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福)과 축복(祝福)의 바른 이해
- 신 광 철 목사
오늘날 신자들이 가장 듣기 좋아하고 사용하기 좋아하는 말 중에는 축복()이라는 단어가 있다.
하지만 그 축복이란 단어가 너무나 오용되고 있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전혀 의식하지 못하는 것 같으며, 어떤 면에서는
정말 하나님이 몹시 듣기 거북해 하실 것으로 생각된다.
구약 원어성경(히브리어)에 보면 바라크()라는 동사가 나오는데 영어로 말하면 "bless"이다.
이 단어에는 세가지 중요한 의미를 동시에 가지고 있어서 그 문맥의 내용을 알지 못하고 번역하면 오역하기 쉬운 단어이다.
그리고 헬라어에도 율로기아()라는 단어가 다양한 의미로 쓰여지고 있어서 오역하기 쉽다.
그러나 한국의 믿음의 선배들은 그 단어들을 지혜롭게 잘 구별하여 성경을 번역하였으므로 한글판 성경은 바르게 표현하고 있다.
그런데 1960년대 초에 한국에 기독교 영문서적의 번역물이 홍수처럼 쏟아져 나오기 시작하면서 신학적 식별이 없는 번역자들
(e.g. 영문과 아르바이트 학생 등)이 "bless"를 모두 "축복"으로 번역해버리므로 문제가 생기기 시작하였다.
그 영향으로 많은 신자들이 "복"과 "축복"의 의미를 분간하지 못하고 편리한 대로 아무데나 "축복"이라는 단어로 통일하여
사용하기 시작하였다. 바르게 번역된 성경을 읽으면서도 생활 속에서는 그 의미를 왜곡하여 사용하고 있다면 우리는
그러한 점들을 하나씩 개혁해 나가야 할 것이다.
1. 세 가지 다른 뜻으로 사용되는 "Bless"
히브리어의 "바라크", 헬라어의 "율로기아", 영어의"Bless"는 그 용어가 아래와 같이 세 가지로
사용되어질 수 있어서 우리를 혼란스럽게 한다.
A. Bless = 하나님(God)이 복을 내리신다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어(bless) 가라사대 . . . ." (창1:22)
“. . .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 . . 범사에 복을 내리시리라(bless)" (신23:20)
“. . . 여호와께서 . . . 그 모든 소유에 복을 내리셨더라(bless)" (대상13:14)
“자기 백성에게 평강의 복을 주시리로다(bless)" (시29:11)
“. . . 그러나 오늘부터는 내가 너희에게 복을 주리라(bless)" (학2:19)
B. Bless = 하나님(God)에게 복을 빈다 = 축복()
“그가(멜기세덱이) 아브람에게 축복(bless)하여 가로되 . . ." (창14:19)
“. . . 너희는 이스라엘 자손을 위하여 이렇게 축복(bless)하여 이르되" (민6:23)
“. . . 모세가 죽기 전에 이스라엘 자손을 위하여 축복(bless)함이 이러 . . ." (신33:1)
“여호수아가 여분네의 아들 갈렙을 위하여 축복(bless)하고" (수14:13)
“. . . 자원하는 백성들이 위하여 복을 빌었느니라(bless)" = 축복()하니라 (느11:2)
C. Bless = 하나님(God)을 찬미한다
“. . . 여호와께서 옥토를 주셨음을 인하여 그를 찬송하리라(bless)" (신8:10)
“. . . 이스라엘 자손이 하나님을 찬송하고(bless) . . . " (수22:33))
“다윗이 온 회중 앞에서 여호와를 송축하여(bless) 가로되 . . . " (대상29:10)
“나를 훈계하신 여호와를 송축할지라(bless)" (시16:7)
“내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라(bless) . . . 그 성호를 송축하라(bless)" (시103:1)
2. 복과 축복이 잘못 사용되는 실예
만일 우리가 하나님을 향하여 "하나님이여 우리를 축복하소서!"라고 기도한다면, 그 의미는?
축복()이라는 말 자체가 "신(God)에게 복을 빈다"는 뜻이다. 즉 어떤 사람이 다른 사람의 행복을 위해서 복을 빈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만일 하나님께 기도할 때 "하나님이여 축복하여 주옵소서!"라고 한다면, 이것은 "하나님께서
하나님 보다 더 위대한 어떤 절대자에게 복을 빌어서 나에게 주옵소서!"라는 의미가 된다.
이것은 극단적으로 말하자면 절대자이신 하나님을 모독하는 표현이 될 수가 있는 것이다.
이 세상에 우리가 믿는 창조주 하나님 보다 더 위대하신 분은 존재하지 않는다(신4:35, 39, 40).
창조주 하나님이 복의 근원이 되셔서 직접 우리에게 복을 내려주신다(창49:25).
