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려움을 치료하는 사랑
마틴 루터 킹
요일 4:18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어 쫓나니 두려움에는 형벌이 있음이라 두려워하는 자는 사랑 안에서 온전히 이루지 못하였느니라
요즘 같은 시대, 파괴적인 변화와 재난이 많은 시대에 우울증을 경험하지 않은 사람은 없습니다. 지옥의 사냥꾼이 우리를 끊임없이 괴롭힐 것 만 같은 느낌, 지옥의 사냥꾼이 우리의 일거수 일투족을 감시할 것만 같은 두려움으로 절름거리게 되는 난처함을 겪지 않은 사람은 없습니다. 어디서건 모든 이들은 낯선 가면과 수 많은 종류의 옷으로 치장을 한 공포에 직면해 있습니다. 건강이 악화될지도 모른다는 사실에 사로 잡혀서 우리는 질병의 증세가 아닌 사소한 징후들에 신경을 곤두세웁니다. 세월이 너무 빨리 지나간다는 사실에 곤혹스러워하면서 우리는 불로장생을 약속하는 약을 복용합니다.
우리가 육체적으로 건강하다해도 열등감, 불안정한 심리로 비틀거린다는 사실, 자신감의 결여, 실패할 것만 같은 예감 때문에 우리는 근심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두려움은 용기백배한 사람을 과음과 난혼의 갈기 갈기 찢어진 길을 정처 없이 걷게 할 지도 모릅니다. 사랑이 두려움으로 바뀐다는 사실을 알지 못한 채 사람들은 사랑과 평화의 해로 떠서 내면의 침체 속으로 지게 하고 있습니다.
두려움이 통제되지 않을 때 물, 고층, 닫혀진 방, 어둠, 혼자 있는 것을 두려워하는 공포를 온 몸의 혈관에 산란하게 될 것입니다. 이렇게 증식된 공포들은 사람들이 두려움 그 자체를 두려워하기 때문에 공포의 크기는 절정에 달할 것입니다.
홀니(Karen Horney)가 "오늘날 심리적인 문제의 대부분이 경제에서 비롯된다"고 말한 것 처럼, 특히 이 경쟁사회 속에서 가장 보편적인 두려움은 경제적 두려움입니다. 산업 자본주의는 사업실패의 가능성과 급변하는 주식시장 때문에 몸살을 앓고 있습니다. 고용인들은 해고 될까봐 두려워하고 있으며 늘어나고 있는 자동화 기계가 자신에게 미칠 영향을 두려워합니다.
또 우리의 죽음과 민족 말살과 같은 종교와 존재론적인 두려움의 증식을 생각해 봅시다.
자동화 시대의 도래는 사람들을 풍부와 번영의 시대로 안내했어야 했지만 죽음에 대한 공포가 더욱더 병적인 지경에 이르도록 했을 뿐입니다. 핵전쟁의 위력이 증명된 광경은 "죽느냐? 사느냐?"는 햄릿의 말을 수많은 입술들이 벌벌 떨면서 내뱉도록 만들었습니다. 마치 이 장소가 수소 폭탄의 공격의 피신처가 되는 것처럼 여기며 방사성 물질 누출 방지소를 건설하기 위한 우리들의 헌신적인 노력을 보십시오. 정부가 핵무기를 자꾸 구입하는 것에 대한 절망에 가까운 우리들의 탄원을 보십시오.
"힘의 균형"을 유지하기 위한 우리들의 광적인 요구는 공포를 가중시키고 어떤 외교상의 '책임전가'가 무시무시한 대학살의 불을 당기지 않도록 하기 위해 각 국가들이 조심하도록 만들었습니다.
공포는 사람의 에너지를 차츰 소모시키고 그가 가진 자원을 고갈시킨다는 것을 깨달았던 에멀슨(Emerson)은 "그는 날마다 두려움을 극복하지 못하는 사람의 삶이 주는 교훈을 배우지 못했다"고 썼습니다.
그러나 나는 우리가 사람의 삶에서 공포를 없애기 위해 다같이 노력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이 인류적인 차원에서 가능하다면 오히려 소망이 없습니다. 두려움은 위험한 일에 접근을 경고하는 인간의 기본적 알림 체계이며 이것이 없이는 사람은 원시 세계나 현대 세계에 생존조차 할 수 없습니다. 두려움은 막강한 창조적인 힘입니다.
