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율법은 모세로 말미암아 주신 것이요 은혜와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온 것이라”(요1:17)
성경을 하나님의 구원사적으로 분류할 때에, 일반적으로 다음과 같이 분류한다.
(제 1 막)
창세기 1장 -11장 (서막)
창세기 12장 - 말라기 4장
(제 2 막)
마태복음 - 유다서 (제2막)
계시록 (종막)
우리는 제1막을 구약(Old Testament)이라고 부르고 제2막을 신약(New testament)이라고 부른다.
제1막과 제2막 사이에는 400년이라는 중간사가 있어서 두 언약을 분리시키며 동시에 연결하여 준다.
우리는 왜 구약과 신약이라고 다르게 구별하여 부르는가?
바울은 구약성경을 옛 계약이라고 불렀다.
“그러나 저희 마음이 완고하여 오늘까지라도 구약(헬: 팔라이도스 디이데케)을 읽을 때에 그 수건이 오히려 벗어지지 아니하고 있으니 그 수건은 그리스도 안에서 없어질 것이라”(고후3:14)
개역성경은 “구약”이라고 번역하였지만, 공동번역은 “옛 계약”, 표준새번역은 “옛 언약”, KJV 영어성경은 old testament, NIV 영어성경은 old convenant 라고 번역하였다.
헬라어 “팔라이오스 디아데케”는 old testament를 뜻한다.
70인역은 단9:2의 “서책”을 헬라어로 “하이 비블로이”(히브리어: 세파림)로 번역하였는데, 이 단어는 구약성경을 의미한다. 클레멘트 서신의 내용을 보면, 초대교회의 교인들도 구약성경은 “비블리아”라고 불렀음을 알 수 있으며(클레멘트서신2, 14:2) 구약성경과 신약성경을 구별하였다.
이와 같이 구약과 신약성경은 구별되어졌지만, 신구약을 통틀은 성경의 핵심적인 주제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롤 통하여 이루시는 하나님의 구원계시”이다.
혹간 어떤 사람들은 구약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구원계시냐고 반문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 답변은 명백하게 "Yes"이다.
이 구원의 계시가 구약에서는 예언되었으며, 신약에서는 성취되었던 것이다.
그 실제적인 예로 원복음이라고 부르는 창3:15을 보자.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너의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하시고...”(창3:15)
창3:15은 여자의 후손, 즉 인간으로 오시는 메시야가 뱀(사단)의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라는 하나님의 구원에 대한 멧세지이다. 이 약속은 구약이라는 줄기 위에서 점진적으로 자라나, 마침내 신약이라는 가지 위에서 열매를 맺게 되었던 것이다.
또 다른 예로서 아브라함의 경우를 보자.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지라.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하여 복을 얻을 것이니라 하신지라(창12:2-3)
본문은 땅의 모든 족속이 아브라함을 인하여 복을 얻을 것이라고 하셨다.
아브라함은 이방의 어두운 곳에서 복음의 빛 안으로 부르는 신자들의 첫열매였다. 여호와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이 “모든 믿는 자들의 조상이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그 징표로 이삭이 태어날 것이라는 언약을 아브라함과 맺으셨으며, 구원의 약속은 계속 진행되어갔다.
아브라함과 이삭의 후손 중에서 야곱은 택함을 받았으나 에서는 택함을 받지 못하였다.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이시지만, 아브라함의 육신적인 후손만이 구원을 얻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시고 산 자의 하나님이시다.
위 성경본문 창세기12장2-3절에서는 “아브라함으로 인하여 땅의 모든 족속이 복을 얻을 것”이라고 기록되어 있는 것이다. 그 구약본문의 점진적인 예표가 신약에서는 다음과 같이 성취적으로 해석되어지는 것을 알 수가 있다.
