른 측면과 더불어, 이 점도 창조 세계의 선함에 대한 우리의 신학 안에 포함되어야 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단호하게 평가하신 세계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이기 때문이다.

그뿐만 아니라 그(라이트)는 “땅이 너로 말미암아 저주를 받고”(창 3:17)라는 말씀에서 명확하게 드러난 대로, 인간의 불순종과 타락이 물리적 환경 전체에 영향을 주었다는 것을 인정한다. 하지만 그것의 성격에 대해서는 다른 해석이 가능함을 언급하는데, 즉 그 타락이 ‘창조 세계 자체의 타락’을 의미하는가에 대한 질문을 던진다. 즉, 인간의 타락으로 인한 지구에 대한 하나님의 저주는 존재론적인가(즉, 현재 있는 모습대로의 지구라는 행성이 갖는 성격 자체에 영향을 끼치는가?), 아니면 기능적인가?(즉, 오직 땅과 인간과의 관계에만 영향을 끼치는가)라는 것이다. 이러한 질문에 대해서, 하나님의 저주가 지구 전체 영역에 대해서 영향을 끼쳤다고 주장하는 학자들은 지진과 같은 파괴적인 자연 현상이 바로 땅에 대한 하나님의 저주라는 증거라고 내세우지만, 그런 사건들은 인간이 나타나기 훨씬 이전의 것으로 보고 있기는 지질학과 고생물학의 연구 결과들과 연대기적 문제들을 일으키게 된다고 보았다.

또한, 오늘날 지구 위에서 존재하는 육식 동물들과 동물의 세계에 널리 퍼져 있는 약육강식(弱肉强食)과 같은 현상은 인간이 보기에는 감정적으로 불쾌할 뿐만 아니라 도덕적으로도 악한 것으로 보는데, 그것이 바로 타락의 결과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하지만 그러한 주장에 대해서 크로스토퍼 라이트는 아래와 같은 이유로 수용하기가 어렵다고 했다.

자연현상들은 인간이 죄를 범한 이후는 말할 것도 없고, 인간이 존재하기도 훨씬 전부터 언제나 지구상의 ‘그랬던 상태’의 일부였던 같다는 것이다. 창세기 1장 30절을 보면, 비록 하나님이 사람들에게만이 아니라 동물들에게도 채소 먹는 것을 허락하셨다고 기록하고 있지만, 동물들이 ‘호모 사피엔스’(Homo sapiens)가 존재하고 있는 시간대 안에서만 그리고 그 피조물이 하나님께 저항하여 도덕적이며 영적으로 반역한 결과로서만 서로를 잡아먹기 시작했다는 견해를 유지하는 데는 어려움이 있다.

창조론적 관점에서 생태계의 먹이사슬과 자연법칙에 의한 동식물의 죽음을 살펴보더라도 이러한 견해는 주장되고 있다. 양승훈 교수는 창조론의 다중격변 이론을 다룬 글 가운데서 동식물의 죽음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다. 만약에 동물 세계에서 아무런 죽음이 없었다고 한다면, 사자나 호랑이와 같은 육식동물은 언제 만들어졌겠느냐는 의문을 제기하면서, 미생물을 포함한 동식물 세계에는 죽음이 일상적으로 존재했을 것이라고 한다. 더 나아가 동식물의 죽음은 하나님의 심판으로서의 저주가 아니라 피조 세계를 유지하기 위한 하나님의 섭리로 봐야 할 것이라고 했다. 또한, 생물들이 죽지 않고 지속해서 생육하고 번성하기만 했다면, 에덴의 아름다움과 풍요로움은 지속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얼마의 시간이 지나지 않아서 지구는 생지옥이 되었을 것이라고 했다. 그래서 오늘날과 같이 먹이사슬을 통해 예민하게 균형을 이루고 생태계는 비록 인간의 타락이 생태계의 운행에 상당한 영향을 끼쳤을지라도 먹이사슬 그 자체가 인간의 타락 결과로 생긴 것이 아니라 생태계를 ‘보시기에 좋도록’ 운행하시려는 하나님의 지혜의 한 부분이라고 보는 것이 더 나은 생각이라고 말했다.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동식물의 죽음을 생태계의 구조 안에 존재하는 하나님의 섭리로서 이해한다고 하더라도 여전히 혼란스러움은 존재한다. 하지만 이러한 혼란에 대해서, ‘질서 있는 혼돈’이라는 개념과 ‘의도적인 임의성’(purposive randomness)의 개념으로 해석하려는 시도도 있다. 이에 대해, 크리스토퍼 라이트는 내시(James A. Nash)의 글을 인용하여 다음과 같이 말했다.

