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약 성경해석학 및 개론
제 1 장 서 론
1. 서론의 방법
성경같은 책이 이 세상에 없다. 한 분이신 참 하나님의 기록된 계시요 인간의 구원을 위해 의도된 책이며 결코 오류가 없는 수 많은 증거들에 의해 신적 권위를 확증해 주는 책으로서 성경은 유일한 책이다.
구약 "서론"이란 성경 39권이 올바로 이해 되도록 그 고대의 배경을 구체적으로 연구하는데 적용되는 용어이다.그것은 성경의 여러 책에 언급된 언어,관습,역사적 상황,인물,장소,사건을 다룬다.
언어:원래 구약 성경이 쓰여지게 된 히브리어와 아람어 및 성경 본문에 사용된 단어들의 의미를 이해 할수 있도록 도움을 주는 셈어 연구(아람어,앗수르어,페니시아어,우가릿어,수리아어).
역사:히브리 백성들의 역사와 그들이 접하고 살았던 인근 국가들의 역사 연구.
종교및 문화:고대 이방인 저자들과 현대 고고학의 발굴에 의해 우리에게 알려진 비 히브리인 국가들의 종교와 문화 연구.
성경 각 권의 저작권:누가 썼느냐하는 문제는 그 책의 의미와 신빙성에 중요한 의미를 미친다.
편집연대:성경 각 권이 편집된 정확한 연대,혹은 근사한 연대는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에게 말씀하신 그 당시의 사람들이 직면하고 있었던 문제에 종종 실마리를 제공한다.
역사적 상황:하나님의 대변자로서 영감된 저자가 말씀을 선포한 그 역사적인 상황과 그 당시의 문제를 연구.
원문비평:필경자의 실수나 오류가 현재 우리에게 보전된 사본에 들어오기 이전에 있었던 각권 의 원본 연구.
본문의 완전성:성경 각 권이 그것에 의해 주장되는 바 대로의 저자에 의해 쓰여졌는지,혹은 다른 사람들의 글이 그것과 함께 결합되었는지를 검토한다.
본문의 전승사:성경 각 권이 어떻게 여러 사본군(群)으로 복사되고 전수되었으며,그 이후 유대주의와 기독교를 거쳐 성경이 어떻게 고대의 여러 언어들로 번역되어 왔으며 결국 활자의 발명후 히브리어 원본자체가 인쇄되었는지를 연구한다.
2.구약성경과 신약성경의 관계
신약성경의 저자들은 구약성경을 "다양하나 통일된 한권의 책"(a single composite whole,즉 Scripture)으로 보았다.구약이 비록 하나님의 무오한 지도하에서 하나님의 진리를 인간 저자들을 매개로 하여 쓰여진 것이지만 궁극적으로는 하나님 자신이 저자가 된다고 그들은 보았다(갈3:8,
벧후1:20).영감을 받은 사도들은 히브리어 성경의 저자가 되신 하나님의 의도를 중요시 하였다.
신약저자들은 전(全)히브리어 성경을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증거로 보았다.일반적으로 우리는 구
약성경은 준비요,신약성경은 그 성취라고 말한다.구약은 씨앗이요,신약은 그 영광스런 결실이다.
참으로 나사렛 예수께서 구약이 예언한 것을 성취하셨기 때문에 그의 생애와 행위는 절대적 권위를 지닌다.구약성경은 예수와 그의 교회가 섭리적 존재이며 하나님의 목적을 실현한 것으로 증거하고 있다.신약성경은 히브리어 성경이 하나님의 위대한 주제에 초점을 맞추고 하나의 구원계획을 전시하는 일관성 있고 통일성이 있는 유기체임을 증명하고 있다.
3.셈어군
헬라어는 시간을 표현하는데 정확한 반면 히브리어는 시제 보다는 오히려 행동의 방식에 주된 강조점을 두는 것이 다른 점이다.구약성경의 계시를 올바로 해석하기 위해 히브리어 동사와 구문의 특성에 정통하여야 한다.여러 셈어들을 분류하는 방법은 전통적으로 볼때 그것을 쓰는 나라들의 지역적인 위치에 따라 동서남북으로 나누는 것이다.동부 셈어는 악카드어이며 바벨론어와 앗수르어로 나누어졌다.남부 셈어는 아랍어와 에디오피아어,암하르어(Amharic,현대 에디오피아어)로 구성된다.북부 셈어는 아람어 군을 총괄하는데 그것은 주로 동부 아람어계와 서부 아람어계로 나누어 진다.서부 셈어는 우가릿어,페니시아어,가나안어로 구성된다.
제 2 장 구약성경의 영감성
1.성경의 독특한 영감성에 대한 증거
첫째로 구약성경 39권의 밑바닥에 흐르는 의미깊은 통일성이 있다.그것은 구약이 편집되기까지 수세기가 지났지만 유기적인 상호 연관성을 지니고 있음을 은연중에 나타내는 것이다.그것은 하나의 마음,저자가 되시는 하나님 자신의 마음이 나타난 것으로 설명하는 것이 가장 자연 스럽다.
둘째로 세계의 모든 종교들 중에서 오직 히브리 종교와 기독교만이 논리적으로 옹호할수 있는 인식론(종교지식의 학문)을 제공한다.성경을 떠난 4천년 동안의 인간 연구와 철학적 탐구의 결과가 무엇인가.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하나님을 알수 있고 우리의 생애를 위한 그의 뜻을 알수 있는가?오직 그가 자신을 우리에게 계시할때 뿐이다.그분 자신이 우리에게 말씀하시지 않는다면 우리는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문제에 대해서 확실한 대답을 결코 할수가 없다.성경이 하나님의 기록된 계시로 우리에게 그 자신을 소개하고 있다는 이 중요한 사실을 관찰하여야 한다.성경은 스스로 그것이 하나님으로부터 온 특별 계시임을 증거한다.그것은 그 말씀이 하나님 자신으로부터 왔다는 주장을 우리에게 하고 있다.즉"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느니라."만약 한 하나님이 계시고 그가 우리의 구원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면 이것은 그가 이 지식을 우리에게 확실히 부여할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
2.원문의 무오성
다음으로 우리가 물어야할 질문은 이 책은 어떤 종류의 기록인가?그것은 여러 종류의 오류를 내포하고 있는 것인가?만약 이 기록된 계시가 오류를 포함하고 있다면 그것은 그 자체의 고유한 목적인 인간 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뜻을 신빙성 있게 전달하고자 하는 목적을 성취할수 없을 것이다. 만약 성경이 진리와 오류를 섞어둔 것으로 판명된다면 그것은 다른 책인 코란,베다,우파니샤드,아나덱트,일리아드,오딧세이 등과도 겉은 것이다.인간이 성경의 진리에 타당한 판단을 내리려면 그는 하나님과 영혼의 영적 가치들에 대해 성경이 아는 것보다 자신이 더 많이 알아야 한다. 그러나 그럴수는 없는 것이다.그러므로 인간은 하나님의 계시에 전적으로 의존하여야 한다.만약 그 계시가 쓸모있고 신빙성 있는 것이 되려면 그것은 인간의 오류있는 판단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무오한 것이어야 한다.
3.사본의 전승이 무오한 것만은 아니다.
모든 오류에서 벗어났다는 무오성은 성경책들의 원본에 해당된다.그것들은 모든 실수와 무관하다.하나님께서 성경의 인간 저자들로 하여금 오류나 거짓을 쓰게 하실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소유하고 있는 성경의 텍스트는 어떠한가?그것 역시 모든 종류의 오류에서 벗어난
것이어야 하는가? 원본을 처음 복사할때 펜을 약간 잘못돌린 것과 사본을 사본하면서 전수되어 가는 중에 더 많은 실수들이 생기게 되었다.이런 경우는 거의 피할수가 없는 일이었다.
원본을 무오하게 복사를 할수 있다고 보증하는 것은 기적과 다름이 없다.오늘날 원문 비평가들은 구약 성경의 초기 사본들에서 많은 종류의 사본상 실수를 발견하였다. 이것들은 메시지 자체를 왜곡시키며 그 참뜻을 전달할수 없을 만큼 너무나도 심각한 것인가? 만약 그렇다면 하나님의 목적이 이루어질수가 없다.그 분은 자신의 계시를 전달할수 없기 때문에 후세대의 사람들은 그것을 올바로 이해 하지 못할 것이다. 만약 그분이 성경의 표준판과 권위있는 사본들을 복사하는 서기관들에게 어떤 억제력을 행사하지 않았다면 그들은 그 메시지를 왜곡시켰을 것이다. 만약 그메시지가 오도되면 기록된 계시를 주신 그 전체적 목적이 무효로 돌아가버리게 된다.왜냐하면 이렇게 왜곡된 성경은 진리와 오류의 잡탕이므오 인간을 판단하는 자리에 앉기 보다는 인간의 판단을 받아야만 할 것이다.
우리가 분명히 이해해야 하는 것은 구약성경이 우리가 알고 있는 기독교이전 시대의 모든 문학들과는 다르다는 사실이다.히브리어 성경의 전수에 있어서 하나님의 특별한 간섭이 없었다면 똑같은 모순과변화의 현상이 일어나지 않을 이유가 없다. 이사야서 두 권이 사해 근처의 쿰란 동굴 1에서 1947년에 발견되었는데 그것은 이전에 알려진 가장 고대의 사본(A.D.980)보다 약 1000년 이전의 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우리가 가지고 있는 히브리어 성경 표준판과 비교해볼때 95%이상의 단어에 일치한다. 나머지 5%의 차이는 펜을 잘못돌렸는지 스펠링을 다르게 쓴 것들이 대부분이다.
4.영감 교리에 대한 성경의 자체 증거
성경은 스스로 그 무오성을 주장하고 있는가?종종 성경은 그 무오성을 주장하고 있지 않다고 말하지만 사실은 성경을 깊이 연구할수록 성경은 그 스스로 무오한 하나님의 말씀으로서의 절대적인 권위를 부르짖고 있음을 깨닫게 된다.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 일획이라도 반드시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마 5:18).
"성경은 폐하지 못한다"(요 10:35).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다"(벧후 3:16).
"… 선지자들을 통해 말씀하신 하나님이 …그의 아들로 우리에게 말씀하신다"(히 1:1-2)
" 이 구원에 대하여는 너희에게 임할 은혜를 예언하던 선지자들이 연구하고 부지런히 살펴서 자기 속에 계신 그리스도의 영이 그 받으실 고난과 후에 얻으실 영광을 미리 증거하여 어느 시 어떠한 때를 지시하시는지 상고하니라"(벧전 1:10-11)
"예언은 언제든지 사람의 뜻으로 낸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의 감동하심을 입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받아 말한 것임이니라"(벧후 1:21)
5.하등적 영감관
성경의 영감에 대하여 신 정통주의적 접근을 하는 자들은 성경에 있는 교리적 진실과 오류를 판단하는 기준으로서 소위 그리스도의 마음을 제시한다.진리의 기준은 그리스도의 마음인 것이다.
그러나 신약성경에 기록된 그리스도의 선언들중 많은 것이 소위 "그리스도의 마음"과 너무나 크게 충돌하고 있다.
"뱀들아 독사의 새끼들아 너희가 어떻게 지옥의 판결을 피하겠느냐"(마23:33).
"저주를 받은 자들아 나를 떠나 마귀와 그 사자들을 위하여 예비된 영영한 불에 들어가라"
(마25:41).등 그의 진술중 기록된 몇가지에 근거하여 그리스도가 어떠했겠다는 철학적인 개념을
세우고 동일한 자료에 기록된 다른 진술들의 신빙성에 대하여는 그것들이 자신들의 입맛에 맞지 않는다고 그 진정성을 부인해 버리는 것은 전혀 일관성이 없는 일이다.이와 같은 과정을 밟아 나가는 것은 인간의 이성을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에 억지로 집어넣는 것이요,하나님의 말씀중 인간의 마음이 승인해 주는 것만이 진리라고 주장하는 것이다.그러나 인간의 지성이 참된 종교적 지식을 얻는데 있어서 부적당하고 신빙성이 없는 도구임을 보았었다.성경이 인간을 판단해야 한다.
인간은 결코 성경을 판단하는 자리에 앉을수 없다.
전형적인 신정통주의적 성경관은 성경을 단지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 정도로만 보는 것이다.성경의 텍스트가 인간 저자에 의해 쓰여졌으며 모든 인간들은 죄에 빠졌고 오류의 지배를 받기 때문에 성경 자체에도 오류가 있음이 틀림이 없다고 말한다.이와같은 성경관은 모든 종류의 과학적 역사적 오류들을 향해 문호를 개방하며 모세,이사야,다니엘과 나머지 글들의 진정성에 대해 합리주의자들이 고등비평을 하는 것을 용인하게 돤다.성경이 인간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므로 이 모든 실수와 오류가 있는 것이 정상으로 여겨진다.신정통주의의 신학자들은 성경 기록의 진실성에 대한 합리주의적 고등비평의 공격을 옆으로 돌리고 초자연에 대한 과학적 반박앞에서 기독교 메시지의 의의를 살리려고 노력하다가 계시 자체의 성격에 대해 역설적인 견해로 빠지고 말았다.그들은 하나님의 계시가 그 성격 자체에 있어서 성경화 될수 없다는 견지를 지지한다.
6.성경의 난제를 다루는 법
사실 우리에게 전수된 성경의 텍스트는 성경 무오의 교리에 도전을 하는 듯이 보이는 난제들을 가지고 있다.이와 같은 어려움들중 어떤 것들은 본문 비평학을 올바로 사용함으로써 해결이 된다.
이런 문제를 다룰때 두가지의 가능한 방법이 있다.첫째는 그 개개의 난제가 풀릴때까지 성경 자체가 주장하는 무오성을 중지시키는 것이다.새로운 문제가 생길때마다 그것이 만족스럽게 해결될때까지 성경은 의심받는 위치로 강등이 된다.이러는 동안 신자는 성경에 대한 의심이 풀릴때까지 영혼의 고통과 힘든 의심의 고리에 묶여 있게 된다.둘째는 명백한 불일치 앞에서도 성경 기록의 무오성에 대한 자신의 신앙을 굳게 잡고 후일의 연구가 답을 확실하게 제시할때까지 인내하며 기다리는 것이다.오직 성경의 신적인 기원이 성경 현상을 설명해 준다고 믿으며 나사렛 예수와 함께 기록된 하나님 말씀의 무오성을 붙잡고서 제기된 모든 문제가 결국 해결될때까지 믿고 바라보는 것이다.성경의 신적 권위를 확신하는 자에게 있어서는 그 무오성에 대한 의심이 풀려 질때까지 기다리는 자가 어리석고 합당치 않게 보인다.그것은 종종 과학적이고 객관적인 절차를 밟는 다기보다는 우유 부단한 자세로서 하나의 전제에서 다른 것으로 논리성이 없이 왔다 갔다 하게 된다.명백하고 분명한 상이점이 성경에 있다면(특히 원본에서 확증될 수 있는 것이라면) 성경의 무오성에 대한 신앙을 버려도 좋은 이유가 될수 있을 것이다.그러나 이와같은 것이 증명될때까지 혹은 이와같은 변명의 여지가 없이 역사나 과학에서 오류가 있는 것이 법률적 증거의 법칙에 따라 확증이 될때까지 성경을 믿는 자는 그것이 무오한 하나님의 말씀이란 전제를 잊어서는 안된다.그동안 수많은 시도들이 있었지만 이와같은 오류는 법정에서 만족할 정도로 발견되지 않았다는 것은 대단히 의미심장한 일이다.
제 3 장. 히브리어 사본들과 초기 역본들
1.가장 초기의 히브리어 사본들
(1)기독교 이전의 사본들
기독교 이전의 사본들은 주로 사해의 동굴에서 발견된 그 놀라운 사본들로 주축을 이루고 있다.이 사본들이 발견된 여러 동굴들이 사해의 북동쪽 해안을 따라 와디 쿰란의 깊은 계곡(the canyon
of the Wady Qumran)가까이에 위치하고 있기 ㅤㄸㅒㅤ문에 이를 쿰란의 자료들이라 말한다.사해 사본을 구분할때는 먼저 동굴의 번호를 제시하고 성경책 각 권의 약자를 뒤따라 적으며 그 후에 사본들이 빛을 보게 된 순서에 따라 어깨 위에 글자를 써서 동일한 책의 다른 사본들과 구별을 할수 있도록 한다.예를 들면 사해 사본 이사야서 두루마리(Isaiah Scroll)는 1QIsa 로 쓰며 이것은 와디 쿰란의 첫 동굴에서 가장 먼저 발견된 이사야서 사본이란 뜻이다.히브리 대학의 이사야서 두루마리는 전문적으로 1QIsb 로 알려져 있다.동굴 1과 4에서 출판된 성경의 단편들 외에도 수 천개의 파편들이 재발견 되었고 그중 380개 이상의 다른 사본들이 확인 되었으며 그중 약 100개가 구약 성경의 단편으로 알려졌다.동굴 2에서는 약 180개 이상의 단편들이 발견되었으며 그중의 1/4이 성경 단편이다.동굴 11에서는 다섯 개의 두루마리가 발견 되었으며 그것은 레위기의 일부,시편을 발췌한 하나의 두루마리,욥기의 아람어 탈굼,외경 새 예루살렘 묵시록이다.
사해 이사야서 두루마리(1QIsa):이사야서 66장이 모두 있다.(B.C.150-100)이 중요한 텍스트는 맛소라 텍스트(MT)와 동일한 사본계(manuscript family)에 속한다.가끔 이것은 70인역(LXX)의 읽기를 지지해 주기도 한다.그리고 MT와 다른것 대부분은 명백한 서기관의 오류에 기인한 것이다.