“그러므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고 속으로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 말하지 말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이 능히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시리라”(눅3:8)
“또한 아브라함의 씨가 다 그 자녀가 아니라 오직 이삭으로부터 난 자라야 네 씨라 칭하리라 하셨으니 곧 육신의 자녀가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라 오직 약속의 자녀가 씨로 여기심을 받느니라”(롬9:7-8)
“그런즉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들은 아브라함의 아들인 줄 알지어다. 또 하나님이 이방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로 정하실 것을 성경이 미리 알고 먼저 아브라함에게 복음을 전하되 모든 이방이 너를 인하여 복을 받으리라 하였으니 그러므로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는 믿음이 있는 아브라함과 함께 복을 받느니라”(갈3:7-9)
즉 아브라함으로 인하여 땅위의 모든 족속이 구원을 얻게 된다는 구약의 예시가 마침내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이 모두 아브라함의 자손으로 유업의 언약을 받는 자가 되어진다.
“너희가 그리스도께 속한 자면 곧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약속대로 유업을 이을 자니라”(갈3:29)
우리는 구약과 신약에 대한 관계, 즉 서로 구별되어야 하는 것과 서로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살펴보자.
구약과 신약이 구별되어져야 하는 것은 무엇일까? 물론 이러한 구별되는 상이점은 단순하게 그 강조점을 설명하기 위함이라는 것을 이해하여야 한다.
구약은 예비적 성격을 갖고 있으며, 신약은 집행적 성격을 가진다.
구약은 우리가 해서는 안될 것을 말해주고, 신약은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하실 수 있는 것을 말해준다.
구약은 우리는 감금시켜 주고 신약은 우리를 해방시켜 준다.
구약은 우리의 현재의 모습을 말해주며 신약은 우리의 미래의 모습을 말해준다.
구약의 강조는 행함에 있고, 신약의 강조는 인격에 있다.
구약은 소망을 갖게하고 신약을 완성을 가져온다.
구약은 “할 수 없는 것”을 강조하며, 신약에서는 “할 수 있는 것”을 강조한다.
구약은 슬픈 소식이지만, 신약은 기쁜 소식이다.
그러나 구약과 신약은 서로 불가분의 관계가 있으며, 분리되지 않는다. 즉 그 둘은 구별은 되지만, 서로 다른 것은 아니라는 것이 이해되어야 한다.
신약의 열매는 구약의 뿌리와 줄기가 없이는 맺을 수 없는 것이다.
신약은 구약속에 숨겨져 있고, 구약은 신약속에 제시되어져 있다. 다른 말로 바꾸자면 신약은 구약속에 포함되어있고 구약은 신약속에 설명되어 있다.
그러나 신약과 구약의 근본적인 차이점이 있다.
구약과 신약의 근본적인 차이는, 옛 언약은 이스라엘이라는 국가 안에서 구체화된 반면에 새 언약은 교회 안에서 구체화되고 있다는 점이다.
옛 언약의 국가는 배타적이며 선택적이지만, 새 언약에서의 교회는 포괄적이며 개방적이다.
죤 캘빈은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나는 기꺼이 이 두 성경의 차이점을 인정한다..... 그러나 이미 확립된 성경의 통일성을 넘어뜨릴 정도의 차이점이 있는 것은 아니다......이 모든 차이점은 실제 내용의 차이라기보다는 오히려 하나님의 경륜적 방법과 관련되는 것이다.”(기독교강요2, 11:1)
구약과 신약의 통일성에 대한 접근법은 모형론(typology), 즉 신약과 구약의 요소들의 상응성을 연구하는 것이다.
이러한 모형론은 상당히 주의를 요하는데, 그동안 알레고리적인 해석으로 가끔 악용되어지기도 하였던 것이 사실이기 때문이다.
결론적으로 구약과 신약의 관계에서 우리가 알아야만 할 가장 중요한 점은, 그리스도의 사역이 구약성경의 사실에 대한 부정이 아니라는 사실이며, 그리스도의 사역이 구약의 모든 사건들의 정점에 집약되어 위치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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