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 배경사! 형성사!!

성경의 형성사

하나님아들 2020. 3. 13. 23:20

성경의 형성사 


 

 
초기 히브리 성경
  
구약성경은 BC 1450년에서 BC 400년까지 무려 1000년에 이르는 기간에 걸쳐 기록되었다.
  
BC                 1450년경                                          400년                         서기1년    45~95 년                           A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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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구약 기록 시기                 성경정경화시기       예수님탄생     신약 기록 시기
  
보수주의 신학자들에 의하면, 모세는 최초로 영감을 받은 성경 기록자로서 대략 BC 1450-1400년경에 모세오경을 기록했다고 한다. 구약의 마지막 기록자인 말라기는 BC 400년경에 성경을 기록했다.
  
구약의 본문
구약성경의 첫 부분은 갈퀴모양의 문자인 고대 히브리어로 가죽이나 파피루스에 기록되었다.
이 고대 문자는 점차로 발전되어 BC 400년 이후에는 둥근 종 모양의 문자로 되었다.
이 종 모양의 문자는 사해 사본과 마소라 사본과 1477년 이후 인쇄된 히브리성경에서 발견되었다.
  
구약의 정경화
성경의 정경이라 함은 권위있고 성스러운 문서의 목록으로 지정되었다는 말이다.
  
헬라어에 이러한 표현으로 '카논'이라는 단어가 있는데 이 말은 원래 갈대나 자(尺)를 뜻한다.
실제로 이것은 "측정하는 것", 즉 표준.규범.규칙을 나타내며, 특히 표준이나 규범으로서 "측정 되어지는 것"을 의미했다.
  
하나님의 영감과 권위의 표준이나 조사를 통해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선정되었던 책들은 "정경"으로 편집되었다.
보수주의 신학자들은 영감된 성경이 공식적인 수집이나 단순한 인준에 의하지 않고 성령을 통한 영감의 중요성
때문에 정경으로서의 권위가 있다고 주장한다.
  
그렇지만 성경비평학적 견지에서 볼 때, 정경화의 과정은 오랜 세월을 필요로 했다.
이러한 논법에 따르면 BC 444년에 율법서가 제일 먼저 정경이 되었고 예언서는 BC 400-200년이 되어서야 정경화
되었으며, 성문서가 대략 BC 165-100년경에 이루어졌다.
  
그래서 성경비평학에서는 히브리정경이 세 부분으로 나뉘어지는 것은 본래 연대적인 문제에 기인한다고 본다.
  
예언서는 BC 300년이 지나서야 대중화되어 그 결과 그 다음 세기에 수집되어 정경화가 이루어졌다고 주장한다.
소위 제2이사야와 제3이사야(대체로 40∼66장)는 그 기록자들을 전혀 찾아낼 수 없으므로, 이사야서의 뒤에
부착시켰다고 한다. 다니엘서는 BC 167년이 지나서야 기록된 것으로 추정되며, 나머지 에스더와 역사상.하
그리고 에스라.느헤미야도 너무 늦게 작성되어 역사서 부분에 포함시킬 수 없어 성문서에 포함시켰다고 한다.
  
그러나 보수주의 신학에서는 히브리 정경의 삼분화를 기록자의 신분이나 예배의식의 편의상의 배열로 설명할 수 있
다고 주장한다. 그러므로 구약의 완전성이 유지되는 초기 연대를 고수하고 있다.
  
또한 유대 정경에 대한 절대적인 지지가 항상 신교의 입장이 되어왔다.
  
마소라 학자들의 활동
AD 500년 이전의 히브리 사본에는 장모음을 표시하는 일부 자음을 제외하고는 모음체계가 없었다.
AD 600-950년에 이르러 마소라(Masoretes)라고 일컬어지는 유대인 학자들이 본문을 보다 정확하게 발음하기
위해서 완전한 모음체계와 악센트를 보안해냈다. 그들은 또한 케리(Keri)라고 명명되는 난외(marginal readings)와
케티브(kethiv)라고 명명되는 본문과 상이한 것(textual variants)을 수록하여 본문을 표준화시키기도 하였다.
마소라 학자들의 히브리 성경 연구는 5세기 후에 성경을 인쇄하는데 있어서 기틀을 마련했다.
  
히브리성경의 인쇄
인쇄된 히브리성경의 제일 첫 부분은 시편이었다.
이것은 1477년의 일이었으며,
           1488년에는 모음 부호와 악센트가 첨가된 히브리 구약성경 전체가 첫 출판을 보게 되었다.
  
최초의 기독교 성경
우리 주님이 승천하신 후 거의 20년 동안은 주로 헬라어로 기록된 구약성경이 유일한 성경이었다.
최초의 신약성경은 일찍이 AD 45년에 기록된 것으로 추측되는 야고보서가 분명하다.
요한계시록은 일반적으로 95년경에 기록된 것으로 추정되는 가장 뒤 늦은 책이다.
  
초대교회에서는 구약만을 성경으로 사용하였다.
베드로는 스데반(행 7:2-53), 빌립(행 8:32-35), 바울이 그러하였듯이 구약(행 2:14-16)을 가지고 설교하였다.
신약의 모든 기록자들은 구약을 익히 알고 있었으며, 그들의 영감적 기록은 구약에서 영감을 받는 계시에 근거하였다.
  
신약의 기원
복음(고전 15:3, 4)은 초기에 구전을 통하여 전파되고 구약 역사와 예언에 비추어 해석되었다.
그리스도의 생애와 사역에 대한 구전은 글로 기록되어 마침내 AD 70년경에 영감적인 공관복음을 형성하게 되었다.
율법주의나 비도덕주의와 같은 오류에 반하여 기독교를 정의할 필요가 강조되어 그리스도와 그의 사역에 대한 교리적인 설명을 요하게 되었다.
  
바울서신과 그 외 일부 서신들이 이를 위해 기록되었다.
교회의 발전에 대한 역사적인 개괄적 설명은 사도행전에 나타나 있다.
요한계시록은 시간과 영원에 대하여 계시된 하나님의 계획과 목적을 성취시키기 위해 기록되었다.
  
신약의 정경화
정경화 이전의 초기 신약서들
  
제1클레멘스 로마의 클레멘스가 고린도교회에 보낸 편지(BC 96년)로 매우 높이 평가되었다.
이것은 소수의 사람들에 의하여 정경의 권위가 있다고 인정되었으며,
170년경 고린도교회에서는 공식적으로 낭독되기도 하였다.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스나 오리게네스와 같은 이집트의 기록자들은 이것을 사용하기도 하였다.
이것은 알렉산드리아 사본에 포함되어 있다.
  
제2클레멘스 역시 알렉산드리아 사본에 포함되었던 서신이다.
이것은 로마의 클레멘스의 것으로 잘못 간주되었으며 널리 읽혀지지 않았다.
이것과 제1클레멘스는 여전히 서방에 정경으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
12사도의 교훈집(Didach, 120년경)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스나 오리게네스와 같은 일부 이집트 학자들에 의해서
성경으로 간주되었다. 이것은 널리 회람되었다.
  
