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논문 소논문

루터의 작품에서 드러나는 이원론적인 구도

하나님아들 2021. 7. 19. 20:16

루터의 작품에서 드러나는 이원론적인 구도  이진일목사

 

목 차  

I.  서론  

  1. 연구동기  

  2. 문제제기  

  3. 연구방법  

 

Ⅱ. 루터의 작품을 통한 이원론적인 구도 연구  

  1. 성경과 관련된 서문들    

  2. 그리스도인의 자유  

  3. 두 종류의 의  

  4. 갈라디아서 주석  

  5. 노예 의지론  

  6. 교회의 바벨론 포로  

  7. 세속권세 : 어느 정도까지 복종하여야 하는가  

  8. 독일민족의 귀족에게 고함  

  

Ⅲ.이원론적인 구도 채택 이유  

  1. 시대적인 상황  

  2. 루터의 문학양식  

  

Ⅳ. 한국교회에 적용  

  1. 한국교회의 문제점  

  2. 루터로부터 배울 점  

  3. 적용점들  

    1) 설교  

    2) 사회 제 분야  

 

Ⅴ. 결론

 

                                          I. 서 론

 

 1. 연구동기  

  본 소논문은 루터가 자신의 저작에서 의도적으로 믿음과 행위라는 이원론적인 구도를 사용하여 자신의 주요한 이론-이신칭의 사상-을 전개하고 있음을 밝히고자 한다.

 

루터는 이원론적인 구도를 사용하여서 당시 카톨릭의 핵심적인 사상-공로사상-을 공격하고 있다. 루터가 카톨릭의 핵심사상을 반박하기 위해서 의도적으로 채택한 글의 양식이 이원론적인 구도라는 것이다.

 

루터가 처한 시대적인 상황과 루터의 문학양식, 그리고 루터의 성격등을 종합하여 볼 때, 루터가 의도적으로 이원론적인 구도를 채택하여 상당히 전투적이고 강력하게 카톨릭의 공로사상에 대항하고 있음을 알 수가 있다.

 

또한 루터의 저작에서 사용되는 이원론적인 구도는 철저하게 성경을 통하여 지지되고 있기 때문에 거대한 카톨릭 조직에 대항한 일개 기독교인 루터의 종교개혁이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루터의 저작에서 드러나는 이원론적인 구도는 루터를 이해하고 또한 한국교회가 나아갈 방향을 제시하는 중요한 요소이다.  

 

 2. 문제제기  

루터가 사용하는 이원론적인 구도는 타협과 절충의 여지를 전혀 남기고 있지 않다. 루터가 자신의 저작에서 이원론적인 구도를 과감하게 사용할 수 있었던 것은 성경의 토대 위에서 이 구도를 전개해 나갔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루터의 글들을 읽는 독자들은 명쾌함과 깊은 호소력, 그리고 호전적인 전투력을 느낄 수가 있는 것이다. 그러나 현재 한국교회는 루터가 자신의 저작에서 보여준 이러한 단호함과 명쾌함, 그리고 호소력을 많이 상실하고 있다. 물론 시대적인 상황이 루터의 시대와는 다르기 때문에 루터처럼 극단적인 구도를 사용할 필요가 없다고 주장할 수도 있다. 그러나 종교개혁의 선구자 루터가 보여주는 타협과 절충을 거부하는 이원론적인 구도는 오늘날 무사안일주의와 절충주의로 흘러가고 있는 설교단에 서 있는 설교자들과 생활의 터 위에 서 있는 모든 기독교인들, 곧 한국교회가 각성하고 실천해야 할 점이다.        

 

 3. 연구방법

루터는 만인제사장주의, 선행론, 소명론, 이신칭의, 면죄부 반박 등을 비롯해서 수 많은 주제의 저작들을 발표했다. 그러나, 많은 주제들의 근간을 이루고 있는 핵심적인 주제는 바로 이신칭의 사상이다. 그러므로 본 소논문은 루터에게 있어서 가장 핵심적인 사안인 이신칭의사상을 중심으로 해서 살펴볼 것이다. 이신칭의 사상을 중심으로 해서 루터가 믿음과 행위라는 이원론적인 구도를 자신의 저작에서 사용하고 있음을 연구할 것이다. 그리고 그리스도인의 선행 부분은 공로사상과 연결되는 행위가 아니라 오히려 믿음과 연결되는 행위이므로, 본 소논문의 주제와 벗어나는 부분이다. 따라서 본고에서는 별로 언급을 하지 않을 것이다.  

 

 

                     II. 루터의 작품을 통한 이원론적인 구도 연구  

 1. 성경과 관련된 서문들  

 이 책에서 루터는 믿음과 행위라는 이원론적인 구도속에서 믿음의 우위성을 입증한다. 각각의 서문들을 통하여 루터가 이원론적인 구도 속에서 믿음의 우위성과 행위의 무효성을 강력하게 주장하고 있음을 밝히고자 한다.

 

  1) 서문  

서문에서 루터는 "사실 복음은 우리를 거룩하게 만들고 우리를 구속하기 위하여 어떠한 행위도 요구하지 않는다. 실제로 복음은 그러한 행위들을 정죄하며 오로지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만을 요구한다"라고 말하며 믿음과 행위를 이원론적인 구도에 놓고 믿음의 우위성을 주장한다.

 

  2) 로마서서문  

로마서서문에서는 믿음과 율법을 이원론적으로 말하고 있는데, 루터가 말하는 율법의 성취는 공로와 연관된 인간의 행위를 언급하는 것은 절대로 아니다. 오히려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를 획득한 인간이 이제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율법의 요구를 성취하는 것을 말하고 있다. 즉, 율법의 성취가 인간의 공로와는 전혀 무관하며 오직 그리스도의 사역에 근거하고 있으므로 여기서도 믿음과 율법은 이원론적인 구도 속에서 말해지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루터는 로마서서문에서 다음과 같이 믿음의 우위성을 말하고 있다. "우리는 믿음만이 우리를 의롭게 하며 율법을 성취한다는 결론에 도달한다. 그리고 이것은 믿음이 우리에게 그리스도의 공로에 의해 얻어진 영을 가져다 주기 때문이다" 이처럼 루터는 믿음의 차원에서 율법의 성취, 선행, 행위를 말하는 것이지 공로의 차원에서 말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3) 야고보서와 유다서 서문  

루터가 야고보서를 정경에서 제외하는 주된 첫 번째 이유를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첫째로, 성 바울 및 성경의 다른 모든 책들과는 직접적으로 상치되게 야고보서는 칭의를 행위에 의한 것으로 돌리고 있으며 아브라함은 자기 아들을 제물로 드린 자신의 행위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었다고 선언하고 있다" 이처럼 루터가 야고보서를 정경에서 제외하는 첫 번째 이유가 칭의를 행위에 의한 것으로 야고보서는 말하고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루터는 믿음과 행위의 이원론적인 구도 속에서 야고보서를 보았기 때문에 이처럼 단순하고 무모하게도 야고보서를 정경에서 제외시켜 버렸다. 루터에게 있어서 공로사상과 연관되는 행위는 믿음과 행위의 이원론적인 구도 속에서 도저히 수용될 수 없었다.

 

  

 2. 그리스도인의 자유  

루터의 저작들 중에서 [그리스도인의 자유]는 루터의 사상을 드러내는 대표적인 작품으로 평가된다. 여기서도 루터는 믿음과 행위라는 이원론적인 구도 속에서 철저하게 행위를 거부하는 것을 볼 수가 있다.

