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

생명의 복음을 구현하는 교회 개혁주의 생명신학의 이해

하나님아들 2021. 9. 13. 20:54

 생명의 복음을 구현하는 교회 개혁주의 생명신학의 이해  

 

1. 들어가는 말 이 글은 백석학원 건학 35주년을 기념하는 이번 국제공동학술대회에서 개혁주의생명신학회가 마련한 분과발표에서 발표되는 글이다. ‘성경으로 돌아가자: 생명과 복음, 교회’라는 전체 주제는 이번 국제학술대회를 공동 개최하는 두 학회의 관심과 지향점을 잘 드러낸다. 한국복음주의신학회는 복음주의 관점에서 ‘성경과 신학’이라는 학술지를 발간하고 있으며, 개혁주의생명신학회는 생명의 말씀인 “오직 성경으로!”(Sola Scriptura)를 외치면서 신학이 철저히 교회를 위한 신학이어야 한다고 주장하며, 무엇보다 신학은 학문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이며 복음이라고 외치기 때문이다. 두 학회가 공동주최하는 국제학술대회의 윤리 분과에서 발표되어야 하는 글은 두 학회의 공통관심사를 교회와 관련하여 윤리적 관점에서 다루어야 할 의무를 지닌다 할 수 있다. 최근 한국 교회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에 대한 비판들 때문에 교회 현장의 목회자들과 사역자들이 복음 전파에 큰 어려움을 겪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원로목사와 후임목사 사이의 갈등이나 목회자의 성추행 문제 등으로 교회가 갈등하고 분리되기도 하며 세상의 지탄을 받기도한다. 김영재는 교회가 말씀을 삶으로 증언하고 말씀대로 섬기는 모습보다는 제도를 강조하는 교직주의(clericalism)의 경향을 강하게 보임에 따라 한국 사회가 한국 교회를 기업주의화된 집단으로 보는데서 한국 교회의 어려움을 찾기도 한다.1) 김기현은 한기총을 비롯하여 한국 교회가 힘에 의존함으로써 그리스도의 인격과 가르침을 제대로 반영하지 못하는 정치참여를 하고 있다는데서 한국 교회의 문제를 찾고 있다.2) 특히 일부 목회자들이 윤리적으로 부적합한 언행을 통해 지도력을 상실할 때 교회가 건강하지 못하며 세상을 향한 교회의 영향력이 축소될 수밖에 없는 것은 사실이다.3) 특히 일부 목회자들의 성적 탈선은 성 문제를 공론화하기 꺼려하는 유교적 문화의 영향과 맞물려 공적으로 제대로 다루어지지 않는 동시에 한국교회에 대한 사회적 평가에 악영향을 미칠 뿐 아니라 교회 내의 그리스도인들에게도 심각한 내상을 가하고 있다.4) 그런데 문제는 한국 기독교와 교회에 대한 도덕적 이미지가 전반적으로 나빠지는 상황이 복음 전파에 불리한 환경을 조성하고 있다는데 있다. 최근 한국 사회가 한국 교회를 바라보는 시선이 차갑다는 사실에 큰 상처를 받을 필요는 없을 것이다. 클라우니(Clowney)의 지적처럼 “교회에 대한 세상의 비판이 최고조에 달한 바로 그 순간이 세속 세상이 가장 곤고한 때이”기 때문이다.5) 한국 교회에 대한 비판의 수위가 높은 것은 한국 교회에 대한 기대가 그만큼 높음을 나타내는 것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세상은 한국 교회가 그리스도의 복음을 회복해서 세상이 우러러 볼 수 있는 도덕적 고결성을 보여주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는 셈이다. 이는 세상의 주인이신 그리스도께서 세상의 빛으로 부름 받은 한국 그리스도인과 한국 교회에게 바라시고 명령하시는 일이기도 하다. 지금 하나님의 말씀이 절실히 필요한 곳은 세상이 아니라 한국교회 자체가 되어버린 상황이다. 레슬리 뉴비긴(Lesslie Newbigin)이 선교의 일차적 대상이 인도와 같은 제3세계 국가가 아니라 영국이라고 지적한 것처럼, 지금 그리스도의 복음을 진지하게 경청해야 하는 대상은일차적으로 한국 사회가 아니라 한국 교회가 된 상황이다. 신현수에 따르면 한국 교회는 사역의 목표를 “한 사람 한 사람이 바른 믿음의 삶을 살아가도록 돕는데 있지 않고 교인의 수적 증가를 통한 큰 교회를 만드는 데” 두고 있으며, 성경이 가르치는 삶의 원리가 실현되는사회와 세상을 만들기보다는 세상의 가치관에 깊이 물들어 있다.6) 김기현의 지적처럼 교회는 스스로에게 ‘죄 많은 이 세상으로 충분한가?’라고 묻지 말고, ‘죄 많은 이 교회로 충분한가?’라고 물어야 할 것이다.7) 이용원의 지적처럼 우리가 현실에서 만나는 가시적 교회들에서 비가시적이고 참된 교회의 본질을 찾아보기 힘들기 때문에8) 이 질문은 어느 한 시대에 국한되는 질문이 아니라 주님 오실 때까지 계속 제기되어야 하는 질문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이 글은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생명이 되신다는 복음을 다시 회복하는데서 교회의 회복이 시작할 수 있다고 주장하고자 한다. 이는 한국 교회가 교회다워질 수 있는 기준과 척도를 우리가 설정하지 말고 하나님의 말씀이 설정하도록 해야 한다는 뜻이다.9) 또한 이 글은 성경 말씀이 목회자를 비롯하여 우리 그리스도인의 삶에 인격적으로 적용되는데서 복음의 회복이 시작될 수 있다고 주장하고자 한다. 이를 통해 한국 교회가 진정한 말씀 공동체로 바로 설 때 생명의 말씀이 밝히 드러남으로써(빌2:16) 온전한 복음이 선포되고 교회가 교회다워진다고 주장하고자 한다. 이 글은 무엇보다 한국교회의 문제가 목회자의 문제이며 목회자의 문제는 신학교육의 문제라는 개혁주의생명신학의 통찰을 적극 받아들이면서,10) 목회윤리 교육이 이론적 차원에서뿐 아니라 실천적 차원에서도 행해져야 한다고 주장하고자 한다. 이를 위해 이 글은 우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개인과 교회, 사회에서 회복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개혁주의생명신학의 내용을 살펴본 다음에, 개혁주의생명신학의 적용으로서 한국교회 문제 해결을 위한 올바른 신학교육의 일환으로서 목회윤리 교육과 관련하여 “오직말씀으로 돌아가는” 목회윤리 교육을 제안하고 말씀 운동이 교회와 그리스도인의 자기정체성과 관련해서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2. 개혁주의생명신학 개혁주의생명신학은 백석학원 설립자 장종현 목사님이 한국교회의 여러 문제들을 안타까워하면서 그 해결책으로 제시하였고 개혁주의생명신학회를 중심으로 여러 신학자들이 발전시켜 가고 있는 신학이다. 따라서 개혁주의생명신학이 무엇인지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선 장종현 목사님이 말씀하시는 개혁주의생명신학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이를 위해 장종현 목사님이 그동안 출판하신 글들을 중점적으로 참고하고자 한다.

 

 (1) 개혁주의생명신학은 영원한 생명이 있는 하나님 말씀의 신학이다. 개혁주의생명신학이란 무엇인가? 장종현 목사님은 개혁주의생명신학을 영원한 생명의 신학으로 규정하신다. 예수께서 신학의 정의를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라 하신 요한복음 17장 3절이 그 근거로 제시된다. 장종현 목사님에 따르면, 이 신학은 구체적으로(1) 참된 생명이시며 십자가의 희생적 죽음을 통해 우리에게참된 생명을 주시는 예수님에 대한 신학이며,(2)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온전한 계시자이시기에 하나님의 말씀의 신학이기도 하며, (3) 인간이 예수님의 생명을 받을 수 있는 통로인 믿음의 신학이기도 하며,(4) 성령 하나님께서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세상에 비추며 나누어주는 선교의 신학이기도 하다.11)

“개혁주의생명신학은 예수 그리스도의 피 묻은 십자가의 복음이 교회 강단에서 회복되기를 힘쓰는 신앙운동”이다.12) 그러하기에 개혁주의생명신학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영접하는 일을 강조하며, 신학자들의 신학저술보다 하나님의 말씀 자체를 더 강조하며, 예수님의 말씀을 인간 이성의 잣대로 비판하거나 판단하지 않고 전적으로 신뢰하는 믿음을 강조하며, 개혁주의신학을 고정 불변하는 신학으로 여기지 않고 성령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말씀의 의미를 시대상황과 선교현장에서 실천적으로 보여주심으로써 계속 개혁되어 가는 신학으로 이해한다.13) 장종현 목사님에 따르면 “하나님께서는 항상 백성들이 처한 구체적인 상황 속에서 말씀을 주셨”다. “진정한 신학자는 성도들이 처해 있는 사회적, 영적 환경을 늘 염두에 두고 연구해야” 한다.14) 그러하기에 개혁주의생명신학은 개혁주의신학에 생명을 불어넣는 신학이며, 성령에 충만한 개혁신학자들이 하는 신학이다. 따라서 “성경적으로 우리의 신학을 늘 개혁하는 것이 진정한 개혁주의 신학자들의 바른 자세일 것”이다.15) “성경이 가르치는 대로 행하고, 성경에 비추어 보아 그릇된 것은 바로잡는다는 것이” “개혁주의신학의 핵심”이다.16) ”교회 역사에 있었던 신조들이나 고백들이 소중하지만 신앙과 삶의 유일한 표준인 성경을 대신할 수는 없다.17)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만이 우리의 신앙과 삶의 유일한 표준입니다.”18) 개혁주의생명신학이 “성경이 우리 신앙과 삶의 유일한 표준임을” 믿는 신앙운동을 구체적인 실천 운동으로 제안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19) “개혁주의생명신학의 일곱 가지 실천운동 역시 ‘오직 성경’의 정신을 기초로 하여 전개되어야” 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인간이 만들어 낸 과학이나 전통이 신학의 기초가 될 수” 없으며, 참된 신학에는 “오직 하나님의 계시의 말씀인 성경에서만 찾을 수” 있는 “영적 생명력”이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20) 서구 대학의 실증주의적, 합리주의적 학문관에 따라 신학도 하나의 학문으로 인정받으려 하는 태도는 참된 신학의 영적 생명력을 잃어버리는 결과를 낳는다. 그 태도는 인간 이성을 하나님의 계시보다 우위에 놓는 잘못을 저지른다.