하박국 주석(1QpHb):제 1장과 5장만을 주석했는데 절들 사이에 군데 군데 주석 노트가 있다(B.C.100-50).인용된 하박국 텍스트가 MT와 아주 가까운 관계를 가지고 있음을 알수있고 차이점이 있기는 하나 성격상 차이는 별로 없고 서기관의 오기로 볼수 있다.그러나 아주 드물게 차이점들중 LXX이나 혹은 다른 역본들을 지지하는 것을 발견할수 있다.
히브리 대학 이사야서 두루마리(1QIsb):주로 이사야41-66장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다.(B.C.50년경)
이것은 1QIsa보다 MT에 더 가까이 있다.
1Q레위기 단편들:19-22장의 몇절을 담고 있다.(약B.C.4세기-de Vaux,Burrows/B.C.2세기-Cross)이 사본은 MT와 상당히 일치하고 있다.그것은 古히브리어(paleo-Hebrew)필체로 쓰여졌다.
4Q신명기 B:32:41-43은 산문이 아니라 시로써 半行으로 쓰여졌다.세곳에서 LXX을 지지하고 MT와 다르다
4Q사무엘서 A:사무엘상 1,2장을 다루며 27개의 파편들로 이루어져 있다.(B.C.1세기경)몇곳에서 LXX와 일치하고 MT와 다르며 또 어떤 곳은 둘다 반대한다.
4Q 사무엘서 B:사무엘상 16,19,21,23장이 담겨져 있다.(B.C.225년 혹은 그이전)이것은 MT보다 더 모음을 시사하는 자음(matres lectionis)을 적게 쓰고 있다.이 텍스트는 MT와 다르고 LXX을 일관성있게 지지하고 있다.
4Q예레미야서 A:크로스에 따르면 고대풍으로 쓰여졌다고 한다.
4Q ?-A(?는 소선지서 사본을 가르킨다):크로스는 B.C.3세기의 초서체로 쓰여졌다고 한다.
4Q Qoha :2세기의 초서체 전도서로서 크로스에 따르면 최소한 3세기나 혹은 그 이전의 자료에서 나왔다고 한다.
4Q 출애굽기:제 1장의 단편으로서 LXX을 지지한다.
4Q 출애굽기:제7,29,30,32의 부분들을 담고 있으며 古히브리어 필체로 쓰여졌다.이 사본은 상당한 부분에서 MT와 다르고 사마리아 오경(the Samaritan Pentateuch)과 일치한다.
4Q 민수기:사마리아어 형태를 확장하여 사각형의 히브리어로서 기록되었다.사마리아 사본이나 MT놔 다르며 LXX과 일치하고 있다.
4Q 신명기A:제 32장 (모세의 노래)
11Q 시편:동굴 11에서 발견된 시편의 사본으로서 헤롯시대에 유행한 규격적인 책 글씨 형태로 복사되었다.각 페이지의 하부 1/3이 유실되었다. LXX의 시편 151편을 포함하여 33개의 시편이 보존되어 있다.4개의 독립된 파편들이 네개의 시편들 일부를 기록하고 있기 때문에 총 37개가 된다.
위와같은 쿰란의 자료들을 다음과 같이 분류할수 있다.
원 맛소라계(the proto-Masoretic):여기에서 현재의 우리가 가진 히브리어 자음 텍스트가 나왔다.
원 70인역계(the proto-Sepuagintal):후대의 70인역이 나오게 된 원래 헬라어 번역의 히브리어 전신(the Hebrew Vorlage).
원 사마리아계(the proto-Samaritan):히브리어 오경의 후대 사마리아 텍스트를 위한 기초를 형성하였다.
중간계(a neutral family):이것은 위의 세 계통의 갈등하는 전통사이에서 다소 중도를 지키고 있는 계통이다.
(2)기독교 이후의 사본들
대영 박물관 오리엔탈4445(British Museum Oriental 4445):오경의 사본으로서 A.D.850년 후경으로 추정되는 자음 텍스트이며 모음부호는 약 1세기 전후에 첨가되었으며 대부분의 창세기와 신명기는 유실되었다.
케이어렌 시스 사본(Codex Cairensis C):대소 선지서를 포함하고 있으며 A.D.895년 아론 벤 아셰르에 의해 복사되었다.
소 선지서 레닌그라드 사본(Leningrad MS):A.D.916년에 쓰여졌다고 한다.바벨론 구둣점이 찍힌 이 사본은 크리미아에 있는 츄퓨트칼러에서 피르코비취가 발견하였다.
레닌그라도 사본 B-19A:구약성경 전권이 여기에 담겨 있으며 벤 아셰르 맛소라 텍스트에 있다.이것은 A.D.980년 MS(그후로 분실됨)를 A.D.1010년에 충실하게 복사한 것으로서 오늘날 히브리어 성경의 표준 텍스트가 되는 킷텔의 Biblia Hebraica 제3판의 기초가 되었다.
사마리아 오경(the Samaritan Pentateuch):이 판의 최초 사본들은 아직까지 나블루스(Nablus)에 있으며 사마리아 분파주의자에 의해 출판이 금지되어 있다.이 사마리아판은 MT와 6천가지 정도 틀린 점을 가지고 있으나 그 대부분이 활자의 차이에 불과하다.그러나 약 1900개의 경우에 있어서는 그것이 MT와 다르면서 LXX와 일치한다.(예,족장들의 나이)사마리아 오경의 사본들중 그 어느것도 A.D.10세기 이전에 쓰여진 것이 없는 것으로 알려졌다.
(3)히브리어 성경중 오래 전에 출판된 것으로서 가장 중요한 것들
시편의 볼로냐판(Bologna Edition of the Psalter),1477년
구약 산시노판(Soncino Edition of OT),1488년
구약 제2 봄버거판(Second Bomberg Edition of OT),1525-26년
2.구약 성경의 초기 역본들
(1)헬라어 역본들
70인역:이것은 알렉산드리아에서 B.C. 250-150년에 번역되었다.
라일랜드 파피루스 458(Rylands Papyrus 458)은 신명기 23-28장(B.C. 150)을 담고 있으며 이것은 미이라로 싸서 우리에게 보존되어 왔다.
쿰란동굴 4에서 아래의 단편들이 나왔다.파피루스로 쓴 레위기 단편은 표준 LXX와 아주 일치하나 "여호와"를 표기할때 kyrios 대신에 IAO를 사용한다.가죽에 쓴 레위기 단편은 26:2-16절을 담고 있으며 후대 LXX와 열개의 차이점을 가지고 있다.가죽에 쓴 민수기 3:30-4:14절의 단편이 있는데 LXX와 아주 드물게 다른 헬라어를 사용하나 원본에 있는 똑같은 히브리어 단어를 번역한 것이다.
체스터 비티 파피리(The Chester Beatty Papyri)는 이집트의 옥시린커스(Oxyrynchus)에서 발간되었다. Ⅵ는 약 A.D.150년 경의 것으로서 민수기와 신명기의 부분들이다. Ⅶ(약 A.D.230년경)은 파유믹 콥틱어로 주석이 되어 있으며 이사야서의 부분이다. Ⅴ(약 A.D.270)는 창세기의 부분들이며, Ⅳ(약 A.D.359)는 창세기 9:1-44:22절이 기록되어 있다.
파피루스 911은 이집트에서 나온 것으로 A.D.3세기 말의 것으로 추정되며 초서 언셜체로 기록되었고 창세기 1-35장의 부분들을 담고 있다.
소선지서 프리어 헬라어 사본 V(Freer Greek Manuscript V)은 와싱턴에 있으며 33개의 파피루스 잎을 종합한 것으로 A.D.3세기 후반의 것이며 애굽인의 손으로 기록되었고 호세아서를 제외한 모든 선지서의 텍스트를 거의 전부 담고 있다.
오리겐의 헥사플라(Origen's Hexapla)는 A.D. 240년 경에 쓰여졌다.그 당시에 사용되던 LXX의 사본들사이에 많은 상이점들이 있었고 또 LXX에 히브리어 텍스트의 어떤 부분들이 빠져 있는 것을 발견했기 때문에 그는 여섯개의 평행칼럼으로 헬라어 구약성경을 써내려갔다.(1)히브리어 원본,
(2)히브리어를 헬라어로 음역함,(3)아퀼라의 직역한 헬라어번역,(4)시마쿠스의 헬라어 번역,(5)70인역 자체,(6)데오도션의 헬라어 번역.히브리어 성경에 없는 것이 헬라어 번역에 나타나면 오벨리스크(수평으로 구별하는 일획)을 삽입하고 메투벨루스로써 달아주었다.히브리어에 있는 것이 70인역에 나타날 경우에는 별표나 메투벨루스로써 표시를 하면서 헬라어 번역을 다른 칼럼들 중에서 하나에 삽입해 두었다.
히시키우스 개정판(the Hesychian Recension)은 70인역 텍스트를 애굽에서 히시키우스 감독이 개정한 것인데 Q에 있을수 있는 가능성을 제외하고는 어떤 초기의 사본에도 남아 있지 않다.
루시안 개정판(the Lucianic Recension)은 사모사타와 안디옥의 루시안에 의해 만들어졌으며 후대의 사본중 베네투스사본에만 남아있다.
바티칸 사본(Codex Vaticanus: B)은 거의 신구약 성경을 다 담고 있는 놀라운 사본으로 A.D.325-350년에 쓰여졌다
시내산 사본(Codex Sinaiticus:Aleph)은 구약 부분은 상실되었지만 신약 전권을 담고 있는 사본이다(약 A.D.375-400).어떤 부분은 바티칸 사본을, 일부는 알렉산드리아 사본을 닮았다.
알렉산드리아 사본(Codex Alexandrinus:A)은 또 하나의 중요한 신약 텍스트로서 약 450년경에
쓰 여졌다.그것은 근본적으로 애굽타입의 텍스트이지만 헥사플라 형태와 몇가지 유사점을 가지고 있다.
후대 헬라어 역본들
아람어 역본은 폰투스(Pontus)출신 아퀼라에 의해 쓰여졌다.그는 유대교에 개종한 자요 랍비 아키바(Aqiba)의 제자로 알려져 있다.그의 작품은 A.D.130년에 출판 되었으며 아주 엄격한 직역을 한 것으로 알려져 인정되었다.아퀼라의 번역은 인용으로나 단편으로 남아 있는데 특히 열왕기와 시편 90-103편에서 찾아볼수 있다.
시마커스 역본(Symmachus Version,약 A.D.170년경)은 아주 높은 수준의 정확성을 유지하면서도 좋은 관용어 헬라어로 구약성경을 번역한 것이다.
데오도션의 역본(Theodotion's Version):약 A.D.180년 혹은 190년 은 새롭고 참신한 번역이 아니라 초기의 헬라어 역본을 개정한 것이다.지금도 그것이 LXX이었는지 혹은 다른 것이었는지 대해서는 논재의 여지가 많이 있다.다니엘서의 경우에 있어서 데오도션 번역은 원 LXX의 번역과 상치된다.이는 그것이ㅐ 초대 교회 시대에 널리 퍼져 있던 히브리어 원본에 더 충실했기 때문이다.
(2)아람어 탈굼들
바벨론 포로중 유대인들은 히브리어를 버리기 시작하면서 점점 더 당시의 국제언어인 아람어를 쓰기 시작했다.그때 아람어는 바사 왕국이 설립된 후부터 바사 정부와 그 하에 있는 종속국 사이에서 주된 의사 소통의 매개체였고 정치와 상업에 있어서 국제 언어가 되었다.유대인 회중들이 그들의 히브리어를 점점 잊어가기 시작하자 회당 예배 시간에 읽은 히브리어 성경을 아람어로 번역해 줄 필요를 느끼게 되었다.口傳이 수세기를 계속되면서 특히 유대인들이 팔레스타인에서 A.D.138년에 추방이 된후에는 이 아람어 의역을 글로 쓸 필요가 생겨서 탈굼(targum,해석)이라는 것을 만들었다.
옹켈로스의 토라 탈굼(The Targum of onkelos,A.D.3세기경)은 바벨론에 살던 유대인 학자들에 의해 만들어졌다.그것은 아쿨라 헬라어 번역을 한 폰투스 출신 바로 그사람으로 여겨지는 어떤 옹켈로스라는 사람이 쓴 것으로 여겨진다.그러나 그것이 동방에서 나온 것이고 후대헤 편집되었다는 사실은 이 전통의 신빙성을 의심하게 한다.
조나단 벤 우지엘의 선지서 탈굼(The Targum of Jonathan ben Uzziel)은 여호수아서에서 열왕기까지 이야서에서 말라기까지를 다룬 것으로 A.D.4세기에 편집되었고 바벨론에 있던 사람들 사이에서 만들어졌다.그것은 옹켈로스보다 히브리어 텍스트를 번역함에 있어 훨씬 더 의역을 하며 자유롭게 한다.
익명의 요나단의 토라 탈굼(The Targum of Pseudo-Jonathan)은 A.D.650년경에 나왔고 옹켈로스와 미드라쉬 자료들을 섞은 것이다.
예루살렘의 토라 탈굼(The Jerusalem Targum)은 A.D.700년 경에 나왔다.
(3)라틴어 역본들
구 라틴어,혹은 이탈라 역본(2세기 동안 편집되었고 약 A.D.200년경에 완성된)은 히브리어로부터 직역을 한것이 아니라 70인 역을 라틴어로 번역한 것이다.따라서 이것의 가치는 "방계번역"이라는 데만 있다.그것은 초기의 70인역 텍스트를 밝혀 주는데 도움을 주고 있다.
제롬의 벌게이트(Jerome's Vulgate,A.D.390-404)이것은 서방교회에서 권위있는 라틴어 성경을 거
의 공식적인 인정을 받았다.그후 수세기 동안 그것은 이타랄와 함께 평행칼럼으로 출판되었고 16세기 중엽 트렌트 총회에서 벌게이트의 삭제된 부분들을 다시 회복하라는 결정을 내려 1590년 식스타인 판을 출판하고 곧이어 1592년에 수정 증보된 클레멘타인판이 나오게 되었다.
(4)수리아어 역본들
아람어 옹켈로스 탈굼이 형성되던 그때에 수리아의 기독교인들도 그들의 동부 아람어 방언으로 다소 표준 성경번역판을 만들기 시작하였다.신약성경을 번역할때는 헬라어 원본을 사용했음이 분명하다.
페쉬타(단순한) 수리아어(the Peshitta Syriac)구약 성경은 4세기 수리아어 문헌들에 이미 인용이 되기 때문에 2세기 혹은 3세기 편집된것이 분명하다.처음에는 구약성경이 히브리어 원본에서 번역이 되었으나 후에 70인역과 좀더 가까워지도록 만들기 위해 몇번의 개정이 있게 되었다.페쉬타는 에뎃사의 감독 랍불라의 권위하에 개정되어 출판된후 수리아어를 쓰는 교회에서 공식적인 위치를 획득하게 되었다(약 A.D.400)
수 리아어 헥사플라(the Syric Hexapla)는 다른 기존 구약성경 번역중 유일한 것이다.오리겐의 헥사플라의 다섯째 칼럼을 번역한 것으로 텔라의 감독 폴의 후원으로 A.D.616년에 출판되었다.
(5)다른 역본들
애굽 설형문자로부터 내려온 방언으로 콥틱어 역본이 있는데 기독교 시대에 그것이 많은 헬라어를 빌려쓰게 되었으며 헬라어 알파벳으로 쓰여졌다.성경을 번역한 언어는 사히딕어(Sahidic,남부 방언),혹은 보하이릭어(Bohairic,멤피스와 델타에서 사용)으로서 LXX의 히시키아 개정판으로 거슬러 올라간다.그것은 히브리어에서 직역한 것이 아니고 헬라어에서 번역하였다.
에 디오피아어 역본(the Ethiopic Version)은 4세기에 기록된 것으로 추정되며 현존하는 최초의 사본은 13세기의 것이다.
아랍어 번역들은 하나의 권위있는 역본으로 표준화되어 본적이 없지만 대부분이 LXX으로부터 만들어졌다.사디아 가온(Saadia Gaon)의 아랍어 번역만이 중요한 예외이며 유대인으로서 그는 히브리어 텍스트에서 직접 번역하였다.
알메 니아 역본(The Armenian Version)이 처음 나온 것은 5세기 초엽인 것같다.그것은 레위파로부터 약간의 영향을 받은 것같다.
윌필라스가 만든 고딕원본(the Gothic Version by Wulfilas).은 약 330년에 출판되었으나 구약 부분도 남은 것이 별로 없다.
(6)수 개국어 대형 성경
콤플류툼 폴리글로트(the Complutensian Polyglot)는 최초의 것으로서 콤플류툼,혹은 알칼라라는 이름으로 불려진다.그것은 시메네스(Ximenes)추기경의 후원 하에 교황의 승인으로 1522년에 출판되었다.
안트베르프 폴리글로트(the Antwerp Polyglot)는 스페인의 필립 2세의 성원하에 8권으로 1569-1572년에 나오게 되었다.
파 리 폴리글로트(the Paris Polyglot)는 1645년에 나타난 것으로 안트베르프판의 텍스트를 따르나 사마리아 오경과 사마리아 아람어 역본,페쉬타,그리고 아람어 역본을 추가하였다.
런던 폴리글로트(the London Polyglot)는 이탈라,에디오피아어 시편과 아가서 역본,아포크리파(헬라어,라틴어,수리아어,아랍어),오경에 대한 익명의 요나단이 쓴 탈굼,그리고 바사 역본까지 다 포함 하였다.그것은 1656-1657년에 브리안 왈톤 감독에 의해 여섯권으로 편집되었다.
