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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하나님에 대한 묵상(요약)- 김홍전 목사

하나님아들 2012. 9. 28. 17:23

하나님에 대한 묵상(요약)- 김홍전 목사

 

 

 

성경을 공부하는 목적(1)

 

의의 결과에 이르게 못 하는 지식욕은 정욕
   딤후 3:7『항상 배우나 마침내 진리의 지식에 이를 수 없느니라』라는 문구에서 
   여러 가지 욕심에 끌려 거룩한 것을 거룩히 여기지 못하는 현상을 지적했다. 
   바울이 말하는 성경의 역할
   딤후 3:15『성경은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말씀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게 하는 지혜가 있게 하느니라』
   ⇒성경을 통한 지식으로 얻을 수 있는 것
   성경에 대한 지식을 얻은 만큼 하나님을 더 의지하게 되고 그로 인해 
   은혜가 풍성히 임하여 구원의 큰 사실이 풍요하게 나타나고 그 완성의 
   경계에 가까워진다.
   우리에게 은혜를 전달하고 소개함으로써 마땅히 행해야할 여러가지 선을
   완전히 행하게 한다.
    ★그러나 의의 결과에 이르지 못한 채 알아보고 싶어서 알게됐고 그것으로 
       만족한다면 그것은 결국 시간 낭비와 정력낭비이며, 오히려 자신의 정욕을 채운
       결과일 뿐이다.

성경공부에서 얻는 여러 가지 유익
   문학적 효과 : 성경에서의 문학적인 요소 즉 성경 속 등장인물들의 회로애락을 
                       통해 공감과 위로를 얻게된다.
   사상의 지침 : 성경은 인간에게 도덕적인 지침이 되고 이세상과 인생의 문제
                       에 대한 사상의 원천 노릇을 하게 된다.
   신학의 원천 : 기독교를 보는 관점을 형성하고 참된 신앙이 무엇인지를 알게 한다.

성경이 기록된 까닭
   최초의 사람 : 하나님은 사람을 만드시고 능력을 주시며 무엇을 해야할 것인가를 
                       가르쳐주셨는데, 그것이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주신 최초의 계시이다.
   인간의 타락 : 인간은 타락과 부패로 말미암아 하나님앞에서 바르게 살 능력을 
                       상실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여전히 은혜의 
                       방편과 자신의 본의를 가르쳐 주셨다.
   성경의 기록 : 하나님의 가르침은 역대를 통해 거룩한 사람들의 손을 거쳐 
                       기록되었으며 그것을 베끼고 베껴서 우리의 손에까지 내려왔으며 
                       이것이 있어야만 하나님 앞에서 바르게 살 수 있다.
   성경공부의 올바른 자세
         ⇒ 하나님께서 성경을 주신 본의를 깨닫고 상고해서 그 방향으로 나아가려고 
             해야한다. 그렇지 않다면 성경은 성경으로서의 능력을 그것을 공부하는 
             사람에게 나타내지 않는다.

성경공부의 그릇된 목적 & 성경이 우리에게 요구하는 근본적 태도
   역사와 서양문학에 대해 공부하기 위해 성경공부를 하는 경우
   성경을 도덕의 한 표준으로 받기 위해 공부하는 경우
   성경을 통해 자신의 마음의 위로를 받으려는 경우
   기독교의 근본적인 가르침을 알기 위해 성경을 공부하는 경우 또는 굳이 
   신학자가 되기 위함이 아니더라도 인생의 큰 의미를 깨닫기 위해 성경공부를 
   하는 경우
      ☆ 이러한 것들은 성경공부를 하는 근본적인 목적이 아니며 부수적으로 얻게 
          되는 "일반은혜"이다. 성경이 참으로 우리에게 요구하는 자세는 자기 자신을
          완전히 비우게 하는 자세이다. 성경말씀은 자기 자신을 비워 위의 것들을 
          모두 초월하게 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다.

은혜의 방도로서의 성경
   성경을 통해 자기 유익을 구하는데 그친다면 성경을 통한 참된 은혜를 받을 수
   없을 만큼 왜곡된 상태가 된 것이다. 성경을 통해(하나님과의 관계가) 바로 잡아
   지지 않는데 교회가 그를 바로 잡을 수는 없다. 하나님께서 주신 유일한 은혜
   의 방도는 말씀과 성례전이다.
   사람이 스스로의 힘으로 회개하고 반성해서 (관계가) 바로 잡아지는 것이 아니다. 
   회개와 신앙이라는 것은 "은혜의 내용"이지 은혜의 수단이 될 수 없다. 그러므로 
   겉으로 회개한 사실이 저절로 그 사람을 회개케 만들지는 않는다.
   하나님의 말씀만이 가장 큰 은혜의 수단이다. 또한 기도는 특권이며 곧 은혜의 
   결과이지만 (말씀에 충실한 기도는) 은혜의 수단으로도 쓰인다.

성경공부의 목적을 돌아보아야 함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상고하려할 때 무슨 목적으로 성경공부를 하는지 우리의 
   마음을 돌아봐야 한다.
      ⇒ 귀한 옷의 비유 : 값 비싼 비단 옷을 갈기갈기 찢어 걸레로 쓰지 않는다.
          →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며 그런 까닭에 현실적인 효과에만 치중해서 
              성경을 읽어서는 안된다.

결  론
   성경공부의 바른 목적을 이해했다면 그에 상응하는 열매와 결과가 있어야 한다. 
   우리는 이것에 대해 각각 자기를 반성하고 하나님의 말씀이 왜 우리에게 있는지 
   무엇 때문에 쓰였는지를 이해해야 할것이다.

 

성경을 공부하는 목적(2)

 

성경의 목적은 영원한 생명
우리가 가진 목적과 의도를 떠나 하나님께서 성경을 우리에게 주신 본의대로 쓰는 것이 하나님 앞에 정당한 것이고, 또 우리에게도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내신 본의에 합당한 생활, 하나님과 가장 정당한 관계를 맺고 사는 생활에 필요한 여러 가지를 가르쳐 주시기 위해 계시하신 것입니다. 이러한 본의에 저항하고 있지는 않은지 우리는 살피고 두려워해야 합니다.
성경은 구원이라는 목적에 도달할수 있는 지식을 주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성경이 자신에 대해 증거하며, 그 증거의 말씀을 우리가 배움으로 영생을 얻는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구원의 의미
구원이라함은 예수그리스도로 말미암은 새 생명이 내 안에 있다는데서 시작하여, 그렇게 형성된 새 사람이 성경이라는 필수적인 양식을 통해 점점 장성해 나가는 과정과 그 정점인 영화의 단계까지 포함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미 과거에 새 생명을 얻었지만 현재 나에게 날마다 풍요하게 역사하고 계시는 사실에서 지금도 구원은 계속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고정 속에서 우리는 더욱 믿음이 굳건해 지고 밝아져야 합니다. 이를 위해 성경으로 말미암아 믿음의 요소가 풍부해져야 합니다. 즉 구원의 조성자이신 하나님과, 구원을 주시기 위한 조건을 모두 이루신 예수그리스도와, 그것을 내가 받게 해서 구원의 사실들이 내게 발생하고 더욱 장성케 하시는 성신님의 크신 역사가 내안에 같이 해야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성신께서 반드시 말씀과 함께 사역하십니다. 성경을 오직 하나님의 성신님께서 그것을 쓰시는 데에서 본의가 나타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성경을 공부할 때 성신님께서 그것을 쓰셔서 성경의 큰 본의를 나타내시기를 간절히 바라야 하는 것입니다.

일반은혜와 특별은혜
성경이 우리에게 은혜의 방도가 된다고 할때 그것은 특별한 은혜의 방도가 됩니다. 물론 성경이 성신님의 일반은혜의 사역에도 쓰이지만 중생의 사실과 중생으로 말미암은 계속적인 은혜의 사실들이 일반은혜의 사역을 받은 사람들에게는 나타나지 않습니다. 특별한 은혜는 구속의 은혜를 뜻합니다. 그리고 구속의 여러 가지 과정들에 필요한 것들이 자꾸 더 드러나게 되는 것입니다.
성경을 공부할때의 마음가짐은 인간적인 친분이나 자기 감정의 만족을 위하거나, 자기 불행을 덜고자 하는 자기중심적인 생각에서 벗어나 '이 성경공부에서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가 나에게 나타나야겠다. 특별한 은총이 나타나야겠다' 는 간절한 소망을 가지고 하나님을 의지하고 나아가야 합니다. 또한 특별한 은총이 나에게 임하여 하나님 앞에서 나 자신의 죄된 모습과 이기적인 모습을 깨닫고 감정의 만족과 지식욕에서 떠나, 그 말씀이 늘 특별한 은혜로 역사하기를 간절히 바라야 합니다.
여기서 성신님이 성경을 사용하여 나타나는 거룩한 은혜를 훌륭한 경험 정도로 생각해선 안됩니다. 어떤때는 그런 것들이 거룩한 하나님나라의 일들을 돕기도 하지만 은혜받는 방도는 아닙니다. 즉 자신의 특별한 경험으로 말미암아 더욱 은혜를 받으리라고 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고로 자신의 은혜를 정당하게 해석하고 판단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교회에서 해명한 말씀이 중요함
성경이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라고 할때 그것은 나 개인에게 주신 것이라기 보다는 예수그리스도의 주권하에 있는 그 나라가운데 베푸신 은혜라고 생각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백성을 땅위에 보이는 확실한 교회로서 존재하게 하셨는데 그 교회에 베푸신 은혜라는 뜻입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모태와 같이 사용되어, 그 안에 쓰실 자들을 세우시고 지혜를 주셔서 성경을 바로 해석하게 함으로써 그 백성들이 은혜를 받게 하셨습니다.
거룩한 교회가 하나님의 말씀을 권위있게 선포함으로, 그 말씀이 살아있는 말씀으로 정당하게 해석되는가 잘못 이용되는가에 대한 명확한 반응을 일으키고, 이러한 명확한 반응하에 들은 지체들이 성신님의 깨닫게 하심으로 장성해 가는 것입니다. 그런고로 지체들은 교회에서 해명한 것을 듣고 깨닫는 것이 중요하고, 돌아가서 그것을 읽고 공부할 때 깊이 반성하고 반추해 보는 것입니다.
말씀이 보일수 있는 형태로 나타날 때에는 세례와 성찬이라는 성례로 나타납니다. 그러나 성례는 항상 말씀과 함께 존재함으로 그 상징으로서 의미를 가집니다. 성례의 집행 또한 말씀의 해명과 선포와 마찬가지로 자기 마음대로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지혜를 주시고 은사를 주신 사람이 집행해야 합니다.

말씀을 듣는자의 마음 상태
우리는 개인적인 경험이나 회개가 아닌, 거룩한 교회에 객관적으로 공통적으로 주신 것을 은혜의 방법이라고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 성신님께서 깨닫게 하셔야 깨닫는 것입니다. 깨닫게 하시는데도 불구하고 자신의 선입관이나 감정, 자신의 주관과 다른 기대들로 성경을 들으려 하며 안됩니다. '순정한 마음으로 하나님의 거룩한 은혜만을 받게 하시옵소서'하고 간절히 기대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교회에서 해명되고선포된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고 알게된 신자라면 그것을 기초로 현실적인 신앙생활이 구체적으로 나타나야 합니다. 하나님만을 전부로 의지하고 자기 자신은 도무지 없다는 큰 기저가 명확해졌느냐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은혜를 받았다면 은혜를 받은데 해당하는 마음의 상태가 언제나 필요한 것입니다.

은혜 받은 자의 실증
하나님말씀을 공부하여 더욱 큰 진리를 깨닫고 알게되면 하나님의 나라 뿐만아니라, 더럽고 추한 이 세상의 사실들과, 하나님께 속한 사람과 세상에 속한 사람은 어떠한가에 대해서도 깨닫게되어 더욱 하나님나라를 사모하게 되어집니다. 그리하여 이 땅위에 아름답고 거룩한 하나님 나라의 모습을 드러내기를 간절히 소원하며, 그것을 교회라는 형식을 통해 드러내는 것입니다. 이렇게 항상 거룩한 자태를 드러내고자 할때 자신을 살펴서 그리스도의 거룩함에 비추어 내가 얼마나 부적당한가에 대해서도 더욱 바로 알게 되어, 거룩한 은혜의 사실들을 잘 드러내고자 하는 간절함이 생기며, 자연히 성신을 의지하게 됩니다. 즉 우리가 하나님을 더 깊이 알면 알수록 더욱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려는 거룩한 심정으로 차게됩니다. 하나님나라를 간절히 사모하고 그것을 드러내려는 신자라야 신앙의 지적요소가 증가하는 은혜를 받을수 있고 거기에 의해 내가 생활해 나가는 것입니다.

푯대를 향해 나아감
중요한 것은 세상이 요구하는 선한것들이 아닙니다. 항상 하나님나라의 의와 영광을 나타내는 푯대를 향해서 좌우로치우치지않고 매일 전진해 나간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하나님 말씀을 공부할수록 예수그리스도를 더 깊이 사모하고, 그의 도덕적인 품성만이 아니라 큰 경영과 대권과 영광을 그 거룩한 나라를 통해 드러내야 합니다.
우리는 다른 것들을 목표로 해서는 안됩니다. 항상 성경에서 일반적인 은총만 구하고 특별한 은혜를 내가 기대하지 않고 있는가를 바로 생각해야 합니다. 특별한 은혜는 우리를 하나님의 것 답게 고귀하게 만드시되, 개인을 일종의 성자로 만드시는 것이 아니라 거룩한 교회의 빛을 드러내기에 합당한 교회의 일원으로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지식과 품성과 의지가 주께서 우리를 향하여 가지신 크신 경륜을 이루는 방향으로 항상 전진시키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괴롬이나 어려움이 있을 때 주님앞에 구하여 그것을 제해주시기를 바라는 것은 아주 정당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왜 필요하냐 하는 분명한 목표가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건실하게 살아가려고 할 때도 분명한 목표가 있어야 합니다. 건실하게 살아가려면 더욱 하나님 말씀을 상고하고 특별한 은혜가 내안에 거하기를 간구해야 하는 것입니다.

 

 

성경이 가르치는 큰 목적

 

하나님이 계시다는 사실
성경에 대하여 배우고자 할 때 우리가 제일 먼저 생각해야 할 가장 기초적인 사실은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입니다. 모든 존재의 기본은 하나님이 가지고 계신 가장 기본적인 속성, 기본적인 사실에서 연유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계시다든지 아니 계시다든지 하고 논할 수 가 없다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그런데 이 문제에 대해서 이야기하느냐 하면, 세상에는 하나님이 아니 계시다고 하는 사람이 많은 까닭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아니 계시다는 생각으로 살면 그것은 사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은 사람으로 피조된 까닭에 사람으로서 지니는 가치가 거기에 없다면 사는 것이 아닙니다. 동물적인 생명으로 존재하는 것만으로는 사람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사람은 영혼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 영혼의 기능이 발휘되어서 동물과는 본질적으로 다른 존재의 양태를 나타내는 것입니다. 그래야 비로서 사람의 존재라는 것이 의미를 지니게 됩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아니 계시다 하는 생각을 한다면 그것은 사람으로서 존재하는 기본적인 의의를 잃어버리는 것입니다. 

무신론
여러분은 무신론자에 대해서 '무신론을 하는 사람들도 아마 저들의 생각을 확실히 믿겠지' 하고 추측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무신론이라는 것은 만들어 낸 이론이므로 그들의 중심 속에 있는 무신론이 우리에게 확실히 있는 유신론과 같은 비중을 가지고 있지는 못합니다. 하나님이 계시다는 사실이 인샌관의 하나의 기저인 것입니다. 성경은 또한 '사람은 어떻다' 하는 것을 가르치고 있는데 '절대로 사람은 철저하게 마음으로 하나님을 부인하지 못한다. 부인하려고 해도 그렇게 되어 있지 않다'고 합니다. 무신론자는 무신론을 확고하게 못 믿는 것입니다. 왜 하나님이 아니 계시다( no to God )고 하느냐 하면 하나님이 계신 까닭에 아니 계신다는 이론이 생기는 것입니다. 그래서 '무신론은 하나님의 존재의 반증이 되는 것이다' 하는 이론도 생기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바로 앎
하나님이 계실지라도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바로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 이외에 다른 무엇으로 존재한다고 생각한다는 것은 의미 없는 일입니다. 그것은 '실질상 무신론'이라 합니다.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바로 알아야만 참된 유신론이 성립하는 것입니다. "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으로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유신론은 유신론인데 정당한 가치를 하나님 앞에 돌리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알지 않고 하나님 이외의 것으로 알고서 그런 관념의 터 위에서 하나님을 대할 때 그것은 결국 우상 숭배가 되는 것입니다. 신앙의 큰 기초 도리는 하나님이 존재하신다는 것만을 믿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알고 믿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바로 인식한 사람의 태도
하나님을 바로 인식한 사람은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마음이 생기기 전에 먼저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순종할 줄 알아야 합니다. 그래야만 사람이 사람으로서 하나님에 대한 정당한 인식을 발휘하게 되고 정당한 지식을 가지게 됩니다. 주를 경외하는 심정과 또 주에 대해서 겸손한 심정을 가지는 것이 그 사람의 생명과 사람으로서의 정당한 가치를 유지하고 살아가는 데 가장 기본이 되는 요소입니다. 결국 겸손과 여호와 경외는 물질(재물)부터 시작해서 그 사람의 가치(영광)와 존재(생명)에 영향을 미치는 보상을 받는다고 가르쳤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에 대해서 제일 처음 가져야 할 기초적인 인식은 그분이 존재하신다는 객관적 사실뿐 아니라 그분은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바로 아는 것입니다. 그럴 때 나는 하나님과 어떤 관계가 있는가 하는 것을 당연히 생각하게 됩니다. 그분으로 말미암아 내가 난 까닭입니다. 그런 연후에 하나님께 나는 어떠한 생활태도를 취하고 나갈 것인가를 생각하는 것입니다. 결국 성경이 맨 처음에 중요하게 들어서 말하는 사실은 하나님은 어떤 분이시냐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경 전체에 흐르면서 항상 가르치는 바입니다. 

