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범적인 공기도의 특징
Characteristics of a Good Public Prayer
이 주제와 관련해서는 일깨워진 경건한 지성이 최고의 인도자가 된다. 그러나 그 경건의 열심이 특심하고, 재능과 지식이아무리 성숙하다고 하더라도 그 필요를 채우기에는 역부족이거나, 경험이 제공할 수 있는 일반적인 인도하심에는 도달하지 못할 수가 있다. 여러 가지 제안과 시도를 할 수 있지만, 모든 경우에 해당되는 불변하는 원리를 제공한다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여기서 물론, 언제나 필요불가결한 원리로 여겨지는 좋은 기도의 조건들, 예를 들어 신실함과 믿음으로, 예수님의 이름으로, 깊은 겸손으로, 구세주를 향한 굳은 신뢰로, 복종하는 마음으로, 하나님 안에서 용서를 확신하는 마음으로 기도하는 것과 같은 것들을 생략할 것이다. 이러한 모든 기도의 요소들이 하나님께 받아들여지는 기도가 되기 위해서 필수적이고 당연한 것들이다. 그러나 어떤 요소들은 잊기 쉬운 것들이기에 더 주의가 필요하고, 내 판단으로는 기도에 대한 가르침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해야 할 것들이다.
1. 공기도에서 가장 필수적인 요소 중 하나이고, 내가 느끼기로 가장 우선적인 것이기에 다른 어떤 것보다 가장 먼저 언급해야 하는 것은 공기도 내용은 반드시 하나님의 말씀으로 가득 차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1) 말씀으로 채워진 기도는 언제나 바르고, 언제나 안전하고 언제나 교훈적이다. 다른 것에 있어서는 우리가 어떤 의심이라도 품을 수 있지만, 이것에 있어서만큼은 어떤 의심도 있을 수 없다. 이것은 모든 반대를 일시에 불식 시킬 수 있다.
(2) 거룩한 하나님의 말씀의 언어는 단순하고, 부드러우며, 마음에 감동을 주는 힘이 있다. 인간이 발화할 수 있는 언어 중에 인간의 마음을 가장 합당하게 사로잡는 어린 시절부터 읽어 왔던 각 페이지 마다 영원한 것들과 잇대어 있고 영혼에 소망을 불어 넣어 주는 영감된 하나님의 말씀보다 더 뛰어난 것이 있을까? 심지어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문학가들도 문예적인 측면에서 위대한 언어가 저장된 저장 창고로서 성경의 언어야말로 대중의 마음과 감정에 강력하게 호소할 수 있는 것이라고 동의하고 있다.
(3) 예배의식 가운데 기도문을 따라 기도하는 것을 옹호하는 사람들은 예배를 인도 하는 사람들이 하는 즉흥기도의 내용을 따라 가기가 어렵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기도 인도자들이 하는 기도 중 한 문장이 끝나기 전까지는 기도 내용이 어떻게 전개될 것인지를 미리 알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이 끊임없이 요청하는 것은 한 문장이 마무리기 전 까지는 기도내용을 파악할 수가 없으니 한 문장이 끝나기 전에도 잠깐씩 쉬어가는 순간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나와 친한 친구들 가운데는 기도문을 미리 작성해 와서 기도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들이 미리 적어 와서 기도를 할 때는 이러한 어려움들을 해소할 여지가 있다. 그러나 여전히 그들은 상당한 시간 동안 그렇게 기도하는 것의 불편함에 대해서 호소하는 것을 듣는다. 그러나 만약 다음과 같이 기도하기만 한다면 이러한 반대 의견이 차지할 자리는 사라질 것이다. 공기도를 인도하는 사람이 그의 기도의 상당 부분을 하나님의 말씀으로부터 그대로 따온 다면 말이다. 그렇게 기도하는 사람은 자신이 기도를 청중과의 연합과 마음의 일치 가운데 진행하게 될 것이다. 기도 인도자가 성경에서 나오는 말씀 중 한 구절이라도 그대로 인용하자마자 사람들은 즉석에서 동의하고 마음으로 따를 준비를 할 것이다. 예배에 참여한 회중들은 자신들의 귀에 거룩한 하나님의 말씀의 한 구절이라도 들리자마자 그 말씀이 꿀송이처럼 달콤하게 다가오는 것을 바로 경험하게 될 것이다.