생태 영역은 생태 체계의 구조 안에 자리 잡고 있는 질서 있는 혼돈을 포함하고, 일반적으로 예측할 수 있는 과정들 가운데 구조화되어 있는 창조적 우연한 요소들을 가진 ‘의도적인 임의성’을 포함하는 그 모든 도덕적 모호성 가운데서 가치의 원천이신 분에 의해 가치를 인정받았다. 그러나 하나님은 신비스런 목적을 가지고 계신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 모호한 상태에 있는 창조 세계를 가치 있는 것으로 보신다. 이는 창조 세계가 그 목적에 기여하기 때문이다.

위에서 언급한 내시의 글에 동의하면서, 크리스토퍼 라이트는 동식물의 생태 체계 안에 존재하는 하나님의 창조 질서에 대하여 고양이와 쥐의 관계에 대한 예를 들어 설명한다. 즉, 고양이가 쥐의 목숨을 가지고 노는 전혀 까닭없는 잔인한 행동은 ‘비도덕적인 것’이라기보다는 ‘무도덕적인 것’으로 해석할 가능성에 대해서 전제한 다음에, 그러한 모습은 하나님의 창조의 목적에서 벗어난 것이 아니라 창조 과정의 불완전함에 대한 징표인 것으로 볼 수 있다고 하였다.

결론적으로 동식물의 죽음의 원인에 대해서도 한 가지만을 주장할 수 없는 것 같다. 동식물을 포함한 피조 세계의 죽음은 바로 인간의 불순종으로 인한 저주로부터 기인한 것이라는 주장과 생태계의 구조 안에 존재하는 하나님의 섭리로써 자연 법칙이라는 것이다. 지금까지는 사실 어느 한 가지 주장만이 옳다고 하기에는 여전히 해결해야 할 문제들이 있기에 통합적인 이해가 필요하다고 볼 수 있다.

3. 죽음의 결과

동식물 죽음의 원인을 인간의 타락으로 인한 하나님의 저주로 받아들인다면, 인간의 타락은 인간 자신뿐만 아니라 그 주변 세상도 변하게 하고, 땅이 저주를 받아서 가시덤불을 내고, 동식물들도 서로 잡아먹어야 하는 약육강식의 세상이 되었다는 것을 인정하게 된다. 만약에 그렇다면, 사실 동식물을 포함한 피조 세계는 억울할 수밖에 없는 노릇일 수 있다. 왜냐하면, 동식물이나 피조 세계가 불순종한 것이 아니라 인간이 하나님께 죄를 범했기 때문이다. 아무런 잘못이 없는 동식물들이 인간의 죄로 인해서 저주를 받게 되어버렸다. 물론 연대의식이나 피조물의 연관성을 인식할 때, 공동성이 있지만 그래도 의인화해서 표현하자면 인간을 제외한 모든 피조물은 기가 막힐 노릇이다.

로마서 8장 21~22절에서 다루었듯이, 피조물들이 “허무한 데 굴복하는 것”과 “썩어짐의 종노릇”하는 것이 자신들로 인한 것이 아니라 인간들의 불순종 결과이다. 더욱더 할 말이 없게 만드는 것은 그렇게 하신 분이 하나님이라는 사실이다. 로마서 8장 20절에서 보면, 그 이유가 바로 “굴복하게 하시는 이”로 말미암았는데, 그 존재는 일부 주석가들이 주장하는 사단이나 아담이 아닌 바로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성경은 피조물 자체가 공동성과 연대성으로 엮이도록 하신 하나님의 계획을 볼 수 있다. 하나님의 계획으로서의 구원의 온전한 완성에는 피조물이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어쨌든 동식물의 죽음은 인간으로 말미암았다는 것이다.