그러므로 우리가 기도할 때에는 "하나님이여 복을 내려 주옵소서!"라고 해야 바른 기도가 된다.
또 "하나님의 축복"이라고 말하지 말고, "하나님의 복"이라고 해야 하며, "하나님이 축복하신다"가 아니라 "하나님이 복을
내리신다"라고 해야 한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복을 빌어서 우리에게 주시는 분이 아니시기 때문이다.
우리 한글판 성경은 원어의 바라크()나 율로기아()의 문맥상 의미를 대부분 잘 구분하여 번역해 놓았다.
우리는 우리 신앙의 선배들의 바른 성경관으로 돌아가야 한다. 마지막 때에 사탄은 하나님의 말씀을 왜곡하여 여러가지
면으로 우리의 영혼을 혼란 가운데로 몰아갈 것이다. 왜냐하면 인간을 에덴 동산에서 타락시킨 사탄의 최초 수단이
하나님의 말씀을 왜곡하는 것이었던 것처럼 마지막 때에 교회와 성도를 무너뜨리는 최후의 수단도 하나님의 말씀을
왜곡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성경은 요한계시록 22:18-19의 경고로 끝난다.
3. 성경에 기록된 복과 축복의 분명한 구별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일러 가라사대 아론과 그 아들들에게 고하여 이르기를 너희는 이스라엘 자손을 위하여 이렇게 축
복하여(bless) 이르되 . . . 그들은 이같이 내 이름으로 이스라엘 자손에게 축복할지니(bless) 내가 그들에게 복을 주리라
(bless)" (민 6:22-27)
“그가 아브람에게 축복하여(bless) 가로되 천지의 주재시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이여 아브람에게 복을 주옵소서
(bless)" (창14:19)
“. . . 네게 축복하는(bless) 자는 복을 받기를(bless) 원하노라 . . . 너 오기 전에 내가 다 먹고 그를 위하여 축복하였은즉
(bless) 그가 정녕 복을 받을(bless) 것이니라" (창27:29,33)
“여호와의 이름으로 오는 자가 복이 있음이여(bless) 우리가 여호와의 집에서 너희를 축복하였도다(bless)" (시118:26)
* 참 고
한글 개역 성경에서 잘못 번역된 부분:
민수기 23:20 = "내가 축복의 명을 받았으니 그가 하신 축복을 내가 돌이킬 수 없도다"
여기서 "그가 하신 축복"이란 구절을 "그가 내리신 복"이라고 바꾸어야 할 것이다. < Ref. Francis Brown (1979),
The New Hebrew and English
Lexicon, Hendrickson Pub. Inc., P.139, 2. God blesses men. abs. Nu23:20 >
히브리서 12:17 = "너희의 아는 바와 같이 저가 그후에 축복을 기업으로 받으려고"
여기서 "축복을 기업으로 받으려고"의 구절도 "복을 상속받으려고"라고 고쳐야 할 것이다.
로마서 15:29 = "내가 너희에게 나갈 때에 그리스도의 충만한 축복을 가지고 갈 줄을 아노라"
여기서도 "그리스도의 충만한 축복"을 "그리스도의 충만한 복"으로 수정해야 할 것이다.
복(福)과 축복(祝福)에 관한고찰
<들어가는 말>
빛과 소금, 소금과 빛
복과 축복, 축복과 복
이 두 말은 기독교 전문용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기독교에서 실제적으로 많이 쓰고 있는 말이다. 그런데 문제는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빛과 소금이나 복과 축복을 무심코 사용하고 있다는 것이다. 심지어는 목회자들도 예외는 아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인들은 보편적으로 목회자의 영향을 받아 무심코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빛과 소금, 소금과 빛은 단어적 의미도 중요하지만 순서적 의미도 단어적 의미만큼 중요함에도 불구하고 무심코 사용하고 있다.
“복과 축복”은 순서적 의미는 그리 중요하지 않지만 단어적 의미는 우리가 보편적으로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무심코 사용하고 있다.
“복과 축복”은 단어적 의미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더 이상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 저자가 신학교에서 제자들에게 가르치면서 자주 하는 말이다.
“복과 축복을 사용함에 있어서 단어적 의미만이 아니라 신론에까지 그 영향을 미치고 있는데, 우리가 무심코 사용하게 되면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하지 않는 신학적 문제를 갖게 된다.” 신론에까지 문제되는 심각한 데도 불구하고 무심코 사용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 말을 처음으로 들은 중국 신학도들에게는 충격적인 말이다. 그래서 즉각적인 반응이 여기저기서 터져 나온다. 학생들이 충격을 받은 일과 즉각적인 반응을 보인 것은 두 가지 이유 때문이다. 하나는 제자들이 원장(저자)의 강의 스타일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다른 하나는 “복과 축복”이 도대체 무슨 의미이기에, 그러나 누구나 이런 소리를 들으면 한 번쯤은 할 수 있는 의문점이기 때문에 즉각적인 반응을 보인 것이다.
