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논문 소논문

한국 장로교회를 향한 선지자적 외침.

하나님아들 2020. 8. 27. 12:45

한국 장로교회를 향한 선지자적 외침.

「개혁주의 사회 윤리와 한국 교회」를 읽고

M.Div 1914068 장민석

1.들어가며

대한민국에 복음이 전파 된지도 100년의 세월이 지났다. 선교사들에 의하여 조선 땅에 복음이 전파된 이후로 수많은 교회가 세워졌다. 교회를 통하여 복음이 증거 되었고, 복음은 또 다른 교회를 양산하였다. 복음을 통하여 이 땅에 교회가 세워졌을 뿐 아니라, 인간의 개인적 윤리와 사회적 윤리 등 삶의 수많은 변화들을 가져오게 되었다. 그러나 한국 교회는 수많은 변화들을 피부로 직접 느끼며 성장해왔지만, 대부분의 교회는 성도 개인의 회심과 구원에만 관심이 있을 뿐 사회 윤리에 대해선 무관심하며 왜곡된 시각으로만 사회를 바라보았다.

이에 대하여 양낙흥 교수의 “개혁주의 사회 윤리와 한국 교회”는 우리의 잘못된 개혁신학의 사회 윤리를 바르게 잡아주며 올바른 개혁신앙의 길로 인도한다. 필자는 본서를 읽으며, 정교분리의 개념을 재정립하고, 한국 장로교회에서 ‘보수’신학과 정치에 대한 착각과 태극기 부대와 한국교회의 불온한 결탁에 대하여 서평 해보도록 하겠다. 또한 본서를 통하여 한국교회의 올바른 선지자적 외침이 무엇인지에 대하여도 이야기 하겠다.

2.정교분리, 누구를 위한 가르침이었는가?

한국 장로교인들 중 대다수의 사람들은 ‘정교 분리’를 주장한다. 즉 정치와 교회는 분리되어야 한다는 말이다. 지난 시간 그들은 이 단어를 해석할 때, 국가가 종교문제에 간섭하지 말아야 한다는 생각보다는 교회가 정치 문제에 간섭 갖지 않아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에 대하여 어떤 복음주의자는 그리스도인은 정치적인 문제에 대하여 중립적인 태도를 취하여야 한다고 말하기도 하였다.

이와 마찬가지로 정교분리와 관련하여 필자가 어릴 적부터 들어왔던 말은 ‘우리는 교회의 회복을 위해서만 기도해야 한다. 왜냐하면 우리가 사회를 위하여 할 수 있는 것은 기도 밖에 없기 때문이다’라는 말이다. 이처럼 교회 안에서 지나친 정치적 발언은 마치 우리에게 금기된 ‘선악과 열매’와 같은 것이었다. 그러나 우리의 삶의 작은 부분 하나라도 ‘정치’와 관련되지 않은 것이 없다. 왜냐하면 우리가 먹고, 입고 살아가는 삶의 모든 부분이 ‘정치’와 관련되어 있기 때문이다. 또한 올바른 신학적 입장은 반드시 이웃에 대한 사랑을 실천이 따라간다. 마찬가지로 정치에 대한 관심은 나를 비롯한 이웃에 대한 관심으로 자연스럽게 넘어갈 수밖에 없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정치에 중립적인 태도를 취하는 것은 실제론 현상 유지를 원하는 무책임한 태도일 뿐이다. 이런 무책임은 결국 정의가 구현될 것을 기대하는 이웃에 대한 책임을 져버리는 일이다.

이에 대하여 양낙흥 교수는 자신의 저서에서 독자들에게 확실히 전달한다. 교회와 국가는 서로 자유롭고, 어느 한쪽이 다른 한쪽의 지배권을 가질 수 없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종교와 정치는 불가분의 관계이기에 교회는 민족과 국가의 운명에 영향을 미치는 문제에도 반드시 선지자적 관심을 표명할 권리와 의무가 있다. 성경은 분명히 세상에 대한 교회의 권리를 말하므로, 지난 시간 한국 장로교회가 잘못된 성경적 가르침을 전하였고, 제대로 가르치지 못한 정교분리의 의미를 버려야한다. 또한 이렇게 끝맺지 아니하고, 이를 깨달은 한국 장로교회는 사회에 대한 책임들을 찾아 나가야만 한다.

3.보수 신학은 정치적 보수를 가리키는가?