바나바의 편지(130년경) 시내 사본에 수록되어 있으며, 이집트에서는 권위있는 것으로 간주되었다.
히에로니무스(400년경)는 이것을 외경으로 여겼으며, 이것은 점차로 성경으로서의 위치를 상실해갔다.
헤르마스의 목자서(140년경) 로마의 주교이자 피우스의 형제인 헤르마스에 의해 기록되었다.
이것 역시 시내 사본에 수록되어 있고 무라토리 정경(Muratorain Canon)에서는 높이 평가하고 있으나
성경으로 인정받은 적은 없다.
  
베드로의 묵시록(145년경) 앞에서 열거한 책들보다는 다소 중요성이 떨어지나 동방에서는 매우 귀중하게 여겼고
서방에까지 알려졌던 것이다. 이것은 유세비우스에 의하여 허위문서로 인정되었다.
  
바울행전(170년경)은 널리 회람되었고 일부 사람들에 의해 정경으로 여겨졌으나,
학자들의 연구 결과 외경적인 성격이 드러나 점차 정경으로서의 가치가 사라졌다.
  
사도들의 이름으로 이후에도 많은 복음서, 행전, 서신과 묵시록 등이 나타났었다.
그러나 이것들은 명백한 허위문서로, 교회는 이것들을 신중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신약 정경화의 원인
정경 또는 반정경으로서의 제1클레멘스서, 12사도의 교훈집, 바나바의 편지, 헤르마스의 목자서 등을
인정하는 문제에 있어서 동방에서는 3세기 말 명확하게 제정된 정경의 필요에 관심이 집중되었다.
  
마르키온 이단(140년경)의 불완전한 정경 역시 당시 널리 읽혀지고 있었다.
마르키온은 영지주의자로서 누가복음과 바울서신 가운데 10편만을, 그것도 많은 삭제를 한 후
그들의 교리적인 근거로 삼았다.
  
정경으로 인정을 받으려는 다른 외경적인 위문서들의 출현으로 정경을 명확히 제정해야 할 필요성이 발생했다.
또한 후일 모든 성문서를 불사르라는 로마의 박해자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의 칙령도 정경의 제정을 독촉했다.
  
신약 정경성의 표준
그 첫째 표준은 "사도성"이었다.
                        기록자가 진실로 사도인가?
                        아니면 마가복음의 기록자나 누가복음, 사도행전 그리고 히브리서신의 기록자의 경우와 같이
                        그가 사도와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는가?
    둘째 표준은 "내용"이었다.
                        그 주제나 그 주제의 취급과 영적인 특징이 성경으로서 합당한가?
                        이러한 기준에 의해 위문서들은 제거되었다.
   셋째 표준은 "보편성"이었다.
                      교회가 전반적으로 그 문서를 받아들이고 있는가?
                      그 문서가 보편적인 호소력을 지니고 있었는가?
   넷째 표준은 "영감성"이었다.
      그 문서가 "하나님의 감동으로"(딤후 3:16)라는 명백한 증거를 가지고 있는가?
            그리고 성령께서 이것은 진실하다고 하나님의 사람들에게 확신을 주었는가?
             이것이 마지막 기준이었다.
       하나님의 섭리가 없었더라면 신약 정경은 올바르게 제정될 수 없었을 것이다.
  
정경으로 승인된 초기 문서
이처럼 인정된 책들을 오리게네스(245년)는 「호모로구메나」("인정된" 또는 "승인된")이라고 불렀다.
이것들은 영감적인 성경으로서 널리 인정된 신약 문서였다.
  
오리게네스는 사복음서와 바울서신, 베드로전서, 요한1서, 사도행전 그리고 요한계시록을 포함시켰다.
그는 히브리서를 「호모로구메나」중에 넣지는 않았지만 바울의 서신이나 정경적인 서신으로서 인용했다.
실제로 그가 성경으로서 인정하지 않았던 책들은 유다서와 요한 2서.요한 3서 뿐이었다.
  
교회사가인 가이사랴의 유세비우스(300-325년경)는 「호모로구메나」가운데
사복음서, 사도행전, 바울서신, 요한 1서, 베드로전서와 요한계시록을 넣었다.
그는 부주의로 히브리서를 빠뜨린 것으로 보인다.
  
초기에 문제시된 신약 문서
오리게네스는 이 문제시되었던 책들을 「안티레고메나」("항변되는" 또는 "논쟁되는")라고 불렀다.
이러한 책들 가운데 그는 히브리서, 베드로후서, 요한 2. 요한 3서, 야고보서, 유다서, 바나바의 외경적인 서신,
헤르마스의 목자서, 12사도의 교훈집 그리고 히브리복음서 등을 포함시켰다.
  
가이사랴의 유세비우스는 「안티레고메나」를 다음과 같이 구분했다.
①단순히 논쟁되거나 의문시되는 문서로 야고보서, 유다서, 베드로후서, 요한 1.2서,
②확실히 위조되었거나 영감되지 않은 문서로 바울행전, 헤르마스의 목자서, 베드로묵시록, 바나바서신
   그리고 12사도의 교훈집.
  
일부 신약 문서를 의심하는 이유
초기에 논쟁의 대상이 되었던 일곱 권의 책들은
야고보서, 베드로후서, 히브리서, 요한 2.3서, 유다서와 요한계시록이었다.
몇몇 초대교회 지도자들이 이러한 책들의 인정을 주저한 데에는 그들 나름대로의 내적인 증거를 근거로 가지고 있었다.
  
①야고보서와 유다서의 문체는 자신들을 사도로서가 아니라 다만 그리스도의 "종"으로서,
   요한 2.3서의 기록자는 자신을 사도가 아닌 "장로"로서 표현하고 있다.
②히브리서는 기록자 불명이고 바울서신이라고 인정하기에는 어휘나 문체가 다르다.
   베드로의 두 번째 서신은 기록자 불명은 아니지만 베드로전서와는 어휘나 문체에 있어서 다르다.
③또한 야고보서는 초기의 유대인 개종자들을 대상으로 기록된 것이지 이방인 교회를 대상으로 기록된 것은 아니다.
④유다서는 에녹(1:9; 5:4; 유 1:14, 15)의 외경적인 책에서 인용했기 때문에 문제가 제기되었다.
  
서방의 정경 초기 형성
로마의 클레멘스의 증언(AD 96년경) 그가 로마 주교로 있을 당시 고린도교회에 보낸 매우 정평있는 편지에서
(제1클레멘스로 알려짐), 그는 마태복음, 로마서, 고린도전서에 대한 지식을 보여 주며 히브리서에 대하여 거듭해서
언급하고 있다.
  
마르키온의 증언(140년경) 영지주의 이단자로서 그는 다만 누가복음과 바울서신 중 10편만을 인정했다.
다소 잘못된 점은 있으나 그의 증거는 계몽적이며 교회가 현재의 신약성경을 수집하고 인정하는 데 중요한 지표를
형성케 하고 있다.
  
헤르마스의 증언(150년경) 그는 매우 정평있는 헤르마스 목자서의 기록자로서 마태복음, 에베소서, 히브리서, 야고보서
특히 요한계시록을 정경으로 확증하였다.
  
이레나이우스의 증언(40-203년경) 그는 청년 시절에 서머나의 폴리카르푸스와 교분이 있었으며,
후일 고올지방 리용의 주교로서 사복음서, 사도행전, 베드로전서, 요한1서, 빌레몬서를 제외한
바울의 모든 편지와 요한계시록을 입증하였다.
  
