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세 오경

창조와 함께 구속의 서막 - 창세기의 신학적인 내용에 대한 연구 -

하나님아들 2021. 5. 3. 19:45

창조와 함께 구속의 서막 - 창세기의 신학적인 내용에 대한 연구 -


1. 창세기 - 성경의 위대한 서론

처음 기독교를 믿는 사람이나 오랫동안 믿어오던 사람이나 관계없이 성경의 첫 번째 책인 창세기에서 세상, 인간, 그리고 이스라엘이라는 세 종류의 역사의 장엄한 시작에 대하여 경외심을 가지고 읽게 된다. 이 세 종류의 역사는 성경 전체가 나타내고자 하는 모든 신학적인 내용의 중요한 기초가 된다.

이 책에서 물론 기독교의 핵심적인 내용인 예수 그리스도가 직접 언급되지는 않았으나 그가 오셔야 할 필요, 그의 위치, 그의 사역의 내용등이 예상되어있고 예언되어 있다. 그러므로 이 책은 성경의 새로운 단위이며 예수 그리스도를 본격적으로 소개하는 신약과 직접 관련될 뿐 아니라 그의 재림을 다루는 성경의 마지막 책인 계시록과도 연관이 된다. 이렇게 창세기는 성경의 통일성을 이루는데 절대적인 역할을 한다.

또 창세기는 그 자체로서 하나의 독립된 책이 아니고 모세 오경에 포함되어 있으며 오경내에서도 서론으로서의 역할을 한다. 즉 창세기에서 시작된 하나님 나라에 대한 역사적 묘사는 출애굽기를 거쳐서 레위기, 민수기까지 이어지며 그것이 다시 신명기에서 종합적으로 재정리된다. 구체적으로 창세기는 세계, 인간의 역사에 이어서 족장들을 통하여 민족으로서의 이스라엘이 준비되는 역사를 묘사한다. 그리하여 창세기는 이스라엘이 민족으로 형성된 애굽을 떠나 하나님과 시내산에서 언약을 맺으며 광야여행을 계속하여서 족장들에게 약속한 언약의 땅에 들어가기 직전까지의 과정을 묘사한 출애굽기부터 신명기까지의 내용의 서론이 되는 셈이다.

그러므로 만약 오경이 구약과 성경의 전체에 대한 기초요 서론이라는 일반적인 결론을 받아들인다면 창세기는 그야말로 성경 전체에 대한 서론의 서론인 셈이다.

그리고 내용적으로 창세기에서 말하는 것들은 역사속에서 일어난 일을 보고하는 역사적 의미를 지니고 있음과 동시에 그것이 교훈성을 지닌다. 무엇보다도 하나님 나라의 역사가 보존되고 새롭게 되는 과정에서 일어나는 사건들과 경험들은 역사성을 지닌다. 그러나 그것은 동시에 우리 인간의 일반적인 상태를 나타내기도 하여서 명확히 창세기를 읽은 사람에게 교훈적이다. 그래서 우리는 창세기를 통하여 하나님 나라 역사의 원대한 섭리와 계획과 진행을 믿고 받아 들이지만 동시에 그 속에서 우리가 현재에서 이루는 하나님 나라에 대한 개인적이고 공동체적인 교훈을 얻을 목적을 가질 기대를 가진다.

2. 창조

창조 ! - 그 장엄한 시작

무엇을 시작해 본다는 것은 언제나 신선한 감동과 설레임이 있는 기대감을 주는데 특히 아무 것도 없는데서 어떤 것을 창조한다는 것은 더욱 그러할 것이다. 성경의 창조는 바로 이러한 감동을 준다. '창조한다'( 1:1)라는 단어는 성경에서 하나님에게만 쓰였다. 또 목적어로 직접 창조되는 대상만이 표현되었을 뿐 창조에 사용되는 재료에 대한 언급이 없다. 이것으로 성경에서의 창조는 하나님의 절대주권적 행위요 인간이 흉내낼 수 없는 것이라는 점을 알 수 있다. 또 하나님의 창조의 내용은 '하늘과 땅'(1:1)으로 표현된 우주전체이다 (44:24). 이로서 창조주로서의 하나님의 유일한 행동이 장엄하게 선포되었다. 하나님은 이 일을 '태초에' 하셨고 훗날에 다시 우주를 새롭게 하실 것(65:17, 21:1)의 원형이 되게 하셨다. 그리고 이 하나님은 복수성(plurality)을 띄고 있음을 '하나님의 신'(1:2)이나 창조에서 표현된 '우리'구절들(1:26 이하)에서 볼 수 있다.

하나님은 창조사역에 있어서 명확한 질서를 가지고 하셨다. 6일동안의 사역을 통하여 먼저 된 창조사역의 기초위에 다음에 나올 사역이 놓여졌다. 시간이 지나갈수록 창조는 점점 더 복잡하게 상승되며 세분화되어간다. 그리고 각 단계가 명확한 구획이 지어져 있음을 하나님은 각 날에 '종류를 따라서' (1:11,12,21,24,25) 즉 어떤 페턴을 따라서 만드신 것으로 알 수 있다. 그런 페턴중에서 최종적으로 만들어진 것이 인간인데 인간은 특이하게도 하나님의 종류를 따라서 즉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서' 만들어졌다. 즉 하나님이 생각하신 어떤 페턴을 따라서가 아니라 바로 창조주 하나님 자신을 따라서 인간이 만들어졌다. 여기서 나타나는 인간의 탁월성은 고대 근동을 비롯한 거의 모든 창조설화에서 그 비슷한 것조차 찾아볼 수 없는 것이다. 1:1에서 하늘과 땅의 창조에 대한 선언 이후 하늘에 대한 묘사는 극히 제한되고 땅에 대한 것을 주로 설명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서 저자의 관심이 하늘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사는 삶의 조건인 땅을 중심한 창조사역에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하늘에 있는 것들에 대한 묘사가 있다 하더라도 그것은 인간이 살 땅을 비취는 역할을 하는 것으로 소개되었다 (1:14-19). 그런 인간 창조의 중요성 때문에 이제 그 인간을 중심으로 한 역사의 드라마는 다시 재조명되어서 2장 이하에서 구체적으로 드러난다.

창조와 구속의 모티브

창세기라는 것은 좋은 책명이 될 수 있지만 한편 이 책이 창조에 관한 내용만을 실고 있는 것으로 생각하게 만들 수 있다. 그러나 실제는 창조 자체에 대한 것은 초반중에서도 일부에 (1-2) 불과하고 대부분은 (3-50) 인간의 타락과 그 이후의 구속의 역사에 대해 할애되고 있다. 다시 말하면 창조에 이어서 나오는 인간의 타락과 심판 그리고 그것으로부터의 하나님의 구속은 이 책과 나머지 오경을 움직이는 강력한 추진력이 된다. 저자는 자신의 작품의 자연스러운 출발이 되는 창조를 언급함으로서 인간과 세계의 구속에 대한 설명의 기초를 놓을 수 있었다. 그러므로 창세기는 하나님의 인류 구속에 대한 간절한 소망이 담긴 책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창세기를 일반적으로 1-11장 그리고 12-50장 두 부분으로 나누는 것을 이해할 수 있다. 11장까지는 하나님의 심판으로서 홍수와 바벨탑 사건을 통하여 하나님 나라를 악에서 보존하시는 소극적인 사역의 방식을 말한다. 그러나 12장 이후는 인류를 구속하시려는 하나님의 적극적이며 전혀 새로운 조처와 방법들을 소개한다. 전자(1-11)에서 역사가 진행되고 비록 문화가 발전되어도 영적인 세계에 있어서는 발전대신 오히려 타락만이 있는 것 같으며 태어나는 아이마다 - 심지어 하나님의 선호하시는 아벨의 후손이라고 할지라도 - 악인들의 영향권아래 들어가 버리는 안타까운 모습을 본다. 그러나 이제 후자(12-50)에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당신의 나라를 진행시키는 방식은 소극적이거나 수동적이지 않고 능동적이며 적극적이며, 하나님 나라를 세우시기 위하여 역사에 개입하시는 하나님의 모습을 본다. 즉 한 사람 아브라함을 통하여 하나님 나라를 새롭게 하시는 역사를 시작하시려는 것을 본다. 이러한 행위는 새창조 행위이다. 이런 의미에서 창조와 구속은 서로 멀리 있는 것이 아니다. 이 점은 오경 전체를 통하여 구체적으로 제 7일에 표시된 안식의 개념에 드러나 있다 (2:1-3). 하나님이 창조하시고 난 뒤 쉬신 제 7일은 후대에 시내산 언약에서 제 4계명(20:8-11)에서 안식일로 제정되었지만, 그것이 애굽에서 구속받았기 때문에 안식할 것으로 확대된 것은 모압언약에서의 제 4계명(5:12-15)에서이다.