제 4 장 구약성경의 하등비평
성경의 저작권과 순수성 문제를 다루는 고등비평과 하등비평은 우리에게 불완전한 사본들에 기초하여 원본을 회복하는 작업이다. 잔존하고 있는 사본들이 일치하지 않는 부분 즉, 다른 단어나 문장에 근거한 것인가를 체계적으로 검토하는 일이다.
1. 사본이 지닌 오류의 형태
무엇보다 필경사가 저지를수 있는 오기의 형태들을 분석하고 오류들이 어떻게 생기게 되는가 를 관찰하여 살펴보자. 가장 평범한 오류를 제1쿰란 이사야서(1Qlsa)에서 예중을 제시한다.
① 중자(重子)탈락(haplography) : 중복되어져 써야할 글자 하나, 한 음절, 혹은 단어를 한번만 기록한 것이다. 이사야 26:3 BeKa B e uW는 "당신을 그들이 신뢰할 것이다" 이는 "당신을 신뢰함; 너희는 신뢰하라) 대신에 쓴 것이다.
② 중복오사(重複誤寫, ditography)는 한번만 써야하는 것을 두번 쓰는 것이다. 이사야 30:30에 있는 H MY H MY (듣게 하다 듣게 하다)는 MT의 H MY (듣게 하다) 대신에 쓴 것이다. 즉, 한번 써야 할 것을 두번 썼다. 에스겔 48:16의 MT는 원래 M M'WT(5×100)으로 써야 하는데 M M M'WT(5×5×100)로 썼다.
③ 글자의 순서를 바꿈(metathesis): 글자나 단어의 원 위치를 거꾸로 만드는 것이다. 이사야 32:19 HY'R(삼림)은 MT의 H'YR(성읍) 대신에 사용된 것으로써 문맥에 뜻이 잘 통한다.
에스겔서 42:16은 명백하게도 M M'WT QNYM (500척)인데, MT의 자음 텍스트는 M 'MWT QNYM(5규빗 척)으로 읽고 있다(맛소라 학파에서도 그 난외주에 500척으로 교정하고 있다).
④ 합성(fusion): 두 개의 다른 단어들을 하나로 결합하는 것으로 아모스 6:12의 BBQRYM(소들과 함께)는 원래 BBQR YM(소들로써 바다를, 즉 사람이 소들로써 바다를 가겠느냐?)를 가리킬 것이라고 제시한다. 라이핀스는 이사야 3:15의 MLKM(MT의 자음 텍스트에 따르면, 그 뜻은 "그들의 왕")을 인용하여 원본이 문맥에 따라서 MH LKM(어찌된 일이냐?)일 것이라고 한다.
⑤ 나눔(fission): 하나의 단어를 두개로 분열시키는 것이다. 이사야 2:20에 MT는 L PR PRWT(쥐구멍)은 두루마리에 있는 L PRPRWT(뾰족뒤 쥐<두더지?>, shrew-mice)로 수정되어야 한다.
⑥ 동음이어(homophony) : 같은 발음을 가진 다른 단어로 대치시키는 것이다. 종종 LW(그에게)를 L'(not)으로 대치시킨다. 이사야 9:3에서 MT와 두루마리는 둘 다 HRBYT HGWY L' HGDLT H M H(당신은 백성을 번성케 하셨나이다. 당신은 기쁨을 크게 하지 않았습니다)는 HRBYT HGWY LW HGDLT H M H(당신은 백성을 번성케 하셨나이다. 당신은 그를 위해 기쁨을 크게 하셨나이다)로 수정하는 것이 더 좋은 뜻을 드러내어 준다. 여기서 문제가 된 것은 L'와 LW가 둘다 l 로 발음이 되는 데 있다.
⑦ 비슷하게 보이는 글로 읽음 : 약 B.C. 600년부터 (달렛)와 (레쉬)가 아주 유사하게 쓰여졌기 때문에 종종 바뀌어 졌으며 이런 현상은 특히 代名詞에서 나타났다. 창세기 10:4의 "도다님"은 역대상 1:7에서 "로다님"으로 나타나며 이것이 로데 사람을 가리킬 가능성이 있으므로 많은 사람들에 의해 더 좋은 독법으로 알려졌다. 또 (와우)와 (요드)가 B.C. 150년부터 아주 유사하게 쓰여졌으므로 이사야서 두루마리조차 구분하기가 종종 어렵게 되었다.
⑧ 유사한 끝(homoeoteleuton) : 이것은 필경사의 눈이 하나의 끝에서 다음에 나오는 유사한 것
의 끝으로 바로 넘어가버림으로 중간 구(句)를 생략해 버리는 것이다. 호모에오텔유톤이란 헬라어로서 "유사한 끝"이란 뜻이다. 이것의 예를 들자면 이사야 4:5 두루마리에서 찾아볼 수 있다. BR' YHWH 'NN (YWMM W'SN WNGH' LHBH LYLH KL 'L KL KBWD PH WSKH THYH L L) YWMM M RB. (생략된 단어는 괄호 안에 있다). 여기에서 우리가 관찰할 수 있는 것은 필경사의 눈이 YWMM(날에)에서 둘째 YWMM 으로 뛰어 넘어버려 그 사이에 있는 13개의 단어를 생략하게 되었다.
⑨ 단어가 우연히 생략된 경우 : 삼상 13:1의 MT는 "사울이 다스리기 시작할 때……세였다"라고 하였다. 불행하게도 LXX이나 다른 역본들도 여기에 숫자를 기록하고 있지 않고 있기 때문에 본문비평도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⑩ 모음을 자음으로 잘못 읽는 경우 : 히브리어 글자 알렙, 헤, 와우, 요드 는 초기에는 자음으로만 사용하였다. 그러나 점차적으로 모음으로 사용되었다. 이런 경우에 알렙( , '), 헤( , H), 와우( , w), 혹은 Y( , 요드)는 발음은 되지 않으나 모음용 자음으로 여겨지게 되었다. 마카비 시대에 이 모음들은 점차 확대되었는데 이는 사람들이 아람어를 모든 생활 속에서 생활했기 때문에, 히브리어 발음에 어려움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2. 본문 비평의 법칙들
제1법칙 : 더 오래된 독법에 우선권을 둔다. 이 법칙은 더 오래된 사본이 최소한 후대의 것만큼 신빙성이 있고 기이한 것이나 특출한 없는 곳에 적용된다.
제2법칙 : 더 어려운 독법에 신빙성이 있다. 이유는 필경사가 원본을 독자들이 이해하기 어렵도록 만드는 것보다 더 쉽게 하고 단순히 하려는 경향이 더 강하기 때문이다.
제3법칙 : 더 짧은 독법일수록 신빙성이 크다. 이유는 필경사가 성경 어느 부분을 삭제하기보다는 새로운 자료를 추가하기가 더 쉽기 때문이다. 중간탈락과 호모에오텔류톤의 경우에 이 법칙은 적용이 안된다.
제4법칙 : 모든 차이들을 가장 잘 설명해 주는 독법이 신빙성을 지닌다. 시편 22:16(MT 22:17)에 있는 K'RY YDY WRGLY는 맛소라 학파에 의해 지적된 바와 같이(K 'aRiY) "사자와 같이 내 손과 내 발을" 이란 뜻을 지닌다. 콤풀류툼 수 개국어 성경(the Complutensian Polyglot)에 있는 히브리어 칼럼에는 K'RW로 되어 있고 Ka'RuW로 발음이 되는데 그 뜻은 "그들이 구멍을 뚫었다"이다. 어느 것이 역본의 독법에 있어서 상이점들을 가장 잘 설명해 주는가? 아마 둘째번 독법인 듯하다. 왜냐하면 LXX, 페쉬타와 벌게이트와 제롬의 히브리어 시편까지도 "그들이 뚫었다," 혹은 "찔렸다"로 읽고 있기 때문이다. 시마커스는 그것을 "묶으려고 한다"로 번역하였는데 이것은 K'RY나 K'RW 중 어느 것도 지지하지 않는 것이다.
제5법칙 : 폭넓은 지역의 지지를 받는 독법이 우선권을 가진다. 따라서 LXX, 이탈라, ㅤㅋㅗㅍ틱의 지지를 받는 독법은 페쉬타와 사마리아 판의 지지를 받는 것보다 힘이 없다. 왜냐하면 이탈라와 콥틱이 LXX의 자매번역이며 이 모두가 알렉산드리아 개정판 그룹에 속하는 반면 페쉬타와 사마리아 판은 서로 약간 다른 본문의 전통들을 나타내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사마리아 판과 LXX과 같이 너무나 다른 두 전통에 의해 지지를 받는 독법은 MT보다 더 원본에 가깝다는 결론이다.
제6법칙 : 저자의 문체와 어투에 가장 가까운 독법이 우선권을 가진다. 이것은 가능성에 대한 발언일 뿐이지만 두 개의 다른 독법이 문맥상 똑같은 가능성을 지닐 때, 하나가 저자의 평상시의 사고구조를 표현하는 것이고 다른 것은 그가 항상 쓰는 문체와 약간 다르게 들린다면 저자에게 신빙성을 두어야 한다. 오늘날 성경을 난도질하는 본문 비평가들은 이 법칙을 용납할 수 없을 정도로 오용하고 과용하여 고대의 저자가 무엇을 말했을 것이냐 말하지 않았을 것이냐에 대해 주관적이고 억지의 판단을 내림으로써 문단에 일치하지 않는 것들을 집어넣었다.
제7법칙 : 교리적 편견이 없는 독법에 우선권을 둔다. 예를 들자면 탈굼과 LXX은 하나님을 인간의 모양으로 표현하지 않은 후대의 유대 사상을 반영하고 있다. 또한 하나님께서 몸이나 지체
나 격정을 가진 것으로 암시하는 표현들을 제거해 버렸다. 이런 요소를 감소시키는 경향을 우리는 "반―신인동형적 표현"(antianthropomorphism)이라고 한다.
3. 본문비평 방법의 요약
다른 증거들이 MT로부터 확실하게 떠났으나( 그 떠난 것이 단순히 번역자의 해석이 아닐 경우에) 그 두 가지 독법이 다 그럴듯한 경우에도(위에서 제시한 법칙들 중 하나가 다른 독법을 명백하게 지지해 주지 않는한) 우선권을 MT에 주는 것이 일반적이다. 모든 비평의 사본의 작업에 있어서 필경사 자신이 심리적 형편을 올바로 고려해야 한다. 우리가 항상 우리 자신에게 던져야 할 질문은 이것이다. 만약 오류가 있다면 이 오류가 어떻게 해서 필경사의 손으로부터 이러나게 되었는가? 이것은 그의 작품의 다른 곳에서 관찰되는 바와 같이 그의 성격이나 정신적 습관에서 일어나는가?
4. 쏘페림의 작업, 탈무드, 맛소라 학파
쏘페림이란 "서기관"들의 계통으로써 최고의 서기관인 에스라 아래에서 그 첫 출발이 있었다(이 용어 자체가 서기관을 뜻한다). 그들은 예수님 당시에 성경 텍스트를 보호하는 인정된 협회였다. 그들이 활동한 기간은 B.C. 400년에서 A.D. 200년 까지 였고 그들의 업적 중 위대했던 것은 히브리어 성경의 순수한 텍스트를 그들이 가진 사본의 자료들이 허락하는 데까지 순수하게 만들어 표준판을 만드는 것이었다. 아마도 그들은 가상적인 개정판 위원회를 구성하였을 것이며, 그들은 그 당시의 공식적인 성경 출판 위원들이었으며 그들의 손으로 만든 성경의 모든 사본들이 표준 텍스트가 되었을 것이다.
쏘페림 중에서 특이한 것은 소위 말하는 티쿠네 쏘페림으로서 그 뜻은 서기관들의 교령(敎令으로서 모두 18개가된다. 그 중에 반―신인동형적 성격(제7법칙)을 지니고 있다. 예로써 창세기 18:22에 "여호와께서 서셨다"를 "아브라함이 여전히 서 있었다"(한글 개혁 성경도 이렇게 번역함)로 바꾸었다. 그들은 하나님의 존귀하심을 보존하기 위해 노력하였는데, 사무엘상 3:13의 전통적인 텍스트는 엘리의 아들들이 "하나님"('LHYM)을 저주하였다 인데, 이것을 바꾸어 그들이 "자신에게"(LHM ― 알렙과 요드를 삭제함)저주를 자청하였다로 만들었다(개역도 이렇게 번역함).
유대인의 전통에 따르면 쏘페림이란 용어는 B.C. 5세기에서 3세기에 일했던 초기의 서기관 그룹에서 구체적으로 해당이 된다(에스라로부터 쏘코의 안티고누스까지). 그들 후에 주고트(Zugoth, 본문학자들의 팀들)가 B.C. 2세기에서 일해 왔다(요세벤 죄제르로부터 힐렐까지). 제3구룹은 탄나임(Tannaim, 암송자들, 혹은 교사들)인데, 그들은 힐렐의 죽음부터 유다 한나시(Judah Hannasi)까지 있었다. 이 세 구룹의 가르침들이 미쉬나, 토세파, 바라이도스(Baraithoth), 그리고 미드라쉬에 담겨있다. 약 200여명 이상의 탄나임들이 이 작품들에 언급되어 있고 그들 중 대부분은 랍비이거나 라반(Rabban, 선생)이란 칭호를 갖고 있다.
미드라쉬(Midrash)는 B.C. 100년에서 A.D. 300년 사이에 집대성이 된 것으로 그 뜻은 본문연구, 혹은 본문해석이다. 그것은 d ra 라는 데서 나왔다. 그 뜻은 '연구하다', '찾아보다' 이다. 그것은 두 부분으로 구성되어 할라카(Halakah, 절차, 진행)는 토라만을 설명한 것이고, 하가다(Haggada, 선언, 혹은 설명)는 여러 가지의 잠언, 비유 이야기들을 포함하여 구약 전체를 설명한 것이다. 이것들은 가장 초기의 회당 설교 중 남은 것을 보전하고 있다. 그것들은 구약 성경 텍스트로부터 수많은 인용을 하고 있으며 MT와 약간 다르게 나타나기 때문에 본문 비평에 제법 중요하다.
토세푸타(Tosefta, 첨가, 혹은 부록)는 A.D. 100년에서 300년 사이에 만들어진 것이다. 그것은 미쉬나와 밀접하게 연결된 탄나임의 가르침과 전통을 집대성한 것이다. 전통에 따르면 랍비 아키바(약 A.D. 100)가 그의 미쉬나 편집에서 삭제한 원래의 미쉬나의 부분을 담고 있다고 한다. 랍비 아키바는 암기를 쉽게 하기 위해 그것을 축소시켰다.
탈무드(Talmud, 가르침)는 A.D. 100년에서 500년 사이에 발전된 것이다. 그것은 두 개의 주요
부분으로 구성된다(반복, 혹은 가르침)는 A.D. 200년 경에 완성이 되었다. 히브리어로 쓰여졌으며 모든 구전된 율법(모세가 그의 70장로에게 입으로 말한 것으로 여겨짐)과 전통들과 성경의 설명들을 압축한 것이다. 그것은 목차로 분류가 되는데 농업, 절기, 여인, 사회법과 범죄법, 제사와 거룩한 것들, 그리고 부정한 것들을 다룬다. 이것들을 다시 63개의 소책자로 세분된다. 미쉬나를 만드는데 공헌한 성인들이 탄나임(Tannaim)으로 알려져 있는데, 이들은 위에서 본 바와 같이 쏘페림 중 맨 후대와 반열에 있는 사람들이다. 둘째의 주요 부분은 게마라이다. 이것은 아람어 단어이기 때문에 게마라가 히브리어로 기록된 것이 아니라 아람어로 되었음을 시사해 준다, 그것은 미쉬나를 확대하여 주석 함으로써 각 소책자에 첨가 사항을 담고 있다.
맛소렛츠(Masoretes)는 A.D. 500년에서 950년 사이의 학자들로서 구약성경 텍스트의 최종형태를 결정한 자들이다. 그들이 이렇게 불려진 이유는 그들이 정확한 모음과 액센트, 그리고 이레 적인 스펠링을 가진 희귀한 단어들의 수에 대한 구전(masoah)을 기록으로 보존하였기 때문이다. 그들은 쏘페림으로부터 물려받은 그대로 실제적인 자음들을 흘뜨리지 않고 두었다. 그들은 옛날의 단어를 대치하는 새 단어에 속한 모음을 삽입하고 난 외주에다 아주 조그만 글씨로써 새 단어 자체의 자음을 삽입하였다. 예로써 이사야 28:15에 나타나는 단어의 뭉치는 KY-'BR이다. 정상적으로 쓴다면 KiY―' BaR(그것이 지나간 후에는)로 읽혀진 것이다. 이것을 우리는 케티브(kethib) 독법이라고 한다. 케티브란 아람어로서 "기록된 것"이란 뜻을 가진다. 즉, 자음이 시사하는 단어란 뜻이다. 그러나 맛소렛들은 미래완료시제(imperfect tense)가 KiY(때) 다음에 따라와야 하기 때문에 'BR아래에 모음을 붙여 Ya'aB R(그것은 지나간다:현재)로 만들었다. 그리고 난 외주에는 조그만 글씨로 Y'BR로 썼다. 이것을 케레(qer , 아람어로서 "읽으라!"는 뜻이다)라고 부른다(일반적으로 케티브는 K, 케레는 Q로 간략하게 만들어 쓰고 있다).