하나님의 속성
하나님은 누구이시다 하는 직접적인 선언만이 아니라 하나님이 하신 일의 역사를 우리가 알아야 하는 것이고 또한 하나님의 속성에 대해서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속성이라고 할 때 그 무한한 내용을 우리가 다 알 수 없다는 것을 첫째 중요히 생각해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알려 주신, 전달하신 속성이 있습니다. 예수님 혹은 하나님의 거룩한 속성이라든지 크신 일을 우리가 성경에서 배워서 아는 것인데, 비단 성경에 있는 이 특별한 계시뿐 아니라 하나님이 내신 일반 법칙에 대한 연구를 통해서도 결국은 하나님에 대해서 깨닫게 하십니다. 모든 과학은 결국 하나님에 대한 정당한 인식으로 인도하는 길잡이 노릇을 할 때에 정당한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아무튼 성경 가운데 나타나는 바 하나님에 대한 그 풍요한 지식을 우리가 바로 터득해서 나아가는 것이 가장 중요한 문제입니다. 

개인적 종말론이 예수 믿는 대본이 아님
성경은 하나님께서 만드신 천지 가운데 늘 땅을 중심 삼아서 기록되었습니다. 여기서 주의할 것은 성경의 내용에 지구에 있던 사람의 생활 이야기가 많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하나님께서 내신 일반 법칙 전체를 망라한 것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이 내신 천계의 법칙도 일반 법칙인 것입니다. 지구에 대해서도 자세히 이야기한 것은 소위 사람이 땅위에서 사는 동안 하나님의 경영은 무엇이며 하나님과의 관계는 어떠해야 하느냐 하는 것들입니다. 그런데도 성경의 가장 큰 부분인 땅 위에서의 생활은 다 무시하고서 죄 있는 사람이 사망의 그늘 가운데서 살다가 예수 믿고 새 생명을 얻어 훌쩍 천당으로 가는 얘기만 한다면 옳지 못합니다. 사실 사람이 천당에 가서 어떻게 산다는 것은 이른바 개인 종말론이라는 것이데 성경에는 그게 그렇게 풍성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가장 간단한 이야기 하나를 가지고 자꾸 예수 믿는 도리의 대본(大本)으로 삼으려 하고 또 그렇게 산다면 그런 교회는 어떻게 되겠나 하는 것입니다. 중요한 문제는 성경에서 여러 가지로 자세히 가르쳐 준 땅위의 이야기를 중요히 파악하고 그것을 경영해서 우리 생활 가운데 나타내려고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성경이 가르친 큰 제목의 또 하나는 '먼저 땅을 무대로 하고 있다'는 것임을 기억해 두어야 합니다. 첫째로 성경은 항상 하나님을 본체로 가르쳐서 모든 지식은 결국 하나님을 바로 알게 하는데 있다는 것이고, 둘째 그 무대는 땅이라는 것입니다.

성경의 중심 주제: 하나님과 사람
하나님에 대해서와 사람에 대해서 바로 알려주시는 것이 가장 중심 되는 성경의 내용입니다. 이것이 가장 중요한 사실로서 하나님의 계시, 교시(敎示), 교훈인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계시가 어디서 제일 잘 나타났는가 하면 하나님이시면서 사람이신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가장 잘 나타났습니다. 사람이시오 하나님이시되 어느 편이나 가장 완전하신 분으로서 나타나셨습니다. 그럼으로써 우리에게 '너희가 알아야 할 것은 하나님이요 사람이다' 하고 가르치셨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아끼고 사랑을 쏟으실 대상으로 만드셨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성경을 보아 가면서 하나님께서 인생을 창조하신 본의를 깨달을 때 알 수 있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 수 있는 피조물이라면 그 사랑의 대상으로서 정당한 자격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에 대해서 가르친 성경 교훈 가운데 하나님의 큰 두 가지 속성은 '빛과 사랑'이라는 말로 표시되었습니다. 그 빛과 사랑을 잘 쏟아서 비추실 대상으로 만드신 것이 바로 사람입니다.

 

 

하나님은 인격자이시다

 

실천적 무신론
사람들은 하나님의 존재에 대해서 하나님이 안 계시다는 이론, 소위 무신론이라는 것을 주장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실상 무신론이란 그 사실을 이론적으로 냉정하게 제시하는 데 그 초점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희미하게 나마 사람 속에 응당 비취는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계시를 무시하거나 반대하고 일어나는 적극적, 반신적 행위일 뿐입니다. 
우리가 정작 중요하게 고려해 봐야 할 것은 '실천적 무신론' 이라는 것입니다. 그 내용은 '말로는 하나님의 존재를 긍정하나 말 그대로 실제로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정당하게 인식하지 않는다'라는 것입니다.(참고 ☞ 롬 1 : 21, 고전 8 : 4, 엡 4 : 6, 약 2 : 19).
실천적 무신론에 젖어 있는 사람들의 태도는 "하나님은 계시다. 그러나 사람의 생활은 사람이 경영하는 것인 까닭에 사람의 경영아래서 무엇이든지 적당한 방법을 취해야 하고, 그로 말미암은 정당한 인과 관계를 고려해서 생활해 나가야 한다." 하는 식입니다. 
즉, 하나님이 하나님으로서 거룩한 영광과 능력과 권세를 드러낸다는 사실은 승인하지 않고 제 생각으로, 자기의 관견으로 하나님이 개재하지 아니한 것처럼 생동하는 식이라는 것입니다. 대체로 이러함은 미신적인 것이나, 합리주의를 절대화하는 합리 제일주의에서 찾아볼 수 있는데, 질병에 대한 사람들의 태도를 통해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 미신에 대한 정의 : 정당한 신앙태도가 아니고 어떤 그릇된 관념에 사로 잡혀서 믿어도 소용없는 것이나 혹은 원래 믿을 것이 아닌 것들을 자꾸 믿으려 하는 것을 말합니다. 미혹 되어 방황하는 것을 말합니다.)

질병에 대한 미신적 태도
신체의 질병 앞에서 나타나는 미신을 보면 믿을 수 없는 것과 믿도록 되어 있지 아니한 것들을 믿으려 할뿐더러 그것을 믿도록 하기 위해서 무슨 이론, 즉 무슨 설이라 해서 만들어 내는데, 이러한 모양이 기독교 안에 파다합니다. 하나님이 내신 정당한 법칙과 진리를 무시하고 유린해 가면서 자기의 욕심을 위한 이론을 세운 다음에 따라가는 경우가 많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병을 낫게 해 주는 것이 원칙입니다. 그러나 거기엔 하나님의 뜻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을 모르고서 자기 맘대로 해석하여 병에 대한 하나님의 다스리심을 불인정한다면 그것이 바로 미신이며, 방황하는 신앙입니다. 
그리고 병이 '나고', '낫는다'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내신 일반 법칙아래 발생하는 한 현상일 뿐인데 그러한 현상을 하나님께서 내신 법칙이므로 하나님스스로 취소할 수 없다고 생각하여 절대적 사실로 인정한다면 그것 또한 '미신'인 것입니다. 만약 그 이치를 절대화 시킨다면 '하나님은 이치안에서 벗어나지 아니하신다'는 Deism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분명히 하나님께서는 그의 법칙을 유린 하시지 않습니다. 그러면서도 법칙을 내신 위에 다른 법칙을 내실 수 있음을 믿고 고백해야 합니다.

불치의 병이라는 것은 없음
과학적인 관점에서 볼 때 어떤 병은 의사가 아무리 손을 써도 어쩔 수 없는 것이 있습니다. 치료 요법을 지금까지 발견하지 못한 것이 있습니다. 그런 질병에 대해서는 의사라도 손을 들 수밖에 없습니다. 의사로서 어떻게 할 수 없는 병이 있다는 것은 정당한 이야기입니다. 그런 의미로 '불치의 병' 이라고 한다면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그러나 병 자체를 일컬어 절대 불치의 병이라고 말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병은 하나님의 다스림 속에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질병에 대한 합리주의적 태도
"하나님께서 이치를 내셨으니까 하나님께서는 자신이 내신 이치를 스스로 유린할 수 없다. 그러니 이치 그것 자체는 항상 가장 확실한 것이고 또 변경할 수 없는 중요한 사실이다"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이 합리주의를 제일로 여기는 '합리 제일주의'입니다.
다른 말로 하자면 이들은 하나님이 인생의 진행과정 중에 내려오셔서 간섭하거나 그 방향을 전환하는 일은 없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인격신이시고, 만유의 통재자이시며 동시에 우리의 모든 것을 다 주장하시고 섭리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섭리'란 어떤 것을 다스리며 그것이 적시에 발생하도록 전부 배치해 나가는 것을 말합니다.
이 섭리 가운데는 특별한 섭리가 있습니다. 그것은 보통 일반 법칙으로서는 쉽게 알 수 없는 사실로서 특별하게 발생하는 것들입니다. 물질계에서도 발생하고 심령계에서도 발생합니다. 이와 같은 하나님의 특별하신 섭리와 일반 섭리의 역사는 인류 역사의 가운데 하나님이 친히 임재하셔서 역사의 방향을 바꾸기도 하시고 막기도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한 하나님을 믿을진대 소위 디이즘(Deism)을 주장하는 합리주의는 곧 불신을 의미합니다. 

인격자 이신 하나님
성경에 우리에게 나타내는 바는 하나님은 누구신가 하는것입니다. 
'하나님은 인격자이시다'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인격적인 모든 활동을 하시는 분입니다. 그분이 '인격자'라는 사실을 가르쳐 주기 위하여 성경은 신의 의인화적인 표현을 기록하였습니다. 신의 의인화라고 할 때 알 수 있는 것이 두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신인동형론이란 것이고 다른 하나는 신인 동성론이라는 것입니다.
신인동형론이란 하나님을 사람의 형상과 같은 것처럼 표현하는 것을 말합니다. 예를 들면 '들으신다', '듣는다', '보신다' 등등... 그리고 신인동성론이란 것은 사람의 성품을 가지고 하나님의 인격적인 작용을 묘사해 나가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슬퍼하신다', '진노하신다', 질투하신다', '기뻐하신다' 등등...
이처럼 사람의 형상을 사용하는말, 성품을 드러내는 말들을 가지고 하나님의 거룩한 인격적 작용을 묘사했습니다. 

신인동형론과 신인동성론으로 나타내시는 것
하나님은 하나님이신 까닭에 우리가 도저히 측량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우리고 하여금 그 하나님을 깨닫게 하시려고 신인동형론, 신인동성론을 사용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인격자이심을 나타내시기 위하여 그렇게 표현한 것입니다. 이러한 신의 의인화가 주는 중요한 것은 또한 하나님께서 특별하신 섭리고 우리의 생활가운에 임재하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아울러서 우리와 가까이 계시고 교제할 수 있는 분임을 보여주시기 위함입니다. 하나님은 너무나 두려운 분이라 우리가 도무지 가까이 할 수 없다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은 두려운 분이나 또한 우리 가까이 계신 분으로 우리가 가까이 할 수 있는 분이다 하는 것을 특별히 보이시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와 가까이 거하시며 그래서 우리 생활 전체의 과정에 관여하시고 우리를 인도하시며 주재하시는 하나님이시다 하는 사실입니다.

 

 

성경은 은혜의 방도이다

 

성경을 공부하는 중요한 이유
우리가 성경 공부를 하는 것은 생활이 날마다 능력있게 변하여 하나님께서 우리를 세상에 보내신 본의를 나타내는 생활을 하는 데 그 의미가 있습니다.
그런데 흔히 공부를 한 보람이 없는 경우가 많습니다. 자기 생활은 양보하지 않으면서 단지 생활의 한 프로그램으로서 기독교를 가지고 살아갑니다. 이런 생활이 예수 믿고 잘 사는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이건 잘못된 생각입니다. 무엇이든지 필요에 따라서는 늘 변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살아가야 합니다. 성경을 공부하는 중요한 이유가 여기에도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명심해야 할 또 하나의 중요한 이유가 있는데, 그것은 내 성격 자체를 늘 돌아보아서 공부를 하고 지냈으면 얼마만큼 내 품성이 변했는가를 항상 저울질해 보는 반성의 태도를 지니는 것이며, 나아가서 반성만 하는 게 아니라 반성한 결과 확실한 새로운 단계의 생활 태도를 취하는 데에 공부하는 의미가 있습니다. 십 년이 지나도 자기 품성의 변화가 없이 그냥 '자기' 속에 갇혀 사는 것은 성경을 공부하는 본의가 아닐 뿐더러 무서운 결과를 초래할 수 있는데,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의 능력으로 변경해야 할 것을 변경하지 못하고 말면 어떤 다른 것으로도 변경시킬 수가 없다는 것이 그것입니다. 그리고 그 결과는 다른 사람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지닌 효용을 평가 절하하는 결과를 가져옵니다.

생명을 얻고 더 얻어 풍성하게 됨
하나님의 말씀은 여러 가지 방면(도덕, 사상, 예술, ...)에서 그 효과를 나타내지만, 참으로 예수를 믿어서 하나님 말씀의 바른 효과가 나타나는 사람에게는 단 한 가지의 효과가 옵니다. 하나님 말씀의 참된 효과는 결국 '생명'인 것입니다. 그런고로 하나님의 말씀에서 "생명을 얻고 더 얻어 풍성하게 하리라"는 사실이 직접적으로 실현되지 않을 때는 성경을 공부하는 것이 불신자라도 얻을 수 있는 정도의 것밖에 되지 않는 것입니다. 
성경을 봄으로써 생명을 얻고 더 풍성히 얻는다는 말은 함부로 해석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이 말은 단순히 신선해진다는 말도, 기분이 좋게 된다는 말도 아닙니다. 이 말은 글자 그대로 생명을 얻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면 생명을 얻는다는 말은 무슨 뜻입니까? 곧 죽은 사람이 다시 살아나는 것처럼 죽어서 아무 것도 기대할 수 없는 암담한 상태에서 새로운 것으로서 창조적인 능력이 신선하게 발휘되기 시작하는 상태를 말합니다. 이것은 전에 자기에게 있던 것이 아니라, 전연 없던 것이 새로 나오는 것입니다. "생명을 얻고 더 얻어 풍성하게 한다"는 말은 그러한 새로운 창조적인 능력이 더 신선하게, 더 능력있게 자꾸 발휘되어 나가는 것을 말합니다. 
그리고 그냥 한 번만 발휘되고 마는 것이 아닙니다. 전에는 없던 것인데 가지게 되어 전연 경험하지 못했던 새로운 사실을 새로운 능력으로 경험해 가는 것입니다. 곧 이사야 선지자의 말과 같이 날마다 새롭고 힘있게 올라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참으로 믿는다는 것은 그 사람의 그 사람의 인생이 더 능력있게, 자꾸 신선하게 되는 것을 말하며, 이것은 나이를 먹어 감에 따라 쇠퇴하는 것이 아니라 주께서 부르시는 때까지 계속 자라 가는 것입니다. 

생명이신 하나님
하나님의 존재와 관련해서는 죽음이라는 것을 생각하지 못하게 되어 있습니다. 구약에서, 하나님을 제일 가까이 모시는 제사장들은 절대로 주검에 손을 댈 수 없었습니다(레 21:1,10-11). 이렇게 '하나님' 하면 '생명'이라는 말이 연결되는 것입니다. 그러한 까닭에 하나님께서 생명을 주셨다 함은 그 생명 자체가 늘 살아 계신 하나님을 나타내는 신선한 능력인 것입니다. 
믿는 사람은 나이에 관계없이 언제든지 새롭게 더 신선해지는 것입니다. "겉사람은 날로 후패한다" 하지만 이는 사람의 생리의 법칙 하에서 그런 것이고, "속사람은 날로 새롭다"는 것입니다. 이는 '속에 있는 사람이 진짜 사람으로서 그것은 날로 새로워지는 것이다'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런저런 방식으로 생명의 발휘를 하게 하셨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러한 생명을 얻고 더 얻는 풍성한 능력이 우리 안에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틀림없이 그것을 주시며, 그것을 주셔서 자기의 할 일을 다 하고 달려갈 길을 다 가도록 만드시는 것입니다.