 

더욱이 온갖 종류의 행위는 그만두고라도 정관과 명상을 비롯하여 영혼이 할 수 있는 모든 일조차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한다. 한 가지, 오직 한 가지만이 그리스도의 생명과 의와 자유를 위하여 필수적이다. 그 한가지란 바로 그리스도의 복음인 하나님의 가장 거룩한 말씀인데, 이에 대해 그리스도께서는 요한복음 11:25에서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라고 말씀하고 있으며, 또 요한복음 8:36에서 '그러므로 아들이 너희를 자유케 하면 너희가 참으로 자유하리라'고 말씀하고 있고, 또 마태복음 4:4에서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만 있다면 그밖의 다른 모든 것이 없다고 할지라도 영혼은 살아갈 수 있으며, 또한 하나님의 말씀이 없는 곳에서는 영혼을 위하여 전혀 도움이 없음을 확고부동한 사실로 생각하자

 

루터는 여기서 행위와 반대되는 믿음을 하나님의 말씀과 연관시켜 말하고 있다. 루터는 하나님의 말씀을 믿음과 연관시켜 공로사상과 연관되는 행위의 무효성을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하나님의 말씀은 행위에 의해서가 아니라 오직 믿음에 의해서 받을 수 있고 품을 수 있다. 그러므로 영혼이 그 생명과 의를 위하여 오직 하나님의 말씀만을 필요로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의롭게 되는 것도 행위로가 아니라 오직 믿음으로 된다는 것은 분명하다" 루터는 계속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믿음과 연관시켜 행위와의 이원론적인 구도 속에서 행위를 거부하며 믿음의 우위성을 강력하게 말하고 있다. "...그러므로 이것은 영혼이 행위 없이 신앙만에 의하여 하나님의 말씀으로 의롭게 되고 거룩하게 되며 참되고 화평하고 자유케 되고 모든 축복으로 충만케 되며 진정으로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방식이다" 루터는 철저하게 믿음과 행위의 이원론적인 구도 속에서 말하고 있는데, 여기서 말하는 행위가 그리스도인의 선행과는 구별되는 공로에 의한 것임을 다음의 루터의 주장에서 알 수가 있다. "만약 신앙이 있다면 행위들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행해질 수는 있지만, 행위라는 것은 생명이 없는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을 영화롭게 할 수는 없다" 이처럼 루터에게 있어서 믿음의 차원에서 설명되어지는 선행이 아니라 믿음과는 동떨어진 공로사상과 연관되는 행위는 절대로 용납할 수가 없다. 루터의 이원론적인 구도 속에서 행위는 철저하게 거부되며 오직 믿음만이 요구됨을 알 수가 있다. 루터는 이것을 계속해서 더욱 강력하게 말하고 있다. "그리스도인은 만물로부터 자유로우며 만물에 대하여 자유로우므로 자기를 의롭게 하고 구원하기 위하여 어떠한 행위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는 것을 누구나 분명히 알 수 있다. 신앙만이 이 모든 것을 풍족하게 공급해 주기 때문이다. 그러나 만약 그가 어떤 선행으로 의롭고 자유롭게 되며 구원을 받고 그리스도인이 된다고 생각할 정도로 어리석게 된다면, 그는 즉시 신앙과 신앙의 모든 유익을 잃게 될 것이다" 루터는 공로와 연관되는 행위의 무효성을 주장하면서, 그리스도인의 선행을 믿음과 대립되는 행위와 연관시켜서 선행의 무효성을 주장하지  못하도록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러한 행위들을 행함에 있어서 인간이 그것들에 의해 하나님 앞에서 의롭게 된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하나님 앞에서 의가 되는 신앙은 그러한 잘못된 생각을 용인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러한 행위들이 몸을 복종하게 하고 몸의 악한 정욕을 깨끗케 하며 우리의 모든 목적이 오직 정욕을 몰아내는 것을 지향한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루터는 믿음과 행위의 이원론적인 구도 속에서 자신의 글을 전개하면서도 그리스도인의 선행이 공로사상과 연관되는 행위와 혼동을 일으키지 않도록 믿음의 차원에서 유발되는 그리스도인의 선행과 불신앙의 차원에서 유발되는 행위와의 구별을 명확하게 하고 있다. "자신의 신앙에 의하여 성별된 그리스도인이 선을 행하는 것이지 선행이 그리스도인을 더 거룩하게 하거나 더 그리스도인답게 하지는 않는다...그리고 만약 어떤 사람이 먼저 신자와 그리스도인이 되지 않는다면, 그의 모든 행위는 전혀 아무 것도 아니게 되고 참으로 악하고 저주받을 죄가 될 것이다...따라서 선행을 행하기를 원하는 사람에게는 행위를 행하는 것으로부터가 아니라 그 사람을 선하게 만드는 신앙으로부터 시작하게 하라. 신앙 외에 그 어떤 것도 사람을 선하게 만들지 못하며 불신앙 외에 그 어떤 것도 사람을 악하게 만들지 못하기 때문이다...그러므로 우리는 선행을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가능한 한 많이 선행을 소중히 여기며 가르친다. 우리가 행위를 정죄하는 것은 행위 자체 때문이 아니라 거기에 덧붙여진 이러한 악한 부가물과 이를 통하여 의를 얻을 수 있다는 악한 생각때문이다" 루터는 [그리스도인의 자유]에서 신앙과 행위라는 이원론적인 구도 속에서 모든 글을 써내려 갔다. 신앙과 행위라는 이원론적인 구도 속에서 신앙의 우위성과 행위의 무효성을 적나라하게 밝혀 놓았다. 그러나, 루터는 독자가 그리스도인의 선행과 공로와 연관된 행위를 혼동할 것을 우려해 그리스도인의 선행은 공로사상과는 상관없는 철저하게 믿음에 근거되어 있음을 동일하게 이 이원론적인 구도 속에서 설명하고 있다.

 

3. 두 종류의 의        

루터는 [두 종류의 의]에서 외래적인 의와 우리 자신의 고유한 의라는 이원론적인 구도로 내용을 전개하고 있다. 여기서 루터가 말하는 외래적인 의는  앞에서 언급한 신앙,믿음과 동일한 의미를 가지는 것이다. "첫번째는 외래적인 의로서 밖으로부터 스며들어온 다른 분의 의입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의로서 고린도전서 1:30에 "예수는 하나님께로 나와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속함이 되셨으니"라고 기록된 것처럼 그리스도께서는 이 의를 통해 믿음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의롭다 하십니다" 이처럼 루터는 [그리스도인의 자유]에서 하나님의 말씀과 믿음을 연결시킨 것 처럼 여기서도 그리스도의 의와 믿음을 연결시켜 말한다. 따라서 외래적인 의는 믿음과 동일한 것이다. 그리고 외래적인 의와 이원론적인 구도 속에 놓은 우리 자신의 의에 대해서 루터는 후자를 철저하게 배격하며 후자를 전자에 복속시킨다. 즉, 우리 자신의 고유한 의 자체의 무효성을 주장하며 외래적인 의와 더불어서 행해질 때 비로소 의미를 가진다고 말한다.

 

 두번째 종류의 의는 우리 자신의 고유한 의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홀로 그것을 행하기 때문이 아니라 외래적인 첫번째 의와 더불어 우리가 그것을 행하기 때문에 두번째 의가 됩니다. 이것은 첫째로 육을 죽이고 자기와 관련된 욕망을 십자가에 못 박는 가운데 선한 행실을 하면서 유익하게 보내는 삶의 방식입니다...이 의는 첫번째 유형의 의의 산물인데, 실제로 그 열매이자 결과입니다...첫번째 의를 통해 영혼에게 '나는 너의 것이다'라고 말하는 신랑의 음성이 울려나오는 반면에, 두번째 의를 통해 '나는 당신의 것입니다'라고 대답하는 신부의 음성이 나옵니다

 

이처럼 루터는 외래적인 의를 통해서만 우리를 의로워질 수 있다고 말하고, 우리 자신의 고유한 의 자체의 무효성을 이원론적인 구도 속에서 말하고 있다. 우리 자신의 고유한 의가 외래적인 의와 더불어 행해질 때, 비로소 가치와 의미가 있음을 말하고 있다.