이 문제와 관련해서, 많은 분별력 있는 그리스도인들은 현대 설교자들의 많은 경우에 이러한 특징들이 빠져 있다는 사실에 애통해 할 것이다. 목회자의 마음이 하나님의 말씀의 언어와 성령에 깊이 적셔져 있다면, 그가 혼자 묵상해서 하는 기도 보다 훨씬 더 풍성하고 부드럽게 기도가 이루어질 것이며, 모든 지성적인 청중들의 마음과 귀를 동시에 유익하게 하는 즐거움을 누리기에 충분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공기도에서 성경의 언어를 사용함에 있어서 어려움이 발생할 가능성은 다분히 있다. 성경의 내용을 무조건 인용한다고 해서 그것 자체가 우리를 은혜의 보좌 앞으로 인도하는 것은 아니다. 성경의 어떤 구절들은 형식에 있어서 기도에 사용하기에 적절치 않은 교훈적이거나 역사적인 내용일 수가 있다. 또한 기도에 직접 인용하기에는 어색한 내용들이 성경에 등장하기에 만약 이러한 내용들을 가지고 기도하게 되면 적합하지 않게 되고 기도를 방해하게 되는 것이다.
목회자가 임직시에 가장 흔히 언급되는 성경 구절이 디모데전서 3장 1절에서 4절 말씀이다. “미쁘다 이 말이여, 곧 사람이 감독의 직분을 얻으려 함은 선한 일을 사모하는 것이라 함이로다 그러므로 감독은 책망할 것이 없으며 한 아내의 남편이 되며 절제하며 신중하며 단정하며 나그네를 대접하며 가르치기를 잘하며 술을 즐기지 아니하며 구타하지 아니하며 오직 관용하며 다투지 아니하며 돈을 사랑하지 아니하며 자기 집을 잘 다스려 자녀들로 모든 공손함으로 복종하게 하는 자라야 할지며”
이 구절을 기도에 사용하면서 이러한 교훈적 본문을 자기 것으로 소화해서 내용을 약간 바꾸거나 그 내용을 실제화 시키거나 기도의 내용에 적합하게 하게 하려고 하지 않고 그저 성경의 내용을 인용하기에 성경대로 기도한다고 생각할 가능성이 있다.
또 다른 예를 들어 보면, 공기도에서 로마서 2장 마지막 두 구절을 인용할 수 있다. “무릇 표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 아니요 표면적 육신의 할례가 할례가 아니니라 오직 이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며 할례는 마음에 할지니 영에 있고 율법 조문에 있지 아니한 것이라 그 칭찬이 사람에게서가 아니요 다만 하나님에게서니라”
이것은 ‘기도 중의 설교’라고 불리는 것이다. 그래서 이 내용은 실제로 기도의 내용으로 적용하기가 어려운 내용이다.
때때로 기도 중에 성경 구절을 인용하지만 그 구절의 원래 뜻에서 이탈해서 활용할 가능성이 있다. 나는 공기도에 있어서 우스꽝스럽고, 섬세하지 못하며, 전혀 어울리지 않는 내용을 기도 중에 사용한 예를 들어 보고자 한다.
나는 열렬한 경건과, 강하면서도 섬세한 분별력을 지닌 뛰어난 사람이라고 하는 평판을 받고 있는 사람이 한 번이 아니라 여러 번 이렇게 기도하는 것을 들은 적이 있다. 그는 교회의 무기력함과 열매 없음에 대해서 애통해 하면서, 열매 맺지 못하는 포도원에 심긴 나무를 예로 들면서, 이렇게 기도했다.
--‘주님, 우리는 주님의 공의로운 판단을 받기 합당합니다. 우리는 우리가 맺어야 할 열매를 맺지 못했습니다. -- 그러나 교회를 성장케 하지 못한 우리의 범죄로 인해서 우리가 가진 자녀로서의 특권을 박탈시키지는 마소서-- 우리를 잘라 내지 마소서; 우리 주변의 땅을 개간 하시고, 거름을 주셔서, 하나님 당신의 거룩한 영광의 이름을 위해서 열매 맺게 하소서.’