이제 이글을 읽은 독자들의 반응은 어떨까?
첫 번째 반응은 저자의 대해 잘 모르기 때문에 충격적인 반응은 없겠지만 그러나 두 번째 반응은 혹시 하지 않을까? 조심스럽게 생각해 본다.
복과 축복은 아무렇게나 쓰는 말이 아니다. 그 의미를 제대로 모르고 사용해서는 더더욱
안 되는 말이다. 그래서 복과 축복에 관한 성경적인 고찰이 요구되는 것이다.
“복과 축복”
여러분은 어떻게 사용하고 있습니까?
무심코 사용하고 있습니까? 그 의미를 제대로 알고 사용하고 있습니까?
강의 전에 “복과 축복”에 관한 설문지는 어떻게 작성했습니까? “복과 축복”의 관한 열 두 개의 설문을 스스로 체크하면서 어떤 마음으로 했는가? 그리고 어떤 생각들이 머리를 스쳐갔는가? 정답을 요구하는 설문은 아니라고 하지만 체크하는데 결코 쉬운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더구나 “복과 축복”은 단어적 의미를 넘어서 신론에 까지 영향을 미친다는 이야기가 들었기 때문에 더욱 그러했을 것이다. “복과 축복”의 관한 설문지는 여러분이 그동안 “복과 축복”을 어떻게 사용하고 있는가를 가름해 줄 것이다.
그리고 “복과 축복”에 관한 설문지는 강의 다 마친(독자는 본서를 다 읽음)후에 다시 체크해 보면 본 강의의 의미, 설문지를 강조한 의미. “복과 축복”에 관해 그동안 사용했던 의미, 그동안 무심코 사용한 의미, “복과 축복”에 관한 진정한 의미에 대해 알게 될 것이다.
서론에서 마지막으로 강조하고 싶은 것은 성경에서 “복과 축복”이 사용될 때는 어떤 ‘공식’에 의해 사용되었다는 점이다. 여기 ‘공식’은 ‘원리(진리)’와 같다는 의미이다.
이제 본론으로 들어가기 전에 “복과 축복”의 관한 설문지를 먼저 체크해 보자
“복과 축복”에 관한 설문조사
순번 | 설문항목(주제) | 강의 전 체크 | 강의 후 체크 |
1 | 하나님은 우리를 위해 축복해 주신분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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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 하나님은 우리에게 복을 주신분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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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 하나님은 지금 여러분을 축복해 주시기를 원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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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 하나님은 복 받을 자에게 축복해 주신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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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 하나님은 남을 위해 진실로 축복하는 자에게는 복을 주신다. (창27:29,33, 민6:2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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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 사람은 사람에게 축복할 수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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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 복의 권한은 하나님에게만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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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 축복은 목회자나 평신도 누구나 할 수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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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 하나님 2012년에 우리 가정을 축복해 주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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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 여호와의 이름이 축복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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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 나는 그동안 복과 축복을 무심코 사용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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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 나는 그 의미를 알고 심중하게 사용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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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크 방법은 'O, X'로 한다. 자기 생각이 맞거나 그동안 사용해 왔으면 '√' 으로 아니면 ‘X’자로 표기하면 된다.)
<본 론>
“복과 축복”이라는 말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현재 가장 흔하게 쓰고 있는 말이다. 그런데이 말이 신론에까지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말을 어떻게 이해할 것이며, 그리고 그 진실은 어디까지일까? 이 의문점을 시작으로 “복과 축복”에 관한 고찰을 구체적으로 하려고 한다.
一. 복의 일반적인 이해 : 유형, 순서, 호칭
우리는 먼저 ‘복’에 관한 일반적인 이해를 해야 한다. 그렇지 않고서는 복에 대해 바르게 알 수가 없다. 복의 유형, 순서, 호칭 이 세 가지는 복을 이해하는데 가장 일반적인 요소이다. 그래서 저자는 이 세 가지 요소를 ‘복의 삼박자’라고 즐겨 사용하고 있다.
1. 복의 유형(종류)
복의 종류는 크게 두 가지이다. 하나는 영적(하늘)인 복이며, 다른 하나는 육적(세상)인 복이다.
1.1 육적인 복. 이 세상에서 누릴 복으로서 물질, 건강, 부모와 자녀, 명예로부터 얻는 복을 총체적으로 말한다. 육적인 복은 여기서 열거한 것 외에도 아주 다양하다. 육적인 복이라고 해서 영적인 복, 즉 신앙과 별개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물질적인 복이 영적인 복과 다르다고 해서 하나님과 전혀 연관이 없다는 말이 아니라는 것이다. 육적인 복도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복이 진정한 복이다. 육적인 복을 받기 위해서는 영적인 삶이 중요하다.