하지만 인간이 경험하는 현실에서는, 동식물들의 죽음 결과는 부정적인 것보다는 긍정적이며, 손해보다는 유익이 훨씬 더 많은 것 같다. 동식물의 죽음 즉, 부패로 인한 썩어짐은 냄새가 나는 것을 제외하고는 너무 많은 것을 인간에게 제공한다. 그들의 썩어짐은 예수님의 말씀처럼 많은 열매를 맺기 때문이다(요한복음 12장 24절 참조).

양승훈 교수는 대규모 격변을 설명하는 가운데 동식물들의 대규모 멸종이 아니었다면, 오늘 인류가 사용하는 엄청난 화석 연료들이 전혀 생성될 수가 없었음에 대해 잘 지적하고 있다. 왜냐하면, 인간의 생존을 위해서 필요한 석탄과 석유, 천연가스는 생물들의 유해들이 매몰, 탄화되어 형성되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 엄청난 규모의 죽음이 없었다면, 오늘날과 같이 인류를 부양할 수 있는 대규모 화석연료는 만들어질 수가 없었을 것이라고 한다.

이처럼 동식물의 죽음은 인간의 생존을 위해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자원이 되는 것은 분명하게 엄청난 희생인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것은 동식물의 의지적인 선택이나 자발적인 희생이 아니다. 인간이 그들을 “인격화”했을 때, 가능한 것일 뿐이다. 여기에서 인간과 동식물의 죽음에 대한 분명한 구별이 필요한 것이다. 아마도 동식물 사체의 부패나 썩어짐이 인류에게는 엄청난 귀한 생명을 위한 재료가 되었다는 것은 하나님의 지혜와 은혜라고 설명할 수밖에 없다. 여하튼 동식물 죽음의 결과는 너무나 중요한 열매를 맺고 있다. 그런 면에서 동식물의 죽음을 의미하는 “썩어짐의 종노릇”(로마서 8장 21절)이나 “허무한 데 굴복하는 것”(로마서 8장 20절)은 현재를 살아가는 인간의 입장에서는 극복해야 할 “원수”가 아니라 감사해야 할 “희생”임에는 틀림없다.

지금까지 전개한 동식물의 죽음에 대한 이해를 통합적인 의미의 요약과 강조를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을 것이다.

동식물을 포함한 피조물의 죽음을 로마서에서는 부패하여 변하게 된 “썩어짐”이고 "허무함“이라고 말한다(로마서 8장 20~21절 참조). 하지만 그러한 무익함, 속박, 썩어짐, 고통으로 표현된 동식물의 죽음이 끝없는 자연의 순환이라는 관점에서 본다면, 전적으로 부정적인 의미만을 지니는 것은 아니다. 그러한 자연법칙과 먹이 연쇄는 오히려 지구 전체의 균형과 조화를 가져오는 것으로서 하나님의 창조 질서 가운데 하나로 수용할 수 있을 것이다. 자연법칙과 먹이 연쇄가 없었을 때의 지구와 인간의 상태를 가늠하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그들의 죽음의 결과로 생명을 유지하고 있는 인간들의 입장에서는 그러한 자연법칙과 먹이연쇄를 인간 죄의 결과라고만 말해 버리는 것은 너무나 교만한 자세이다. 동식물의 죽음과 자연법칙이 인간의 죄로 인해 생긴 것이라고 믿고 말하는 사람일수록 더더욱 그렇다. 그러므로 동식물 죽음의 원인이 인간의 죄로 인한 하나님의 심판이라고 주장하는 자들은 일상의 삶에서 동식물의 죽음을 대할 때마다 오히려 겸손해야 할 것이다. 또한, 동식물의 죽음이 하나님의 자연법칙에 의한 과정 일부로 받아들이는 자들 역시 하나님의 섭리하심에 대해서 감사해야 해야 할 것이다. 그러기에 동식물의 죽음 의미와 원인과 결과에 대한 양쪽의 개연성과 가능성에 대한 통합적인 이해는 인간을 더욱더 하나님의 지혜와 은혜로 인도하는 수단이자 인간을 더욱더 겸손하게 하는 통로가 되기도 한다.


