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형상 이해에 대한 역사적 신학적 고찰/이영식
하나님의 형상 이해에 대한 역사적 신학적 고찰 에릭슨(Erickson/ 나용화, 박성민 역, 1993)은 하나님의 형상에 대한 견해를 “실재론적 견해들(The Substantive Views)”과 “관계적 견해들(Relational Views)” 그리고 “기능적 견해들(Functional Views)”로 대별하였다. 한편 후크마(Hoekema, 1994/ 류호준 역, 1995) 역시 이와 비슷하게 분류하는데 그에 따르면 지금까지 하나님의 형상은 구조(構造)와 기능(技能) 그리고 관계(関係)적으로 이해되었다. 여기서 에릭슨의 ‘실재론적’이라는 말은 후크마의 ‘구조적’이라는 말과 같은 의미이므로 양자가 같은 견해를 가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1. 실재론적 견해들(The Substantive Views) 김균진(1989: 57)에 따르면, 초대교회의 거의 모든 기독교 사상가들이 하나님의 형상에 대하여 실재론적인 견해를 가지고 있었다. 클레멘스(Clemens)와 오리게네스(Origenes)는 하나님의 형상을 인간 영혼에서 발견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터툴리안(Tertullian)과 락탄티우스(Lactantius)같은 라틴 교부들은 인간의 육체까지 하나님의 형상과 결부시켰다. 터툴리안에 의하면 죄된 인간도 하나님의 형상이다. 인간은 그의 영혼이나 이성 속에 있는 하나님의 형상에 따라 창조되었으며, 영혼이나 이성 속에 있는 하나님의 형상은 인간의 타락과 함께 완전히 파괴되지 않았다. 즉 하나님의 형상은 다시 “형상(imago)”과 “모양(similitudo)”으로 구별되는데 타락한 후에 하나님의 “모양”은 상실하였으나 하나님의 “형상”은 상실하지 않았으므로 인간은 의지의 자유와 이성을 지니고 있어 동물과는 구분되는 인간 됨을 지닌다고 보았다. 그러므로 실재론적 견해에 따르면 인간은 하나님을 인식할 수 있으며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고 이를 받아들일 수 있는 내적인 능력이 있다는 것이다. 초대교회 교부중 한 사람인 이레니우스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형상이란 곧 인간의 합리적이고 자유스런 성품 다시 말해서 타락 시에도 상실되지 않은 성품’을 의미한다((Hoekema, 1994/ 류호준 역, 1995). 즉 이레니우스는 하나님의 형상과 모습을 구별하여 하나님의 형상이 타락 이후에도 보존된 측면과 아울러 상실된 측면이 있다고 보았다. “형상”은 아담이 이성과 의지의 자유를 갖춘 존재임을 의미했고, 인간의 이성적인 생각과 덕스러운 행동을 가능케 하는 것이라고 이해하고, 이것이 사람 속에 심어져서 본성에서 없어지지 않으며, 우주적이며, 결코 상실되지 않았고 상실될 수도 없다는 것이다. 형상은 타락과 관계 없이 존재하는 인간의 본질적 특성이라고 본다. 반면 “모양”이란 말은 아담이 성령(聖霊)의 역사로 말미암아 초자연적인 은사를 누리었음을 의미했다. 아담이 피조물인지라 신적인 완전성과 썩지 않음으로부터 필연적으로 멀리 옮겨졌다. “모양”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누리는 초자연적인 은혜로서 이 모습은 죄로 말미암아 파괴되었으며, 가변성이 있는 것이어서 타락함으로 상실되고, 이것은 그리스도의 구속사역과 성령을 받아들임으로서 회복되어 진다고 보았다(이용호, 1996: 11). 비슷한 맥락에서 토마스 아퀴나스는 하나님의 형상을 주로 인간의 지성 혹은 이성에서 찾고 있다. 말하자면, 오직 지능이 있는 똑똑한 피조물만이 하나님의 형상을 지니고 있다. 그리고 합리적인 피조물 안에서도 하나님의 형상은 오직 정신(mind)속에서만 발견되어 질 수 있다. 그에 의하면, 하나님의 형상은 사람 안에서보다도 천사에게서 좀더 완전하게 발견되어 지는데 그 이유는 천사들의 성품이 사람들의 성품보다 좀더 완전하게 지성적이기 때문이다(Hoekema, 1994/ 류호준 역, 1995: 66). 