 

21) 참된 신학의 주체는 인간이 아니라 하나님이시다. 신학은 인간이 하나님에 대해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이다. 따라서 “신학의 방법도 인간의 이성과 경험이 아니라 ... 하나님의 은총, 곧 성령과 믿음이 될” 것이다.22) 개혁주의생명신학의 인식론에 따르면, 하나님의 뜻은 이 세상의 지혜로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신령한 지혜 곧 성령과 믿음으로” 알 수 있다. 개혁주의생명신학은 성경을 학문으로 이해하지 않기에 성경을 인간의 저작물로 여기지 않고 하나님의 특별계시로 받아들인다. “개혁주의생명신학은 인간의 이성을 무시하지 않”지만, “동시에 인간의 이성의 한계를 인식”한다. “성령님의 조명이 없는 인간의 이성과 경험”으로 신학을 해서는 안 된다.23)

 

 (2) 신학은 학문이 아니다. 이와 관련하여 개혁주의생명신학은 “신학은 학문이 아니라”고 선언한다. 이와 관련하여 중요한 개념은 인격 개념이다. 장종현 목사님은 신학이 추구하는 진리가 “단순한 사상이나 교훈이 아니라 인격이시라는” 성경 말씀을 강조하신다. 그 진리는 하나님이시며, 예수 그리스도이시며, 성령님이시며,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이다.24) 따라서 신학을 하는 일은 지성을 사용해서 하나님에 관해 합리적으로 분석하고 판단하는 일이 아니다. 그러하기에 우리는 인격이신 주님을 만나고 그분과 악수해야 한다.25) “우리는 성령님께서 살아계신 인격체이심을 기억하며, 늘 그분의 뜻에 순종하며 살도록 노력해야” 한다.26) 장종현 목사님은 인간 이성대신 성령님께 의지해서 신학을 한 대표적 인물로 신학 교수직을 버리고 인도네시아 선교사로 일한 에타 린네만(Eta Linnemann)을 제시하신다.27) 

 

이와 관련하여 성경의 하나님이 철학자들의 신과 대조된다. 성경의 하나님은 개념적이고 추상적이고 비인격적인 철학자들의 신과는 달리 아브라함과 야곱과 이삭의 하나님, 즉 영적이고 인격적이고 살아계신 하나님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신학자와 철학자의 연구대상의 성격이 이처럼 서로 다르기 때문에 신학자의 연구방법을 철학자의 연구방법과 동일시해서는 안 된다. 철학자들의 지식이 자신들의 이성에 근거해서 자신들이 찾아내는 지식인데 반해, 신학자들의 지식의 원천은 신학자들 자신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이다. 학자들이 개념이나 정의(definition)를 얻고자 하는 목적은 연구대상을 고정시킴으로써 그 대상을 완전히 파악하고 이를 통해 그 대상을 통제하려는데 있다. 이러한 점에서 살아계신 인격이신 하나님을 추상적 개념을 통해 고정시켜 그분을 통제하려는 행위는 인격이신 하나님을 비인격적 이미지에가두지 말라는 제2계명을 위반하는 행위이기도 하다. 아브라함과 야곱과 이삭의 하나님은 학자들의 추상적 개념에 의해 파악되는 하나님이 아니라 아브라함과 야곱과 이삭이 인격적으로 직접 순종하고 체험한 하나님이다. 장종현 목사님이 신학은 학문이 아니라고 강조하시는 이유는 바로 생명이시고 인격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고정되고 비인격적인 개념으로 만들지 말라는데 있다.28) 그 개념은 우리가 믿고 신뢰하고 순종하고 교제할 수 있는 인격이 아니다. 인격은 단순한 개념으로 환원될 수없다. 그러하기에 장종현 목사님은 신학을 단순한 학문으로만 추구하는 학자들을 향해 “하나님 앞에서 신학을 단순히 학문 자체로 나누는 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인간이 이해할 수 없는 하나님의 계산법을, 하나님의 주권이 담겨있는 하나님의 계산법과 깊은 뜻을 어떻게 학문이란 이름으로 함부로 쪼개고 나누고 말할 수 있습니까?”29)라고 반문하신다. 로마서 11장 33절에서 보듯이, 부패하고 타락한 인간이 “인간에 비해 너무나 크고 존귀하신 분”이신 하나님을 다 알 수 없다는 점도 인간의 이성으로 하나님 말씀을 다 이해하려고 하지 않아야 하는 이유로 제시된다.30) 그러하기에 하나님에 대해 “연구를 할 때는 우선적으로 그분의 위대하심과 나의 작음을 겸손하게 인정하고 그분 앞에 무릎을 꿇는 자세가 요구됩니다.”31) 

 

(3) 개혁주의생명신학은 성령 하나님의 조명을 구하는 기도의 신학이다. 게다가 신학의 대상을 비인격적 개념으로서의 신으로만 삼는 경우 신학 작업에서 성령하나님의 역할이 필요 없게 된다. 이는 인간이 아니라 성령 하나님이 주도하시는 신학 작업을 부정하는 결과를 낳는다. 그런데 성령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는 기도가 없어도 가능한 신학은 진정한 신학이 아니다. 성령으로 “충만해지기 위해서는 기도 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다.32) 인격적인 성령 하나님이 성경의 저자이시기 때문에, “우리는 성경을 ... 경건하고 겸손한 태도로 대해야” 한다. “우리가 성경을 읽을 때, 성령의 조명이 없이는 성경의 말씀을 깨달을 수 없”기에 성령의 도우심, 즉 기도를 해야 한다.33) “성령의 도우심이 있어야 하기에 신학자는 하나님 앞에서 늘 마음을 낮추어야 하고 예배와 찬양과 기도의 경건한 자세를 취해야” 한다.34) “기도가 없이는 우리는 너무나 쉽게 교만에” 빠진다.35) 그 경우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인간의 학문적 노력으로만 이해”하려는 잘못에 빠질 수 있다.36) 또한 “조금 능력이 생기면 그것을 자신의 욕심대로 사용하려고” 하는 사람들은 인격적이신 성령을 비인격적 에너지처럼 생각하는 사람들이다.37) 인격적인 성령 하나님을 인정하는 사람만이 자신을 낮추고 “세상 가운데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다.38)

 

 (4) 신학이 학문이 아닌 이유 “신학은 학문이 아니다”는 주장에 대해 신학이 학문이 아니냐는 반론이 있다. 신학도 학문적인 방법을 사용한다는 것이 그 이유이다. 그런데 “‘신학은 학문이 아니다’라는 주장은 우리가 하나님의 선물인 이성의 활동을 완전히 무시해야 한다는 뜻이” 아니다.39) 그러나 장종현 목사님이 지적하신 대로, “신학은 학문으로 끝나면 안 되는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신학은 학문이 아닙니다. 학문적인 방법을 사용하지만, 절대로 학문으로 끝나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40) ‘신학은 학문이 아니라는’ 주장은 신학이 제 자리로, 즉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는 자리”로 돌아갈 것을 촉구한다.41) 그런데 신학에 일부 학문적 요소가 있다고 하더라도 그 이유 때문에 신학을 학문으로 규정해야 한다는 결론은 나오지 않는다. 가령 생물학의 연구대상인 생물은 물리학의 법칙에 의해 설명될 수 있는 요소를 갖고 있다. 예를 들어 생물도 무생물처럼 일정 공간을 차지하고 있으며 중력의 영향을 동일하게 받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생물 연구를 물리학이라 부르는 사람은 없다. 물리학적 연구가 생물학적 연구의 일부를 차지한다고 해서 생물학을 물리학이라 불러서는 안 되듯이, 신학이 일부 학문적 방법을 사용한다고 해서 신학을 학문이라 불러서는 안 된다. 그런 의미에서 신학은 학문이 아니다. 장종현 목사님에 따르면 “신학은 그리스도의 영적 생명력으로 충만한 신학, 복음의 진리를 증거하는 신학이 되어야” 하기 때문에 “학문이 아니라 생명이요 복음이다.” “신학은 ... 전문적인 신학자들의 전유물”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하는 모든 사람이 공유”하는 것이다.42) 그러하기에 “개혁주의신학이 아무리 좋은 것이라고 해도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이 빠진 학문적 노력에 불과하다면, 사람을 살리는 신학이 되지 못한다. ‘오직 성경’(sola scriptura)을 외친다 해도 성경을 인간 이성의 잣대로 평가한다면,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 삶을 지배하지 못하게 된다. ‘오직 그리스도’(solus Christus)를 말하면서도 우리의 삶 속에서 그리스도께서주인이 되시지 않으신다면, 우리의 신앙은 껍데기뿐인 죽은 신앙에 지나지 않는다. ‘오직 믿음’(sola fide)으로 구원을 얻는다고 하면서도 우리가 성령 안에서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지 않으면, 그것은 하나의 신념(信念)으로 추락하고 만다. ‘오직 은혜’(sola gratia)를 부르짖으면서도 우리가 자기부인과 용서를 실천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자기자랑과 교만을 앞세움에 지나지 않는다. 이런 일을 하는 자는 자신의 이익과 명예를 위하여 일할 뿐, ‘오직 하나님께 영광’(soli Deo gloria)을 돌려드릴 수 없다.”43) 장종현 목사님이 개혁주의신학의 “5대표어”가 자신의 삶과 사역에 실천적으로 큰 영향을 끼쳤다고 말씀하시면서 ‘해불양수’(海不讓水)가 자신의 삶을 잘 드러낸다고 밝히시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44) 장종현 목사님이 개혁주의생명신학이 “개혁주의신학의 생명을 끌어올리는 마중물”이 되어야 한다고 강조하시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45) 

 