말씀이 은혜의 방도로 효과를 내야 함
하나님의 말씀이 참으로 은혜의 방도(media gratiae)로서 효과를 나타내지 아니한다면 소용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은혜의 방도로서 효용 있게 작용하려면 은혜가 나에게 말씀을 통해서 와야 합니다. 
말씀이라는 것은 개념 작용, 즉 생각하고 해석하고 뜻을 깨닫는 것을 요구합니다. 이런 개념 작용이 없다면 말씀의 의미가 없습니다. 
그런데 말씀을 듣기는 듣지만 깨닫지 못하고 해석하지 못하고 알아듣지 못했다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그러니까 말씀은 그 사람 속에 들어가서 작용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작용은 사람이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주신 은혜대로 혼자서 말씀을 읽고 이리저리 생각해 보는 것이 아닙니다. 이런 것은 은혜의 방도가 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말씀이 은혜의 방도가 됩니까? 먼저 하나님께서는 그 말씀을 바로 깨닫게 하시려고 선지자, 사도, 교사를 보내셨습니다. 그들에게 특별한 은사를 주셔서 말씀의 뜻을 깊이 알고 깨닫게 하시며, 이를 남에게도 전달하게 하신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 나라에서 하시는 방법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예로부터 지금까지 거룩한 교회를 주셨습니다. 구약 시대에는 교회가 민족 속에 융합되어 있었지만, 신약에서는 예수께서 교회를 민족과 분리시키셔서 하나의 독립된 개체로 세우시고 그 안에 하나님의 사자들을 세우셨습니다. 
그래서 역사를 통해서 면면히 교회에서는 말씀을 해석해 내려왔습니다. 곧 교회에서 해석해 준 그 말이 은혜의 방도로서 효과를 내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자의 자격
교회에서 말씀을 해석하는 하나님의 사자들은 자기 사정에 따라 말씀을 해석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가르치시는 대로 '말씀은 이것이다' 하고 가르치는 것입니다. 어떤 상황에 있든지 말씀은 전해야 합니다.
그런데 교회가 하나님의 말씀을 강단에서 가르치면 그것이 다 은혜의 방도이냐 할 때 그렇지 않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왜냐하면 교회가 아닌데 교회라 자칭하는 일이 많으며 또 하나님의 사자가 아닌데 하나님의 사자라고 자칭하는 자들도 많기 때문입니다. 선지자의 영도, 교사의 영도 없는데 말씀의 사자로 나서는 것입니다. 
물론 선지자가 사람 마음대로 생기는 것은 아닙니다. 선지자는 하나님께서 그때그때 불러내시는 것입니다. 구약에 나오는 '선지자의 영'을 보면,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하여 가라사대" 해서 여호와의 말씀이 자기에게 임하는 것을 인식할 만한 정도의 명확하고도 특수한 은사, 카리스마라는 것이 그에게 움직였습니다. 
오늘날 선지자라는 말을 쓸 때 목사이면 다 선지자냐? 그렇지 않습니다. 목사는 당연히 교사입니다. 그러나 특별히 선지자라 한다면 항상 시대의 앞을 볼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 시대에 적응해서 당대의 사람들에게 시대적인 사명을 일러주는 사람이라야 선지자라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많은 경우 목사들은 대개 교사로서 역할을 하며, 그에게 선지자의 영이 없는데도 우리가 선지자로서 일하라고 요구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선지자라고 할 것 같으면 성경을 보면서 다른 사람들이 볼 수 없는 것들을 자꾸 보아 가는 것입니다. 이는 다른 말이 아니라 역사라는 큰 흐름을 눈앞에 놓고 앉아서 새로운 것을 본다는 말입니다. 그렇게 하고 당대를 짚어 가면서 시대에 대한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지 못한 사람, 그런 은사의 영이 없는 사람들이 제도 안에서 무엇이 되는 일이 많은 것입니다. 

은사의 영
여기서 '영'이라는 것이 반드시 성령님의 인격적 존재를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선지자의 '영'이라 하면 '선지자의 정신', 곧 선지자가 받은 영혼의 기능의 작용이라는 말입니다. 그것은 특수한 성령의 사역으로 말미암아 발생하는 것이기에 '영'이라는 말로 씁니다. 성경에서 '영'이라는 말을 쓸 때는 인격적 존재로서의 영을 나타내기도 하고, 일반적인 말로 정신을 나타내기도 합니다. 이를 억지로 성령이라고 해석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선지자의 영이나 교사의 영과 같은 특수한 영이 없는 사람들이 제도 안에서 목사가 되고 교사가 될 때, 하나님께서 '할 수 없다. 너희에게도 교사의 영을 조금 나누어주마' 하시겠습니까? 결코 그리하지 않으십니다. 그렇기에 거짓 선지자, 거짓 교사, 거짓 사도들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러한 무리들이 말씀의 권위, 강대의 권위를 흐려 놓는 것입니다. 
오늘날에는 강대라는 것을 권위 있게 생각할 만한 여지가 없어졌습니다. 원래 하나님께서 특수한 영을 부어 주셔서, 그 카리스마를 가지고 강대에 설 때 말씀의 사자로서의 의미가 있는데, 오늘날 교회에서는 그러한 실질보다는 제도와 물질을 더 중요시하는 나쁜 경향이 퍼져 있습니다. 애초에 경건의 능력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사람이 올라서 있으니 권위가 서지 못하는 것입니다. 
한국에서 목사라는 자리가 어떤 정도입니까? 아무나 다 목사가 되니 권위가 설 턱이 없는 것입니다. 카리스마는 고사하고 사람의 직위로서도 인정받지 못하는 것입니다. 

개혁주의 신학의 전통
하나님께서는 참된 교회를 역사를 통해서 면면히 땅 위에 늘 존재케 하시고 계속 흘러 나가게 하시면서 거기에 하나님의 사자를 세우십니다. 그래서 한 시대에 예언자가 나오면 그 선지자에 의해 배우고 궁구한 교사들이 충실하게 그 뒤를 습답해서 계속 가르칩니다. 그러다가 차츰차츰 가르침이 고갈되고 시대의 요구는 강해지며 문제는 착잡해지게 되어 지난 세기의 선지자의 말만으로는 대응하기 어렵게 됩니다. 이렇게 되면 다시 새로운 예언자를 세우시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예언자가 전연 딴소리를 가르치는 것이 아닙니다. 과거에 있던 근간을 그대로 가르치는 것입니다. 
기독교 역사에서 보면, 바울 선생이 하나님의 말씀을 강력히 증거했습니다. 그리고 그 뒤에 여러 교사들이 그것을 계승해 나갔습니다. 그러다가 말씀이 계속 변질되어 가자 하나님께서는 어거스틴이라는 위대한 예언자를 내세우셔서 진리를 바로 비추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또 다시 변질되고 혼란에 빠지자 하나님께서는 개혁 시대에 위대한 예언자를 다시 세워 주셨던 것입니다. 
이렇게 새로운 시대에 위대한 예언자들이 나왔지만 그들이 전 시대의 것과 전혀 다른 이야기를 하지는 않습니다. 어거스틴은 바울 선생의 말씀을 해명하는 데 주력했지 자기가 딴소리를 새로 하지는 않았습니다. 루터나 칼빈 선생도 어거스틴의 권위에 의존하고 이야기를 했습니다. 옛것을 무시하고 새것을 가르치는 일을 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물론 자칭 예언자라는 사람들이 나와서 별 이상한 것들을 만들어 냈습니다. 오늘날 소위 복음주의라는 이름 아래 이런 것들이 뒤섞여 있습니다. 하지만 이런 조그만 운동들은 과거의 전통이나 위대한 해석에 대해서는 생각할 만한 기능이 없으며, 심오한 은사들은 더더욱 없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칼빈주의나 개혁주의라는 말을 쓸 때도 주의해야 합니다. 특별히 칼빈주의라는 말에 대해 주의할 것은 그것이 칼빈 선생 한 사람만이 주장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개혁 신학은 계승해서 면면히 흘러나온 것으로 모두 합해진 것이지 칼빈 선생 하나로 대표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루터교회의 경우는 다릅니다. 거기엔 루터 자신의 경험과 주장이 강하게 드러납니다. 그러므로 루터 신학이라는 말은 쓸 수 있지만, 칼빈 신학이라는 말은 엄밀히 말해서 틀린 말이며, 개혁 신학이라 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바로 해석해서 깨달았을 때, 그래서 마음에 그 깨달은 바가 바로 들어갔을 때 비로소 말씀이 은혜의 방도로서 효과를 내는 것입니다. 깨달은 만큼 속사람이 효과를 내는 것입니다. 속사람이 효과를 내지 못하면 많이 알아도 소용이 없습니다.

 

 

인간의 종교적 요구

 

하나님을 바로 알지 못하는 이유
성경이 가르쳐 주시는 가장 큰 제목은 하나님이십니다. 성경에서 얻을 가장 바르고 중요한 지식은 하나님에 대한 지식입니다. 따라서 어떤 지식을 얻든지 어떤 은혜를 받을 때는하나님에 대해서 바로 생각해야 하고, 그리하여 하나님께 마땅히 드려야 할 것을 바로 드려야 합니다. 그런데 왜 하나님을 바르게 생각하지 못하고 하나님께 정당하게 드려야 한 것을 바로 드리지 못하는 것인가? 그것은 사람의 마음 가운데 있는 그릇된 종교적 욕망과 인간의 타락한 심사로 기독교를 이해하고 있는 까닭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그것은 '예수 믿는 도리가 나에게 이러이러한 육신의 복과 영혼의 복을 준다'고 생각하는 데 그쳐 버리기 때문입니다. 자기의 복리를 중심 삼아 생각하는 기독교 신앙이라는 것은 정당한 신앙이 아니고 인간의 종교적인 감정과 요구에 대한 응답으로서 나온 것입니다. 인간에게는 자연스러운 종교적 요구가 있습니다. 불교를 믿는 사람이 불교 교리의 체계를 토대로 무엇을 드러내는 것처럼 기독교를 믿는 사람이 단순히 자기가 이해하는 신학의 정신이나 자신이 믿고 의지하는 심정의 발로를 나타낸다면 그 결과는 크게 다르지 않을 것입니다, 그것들은 인간적인 요구와 정열에서 나온 결과이기 때문입니다. 기독교를 믿되 항상 기독교 안에서 얻을 수 있는 바 모든 복락과 은혜를 중요하게 생각하고 나아가는 심지에서 나오는 것인데 인간의 종교적인 요구에서 나온 것입니다. 

도덕적으로 저급한 사회
항상 빈곤하고 각반한 사회 속에서 사람이 자라나면 사회가 정신적으로 빈곤하니까 그 사람의 사상도 풍성하지 못합니다. 그런 사회는 몇 가지 교조를 가지고 "이렇게 해야 하느니라. 이런 것이 법이라" 해 버리는 정도의 사회입니다. 
유교의 교조 사회가 그러한 예입니다. 유교에 기초를 둔 근원적인 간단한 도덕과 교조가 지배함으로서 생활 태도를 형성하는 사회라든지 혹은 도덕적으로 빈곤한 사회라면 비록 마음이 어둡고 불의하다고 할지라도 그것을 그렇게 대단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고 "사람이 살려니까 별수 없다"라고 용서해 버립니다.
만일 그렇다면 그 사회는 도덕적으로 퍽 저급한 사회인 것입니다.

경제적으로 빈곤한 사회
우리 나라는 경제적으로 빈곤한 사회였습니다. 먹고 사는 것이 항상 문제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만나면 하는 인사에도 경제적으로 빈곤했던 것을 나타냅니다. "진지 잡수셨습니까?" 이렇게 밥을 먹었는지 못 먹었는지를 알아보는 사회입니다. 말이란 사회성을 지닌 까닭에 그러한 사회적인 조건이 있어서 생기는 것입니다. 그런 표현이 인사말로서 형성 되어 일반화된 데에는 그럴만한 사회적이고 보편적인 조건이 있었던 것입니다. 
1970년대 초에 젊은 사람들 가운데 널리 유행하던 말이 하나 있었는데 그것은 "웃기네' "남을 웃긴다"는 말이었는데 이것은 보통 남을 모욕하는 데서 쾌감을 느끼는 심정으로 하는 말이었습니다.이러한 사회적 조건의 배경에는 결국 항상 자존의식, 남을 나보다 낮게 여겨야 하겠다는 잠재의식이 강하게 들어 있습니다. 우리 사회의 일면이 항상 음울하고 어둡다는 것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평안을 추구하는 종교적 요구
가난하면 대개 사람이 살벌해지고 마음이 언제든지 긴장된 상태이기에 신경이 곤두섭니다. 빈곤한 사회에서는 사람들에게 무엇이 없으니까 자연히 그것을 채워야겠다는 것이 중요한 요구가 됩니다. 사회가 그렇게 각박하니까 마음이 편할 리 없습니다. 그래서 평안, 평안, 외치면서라도 조금 안정하고 편안하게 살려고 합니다. 이렇게 빈곤하면서도 날카로운 사회에 살게 되면 자연히 마음에 어떤 요구가 일어납니다. 종교적 요구인데 불안 속에서 평안을 얻고 자기 생활에도 어떤 복리를 얻어야 겠다는 것입니다.
그런 사회에서 평안을 얻으려면 보통 권력을 쥐든지 힘을 가져야 합니다.
어려서부터 그런 데서 자라나게 되면 자연스럽게 그런 욕망이 천성과 같이 관습으로 붙게 됩니다. 그리고 그런 욕망을 채우려고 여러 가지 방법을 다 쓰게 되는데 그 사람이 종교적인 훈련을 받아 놓으면 자연히 자기가 귀의하는 신앙의 대상에게서 그것을 얻으려고 할 것입니다
불안하고 괴로우니까 그 불안과 괴롬을 떨치고 좀 안전한 상태, 편안한 사회에 들기 위해서 라도 자꾸 종교적인 대상을 찾게 됩니다, 그래서 그런 면에 대하여 잘 응답해 주는 종교에 쉽게 연합하게 됩니다.

천당을 강조하게 된 까닭
우리나라에서 기독교를 전할 때에 처음에 중요한 조건을 붙였는데 그것은 바로 천당입니다. 언제든지 장담해서 말할 수 있고 크게 공격을 받지 않을 수 있는 얘기는 죽은 다음에 가는 천당입니다. 그것은 죽어 보아야 알 수있는 일이라서 죽은 사람이 다시 와서 그게 아니라고 항의 할 수 없을 테니까 걱정할 게 없습니다. 살아 생전에 평안함을 받는다는 소리는 많이 하지 않았습니다, 예수 믿으면 천당 간다고 유독 천당이라는 사실을 강조했습니다. 천당을 강조하면 할수록 그만큼 크게 환영받았습니다. 그렇게 잘 적응될 수 있었던 까닭은 물론 사회의 불안정과 마음의 불안에서 비롯된 종교적인 요구 때문이었습니다. 게다가 종교학적인 관점에서 보더라도 우리에게는 내세에 대한 사상, 피안에 대한 주장이 희박하고 빈곤했습니다. 

본의를 상실한 기독교
사람에게는 종교적인 요구가 있는 까닭에 그 요구에 부합하기 위하여 기독교도 가장 그럴 듯한 이야기만 있으면 그것을 중요한 복음으로 강조하였습니다. 천당을 강조하는 가운데 예수 믿고 속죄함을 받는다고 가르쳤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속죄의 큰 목적은 천당 가는 데 있다고 알게 되었습니다. 결국은 천당으로 보내 주기 위해서 죄의 값을 대신 받아 주시고 죄 없다고 선언하셨다는 것입니다. 대속의 목적이 다른 데로 비꾸러져 나간 것입니다. 이러한 식으로 기독교를 받아들여서 교회가 굉장히 왕성하게 섰다. 결국 사람은 정신적이든 물질적이든 이익을 추구하기 위해 활동하고 살아나간다는 생각인데 기독교도 역시 일종의 자기이익을 추구하기 위한 도구에 지나지 않는다 말입니다. 평안과 행복을 얻기 위해서 일보 더 나아가는 과정이고 청년들이라면 하나 더 추가해서 출세를 하기 위한 방편으로 취하는 종교입니다.
내가 가지고 있는 인간 종교적인 요구에 의해서 아무리 간절하게 신을 사모했다고 할지라도 종교적인 열정이라는 것은 놓고 비판해 보면 그것은 다른 종교인의 열정과 다를 것이 없습니다.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신의 일을 받지 아니하나니 저에게는 미련하게 보임이요 또 깨닫지도 못하나니 이런 일은 오직 성신으로라야 분별함이니라" (고전 2:14)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정당하게 들어가기 위해서는 아무리 훌륭한 노력과 정신을 기울일지라도 인간 종교적인 요구에 의해서는 아니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해득하는 데 있어서 크게 장애가 되는 첫째 문제는 인간의 종교적인 방법에 의해 해득하려는 태도입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

 

하나님을 안다는 것
우리가 하나님에 대해서 배운다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에 대하여 배워서 이러한 하나님이시니까 우리는 어떠해야겠는가 하는 것을 마음 가운데 깊이 느끼게 하는데 큰 작용이 있는 것이지 철학상 신론을 배운다는 것은 아닙니다. 사람이 어떤지식을 가져서 지식이 참으로 산지식으로서 의미를 가지려면 자기자신의 평가와 그 평가에 의한 태도가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만일반응이 아니 일어나는 지식이라면 참지식 으로서 굳어지지 않은 것입니다. 그것은 정보에 불과한 것입니다. 정보가 아니고 지식이 되려면 그것과 나와의 관계에서 마땅히 내가 인식하고 대우해야 할 것들을 남김없이 가져야 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에 대해서 무엇을 배우면 그 사실이 그냥 그대로 있으면서 그 이상 더 나아가지 않는 상태가 없다는 말이 아닙니다. 그러나 어떤사람은 하나님에 대해서 무엇을 배우면 배운 만큼 거기에 대한 인격적인 반응이 일어나야 하는데 그렇지가 않습니다. 세상 사람들의 지식 증가와 같아서 그냥 조금 더 어떤 것을 알았다는 사실만 중요히 남는경우도 많습니다.