보수신학을 실천하고 있다는 사람들은 흔히 말하는 정치적 보수임을 자처한다. 그들은 마치 보수 신학을 가진 사람들은 정치적으로도 반드시 보수적이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보수 신학을 지지하는 사람들이더라도 인권과 복지를 강조한다면, 그들의 신학이 어떻든 간에 ‘빨갱이’라는 이름표를 붙여버린다. 어느 샌가 갑자기 ‘보수’라는 개념의 정의가 모호해 진 것인지, 그들의 신학자체에 문제가 생긴 것일까? 이제 신학보다는 ‘보수’라는 관념만 맞으면 소통이 가능한 것처럼 되었다.

최근 많은 한국 교회는 소위 ‘보수 정당’과의 손을 맞잡고 태극기 부대를 이끌고 있다. 이들은 현 정부가 어떤 정책을 발표하든지간에 대부분의 모든 정책들을 비판하고 입에 담기 어려운 말들을 쏟아내고 있다. 얼마 전 본 집회를 이끌어 가는 목사님 한 분의 발언이 교회와 사회적으로 이슈를 불러일으켰는데, 그는 본 집회에서 “하나님 까불면 죽어!”라는 신성모독 발언을 하였다. 이로 인하여 교회와 사회에서 수많은 이슈를 만들어 내었고, 현재도 그와 같은 행보를 이어가고 있다.

그러나 그의 행보는 단순히 그 사람만의 행보는 아니었다. 최근 장로교회의 수많은 교단의 원로들이 구국 기도회를 열었는데, 그 자리에 신성모독 발언을 하였던 목사님을 강사로 초청을 하였다. 분명히 그런 신성모독적인 발언을 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교계의 원로들은 그를 초청하여 말씀을 들었다. 이와 같이 그들은 ‘보수’라는 관념만 통하면 그와 같은 발언을 하였던 사람도 초대할 수 있게 되어버렸다. 작금의 사태를 통하여 마치 그들에게 하나님을 믿는 신앙보다 정치적 신념이 우위에 있는 것처럼 보인다. 현 정부가 진행하는 정책과 상관없이 원색적인 비판만 일삼는 것이 너무나 자연스러운 현실이 되어버렸다. 때론 교회 강단에서 이런 정치적인 발언을 스스럼없이 내뱉는 경우가 허다하다.

최근 원로들의 이러한 활발한 행보는 정치적 보수와 진보의 개념을 막론하고, 교회 내부에 있는 젊은이들의 마음을 외면하게 만들었다. 또한 젊은 사람들은 이 사건으로 인하여 보수적 신앙과 정치적인 보수의 개념 자체에 대한 혼동이 생겼다. 결국 그들의 이러한 행보는 교회를 분열되게 하는 크나큰 이유가 되었다.

이에 대하여 본서는 이런 병폐를 향하여 그들이 가진 병든 영성과 그 병든 영성이 누적된 죄악의 결과라고 말한다. 지난 시간 한국교회는 상대의 그 어떤 잘못에도 불구하고 선지자적 메시지를 전하기보다 ‘용서’라는 허울로 그들을 감싸주었던 결과를 맞이하고 있다. 한 예로 ‘민중 신학’이 민중들을 위한 신학을 하기 위하여 노력하였지만, 결국 민중을 위하지도 않고, 자신을 위하여 움직이는 이익집단이 되었던 것처럼 작금의 시대에 한국교회는 또 다른 기형아를 양산하였다. 결국 그들이 가진 잘못된 ‘영적 나르시시즘’이 이웃은 고사하고 자신조차도 돌아보지 못하게 만들었다.

4.한국교회의 선지자적 외침.

성경은 그리스도인들에게 무엇이라고 외쳤는지 살펴보아야 한다. 구약성경의 수많은 선지자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죄악을 방관하지 않았고, 그들의 죄악을 고발하였다. 이스라엘의 모든 자들이 가난한 자의 티끌을 탐내며, 겸손한 자의 길을 굽게 하여 부자가 여인에게 다녔다.(암 2:7)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신들의 죄악으로 잘못된 사회를 형성하였다. 신약 시대에서도 그들의 죄악은 마찬가지였다. 이에 성경은 우리에게 선지자적 외침으로 그들의 죄악을 강력히 고발할 것을 요구하였다.