모든 위대한 발명과 지성의 발전은 열악한 환경과 조건으로부터의 탈출을 의미합니다. 어둠에 대한 공포는 전기의 비밀을 발견하도록 만들었습니다. 고통에 대한 두려움은 의학의 괄목할만한 발전을 이루어 냈습니다. 무지에 대한 두려움은 배움을 베푸는 거대한 기관을 건설하는 이유가 되었습니다. 전쟁에 대한 공포는 '미국'의 탄생 이유들 중의 하나입니다. 파트리(Angelo Patri)는 다음과 같이 올바르게 지적했습니다. ]
교육은 바로 그 때를 두려워하게 하는 데 있다.
사람이 공포에 대한 수용력을 잃어버린다면 성장하고 발명하고 창조하는 힘도 잃어버릴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의미에서 두려움은 일상생활에 존재해야 하고 일상생활에 필요하며 또 창조하는 힘을 가진 존재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비정상적인 공포가 정서의 파괴를 일으키고 심리적인 해를 불러일으킨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합니다. 정상적인 두려움과 비정상적인 두려움을 구분하기 위해 아프리카 정글의 기억 때문에 뱀을 무서워 하게 된 사람과 노이로제처럼 아파트 그의 집에 깔려 있는 카페트에 그려진 뱀을 무서워하는 또 다른 사람을 프로이드는 예로 들었습니다.
심리학자들은 정상아들은 태어날 때 두 종류의 두려움을 가지고 태어난다고 말합니다. 그것은 떨어지는 것에 대한 두려움과 큰 소리에 대한 두려움입니다. 그리고 다른 공포들은 환경적으로 습득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습득되어진 공포는 카페트 아래 있는 뱀과 같은 것입니다. 우리가 대부분 없애야 한다고 하는 공포는 이런 종류의 공포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그 이야기의 일부분일 뿐입니다.
정상적인 공포는 우리를 보호하는 장치입니다. 비정상적인 두려움은 우리를 쓸모 없는 인간으로 만듭니다. 정상적인 두려움은 우리 개인과 우리의 공동체의 행복을 증진시킵니다. 비정상적인 공포는 끊임없이 우리 내면의 삶에 독을 주입하고 우리 내면을 일그러지게 합니다. 우리의 문제는 공포를 없애는 것 자체가 아니라 오히려 두려움을 조절하면서 그것을 다스리는 것입니다. 어떻게 우리는 이 두려움을 다스릴 수 있을까요?
첫 번째로, 우리가 가진 두려움을 직면하고 왜 우리가 두려워하는지 정직하게 우리 자신에게 단호하게 물어봐야 합니다. 이러한 직면은 어느 정도까지는 우리가 힘있게 살도록 만들어 줍니다. 우리는 두려움을 회피하거나 도피해서 두려움을 치료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가 두려움을 무시하고 우리가 가진 공포를 억누르면 누를수록 점점 더 우리 내면의 갈등은 깊어집니다. 당당하고 정직하게 우리가 가진 공포를 바라볼 때 우리는 많은 사람들이 어린 시절의 필요나 염려에 그대로 머물러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여기에 죽어서 심판을 받을 지 모른다는 공포, 죽음의 공포에 시달리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은 잠재의식 속에 어린 시절 부모로부터 받았던 벌, 방에 갇히고 버림을 받았던 것 처럼 느꼈던 유년시절의 기억들이 여전히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또 다른 사람은 열등감과 사회 부적응으로 고통을 당하고 있었는데 이 사람은 어린 시절 자기 중심적인 어머니로부터 거부당하고 편견에 사로잡힌 아버지가 자괴감에 사로잡혀서 아들을 무능한 존재로 인식하게 만들었으며 삶에 대해서 비관적인 자세를 가지도록 만들었다는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우리가 가진 두려움 그 자체를 우리의 생각에 확대시키므로 이 두려움에 실제보다 상상의 요소가 많이 들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입니다. 두려움들 중 어떤 것은 카페트에 그려진 뱀을 볼 때 일어나는 발작과 같이 드러날 것입니다.