인간의 이성을 매우 강조했던 토마스 아퀴나스는 신자이든 불신자이든 상관없이 인간의 타락 후에도 하나님의 형상으로서의 이성이 여전히 남아 있다고 보았다. 이와 같은 초대교회 교부들의 하나님의 형상에 대한 실재론적 이해는 카톨릭 교회의 대표적인 견해로 자리 잡았으며 중세의 아퀴나스를 거쳐 현재까지도 부단히 논의되고 있다. 실재론적 견해는 김균진(1989)에 의하면 희랍사상의 영향을 반영하고 있다. 희랍사상에서 인간의 육체는 눈으로 볼 수 있는 현상의 세계에 속한 허무한 것임에 반하여 인간의 영혼은 “신(神)과 같은 형태의 것”이며 “신적(神的)인 것과 교통”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신들 다음에 가장 신적인 것”이다. 한편 영지주의에 의하면 인간의 육체는 영혼의 감옥이요 사멸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 반면 인간의 영혼 속에는 “신적인 불티”가 숨어 있다. 그 속에는 “신적인 실체”가 들어 있다. 스토아 철학에 의하면 신은 곧 이성(logos)이다. 따라서 인간의 이성은 단순히 인간적인 것이 아니라 신적인 것이다(김균진, 1989). 현상과 그 배후의 실체를 나누어 보는 이원론적 관점은 당시의 지배적 패러다임으로서 현상과 실체를 미분화된 상태로 뭉뚱그려 인식하던 패러다임을 극복하고 사물에 대하여 보다 정밀하게 생각하고 체계화하는 것을 돕는 새로운 패러다임이었다. 초대교회의 신학자들은 그러한 패러다임으로 하나님의 형상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나름대로 규명하고자 했던 것이다. 하나님의 형상에 대한 실재론적 입장들은 그 이후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들고 나온 신학자들에 의해 강하게 부정되기도 했으나 성경은 하나님의 형상으로서 새롭게 된 성품들에 대해 분명히 지지하고 있다. 사도 바울은 에베소 교회에 보내는 글에서 구원받은 성도들의 성품의 특징을 ‘오직 심령으로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사람’(엡 4:23-24)으로 파악한다. 내적으로 하나님의 형상이 회복된 모습으로서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온유와 절제’와 같은 덕목을 제시한다(갈 5:22-23). 그런데 인간의 내적 성품의 요소로서 하나님의 형상은 무엇보다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인격에서 극명하게 드러난다는데 신학자들은 이의가 없다. 그런 의미에서 실재론적 관점에서 하나님의 형상을 이해하려고 했던 오랜 기독교 신학적 유산은 목회상담에서 인간을 이해하는 좋은 자원으로 활용할 수 있을 것이다. 2. 관계적 견해들(Relational Views) 하나님의 형상에 대한 또 다른 지평의 이해가 관계적인 견해들이다. 관계적인 견해에는 다시 ‘하나님과의 관계’, ‘사람과의 관계’, 그리고 ‘자연과의 관계’적 지평이 있다. 여기서는 두 번째까지를 다루고 세 번째는 기능적 견해로 다음절에서 논의하고자 한다. 김균진에 따르면(1989) 하나님의 형상을 인간과 하나님 사이의 관계의 지평으로 이해하고자 하는 사상은 아우구스티누스(Augustinus)에게서 뚜렷이 나타난다. 그에 따르면 타락 이전의 인간은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 속에 있다. 이러한 의미에서 그는 하나님의 형상이다. 그러나 타락으로 인하여 하나님의 형상은 파괴되었으며 본래적 의(義)는 상실되었다.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는 깨어졌다. 그러나 하나님의 형상이 완전히 없어진 것은 아니다. 하나님의 모양은 상실되었으나 형상은 상실되지 않았다. 타락한 인간도 타락 이전의 인간과 같이 이성과 오성(悟性)을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타락한 인간은 그의 이성과 오성 때문에 하나님의 형상이다. 