 

 

 

4. 갈라디아서 주석  

루터는 [갈라디아서 주석]에서 수동적 의와 능동적 의라는 이원론적인 구도 속에서 수동적 의의 우위성과 정당성을 입증하고 있다. 루터는 수동적 의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그러나 이 가장 뛰어난 의, 믿음의 의(하나님은 이 의를 행위 없이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전가하신다)는 정치적인 것도 의식과 관련된 것도 아니며 하나님의 율법의 의도 아니며 우리의 행위들로 이루어진 것도 아니며 그와는 반대로 깨끗하다. 즉 위에서 말한 다른 의들이 능동적인 의라고 한다면 이 의는 전적으로 수동적인 의이다. 이 의와 관련해서 우리가 하는 것이라고는 아무 것도 없으며, 우리는 하나님께 아무 것도 드리지 않고, 단지 우리는 우리 안에서 역사하는 하나님을 받아들이며 경험한다. 그러므로 내게는 이 믿음의 의 또는 그리스도의 의를 수동적 의라고 부르는 것이 좋을 듯 싶다.

 

루터가 말하는 수동적 의는 앞에서 언급한 믿음, 신앙, 하나님의 말씀, 그리스도의 의와 동일한 것이다. 이와는 반대로 능동적 의는 우리 자신의 고유한 의, 행위, 율법 등과 동일한 것이다.

 

 이 세상의 황제들과 제후들, 철학자들과 법률가들이 다루는 정치적 또는 시민적 의가 있다. 또한 사람들의 유전들이 가르치는 의식과 관련된 의도 있다. 이 의를 부모들과 학자들은 아무런 위험없이 가르칠 수 있다. 왜냐하면 그들은 그 의에 죄를 보속하고 하나님을 달래거나 은혜를 받을 만한 어떤 힘을 부가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은 행동거지들의 교정에 꼭 필요한 예법들과 이 세상의 삶에 관한 어떤 관찰들을 가르친다. 이것들 외에도 모세가 가르치고 있는 율법의 의, 십계명의 의라고 부를 수 있는 의가 있다. 이것을 우리는 믿음의 가르침 이후에 가르치기도 한다.

 

이처럼 루터는 능동적 의와 수동적 의라는 이원론적인 구도 속에서 능동적 의의 무효성과 수동적 의의 우위성을 계속해서 입증하고 있다. "세상에 있는 만물 가운데서 율법이 가장 뛰어나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렇지만 율법은 괴로워 하는 양심을 고요하게 하지 못하고 공포를 증대시키며 양심을 절망으로 몰고 갈 뿐이다. 왜냐하면 계명으로 인해서는 죄는 극도로 죄로 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환난을 당하고 괴로워 하는 양심은 그리스도 안에서 거저주어지는 은혜의 약속, 즉 이 믿음의 수동적 의 또는 그리스도의 의를 부여잡지 않는다면 절망과 영원한 죽음에 대항한 치료책을 갖지 못한다" 루터는 능동적 의의 한계를 지적하면서 수동적 의의 필요성을 설명하고 있다. 루터는 이러한 이원론적인 구도 속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수동적 의를 강조하면서 능동적 의의 상징인 율법의 무효성까지 주장하고 있다. 이는 이원론적인 구도 속에서 필연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에 율법에 대하여 무지하고 마치 율법이 없는 양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는 법을 배우라고 가르치는 것은 세상에 대하여 매우 이상한 것이고 세상이 모르는 것이다. 그렇지만 당신이 율법을 모르고 당신의 마음 속에 율법도 없고 하나님의 진노도 없으며 오로지 그리스도로 인한여 은혜와 자비만이 있다는 것을 확신하지 않는다면 당신은 구원받을 수 없다" 루터는 율법의 행함이 공로로 인한 의의 획득이 될 수 없음을 여기서 단호하게 말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의 율법은 그리스도인의 믿음의 차원에서의 행함이 아니다. 루터는 더욱 명확하게 능동적 의와 수동적 의의 이원론적인 구도를 다음에서 말하고 있다.

 

 그러므로 내가 이미 율법에 의해 충분히 멍들고 억압을 받고 있으며 죄로 인해 두려움에 떨고 있는 가운데 위로를 갈망하고 있는 사람을 볼 때 그것은 내가 그의 시야로부터 율법과 능동적 의를 제거하고 그 사람 앞에 복음을 통해 기독교적 수동적 의를 갖다놓아야 할 때이다... 그리스도의 의는 새사람에게 속하고, 율법의 의는 육체와 피로부터 태어난 옛 사람에게 속한다. 이 옛 사람에게는 나위에게와 마찬가지로 그를 내리누르는 짐이 지워져 있음에 틀림없고, 그는 먼저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통하여 새 사람을 입지 않는다면 성령의 자유를 누리지 못한다"

 

루터는 이제 한 걸음 더 나아가 지도자들에게 이원론적인 구도로 들어오도록 요청하고 있다. 이 구도 속에서 참된 믿음과 거짓 행위를 구별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가 다른 사람들의 교사와 지도자라면 우리가 이러한 문제들에 지극한 관심을 기울여서 율법의 의와 그리스도의 의의 이러한 구별을 잘 할 필요가 있다. 이러한 구별은 말로 하기는 쉽지만 실제 경험 속에서는 매우 힘들다. 물론 그러한 구별을 그렇게 부지런히 행하지도 않고 있긴 하지만 말이다. 왜냐하면 죽음의 순간에 또는 양심이 고뇌하는 다른 경우들에 이 두 종류의 의는 당신이 원하거나 바라는 것보다 더 가까이 만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나는 다른 사람들은 제쳐두고서라도 양심의 훈육자와 지도자가 될 당신에게 권하노니 그대들은 연구와 읽기와 하나님 말씀에 대한 묵상과 기도를 통하여 끊임없이 연습하여서 유혹의 때에 그대들이 당신 자신의 양심과 다른 사람들의 양심을 가르치고 위로하며 그들을 율법으로부터 은혜로, 능동적이며 행위에 의한 의로부터 수동적이며 받아가지는 의로, 즉 모세로부터 그리스도로 이끌어 올 수 있어야 한다.           

 

루터는 수동적 의와 능동적 의라는 이원론적인 구도 하에서 내용을 전개하면서 수동적 의의 우위성을 계속해서 말하고 있다. 루터에게 있어서 공로로 연결되는 능동적 의는 전혀 무가치 한 것이다. 루터가 말하는 유효한 선행은 능동적 의가 공로와 연관되지 않고 수동적 의, 즉 믿음의 차원에서 행해질 때 가치가 있다는 것이다. 루터는 공로와 연관되는 선행은 믿음과의 이원론적인 구도 속에서 철저하게 배격했지만, 믿음의 차원에서의 선행은 적극적으로 강조하고 있다.