(5) 성경적 지식 개념 이와 관련하여 지식 개념이 성경적 관점에서 새롭게 제시된다. 철학과 일반 학문에서 지식은 개념과 정의를 통해 연구대상을 파악하는데서 성립한다. 진리는 인간 이성과 경험에 의해 파악되는 비인격적 대상으로 이해된다.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 진리이며 따라서 진리는 비인격적 대상이 아니라 인격이다. 따라서 하나님을 아는 지식인 신학은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며,46) 단순히 지적으로 무엇인가를 파악하는 지식이 아니라 진리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인격적으로 만나고 그분께 신뢰하고 그분께 순종하고 그분과 신비적 결합을 이루는 일이다. 이와 관련하여 요한계시록 3장 20절이 그 근거구절로 제시된다.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47) 그러하기에 “‘아는 것’은 학문적으로만 아는 것이 아니라 참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영적으로, 인격적으로 알아서, 결국 생명을 받아 영생을 누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학은 생명을 받고, 생명을 주는 신학이어야” 한다.48) 이치에 맞는 것을 추구하는 학문만으로는 “우리를 변화시켜 주고 회개시켜주고 새사람이 되게 하고 거듭나게” 하지 못한다. 그런 학문만으로는 “자신을 철저히 부인하고 십자가의 능력을 힘입어 자신을 온전히 희생하고자 하는 열정”을 주지 못한다.49) 온전한 지식은 하나님과 관계를 맺는 영적 체험을 통한 지식이어야 한다. 이와 관련하여 장종현 목사님은 모태신앙인의 문제점을 본인에게 체험이 없다는데서 찾으신다.50) 인격이신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일반적 지식과 다르기 때문에, 그 지식이 우리 삶에서 하는 역할도 달라진다. 그 지식은 생명을 지닌 지식이기에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과 사랑을 우리에게 불러일으킨다. 하나님에 대해 배우고 아는 지식은 머리에 머물지 않고 가슴으로 내려와서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분께 순종하고 경배하도록 한다. 그 결과 하나님을 아는 사람들은 “변화를 받고 진실한 삶을 살아서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떳떳한 주의 종이” 된다. 이것이 바로 진정한 개혁이다. 이런 개혁이 일어날 때 개혁주의신학은 죽은 신학이 아니라 생명을 지닌 신학이 된다.51) 바로 이런 신학이 개혁주의생명신학이다. 이런 신학을 지닐 때 개혁주의신학의 사변화 때문에 생긴 교회의 끝없는 분열도 극복할 수 있을 것이다.52) 

 

(6) 참된 지식은 하나님 말씀에 대한 순종에서 나온다. 그런데 인격이신 하나님에 대한 지식은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우리에게 온다. 그러하기에 하나님을 알려면 하나님의 계시로서 우리에게 오신 예수님의 말씀을 읽어야 한다. 그냥 눈으로 읽고 머리로만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말씀을 지키고 순종할 때 진리의 영이신 성령을 체험하고 그분의 인도를 받게 된다.”53) “‘오직 믿음’으로 구원받은 우리의 삶속에 순종의 열매가 있어야”54)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를 통해 예수님은 우리 안에 많은 착한 일들을 이루시며, 무엇보다 우리의 인격을 변화시키신다.55) 개혁주의생명신학이 “오직 성경으로”를 외치며 신학공부의 기초를 하나님의 말씀에서 찾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목회자가 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성경에 능통한 자가 되어야” 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56) 그러하기에 장종현 목사님은 오늘날 유럽이나 미국에서 신학자들이 많은데도 불구하고 교회 문을 닫는 이유를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 자체보다 신학자들의 학문적 연구를 더 중요시하는데서 찾으신다.57) 그러한 학문적 연구는 “지엽적이고 전문화된 분야에 지나치게 많은시간을 투자하여”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성도들에게 영적 유익을 가져다주는” “신학의 일차적 목표”를 다하지 못하는 경향이 있다.58) 이처럼 성경 자체보다 학자들의 학문적 연구를 더 중요하게 여기는 시대는 “각자 자기 기준과 자기 삶의 목표를 중시하면서 하나님을 우롱하는 이 시대”로 규정된다. 자기 기준이나 잣대를 가지고 하나님의 말씀을 재단하려는 태도를 버리고 “하나님 앞에 진정으로 겸손하고 순종”해야 하는 이유는 하나님의 말씀이 인격이라는데 있다.59) 하나님의 말씀은 일반 학자들이 연구대상으로 삼는 평범한 텍스트가 아니다. 성경 말씀은 인격이신 하나님의 인격적 계시이므로, 우리가 그 앞에서 경건하게 옷깃을 여미고 그 권위를 인정하고 찬양하면서 순종해야 하는 인격이기도 하다. 하나님의 말씀은 인간의 이성이나 지성으로 완전히 고정시키거나 파악하거나 통제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니다. 그러하기에 장종현 목사님은 신학도들을 향하여 “자기 지식을 믿지 말기를 바라고, 자신이 하나님 말씀의 대변자라는 것을 알기” 바란다고 권고하신다. 그래서 우리 자신이 하나님 말씀을 지배하기보다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 자신을 “지배하고 조절할 수 있도록 자기 자신을 비워두”어야 한다.60) 이것이 바로 “바른 성경읽기를 통해 바른 신학을 세워갈 수 있는 것이 분명”한 이유이다.61) 목회자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 이런 태도를 취할 때 교회를 무너뜨리는 신학이 아니라 교회를 세우는 신학을 할 수 있다.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를 세우는 신학이야말로 진정한 신학이다. 그러하기에 “개혁주의생명신학 운동은 한국 교회를 그리스도의 영적 생명력이 넘치는 교회로 만드는 운동”62)이 되고자 한다. 개혁주의생명신학이 한국 교회를 올바로 세워나가기 위해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무능함을 고백하고 겸손히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는” 신학회복운동을 실천하고자 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63) “ 그런데 ‘오직 성경’을 기초로 삼는다고 해서 모든 사람이 참된 신학을 연구하는 것은” 아니다. “참된 신학을 하기 위해서는 성령의 감동하심을 받는 것, 즉 성령으로 충만해지는 것이 필요”하다.64) 

 

(7) 하나님 말씀에 대한 순종은 실천으로 나타난다. 그런데 신학은 인격이신 예수 그리스도께 순종하는 지식이기 때문에, 이 지식은 이론에 머물 수 없다. 따라서 실천이 없는 신학은 개혁주의생명신학이라 할 수 없다. “성경대로 생각하고, 성경대로 말하고, 성경대로 가르치더라도, 성경의 말씀이 자신의 행위와 삶으로 나타나지 않으면, 아무런 소용이 없”기 때문이다.65) 이와 관련하여 장종현 목사님은 예수님의 생명이 나타날 수 있는 개혁주의생명신학의 실천을 말씀과 기도 운동에서 제안하신다.66) “개혁주의생명신학 실천운동은 성경이 제시해주고 있는 원리에 따라 실천되어야” 하며, 성경을 깨닫기 위해서는 성령 하나님의 조명을 구하는 기도를 해야 하기 때문이다.67) 무엇보다 “예수님의 생명이 나타나려면 우리의 육적인 것이 죽”는 훈련을 해야 한다. 강의실과 경건훈련, 생활훈련 등을 통해 우리의 육적인 것을 “십자가의 능력으로 소멸하는 훈련을 해야” 한다.68) “우리의 언어생활 가운데 성령의 다스리심이 나타나고 우리의 행동 하나하나에 그리스도의 생명의 흔적이 나타나기를 힘써야” 한다.69) 이를 통해 인간의 죄 된본성이 드러나지 않도록 하고 오직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드러나야 한다. 신학자의 내면이 생명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로 충만할 때 다른 사람들에게 생명을 나누어줄 수 있는 사람이 된다. 이는 자신이 죽고 예수님의 생명이 살아나는 훈련을 하는 사람만이 온전한 선교의 사명을 감당할 수 있다는 뜻이다. “믿고-믿게 하고-진리 안에서-하나되어-자유케 하자는” 백석학원의 교훈이 이루어지려면,70) 무엇보다 “믿게 하고”라는 선교적 사명을 다하기 위해서는 첫 단계인 “믿고”가 예수 그리스도께 순종하는 개혁주의생명신학의 실천을 통해 이루어져야 한다. 이렇게 “우리 모두가 예수님을 기준으로 삼아 자신의 생각과 기준을 포기한다면”, “자신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에 기준을 둔다면” 진리이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가 되어 “같이 살 수 있고 같이 일할 수 있”다. “‘나’라는 존재가 살아 있으면 하나님이 함께 하여 일할 수 있는 자리가 없지만, ‘나’라는 존재가 포기되는 순간 하나님이 일하시는 공간이 마련”되기 때문이다. 이러할 때 우리는 우리의 생각과 기준으로부터, 자신의 경험과 학문으로부터, 우리의 욕심과 죄악으로부터 자유롭게 되며, 하나님께서 성령 하나님을 통해 일하시는 성전이 된다.71) “그리스도인의 진정한 자유는 하나님의 뜻을 위하여 자기 자신을 하나님께 굴복시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우리의 삶의 표준이 우리 인간 자신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 될 때72) 우리는 예수님의 참된 제자가 될 수 있다. 예수님의 말씀에 거하고 진리를 알고 진리를 통해 자유하게 될 때 예수님의 참된 제자가 되기 때문이다.73) 그러하기에 이승구 교수도 “오직 하나님의 말씀에만(Sola Scriptura!) 근거해서 우리의 삶을 살아 나가야” 한다고 강조한다.74) 예수님의 말씀에 거한다는 것은 그분의 말씀에 순종한다는 것이며, 진리를 안다는 것은 진리의 영이신 보혜사 성령님을 통해 예수님께서 우리 “자신의 구원과 생명이 되시는 분이심을 가슴으로 확실하게 체험하고 그분을 전적으로 신뢰하는 것”이다.75) 개혁주의생명신학이“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사람을 변화시키며, 우리 속에 그리스도의 영을 회복시키자는”영적생명운동을 실천하고자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76) 그러한 “실천할 수 있게 해주시는 분이 우리 안에 살아 계신 그리스도이”다.77) 3. 개혁주의생명신학의 실천: 신학교와 교회 그런데 개혁주의생명운동의 실천은 개인에 머물지 않고 교회와 가정, 학교, 학문연구에까지 확장된다.78) 교회에서는 살아 있는 목회자에게, 가정에서는 살아 있는 부모에게, 학문연구에서는 살아 있는 선생과 대학 모두에게 그리스도께서 주인이 되셔야 한다. 장종현 목사님은 우선 개혁주의생명신학의 실천을 신학교와 신학교육에 적용하신다. “신학은 언제나 교회를 위한 것이어야” 한다. 따라서 신학 교육의 성패는 교회가 예수님의 생명으로 사는 교회가 되느냐 여부에 달려 있다.79) 그런데 생명의 능력을 갖추지 못한 채 신학교를 졸업한 목회자들은 죽어가는 사람들을 목회 현장에서 살리고 치유하기는커녕 자기의 목숨도 잃을 수 있다. 그러하기에 신학교육에서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의 능력을 깨닫고, 날마다 생활속에서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자신의 체험을 통해서 경험하고 사는 훈련을 해야” 하는 일이 중요하다.80) 이를 위해 신학교에서도 신학자들이 생명이신 그리스도로 충만해야 하며, 자신들이 체험적으로 아는 그리스도를 신학생들에게 인격적으로 가르쳐야 한다. 그러하기에 장종현 목사님은 “개혁의 일차적인 대상은 세상이 아니라 교회이며, 교회 개혁 내용의 일차적인 과제는 도덕이 아니라 신학이다”는 마이클 호튼의 말을 인용하시면서, “세상을 바꾸려고 하기 전에 우리 자신이 먼저 변화되어야” 하며, “우리의 행동을 바꾸기 이전에 우리 안에 있는 성경적이지 않은 생각들을” 먼저 “내어버려야” 한다고 주장하신다. 이는 “세상을 변혁시키기 위해 세상 안에 존재”하는 교회가 먼저 변화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는 말이다.81) 