클로우즈업 기법 (close-up technique)

창세기의 초반은 문서설이 예로 드는 중요한 곳이었다. 다시 말하면 창조사역이 반복적으로 묘사되었기 때문에 다른 문서들을 조합한 결과였으리라 추측하였고 그러한 분석을 위한 근거로 신명(神名)이 사용되었다. 그러나 이것은 창세기를 근본적으로 잘못된 방향으로 이해하도록 만들었다. 이미 말한대로 1장에서 하나님의 창조사역을 묘사할 때 하늘에 대한 관심은 제외되고 땅에 대하여 집중적으로 묘사되었다. 그리고 이제 2장에서 땅에서 사는 모든 생물중에서 좁게 인간을 중심으로 창조사역을 설명하였다. 그리고 더 나아가 3장에서는 그 땅중에서 가장 중요한 곳인 에덴동산과 거기서 일어난 일에 집중하여서 묘사하였다. 이렇게 창조를 설명할 때에 줌렌즈를 사용하여서 먼거리의 물체를 점점 가까이 보면서 한 곳에 드디어 초점을 ㅁ추는 클로우즈업 기법(close-up technique)을 사용한 것을 알 수 있다.

2. 인간

하나님의 닮은 꼴로서의 인간

창조에 있어서 인간은 모든 피조물들중에서 유일한 위치를 차지한다. 그것은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 '하나님의 모양으로' (1:26) 창조되었기 때문이다. '형상'( )'모양'( )이 전형적인 히브리 문학기법인 평행법(parallelism)을 통하여 사용된 것으로 인정한다면 이 표현의 가장 중요한 의미는 인간이 하나님의 닮은 꼴로 창조되었다는 점이다.

하나님의 복수성과 인간의 복수성 (1:26)

그러면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의 실제적인 내용을 고려해 볼 수 있다. 본문 자체를 보면 1:26은 하나님 자신의 선언이고 1:27은 그 선언에 대한 저자의 보충 설명이다. 1:26에서 선언된 하나님의 닮을 꼴에 대한 선언이 무엇을 의미하는가를 1:27에서 설명한다. 히브리 시의 정상적인 평행법(parallelism)에서는 두 '콜론'(colon)을 가지는데 1:27은 특이하게 세 '콜론'으로 구성되어 있다. 보통 세 '콜론' 형식은 한 단락의 처음이나 마지막과 같은 위치에서 쓰여서 특수한 효과를 나타낸다. 여기서는 첫 번째 '콜론'이나 두 번째 '콜론'은 도치된 문장으로 되었을 뿐 (a-b-c // c'-b'-a') 사실상 거의 똑같은 내용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세 번째는 본질적으로 다른 내용을 가지고 있다. 이것을 히브리어 순서대로 번역하면 다음과 같다 :

첫 번째 '콜론' : "창조하였다 / 하나님이 / 인간(단수)/ 자신의 형상대로"

두 번째 '콜론' : "하나님의 형상대로 / 그가 창조하였다 / (단수)"

세 번째 '콜론' : "남자와 여자로 / 그가 창조하였다 / 그들(복수)"

이것을 통하여 알 수 있는 것은 1:27에서 결과적으로 강조하는 것은 하나님의 형상으로서의 가장 중요한 면은 세 번째 '콜론'의 내용인 인간이 남자와 여자로 창조되었다는 사실이다. 만약 이러한 분석이 옳다면 인간에 내재하는 하나님의 형상으로서의 가장 중요한 많은 내용들 중의 하나가 바로 인간이 남녀로 존재한다는 것일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러한 분석에 대하여 정당하고도 조심스러운 해석을 해야한다. 하나님은 성경 전체를 통하여 결코 성적인 존재로 표현되지 않았고 오히려 그것을 강력히 금지하였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형상은 성적인 관계성을 나타내는 것으로는 결코 해석할 수 없다. 오히려 1:27은 사람들 사이에 인격적인 관계를 가지며 서로를 향하여 서는 것을 말하는데 그 중에 가장 중요한 예가 바로 남녀로 서는 것이라고 보아야 할 것 같다.

또 이러한 해석에서 고려할 일은 1:26의 하나님 자신의 말씀속에 드러난 하나님의 속성이다. 여기서 갑자기 '우리'(의 형상을 따라...) 구절이 나타난다. 이것이 삼위일체를 의미한다는 전통적인 해석을 비롯한 많은 해석들이 있으나 1장 자체내에서는 일단 하나님의 복수성(plurality)을 의미한다는 포괄적인 해석이 적당할 것 같다. 그렇게 되면 우리는 1:27에서 본대로 하나님의 형상으로서의 인간의 모습의 가장 중요한 예가 인간이 남녀로 존재하는 것이라면 인간 존재의 복수성은 하나님의 복수성의 반향이라고 생각해 볼 수 있다. 이런 해석은 많은 검증을 거쳐야 하겠지만 그 주석적 장점은 1:261:27을 동시에 고려한다는 점이다. 이렇게 남녀가 서로 떨어질 수 없는 깊은 인격적인 관계를 가지는 것을 2:18-25에서 더 구체적으로 말하고 있다.

이러한 인간관은 인간문화 전반에 대하여 엄청난 파급효과를 가져올 수 있는 혁명적인 것이 될 수 있다. 이것은 서구를 지배한 '' 중심의 지극히 이기적인 인간관에 정면으로 도전한다. 이러한 성경의 인간관을 다음과 같이 풀어서 설명할 수 있다. 인간인 나의 존재는 ''됨에 있다기 보다 '우리'됨에 있으며, 여기에 삼위일체 하나님의 연합의 신비가 반영되어 있다는 것이다. 삼위 하나님의 복수성과 하나됨이 하나님의 존재하심의 가장 중요한 측면의 하나인 것과 같이 인간존재는 근본적으로 복수성과 하나됨을 이룬다는 선언은 '' 중심의 철학에 근거한 서구 문화의 오래된 전통에 대한 혁명적인 도전이다. 이것은 또한 동시에 천상천하 유아독존적이며 ''속에 우주가 존재한다는 동양철학적인 사고에 대한 원천적인 도전이다.

3. 인간의 타락,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로서의 구속

인간의 타락

2장까지의 내용인 창조는 3장의 내용인 타락과 아주 적절하게 연결되어 있다. 2:25(인간의) '벌거벋음'('아루밈' )3:1(뱀의) '간교한'('아룸' )이 같은 히브리 단어로 이루어졌다는 것은 인간의 순진성에 어두운 세력의 간사한 공격으로 어두워질 창조세계를 은연중에 드러낸다. 하나의 '벌거벋음'에 대해서는 인간은 부끄러워하지 아니하였다 (2:25). 그러나 범죄의 결과로 깨닫게 된 또 다른 '벌거벋음'('에이롬' )때문에 인간은 두려워하고 도피하는 모습을 지니게 되었다 (3:10).