똑같이 성경의 표현을 사용했지만 어색한 경우를 예를 들어 보고자 한다.
이 사람은 시편 73편에 나오는 표현을 인용하기를 전혀 주저하지 않고 이렇게 기도 했다. ‘무릇 주를 멀리하는 자는 망하리니 음녀 같이 주를 떠난 자를 주께서 다 멸하셨나이다.’ 분명히 우리의 기도 중에 어떤 말씀의 내용이라도 인용해서 기도할 수 있지만, 만유의 아버지 되신 그 분에게 기도할 내용을 선택함에 있어서 분명히 적합한 내용을 선택할 수 있어야 한다.
성경은 영적인 의미에서 풍성하고 적합한 수많은 구절들로 가득 차 있지만, 또한 전체적인 구조와 범위 안에서만 직접적으로 자연스럽게 인용할 수 있는 구절들도 많이 있다. 영감된 전체 중에서 한 부분만을 떼서 인용하면 이상하게 느껴질 수 있는 것이다. 비록 성령에 의해 감동된 말씀을 성령 안에서 기도하면서 그 말씀을 사용한다고 하더라도 거룩한 하나님의 말씀의 전체적인 구조 속에서 엄격하게 그 위치에서만 사용되어야 한다. 이것은 물론 강단에서 설교자가 말씀을 인용할 때도 마찬가지로 적용되는 원리이다.
다시 한 번 지적하고자 한다. 성경에 있는 말씀이라고 해도 기도 가운데 실제적인 사용에 있어서 적절하지 않을 수 있다. 왜냐하면 지형학적인 측면에서 어떤 내용을 사용함에 있어서 더 이상 상식적으로 맞지 않을 수 있기 때문이다. 목회자들이 복음의 확장을 위해서 기도함에 있어서, 스가랴 9장 10절 말씀을 인용하거나 언급하는 것을 들어 본 적이 있을 것이다. “그의 통치는 바다에서 바다까지 이르고 강에서 땅 끝까지 이르리라” 이 구절을 인용할 때 여기서 말하는 강은 어떤 강을 말하는가? 삼천년 전의 팔레스타인에 살던 사람들에게는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가 의심의 여지없이 당연히 인식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영국이나 미국에 현재를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여기서 말하는 강의 의미는 어떻게 다가오게 될까?
시편 121편 1절 말씀도 동일하다. “내가 산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꼬” 이 구절도 기도 중에 자주 인용되는 구절이다. 그러나 여기서 말하는 산이 어떤 의미로 다가올까? 예루살렘성은 산 위에 건설되었고, 유다는 산악 지형의 나라였다. 그래서 유대인들이 여러 지역에 분산되었다고 하더라도 그들이 기도할 때 예루살렘을 향하여 기도를 하는 것이 마땅했다. 그러나 이 말씀이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는 이러한 개념을 담아내지 못하는 것이다.
나는 오래 전에 소천하신 한 뛰어난 목회자를 알고 있는데, 그는 이 주제와 관련해서 또 다른 방식으로 실수를 범하는 것을 본 적이 있다. 이분이 범한 실수는 자주 범할 수 있는 실수는 아니지만 충분히 주목할 만하다. 그의 기도는 항상 성경 말씀을 계속해서 언급하면서 진행되었는데, 자기 자신의 말이나 표현은 일체 사용하지 않았다. 사실 그의 기도는 처음부터 끝까지 성경 구절들의 연결이었고, 연결할 때 연결구조차도 거의 사용하지 않고 말씀 그 자체만을 말했다. 그러나 내가 기억하기로는 이 기도는 연구와 기억에 의존한 발설이었지 마음으로부터 우러나오는 기도는 아니었다. 단순히 기도의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성경 구절을 단순히 반복해서 말한다고 해서 그것 자체가 기도가 들리게 하고, 마음을 연합하게 하고 기쁨을 주는 것은 아닌 것이다. 끊임없이 말씀의 영의 인도함을 받아서, 하나님의 말씀을 풍성하게 사용하지만 맹목적인 인용이 아닌 쉽고 자연스럽게 의식하지 않는 가운데 성경의 내용들이 자연스럽게 흘러나오는 기도야말로 학습되거나 형식적인 기도 보다 훨씬 더 사람들을 기쁘게 하고 유익을 줄 수 있을 것이다.
