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가지 사랑
20세기 최고의 기독교 변증가인 C.S. Lewis는 『네 가지 사랑』이라는 책을 통해,
헬라어에 기초해서 4가지 사랑에 대해 말했습니다.
▲1. 에로스(eros)의 사랑입니다..
이 사랑은 우리가 익히 들어 잘 알고 있는 대로 남녀 간의 사랑입니다.
대체적으로 사람들은 이런 에로스의 사랑을 육체적인 사랑이라며
천하게 여기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는 본시 남자와 여자 간의 기본적이고 본능적인 사랑입니다.
사람은 이성에게 사랑받고 싶어 하고 또 이성을 사랑하고자 합니다.
세상의 많은 노래와 문학, 예술 작품이 이 남녀 간의 사랑에 기초하고 있습니다.
여기에 사랑의 기쁨이 있고 사랑의 슬픔이 있습니다.
『로미오와 줄리엣』,『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등이 그런 것입니다.
이런 사랑이 있으므로 결혼이 가능하고 가정이 탄생됩니다.
우리는 이런 사랑 속에서 자신들을 닮은 자녀들을 낳아 키우고 싶어 합니다.
그런데 이 사랑은 울타리가 있는 사랑입니다.
이 사랑은 독점하고 싶은 사랑입니다.
울타리를 쳐서 남이 들어오지 못하게 하는 사랑입니다.
만일 이 사랑에 제 삼자가 끼어들면 거기에 질투가 생기고 비극이 발생합니다.
질투가 없다면 그것은 사랑이 아닙니다.
그런데 우리가 가만히 생각해보면
하나님도 우리를 사랑하시되 질투하시며 사랑하십니다.
성경을 보면 하나님은 신랑이시고 성도는 신부로 묘사된 곳이 많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 한분만을 사랑하기 원하십니다.
우리가 하나님 외에 우상을 사랑하고 그 앞에 절할 때 하나님은 질투하십니다.
하나님의 사랑에는 이렇게 에로스적인 면이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뜨겁게 사랑하신다는 증거입니다..
▲ 2. 스토르게(storge)의 사랑입니다.
이 사랑은 자식에 대한 부모의 희생적인 사랑을 가리킵니다.
부모가 자식을 사랑하는 데는 아무런 이유가 없습니다.
다만 상대가 자기 자식이라는 그 이유 하나만으로 그가 예쁘고 사랑스러울 뿐입니다.
고슴도치도 자기 새끼가 가장 예쁘다고 합니다.
부모님들은 자기 자식이 가장 예쁩니다.
너무 사랑스러워서 자신의 모든 수고를 드려 사랑합니다.
결혼을 할 때 남편에게서 공주대접을 받고 싶은 꿈을 갖지만
자식을 낳으면 이 자식을 위해서라면 자존심을 다 꺾어
남의 집의 가정부 일도 하고, 시장 바닥에서 좌판을 벌이기도 합니다.
이 사랑이 있기 때문에 아이들이 보호받고 사랑 속에서 성장합니다.
우리 교회에도 어머니들이 자기 자녀들을 얼마나 많이 사랑하는지 모릅니다.
아이들이 까만 눈을 굴리며 예쁘게 자라는데 그 배경에는
부모의 사랑이 있기 때문입니다.
스토르게의 사랑은 자기가 낳았기 때문에
자식이 무슨 짓을 하든 항상 변함없이 사랑하는 희생적인 사랑입니다.
한국에 기러기 아빠들이 많습니다. 왜 이런 외로운 아빠들이 많이 생겼습니까?
자식들 공부시키느라고 생긴 것입니다.
입시제도 때문이 아니라, 자식에 대한 사랑 때문에 생긴 것입니다.
자식 잘되기만을 바라면서 이역만리 먼 곳으로
사랑하는 아내도 보내고 홀로 밥해 먹으면서 삽니다.
한 청년이 여우같은 여자와 사랑에 빠져 청혼하였습니다.
그랬더니 그 여자가 나와 결혼하고 싶으면
당신 어머니의 심장을 가져오라고 했습니다.
아들은 자기 어머니에게 가서 자기가 결혼해야하니까 심장을 달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어머니는 정말 자식에게 심장을 주었습니다.
청년은 너무 기뻐서 그 심장을 두 손에 받쳐 들고 신나게 여자에게 달려갔습니다.
그런데 이 청년은 달려가다가 그만 돌부리에 걸려 넘어졌습니다.
이때 아들이 놓친 심장이 떼굴떼굴 굴러갔습니다.
이때 심장이 말했습니다. “얘야, 다친데 없니?”
이것이 부모의 자식에 대한 사랑입니다.
눅15장에 탕자의 비유가 나옵니다.
이는 자식에게 배반당하지만 그 아들을 끝까지 참고 기다리며
돌아오면 뜨겁게 영접해주는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에는 이렇게 스토르게적인 면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아버지 이십니다.
하나님은 자녀 된 우리를 부모의 희생적인 사랑으로 사랑하십니다.
▲ 3. 필레아(philia)의 사랑입니다.
이 사랑은 친구간의 사랑, 곧 우정을 말합니다. 이 사랑에는 비밀이 없습니다.
자기 아내에게는 말 못해도 친구에게는 합니다.
우정은 어떻게 보면 쉽게 형성되고 쉽게 깨지는 것같이 보입니다.
그러나 순수한 우정은 그렇지 않습니다.
평생을 가며 한 세상 사는 동안 서로를 위로하고 지켜줍니다.
친구를 위해 보증을 섰다가 재산을 떼어도
이를 잘 감당해 주는 것은 거기 우정이 있기 때문입니다.
