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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약의 선지자들의 예배관 송병현(천안대학교 기독신학대학원)

하나님아들 2020. 4. 29. 17:31

구약의 선지자들의 예배관  송병현(천안대학교 기독신학대학원)

 

 

 

결코 포기할 수 없는 그 무엇을 추구하며…
(구약의 선지자들의 예배관)



들어가는 말


우리 주변에는 아직도 선지자들에 대한 여러 가지 오해가 존재하고 있다. 이러한 오해들 중 가장 기본적인 것 중 하나는 이스라엘의 선지자들이 제사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했느냐 이다. 이들이 윤리와 사회정의에 메시지의 초점을 맞춘 것에 근거하여 선지자들은 모세를 통해 전수된 의식이나 예배형식에 별 관심이 없었거나 제사를 중심으로 형성되었던 이스라엘 종교의 본질을 도덕과 윤리를 중심으로 대처 내지는 개혁해 나갔던 반의식주의자들(anti-ritualist)로 알려져 오기도 하지만 이러한 주장은 선지자들의 메시지에 대한 제한된 이해에서 비롯된 오해에 불과하다. 선지자들은 진정한 제사를 통하여 여호와와 백성들이 교통할 수 있고, 주의 백성들이 형제애를 즐길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미래에 도래할 하나님의 나라는 예배의 회복을 바탕으로 세워질 것을 확신하고 예언했다. 그러므로 그들이 문제 삼았던 것은 변태적인 종교행위와 본질과 목적을 상실해버린 형태의 제사들이었다. 이 글은 이스라엘의 예배가 왜 선지자들의 비난을 받았는가와 그들의 진정한 예배의 회복에 대한 기대를 살펴본 후 이러한 사실들이 오늘날 교회에게는 어떠한 도전을 주어야 하는가를 생각해보고자 한다.