둘째로 탁월한 공기도는 질서 정연하다.
좋은 기도는 정돈된 기도이다. 항상 특정한 형식과 순서를 가진다는 의미가 아니다. 좋은 공기도는 경배, 고백, 감사, 간구와 중보라고 하는 순서와 질서가 있다. 부주의하게 아무 내용이나 섞어 놓은 것이 아니라 분별력 있는 배열과 차례를 따른 분명한 짜임새가 있는 기도이다.
규칙적인 순서를 정해 놓고 기도하는 것은 기도를 인도하는 사람에게 유익이 크다. 이렇게 기도하면 분명하게 기도의 각 순서를 인지하는 것을 도울 수 있고, 중요한 기도의 주제나 부분들을 생략하는 것을 방지할 수 있다. 또한 이렇게 기도하면 기도에 있어서 필수적인 요소인 기도의 길이를 조절하기가 쉽다.
분명하면서도 정교한 질서가 공기도에 가미되면 예배에 참여한 모든 이들의 마음에 효과적인 영향을 줄 수 있다. 기도 인도자가 기도의 여러 부분들을 주먹구구식으로 섞어 버리면 기도에 함께 참여하는 사람들이 예상치 못하거나 기대했던 내용을 지나쳐 버림으로 기도에 집중하는데 방해를 주고, 청중들의 정서의 흐름을 끊어 버린다. 그래서 순서를 정해 놓고 기도하는 것은 청중들로 하여금 정서의 흐름을 예상케 함으로 미리 마음으로 준비하게 하고, 한 순서에 특별한 인상을 주고자 할 때 그것이 중요한 것이라고 하는 것을 청중들이 쉽게 파악할 수 있다.
기도 가운데 질서를 유지하는 것은 또한 적절한 기도의 분량을 조절하는데도 유익하다. 적절한 배열 작업 없이 기도를 한다는 것은 몇 가지 주제들이 계획 없이 나열되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면 기도 인도자는 시간의 흐름을 적절히 인식할 수 없게 된다. 그렇게 기도하는 사람은 자신의 기도의 길이를 스스로 판단 내리기가 어렵게 되고, 그렇게 되기 때문에 시간의 진행 여부를 알 수 없기에 청중들이 듣기에 불편하게 장황한 기도가 될 수밖에 없다.
그러나 기도에 질서가 필요하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항상 같은 순서와 같은 방식으로 기도가 진행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면 오해하는 것이다. 나는 기도가 하나의 형식으로 정형화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이 아니다. 내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기도에는 질서가 있되 그 질서 가운데 다양한 자유를 허용함으로 예배자들로 하여금 단조로움을 느끼게 하거나 정형화된 틀 속에서 기도하는 것과 같은 느낌을 받지 않게 해야 한다는 것이다. 때로는 죄에 대한 고백과 비참함에 대한 고백이 처음에 올 수도 있고, 다른 경우에는 처음에는 감사로 기도를 시작할 수도 있는 것이다. 이처럼 각 순서들의 부분을 얼마든지 다양하게 배치할 수 있는 것이다.