케레 독법 중 중요한 것은 하나님을 칭하는 여호와이다. 이 이름은 聖四文字 YHWH( )로 기록되었다. 원래의 발음은 YaHWeH(야훼)이었다. 느혜미야 시대로 거슬러 올라가 본다면 그들은 제3계명을 생각하여 그 거룩한 이름을 부르는 것을 두려워하였다. 그래서 소리내어 읽을 때마다 '야훼'라는 이름 대신 "주"('aD N Y, 아도나이)라는 칭호로 대치하게 되었다. 이것을 맛소렛들은 '아도나이'의 모음을 JaHWeH의 자음 아래에 삽입하였고 그 결과 "JeH W H, 여호와"로 부르게 되었다. 이 케레를 잘못 이해하여 르네상스 시대에 유럽 학자들은 "여호와"로 읽는 것이 올바른 줄 알고 그렇게 발음을 했는데 그것이 오늘날까지 전해 내려오고 있다. 그것은 사실 야훼인데 열렬한 기독교인들이 역사적으로 올바른 발음으로 수정하는 것을 꺼려했기 때문에 그 잘못이 그냥 승인되었다.
마지막 맛소라(Final Masorah)는 대부분 책에 나타나는 절, 낱글자 등과 같은 것의 수에 대한 통계를 주로 다루고 있으며 중간 단어와 중간 낱글자를 가리켜주고 있다.
본문비평과 연관된 것으로 맛소라 개정판이 가진 나머지 두 개의 특징을 언급할 필요가 있다. 이것들은 구약성경 텍스트 안에 있는 15개의 점을 친 단어들인데, 유대인의 전통에 따르면 소위 대회장으로 불려지는(에스라가 세운 것이 명백하다)학자들이 판단해 볼 때 삭제되어야 하거나 혹은 의심스러운 것으로 여겨져야 하는 것이다. 예로써 민수기 3:39에 있는 단어, "그리고 아론"에 점을 찍어 두었는데 이것은 아론 자신이 이 인구 조사에서 계수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또 다른 하나의 기호는 글자를 정상적인 줄 위에 걸어놓은 것이다. 이것은 네 곳에 나타나는데 맛소라 학자들은 쏘페림의 결정을 따라 이 글자들의 진실성을 의심하였다. 따라서 사사기 18:30에서 원래의 글자는 분명히 "모세의 손자 게르솜의 아들 요나단"인데 모세의 명성을 지키기 위해 여분의 눈(N, nun)을 삽입하여 "모세"로부터 "므낫세"(MeNa eH)로 바꾸게 되었다.
제 5 장. 구약성경의 정경
캐논(canon)이란 똑바른 막대기, 혹은 잣대를 뜻한다. 히브리어 성경에 있어서 유대인들이 정경으로 여겨진 것이 39권이다. 로마교에서는 외경(Apocrypha)을 14권 추가하였다. 이것이 우리에게 문제를 야기시킨다. 구약성경 안에 있는 여러 책들이 언제 하나님의 백성들에 의하여 정경으로 여겨져 수납되었는가? 먼저 우리는 히브리어 정경에 대하여 삼 구분(율법서, 선지서, 기록)하는데 대해 설명을 듣기로 한다.
1. 히브리어 정경의 구분
헬라어 역본(LXX)의 편집자는 제목 중심으로 다음과 같이 분류했다.
① 율법책 : 창세기,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
② 역사책 : 여호수아, 사사기, 룻기, 사무엘 상하, 열왕기 상하, 역대기 상하, 에스드라서 1,2(첫 권은 외경이고 뒤에 것은 정경 에스라서이다), 느혜미야서, 토비스서, 유딧서, 에스더서.
③ 시가서와 지혜서 : 욥기, 시편, 잠언, 전도서, 아가서, 솔로몬의 지혜서, 시락의 지혜서.
④ 선지서 : 소선지서 ― 호세아서, 아모스서, 미가서, 요엘서, 오바댜서, 요나서, 나훔서, 하박국 서, 스바냐서, 학개서, 스가랴서, 말라기서.
대선지서 ― 이사야서, 예레미야서, 바룩서, 애가서, 예레미야의 편지, 에스겔서, 다 니엘서(수산나, 벨과 용, 세 거룩한 아이들의 노래를 포함함).
⑤ 보충적인 역사서 : 마카비 1,2서
맛소라 텍스트에 있는 각 권의 순서는 다음과 같다.
⑴ 율법서(혹은 오경)
⑵ 선지서(Nebi' m) : 전선지서― 여호수아서, 사사기, 사무엘 상하, 열왕기상하 ; 후 선지서(혹은 대선지서) ― 이사야서, 예레미야서, 에스겔서, 그리고 영어성경에 있는 순서와 같이 12개의 소선지서가 있다.
⑶ 기록들(Keth bim, 헬라어로는 Hagiographa<거룩한 글들>) : 시가와 지혜서―시편, 잠언, 욥기 (그러나 레닌그라드 사본은 시편, 욥기, 잠언의 순서로 되어 있다)
⑷ 두루마리 혹은 매길로트(Megilloth) : 아가서, 룻기, 애가서, 전도서, 에스더서(그러나 레닌그 라드에서는 룻기, 아가서, 전도서, 애가서, 에스더서 순으로 되어 있다).
⑸ 역사서 : 다니엘서, 에스라서, 느헤미야서, 역대기 상하.
그러나 꼭 언급되어야 할 사실은 MT를 구성하고 있는 각 권들의 순서는 후대의 분류법을 따른다는 것이다. 이것은 유대인들과 논쟁을 하는 기독교 변증가들이 구약성경에 호소할 때 더 편리하도록 하기 위하여 고안되었다. 초기의 구분법은 위에 제시한 39권과 동일한 내용을 갖고 있으나 24권으로 배열이 되었다. 즉, 사무엘 상하와 열왕기 상하, 역대기 상하들이 각각 한권으로 계산이 되었기 때문이다. 또한 12권의 소선지서도 한 권으로 간주되고 에스라서와 느혜미야서도 하나의 단위로 구성되어 있다. 그러나 요세푸스는 A.D.1세기 말경에 책을 쓰면서 22권의 성경책에 대한 증거를 제시하였다. 이것은 룻기를 사사기와, 그리고 예레미야 애가를 예레미야서에 포함시켰기 때문이다. 어쨌든 본질적으로 볼 때 39권이든, 24권이든, 22권이든 히브리어 정경에 기본적 구분은 동일한 것이다.
2. 안티레고메나
이 시점에서 안티레고메나(Antilegomena, 반대하여 말해진 책)로 불려지는 것에 대해 언급하고 넘어가자. 미쉬나에 따르면 A.D. 2세기에 어떤 유대인들 사이에 아가서, 전도서, 에스더서의 정경성에 대해 논쟁이 있었다고 한다. 그 당시 어떤 사람들은 잠언에 대해서도 의심을 제기하였다. 게마라(Gemara)에 따르면 에스겔 역시 그 권위에 있어서 토론이 되었고 그 반대설은 A,D, 66년에 마무리 지워졌다. 샴마이의 제자들은 B.C. 1세기에 전도서의 정경성에 대해 의문을 제기했으나 힐렐학파에서는 강력하게 옹호했다고 한다.
에스겔에 관한 문제는 그 책의 마지막 10장에서 후일의 성전과 예배의식이 모세의 성막과 솔로몬의 성전 사이에 상당한 불일치가 있다는데 있다. 그러나 그 차이들은 그렇게 큰 것이 아니고 또 그것들이 스룹바벨이 세운 두 번째 성전이 아닌 아직도 미래의 성전에 속한 것이라는 반박이 있다. 어쨌던 엘리야가 땅에 다시 와서 이 모든 난제들을 믿는 자에게 풀어줄 것이 확실하게 기대되고 있었다.
잠언에 대한 반박은 몇 가지의 모순이 있는 개념들에 대한 것이다. 예로써 26:4-5에 있는 "미련한 자의 어리석은 것을 따라 대답하지 말라……미련한 자의 어리석은 것을 따라 그에게 대답하라"와 같은 것이다.
3. 맛소라 정경에 대한 고대의 증거들
이제 예루살렘에 요세푸스(A.D.37-95)를 살펴보기로 하자. 그가 구약성경이 22권으로 구성된다는 것에 대해서 이미 앞에서 암시한 바가 있다. 그의 저서 『앞피온 반박』(Contra Apionem)에서 그는 말하기를 "우리는 서로 상충되고 모순되는 수천 권의 책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모든 시대를 다 포함하는 오직 22권만이 있을 뿐이다. 그것들이 신적인 것임을 우리는 믿는다." 모세의 책 다섯 권과 선지서 13권, 그리고 나머지 책(하나님에 대한 찬양과 인간의 바른 생활을 위한 교훈을 담은 것)을 언급한 후에 그는 아주 중대한 선언을 하였다. 요세푸스가 진술한 이 말에는 중요한 세 가지 사실이 담겨 있다.
⑴ 요세푸스는 맛소라 사본과 같은 분류방식으로 히브리어 성경을 세 가지로 구분하고 이 세 구분 속에 있는 정경의 총수를 22권으로 제한한다.
⑵ 정경은 크세르크스(B.C.464-424) 아들 아르타크세르크스가 통치한 이후에는 쓰여지지 않았다. 즉, 말라기 이후에는 쓰여지지 않았다.
⑶ 중간사 시대(B.C.425-A.D.90)까지는 정경 22권 안에 그 어떤 보충적인 자료도 포함되지 않았다. 합리적인 고등 비평가들은 마지막 두 가지 점은 강력하게 부인하고 있다. 그렇지만 그들은 요세푸스와 같은 오래 전의 저자가 제시한 증거에 대해 납득할 만한 이유를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 또한 그들은 다니엘서나 에스겔서, 아가서, 시편 중의 많은 것들이 말라기 이후에 쓰여진 것이라고 하는데 어떻게 해서 그것들이 A.D. 1세기의 학식이 풍부한 유대인에게 알려지지 않았는지에 대해서 만족할 만한 답을 제시해 주지 못하고 있다. 요세푸스가 외경 자료들(에스드라 1서부터 마카비 1서까지)을 암시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위에서 언급한 진술을 비추어 볼 때 그가 그것을 단순한 역사적인 자료로서 사용한 것이지 신적으로 영감 있는 책으로 다루고 있지 않음을 명백히 알 수 있다.
3세기에 오리겐(254년에 죽음)은 구약성경이 22권으로 구성되었음을 일목요연하게 제시하는데, 그것은 유세비우스의 『교회사』(Ecclesiastical History <6:25>)에 있다. 이것은 요세푸스와 맛소라 사본이 22권으로 분류한 것과 동일한 목록이다. 단 하나의 차이가 있다면 그것은 예레미야 서신을 포함한 것인데, 아마 그것이 히브리어로 기록된 적이 있다는 사실을 모르고 그렇게 한 것이다. 오리겐과 거의 동시대에 살았던 터툴리안(A.D.160-250)은 현존하고 있는 책을 남긴 라틴 교부들 가운데서 가장 오래된 사람이다. 그는 정경이 24권으로 구성된다고 언급하였다. 포이티어 힐라리(Hilary of Poitiers)는 22권으로 계산하고 있다. 제롬은(A.D.340-420) 『갈레아우스 서문』에서와 또 다른 곳에서 오직 22권만이 히브리어로 되어 있으며, 외경들은 2차적인 위치에 놓여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4. 외경의 정경성 문제
로마 교회와 헬라 정교회가 14권으로 된 외경의 정경성을 주장할 뿐 아니라 자유주의 신학을 따르는 개신교 신학자들도 알렉산드리아 정경이 소위 팔레스틴의 정경으로 불려지는 것과(22권 또는 39권) 동일한 권위를 가진다고 말하고 있다. 우리가 가진 증거를 살펴볼 때 이 주장을 조심스럽게 검토해야할 필요성을 느낀다.
외경을 두둔하는 자들은 LXX 안에 있는 외경이 14권의 외경을 포함한 알렉산드리아 정경의 존재를 시사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LXX에 있는 모든 책들이 알렉산드리아 유대인들에 의해서 조차 정경적인 것으로 여겨졌는지는 결코 확증할 수 없는 문제이다. 이것과 정 반대되는 증거는 알렉산드리아의 필로 1세기의 작품에서 찾아볼 수 있다. 종종 그는 "팔레스틴 성경"에서 인용하지만 외경에서는 한번도 한 적이 없다. 이것은 만약 우연히 어떤 알렉산드리아 유대인이 이 알렉산드리아 정경을 받아들이는데, 어떤 사람은 받아들이지 않았다면 대형의 알렉산드리아 정경 이론과 일치될 수가 없다.
둘째로 아퀼라의 헬라어 역본에 외경을 포함하고 있지 않지만 A.D.2세기에 알렉산드리아에서 살고 있던 유대인들에 의해 받아들여졌다는 것은 신빙성이 있는 사실이다. 유추해서 말하자면, 알렉산드리아 유대인들은 구약성경을 편집할 때 제롬처럼 정경적이라고 여기는 것 뿐 아니라 진리를 담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까지도 그들의 구약성경 판에 포함하도록 작정했다는 것을 의미할 수 있다. 이 가정을 뒷받침해 주는 또다른 근거가 최근 쿰란 동굴4에서 발견되어졌다. 팔레스타인의 심장부인 그곳에서는 팔레스타인 정경이 권위 있는 것으로 확실히 받아들여졌는 데도 두 개의 외경서, 즉 시락의 지혜서와 토비트서가 발견되었다.
종종 신약성경이 구약성경을 인용할 때 70인역을 사용한다는 사실에 종종 호소하는 학자들이 있다. 달리 말하자면, 70인역이 외경을 포함하고 있으므로 신약의 사도들이 그 때 편집되어 있던 모든 LXX의 권위를 다 인정했었다는 말이 된다. 또한 팔레스타인 정경 외의 작품들에 대해 호소하는 학자들이 있다. 윌더보어(Wildeboer)와 토리(Torrey)는 단지 추정적인 것들 몇 개를 포함하여 외경들을 인용한 것이나, 암시하는 모든 가능한 것들을 모아보았다.
외경을 두둔하는 두 번째의 주된 논거는 교부들이 이 책들을 권위 있는 것으로 인용했다는 것이다. 좀더 정확히 말하자면, 초대교회의 몇몇 저술가들이 그랬던 같이 보인다. 그러나 또다른 사람들은 아주 명백하게 그것들의 정경성을 반대하고 있다. 지지하는 편에 있는 사람들을 들자면 클레멘트 1서와 바나바 서신의 자자와 그리고 제롬보다 나이가 좀 적은 동시대인이었던 히포의 어거스틴이 유명하다. 그러나 우리는 이 주장이 단지 표면적이며, 혹은 추정적이라고 수정해서 말해 주어야 한다.
어거스틴이 애매하게 외경을 두둔하고 있는 태도와 대조를 이루는 사람이 아다나시우스(Athanasis, 350년에 소천)이다. 그는 삼위일체 교리를 세우는데 챔피언이었음을 동서 교회가 다 인정한다. 그의 제 99번째 서신에서 그는 "교회에서 수납된 특정 책들과 그 수에 대해"토론을 한다. 제 4항에서 그는 "구약성경은 22권으로 되어 있다"고 말하면서 그 책들을 열거해 간다. 그것은 맛소라 있는 것과 동일한 책들이고 개신교 성경에 있는 것과 거의 순서가 일치하고 있다. 6,7항에서 그는 성경 외의 책들(외경 14권)다루면서 그것들은 "정경에 포함도지 않았으나"단지 "읽도록 지정되었다"라고 말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방교회는 외경을 받아들이는데 있어서(콘스탄틴노플에서 692년에 열렸던 제2차 트룰란총회) 서방교회와 일치하는 경향을 보이게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4권 중 어떤 것에 대해 의심을 가진 자들이 있었기 때문에 헬라 교회에서는 1672년에 예루살렘에 모여 외경 중 4권을 정경으로 줄이게 되었다(지혜서, 시락의 지혜서, 유딧서, 유딧).
5. 정경성의 기준
먼저 최근에 제시된 몇 가지의 부적한한 기준들을 살펴보도록 하자.
① 아이히혼(J.G. Eichhorn, 1780)은 세월이 정경성을 시험해 준다고 생각하였다. 말라기서 이후에 쓰여진 모든 책들은 일고의 가치도 없다고 여겼다. 그러나 이 이론은 권위 있는 것으로 여겨지지않던 야살의 책(수 10:13, 삼하 1:18)과 여호와의 전쟁기(민 21:14)와 같은 수 많은 고대의 작품들을 고려하지 않고 있다.
② 힛지히(F. Hitzig, 약 1850)는 히브리어를 유대인의 정경기준으로 만들었다. 그러나 이것은 시락의 지혜서, 마카비 1서가 비록 히브리어로 쓰여졌는 데도 왜 받아들여지지 않았는지에 대해 설명을 하지 않고 있다. 또한 이것은 다니엘서와 에스라서에 있는 아람어 부분들을 어떻게 받을 것이냐에 대한 문제를 제기해 준다.
③ 윌더보어(G. Wildeboer)는 토라와 닮은 것을 후대 책들의 정경성 기준으로 삼았다. 그러나 후에 그는 이것을 무효화시키는 다른 기준들을 많이 소개하였다. ⒜ 정경은 히브리어나 아람어로 쓰여져야한다. 그리고 그것들은 ⒝ 고대역사를 다루든지(룻기나 역대기같이), 혹은 ⒞ 새로운 질서를 세우는 것을 말해 주어야 한다(에스라서, 느헤미야서). 혹은 ⒟ 고대의 유명했던 사람, 즉 솔로몬, 사무엘, 다니엘 혹은(아마) 욥과 같은 사람이 쓴 것으로 되어야 한다. 혹은 ⒠ 국민과 서기관의 감정에 완전히 일치해야 한다(에스더). 이 시험의 기준들은 우리를 당혹케 한다. 윌더보어의 원래의 기준을 생각해 볼 때 어ㅤㄷㅓㅎ게 나단 선지자의 말씀(대하 9:29), 이사야가 쓴 웃시야의 행적(대하 26:22), 혹은 예레미야의 요시야 애가(대하 35:25)가 토라에 일치하지 않는다고 확신할 수 있는가?