장종현 목사님은 “개혁주의생명신학을 선언하게 된 근본적인 이유는 신학교에서 신학을 학문으로 가르침으로써, 예수 그리스도의 영이 말씀을 통해 우리 자신을 지배하지 못하는 데있습니다”고 밝히신다.82) 신학교에서 그리스도의 말씀을 자신의 삶에 인격적으로 적용하는 훈련을 쌓은 목회자가 교회를 섬길 때 교회 내에서도 하나님 말씀의 성육신이 이루어질 수 있다. 그러할 때 비로소 하나님 말씀에 굳건히 기초하면서 흔들림 없이 성장하고 성숙하는 교회가 이루어질 수 있다.83)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주되심을 선포하는 복음이 우리의 모든 삶에서, 우리의 구체적인 삶에서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도 선포해야 한다. 달리 말하면 교회는 우리 삶의 개인적 차원과 사회적 차원 모두에서 하나님 나라의 도래를 선포해야 한다. 그러할 때 교회는 “하나님 나라와는 무관한 자기 충족적 프로그램들과 자기 이익만을 추구하는 세속 기업으로 전락”84)하지 않을 것이다. 무엇보다 개인이 가족과 마을, 동업 집단 등과 같은 전통적인 공동체가 제공하는 유대관계를 잃어버리고 유목민(nomad)처럼 많은 곳으로 이동하며 대체가능한 하나의 부품으로 여겨지는 글로벌 시대에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를 동일한 주님으로 모시는 새롭고 참된 가족 공동체를 제공해야 할 의무가 있다.85) 

이 일을 위해 목회자는 우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온전히 선포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 목회자는 복음을 성도들의 요구와 필요에 맞추어 변형시켜서는 안 되며, 사람들로 하여금 복음에 합당하도록 살아가도록 도전해야 한다. 목회자는 목회의 초점을 인간의 요구에 두지 않고 하나님의 뜻에 두어야 한다. 그런데 오늘날 목회 현장에서 목회자는 교인들로부터 인정받는 일에 매우 민감하다. 비록 목회자가 교인들의 필요에 대해 민감해야 하지만, 우리는 목회자가 자신의 목회사역의 성패 여부를 교인들의 평가에 둘 때 교회의 주인은 그리스도가 아니라 (때로 옳지 못한 기대와 요구를 하는) 교인들이 될 수 있다는 점을 잊지 않아야 한다.86) 목회자가 교회 안에서 하나님의 뜻에 충실할 때 그의 지도력은 하나님의 권위를 반영할 수 있다. 목회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잘 가르치는 자이어야 그 지도력을인정받을 수 있다.87) 그런데 목회자가 하나님의 뜻을 설교나 가르침을 통해 선포하고 교육하는 것만으로 충분하지 못하다. 성경 말씀을 깊이 연구하고 묵상함으로써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묻고 깨닫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경험을 해 보아야 하기 때문이다. 우선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알아야 그 뜻에 순종할 수 있다는데 동의할 수 있다. 히브리서 11장 6절에 따르면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한다. 이 구절에 따르면 우리가 우리가 하나님이 살아계시며 상급을 주시는 분이심을 (지적으로도) 알고 믿을 때 살아계신 하나님께서 주실 상급을 바라보며 순종의 삶을 살 수 있다. 요한일서 4장 2절에 따르면 “이로써 너희가 하나님의 영을 알지니 곧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신 것을 시인하는 영마다 하나님께 속한 것이”다. 하나님의 영을 아는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신 것을 (지적으로도) 인정하는 사람이다. 그렇지만 동시에 우리의 지성적 지식은 윤리적 지식을 전제한다. 달리 말하자면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지적으로 아는 것으로 충분하지 못하며, 우리의 삶 속에서 그 뜻을 실천할 때 좀 더 온전하게 하나님의 뜻을 체험하고 알게 된다는 뜻이다. 요한일서 2장 3절에 따르면 “우리가 그(그리스도)의 계명을 지키면 이로써 우리가 그를 아는 줄로 알 것”이다. 요한일서 4장 8절에 따르면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이시기 때문이다. 이는 사랑을 실천하지 못하는 사람은 사랑의 하나님을 제대로 알지 못한다는 뜻이다. 요한일서 5장 2절에 따르면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의 계명들을 지킬 때에 이로써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를 사랑하는 줄을” 안다. 하나님의 계명들을 지키는 것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일이며,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를 사랑하는 법을 ‘아는’ 것이다. 로마서 12장 2절은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고 명령한다. 여기서 ‘분별하다’(dokimazein)는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순종의 경험을 통해 배워가는 것을 뜻한다. 이는 우리가 하나님 안에서 새롭게 살아가면서 삶의 변화를 체험할 때 하나님의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더 잘 식별할 수 있게 된다는 뜻이다. 목회자 후보생이 신학대학원3년 과정 동안 하나님의 말씀을 이론적으로 지적으로 다 배우고 깨닫고 난 후에 목회현장으로 내려가서 그 말씀에 순종해서 목회를 해 나간다는 뜻이 아니다. 목회자 후보생이 신학대학원 과정에서 성경 말씀을 읽고 배울 때 수업마다 배우고 깨닫는 것을 그의 삶에 적용함으로써 하나님의 뜻에 순종할 때 비로소 그 말씀의 깊고도 참된 의미를 더 깨달을 수 있다는 뜻이다. 그러하기에 목회자를 훈련하는 신학교 교육은 이론적 교육에 그쳐서는 안 된다. 비록 피곤하고 힘들지만 목회자 후보생은 목회 현장을 떠나서는 안 된다. 목회자 후보생은 신학교 교실에서 배운 것을 자신의 삶과 목회 현장에 바로 적용함으로써 그 배운 내용을 더 잘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 이는 목회자 후보생을 교육하는 신학교 교수들도 목회 현장을 떠나서는 안 된다는 뜻이기도 하다. 무엇보다 신학교 교수들은 자신의 신학을 이론적으로 자랑하는데 그쳐서는 안 되며 자신이 가르치는 내용이 자신의 삶과 목회 현장에 어떻게 적용될 수 있는지를 체험적으로 가르칠 수 있어야 한다. 신학교 교수들은 신학의 명제적 내용만 가르쳐서는 안 되며 하나님 말씀을 삶과 현장에 어떻게 적용할 수 있는지에 대한 노하우(know how)고 가르칠 수 있어야 한다. 물론 이 가르침은 목회자 후보생 편에서의 적용과 맞물려 더 효과적으로 이루어질 수 있을 것이다. 하나님 말씀에 대한 순종이 점점 더 쌓여갈 때 목회자가 하나님 말씀을 자신의 삶과 현장에 적용하는 일이 좀 더 순조로워질 수 있다. 히브리서 5장 11-14절에 따르면 유대인들은 그리스도인들이 멜기세덱에 관해 가르치는 내용을 제대로 깨달을 수 없다. 멜기세덱의 계보에 따라 오신 대제사장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그분의 뜻에 순종한 경험이 그들에게는 없기 때문이다. 그러하기에 히브리서 본문은 유대인들을 의의 말씀을 ‘경험하지’ 못해서 젖이나 먹는 미성숙한 자들로 규정하며, 그리스도인들을 ‘지각을 사용’하여 연단을 받아 선악을 ‘분변하는’ 장성한 자로 규정한다. 이는 하나님 말씀을 순종함으로써 영적으로 성숙할 때 하나님 말씀을 잘 분별할 수 있다는 뜻이다. 그런데 이러한 영적 성숙은 인간의 노력만으로 되지 않는다. 다윗처럼 하나님 말씀에 잘 순종하고 살았던 사람도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를 취했을 때 영적 눈이 멀어 자신의 살인과 간음을 어떤 방식으로 합리화했던 것 같다. 그러하기에 그는 선지자 나단이 와서 새끼 암양의 비유를 들었을 때 그 비유가 자신의 범죄를 가리키고 있음을 깨닫지 못했던 것 같다. 성령께서 다윗에게 회개의 영을 불어넣어주셨을 때 다윗은 선지자 나단이 지적하는 바를 깨닫고 그 지적에 따라 회개를 할 수 있었다.88) 

결국 목회자가 하나님의 뜻을 이 땅에 선포하고 실현하는 섬김의 종으로서 살아가려면, 하나님의 말씀을 제대로 설교하고 가르칠 수 있는 능력을 갖출 뿐 아니라 자신의 인격을 통해 그 말씀이 드러나도록 해야 한다. 그러해야 목회자 스스로 하나님의 말씀을 더 잘 이해하고 그 결과 하나님의 뜻을 좀 더 온전히 선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신자가 그리스도와 연합하는 일이 단순한 지적 동의에 그치지 않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89) 