창세기는 창조세계에 존재하는 어두움의 그림자가 왜 그리고 어떻게 생겼는지는 말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미 2:17'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라는 이름과 그것을 먹으면 '반드시 죽음을 경험하게 된다'(2:17)는 경고에 이미 어두움의 세력이 존재한다는 것이 암시되었다. 그러나 선악과를 만들지 않았으면 이런 타락이 없었을 것인데라고 흔히 기독교를 공격하는 사람들이 생각하듯이 선안과는 하나님의 창조의 불완전을 표현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하나님께서 지으신 인간의 인격의 완전성에 대한 증거이다. 선악과는 인간이 자신을 창조하신 하나님을 배반할 수 있는 정도의 높은 자유까지 가지고 있다는 것을 나타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선악과는 어떤 면에서 창조의 영광의 표현이며 인간의 인격이 가지는 자유의 놀라운 상징으로 볼 수 있다.

그 어두움의 세력도 인격적인 실체라는 사실은 악한 일에 사용된 도구인 뱀이 인격적인 능력을 가진 대화를 하는데서 알 수 있다. 뱀의 간교한 질문형태(3:1)와 하와의 변형된 대답(3:2-3)은 서로 좋은 짝을 이루어 사탄의 간사한 계획에 딱 들어맞았다. 여기에 용기를 얻은 뱀은 전격적으로 거짓을 조작할 뿐 아니라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자로 만들어 사탄이 거짓의 아비임을 역사의 초기부터 증거하였다 (3:4-5, 참조:8:44). 그러나 이 거짓은 그 누구보다도 사탄 자신을 속이는 행위였다. 하와가 선악과를 바라볼 때 생긴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게' 보인 그 세가지 유혹은 그리스도가 받은 세가지 유혹(4:1-11, 4:1-13)과 유사하며, 세상에 속한 모든 인간의 근본적인 세 욕망인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 이 생의 자랑'과 유사하다 (요일 2:16). 그래서 모든 인간이 가져야 할 태도를 보여준다. 먼저 우리는 근본적인 세 욕망의 노예가 될 수 있는 존재라는 것을 깨닫는 것이다. 그 근본 원인은 첫째 아담이 실패한 역사적인 경험속에 자신이 이미 속해 있기 때문임을 겸손히 시인하는 것이다. 그러나 거기서 절망가운데 앉아있지 않고 둘째 아담되신 예수께서 모든 유혹의 도전을 극복하심으로 근본적으로 인간의 욕심의 문제를 직접 몸으로 해결하셨을 뿐 아니라 오늘도 성령으로 우리를 도우심을 의뢰할 때에 우리의 현실 역사속에서 유혹들을 극복할 수 있는 것을 믿는 것이다.

하나님의 은혜로서의 구속

하나님의 구속의 활동은 '원시복음'이라고 알려진 3:15부터가 아니라 이미 아담과 하와의 타락이후 두려워하여 숨은 그들을 찾아 부르시는 하나님의 행동으로부터 시작되었다. 하나님은 그들이 타락했기에 받는 심판의 결과로서 '반드시 죽도록' 내버려두지 않으셨다. 이로서 하나님의 구속은 바로 창조의 첫 몇 페이지부터 시작된 것이다.

"네가 지금 어디 있느냐"(3:9)는 질문을 통하여 인간 존재의 현주소를 네가 스스로 아느냐라고 아담에게 물으신 하나님은 우리에게 지금도 동일한 질문으로 다가오고 계시는 분이시다. 피상적인 결과만을 말하여 본질적인 질문을 회피하는 아담과 우리의 대답(3:10)에 대하여 하나님은 그 원인(3:11)을 물으신다. 여기에 대한 우리의 대답은 더욱 회피적일 뿐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 그 원인이 있는 것으로 핑계하는 것이다. 더 근본적으로는 모든 일이 잘못된 원인은 하나님께 있다고 대답할 정도로 우리는 간혹 완벽한 악을 그러낸다 (3:12) : "하나님이 주셔서 나와 함께 하게하신 여자 그가 그 나무실과를 내게 주므로 내가 먹었나이다." 또 일을 그르친 첫 번 원인자인 하와는 자신의 반대편에 선 하나님의 형상인 아담이 하나님께 심문을 받는 것을 보고 먼저 아담이 핑계대는 것을 닮아서 일이 잘못된 원인을 자신에게 돌리는 것이 아니라 다른 곳, 뱀에게만 돌렸다 (3:13). 직접적인 원인인 사탄이 받을 심판은 물론 있지만 우리 인간은 자신의 행동에 대한 나름의 책임을 지는 것을 포기하는 비인격적인 모습을 본다.

그러나 하나님은 인간들이 이렇게 자신의 책임을 회피하며 그 속에서 끊임없이 해메고 있는 순환논리의 고리를 결연히 끊으시고 역사를 관통한 단정적인 조처를 내리신다 (3:15). 비록 뱀은 여인의 한 후손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지만 여인의 한 후손이 뱀으로 상징된 사탄의 머리를 부수리라. 그리고 각 사람의 죄에 대하여 내리신 심판(3:16-19)은 고통과 번민을 수반할 것이다. 또 생명나무에 인간이 손을 대지 못하게 하심으로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계의 근본질서가 자가당착에 빠지지 않게 하셨다 (3:22-23). 그러나 하나님은 당장에 인간을 사망이 이르게 하지 않으셔서 인간이 하나님과 관계를 회복할 시간을 주심으로 집행유예의 은혜를 보이신다. 이것은 장차 나타날 그 한 후손의 죽음과 사역을 통하여 인간이 죽음과 그 공포의 노예된데서 해방되며, 인간이 인간을 지배하는 형태가 없어지며, 모든 원수된 것이 철폐되며, 궁극적으로는 생명나무의 열매를 먹게 될 것을 대비한 것이다 (2:7). 이것이 인간이 스스로의 잘못으로 깨닫게 된 벌거벋음의 수치를 하나님이 가죽옷을 만들어 지어 입힘으로 간접적으로 표현되었다.

4. 완전한 대조 : 하나님 나라와 세상 나라

첫째 아담 이후에 한 세대가 지나가기 전에 이미 인간의 타락의 모습이 나타났다. 아담은 아들을 낳았을 때 이 첫 아들에 대하여 3:15의 한 후손에 대한 기대를 가지고 이름을 가인이라 붙이고 그 이유를 "하나님의 도움으로 득남하였다"고 표현한다. 그러나 실제 역사는 정반대로 나타났다. 그런 기대가 표현되지 아니한 둘째 아들 아벨의 제사를 하나님이 받으신 것에 대한 시기때문에 하나님 나라에 대한 원대한 기대속에 붙여진 이름을 가진 가인은 동생을 죽이게 되었다. 바로 이런 인간의 타락은 역사가 진행될수록 더 심해진다는 것을 창세기는 11장이 되도록 보고한다.

먼저 아담과 하와의 타락(3)에 비해서 가인의 타락(4)이 더 악한 것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두 사건에서 하나님의 두 질문에 있어서 서로 유사하다 : "네가 (네 동생이) 어디 있느냐 ?" (3:9, 4:9); "네가 무엇을 하였느냐 ?" (3:13, 4:10). 그러나 첫질문에 대한 가인의 대답은 아담의 그것보다 뻔뻔스럽고 악한 것이었다 (3:9, 4:9). 인간의 타락에 대한 하나님의 저주에 있어서도 차이가 나는데 아담의 경우는 땅이 저주를 받지만 (3:17) 가인의 경우는 가인 자신이 저주를 받는다 (4:11).