이와 같은 아우구스티누스의 견해에는 실재론과 관계적 관점이 혼재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후크마(Hoekema, 1994/ 류호준 역, 1995: 95)는 인간이 하나님과 맺는 관계 자체에서 하나님의 형상을 이해하려는 관점은 현대 신학자 에밀 부룬너(Emil Brunner)에게서 뚜렷하게 드러난다고 본다. 그에 따르면 부룬녀 있어서 하나님의 형상은 인간의 하나님에 대한 관계성의 모든 영역, 하나님에 대한 인간의 책임성, 하나님과의 교제의 가능성 속에서 발견되어진다. 따라서 그에 의하면 실재론적 견해를 가진 사람들이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생각했던 인간의 이성은 인간 속에 있는 최고의 것이 아니라 단지 수단에 불과하며 이 수단을 통해 인간은 자신의 진정한 기능을 수행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 진정한 기능이란 하나님과의 사랑의 교제를 갖는 것을 의미한다. 부룬너는 이처럼 하나님의 형상을 그분과 사람이 맺는 관계성에서 찾으면서도 한 편으로 실재론적 관점을 수용하여 형상을 형식적(formal) 의미와 실질적(material) 의미로 나눈다. 여기서 부룬너가 말하는 하나님의 형상의 “형식적 측면” 이란 인간의 책임성,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 반응 할 수 있는 능력, 하나님께 대해 대답해야 할 필요성이 있는 인간존재의 궁핍성을 의미한다(Hoekema, 1994/ 류호준 역, 1995: 97). 말하자면 형식적 측면에서 하나님의 형상은 상실될 수 없으며 죄에 의해 무효화되지 않는 것이다. 한편 부룬너가 말하는 하나님의 형상의 실질적 측면이란 창조주 하나님에 대한 피조물 된 인간의 올바른 응답을 의미한다. 즉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하나님의 형상의 회복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완성된다. 형상의 회복은 화목교리의 심장이라고 할 수 있다(Hoekema, 1994/ 류호준 역, 1995: 99). 이처럼 부룬너는 하나님의 형상을 인간의 내면에 있는 어떤 본질적 특성으로 보고자 했던 실재론적인 패러다임을 수용하면서도 하나님과 관계 안에서 찾고자 그것을 조명하는 새로운 지평을 확고히 했다고 볼 수 있다. 두 번째, 하나님의 형상에 대한 관계적 접근은 최근의 신학자 칼 바르트(1886-1968)의 신학에서 나타난다. 그는 인간존재와 그 구조, 그 성향, 그 능력들 등에 관한 그 어떠한 인간론적 묘사 속에서 하나님의 형상을 찾으려는 시도, 즉 실재론적 관점을 거절하고 그 대신 창세기 1장 27절 말씀을 주석하면서 사람과 사람이 맺고 있는 관계성에서 하나님의 형상을 찾고자 한다.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셨더라’(창1:27) 위 본문이 너무나도 명백하게 가르치는 내용은, 하나님에 의해 창조된 형상과 모습은 인간존재가 대면(confrontation) 속에 있다는 것을 암시한다. 인간과 인간 즉 남자와 여자 사이의 연결은 대면의 관계를 말한다(Hoekema, 1994/ 류호준 역, 1995: 에서 재인용). 우리가 남자와 여자로 창조되었다는 것은, 남자와 여자 사이에 대면의 가능성이 있도록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부여하셨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다가오시며 우리와 “나-너” 관계 속으로 들어가시는 분이시다. 따라서 인간이 동료인간을 향하여 이와 동일한 관계를 수립할 수 있는 능력을 지니고 태어났다는 것이 곧 그가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는 존재론적 유사성이 있는 것이 아니라 관계론적 유사성이 있을 뿐이라고 바르트는 말한다. 하나님은 인간이 자기와 언약적 교제를 그리고 동료 인간과도 교제를 나누도록 창조하셨다. 이것을 바르트 자신의 말로 요약해 보면 다음과 같다. 진정한 인간은 하나님에 의해 하나님과 함께 사는 삶을 살도록 규정지어졌다는 사실은, 인간의 피조적 존재는 만남의 존재라는 사실-“나”와 “너”, “남자”와 “여자” 사이의- 속에 분명한 상응점을 갖고 있었다. 