선지자들의 예배에 대한 문제 제기


선지자들은 이스라엘이 여호와께 드렸던 제사에 대하여 많은 논평과 평가를 남겼다. 어떤 것은 긍정적이기도 하지만, 대체적으로 부정적이고 비판적이다(cf. 사1:10-15; 66:1-3; 호6:6; 암5:21-23). 선지자들의 사고에 의하면 이스라엘의 예배가 결코 하나님을 만족하게 할 수는 없었던 모습으로 변질되었던 것이다. 특히 이사야와 아모스는 그 누구보다도 강한 문제의식을 가지고 이스라엘이 드렸던 예배를 논했던 사람들이다.
이사야서에서 백성들이 드리는 예배와 제물에 대한 하나님의 거부감이 가장 강력하게 표현된 곳이 1:10-15이다. 선지자는 자신들은 여호와의 율법의 요구에 따라 적절한 예배와 제물을 제 때 드리고 있다고 자부하던 백성들의 안일한 생각에 핵폭탄을 던졌다. 나름대로 여호와의 율법을 잘 준수하고 살아가고 있음을 자부하던 이스라엘 사람들이 남녀노소, 귀천을 막론하고 한결같이 “율법의 ‘율’자도 모른다”는 것이었다(1:10): “너희 소돔의 관원들아 여호와의 말씀(히, 다바르)을 들을지어다 너희 고모라의 백성아 우리 하나님의 법(히, 토라)에 귀를 기울일지어다.” 이어지는 말씀(11-15절)을 통해 선지자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예배와 신앙생활을 총체적으로 거부하셨다는 사실을 세 가지 예를 들어 설명하고 있다.
첫째,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가져온 온갖 제물들을 거부하셨다. 구약에서 이 구절들 같이 각종 다양한 제물들에 대한 언급으로 가득 찬 곳도 없다. 다음 문구들을 생각해 보라: 많은 제물(11절); 숫양의 번제물(11절); 살진 짐승의 기름기(11절); 수송아지의 피(11절), 어린 양의 피(11절); 숫염소의 피(11절); 제물(13절); 분향(13절). 하나님은 이 모든 것을 거부하셨다. 오늘날의 용어로 하면 여러 가지 헌금과 헌물을 의미한다. 비록 성전에서 일하는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이 하나님을 대신해서 백성들의 제물을 받았을지언정 하나님께는 이들의 제물을 전혀 받지 않으셨던 것이다. 하나님을 즐겁고 기쁘게 해야 할 선물들이 오히려 그분에게 큰 짐이 되었기 때문이다.
둘째,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모든 형태의 예배를 거부하셨다. 다음 문구들을 생각해보라: 나의 앞에 보이러 오는 것(11절); 초하루(13, 14절); 안식일(13절); 대회로 모이는 것(13절); 거룩한 집회(13절); 정한 절기들(14절). 이스라엘 사람들이 생각할 수 있는 모든 종교적 모임들을 나열하고 있다. 오늘날의 교회생활에서 평행을 찾는다면 각종 예배, 부흥회, 사경회 등이 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이처럼 이스라엘이 그분의 이름으로 그분을 위하여 가졌던 모임에 대하여 염증을 느끼고 계셨던 것이다.
셋째, 하나님께서는 이들이 예배를 통해 드리는 모든 기도에 귀를 기울이시기를 거부하셨다. 기도는 모든 종교의 가장 순수한 행위라는 점을 감안하면 이 일은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가장 큰 충격을 안겨주었을 것이다. 다음 문구들을 생각해보라: 팔을 벌리고 기도하는 것(15절); 많은 기도를 하는 것(15절). 오늘날의 신앙생활에 비교한다면 각종 기도모임과 묵상생활(QT) 등이 된다. 선지자 이사야는 이처럼 이스라엘의 예배를 전적으로 비판적인 시각에서 바라보는 듯하다.