항상 공포는 상상력을 잘못 쓴 결과로 나타난다는 사실을 기억합시다. 우리가 두려움을 밖으로 끄집어 내어 공개할 때 두려움에 대해 웃을 수 있고 이것이 우리에게 양약이 될 것입니다.
어떤 정신과 의사는 "웃음은 공포와 염려에 대한 가장 좋은 치료약이다"라고 말합니다.
두 번째로, 우리는 이 두려움을 사람들이 알고 있듯이 사람이 가진 최고의 덕인 '용기'로 극복할 수 있습니다. 플라톤은 용기를 이성과 욕망 사이의 균열을 이어주는 영혼의 한 요소라고 생각했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용기를 사람의 본질적인 품성의 하나인 '확신'으로 보았습니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용기는 지고 선을 달성하는 것을 위협하는 어떤 것이라도 정복할 수 있는 '마음의 힘'이라고 말했습니다.
이 모든 말을 종합해볼 때 용기는 두려움을 극복할 수 있는 힘입니다. 염려와 달리 두려움은 대면하고 분석하고 공격하고 필요하다면 참아내야 하는 구체적인 대상을 가지고 있습니다. 얼마나 자주 두려움의 대상이 두려움 그 차제로 남아있습니까? 토로우(Henry David Thoreau)는 그가 발행하는 저널에서 "공포만큼 두려운 것은 아무 것도 없다"고 썼습니다. 고대의 에픽테토스는 다음과 같이 썼습니다.
"진정으로 두려운 것은 죽음이나 시련이 아니라 시련과 죽음에 대한 공포 그 자체이다"
용기는 구체적 대상에 의해 생긴 공포를 용기로 흡입하여 공포와 관련된 것들을 극복하도록 합니다. 폴 틸리히는 다음과 같이 썼습니다.
"용기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 자신을 확신하지 못하게 하는 경향이 많음에도 불구하고 자기를 확신하는 자기 확신이다."
용기는 죽음과 무존재에도 불구하고 자기확신을 하는 것입니다.
이 확신에 찬 사람은 용기백배해서 죽음의 공포를 자기확신으로 바꾸고 자기확신에 힘입어 행동합니다. 확실한 공포 치료제인 용기로 가득 찬 자기 확신은 이기적이지 않습니다. 자기확신은 적당히 자기를 사랑할 줄 알고 또 적당한 수준에서 다른 사람을 사랑할 줄 압니다. 에리히 프롬은 올바른 자기 사랑과 다른 사람을 제대로 사랑하는 것은 상호 의존적이라고 말합니다.
용기는 어떤 장애물에도 당황하지 않는 분별력이며 아무리 놀랄만한 일이 벌어진다 해도, 어떤 두려움에도 우리가 굳건히 설 수 있게 해 줍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공포의 많은 부분은 카펫에 그려진 뱀을 보고 놀라는 차원에 그치는 것이 아닙니다. 시련은 이 낯선 삶의 음율에 울려 퍼지는 현실이며 우리의 모든 행동 반경 내에 잠복한 위험이며 불의의 사고가 발생할 수도 있고 건강이 악화될 우려될 가능성이 언제나 있습니다. 그리고 죽음은 사람이 경험해야 하는 냉혹하고 피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인생의 수수께끼에서 악과 고통은 우리 각자에게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놀라운 일을 겪어야만 하는 이 세상에서 힘든 일은 아무 것도 없다고 증명하려고 애쓸 때 우리는 우리들 자신 뿐 아니라 이웃들에게 해를 가하기도 합니다. 삶을 비관하도록 위협하는 이러한 요소들은 용기의 도전을 받아야 합니다. 이 용기는 인생의 애매모호한 여러 면에도 불구하고 삶 자체를 확신하는 힘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절망의 산에서 희망의 돌을 캐도록 하는 창조적 의지의 경험을 필요로 합니다.