내 인생의 초반부에 감사하게도 드와이트 박사[티모씨 드와이트 4세, 예일 대학 학장, 1795~1817]의 목양을 경험하는 특권을 누렸다. 드와이트 박사는 박학함과 경건성 그리고 열정에 있어서 그를 아는 모든 사람들로부터 특별한 평가를 받는 그런 분이셨다. 그의 공기도는 다른 사람들에게서 찾아 볼 수 없었던 풍성함과 다양한 표현과 즐거움이 있었다. 그의 기도의 특징 중 하나가 기도의 순서와 배열을 바꾸는 것이었다. 그는 늘 동일한 순서로만 기도하지 않았다. 그는 같은 날 예배를 한 번 이상 인도하게 될 때 그가 하는 기도는 달랐고, 자유롭게 기도의 주제들의 순서를 바꾸었다. 뿐만 아니라 어떤 주제들은 그냥 지나쳤고, 때로는 한 주제를 구체적으로 더 깊이 다루기도 했다. 내가 기억하기로 어떤 경우에, 오전 예배중의 공기도에서 중보기도의 상당 부분을 생략했고, 오후 기도에서는 중보기도를 더 오래 하기 위해서 다른 부분에 대한 기도를 짧게 다루었다. 때로는 간결하게 기도 했고, 때로는 길게 하기도 했는데, 그의 특별한 기도 방식으로 인해 그의 기도에 사람들은 늘 집중할 수 있었다.
이처럼 우리는 특정한 때나 사안을 가지고 기도할 때에 어느 정도 순서의 원리를 적절하게 지켜 나가면서도 때로는 어떤 부분을 생략하거나 줄이고, 다른 부분을 늘리는 식으로 자유를 가지고 기도함으로 기도가 청중의 주의 집중을 가져오도록 해야 한다.
셋째로 공예배에서의 올바른 기도는 일반적이어야 하고, 포괄적이어야 하며, 너무 구체적이어서는 안 된다.
개인이 홀로 하는 기도에 있어서는 어떤 사소한 기도를 구체적으로 한다고 하더라도 그 기도는 특별한 문제가 되지 않을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을 독대할 때는 특별한 예의범절을 차릴 필요도 없이 우리 마음에 있거나 우리의 원하는 유익을 위해서 어떤 내용이라도 시간의 구애를 받지 않고 끈질기게 기도할 수 있다. 성경에서도 경건한 하나님의 사람들이 하나님의 도우심이 필요할 때에 하나님의 은총을 구하며 긴 시간 동안 절박하게 기도하는 경우를 찾아볼 수 있다. 그러나 공기도에서는, 기도가 너무 장황하거나 길어서는 안 된다. 일반적인 경우에는 12분, 아무리 길어도 15분을 넘어서는 안 된다. 공기도에서 다루는 주제들은 보편적이고 전체 회중에게 적용될 수 있는 것이어야 한다. 특수한 사항을 놓고 기도할 때는 전체 대중의 정서를 고려해야 하며, 특정 사람들에게만 해당되는 기도는 하지 않도록 노력해야 한다. 형식적이고 껍데기만 남아 있는 일반화된 기도도 피해야 하지만, 다른 극단으로 지성적이고 신앙이 성숙한 사람들만 이해할 수 있는 언어로 기도하는 것들도 피해야 한다.
공기도에서 너무 많은 주제들을 한꺼번에 기도하려고 해서는 안 되고, 선택된 주제를 위해 기도하면서 한 주제에 대해서 너무 길게 기도하는 것도 피해야 한다. 그러나 우리의 기도 중에 지나치게 길고 지루하게 기도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지 모른다. 기도가 장황해 지는 것은 한 기도에 너무 많은 주제들을 다루려고 하거나, 또한 몇 가지 주제를 기도하면서 주제와 상관없는 것을 장황하게 기도함으로 기도가 길어지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유사한 표현을 반복해서 말하거나 장황하게 표현하는 것을 피하지 않으면 너무 쉽게 상황에 맞지 않는 말을 하게 되면서 기도가 장황해 지는 것이다. 그래서 같은 말이나 유사한 표현을 반복하는 것은 피해야 한다. 기도 중에 사용하는 단어는 적어야 하고 잘 정돈되어야 한다.
그렇다고 해서 어떤 특정한 주제를 다른 주제보다 더 길게 기도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런 경우에도 전체적으로 기도가 너무 길어지지 않도록 특정한 주제에 대해서 길게 기도한 만큼 다른 부분들에 대한 기도는 탄력적으로 짧게 줄여야 하는 것이다. 기도의 교훈적인 면을 방해하는 가장 큰 요소인 피곤한 장황함과 지루함을 피하기 위해서는 기도의 각 요소들을 조율하는 작업이 반드시 필요하다.