이사야는 이스라엘이 성전에서 드리는 예배에 대하여 불편한 심기를 토로했다면, 아모스는 아예 백성들이 성지(聖地)로 예배 드리러 가는 것 자체를 막는 듯하다. 그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이 여호와께 예배 드리기 위하여 끊임없이 찾았던 성지 벧엘, 길갈, 브엘세바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선언했다(5:5): “벧엘을 찾지 말며 길갈로 들어가지 말며 브엘세바로도 나아가지 말라.” 아울러 선지자는 이미 비아냥거리는 투로 이 성지들에서 드려지는 예배와 제물들이 모든 의미를 상실했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 앞에 죄를 범하는 행위라고 경고했다(4:4-5): “너희는 벧엘에 가서 범죄하며 길갈에 가서 죄를 더하며 아침마다 너희 희생을, 삼일 마다 너희 십일조를 드리며 누룩 넣은 것을 불살라 수은제로 드리며 낙헌제를 소리내어 광포하려무나.” 많은 학자들이 이 아모스 텍스트를 구약 안에서 발견되는 제사와 예배에 대한 가장 강력한 비난으로 간주한다. 여호와를 기념하고 찬양하기 위하여 드리는 예배라도 얼마나 잘못될 수 있는 가를 지적해주는 말씀이기도 하다. 어떻게 생각하면 선지자의 발언은 마치 신성모독(blasphemy)처럼 들린다. 현대적인 감각을 더한다면, “교회에 가서 죄 짓고, 기도원에 가서 반역하라! 새벽기도 때마다 헌금 드리고, 매 예배 때마다 십일조를 드려보아라. 또한 드리는 감사 헌금에 대하여 남들에게 떠벌려라. 하나님께서 잘 해주실 것이다!”
이 본문이 이스라엘의 역사와 선지자들의 가르침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가는 폴(Shalom Paul)에 의하여 적절하게 설명된다: “토라의 문헌과 고전적 예언자들 이전의 예언자들의 글들 속에 표현된 옛 전승들, 다시 말해서 한 국가의 궁극적 운명을 결정짓는 근본적 범죄는 우상숭배의 죄라고 강조한 옛 전승들과는 달리 고전적 예언자들의 등장과 함께 한 국가의 운명을 결정짓는 새로운 기준이 나타나게 되었다. 새로운 기준이란 ‘도덕적 청렴’(moral rectitude)이었다. 이스라엘의 장래와 운명은 본질적으로 그들의 근본적인 도덕적 자세에 의해 결정되었다. 부도덕과 비윤리적 행위들은 궁극적으로 한 국가를 파멸로 인도할 것이다.”
이스라엘의 예배에 대한 선지자들의 문제제기는 결코 초기시대 선지자들에만 국한되어 있는 것은 아니었다. 400년대 쯤으로 추정되는 포로후기 시대에 예루살렘에서 사역했던 말라기 역시 선배 선지자 아모스와 같은 심정으로 아모스만큼 강도 높은 비난을 토하고 있다: “그런 식으로 예배를 드리려면 차라리 성전 문을 닫아버려라!”(1:10). 선지자들은 이스라엘의 예배에 대하여 끊임 없이 문제의식을 가졌었고 자신들의 우려를 지속적으로 표현했던 것이다.
그렇다면 선지자들은 이스라엘 종교의 중심이었던 제사와 예식을 도덕과 정의실행으로 대처했단 말인가? 즉, 이들이 이스라엘 종교에 새로운 파라다임을 지시한 것으로 간주해야 하는가? 이렇게 속단하기 전에 선지자들의 메시지를 다른 각도에서 살펴볼 필요가 있다.