그리고 다시 가인을 그 후손 라멕과 비교해 보면 타락이 더 진행된 것을 알 수 있다. 가인은 한 아내를 얻었지만 라멕은 (4:19) 두 아내를 얻기 시작함으로서 하나님의 형상으로서의 인간존재의 가장 중요한 면인 복수성의 예인 남녀로 서로 마주 서는 면이 무시되면서 인간공동체의 심각한 위기를 불러일으켰다. 자신의 행동에 대해서 주어질 심판에 대한 반응에서도 심각하게 진행된 타락의 냄새가 난다. 가인은 사람들의 보복을 두려워했지만 (4:13-14), 라멕은 전혀 사람의 복수를 두려워하지 않고 오히려 복수의 일념에 불탄다 (4:23-24). 보복의 경우도 가인의 경우는 오직 죽음을 당했을 경우이며 벌의 주체는 하나님이고 형벌의 양은 7배였다. 그러나 라멕의 경우는 상하기만 해도 죽음으로 보복하고 벌의 주체는 하나님이 아닌 라멕 자신이며 벌의 양도 77배였다. 여기에 더하여 라멕이 부른 두 아내에 대한 잔인한 연가(戀歌 4:23-24)는 그 참혹성에 있어서 아담이 하와에 대한 아름다운 사랑의 노래(2:23)와 완전히 대조를 이룬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런 타락에 수수방관하지 않으시고 당신의 나라를 지키시는 일을 하셨다. 그래서 역사가 진행될수록 하나님 나라와 세상 나라는 뚜렸히 구분되어 갔다. 이 사실이 성격이 전혀 다른 두 가계에서 같은 이름을 가진 사람들이 두가지 예를 통해서 서로 철저히 비교되는데서 드러났다.

첫 번째는 가인계의 에녹과 셋계의 에녹의 비교이다. 가인계의 에녹(4:17)이란 이름은 그 아버지 가인이 이 땅위에서 지은 성에도 붙여짐으로 이 땅에서의 삶에 대한 인간적인 기대를 나타내었다. 그러나 셋계의 에녹(5:22-24)은 이 땅 위에서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다가 하나님께로 옮겨졌다. 한 에녹은 이 땅위의 성을 쌓은 일에 관계하고 또 하나의 에녹은 하늘나라의 성을 쌓는 일과 관계하였다. 특이한 것은 가인계의 후예들에 대해서는 살았던 나이가 표시되지 않은데 비해 셋계의 후예들은 나이가 정확히 표시되어 있다는 것이다. 즉 가인의 후예들이 아무리 고도의 문화를 발달시켜도 (목축업 4:21, 예술 4:22, 기계문명 4:22) 그들의 삶은 하나님의 판단하시기에 '아무 것도 아니며'(nothing) 헛되다는 점을 나타내신다. 이러한 가인의 후예들의 다양한 문화적인 업적에 비하여 셋의 후예들은 하나님을 공적으로 경배하며 (4:26)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이 그 생애의 가장 중요한 의미였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이 살아간 일년 일년이 의미가 있으며 그 결과 그 의미있는 삶의 햇수가 성경에 정확히 기록된 것이다 (5:22-24). 결론적으로 창 5:1에 있는 아담의 '계보'(톨르도트 )에는 이미 가인의 후예는 빠져있고 오직 셋계만이 기록되어 있는데 이는 이미 가인의 후예는 하나님의 택하심에서 제외된 것을 나타낸다.

두 번째는 가인계의 라멕과 셋계의 라멕의 비교이다. 우선 가인계의 라멕은 두 아내를 가졌으며 세 아들을 낳았는데 고대에 아내의 이름(아다와 씰라)이 전해져 내려온다는 것은 이 여자들이 유명한 사람이었음을 암시해준다 (4:19). 또 그 아들인 야발, 유발, 두발가인은 하나님과는 아무 관계가 없이 살며 세상의 문화를 만드는 일에 몰두하였다 (4:20-22). 그리고 라멕의 연가 혹은 독백(4:23-24)은 자기과시와 철저한 보복주의, 탈취하는 삶을 전제하고 있어서 살벌한 당시의 세상의 모습을 반영한다. 그러나 셋계의 라멕은 이름은 나와 있지 않은 한 아내에 한 아들이 있을 뿐이었다 (5:28). 그 아들 노아가 한 일이라고는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서 방주를 120년 동안이나 짓고 있는 세상이 보기에 어리석은 일에 몰두하는 사람이었다 (6:13-22). 그리고 아버지 라멕의 독백은 하나님이 저주하신 이 땅에서의 삶이 얼마나 어려운가를 정직히 나타내며 이 자녀를 통해서 안식을 기대하고 있음을 보인다 (5:29).

에녹이나 라멕이라는 이름이 모두 악한 가인의 계열속에서 먼저 사용이 되었지만, 나중에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순종하는 셋의 계열에서 다시 이 말이 사용되어서 어떤 면에서 은혜의 승리를 암시한다.

5. 세상나라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 : 대홍수와 바벨탑

대홍수

비록 인간은 문화적으로는 목축과 예술과 기계문명의 발전으로 진보를 보이고 육체적으로는 네피림이 생길 정도로 번성하였다. 그러나 실제로는 창조하신 세계에 대하여 하나님께서 깊은 탄식을 하실 정도로 - 이 탄식을 두 번이나 표현함 - 세상은 겉잡을 수 없이 빠른 속도로 타락의 수렁에 빠지고 있었다 (6:5-8). 심지어 셋계의 후손들조차 가인계의 영향으로 타락의 길을 걸어갔고 그 결과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의인은 노아 가족밖에 남지 않은 것이다. 노아는 그 조상 에녹과 같이 (5:24, 6:9)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았고 그 결과 그는 당대에서 완전한 자라는 판정을 받았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이러한 세상을 향한 조처는 타락한 세대를 향한 단호한 심판과 노아를 통한 하나님 나라의 보전이라는 점에서 이원적이었다. 노아가 방주를 준비하는 120년의 삶은 단지 자신이 구원을 준비하는 의미를 지닐 뿐 아니라 이 세상에 존재하는 하나님 나라를 유지하는 더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그 속에 들어간 생물들은 각기 그 '종류대로' 되었으므로 창조시에 이들이 종류대로 만들어진 것을 연상하게 하고 창조하신 세계를 보호하시려는 하나님의 의도를 보여준다 (7:14). 또한 하나님이 심판을 행하실 때도 은혜속에서 이루어진다는 것을로 제한된다는 것은 다음의 사실로 알수 있다. 7-8장이 소위 동심원적인 구조(同心圓的 構造 concentric structure)로 이루어졌으며 그 중심(8:1)에 하나님이 방주안에 있는 노아와 생명들을 '기억하심'(개역 '권념하심')에 대한 선언이 나오는 것으로 알 수 있다. 이 기억하심 후에 바로 하나님은 진노를 푸시고 세상을 정상으로 돌아가게 하셨다. 이 은혜의 역사는 방주에서 노아가 나오고 난 뒤에 하나님이 스스로의 약속에 매이시는 것을 나타내는 언약(9:9)에도 다시 표현되었다. 이런 하나님 스스로가 매이는 언약은 하나님이 적극적으로 하나님 나라를 세워나가실 때인 아브라함에게 하신 것으로 다시 나타났다. 다시는 물로 심판하지 않으리라는 언약은 인간으로 하여금 방금 겪었던 심판의 성격을 띤 대홍수에 대한 두려움에서 벋어나게 하는 말씀이다. 그러나 이것은 심판 자체가 영원히 없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다. 세상나라를 향한 또 다른 심판의 도구인 불이 기다리고 있고 그 영원한 심판이 일어나기 전에 불로서의 심판이 국지적으로 타락한 소돔과 고모라에 행해질 것이다.