한 본문에서 뽑아낼 수 있는 모든 교훈들을 설교에 포함시켜야할 필요가 없듯이 한 번의 기도에서 기도해야할 모든 내용들을 포함시켜서 기도해야 한다고 생각할 필요는 없다. 설교를 하면서도 35분에서 40분에 강론할 수 있는 내용들은 두 시간에 걸쳐서 하는 경우가 거의 없는 것과 마찬 가지이다. 사실, 설교뿐만 아니라 기도에 있어서 우리의 목표는 처음에 시작할 때 청중들이 가지고 있었던 감정의 고양과 기대감의 수치가 떨어지면서 청중들이 지루함을 느끼기 전에 마치는 것이다. 존경하는 박식한 코튼 매더(Cotteon Mather) 목사는 한 세기 전에 젊은 목회자들 앞에서 자신의 기도에 대해서 언급한 적이 있는데 자신은 공기도를 한 시간이나 하면서 어떤 반복이나 지루함을 느끼게 하지 않으면서 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나는 이 글을 읽고 있는 독자들 중 매더 박사에 필적할만한 놀라운 성취를 이룰 사람이 없음을 확신한다.
넷째로 좋은 공기도는 때와 상황에 맞는 시기적절함이 있어야 한다.
시기적절하게 기도할 때 기도로 인한 유익함을 누릴 수 있다. 성경에 기록된 기도들을 보면 많은 경우에, 이러한 특성을 매우 놀라운 방식으로 가지고 있음을 알게 된다. 성경에 나오는 대부분의 기도들은, 처음부터 끝까지 엄격하게 철저하게 상황을 반영하는 기도들이다. 그래서 특정한 그 상황을 떠나서는 그 어떤 곳에서도 다시 그 기도를 반복할 수 없는 기도들이다. 그만큼 성경에 나오는 기도들은 상황이 깊숙이 들어가 있는 기도들이다. 공기도를 하는 사람은 청중을 전혀 고려하지 않고, 사람들의 지루함을 자아 낼 수 있는 적용할 수 없는 주제들을 미리 선정해서 기도할 가능성이 늘 상존한다. 그러나 이것은 매우 지혜롭지 못한 것이다. 왜냐하면 강단에서, 선교사들의 회합에서, 성찬을 집례할 때, 주일학교 예배에서, 병원 심방에서, 고려해야 하는 그 상황의 독특함이 다르기 때문이다.
그리고 적절하게 상황을 고려하지 않고 기도하면 과도하게 긴 기도를 하거나 시기 적절하지 않은 기도를 할 가능성이 커진다. 대부분 지나치게 길거나 지루한 기도는 이러한 곳에서 실수를 범하기 때문에 하는 것이다. 기도를 인도하는 사람이 기도해야 하는 상황을 고려함으로 자기 자신을 제한하지 않으면, 자기 자신의 정서가 끌리는 데로 자기감정을 억제 하지 않은 채로 기도할 수 있고, 상황과는 별 관계 없는 없는 부수적인 기도제목들을 가지고 장황하게 기도할 수 있게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상황에 맞게 적절하게 기도하도록 신중하게 노력하는 사람들은 지루하면서도 장황한 기도로부터 벗어나서 가장 풍성하고 유익한 기도를 할 수 있는 것이다.
공기도가 탁월함을 발휘하기 위해서 마지막으로 지적할 수 있는 중요한 요소 중 하나는 복음 진리를 풍성하게 기도 가운데 포함시키는 것이다.
그렇게 하면 기도를 듣는 사람뿐 아니라 모든 사람들에게 풍성한 교훈을 줄 수 있다. 진리는 영혼의 양식이다. 복음 진리의 기반 위에 그리스도인이 살아가고 진리로 인해 매일 매일 자라난다. 비록, 듣는 사람들에게 교훈을 주는 가르침을 전달하는 일은 기도 보다는 설교가 해야 할 일이고, ‘기도 중 하는 설교’는 앞에서도 그것이 피해야할 심각한 오류임을 지적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든 공기도에는 교리적 가르침이 분명하게 포함되어야 하고, 이에 따라 기도가 인도되어야 함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공기도를 통해서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지함; 하나님의 은혜를 받기에 합당하지 않음과 우리의 무가치함; 아담의 자손으로서의 우리의 부패와 타락; 두 번째 아담의 희생 제물 되심과 성육신으로 인한 우리의 회복; 하늘에 계신 하나님; 성령으로 말미암은 쇄신의 필요성; 그리스도의 의의 전가로 인한 우리의 칭의; 우리의 모든 거룩한 열망과 삶을 위한 하나님의 은혜의 전적인 필요성: 이러한 모든 교리들이 직,간접적으로 우리의 기도에 등장할 수밖에 없는 것 아니겠는가?