용기와 비겁함은 정반대의 것입니다. 용기는 장애물과 놀랄만한 상황에 처해 있음에도 앞으로 전진할 수 있는 내면의 해결책이며 비겁함은 환경에 굴복하는 굴종입니다. 용기는 창조적 자기 확신을 만듭니다. 비겁함은 패배적인 자기 비하를 만듭니다. 용기는 두려움에 직면하고 두려움을 다스리지만 비겁함은 두려움을 피하고 두려움에 질질 끌려 다니게 됩니다. 용기 있는 사람은 처한 상황이 아무런 흥미가 당기지 않는다 해도 삶의 열정을 잃지 않습니다. 비겁한 사람은 삶의 불확실성 때문에 당황하고 살 의지를 잃어버립니다. 우리는 끊임없이 공포의 홍수가 나지 않게 하기 위해서 용기의 제방을 쌓아야 합니다.
세 번째로, 공포는 사랑으로 다스려집니다. 신약성경은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어 쫓나니"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이르게 한 종류의 사랑, 박해가 계속되던 와중에도 바울을 평안케 했던 그 사랑은 약하거나 힘이 없거나 감상적이지 않습니다.
그러한 사랑은 움추리지 않고 악에 맞서 싸우며 시체말로 "그것을 취하는 것" 무한한 능력을 보여줍니다. 그러한 사랑은 세상을 이깁니다.
그러나 사랑이 현대사회가 가지고 있는 전쟁의 공포, 경제적 무능력, 인종 불평등과도 연관이 있을까요? 미움은 공포에 뿌리를 두고 있으며 공포적 미움에 대한 유일한 치료약은 사랑 뿐입니다. 국제 사회의 상황의 악화는 두려움의 치명적인 화살을 쏘고 있는 것입니다.
러시아는 미국을 두려워하고 미국은 러시아를 두려워합니다. 중국과 인도, 이스라엘과 아랍의 관계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공포들은 다른 나라를 공격하고 과학기술의 정상에 이르는 것, 경제적 힘, 우리 자신의 지위와 힘을 잃는 것 같은 것을 포함합니다. 전쟁의 중요한 원인 중 하나가 바로 두려움이 아닐까요? 우리는 전쟁은 미움의 결과라고 말하지만 면밀히 살펴보면 다음과 같은 결론을 얻을 수 있습니다.
처음에는 두려워하게 되고 그 다음에는 미워하게 되며 그 다음에는 전쟁이 일어나고 마지막에는 더욱더 깊어진 증오만 남습니다. 악몽 같은 핵전쟁이 이 세상을 소용돌이에 몰아 넣는다면 그 원인은 한 국가가 다른 국가를 미워하는 것 때문이 아니라 모든 국가가 서로를 두려워하고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지능적으로 교묘한 현대인들이 어떤 방법으로 전쟁의 공포를 다루도록 해야 합니까? 우리는 우리 자신을 최대한 무장하고 있습니다.
서방과 동방은 서로 팔을 할퀴는 싸움에 휘말려 있습니다. 방위비가 어마어마한 비율을 차지하고 살인에 사용되는 무기 구입비는 인류의 복지비보다 우선권을 가지고 있습니다. 국가는 더 많은 무기를 소장하면 공포가 사라질 것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그러나 보십시오! 이들은 더 큰 공포를 만들고 있습니다. 이 휘몰아치는 공황의 시절에 우리는 "완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어 쫓나니"라는 오래된 이 말씀을 기억해야 합니다. 무기가 아니라 사랑과 이해, 잘 다듬어진 선의(善意)로 두려움을 극복할 수 있습니다. 좋은 믿음에 기초한 정신적인 것들이 실제 현실에서 서로 서로 믿을 수 있도록 해 줄 것입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민족 간 불평등 문제는 그와 꼭 같은 공식으로 해결할 수 있습니다. 인종 차별은 불합리한 공포, 누구나 좋아하는 경제적 특권, 사회적 지위 상승, 근친혼, 새로운 상황에 부적응할 것 같은 두려움에 의해 지지되고 있습니다. 잠 못 이루는 밤과 고통의 낮 동안 백인들은 다양한 방법으로 마음을 좀 먹는 공포와 전쟁을 시도합니다.