목회자가 생명이신 하나님의 말씀을 자신의 인격을 통해 구체화함으로써 자신의 생명을 살리고 이를 통해 교인들의 생명을 살리는 일은 무엇보다 “죄에 대해 죽고 하나님에 대해사는”(롬6:11) 일을 통해 이루어진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죄에 대해 단 번에 죽으셨고 하나님에 대해 살아 계신 것처럼 목회자도 자신의 죄에 대해서는 죽어야 하며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에 대해서는 살아야 한다. 우리가 죄에 대해 죽는 일은 죄가 우리 죽을 몸을 지배하지 못하게 하는 일이며, 우리가 우리 몸의 사욕에 따르지 않는 일이며 우리의 몸을 불의를 행하는 수단으로 사용하지 않는 일이다. 이는 세상의 폭력적이고 지배적이고 억압적인 방식에 대해 무력하게 십자가에 달리심으로써 세상의 방식에 대해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는 일이기도 하다. 뉴비긴이 지적하듯이, “하나님의 능력과 의와 사랑이 이 죄 많은 세상에 나타날 때는 연약함과 죽음의 형태를 지닐 수밖에 없다.” 우리가 세상의 방식에 대해 죽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좇아 우리에게 맡겨진 십자가를 지는 일이기도 하다. 그러할 때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다시 살리심으로써 세상 방식에 대해 승리를 선포하신 것처럼 우리도 그리스도 안에서 다시 살리심으로써 세상 방식에 대한 승리를 선포하신다. 비록 생명이 죽음을 통해 주어진다는 사실이 역설처럼 보일 수도 있지만, 하나님의 통치는 죄 많은 이 세상에서 세상 방식에 대한 패배와 죽음의 형태로 나타날 수 있다.90) 김기현의 지적처럼 예수의 십자가는 악으로 악을 이길 수 있다는 세상방식의 유혹을 거절하는 것이다. 이를 통해 교회는 세상과는 다른 삶의 방식, 즉 십자가의 삶의 방식을 세상을 향해 증언하는 역할을 한다.91) 목회자가 목회 현장에서 하나님의 뜻을 온전히 실현하며 하나님의 통치를 구현할 수 있는 방법도 세상 방식에 대해 죽는 일이다. 한국 사회가 한국 교회와 목회자를 향해 바라는 바도 “교회가 세상과는 다른 방식으로 살아라!”, “세상 방식에 대해서는 죽어라!”이다. 목회자가 자신의 죄에 대해 죽고 세상 방식의 목회와 통치에 대해 죽게 된다면, 예수께서 종의 모습으로 성육신하셔서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고 십자가에서 무력하게 죽으신 것처럼 세상방식에 대해 죽는다면, 하나님께서 목회자와 그가 섬기는 교회를 다시 살리실 것이다. 이는 교회가 수장(水漿)을 상징하는 세례를 통해 보여주고자 하는 바이다.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그리스도와 함께 사는 것이다. 예를 들어, 성경이 말하는 완전한 사랑은 서로를 위하며 자기이익을 추구하지 않는다. 그런데 그 사랑을 실천하는 사람은 자기이익만을 추구하는 이 세상의 사랑방식 앞에서 상처를 입으며 손해를 입게 된다. 그러나 그 손해를 감수하면서 성경이 말하는 온전한 사랑을 실천하는 사람은 이 왜곡된 세상에서 겪는 고난을 통해 그리스도의 십자가을 지는 사람이다.92) 그런데 이렇게 거듭나는 일은 우리의 힘으로 할 수 없는 일이다. 오직 성령께서 이 일을 행하실 수 있다. 또한 하나님에 대해 사는 일은 지금은 불가능하고 미래에만 가능한 일이 아니다. 성령께서는 지금도 교회 공동체를 통해 그리스도의 부활을 맛보게 하신다. 세상을 비록 세상 방식대로 움직이면서 죄에 대해 죽지 않는 모습을 보이지만, 교회 공동체는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죽음으로써 세례를 받는 그리스도인들을 통해 죄에 대해 죽고 하나님에 대해 사는 경험을 한다. 이를 통해 교회 공동체는 앞으로 다가올 미래의 하나님 나라의 모습을 세상을 향해 공동체적으로 구체적으로 증거 하는 증인의 역할을 감당하게 된다. 죄의 방식이 지배하는 세상 속에서 죄에 대해 죽음으로써 하나님에 대해 살아가는 공동체가 바로 교회 공동체이다. 교회 공동체는 그리스도인들이 죄의 방식에서 완전히 벗어나 하나님에 대해서 온전히 사는 미래의 하나님 나라를 소망하면서 지금 이곳에서의 고난과 시련을 견디어낼 수 있다. 세상의 관점에서 볼 때 교회공동체는 미약하고 무력하고 죽어 있는 공동체이지만 하나님의 관점에서 볼 때 살아 있는 공동체이다. 이렇게 온전한 교회공동체가 되려면 목회자부터 죄된 본성의 지배를 받는 자아를 죽이고 죄에 대해 죽으시고 하나님에 대해 사신 그리스도가 자신 속에 사시도록 해야 한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와 연합하는 삶을 사는 그리스도인과 교회 공동체의 모습이다.93)

이를 통해 교회 공동체는 사람들에게 십자가의 복음을 전할 수 있다.94) 그런데 목회자가 그리스도인의 온전한 삶을 드러내는 일은 목회 윤리 속에서도 이루어진다. 설교와 가르침, 권면 등 역할 때문에 말을 많이 해야 하는 목회자는 그 말과 자신의 삶 사이에 큰 괴리를 경험하기 싶다. 그런데 교인들은 목회자로부터 언행일치의 삶을 기대한다.95) 이러한 삶은 하나님의 말씀이 어떻게 한 인격과 그의 삶에서 구체적으로 적용되는지를 보여주는 하나의 모범이 될 수 있다. 실제로 아이들이 부모의 가르침에 따르기보다 부모의 언행일치적 삶을 따르는 것처럼 교인들은 실제로는 목회자의 삶을 통해 그리스도인의 삶을 배우는 경향이 있다. 따라서 비록 목회 윤리 강령이나 규정이 필요하기는 하지만 그것으로 충분하지는 않다. 목회 윤리는 하나님의 말씀이 목회자들의 구체적인 삶에서 성육신할 때 그 빛을 발할 수 있기 때문이다. 목회 윤리와 관련하여 소위 의무론적 명령윤리만으로 충분하지 않으며 목회자의 성품을 계발하고 변화시키는 덕 윤리가 필요한 까닭이 여기에 있다.96) 그러할 때 교회 교인들도 기독교 윤리의 특정 규칙들의 준수로 그들의 삶을 평가하는데 그치지 않고 그리스도의 성품에 따라 자신들의 성품을 내면적으로 바꾸어나가는 일에 나설 것이다. 그러할 때 교회는 목회자의 성품 변화를 통해 교인들에게 예수의 성품을 훈련하는 장소가 될 것이다.97) 

 

이를 위해 신학교육은 목회자 후보생이 하나님의 말씀을 자신의 삶에 구체적으로 적용함으로써 하나님의 말씀을 체험적으로 알 수 있도록 하는 훈련을 제공해야 한다. 특히 기독교윤리 과목은 윤리 규칙을 중시하는 명령 윤리만 강조해서는 안 될 것이다. 일반적이고 추상적인 윤리 규칙을 강조하는 것만으로는 목회자 후보생들이 그 규칙을 자신들의 삶에 어떻게 구체적으로 적용해야 하는지 충분히 알 수 없기 때문이다. 현대사회의 경제적, 정치적,사회적 구조가 매우 복잡하기 때문에 그 속에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은 일반적인 윤리 규칙만으로는 어떻게 살아가며 어떻게 결정해야 하는지 알기 쉽지 않다. 따라서 신학교에서 기독교 윤리 과목은 현대 사회의 복잡한 상황을 제대로 파악하며 하나님의 말씀과 그 상황을 제대로 연결하는 훈련을 시킬 필요가 있다. 에디 깁스가 지적하듯이, 선교적 교회는 하나님의 불변하는 말씀을 계속 바뀌고 있는 상황과 시대와 연결하여 이 시대를 향한 하나님의 뜻을 밝히는 일을 해야 하기 때문이다.98) 그래서 깁스에 따르면 신학교육은 성경의 내용을 현대의 상황에 적용하는 기술을 제공해야 한다. 그러하기에 우선 신학교는 목회자 후보생에게 성경을 잘 알도록 교육시켜야 하며, 아울러 성경 말씀을 오늘날의 상황에 적합하게 적용하는 해석 기술을 갖추도록 해야 한다.99) 그런데 문화와 상황이 계속 변화를 겪기 때문에 신학교육은 학부 4년이나 신대원 3년에 그쳐서는 안 된다. 교회와 신학교가 평생교육을 위한 파트너를 맺어 신학교는 현장에 있는 목회자들에게 현장과 연결되는 재교육을 계속 시킬 필요가 있다.100)

 

그러하기에 마치 경영학 교수가 산업체와 계속 대화하면서 산업체에 사례연구와 컨설팅(consulting)을 제공하고 그것을 강의시간에 활용하듯이 신학교수들도 단순히 학술적인 연구만 추구할 것이 아니라 지역교회 목회자들과 협조관계를 유지하면서 현장목회에 필요한 연구와 컨설팅, 훈련을 제공할 필요가 있다.101) 신학교수의 연구가 학문을 위한 학문에 그쳐서는 안될 것이다. 예를 들어 기독교 윤리를 가르치는 교수는 성경으로 돌아가서 성경에 나타난 사건들과 인물들이 구속사에서 어떤 위치를 차지하며 각 인물들이 구체적인 구속사, 즉 내러티브(narrative) 속에서 하나님 말씀을 어떻게 적용해 나갔는지 살핌으로써 그 내러티브 속에 자신을 집어넣어 그 내러티브를 오늘날 자신의 내러티브로 만드는 작업을 해야 한다. 한 마디로 말하자면 이는 기독교 윤리가 내러티브 윤리의 요소도 포함해야 한다는 뜻이다. 성경 이야기를 지금 여기에서 살아내는 신자의 삶이 훌륭한 성경 해석인 셈이다.102) 또한 성경속의 공동체들이 구속사에서 걸어갔던 이야기들 속에 자신이 속한 교회 공동체를 집어넣음으로써 하나님의 말씀이 오늘날 교회 현장에 적용되도록 해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을 공동체 차원에서 적용하는 일이 매우 중요하기 때문에 신학교육에서도 개개인에 대해서만 점수를 주는 시스템을 버리고 소그룹 등 공동체로서 하나님의 말씀을 공동체적 삶의 경험과 연결시키는 공동체적 작업을 유도할 필요가 있다.103) 그런데 이렇게 하나님의 일반적 규범들을 구체적인 상황 속에 적용할 때 나 자신이 그 적용대상에서 제외되어서는 안 된다.104) 일차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적용해야 할 대상은 그 상황 속에 있는 다른 사람이 아니라 나 자신이기 때문이다. 목회자가 하나님 말씀을 선포하면서 그 말씀을 성도들에게만 적용시키고자 할 때 비록 성도가 유익을 얻을지는 모르지만 목회자 자신은 하나님의 말씀으로부터 유익을 얻지 못한다. 비록 설교자가 설교하지만 설교자를 통해 말씀하시는 분이 하나님 자신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적용해야하는 사람은 성도들뿐 아니라 목회자 자신이기도 하다. 또한 설교자 자신이 하나님의 말씀을 자신의 삶에 적용함으로써 그 말씀의 깊은 의미를 체험적으로 깨닫고 그 말씀을 우리의 구체적 삶과 상황에 적용하는 법을 깨달을 때, 그 설교는 성도들에게도 동일한 순종과 깨달음을 낳을 수 있다. 목회자가 하나님 말씀을 자신의 삶에 적용하지 않는 모습을 보여줄 때 목회자의 훌륭한 설교는 목회자의 진면모를 잘 알고 있는 성도에게는 도리어 역효과를 낳을 수도 있다. 하나님의 말씀은 일차적으로 말씀을 전하는 설교자의 성품을 변화시켜야 한다. 이런 점에서 기독교 윤리는 인간의 성품을 중시하는 덕 윤리(virtue ethics)의 요소도 갖추어야 한다. 그런데 교회 공동체가 있어야만 목회자와 성도의 성품이 훈련받을 수 있다. 덕 윤리에서 개인의 도덕적 성품과 관련하여 공동체와 전통이 중요함을 강조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이 성품은 공동체의 역사와 내러티브(이야기) 속에서 형성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성도는 교회 생활을 통해 그리스도의 성품을 습관화함으로써 그분의 성품을 자신의 성품으로 내면화한다. 그래서 어떤 상황이 주어질 때 공리주의자들처럼 공리 계산을 하지 않고 의무론자들처럼 그 상황에 어떤 윤리규칙을 적용해야 하는지를 고민하지 않고 즉각적으로 자연스럽게 그 상황에 대해 윤리적인 반응을 보일 수 있다.105) 성도의 성품은 하나님 말씀이 성도의 마음 판에 새겨진 것이라 할 수 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육신하셔서 자신의 삶과 죽음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계시하신 것처럼, 교회 공동체 안에서 목회자와 성도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자신의 삶에 적용함으로써 하나님의 뜻을 인격적이고도 구체적으로 세상에 드러내어야 하는 사명을 지니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세상의 빛으로 보내셨다. 일반적으로 목회자는 목양을 하는 목자로 불린다. 그러나 양들인 성도들을 양육하는 것은 목회자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목회자도 그리스도가 양육하시는 양들 중 하나라는 사실이 매우 중요하다. 이는 목회자도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양육되어야 한다는 뜻이다. 그런데 성도들은 목회자를 예수 그리스도와 같이 완전한 인격을 지닌 목자로 여기는 경향이 있다. 그러하기에 목회자들은 이러한 기대를 하는 성도들을 실망시키지 않기 위해 자신의 솔직한 모습을 드러내지 못하는 경향이 있다.106) 

