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해를 돌아보며
우리는 그가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엡 2:10)
오늘은 2012년도 마지막 주일입니다. 2012년 한해를 보내면서 다사다난이란 말이 실감이 될 정도로 올 한해 우리 주변에는 크고 작은 많은 일들이 있었습니다. 모 일간지가 발표한 2012년 10대 뉴스를 보니까 34년 만에 다시 청와대로 들어가게 된 박근혜 대통령 당선자 이야기이며, 새정치를 갈망하는 국민들의 갈망이 만들어 낸 ‘안철수 현상’, 북한이 장거리 로켓 발사 성공, 성(性)검사, 뇌물검사, MB정권 실세들의 잇단 비리혐의 등 정치적으로 굵직굵직한 사건들이 유난히 많았던 한 해였습니다. 또 사회적으로는 학교폭력과 성폭력으로 신음하는 사회와 ‘강남스타일’ 말춤으로 하루아침에 월드스타가 된 가수 싸이 이야기 등이 사회면의 톱기사를 장식했습니다.
아마 개인적으로도 크고 작은 일들을 많이 겪으셨을 겁니다. 남편과 자녀, 직장, 경제, 건강, 신앙문제로 위기를 느낄 때도 있었을 것이고, 아직도 그 위기가 해결되지 않은 분들도 계실 겁니다. 상황이야 어찌되었건 흘러가는 시간을 우리가 막을 수는 없지요? 우리가 누구라서 흘러가는 시간을 거꾸로 막을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비록 우리가 흘러가는 시간을 막을 수는 없더라도 흘러가는 시간이 제대로 흘러가고 있는지는 평가해 볼 수 있지 않겠습니까? 아니, 시간이 좀 들더라도 우리의 삶을 제대로 평가해 봐야 하지 않겠습니까? 나에게 관대한 채 좋은 게 좋은 것이라고 넘어가는 한 발전은 없습니다. 희망찬 미래도 없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두 가지 문제가 발생합니다. 먼저는 “과연 누가 우리의 삶을 평가해 줄 거냐?” 하는 것이고, 둘째는 “과연 어떻게, 어떤 기준으로 우리의 삶을 평가할 것이냐?” 하는 겁니다. 만약 이 두 가지 문제가 제대로 세워지지 않으면 우리는 잘못된 결과를 낳을 수밖에 없지요.
제 주위에 평상시부터 알고 지내던 분이 계세요. 최근에 그분을 만났는데 자신의 치아를 보여주면서 굉장히 고통스러워하십니다. 그래서 물었지요. “아니, 어느 치과에 가서 치료를 받으셨는데 그렇게 힘들어 하세요?” 그랬더니 이 분이 이리 말하는 겁니다. 자신의 친구가 중앙시장 어디에 가면 아주 싸게 이빨치료를 해 준다고 해서 그 분의 소개로 그 곳을 찾아갔답니다. 그런데 그 의사는 치대를 나와서 정식으로 의사면허증을 걸어놓고 시술하는 분이 아니라, 소위 야매로 치과시술을 하는 분이였던 겁니다. 치아 하나에 이십 만원씩을 주기로 약속하고 치아 다섯 개를 교정하기로 했습니다. 준비한 돈이 부족해서 일단 50만원만 주고, 나머지 50만원은 다음에 주기로 하고 교정을 받았습니다. 본인도 찝찝한 마음은 있었지만 그래도 싼 맛에 치아를 맡겼습니다. 그런데 이게 웬일입니까? 치아 교정을 받은 후 채 일주일도 지나지 않아 잇몸이 쑤시고 아프기 시작하더니 급기야 잇몸이 퉁퉁 붓고 피가 나오는 겁니다. 어쩔 수 없이 다시 그 돌팔이 의사를 찾아갔더니 그 의사가 쩔쩔매며 나머지 돈은 안 주어도 되니 그냥 이쯤해서 돌아가시라고 말하더랍니다. 그러면서 생돈 50만원만 날린 것도 모자라, 소중한 자신의 치아만 망쳤다고 하소연을 하는 겁니다. 여러분, 사람이 이렇게 어리석습니다. 아니, 돈 몇 푼 아끼겠다고 여러분의 소중한 몸을 아무에게나 맡기시겠습니까?
여러분의 소중한 몸을 면허도 없는 돌팔이 의사에게 맡기지 않겠거든 하물며 여러분의 영혼과 인생을 누구에게 맡기시려 합니까?