'샬롬'과 '에이레네'
옛날의 히브리 사람들의 주의나 철학이나 사상의 내용은 여호와 하나님을 알고 경외한다는 것과 깊이 관계되어 있었습니다. 즉 하나님과의 관계라는 터전 위에서 그들의 사상이 구성되고 점차 발전되었다는 것입니다. 그 당시에는 소위 헤브레이즘이라는 중요한 문화 조류가 있던 반면에 헬라 사람들에게는 헬레니즘이라는 중요한 문화가 있었습니다.그것은 그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여러 가지 특성과 생활 관습에 의해서 발생되고 구성되고 진전되어 온 것입니다. 예를 들어 '평안'이라 하는 말을 번역할 때 히브리어는 샬롬 이라는말이 있지요. 헬라어로는 에리레네라고 합니다. 샬롬을 헬라어로 번역할 때 에이레네로 번역합니다. 그런데 이 두 낱말은 서로 그 의미가 같지 않습니다. 다 같이 우리말로 번역하면 평안이라는 말인데 그 개념의 내용이라는 것이 같지 않다는 것입니다. 간단히 말하면 에이레네가 주로 전쟁과 혼란의 반대 개념인 정적인 평화 혹은 내적인 평안을 뜻하는 반면 샬롬은 하나님과 관계된 평강으로서 동적인 개념인 성장과 번영의 의미가 다분히 담겨져 있다는 것입니다. 퀴리오스가 힘있고 귄위 있으며 또한 합법적인 지배자라는 뜻인데 비하여 아도나이는 특별히 히브리적인 주종의 관계에서 독특하게 나타나는 바 보호와 섬김에서 비롯된 사랑과 신뢰의 의미가 더 강하게 담겨 있습니다. 그런 뜻에서 '안다' 혹은 '지식'이란 하는 우리말의 의미와 다른 나라 말의 의미 사이에 있는 차이를 알아보는 것도 괜찮은 일일 것입니다.

'안다'라는 말의 의미
헬라어의 안다는 말에는 에피스타마이도 있고 기노스코도 쓰이는데 비해 히브리어로는 야다가 안다는 말입니다. 언어란 문화 속에서 발전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 문화가 항상 여호와를 모시고 살면서 그분의 분부대로 건설해 나가려고 한 독특한 문화였기에 무엇을 표현하는 용어들도 그 안에서 발달해 나갔다는 것입니다. 결국 성경에서 '안다'는 말을 어떤 의미로 썼느냐 하면 히브리 말의 '야다'라는 말로 썻던 것입니다. "내가 내 아버지를 알고 내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는 것같이 나는 내 양을 알고 내 양은 나를 안다"(요10:14-15) 예수님께서는 여기서 '안다'는 말을 쓰실 때 아예 한 개의 전제까지 들어서 말씀하십니다. 그런고로 우리가 '하나님을 안다', '목자를 안다'고 할 때 안다는 것은 성부께서 성자를 아시고, 성자께서 성부를 아신다 할 때의 안다는 것과 같은 개념의 말입니다. 내가 하나님을 안다든지 하나님에 대한 바른 지식을 갖는다 하는 말도 그런 의미의 지식입니다. 단순한 인지의 사실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성경을 배우는 것은 결국 성경에 대한 바른 지식을 가지기 위해서인데, 그 지식을 한마디로 말하면 하나님을 아는 지식입니다 결국에 히브리적인 용어의 '안다', '하나님을 안다'는 말을 쓸 때는 내가 하나님을 알되 그냥 알지 않고 친면이 있어서 아는 것을 말합니다.

일반계시와 실천적 무신론
하나님에 대해서 아는 문제, 이것이 성경의 가장 큰 제목입니다. 결국 우리에게는 하나님을 안다 하는 사실이 중요한 것인데 문제는 하나님을 알되 어떤 방식에 의해서 알 수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주로 몇 가지 사실에서 알 수 있습니다. 첫째는 일반계시가 있습니다. 성경이 계시한 것 이외에 일반적으로 보여진 것들이 일반계시입니다. 또 왜 일반 계시라고 하느냐 하면 그것은 어떤 특정한 사람에게 특별히 나나탠 것이 아니라 모든 인생에게 다 같이 보인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일반계시에는 그것만이 아니고 또 한 가지의 사실이 더 있습니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의 제 1장 '성경에 관하여' 처음에 나오는 대목을 보면 이렇습니다. '하나님께서 인간 본성에 심어 주신 빛과 하나님께서 창조하시고 다스림심으로 이루어 놓으신 모든 일들은 하나님의 선하심과 지혜와 권능을 너무나 잘 드러내고 있기 때문에 인간은 하나님을 모른다는 핑계를 할 수가 없다' 그가 인간인 이상에는 자연스럽게 구하고 있는 지식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은 잠재의식가운데서 느끼고 있는 것입니다. 둘째로 실천적무신론이 있습니다. 실질상 무신론이라고 말할 수 있는데 이것은 하나님이 계신다든지 아니 계시다든지 하는 존재론에 대해서는 상관하지 않습니다. 존재론에 있어서는 승인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계시다 하나님이 계시기는 하지만 나아고 무슨 상관이냐'하는 태도를 취하는 것입니다. 나아가서 생각할 때 하나님이 나하고 상관있다고 백 번 말할지라도 실제 생활에서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는 것도 실질상 무신론입니다. 하나님은 존재하실 뿐아니라 간섭하시는 분입니다 하나님은 나와 그러한 관계를 가지고 계시기에 우리는 생활에서 하나님과의 관계를 확실히 인정할 실증을 가지고 의지하는 것입니다. 주님의 지도 아래 열복하는 것이고 그 뜻을 늘 우러르는 것입니다. 이런 것이 여호와를 정당하게 알고 살아가는 방식입니다.

신자는 일반계시를 존중해야 함
우리가 하나님을 바로 아는 데 일반 계시도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하나님께서 만드신 사람에게는 누구든지 근본적으로 하나님을 알 수 있는 것이 있습니다. 지으신 만물 가운데 나타나 있는 하남의 영명하신 그 신성이라는 것을 믿지 않는 사람은 암매와 자기 욕심에 눈이 어두워서 자구 부인하려고 합니다 비록 그들은 그서을 안 보고 나간다고 하지만 그것을 존중하고 분명히 보아야 할 사람은 누구입니까? 바로 믿는 사람들이 아니겠습니까? 믿는 사람이 그것을 존중하고 보는 일을 게을리하면 누구에게 하나님이 내신 일반계시를 주의해서 복 열복하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그 일반 계시도 존중하고 그대로 열복하고 나아가야 한다는 말입니다.

일반 법칙을 무시하지 않으신 예수님
우리가 하나님께서 내신 일반법칙을 무시하고 특별법칙에서만 살려고 하면 그것은 하나님을 시험하는 결과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도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해 주실 것이다.'하는 것은 하나님을 무시하는 태도입니다. 일반법칙이 엄연하게 있는데도 그것을 무시하고 하나님께서 어찌하든지 해 주신다고 한다면 그것은 하나님을 시험하는 것이 됩니다. 하나님을 아는 데는 어떠한 방식이 필요한가를 이야기하면서, 하나님의 계시에 대한 설명을 해나가고 있습니다. 계시하시는 방식으로 첫째 일반계시가 있는데 왜 그러느냐 하면 결국 암매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불신자들보다 더 암매하다고 해도 할 말이 없는 것입니다 불신자는 자기 죄에 얽매여서 아직 깨닫지 못해서 그럴 수밖에 없지만, 신자는 자기 욕심에 끌려서 그러는 것입니다.

 

 

생명이신 하나님

 

전적인 부패와 타락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과 방불하다는 점에서 사람에게 남아있는 장점이나 훌륭한 점은 결국 하나님께서 사람을 자기의 형상으로 지으신 까닭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을 사람의 형상으로 하나님을 묘사해 가지만 하나님은 사람이 아니시므로 사람과 비교하여 하나님을 알수는 없습니다. 만일 사람이 범죄하지 아니 했더라면 하나님을 사람의 형상으로 묘사했더라도 현재의 결과 보다는 대단히 가까웠을 것입니다. 그런데 혹시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을 더럽힌 부분이 특별히 어디 있느냐고 할수도 있을 것입니다. 만일 그것을 안다면 비록 그 부분에서는 하나님을 나타내지 못해도 나머지 부분은 하나님의 형상이 제대로 나올 것이라는 추측도 하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이 부패한 것이 어떠 한 부분만이 아니라 모든 부분에 부패가 다 들어가 있다는 것입니다.

펠라기우스와 알미니우스 사상의 결과
지적 작용에 있어서도 부패와 암매라는 것이 함께 따라 다닙니다. 또 사람의 정이나 움직임에도 부패가 곁들어 집니다. 그리고 사람의 의지 활동에 있어서도 마찬가지 입니다. 그런데 어떤 신자의 의지가 모두 부패했다 할지라도 단 한 가지는 부패하지 아니 했을 것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에 대한 인식이 생긴 다음 하나님을 믿으려하고 또 그 방향대로 가려하는 의지 만큼은 하나님이 내신 순수함 그대로 있어서 그 의지의 발동과 결정에 의해 하나님을 믿을수도 의지할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이론에 의해서 그러면 하나님이 주시는 구원도 사람이 거절하려면 거절하는 것이다 라는 이론이 또 생기는데 이러한 식의 생각은 어거스틴 시대에 펠라기우스라는 사람에게서 그런 생각이 나와서 많이 퍼졌으며, 종교 개혁 시대에서는 알미니우스에게서 그런 생각이 나와서 많이 퍼졌습니다. 그래서 그런 계통을 밟아가는 사람들은 자기가 열정을 내어 하나님을 섬기면 하나님의 자녀가 될수 있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거기에 의해서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고 열심을 내어 믿으라 하고 사람들에게 권하는 것입니다. 이런것은 우리 한국 부흥회 형식으로 발전 했는데 ! 성경의 진리를 바르게 깊이 가르쳐서 진리의 참된 의미가 무엇인지 드러내는데 중점을 두지 않고 부흥회의 중점은 열심을 내어 주를 의지하고 살도록 하는데 있습니다. 그런데 그런 것이 어디에서 오느냐 하면 의지 작용 가운데에는 하나님께 은혜를 받고 못받는 즉, 구원에 이르고 못 이르는 것을 결정할 만한 권위가 최후에 하나 남아 있다는 이론에서 나옵니다. 그 구원을 잘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 그냥 얼른 받아서 눈에 보이는 현실대로 그렇거니 하고서 그것을 자꾸 사람들에게 전하고 때로는 열심을 내라고 소리쳐서 강박 하듯이 채찍질 하는 교회들이 있는데 이와 같은 일은 가장 근본적인 사실 즉 사람의 전적 타락과 부패의 사실을 어긋나게 생각해서 차례 차례 발전한 것입니다.

종교 감정에 의존함
불교나 다른 이교에서는 주문을 외우며 병이 낫기를 바라고 산에 올라가 상봉에서 주문을 외며 기도를 하는 일이 있습니다. 이러한 행위를 일종의 정신요법 이라고도 할는지 알 수는 없으나 그런 일을 얼마든지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들을 극단적이라고 타매하면서도 기독교 안에서도 사람들이 막 일어나서 무슨 죄 다짐을 하고 계속적으로 꾸짖고 해서 한참 울고 나면 후련하게 되는 상태를 이용합니다. 여기서 지금 말하는 지적 감정이란 소위 도덕적인 데에 결부할 때는 도덕적 양심이라 하고 종교적으로 결부될 때는 종교적 양심이라 합니다. 새벽 시간은 정신 적으로나 심리적으로 안정된 시간 이여서 어껀 힘을 받으면 심리상 혹은 정신상 작용이 활발해져 그때 모여 기도를 하면 그만큼 효과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한국 교회에서는 새벽 기도회를 권잘하고 있는데 새벽을 이용해 전통적으로 정상적인 것이 들어가면 그만큼 더 좋은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을 이용해사 계속적으로 인간의 종교 심리에 호소하고 항상 종교 감정에 의존해서 활동하는 여러 방식을 취한다면 결국은 사람이 이렇게 하면 된다 하는 사상 경향 때문 입니다. 성경에도 부지! 런하여 게으르지 말고 열심히 주를 품고 주를 섬기라 (롬 12:11)고 하지 않았느냐 하는 것입니다. 사람의 다른 부분은 다 부패했다 할지라도 이것 만큼은 그대로 순수하게 남아 있으니 이것으로 자기가 구원에 이르는가 못 이르는가를 결정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래서는 아니 된다 하는 것이 원래 장로교회의 교육입니다. 하나님 말씀의 가장 깊고 오묘한 도리는 그런 것을 가르친 것이 아니라고 바르게 일러주는 것이 처음의 장로교 지도자들의 강한 신학이었습니다 그것을 장로교 신학이라 하지 않고 소위 개혁신학이라 합니다.

구원의 신앙
우리 속에 있는 피데스 디비나(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신앙)에 의해 서만 에수 그리스도의 거룩한 구원의 사실을 확신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신앙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이 정당합니다.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이런 신앙을 가리켜 다른 말로 구원의 신앙 혹은 구원에 이르게 하는 신앙이라고 합니다. 성경에 있는 신앙이라는 말이 이 한 가지 의미로만 쓰이지 않았다는 것을 알아야합니다. 성경에 씌어 있는 신앙이라는 것은 그것대로 학실한 조건하에서 늘 쓰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믿음이 있다 하는 말도 성경적인 표현으로 따지자면 그러니까 너는 반드시 구원을 받았다 하는 말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모든 종류의 믿음이 다 구원받기에 충족한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생명이신 하나님
우리 생활 가운데 제 아무리 사람의 모양을 가지고 하나님을 묘사하고 사람의 정을 가지고 하나님을 묘사해도 하나님을 바로 나타낼 수는 없습니다. 암만 신인동형론과 신인동성론이 있다 하더라도 그것으로 결국 하나님을 다 아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상을 그렇게만 가질 수가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죽음 위에 계신 분입니다. 그런고로 어쩔 수 없이 죽음을 반증해 가는 사람의 여러 가지 인격적인 발휘를 그대로 비교하여 하나님을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사람의 죽음이라는 것을 생각 할 때 거기에는 자연히 시간적인 정지라는 장점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유시유종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무시무종하시고 영원하시다 하는 말 자체가 멀써 생명과 관계되는 것입니다. 참생명의 성격 가운데 하나가 무시무종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호칭

 

신자는 하나님을 바로 이해해야 신앙 생활도 정당하고 또 바른길로 전진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지금 하나님에 대한 생각을 바르게 하기 위해서 성경이 가르치신 바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가, 어떻게 일하시며 인간과 어떻게 접촉하시는가 하는 문제를 공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을 나타내실 때 '나는 이러하다'는 직접적인 설명을 성경에 담아 두셔서 그것으로 나타내셨습니다. 그뿐 아니라 역사 위에서 하나님께서 하시는 직접적이고 간접적인 여러 가지 일들을 가지고 결국 '하나님은 이런 분이다'하고 사람들로 하여금 추리히고 결론할 수 있게 하신 것이 또한 풍부합니다.