우리의 모든 기도 중에 이러한 경건한 교리적 가르침이 나올 수밖에 없고 이런 의미에서 우리가 하는 모든 기도도 또한 교훈적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의도하건 의도하지 않건 이러한 내용들로 은혜의 보좌 앞으로 가지고 나아갈 때, 기도에 참여하는 동료 예배자들의 마음을 이러한 위대한 진리들로 인도하고 그들의 마음을 영혼의 양식가운데로 집중시킬 수 있는 최상의 기회를 가지는 것이다. 영혼의 의사라고 불리는 목회자가 현명하다면 그리스도인이든 세상적인 사람이든 그들에게 암시하든 강조해서 말하던 복음 진리를 전할 수 있는 가장 강력한 매개체를 찾는다면 강력한 진리를 담고 있으면서도 지혜롭게 구별된, 시기적절하면서도 마음을 부드럽게 하는 기도를 뺄 수 없을 것이다. 우리는 휫필드가 말한 그가 청중들에게 가장 부드러우면서도 매력적인 가르침과, 가장 강력한 꾸짖음, 그리고 가장 강조된 교훈적인 가르침을 전달하는 자기 입술로부터의 중요한 수단이 바로 기도였다고 고백한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공적인 기도 어떻게 해야 하는가?
에베소서 3:14-21
바울은 에베소서를 쓰면서 두 번의 기도를 하였다. 한 번은 1:15-19에 있고 또 하나는 3:14-21에 있다.
특별히 여기서는 하늘과 땅에 있는 각 족속에게 이름을 주신 아버지 앞에 무릎을 꿇고 간절히 기도하고 있다.
그 내용을 보면
①성령으로 말미암아 속 사람이 능력으로 강건해 지기를
②믿음과 사랑의 뿌리가 박히고 터가 굳어지기를
③그리스도 사랑의 길이, 높이, 깊이를 깨닫게 되기를
④하나님의 모든 충만으로 충만해 지기를
기도하고 있다.
우리가 드리는 기도를 성격적으로 구분한다면 사적인 기도와 공적인 기도로 구분할 수 있다.
사적인 기도는 문자 그대로 자신과 하나님과의 만남이다. 그렇다고 해서 아무렇게나 기도를 해도 된다는 것은 아니나 지금까지 배운 대부분의 내용들은 이 사적인 기도를 중심으로 배운 것이다.
공적인 기도는 공예배에서 모인 사람을 대표해서 드리는 기도이다. 그곳에 모인 모든 사람들이 대표자의 기도에 공감하고 진심으로 “아멘” 할 수 있는 기도를 하여야 한다. 그러므로 특별한 준비와 훈련이 필요하다.
20여년 전 수요일 저녁 예배시간에, 어느 남자 집사는 예배 인도자가 갑자기 기도를 하라고 하자 당황하여 집으로 도망쳤던 일이 있었다. 당시에는 창피하고 기도를 시킨 그 사람이 야속하기도 했지만 열심히 기도하여 지금은 큰 교회에서 장로로 충성하고 있다. 이것은 평소 대표기도의 준비와 훈련이 없었기 때문이다.
1. 모임의 성격을 파악하고 그에 맞는 기도를 하여야 한다.