바벨탑

사람은 망각의 동물이다. 특히 어떤 사건의 원인과 과정과 결과에 대해서 자의적인 해석을 함으로 결국에는 그 사건의 의미를 놓쳐버린다. 대홍수 사건의 경우도 인간은 그 원인과 과정과 결과에 대한 완전히 오해함으로 헛된 바벨탑을 쌓았다. 대가 하늘에 닿는 성을 쌓으면 이름이 나고 지면에 흩어짐을 피할 수 있는 것으로 생각하였다. 연합된 중앙집권국가를 형성하여 인간의 자부심을 만족시키려는 첫시도였다. 그러나 이러한 인간 중심의 문화건설에 대하여 하나님은 새로운 차원의 심판을 베푸셨다. 언어를 혼잡하게 하는 것이다(11:9). 그러나 이것이 중앙집권국가를 형성하여 인간적인 자만심을 채우려는 것에 대하여는 심판행위가 되지만 한편으로 참다운 인간 공동체의 형성을 어렵게 만드는 요소가 되기도 한다. 특히 이제 하나님의 경륜을 따라서 하나님 나라가 소극적으로 형성되는 때를 지나 나라와 피부와 문화의 장벽을 넘어 적극적으로 형성되어야 할 때에는 인간의 죄악에 대한 저주와 심판으로 주어진 언어의 장벽은 없어져야 할 것이었다. 그래서 사방에서 민족들이 몰려와서 오순절의 예배를 드릴 때에 성령이 임함으로 각 사람이 자신의 방언으로 하나님의 위대한 일을 듣음으로 이 장벽을 허물어지게 하실 때가 곧 오고야 말 것이다 (행전 2:11). 그러나 그 때가 오기까지 인간은 바벨의 심판 후에도 계속해서 타락해 갈 것이고 결국에는 하나님은 또 다시 모든 타락한 사람들을 포기하시고 오직 한 사람 아브라함만을 택하여 하나님 나라의 역사를 이어가게 하실 것이다.

6. 아브라함(1) : 하나님 나라의 극적인 새출발

하나님은 위에서 언급한 두 번의 심판에도 불구하고 실패하시는 것 같았다. 사실 마지막 심판인 바벨탑 사건에서 언어를 혼돈하게 하신 것은 문제에 대한 근본적인 해결은 아니었다. 사람들은 흩어져서도 여전히 악한 성품을 그대로 가지고 더 악한 길로 갈 것이며 또 악은 너무나 쉽게 자신의 영역인 세상 나라를 넓혀갈 것이고 상대적으로 하나님 나라는 더 빨리 축소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가운데 하나님은 새로운 계획을 준비하셨고 그것을 때가 되매 펼치셨다. 대부분의 셋의 후손과 노아의 후손들조차 세상의 영향을 받아서 타락의 길을 갔기에 세상 나라는 항상 공격적이고 하나님 나라는 항상 수동적이라는 인상을 줄 수 있으나 하나님은 이제부터 전혀 새로운 차원의 길을 여신 것이다. 그것은 부름을 받은 한 사람의 후손들은 모두 하나님 나라에서 세상 나라로 빼앗기지 아니하게 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아브라함의 부르심과 구원은 단순히 한 사람이 어떻게 불러지고 구원을 받는가 하는 예로 생각하는 개인적인 관점에서만 볼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를 통해서 구속역사가 전혀 새로운 방법과 목표를 가지고 움직이기 시작했다는 관점에서 보는 것이 더 중요하다. 그렇기 때문에 아브라함을 통한 하나님 나라의 역사는 그 자체로 완성된 것이 아니라 이삭과 야곱과 요셉을 통하여 준비되어서 이스라엘이 민족으로 형성되고 출애굽을하여 하나님과 언약을 맺고 드디어는 약속된 땅을 받음으로 완성되는 것이다. 그렇기에 아브라함을 통하여 새롭게 진행되는 역사는 이 때까지 하나님이 사용하시던 것보다 훨씬 더 적극적인 전략가운데서 나온 것이다. 또 그렇기에 이 아브라함 한 사람을 부르심은 새로운 차원의 하나님 나라를 위한 장기적인 안목에서 나온 부르심이다.

이 부르심의 명령에는 엄청난 약속이 동반되었다 (12:1-3). 아브라함이 큰 민족을 이루고 이름이 크게 되는 것은 우리 신자들이 동일한 페턴을 따라서 하면 우리도 큰 민족을 이루고 큰 이름을 가지게 된다는 개인적인 교훈이라기 보다 하나님 나라 전체에 대한 역사적인 교훈이다. 후대에 사는 우리가 또 하나의 아브라함이 되는 것이 아니라 아브라함의 그 축복에 동참하는 것이다. 즉 아브라함은 이제 하나님의 구속역사의 전개방식이 결정적으로 변화하는 가장 중요한 순간에 서 있다. 12:2의 약속중에서 마지막에 나온 "너는 복이라"라고 직역될 수 있고 "너는 축복의 대명사라"라고 번역할 수 있는 구절(개역 : "너는 복의 근원이 될지라")은 모든 약속의 결론이다. 이것은 12:3에서 부연 설명되었다. 모든 민족이 아브라함을 통해 이루어질 하나님 나라를 통하여 축복을 받을 것이다. 그런데 이 축복은 후대에 일어날 선지자의 예언의 내용인 정죄와 심판을 지나서 마지막 소망의 차원을 거쳐서 아주 먼 훗날에야 비로소 완전하게 이루어질 것이다.

여기에 대해 어떤 부정적인 반응도 없이 순종한 아브라함의 믿음은 앞으로 하나님이 인정하실 믿음의 행위(15:7)에 대한 서론이었다는 것을 신약은 증거한다 (11:8). 그러나 아브라함이 첫 여행을 끝내고 멈추어 섰을 때 이것이 네 땅이니라 라고 하신 곳은 아무도 살지 않은 임자가 없는 곳이 아니라 이미 전통과 유서가 깊으며 사람이 많이 살고 있는 세겜이었다 (12:6-7). 그런데 이 약속은 사람들이 이미 사는 땅위에 어떻게 하나님의 나라가 건설될 것인가 ? 이것은 아브라함이 마음으로 해 보았을 본질적인 질문이다. 세겜을 주신다는 하나님의 이 약속은 언젠가 그 속에 사는 사람들이 제거되어야 하는 것을 의미한다. 여기서 하나님 나라의 성격이 분명해진다. 15:16에서 밝혀지지만 그 땅에 사는 사람들의 죄악이 관영하여 하나님이 인내하시는 한계를 넘을 때 하나님은 그 곳의 사람들을 심판하셔서 그들을 뽑으시고 그 대신에 이스라엘을 그 자리에 심으시겠다는 것을 의미한다. 또 하나님은 한 걸음 더 나가셔서 가나안 사람들을 심판하는 도구로서 이스라엘을 쓰실 것이다. 한 마디로 이스라엘의 구원과 이방의 심판은 글자 그대로 한 진리의 양면이며 이것은 먼 훗날 신자들이 그리스도와 함께 왕노릇할 마지막 사건과 연관된다.

아브라함은 지금은 눈에 보이지 않지만 앞으로 성취될 하나님의 이런 약속에 대해서 부정적인 반응을 보이지 않으나 현실적인 문제에서 허물어진다. 그것은 그가 거하는 남방에 닥친 견딜 수 없는 심한 기근이었다. 그 결과 물을 따라서 하나님이 약속하지도 않은 땅인 애굽에 내려가는 인간적인 결단 때문에 생기는 문제에 대하여 인간적인 속임수를 베푸나 오히려 그 계획이 드러나고 바로에게 책망받게 된다 (12:10-20). 그러나 여기서 하나님의 섭리에 대한 교훈을 받고 가나안에 돌아온 아브라함은 조카 롯과의 문제가 생겼을 때에 그 섭리를 신뢰하여 조카에게 양보를 할 줄 알게 된다 (13:1-8). 조카 롯이 '악하고 큰 죄인'인 소돔의 영적인 환경은 전혀 고려하지 않고 단순히 풍요로운 자연적인 삶의 조건을 중요한 요소로 생각하여 그 곳을 찾아 떠난다 (13:9-18). 그러나 그런 개인적인 소망과는 관계없이 롯은 국제분쟁에 휘말려 노예가 될 신세가 되지만 아브라함 결사대의 도움으로 해방된다 (14:1-16).

7. 아브라함(2) : 언약의 수립 (15, 17)

해가 돌아오면 다시 군대를 모아서 복수전을 감행하는 고대의 관습을 알기에 두려움에 처해있는 아브라함을 하나님은 찾아오셔서 하나님 자신이 방패요 그 전쟁으로 실제적으로는 아무 것도 얻지 못한 그에게 하나님 자신이 바로 상급임을 선언하신다 (15:1). 이 선언에 대하여 아브라함은 처음으로 하나님께 하나님의 약속의 양면인 씨와 땅에 대한 질문으로서 반응을 보인다 (15:2-7).