하나님에 대한 호칭들
하나님을 생각하기 위해서는 우선 하나님에 대한 이름, 우리가 하나님을 부를 때의 호칭이나 하나님을 가리켜서 말할 때의 호칭을 주의해서 살펴보는 일이 필요합니다. 이름이 하나님께만 적용되었든지 다른 대상에게도 쓰였든지 간에 문제는 그 호칭으로서의 언어가 이미 사람의 사회에 존재해서 무엇을 나타냈느냐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주라 하는 호칭으로 불린 사람이 많지만 사람을 주락고 부를 때와 하나님을 주라고 부를 때 그 내용과 의미가 서로 어떻게 다른가를 항상 분명하게 식별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말의 하나님이라는 말의 뜻
엘로힘이 우리말의 하나님이라는 말인데 이 호칭 역시 여기도 쓰이고 저기에도 쓰였습니다. 우리말의 하나님이라는 말이 고대부터 있어 온 보편적인 이름인 까닭에 우리가 그 이름이 표시하는 여러가지 성격을 도움 삼아서 사람들에게 하나님을 전하는 것이 좋다는 설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처음 교회에 들어온 사람이 그런식으로 '하나님'을 이미 안 것같이 생각한다면 문제입니다.왜냐하면 하나님을 안다고 하면서 항상 이교 시대에 가지고 있던 막연한 신 개념 이상으로는 더 발전하지 않고 있는 예가 많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에 대해서는 구체적으로 늘 바로 알아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님을 '하나 되시는 분이다'하는 뜻의 말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또 하늘에 계신 분이라 하여 '하늘님'이 하느님이 됐다고도 합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그것을 세분해서 '한'은 크다는 말이고 '울'이라는 것은 들러싸고 있는 울타리라고 생각합니다. 그런 개념을 미리 가지고 기독교 안에 들어온 사람에게 그가 믿고 있다는 그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따져 주지 아니하면 평생 가야 같은 생각이지 별로 발전하지 않습니다. 지금 우리는 하나님에 대해서 공부하고자 할 때 이런 점을 주의하자는 것입니다. 언어가 표시한 국부적인 의미가 아닌, 그 언어로 대표된 바 우리가 마땅히 알아야 할 하나님에 대한 지식의 내용을 가져야 합니다. 먼저 성경이 그것을 일러주시는 것입니다. 우리 나라 말의 하나님이라는 어휘 속에 하나님, 하늘님, 한울님이라는 어원이 있다 해도, 그게 무엇이 됐든지간에 성경이 일러주시는 바를 생각해야 합니다.

생명이신 하나님
항상 중요히 생각해야 할 문제는 생명! 하나님은 생명이 있습니다.

주 되신 하나님
생명을 늘 대표하고 계시는 분이 신입니다. 우리가 성경을 읽어어서 알아야 할 중요한 사상은 그분이 인격신이라는 것입니다. 그외 또 하나는 하나님은 주이시다 하는 사상입니다. 우리가 신과 적극적으로 관계할 때 반드시 먼저 생각해야 할 사상이 이런 것입니다. '신은 신으로 존재하시되 인격신이시고 또 생명을 표시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하여도 나하고 상관없이 그런가 보다 한다면 그것은 의미가 없습니다. 신은 나의 무엇이냐 할 때 신은 또한 주이시라는 것입니다. 이 사상을 성경에서는 야훼 즉 여호와라는 독특한 용어를 써서 표현했습니다. 여호와라는 용어가 나타내는 첫째 중요한 사상은 '주 되시는 분이다' 하는 것입니다. 야훼라는 말뜻 자체가 '나는 영원 자존자이다'입니다. 히브리 사람들에게는 이것이 너무나 신성한 이름이고, "주 너의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는 명령이 있는 까닭에 망령되이 일컫지 않기 위해서 보통 쓰는 말인 '주'라는 말로 대치해서 불렀습니다.

여호와
보통 주인이라는 의미로 쓴 주라는 단어는 첫문자를 대문자로 써서 Lord로 표기하였고 여호와라는 의미로 쓴 주는 다 큰 자로 넉자(LORD)를 썼습니다. 우리나라에서 성경을 처음 번역할 때 송구스러워서 그랬는지는 모르나 그리고 초창기니까 여호와라는 이름이 귀에 설고 잘 알지 못하니까 다 주라고 번역했습니다. 그런데 활자를 특별히 다르게 한 것도 아니고 그냥 막 뒤섞어 사용해서 그 주라는 말이 여호와라는 말인지 주인이란 말인지를 구별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랬는데 그 후에 개역을 몇 번 하면서 여호와가 되었습니다.

나는나이니라
하나님을 나타내는 말로서 가장 독특하고 중요한 말은 엘로힘이라는 말도 아니고 주라는 말도 아니라 했습니다. 예수라는 칭호도 종합적인 이름이 아닙니다. 땅에 오셨던 성자 그분에게 예수라고 하는 것 뿐이지 하나님을 예수라고는 안 합니다. 그리스도는 직명입니다. 결국 하나님을 나타내는 명의로 가장 중요하고 독특하게, 그리고 거룩하게 구별해야 할 것은 야훼라는 이름입니다. 야훼는 '에흐예 아쉐르 에흐예' 곧 '나는 장차 나일 것이다'하는 의미입니다. 스스로 있으면서 나는 그때도 역시 나로서 존재할 것이다, 시간에 관계없이 나는 항상 존재할 것이다 하는 의미가 거기 표시되었습니다. 이것은 명의나 관념으로 하나님을 아는 것이 아니라 생활의 증헙 가운데에서 알아야 한다는 것을 또한 표시하는 것입니다. 생활 가운데서 하나님을 알 때에 어떠한 하나님으로 알았느냐 하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구원하시사 목적을 주신 야훼
이스라엘 백성에게 야훼라는 이름으로 당신을 보이신 하나님께서는 '내가 너희를 이렇게 건져낸다'하는 것을 그들에게 경험케 하셔서 '구원하시는 하나님'이심을 나타내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역사를 통하여 야훼는 구원하시는 하나님이신 것을 보았습니다. 그러나 구원하시는 하나님으로만 존내하신 것이 아닙니다. 이스라엘 백성을 시내 산까지 데리고 오셔서 거기서 그 백성에게 '나는 이러한 목적을 위해서 너희를 건져냈다'고 하시며 구원하신 목적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냥 건져내신 것이 아닙니다.

계약사상
사람은 자기 당위 즉 자기가 마땅히 해야 할 것이 뭔가를 알아야 하고 또 자기 자신에 대한 평가를 정당하게 해야 합니다. 최선을 다했다 하더라도 하나님께서 당연히 요구하시는 그 자리에 못 올라가는 것입니다. "가난한 자를 불쌍히 여기는 것은 여호와께 꾸이는 것이니 그 서ㅓㄴ행을 갚아 주시리라." 이것은 순전히 계약사상입니다. 가난한 자를 내가 불쌍히 여겼다 해도 내가 마땅히 할 것을 했을 뿐이지 별것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호와께서는 그것을 '네가 가난한 사람을 불쌍히 여겼는데 그것은 내가 불쌍리 여겨야 할 사람을 네가 대신 한 것이다. 그러니 내가 네게 부체를 졌다. 내가 너에게 행한 대로 갚아주마'고 하시는 것입니다.

아도나이
아도나이란 말 가운데에는 지배권, 주장권, 주재권을 행사하고 통재하고 계시는 분이라는 뜻이 있습니다. 소유 관념을 특별히 나타내려고 할때 쓰는 바알이란 말에 비헤 현실적으로 통재하시고 주장하신다는 것을 표시하는 의미로 아도나이가 쓰입니다. 아도나이란 청지기가 대신 무엇을 주장하고 있는 상태가 아니고 주인으로서 직접 주장하신다는 의미입니다. 성경에는 이런 의미가 가장 중요하게 나타나 있습니다. 그러므로 주라는 의미는 무엇보다도 우리를 온전히 주장히시고 주재하시는 것임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주이시라는 사상이 중요함
신자들이 하나님을 부를 때 '주님'하고 부르는데, 이때는 아도나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또한 모세가 하나님을 야훼라고 할 때에도 주라고 부르는데 그때에 주라는 의미는 독특하게 '나는 주의 종입니다.'하는 자의식 가운데서 부른 것입니다. 마치 사도 바울이 "예수 그리스도의 종 바울"이라고 하는 식입니다.

 

 

하나님은 주이시다 (1)

 

개 요
성경에서 가르친 큰 제목은 첫째로 하나님에 대한 것이요, 다음이 사람에 대한 것입니다. 지금은 하나님에 대한 것을 기본적으로 알아보고 있습니다. 그 중 하나님은 '주'가 되신다는 사실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세상 철학자들은 단순히 하나님은 법칙을 내시고, 선도하시는 분이라고만 이야기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하나님은 무엇보다도 주가 되신다고 합니다.

주라는 말의 의미
사람 세계에서 주라는 말이 여러 가지 뜻을 가지게 되었지만, 시편 105:21에서 "저로 그 집의 주관자를 삼아 그 모든 소유를 관리케 하고" 라고 기록했듯이, 자신이 직접 절대의 지배자로서 위에서 권력을 온정하게 행사하는 분이라는 의미입니다. 바알처럼 단순한 '소유자'라는 의미가 강한 종류의 단어가 아닙니다. 직접 관리하시고 직접 지배하시는 주이십니다.

구약의 기본사상 : 하나님은 통치하시는 주
구약의 여러 가지 다른 생각들은 하나님은 주이시라는 사상의 설명입니다. 어떤 사람이 본성이 드러나는 어려움에 닥칠 때 이 사상을 바로 이해하고 있는지 여부가 드러납니다. 만일 하나님은 통치하시는 주이시라고 최소한도로 이해했다면 어떠한 환경에 있어서도 결국 주께 모든 것을 다 맡기고 습복하는 것입니다.

어려움에 빠졌을 때 신앙이 불타오르는 것
어려움에 빠져 신앙이 불타 오르는게 될 때도 그 신앙의 동기와 그 목표가 무엇이냐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자기에게 불행이 닥쳐야만 신앙이 타오르는 것은, 그에게 제일 중요한 관심사는 자기의 행복이지 하나님나라의 경륜이 아니라는 겁니다. 평소의 생활 가운데서 하나님은 적극적으로 주가 되사 주가 가지고 계시는 그 경륜을 이루어 나가는데, 나는 나의 모든 시간과 생활의 모든 것을 거기에 주력하고 나간다는 태도는 거의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에 대해서 '하나님은 꼭 계셔야만 하겠다', '하나님이 아니 계신다면 참 큰 일이다' 하는 생각을 간절히 하는 것은 보통때 보다는 불행한 때입니다. 이런 식의 생활감정에 대해 따져봐야 소용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다스리시는 주이시라고 말하는 것은 천하에 쉬운 일입니다. 하지만 그것을 얼마만큼 확고히 쥐고 있고 믿고 있는가가 문제입니다.

 

 

하나님은 주이시다 (3)

 

서론 : 주라는 말, '아돈', '아도나이' 의 어근으로 추측되는 말의 원래 뜻은 '명령하다' '다스린다'입니다. 다스리는 분의 크신 능력과 그 영광의 발휘가 사람에게 접촉함으로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것은 사람으로 하여금 깨닫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주이시라 할 때에 그것은 전능하신 통치자로서 모든 것이 그에게 종속되어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은 주이시므로 다스리신다
하나님이 주이시라는 기본적인 사상에서 필연적으로 붙어 나오는 중요한 사상들이 있습니다. 먼저 '하나님은 주이신 까닭에 그는 다스리신다'하는 사상이며 '하나님은 주이시다. 그러므로 다스리신다'라는 말입니다. 그러나 그 역- 하나님은 다스리신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주이시다- 하는 것은 부정당한 생각입니다.
하나님은 주가 되시니까 다스리는 분이다 해서 다스리신다는 것은 주 되시는 하나님의 거룩한 위치에서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사실입니다. 그렇지만 다스리는 존재가 곧 주이다 하는 말은 옳지 않습니다. 이것은 언어의 발달로 그러한 사상이 형성된 것이나 논리의 전제로 살필때에는 맞지 않습니다.

변할수 없는 주종의 관계
하나님께서는 주이신고로 창조하시고 소유하셨다는 데에서 출발하여서 당신의 뜻대로 명령하시고 또 무순 일을 하도록 길을 열어 주십니다. 주의 종이라면 마땅히 명령을 받고 시키시는 대로 순종하고 능력이 부족할 때 능력을 구하고 방법을 모를 때 방법을 구해서 나아가야 합니다. 이것이 주와 종의 관계입니다. 하나님께서 주가 되신다 할 때 거기에 또 한가지 필연의 결과가 있습니다. 바로 '하나님은 왕이 되신다'라는 사살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주가 되신다는 사실과 겹쳐서 같은 내용을 나타내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이 왕 되신다는 사실이 있기 전에 하나님은 주가 되신다 하는 엄연한 원칙이 서 있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은 주의 종이라 하는 관계는 피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민주주의의 연원
민주주의 체계가 헬라라든지 로마에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그것은 오래가지 못하고 이내 붕괴하고 다른 큰 권력의 지배를 받았습니다. 그러면 민주주의라는 것은 어디서 발생했느냐 라고 엄격히 말하면 성경의 가르침 가운데 발생한 것이라 말할 수 있습니다.

정치 사상사에서 본 종교개혁
종교개혁에서 부르짖은 것 가운데 정치 사상사에서 바라볼 때 문제는 정치제도와 종교제도가 뭉쳐서 민중을 억눌렀다는 것이니, 그래서 민중은 무엇보다도 행복추구가 항상 큰 관심사였으며 또한 절실한 과제입니다. 그러나 그 사람들의 결론은 다음의 성경말씀에서 잘 살펴볼 수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집을 세우지 아니하시면 세우는 자의 수고가 헛되도다"(시편 127:1)
그런데 사람은 죄가 있어서 하나님 앞에 가까이 가지 못할뿐더러 하나님과 불화한 위치, 원수 된 위치, 원수된 위치에 있어서는 하나님께 복을 받을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사람은 하나님과 화해를 해야 합니다. 바로 인간의 선한 공로나 자기 의가 아닌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의 공효가 필요한 것입니다. 근데 카톨릭의 생각에는 교회가 구원의 보관자, 관리자라는 사상이 들어있습니다. 결국 이는 사람이 하나님과 사람사이에 중보자 노릇을 하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개혁자들의 주장과 민주주의 사상
그런데 그런 사상은 카톨릭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부흥회에서도 잘 나타납니다. 바로 하나님과 사람사이에 중보자가 있게 되어 사림이 은혜의 자유를 완전히 갖지 못하게 되었다는 말이 성립되어 집니다. 개혁자들은 이것에 대하여 은혜는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그리스도라는 유일한 중보, 오직 그로 말미암은 것이라고 고백합니다. 소위 제사장이 중간에서 은혜의 중보자가 된다는 이론에 대해서 ' 만인 제사장'이라는 고백을 하게됩니다. "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라"(벧전 2:9)
그러므로 이 은혜의 자유라는 것은 오늘날 자유 민주주의의 정치 체제나 정치 사상에 근거를 제공한기본적인 사상입니다. 개혁자들에게 나온것이지만 시작은 성경에서 비롯됩니다.
종교개혁기의 교회는 도그마를 가지고 사람들에게 억지로 명령을 내렸습니다. 그 명령에 대해서 '예. 옳습니다.'라고 아니하면 이단사설을 주장한다고 했드랬습니다. 그래서 이단 사설을 주장하는 사람들을 악랄하게 불에 태워 죽이고 목을 베어 죽이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마음에 없는 소리도 마치 자기가 원해서 하는 것인양 하였습니다. 그 때 개혁자들이 일어나서 양심을 속이지 않음, 즉 양심이 자유로워야 한다하여 양심의 자유를 가르쳤고, 더불어서 표현의 자유, 출판의 자유, 결사의 자유등을 생각했습니다. 이런 자유라는 초석위에 정치 제도를 발전시켜야 할것이니라 하는 사상이 나온것이고 거기서 현대 민주주의 제도가 발생한 것입니다. 그리고 이와 같은 제도는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심으로 발생하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모든 것의 근원이 어디있느냐 하면 하나님 앞에서 다 종이 된다는 사실이 있습니다.

집합체의 머리사상
성경은 원래 개인의 행복론을 중심으로 하여 쓰여지지 않았습니다. 성경은 항상 개인이 아닌 한 그룹을 근거로 하고 있다는 점이 특징입니다. 따라서 개인 중심이 아닌 예수 그리스도 안에 포함된 하나, 전체의 몸 가운데 있는 자기 부분이라는 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 몸에서 분리된 개인은 소용이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 몸과 분리되면 생명이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영생을 가졌다 하는 말 자체가 벌써 자기는 개인이 아니다 하는 것을 표시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주이시다 하는 사상에서 자연적으로 따라 발생하는 사상은 모든 사람은 하나님 앞에서 똑같이 종으로서의 위치를 가진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사람과의 관계(1)

 

일반 계시와 특별 계시
하나님께서는 당신을 이 세상 사람들에게 보이셔서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알 수 있도록 하셨습니다. 이 세상 사람 누구도 하나님의 존재에 대해서 부인할 수 없도록 하셨다는 것입니다.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들어졌기 때문이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알 수 있는 상태는 자연의 모든 법칙과 창조된 현실 가운데에도 나타납니다.
그러나 사람의 본성으로는 자연계에 나타난 하나님의 거룩하신 자태, 또 인류의 역사 가운데서 드러나는 바 하나님의 자취를 다 알지는 못합니다. 예수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표현된 하나님과 그 분의 무한하신 사랑, 그 사랑으로 말미암은 구속의 사역, 이런 것들을 일반 계시에 의하여는 알 수가 없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의 거룩한 경영과 사랑과 구속, 사람이 어떻게 살아야 할 것 등은 모두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특별하게 보여 주십니다. 인류 사회와 인류 역사에 비추인 이 특별 계시는 우리 사람에게는 역사의 진전과 함께 그 역사라는 사실을 아는 만큼 계시에 대해서도 충분히 더 알게 하셨습니다. 이렇게 알려 주신 것들이 기록되어 보존된 것이 바로 성경입니다. 이 기록된 성경에 의해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알려주시려고 하는 특별계시의 내용을 더 깊이 알아 가는 것입니다.