- 헌신예배의 인도자가 개회기도를 하면서 나중에 할 기도까지 다 하는 경우
- 헌금기도를 하면서 드려진(혹은 드릴) 헌금에 대한 기도를 빼먹을 경우
- 어린이 예배 기도시간에 알아듣지 못할 어려운 신학용어만 나열하는 경우
- 식사기도를 하면서 준비한 분들의 수고를 기억하고 축복하여야 하는데···
아무튼 그 모임과 관계없는 기도는 피하라. 혹시 꼭 해야 한다면 간단히 하라.
특히 “이렇게 부족한 사람에게 기도할 수 있게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하는 식의 개인적인 기도는 금물이다.
2. 기도 시간을 잘 조정하라.
하나님은 어지러움의 하나님이 아니시요 오직 화평의 하나님이시다(고전 14:33).
“모든 것을 적당하게 하고 질서대로 하라”(고전 14:40).
주일 예배라든지 공식적 행사에는 시간 계획이 짜여져 있다. 만약 교회의 주일 예배시간이 60분인데 대표기도를 맡으신 분이 10분이나 15분쯤 한다면 전체 예배와 의 질서와 조화가 맞겠는가?
통상적으로 60-70분 예배의 경우 대표기도는 3분이 적당하고 아무리 길어도 5분을 넘지 않는 것이 좋다. 3분이란 시간이 기도자에게는 대단히 짧게 느껴지고 함께 머리를 숙이고 있는 사람에게는 대단히 길게 느껴지는 시간이다. 공중전화를 할 때 전화 거는 사람의 3분은 짧은데 뒤에서 기다리는 사람은 얼마나 지루한지.
특히 어린이 예배의 기도는 1-2분이면 족하다.
3. 모든 사람이 다 들을 수 있는 큰 목소리로 똑똑히 기도해야 한다.
할 수만 있으면 앞에 나와 마이크 앞에서 기도하는 것이 좋다. 이것이 어려우면 큰 목소리로 또박또박 기도를 해야 한다. 그래야 다른 사람들이 내 기도를 듣고 진심으로 “아멘” 할 것이 아닌가?
내가 무슨 기도를 했는지 듣지 못한 사람이 어떻게 아멘을 할 수 있겠는가? 너무 작은 소리, 똑같은 말을 자꾸 반복하는 기도 습관(아버지시여, 진정으로, 참으로 등).
특히 불미한 언사나 불미스런 내용이 나오지 않게 해야 한다.
이와 같은 기도를 하기 위해서는
첫째, 준비 기도를 철저히 하여야 한다.
어느 목사님은 기도 담당자가 그날 새벽기도회에 참석하지 않으면 기도를 시키지 않기도 한다. 준비 기도야 20분을 하건 30분을 하건 누가 말리겠는가, 새벽 시간이나 예배 전에 하고 싶은 기도를 다하고 그 중에서 가장 공감할 수 있는 내용을 뽑아 간단하고 명료하게 기도해야 한다. 준비 기도가 없으니 횡설수설 중언부언 기도가 길어진다.
둘째, 기도할 내용을 미리 메모해 두어야 한다.
기도 내용을 다 쓰라는 말이 아니다. 기도할 내용을 순서대로 몇 가지 메모하여 기도하면 꼭 해야 할 기도를 빼먹는다든지 횡설수설하지 않는다.
공적인 기도는 개인적인 기도와는 달리 사람들도 들어야 하는 기도이다. 그러므로 세심한 준비와 훈련이 필요하다. 그런데 막상 기도를 하려면 왜 그리 떨리고 힘들던지, 앞이 캄캄하고 별이 보이거나 기도 중에 말문이 막히는 이런 경험은 누구나 다 한 번씩은 경험한 것이다. 이런 과정을 통해 기도의 훈련이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먼저 가정예배나 구역예배 같이 몇 사람이 모인 자리에서 자꾸 기도를 해 보아야 한다.
'기도!! 기도문 !!' 카테고리의 다른 글
5만번 기도 응답 받은 뮬러를 변화시켰던 성경구절 (0) | 2021.09.09 |
---|---|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라 (0) | 2021.09.09 |
예배와 기도 (0) | 2021.09.09 |
성경이 가르치는 기도의 본질과 그 역할은 무엇인가 (0) | 2021.09.09 |
칼빈이 말하는 진정한 기도는 무엇인가? (0) | 2021.09.0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