한국의 가나안 농군학교의 설립자이신 고 김용기 장로는 “누구나 복 받기 위해서는 복 받을 짓을 해야 복을 받을 수 있다.”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장로님께서 말씀하신 ‘복 받을 짓’이란 하나님의 말씀의 순종하면서 경건하고 선하게 사는 자기 삶을 말한다.
1.2 영적인 복. 이 세상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에서까지 받을 복을 말한 것으로서 신앙, 예배, 경건, 사랑, 죄의 문제 등 신앙생활로부터 얻는 복을 말한다. 영적인 복도 육적인 복만큼 매우 다양하다. 영적인 복 역시 육적인 복과 무관 한 것으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영(혼)은 육이라는 그릇 안에 있기 때문이다. 육적인 복을 받기 위해서는 영적인 삶이 중요하듯, 영적인 복을 받기 위해서도 육적인 삶이 중요하다.
영적인 복은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와 깊은 관계에서 오는 것이다. 성경에서 ‘의롭다’는 말과 ‘경건하다’는 말은 바로 하나님과 ‘바른 관계’와 ‘깊은 관계’를 뜻하는 말이다. 여기 ‘의롭다’는 말은 삶과 직접적으로 연관된 것으로써 하나님과 ‘바른 관계’에서만 이해될 수 있으며, ‘경건하다’는 말은 정직한 마음과 믿음을 대변한 것으로써 하나님과 ‘깊은 관계’를 나타내는 말이다.
육적인 복은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복이 가장 복된 복이며, 좋은 복이다. 아브라함의 복이 세상에서 근원이 될 수 있었던 것도 바로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약속 복이기 때문이다. 반면에 영적인 복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복이 가장 복된 복이며, 좋은 복이다. 예수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란 말은 하나님과 ‘바른 관계’와 ‘깊은 관계’에서 새롭게 형성되는 인격적인 삶이기 때문이다(고후5:17).
2. 복의 순서(중요성과 필요성)
다음은 복의 순서이다. 육적인 복이 우선인가? 영적인 복이 우선인가? 양자 중에 보편적으로 육적인 복보다 영적인 복을 우선적으로 말한다. 예수님도 육적인 것과 영적인 것 중에서 영적인 것을 우선시 하라고 말씀하셨다. (마6:33)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
예수님의 말씀은 영적인 것을 먼저 추구하면 육적인 것은 필요에 따라 자연적으로 주어진다는 것이다. 이것은 복 받는 원리로서 영적인 복을 먼저 받으면 육적인 복은 후에 덤으로 받는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돈을 달라면 즉석에 돈을 주며, 명에를 달라고 한다고 해서 높은 자리에 있는 사람을 밀쳐내고 그 자리를 준다는 말이 아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말씀하신 의도를 조금이라도 오해해서는 안 된다.
복의 순서는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다. 그러나 복의 순서에 있어서 복의 중요성과 필요성에 대해서는 잘 모를 수 있다. 복의 순서에는 복의 중요성과 필요성이 함께 내재(內在) 되어 있는 개념이다. 복의 순서에는 반드시 복의 중요성과 필요성이 대비(對比)되어 있어 직간접적으로 영향을 주고 있다.
그러므로 복의 필요성과 중요성을 바르게 이해하고 알아야 한다. 그리고 두 관계를 혼동해서는 안 되기 때문에 간략하게 핵심 부분만 다루려고 한다.
2.1 복의 중요성. 복의 중요성은 앞에서 언급한 것 같이 복의 순서와 직접적으로 연관되어 있다. 그래서 육적인 복보다 영적인 복이 더 중요하다는 것은 자명한 일일 것이다. 그러나 복의 순서적인 의미뿐만 아니라 중요성에 있어서도 육적인 복과 영적인 복은 그 의미가 다를 수밖에 없다.
육적인 복은 이 세상에서만 누릴 수 있는 것이기 때문에 지극히 제한적이다. 육적인 복은 죽음 이후에는 어떤 것도 누릴 수 없으며, 작은 것 하나라도 다음 세상(무덤)으로 가지고 갈 수 없다. 한국의 현대그룹의 창시자였던 고 정주영 회장은 작고했을 때, 현대 자동차에서 좋은 값비싼 차를 많이 생산하고 있었지만 자동차 한 대도 가지고 가지 못했다. 심지어는 살아계실 때 자기 고향인 북한이 못 살기 때문에 황소를 지원하면서, 황소 천 마라를 실고 갔던 트럭 500대를 모두 북한에 주고 왔다. 그러나 진작 자기가 죽었을 때는 좋은 차는 고사하고 당시 가장 싸고 흔한 자동차 한 대도 가지고 가지 못했다. 이것은 육적인 복은 이 세상에서만 누릴 수 있는 지극히 제한적이라는 것을 단면(斷面)적으로 보여준 좋은 실례이다.