주 되신 하나님과 종된 사람의 특별한 관계
특별 계시의 내용으로 우리에게 알려 주시는 큰 사실은 무엇보다 인격신이신 생명의 하나님이 우리와의 관계에 있어서 우리의 주가 되신다는 것입니다. 주와 종의 관계는 무엇보다도 하나님께서 자신의 의지를 나타내 보이실 때 사람의 의지도 거기에 온전히 순종하고 복속하여 하나님의 뜻을 받아서 행하고 나아가는 데 의미가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사람과 어떤 특별한 관계를 맺으신다 하는 것을 보이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우주 만상의 다른 어떤 것과도 달리 하나님과 특수한 관계 가운데 들어갈 수 있게 하셨으며, 이 특수한 관계 가운데서 하나님은 당신의 경영을 이루어 나가십니다. 즉 하나님께서는 사람 위에 군림하셔서 직접 거룩하신 목적과 경륜을 펴시며 다스리시는 것입니다. 물론 이 다스린다는 사실이 있기 전에 사람을 구원하셔서 다스림을 받을 수 있는 위치에 올려놓으신 사실이 선재합니다. 야훼라는 말속에는 "사람을 특수한 계약 가운데 놓으셨다"는 뜻도 포함되어 있듯이 이런 특수한 계약 가운데 사람을 놓으심으로써 사람과의 거룩한 약속 아래서 사람들을 다스려 나가십니다.

행위약속
하나님과의 이 특수한 계약 관계 아래, 다스림과 다스림 받음이 땅위에서 한 형태를 취하고 나타납니다. 다스림을 받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다스림을 입증하는 생활을 해 나가는 사실이 잘 드러날 때 계약에 대한 정당한 대답이 된다는 것입니다. 이 계약은 최초에 사람을 만드시고 그 사람에게 하나님께서 내리신 어떤 일정한 약속입니다. 그 약속은 '너희가 이렇게 이렇게 생활하라. 그러면 나는 이렇게 하마'하는 것이었고 그래서 그렇게 하면 '나는 너를 훨씬 고귀한 위치로 올려 나의 사랑의 대상으로 삼겠다'고 하셨습니다.
이런 최초의 약속을 '행위 약속'이라 부르는데 이것은 지금도 존재하고 있습니다. 문제는 그 후의 결과로 받은 은혜를 받을 수 없게 됐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어쨌든 사람은 이러한 거룩한 약속 아래 하나님께서 지시하고 명령하신 거룩한 길을 따라 생활해 나가야 합니다. 사람은 하나님의 법을 행해야 하고 그로 말미암아서 응당히 보응을 받게 하셨습니다.
최초에 하나님께서 아담을 창조하셨을 때에는 행위 언약을 능히 다 이룰 수 있게 만드셨습니다. 그러나 아담은 그것을 끝까지 잘 지켜 나가지 못하고 타락했습니다. 그런데 그 약속은 아담에게만 하신 것이 아니라 전 인류에게 하신 것입니다. 즉 우리 모두는 하나님과 행위언약을 맺은 것이죠.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하나님의 형상대로 만드셨기 때문에 우리 사람은 그 자격에 상당한 생활을 해야 하는 것은 당연히 요구되는 사실입니다. 즉 사람이 요구되는 생활을 했다고 해서 하나님께서 꼭 복을 주셔야 할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보상의 약속을 하셨습니다. 그것은 마치 어린 아들에게 아버지가 무슨 일을 하나 시키고 '네가 이일을 해라. 이 일을 하면 내가 너에게 요만한 것을 주마'고 하는 것과 비슷합니다. 아버지가 아들을 사랑해서 덮어놓고 그냥 주는 것이 아니라 사랑에 부응하는 태도를 충분히 취함으로 그 사랑을 획득하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사랑을 받는 아들로 하여금 부모의 사랑에 상당한 반응을 일으킬 수 있는 자격을 양성하려는 것입니다. 제가 그것을 당연히 받을 것으로 생각하는 잘못된 특권 의식이 자식에게 들어가기가 쉽기 때문이죠.

사랑과 의
부모의 사랑을 받기에 합당한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항상 '이것은 부모가 사랑으로써 나에게 주는 것이다. 거기에 해당하게 나 스스로도 자격 있는 사람이 되어야겠다'하는 생각을 해야 합니다.
이런 사상은 하나님 말씀 가운데서도 우리에게 요구되는 중요한 사상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 당신께서 사람을 그렇게 대하시기 때문입니다. 사랑과 더불어 의를 조금도 희생시키지 않는 하나님의 속성이 사람을 자녀로 삼으셨을 때에도 꼭 그대로 나타난 것입니다. 하나님의 본질적인 속성은 사람을 사랑하시되 그저 '네가 예쁘고 사랑스러우니까 의라는 것도 다 무시하고 너를 위해 영생을 주마'하시지는 않았습니다.
사람을 처음 만들었을 때 사람이 가지고 있는 위치는 하나님과 충분한 연락을 할 수 있고 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고 하나님의 거룩한 품성을 충분히 발휘할 수 있게 모든 능력을 주셨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완전한 완성의 상태는 아니었습니다. 즉 하나님께서 ,사람의 세계는 계속 장성해서 당신의 거룩한 세계에 부응할 수 있는 자발적이고 능력적인 위치, 참된 영광의 위치로 올라가야 한다는 발전의 여지를 그 속에 포함시켜서 내놓으신 것입니다.

참된 평안
그러므로 사람은 끝없는 창조와 발전의 생활을 하는데서 무한한 기쁨도 얻고 즐거움도 얻는 것입니다. 참된 평안이라 끝없이 전진해 나가는 안정입니다.
헬라어의 '에이레네'는 고통이 없고 불안함이 없는 안정한 상태, 비교적 정지한 상태의 평안을 말하지만 , 히브리말의 평안이라는 말의 '샬롬'은 끝없이 전진해 나가는 상태에 있어서의 안정의 위치를 가리킵니다. 평안이라는 것은 항상 건전하고 건강한 데 있고 이것은 다시 말하면 생명력이 끝없이 작용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생명체로서 영혼을 가진 사람에게 있는 평안의 상태입니다.

영광의 정점을 향해 올라가야 할 상태
이렇게 끝없이 전진해 나가야 한다는 사실에서 알 수 있는 것은 사람의 현재의 생명이 아름답지 아니한 것은 아니나, 그것은 항상 더 나은 충족을 요구하는 생명이라는 사실입니다.
아담도 전연 죄를 지을 수 없었던 완전한 상태는 아니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창조적인 생활을 할 수 있는 동시에 또 죄도 지을 수 있는 상태로 기묘하게 만들어 놓으셨습니다. 거기서부터 출발해서 충만한 영광의 목적지를 향해서 끝없이 가게끔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끝없이 전진하는 그런 기개로 전진해 나가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영광의 위치로 끌어올리시려는 계획을 가지고 계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역사의 진전에 따라서 그 역사와 더불어 계시를 더욱 증가시키면서 그 계시 안에 포함되어 있는 행동의 계시가 무엇인가를 설명해 주심으로 우리로 하여금 깨닫게 하십니다.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영광의 몸
우리가 알고 있는 바 우리가 바라고 올라가야 할 정점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하신 영광의 몸입니다. 그러한 영광의 정점을 향해서 올라가도록 아담에게도 처음부터 분명한 목표를 주셨고 그 길에 대해서도 가르쳐 주셨습니다. '내가 너에게 계시하는 바에 따라 네가 순종하고 살면 거기에 이른다'고 하셨던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행위의 약속이었습니다. 이것은 사람과 가지시는 관계의 특수성이기도 합니다. 사람을 다른 모든 것보다도 높고 훌륭하게 만드셨으니 그런 사람과는 또한 특수한 관계를 가지시며 이를 통하여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신 본래의 크신 뜻이 무엇인가를 더 드러내겠다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과 사람과의 관계 (2)

 

특별계시로 알려 주시기를 원하는 것들
일반계시 혹은 자연 계시를 통해서도 하나님은 그 영원하신 품성과 능력을 나타내시지만 거기서 사람이 간취해야 할 것을 충분히 간취하지는 못합니다. 죄의 암매로 사람의 정신이 흐려져서 보긴 하지만 깨닫지 못하고 듣긴 하지만 알지 못하는 것이 많은 까닭입니다. 하나님께서 직접 인간의 몸으로 땅에 내려와 구원을 행하신다는 신비한 내용이나 하나님께서 특별히 보이려 하시는 여러 가지 내용은 사람이 일반 계시를 통해 그냥은 알 수 없는 것입니다.
그것은 오직 하나님께서 특별한 계시로써 가르쳐 주시고 설명해 주셔야 알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을 쓰셔서 설명하는 것과 사람의 정신으로 하여금 그것을 깨닫고 이해할 수 있게 빛으로 비춰 주시는 일, 즉 성신의 사역으로 그것을 우리 마음에 심어 주사 깨닫게 하시는 일이 언제나 병행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은 신인데 인격신이라는 것과 생명의 근원이요 생명 자체이시라는 것을 압니다. 또 하나의 큰 사상으로 사람이 하나님과 거룩한 관계를 맺고 하나님의 인도와 주장 아래 살 때에 가장 중요한 사상은 하나님은 주이시라는 것입니다. 이 사실을 바로 깨닫지 못하면 다른 것들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다른 모든 사실들은 하나님이 주이시라는 사실아래 종속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모든 피조물 그 중에 특별히 이성을 가진 피조물은 하나님께서 주가 되신다는 사실 앞에서 모두가 종입니다. 종이라 함은 모두가 그분의 지배아래 있는 자요 주의 명령대로 준행해야 할 자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하나님을 주라든지 절대 대권으로 행하시는 분으로 이해하지 못하고 나의 행복과 복리와 번영을 위해 내 곁에 계셔 주시는 행복론적인 신앙입니다. 그런식의 눈을 가지고 성경을 읽을 때 많은 문제가 생깁니다.

철학상 행복론
행복이라는 말은 흔히 쓰이면서도 철학상 중요한 명제로 다루어진 용어입니다. 옛날 헬라 사람들은 몸과 마음이 다 같이 건전하고 필요한 것들을 모두 갖추어서 미와 지혜가 충족하고 정신이 발랄할 것 같으면 행복하다고 했습니다. 더 나아가 신체와 정신의 행복, 그 중에서 특별히 마음의 건전성을 훌륭한 행복이라고 했습니다. 이런 행복의 의미를 에피큐로스라는 사람들은 조금 더 확대하고 각도를 달리 해석하여 쾌락에 집중해서 생각한 철학적 사조가 나타났습니다. 이런 헬라적 사상체계 가운데 있던 행복론이 그 후 중세 기독교에 들어와서는 '이 세상에서 항상 자비와 인내와 또 여러 가지의 덕을 행함으로써 궁극적으로 가장 복락스럽고 아름다운 영원한 저 세상에 도달하는 것이다'하는 카톨릭적 교회 사상에도 영향을 미쳤습니다. 그것도 일종의 행복론입니다. 달리 말하면 '예수 믿고 천당에 간다'는 식의 관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행복론에서 또 하나의 중요한 문제는 선이란 무엇을 의미하느냐는 것입니다. 이 문제에 대하여 선이란 가장 큰 행복을 가져다주는 것이 선이다 하는 것입니다. 벤담은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을 이상으로 하여 행복은 쾌락의 양으로 결정된다는 공리주의를 내 놓았고 밀은 벤담의 공리주의에 쾌락의 양 뿐만 아니라 질도 고려해야 한다고 하며 공리의 원칙을 수정하였습니다.
그러니까 선을 평가할 때도 그 기준은 결국 행복을 가져다 주었느냐 하는 것이었습니다. '사람이 왜 인내하고 선을 행하느냐? 궁극적으로 행복을 얻기 위해서 하는 것이다. 인내하고 선을 행해서 불행해질 것 같으면 그게 무슨 의미가 있느냐' 그것입니다.
성경을 행복론적으로 이해하는 잘못
이런 행복론이 기독교 사상 가운데도 있는가 할 때 그것은 성경 가운데도 많이 있습니다. 참고 인내한 자에게 영생복락이 있다는 사상이 없는게 아니지만 이 자체만으로는 행복론이 됩니다. 시편 1편을 예로 "복있는 사람은 악한 자의 이론대로 행치 않으며 죄인에 길에 들어서지 않는 것이다"(1절)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이 말씀을 볼 때 행복론에 전적으로 영향을 받은 사람들은 최종적으로 신은 이러한 행복을 창조해 주시는 분으로서, 결국 신이 가지는 가장 큰 의의라는 것은 사람으로 하여금 도덕적으로 높은 위치에 올라가도록 하여 행복을 얻게 하는 일이다'하고 생각하는 일이 많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사상 가운데 성장하는 사람은 하나님을 어떻게 생각하느냐 하면 행복을 나에게 주시기 위해서 길을 열어 놓으시고 그 행복을 받도록 기다리시는 하나님으로 생각합니다. 즉 하나님은 행복의 신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 까닭에 내가 불행하고 괴로울 때는 그 불행과 괴롬이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라 마귀한테서 오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결국 동등한 입장에서 하나님은 행복과 평안과 기쁨과 즐거움만 주시고 마귀는 불안과 고통과 초조와 번민을 준다는 이원론에 빠지게 됩니다.

하나님은 주이시지 행복의 신은 아님
성경이 하나님에 대해서 크게 가르친 사실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성경을 자세히 공부해 볼 때 인간의모든 불행을 없애려고 애쓰시고 악한 신을 물리쳐 행복만을 주려고 한다는 것을 절대 표시하지 않았습니다. '나는 주이다. 모든 것은 나의 명령과 내 의사 안에서 움직이는 것이다. 모든 것이 나를 위해 있을 뿐이지 너희의 행복과 불행을 우선적으로 거론할 게 아니다' 라고 명백히 가르치십니다.
그러므로 다른 것은 다 침묵을 지켜도 명백히 최후까지 품고 있어야 할 사상은 하나님은 주이시지 행복의 신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모든 것은 주 곧 하나님을 위하여 존재하고 또 그분의 뜻을 체득하여 순종하고 준행하기 위하여 존재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경에 나타난 바 사람과 하나님에 대한 가장 기본적인 사상입니다.
행복이나 불행은 아무리 객관적으로 얘기를 할지라도 사람에 따라서 달라지는 주관적인 것입니다. 신앙을 행복론적으로 생각할 때 내가 없다면 행복이고 불행이고 없게 되고 하나님 또한 나의 존재라는 문제를 전제로 그 필요성과 존재를 생각하게 됩니다.

기독교의 이원론은 행복론에서 옴
하나님은 주이시니까 대립하는 어떠한 신도 어떠한 피조물도 없습니다. 사탄이 감히 하나님 앞에 대립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천사와 마찬가지로 사탄 또한 종으로서 자기 일을 하는 것입니다. 욥의 시험에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욥이 하나님을 이유없이 경외하지는 않는다고 하여 사탄 자신이 그걸 증명해 보겠다고 합니다. 그 때 사탄은 하나님 보좌 앞에서 종의 하나요 부리는 신의 하나로 일을 한 것입니다.
이러한 이원론의 기본적인 근거가 어디에서 나왔느냐 하면 기독교 가운데 표면에 부동하는 피상적인 행복론만 취해 가지고 나와서 그렇습니다. 그리고 행복론적인 이론이 귀에 솔깃하니까 그것을 간단히 해 가지고 '예수 믿고 천당 갑시다'하는 말로 선전하는 것입니다. 현세에 있어서 인고하고 자선을 행하고 고요히 정결히 살아가면 내세에는 그만큼 영원한 복락 가운데서 더 큰 행복을 누린다 하는 중세 수도원적인 행복론 사상이 내내 흘러내려온 것입니다.