바로 이러한 대면 속에 인간됨이 있으며, 이러한 인간 됨 속에 인간의 창조주를 닮은 모습이 있다 (Hoekema, 1994/ 류호준 역, 1995 에서 재인용). 바르트는 교회교의학에서 창세기 1장 1절 말씀의 문학적 형식을 빌어 “태초에 관계가 계시니라”라고 한다. 그 관계는 성부, 성자, 성령 삼위일체 하나님의 관계이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실 때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창 1:26) 라고 말씀하실 때 우리는 바로 삼위 일체 하나님 자신들을 가리키며 이어서 창세기 1장 27절에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신 것은 바로 삼위 일체 하나님이 맺고 있는 관계로서의 형상을 따라 지음 받은 것이라고 한다. 관계로서의 하나님 형상이해는 직접적으로 표현되어 있지는 않으나 요한복음에서도 선명하게 볼 수 있다. 요한복음에 의하면 예수께서 다락방 강화를 마치고 제사장적 기도를 하실 때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 같이 저희도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세상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요17:21) 라고 하신다. 즉 제자들이 상호간에 맺는 관계의 원형이 다름 아닌 예수 자신이 하나님 아버지와 맺고 있는 “관계”이다. 그러한 관계는 단지 제자들끼리만 맺는 인간관계가 아니라, ‘곧 내가 저희 안에,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서 저희로 온전함을 이루어 하나가 되려 함은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과 또 나를 사랑하심 같이 저희도 사랑하신 것을 세상으로 알게 하려 함이로소이다.’(요 7:23) 라는 말씀에서 볼 때에 하나님 아버지와 예수 그리스도와 종적인 관계가 함께 어우러져 있다. 한편 사도 바울 역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역을 하나님과 사람의 관계 회복의 차원에서만 이해하지 않고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회복의 차원에서 이해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즉 에베소 교회에 보내는 글에서 그는 이방인 그리스도인과 이스라엘 유대인이 어떻게 하나되었는지를 다음과 같이 말씀하신다. ‘원수 된 것 곧 의문에 속한 계명의 율법을 자기 육체로 폐하셨으니 이는 이 둘로 자기의 안에서 한 새 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시고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원수 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엡3:15-16) 3. 기능적 견해들(Functional Views) 하나님의 형상에 대한 기능적 이해는 피조물과 인간의 관계를 창으로 하여 하나님의 형상을 이해하고자 하는 것이다. 이는 소위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문화명령으로 이해되어 온 창세기 1장 28절의 말씀과 시편 8편 5-6절 말씀에 근거를 두고 있다. 이 견해는 상당히 오랜 역사를 지니고 있는데 소시니아스트(Socinianist)들에 의해 제시되었으며 그들의 라코비안 교리 문답서(Racivian Catechism)에 포함되었어 있다(Erickson/ 나용화, 박성민 역, 1993: 103). 그들에 따르면 하나님은 모든 창조물의 주(主)이시기 때문에 인간은 그 나머지 창조 세계를 다스림을 통해서 하나님의 형상을 반영한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형상은 실제로 주로서의 하나님의 한 형상의 모습이라는 것이다. 