반면에 영적인 복은 이 세상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까지 지속되기 때문에 영원하다. 그러므로 육적인 복보다 영적인 복이 우선이며 중요한 것이다. 사도 바울이 로마교회에 권면하고 있는 말씀을 한 번 상기해 보기 바란다(롬2:16). 여기 ‘그 날은’ 종말론적인 의미로서 새 예루살렘이 임하는 구원의 날이다. ‘그 날에’ 상급이 있다는 것을 잊지 말라는 당부의 말씀이다. 그리고 여기 ‘상’은 하늘에서 받을 상급으로서 영적인 복, 영원한 복을 말한다.
2.2 복의 필요성. 그러나 복의 필요성은 복의 순서 중에서 중요성과는 약간 다른 개념이다. 육적인 복과 영적인 복은 양자가 모두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그리고 양자의 복은 어느 정도 균형을 유지하면서 추구해야 한다. 만약에 육적인 복만 필요하여 추구한다면 이 세상에서는 물질적인 풍요로움은 누릴 수 있겠지만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반대 현상이 있게 될 것이다. 반면에 영적인 복만 추구한다면 이 세상에서 너무 힘들게 살아갈 것이다. 그래서 양자의 복은 균형이 필요로 하는 것이다.
세상에서 물질이 없다면 가정생활, 자녀교육, 신앙생활, 문화생활 등을 누리기는커녕 아무것도 할 수 없을 것이다. 그야말로 고통 그 자체일 것이다. 그래서 세상에는 물질과 땅(토지가)이 필요로 하고 있다.
그리고 경제적인 지표(指標)라고 할 수 있는 돈은 생활을 유지하는데 있어서 더 중요하게 필요한 것이다. 결코 가난하게 사는 것이 경건의 삶이 아니다. 앞 단락에서 언급하였듯이 진정한 경건은 하나님 앞에서 정직하고 순결하게 사는 삶이다. 하나님과 바른 관계로 사는 것이 진정한 경건의 삶이지 가난하게 사는 것이 경건이 아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은 물질의 복의 필요성을 바르게 인식해야 한다. 그리고 물질의 복, 세상적인 복을 받아야 한다. 구약의 족장들이 받은 물질의 복의 의미도 되새겨 보아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우주 만물을 창조하실 때 사람에게 영적인 복과 물질의 복을 함께 주셨다.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되었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주신 최고의 영적인 선물이며, 복이다. 왜냐하면 그 어떤 다른 피조물에게 없는 하나님의 형상을 사람에게만 주셨기 때문이다. 이 보다 큰 영적인 복은 없다. 인간의 구속의 문제도 이러한 영적인 복으로부터 시작한 것으로 볼 수 있다. 하나님의 죄인을 향한 구속의 섭리는 무조건적인 것이 아니라 사람에게 하나님의 형상을 부여했기 때문이다. 사람에게 하나님의 형상이 없다면 하나님은 사람을 구원할 계획을 세우지 않았을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인간의 구속은 영적인 복으로부터 출발하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은 창조를 마치시고 사람에게 “땅을 정복하며, 다스리며, 민족을 번성하여 가정을 이루라”고 말씀하셨다. 이것은 이 세상에서 누릴 육적인 복을 말한다. 여기 ‘다스리라’는 말씀은 크게 두 가지 의미를 지니고 있다.
하나는 통치 개념이다. 많은 피조물 중에 하나님의 형상을 지닌 인간이 가장 으뜸(머리)이라는 말이다. 우주 만물을 다스릴 수 있는 통치의 복은 이 세상에서는 가장 으뜸이 되는 복이며 가장 좋은 복이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통치는 야망적이며 현대적인 국가를 통치하는 정치적인 통치가 아니라 하나님의 피조물이라는 세계를 의식한 자연섭리적인 정직한 통치를 말한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피조물을 사람이 통치한다는 것은 복 중에 복이다.
다른 하나는 여기서 말하는 통치는 이 세상에서만 누릴 수 있는 제한성이 들어 있다. 앞에서 언급하였듯이 육적인 복은 이 세상이라는 제한성을 지니고 있다. 앞으로 더 좋은 통치의 복이 주어진다고 할지라도 육적인 복은 이 세상에서 끝이 난다.
