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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의 성서해석

하나님아들 2020. 3. 14. 18:37

중세의 성서해석

 

 

 로마 제국의 멸망 476년부터 15세기 말에 이르는 시대를 중세시대라고 말한다. 성서 연구의 소재는 과거 교부들이 쓴 해석이었다. ‘카테나’(catena)라고 하는 형식은 교부들의 주석서에서 모아 놓은 해석들의 연결문이었다. 또 다른 형식은 ‘주석서’(gloss)였다. 보통 카테나는 여백에 씌어 있으며 어떤 경우에는 본문을 완전히 포위하여 씌어 있다. 그러나 주석서는 어떤 때는 여백에, 어떤 때는 줄 사이에, 어떤 때는 따로 떨어져 계속 씌여 있다. 이러한 주석서는 결국 중세에 새로운 성경해석이 시도되었다고 하기 보다는 과거의 것을 보존하는 데 중점을 두었다는 것을 알게 한다.
 
중세의 가장 중요하고 특징 있는 성서 해석은 문자적인 것이 아니라 비유적 해석이었다. 요하네스 카시안(Johannes Cassian, 360-435년)은 4중의 성경의미론을 주장하였다. 16세기까지 유행되던 한 시에 4중 해석에 대한 것이 담겨 있다. ‘문자는 무엇이 일어났는지를 가르쳐주며, 알레고리는 무엇을 믿어야 하는지를, 도덕적인 성경의미는 무엇을 행해야 할지를, 그리고 상징적인 성경의미는 무엇을 소망해야 하는지를 가르쳐 준다.’ 이 용법의 가장 좋은 예는 갈라디아서 4:22절 이하의 해석에서 본다. 여기에 나오는 ‘예루살렘’은 네 가지 방법으로 이해된다. 역사적으로는 유대 사람의 수도, 알레고리적 의미로는 그리스도의 교회, 신비적으로는 모든 사람의 어머니가 되는 하늘 나라의 성, 도덕적 의미로는 인간의 혼을 가리킨다.
 
이러한 원인은 바로 플라톤주의의 영향력 때문이다. ‘성서는 가시적 세계와 흡사하게 하나님을 반사하는 큰 거울이다. 그러므로 모든 종류의 진리를 전부 보여 준다’고 일반적으로 믿었던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과 뜻은 성서 안에 포함되어 있지 않고 그 안에 숨어 있다. 성서는 중세의 대사원같이 상징의 언어로 사람에게 말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중세 후기에 비유적 해석을 인정하면서도 문자적 해석을 강조한 사람이 있었는데 바로 토마스 아퀴나스였다. 아퀴나스의 문자적 해석의 한 사례는 에덴 동산의 본질에 대한 전통적인 문제를 취급하고 있는 그의 방법에서 엿볼 수 있다. 교회의 최초기부터 이에 대한 해석은 둘로 갈라져 있었다. 그리하여 어떤 이는 땅 위에 낙원이 정말 있었다고 하며, 어떤 이는 그것이 영적이라고 했다. 이에 대하여 토마스 아퀴나스는 ‘성서가 낙원에 대하여 말하고 있는 것은 역사적인 서술 방법으로 설명되어 있다. 그런데 성서가 이와 같이 설명하는 모든 것에 진리의 기초로 놓아져야 하며 그 위에 영적 해석이 세워져야만 한다.’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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