한 걸음 더 나아가 우리는 우리가 다루고 있는 이 정경성의 문제에 대해 어떤 다른 타당한 기준을 기대할 수 없음을 지적해야 한다. 만약 정경성이 자유주의 학자들이 의심없이 가정하는 것처럼(로마 교회도 "교회는 성경의 어머니이다"라는 자가모순의 주장에서 이것을 암시하고 있다) 어떤 인간의 결정에 의해 결정될 수 있는 것이라고 하면 어느 것이 권위가 있어 받아들이고 어느 것이 없어 배척해야 함을 결정할 수 있는 기계적인 시험과정을 만들 수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주권적인 하나님께서 계시의 주도권을 가지시고 인간이라는 매개체를 통해 계시를 영감하여 기록하고 만들었다고 하면 우리는 그 영감된 책 속에 정경성이 내제하고 있음을 받아들이는 일 뿐일 것이다. 어린 아이가 다른 수 많은 성인들로부터 자신의 부모를 구렵해낼 때 그는 어떤 새로운 부모상을 투사해 넣지 않고 이미 존재하고 있던 그 관계를 단지 인정할 뿐이다.
6. 정경의 기원에 대한 자유주의 이론
성경이 스스로 증거하고 있는대로 그것을 하나님의 영감된 계시로 생각하지 않는 자들은 이 책의 기원에 대한 좀더 합리적이고 납득이 갈 만한 설명을 찾아보려고 한다.
자유주의 신학은 구약정경을 셋으로 나눈 것(예: 토라, 선지서, 그리고 케투빔 등 제서)을 여러 책들이 편집되어 가던 세 가지의 각각 단절된 과정의 경과로 본다. 즉, 토라는 B.C. 850년에서 모여지기 시작하여(최초로 기록된 문서), 750년과 650년 사이에 있었던 후대의 문서를 결합하여 요시야의 종교개혁 때 신명기가 오경 가운데서는 정경성을 공인받은 첫 단위가 되어 왕과 백성들에 의해 공식적으로 받아들여지게 되었다(왕하 23:장). 바벨론 포로 시대에(587-539년) 예식과 제사 부분이 에스겔의 영향을 받은 레위족 저자들에 의해 기록되어 그들의 활동이 에스라 시대까지 내려오게 되었다(에스라도 그 일원이었다). (느헤미야 8:1-8은 모드 토라를 "모세의 율법책"으로 여기고 처음으로 회중 앞에서 읽은 기사가 나타난다. 그 "모세의 율법책"이란 것은 일부가 방금 완
성된 것이며 대부분의 것은 모세가 죽은지 최소한 500년이 지난 후에 쓰여진 것이다). 어쨌든 에스라의 청중들은 이 혼합되고 위조된 다섯권의 책들을 정말로 모세가 직접 쓰고 또 권위 있는 하나님의 말씀을 담은 것으로 믿게 되었다.
두 번째 부분인 선지서는 B.C. 300-200년 사이에 권위있는 것으로 여겨지고 점점 집대성이 되게 되었다. 그 이전일 수가 없는 이유는(고등비평 이론을 따를 것 같으면) 이사야서, 요엘서, 스가랴서, 그리고 몇몇 다른 선지서 어떤 부분들이 B.C. 3세기까지 기록이 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둠(Duhm)과 같은 학자는 이사야서의 어떤 부분이 B.C. 2 세기, 혹은 1세기까지 기록이 될 수 없었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두 번째 부분은 알려지지 않은 상황 하에, 알려지지 않은 장소에서 대충 B.C. 200년이라 알려지지 않은 때에 정경적 위치를 획득하게 되었다.
케투빔은 선지서 들을 수집하기 시작할 때까지 모아지지 낳았을 뿐 아니라 대부분이 쓰여지지 않았다. 문서 비평에 따르면 다니엘서는 B.C. 168년 경에 편집이 되었기 때문에 케투빔은 B.C. 150년까지는 거두어질 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최소한 이 30년이 지나야 정경적인 위치를 차지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세 번째 부분을 일차적으로 혹은 잠정적으로 정경화한 것은 의심할 여지없이 B.C. 150년 내지 100년 경이었지만 최종적인 인준은 A.D. 90년 잠니아 회의까지 연기되었다. 이상이 오늘날 자유주의 신학계에서 제시하고 있는 정경의 형성 이론이다.
제 6 장 오경 문서설의 역사
스피노자는 1670년에 Tractatus Theoligico-Potitcus에서 오경이 모세에 의해 쓰여졌을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주장하면서 그 근거로써 3인칭 "그"를 제시하였다. 모세가 썼다면 "나"라고 했어야만 했다. 또한 모세는 신명기 33장에 있는 바와 같이 자신의 죽음을 스스로 기록할 수 없었다. 따라서 에스라가 오경을 마지막으로 편집한 자라고 스피노자는 주장하였다. 이 제안이 그의 생전에는 거의 무시되었지만 19세기 후반에 들어와서 그라프, 쿠에넨, 벨하우젠에 의해 문서설을 결정짓는데 괄목할 만한 기여를 하였다).
1. 초기의 연구진행
오경이 다양한 문서들로 구성되었다는 것은 창세기 1장에는 엘로힘(하나님)만이 나타나고, 2장에는 여호와로 언급되어진다. 『모세가 창세기를 만들 때 사용한 것으로 보이는 원래의 메모들에 대한 추측들』에서 그는 두 가지의 다른 기사를 제공하는 두 개의 다른 기록들을 자료로 사용한 것으로 추측이 된다고 설명하였다.
아이히혼(Johann Gottfried Eichhorn)이 1780-1783년에 출판한『구약서론』(Einleitnng)으로 넘어가서 창세기 전체와 출애굽기의 첫 두장(모세가 불붙는 가시덤불에서 하나님과 대화를 한데까지)을 여호와 문서(J)와 엘로힘 문서(E)로 나누었다. 그는 서로 다른 "평행기사들"과 "중복들"(예;홍수에 대한 "두 기사")을 두 가지의 자료로 연결시키고 각각의 특징들을 분리시켜 내었다. 처음에는 모세가 이 "모세 이전"의 기록된 자료들을 편집하는 일을 했다고 말했지만, 후에는 그의 『구약서론』에서 오경이 모세 시대 이후에 기록된 것이라면 그 당시 점점 유행해 가던 견해에 동조하게 되었다. 이리하여 J-E의 구분이 오경 전체에 미치게 되었다.
다음에 더 베테(Wilhelm M.L. De Wette)의 신명기 연구이다. 그의 "박사학위 논문"과 『서론』에서 그는 오경 중 그 어느 것도 다윗 이전의 것이 없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신명기는 열왕기하 22장에 따르면 요시야 왕의 종교개혁 때 예루살렘 성전에서 대제사장 힐기야가 발견한 율법책의 모든 표식이 담겨 있다고 하였다. 왕과 제사장이 함께 수도밖에 있는 모든 예배처와 희생을 여호와께 드리는 곳을 폐쇄할 목적으로 뭉치게 되었다. 예배를 중앙으로 집중시키는 것은 모든 왕국의 부분들을 더 가깝게 정치적으로 뭉치게 하는 것이며, 경건한 자들의 모든 헌금을 예루실렘 제사장들의 금고에 쏟도록 하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이 책은 정부의 캠페인을 위해 된 것이며, 그것을 발견한 것은 어떤 심리적 충격을 주기 위한 것일 뿐이었다. 그래서 그 책의 연대를 621년(요시야 종교개혁 연대), 혹은 바로 직전으로 고정을 해준다. 이리하여 D문서가 생기게 되었다. 그것은 기원에 있어서 J나 E와는 전혀 별개이며 "여호와가 선택할 도시"라는 언급(12장)을 통해 정부의 정책을 지원하기 위해 형성된 것이다. 이리하여 오경의 자료가 세 가지 문서로 구성이 되었다 ― E(가장 초기의 것), J, 그리고 D(7세기문서).
오경의 단편 설을 처음 주장한 사람은 스코틀랜드의 로마 카톨릭 신부였던 게데스(Alexander Geddes)였다. 게데스는 많은 파편들이 솔로몬 시대에 토라로 편집이 되었으며 그들 중에 어떤 것은 모세 시대의 것이었거나, 혹은 그 이전 시대의 것도 있다고 주장하였다.
에발트는 『창세기의 구성』에서 창세기의 본질적 기초는 모세 때의 것은 아닐지 몰라도 아주
오래된 것이라고 강조하였다. 그는 아이히혼이 주장한 바 히브리어 텍스트에 있는 반복과 표제들을 다른 저자의 작품이라는 이론을 비판하면서 초기 아람의 작품들(저자의 통일성이 불문시 되는 것) 이 셈 문장의 중심적인 특징인 이 반복 표제를 사용하였음을 강조하였다. 그의 책『이스라엘의 역사』에서 모세가 개인적으로 십계명(출 20장)과 가장 오래된 법들을 만들었다고 주장하였다.
창 세기 14장과 민수기 33장은 아주 오래된 것이었다. 그러나 이 초기의 자료들도 사사 시대에 살았던 익명의 한 유다 족속에 의해 만들어진 언약의 책에 추가되었다. 솔로몬 시대에 기원의 책(a Book of Origins)이 E 문서의 대부분 자료를 포함하여 어떤 익명의 레위인에 쓰여졌다. 세 번째 보충이 된 것이 모세의 전기형식으로 9세기(엘리야 시대)에 만들어 졌다. 그 후에 선지자 해설자가 나타났고 마지막으로 웃시야 시대(8세기 중엽)에 한 유다 지파 사람이 나타나 여러 곳에서 "야웨"라는 이름을 등장시키고 최종의 편집자로서 모든 자료를 재구성하였다. 에발트가 1840년에 쓴 작품은 실제적으로 보충이론으로부터 결정체이론(the crystallization theory)으로의 출발점이 되었다. 이것은 각 시대의 편집자가 모세의 자료를 가지고 자기 자신의 작품에 여기저기 뜯어 붙인 것으로 보지 않고 전체를 재구성하는 것으로 보는 수정을 가져왔다.
위에 언급된 보충 이론 자들 중 두 번째 인물은 볼릭(Friederich Bleek)이다. 그는 1822년 문서 분석을 여호수아서까지 확장시킴으로써 종래의 다섯 권으로 된 오경 개념을 떠나 육경(Hwxateuch)이라는 용어를 만들었다. 모세의 전통은 그 최종적인 기록 형태에 있어서 육경으로 나타난다고 그는 주장한다. 1836년 그는 창세기 연구를 통해 그 중 몇 문단은 진정으로 모세의 것으로 인정해 주었다. 통일왕조(약 10세기) 때에 어떤 익명의 편집자가 창세기의 가장 초기 형태를 수집함으로써 첫 번째 보충이 시작되었다고, 두 번째 보충은 요시야 왕 시대(약 B.C. 630년, 혹은 620년)에 신명기를 편집한 익명의 사람에 의해 이루어 졌는데 그가 여호수아서를 육경의 형태로 만들게 되었다. 블릭은 후에 구약 서론을 출판하고 그 재판을(1865년)영어로 번역하여 내어놓았다(1869년). 이 작품에서 그는 그 당시 문학 비평이 지니고 있던 극단적인 이론들을 비판하였으나 전체적인 문서주의자의 접근법에 대해서는 지혜롭지도 않고 정당치도 않게 많은 양보를 하였다.
프란츠 딜리취(Franz Delizsch)는 에발트나 블릭보다는 훨씬 더 보수주의적인 경향을 지니고 있었다. 1852년에 출간된 그의 『창세기 주석』에서 그는 오경 중에서 텍스트 자체가 모세의 저작권을 주장한다면 그것은 진정으로 모세의 것이라는 견해를 표명하였다. 나머지 율법들은 진정한 모세의 전통을 제시하는 것이나 가나안 정복시기까지 제사장들에 의해 명문화되지 않았다. E 문서 중 모세의 것이 아닌 부분은 언약의 책을(출 20:23-23:33) 다 모은 엘리에셀(아론의 세째 아들)에 의해 아마 편집되었을 것이다. 조금 후에 다른 편집자가 신명기를 포함하여 여기에다 보충을 하였다. 델리취는 구약성경 중 거의 전 권에 걸쳐 훌륭한 주석을 만들어 내었다.
1853년에는 후벨트(Hermann Hupfeld)분수령적인 작품 『창세기의 자료』(Die Quellen der Genesis)가 나왔다. 이것은 "문서설의 역사에 있어서 코페르니쿠스적 혁명"으로 알려졌다. 그는 먼저 E 문서를 철저하게 분석한 결과 두 개의 구별된 문서가 있음을 알았다. 그 중 하나는 E2로서 문체, 어휘, 주제에 있어서 J와 너무 흡사하며, J에서 발견되는 자료들에 대한 암시들을 종종 하고 있는 것으로서 엘로힘 기자의 작품 중 상당한 부분을 차지하는 것이었다.
여기서 언급하고자 하는 바는 E 를 구분하는 것이 후벨트에 독창적으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그 이전에 예나의 일겐(Kari David Ilgen of Jena)이 창세기는 17개의 다른 문서로 구성되어 있으며, 그 중 두 명의 엘로힘 저자와 한 명의 여호와 저자가 있다고 1798년에 발표하였다. 후펠트는 문서설에 있어서 새로운 흥미를 학자들에게 불어넣었다. 가장 큰 관심을 끈 것이 기본문서인 E1이다. 1866년 그라프가 누구보다도 먼저 논쟁을 제기하였다. 그라프는 그의 선생 류스(Eduard Reuss)와 같이 오경에 있는 이 제사규례가 신명기 보다 (B.C.621)더 후에 생긴 것이라고 믿었다. 왜냐하면 D가 J와 E의 법들을 반영하긴 하지만, P의 율법 부분은 전혀 모르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P의 규례들을 포로 시대 때의 것으로 여겨야 한다(B.C. 587-539). 물론 P에 있는 역사적인 부분들은 의심할 여지없이 아주 오래된 것이다. 이리하여 그라프가 만든 "문서들"의 순서는 역사적인 내용을 담은 P, E, J, D와 율법적인 P의 순으로 되었다. 그는 E가 J에 의해 추가되었으며, 요시야 시대에 E-J가 D의 저자에 의해 편집되었다고 한다.
2. 문서설의 네 문서 요약 소개
① J 는 남조 유다에서 어느 익명의 저자에 의해 B.C. 850년 경에 쓰여졌다. 그는 개인의 전기에 특히 관심이 깊었으며 한 인물, 인물의 개성을 생생하게 묘사한다. 하나님에 대해서는 가끔 신인 동형적으로 그린다(즉, 마치 그분의 몸, 신체 각 부가 있고 또 인간처럼 정서가 있는 것으로 묘사함). 또한 그는 선지자처럼 윤리적이고 신학적인 사상에 관심을 가지나 제사나 의식에는 거의 흥미가 없다.
② E 는 이스라엘의 북조에서 무명의 저자에 의해 B.C. 750년에 쓰여졌다. 그는 설화체에 있어서는 J 보다 좀더 객관적이며 윤리적이고, 신학적인 문제에 있어서는 약간 관심이 적다. 오히려 그는 구체적인 것들(혹은, 이름들의 기원, 이스라엘 문화에 있어서 특별히 중요한 관습들)에 더 집착하였다. 창세기에서 E 는 의식과 예배에 관심을 나타내며 하나님께서 꿈과 환상으로 자신을 계시하는 것으로 서술한다(J처럼 하나님께서 직접적으로 신인 동형적 접촉을 하는 것으로 보지 않는다). 출애굽기에서 민수기까지 E 는 모세를 놀라운 기적을 일으키는 자로 높여주며 하나님께서 그와 함께 신인 동형적인 양태로 교통하였음을 소개하고 있다.
약 B.C. 650년에 무명의 편집자가 J와 E를 결합하여 J-E 를 만들었다.
③ D는 요시야 왕이 B.C. 621년에 부흥을 일으킬 때 대제사장 힐기야의 지도를 따라 공격적인 개혁의 프로그램으로써 만들어졌다. 그 목적은 유다 왕국에 있는 모든 자들로 하여금 "높은 곳"(high places)에 있는 그들의 지방성소(신당)를 그들의 모든 제사와 종교적 헌물들을 예루살렘 성전에 바치도록 하는데 있었다. 이 문서는 예언자들, 특히 예레미야의 영향을 강하게 입고 있다. 이 신명기 학파의 사람들이 후에 여호수아서, 사사기, 사무엘서, 열왕기에 기록된 역사적 사실들을 제기하였다.
④ P 는 에스겔의 성결법전(레 17-26장 : 약 570년, H로 알려져 있음)으로부터 시작하여 "모세의 율법에 익숙한 학사" 에스라까지 여러 시대에 걸쳐 편집이 되었고 에스라는 가장 후대의 제사문서를 율법에 첨가시켰다. P는 이스라엘 신정정치의 기원과 조직들을 체계적으로 서술하는데 관심을 갖고 있다. 또한 족보와 제사제도, 희생의 세부사항들과 기원들에 대해 특별한 관심을 갖고 있다.
3. 문서설의 변증법적 발전 개요
① 아스트룩은 하나님의 이름이 다른 것이 다른 자료를 가리키는 것이라고 말하면서 J와 로 구분했고, 이 아이디어가 아이히혼에 의해 더 체계화되었다(J보다 E가 더 이전 것임).
② 더 베테는 D가 요시야 시대에 만들어 졌다고 했다(B.C. 621).
③ 후펠트는 E를 초기의 E1(혹은 P)과 후대의 E2(J를 더 닮은 것임)로 구분을 하고 문서들의 순서를 P E J D로 만들었다.