무라토리 정경의 증언(172년경) 이 단편문서는
1740년 밀란의 암브로시우스 도서관에서 이탈리아인 무라토리가 발견했다.
삭제된 처음 부분은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이었다.
이것은 베드로전.후서, 야고보서, 히브리서를 제외한 모든 신약 문서에 대해 입증하고 있다.
  
170년 이전의 고대 라틴어역 증언
이것은 야고보서, 베드로후서 그리고 테르톨리아누스시대 이전에 첨가된 히브리서를 제외하고는
모든 문서들에 대하여 입증하고 있다.
  
테르툴리아누스의 증언(150-222년경) 이 카르타고의 다작의 라틴 작가는
사복음서, 13편의 바울서신, 사도행전, 베드로전서, 요한1서, 유다서, 요한계시록에 대하여 증언하였다.
그러나 그는 히브리서의 기록자는 바나바라고 하면서 이를 넣지 않았다.
  
키프리아누스의 증언(200-258년경) 카르타고 주교로 히브리서에 대해서는 테르툴리아누스의 견해를 따랐다.
그러나 빌레몬서, 야고보서, 요한 2.3서, 유다서는 인용하지 않았다.
  
서방의 정경 후기 형성
히에로니무스의 증언(340-420년경) 그는 라틴어 불가타역의 뛰어난 번역자이며 명성있는 학자로서,
우리가 소유한 신약 정경 모두를 증언했다.
그는 바울에 의해 히브리서가 기록되었음을 인정하였고,
야고보서와 베드로후서가 어떻게 인정될 수 있는가를 설명했다.
그의 견해는 최상의 가치를 지니고 있다.
  
아우구스티누스(Augustine)의 증언(354-430년) 히에로니무스와는 달리 그의 견해는 모호했다.
그는 문제시되었던 일곱 권의 책을 모두 수락하기는 했으나
성경의 권위에 정도의 차이를 두고 대체로 외경을 포함하여 폭넓은 로마 가톨릭교회의 구약 경전 확립에 기여하였다.
  
  
교회협의회의 활동 신약 정경의 한계를 정하는 문제는 어떠한 협의회에서도 결정할 일이 아니었다.
개개의 문서가 지닌 영감적인 가치나 내적인 권위가 그 결정 요소였다.
이러한 사실은 정경 가운데 우리에게 전해 내려오는 문서의 순수함이나 확실성에서 뚜렷하게 증명되고 있다.
4세기 말 이전 어떠한 협의회도 이런 주제에 관해서 아무런 공언도 하지 못하였다.
  
카르타고 제3차 교회회의(397년) 여기에서 정경에 대한 최초의 결정을 내렸다.
이 회의에서 규정된 사항 중의 하나는 교회내에서는 오로지 "정경으로 인정된" 책만 읽혀져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후에 이것은 현재 우리가 가지고 있는 27권의 목록이 되었다. 히브리서는 바울의 것이라는 이유로 인정되었다.
  
히포 교회회의(419년)는 제3차 카르타고 교회회의의 목록을 거듭 확인하였다.
이처럼 정경의 선정은 개개의 책들이 자체의 가치를 입증한 후 교회 회의에서 확인하는 자연스러운 과정을 겪었다.
  
동방의 정경 형성
안디옥 주교 이그나티우스(116년경),
서머나 주교 폴리카르푸스(69-155년경),
히에라폴리스 주교 파피아스(80-155년경)는
마태복음, 요한복음, 바울서신, 베드로전서, 요한1서, 사도행전에 대해서 증언했다.
12사도의 교훈집(120년경)은 마태복음을 특히 많이 언급하고 대부분 신약성경과 마찬가지로 누가에 대해서도 알고 있다.
  
사르디스 주교 멜리투수(170년경)는 야고보서, 유다서, 요한 2.3서를 제외하고는 모든 신약성경을 인용했다.
안디옥의 데오필루스(115-118년경)는 신약성경의 대부분을 입증하였고
                                                        이것들은 구약 정경과 동등한 가치가 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그의 후계자인 루키아누스(312년에 순교)는 자신의 "안디옥 정경"에서
                                                                                    요한계시록, 베드로후서, 요한 2.3서를 제외시켰고,
                                                                                   그가 개역한 구약과 신약성경에서는 유다서를 제외시켰다.
가파도키아의 대 바실리우스(329-379년경)와
                    나지안주스의 그레고리우스(330-390년경)는 요한을 계시록의 기록자라고는 했으나,
                                                                                     이를 제외한 현재의 정경에 있는 모든 문서를 인정했다.
몹스에스티아의 데오도루스(350-428년)는 가톨릭 서신들과 요한계시록을 인정하지 않았다.
  
교회의 이러한 견해는 콘스탄티노플 정경에까지 상당한 영향을 주었는데,
이는 루키아누스의 "안디옥 정경"에서 발전된 것으로,요한2.3서, 베드로후서, 유다서와 요한계시록 등을 인정하지 않았다.
  
페쉬타(411-435년)도 콘스탄티노플 정경과 유사하였다.
필로크세누스(508년경)가 이 부인된 책들을 첨가하여 시리아 페쉬타성경을 개정하고부터
콘스탄티노플 정경의 그릇된 영향은 사라지게 되었다.
  
이집트와 팔레스타인 정경의 초기 형성
순교자 유스티누스(100-165년경)는 요한계시록에 관하여 중대한 증언을 하면서 이것을 사도 요한의 기록이라고 하였다.
그는 또한 히브리서를 잘 알고 있었고, "베드로의 회고록"이라는 표제가 붙은 마가복음에 대해서도 언급했다.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스(155-215년경)는 현재 신약에 수록되어 있는 모든 문서에 정통하였으며,
유다서, 히브리서, 공동서신과 요한계시록을 포함한 모든 문서를 인정하였다.
  
알렉산드리아의 오리게네스(185-253년경)는 많은 논쟁이 되었던 책들
(히브리서, 베드로후서, 요한 2.3서, 야고보서, 유다서)을 인정할 만한 증거를 제시하고 있다.
그는 이 인정된 책들(「호모로구메나」) 가운데 요한계시록도 포함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집트와 팔레스타인 정경의 후기 형성
프레드릭 케년 경에 의해 1933-37년에 출판된 3세기 체스터 비티(The Chester Beatty) 파피루스 사본은
사복음서, 사도행전, 바울서신, 히브리서(로마서 다음에 있음), 요한계시록(9:10∼17:2 부분만이 보존되고 있다)을
인증하고 있다.
  
알렉산드리아의 디오니시우스(200-265년경)는
야고보서, 요한 2.3서 그리고 요한계시록을 영감된 성경으로 인정함과 동시에 히브리서가 바울서신임을 증언했다.
  
알렉산드리아의 아타나시우스(298-373년)는 현재 우리가 소유하고 있는 27권의 신약성경에 대하여
"정경적"이라는 말을 사용하였다.
  
신약 정경 형성사의 요약
신약 정경은 교회 협의회의 활동을 통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형성되었다.
개개의 책들이 지닌 영감성과 내적인 권위가 그것들을 궁극적으로 인정하고 정경화하는 결정적인 요소를 이루었다.
AD 200년에 이르러서야 신약은 본질적으로 오늘날 우리가 소유하고 있는 것과 똑같은 문서들을 포함하였다.
그 후 이것들은 기독교인들에 의해서 오늘날과 같은 권위와 확실성을 지니게 되었다.
  