선지자들의 미래론과 예배


선지자들이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에 대하여 강력한 불만과 비난을 표시했다 해서 예배의 중요성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그들은 순수하고 진정한 예배의 중요성을 인정하고 갈망했다. 선지자들의 이러한 예배에 대한 이해가 그들의 글을 통해 다양하게 전개되고 있지만, 무엇보다도 미래에 회복될 공동체의 모습에 대한 그들의 예언에서 역력하게 드러난다.
이사야는 자신의 책을 통해 이스라엘과 인류의 미래에 대한 여호와의 거대한 비전(grand vision)을 전개해 나가고 있다(2:1-4; 11:1-9; 12:1-19:25; 등등). 이 비전은 이스라엘의 회복뿐만 아니라 온 인류가 여호와를 예배하는 것을 전제하고 있다: “그 날에 애굽 땅 중앙에는 여호와를 위하여 재난이 있겠고… 그들[애굽인들]이 압박하는 자들로 말미암아 여호와께 부르짖겠고 여호와께서는 그들에게 한 구원자이자 보호자를 보내사 그들을 건지실 것임이라… 그 날에 애굽이 여호와를 알고 제물과 예물을 그에게 드리고 경배할 것이요”(19:19-21). 선지자의 비전을 절정적이고 최종적으로 제시하고 있는 66장 역시 여러 가지 예배와 연관된 언어와 이미지를 사용하며 미래를 묘사하고 있는데(특히 18-23절), 이 거대한 비전을 결론지으며 이렇게 선언하고 있다: “여호와가 말하노라 매월 초하루와 매 안식일에 모든 혈육이 내 앞에 나아와 경배하리라”(23절). 이사야는 자신의 거대한 비전의 핵심을 열방과 이스라엘이 하나되어 여호와께 예배드리는 것으로 묘사하고 있는 것이다.
선지자들 중 그 누구보다도 민족주의적인 성향을 띤 자로 간주되는 눈물의 선지자 예레미야는 이스라엘의 일명 “위로의 책”(30-33장을 일컫는 애칭)을 통하여 이스라엘의 미래에 대한 비전을 제시하고 있다. 비록 바벨론의 손에 의하여 멸망하게 될 것은 기존 사실이지만, 훗날 유다는 한 국가로서 발돋음 할 뿐만 아니라 예전의 영광을 다시 누리며 확고히 설 것임이 그의 확신이었다. 이러한 사실을 확인하는 과정에서 예레미야는 이스라엘의 회복된 미래를 두 제도의 영구적 지속으로 묘사하고 있다: “이스라엘 집의 왕위에 앉을 사람이 다윗에게 영원히 끊어지지 아니할 것이며 내 앞에서 번제를 드리며 소제를 사르며 다른 제사를 항상 드릴 레위 사람 제사상들도 끊어지지 아니하리라”(33:17-18). 이스라엘의 회복을 예언하고 있는 예레미야 역시 민족의 회복을 예배의 회복과 지속으로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그 역시 여호와께 드려지는 지속적인 예배와 무관한 이스라엘의 회복은 상상할 수도 없었던 것이다.
예배의 회복에 대하여 가장 확고하고 상세한 비전을 제시한 선지자는 에스겔이다. 그는 자신의 책의 ¼을 성전과 제사에 필요한 각종 도구들의 복원과 예배 회복에 대한 예언에 할애하고 있다(40-48장). 선지자는 이 섹션에서 미래에 건축될 새 성전의 구조와 모습을 구체적으로 설명하는가 하면, 어떤 절기들과 예식들이 다시 지켜지는 가를 묘사하기도 하고, 다양한 예배의 회복을 언급하기도 한다. 그가 제시하고 있는 이스라엘의 회복에 대한 비전에 있어서 제사와 예식의 회복은 매우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것이다. 아마도 선지자가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백성으로 선별되었던 근본적인 목적이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를 진정으로 사랑하고 예배하는 데 있음을 인식한 것에서 비롯되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미래관에 있어서 에스겔의 절대적인 관심사는 바로 제사와 예배의 회복이다. 