에릭슨(Erickson/ 나용화, 박성민 역, 1993: 105)에 따르면 시편 8장 6절의 주석적 의미로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인간의 모습은 무엇보다도 다른 만물과 비교되는, 그의 신과 같은 존귀한 영광 속에서 만물들을 지배하는 주권과 능력에 있다’ 라고 하였다. 성경적으로 말해서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낱말은 도덕이나 혹은 어떤 이상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고 보는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형상이란 오직 세계와 그 속에 있는 만물에 대한 인간의 통치 행위를 언급하는 것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박준서(1989)역시 하나님의 형상을 통치의 개념으로 파악한다. 창세기의 배경적인 문화중 하나인 메소포타미아 지역의 고대 기록을 보면, 애굽의 왕은 “신의 형상”이라고 불려 졌다, 특히 주전 17세기 힉소스(Hyksos)시대 이후로부터 주전 300년대 희랍 시대까지 애굽에서 “바로(Pharaoh)”는 애굽의 신인 “르(Re)신의 형상”으로, 혹은 “아몬(Amon)신의 형상”으로, “아툼(Atum)신의 형상”으로 불려진다. 애굽의 기록에서 “신의 형상”이란 신이나 인간의 외형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신과 왕 사이의 특별한 관계를 말하는 것이다. “신의 형상”이 외형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은 그를 남신(男神)인 “오노프리스(Onophris)신과 여신인 이시스(Isis)신의 형상”이라고 동시에 부르고 있다는 점을 통해서 알 수 있는데 이는 바로가 남자와 여자의 외양을 동시에 갖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점을 주의 깊게 관찰 한 후 박준서(1989)는 “신의 형상”에 대한 고대 근동의 이러한 어법의 맥락에서 하나님의 형상대하여 다음과 같이 기능론적으로 결론짓는다.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되었다는 것은, 피조물에 대한 인간의 통치와 관리를 뜻한다. 인간은 하나님의 대리인으로서 다른 피조물을 다스릴 책임과 임무를 위임받은 것이다. 그러므로 인간의 자연에 대한 통치는 자연의 질서를 유지하고 보존하는 통치가 되어야 하며, 자연의 질서를 파괴하고 자연을 수탈하는 통치가 되어서는 안될 것이다(박준서, 1989: 120). 하나님의 형상에 대한 지금까지의 논의들을 베이커(Baker/ 김성웅 역, 1994)는 다음과 같이 좀더 세분하여 다섯 가지의 패러다임으로 정리하였다. 첫째 ‘내적인 특질인 하나님의 형상’, 둘째 ‘하나님-인간이 맺는 관계인 형상’, 셋째 ‘지배권인 형상’, 넷째 ‘하나님의 대리자가 되게 하는 형상’, 그리고 ‘아들 됨(sonship)인 형상’이다. 그런데 이 모든 하나님의 형상을 온전히 보여 주신 분이 예수 그리스도라고 하는 점은, 특히 종교 개혁자들이 강조했는데, 거의 모든 학자들이 의견의 일치를 보고 있다. 4. 최근의 신학적 고찰 1) 영과 몸을 포함한 일원론적 견해 최근의 신학적인 논의들은 하나님의 형상에 대하여 더욱 풍성한 관점을 제시하고 있다. 먼저 사람의 몸도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관점이다. 리(Lee, 1983/ 이승구 역, 1996)에 따르면 사람이 그의 몸이고 또 생령(生霊)이라면 하나님의 형상이란 전인(全人), 즉 그의 몸과 영혼을 포괄하는 개념이다. 하나님의 형상이란 인간의 어떤 특정 요소가 아니라 인간 그 자체로 송두리째 하나님의 형상이다. 다시 말하여 전인(全人)이 하나님의 형상이며 하나님의 형상이 전인이라는 것이다. 사람은 마치 짐꾼이 짐을 진 것과 같은 단순한 하나님의 형상의 담지자(担持者)가 아니 그가 어떤 요소로 구성되어 있든지 그 전체의 모든 요소가 전부 하나님의 형상이다. 하나님의 형상이란 사후에 덧붙여진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이 아니고서는 한 순간도 있지 않다. 