3세기에는 「안티레고메나」로 논쟁이 벌어졌다.
동방에서는 요한계시록을 인정치 아니하였으며, 서방에서는 히브리서를 부정하였다.
실제적으로 3세기 말에 가서야 모든 외경서들이 히에로니무스와 아우구스티누스의 영향, 그리고 이집트 아타나시우스의 정경이 설정한 명확한 구분으로 실제로 어떠한 문서가 정경의 지위를 갖는가에 대한 논쟁은 그치게 되었다.
제3차 카르타고 교회회의(397년)는 이 결정을 확증하였으며, 이때부터는 어느 신약 문서에 대한 논쟁도 그치게 되었다.
동방에서는 오랫동안 논쟁이 계속되었다.
  
그러나 서방과 알렉산드리아 아타나시우스의 경우, 갑바도기아 교부들의 영향은 모든 반론을 일축시켜 버렸다.
페쉬타(시리아 성경)에 요한 2.3서, 베드로후서, 유다서, 요한계시록을 첨가함으로써 정경에 대한 문제는
동방 역시 해결되었다.
  
그리하여 신약 정경은 모든 실제적인 목적에 맞추어
서방에서는 400년에, 동방에서는 500년에 이르러 그 결정을 보았다.
  
현재까지의 정경사
몇 가지 근소한 차이점을 제외하고서는 4세기 초 신약정경에 대한 결정은 현재까지 내려오는 교회의 결정으로 남아 있다.
종교개혁 당시 개혁자들은 소위 교회의 절대성이라는 권위에 항변하여 성경의 절대적 권위를 주장했다.
그러나 구약 정경에 대하여 로마교회는 1546년 「사크로산크타 교령」(Decree Sacrosancta)으로
트렌트공의회 중 14권의 외경서 중 11권을 정경으로 공포했다.
  
이것은 토비트, 유딧, 지혜서, 집회서, 바룩, 마카베오상.하, 세 아이의 노래, 수산나, 벨과 용이었는데
그 후 로마가톨릭교회는 에스델서를 추가했다.
  
신약의 본문
고대로부터 신약만큼 서방세계에 영향을 많이 주었던 문서는 없었다.
어떠한 고문서의 본문도 이렇게 잘 입증되지는 못했다.
  
거의 5천편의 헬라어 사본(필사본)이 있으며,
초기 번역문서의 사본만도 1만여편이 존재하며 이 외에도 수천에 달하는 교부들의 인용문이 있다.
본문연구의 문제는 비교연구에 의하여 순수한 본문을 결정하기 위하여 이러한 사본들을 사용하는 것이다.
  
신약성경 자료 : 본문 연구
파피루스 사본 1세기에 걸친 고고학적 연구의 결과로
현재 P 문자로 명명되어 P1, P2의 색인표가 붙은 신약본문의 파피루스 단편문서가 75편 이상 존재하고 있다.
이들의 연대는 2∼8세기에 걸쳐 있으며, 신약본문의 약 40%로 총괄 부수가 25권의 책을 이루고 있다.
  
P52는 요한복음 18:31-34, 37, 38의 부분이며 연대는 가장 오래된 것으로 대략 135년의 것이다.
P46, P46, P47은 체스터비티 파피루스 Ⅰ, Ⅱ, Ⅲ(200년경)에 들어 있다.
P66은 200년경으로 추정되며 요한복음이 기록되어 있는 유명한 보드머 파피루스이다.
P75는 새로 발견된 요한복음과 누가복음이 기록된 보드며 파피루스인데 200년경의 것이다.
  
언셜자체 사본 이것은 둥근 종 모양의 대문자로 양피지위에 기록되었으며 800년경까지 신약 필사본에 사용되었다.
현재 300여개의 언셜자체 사본이 남아 있다.
  
초서체 사본 소문자 필사본은 초서체로서 기록되었는데, 9∼18세기로 추정된다.
모두 합쳐 2,647편의 소문자 사본이 발견되었다.
  
역본 100년 전의 헬라어 본문에서 번역된 것들은 대단한 가치가 있다.
이 가운데서 고대 라틴어역(2세기), 히에로니무스의 불가타역(382-84년), 시리아역(4∼5세기), 콥트역(2∼4세기),
아르메니아역(5세기 초), 고대게오르기아역(5세기), 에디오피아역과 고트역(4세기 중기)은 매우 귀중한 것이다.
  
성구집 이것은 연중행사에 통독된 성경 교훈을 담고 있는 교회 예배서이다.
언설 자체와 초서체로 된 2천여 성구집이 남아 있다.
이들의 연대는 280-1600년경으로 추정된다.
  
패각과 부적 현재 신약 본문이 부분적으로 새겨져 있는 25개의 패각과 9개의 부적이 알려져 있다.
연대는 4∼13세기경이다.
  
교부들의 인용문 이 중에 8만 6천여편 이상이 알려져 있다.
  
  
가장 오래된 구약 사본
가장 오래된 맛소라 히브리어 필사본 그 연대를 9세기 말 이전으로 추정한다.
  
이것은 예언서가 기록된 카이로 사본(895년),
          구약 전문이 기록된 알렙포(Aleppo) 사본(925년경), 레닌그라드 사본(1108년에 완성됨)으로서
후자는 키텔의 《Bilblia Hebraica》의 본문으로 사용되고 있다.
  
그러나 1947년에 발견된 2개의 이사야 필사본 사해 두루마리는
우리에게 BC 2∼1세기로 추정되는 구약문서들 중의 하나를 제외한 모든 단편문서와 함께 1천년이나
더 앞선 히브리어 본문을 보여 준다.
  
가장 오래된 신약 사본
시내 사본(a) 4세기, 신약이 148장으로 되어 있다.
이것은 1844년과 1859년에 시내산에 있는 성 캐더린 수도원에서 티쉔도르프가 발견한 것이다.
역시 여기에는 헬라어로 기록된 구약 단편 문서도 들어 있다.
  
알렉산드리아 사본(A) 5세기, 이것은 대부분의 구약과 신약 사본을 담고 있다.
1627년 영국 찰스 1세에게 콘스탄티노플의 총대주교가 기증한 것으로, 1757년에 대영박물관으로 이관되었다.
  
바티칸 사본(B) 4세기, 이것은 1481년 이래 로마의 바티칸 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
이 사본은 히브리서 9:14∼13:25, 목회서신, 빌레몬서, 요한계시록을 제외하고는 구약과 신약 전부를 수록하고 있다.
  
에브라임 사본(C) 5세기, 신약 238장 가운데 145장이 보존되어 있다.
  
베자 사본(D) 5세기, 신약에 관한 것은 남아 있는 것이 없다.
  
제1체스터 비티 파피루스(P45) 3세기 초, 이것은 복음서와 사도행전이 기록된 파피루스 본문 중 30장을 포함하고 있다.
제2체스터 비티 파피루스(P46) 3세기 초, 바울서신이 기록된 파피루스 사본 104장 가운데 86장이 보존되어 있다.
제3체스터 비티 파피루스(P47) 3세기 말, 32장의 파피루스 요한계시록 사본 가운데 10장이 남아 있다.
제2보드머 파피루스(P66) 3세기 초, 요한복음이 기록된 파피루스 사본 150장이 남아 있다.
제14, 15보드머 파피루스(P75) 3세기 초, 요한복음과 누가복음 본문 144장 전부가 발견되었다.