절대적인 주종의 관계
하나님은 주가 되신 까닭에 이성의 피조물인 사람들은 그의 종으로 존재합니다. 그러므로 그 뜻을 나타내시사 알게 하시는 분은 주 되시는 하나님이고 그 뜻을 받아서 행해야 할 자는 종 된 사람입니다. 주종의 관계는 주 되시는 분이 당신의 의사를 표시하는 것이고 종 된 자는 그 의사를 받들어서 준행하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의지의 관계인 것입니다. 즉 자기를 주 되시는 분의 의지에다 종속시켜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해서 사람은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있는 대상이라고 비약할 일이 아닙니다. 물론 기독교인은 하나님의 자녀이긴 하지만 그건 법적인 위치를 나타낼 때 쓰는 말입니다. 하나님과 사람의 관계는 실질상 주종의 관계에서 벗어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곧을 것을 굽혀 놓으셨다 해도 우리가 '하나님, 무엇 때문에 그것을 굽혀 놓았습니까?'라고 하지는 못하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 있어서 이 관계는 완전하고도 엄격한 주종 관계입니다. 절대적인 주종관계라 할 수 있습니다.

순종의 관계
하나님만이 뜻하시고 의지를 친히 나타내시며 최후에 이렇게 해야 할 것이다 하고 결정하시는 분이십니다. 목표를 세워 주시는 분일 뿐만 아니라 이것은 이렇게 하라고 다 짜 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면 종 된 사람은 오직 순종해야 하는데 하나님께 모든 것을 바치고 그 뜻대로 행하여야 합니다. 명령을 내리시면 그것을 받아야 하는 것이고, 그 다음에는 자기 의지를 적극적으로 발동해서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바 한도를 채워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고로 사람이 하나님과 맺는 가장 정당한 관계라는 것은 명령하시는 분 앞에서 명령에 순종하는 관계라고 성경은 말합니다. 사랑을 베푸시는 분에게 사랑을 보답하는 것이 첫째가 아닙니다. 무엇보다도 우선되어야 할 것은 명령하시는 분의 의사에 모든 것을 맡기고 전적으로 드려서 순종해야 하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11장의 믿음의 용사들을 예로 거기에 그 사람들이 강렬한 종교적인 방도를 취하고 산 사람들이었습니까? 그런 것을 쓰지 않았습니다. 세상에서 말하는 도덕적으로 얼마나 훌륭했는가에 대해서도 쓰지 않았습니다. 시종일관 하나님의 뜻만을 순종한다고 목숨까지 걸고 나갔던 사람들이었음을 분명히 밝혔습니다. 하나님의 의사가 분명히 전달된 이상 기어코 그것을 하려고 하고 고통을 당해 가면서라도 이루어 간 사람들입니다. 이런 사람들이 훌륭한 종교인이라 할 수 있습니다.

사람이 서 있어야 할 정당한 위치
온전히 주의 뜻만을 받들어서 그대로 준행하고 나갈 때 종 된 자의 종교적인 심정은 어떠해야 하는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종 된 사람의 처지에서 보면 그렇게 섬기되 기계적으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이 주의 명령을 절대시하고 받아 섬겨 나갈 때 그의 마음은 자연히 가장 두려운 심정이 됩니다. 이런 심정을 경외(敬畏)라는 말을 씁니다. 즉, 공경하고 두려워한다는 말입니다.
경건한 사람은 결국 주를 두려워하는 사람입니다. 주를 두려워 하는 것에 지식이나 지혜의 근본이 있습니다. 사람이 서 있어야 할 정당한 위치에 있어야 명철을 얻어서 알아듣기 시작하고 이해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솔로몬도 사람이 지혜를 얻는 방식에는 조건이 있다고 했습니다. 그 조건은 지혜를 얻어야 할 정당한 위치에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잠언 1:7에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어늘 미련한 자는 지혜와 훈계를 멸시하느니라"고 했습니다.

거룩하신 하나님
거룩하신 자를 안다고 할 때도 요컨대 하나님이 어떠한 분이신지 하나님의 위치를 정당하게 이해할 때 비로소 거룩하신 분으로 알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정당한 위치를 표현하기에 가장 적당한 말은 다른 어떤 말보다도 거룩하시다는 말입니다. 한자로 거룩하다는 말이 성(聖)이라 해서 무엇이든지 보통과 구별되는 위치에 있을 때 쓰이긴 하지만 하나님에 대해서 쓰는 말로는 그런 개념이 아닙니다. 그런고로 거룩하시다 할 때는 '하나님의 위치인 절대의 대권을 가지시고 항상 명령하시는 분이시며, 나는 그의 명령 일하에 언제든지 움직여야 할 중이다'라는 근거를 떠나서 다른 생각을 강조하면 정당한 기독교 신관이 아닙니다.
자유주의 신학자들이 '하나님은 사랑이시다'라는 말을 많이 쓰고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에게 오도되면 하나님은 사랑이시라는 말만 강조하게 됩니다. 틀이 말이 성경에 없는 것도 아니요 틀렸다는 것이 아니지만 이 말을 기독교의 가장 중요한 내용으로 강조하고자 사용해서는 안 됩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은 대권자시며 그래서 당신 자신의 목적과 그 원인 때문에 모든 것을 움직이신다는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Soli Deo Gloria)'

지혜에 대하여
'네가 무엇인가를 바로 보려면 먼저 하나님을 올바로 깨달아야 한다. 그러고서야 다른 것을 생각하는 것이 지혜이다' 솔로몬이 잠언을 말할 때 지혜의 근본은 주를 경외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하지만 솔로몬이 말하는 지혜란 때때로 하나님께로부터 온 아주 차원 높은 소피아, 제2위가 되시는 분 즉 예수 그리스도를 표현한 말이기도 합니다. (잠8:23-30)
그렇지만 많은 경우 윤리 생활상, 정서 생활상, 혹은 인간 대 인간의 사회 생활상 지혜를 말하였는데 즉 어떤 것이 가장 유효한 생활 방식이냐 하는 것을 가르쳤습니다. 세상의 많은 현자들도 지혜와 여러 가지 근원을 이야기했지만 여기서 가르치는 지혜는 항상 목표가 뚜렷한 지혜입니다. 바로 사람이 참으로 슬기 있고 목표가 있어서 여호와의 가장 정당한 관계를 바로 인식하고 따라서 거기에 대한 바른 생활 감정을 늘 포회하고 있는 데 지혜의 근원이 있다고 가르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왕이시다(1)

 

사람이 하나님에 대해서 주라고 말할 때에는 사람은 하나님 앞에서 종이다 하는 것을 항상 생각해야 합니다. 사람이 하나님 앞에 종이 되었으면 하나님은 모든 것을 명령하시고 모든 것을 당신의 뜻대로 지도하시고 가르쳐 주시고 또 가르쳐 주신 그 일을 할 수 있도록 방법을 내시며 거기에 필요한 힘도 주신다는 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이것은 하나님께서 주로서 우리에게 늘 하시는 일인 까닭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 앞에 그의 종으로서 모든 것을 순종하되 힘이 없을 때에는 힘을 구하며 알 수 없을 때에는 어떻게 해야 할 것인지에 대해서 여쭈어 보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먼저 구체적으로 드러나야 할 것은 무었이냐? 우선 그 앞에 엎드려 경배하는 것입니다. 인생을 포함한 모든 피조물이 하나님에 대하여 가져야 할 정당한 태도의 구체적이고 명확한 표시의 하나는 그 앞에 예배드리는 것입니다. 주되신 하나님께서 사람과 관계를 맺고 일을 해나가실 때 당신의 주권으로 특별히 사람과의 관계 양태를 보여 주시고 그것을 알라고 하시는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주권 행사의 한 양식으로 보이신 것은 절대의 대권, 절대!
권입니다. 이 절대의 대권으로 완전한 통치자의 양태만을 보이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은 왕이시다'라는 관계 형식을 또한 보이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왕으로서 우리에게 임하시고 우리와 관계를 맺으신다는 것이 또한 성경에 나타난 큰 사상입니다.

경배의 대상
본래 사람이 형성하고 있는 주라는 개념은 '하나님은 주이시다' 하는 말을 제대로 설명하기에는 심히 부족합니다. 그 중에서 하나님은 주이시라는 사실 가운데 들어 있는 하나님과 사람과의 관계에는 특별히 '경배한다, 섬긴다' 라는 뜻이 강하게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런고로 인간의 주종관계와 달리 주라는 개념에는 경배의 대상이란 의미도 내포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관계를 주와 종이라는 말로 표시할 때 주가 되시니까 경배한다는 것도 이유가 되지만 그보다는 하나님이시니까 경배하는 것입니다.

왕의 통치
왕이라는 사상 가운데에는 통치와 피통치의 관계가 타나납니다 '한쪽은 다스리고 다른 쪽은 다스림을 받는다' 그런데 이런 관계는 주라는 말 가운데 다 포함되어 있지만 '하나님은 왕이시다'라는 관계에서도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주로서 인간을 통치하시고 우주 만상을 통치하시지만 특별히 사람에게는 거룩한 통치의 대권을 행사하실 때 좀더 친근하고 자상한 관계를 맺어서 다스리시겠다는 큰 의도가 거기 있다는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을 왕이라 할 때에는 하나님의 통치방식 가운데 통치 대상을 선정하시고 통치의 성격을 좀더 명확하게 보이려고 쓴 말입니다. 왕이라는 말은 항상 통치의 대상과 범위가 선정되어 있는 것이고 주라는 말보다 좀더 특정적이고 구체적으로 드러납니다. 이런 점에서 왕이라는 말이 필요합니다.

하나님의 통치를 모방한 아담의 통치
왕의 통치형태가 어디서부터 흘러나왔는가를 생각해 보면 사람의 마음 가운데 다스리고 다스림을 받는 형식의 통치 양태를 가져야 한다는 지혜와 능력이 처음부터 구배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사람을 다스리되 어떻게 다스려 가시는가와 사람이 하나님에 대해서 어떻게 해야 할 것인지를 나타내 보이신 사실에서 은연중 그런 지혜가 나왔던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에 있어서도 아담은 다스리는 사람이었고 하와는 다스림을 받는 사람이었습니다. 그것은 남편이 아내를 다스린다는 정도가 아닌 왕으로서 다스린다는 말을 붙여도 괜찮을 만큼의 통치권의 씨가 거기에 들어 있었습니다. 아담 또한 그가 가진 거룩한 예지에 의해서 사람끼리의 통치를 어떻게 해 나갈 것인지를 자연적으로 체득해서 그대로 해 나갔을 것입니다. 아담은 처음 만들어질 때부터 풍성한 지헤를 가진 상태로 만들어진 사람이지 백지 상태에서 시작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아담이 우리와 같이 경험으로부터 얻은 지혜가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여기에 아담의 특이성이 있습니다. 아담은 하나님과의 교통 가운데에서 받은 신비한 경험, 즉 하나님의 형상으로서 하나님을 모방하는 것이 바로 그의 통치 방식이었던 것입니다.

아담의 다스림에 열복한 셋 그리고 떠나간 가인
선악과를 따먹은 문제에 있어서도 아담이 통치자로서의 위치를 잊고 남편으로서의 위치만 가지고 임했다는데 아쉬움이 있습니다. 남자에게는 남편의 몫만 남겨지는 게 아닙니다. 가장 최후까지 남는 것은 무엇보다도 하나님 앞에서의 책임입니다. 남편과 아내라는 사람끼리의 책임이 우선될 수 없습니다. 선악과를 따먹은 후 아담의 자손들이 번성하게 되고 좀더 큰 사회가 형성되자 질서를 유지해야 할 필요가 생겼습니다. 어떤 형태로든지 그 사회가 통제 되어서 잘 보존되어야 하니까 거기에는 다스리는 사람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아담의 다스림에 열복한 사람도 있지만 아담을 떠나 저희끼리 다스리고 저희 마음대로 다른 형태를 취했던 사람도 있었습니다. 그렇게 열복한 사람으로서 아벨은 죽고 그 다음 셋이 그 안에 들어온 데 비해 그런 통치 형태를 떠나겠다고 에덴 동편의 놋 땅으로 가 버린 사람이 가인입니다. 가인의 행동을 정치적으로 보면 하나님께로부터 나와서 정당하게 역사 위해 흘러가야 할 통치 형태를 반항하고 최초로 반대로 튀어 나간 것입니다. 그리고 가인은 필연적으로 자기 권력 기구를 수립해 나갔습니다. 이것이 그 후 인류역사에 현저히 영향을 끼친 카이니즘입니다. 그러나 셋의 자손으로서 노아의 경우는 그런 카이니즘에 포함되지 않고 남았습니다. 노아는 아버지이자 족장이고 통치기구의 머리요 거룩한 교회의 머리인 그리스도를 대표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결국 그의 가족 여덟은 천하가 다 심판을 받을 때 구원의 은혜 가운데 들어갔던 훌륭한 교회가 되었습니다.

두 차례의 세계대전과 가인적인 통치 형태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주신 바 거룩한 지혜와 사상에 의한 통치 형태가 그 후에 사람의 범죄와 타락으로 왜곡된 가인적인 통치 기구로 나타납니다. 그 특징은 폭력적인 반항 운동과 반동적인 활동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의 의지하는 것은 다른 것이 아닌 칼이었습니다. 1차 세계대전 이후 승전국이나 패전국 할 것 없이 모두가 또 다시 가인적인 성격을 드러내면서 2차 세계대전을 일으킨 사실을 볼 때 역사 속의 카이니즘은 일부분적인 현상이 아니라는 사실을 명백히 드러냅니다.

인간 신화
성경의 가르침으로 볼 때 카이니즘의 현실은 결국 세계를 계속 지배해 나갈 것입니다. 노아의 때와 같은 그런 강포, 롯의 때와 같은 극도의 도덕적인 부패와 타락이 앞으로 현실로 나타날 것입니다. 참으로 무서운 사실이지만 인간들이 가진 통치 형태의 필연적인 결과요 역사적 성격의 전말이기도 합니다. 그러면 왜 그렇게 되느냐 할 때 거기에는 두 가지 큰 요소가 있습니다.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만들어짐을 받았다는 요소와 마귀는 하나님의 모방자라는 요소입니다. 비록 하나님의 형상대로 만들어진 사람이긴 하지만 죄로 인해 그 형상을 이지러뜨려 암매가 지배하게 되니까 형상의 형식만을 취하지 형상의 실질을 취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형상의 형식은 곧 신권 정치입니다. 이것의 형식만을 취하는 것입니다. 신권 정치의 핵심은 절대권인데 하나님 외에는 절대권을 행사할 수 없어야 할 터인데 사람들이 인간을 신화해서 절대권을 행사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카이니즘적인 통치의 작용입니다. 인간 신화는 말세로 갈수록 더욱 강렬하게 나타날 것입니다.

마귀가 하나님의 절대권을 모방함
그리고 또 하나는 마귀가 하나님을 모방해서 하나님을 대신해 자기를 보여 하나님이라 하는 것이 나타날 것입니다. 어떻게 하나님이라고 하느냐 하면, 마귀가 하나님의 절대권을 자기 스스로 입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절대권을 입되 그것이 어디까지 미치느냐 하면 성전 안에 즉 기독교 안에 들어와서 많은 신도들 앞에서까지 자기를 신화하는 것입니다. 이런 것은 과거로부터 있어 온 것이고 때때로 현실로 드러나기도 했습니다. 과거의 앗시리아나 바벨론, 페르시아에도 그런 요소가 있었고 중국의 왕도정치나 헬라의 철인정치가 그 예입니다.

왕권 행사의 형태
하나님은 왕이시다는 사상을 우리가 잘 깨달으면 먼저 왕이라는 개념이 어떻게 발전해 왔고 사람들은 그것을 어떻게 생각했던가를 알아야 할 것입니다. 왕이라는 개념을 생각할 때 일반적으로 떠오른는 것은 왕의 명령 곧 칙령이 법률이 되어서 통치를 받는 사람들의 매일 생활을 다 관여해서 정치를 해 나가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이 말하자면 왕다운 왕권 행사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역사 속에서 왕권은 단순히 하나님을 모방한 것이 아닙니다.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만들어짐을 받았다고 하지만 범죄 후 타락함으로 죄의 부패와 암흑이라는 것이 함께 곁들여서 모든 것에 나타납니다. 또 마귀가 하나님을 모방하여 나타나서 사람들의 어두운 마음을 사로잡아 가지고 끌고 나가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절대의 통치를 행사하면서 무엇을 해보려고 하는데 거기에는 자연히 사람의 권력에 대한 정욕이 나타납니다. 이런 권력 행사와 권력에 대한 욕망을 간절히 추구하면서 절대왕정 때의 루이 14세나 교화의 법왕권과 같은 성격이 드러나게 됩니다. 하지만 왕권이 약해질 때도 있었습니다. 잉글랜드의 국왕 존이 대헌장에 서명한 일입니다. 이렇듯 왕권의 형태는 이랬다 저랬다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왕이시다(2)

 

여호와는 이스라엘의 왕이시다
오늘날 이 세계의 어떤 나라에서 왕을 세운다고 해서 하나님께서 자기들을 통치하시는 그 다스림을 거절하는 것이라고 생각할 사람은 없습니다. 여호와의 통치를 믿는 나라에서 왕을 세우더라도 하나님께서는 왕 위의 왕이 되사 친히 다스리신다는 것을 믿는다는 것입니다. 사람이 사람 위에서 왕 노릇을 한다고 해서 여호와의 통치에서 벗어나는 것은 아닙니다. 여호와가 왕이 됐다는 사실은 사람이 한 백성 위에서 왕이 된 것과 대립하지 않는, 대치할 수 없는 사상입니다. 그러나 여호와가 이스라엘의 왕이 되었다고 할 때는 단순히 그 초연한 위치에서 사람의 제도와 국권이 어떠한 형태를 취하든지 상관이 없다고 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마치 여호와의 통치의 양태가 직접 사람이 사람 위에 왕 노릇 하는 것과 같이 적용을 한다 하는 의미로 여호와가 이스라엘의 왕이라고 가르치신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열방과 같이 자기네를 통치할 사람인 왕을 구하니까 그것은 곧 여호와가 그들 위에 왕 노릇 하는 사실을 배척하는 것이라고 하셨던 것입니다. 여기서 왕이라는 말뜻을 우리가 주의해야 합니다. 왕이란 개념은 그가 절대의 통치자로서 군림하고, 다스리는 백성들에게 특별히 가부를 결정해 주고, 혹 전쟁이 일어났을 때는 그 백성들 앞에 서서 싸운다는 사상입니다. 그래서 “우리도 열방과 같이 되어 우리 왕이 우리를 다스리며 우리 앞에 나가서 싸움을 싸워야 할 것이니라”하는 말을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저들의 왕이 되신다 하는 것은 무슨 뜻이냐 할 때, 왕의 큰 의무가 첫째는 백성을 다스리는 것입니다. 이 다스린다는 말을 특별히 모든 행정을 한다는 의미보다는 재판을 한다. 시비 곡직(是非 曲直)을 늘 구분해 준다 하는 의미가 더 강합니다. 둘째는 전쟁터에서 선두에 선다고 하는 의미가 있습니다. 지금 우리가 가지고 있는 왕이라는 개념과 많이 다릅니다.