오늘 본문은 우리에게 무엇이라고 말하지요? “우리는 그가 만드신 바라” 여기서 ‘그’는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을 가리킵니다. 우리를 누가 만드셨나요? 하나님이 우리를 만드셨습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이 만드신 최고의 걸작 품들입니다. 자! 이게 너무 뻔 한 이야기 같지요? 그런데 이 진리를 알지 못하고, 믿지 못하는 사람이 이 세상에는 너무나 많아요. 이 세상에는 이 진리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아요. 그들은 인생에 대해 다음과 같이 생각합니다.
“우리는 원시적인 아메바들의 합성으로 우연히 태어난 존재들이지. 우리의 조상은 원래 원숭이들인데 오랜 세월동안 수많은 진화들이 일어나서 오늘 우리까지 오게 된 거야. 내 조상이 원숭이까지는 아니더라도, 적어도 나는 이 세상에 우연히 태어난 존재지. 아마 저 세상에서 나는 동물로 다시 태어나거나, 아니면 아주 존경받는 위인으로 다시 태어날지도 모르지. 어쩌면 내가 이렇게 생각하는 것 자체가 부질없는 것일지도 몰라. 저 세상이 어디 있고 내세가 어디 있어! 그냥 이렇게 살다가 죽으면 그만이지. 죽으면 모든 게 끝이라고…”
여러분, 이러한 이야기들이 여러분들에게 전혀 낯선 이야기들은 아닐 것입니다. 이 세상에 수많은 사람들이 인생에 대해, 또는 내세에 대해 아주 막연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인생관은 “누가 우리를 만드셨는가?”하는 질문을 깊이 생각하지 않은 결과물들입니다. 이러한 생각들의 공통적인 특징은 우리는 인생에 대해 잘 알 수 없다는 생각들입니다. 그저 우리는 우연히, 혹은 불확실한 세계에 던져진 존재들일 뿐입니다. 그러므로 인생의 중요한 목적들을 발견할 수 없게 됩니다. 그러나 성경은 무엇이라고 말하나요? “우리는 그가 만드신 바라” 우리는 하나님에 의해 창조된 존재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를 판단하실 분은 오직 하나님 밖에 없습니다. 하나님 외에 그 어떤 존재도 우리의 삶을 평가할 수는 없습니다. 심지어 우리 자신 조차도 말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들에게 아주 의미 있는 이야기를 들려 주셨습니다. 어떤 사람들이 예수님 앞에 나와서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 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 그 때 주님께서 그들에게 무엇이라고 말씀하셨나요?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마 7:22-23).”
비슷한 종류의 이야기가 그 유명한 달란트 비유에도 등장합니다. 예수님은 게으름과 불평으로 자신의 한 달란트를 땅에 묻어두었다고 그대로 가지고 온 사람에게 무엇이라고 말씀하셨나요? “그에게서 한 달란트를 빼앗아 열 달란트 가진 자에게 주라…이 무익한 종을 바깥 어두운 데로 내쫓으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갈리라 하니라(마 25:30).”
이 두 이야기가 말하는 바가 무엇인가요? 우리의 인생을 판단하실 분은 오직 하나님이시다. 오직 하나님만이 우리의 인생을 판단하신다.
여러분, 올 한해 앞 만보고 부지런히 달려오셨습니까? 이제는 잠시 쉬면서 여러분의 삶을 되돌아보세요. 과연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삶을 어떻게 평가하실까요? ‘올 한해 얼마만큼의 소득을 남겼다.’ ‘남들이 나를 어떻게 생각한다.’ 그런 게 중요한 게 아닙니다. “하나님이 나를 어떻게 평가하실까?” 그게 더 중요합니다. 항상 하나님의 눈은 공정하십니다. 하나님은 정의로 이 땅을 다스리십니다. 그래서 누구도 하나님의 눈은 속일 수 없습니다. “오직 정의를 물 같이, 공의를 마르지 않는 강 같이 흐르게 할지어다(암 5:24).” 더구나 하나님은 인생이 아니셔서 거짓말하지 않으시고 후회하지도 않으십니다(민 23:19).