 

이는 목회자들이 자기 스스로를 돌아보는데 익숙하지 못하도록 하여 목회자들이 때로 부적절한 처신과 교만을 보이는 결과를 낳기도 한다. 그래서 목회자 세계 밖에 있던 사람은 목회자 세계를 접했을 때 목회자들이 매우 권위적이며 교만하고 일방적이라는 인상을 받기도 한다. 하지만 목회자가 자신의 솔직한 모습을 드러냈을 때 목회자에게서 일종의 도덕적 대리만족을 추구하는 성도들은 그 목회자의 권위와 지도력을 부정하는 경향을 보이기도 한다. 그래서 한국교회 목회자들은 자신들의 솔직한 모습을 드러내고 자신들의 영적 변화를 모색할 수 있는 기회를 갖기가 쉽지 않다. 그래서 목회자들은 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상담하고 도와주고 가르치지만 정작 자신은 하나님 말씀을 자신에게 적용하고 자신의 성품을 바꾸어나가는 기회로부터 소외되기 십상이다. 많은 군중 속에 있지만 절대고독을 경험하는 것이 한국교회 목회자들이다. 그래서 목회자들 사이에 신뢰할 수 있는 영적 멘토(mentor) 시스템 구축이 시급하다. 서로 신뢰할 수 있는 목회자들이 하나님 말씀을 각자의 삶에 적용하는 일을 서로 도울 수 있어야 한다. 목회 현장의 고충을 충분히 공감하는 목회자들끼리 먼저 멘토 시스템을 구축하는 일이 중요해 보인다. 물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함으로써 자신의 삶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동시에 하나님의 말씀을 더욱 더 깨달아가는 과제는 목회자에게만 주어진 과제는 아니다. 교회구성원들은 교회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을 실현하기 위해 교회 공동체의 구성원으로서 각자가 맡은 역할을 온전히 감당할 필요가 있다. 하지만 이는 모든 사람이 중보기도와 전도, 사회 정의의 추구, 병자 심방, 구제, 성경 연구 등을 같은 비중을 두어 동일하게 해야 한다는 뜻은 아니다. 각 사람은 시간과 능력, 자원에 있어 한계를 지니고 있다. 따라서 각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해야 할 의무를 지니지만 그 모든 의무들을 동시에 행할 수는 없다.107) 예를 들어 필자는 국제학술대회 기독교윤리 분과에서 논문을 발표하는 동시에 아프리카에서 병자를 고치는 선교사역을 할 수는 없다. 필자는 하나님과는 달리 편재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또한 필자는 의과대학에서 의료훈련을 받지 않았기 때문에 의료선교를 제대로 할 수 없고 그러하기에 병든 사람을 치료하는 사랑의 실천을 해야 하는 의무를 충분히 감당할 수 없다. 그 대신 필자는 기독교 윤리를 좀 더 공부해서 그리스도인들과 교회에 조금이나마 도움을 주고자 한다. 달리 말하자면 각 그리스도인은 하나님께서 교회 구성원들 각각에게 달리 주신 은사에 따라 각자의 의무들에서 우선순위를 정할 수 있다. 이는 하나님 말씀에 대한 순종이 각 개인 차원에서보다 교회 차원에서 이루어져야 하며 각 개인은 언제나 교회 구성원으로서 교회가 하나님 말씀을 온전히 순종하는데 일익을 담당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물론 이는 각 그리스도인이 공통되게 순종해야 하는 의무가 있음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 말씀을 순종하는 일은 교회를 떠나서는 생각되기 어렵다고 지적하고 있을 뿐이다. 결국 우리의 정체성은 교회의 지체와 구성원이라는 데서 발견된다는 뜻이다.108)

 

우리가 어떻게 (모인) 교회 공동체에 이바지하며 또한 (흩어진) 교회의 일원으로서 이 세상에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가 우리의 삶의 의미를 결정한다는 뜻이다. 흔히 말하는 ‘교회 중심의 삶’이라는 구호도 이와 맥락을 같이 한다. 이와 같이 목회자를 비롯해서 교회 구성원들이 성령의 다양한 은사들(charisma)을 가지고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의 지체들로서 각자의 의무와 역할, 사명을 다할 때 교회 구성원들은 하나님의 뜻을 더 깨달을 수 있다. 이는 교회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공동체가될 때 하나님의 말씀을 온전히 이해하고 선포하는 공동체가 될 수 있다는 뜻이다. 실제로 일반 교육현장에서도 실습이 교육에 있어 매우 중요함을 강조하고 있다.109) 이는 교회 구성원들이 각자의 은사와 직분을 사용해서 서로를 섬김으로써 각 개인과 교회를 향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온전히 체험적으로 깨닫는다는 말이기도 하다. 그러하기에 주일 오전예배만 참석해서 예배를 ‘구경하듯이’ 참석하고 교회에서 아무런 봉사를 하지 않는 성도는 주일 예배때 선포되는 하나님의 말씀을 온전히 이해하지 못했다는 평가를 받을 수 있다. 그러하기에 인터넷 시대에 인터넷이나 방송으로 유명 목사님의 설교를 듣기만 하면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는데 충분하다고 하는 주장도 근거가 약하다. 우리는 교회 공동체의 한 지체로서 하나님의 뜻에 따라 교회 공동체를 섬길 때 비로소 하나님의 말씀을 체험적으로 알 수 있기 때문이다.110)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에 온전히 순종하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다. 이는 성령 하나님의 도움으로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온전히 있을 때 가능한 일이다. 이와 관련해서 기도가 중요하다. 하나님께서 우리 각 개인과 우리 교회 공동체 안에 임재하심으로써 하나님의 통치를 이루시기를 바라는 것이 참된 기도이다.111) 성령 하나님께 의지하여 하나님께 기도함으로써하나님의 말씀을 각 개인과 교회 공동체 안에 적용하려는 노력을 하는 일은 결국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고 가르치며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이웃과 사회를 섬기는 교회의 본질적 사역을 다하는 일이기도 하다.112) 4. 나가는 말 이 글에서는 개혁주의생명신학이 무엇인지, 개혁주의생명신학의 관점에서 목회자 윤리를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지 살펴보고자 했다. 개혁주의생명신학은 개인과 사회, 교회를 살리는 생명은 학문으로서의 신학에 있지 않고 오직 복음에 있다고 주장한다. 그동안 개혁주의신학이 사변화되고 학문에만 머무는 경향이 있다고 보고서 개혁주의생명신학은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개혁주의신학을 학문으로부터 실천으로 옮기실 수 있다고 주장한다. 개혁주의생명신학에 따르면 하나님의 말씀이 하나의 명제에 머물러 있으면 아무 힘과 생명이 없지만 우리의 삶과 공동체에 구체적으로 적용될 때 생명력을 갖는다. 오늘날 한국사회로부터 따가운 눈총을 받고 있는 한국교회가 다시 새롭게 서서 교회다워지는 것은 그리스도의 복음에 충실하게 사는 삶을 살아내는 것이다. 각 그리스도인과 교회가 복음에 충실하게 살 때 세상의 빛으로서 그 사명을 감당하며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세상에 증거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한 점에서 “교회의 일차적인 사회적 과제는 교회가 되는 것이다”라는 하우어와스(Hauerwas)의 주장을 경청할 필요가 있다.113)

 

하우어와스에 따르면 교회 자체는 “그리스도의 이야기를 따라 사는 하나님 나라의 삶을 증언함으로 ... 세상을 향한 정치적 대안이 되어야 한다.”114) 이승구의 지적처럼 교회의 근본적 사명은 하나님 나라를 이렇게 증언하고 보여주는데 있다.115) 교회 구성원들은 이 세상에서 거룩하게 구별된 사람들이라는 자기 정체성을 의식하면서 삶을 통해 그 정체성을 드러내야 하는 의무를 지닌다.116) 그렇다고 해서 교회가 문화의 변혁자로서 역할을 해야 한다는 개혁주의신학의 관점을 포기하는 것은 아니다. 교회가 하나님의 교회로 온전히 설 때 세상 문화를 변혁시킴으로써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어가는 전초기지 역할을 할 수 있다고 주장할 뿐이다. 한국교회가 한국사회의 변화와 변혁을 말하기에는 한국사회의 염려를 더 받고 있는 시점에서 한국교회가 먼저 교회다워지는 것이 급선무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이 글은 기독교윤리가 전통적인 명령윤리에만 그쳐서는 안 되며, 성경에 나타난 공동체들의 전통과 역사를 반영하는 내러티브 윤리와 하나님 말씀을 오늘날의 내러티브 속에서 개인에게 적용하는 것을 중시하는 덕 윤리도 포함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무엇보다 이 글은 목회자 자신도 하나님 말씀을 삶에 적용해야 하는 사람이며 그렇게 할 때 목회자의 설교가 온전해진다고도 주장했다. 또한 이 글은 그리스도인이 하나님의 말씀을 자신의 삶에 적용할 때 교회 공동체가 각 그리스도인에게 정체성과 역할을 제공한다는 점도 밝혔다. 이 글은 그리스도인 개개인이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다양한 은사를 사용해서 개인마다 다른 우선순위에 따라 하나님의 뜻에 순종함으로써 교회 구성원으로서 온전한 교회 공동체를 세워가는 데 기여함도 밝혔다. 결국 교회가 생명의 복음을 구현할 때 교회다워지며 교회구성원이 다양한 은사에 따라 생명의 복음을 삶의 모든 분야에서 구현할 때 교회를 온전히 세워간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할 때 교회는 생명의 복음을 좀 더 깊이 알게 되며 그리스도인은 교회 구성원으로서 진리의 말씀을 더욱 알게 된다 할 수 있다.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여 하나님 말씀을 개인의 삶과 교회 공동체의 삶에 적용할 때 하나님 말씀을 더욱 깨닫게 된다는 뜻이다. 따라서 우리는 교회론과 관련해서도 신학은 학문이 아니라 생명의 복음이라는 개혁주의생명신학의 통찰을 확인할 수 있다.   