 

 이렇게 우리가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가르칠 때 우리는 선행도 가르친다. 그대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붙잡았고 그분으로 인하여 의롭게 되었기 때문에 그대는 이제 선행을 하기 시작한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며, 하나님께 간구하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며, 하나님을 찬양하며, 하나님께 고백하라. 이웃을 선대하며 섬기라. 그대의 직무를 다하라. 이러한 것들은 참다운 선행으로서 마음 속에 알고 있는 이 믿음과 기쁨으로부터 흘러나오는 것이다. 우리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값없이 죄사함을 받았기 때문이다

 

이처럼 현재 카톨릭의 핵심교리인 공로사상과 대결하는 루터에게서는 공로와 연관되는 행위는 절대로 용납될 수가 없었다. 그러나, 루터는 믿음의 차원에서의 선행을 절대로 희생시키지 않았다. 이것은 루터의 이원론적인 구도 하에서 공로와 연관되는 행위를 배척하고 믿음의 차원에서의 선행을 부각시키는 것은 가능한 사항이었다. 루터에게는 믿음의 차원에서의 선행은 곧 믿음 그 자체였기 때문에 믿음의 차원에서의 선행을 강조하는 것도 마찬가지로 믿음과 행위의 이원론적인 구도 속에서 강조하는 것이다. 이것에 대해서 루터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것 즉 율법의 행위로 말미암아서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된다는 것은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의 참된 의미이다. 우리는 사랑과 선행이 함께 결합된 믿음이 우리를 의롭게 한다고 말하는 학자들의 악한 해설이 아니라 바로 위에서 말한 것 위에 서야 한다...우리는 의롭게 하는 힘이 사람을 하나님에게 받음직하게 만드는 저 형식[즉 사랑의 행위]에 돌려서는 안되고 그 힘을 마음 속에서 구주이신 그리스도를 인정하고 소유하는 믿음에 돌려야 한다. 이 믿음은 사랑의 행위 없이 그리고 사랑의 행위 이전에 우리를 의롭게 한다.

 

루터는 [갈라디아서 주석]에서 예리하게 수동적 의와 능동적 의라는 이원론적인 구도 속에서 수동적 의의 우위성과 필요성, 그리고 공로와 연관된 능동적 의의 무효성을 철저하게 주장했다.   

 

5. 노예의지론  

루터는 [노예 의지론]에서 자유 의지와 노예 의지라는 이원론적인 구도 속에서 노예 의지의 우위성과 정당성을 입증한다. 노예 의지론은 에라스무스와의 자유의지에 대한 논쟁이다. 에라스무스가 말하는 자유 의지는 카톨릭의 공로 사상과 거의 흡사하다. 루터는 에라스무스가 하나님의 자비를 염두에 두고 있으나 인간의 의지와 노력으로 얻는 의를 말하고 있다고 다음과 같이 비난했다.           

 

 당신이 그려낸 기독교의 개요는 다른 것들보다도 이것을 포함하고 있다. '우리는 우리의 모든 힘을 다하여 노력하고 참회의 치유하는 향기에 의존하여야 하며 하나님의 자비를 부여안으려고 온갖 노력을 다 기울여야 한다. 하나님의 자비 없이는 사람의 의지와 노력은 아무런 효력도 발휘하지 못한다.' 그리고 '본성자체가 사랑 자체이신 하나님으로부터의 사죄받는 일에 대하여 누구도 절망하여서는 안된다.' 당신의 이러한 그리스도도 없고 성령도 없는 말들은 얼음보다도 더 차다. 실제로 그런 말들은 당신의 웅변적인 말들의 아름다움을 망치고 있다. 아마 이런 말들은 당신이 독재적인 교황청이 두려워서 완벽한 무신론자로 보이지 않도록 하기 위하여 당신에게서 마지못해 나온 승이들이리라(가엾은 사람

 

  어쨌든 다음과 같은 것이 당신의 말이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우리 안에는 힘이 있다;우리의 모든 힘을 다하여 노력하는 것이 존재한다;하나님 안에는 자비가 있다;그 자비를 부여안는 여러 방법들이 있다;본성상 의롭고 사랑 자체인 하나님이 존재한다 등등. 그러나 우리가 이 '힘'이 무엇인지-사람이 무엇을 할 수 있으며 무엇이 사람들에게 행해지는지-이 '노력하는 것'이 무엇인지, 그것의 효력의 범위와 한계는 무엇인지를 알지 못한다면, 우리는 무엇을 하여야 하는가? 당신은 우리에게 무엇을 하라고 말할 것인가?

 

루터는 계속해서 에라스무스가 주장하는 인간의 공로와 연관되는 자유 의지는 존재하지도 않는다고 주장한다.

 

 그러므로 당신 자신의 증언을 토대로 하더라도 우리는 모든 것을 필연적으로 행하며 '자유 의지'에 의해 행해지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것은 확정된 진리이다. '자유 의지'의 권능은 무이고 자유 의지는 은혜 없이는 선을 행하지 않고 행할 수도 없기 때문이다. (당신이 '효능'이라는 말을 완성을 의미하는 것으로 새롭게 사용함으로써 '자유 의지'는 실제로 어떤 것을 뜻하고 시작할 수 있지만 그것을 완성할 수 없다는 것을 시사하지 않는다면 말이다. 이것을 나는 믿지 않는다. 나는 이 점에 대해서 나중에 더 자세히 말할 것이다.) 그러므로 '자유 의지'는 분명히 오직 하나님께만 적용될 수 있는 용어라는 결론이 나온다. 오직 하나님만이 "자신이 하늘과 땅에서 뜻하시는 모든 것"(시135:6)을 할 수 있고 하기 때문이다(시편 기자가 노래하고 있듯이).       

 

이처럼 루터는 자유 의지에 반대해서 노예 의지라는 이원론적인 구도로 하나님의 자비와 은혜, 믿음의 필연적인 우선성을 강조한다. 루터가 에라스무스에 대항하여 주장하는 이원론적인 구도의 한 부부인 노예 의지의 의미는 다음과 같다.

 

 당신은 '자유 의지'의 권능을 작고 하나님의 은혜와 동떨어져서는 전적으로는 효력을 발휘할 수 없는 것으로 서술하고 있다. 동의하는가? 그렇다면 나는 이렇게 당신에게 묻겠다:하나님의 은혜가 결여되어 있고, 자유 의지가 그 작은 권능으로부터 제거된다면, 자유 의지는 무엇을 할 수 있는가? 그것은 아무런 효력도 발휘할 수 없으며 선한 것을 아무 것도 할 수 없다고 당신은 말한다. 따라서 자유 의지는 하나님 또는 하나님의 은혜가 뜻하는 것을 행하지 않을 것이다. 왜냐고? 우리는 지금 자유 의지로부터 하나님의 은혜를 떼어놓았고 하나님의 은혜가 행하지 않는 것은 선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은혜 없이는 '자유 의지'는 결코 자유롭지 않으며 악의 영속적인 죄수이자 노예라는 결론이 나온다. 왜냐하면 자유 의지는 선을 행할 수 없기 때문이다.

 

루터의 자유 의지와 노예 의지라는 이원론적인 구도 하에서 인간의 공로와 연관되는 자유 의지는 여지없이 무너지며 하나님의 은혜와 연관되는 노예 의지의 우위성이 적나라하게 입증 되고 있는 셈이다.

 

 솔직히 고백하건대 나는 그것이 가능하다고 하더라도 '자유 의지'가 내게 주어지길르 원하지 않으며 구원을 추구할 수 있는 그 어떤 것이 내 손에 남아 있기를 원치 않는다. 단지 수많은 위험들, 대적들, 마귀들의 공격에 직면하여 내가 나의 지반을 굳히고 나의 '자유 의지'를 굳건하게 붙잡을 수 없기 때문만이 아니라(왜냐하면 마귀 하나가 인간 전체보다 더 강하며, 그렇기 때문에 어떤 사람도 구원받을 수 없기 때문이다) 위험이나 대적이나 마귀가 없다고 하더라도 나는 여전히 아무리 노력해도 성공한다는 보장이 없고 허공을 향해 주먹질하는 격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나아가 나는 나의 행위의 공로 때문이 아니라 내게 약속하신 하나님의 자비로우신 호의 때문에 내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있다는 마음 편한 확신을 지니고 있다. 따라서 내가 거의 일을 하지 않거나 나쁘게 일을 하더라도 하나님은 그것을 내게 돌리지 아니하시고 아버지의 사랑으로 나를 용서하시며 나를 더 낫게 만드신다. 이것이 그들의 하나님 안에서의 모든 성도들의 영광을 누리는 모습이다.