 


성경의 형성사



대한기독교서회. 박창환

 

이길주

 

1. 하나님이 사람에게 어떻게 말씀하셨는가?


가. 하나님께서는 인간에게 말씀하셨다.

1) 예언자들을 통하여, 여러 부분에 여러 방법으로, 마지막의 때에는 아드님을 통하여 말씀하셨다.(히브리서 1:1-2)

2) 어떻게 말씀하셨는가➡인간이 알아들을 수 있도록 말씀하셨다➡역사화 (인간이 보고 듣고 알아들을 수 있도록)

3) 역사화의 문제 : 하나님이 역사하시는 그 시대 그 방법으로 (성서의 계시를 주시던 때는 4000년전의 시대 -> 신화적인 우주관, 미개하고 과학적인 사고를 하지 못하는 시대, 그 시대의 지식과 언어 표현 양식을 사용하여 표현하심)

4) 표현방법의 문제 : 예수님이 비유로 복음을 설명하셨듯이, 성경도 시, 편지, 비유, 격언, 신화, 역사 등으로 설명하고 있다. 고로 그 방식에 맞게 읽어야 한다. 또한 그 성경이 기록된 시대의 역사와 사회 문화를 고려하며 읽어야 한다.


2. 구약성서는 어떻게 기록되었을까?


가. 구약성서의 세 구분

1) 기원전 180년경 ‘예수 벤 시락’에 의하면 유대인들은 구약성서를 율법서(토라), 예언서(느비임), 성문서(케투빔)으로 구분하고 있음을 보게 된다. 총 24권으로 된 구약성서의 구성은 아래와 같다.

가) 율법서 5권: 창세기,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

나) 예언서 8권: 전기예언서(여호수아, 사사기, 사무엘, 열왕기), 후기예언서(이사야, 예레미야, 에스겔, 12소선지-호세아, 요엘, 아모스, 오바댜, 요나, 미가, 나훔, 하박국, 스바냐, 학개, 스가랴, 말라기)

다) 성문서 11권: 시편, 잠언, 욥기, 전도사, 아가, 룻기, 예레미야 애가, 에스더, 에스라-느헤미야, 역대기, 다니엘

2) 기원후 90년 얌니야 회의에서 오늘의 성경 39권으로 된 구약성서를 정경으로 결정하고 선포하였다


나. 율법서의 형성

1) 평가: 율법서 > 예언서 > 성문서 순으로 가치있는 책으로 평가

2) 저자: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불러주어 쓰게 하신 것이라고 생각함.그러나 모세가 쓴 것이 아니다. 합성되고 발전되어 수정된 것을 확인할 수 있다.(cf. 예수님 모세 저작권 인정 - 세종대왕의 한글창제 사건과 비교 이해)

가) 모세 이외의 다른 사람도 기록한 증거

(1) 모세가 죽은 후의 일(신34)

(2) 이스라엘의 왕이 형성된 사실을 아는 사람이 저자(창36)

(3) 지명 ‘단’은 ‘라이스’로 불리다 사시시대에 ‘단’이 됨(창14:14, 삿18:29)

(4) 블레셋 사람은 기원전 1200년경에 등장 (창21:34; 26:14-18; 출13:17)

나) 같은 사건을 서로 다르게 묘사한 증거

(1) 브엘세바 지명에 대한 기원 설명(창21:31아브라함과 아비멜렉 사이에서; 26:33이삭과 아비멜렉 사이에서)

(2) 벧엘 지명에 대한 기원 설명(창28:19야곱이 밧단아람으로 가는 도중; 35:15야곱이 몇 해 후에 밧단아람으로 돌아올때)

(3) 하갈이 추방되는 이야기(창16:6-이스마엘을 낳기전; 21:9-이스마엘이 커서 소년이 되었을때)

(4) 창조설화(창1 세상만물과 동물까지 창조된 후; 창2 남자, 동물, 여자 순으로)

(5) 홍수이야기(창6:19 짐승을 한 쌍씩 방주안데; 7:2정결한 동물 일곱씩 부정한 동물 한쌍씩)

다) 오늘의 형태로 작성한 사람들이 자료를 정직하게 보존하려는 생각으로 두가지를 다 나열한 것으로 평가됨.

3) 기록방법: 아무도 모른다. 다만 이스라엘의 역사가운데 말씀하셨고 구전으로 전해져 내려왔다는 것. 구전이 언제 어떻게 문서화 되었는지 알수 있는 방법 없다.


가) 5경(율법)의 문서화에 대한 가설


(1) 남유다 솔로몬왕 사망 후에 이스라엘의 역사 문서 생김(주전 950년경)

① 하나님을 여호와로 부름

② 유다와 이스라엘의 남쪽왕국에 관심 집중

③ J 문서라 호칭. 여호와(Jehovah) J, 유다(Judaea) J 의 의미

④ 하나님을 귀여운 어린이 같은 단순성을 지닌 분으로 생각하며 묘사함 창2:7, 창2:22, 창3:8, 창7:16


(2) 북이스라엘에서 또 하나의 문서 생김(주전 750년경)

①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여호와라는 이름을 계시하시기 까지는 하나님을 여호와라 부르지 않는 문서

② 창조기사부터 시작하지 않고 아브라함의 역사부터 시작

③ 북 이스라엘 나라에 관심 집중(출애굽이야기-여호수아, 야곱이야기-벧엘과 세겜, 요셉이야기-르우벤 주도적)

④ E 문서라 호칭. 에브라임(Ephraim) E, 엘로힘(Elohim) E 의 의미


(3) 북 이스라엘이 주전 721년경 멸망후 J 와 E 문서 병합되었음

① 두 문서를 정직하게 그대로 소개하면서 하나의 이야기로 엮었음

② JE 문서라 호칭


(4) 요시야 왕의 대혁명때 발견된 책(주전 621년)

① 이때 발견된 책이 신명기(Deuteronomy)

② 즉각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여짐

③ 정경형성의 시작 발단

④ D 문서라 호칭

⑤ 이 시대에 이미있었던 JE 문서와 D 문서를 병합하고 모세의 죽음 이전이야기속에 삽입


(5) 이후 형성된 문서가 있음(주전 550년경)

① 거룩에 대한 규칙과 원리를 규정한 것 (레17-26)

② H 문서로 호칭. Holiness Code(거룩한 법전)의 H


(6) 포로 시대와 그 이후 문서 생김(주전 444년경)

① 포로 이후 유대인 고유의 종교문화사회를 확립하려는 시도. 이를 위해 제사장 무리와 학자들이 선민 역사의 줄거리와 그들의 종교제도, 성전 의식법과절차들을 수집, 편찬하기 시작했음

② 주로 제사장 무리에 의해서 작성되었음

③ 엄숙하고(창1창조), 종교적 제도나 절기의 기원 이야기, 족보중요(계보의 성경이 중요했기 때문)

④ 이 P 문서를 골격으로 하고 다른 부분들이 덧붙여져서 5경이 형성되었다고 봄. 또한 에스라 시대에 완성되었고, 에스라가 백성들에게 읽어 준 것이 바로 이 문서(느8)

⑤ P 문서라 호칭. Priestly Document(제사장 문서)의 P


(7) 이후 기원전 400년경에 창세기,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 이렇게 다섯 권 모세5경이 제일 먼저 성서로 받아들여지게 되었음(증거: 기원전 250년경 애굽왕 필아델퍼스가 구약성서를 헬라어로번역할 때 모세5경만을 했다/ 느헤미야 시대에 사마리아인들이 분리될때 5경만을 사마리아글자로 번역/ 느8-10 에스라가 율법책을 읽었다는 기록)


다. 예언서의 형성

1) 예언자는 하나님의 감동을 받아 하나님의 말씀을 대변하는 사람을 가리키는 개념이지 시간개념을 가지고 미래의 것을 말하는 의미가 아니다.