도피의 길을 따라가다 보면 어떤 이들은 민족 관계가 가지고 있는 그 문제를 무시하게 되고 또 다른 사람들은 법률 중재와 파기, 대중저항 선동 같은 법률적인 책략을 믿습니다. 여전히 사람들은 폭력과 그들의 형제인 흑인들을 인색하게 대하는 것으로 그들이 가지고 있는 공포를 없애고자 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치료법이 얼마나 쓸모 없는 것입니까? 공포를 없애는 대신 그들은 점점 더 심각해진 병적인 공포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 공포는 이상한 정신병과 기괴한 편집증 증세로 고통당하는 피해자를 남깁니다. 억압도 아니며 단체 저항도 아니며 파괴적인 폭력으로 점점 커진 공포를 없앨 수 있는 것은 더더구나 아닙니다. 오직 사랑과 선한 의지만 공포를 몰아낼 수 있습니다.
우리들의 백인 형제들이 두려움을 다스릴 수 있으려면 그리스도의 사랑의 위임과 흑인들이 백인들을 사랑하는 기독교적인 사랑에 의존해야 합니다. 우리가 사랑과 비폭력의 방법을 고수할 때만 백인 공동체 내에 존재하는 공포를 감소시킬 수 있습니다. 압제를 가해왔던 소수의 백인들은 흑인들이 권력을 장악하여 지난 세월동안 수 없이 당해 온 불평등과 만행에 조금의 주저함도 없이, 조금의 동정도 없이 복수를 할까봐 두려워합니다.
계속 아들에게 상처를 주었던 부모는 어느날 갑자기 지금 아들이 자기보다 훨씬 더 키가 크다는 사실을 발견합니다. 아들이 지난 날 받았던 모든 상처를 폭력으로 대신할 것입니까? 전에는 의지할 데 없었던 흑인 소년이 자라서 지금은 정치, 문화, 경제적으로 영향력을 발휘하는 성인이 되었습니다. 많은 백인들은 복수를 두려워합니다. 이 흑인은 그들에게 두려워 할 일이 아무 것도 없다는 사실을 보여줘야 합니다. 이미 그들을 용서했고 기꺼이 과거를 용서했기 때문입니다. 이 흑인은 자기 자신과 백인을 둘 다를 위해서 정의를 구하고 있다는 것을 두려워 하고 있는 백인에게 확신시켜야 합니다.
사랑과 비폭력의 방법을 사용하고 질서정연한 가운데 힘을 드러내는 대중운동, 권력을 얻기 위한 그런 대중운동은 복수에 쓰이지 않고 창조적으로 쓰여질 것이라는 확신을 백인들에게 주어야 합니다.
그러면 이렇게 병적으로 증가하는 공포에 대한 치료책은 무엇일까요? 우리는 그 치료법을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치료법을 알려 주실 것입니다. 사랑이 두려움을 내어 쫓습니다. 이 진리는 우리가 가진 개인적인 염려와 상관없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이 나보다 뛰어나다는 사실을 두려워하고 실패와 우리가 최고로 여기는 사람들의 비난이나 불만을 두려워합니다. 시기, 질투, 자신감 결여, 정서적 불안정, 끊임없이 괴롭히는 열등감들은 모두 두려움에 그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우리가 사람을 시기하지 않고 그들을 두려워합니다. 처음에 우리는 그들을 두려워하고 차차 그들을 시기합니다. 우리의 일상생활을 방해하는 이런 사소한 두려움 치료책이 있습니까?
예, 물론 있습니다. 그것은 깊고 지속적인 사랑의 방법에 위탁하는 것입니다.
"완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쫓습니다."
증오와 쓴 상처는 두려움의 질병을 결코 치료할 수 없습니다. 오직 사랑만 두려움을 치료할 수 있습니다. 미움은 삶을 황폐화시킵니다. 사랑은 삶을 부요하게 합니다. 미움은 삶을 혼동시키지만 사랑은 삶을 조화롭게 합니다. 미움은 삶을 어둡게 하지만 사랑은 삶에 빛을 비춰줍니다.
네 번째로, 두려움은 믿음으로 다스려집니다. 두려움의 공통적인 원인은 부족한 능력과 계속 자신의 무능을 인식하는 것입니다. 거의 모든 사람들은 삶의 긴장을 덜 영적인 방법으로 직면하려고 합니다. 멕시코에 휴가를 갔을 때 킹씨와 나는 더 깊은 바다에서 고기를 잡으려고 했습니다.