 

루터는 카톨릭의 공로사상 앞에서 담대하게 복음의 요점인 이신칭의를 외쳐야 했다. 그러기 위해서 루터는 카톨릭의 공로사상과 이신칭의라는 이원론적인 구도 속에서 철저하게 공로사상을 무너뜨리고 이신칭의의 구도를 새롭게 세워야 했다. 그러므로 [노예 의지론]이라는 저작 속에서도 카톨릭의 공로사상과 연관되는 에라스무스의 자유 의지에 반대해서 이신칭의와 연관되는 자신의 노예 의지를 통하여서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 믿음의 우위성을 강력하게 입증하고 있는 것이다.   

 

6. 교회의 바벨론 포로

교회의 바벨론 포로에서도 루터는 행위와 신앙이라는 이원론적인 구도를 사용하고 있다.

  1) 성찬

루터는 성찬, 즉 미사에 대해서 행위와 믿음이라는 이원론적인 구도를 사용하여서 미사의 믿음의 우위성을 입증한다. 루터는 미사가 하나님과의 약속이며 행위와는 상관없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내가 논증한 대로 미사가 하나의 약속이라면 우리는 우리 자신의 어떤 행위나 능력이나 공로를 통해서가 아니라 오직 신앙으로써 스스로를 준비할 수 있다. 왜냐하면 약속을 지키시는 하나님의 말씀이 존재하는 곳에서는 그 약속을 받아들이는 사람의 신앙을 필요로 한다. 우리의 구원은 우리의 신앙에서 시작되며 신앙이란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굳게 부여잡는 것이라는 것은 분명하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할 수 있는 모든 것과는 상관없이 아무 공로 없이 거저 얻어지는 그분의 자비를 보이시며 자신의 약속의 말씀들을 주신다:하나님은 먼저 우리의 행위를 받으신 다음 우리를 구원하시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다른 무엇보다도 선행한다. 그 다음에 신앙이 따르며 신앙 다음에 사랑이 따른다.

 

루터는 미사가 공로와 행위의 측면으로 카톨릭이 이끌어가고 있다고 생각해서, 믿음과 행위의 이원론적인 구도를 내세워서 미사는 인간의 행위와 공로와는 아무 상관없는 믿음과 약속에 근거해 있음을 밝히고 있다.

 

 왜냐하면 약속과 신앙 이 두 가지는 필연적으로 한데 묶여 있다는 것을 누구나 쉽게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약속이 없다면 아무도 믿을 수 없다. 믿음이 없다면 약속이 아무 쓸모가 없다. 약속은 믿음이라는 짝을 만나서 완성되기 때문이다. 이러한 고찰들을 통하여 단지 약속에 불과한 미사는 신앙 가운데서만 참석하여 드려질 수 있다는 것을 누구나 쉽게 추론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신앙이 없다면 기도, 자기 준비, 선행, 외적인 표징들, 무릎꿇기와 같은 부수적인 것들은 경건한 예배가 아니라 불경건한 예배를 촉진시키는 것들이 된다. 이런 식으로 스스로를 준비한 사람들은 자신들이 제단에 나아갈 권리를 갖고 있는 것으로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그들은 다른 어느 때보다도 또 다른 어떤 수단들을 통하여 준비했을 때보다도 더 부적합하게 되어 있는 것이다.

 

루터는 계속해서 믿음과 행위라는 이원론적인 구도에서 미사에 관한 인간의 행위의 무효성과 미사의 본질에 관한 믿음의 우위성에 대해서 설명한다. "미사는 다른 사람들이 공유할 수 있는 행위가 아니라 내가 이미 설명한 대로 신앙의 대상이라는 결론이 나온다. 그리고 미사의 목적은 각자의 개인적인 신앙에 자양분을 공급해주고 강화하기 위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사와 선행을 연관지우는 카톨릭 교도들에게 루터는 믿음과 행위라는 이원론적인 구도 하에서 더욱 충격적인 주장을 한다.

 

 그리스도께서 최후의 만찬에서 이 성례를 처음으로 베푸시고 이 언약을 세우실 때 그리스도는 자기 자신을 하나님께 드리지 않으셨으며 다른 사람들을 위하여 선행을 행하지도 않으셨다. 그는 식탁에 앉으셔서 한 사람 한 사람 앞에서 이와 동일한 언약을 하시고 동일한 표징을 주셨다. 우리의 미사가 그리스도께서 최후에 만찬에서 행하신 저 최초의 미사에 가까워지면 가까워질수록 그 미사는 더욱더 기독교적이 될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거행하신 미사는 극히 단순한 것이어서 예복, 무릎꿇기(장궤), 찬송 및 다른 의식들이 전혀 없었다. 만약 그리스도 자신을 희생제물로 드릴 필요가 있었다면 그리스도께서 제정하시 미사는 완전한 것이 되지 못했을 것이다...우리가 반론을 제기할 것이 아무 것도 없다고 할지라도 미사가 하나의 선행이나 희생제사라는 것을 용인하기보다는 모든 것을 다 거부하는 편이 더 안전할 것이다.   

 

루터가 성찬을 다루는 이유도 카톨릭의 공로사상의 무효성과 믿음의 우위성을 입증하기 위함이었기 때문에 여기에서도 마찬가지로 믿음과 행위의 이원론적인 구도를 사용하였던 것이다. 루터에게서 공로와 연관된 선행, 행위는 그 어떤 것도 용납될 수 없었다. 루터의 성찬에 대해서 마무리하는 말을 들어보자.           

 

 당신은 흔들리지 않는 신앙으로 그리스도께 매어달려야 한다. 당신은 언약의 말씀이 선포하는 것이 당신에게 거저 주어진다는 것을 믿어야 한다. 당신이 이것을 믿지 않는다면, 어떤 선행이나 어떤 유의 노력에 의해서나 결코 어디에서도 당신은 양심의 평안을 얻을 수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오직 신앙만이 양심의 평화를 뜻하며 불신앙은 고뇌만을 뜻하기 때문이다.   

 

  (2)세례의 성례

루터는 세례도 성찬과 마찬가지로 믿음과 행위의 이원론적인 구도하에서 바라본다.

 

 그러므로 당신은 행위의 외적인 과시와 사람이 만든 규정들의 궤계에 의해 속지 않도록 함으로써 하나님의 진리와 당신 자신의 신앙에 대하여 잘못을 저지르는 일이 없도록 매우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당신이 구원을 받고자 한다면 당신은 어떤 행위들에 앞서 성례들에 대한 신앙으로부터 시작하여야 한다. 당신의 신앙이 아주 연약하지 않다면 행위는 신앙에 뒤따라 올 것이다. 사실 신앙은 모든 "행위들" 가우데서 가장 뛰어나고 가장 어려운 것이다. 당신이 어떤 다른 행위들을 하는 것이 방해를 받는다고 할지라도 당신은 오직 신앙만으로 지탱해 나갈 수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신앙은 바울이 가르치고 있는 바와 같이 인간의 행위가 아니고 하나님의 행위이기 때문이다. 다른 행위들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통하여 그리고 우리의 도움으로 행하시지만, 신앙의 경우에는 우리 안에서 그리고 우리의 협동 없이 행하시는 것이다.

 

7. 세속 권세 : 어느 정도 까지 복종하여야 하는가

루터는 이 글에서도 의식적으로 이원론적인 구도를 사용하고 있다. III. 에서 루터는 아담의 자손들을 이원론적인 구도로 분류하고 있다.