그의 논리에 의하면 비록 이스라엘 민족이 회복된다 해도 만일 그들의 예배가 회복되지 않는다면 이스라엘은 또 하나의 회복을 기다릴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처럼 선지자들은 한결같이 이스라엘과 인류의 복된 미래를 여호와께 드리는 예배와 연결하고 있다. 이점을 감안할 때, 이스라엘의 선지자들이 예배의 중요성을 무시하거나 이스라엘 종교의 중심을 예식에서 윤리로 대처했다는 주장은 별로 설득력이 없어 보인다. 다만 그들은 자신들의 시대에 성행했던 제사와 예배가 본래의 모습과 의미를 상실한 것에 문제를 제기했던 것이다.
선지자들이 이스라엘의 예배가 본질을 잃어가는 것을 안타까워하며 진정한 예배의 회복에 많은 관심을 가졌던 것은 그들이 바벨론 포로생활을 어떻게 묘사하고 있는가에서도 드러난다. 유다가 포로가 되어 바벨론으로 끌려간 일은 무엇보다도 하나님을 순종하지 않은 것에서 비롯된 죄 값이었다. 그러나 바벨론 포로생활은 잘못 드려지는 예배의 종식을 의미하기도 했다. 선지자들은 엉터리 예배는 차라리 드리지 않음만도 못하다는 주장을 했다. 여호와께 예배를 드리기 위하여 성소로 향하는 성도들을 향해 아모스 선지자는 벧엘, 길갈, 브엘세바 등 이들이 찾는 예배처소를 버리고 여호와를 찾는 것만이 살 길이라고 외쳤다(암5:5-6). 이 처소들에서 드리는 예배는 오히려 그들의 죄를 가중시킬 뿐이었다(암4:4).
이스라엘의 멸망이 바로 몇 해 후의 일로 다가와 있던 시대에 사역하던 예레미야는 평소에 어떻게 살아가든 상관없이 정한 절기에 성전을 찾아와 제물을 바치고 예배를 드리면 모든 것이 형통할 것이라는 생각에 젖어 있었던 백성들에게 큰 충격을 안겨주는 선언을 했다. 마치 성전이 그들의 부조리와 죄를 덮고 액운이나 때우는 부적정도로 생각하고 있던 자들에게 “하나님께서 이곳에서 드려지는 예배에 염증을 느끼셨으므로 머지않아 이곳을 옛적 실로의 꼴로 만드실 것이다”라고 경고했던 것이다(렘7장; 26장; cf. 32장).
포로 후기시대를 살았던 말라기 역시 비슷한 메시지를 외쳤다. 말라기 선지자는 외식과 왜곡으로 얼룩진 예배를 드리는 자들에게 “너희가 내 제단 위에 헛되이 불사르지 못하게 하기 위하여 너희 중에 성전 문을 닫을 자가 있었으면 좋겠도다” 라는 하나님의 솔직한 심정을 토로했다(말1:10). 선지자들의 진정한 예배에 대한 열망은 이스라엘의 멸망의 예배에 관하여 한 의미를 부여했다. 바로 잘못 드려지는 예배의 종식이라는 점이었다. 이러한 차원에서 선지자들은 바벨론 포로생활을 포함한 민족적 위기와 쇠퇴를 예배의 순수성을 회복하는 첫 단계로 간주할 수 있었던 것이다.
선지자 다니엘의 세상종말에 대한 예언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요소로 부각되어 있는 “70주 예언”(단9:24-27) 역시 예배의 부흥과 황폐 등을 중심으로 전개되어 있다.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를 하나의 적그리스도의 모형으로 삼아 말세에 있을 일을 예고하고 있는 11장 역시 그가 어떻게 주의 백성들이 여호와께 드리는 예배를 파괴하고 그들에게 우상숭배를 강요할 것인가를 골자로 하고 있다(특히 단11:31-39). 다니엘서의 종말론에서도 예배의 비중이 이처럼 크다. 선지자들의 종말론과 미래관은 그들의 예배관과 밀접한 연관이 있다는 주장이 결코 과언이 아닌 것이다.
지금까지 살펴본 것처럼 선지자들이 제시하는 미래 공동체에 대한 예언들이 한결같이 회복된 참 예배를 중심으로 형성되고 있다면, 그들은 자신들의 가르침이 예배의 중요성을 인정하지 않거나 약화시킨다고는 생각하지 않았을 것이다. 오히려 그들은 자신들의 외침이 부패와 부조리로 얼룩진 제사와 예배에 대하여 환멸을 느끼던 주의 백성들에게 대안을 제시함으로써 소망을 선사하는 것으로 여겼을 것이다. 그렇다면 자신의 시대에 드려졌던 제사와 예배의 모습을 강력하게 비난했던 선지자들이 갈망했던 참 예배는 어떤 것이었을까? 다음 섹션에서 살펴보자.