또한 형상이란 하나님의 한 부분이나 하나님의 속성 중 어떤 것의 단순한 반영이 아니다. 오히려 사람은 모든 점에서 하나님을 닮은 것이다. 즉 하나님께서 가지신 모든 것을 인간도 역시 모두 가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모든 것을 창조적이고 독립적인 방식으로 가지신 것이고 사람은 단지 종속적이고 피조물 된 입장에서 가지고 있을 뿐이다. ((Lee, 1983/ 이승구 역, 1996)는 위와 같이 하나님의 형상의 전인성(全人性)을 강조하면서 결론짓기를 성경 어느 곳에서도 인간의 영혼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는데 그의 몸은 그렇지 않다고 말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계시를 알지 못하거나 거부하는 철학은 언제나 경험론이나 합리론, 유물론이나 유심론의 극단 속에 빠지고 만다. 성 염 등(1998: 43)에 따르면 ‘지금처럼 인간의 다면성(多面性)이 연구되는 시점에서도 자아를 영과 육 가운데 한 요소로 환원시키는 유혹이 있지만 우리는 적어도 자신의 정신과 육체에 대해서는 변증법적인 일치를 도모해야 한다’고 지적한다. 성경은 육체와 영혼 이 둘을 조화시키는 것이다. 사람은 영혼을 가진다. 그러나 그 영혼은 심적으로 조직된 것이다. 이런 본성에 의해 영혼은 필히 몸 안에 있게 되는 것이다. 육체적이고도 영적인 것이 인간의 본질이다. 그러므로 시간적으로 뿐만 아니라 논리적으로도 육체가 먼저 만들어지고 그 후에야 생기가 불어넣어 진 것이다. 하나님의 형상에 대한 이러한 새로운 관점은 현상학과 같은 철학에서 인간을 몸의 관점에서 새롭게 해석하는 패러다임 전환과 맞물려 있다고 보인다. 전통적 기독교의 패러다임들이 몸을 무시하거나 무시하지는 않는다 하더라도 하나님의 형상을 이해하는 패러다임으로 사용하지 않았던 것을 생각할 때에 몸의 패러다임은 중요한 관점의 변화이다. 몸의 패러다임은 인간을 통합체로 보는 패러다임을 전제로 하는 것인 바 게슈탈트(Gestalt) 상담의 전제이기도하다. 2) 공동체에서 하나님의 형상을 찾음 하나님의 형상에 대한 또 하나의 현대적 관점은 “공동체 패러다임”이다. 후크마(Hoekema, 1994/ 류호준 역, 1995: 174)는 하나님의 형상에 대한 성서적, 역사적 해석을 주의 깊게 고찰한 다음 ‘하나님의 형상이 총체적으로 나타날 수 있는 것은 오로지 “전체로서의 인류” 안에서이다’ 라고 결론을 내린다. 즉 하나님의 형상은 개체로서의 인간이 아닌 심지어 함께 어울려진 남자와 여자로서의 인간이 아닌, 전체로서의 인류가 비로소 온전히 발전된 하나님의 형상이라 할 수 있다. 하나님의 형상은 너무나 부요(富饒)한 것이기에 한 인간으로서는 그가 제 아무리 엄청난 재능을 부여받았다 하더라도 온전하게 그것을 드러내 보일 수 없다. 그 형상은 그 깊이와 부요(富饒)함에 있어서 하나님의 흔적들이 시간과 공간상으로 하나님이 행하신 수많은 일들 속에 흩어져 있듯이 하나님의 형상 또한 우리들의 이전과 이후에 걸쳐 존재하는 총체적인 전 인류 가운데서만 보여질 수 있다는 것이다. 즉 하나님의 형상은 불변부동의 것이 아니라 시간과 공간의 현실들 가운데서 그 자체를 드러내며 전개시켜 나간다는 것이다((Hoekema, 1994/ 류호준 역, 1995) 이어서 후크마는 하나님의 형상에 관한 공동체적 패러다임을 지지하는 학자로 리차드 마워(Richard Mouw)의 견해를 소개한다. 마워에 따르면 하나님의 형상에 대한 성경적 이해를 위한 신학적 토의 과정 중에서 이루어진 괄목할 만한 제안 중의 하나는 하나님의 형상의 “집단적” 차원을 갖고 있다는 점이다. 즉 어느 한 개인이나 한 그룹이 하나님의 형상과 이에 포함되는 모든 것을 온전히 지니거나 그것들을 완전하게 드러내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러기에 어떤 의미에서 하나님의 형상은 집단적으로 다시 말하여 공동체적으로 소유되어 지는 것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하나님의 형상의 공동체성은 사도 바울의 글에서 찾아 볼 수 있다. 