IV. 인간의 죽음과 동식물의 죽음 상관성

1. 연계성

첫째, 인간의 죽음과 동식물의 죽음은 존재론적 연계성을 지니고 있다.

인간과 동식물의 죽음을 다루기 전에 먼저, 하나님께서 모든 피조 세계를 창조하셨다는 것에서 출발하는 것이 올바른 순서일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창조세계를 자기 뜻에 따라 선하게 창조하셨다. 그분이 만드신 창조세계가 선하다는 사실은 자신의 작품이 ‘보시기에 좋았다’고 선언하시는 그 말이 여섯 번(창세기 1장 4절, 10절, 12절, 18절, 21절, 25절)이나 반복되고 있는 것에 비추어 볼 때, 창세기 1장과 2장의 가장 분명한 요점 중 하나임이 틀림없다. 그러한 창조 내러티브들 가운데 있는 “보시기에 좋았더라!”라는 단적인 선언은 아담과 하와가 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이 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창조 세계의 선함은 신학적으로 그리고 시간 순서상으로 인간의 관찰에 앞선 것이며, 그 선함은 사람이 그것을 둘러보기 전에 하나님이 보고 인정하신 것이라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라이트는 하나님의 창조 세계의 선함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창조 세계의 선함은 그저 어느 햇살 좋은 날 유쾌한 기분으로 흡족하게 바라본 정경에 대한 인간의 반응이 아니다. 또한, 그것은 인간을 뺀 나머지 창조 세계가 인간의 유익을 위해서 존재하고 있기 때문에 선한 것이라는 의미에서의 도구적 선함도 아니다. … 창조질서는 모든 가치의 근원이신 하나님에 의해 가치 있는 것으로 평가된 것이다. 그 가치는 단순히 우리 인간들이 지구에 부여하는 가치의 문제가 아니다.

이처럼 인간의 죽음과 동식물의 죽음의 상관성이라는 존재론적 연관성은 그 둘의 존재론적 출발이 바로 하나님의 창조에 의한 것이라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에서 시작되어야 한다.

또한, 인간과 동물의 존재론적 연관성에 대해서, 성경은 사람이 동물과 마찬가지로 생명의 호흡을 공유하고 있음을 증명한다. 구약성경에서는 생명 원리를 인간에게만 존재하는 배타적인 속성으로 보지 않는다. 인간은 “살아있는 영혼”(생명)이다. 그러나 그 표현은 동물에게도 동일하게 사용된다. 실제로, 적어도 11차례에 걸쳐서 구약성서는 여러 구절에서 생명이라고 말하거나, 또는 동물들이 ‘혼’이라고 말하고 있다.

인간에게는 하나님이 콧속으로 숨을 불어넣어 주신 것은(창세기 2장 7절), 아마도 인간과 동물들의 존재론적 구별이 아니라 인간과 하나님의 친밀한 관계성에 대해 언급이라고 할 수 있다. 즉, 인간과 동물은 존재론적인 차원에서와 재료적인 성격에서도 공통적인 요소를 가진 연계성을 가진 피조물이다. 하나님은 영적인 차원에서뿐만 아니라 물리적인 차원에서도 인간이 다른 피조물들과 분리될 수 없도록 우주를 창조하셨다. 하나님은 지구에 있는 흔한 재료로 인간을 만드셨다. 그러므로 인간은 자신의 유한성을 인식함으로써 창조주 안에서 피조물과의 연계성을 인정하도록 하신 것이다. 또한, 인간은 구성 물질에서도 다른 피조물과 연계성을 가지고 있다. 히브리어 ‘아담’(!d;a;)은 고유한 이름으로 사용될 수도 있으나 더 넓은 의미로 ‘인간’ 혹은 ‘인류’를 의미하기도 한다. 히브리어 ‘아다마’(hm;d;a)는 땅이나 땅의 흙을 의미한다.

이처럼 인간은 다른 피조물들과의 관계에 있어서 연계성을 갖고 창조되었다. 만약에 창조세계가 우선으로 하나님의 영광과 즐거움을 위해서가 아니라 인간 자신만의 유익만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라면, 창조세계에 대한 보살핌은 인간 중심적 이기주의의 또 다른 형태에 불과할 따름이다. 결론적으로 인간은 동식물과 존재론적 연관성을 가지고 있다.