제가 신학대학원에 다닐 때 학교에서 주최하는 교내 설교대회에 나간 적이 있습니다. 매년 대학원 원우회에서 주최해서 열리는 설교대회는 다른 행사보다 대학원생들의 참여도 높고, 상금도 높아서 내노라하는 쟁쟁한 사람들이 많이 참석했습니다. 그래서 거기에서 입상하는 것 자체가 결코 쉽지 않았어요. 대학원 1학년 때는 선배들이 하는 것을 지켜보았습니다. 2학년 때 큰 맘 먹고 별 준비 없이 나갔습니다. 그런데 의외로 호응이 좋았습니다. 선배들이나 동기들이 1등은 못해도 아마 입상은 할 수 있을 것이라고 이야기해 주었습니다. 그런데 역시나 입상을 하지 못했습니다. 그곳은 별 준비 없이 나가면 결코 입상할 수 없는 대회였습니다. 개인기만 가지고 대학원들을 울렸다, 웃겼다 해가지고는 결코 입상할 수 없습니다. 왜냐구요? 심사위원들 때문입니다. 해외에서 설교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은 쟁쟁한 교수들 세 명이 눈을 부릅뜨고 설교자의 일거수일투족을 심사하기 때문입니다. 청중들은 웃어도, 설교학 교수들은 절대 웃지 않습니다. 엄중한 심사위원들이 있어서 더욱 그 대회가 부담스럽고 빛난 자리입니다. 결국 대학원 졸업반 때 몇 달을 준비해서 설교대회에 나갔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은혜로 1등을 했습니다. 물론 그 때 저보다 설교를 더 잘하는 후배가 있을 수 있었을 겁니다. 그런데 더 중요한 건 심사위원들의 마음을 움직여야 하는 겁니다. 그것을 위해서는 준비가 필요하고, 피나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올 한해, 여러분은 하나님 앞에서 몇 점이나 받을 수 있겠습니까? 만약 여러분이 하나님 앞에 섰을 때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이렇게 물으실 지도 모릅니다. “네가 그 때 그렇게 밖에 할 수 없었겠니? 더 좋은 방법은 없었겠니?”
혹시 부족한 점이 있었습니까? 아쉬운 점이 있었습니까? 낙심하지 마십시오. 그래서 하나님께서 2013년도를 여러분에게 허락해 주신 것입니다. 2013년도는 여러분의 부족한 점을 만회하도록 하나님께서 허락해 주신 좋은 기회입니다.
이제 두 번째 질문을 던질 때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과연 어떤 기준으로 우리를 평가하시는가 하는 것입니다. 오늘 성경은 말합니다. “우리는 그가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
하나님은 선한 일을 위하여 우리를 창조하셨습니다. 여기서 ‘선한 일’이 무엇입니까? 중요한 단서가 있습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았다는 이야기입니다. 오늘 우리가 10절만 읽었지만, 사실은 8,9,10절이 모두 연결되어 있습니다. 8절에서 무엇이라고 말합니까?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는데 이것은 우리에게서 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물이다.” 또 9절에서는, 우리가 우리의 행위로 구원받은 것이 아니다 라고 말합니다. ‘은혜, 믿음, 구원, 선물’ 이런 단어들을 보며 느끼는 것이 무엇입니까?
탈무드에 보면 사람을 평가하는 기준이 세 가지가 있다고 합니다. 이것을 히브리어로는 "키소, 코소, 카아소"라고 부릅니다.
첫째 기준은 "키소"입니다. 이것은 “그의 주머니”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쉽게 말해 어떤 사람을 알려면 그 사람이 돈을 어디에 쓰는지를 보면 된다는 말지이요. 여러분이 잘 아시는 미국의 강철 왕 카네기는 어린 시절 무척 가난하게 살았습니다. 돈이 없어서 옷을 살 돈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누더기 옷을 걸치고 살았습니다. 돈이 없기 때문에 장가도 느지막하게 들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믿음 안에서 늘 성실한 삶을 살려고 노력을 했습니다. 결국 그는 하나님의 은혜로 사업에 크게 성공해서 세계적인 갑부가 되었습니다. 그는 늘 하나님의 선한 청지기로 살려고 노력했습니다. 그래서 그의 생활신조는 이러했습니다.