구약에 나타나는 독특한 왕의 지위
구약에 나타나는 왕이라는 개념에 따르면 왕이라는 것이 항상 있는 현상적인 것이 아니었습니다. 구약 성경에 특별히 나타나는 왕의 지위는 독특한 것이었습니다. 보통 구약의 사람들이 자기의 생활을 경영하게 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왕의 존재는 보통 사람들의 평상적인 생활에 직접 관계를 하지 아니하였던 것입니다. 사람들이 자연계와의 관계, 즉 자연의 법칙에 의존해서 살아가는 것은 평상적인 생활이므로 거기에 인간이 왕이 되어 선다고 할지라도 자연의 힘을 어떻게 좌우할 수는 없는 일입니다. 여호와께서 왕이 되셔서 그들 위에 군림하실 때에도 역시 보통 생활을 할수 있는 조건하에서는 일일이 간섭하시지 않았습니다. 그렇지만 어떤 비상한 사태가 일어나든지 자기네 힘으로 어떻게 할 수 없는 문제가 생길 것 같으면 왕에게 가서 도와주시고 구원해 주시기를 청하는 것입니다. 이때 그렇게 청하는 사람이 여러 사람이어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백성 중에 한 사람일지라도 청하면, 가령 분쟁이 있다든지 전쟁이 있다든지 기타 무슨 특수하게 어려운 일이 있어서 청할 것 같으면 왕은 그것을 응낙하고 자기 힘이 자라는 데까지 도와주는 것이 중요한 역할이었습니다.

이스라엘 왕 여호람의 예
지금 이 어려움은 아람 왕 벤하닷이 사마리아를 에워쌌을 때 일어난 인공적인 기근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보는 것은 한 여인이 왕에게 와서 도움을 청한 사실입니다. 그런데 도움을 구한 내용은 '서로 자식을 내놓고 삶아 먹자고 해서 제 자식을 먼저 삶아 먹었고, 그 다음날 저쪽 자식을 삶아 먹자는데 안 내놓으니 이럴 수가 있습니까'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렇지만 왕은 기가 막혀서 자기의 옷을 찢을 뿐 도울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여호와께서 너를 돕지 아니하시면 내가 무엇으로 너를 도우랴. 타작 마당에서 곡식을 주겠느냐 포도주 틀에서 술을 줄 수 있겠느냐”고 했습니다. 이와 같이 백성은 개인이라도 무슨 문제를 가지고 왕에게 나아가서 도움을 청하는 것입니다. 구약에 나타난 왕의 위치라는 것은 적극적으로 혹은 스스로 먼저 무엇을 계획하고 권력을 행사하며 나아가는 것이 아닙니다. 권력이 항상 있기는 있지만 늘상 왕권을 행사하는 것이 아닙니다. 권력이 항상 그에게 비치되어 있다 할지라도 특별히 위기에 처한 상태라든지 아니면 백성이 그 권력을 행사하더라도 그 권력의 행사는 자기의 의사나 큰 포부를 가지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무슨 계획을 펴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백성이 도움을 청할 때 행사하는 것입니다. 도와야만 하겠다는 큰 위기에 이르러서만 그 세력을 나타낸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권력을 행사하더라도 무슨 조건을 거기에 붙이지 아니합니다. 내가 이만큼 권력을 써서 도와주었으니 너희는 그대신 무엇을 해라 하는 조건이 없습니다. 이것이 구약에 나타난 왕권의 행사입니다. 이러한 제한이 있는 왕권 행사라는 독특한 성격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 비로소 하나님은 주가 되시며 동시에 왕이 되신다 하는 것을 바로 이해할 수가 있습니다.

왕과 왕권 행사에 대한 오해
여러분도 이런 이야기를 어디서 들어보신 적이 있을 것입니다. 이런 생각은 우리 한국 교회의 압도적인 다수가 하는 생각입니다. 예수님은 현재 우리를 통치하시는 왕이다 하는 사상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구주가 되사 우리를 돌아보시고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고 사랑하시고 인도하시지만 왕으로서의 예수님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지금 예수님은 구주이시고 또 우리의 머리는 되실지언정 왕은 아니신데, 언제 왕이 되느냐 하면 나중에 재림하셔서 땅 위에 천년 왕국을 건설하시고야 왕이 되실 것이다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불행하게도 우리 나라의 명색만은 개혁 신학을 가졌다는 장로교안에 처음부터 압도적으로 들어온 사상입니다.

공리주의와 이원론적인 생각
여러분, 어렸을 때 교회에서 '예수님이 구주이시다' 하는 것을 배웠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왕으로서 어떻게 통치하시는가' 하는 것을 자세히 배운 기억이 있습니까? 예수님께서 매일매일 생활에서 왕으로서 통치권을 어떻게 행사하시고 계시는가를 아마 별로 들어본 적이 없을 것입니다. 과거에 교회에서 이야기한 것은 '예수님은 구주요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속죄함을 받고 천당에 간다. 그리고 세상에서는 그분에게 기도하면 들어주시고 불쌍히 여기시고 은혜를 베푸신다'는 식이었습니다. 또 늘 말씀드리지만 행복주의나 공리주의라는 기초 위에서 생각해 나갔습니다. 물론 지금도 그런 사람들이 많습니다. 이것은 전에도 말씀했습니다만 우리의 생활에 있어서만큼은 이원론적으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즉 두 개의 세력이 늘 다투는 것으로 해석합니다. 항상 마귀와 예수님의 세력이 대립해서 겯고틀고 싸우는 그 속에서 우리가 산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무슨 일이 잘못되거나 어려운 일이 올 것 같으면 당장에 '아, 마귀가 이렇게 한다' 하는 식의 생각을 가집니다. 많은 신자들의 이런 생각을 마귀 자신이 알고 나서 어이없는 웃음을 터뜨릴 것입니다. 자기가 하지도 않은 뚱딴지 같은 여러 가지를 마귀인 자기 탓으로 돌리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생각하는 경향이 한국에서 갑자기 생긴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왕이 되신다는 사상이 빈곤함
이 세상에 살면서 예수님께서 왕이 되사 우리의 전체 위에 군림하시고 통치하신다는 것을 믿고 그의 요구하는 바가 무엇이며 그의 목적하신 바가 무엇인가를 알고 사는 사람과 그런 것을 전연 모르는 사람과는 많은 차이가 있습니다. 그런 것을 전연 모르는 사람은 이 세상에 있는 동안은 마귀가 자꾸 여러 가지로 작희(作戱)하고 지배하는 세계이니까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워야 한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믿음의 선한 싸움이라는 것은 어떤 목적을 향해서 무엇을 이루겠다는 것보다 자기 자신의 안심 입명(安心立命)과 자기 인격의 완성에 중점을 두고 하는 얘기입니다. 거기에는 항상 자기 개인의 완성이라는 개인주의 사상이 강렬하게 박혀 있습니다. 그러므로 모든 것을 도덕적인 문제, 윤리적인 문제에만 귀결시킵니다. '선하다 악하다' 이것만 가지고 따지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경영하시는 일이 역사를 통해서 어떻게 새로 발생하고 발전해 나가는가 하는 것은 보지 않습니다. 매사를 단지 좋다 나쁘다, 선하다 악하다 하는 것으로 따집니다. 어떤 사실이 역사 위에서 크게 발전하는 양상에 대해서는 도무지 생각이 미치질 않습니다. 다만 이 사람은 선저 사람은 악하다, 이렇게 하면 선하다 저렇게 하면 악하다 하는 것만 키워 나가는 사상이 너무나 강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왕이 되신다 하는 사상을 생각하더라도 하나님은 그냥 높이 계셔서 모든 것을 다스리신다 하는 섭리의 통치라는 중요한 요소가 분명히 있습니다. 우리에게 중요한 문제는 죽어서 천당 가는 문제가 아닙니다. 중요한 문제는 오늘날 이 세상에서 어떻게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일을 하고 사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강조해야 할 만큼 강조를 않고 삽니다. 하나님께서 왕이 되신다 하는 사상을 이야기했는데 이 부분을 잘 기억하시고 주의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왕이라 할 때 먼저 무엇을 가르치셨는가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대로 이 세상의 어떤 임금이 통치한다는 그런 형식으로 얼른 생각하지 마시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항상 별다른 형식을 취하고 계십니다. 왕으로서는 날마다 일어나는 일상 생활의 정상적인 것, 평이한 것에 대해서 관여하시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것을 배우면서 겸해서 배워야 할 것은 우리의 머리터럭 하나도 땅에 떨어지지 아니하도록 다 보호하시고 지키신다는 것은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세밀한 모든 것까지 다 주관하시는 일은 또한 무엇인가도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왜 이세상에 사는가?

 

하나님의 선
하나님께서 우리를 이 세상에 두어두시는 큰 이유는 하나님 나라의 여러 가지 일만을 열심히 하라는 것이 전부는 아닙니다. 우리가 하나님일에 쓰임 받는 것은 요컨대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서 완전히 나타나도록 하기 위한 것입니다.우리를 통해서 그 모든 것들을 나타내시려는 것이 하나님의 선하신 뜻입니다. 하나님의 그 거룩한 사실들은 어떤 추상적인 관념이나 특별한 것으로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인격적인 존재, 즉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받은 우리 인간들로 하여금 나타나게 하신 것입니다.

거룩한 품성과 사명
하나님께서 당신의 경륜을 이루어 가실 때 사람은 땅 위에서 하나님의 인격적인 발휘에 맞게 그 속성들을 인간 사회에 나타내고 살아갑니다. 이것이 중요한 사실이긴 하나 이것은 저절로 되는 것은 아닙니다. 계시하신 바 하나님 나라의 일들을 우리가 알고 깨닫는 데에 따라서 달라집니다. 또한 하나님의 거룩하심에 합당하게 사는 사람은 거기에 따라서 필연적으로 그 마음의 소원과 의지가 하나님이 원하시는 바를 추구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인격을 잘 나타낸다고 할 때는 필연적으로 거룩한 사명감을 반드시 띠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하나님 앞에 좀더 거룩하고 구별되어서 이 세상 사람과 같지 않고 신령하고 고매한 하나님 나라의 사상을 마음에 품으면 품을수록 고귀한 하나님 나라의 일에 자기가 사명감을 느끼고 '아 이것은 내가 해야 할 일이구나!'생각하고 나서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사상의 특이성
하나님 나라의 사상이 이 세상의 것과 다른 것은 이 세상 사람들에게는 최종적으로 사상의 주체가 늘 자기 자신이지만 ,하나님 나라 사상은 그것을 그리스도의 지체로 장성하는 데서 얻어간다는 것입니다. 그런 까닭에 교회가 그 사람을 포함하고 있는 것이지 자기가 교회를 인정하고 살아가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우리가 명심해야 할 내용일 듯...^^;)
또한 하나님 나라의 사상에서 내 자신은, 그 전체 안에서 자기를 늘 발견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만유를 완전히 통재하시고 은혜의 왕국을 통재하시는 사실 아래, 모두는 그 나라의 총화적인 아름다움을 이루는 각 부분 부분으로서 ,하나님의 인격성을 충분히 대표할 수 있는 한 영혼으로서 그만큼 주체성을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결국 자기의 거룩한 인격과 사명은 교회라는 큰 테두리 안에 있는 것이며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형성하는 것이 그 본의요, 목적인 것입니다.

교회의 사명
우리를 포함하고 있는 거룩한 교회의 사명...역사적으로 개혁교회가 가르쳐준 중요한 사실은 '사람은 하나님의 은혜로만 거듭나고 구원을 받는 것이다.'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성신의 감화가 있을 때에야 비로소 사람은 구원의 복음을 전할 수가 있습니다. 내가 하지 않으면 아무도 할 사람이 없다는 생각에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내게 기회를 주실 때 ,감사의 맘으로 그 일을 잘 감당해서 그만큼 하나님나라의 깊이에 관여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항상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이 시대에 무엇을 하라고 하시면 우리가 순종하여 그 무엇을 하는 것입니다. 현상적인 교회의 여러 지체들이 합해서 하나님 나라 역사의 진행에 가담해서 일을 하여 나가노라면 교회는 그 때마다 반대 세력에 부딪히게 됩니다. 그러나 그럴 때마다 어떻게든지 순결하게 서서 '아니다. 이것이 참교회의 자태이다'하고 빛을 비치는 것만으로도 그 교회는 충분히 큰일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시대의 도전과 교회의 응전
그런데 어떤 시대에는 교회의 이름을 가지고 무례와 포악과 불공의를 행하며 사람을 은폐의 길로 끌고 가기도 했습니다. 예수님 당시 바리새인들이 그 예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자꾸만 크리스천이 되어야 하겠다는 문제에 치중하기만 할 것이 아니라 바른 빛을 비추고 바른길을 제시하여 왜곡된 교회의 모습을 시정해 나가야 합니다. 거룩한 교회가 바른 내용과 실질을 보임으로써 '아 ,예수를 믿으면 나도 장차 저런 길을 가겠구나'하는 생각을 세상사람들이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은...바른 것을 혼탁하게 만드는 복음주의, 정통주의 등의 것들이 신자들을 딴 데로 이끌고 가고 있으며 또 한쪽에서는 교회란 항상 항시적인 것을 추구해야 하는 데도 불구하고 어떤 일시적인 휘황찬란한 일, 기적적인 일들을 추구하고 있습니다.
이런 데서 우리는 자신의 목표를 더욱 분명히 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거룩한 인격을 이 세상에서 어떻게 하면 완벽히 실증하는 인격적인 존재가 되어야 하는지, 어떻게 거룩한 교회로 존재하면서 흑암의 이 때에 참교회 자태를 드러낼 것인지를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또한 그리스도의 그 거룩한 상태가 무엇인지에 대해서도 성경이 가르치는 대로 배워야 합니다. 바르지 못한 것에 대해 비판할 때, 성경에 분명히 나와있는 올바른 표준을 지니고 있어야만이 비판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교회론의 혼탁상
이런 것들이 항상 우리에게는 중요한 일들입니다. 20세기 후반의 오늘날, 기독교회의 사상에서는 교회론이 크게 혼탁되고 말았습니다. 그것은 대체로 두가지로 일어났는데 하나는 초교회적인 대집단,super church를 만들겠다는 것이고 , 다른 하나는 복음주의라는 미명으로 대중을 모아서 사실상 교회의 순결성은 유린해 버린채 아주 위험스러운 운동들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이것은 더욱더 강렬해진 새 세대라고 할 청년세대의 일종의 절망주의와 찰나주의, 그리고 인위적인 몽환에 빠져 다른 것을 망각하려고 하는 현상과 결합하여 새로운 경향을 만들어 가기도 합니다. 이것은 결국 무엇이 바른 것인지 모르게 혼동하도록 만드는 것입니다. 자신들이 무엇을 위하여 존재하는 지 대체 무엇을 성취해 보겠다고 그러는 것인지 명확한 목표가 없습니다.
이런 일에 대해 우리는 항상 주의해서 생각을 해야 할 것입니다. 무조건 남을 비판하고 자꾸 떠들기만 할 것이 아니라 과연 하나님께서는 거룩한 교회를 향해서 참으로 무엇을 요구 하시겠는지를 냉정하게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무엇 때문에 우리를 이 세상에 살려 두시는 것인지, 지금 이 시대에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출처 : 보길예송교회
글쓴이 : 김완수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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