 

 우리는 아담의 모든 자손들을 두 부류로 나누어야 한다. 첫번째 부류는 하나님 나라에 속하고 두번째 부류는 세상의 나라에 속한다. 하나님 나라에 속하는 자들은 그리스도를 진심으로 믿는 자들로서 그리스도께 복종한다...마찬가지로 성령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모든 율법으로 그들을 가르치는 것보다 훨씬 그 이상의 것을 행하고 율법을 지킬 수 있는 성향이 철저히 갖추어져 있으므로 그들에 관한 한 어떠한 계명이나 율법도 필요치 않다. 그렇다면 왜 하나님은 모든 사람들에게 그토록 많은 계명들을 주셨으며 왜 그리스도는 복음서에서 그토록 많은 것들을 행하라고 가르치고 있느냐고 당신은 물을 것이다...그것을 여기서 가급적 간단하게 표현한다면, 바울은 우리가 나중에 듣는 것처럼 율법이 불의한 자들로 인하여 주어졌다, 즉 그리스도인이 아닌 사람들이 율법으로 말미암아 악한 행실을 외적으로 억제될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주어졌다고 말한다.

 

이처럼 루터는 하나님 나라에 속한 자와 세상 나라에 속한 자라는 이원론적인 구도 하에서 전자에게 있어서 율법의 불필요함을 입증하고, 후자에게 있어서 율법의 필요성을 역설하고 있다. 계속해서 루터는 IV에서 이원론적인 구도 하에서 세상 나라에 속한 자를 위한 정부의 존재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그리스도인이 아닌 모든 사람은 세상의 나라에 속하며 율법 아래 있다. 믿는 자는 드물고 더구나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삶을 살아가며 악에 대적치 않고 스스로 악을 행치 않는 자는 더욱 드물기 때문에, 하나님은 비그리스도인들을 위하여 기독교 세계와 하나님 나라 바깥에 다른 정부를 마련하셨고 그들로 하여금 칼에 복종토록 함으로써 비록 그들이 악을 행하고자 하여도 행할 수 없게 하고 만약 그들이 악을 행한다면 두려움 없이 또는 평온하고 번성하는 가운데 악을 행할 수 없도록 하였다.   

 

루터의 글「세속 권세」는 세속 권세의 존재 가치와 정당성을 말하고 있으나, 사실은 세속 권세가 세상 나라에 속한 사람들을 위한 법이라는 전제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 나라와 세상 나라라는 이원론적인 구도하에서 하나님 나라에 속한 그리스도인들의 우월성을 입증하고 있는 셈이다.

 

 먼저 아담의 자손의 두 부류, 즉 그리스도 아래에서 하나님 나라에 있는 자손들과 국가 아래에서 세상의 나라에 있는 자손들은 위에서 말했듯이 두 종류의 법을 갖고 있다. 각각의 나라는 자기 자신의 법과 규율을 가지고 있어야 하는데, 일상의 경험이 충분히 입증하여 주듯이 법 없이는 어떠한 나라나 정부도 존재할 수 없다. 세상 정부는 생명과 재산, 이 땅 위에서의 외적인 것에만 미치는 법을 갖고 있다. 영혼에 대해서는 하나님 외에는 아무도 다스릴 수 없고 다스리게 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세속 권세가 영혼에 대한 법을 규정하려고 하는 곳에서는 그것은 하나님의 정부를 침해하고 영혼들을 그릇 인도하고 파괴하는 결과만을 가져온다.

 

루터의 「세속 권세」에서는 하나님 나라와 세상 나라는 이원론적인 구도 하에서 내용이 물흐르듯이 전개되어지고 있다. 세속 권세의 필요성과 정당성, 세속 권세에 대한 그리스도인의 복종의 기준과 한계 등이 이원론적인 구도 하에서 잘 설명되어지고 있다. 그러나, 이 글도 이원론적인 구도를 사용하고 있기에 하나님 나라에 속한 사람들의 우수성과 세상 나라에 속한 사람들의 열등함을 반영하고 있음을 알 수가 있다.     

 

8. 독일 민족의 귀족에게 고함

루터는 이 글에서도 이원론적인 구도를 사용하여 카톨릭의 세가지 담을 무너뜨리는 작업을 하고 있다. 루터가 말하는 첫번째 담은 소위 카톨릭이 말하는 영적 계급이 속권에 의해 위협을 받을 때에 속권은 자기들에 대한 관할권이 없으며 오히려 정반대로 영권이 속권보다 우월하다는 입장이다. 그러나, 루터는 카톨릭이 주장하는 영적 계급과 속권이라는 이원론적인 구도로 오히려 진정한 의미에서 영적 계급에 속한 자들과 속권에 속한 자들을 분류하며 로마카톨릭의 첫번째 담을 무너뜨리며 영적 계급에 속한 자들의 우위성을 입증한다.

 

 그러므로 지금 “영적 계급”으로 불리는 자들, 즉 사제, 주교, 교황들은 다른 그리스도인들보다 더 큰 위엄을 지니고 있는 것이 아니며 단지 하나님의 말씀을 해설하고 성례를 거행하는 것을 그들의 의무로 가지고 있을 따름이다-이것이 그들의 직무이다. 마찬가지로 세속적인 권세들은 “칼과 회초리를 가지고”있는데 , 그들의 임무는 악행하는 자를 벌하고 법을 지키는 자를 보호하는 것이다. 제화공, 대장장이, 농부는 각기 자신의 직업과 일을 갖고 있으면서도 그와 아울러 그들 모두는 사제와 주교로서 행할 자격이 있다.

 

첫번째 담에서 루터가 사용하는 이원론적인 구도는 영적인 권세와 세속적인 권세이다.   

 

그리고 세번째 담에서 루터는 교황의 공의회 소집권에 대한 논박을 하고 있다. 루터는 여기서도 그리스도의 권세와 그리스도를 거스리는 교황의 권세라는 이원론적인 구도를 사용하여 그리스도의 권세가 최종적인 권세임을 못박아 말하고 있다.

 

 그러므로 어떠한 그리스도인의 권세도 그리스도를 거스려 행사될 때에는 유효하지 않다는 것을 굳게 견지하도록 하자...어떤 권세가 그리스도를 거스려 어떤 것을 행한다면 비록 그 권세가 이적들과 역병들을 비오듯 쏟아지게 한다고 할지라도 그것은 다 적그리스도와 마귀의 세력에 기인하는 것이다.

 

 III. 이원론적인 구도 채택 이유

루터가 자신의 작품에서 믿음과 행위라는 이원론적인 구도를 채택하여 자신의 전개해 나간 이유가 있다. 루터의 저작 전반을 통하여 볼 때, 이러한 이원론적인 구도는 상당히 의도적으로 사용되었음을 알 수가 있다. 루터의 저작에서 볼 수 있는 이원론적인 구도는 한 가지 이유만이 아니라 몇가지 원인이 복합적으로 영향을 미쳤다고 볼 수가 있다. 루터가 이원론적인 구도를 채택하여 자신의 저작을 전개했던 복합적인 첫번째 원인은 루터가 처한 시대적인 상황과 연관이 되며, 둘째는 루터의 문학적 양식에 기인한다.

 

1. 시대적 상황

루터가 이원론적인 구도를 의도적으로 채택한 첫번째 이유는 당시의 시대적인 상황에서의 필연적 선택의 성격을 강하게 띄었다고 할 수 있다. 루터가 카톨릭을 상대로 95개조 반박문을 발표한 이후 루터와 카톨릭의 관계는 급속하게 얼어붙었다. 사실 루터가 95개조 반박문을 발표했을 때는 그 내용을 볼 때에 카톨릭과의 타협과 절충을 어느 정도 염두에 두고 많은 면에서 카톨릭적인 냄새를 풍기고 있음을 알 수가 있다. 아래의 95개 조항 중 일부분은 루터가 어느 정도 연옥사상에 관하여 인정을 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16. 지옥과 연옥과 천국의 차이는 절망과 불확실과 확신의 차이와 같은 것이다.