금전적인 사정으로 우리는 오래되고 시설이 낡은 배를 빌렸습니다. 이 때 우리의 생각은 여기까지 밖에 미치지 못했습니다. 해변에서 십마일 정도 되는 거리에 이르자 구름이 낮게 몰려오더니 바람이 일렁이기 시작했습니다. 그 때서야 우리는 배가 낡았다는 사실을 깨닫고 새파랗게 질렸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와 유사한 상황에 있습니다. 몰아치는 바람, 낡은 배가 이 공포를 설명합니다. 많은 비정상적인 두려움을 프로이드에 의해 시작된 새로운 치료법인 정신의학적인 방법으로 치료할 수 있습니다.
이 치료법은 사람의 무의식의 세계를 관찰하고 어떻게, 어떤 이유로 근본적인 에너지가 신경계 속으로 들어갔는지 찾아냅니다. 정신의학은 우리가 솔직하게 우리 내면세계를 볼 수 있도록 해 주고 우리의 실패와 두려움의 원인을 발견해 줍니다. 우리의 두려운 삶의 현실은 정신과 의사가 종교적인 믿음을 가지고 있지 않다면 정신의학 치료가 효과를 발하지 못하는 상황에 직면해 있습니다.
우리의 어려움은 우리가 믿음없이 두려움을 대면하려고 하는 단순한 이유에 있습니다. 우리는 풍부한 영성의 배를 가지지 않고 폭풍이 이는 바다를 따라 인생의 항해를 합니다. 미국에서 선구자적인 역할을 하는 의사는 "두려움에 대한 단 하나의 치료제는 믿음이다"라고 말합니다.
신경질적인 염려로 나타나는 정상적인 두려움과 공포는 정신의학으로 치료될지 모르지만 실존의 염려로 나타나는 죽음, 무존재, 아무 것도 아닌 존재로 전락할 것 같은 두려움은 오직 긍정적인 종교적 믿음으로만 치료됩니다. 긍정적인 종교적 믿음은 우리가 고통과 괴로움에서 완전히 놓임을 받을 것이라는 환상을 그리지 않을 뿐 더러 삶은 정말 안락하고 힘든 일 없이 편안하게 살아가는 한 편의 드라마라는 환상을 우리에게 부여하지도 않습니다. 오히려 믿음은 우리의 마음의 평강은 억압과 무거운 짐과 공포가 불가피하게 찾아온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각인시켜 주고 세상은 살 만한 곳이며 하나님이 관계하고 있다는 사실도 확신시켜 줍니다.
반대로 무종교는 우리가 아무 목적 없이, 아무 생각없는 세상 안, 무시무시한 공간 안에 고아처럼 그냥 던져진 존재라고 믿게 합니다. 그러한 가치관은 용기를 고갈시키고 사람이 가진 에너지를 탕진하게 합니다. 톨스토이의 고백에서 톨스토이가 회심하기 전에 느꼈던 고독과 공허함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적었습니다.
내 인생에서 모든 것이 산산이 무너진 것 처럼 느껴지던 시절이 있었다. 나의 확신은 심연에서부터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고 나 자신이 갈갈이 찢겨지는 것 처럼 느꼈다. 내 인생에 지속적인 영향을 미칠만한 것은 아무 것도 없었고 그 곳엔 하나님도 없었다. 잠들기 전 밤이면 밤마다 내 방의 서까래에 밤에 목을 매고 싶은 유혹을 이기기 위해서 내 방 안에 줄이 있는지 확인해야 했다. 그리고 나는 총을 쏴서 순식간에 죽음을 맞아 비극에 처하지 않기 위해서 방아쇠를 당기는 것을 참아야 했다.
톨스토이의 삶의 방황의 단계에서 많은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톨스토이는 한없는 사랑으로 사람들을 보듬어 안으시는 인자하시고 지혜로우신 분이 이 세상을 다스리신다는 확신이 주는 지속적인 영향력을 가지고 있지 않았습니다. 종교는 이 광대한 세상과 불확실한 세상에서 우리가 혼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확신을 줍니다. 우리의 시대를 어둡게 하는 불확실성과 밤에 드리워지는 변화무쌍함에도 불구하고 쉴새없이 변화하는 시간 너머에 존재하시는 하나님은 지혜로우시고 사랑이 넘치는 하나님이십니다.