④ 그라프는 P의 율법적 부분이 가장 후대의 것으로서 포로 시대의 것이라고 한다. 그러면서도 역사적 부분은 좀더 이전에 있었던 것으로 여긴다. 그의 문서 순서는 J1 E D P2 이다.
⑤ 벨하우젠은 문서설을 완전히 다듬고 J E D P 를 체계적이고 진화론적인 형태로 발전시켰다.
문서설의 발전과정에서 모순과 역전이 있었음을 관찰해 보자.
⑴ 하나님의 이름이 다른 것이 다른 저자를 가리키는 것인데(아스트룩, 아이히혼), 각 저자는 자신의 관심, 문체, 어휘를 가지고 있다.
⑵ 동일한 하나님의 이름(엘로힘)이 또 다른 저자를 가리킨다(후펠트). 어떤 E 구절들은 그 관심,문체, 혹은 어휘에 있어서 J와 다르지 않은 것도 있다.
⑶ 관심과 문체에 있어서 J와 가장 다른 그 엘로힘 저자는(P) 가장 초기의 것임이 틀림없다(야훼
가 엘로힘 보다는 후대의 이름이다).
⑷ 아니다. 그것이 아니다. P가 가장 초기의 것이 아니다. 가장 후대의 것이다(왜냐하면 그렇게 되어야 히브리 종교가 원시적인 다신론에서부터 제사장 중심의 유일신으로 발전했다는 진화론에 일치하기 때문이다).
⑸ J 는 물론 E 보다 후대의 것이다(그라프까지의 모든 비평가들). 그러나 J는 실제적으로 E 보다 앞선다(쿠에넨과 벨하우젠).
벨하우젠의 가설을 가장 철두철미하게 반박한 학자는 프린스톤의 그린(William Henry Green)인데, 그의 Unity of the Book of Genesis(New York: Scribner, 1895)와 Higher Criticism of the Pentateuch(New York: Scrobner, 1896)는 두 책 모두 19세기 말에 미국에서 나왔다. 그는 풍부하고 섬세하게 제시된 가설이 성경 텍스트의 실제적인 자료와 얼마나 상충되며 또한 비평적인 기준들이 얼마나 비논리적이며 자체 모순을 안고 있는지 드러내었다.
제 7 장 20세기의 오경 고등비평
아이스펠트(Otto Eissfeldt)는 그의 책 <육경의 개요(Hexateuchsynopse,1922)>에서 스멘드(Julius Smend)가 <육경의 기원에 대한 연구(Die Erz hlung des Hexateuchs auf ihre Qullen untersucht,1912)>에서 명명한 J1 과 다소 유사한 기본자료 L을 J에서 발견해내었다고 생각하였다.이 L을 가나안의 생활양식에 완전히 적대적인 유목민적,레갑인(Rechbite)의 이상을 반영하고 있다.그는 L이 엘리야 시대(약 B.C. 860)에 등장하였고 사사들과 사무엘에게 영향을 미쳤다고 결론지었다. L과 약간 유사한 것이 새로운 문서인 K(겐 족속,즉 Kenite를 가르킴)이다. 이것은 모세의 생애중 어떤 부분을 중심으로 쓰였으며 이스라엘과 겐 족속과의 관계를 다룬다.이것은 모르겐스테론(Julius Morgenstern, The Oldest Document of the Hexateuch,1927)에 의해 발견되었으며 그는 이것이 열왕기상 15:9-15에 있는 아사왕의 종교개혁에 기초가 되었다고 가정하였다.(약 B.C.890)
1.하나님의 이름이 문서의 기준으로서 정당한가?
이미 1893년에 클로스터만(August Klostermann, Der Penateuch)은 맛소라 히브리어 성경이 하나님의 이름을 전승하는데 있어서 무오하지 않으며 그것으로 문서의 자료를 찾아낼 수 있다는 주장을 비판하였다. 그러나 MT와 LXX의 관계를 철저하게 조사했던 요하네스(Joannes Dahse,"Textkritische Bedenken gegen den Ausgangspunkt der Pentateuchkritik"<오경비평의 초기 전제에 대한 본문 비평적 의심들>, 1903)에서 LXX이 180회 이상이나 야웨를 데오스(하나님)로서, 엘로힘(하나님)을 퀴리오스(주)로 표현하고 있음을 지적하였다. 이것은 MT가 이름을 전승함에 있어서 문서설주의자들이 시도한 바와 같이 아주 미묘하고 정확한 자료의 구분을 하는데 기초가 될 수 있을 만큼 충분히 무오하지 않다는 것을 의미한다.
영국에서는 위너(Harold M. Wiener)가 LXX인과 MT사이의 동일한 차이점을 1909년에 깊이 연구하기 시작했다. 많은 구절들 중 하나님의 이름을 가지고 자료구분을 한다는 것은 비실제적이고 무모한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레이든 대학 교수 후계자 어드만스 (B.D. Eerdmands)는 70인역의 통계에서 제시된 이 논점을 받아들이고 하나님의 이름으로 분리된 문서들을 찾는 실마리를 발견할 수 없다고 단호하게 주장하였다. 레위기의 의식들 중 많은 것들이 모세 시대에 만들어졌다고 보는 것이 더 타당하다. 더구나 문학비평의 관점에서 볼 때 창세기 전설들의 근본적 통일성이 그라프-벨하우젠 학파들에 의해 난도질을 당했다. 그러므로 어드만스는 문서설 학파에서 벗어날 뿐 아니라 그라프-쿠에넨-벨하우젠의 이론의 정당성을 부인하였다.
노르웨이의 학자 모빙켈(Sigmund Mowinckel)은 양식 비평에서 J-E의 문서설을 공격하였다. 그는 E가 북조 이스라엘에서 나온 것임도 부인하였다. E는 가끔 여호와를 하나님의 이름으로 사용하고 있다. 그는 출애굽기 3:14이 새로운 하나님의 이름으로써 야웨를 선포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구절은 여호와가 히브리인들에게 이미 알려졌음을 전제한다고 말했다.
올브라잇(W.F. Albriht)은 하나님의 이름이 기준으로 사용되는 것에 대해 회의적인 말을 하였다. 예를 들면, 사무엘서부터 열왕기까지 보다 오경이 편집상의 차이가 적은 것이 사실이지만 받아들여진 텍스트에서 흠이나 불일치되는 점을 발견할 때마다 또 다른 자료와 문서를 계속 찾아내는 것과 가정적인 분석을 계속 넓혀 가는 것에 대해 많은 경고들이 이미 있었다. 문학적-역사적 문제에 대해 이렇게 주관적으로 접근하는 것은 항상 의심을 사게 되고 비합리적이 된다고 말했다.
2. J, E, P가 분리된 문서로 출발했다는 점을 반박함
헤르만 궁켈(Herman Gunkel)은 양식비평을 이렇게 정리한다.
⑴ 옛 시대의 문학사를 정확하게 구상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기록된 문서들의 발전과정을 일관성 있게 재구성하려는 시도는 텍스트 자체의 자료들이 상충되었기 때문에 무산되었다. 그라프-벨하우젠의 가설이 제시한 가상적 문서들에 대해 우리는 알 도리가 없다).
⑵ 오경문학에 대한 유일한 실제적 접근은 문서설주의자들의 분석 비평적 관심이 아니라 종합적 창의적 방법으로 되어야 한다. 그것으로 우리는 원래의 자료들이 구전 상태에 속해 있었던 여러 종류들의 양식들을 찾고 포로기 혹은 그 후기로 가정되는 최종적 기록형태의 시기까지 있었던 이 구전의 단위들이 각각 어떻게 발전했는지 그 가능성을 찾아야 한다,
(3) 종교 사학파(relionsgeschichtliche Schule)의 방법론을 실습하는 자로서 궁켈은 이스라엘 주위에 있던 이방의 인근 국이 믿고 표현한 그 종교와 문헌들의 현상중 대조가 되는 것들을 연구했고 그는 애굽과 메소포타미아의 자료들을 통하여 이 다른 형태들이 어떤 생활의 상황에서 나왔으며 어떤 과정을 거쳐 계속적인 역사의 흐름 속에서 발전했는지를 파악할 수 있었다. 이리하여 창세기는 그 대부분에 있어서 사가들을 집대성한 것이며 이 모든 것들이 후대에 기록된 형태로 최종 마무리될 때까지 상당히 유동적인 구전을 통해 내려오게 되었다. 그러나 모세의 책이 기록된 형태를 갖춘 것은 포로 시대 이후였다고 하는 궁켈의 가정은 히브리인들이 모세 시대 이후로 고도의 언어 능력을 갖춘 백성이었다는 산적된 증거를 도외시하는 것이다.
그러나 모세의 책이 기록된 형태를 갖춘 것은 포로 시대였다고 하는 궁켈의 가정은 히브리인들이 모세 시대 이후로 고도의 언어능력을 갖춘 백성이었다는 산적된 증거를 도외시하는 것이다. 사실 고고학에 의해 여태까지 발견된 히브리어 파편 중 최초의 것은 게제르 월력(Gezer Calendar, 약 B.C. 925)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인근국가에서는 그보다 이미 수세기 전에 모든 종류의 문학작품을 기록된 형태로 가지고 있었으며 심지어 반도에 있는 터어키 옥(玉)을 채집하던 셈계의 가난한 광부들도 B.C. 1500년 경에 이미 초서체의 알파벳 비문을 가지고 있었다. 가나안 땅 북부에 툭 튀어나온 우가릿에서도 알파벳으로 된 그들의 이방 종교의 경전을 갖고 있었다.
1931년 코펜하겐의 페더슨(Johannes Pedersen)은 『구약성경의 구성』(Die Auffassung uom Alten Testament)이란 책에서 문서설을 과감하게 비판하였다.
① 여호와와 이브람 사이의 대화, 소돔과 관련된 주기(싸이클), 야곱과 에서의 설화, 다말과 유다의 이야기와 같은 J와 E의 이야기들은 포로 후 시대까지 현재의 기록된 형태를 갖추지 못했지만 아주 옛날의 것들이다(즉, 이 범주에 있는 J와 E의 구성 요소들은 문서설 주의자들이 말하는 바와 같이 850, 750년 보다 훨씬 더 고대의 것이며 또한 제사적 문서만큼이나 후대의 것이다).
② 일반적으로 J와 E를 구분하는 것은 고대 셈계의 설화에 서양의 관점을 억지로 집어넣고 이스라엘인들의 심리적 작용에 무리를 가하지 않고서는 될 수 없는 일이다.
③ D 문서를 문서설 주의자들과 같이 엣 요소와 새 요소로 엄격하게 구별할 수가 없다. 이와 반대로 신명기에 편만한 반―가나안적 경향은 신명기가 포로 후 시대의 산물임을 증명해 주는 것이다(이는 포로 귀환 후에 비로소 D가 그리는 바와 같은 독자적 이스라엘 공동체가 일어났기 때문이다). 이것은 우리로 하여금 신명기가 요시야 통치 때 편집되었다는 성을 버리게 한다.
④ P 문서로 말하자면 그 체계적 배열과 어투의 스타일에서 그것이 포로 후기의 작품임을 명백히 알 수 있지만 많은 율법적 규례들에 있어서 포로 이전의 상황들을 내포하고 있다. 특히 사회적 법들의 경우는 다욱 그러하다. 우리는 벨하우젠이 모세의 자료에서 분리시키려고 하던 B.C. 850년 문서와 B.C. 750년 문서를 만들어낼 수 없다. 단지 우리는 토라의 최초 단위가 출애굽기 1-15장에 있는 모세의 진실과 유월절 전설이었다고 단지 추측만 할 수 있을 뿐이다.
3. J가 E보다 앞선다는 가설에 대한 반박
1920년 『신명기와 십계명』이란 책에서 켄너트(R.F. Kennett)는 J가 아니라 E가 가장 최초의 기록된 문서였다고 말하면서 그것이 B.C. 650년에 북조 이스라엘의 혼혈백성들에게 의해 구성되었다고 주장했다. J는 그 얼이 후에 요시야의 종교개혁과 오직 예루살렘 성전만이 유일한 정당성을 지닌다는 곳에 대한 반박으로 남부 헤브론에서 쓰였다고 했다. 그 연대는 615년이었다. 이 J는 아마 예레미야 8:8에 예레미야가 언급한 바가 있는 "그러나 보라 서기관의 거짓 붓이 거짓되이 썼도다"라는 문서를 의미하는 것일지 모른다.
4. E가 J 후대의 문서로서 독립적으로 존재했다는 가설에 대한 반박
폴 볼츠(Paul Volz)와 루돌프(Wilhelm Rudolph)는 1933년 『해설자로서의 엘로히스트:오경 비평에 있어서 하나의 오류?』란 표제로 공저를 내었다. E의 단락들을 세심히 재검토한 후 그들은 독립된, 그리고 일관성 있는 E 문서라는 것이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것들은 단지 J의 일부이거나 혹은 보충일 뿐이다. 볼츠는 J와 E를 구분하지 말 것과 구 보충가설과 유사한 것으로 돌아갈 것을 제의하였다. 창세기에서는 우리는 단 한 명의 이야기 기록자(J)를 만날 뿐이며, E는 자기 내용 몇 개를 삽입했을지도 모를 후대의 J편집자일 뿐이다. P는 아무런 이야기도 만들지 않았으며, 그는 단지 법규들의 기록자요, 창세기 1, 17장과 같은 교리적 부분을 편집했을 뿐이다.
5. 신명기는 요시야 시대 것이라는 가설에 대한 반박
다 베데(De Wette)가 신명기를 힐기야가 성전에서 발견하고 요시야 왕게게 B.C. 621년에 봉독한 책이라고 주장한 후 신명기의 요시야 시대설은 모든 하우젠 학파에 의해 "현대 학문연구의 확실한 결과" 중 가장 확고한 것으로 여겨졌다. 벨하우젠 역시 그의 『서문』(Prolegomea)에서 선언하였다. "신명기의 기원에 대해서는 논쟁의 여지가 없다. 과학적 결과를 올바로 평가하는 모든 학자들은 신명기가 발견된 것과 같은 때에 구성되었으며 그것이 갈대아인에 의해 예루살렘이 멸망되기 한 세대 전에 있었던 요시야 종교개혁의 규칙을 만들었다."
6. 신명기의 초기설을 지지하는 비평가들
1919년 케겔(Martin Kegel)은 『요시야의 종교개혁』(Die Kultusreformation des Josias)을 쓰고 신명기 연대를 621년으로 잡은 것이 건전하지 않다고 하였다.
1924년 에딘베라의 웰치(Adam C. Welch)는 B.C. 7세기에 "단일성소에 대한 율법"을 공포한다는 것은 그 당시에 널리 유행된 상황과는 일치하지 않기 때문에 실제적으로 불가능함을 지적하였다. 또한 그는 D 안에 있는 율법 규정 중 많은 것들이 후대 유대의 왕정정치에 어울리기에는 너무나 원시적이라고 말했다.
로빈슨의 논문에서는 히브리인들이 팔레스타인에 들어갈 때 신명기와 언약의 책(출 20-23장)을 포함한 핵심적 율법들을 소유한 조직된 공동체였음을 주장하였다. 모세 율법의 다양한 지역적 전통들이 통일왕조를 세우는 문턱에서 사무엘에 의해 종합되었다(참조, 삼상 10:25). 이 배경은 사경(四經)의 배후 자료들이 다양한 요소를 가지며 연속성이 없는 것에 대해 만족스러운 설명을 제공해 준다.
1940년대와 1950년대에는 예루살렘의 카우프만이 P가 D보다 앞선다고 주장하였다. "오직 D와 그리고 그와 상관된 문학만이 중앙화 사상의 영향력을 명백히 가지고 있다. 히스기야 시대에 이 아이디어가 인정을 받기 시작하였으며 요시야는 그것의 최종적인 결론을 내렸다. 그러므로 유대주의는 중앙성전과 선택된 도시의 이미지로 받게 된다. 이 당시에 발전된 제사장 법규들이 이주된 아이디어를 침묵으로 외면해 버렸다는 것은 생각할 수조차 없다.
7. 신명기의 후대설을 지지하는 비평가들
이스라엘 백성들이 단에서부터 브엘세바까지 다 흩어져 정착한 후에 모든 남자들이 그들의 가정과 농토를 버려두고 1년에 세 차례 이상씩이나 수 일 혹은 수 주 동안 단지 몇 개의 중앙성전에서 거행되는 종교예식에 참석하도록 법관들이 법을 만들었을 것 같지 않다. 그러므로 신명기는 스룹바벨과 여호수아 지도 하의 유대인 남은 자들이 땅에 새로 정착한 후 신명기를 만들었다는 것이 합리적으로 보인다(만약 신명기가 히브리인들이 그 땅에 새로 정착하고 아직 다함께 모여 살고 있을 그때를 명백히 그르치고 있다면 이 구체적 규례들은 신명기 자체가 스스로 제시하고 있는 그 때와 배경<신1:1-4>, 즉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정부 직전에 모압 평지에 모여 있을 때<약 B.C. 1400년>에 쓰여졌다는 것과 완전히 일치한다는 점을 여기에서 지적해 두고 싶다. 그러나 휄셔는 이 가능성에 대해서는 전혀 염두에 두지 않았다).
휄서의 이 결론에 대해 페더슨은 전체적으로 동의한다. 그는 신명기에 편 만한 반가나안 성향은 스룹바벨과 느헤미야 시대의 반외국정신을 가르치고 있다(그러나 페더슨 역시 이와 같은 반가나안 정신이 모세와 여호수아 시대, 즉 철저하게 ㅤㅆㅓㄲ은 가나안인들의 문화가 하나님의 심판 하에 놓일 그때를 가리킬 수 있다는 가능성을 고려하지 않았다).