 

 17. 사실 연옥에 있는 영혼들의 고통은 경감되어야 하고 이에 비례하여 자비는 증가되어야 한다.

 

 18. 교황이 열쇠의 권세에 의해서가 아니라 그들을 위한 중보기도의 방법으로 연옥에 있는 영혼들에게 사면을 허락한다면 그것은 아주 잘하는 일이다.

 

그리고 38조항에서는 루터가 교황의 권위를 인정하고 면죄부의 존재 가능성에 대해서 긍정적으로 인정할 수 있는 여지를 남겼다는 것을 알 수 있다. “38. 그렇지만 교황의 면죄와 그의 특별사면을 결코 무시해서는 안된다. 왜냐하면 이미 말한대로 그것들은 하나님의 사면을 선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루터는 절대로 카톨릭의 틀을 벗어난 것이 아니라, 카톨릭의 틀 안에서의 온건한 개혁을 시도했다는 것을 알수가 있다. 그러나, 카톨릭 측에서는 루터의 95개조 반박은 충격적인 내용이었고, 그래서 이러한 반역적인 상황을 철회시키기 위한 여러 가지 중재와 조치를 곧바로 취하였으나 루터의 거부로 다 물거품이 되어버렸다. 이런 상황이 오래도록 진전됨에 따라 루터와 카톨릭의 골은 더욱 깊어만 갔고, 마침내 카톨릭에서는 1520년 6월15일 루터를 반박하는‘엑수르게 도미네’(일어나소서, 주여)라는 교서를 발표했다. 이 교서가 발표된 직후 루터의 태도는 더욱 급진적으로 나아가게 된다. “루터에게 아주 분명한 것이 하나 있었다. 그것은 누가 자기를 돕거나 말거나 자신의 입장을 밝히려는 태도였다.‘내게 있어서 주사위는 이미 던져졌다. 로마의 격노도 로마의 호의도 싫다. 다시 그들에게 저주하고 불사르게 내버려 두라. 나로서는 불이 이 세상에 있는 한 교회법을 모조리 저주하고 불살라 버리겠다.’” 루터가 처한 시대적인 상황은 루터에게 있어서 참혹한 전장터 그 자체였다. 그러므로 루터는 95개조 반박문을 발표하고 일련의 카톨릭과의 논쟁을 벌이면서 서서히 카톨릭의 잔재를 벗어버리는 것을 볼수가 있다. 마침내 루터는 다음 해인 1521년 4월16일 보름스 회의에서 카톨릭과의 완전한 결별을 선언하는 발언을 하고 만다.   

 

 루터가 대답했다. “황제 폐하, 귀족 제후 각하들은 아주 간단한 대답을 요구하고 계시군요. 여기 숨김 없고 간단한 대답이 있습니다. 성경의 증거와 명백한 이성에 비추어 나의 유죄가 증명되지 않는 이상, 나는 교황들과 교회 회의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겠습니다. 사실 이 양자는 서로 엇갈린 주장을 펴 오고 있습니다. 내 양심은 하나님의 말씀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왜냐하면 양심에 어긋난 행동을 한다는 것은 옳지 않을 아니라 안전하지도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여 이 몸을 도우소서, 아멘.” 맨 처음 인쇄물에는 “나는 여기에 확고부동하게 서 있습니다. 나는 달리 어찌할 도리가 없습니다”하는 말이 덧붙여져 있다.

 

이러한 급박한 시대적인 상황, 목숨이 걸린 전쟁터와 같은 상황에서 루터가 택할 수 있는 문체는 강력한 호소력을 갖춘, 하나를 완전히 부정하는 이원론적인 구도였던 것이다. 루터는 더 이상 물러설 곳이 없었다. 루터에게 물러선다는 것은 곧 죽음을 의미하였기 오히려 더욱 철저하게 이원론적인 구도를 사용하여 카톨릭의 핵심을 공격하였던 것이다. 루터의 저작 중에서 카톨릭의 조직이나 교리, 일부분이 여전히 인정이 된다고하더라도 사실 카톨릭 교리의 핵심이 이원론적인 구도하에서 거부되었기 때문에 카톨릭은 철저하게 거부되어질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카톨릭에서 공로사상을 제거하면 카톨릭의 뼈대가 제거되는 것이기 때문에 루터의 이원론적인 구도하에서의 공로의 거부와 믿음의 우위성은 카톨릭에 대한 철저하고도 완전한 거부가 되는 것이다. 루터가 의식적으로 이원론적인 구도를 택할 수 밖에 없었던 이유는 당시의 시대를 장악하고 있던 거대한 공룡과도 같은 카톨릭과의 일개 개인인 루터의 목숨을 건 전쟁이라는 시대적인 상황에 기인한다.

 

2. 루터의 문학양식

루터가 이원론적인 구도를 사용한 두번째 이유는 루터의 문학적 양식에 기인한다. 루터의 저작 전반을 통하여 볼 때 루터는 의도적으로 이 양식을 택하여 자기가 강조할려는 의도와 목적을 성취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이원론적인 구도는 시이소오와 같은 구조라고 볼 수가 있다. 한 쪽이 올라가면, 한 쪽이 내려오는 구도가 이원론적인 구도이다. 루터에게서 볼 수 있는 문학적인 구도는 바로 한쪽편을 올리고 다른 쪽 편을 내리는 구도이다. 이런 구도를 택하면 부정하는 쪽에 의해 강조하고자 하는 쪽은 상당히 조명이 집중이 된다. 이 구도를 택해서 글을 쓰면 독자들에게 강력한 호소를 할 수가 있고, 또한 상당히 전투적인 글이 되어서 독자들에게 명쾌함을 주게 된다. 루터의 글 전반을 통해서 볼 때「앞의 글,pp.-」 이러한 이원론적인 구도를 볼 수 있다. 이러한 점으로 미루어 보아 루터의 문학양식과 이원론적인 구도의 연관성을 볼 수가 있다. 루터가 이원론적인 구도로 자신의 방대한 저작을 전개해 나간 것은 우연이라고 볼 수 없으며, 시대적인 상황만이 그 이유라고 할 수도 없다. 루터가 이원론적인 구도로 자신의 저작 전반을 전개해 나간 것을 볼 때에 루터의 문학양식에서 그 원인을 찾을 수가 있다.

 

 

                                  III. 한국교회에 적용     

16세기의 시대적 상황이 드러난 전장터라면 오늘날의 시대적 상황은 드러나지 않는 치열한 전장터라고 말할 수 있겠다. 정체된 교회, 기복신앙, 기독교적 생활의 상실, 사회 전반의 부패, 기독교인의 만성적 타락, 기도원의 난립, 복음의 희석과 같은 상황이 16세기 종교개혁이 발발하던 종교적, 사회적 상황과 흡사한 면이 있다. 따라서 오늘날 한국교회의 문제점을 검토하고 루터로부터 그 대안과 적용점을 찾고자 한다.   