선지자들이 추구했던 예배의 본질


선지자들이 꿈꾸었던 진정한 예배는 어떤 것이었을까? 예루살렘 성전에서 드려졌던 예배는 무엇이 문제였단 말인가? 물론 모든 선지자들이 이스라엘의 예배의 모든 것을 비판하거나 거부한 것은 아니다. 그들의 글에 때로는 “달리는 말에 채찍을 가하는” 성향도 역력하다. 그러나 대체적으로 그들은 이스라엘의 예배에 대하여 심각한 문제와 위기의식을 가지고 있었다. 그 당시 성전에서 드려졌던 예배의 문제점들을 조명해봄으로써 선지자들이 갈망했던 예배를 생각해보자.
선지자들이 자신들의 저서에서 윤리적인 이슈를 문제삼은 가장 근본적인 이유는 예배가 백성들의 경건하고 의로운 삶의 연장이 아니라 그들의 부도덕한 행위를 덮어주고 액운이나 때워주는 수단으로 간주된 것이었다. 모세를 통해 선포된 율법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에 대한 규정과 격식만을 논한 것이 아니라 세상에서 하나의 공동체를 형성하며 어떻게 서로를 대하고 질서를 유지할 것인가에 대한 규례와 원칙들을 함께 제시했다. 이스라엘은 사회적인 집단이기 전에 종교적인 목표와 의미를 지니고 형성된 공동체였다는 점을 감안할 때, 사회와 질서에 대한 규례들은 이 공동체에 속한 모든 사람들이 철저히 준수해야 했다. 한 백성으로서 함께 모여 여호와께 격식과 규례에 따라 제사를 드리는 것 만큼이나 일상생활에서 한 공동체로서 서로를 공의와 공평으로 대하는 것도 중요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곧 서로에 대한 도덕적, 공동체적 책임을 등한시하거나 회피하기 시작했다. 반면에 예식과 제사에 관한 율법만을 중요시 여기는 성향이 예배를 드리던 성소들을 중심으로 온 나라에 팽배해졌고 급기야는 예배와 제사가 율법의 모든 것처럼 여겨지기 시작했다. 우리에게 책을 남긴 선지자들 중 처음이었던 아모스의 시대(주전760년대)에 이르러서는 아무런 거리낌 없이 남에게 돈을 빌려주며 담보로 잡아두었던 옷을 제단 옆에 펼쳐놓고 그 위에 누워 서민들로부터 벌금과 세금으로 거두어들인 포도주를 즐기기에 이르렀다(암2:8). 이스라엘은 거리낌 없이 신앙과 삶을 이분화했던 것이다.
삶에서 신앙을 괴리시키는 행위는 모세 율법의 목적과 의도를 망각하는 것이었고 이스라엘 공동체의 본질을 위협하는 요소였다. 그러므로 선지자들은 잠잠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들은 공동체에 속한 가난하고 불쌍한 자들에 대한 배려와 긍휼에 인색하고 오히려 세상에서 가장 연약한 자들에게 착취한 것들을 여호와께 드릴 제물로 둔갑시켜 성전에 들여놓았던 자들에게 하나님의 거룩한 진노를 쏟았다. 선지자들은 의롭고 경건한 삶이 뒷받침하지 않는 예배는 위선이요 가증함으로 간주했다. 그러므로 그들은 이들에게 차라리 예배를 드리지 말라고 권면했던 것이다. 그들은 예배는 삶의 연장이요 결정체여야 한다고 간주했기에 예배가 순수하고 정결하여 하나님께 열납되려면 드리는 자의 신실하고 의로운 삶이 함께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우리는 이미 이사야가 어떻게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예배의 3대요소들—제물, 예배, 기도—을 거부했는가를 살펴보았다(사1:10-15). 그는 백성들에게 다음과 같이 요구하고 있다: “”너희는 스스로 씻으며 스스로 깨끗케 하여 내 목전에서 너희 악업을 버리며 악행을 그치고 선생을 배우며 공의를 구하며 학대 받는 자를 도와주며 고아를 위하여 신원하며 과부를 위하여 변호하라”(사1:16-17). 예배나 제물, 심지어는 기도보다 더 중요한 것은 의를 추구하는 삶의 자세인 것이다. 아모스 역시 이렇게 외치고 있다: “너희는 악을 미워하고 선을 사랑하며 성문에서 공의를 세울지어다”(암5:15); “오직 공법을 물 같이, 정의를 하수 같이 흘릴지로다”(암5:24). 예배자가 하나님께 드리는 제물은 바로 그의 삶의 상징이 되어야 했던 것이다.
선지자들이 이스라엘의 제사에서 의식했던 또 하나의 문제는 형식과 절차가 예배의 본질과 의도를 대처해가는 것이었다. 예배의 본 목적은 평소에 경건하게 살려고 노력하는 자들이 그렇게 살 수 없는 자신의 한계를 시인하여 상한 마음을 이끌고 나아와 용서와 치유를 경험하고 이러한 은혜를 베푸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임재를 체험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세월이 지나면서 예배의 본 의도는 잊혀져 갔고 어떤 제물이 언제, 어디서, 어떤 예식에 따라 드려지는가가 사람들의 관심사가 되었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이스라엘의 모습에 대하여 “이 백성이 입으로는 나를 가까이하며 입술로는 나를 존경하나 그 마음은 내게서 멀리 떠났다”라고 탄식하실 수밖에 없었다(cf. 사29:13). 외형적인 것들이 내적인 것들을 대처해버린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결코 그 무엇으로도 대처할 수 없는 무형(無形)적인 것들의 자리를 유형(有形)적인 것들이 차지한 것이다. 물론 밖으로 드러나는 형식이 전혀 중요하지 않다고 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외형적인 것들이 내적인 것들을 대처하는 예배는 더 이상 예배가 추구하고자 하는 효과를 거둘 수는 없었다. 당연히 선지자들은 분노했다.
선지자들은 이처럼 외형적인 것에 치우치지 않고, 결코 그 무엇으로도 대처할 수 없는 것을 추구하는 예배를 갈망했다. 또한 경건한 삶의 연장선에서 일상생활에서 끊임없이 공평과 의를 추구하는 사람들이 드리는 제물로 가득 찬 제사를 요구했다. 선지자들이 인간의 연약함과 죄를 초월할 수 없는 본성을 인정하기를 거부하는 매정한 이상주의자들이었기에 고결하다 못해 심지어는 비 현실적인 예배를 강요했는가? 그들이 남긴 글들이 인간의 한계와 본능적인 문제들에 대한 깊은 이해를 반영하고 있는 점을 감안할 때 선지자들이 고지식한 원리론자들이어서 이러한 예배를 추구한 것이 아니었다. 아무리 좋은 세상에서 살더라도 더 좋은 세상을 꿈꾸었던 것이 그들의 본능이었던 것처럼 그들은 더 이상적이고, 더 순수한 예배를 끊임없이 갈망했다. 음악적인 용어로 말하자면 그들은 항상 세상사람들보다 한 옥타브 위의 노래를 불렀다. 그들은 결코 포기할 수 없는 것에 대한 열망을 그들의 예배관을 통하여 불태웠다.