성경은 분명히 이스라엘의 부도덕함과 윤리의 부재에 대하여 강력히 근절할 것을 요청한다. 성경에서 윤리가 나왔고, 윤리적인 행위의 근원이 성경적인 신앙이다. 십계명을 보면, 1-4계명은 하나님 사랑이며, 5-10계명은 이웃사랑을 실천할 것을 요청한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이웃을 사랑하며, 이웃을 사랑하지 않는 자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다. 이런 바탕은 사회전체를 유지하는 중요한 근간이 된다. 그런 의미에서 ‘사회윤리’는 우리 삶의 작은 조각도 포함하기에 우리 삶, 이웃과의 더불어 삶을 외면하지 않는다.

지난 100년 기간 동안의 한국 장로교회들은 이런 성경의 가르침을 어떻게 여겨왔는지 돌아보아야 한다. 지난 시간 한국 장로교회의 강단에서는 성경의 가르침과 사회 윤리를 결부되어있지 않은 것처럼 가르쳐왔고, ‘정치’에 대한 무관심을 조장하기도 하였다. 그들은 교회가 공적 문제에 대하여 자신의 입장을 밝히는 것을 교회의 권위가 손상될 것에 대한 염려라고 말하였다. 그러나 저자는 정치에 대한 무관심은 이웃에 대한 무관심이라 말한다. 또한 완전한 중립이란 존재할 수 없으며, 정치적 무관심이란 주장도 하나의 정치적 표현이라 말할 수 있다. 결국 지금의 이분법적 윤리 입장은 지난 시간 말씀을 잘못되게 가르쳤던 결과이다.

한국교회는 선지자적 외침에 힘을 실어야 한다. 교회가 교회답지 못함을 보고 외쳐야 하고, 사회가 공정하지 못함과 이웃이 우리의 이웃되지 못함을 보고 외쳐야 한다. 이에 대하여 어떤 이들은 교회가 사회 문제에 대하여 어떤 입장을 취할 때, 그것이 교회의 일치를 깨뜨리는 일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이분법적 윤리의 사고를 버리고, 인간은 전인적인 존재이며. 공동체에 대한 우주적인 관점을 가져야 한다. 결국 말씀 안에서 교회가 하나 되지 않으면 교회는 분열의 길을 걷게 될 것이다. 우리는 말씀에서 답을 찾아야 하며, 말씀을 통하여 깨달음에 이르러야 한다. 또한 교회를 통하여 사회가 변화되도록 노력을 다해야 한다. 지난 시간 한국 장로교회가 정당한 책임에서 회피하였던 부분들에 대하여 선지자적 역할을 감당하도록 고군분투하여야 한다. 물론 이 땅에서 실재가 나타나지 않을 수 있다. 우리의 이상은 드높고 현실은 바닥일 수 있으나, 우리는 이상을 바라보되 현실을 외면치 않고, 이상과 현실의 간격을 좁혀가야만 한다.

7.나가며

한국 교회는 100년의 세월을 지나왔다. 지나온 세월만큼 교회와 사회에 대한 윤리적 책임을 다하고 있는지 돌아보아야한다. 성경은 분명히 사회의 윤리적 죄악에 선지자적 외침을 가할 것을 요청한다. 그러나 한국 교회는 지나온 세월이 무색할 만큼 그에 합당한 사회적 관심이 결여되어 있었다. 정교분리를 가르쳤지만, 마땅히 가르쳐야 할 부분들을 제대로 가르치지 못하였고, 이로 인하여 세대 간의 갈등은 더욱 심화되었다. 이에 대한 결과 많은 사람들은 세대 간의 차이가 빚은 결과라고만 말한다. 그러나 이는 세대 간의 차이로 인한 결과만이라고 볼 수 없다. 지난 시간 한국 교회가 사회적 관심에 대하여 책임 있게 선지자적 외침을 가르치고, 그에 동참하고 있었는지 살펴보아야 할 문제이다.

이에 대하여 저자는 독자들로 하여금, 그리스도인의 사회적 관심에 대하여 적확한 메시지를 제공한다. 그리스도인의 사회적 관심은 항상 복음 전도와 양육에 대한 관심이 동반되어야 함을 주장하고, 사회 윤리의 적합한 개혁 신학의 입장을 보여준다. 본서를 통하여 많은 독자들이 올바른 사회 윤리관이 적립되어 성경을 통하여 세상을 해석할 수 있는 눈이 생기길 바란다.

[출처] 한국 장로교회를 향한 선지자적 외침. 「개혁주의 사회 윤리와 한국 교회」를 읽고|작성자 민돌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