특히 에베소서에서 사도 바울은 교회를 그리스도의 몸으로 이해하고 있으며 고린도전서 12장에서는 성도들 상호간의 올바르고 긴밀한 유기체적 관계로 묘사하고 있다.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교회 공동체는 완성된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이 거하실만한 처소가 될 만하게 지어져 가고 있다(엡 2:20-22). 하나님의 형상을 공동체적 패러다임에서 이해하는 것은 개인적인 관점과 확실히 그 차원이 다른 것이다. 즉 개인들의 집합은 항상 단순한 산술적 합계 그 이상이라는 점이 집단역학에서 분명히 밝혀진 바 있다. 그런 의미에서 목회상담은 반드시 공동체적 지평을 고려해야 한다고 로드 윌슨은 말한다(Wilson, 1992/ 김창대 역, 1997). 즉 우리는 전적으로 개인에 초점을 맞추기 보다는 공동체 중심적인 상담 접근법이 필요하다. 이렇게 된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사람들에 관하여 성경이 강조하고 있는 것의 진정한 의미를 알게 될 것이다. 윌슨은 ������상담과 공동체������라는 그의 책 서문에서 ‘기독교적 관점에서나 또는 세속적인 관점에서의 많은 문헌들이 공동체와 개인간의 갈등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우리는 이와 같은 문헌들을 상담영역에 접목시킬 필요가 있다. 목사들이나 일반 상담자들은 모두 공동체(共同体)의 중요성과 그것이 치료과정에 가지고 있는 힘을 재확인할 필요가 있다’라고 말한다(Wilson,1992/ 김창대 역, 1997: 12). 성경은 상담의 공동체적 지평의 풍부한 자원보고(資源宝庫)이다. 하나님의 형상에 대한 공동체적 이해와 집단 상담이나 가족치료와 같은 일반상담은 공동체적 패러다임을 공유하고 있다. 3) 종말론적 관점에서 하나님의 형상을 찾음 세 번째 하나님의 형상에 대한 최근의 신학적인 논의는 종말론적 관점이다. 후크마(Hoekema, 1994/ 류호준 역, 1995)에 의하면 우리가 사람에 관해 생각할 때 우리는 반드시 현재적 상태에서의 인간뿐만 아니라 미래적 상태의 인간을 바라다 보아야한다. 과거의 신학자들은 하나님의 형상을 창세기 3장 이전에서만 찾으려고 하였다. 즉 ‘타락하기 이전의 본래적 하나님의 형상이 무엇인가’라는 점에 관심의 초점이 있었다. 그러나 창세기 1장과 2장의 짧은 본문에서 하나님의 형상의 본래 모습을 도출해 낸다는 것은 몹시 어려운 일이고 논란의 여지가 많다. 하나님의 형상을 과거적으로 이해하려 했던 것은 시간에 대한 패러다임의 반영이라고 볼 수 있다. 즉 시간의 흐름을 과거-현재-미래의 방향으로 생각했던 것이다. 그러나 종말론적 관점에서 시간은 오히려 종말적 미래로부터 현재로 다가와서 과거로 흘러간다고 이해할 수 있다. 그렇게 볼 때 하나님의 형상은 창세기 1-2장에서만 찾을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궁극적으로 이루신 종말의 지평에서 탐구해야 할 것이다. 이처럼 하나님의 형상에 대한 종말론적 패러다임을 적용하게 될 때 하나님의 형상에 대한 이해를 창세기 3장 이전에서만 찾으려고 했던 한계를 극복하여 신∙구약 성경 전체가 하나님의 형상을 이해하는 텍스트가 될 수 있다. 성경은 하나님의 형상의 종말론적 실체로서 부활의 몸과 연결시킨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들의 미래는 영화롭게 된 부활의 몸, 다시 말해서 온전하게된 하나님의 형상의 영원한 생명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동시에 바로 그 성경이 그리스도를 배척하고, 회개치 않으며 불신앙으로 하나님에 대해 계속적인 반항 속에 살아가는 자들의 미래는 영원한 형벌로서 하나님의 온전한 형상을 입지 못한다는 것이다. 이처럼 하나님의 형상을 종말론적으로 이해하는 패러다임은 목회 상담의 인간관 이해에 있어서 내담자의 과거나 현재뿐만 아니라 미래에 관심을 가지도록 도전한다. 요한복음 9장에 보면 나면서부터 소경 된 사람에게 저가 소경 된 것이 자신의 죄 때문인지 부모의 죄 때문인지를 제자들이 묻는다. 