현대교회에게 주는 의미


지금까지 살펴본 선지자들의 예배관을 염두에 두고 오늘날 한국교회의 예배에 적용할 수 있는 원리들을 생각해보자. 먼저 선지자들은 예배에 있어서 양보다는 질을 중요시 여겼던 점이다. 일부 교회에서 성도들에게 직분을 주면서 “공예배는 모두 참석하는 것”을 조건으로 제시하는 것을 본다. 기도원에서 “하루 한 시간 기도하는 성도는 평범한 성도, 두 시간 기도하는 성도는 우수한 성도, 세 시간 기도하는 성도는 초월한 성도” 등등의 표어를 본 적도 있다. 물론 교회 지도자들에게 있어서 예배 참석이나 기도생활에 있어서 타의 모범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고, 요구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그러나 자칫 잘못하면 본의 아니게 외적으로 드러나는 것, 즉 양으로 질을 대처하는 일을 범할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 만일 예배에 참석하는 것이 즐겁고 위로와 치유를 체험하고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는 시간이 아니라 피곤하고 짜증이 나지만 자신의 지위 때문에, 혹은 남의 시선 때문이라면 우리는 예배의 참 의미를 잊어버린 것이다. 선지자들은 이런 예배는 하나님께서 받으실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그분 앞에 범죄하는 것이라고 단언하고 있다. 예배 하나 하나는 온 마음으로 드려지는 온전한 것이 되어야 한다. 더불어 한국교회의 예배가 갱신되려면 양과 질의 균형이 심각하게 논의되어야 할 것이다.
선지자들은 예배가 경건한 삶의 연속이어야지 결코 그것을 대신할 수는 없다는 점을 상기시켰다. 제물은 평소에 신실하게 살려고 노력한 자들의 마음의 표현이지 신실하게 살지 못한 것에 대한 사죄나 대가가 아니라는 것이다. 오늘날 우리 주변에는 헌금을 마치 하나님의 진노를 달래는 제물 혹은 하나님의 요구대로 살지 못한 것에 대한 “벌금” 정도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러한 태도는 하나님을 마치 어린 아이들의 과자나 빼앗아 먹고 흡족해 하는 형편없는 어른 정도로 간주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결코 돈에 매수 당하는 분이 아니다. 헌금은 형편에 따라 많이 드릴 수도 있고 적게 드릴 수도 있다. 심지어는 드리지 못할 수도 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모든 성도들에게 요구하시는 진정한 “헌금”은 일상생활에서 그분의 말씀대로 살아가려는 의지와 노력이다. 이러한 의지와 노력이 동반되지 않은 예배는 위선이고 가증스러운 것이다. 그러므로 교회는 성도들에게 헌금보다는 신실하고 진실한 생활을 가르치고 강요해야 할 것이다.
선지자들은 예배를 드리는 행위가 결코 예배자의 의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점을 지적했다. 예배는 하나님과 예배자의 개인 관계이자 하나님과 공동체의 교제이다. 개인 관계적인 차원에서 그 누가 하나님 앞에 의롭다고 하겠는가! 그러므로 예배의 필수 요건은 자신의 죄를 의식하는 무기력함과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지 못해 비통해져 있는 상한 심령이다. 함께 모여서 드리는 공동체적 예배에서도 똑 같은 마음자세가 요구된다. 그러므로 공동체의 예배에서도 그 누구도 하나님 앞에 당당한 사람은 없을 것이다. 다만 공동체가 예배드릴 때에 본인들도 의식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각 개인의 지위와 헌신정도에 따라 함께 예배 드리는 자들 앞에서 당당해하고 떳떳해하는 자들을 목격하고는 한다. 이들에게는 얼마나 자주 예배에 참석하고 예배드릴 때마다 얼마나 많이 헌금하는 가가 사람들 앞에서의 의가 되는 것이다. 이처럼 자신이 하나님께 드린 제물을 헤아리고, 드린 예배의 횟수를 남들 앞에 드러내고자 하는 자들을 향하여 선지자들은 예배가 하나님을 경배하고 만나는 체험이 되어야지 결코 예배자의 의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성도들의 신앙을 판가름할 때 예배 참석의 빈도수와 헌금 액수를 전적으로 배제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것들을 초월해서 그들의 영성과 지도력을 더 주의 깊게 보아야 할 것이다.