먼저 씨에 대한 질문의 내용을 보면 사뭇 부정적이며 허탈감과 포기하는 마음이 진하게 배여있다. 자신의 적자(嫡子)는 그 당시의 관습을 따라서 다메섹 출신의 종인 엘리에셀이 될 것이라고 냉소적으로 선언한다. 그리고 이 냉소적인 표현에 설명을 덧붙이듯이 15:3을 내뱉는 것 같다. 그러나 하나님은 인내하시고 아브라함과 만난 밤이라는 상황을 사용하여 중동의 까만 밤하늘을 찬란하게 수놓은 무수한 별을 통하여 그 종이 후손이 될 것이 아니라 아브라함의 몸에서 나온 후손이 별과 같이 많으리라는 실물교훈을 하신다 (15:5). 이 약속에 대하여 아브라함이 아마 머리를 숙여 하나님께 경배함으로 믿음으로 반응한 것 같고, 이 믿음의 반응을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의로 선포하신다 (15:6).

둘째로 아브라함이 땅에 대하여 물었을 때에 하나님은 언약을 맺도록 아브라함에게 준비시키셨다. 그리고 준비된 언약을 체결하기 위하여 당시의 습관을 따라서 쪼개어져 준비된 제물 사이로 언약의 쌍방인 하나님과 아브라함이 같이 피가 흥건히 배여있는 그 길을 걸어간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상징한 불만이 지나감으로 (15:17, 참고 렘 24:18-19) 이 언약의 성취의 최종적인 책임은 하나님이 지심을 분명히 드러내었다. 고대의 언약을 맺는 관습대로 하나님이 약속을 지키지 않으시면 하나님의 생명이 문제가 되는 형편에 놓인 것이다. 이것은 아브라함이 곧 이어서 할례를 행함으로서 언약 수립에 능동적인 입장에 선 것과 대응하는 것이다 (17:23-27). 대대로 이행해야 할 할례는 하나님의 언약을 적극적으로 신실하게 지키심에 대한 인간 편에서의 언약 이행을 의미한다. 이 할례는 민족이 된 이스라엘이 정식으로 시내산에서 하나님과 언약을 맺을 때에 하나님의 언약법에 순종할 것을 작정하는 것과 같은 차원의 것이다. 이제 언약의 양방인 하나님과 아브라함이 언약서약을 함으로 이 언약은 앞으로 이루어질 하나님과 민족으로서의 이스라엘간의 시내산, 모압 언약의 기초가 된다. 물론 아브라함의 언약은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언약적 택하심과 약속에서 출발하지만 단순히 무조건적인 언약이 아니라 아브라함의 후손들이 그 속에도 대대로 할례를 받아야 한다는 일종의 조건성이 존재한다. 이 점에서 아브라함 언약과 시내산 언약은 구조적인 유사성을 보인다.

하나님의 생명을 담보로 한 언약적인 이런 서약(15:17)에도 불구하고 믿음이 먼저 약해진 것은 인간들, 정확히 말하면 현실적인 압박을 더 많이 받고 있는 여자쪽이었다. 사라는 하나님과 엄청난 언약을 맺고 나자마자 (15) 하나님 나라 역사에서 돌이킬 수 없는 엄청안 실수를 범한다 (16). 종인 하갈을 아브라함의 첩으로 주어서 아들을 낳은 당시의 습관을 따르도록 16장 전체를 통하여 철저히 수동적으로 머물러 있는 아브라함을 졸라서 일을 성사시켰다 (16:2). 15장에서 종을 아들로 입양하는 그 당시의 관습을 따르려 했던 것과 같이 16장에서도 세상의 일반관습이 끊임없이 하나님 나라를 움직이는 추진 원리가 되려고 밀고 들어오는 것을 발견한다. 그러나 결과는 예상과는 전혀 다르게 나타났고 궁극적으로는 결국 하나님의 약속에 의하여 태어날 이삭의 자손과 이렇게 불신앙 가운데 태어난 이스마엘의 자손 사이에 역사적으로 해결의 실마리가 보이지 않는 견원지간의 관계를 만들어낸 것이다. 결국 이 문제는 하나님의 손에서 해결되도록 위탁될 수 밖에 없었다 (16:7-12).

드디어 아브라함의 나이가 99세가 되어서 하나님이 씨와 땅의 약속을 재확인하러 나타나셨을 때 아브라함은 ()웃었다 (17). 하나님이 씨에 대해서 재차 약속하시려 나타나셨을 때 사라도 ()웃었다 (18:9-12). 이 주제가 동양의 정서를 따라서 사라가 하나님과 아브라함 사이의 대화를 엿듣도록 의도적으로 "사라가 어디 있느냐"고 물으시면서 사라의 주의를 환기시키시는 하나님의 모습으로 아름답게 처리되어 있다 (18:9). 그 이후에 하나님과 사라 사이에 닭싸움하듯이 옥신각신하는 모습(18:12-15)은 오히려 끝까지 자신의 잘못을 시인하지 않는 인간과 같은 차원에서 낮아져서 끝까지 하나님이 옳으심을 주장하시는 희극적인 요소를 드러냄으로 독자로 하여금 인간과 같이 낮아져서 대화하시는 하나님을 만나는 기쁨을 누리게 한다. 이 희극적인 요소는 부부가 다 같이 하나님의 약속에 대해서 비웃었으므로 그 아들의 이름을 '이삭' '웃음'이라고 하게 하시는 일종의 심판이라는 비극적 요소와 어울려서 그 차원이 더욱 깊어진다.

그러나 이 두 번째 하나님의 찾아오심에는 하나님 나라의 건설을 위한 씨와 땅의 약속을 확인하는 것 외에 또 다른 목적이 있었다. 그것은 하나님이 참으실 한계를 넘어서는 죄악이 관영하는 소돔과 고모라의 심판이었다. 순진한 롯은 그 도시의 사람들을 끝까지 형제로 여겼으나 (19:7 '형제들아') 그들은 롯을 잔인할 정도로 냉정하게 이방인 취급하였다 (19:9 '이방인으로 우거하면서'). 또 롯이 내어놓은 두 딸을 집단 성폭행하는 것도 생각하기 어려운 타락인데 그것을 마다하고 심히 부패한 마음을 따라서 롯을 찾아온 손님과 기어이 동성애를 하고야 말겠다고 함으로 그들의 죄가 얼마나 심각한 수준에 있는가를 보여 주었다. 우리는 이 천사들의 방문에서 또 한 번 아브라함을 통한 하나님 나라의 건설(구원)과 소돔과 고모라라는 세상 나라의 심판이 공재하는 순간을 본다. 그런데 그 심판을 그냥 행해 버리시는 것이 아니라 선지자되는 아브라함에게 숨기시지 않으시고 알리심으로 어떤 의미에서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심판에 동참된 것을 나타낸다 (18:17-21). 이 심판의 정보를 듣고 아브라함은 수동적으로 머물러 있지 않았다. 그는 동양에서만 그 정서를 이해할 수 있는 과감한 게임을 감히 하나님과 하여 50인에서 10인까지 흥정해 내려간다. 이 희극성 속에서 그냥 두면 심판 속에 반드시 희생될 조카 롯에 대한 사랑과 관심이 전혀 언급되지 않았으나 강력한 열기로 전달된다. 적어도 소돔에 10인의 의인은 있을 것이고 그 속에 롯이 포함될 것이라는 계산을 아브라함은 한 것이다. 그러나 그 예상은 빗나가서 의인이라고는 오직 롯밖에 없었다는 것을 아브라함은 곧 알게 될 것이었다.