그런데 문제는 일부 목회자들이지만 육적인 복을 너무 지나치게 강조하여 그리스도인들을 물질 만능주의자로 만들어 가고 있는 것은 가슴 아픈 현실이 아닐 수 없다. 우리가 이 세상에 살아가는 데는 물질이 중요하고 필요하지만 물질(돈)을 만능으로 취급해서 안 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현대는 돈이면 모든 것이 통하는 사회가 되어 버렸다. 이것은 돈 앞에 자유하면서 누리며 살아야 하는 인간이 돈의 노예가 되어버린 것이다. 이 역시 가슴 아픈 현실이 아닐 수 없다. 사도 바울은 이런 시대를 예언적으로 예고하고 있다.
“술을 즐기지 아니하며 구타하지 아니하며 오직 관용하며 다투지 아니하며 돈을 사랑치 아니하며” (딤전3:3)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사모하는 자들이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 (딤전6:10)
“사람들은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자긍하며 교만하며 훼방하며 부모를 거역하며 감사치 아니하며 거룩하지 아니하며.” (딤후3:2)
사도 바울은 이 세 구절에서 공통적으로 강조하고자 한 것은 사람들은 돈을 너무 사랑한다는 것이다. 여기 ‘사람들이 돈을 사랑한다.’는 것은 하나님보다 돈을 더 사랑하고 있다는 말이다. 그래서 “돈은 일만 악의 뿌리”라고 하면서 돈을 사랑하지 말 것을 거듭거듭 당부하고 있는 것이다.
히브리서 기자도 돈에 관하여 언급하고 있다. 사도 바울과 같은 개념으로 돈을 사랑하지 말 것을 권면하고 있다.
“돈을 사랑치 말고 있는 바를 족한 줄로 알라 그가 친히 말씀하시기를 내가 과연 너희를 버리지 아니하고 과연 너희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히13:5)
여기 “있는 바를 족한 줄로 알라.”는 말은 세 가지 큰 의미를 지니고 있다. 첫째는 부덕하게 돈을 소유하지 말 것을 권면하는 것이며, 둘째는 돈을 부도덕하게 사용하지 말 것을 권면한 것이며, 셋째는 하나님이 주신 것으로 만족하며 살라는 권면이다.
물질의 복으로 상징되는 돈은 이 세상에서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이지만, 부를 위해 축적해서는 안 되며, 돈이 모든 것을 해결해 줄 수 있다는 물질 만능주의에 빠져서는 더욱 안 되는 일이다. 그리고 돈을 너무 사랑하여 일만 악의 뿌리로 사용하는 어리석은 행동을 해서는 더더욱 안 되는 일이다.
물질의 복, 세상적인 복은 긍정적인 좋은 면과 부정적인 나쁜 면이 공존하고 있다. 그러므로 긍정적인 면은 말씀으로 지켜나가야 하며 부정적인 면은 기도로 물리쳐야 한다. 그래서 신앙생활은 말씀과 기도로 항상 유지해야 한다.
복의 필요성은 중요성과는 사뭇 다르다고 할 수 있으며, 양자는 서로 균형을 이루어야 한다. 여기 ‘균형’이라는 말은 복의 필요성 때문에 복의 중요성을 망각해서는 안 되며, 반면에 복의 필요성에 너무 지나치게 매달려서도 안 된다는 말이다.
복의 중요성을 망각하고 필요성의 너무 매달리게 되면 돈의 부정적인 요소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쉽게 부각될 수 있다. 그러면 돈은 일만 악의 뿌리가 되어 교만해 지며, 하나님보다 돈을 더 사랑하게 되는 것은 자명(自鳴)해 질 것이다.
3. 복과 축복의 호칭
복의 유형과 복의 순서에 대해서는 보편적으로 누구나 잘 알고 있다. 그러나 “복과 축복”의 호칭에 대해서는 잘 알 것 같은데 혼동하거나 아예 모르고 있다. 어쩌면 많은 사람들이 혼동하고 있는 것조차도 모르고 있을지 모른다. 그래서 “복과 축복”에 대해 모르고 무심코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복의 호칭은 본 주제의 핵심이다. “복과 축복”은 단어적 의미를 넘어서 신론에까지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것은 바로 복의 호칭의 문제를 염두하며 나온 말이다.
복의 호칭은 일반적으로 ‘복’과 ‘축복’(혹은 ‘축복’과 ‘복’) 두 가지를 사용하고 있다. 그렇다면 어떨 때 ‘복’을 사용하고 어떨 때 ‘축복’을 사용하는 것일까? 이것은 “복과 축복”의 호칭에 관한 문제이기 때문에 가장 관건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면 성경은 어떨까? 성경은 어떤 때는 ‘복’으로, 어떤 때는 ‘축복’으로 기록하고 있으며 또한 사용하고 있다. 성경은 “복과 축복”을 아무런 생각 없이 무심코 사용하지 않고 어떤 공식을 적용하여 사용하고 있다.