선지자들은 성도들이 모든 개인적인 필요와 고민을 내려놓고 예배에 참여하기를 권면했다. 예배가 우리의 필요나 채우는 도구로 이용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예배를 통해 당면하고 있는 문제에 대한 실마리를 찾고 하나님의 치유를 경험하는 것은 매우 바람직하고 기대할만한 일이다. 그러나 이런 것이 예배의 목적이 되어서는 안 된다. 예배를 통해 우리는 먼저 하나님과 그의 보좌를 바라보아야 한다. 그리고 그분에게 모든 시선을 집중해야 한다. 한 예로 오늘날 한국교회에서 성행하고 있는 찬양예배를 생각해보자. 찬양예배를 통하여 많은 사람들이 치유를 경험하고 변화를 체험한다. 당연한 것이다. 말로는 형용할 수도, 어루만질 수도 없는 인간의 깊은 부분을 음악은 만질 수 있기에 하나님의 말씀이 곡조화 되면 그만큼 강력한 능력으로 임하여 상한 마음과 찌든 영혼을 치유할 수 있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예배에 참석하고 찬양을 드리는 목적이 하나님께 경배와 감사의 제단을 쌓는 것에 있지 않고 개인적인 치유와 위로를 체험하는 것에 있다면 문제가 있는 것이다. 치유와 위로는 부수입적인 것이지 본 목적이 될 수 없다. 예배의 본 목적은 하나님을 경배하고 찬양하는 것이다. 즉, 아무런 조건 없이 하나님의 임재와 그분만을 즐기는 것이 예배에 임하는 자들의 자세가 되어야 한다. 이런 자세로 임하면 첫째 우리의 예배가 그만큼 순수해 질 것이요; 둘째 하나님께서 치유해 주시면 감격하겠지만, 치유하시지 않아도 감사할 수 있는 것이다. 오늘날 많은 성도들이 “하나님께 실망했다”는 자세를 취하는 것은 이처럼 하나님을 우리의 필요와 간구로 얽맨 결과가 아닌가 싶다. 예배에서만이라도 하나님으로 하여금 하나님이실 수 있도록 우리의 모든 이권에서 자유 하시도록 해야 한다.
위의 내용과 연결하여 우리는 또한 형식에 얽매이는 예배의 위험을 생각해보아야 할 것이다. 누구든지 목회자가 새 임지에서 성급하게 예배 순서나 틀을 바꾸려 하다가 교회에서 쫓겨났다는 이야기를 한 번쯤은 들어보았을 것이다. 물론 내면적으로는 목회자와 교회 간에 여러 가지 갈등이 있다가 예배 순서나 틀을 바꾼 것이 동기부여를 한 것뿐일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가지 예배 방식만이 올바른 것이라고 주장하는 자체가 매우 고지식하고 안타까운 일이라는 생각을 떨구어버리기는 어렵다. 고지식함을 초월해서 이러한 태도의 가장 위험한 요소는 어떤 것인가? 무엇보다도 예배가 추구하고자 하는 내적인 것—결코 그 무엇으로도 대처할 수 없는 그것—을 외형적인 것이 대처하는 결과를 초래하는 일이다. 예배의 순서와 틀에서 만족감을 찾는다면 예배드리는 것 자체가 예배의 목적이 되는 위험을 안고 있다. 그러나 예배의 틀과 순서는 예배의 본 목적—하나님의 임재를 체험하고 그분과 교재하는 것—을 이루는 도구에 불과하다. 또한 선지자들은 백성들이 예배에 “익숙해 지는 것”에 강력한 문제제기를 했던 사람들이다. 오늘날의 언어로 말하자면 특정한 곳에서만 드리는 예배가 편안하고, 일정한 방식으로만 진행되어야 예배드린 것 같은 느낌이 드는 것은 일종의 위험 신호라 할 수 있는 것이다. 오늘날 일부 교회들에서 진행되어지고 있는 예배당의 사치화와 구약적인 개념에서의 제단화, 그리고 성도들에게 강요되고 있는 교회에서 드리는 예배중심의 성도생활 등에 대하여 선지자들은 안타까움의 한숨을 내몰아 쉴 수밖에 없다. 내가 드리는 예배가 중요하고 소중한 만큼 다른 사람들의 예배방식도 존중할 줄 알아야 하며, 어떠한 경우에도 한 스타일에 안주하고 익숙해지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형식과 순서로 예배의 질을 판가름하는 것은 매우 안타까운 관행인 것이다.

나가는 말


지금까지 살펴본 것처럼 선지자들은 결코 이스라엘의 예배를 무시하거나 예식을 윤리로 대처하고자 했던 사람들이 아니다. 그들은 오히려 형식주의에 물들어있던 이스라엘의 예배에 갱신을 촉구했던 하나님의 세밀한 음성이었던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그들의 영적 예배의 회복을 중심으로 형성된 미래관에서 역력히 드러난다. 그들은 형식을 무시하지는 않지만, 그것에 치우치지도 않는 예배, 짐승의 살코기가 아닌 성도들의 상한 심령이 제물로 드려지는 예배, 자유로운 마음으로 하나님께 아무 것도 바라지 않고 그분만의 임재를 갈망하고 즐기는 예배, 예배를 드리는 것이 드리는 자의 의가 아닌 예배를 갈망했다. 그렇다면 우리는 과연 어떻게 해야 이러한 예배를 드릴 수 있단 말인가? 요엘은 옷을 찢지 말고 마음을 찢어야 이런 예배가 가능하다고 선포하고 있으며(욜2:13), 이사야는 오직 마음이 가난하고 심령에 통회하며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하여 떠는 자라야만이 이런 예배를 드릴 수 있다고 주장한다(사66: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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