2) 포로시대와 그 이후시대에 전기예언서의 역사와 후기예언서의 하나님의 약속은 그들에게 희망이었고 소중하게 보존해야 할 것으로 여겼다.

  가) 전기예언서(여호수아, 사사기, 사무엘, 열왕기) - 하나님의 구원행위 발견하고 신앙으로 발전시키기 위해 예언자들의 해석이 필요 했을 것. 점진적으로 모아지고 기원전 650-550년경 완성

  나) 후기예언서(이사야, 예레미야, 에스겔, 12소예언서) - 전기예언서 이후 예언자들이 남기고 그의 제자들이 첨가해서 완성.

3) 말라기(주전 5세기경)에 이르러 예언의 소리가 끊겼다고(말4:5) 판단. 때문에 예언자들의 글들을 극히 중요한 것으로 여기게 되어 수집하고 보존. 에스라, 느헤미야 시대에 수집되고 정경으로 되었다.

4) 주전 2세기경에는 예언서가 정경으로 확정되었다고 판단됨(다니엘서는 주전167년 작품인데, 확실한 예언의 성격을 가지고 있는 다니엘서가 예언서에 속하지 않고 성문서에 들어있다. 이것은 다니엘서가 나타날 무렵에는 이미 예언서들이 종결되고 확정되어서 아무리 훌륭한 내용의 예언서라 하더라도 다른 것을 첨가할 수 없었다는 것을 의미함.


라. 성문서의 형성

1) 성격이 다른 여러책들이 모여서 이룬 것으로 내용상 동질적인 것들은 없다. 성문서들은 개별적으로 대중의 수납에 의해서 성서로 간주된 것이지 율법이나 예언서처럼 공식적 결정에 의해서 성경 정경에 들어오게 된 것이 아니다.

2) 회당에서 공중예배때 사용된 것은 율법서와 예언서였지 성문서는 아니었다. 곧 성문서는 그와 같은 가치를 가진 것이 아니었다. 그런데 어떻게 성서가 되었는가?

  가) 그 당시는 인쇄기술이 없어 필사했다. 따라서 사람들에게 인기가 없거나 읽혀지지 않는 것들은 오래가지 않아서 자취를 감추게 되었다. 따라서 성문서는 사람들에게 널리 읽히는 인기 있는 책

  나) 예언적 영감이 끝난 시대이후의 저작물은 정경에 들수 있는 가능성이 없었지만, 사람들이 좋아하고 귀하게 여기는 책의 경우 책의 저자가 익명일 경우, 그 책을 과거의 어떤 위대한 인물이 쓴 책으로 돌려진다면 정경에 들어갈 수가 있었다.

(1) 룻기를 사무엘의 저작으로

(2) 모든 시편을 다윗의 시편으로

(3) 열왕기와 애기를 예레미야로

(4) 잠언과 전도서를 솔로몬의 글로

(5) 욥기를 모세의 글로

(6) 에스라, 느헤미야를 에스라의 글로

  다) 기원전 2세기 - 기원후 1세기경 이전에 성문서가 확정되었다고 보여짐(마카비2서의 서두 ‘다윗의 책들’이라는 언급, 기원전 132년 경 집회서의 저자 예수 벤 시락의 손자가 ‘율법과 예언자들과 또 그들의 발자취를 따른 다른사람들로 말미암아 전수된 위대한 일들에 대해서 말함)


마. 최종 구약 성경 완성

1) 기원후 90년경 얌니아에서 유대 랍비들과 학자들의 권위 있는 회의가 열렸고, 그 회의에서 구약성서의 책들이 최종적으로 낙착되었다. 오늘날의 39권과 같은 형태로 결정되었다.

2) 정경에 대한 논란이 되었던 성경: 잠언(난해한 윤리사상 잠26:4, 57:7-20), 에스더(하나님의 이름이 한번도 나타나지 않음), 전도서, 아가서, 에스겔서

3) 구약성서에 속하는 책들이 어떤 회의를 통하여 결정된 것이 아니라 그 책들이 이미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인 것을 증명했기 때문에 회의를 통하여 반복적으로 확인하여진 것이다. 그 말씀을 통하여 하나님을 만날 수 있게 된 성경이 정경이 된 것이다.

 

3. 신약성서의 형성


가. 1세기 교회는 신약 정경이 필요하지 않았다

1)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이미 정경을 가지고 있었고 구약성경이 그들의 신앙과 생활의 표준이 되는 정경이었다. 더 이상 다른 것이 필요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구약성경외에 예수 그리스도의 사건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들이었다. 그리스도에 대한 역사가 새롭게 그들 삶의 근거가 되었다.

2) 초기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건을 보고 경험하였거나, 직접 전해들었던 자들이었기에 그것들을 문서로 남길 필요성이 없었다. 그와 더불어 시간이 흐르면서 그리스도가 누구인가에 대한 직접 본 자들의 해석이 필요하게 되어, 사도들이 두루 다니며 그 사건을 설명하는 시간이 필요했다.

3)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종말에 대한 강한 기대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문서화에 대한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4) 오순절 성령사건 때문에 성령안에서 풍족한 생활을 하고 있는 그들에게는 새로운 성서가 필요하지 않았다.


나. 구두 전승의 신빙성

1) 적어도 30년이상은 예수의 복음이 구두로 전승되었다. 제일 먼저 기록된 마가복음이 기원후 60년 이후 인 것으로 보기 때문에, 예수 사후의 30년 이상 구두로 복음이 전달되었다.

2) 구두로 전승되면서 왜곡되거나 확대되는 일이 있지는 않았을까?

3) 신뢰할만한 이유

가) 고대 히브리 랍비들, 성서를 거의 다 암송(사서삼경, 천자문 외는 것처럼)

나) 예수에 대한 이야기들 계속적으로 반복 설교됨. 따라서 그에 다른 내용이 전해지면 곧바로 지적되고 공격을 받게 되었을 것. 공통적인 기억에 의해서 내려오는 것이기에 개인이 조작하거나 왜곡할수 있는 가능성 거의 없음


다. 구전 시대의 종결과 신약 문서의 형성개시

1) 기원후 70년경에 사도들이 거의 죽음. 따라서 그들의 증언을 들을수가 없어서 문서로 증언할 필요성 대두.

2) 예수님의 재림이 지연됨에 따라, 문서로 남겨 전해주어야 하는 필요성 대두.

3) 이단이나 탈선적 행동을 방지하기 위해서 표준적이고 공적인 문서로 된 복음서가 필요하게 되었다.

4) 예수님이 메시아였다는 사실을 증거하기 위해서 예수님의 생애에 대한 기록이 필요하였다. 즉 구약의 예언의 성취였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예수님의 생애를 보여주어야만 했다.


라. 복음의 형식

1) 예수님의 생애에 대한 단편단편의 지식들이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에 따른 교훈도 있었을 것이다. 그 이후 시간을 거치면서 어느 일정한 형태로 고정되는 결과를 맞이하게 되어 복음서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을 것이다. 이런 예수님에 관한 단편적인 자료들은 어떤 형태로 있었을까?