二. 복의 호칭에 관한 근본적인 이해 : ‘복’과 ‘축복’
“복과 축복”은 아주 좋은 말이다. 그래서 복을 싫어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특히 중국 사람들은 복 받기를 좋아하는 민족인 것 같다. 춘절이면 ‘福’자를 현관문으로부터 시작하여 여기저기에 더덕더덕 부친다. 춘절이 지나면 ‘福’자를 뛰어 낼 것도 같은데, 대부분이 다음해 춘절이 올 때까지 일 년 동안 그대로 둔다. 다음 춘절이 오면 새로운 것으로 다시 교환하여 붙인다.
어떤 집은 ‘福’자를 거꾸로 부치기도 한다. 처음 본 사람은 ‘福’자를 거꾸로 잘못 부친 것으로 착각하여 복은 고사하고 오던 복도 다나날 것으로 오해하기 십상이다. 그러나 중국 사람들이 ‘福’자를 거꾸로 붙이는 이유를 알면 거기에는 깊은 뜻이 있다는 것을 이해할 수 있다. 중국 사람들이 ‘福’자를 거꾸로 붙이는 것은 한 번 들어온 복은 나가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정말 그럴까? 이것이 복 받는 깊은 뜻일까? 어떠하든 간에 이 정도면 중국 사람들이 얼마나 복 받기를 좋아하는 민족인가를 알 수 있다.
“복과 축복”의 대해 근본적으로 이해를 하려면 먼저 성경적인 이해가 전제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복과 축복”은 창조주 하나님과 깊이 관련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다음 세 가지 속성(屬性)에 대해 바르게 알아야 성경적인 “복과 축복”에 대해 비로소 이해할 수 있으며, 바르게 사용할 수 있을 것이다.
첫째는 단어(사전)적 의미이다. 사전은 “복과 축복”을 어떻게 설명하고 있는가? 명사적 의미를 바르게 알기 위해서는 단어를 해설하고 있는 사전적 뜻이 중요한 요건이다. 그래서 “복과 축복”을 근본적으로 알기 위해서는 단어적 의미를 아는 것이 첫 번째 요건인 것이다.
둘째는 성경의 기록이다. 성경은 복과 축복을 어떻게 기록하고 있으며 또한 어떻게 사용하고 있는가? 성경적인 “복과 축복”을 바르게 알기 위해서는 성경에 사용된 실례(용례)를 아는 것이다. 그래서 “복과 축복”을 근본적으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성경의 실례를 아는 것이 두 번째 요건이다.
셋째는 “복과 축복”에 대한 호칭의 문제이다. 이 부분은 일반적인 이해에서도 언급이 되었다. “복과 축복”을 근본적으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호칭의 문제가 중요한 요건이 된다. 그래서 “복과 축복”을 근본적으로 알기 위해서는 어떻게 사용해야 하는 것을 아는 것이 세 번째 요건이다.
복과 축복의 관한 강의를 끝까지 듣거나 본서를 다 읽었을 때 이 세 가지 부분을 바르게 이해하며 알게 될 것이다. 특히 그동안 우리는 “복과 축복”에 대해 무심코 사용해 왔으며, 그리고 얼마나 잘못 사용했는가를 알게 될 것이다. 성경은 “복과 축복”에 대해서도 우리가 흔히 소홀하게 생각하고 있는 부분까지도 정확하게 기록하고 있다. 이것은 놀라운 사실이 아닐 수 없다. 아니 “복과 축복”에 관한 비밀일 수도 있다. 왜냐하면 알면 비밀이 아니지만 모르면 비밀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一) 단어적 의미 : 명사적, 낱말적 의미
명사적(낱말적) 의미를 알기 위해서는 먼저 사전에 해석해 놓은 뜻을 아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복과 축복”에 대해 사전은 어떻게 해설하고 있는가? 물론 성경을 해석하는데 사전적 의미에만 의존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필자도 익히 알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복과 축복”에 대해 바르게 이해하고 알려면 사전적(낱말적) 의미를 아는 것이 첫 번째 요건이다.
1. 사전의 해석들 : 국어사전
‘복(福)’ [명]: 평안하고 만족한 상태와 그의 따른 기쁨, 좋은 운수, 행복.
‘복(福)’ [명]: 생활에서 누리게 되는 큰 행운과 오붓한 행복. 또는 거기에서 얻는 기쁨과 즐거움.
‘복(福)’ [명]: 행복, 아주 좋은 운수, 복조(福祚, 큰 행운과 오붓한 행복)
‘축복(祝福)’ [명]: (남을 위하여) 행복을 빎, 또는 비는 일
‘축복(祝福)’ [명]: 남 또는 남의 일이나 미래가 행복하기를 빌거나 그것을 기뻐하여 축하함.