 

각 주 1) 은준관, 『신학적 교회론』(서울: 한들출판사, 2005), pp.46-47 참조.2) 김기현, “교회가 복음이다”, 『성경과 신학』 37 (2005), pp.327-330.3) 김남석, "현대사회와 목회윤리," 『신학연구』51 (2007), p.286.4) 김승호, “왜곡된 영성으로서의 목회자의 성적 탈선”, 『신학과 목회』 33 (2010), pp.35-36.5) Edumund P. Clowney, 『교회』, 황영철 옮김 (서울: IVP, 1998), p.17.6) 신현수, “21세기 한국교회 사역의 방향,” 『현상과 인식』 99 (2006), pp.106-110.7) 김기현, “교회가 복음이다”, pp.325-326.8) 이용원, “그리스도의 몸으로서의 교회 공동체”, 『신학과 목회』 4 (1990), p.88.9) 이승구, 『교회란 무엇인가?』(서울: 나눔과 섬김, 2010), p.40.10) 정필도 목사는 평생의 목회를 회고하면서 ‘교회의 문제는 교역자의 문제’라고 진단한다. 그에 따르면 교회가 변화하려면 교역자가 변화해야 한다. 이대웅, “수영로교회의 5가지 ‘부흥성장 시크릿’”, 『크리스천투데이』제492호(2011년 10월 5일), p.4.11) 장종현, “생명신학”, 『생명을 살리는 교육』(백석신학연구소, 2008), pp.119-126.12) 장종현, 『개혁주의 5대 표어(sola)에 대한 해설』(백석정신아카데미, 2011), p.10.13) 장종현, “생명신학”, pp.127-128.14) 장종현, “성경이 답이다! (벧후 1:20-21)”, 『제3회 개혁주의생명신학 포럼』(백석대학교, 2010. 10.25), pp.13-14. 15) 장종현, “성경이 답이다! (벧후 1:20-21)”, p.11.16) 장종현, “영원한 생명수 예수 그리스도”, 『개혁주의생명신학의 성경적 토대모색III』(개혁주의생명신학회, 2011), p.7.17) 장종현, “성경이 답이다! (벧후 1:20-21)”, p.24.18) 장종현, 『개혁주의생명신학 해설』(백석정신아카데미, 2011), p.13.19) 장종현, “성경이 답이다! (벧후 1:20-21)”, p.15.20) 장종현, “성경이 답이다! (벧후 1:20-21)”, pp.18-19.21) 장종현, “영원한 생명수 예수 그리스도”, p.10.22) 장종현, “성경이 답이다! (벧후 1:20-21)”, p.20.23) 장종현, “성경이 답이다! (벧후 1:20-21)”, pp. 20-22.24) 장종현, “하나가 되게 하는 비결”,『생명을 살리는 교육』, pp.156-157.25) 장종현, “하나가 되게 하는 비결”, p.159.26) 장종현, “성경이 답이다! (벧후 1:20-21)”, p.17.27) 장종현, “성경이 답이다! (벧후 1:20-21)”, p.13.28) 장종현, “신학은 학문이 아니다”,『생명을 살리는 교육』, pp.238-239.29) 장종현, “신학은 학문이 아니다”, pp.241-242.30) 장종현, “성경이 답이다! (벧후 1:20-21)”, p.12.31) 장종현, 『개혁주의생명신학 해설』, p.17.32) 장종현, “성경이 답이다! (벧후 1:20-21)”, p.17.33) 장종현, “성경이 답이다! (벧후 1:20-21)”, p.22.34) 장종현, 『개혁주의생명신학 해설』, p.18.35) 장종현, 『개혁주의생명신학 해설』, p.33.36) 장종현, 『개혁주의 5대 표어(sola)에 대한 해설』, p.7.37) 장종현, 『개혁주의생명신학 해설』, p.35.38) 장종현, 『개혁주의생명신학 해설』, p.36.39) 장종현, “성경이 답이다! (벧후 1:20-21)”, p.12.40) 장종현, “신학은 학문이 아닙니다”, (백석대학교), p.7.41) 장종현, “성경이 답이다! (벧후 1:20-21)”, p.13.42) 장종현, “성경이 답이다! (벧후 1:20-21)”, p.14, p.20.43) 장종현, “개혁주의생명신학 선언문”, 『백석신학저널』 18호 (백석대학교 신학대학원, 2010년 봄호), pp.5-6. 44) 장종현, “영원한 생명수 예수 그리스도”, pp.8-9.45) 장종현, “영원한 생명수 예수 그리스도”, p.13.46) 장종현, “생명신학”, p.119.47) 장종현, “하나가 되게 하는 비결,” p.160.48) 장종현, “신학은 학문이 아니다”, p.248.49) 장종현, 『개혁주의 5대 표어(sola)에 대한 해설』, p.5.50) 장종현, “신학은 학문이 아니다”, pp.240-241.51) 장종현, “신학은 학문이 아니다”, pp.241-242.52) 장종현, “영원한 생명수 예수 그리스도”, p.8.53) 장종현,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생명을 살리는 교육』, p.211.54) 장종현, 『개혁주의 5대 표어(sola)에 대한 해설』, p.12.55) 장종현, “착한 사람 바나바”, 『생명을 살리는 교육』, p.168.56) 장종현, “성경이 답이다! (벧후 1:20-21)”, p.27.57) 장종현, “신학은 학문이 아니다”, p.237.58) 장종현, 『개혁주의생명신학 해설』, p.18.59) 장종현, “신학은 학문이 아니다”, p.242.60) 장종현, “신학은 학문이 아니다”, p.245.61) 장종현, “성경이 답이다! (벧후 1:20-21)”, p.10.62) 장종현, “성경이 답이다! (벧후 1:20-21)”, p.11.63) 장종현, “성경이 답이다! (벧후 1:20-21)”, p.15. 64) 장종현, “성경이 답이다! (벧후 1:20-21)”, p.19.65) 장종현, “성경이 답이다! (벧후 1:20-21)”, p.25.66) 장종현, “신학은 학문이 아니다”, p.235-236.67) 장종현, “성경이 답이다! (벧후 1:20-21)”, p.23.68) 장종현, “신학은 학문이 아니다”, p.252.69) 장종현, 『개혁주의 5대 표어(sola)에 대한 해설』, p.12.70) 장종현, “하나가 되게 하는 비결”, p.155.71) 장종현, “하나님이 함께하는 대학이 되려면”, 『생명을 살리는 교육』, pp.201-202.72) 장종현,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p.215.73) 장종현,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p.207.74) 이승구, 『교회란 무엇인가?』, p.372.75) 장종현,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p.210.76) 장종현, “성경이 답이다! (벧후 1:20-21)”, pp.15-16.77) 장종현, 『개혁주의생명신학 선언문 해설』, p.8.78) 장종현, “생명신학”, p.128.79) 장종현, “신학은 학문이 아니다”, p.253.80) 장종현, “신학은 학문이 아니다”, p.251.81) 장종현, “성경이 답이다! (벧후 1:20-21)”, p.19.82) 장종현, 『개혁주의생명신학 선언문 해설』(백석정신아카데미, 2011), p.5.83) 이승구, 『교회란 무엇인가?』, p.385, p.387.84) Lesslie Newbigin, 『교회란 무엇인가?』, 홍병룡 옮김 (서울: IVP, 2002), p.198.85) Lesslie Newbigin, 『교회란 무엇인가?』, pp.14-16.86) 김남석, "현대사회와 목회윤리," pp.291-293.87) 이승구, 『교회란 무엇인가?』, pp.273-277. 88) John M. Frame, The Doctrine of the Christian Life (Phillipsburg, New Jersey: P&R Publishing, 2008), pp.354-359. 89) Lesslie Newbigin, 『교회란 무엇인가?』, p.63.90) Lesslie Newbigin, 『교회란 무엇인가?』, pp.143-144.91) 김기현, “교회가 복음이다”, pp.338-340.92) Lesslie Newbigin, 『교회란 무엇인가?』, pp.158-159.93) Lesslie Newbigin, 『교회란 무엇인가?』, pp.144-151.94) Edumund P. Clowney, 『교회』, p.9.95) 은준관은 1950-60년대 미국 교회의 급성장의 원인 가운데 하나로 엄격한 목회자 자격 규정을 든다. 은준관, 『신학적 교회론』, p.30. 96) 김남석, "현대사회와 목회윤리," pp.288-291.97) 김기현, “교회가 복음이다”, p.326. 이와 관련하여 헨리 나우엔(H. J. Nowen)은 미래의 기독교 지도자는 하나님의 사랑을 나타내기 위해 낮은 모습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처럼 상처받기 쉬운 연약한 자아로서 세상속에 서는 사람이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Henri J. M. Nowen, In the Name of Jesus: Reflection on Christian Leadership, (Chestnut Ridge, NY: Crossroad, 1992), p.17. 김남석, "현대사회와 목회윤리,“ p.301, n.42에서 재인용. 98) Eddie Gibbs, 『넥스트 처치Next Church』, 임신희 옮김 (서울: 교회성장연구소, 2003), p.52, p.86.99) Eddie Gibbs, 『넥스트 처치Next Church』, p.185.100) Eddie Gibbs, 『넥스트 처치Next Church』, pp.156-157.101) Eddie Gibbs, 『넥스트 처치Next Church』, pp.158-159.102) 김기현, “교회가 복음이다”, p.341.103) Eddie Gibbs, 『넥스트 처치Next Church』, p.170.104) 김남석, "현대사회와 목회윤리," pp.285-312. p.285-286.105) 김기현, “교회가 복음이다”, pp.341-345.106) 김남석, "현대사회와 목회윤리," pp.303-304.107) John M. Frame, The Doctrine of the Christian Life, pp.227-230.108) 이승구, 『교회란 무엇인가?』, p.92.109) 김남석, "현대사회와 목회윤리," p.302.110) 최윤배, “헬무트 틸리케의 성령론 연구: 『개신교 신앙』 제3권에 나타난 ‘교회론’을 중심으로”, 『한국개혁신학』 30 (2011), pp.38-39. 111) 장기천, “교회의 희망, 예수 그리스도의 현존,” 『기독교사상』 517 (2002.1), pp.114-115. 112) 신현수, “21세기 한국교회 사역의 방향,” pp.110-121. 113) Stanley Hauerwas, A Community of Character: Toward a Constructive Christian Social Ethic (Notre Dame: University of Notre Dame Press, 1991), p.10. 김기현, “교회가 복음이다”, p.333, n.24에서 재인용. 114) Stanley Hauerwas, A Community of Character, p.12. 김기현, “교회가 복음이다”, p.336, n.33에서 재인용. 115) 이승구, 『교회란 무엇인가?』, pp.294-297.116) 이승구, 『교회란 무엇인가?』, pp.127-138.       