가) 격언적 말씀

(1)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서 있는 것이고, 사람이 안식일을 위해 있는 것이 아니다

(2)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리차

(3)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불러 회개케 하려 함이다


나) 설화 또는 이야기

(1) 연못가의 병자 고친 이야기

(2) 풍랑 잔잔케 하신 이야기


다) 가르치는 말씀


라) 거룩한 전설

(1) 예수님의 탄생이야기, 유아시절 이야기


마) 신화-사람의 언어로 설명이 안되는 이야기

(1) 변화산 사건

(2) 시험당하신 사건


마. 신양성서의 실제적 출현

1) 구전시대가 끝이나고 문서시대가 시작되자, 예수님에대한 문헌이 우후죽순처럼 생겨나게 되었다. (눅1:1 참조) - 도마복음, 마리아복음, 맛디아복음......

2) 이런 많은 문서들 중 왜 어떤 것은 성서로 채택되고 어떤 것은 버려졌을까?

가) 공중예배에서 읽혀진 것만이 성서로 채택

나) 사도적 권위를 가진 것이어야 성서로 채택-사도의 저술이든지 사도들과 관련된 사람들의 저술 (☀사도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건을 가장 잘 해석할 수 있는 사람이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직접뽑으시고 가르치시고 그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을 목격한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바. 바울 서신의 집성

1) 신약성서중 가장 먼저 기록된 것이 바울서신이다.

2) 바울서신은 주후 90년경에 에베소에서 집성되었다.

가) 바울서신 집성자에 대한 가설

(1) 바울서신 중 빌레몬서가 포함되어 있다. 그것은 개인적인 내용의 짧은 편지인데, 그것이 들어가 있는 이유는 오네시모가 바울서신을 집성했기 때문이다. 바울 사후 50년경 이그나시우스가 보낸 편지에 에베소 감독이 오네시모라고 표현. 오네시모가 바울의 편지들을 모아 집성하면서 자신에 관한 기록도 넣어 도둑질하고 달아났던 노예였던 나도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서 변화되었다라고 표현하려고 함

(2) 바울이 죽자 바울이 남긴 편지를 모아서 읽기 위해서


사. 복음서의 형성과 집성

1) 여러 복음이 있다고 하는데 어떻게 해서 4개의 복음서만이 정경으로 인정되었는가? 그것은 읽는 중에 독자들에게 감동을 주고 영과 영이 통하는 중 자연히 복음으로 받아들일 수 있게 되었다고 본다. 그런데 왜 비슷한 내용의 복음서가 하나로 통일되지 않고 그대로 가지게 되었을까?

2) 교회가 사도적 증언을 무엇보다 중요하게 여겼기 때문이다. 네 복음서 모두 사도의 권위를 가진 것이기 때문에 수정하지 않고 그대로 보존하였던 것이다.


아. 그 밖의 책의 수집

1) 사도행전-복음서와 서신서를 자연스럽게 연결해줌으로 인정됨

2) 공동서신-시간을 두고 오랜기간에 걸쳐 수집되었고 인정되었다.


자. 성서로서의 인정

1) 사도의 저작이고 사도와 연관된 사람들의 저작이기 때문에 초대 교회에서 인정받고 거룩한 권위를 가지게 되었다. 그런데 기원후 140년경 마르시온이라는 이단이 성경을 제거하려는 이유 때문에 성경의 정경화에 대한 확실한 기준을 마련하게 되었다.

2) 마르시온은 영지주의자였는데, 그는 바울을 가장 훌륭한 사람으로 여기고 자기가 멋대로 수정한 누가복음서만 인정하였으며, 자기 자신이 저작한 것을 성경으로 만들었다. 이때까지 교회는 공식적인 정경을 가지고 있지못하였기 때문에 마르시온 사건을 계기로 정경의 목록을 작성하게 되었다.(기원후 170년경) 그 정경 목록을 이후 그 문서를 발견한 사람의 이름을 따서 ‘무라토리 정경목록’이라고 부른다.

3) 이후 성경을 늘리려는 주후 2세기 중엽에 나타난 몬타누스 때문에 교회는 주후2세기 말엽에 신약 정경을 한정하고 성서의 정경화 작업을 끝났다고 합의하게 되었다.

4) 이후 3-4세기에는 문제가 된 책들을 가려내는 과정을 겪었다. 그리하여 더러는 정경으로 인정받고 더러는 외경으로 인정받게 되었다. 그 기준에는 사도의 저작이거나, 사도와 관련된 사람의 저작이어야 했다.

5) 기원후 393년에 힙포 레기우스에서 대회로 모여 신약 27권을 정경으로 정식 채택하였다.


4. 5세기 이후의 정경문제

1) 루터는 로마 가톨릭교회가 외경을 중심으로 선행으로 칭의를 얻는다고, 성자의 공로로 구원을 얻게 된다고 믿었던 사실을 발견하고 외경을 배격하기 시작하였다. 그래서 이후 루터와 칼빈을 따라 개혁교회의 전통을 따르고 있는 오늘 한국의 교회들도 외경을 인정하지 않고 구약39권과 신약 27권을 인정하게 되었다.

5. 성서가 우리 손에 들어오기까지


가. 옛날의 책 만드는 방법

1) 책의 재료: 파피루스, 가죽종이

2) 제본방법: 두루마리, 코덱스

3) 사본만드는 방법: 대본을 놓고 한자한자 기록, 대본을 큰소리로 읽고 사서 여러명이 한꺼번이 기록하는 방법

4) 이런 사본제작 과정을 통해 성경의 첨삭이 있었음

가) 주기도문: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는 후대에 추가

나) 마9:29: 금욕적 사상의 영향을 받아 ‘기도와 (금식)외에는 이런유가..’에서 금식을 추가하였음

다) 실수로 고의로 사본에 많은 변화가 생기고 차이가 생긴 것이 사실임

라) 오늘날 우리는 원문 비평학자들의 노력으로 여러 사본을 살펴 연구한 결과 원문에 가까운 성경을 가지고 있게 됨. (매우 기쁜일이지요?)


나. 신구약 고대사본

1) 성서가 문서화되었지만 파피루스나 가죽종이에 기록이 되어 원본을 오래 보관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필요에 따라 사본을 만들어 보관하고 전달할 수밖에 없었다. 지금은 성서의 원본이 하나도 남아 있지 않고 그 사본들이 남아 있을 뿐이다.

가) 기원후 9세기 맛소라 사본

나) 기원후 1세기 쿰란 사본(1947년 사해연안의 쿰란동굴에서 발견)

다) 기원후 4세기 시내산 사본(1859년 시내산의 한 수도원에서 발견)

라) 기원후 4세기 워싱턴 사본(1906년 프리어가 이집트 고물상인에게 산 4복음서)

마) 기원후 3세기 사본(1930년 영국의 골동품수집가 비이티가 발견)

바) 기원후 2세기 사본(1935년 고문서 학자 로버츠가 발견)

사) 기원후 3세기 사본(1956년 스위스 사람 보드머가 발견)

아) 지금까지 발견된 신약사본파피루스 98개/ 코덱스 5000개 이상


다. 고대역본

1) 히브리어로 된, 헬라어로 된 성경이 다른 언어적 환경에 있는 사람도 읽을 수 있도록 번역이 되어야 했다.