둘째, 인간의 죽음과 동식물의 죽음은 구원론적 연계성을 지니고 있다.

바울은 구원에 있어서 피조물이 인간과 무관한 것으로 취급하지 않는다. 비록 피조물도 인간처럼 허무함(futility)에 종속되어 있지만 동시에 하나님의 자녀들의 마지막 자유의 날을 탄식하며 기다린다고 한다. 왜냐하면, 피조물도 그날에 함께 그 자유에 동참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피조물은 그날에 인간과 ‘함께’ 신음하고 탄식하지만, 미래를 내다보고 있다. 하나님은 피조물이 원래 선하고 아름답게 창조되었던 그 상태로의 회복을 향하여 구속의 드라마를 전개하고 계신다. 로마서 8장은 신약에서 유일하게 소개되는 피조물과 인간의 연대적인 구원을 언급하고 있다.

로마서 8장 23절에서는 하나님, 자연, 인간이라는 세 가지 측면을 한꺼번에 이해해야 한다. 특히 인간이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바로 서야만 자연이 되살아난다는 연대성의 원리는 인간이 하나님께 위임받은 자연에 대한 책임론으로 이어진다. 초대교회는 만물의 연대성의 축을 그리스도 안에서 발견했고 그리스도의 몸의 각 지체라는 말로 그 연대감을 표현하였다. 그러기에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말이 주는 그 구체적인 생명의식과 유기적인 연대의식은 단지 인간 공동체에서뿐만 아니라 인간이 자연과 이웃의 생명과의 관계에서도 느끼며 살아가도록 소명을 받았다는 것을 말한다.

또한,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이해에서도 인간과 다른 피조물과의 관계에 대한 구원론적 연계성을 찾아볼 수 있다. 칼뱅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형상’의 자리는 일차적으로는 인간이지만, 그것을 넘어서서 인간을 포함하는 하나님의 피조 세계 전체에도 관계되고 있다. 칼뱅의 하나님 형상 이해는 매우 포괄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라는 구속의 은혜나 특별계시로써 나타나는 하나님의 개입에 대한 인간의 응답과 태도로써 영혼의 능력이라는 것을 강조한다. 하지만 창조주의 영광, 즉 창조로서의 계시라는 시각을 통해 하나님의 형상이 인간뿐만 아니라 다른 피조물들 속에서도 빛나고 있다고 보았다.

그뿐만 아니라 로마서 8장의 ‘피조물’(κτίσις)이라는 용어에 대한 연구에서도 인간과 다른 피조물들과 연계성을 찾아볼 수 있다. 장로회 신학대학교 천세종 교수는 ‘피조물’에 대한 포괄적 해석을 통하여 인간이 그 피조 세계에 포함되어야 함을 주장하면서, 하나님의 구원 계획안에서 인간과 피조물의 구원론적 연계성을 주장한다.

구원론적 연계성에 대한 또 다른 관점은 신체를 가진 ‘몸’ 적인 존재로서 인간에 대한 이해인데, 즉 인간은 고난 속에서 탄식과 희망을 품고 있는 다른 피조물과 한 몸이라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인간)과 피조물은 생명의 연대성 안에 있는데, 하나님은 둘을 생명으로 묶어주었고, 둘은 함께 기뻐하면서 고난 가운데 기다린다. 따라서 ‘몸’적인 존재로서 그리스도인(인간)은 구원받지 못한 피조 세계와의 공동성 안에서 살아가며 하나님의 구원과 영광을 기다린다.

결론적으로 인간과 동식물을 포함한 피조물은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개념에서뿐만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새로운 회복을 바라보는 하나님의 구원 계획안에서도 연계성을 가지고 있다.

2. 독특성

인간과 동식물의 비교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요소는 바로 인간만이 유일하게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다는 성경적인 선언이다. 그러므로 다른 피조물과 인간 사이의 존재하는 독특성(인격성과 윤리성)은 바로 ‘하나님의 형상’에 대한 이해에서 시작된다고 볼 수 있다.

첫째, 인간은 다른 피조물과 구별되는 인격적인 특성을 소유하고 있다.