이 세상은 의미 없는 혼돈들이 비극적으로 나타나는 곳이 아니라 질서정연한 세계의 기묘한 나열입니다. "주님은 놀라우리만치 지혜롭게 이 세계를 만드셨고 측량할 수 없는 지식으로 하나님은 천국을 만드셨습니다." 사람은 계속 타오르는 한 줌의 담배연기가 아니라 "천사 보다 약간 못한 존재"로 지음을 받은 어린아이입니다. 사람의 시간보다 훨씬 더 오래, 영원한 시간을 사시는 하나님이 지혜로 서 계셨고 우리를 인도하셨으며 우리를 그의 권능으로 보호하셨고 우리를 사랑으로 지켜주셨습니다. 그 전능의 바다에서 파도가 칠 때마다 떨어지는 작은 물거품 속에서 우리를 안아 주시고 지켜주셨던 것 처럼 하나님의 한없는 사랑은 우리를 지탱해 주고 우리를 안아주십니다.
그의 끓어 오르는 충만함으로 우리를 향해 영원히 움직이고 있으며 우리들의 삶의 작은 실개천과 내를 한없는 자원으로 채워주시려고 하십니다. 이것이 종교의 영원한 화음이며 존재의 수수께끼에 대한 종교의 영원한 대답입니다. 이러한 우주의 운영원리를 발견하는 사람은 누구든지 삶의 고속도로를 비관주의의 괴로움 없이, 병적인 공포 없이 걸어갈 수 있습니다. 여기에 그렇게 많은 사람들을 괴롭히는 죽음의 정신적인 두려움에 대한 대답이 있습니다. 원자폭탄이 언제 터질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을 우리는 하나님의 손을 벗어나서는 조금도 움직일 수 없다는 믿음으로 직면해 봅시다.
죽음은 불가피한 것입니다. 죽음은 일부 귀족만을 귀족정치가 아니라 모든 사람을 위하는 민주주의와도 같은 것입니다. 왕도 죽고 거지도 죽습니다. 젊은 사람도 죽고 늙은 사람도 죽습니다. 학식이 있는 사람도 죽고 학식이 없는 사람도 죽습니다. 우리는 죽음을 두려워 할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입김으로 소용돌이치는 지구를 만들어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자! 보십시오! 이 하나님이 인류의 순례 여행을 인도하시며 우리를 죽음의 어두운 밤에서 영원한 생명의 찬란한 새벽으로 확실히 인도하실 것입니다. 하나님의 의지는 너무 완벽하고 하나님의 계획은 너무 광대해서 제한된 시간의 틀과 지구라는 좁은 공간 속에 포함될 수 없습니다. 죽음은 궁극적인 악이 아닙니다. 궁극적인 악은 하나님의 사랑의 테두리 밖에 존재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미친 듯이 이 세상의 방사성 피난처를 구할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영원한 방사성 물질의 피난처입니다. 예수님은 어떤 것도 하나님의 사랑으로부터 사람을 격리시킬 수 없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그가 남긴 중요한 말씀에 귀 기울여 봅시다.
그런즉 저희를 두려워 하지 말라 감추인 것이 드러나지 않은 것이 없고 숨은 것이 알려지지 않을 것이 없느니라 내가 너희에게 어두운데서 이르는 것을 광명한데서 말하며 너희가 귓 속으로 듣는 것을 집 위에서 전파하라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 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시는 자를 두려워 하라 참새 두 마리가 한 앗사리온에 팔리는 것이 아니냐 그러나 너희 아버지께서 허락지 아니하시면 그 하나라도 땅에 떨어지지 아니하리라 너희에게는 머리털까지 다 세신 바 되었나니 두려워 하지 말라 너희는 많은 참새보다 귀하니라
예수에게 사람은 인생의 강물에 떠나니는 표류화물도, 버려진 뱃짐도 아니며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참새가 떨어지는 것도 주관하시고 사람의 머리털까지 세실만큼 세심한 사랑으로 나타납니다. 사람의 삶 그 자체를 감싸고 있는 하나님의 사랑을 배제하고서 하나님은 인식하는 것은 잘못된 생각이 아닙니까?