오경 비평과 벨하우젠 가설에 대한 20세기 학계의 동향을 이렇게 특징지을 수 있을까? 최저선에서 살펴볼 때 이 시대는 19세기의 문서이론이 세워둔 산뜻하고 짜임새 있는 구조를 붕괴시키는 시대였다. 그라프―벨하우젠 체제를 지탱해 주던 대부분의 기둥들이 거의 다 무너지고 그것으로는 오경의 자료(데이타)를 만족스럽게 설명해 줄 수 없다는 것을 느끼게 되었다. 그와 동시에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벨하우젠을 공박하는 대부분의 학자들이 모세 책의 기원에 대한 보수주의의 견해를 취하려고 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그들이 문서설을 지탱하고 있던 요새들을 무너뜨렸지만 오히려 그들의 선배들이 가지고 있던 입장보다 더욱 비논리적인 입장보다 더욱 비논리적인 입장에 빠지게 되었다. 이스라엘 주위에 있던 인근나라들과 그 당시 사람들은 모세보다 훨씬 이전에 그들의 종교적 신조들을 기록으로 가지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초대의 학자들은 히브리인들이 B.C. 500년 혹은 그 후대까지 그들의 신앙을 기록으로 남기지 않았다는 생각을 하고 있다. 이와 같은 결론에 도달한다는 것은 도무지 믿을 수 없는 것을 기꺼이 믿고자하는 태도이다.
제 8 장 오경의 저작권
1790년대에 초연신론(혹은 理神論)의 승리로 시작하여 19세기에 헤겔의 변증법과 다윈의 진화론을 거쳐가면서 모세의 저작권을 부인하는 판결들이 내려졌다. 20세기에 들어서서 여러 학자들이 오경에 있는 옛 구절들 중 몇 가닥의 실마리들을 모세의 것일 수 있다고 이야기하나, 기록된 현대의 오경에 대해서는 그 전부가 포로 후기의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리하여 모세 저작권은 20세기 자유주의 신학자들에게 하나의 가능성에 들지도 못하였다. 이것은 이미 1800년대부터 기정화된 사실이며 문서설 이론가들이 그 때부터 모세를 구전의 문맹자로 몰아붙여 버렸다. 앞의 두 장(6,7장)에서 문서설의 시작과 발전을 다룬 것에 근거하여 우리는 이 장에서 문서설의 시작과 발전을 다룬 것에 근거하여 우리는 이 장에서 벨하우젠의 접근법이 그 시초부터 어떤 약점과 오류를 안고 있었는지 살펴보기로 한다.
1. 벨하우젠 이론의 약점과 오류
① 문서설은 미묘한 순환논법으로 특징지어졌다. 즉, 그것은 결론을 중요한 전제로 삼고 있다. 이 전제는 물론 18세기 계몽주의 시대에 서양 지성인들의 신조였다. 그러나 불행스럽게도 그것은 초자연적 계시에 대한 성경의 증거에 대해서는 아무런 고려도 해주지 않았다. 더구나 그것은 성경 안에 담긴 모든 기적과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난 것과 혹은 초자연적 사건에 대해 항상 합리적이고 인간적인 설명을 찾아내려고 하였다.
② 벨하우젠 이론은 텍스트 자체의 증거 위에 서 있다고 단언하면서도 텍스트 자체의 증거가 그 이론에 상반되면 곧 회피해 버리고 만다. 예를 들자면, 문서설주의자는 이렇게 주장한다. "구약성경의 역사책들은 포로 후기까지 P의 규례나 기록된 모세의 법전이 존재했다는 것을 전혀 보여주지 않고 있다." 이 주장에 대해 모세의 율법과 P의 규례들에 대한 수많은 구절들과 언급들을 제시하면, "이 모든 언급들은 포로 후에 이 책들을 재구성한 제사장 계의 서기관들에 의해 후에 삽입된 것이다."라도 대답한다. 즉, 그 이론을 입증하는데 사용된 증거뭉치들이 그 이론과 상반될 때는 다 거부된다. 달리 말하자면, 그 이론이 그것을 설명해 주는 것으로 가정된 바로 그 자료에 의해 부인될 때 즉시 편집자, 혹은 삽입자 등의 고장 발견 수리 팀에게 전화를 하여 구호를 요청한다. 이와 같은 회피전술을 가지고는 그 결과의 건전성에 신빙성을 얻을 수가 없다.
③ 문서설주의자들은 히브리 저자들이 문학사에 알려진 다른 저자들과 달라서 그들만이 하나의 하나님 이름, 주제와 상관없이 하나의 문책만을 사용할 수밖에 없었다고 생각하여 한 사상에 대해 동의어를 여러개 쓸 수 없으며, 단 하나의 주제와 관심만을 가지고 살았다고 생각한다. 이 이론에 따르면, 밀톤과 같은 한 명의 저자가 알레고로(L'Allegro) 같은 즐거운 시들과, 실락원과 같은 고상한 서사시(epic poetry)와 아레오파키타(Areopagitica) 같은 번뜩이는 산문 에세이를 쓸 수 없다고 생각을 한다. 만약 그가 고대의 히브리인이었다고 한다면 그는 즉시 ABC 복합자료 가설에 휘말리고 말 것이다.
④ 고고학적 증거로서의 히브리어 성경을 다룸에 있어서 주관주의적 성향이 나타난다. 19세기의 박사들이 비역사적인 것으로 일축한 수많은 성경구절들이 후대의 고고학적 증거에 의해 확증되었다. 오늘날도 그때처럼 어떤 논리적 근거도 없이 성경에 대해 회의적 태도를 학자들은 갖고 있다. 올브라잇의학문적 노력으로 말미암아 구약성경의 평판이 신빙성 있는 과거의 기록으로 높아지게 되었다. 수많은 책들과 논문들로써 그는 성경의 기록을 최근 고고학적 발굴을 통하여 그 비평가들로부터 옹호해 주었다.
⑤ 벨하우젠 학파는 이스라엘 종교가 다른 것들과 같이 단순히 인간적으로 생겨난 것이며, 진화론의 산물로서 설명이 될 수 있다는 순수가정으로부터 출발한다.
⑥ 교묘하게 본문을 다르게 착색하며, 그 구절을 문맥에서 도려내어 "차이점"을 드러낸 후 그 어떤 조화의 가능성도 배제해 버리면서 추정된 차이점이 문서의 다양성을 "증명한다"고 주장한다(참고, 시스라를 죽이는데 대한 "두 개의 기사" 사이에 있는 추상적 차이점에 대해 파이퍼는 말하기를 사사기 5:25-27은 야일이 시스라가 우유를 마시고 있을 때 망치와 못으로 죽인 것을 제시하나 사사기 4:21은 시스라가 자고 있을 때 죽였다고 한다. 실제적으로 5:25-27은 시스라에게 충격이 가해질 때 그가 마시고 있었다는 것을 언급하지 않는다는 점을 파이퍼에게 말해봤자 소용이 없다. 왜냐하면 그는 이미 J와 E 사이에 "상이점"을 구분해 놓고 있기 때문이다.
⑦ 비록 다른 고대 셈계 문학들은 동일한 저자에 의해 기사를 진술해 가는 기술로써 반복과 중복을 여러 번 해나가고 있지만, 히브리 문학만은 다른 저작권을 드러냄이 없이 이와 같은 반복과 중복이 있을 수 없다고 비평가들은 전제하고 있다.
⑧ 벨하우젠 학파는 현대 유럽의 비평가들이 고대 히브리 문학과 비교할 수 있는 것이 없으면서도 각 문서들의 편집연대를 과학적 정확성을 가지고 고정시킬 수 있다는 믿을 수 없는 자신감에 빠져 있다.
⑨ 그들은 3400여년이나 후대에 살고 있는 학자들이 고대의 자자들보다 실제로 일어난 사건을 재구성하는데 있어서 더 잘할 수 있다고 가정하고 있다.
요약한다면, 벨하우젠의 가설이 과학적 공안을 받을 수 있는지조차 의심스럽다. 특별히 편집자에게 비약을 한다거나, 순환논법을 따른다거나, 기초도 없는 전제를 따라 의심스로운 추론을 하는 것이 너무나 많으므로 그 방법론이 과연 법정 앞에 설 수 있을 지 의심스럽다.
2. 모세 자작권의 적극적 증거들
오경 본문을 심사숙고해 보면, 외증과 내증의 모든 증거들이 모세의 저작권이라는 사실에 가장 부합하다. 간단명료하게 꾸밈없이 이 결론에 이르는 몇 가지 증거들을 열거해 본다.
⑴ 성경이 모세의 저작권을 증거하고 있다.
① 오경 자체는 모세가 그것을 작성했다고 입증하고 있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이것을 책에 기록하여 기념하라…… 내가 아말렉을 도말 하여 천하에서 기억함이 없게 하리라"(출 7:14). "모세가 여호와의 모든 말씀을 기록하였다"(출24:4). "(그가) 언약서를 가져 백성에게 낭독하여 들리매"(7절)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이 말들을 기록하라 내가 이 말들의 뜻대로 너와 이스라엘과 언약을 세웠음이니라 하시니라"(출34:27). "……애굽 땅에서 나오던 때의 노정은 이러하니라 모세가 여호와의 명대로 그 노정을 따라 그 진행한 것을 기록하였으니 그 진행한 대로 노정은 이러하니라"(민 33:1-2). "모세가 이 율법을 써서 여호와의 언약궤를 메는 레위자손 제사장들과 이스라엘 장로들에게 주고"(신 31:9). "온 이스라엘이 네 하나님 앞 그 택하신 곳에 모일 때에 이 율법을 낭독하여 온 이스라엘로 듣게 할지니"(31:11).
② 구약성경의 다른 책에서도 이와 같은 언급을 발견하게 된다. "이 율법책을 네 입에서 떠나지 말게 하며 주야로 그것을 묵상하며 그 가운데 기록한 대로 다 지켜 행하라"(수 1:8). 7절에서는 "나의 종 모세가 네게 명한 율법"이라고 말한다. "모세의 율법책에 기록된 대로 철 연장으로 다듬지 아니한 새 돌로 만든 단이라"(수 8:31). "여호수아가 거기서 모세의 기록한 율법을…… 돌 위에 기록하매"(32절). "네 하나님 야호와의 명을 지켜…… 모세의 율법에 기록된 대로 지키라"(왕상 2:3). "왕을 죽인 자의 자녀들은 죽이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모세의 율법책에 기록된 대로 함이라 곧 여호와께서 명하여 이르시기를"(왕하 14:6, 신 24:14을 인용한 것으로 이 사건은 약 B.C. 796년으로 추정된다). "만일 나의 종 모세의 명한 모든 율법을 지켜 행하면"(왕하 21:8, 므낫세의 통치를 언급함. B.C. 696-642년). 다른 언급들은 요시야 시대 이후로 구약성경에서 발견된다(물론 벨하우젠의 가설에 따르면 신명기는 출판되었고 J E 에 속하는 것이 된다). 토라의 저작권은 항상 개인적으로 모세에게 돌려졌다.
③ 신약성경 역시 모세 자작권에 대해 증거하고 있다. 마태복음 19:8에 "모세가 너희 마음을 완악함을 인하여 아내 내어버림을 허락하였거니와" "모세를 믿었더면 또 나를 믿었으리니 이는 그가 내게 대하여 기록하였음이라. 그러나 그의 글을 믿지 아니하거든 어찌 내말을 믿겠느냐"(요 5:46-47). "모세가 너희에게 율법을 주지 아니하였느냐 너희 중에 율법을 지키는 자가 없도다"(요 7:19). "모세가 말하되 주 하나님이 너희를 위하여…… 나와 같은 선지자 하나를 세울 것이니"(행3:22, 신 18:15에서 인용). "모세가 기록하되"(롬10:5, 레 18:5 인용). 그리스도나 사도들이 거짓말이나 오류를 범했다고 말하지 않고서 어떻게 문서설을 믿겠는가?(즉, 모세가 율법을 아직 쓰지 않았음을 믿겠는가?). 마가복음 12:26은 하나님께서 역사적 모세에게 출애굽기 3:6의 말씀을 하셨다고 진술하고 있다.
⑵ 다른 내증들
① 출애굽 기사에 대한 목격담은 그 사건 후 수세기가 지난 후에 살았던 사람의 지식 범주밖에 있으며 그 사건을 실제적으로 보고 참여한 사람이 쓴 것임을 알 수 있다. 예로써 출애굽기 15:27에서 이야기를 이끌어 가는 사람이 엘림에 12개의 샘물과 70그루의 종려나무가 있었다고 말한다. 민수기 11:7-8은 여호와가 이스라엘을 먹이기 위해 주신 만나의 모양과 맛을 이야기해 준다.
② 창세기와 출애굽기의 저자는 마치 출애굽에 동참한 사람처럼 애굽에 대해 상세한 지식을 갖고 있다. 그는 애굽의 이름에 대해 익숙하다.
오경의 애굽적 배경을 최근에 다룬 것 중 가장 야심적인 작품은 야후다의 책이다. 그는 여기에서 애굽에 있는 요셉과 모세를 다루고 있다. 또한 그는 단지 빌린 단어들에만 자신의 영구를 제한시키지 않고 원래는 애굽이었는데 히브리어로 번역된 상당수의 숙어와 말의 변화를 토론하였다. 창세기 41:40을 KJV은 이렇게 번역하였다. "내 온 백성이 네 말에 복종하리라." 이것을 직역하면 "네 말에 따라 모든 나의 백성이 키스하리라" 야후다는 애굽어에서 sn(키스하다)이 "음식"과 연결될 때는 음식을 먹는다는 뜻으로 사용됨을 밝혔다. 궁중관리들의 칭호들, 바로와 대화할 때 쓴 공손한 언어 등은 모두 애굽의 용법에 충실한 것이다.
이와 반면에 후대에서는 애굽 왕의 이름이 "바로"라는 칭호를 앞에 붙이지도 않고 불려졌다. 이것 역시 그 당시의 애굽 용법이다. 예로써 열왕기상 11:40에 시삭(애굽어로 Sheshong)이 언급되어 있다. 7세기 후반과 6세기 초로부터 히브리의 역사 편찬가들이 정확한 애굽의 용법을 벗어나 자유롭게 바로 라는 칭호에 그의 이름을 추가하였다.
③ 토라의 저자는 가나안 땅에 관한 외부인으로서 팔레스타인 밖의 관점을 가지고 있다. 기사에 언급된 계절과 기후는 팔레스타인의 것이 아니고 애굽의 것이다(예로써, 출애굽기 9:31-32에 있는 우박재앙과 연관된 곡물생산의 순서를 보라. 델리취는 이 사건이 1월 하순이나 2월 초순에 있었음을 이것이 지적해 준다고 말했다).
언급된 식물과 동물들도 팔레스타인의 것이 아니고 애굽, 혹은 시내반도의 것이다. 싯딤나무는 팔레스타인에서는 볼 수 없고, 애굽이나 시내 반도의 토종이다. 그것은 고유한 사막의 나무이다. 이 나무를 가지고 성막의 기구들이 만들어졌다. 성막의 바깥 부분을 덮어주는데 사용된 가죽은 tahash가죽(출 25:5;36:19)으로서 팔레스타인에서는 찾아볼 수 없고 애굽과 시내 반도 부근의 바다에서만 발견된 팔레스타인에서는 찾아볼 수가 없고 시내 반도 부근의 바다에서만 발견된다. ④ 출애굽기에서 민수기까지는 그 배경이 사막이다. 벨하우젠이 가정하는 것처럼 조상들이 이미 1000년 전에 정착한 농경문화가 배경이 아니다. 성막을 예배의 중심장소로 크게 강조하고 있는 것도 저자가 만일 솔로몬 성전이 세워진 이후에 살았던 사람이라면 이해하기 힘들게 된다. 선전과 성막은 많은 중요한 부분에서 서로 다른 점을 갖고 있다. 그러나 성막은 계속 사막을 돌아다니는 유목민에게는 너무나 잘 어울린다. 성막의 재료들을 기자는 여러 장에 걸쳐 아주 세심히게 배열하고 있다. 열 두 지파가 사면으로 성막을 둘러싸고 성막이 중앙에 있도록 한 것은(민2:1-31) 모세 시대와 완전히 일치하여 다른 어느 시대에도 어울리지 않는 대형이다.
⑤ 특히 창세기에서 우리는 B.C. 2000년―1000년대에 있었던 옛 습관들을 찾아볼 수 있다. 누지(Nuzi)에서 발견된 법조문들은 B.C. 15세기로 추정되는데 여기에 하녀가 합법적인 아들을 낳을 수 있는 관습(아브라함과 하갈)과 운명 때 구두로써 유언을 하는 것 (이삭이 야곱에게)과 상속권을 주장하기 위해 가족 드라빔을 소유하는 것(라헬이 라반의 드라빔을 훔치는 것, 창 31장)의 중요성에 대한 언급들이 있다. 또 다른 글들을 통해 창세기 23장에 있는 아브라함이 막벨라 굴을 살 때 행했던 거래의 관습이 역사적으로 정확하다는 것을 확증하게 되었다.
⑥ 도한 언어에서 고풍을 찾아볼 수 있다. 예를 들면, 여성 3인칭 단수는 HY' 대신에 HW' 로 쓰여졌다. 처녀도 N'RH 대신에 N'R로 쓰여졌다. 어떤 학자들은 오경의 히브리어와 8세기의 저자, 예를 들자면 아모스 같은 사람의 글이 거의 차이가 없다고 주장하는데 두 가지 요인을 여기에서 염두해 두어야 한다.