죽마고우(竹馬故友) 라는 말은 '대말을 타고 놀던 벗'이라는 뜻으로,
어릴 때부터 같이 놀며 자란 벗 이라는 것입니다.
지란지교(芝蘭之交) 라는 말이 있는데, 이것은 지초와 난초의 교제라는 뜻으로,
벗 사이의 맑고도 고귀한 사귐을 이르는 말입니다.
금란지교(金蘭之交) 라는 말도 있는데, 친구 사이가 너무 가깝기 때문에
그 벗함이 쇠보다 굳을 뿐 아니라, 그 향기가 마치 난초와 같다는 뜻입니다.
관포지교(管鮑之交)라는 말이 있습니다. 중국 춘추전국 시대에
관중과 포숙이라는 친구가 있었습니다. 관중은 능력이 많았지만 가난했습니다.
친구 포숙은 이 친구를 잘 이해하고 사랑해 주었습니다.
포숙은 왕에게 천하를 다스리려면 관중을 기용해야한다며 관중을 천거했습니다.
훗날 관중은 자기 친구 포숙에 대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와 포숙이 젊은 시절, 둘이서 장사할 때, 내가 이익을 더 챙겼는데
이때 포숙은 내가 가난했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내가 벼슬길에서 물러나게 되었을 때, 사람들은 내가 무능하다고 했지만,
포숙은 내게 운이 따르지 않은 것이라고 했습니다.
내가 전쟁터에서 도망갔을 때 사람들은 내가 비겁한 겁쟁이라고 했지만,
포숙은 나에게는 늙으신 어머님이 있어서 그랬다고 했습니다.”
관중이 말했습니다.
“나를 낳아준 사람은 부모지만, 나를 알아준 사람은 포숙입니다.”
우리 교회 안에도 이 관포지교의 사랑이 가득하기를 기도합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을 친구(필로스)로 부르신 적이 있습니다.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보다 더 큰 사랑이 없나니
너희는 내가 명하는 대로 행하면 곧 나의 친구라.
이제부터는 너희를 종이라 하지 아니하리니 종은 주인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라.
너희를 친구라 하였노니 내가 내 아버지께 들은 것을 다 너희에게 알게 하였음이라.
요15:13-15
하나님의 사랑에는 이렇게 필레아적인 면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친구 삼으시고, 하나님 역사의 동역자로 영접하셨습니다.
출애굽기를 보면 하나님이 사람이 친구와 이야기함같이
모세와 이야기 했다고 했습니다. 출33:11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친구 삼으셨습니다.
그리고 성도들 간의 사랑, 성도들의 하나님에 대한 사랑도
필레오로 나타나는 경우가 있습니다. 바울은 이런 말을 했습니다.
형제를 사랑(필라델피아, 필레아)하여 서로 우애하라. 롬12:10
만일 누구든지 주를 사랑(필레아)하지 아니하거든 저주를 받을 지어다. 고전16:22
이런 필레아의 사랑은 성경에서 종종 아가페의 사랑과 구분 없이 쓰이기도 합니다.
이 사랑은 그만큼 귀하고 아름다운 것입니다.
▲4. 아가폐(agape)의 사랑입니다.
이 아가페의 사랑은 에로스적인 요소와 스토르게적인 요소와 필레아적인 요소가
다 포함되어 있는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하나님은 택한 백성을 질투하기까지 절대적으로 사랑하십니다(에로스).
또 하나님은 자식을 품에 안은 여인보다 우리를 더 불쌍히 여기시고 사랑하십니다
(스토르게).
하나님은 우리를 친구처럼 사랑하십니다(필레아).
모든 비밀을 우리에게 다 알려주시고 늘 함께 하시며 사랑하십니다.
이 하나님은 독생자를 주시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아가폐).
이보다 더 큰 사랑은 없습니다.
이 하나님의 사랑은 이타적인 사랑이며, 절대적입니다.
변함이 없습니다. 무조건적입니다. 신실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이처럼 사랑하시는 것은 하나님의 본질이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삼위일체 하나님은 서로 사랑하시되
서로에서 자신을 온전히 양보하기까지 사랑하셨습니다.
그래서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은 나누일 수 없는 하나이며, 그 자체가 사랑이십니다.
이 아가페의 사랑은 오직 하나님에게만 있는 사랑입니다. 우리에게는 없습니다.
사람이 잠시 이타적인 사랑을 하기는 합니다. 그러나 계속 그렇게 할 수는 없습니다.
인간의 내면은 죄로 타락해 있고 이기심으로 부패되어 있습니다.
아가페의 사랑을 실천하는데 계속하기에 힘에 겨워 이내 형식적이 되고,
의무가 되고, 마침내 이를 부담스러워하며 포기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은바 되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성령님을 통해 우리 마음에 그 사랑을 부어 주실 때
우리는 이 사랑을 실천할 수 있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이 하나님의 사랑을 깨달은 사람들입니다.
성령님을 통해서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사랑을 깨달았고 맛보았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부족해도 기도하므로 고전13장의 아가페 사랑을 베풀 수 있습니다.
이 사랑은 그리스도인만이 이해하고 실천할 수 있는 것으로,
사실 이 아가페의 사랑은 그리스도인들만의 특권입니다.
우리가 이 사랑을 배우므로 사랑이 풍성한 하나님의 사람이 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이를 통해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충만히 누리며 부부간에,
또 부모님과 자녀들 간에, 하나님 역사의 동역자들 간에,
목자와 양들 간에 한 단계 더 높은 사랑의 교제를 이룰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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