“돈은 하나님의 뜻대로 사용해야 한다.” 그는 살면서 어려운 교회들을 많이 지원했습니다. 그가 어려운 교회에서 기증한 전자 오르간만 7천대가 된다고 합니다. 카네기가 죽으면서 남긴 유언을 우리는 귀담아 들어야 합니다. “돈을 남기고 죽는 것은 수치스러운 일이다. 그러므로 나의 전 재산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사용해 다오.” 카네기는 갑부였지만 돈을 어디에 사용해야 하는지를 잘 아는 사람이었던 겁니다.
둘째 기준은 "코소"입니다. 이 단어는 “그의 잔”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 사람이 인생의 즐거움을 어디에서 찾는가를 살펴보면 그 사람의 인물됨을 평가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한국 사회는 향락문화가 극성을 부리고 있습니다. BBC가 발행하는 포커스라는 잡지가 35개국을 대상으로 일 곱 가지 죄악을 놓고 조사를 했다고 합니다. 탐식, 탐욕, 나태, 분노, 시기, 교만 그리고 정욕(Lust) 이렇게 일 곱 가지인데 우리니라가 정욕부문에서 1위를 차지했다고 합니다. 정욕이란 쉽게 말해 향락산업을 말하는 겁니다. 우리나라 향락산업의 규모가 6조원을 넘어서고 몸을 파는 여인들의 숫자가 150만 명을 넘어섰다는 아찔한 통계가 있습니다. 20대 가임여성의 수가 430만 명이라고 하는데 이건 정말 믿기 어려운 숫자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술과 도박 그리고 섹스에서 인생의 즐거움을 찾고 있어요. 여러분은 인생의 즐거움을 어디서 찾고 계시나요?
셋째 기준은 "카아소"입니다. 문자 적으로는 “그의 노여움”이라는 뜻입니다. 이는 그 사람의 감정 조절 능력과 인내력을 보면 그 사람의 됨됨이를 또한 평가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혹시 올 한해 여러분은 여러분의 감정을 잘 다스리며 사셨습니까? 마음속에 치밀어 오르는 울화를 조절하지 못하고 자녀에게, 남편에게, 아내에게, 혹은 이웃에게 내뱉진 않으셨나요?
2012년을 마무리하면서 우리는 고린도전서 12장에 나오는 바울의 권면을 귀담아 들어야 합니다. “너희는 더욱 큰 은사를 사모하라 내가 또한 가장 좋은 길을 너희에게 보이리라.” 우리가 사모해야 할 더욱 큰 은사, 가장 좋은 길은 무엇입니까? 바로 다음 장인 고린도전서 13장에 나오는 ‘사랑’ 아닙니까?
하나님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마음과 행동이 바로 하나님이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선한 일’입니다. 우리가 올 한해를 보내면서 하나님께서 평가하시는 기준이 있다면 그것은 ‘얼마나 사랑했는가?’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올 한해 얼마나 사랑하셨습니까?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이웃을 사랑하는 마음이, 교회를 사랑하는 마음이 얼마나 더 커지셨습니까? 혹시라도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보다는 나 자신을 사랑하는 마음이 더 컸었다면 오늘 다 회개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면서 새해를 맞이합시다! 올 한해, 여러분이 사랑으로 품고 기도하고 있던 전도대상자는 몇 명이나 됩니까? 내년에는 더 많은 영혼들을 사랑으로 품고 그리스도께 인도하도록 은혜를 구합시다!
끝으로 유안진 시인의 시 ‘송년에 즈음하면’이라는 시를 여러분에게 소개해 드리고 설교를 마치고자 합니다.
송년에 즈음하면
도리없이 인생이 느껴질 뿐입니다
지나온 일년이 한생애나 같아지고 울고 웃던 모두가 인생! 한마디로 느낌표일 뿐입니다
송년에 즈음하면
자꾸 작아질 뿐입니다
눈 감기고 귀 닫히고 오그라들고 쪼그라들어 모퉁이길 막돌맹이보다 초라한 본래의 내가 되고 맙니다
송년에 즈음하면
신이 느껴집니다
가장 초라해서 가장 고독한 가슴에는 마지막 낙조같이 출렁이는 감동으로 거룩하신 신의 이름이 절로 담겨집니다
송년에 즈음하면
갑자기 철이 들어 버립니다
일년치의 나이를 한꺼번에 다 먹어져 말소리는 나직나직 발걸음은 조심조심 저절로 철이 들어 늙을 수밖에 없습니다.
- 시집『월령가 쑥대머리』 (문학사상사, 1990)
김규태 목사 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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