반면에 롯의 탈출은 극적이었다. 영적으로 타락한 환경을 잘못 선택한 롯을 잡아당기는 소돔의 끈은 너무나 강인했고 끈질겼다. 먼저 결혼이 확정되고 다른 사람과 결혼하면 그 사회에서 버려지게 될 상태에 있는 딸들과 정혼한 사위들이 롯과 같이 소돔을 떠나기를 거부한 것이다. 딸을 데리고 떠나라는 천사의 명령이 없었으면 롯은 결단을 못내릴 처지였다. 그리고 롯의 아내가 얼마나 정신적으로 영적으로 소돔과 강하게 연결되었는가는 천사의 명령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뒤를 돌아보는 것으로 나타났다. 소돔이 롯을 잡아 당기고 있는 최악의 강인한 끈은 소돔이 멸망된 후에도 없어지지 않고 바이러스처럼 롯의 가정에 껍질을 쓰고 남아 있었다. 그 끈은 살아남은 롯의 두 딸이 소돔에서 눈으로 보아서 배웠던대로 자기의 아버지와 성적인 관계를 가짐으로 자손을 이어갈 비참한 계획을 수행해 버리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미 이스마엘을 인정하시고 큰 민족이 되게하실 계획을 보이신 하나님(16:10-12)은 여기서도 인간이 만들었으나 인간이 도무지 풀 수 없는 역사의 실마리를 자신이 푸실 것을 약속하신다. 즉 롯의 두 딸을 통해서 그렇게 더럽게 태어난 모압과 암몬의 후손들을 이스라엘 옆에 살게 하심으로 궁극적으로 이스라엘에서 시작되는 은혜를 미래에 나누어 가질 수 있게 하신 것이다 (19:36-38). 타락중에 태어난 이 아이들을 살려서 민족을 이루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결국에는 승리로 나타날 것이나 그것은 하나님 편에서는 고귀한 독생자를 죽도록 버려두시는 엄청난 역사를 통해서만 이루어지는 것이다.

아브라함은 사라의 미모 때문에 남방에서 장차 그 후손들이 싸울 불렛셋의 선조였던 아비멜렉에게 또 한번의 실수를 범한다 (20). 이것은 소돔 사건에서 보인 믿음의 용사가 했으리라고는 도무지 생각할 수 없는 나약한 아브라함의 모습이다. 그러나 이 상황은 단순한 위기가 아니라 하나님의 씨에 대한 근본적인 약속이 무너질 위기와 관계있는 것이다. 논리적으로 만약 사라가 늙었지만 하나님의 약속대로 여성으로서 다시 배란할 수 있는 능력을 얻었을 때 아비멜렉과 관계한다면 하나님 나라의 전체 계획이 허물어지게 되고 여기에 대한 책임은 하나님이 지셔야 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이 점 대신에 순전히 인간적인 것만을 고려하여서 순간을 모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오히려 신자가 불신자에게 책망을 듣는 부끄러움의 역사가 애굽에서와 마찬가지로 재현하게 하셨다. 이렇게 아브라함이 부끄러움을 당하는 것은 하나님께도 수치이지만 장차 세상에 있는 하나님 나라가 받아야 할 교훈과 심판을 위해서 자신의 이름이 걸린 성전조차 헐어버리실 하나님의 놀라운 속성과 일치하는 것이다.


기다리던 아들 이삭이 태어났을 때 17장에 나타났던 웃음의 희극적인 요소가 완성되었다. 태어날 아들에게 붙여진 이삭이라는 이름을 사라가 흔쾌히 받아들였다는 것은 사라가 출생을 전후해서 붙인 코멘트(21:6)에 잘 나타나 있다 : "하나님이 나로 웃게하시니 듣는 자가 다 웃으리로다." 비웃음이라는 부정적인 의미로 하나님께서 주신 이름이 이제는 기쁨을 주는 웃음이라는 긍정적인 의미로 전환되었다. 또 한 번 은혜의 승리를 경험하는 현장이다. 그러나 모두가 파안대소하는 시간들이 진행되는 어느 한 날, 이삭이 젖을 떼는 날에 갑자기 찬물이 끼얹어졌다. 하갈의 아들 이스마엘이 이삭을 조롱한 것이다. 여기에 대해 사라가 이스마엘과 그 어미 하갈을 내어ㅉ기를 얼음과 같이 차겁게 요구하는 것에 대해 아브라함은 헴릿과 같이 어찌할 바를 모르고 '깊이 근심한다' (21:11). 그러나 또 한 번 인간의 죄와 불순종 때문에 생겼으나 인간이 처리하지 못하는 역사의 문제를 하나님은 당신의 손에 맡으셨다 (21:12-13). 하나님은 광야로 ㅉ겨간 하갈과 이스마엘에게 우물을 발견하게 하심으로 그들을 보호하신다. 그리고 때가 되어 하나님의 은총을 만민이 체험할 때까지 이들의 후손들로 역사의 비주류의 강을 흐르게 하셨다.

8. 아브라함(3) : 하나님은 하나님의 약속 자체도 죽일 수 있는가 ?

아브라함의 생애는 '내게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12:1)라는 출발에서 '내가 네게 지시하는 한 산'으로 가라(22:2)라는 수행하기 가장 어려운 하나님의 명령으로 요약된다. 이제 아브라함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가장 어려운 시련의 시기를 맞게 되었다. 이삭은 단순한 한 아들이 아니었고, 또 단순히 늦게 얻어서 말로 못할 정도로 귀중한 아들 정도가 아니었다. 그는 하나님 나라의 역사를 이어 갈 가장 중요한 아들이었다. 이 아들을 제물로 바치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수행하기 위하여 아브라함이 건너야 할 결심의 다리는 길고 난관이 많았다. 아비가 아들을 죽여야 할 정도로 인륜이 무시되어야 했으며 그 결과 나중에 아들을 죽여 제사지내는 몰렉신()을 섬기는 것을 금지하신 하나님의 속성 자체도 문제가 될 수 있었다. 그러나 그 중에 가장 중요한 시험의 제목은 하나님은 당신이 몇번인가 확정한 언약 자체도 죽일 수 있는가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결연하고도 차분한 모습으로 이 명령을 이행해 나갔다 (22:3). 사환에게 자신과 이삭이 두 사람이 같이 돌아올 것을 말함으로 ("우리들이 꼭 돌아오리라" 22:5) 하나님께서 이 모든 문제를 해결할 길을 가지고 계심을 확신한 것 같다. 그 결과 그는 죽었다가 다시 산 아들을 되돌려 받았다는 믿음의 평가를 받았다 (11:19). 아브라함이 침착하게 이삭을 제사드리는 절차를 따르며 칼을 드는 마지막 순간에 하나님이 바쁘게 그의 행동을 제지하며 말려 부르셨다 (22:11). 이것은 손자인 야곱이 하나님과 겨루어 이겼다는 의미로 이스라엘이라는 별명을 받은 것과 비슷한 결과를 가지게 되었다 (32:24-32).