인간은 모든 피조물 가운데 독특한 존재다. 그 이유는 인간만이 모든 피조물 중에서 ‘하나님의 형상으로’(made in God's image) 혹은 ‘하나님의 형상으로서’(made as God's image) 지어졌기 때문이다(창 1장 27절). 하나님은 이 세상의 다른 어떤 존재도 그분의 형상을 지니도록 택하지 않으셨다.

인간의 독특한 개성(個性)의 핵심은 성경적 용어를 써서 말하자면 ‘마음’에 있다. 마음이란 감정의 좌소(座所)가 아니라 개인의 삶과 품성의 통합적인 핵(核)이다. 성경에서 ‘영’(soul)이나 ‘신’(spirit)이란 말은 약간의 다른 의미로 동물에게까지 적용되어 사용될 정도로 넓게 사용되지만, ‘마음’이라는 말은 그렇게 사용된 적은 오직 한 번이고, 그 나머지는 모두 독특한 의미로 사용되었다. 사람의 개성은 의도, 태도, 그 나름의 가치, 그리고 그가 가진 독특한 가능성과 책임을 포함한 자기 의식적인 내면성이다. 그뿐만 아니라 성경은 인간의 어떤 특정한 부분이나 독특한 측면을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하지 않으며 좀 더 전체론적인 견해(holistic view)를 취하는데, 영적인 것과 육적인 것을 포함하는 전 존재로서의 인간이 그 개인으로서나 역사적인 활동에서나 인격적이며, 역사적으로도 행동하시는 하나님을 반영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형상으로서의 인간은 이러한 개인적이면서 인격적인 특성이 있는 전 존재로서의 인간이라는 독특성이 바로 동식물과 구별되는 것이다.

총신대학교 신국원 교수는 인간의 탁월함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인간의 독특함은 무엇보다도 창조주 하나님과도 인격적인 결단으로 관계를 맺는다는 것에 있다. 이것이 틸리케(Helmut Thielicke, 1908~1986)가 말하는 하나님의 ‘모험’이었다. 하나님은 인간을 더불어 대화할 수 있는 ‘너’로 만드시고, 유일하게 인간을 향해서만 해야 할 일과 해서는 안 될 것을 말씀하신다.

또한, 하나님과의 관계를 맺는 인간의 독특함과 탁월함은 동료 인간과의 관계를 배제하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되었다는 것은 곧 하나님과 동료 인간과의 이중적 관계 안에서 규정된 존재이면서, 창조로부터 종말을 향한 역사를 가진 존재로 규정되었음을 의미한다. 따라서 하나님의 형상으로 규정된 인간의 인격이라는 것은 하나님과 이웃과의 대화의 역사에 의해 형성되는 전인을 의미한다.

그뿐만 아니라 인간의 특성은 동식물과의 관계와 지위에 관련해서도 나타난다.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을 반영한다는 것은 하나님을 알 수 있게 하여 주는 이성적, 도덕적, 사회적, 영적 특성들로 구성되어있는 존재로서 땅과 땅의 생물들을 다스린다는 것이다. 어떤 면에서 하나님은 창조의 질서, 심지어 계급 체계를 조정하셨다고 할 수 있는데, 하나님은 인간을 창조주이신 자신과 나머지 피조물 중간에 두셨다. 이러한 관계와 위치는 한편으로는 피조물이라는 점에서는 자연 일부이며 하나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고 통치권을 부여받았기 때문에 자연과 구별된다. 인간은 생물학적으로 동물들과 같다고 할 수 있지만, 더 높은 차원의 경험을 누리는 존재이다. 그런 경험적인 차원에서 인간은 동물들과 다르며 하나님과 비슷하다. 인간은 생각하고, 선택하고, 창조하고, 사랑하고, 기도하고, 지배권을 행사할 수 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과 자연, 또는 창조주와 그분의 나머지 피조물 사이, 즉 중간적 위치에 인간이 있다는 것이다. 이처럼 하나님은 인간을 자신의 주권적 표상으로서 하나님 자신의 형상을 입혀서 세상에 두신 것이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형상으로서의 인간의 독특성이다.