가) 기원전 280년경-칠십인역(모세5경만을 먼저 헬라어로 번역, 70명70일 유래)

나) 기원후 2세기경-수리아역, 라틴어역

다) 기원후 3세기경-콥틱어역

라) 기원후 4세기경-벌게이트역(유명한 성서학자 제롬이 헬라어사본을 라틴어로 번역, 가톨릭교회의 공식 성서로 지정)

2) 기원후 13세기경 스테판 랑튼-벌게이트역에다 장 구분을 함(오늘날까지 사용)

3) 기원후 1546년 트리엔트회의에서 라틴어 새번역 제작하여 1592년 완성. 오늘날까지 사용


라. 초기의 인쇄본 성서

1) 15세기 중엽에 인쇄술이 발명되면서 사본시대가 끝이나고 성서가 처음으로 인쇄되어 나오기 시작했다.

가) 1456년 구텐베르크에 의해서 출판된 제롬에 의해 편찬된 벌게이트 라틴성경이 인쇄된 처음 성경이다.

나) 1515년 에라스무스가 10세기 이후의 사본을 참고로 해서 헬라어 신약성서를 편찬하였다. 그러나 서둘러 출판하는 까닭에 정확하지 않은 사본들을 참조하여 가치성을 잃었다.


마. 현대 비평판 성서와 한글성서

1) 1910년에 번역 출판된 구역성서까지는 주로 영어번역과 한문성서를 대본으로 하여 번역하였기 때문에, 오늘날 우리가 사용하는 성경과는 많이 다르다.

2) 19세기 이래 성서 사본들이 많이 발견되면서 성서비평학의 발달에 따라 많은 자료들을 검토한 결과 원문에 접근하는데 큰 발전을 이루게 되었다. 그래서 구약성서에 대하여 많은 비평적인 노력 끝에 1977년에는 Biblia Hebraica Stuttgartensia 가 가장 권위있는 구약 원문 성서로 인정받게 되었다.

3) 1937년에 현행 개역성서 출간

6. 한국 성서의 번역사


가. 해방 이전

1) 구츨라프 선교사가 1832년에 중국에서 한문 성서를 가지고 와 왕과 신하들에게 선물로 주었다.

2) 토마스 선교사가 1865년에 황해도 해안에서 한문 성서를 전해주었다.

3) 1873년 로스 선교사가 한국인 서상륜을 만나면서 한국말로 성서를 번역하기 시작하였다. 1882년에 처음 번역된 것이 누가복음이었다.

4) 1887년 로스 선교사가 매킨타이어 선교사와 함께 신약성서 전부를 번역하였다. 그 이름이 예수성교전서이다.

5) 1882년 한국문호가 개방되면서 알렌, 언더우드, 아펜젤러 선교사가 한국에 와서 1887년에 한국성서위원회를 조직하였고, 1893년에는 공선 번역위원회를 조직하였다.

6) 신약성서의 경우 1900년에 신약전서가 완전히 번역되었다. 이후 개정의 필요를 느껴 1904년 개역되었고, 1906년에는 그것을 재수정하여 결정본으로 삼았다.

7) 구약성서의 경우 1910년에 완역되어 1911년에 신약성서와 함께 ‘성경전서’로 간행되었다. 그러나 이 성경은 원문번역이 아닌 영어, 한문 성경을 번역한 것이었기에 내용이 정확하지 않았다.

8) 이후 1912년에 개역의 필요성을 느껴 위원회가 조직되었고, 1937년 드디어 ‘성서개역’이 완성되었다. 오늘날까지 사용하고 있는 개역한글판 성경이 바로 그것이다.


나. 해방 이후

1) 이후 성서공회에서는 1960년에 새번역 사업을 추진하기로 하고, 중학교 이상의 학생이 읽고 쉽게 이해할 수 있는 번역을 시도하게 되었다. 이때 번역에는 최신 비평판 헬라어 성서들을 대본으로 하게 되었다. 일을 진행한 결과로 1967년 신약성경의 새번역이 출간되게 되었다. 새번역 신약성서 출판을 끝낸 성서공회는 1968년 신구교 공동으로 구약성서 번역 사업을 시작하였다. 그런데 일이 진행되면서 67년 완성된 신약 새번역은 개신교를 위한 것이니 신구교가 함께 사용할 수 있는 번역도 새롭게 만들자고 합의하고 1971년에 신약 공동번역성서를 출간하고, 구약도 완료하여 1977년에 공동번역 성서를 출간하게 되었다.

2) 공동번역이 출간되자 천주교에서 환영하고 잘 사용한 반면, 개신교에서는 번역의 잘못을 지적하며 사용하지 않기로 결의하였다. 그래서 신약 새번역에 맞는 구약을 새롭게 번역하기로 하여 1993년에 표준새번역 성경을 출간하였다.

3) 1999년에는 공동번역 성경에 대한 오류를 잡고 달라진 한글맞춤법에 맞게 공동번역 개정판을 출간하였다.

4) 이후 대한성서공회는 2001년에 표준새번역 개정판을 내놓았다.

5) 1937년에 최종 완성된 성경전서는 이미 70년이상이 지나서 표기법과 번역상에 문제가 있어서 새롭게 오늘날의 언어로 번역할 필요성을 느끼게 되었다. 이에 1998년 73000군데를 고쳐서 개역개정판 성경을 발행하였다.

6) 개역개정판의 번역에 대한 실례를 아래에 실었다.

가) 창세기 16:12개역한글판 : 그가 모든 형제의 동방에서 살리라 개역개정판 : 그가 모든 형제와 대항해서 살리라 원어의 숙어적 의미를 따랐다 하갈의 아들 이스마엘을 두고 한 여호와의 사자(使者)의 말이다. 「개역」은 NAS(New American Standard version)의 이해를 따라 이스마엘이 그의 모든 형제가 살고 있는 땅의 “동방(東方)에서 살 것”이라고 말한 것으로 이해하고 있다. “동방에서”라고 번역된 히브리어 “알프네”는 문자적으로는 “…의 얼굴 앞에서(in the face of)”를 뜻하나 숙어적인 의미는 “…를 대항(對抗)하여(in defiance of)”, “……과 적대(敵對)하여”라는 뜻이다. 따라서 천사의 말은 이스마엘의 후손이 이삭의 후손과 늘 적대관계로 살아가게 될 것이라는 뜻이 된다. 이 숙어를 문자적으로 이해하여 “…… 앞에서” 혹은 “동방에서”라고 하면, 문맥과 숙어적 의미를 둘 다 무시하는 것이 된다.


나) 마태복음 5:28개역한글판 :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는 자마다 개역개정판 :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음욕을 품고 여자를 보는 자마다 원문의 의미를 중요시하였다 원문에서 “본다”는 동사 “불레포”에는 차서(次序)의 의미가 전혀 없고, 단지 “나쁜 욕망을 가지고 여자를 보면”이란 의미인데 반해서, 「개역」의 문체에는 시간이나 순서가 중요한 것처럼 오해될 소지가 있다. 여기에 사용된 동사 “불레포”의 시제(時制)가 현재분사, 능동, 주격, 남성, 단수형인 “불레폰”이므로 이 구절은, “음욕을 품고 여자를 보는 자”로 옮기는 것이 바른 번역이라고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