9. 이삭 : 수동적으로 진행된 하나님 나라

이삭을 통한 하나님 나라의 역사는 수동적이다. 그가 태어나서부터 이스마엘에게 놀림을 당하나 그 때문에 부모의 보호 본능이 자극되었다. 그 결과 이스마엘이라는 어려운 요소가 자연스럽게 자신의 노력이 없이도 정리되었다. 그가 청년이 되어서도 명상적이며 관조적인 성품을 가졌음을 볼 수 있다 (24:63). 오히려 저자는 그의 아내가 될 리브가를 얻게 되는 사연에 대해 길게 묘사한다 (24). 그랄 땅에서 아비멜렉과의 관계에 있어서 자신의 아버지가 처했던 같은 문제에 대하여 아버지가 실수했던 방법을 그대로 답습하여 리브가를 자신의 누이라고 할 정도로 수동성을 보인다(26:1-11). 또 우물사건(26:12-22)을 통하여 전쟁의 모습대신 평화를 위해서 양보하는 소극적인 모습을 보인다. 이런 가운데 그의 삶도 특별한 언급할 것이 없이 짧게 지나가고 이제 눈이 잘 보이지 않을 정도로 늙어졌다. 이런 중에서도 하나님 나라는 빠른 박자도 아니고 힘이 넘치는 것도 아닌 조용한 행진을 경험한다. 특히 그의 삶의 마지막에 있었던 장자축복 사건에서 보여준 수동성(27)은 아브라함의 신앙에 대한 마지막 시련(22)이 능동적인 것에 잘 대조된다. 하지만 이 수동성속에 있는 어리석음은 이삭의 사건들의 배경이 된다. 이삭은 하나님 나라가 이미 정해진 일상과 관습에 의해서만 진행되는 것이 아니라 파격속에서 예측하지 못한 굴곡이 생기기도 하는 역동성을 끝내 이해하지 못한 채 눈이 어두워진 것이다. 이런 어리석음속에서 장자에 대한 편애가 생겼고 그의 육체적인 탁월함에 매료되었다. 반면에 아내 리브가는 하나님의 약속을 인간적으로 이해하여 (25:23) 차자에 대한 편애를 자연스럽게 가지게 되었으며 이로서 하나님 나라의 진행에 대한 이해에 있어서 불일치가 한 가정내에 있음을 드러났다. 드디어 이삭은 리브가와 야곱의 잔꾀로 장자의 축복이 가로채어지는 것을 막지도 못했다 (27). 그러나 바로 이런 어리석음에 가까운 수동성이 원래 아이들이 태어날 때의 예언(25:23)이 성취되는 하나의 길이 되었다. 이삭의 생애에 대한 비교적 짧은 보고에 이어서 그의 임종이 보고되려면 한참이 걸린다 (35:27-29). 이미 그 아들들의 격렬하고도 적극적인 삶의 내용이 천년이 아무 일이 없는 것 같이 흘러가는듯한 이삭의 시대에 속하여야 할 보고의 자리를 차지하고 만 것이다.

10. 야곱 : 능동적으로 이루어진 하나님 나라

야곱의 경우는 처음부터 아버지와 달랐다. 아들이 없어서가 문제가 아니라 아들이 둘이나 되어서 문제가 되는 경우속에 태어난 아들이었다. 첫째가 둘째를 섬기리라는 하나님의 이상한 예언은 둘째를 사랑하는 어머니의 마음속에 있었고 또 그것이 둘째 자신의 마음에 깊이 박혔을 것이다. 그 진정한 의미를 파악하기도 전에 그 예언은 인간적으로 이해되었고 팟죽이나 (25:27-34) 속임수를 통해서 (27) 인간적인 방법으로 쟁취되는 것 같았다. 야곱은 그 아버지의 수동성으로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나라에 대해 무시내지 비웃었을 가능성이 있다. 혹은 하나님의 당신의 약속을 이루는 전능성에 대한 근본적인 믿음의 부족 때문에 이렇게 하나님 나라를 인간적으로 성취하는 일에 열을 올렸을 가능성이 있다. 그러나 그가 치른 대가는 지루하고도 비참한 것이었고 밧단아람에 갔다 돌아오기까지의 모든 과정이 속임에 속임의 연속으로 이루어졌다 (29-32). 심지어는 벧엘에서 한 서원(28:21-22)까지 망각함으로서 일종의 하나님을 속이는 지경까지 갔고, 자기 딸 디나의 사건(34)을 통하여서야 - 이 사건도 아들들의 속임수로 처리된다 - 비로소 자신의 서원을 기억하였고 벧엘로 가면서 새로운 헌신을 약속한다 (35). 결국 야곱의 모든 생애는 속이는 자가 속임을 당한다는 전체의 주제로 꿰어진다. 그러나 이런 우여곡절을 통하여 이스라엘의 12아들이 준비되어 장차 12지파라는 하나님 나라 전체의 중요한 골격이 형성된 것이 야곱을 통한 하나님나라 역사의 의미이다.

11. 요셉 : 한 토막의 아름다운 스토리와 같은 하나님 나라의 역사

요셉의 모습은 선조들의 그것과 유사하지만 다른 차원을 가지고 있다. 아버지 야곱의 역동성은 그가 11번째라도 아버지의 사랑을 받은 것과 결국에는 이스라엘 전체가 애굽에서 정착하여 민족으로 성장하는 것을 준비하는 장자로서의 사명을 다했다는 점에서 요셉에게서도 볼 수 있다. 그러나 야곱은 속임으로 시작하여 속임을 당함으로 마친다. 야곱이 요셉이 죽었다는 아들들의 거짓보고에 속임을 당하고 애굽에 내려가는 것도 요셉의 선한 속임의 완전한 결과가 나올 때까지 그 속임수 아래에 있어야 했다. 그러나 요셉은 속임 당함(37)에서 시작하여 선한 속임을 베푸는 (42-45) 것으로 마무리 되는 점에서 철저히 대조된다. 야곱은 속임 때문에 여러차례의 어려움을 당하지만 요셉은 정직함 때문에 여러차례의 어려움을 당한다.

이삭에게서 보았던 수동성은 요셉에게서 아무리 밑바닥에 내려가더라도 자기에게 주어진 곳에서 혁명이나 반란을 일으키는 것보다 모든 상황속에서 최선을 다하는데서 보여진다. 그러나 이미 여기서 차이가 발견되는데 그 수동성이 어리석음으로 후퇴하는 대신 모든 오해와 불의 속에서 때를 기다리는 찬란한 지혜를 나타내었다.

또한 아브라함에게 보았던 전능한 가부장적인 모습을 모든 야곱의 가족을 애굽에 오게 하고 고센땅에 머무르게 하며 자자손을 무릎에서 기르기까지 한 점(50:22-23)에서 요셉에게서도 볼 수 있다. 그러나 그는 여자의 문제로 실수를 하지 않았으며 처음부터 끝까지 완전함을 보여서 어떤 주석가들은 요셉이 바로 그리스도의 형상이라고 할 정도라는 점에서 차이가 난다.

물론 요셉의 스토리의 중간에 야곱의 넷째 아들 유다의 사건이 끼어 나온다 (38). 자부인 다말과 동침하여 쌍둥이를 낳는 비참한 출산을 경험하지만 자신을 숨기고 있는 애굽의 총리대신인 요셉앞에서 자신의 희생을 각오하며 베냐민과 야곱을 보호하며 토하는 사자후는 장차 때가 되어서 유다족이 이스라엘을 다스리게 되며 거기서 메시야가 나오는 가장 중요한 기초를 놓은 것이다.

요셉의 긴 생애는 어두운 색뿐 아니라 밝은 색 그리고 중립적인 색조차 조화된 한토막의 극히 아름다운 그림과 같이 묘사되었다. 이 그림은 전체적으로 창세기에서 기초된 하나님 나라를 70명의 인원으로 완전히 준비하여 출애굽기로 넘기며 민족이 이루어지고 또 하나님과근본적인 언약이 형성되며 또 마지막으로는 하나님 나라의 마지막 요소인 땅이 마련되는 것을 손짓하고 있다. 이것을 위하여 요셉은 야곱이 마지막 순간에 손을 어긋맞게 하여서 에브라함을 므낫세보다 먼저 축복하는 지혜를 배워야 했고 (48) 야곱의 시신을 장차 이스라엘 민족이 차지할 가나안 땅에 묻었다 (50:1-14). 또 마지막으로 이것을 위하여 자신의 시신은 아버지와 같이 가나안 땅에서 열조에게 돌아가게 한 것이 아니라 애굽에 임시로 있게 하여 장차 출애굽의 진군명령이 떨어질 때 가지고 나갈 역사의 유물이 되게 한 역사의식이 있는 유언을 남긴다 (50:24-25). 이것이 그 훗날에 이행되었으며 (13:19) 드디어 가나안 정복의 기본골격이 마무리 되었을 때 요셉의 유골은 야곱이 세겜의 아비 하몰에게서 산 땅(33:19)에 그 형제중에서 유일하게 가나안에서 열조에게 돌아가게 된다 (24:3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