 

1. 한국교회의 문제점

개신교 전래 110년을 지나는 한국교회는 오늘날 세계교회가 주목할 만한 성장을 이루었다. 전체 개신교회의 수와 교인들의 증가뿐 아니라 모범적인 대형교회들이 많이 생겼다. 한국의 총신대학교에서 수년간 교수로 봉직하였고, 현재는 웨스터민스터 신학교 선교학 교수인 간하배 박사는 "한국교회가 1960년에는 4%의 기독교 인구에서 1990년에는 30% 이상으로 성장하였고, 세계 10개의 초대형 교회 중에서 5개의 초대형 교회가 한국에 있고, 현재 한국교회의 세계 선교 현황은 제3세계 교회가운데 해외 선교를 가장 활발하게 전개하고 있는 나라이며, 1995년 선교사 훈련원의 보고에 의하면 세계 50여개국에 3천명의 선교사들이 파송되어 있고, 5천 4백여개처의 교회 수를 자랑하고 있는 장로교 합동 교단에서는 1994년까지 551명의 선교사를 파송하고 있다"고 말한다. 한국교회의 이러한 성장은 1990년대에 가서도 계속 될 것이라는 예측까지 나왔다. 교회성장 학자 피터 와그너(Peter Wager)는 세계적으로 교회성장의 빛나는 예는 한국교회에서 찾을 수 있다고 하면서 백년 전에는 기독교인이 하나도 없었으나 "현재는 기독교인이 인구의 30%에 달하며, 1980년대 말에는 50%가 넘을 것이다"고 예측하였다. 이러한 유래없는 급성장 속에서 계속되는 성장주의 정책과 이로 인한 부담감으로 앞에서 언급한 일련의 문제점들이 한국교회에 파생되었다. 이와 같은 한국교회의 문제점들은 기독교의 토대라고 할 수 있는 복음이 한국교회의 급성장과 맞물려서 사회적인 요구로 인해 희석됨에 따라서 발생하게 된 도미노식 문제점들이라고 볼 수 있겠다. 그러므로 현재 한국교회의 가장 중요한 문제점은 복음의 희석이다. 여기로부터 현재 한국교회가 안고 있는 문제점이 파생되는 것이다. 복음은 타협과 절충의 대상이 아니다. 그러나, 한국교회는 교인의 확보를 위해서 복음의 절충을 시도하고 있다. 복음이 값싼 복음으로 전락되고 있다는 것이다. 주님께서 제시하신 선택의 기준은 '주님이냐', '아니냐'이다. 중간은 없었다. 양자택일을 요구하는 것이 복음이다. '죽음'이냐, '생명'이냐를 택하는 것이 복음이다. 타협과 절충은 복음위에 그 자리를 펼수가 없다. 초대교회의 신앙의 선배들은 '주님이냐,황제냐', '죽음이냐, 생명이냐'의 갈림길에서 주님을 선택했고, 죽음을 선택했다. 이들에게서 타협과 절충은 복음의 이원론적인 구도-주님이냐, 세상이냐-하에서 전혀 생각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오늘 한국교회는 주님과 세상이라는 이원론적인 구도가 아닌 제3의 다소 모호한 회색 지역을 만들어 놓고 안주하고 있는 것에서 여러 가지 제 문제가 파생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 제3의 지역은 변증법적인 구도 하에서 발생할 수 있는 타협과 절충의 모색지이다.

 

2. 루터로부터 배울점

본고에서는 루터가 가지고 있는 이원론적인 구도를 연구했다. 루터는 이원론적인 구도 하에서 카톨릭의 공로사상을 공격하고 믿음의 우선성을 입증하였다. 그러므로 루터에게서 타협과 절충은 볼 수 없었다. 루터의 이원론적인 구도를 통해서 독자들은 복음 그 자체를 볼 수 있고, 복음의 절대성과 비타협성, 역동성을 볼 수가 있는 것이다. 만약 루터가 이원론적인 구도를 택하지 않았더라면, 이러한 복음의 역동성과 절대성은 드러나지 않았을 것이고 과연 루터의 개혁이 성공할 수 있었을까 하는 의구심이 생긴다. 루터의 저작에서 드러나는 이원론적인 구도는 초대교회의 신앙의 선조들이 가지고 있던 동일한 구도였고, 또한 오늘날 한국교회가 계승해야 하는 구도이다. 이러한 복음과 신앙에 있어서 이원론적인 구도의 상실과 변증법적인 구도의 발생은 필히 복음을 변질 시킬 수 밖에 없고 또 신앙을 변질 시킬 수 밖에 없다. 루터가 오늘날 한국교회에 물려 주는 위대한 유산은 세상과의 타협과 절충의 모색지를 없애버린 복음에 있어서의 이원론적인 구도이다. 한국교회는 이러한 복음의 이원론적인 구도를 물려받아서 타협과 절충이 아닌 희생과 헌신, 필요하다면 수반되는 막대한 고통까지도 감수할 수 있어야 한다.

 

 3. 적용점들

루터의 복음에 있어서의 이원론적인 구도의 적용점은 그리스도인의 사고와 생활 전 부분에 관계되어 있다.   

  1) 설교

교회의 중심 사역은 설교 사역이다. 그러므로 설교는 교회의 심장과 같다고 할 수 있다. 심장에 이상이 생기면 온 몸이 제대로 기능할 수 없는 것 처럼, 설교에 이상이 생기면 교회로서의 존재가치와 의미를 상실하게 된다. 이런 의미에서 한국교회에서는 먼저 설교단에서의 이원론적인 구도의 회복이 필요하다. 예를 들면 5공, 6공 시절에 많은 한국교회가 이원론적인 구도하에서 정치권의 잘못을 지적하지 못하고 침묵을 지킨 적이 있다. 그리고 오늘날 한국교회의 많은 설교자들이 이원론적인 구도하에서의 설교보다는 장로와 교인들 의식한 설교를 하고 있다는 것이다. 한국교회에서 가장 먼저 루터의 이원론적인 구도가 적용되어야 할 곳은 바로 강대상이다.   

 

  2) 사회 제 분야

그리고 사회 제 분야-정치,경제,문화,의료계,법조계 등-에서 복음의 이원론적인 구도가 그리스도인에 의해 실현되어야 한다. 세상은 그리스도인에게 끊임없는 타협을 요구하지만 그리스도인은 루터가 행한 이원론적인 구도로 타협과 절충의 끈을 끊어야만 한다. 오늘날의 사회가 만성적인 부패에 시달리는 이유도 그리스도인의 복음에 있어서 이원론적인 구도의 상실이 큰 원인이다. 루터가 자신의 안락을 위해서 카톨릭과의 타협과 절충을 시도했더라면, 루터의 글들은 전투적인, 호소력이 배어있는 이원론적인 구도를 갖추지 않았을 것이다. 사회의 개혁은 그리스도인의 이원론적인 구도하에서의 사고와 생활로 말미암아 가능하다.             

 

 

                                           V. 결 론

  이신칭의에 한정해서 루터의 이원론적인 구도를 연구하였다. 이러한 이원론적인 구도는 루터의 저작 전반에서 명확하게 드러나고 있다. 그러므로 루터가 의도적으로 이원론적인 구도를 사용했음을 알 수가 있다. 그 이유는 첫째는 그 시대의 주류인 카톨릭과 대항하기 위한 의도였고, 둘째는 루터의 문학양식에 기인한다는 것이다. 루터가 사용하는 이원론적인 구도는 루터에게서 카톨릭과의 타협과 절충을 모색할 수 없게 하였고, 그러므로 오늘날 개신교회를 태동하게 만든 저력이었다. 오늘날 한국교회는 유래없는 급성장과 더불어 복음의 확장을 지속하기 위한 노력 속에서 오히려 복음이 약화되고 사회에서의 영향력을 잃는 현상을 보게 된다. 이러한 현상은 세상과의 타협을 거부하며 복음의 절대성을 드러내는 이원론적인 구도의 상실로 인한 것이다. 초대교회로부터, 루터에게 이어져 내려온 복음의 이원론적인 구도의 적용이 오늘날 한국교회에 절실하게 요구된다. 

 

[출처] 루터의 작품에서 드러나는 이원론적인 구도|작성자 크로스라이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