 

 생명의 복음을 구현하는 교회논평 이혁배 숭실대학교 

 

 I. 이경직 교수의 발제문은 크게 두 부분으로 구성된다. 개혁주의생명신학의 핵심주장을 소개하는 부분과 개혁주의생명신학의 관점에서 목회윤리를 전개하는 부분이 그것이다. 개혁주의생명신학은 백석학원 설립자인 장종현 목사가 기존의 개혁주의신학이 사변화되고 있음을 지적하면서 그것에 영적 생명력을 불어넣고자 하는 의도에서 나온 신학적 흐름이다.발제문의 내용에 근거해보면 개혁주의생명신학은 몇 가지 특징을 지니는 것으로 보인다. 첫째, 개혁주의생명신학은 체험적이다. 이 신학은 신앙인으로 하여금 하나님을 알도록 하는 것을 넘어서 실제로 경험하도록 하려고 노력한다.둘째, 개혁주의생명신학은 변화 지향적이다. 이 신학은 하나님 경험을 통해 신앙인을 변화시켜 하나님의 진정한 종이 되게 하려고 한다.셋째, 개혁주의생명신학은 성경적이다. 이 신학은 하나님의 말씀인 성서를 유일한 표준으로 삼는다.넷째, 개혁주의생명신학은 실천적이다. 이 신학은 신학을 예수 그리스도에 순종하는 지식으로 이해하면서 그분의 말씀을 실천에 옮기려고 노력한다.다섯째, 개혁주의생명신학은 반(反)학문적이다. 이 신학은 학문화되는 것을 거부하면서 영적 생명으로 충만한 복음의 진리를 증거한다.여섯째, 개혁주의생명신학은 교회적이다. 이 신학은 교회에 봉사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신학은 모름지기 교회를 위한 신학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논평자가 분석하기에 발제문은 이런 특징들, 특히 두 번째, 세 번째, 여섯 번째 특징에 주목하면서 개혁주의생명신학의 목회윤리를 전개하고 있다. 발제자에 따르면 전통적으로 내려오는 명령윤리만 가지고서는 현재의 교회적, 목회적 위기를 돌파해낼 수 없다. 이에 발제자는 목회자들에게 명령윤리를 넘어 덕윤리와 내러티브윤리로 나아갈 것을 제안한다. 덕윤리는 주로 개혁주의생명신학의 두 번째와 세 번째 특징에서 도출된 것으로 성경, 곧 하나님의 말씀으로 목회자의 성품을 변화시키는 윤리를 의미한다. 그런데 목회자의 성품이 변화되기 위해서는 교회공동체라는 훈련의 장이 필수적이다. 이런 의미에서 발제자는 목회자의 성품 변화와 관련해서 교회공동체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목회자의 성품은 교회공동체의 내러티브, 곧 이야기 속에서 형성된다는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발제자는 내러티브윤리를 내세운다. 내러티브윤리는 주로 개혁주의생명신학의 세 번째와 여섯 번째 특징에서 도출된 것으로 목회자가 성경에 나타난 공동체들의 내러티브를 자신의 내러티브로 만드는 윤리를 가리킨다. -II. 개혁주의생명신학이 지닌 역동성을 강조하는 발제문은 신학이 관념화되어 교회와의 괴리가 확대되고, 그래서 신학이 교회발전에 거의 도움을 주지 못하고 있는 오늘의 상황에 신선한 도전을 주고 있다. 또한 “한국교회의 문제가 목회자의 문제이며 목회자의 문제는 신학교육의 문제”라고 주장하면서 목회윤리 교육을 강화해야 한다는 지적은 시의적절하다고 생각된다. 나아가 바람직한 목회윤리로 덕윤리와 내러티브윤리를 내세우고 있는 점도 설득력 높은 시도라고 판단된다. 그럼에도 아쉬움이 남지 않는 것은 아니다. 논평자가 보기에 발제자와 개혁주의생명신학의 약점은 신학의 학문적 성격을 진지하게 고려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논평자가 보기에 위에서 서술된 개혁주의생명신학의 특징들 가운데 결정적인 것은 반학문화(反學問化)이다. 신학은 학문이 아니기에 학문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물론 그렇다고 개혁주의생명신학이 학문적 방법을 완전히 무시하는 것은 아니다. 이 신학도 부분적으로 학문적 방법을 수용한다. 하지만 개혁주의생명신학의 최종적 임무는 이론적 사유가 아닌 복음의 증거이다. 논평자가 판단하기에 이런 명제는 그리 설득력 있지 않다. 신학의 본령은 증거가 아닌 사유에 있기 때문이다. 신학은 복음을 증거하는 교회를 위한 것임에 분명하다. 그렇다고 신학이 신앙행위나 교회활동과 동일시되어서는 곤란하다. 신학은 신앙행위나 교회활동 자체가 아니라 그것에 대한 사유이기 때문이다. 이런 의미에서 신학은 일종의 메타적 작업이다. 이 사실을 염두에 두면 개혁주의생명신학도 자신을 신학으로 지칭하는 한 단순한 선언적 진술을 넘어 정교한 체계와 논리를 갖추는 데 주력할 필요가 있다. 만일 신학이 이런 학문적 작업을 포기한다면 교회와 목회자의 신앙행태에 대한 비판적 성찰은 무엇이 할 것인가? 교회와 사회를 이론적으로 매개하는 작업은 무엇이 감당할 것인가?전통적으로 신학은 교회를 위한 학문으로 이해되어왔다. 그리고 이런 정의는 오늘에도 여전히 유효하다. 따라서 신학이 학문이 아니라는 개혁주의생명신학의 주장은 자칫 신학의 자기토대를 허무는 시도로 간주될 수 있다. 하지만 토대가 철거된 신학이 얼마나 의미 있게 지속될 수 있을까. 본디 신학은 개혁주의생명신학이 그토록 강조하는 ‘신앙’과 ‘실천’을 넘어선다. 신학은 이것들 외에 ‘사유’를 포괄한다. 나아가 자체의 정체성을 확보하기 위해 ‘체계성’을 구비한다. 이렇게 신학이 사유적 측면이나 체계성을 요청받는 한 그것의 학문성은 최종적 단계에서조차 지양(止揚)될 수 없다. 흔히 신학의 반학문화는 최종적 단계에서만 시도된다고 주장된다. 개혁주의생명신학에서도 마찬가지이다. 하지만 실제로 신학의 반학문화는 최종적이지 않은 단계에서도 관철되기 쉽다. 반학문화를 지향하는 신학적 담론에서 신학연구자들은 어느 단계가 최종적 단계인지 객관적으로 판단하기 어렵고, 그래서 그들은 최종이전의 단계에서조차 반학문화에 대한 강박관념 혹은 유혹에서 벗어나기 힘들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런 우려가 현실화될 경우 신학의 반학문화라는 취지는 설교적 언사나 선언적 진술에 대한 선호를 강화시키면서 해당 신학적 담론에서 개념의 규정이나 논의의 심화를 방해할 수 있다. 논평자가 보기에 발제문에서도 이런 부작용이 부분적으로 드러나고 있다. 먼저 발제자가 강조하는 실천이란 개념이 구체적으로 규정되지 않고 있다. 기독교에서 언급되는 실천에는 크게 두 가지 형태가 있다. 신앙적 실천과 윤리적 실천이 그것이다. 전자는 기도, 예배, 금식과 같은 의례(ritual)로 구성되어 있는 반면, 후자는 신앙인의 개인적 윤리생활과 사회참여적 활동으로 이루어져 있다. 물론 기독교윤리는 주로 후자와 관련된다. 그런데 발제문에서 실천이 강조되는 경우 이때의 실천은 대체로 신앙적 실천을 가리키고 있다. 발제문이 기독교윤리분과에서 발표되는 것이라면 신앙적 실천보다 윤리적 실천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 더 적절할 것이다. 한편 윤리적 실천, 특히 사회참여적 활동이 제대로 전개되려면 “현대사회의 복잡한 상황” 에 대한 사회과학적 분석이 필수적이다. 그렇다면 목회자나 신학생들의 사회과학적 안목을높이기 위해 구체적으로 어떤 방안이 강구될 필요가 있는지가 논의되어야 한다. 하지만 발제문에는 이런 문제가 다루어지지 않고 있다. 그밖에 발제자가 중요시하는 “그리스도의 복음에 충실하게 사는 삶”도 구체적으로 어떤 상태인지 명확하게 규정되지 않고 있다. 이런 삶이 단지 신앙적 실천에만 관련되는 것인지 아니면 신앙적 실천과 윤리적 실천 모두에 관련되는 것인지가 분명하게 밝혀질 필요가 있다. 발제문이 지닌 이런 문제점은, 개혁주의생명신학이 그 연륜이 오래되지 않아 형성과정 중에 있는 신학이라는 사실을 고려해보면 자연스러운 현상으로 용인될 수 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신학의 반학문화에서 비롯되는 이런 약점은 개혁주의생명신학의 아킬레스건으로 작용할 가능성이 높다. 이에 논평자는, 개혁주의생명신학이 학문화와 거리를 두려는 지금의 흐름에서 벗어나 신학의 학문적 성격을 적극 수용함으로써 한국기독교가 세계 신학계에 내놓을만한 독창적이고 역동적인 신학으로 발전해나갔으면 하는 바람을 가져본다. 발제자를 비롯한 개혁주의생명신학회 회원들의 분투를 기대한다. 

 

이경직 백석대학교 /논평 이혁배 숭실대학교/http://blog.daum.net/hopeyard/75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