이러한 인간과 동물들의 관계와 위치에 대한 해석과 논쟁들은 교회사에서 있었다. 중세기의 토마스 아퀴나스(Thomas Aquinas, 1225-1274)는 짐승(동물)들은 오직 인간의 즐거움과 이익을 위해 존재한다고 가르쳤지만, 아시시의 프란체스코(Francis of Assisi, ?-1226)는 짐승(동물)들을 인간과 동등한 피조물로서 인식하여 형제와 자매로 취급했다.

그리고 18세기 말 제레미 벤담(Jeremy Bentham, 1748-1832)은 짐승(동물)들도 고통에 대한 감각을 지니고 있는 피조물이기 때문에 그에 상응하는 권리를 가지고 있다고 주장하였다. 이러한 주장은 현대에 이르러 앞의 이해보다 한 걸음 더 나아갔다. 미국 프린스턴대학교의 피터 싱어(Peter Singer)박사는 인간과 동물 간에 차이가 있음을 인정하면서도 ‘기본적인 평등의 원리’가 동물에게까지 확장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존 스토트는 그런 주장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평가했다.

이것은 극단적인 과잉반응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모든 피조물 중 인간만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았으며, 땅과 그 안의 모든 피조물들에 대한 책임 있는 지배권을 받았다는 근본 진리를 도저히 내버릴 수 없다. 그러므로 동물들이 소유한 권리에 대해 말하기보다는 동물들에 대한 그리고 동물을 위한 우리의 책임에 대해 말하는 것이 더 의미가 있다. … 율법에 따르면, 안식일의 유익은 인간들뿐 아니라 짐승들도 누려야 했다(출 20:10). 지혜 문학에 따르면, “의인은 자기의 가축의 생명을 돌본다.”(잠 12:10).

죽음과 관련한 인간의 독특성에 대한 논의는 인간과 다른 피조물 간의 차이라는 차원으로 데려다주는데, 그것은 인간은 단순히 하나의 피조물로써 죽는 것이 아니라 인격체로써 죽는다는 것이다. 인간 역시 다른 피조물과 같이 결국은 죽을 수밖에 없다는 유한성(morality)이라는 특징을 다른 피조물(동물과 식물)과 공유하지만, 인간의 사망 체험이라는 측면에 있어서는 다른 피조물들의 체험과 확실하게 다르다. 식물이나 동물과는 대조적으로 인간은 자신의 유한성을 인식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것에 대하여 성찰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인간은 죽음이라는 실존을 일반적인 사실로 인식할 뿐만 아니라 삶 전체에 걸쳐 죽으리라는 것을 알고 있다. 인간은 단순히 다른 사람들이 죽는다는 사실에 대한 인식뿐만 아니라 자신이 죽는다는 것을 아는 유일한 존재이자 그 죽음에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 유일한 존재이다.

크리스토퍼 라이트는 성경이 인간의 독특성에 있어서 다음과 같은 세 가지 면에서 명백하게 인정하고 있다고 했다. 첫째, 하나님은 모든 피조물 가운데 오직 사람만을 하나님 자신의 형상대로 지으셨다는 것. 둘째, 다른 모든 피조물은 천사들(혹은 하나님)보다 약간 낮은 그리고 영광과 존귀로 관이 씌워진(시편 8장 5~6절) 피조물인 인간의 ‘발아래’ 놓여 있다는 것. 셋째, 모든 생명은 하나님께 중요하다는 일반적인 원칙의 범위 내에서, 하나님은 사람의 생명이 각별한 존엄성을 가진다고 선언하신다(창세기 9장 4~6절)는 것이다. 이러한 주장의 근거는 창세기 1장과 2장에 기록된 두 창조 기사가 모두 하나님의 선하시며 가치 있는 나머지 창조 세계 안에서의 인간의 우선성 혹은 탁월성을 지적하고 있다는 것이다.

둘째, 인간은 다른 피조물들과 구별되는 윤리적인 특성을 소유하고 있다.