자신의 죄란 현재의 인과응보(因果応報)적 관점에서 소경을 보는 것이고 부모의 죄 때문이란 과거의 인과응보(因果応報)적 관점에서 그를 보고자 하는 것이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둘 다를 거부하시고 “이 사람이나 그 부모가 죄를 범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서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니라”(요9:3)라고 말씀하신다. 즉 그가 하나님 나라를 위해 장차 기여할 미래의 관점에서 그의 “소경 됨”을 해석하신다. 그러므로 후크마도 힘주어 강조하듯이 기독론적 인간관의 최상을 보려면 최초에 창조되었을 때의 인간으로 돌아가서는 안 된다. 오히려 미래에 새롭게 되어 질 그 인간에게로 돌아가야 한다. 그리스도께서는 그의 구원을 통해 창세기 3장 이전의 본래 하나님의 형상으로 우리 인간을 돌려놓으려는 것이 아니라 타락 이전의 아담보다 더 높은 곳으로 인도하시기 때문이다. 아담은 여전히 그의 죄없음과 복된 상태를 잃을 가능성 속에 있었던 존재였다. 그러나 영화롭게 된 성도들은 더 이상 그렇게 될 수가 없는 존재들이다. 아담은 죄를 짓지 않을 수도 따라서 죽지 않을 수도 있는 존재였으나 영화롭게 된 성도들은 죄를 지을 수도 없고 따라서 죽을 수도 없는 존재들이다. 즉 도저히 상실될 수 없는 이러한 완성이야말로 하나님의 형상으로서 인간이 향하고 있는 필연이다((Hoekema, 1994/ 류호준 역, 1995). 만약 하나님의 형상이 종말론적인 것이 아니었다면 하나님께서는 애초부터 아담을 예수 그리도의 부활한 몸과 같은 몸으로 만드셨을 것이다. 인간에 대한 종말론적 패러다임을 목회 상담에 적용할 때 정신분석과 같은 과거 중심적인 패러다임과 현재성을 강조하는 상담들의 패러다임의 한계를 극복하고 보완할 수 있을 것이다. 다시 말하여 종말론적 하나님의 형상의 패러다임을 취할 때 목회상담은 원래의 건강을 회복하는 치료적인 차원과 건강한 사람들 더욱 성숙하도록 돕는 성장의 차원을 모두 포괄할 수 있게된다. 4) 사람 자체를 하나님의 형상으로 봄 끝으로 하나님의 형상에 대한 결론적 고찰은 하나님의 형상은 인간이 지닌 어떤 속성이나 보유하고 있는 어떤 것이 아니라 “사람”이 바로 그 자체로서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것이다. 이 점에 대해서 후크마의 글을 좀 더 상세히 인용하고자 한다. "하나님의 형상에 대한 벌카워의 견해를 앞서 살펴보면서, 나는 헤르만 바빙크를 인용한 일이 있었다. 바빙크는 말하기를, 성경에 의하면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을 지니고 있거나 보유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바로 하나님의 형상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형상은 인간의 그 전체성(entirety)의 관점에서 이해되어져야 한다고 했다. 이 말이 뜻하고 있는 바는, 하나님의 형상은 인간에게 어쩌다 덧붙여진 부수물이 아니라는 점이다. 즉 하나님의 형상은 계속 우리가 한 인간으로 존재하면서도 동시에 그것을 잃어버릴 수도 있는 그런 우연적인 것이 아니라 우리가 인간으로서 존재하는데 반드시 필수적인 것이라는 주장이다(Hoekema, 1994/ 류호준 역, 1995: 119)." 하나님의 형상을 인간의 전체성으로 보는 패러다임은 대부분의 현대 목회상담학적 인간관의 특징인 “통전적인 인간관”, 혹은 “전인적 인간관”과 그 맥을 같이 한다고 볼 수 있다. 통전적 인간이해란 인간의 모든 차원들-몸, 마음, 영혼-이 하나로 결부되어 있다는 의미이다. 다시 말하여 통전적 인간(whole being)은 기본적으로 영, 육, 혼이 깨어있는 사람으로 자신에 대한 객관적 자아의 능력을 가지고 자기 인식을 하며, 자신의 삶의 가능성을 끊임없이 실현해 나가는 사람이다(구미리암, 2000: 201). (출처: 이영식, "하나님의 형상으로서의 인간 이해와 목회 상담", 한남대 2000년 석사논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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