하나님이 사람의 삶에도 관심을 가지고 계신다는 그 확신은 두려움의 질병을 치료하는 데 극효약입니다. 왜냐하면 이 확신은 우리에게 우리 자신의 가치를 인정토록 해 주며 이 세상에 우리가 속해 있고 이 세상이 편안한 우리집 같은 느낌을 주기 때문입니다.
가장 알라바마의 몽고메리 지역에서 일어난 버스 파업의 가장 열렬한 참여자는 우리가 '폴라더 여사'라고 부르면서 우리가 가장 좋아했던 나이 많은 흑인 여자였습니다. 가난에 찌들고 제대로 교육을 받지 못했지만 그녀는 놀랄만치 지혜롭고 이 운동의 의미에 대해서 깊은 이해를 하고 있었습니다. 몇 주 동안 걸기 운동을 벌인 후 그녀는 "피곤하냐?"는 질문을 받았습니다. 문법적으로는 맞지 않는 말이지만 아주 의미 깊은 말을 했습니다. "내 발은 피곤하지만 내 영혼은 쉼을 얻고 있습니다."
일주일 내내 긴강이 감돌던 때, 체포될 위험이 있었고 쉴 새 없이 울리는 전화에서 어마어마한 위협을 느끼고 있던 어느 특별한 월요일 저녁에 나는 큰 모임에서 연설을 했습니다.
나는 극도로 침체에 빠져 있었고 두려움에 질려 있었지만 힘과 용기의 느낌을 전해주고자 했습니다. 모임이 끝날 무렵 폴라더 여사는 교회 연단으로 왔습니다.
"여기로 오세요." 나는 즉시 그녀에게로 가서 그녀를 사랑으로 껴안았습니다. "무엇인가 문제가 당신에게 있군요" 그녀는 말했습니다. "당신은 오늘 그렇게 강하게 말하지 않아도 됩니다."
나는 두려움을 더 깊이 숨기려고 애쓰면서 말했습니다. "아닙니다. 폴라드 여사, 아무 것도 잘못되지 않았어요. 그 어느 때보다 저는 좋습니다." 그러나 그녀의 시선은 근심에 가득 차 있었습니다. "지금 나를 속일 필요가 없습니다" 그녀는 말했습니다. "나는 뭔가가 문제가 있다는 것을 압니다. 당신을 기쁘게 할 뭔가를 우리가 하지 못하는 것이 당신을 괴롭히나요? 아니면 당신을 괴롭히는 백인들 때문인가요?" 내가 대답하기 전에 그녀는 내 눈을 직시하면서 말했습니다.
"우리는 항상 당신과 함께 있다는 사실을 이야기해 주고 싶군요." 그리고 그녀의 얼굴이 반짝거렸습니다. 그녀는 조용하지만 확신에 찬 어조로 이야기했습니다. "그러나 만약 우리가 당신과 함께 하지 않는다 해도 하나님이 당신을 돌볼 것입니다."
그녀가 이 위로의 말을 했을 때 내 안에 있던 모든 것들이 떨렸고 살아있는 에너지가 내 안에서 강하게 고동쳤습니다.
끔직한 1956년의 밤이 지난 후 폴라드 여사는 영광의 나라에 잠들었고 나는 아주 짧은 며칠을 알고 있습니다. 나는 시련의 격노한 불길로 심한 고통 중에 있었고 괴로워하고 있었습니다. 나는 힘과 용기를 응집해 고통의 어마어마한 바람을 참아내고 반대의 폭풍을 물리쳐야만 했습니다. 세월이 점점 지날수록 폴라드 여사의 굉장히 단순한 말이 자꾸 자꾸 생각나서 빛을 주고 평화를 주었고 힘든 내 영혼을 이끌어 주었습니다."
이 믿음은 패배의 바람의 소용돌이를 소망의 따뜻하고 생기가 도는 바람으로 변화시킵니다. 수 세기 전에 신앙이 투철한 사람의 집 벽에서 발견되던 경구를 지금 우리들의 마음 속에 새겨야 합니다.
"두려움이 문을 두드립니다.
믿음이 대답합니다.
그곳에는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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