인간의 윤리적인 특성은 하나님께서 창조세계를 선하게 창조하셨다는 사실과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어졌다는 사실에 근거해있다. 하나님께서 창조세계를 만드시고 ‘보시기에 좋았더라.’는 선언은 인간의 윤리와 도덕의 시작과 기준은 인간이 아니라 하나님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또한,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어졌다는 것은 인간이 다른 동물과 달리 도덕적인 가치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즉, 인간은 자신의 선택으로 도덕적인 존재가 된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도덕적인 책임을 지는 존재로 지어졌다는 것이다. 이것은 에덴동산에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라는 명칭 자체가 인간은 근본적으로 도덕적인 존재라는 것을 나타낸다.

인간의 윤리와 관련하여 먼저 알아야 할 것이 있는데, 그것은 하나님이 창조 세계를 향하여 좋다고 선언하셨을 때와 하나님이 만물에 명령을 끝내신 후에도 인간은 아직 존재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인간은 하나님의 선언이 완성되기까지는 창조되지 않았을 뿐 아니라(창세기 1장 26절), 창조사역을 거의 마무리 짓는 마지막 단계에 가서야 태어났다. 하나님의 창조 세계에 대한 인간의 견해는 불필요했다. 창조 세계에 대한 판단은 창조주이신 하나님에 의해 이미 내려졌다. 그러므로 모든 피조물은 창조주가 존재하기 때문에 그 가치 역시 존재하는 것이다.

또한, 인간은 처음부터 도덕적으로 중립적이 아니었다. 인간의 본성은 원래부터 적극적으로 선(善)을 향하게 되어있었을 뿐 아니라 악과도 대립하고 있었다. 왜냐하면, 선함이란 인간이 창조된 뒤에 생긴 어떤 부수적인 것이 아니라, 창조의 바로 그 순간에 창조주의 손길에 의해 그에게 형성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인간에게 존재하는 선은 인간 자신에게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으로부터 주어진 것이다.

윤리적인 인간에 대한 기독교적 이해는 인간이 인격적인 존재로서 하나님께 영광을 올려드리고, 이웃을 사랑하고, 청지기로서 세상을 섬기는 존재로서 자신에게 주어진 문화적인 사명을 다 함으로써 세상 속에 영이신 하나님의 거룩하신 성품을 반영하는 가치 있는 존재임을 깨닫는 것이다. 비록 죄로 인해 하나님의 형성이 왜곡되어 고통과 절망 속의 현실에서 살아가는 존재가 되었으므로 하나님의 모습을 온전히 반영하고 있지는 못하지만 타락한 이후에도 하나님의 형상(인격)은 인간에게 여전히 남아 있다. 즉, 하나님으로부터 분리되었지만, 여전히 변함없는 인격체라는 것이다. 그래서 왜곡된 하나님의 형상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가치는 변함없이 고귀한 윤리적인 존재다. 이러한 인간의 윤리적인 가치는 하나님의 거룩하심에서 비롯되며, 하나님의 거룩함으로의 부르심은 오직 인간만이 유일하다. 이것이 인간이 다른 피조물(동식물)과 구별되는 윤리적인 특징이다.

3. 통합적인 이해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인간의 죽음을 동식물의 죽음과 관련하여 이해할 때에는 상호 간에 존재하는 연계성과 독특성에 대한 이해가 필수적이다. 인간과 동식물의 존재론적 연계성과 구원론적 연계성의 관점에서 볼 때, 인간과 동식물은 하나님으로부터 생명을 받은 생령(living being)이라는 존재론적 연계성을 지니고 있다(물론 식물은 여기에 포함되지 않지만).

또한, 구원론적 관점에서 볼 때도 하나님의 구원계획은 단지 순서상의 의미에서만 인간을 먼저 구원의 대상과 통로 삼을 뿐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인간을 통한 전체 피조물에 대한 총체적인 구원을 담고 있다. 그런데도 여전히 인간과 동물의 관계에서는 유독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측면에서는 분명하게 차이가 있음도 분명하다. 식물의 죽음과 동물의 죽음이 다르듯이, 인간의 죽음은 동물의 죽음과 같은 가치와 무게를 가지는 것은 아니다. 이러한 이해를 기반으로 해서 인간과 동식물의 죽음에 대한 통합적인 해석이 필요하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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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인간과 동식물의 죽음에 대한 기독교 세계관적 해석과 통합 |작성자 창조의 작은 언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