2. 낱말의 해석들 : 성경 낱말사전
‘복(福)’ [히] (berakah), [영] bless, blessing [명] :종교적인 의미를 가진 특별용어의 하나. 성서에서 말하는 축복이란 사람들에게 번영, 행복을 가져다주는 하나님의 호의, 또는 은혜를 말하고 있다.
‘복(福)’ [영] Beafituds, [히] ‘이쉬레’, [헬] ‘마카리오스’ 성경은 모범적인 경건한 사람에게 축복을 선포할 때 ‘복 있는 자’, 또는 ‘복이 있을지어다.’라고 표현한다.
국어사전들은 ‘복’과 ‘축복’을 각각 구분하여 달리 해설하고 있다. 그러나 성경 낱말사전들은 ‘복’과 ‘축복’을 구분하지 않고 동시에 해설하고 있다. 특히 아가페 낱말사전에서는 명사로서 ‘복’은 해설하고 있으나 ‘축복’은 아예 해설이 빠져있다. 대신에 ‘축복하다.’는 동사는 해설하고 있다.
"복(福)"과 "축복(祝福)"
옛날이나 오늘날이나 사람들은 모두가 복받기를 좋아한다.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복을 받으려다 화(禍)를 입거나 반대로 저주를 받는 일도 적지않다. 성경에도 '복(福)'이라는 말이 여러곳에 나온다.그렇게 많이 나오는 '복'이라는 말을 우리는 바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성도 중에는 "왜 내가 '복'을 모르는 사람인가?" 하고 반문하는 이도 있을 것이다.그러면 그 동안에 자신이 '복'에 대해서 바르게 알고 있는지 확인해 보기로 하자.
당신은 '복' 받기를 바라는가,'축복' 받기를 원하는가?
창세기 12:3절에 보면,하나님은 우리들에게 복을 내리시는 '복의 근원'이심을 알 수 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이 서로 '복'을 빌면서(祝) 살기를 바라신다. 그런데 언제 부터인지는 몰라도 우리 모두에게는 하나님께서 '축복(祝福)'하시는 분으로 알려져 버렸다. 이렇게 말하면, 어떤 이들은 생각도 해보기 전에 이미 널리 사용되는 말을 탓한다고 거부반응부터 일으킬지 모른다. 그러나 한 번 정신을 차리고 생각해 보자.
'축복(祝福)'은 "앞으로의 행복을 그 무엇(복의 주체)에게 비는것"이요, 이것은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이다. 창세기 14:17-20절에 보면,멜기세덱이 아브라함에게 축복 하였다.또 이삭은 아들 야곱에게 축복하였다(창27:27-29). 그렇다고 반드시 왕이나 아버지로서만이 축복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축복할 수도 있고 저주할 수도 있다.
그러나 사람은 누구를 막론하고 '복'을 내릴 수는 없다. 이는 우리가 틀리게 말하면서도 한편 다행스럽게 생각되는 점이있다.그것은 "사람이 복을 준다" 하는 망발(妄發)은 아직 들어 보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어째서 복의 근원이신 하나님을 피조물인 인간과 같이 겨우 '복을 빌어 주는 위치'로까지 격하 시키고 있는지, 그 이유를 모르겠다. 그런데 다행한 것은,우리들이 가지고 있는 성경에는 바로 쓰여져 있다는 사실이다. 창세기 12:3 절 말씀을 주의깊게 살펴보자. "너희를 축복하는 자에게 내가 복을 내리고 ..." 얼마나 분명한가 말이다.
하나님은 우리들에게 복을 내리시는 하나님이시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서 나의 이웃 oo 에게 복을 내려 주시옵소서"하고 축복 하여야 한다.
우주에서 복을 내리시는 분은 오직 하나님 뿐이시다. 이제부터는 실수로라도 "하나님 축복하옵소서" 하거나 "하나님께서 축복하기를 기도합니다" 하지 말자.전능하신 하나님께서 누구에게 복을 부탁하여 비시겠는가 ! 분명 그 분 스스로 '복을 주시는 분' 이심을 명심하자. 어떤분은 이렇게 변명하신다. "사람이 다니다 보면 없던 길도 생기고,또 필요하면 새길도 만드는 것과 같이,말도 보편화 되어버린 것은 그대로 쓰면 될 것 아닙니까?" 그러나 그렇게 될수 있는 말과,그렇게 될 수 없는 말이 있다.
이제는 우리 한글의 우수성과 우리나라 초대교인들의 바르게 성경을 번역한 사실을 감탄하면서,우리의 좋은 특징을 살려야 하겠다.
하나님 만이 복을 주실 수 있으신 분이다.얼마나 놀라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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