첫째로, 구약성경이 맛소라 시대에 보전이 될 때까지 발음과 알파벳 형태가 모음이 없는 자음 알파벳에 의해 변화됨으로 상당히 애매하게 되었다는 점이다. 만약 자음으로만 쓴다면 구 영어(Old English)도 엘리자베드 시대의 영어와 별로 다르게 보이지 않을 것이다.
둘째로, 토라를 모세 이후 시대의 젊은 사람들에게 중심적으로 가르친 교육 때문에 마치 코란이 13세기의 아랍어 문체에 영향을 미친 것처럼, 후대의 히브리어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오늘날까지도 아랍어는 620년 모하멧이 사용한 것과 본질적으로 같다).
이 모든 특징들은 ①-⑥에 이르러 모세 저작권을 뒷받침해 준다. 또한 이것들은 벨하우젠의 이론, 즉 9세기에서 5세기까지 점차적으로, 단계를 따라 편집되었다는 것이 허구임을 드러내어 준다. 증거의 법을 따라 판단한다면 문서설은 실제적 데이타의 내용과 일치하지 않으므로 기각되어야 한다.
⑦ 전 오경을 관통하는 놀라운 통일성과 그 점진적 발전을 묶어주는 고리들이 있다. 물론 계시의 단계적 발전으로 말미암아 중복과 반복이 어느 정도 있게 된 것도 사실이다. 문서설주의자들도 현재 우리에게까지 전해지게 된 오경의 최종형태는 가상적인 편집자가 질서와 배열을 잘 해두었기 때문이라고 말함으로써 이 통일성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제 9 장 자료구분의 기준으로서 상이점과 중복
1. 여호와와 엘로힘의 상이점
비교종교학적 관점에서 본다면 이스라엘 인근에 있는 이방의 종교문화들이 가장 중요한 신을 오직 하나의 이름으로만 불렀는지 의심스럽다. 바벨론에서는 수메리아의 신들 이름을 악카드어 이름으로 바꾸어 불렀다. 벨은 엘릴이며 누남니르였다. 아눔은 알룸,신은 난나, 에아는 엔키, 우투는 사마쉬, 우쉬타르는 이난나 혹은 텔리툼이었다. 우가릿에서 바알은 알리얀으로, 엘은 랏트판, 코사르 바 하시스는 하임으로 불렀다. 아스트룩과 아이히혼 시대에는 셈계와 애굽의 자료(data)들이 사실상 잘 알려지지 않고 있었다. 만약 그렇지만 않았다면 하나님의 이름에 근거한 자료구분 이론이 결코 생기지 않았을 것이다. 위에서 지적한 바와 같이 이름을 자료구분의 기준으로 삼는 것은 맛소라 사본(MT)과 70인역(LXX)에 나타나는 이름의 차이에 근거하여 반박을 할 수 있다. MT가 여호와와 엘로힘을 전수하는데 아무런 오류도 있을 수 없다는데 근거한 이 문서의 분리 관정은 건전하지 않다는 것을 이것이 제시해 준다.
토라 전반에 걸쳐 야훼와 렐로힘이 흩어져 있는 것에 대해 어떻게 설명해야 하는가? 즉, 엘로힘(능력, 강함, 최고를 가리킴)은 하나님께서 자연과 인류 전반에 주가 되시고 전능하사 우주를 창조하신 하나님에 대해 언급할 때 사용된다. 따라서 오직 엘로힘만이 창세기 1장에서 적합하게 된다. 그 주제가 창조이기 때문이다. 반면에 여호와는 하나님의 언약 명칭으로서 하나님께서 언약을 맺으시는 상황에서 나타난다. 그 주제가 하나님께서 행위언약을 아담과 하와와 은혜로 맺기 때문이다.
최근에 유럽에 있는 지도적 자유주의 신학자들 중 몇이 벨하우젠의 출애굽기 6:3에 대한 전통적 해석을 포기하였다. "야웨가 여태까지 모세에게 알려지지 않았다는 것이 E의 관점이 아니다. 모세는 그가 자기 백성에게 돌아갔을 때 정말 자기가 보낸 분이 그들의 조상들의 하나님이었다는 것을 보여줄 수 있는 <결정적> 증거를 요청하고 있다…그 대화 전체가 이미 이스라엘 백성들이 알고 있었다는 것을 전제하고 있다."
2. 어투와 문체의 차이
출애굽기 8장에서 "그리고 아론"이 나타날 때마다 P에 법규가 만들어질 때까지 발명되지 않은 비역사적 인물이기 때문이다. 이와 유사한 것으로서, 밧단-아람(P 이름)이 창세기 31:18(E 문단)에 나타날 때 18절 하반부는 P에 돌리고 나머지 4-45절은 E에 돌려 밧단-아람은 P에만 나타나고 아람-나하림은 J E와 D에서 사용된다는 그들의 가설을 살리려고 한다. 그러나 이것은 질문 속에 답을 넣고 대답을 이끌어내는 순환논법일 뿐이다.
문서설주의자들은 고대 히브리의 저자들이 표현방법에 있어서 다양성을 띨 수 없었다는 아무 증거도 없이 가정하고 있고 다양성이 나타나면 바로 다른 저작권으로 연결시켜 버린다. 그러나 다른 여러 나라의 문학에서도 숙련된 저술가들이 단조로움을 피하기 위해 다양한 표현을 쓰고 있었음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동일 저자가 강조와 신선함을 위해 다양한 표현을 쓸 수 있음을 명심해야 한다. 예로써, 출애굽기에서 바로가 이스라엘 백성이 나가는 것을 거절할 때 세 가지의 다른 동사가 열 재앙 앞에서도 완고한 그의 마음을 표현하고 있다. 또 다른 경우에는 표현을 달리함으로써 특별히 중요한 것을 강조 하거나 부연해 준다. 리브가의 유모 드보라가 죽을 때나(창 35:8), 라헬이 운명할 때 단순표현으로 처리한다. "그녀가 죽고 장사되었다." 그러나 아브라함(창25:8), 이삭(35:29), 야곱(49:33)과 같은 족장들의 경우에는 그 표현 형식이 더욱 장엄하고 길다. "그는 기운이 진하여 죽고 자기 열조에게로 돌아가며 그의 아들들이 그를 장사하였다."
3. 중복기사와 평행기사
문서설 초기부터 중복기사와 평행기사는 여러 자료가 오경에 있는 것을 증명하는데 사용되었다. 두 개의 창조기사와, 홍수기사가 여러 가지로 얽혀 있는 것과, 이삭의 세 가지 이름 등은 동일한 사건에 대한 다양한 전통을 어설프게 묶은 결과로 여겨졌다. 후대의 편집자가 이 모든 것을 다 하나로 묶었기 때문에 수많은 불일치가 텍스트에 남아있게 되었고, 비평활동을 통해 과학적으로 분산시킬 필요를 느끼게 되었다. 이런 해부활동은 복합저작권 이론을 따르는 자들에게 호소력 있게 전달되었다.
요셉을 애굽에 판 기사가 두 가지라고 한다. J기사는 이스마엘인이 사고(37:25), E 기사는 미디안인이 그를 데려갔다고 한다(창37:28). 이 두 가지 이름은 저자가 그 시대를 잘 알고 있었음을 오히려 변증해 준다. 즉, 미디안인들은 이스마엘 족속 중 한 지파였다. 사사기 8:24은 미디안의 왕들인 세바와 살문나와 그들의 부하들에 대해 그들은 "이스라엘 사람이므로 금 귀고리가 있었음이라"고 말하고 있다. 원래 미디안은 아브라함이 그두라에게서 낳은 자였지만(창25:2), 이스마엘 족속과 그두라 족속이 둘 다 아브라함의 후손이었던 관계로 북 아라비아에서 서로 결혼도 하며 살았던 것 같다.
아브라함이 그의 처 사라를 그의 동생으로 소개하고 바로(창12:10-20)와 그랄의 아비멜렉(창 20:1-18)에게 빼앗긴 두 기사가 동일한 전설을 다른 형태로 보존한 것이라고 주장되기도 한다. 그러나 인간이 동일한 실수를 두번 다시 범하지 않고 똑같은 유혹에 단 한번만 빠진다는 가설은 너무나 피상적이다. 특히 아브라함은 두번 다 큰 부를 가지고 나왔던 것을 고려해야 한다.
하갈이 아브라함의 집을 떠난 것이 두번 나타난다. 창세기 16:4-14에 있는 첫째 기사는 J에(이스마엘 낳기 전에 어떻게 나갔느냐 하는 것을 보여줌), 창세기 21:9-21은 E 에(이스마엘이 이미 소년이 되었을 때 집을 나간 기사) 돌려졌다. 사라와 하갈이 수년간 갈등을 일으키고 있었던 것을 고려해 볼 때 이 두 사건이 다른 때, 다른 상황에서 일어난 사실이 아닌가. 역사는 위인들의 생애에 반복적인 사건들이 일어나는 것을 얼마나 많이 보여주는가. 아다나시우스 감독은 세 번이나 유형을 당하지 않았는가? (A.D. 335, 339, 356―문서설을 따르는 사람들은 이것 역시 세 가지 "자료"에서 나온 것으로 보고 편집자가 마지막으로 다양한 전통으로 묶었다고 하지 않을까?).
4. 중복에 대한 하나의 답으로서 히브리어의 문체
중복 이론에 대한 하나의 해답을 히브리어 문체의 성격에서 찾아 볼 수 있을 것이다. 알리스는 히브리 저자들이 널리 사용한 것으로 알려진 세 가지의 문체적 특징을 지적하였다. 이 세 가지 특징은 문장구조, 중요사항의 반복, 그리고 평행법이다.
① 평행문장은 종속절, 혹은 독립절을 단순 접속사 그리고( , we)로서 연결시키는 특징적인 히브리어 표현구조이다. 창세기 1:14에서 인도-유럽 언어는 목적절로 표현하여 "징조와 계절을 나타내기 위하여(in order to) 하늘의 궁창에 있으리라"로 썼겠지만, 히브리 저자는 "하늘의 궁창에 빛이 있으라…… 그리고 그것들을 징조와 계절이 되어라"로 나타난다. 또한 이사야 6:7을 "볼지어다 이것이 너의 입술에 닿았다 그리고 너의 불의는 제하여졌다. 그리고 너의 죄는 속함을 받았다."로 직역할 수 있다. 그러나 여기에서 이사야가 전달하고 싶었던 점은 "보라 너의 불의가 제거되고 너의 죄가 대속되기 위하여(in order that) 이것이 네 입술에 닿았다."이다.
② 둘째 특징은 중요한 기사를 약간 달리 반복하게 사용하는 것이다. 이 기술에 대한 하나의 예를 홍수기사와 연관하여 이미 제시하였다. 거기에서 3가지 중요한 강조점의 반복이 분할론 자들에 의해 마음대로 요리되었으며, 나머지 기사들은 복합 자료설에 대해 아무런 증거도 제시하지 않고 있음을 보았다. 이와 약간 유사한 것이 출애굽기에 열 재앙이다. 어떤 경우에는 재앙이 다섯 가지의 특징적 부분으로 충분히 기술되었다. 즉, 경고, 명령, 집행, 중보기도, 끝 이러한 순서로 되었다. 자료 재평가에 있어서 이것들을 하나씩 꾸러미로 만들어 가상적인 저자에게 돌리는 것은 지극히 단순한 작업이다. 이리하여 경고와 끝은 J, 그리고 명령과 집행은 P에게 돌려졌다. 그러나 좀 약한 재앙에 있어서는 그 설명이 짧아서 따른 여러 자료로 나누기가 힘든 경우가 있다. 이 재앙과 악질 재앙은 J와 E에게 돌림이 없이 P에게만 할당되었다. 이렇게 인위적으로 배열됨으로써 J는 일곱 재앙을, E는 오직 네 재앙(다섯 번째 것은 경고만 있고 실행이 안되었다)을 알고 있는 격이 된다. 결과적으로 이 자료들 상호간에 재앙의 횟수가 전혀 일치하지 않게 되며, 열 개의 재앙을 알기 위해서는 각 순서가 다른 문서에 있는 정보를 알 필요가 있게 된다.
③ 세 번째 특징은 시적(詩的)평행법(平行法)이다. 평행법이란 평행구절이 균형을 이룰 때 갖는 전문용어이다. 예로써 시편 24:1은 "땅과 거기 충만한 것과 세계와 그 중에 거하는 자가 다 여호와의 것이로다"라고 진술한다. 여기에서 "땅"은 "세계"와 "충만한 것"과 "그 안에 거하는 자"가 평행을 이루며 동의어를 이루고 있다.
그린은 누가복음 15장에 있는 탕자의 비유를 "문서설"로 분석함으로써 이것에 대해 멋진 예증을 제시하였다. 벨하우젠의 기교를 풍자하면서 그는, A자료와 B자료를 나누고 그 둘이 두 아들이 있었다는 점에서 일치하며, 그 중 한 아들은 아버지의 재산의 몫을 받아 방탕한 생활을 함으로써 극빈에 빠지게 되었다는 점에서 동일하다. 그러나 A만이 형님과 동생으로 나누며 B는 그들의 나이에 대해 아무런 언급도 없다. A에서 작은 아들은 아버지께 간청을 하여 유산을 받으며 여전히 그 나머지는 아버지가 갖고 있다. B에 따르면 그 아버지는 유산을 먼저 자기 뜻대로 나누어준다. A는 탕자가 아버지의 이웃에 살았으며 방탕한 생활로 빈궁에 빠졌다고 말한다. B에서는 그가 먼 나라로 가서 모든 재산을 써버리지만 어떤 방탕에 빠진 것 같지는 않다. 그린은 드라이버(S.R. Driver)가 한 그대로 따랐으며 A와 B의 특징적 단어들을 골라내고 또 서투른 편집자가 잘못된 장소에 이것들을 집어넣은 것을 지적함으로 끝을 맺는다. 벨하우젠 학파의 방법론을 철저히 통달하고 그는 마치 그 조합의 인준 멤버가 된 것처럼 그의 재료들을 다루면서 그것의 인위성을 드러내어 주었다.
제 10 장. 자료구분의 기준으로서 후대 단어들과 아람어 영향
20세기의 20년대에 프린스톤의 윌슨(Robert Dick Wilson)은 히브리어 성경에 있는 소위 희귀한 단어들을 모두 뽑은 후 그 결과를 통계자료로 출판하였다. 이 자료에 의한다면 모든 성경은 후대의 것이며 그 하나도 초기의 것이 없다. "희귀한 단어들"이 탈무드에서와 같은 뜻으로 나타나는 것이 많으면 많을수록 후대의 것이라는 것을 염두에 두고, 다음의 통계를 비교해 보자.
비평가의 연대 희귀어 탈무드
P문서 B.C. 550-450 192 53.1%
D문서 B.C. 621 154 53.2%
H문서 B.C. 570-550 48 50.0%
E문서 B.C. 750 119 48.7%
J문서 B.C. 850 162 44.4%
예레미야서 B.C. 620-580 278 32.1%
이사야 1-39장 B.C. 740-680 121 22.3%
이사야 40-66장 B.C. 550-300 62 25.8%
다니엘서 B.C. 168 47 29.8%
이 통계를 분석해 볼 때 가장 후대에 쓰여진 책으로 알려진 (비평가들의 연대 추정에 따르면) 다니엘서는 인용된 아홉 가지 중 밑에서 세 번째로 퍼센트(비율)가 낮으며 가장 초기의 것인 J는 44.4%로서 상당히 높은 비율을 차지하고 있다. P보다 2-3세기 더 일찍 쓰여진 것으로 여겨지는 E문서는 P보다 5% 더 이하로 떨어진다. 이와 반면에 P보다 1세기나 더 앞선 것으로 여겨진 D는 P와 거의 같은 비율을 갖고 있다. 이것을 볼 때 이 접근법 자체가 불건전하며, 그 논거가 정당치 않음이 명백하다. 포로 후기의 에스라서 1-6장은 비록 B.C. 450-370년으로 비평가에 의해 연대 측정이 되었지만 16.7%밖에 되지 않는다. 말라기서(B.C. 430) 역시 23.1%로서 낮은 비율을 갖고 있다. 이것을 B.C. 850년 작품으로 여겨진 "여호와 문서"의 44.4%와 비교해 보라. 그러므로 우리는 이런 식의 연구방법을 완전히 기각시켜 버려야 한다. 이는 그것이 부조리한 결과로 이끌어가기 때문이다.
1. 후대 작품의 기준으로서의 아람어 영향
카우취의 저서에는 『구약성경 안의 아람어 영향』에는 구약성경에 있는 약 350개의 단어가 확실히, 상당히, 혹은 아마 아람어에서 온 것이라는 내용이 있다. 이 350개의 단어 중 윌슨은 100개가 그 어느 아람어 문서에서도 발견되지 않으며(1926년까지의 현황), 그 나머지 250개 중 135개는 A.D. 2세기 전의 아람어 문서에서 단 한번도 나타나지 않는다고 밝혔다. 그 나머지 중 115개는 그 이전의 문서에서 발견이 되며, 75개는 바벨론어, 아람어, 페니시아어, 혹은 에디오피아어에서 발견된다. 그러므로 카우치가 열거한 이 350개의 아람어 영향에 대해 전체적으로 의심을 하지 않을 수 없다. 대부분의 경우에 있어서 이 단어들은 기존하고 있는 아람어 문서에 나타나는 것보다 약 7세기 더 오래된 히브리어 책에 나타난다. 사실 기독교 이전 시대의 아람어 작품들이 안타까울 정도로 적다. 그러나 히브리어 단어를 아람어 영향으로 구분을 한다는 것은 단순한 학적 추측에 근거해서가 아니라 보다 확고한 기초 위에서 주장되어야 할 것이다. 비평가들이 아람어 영향에 근거해서 포로 이전 작품 중 약 1,500개의 절을 포로 후 시대의 것으로 돌려버릴 것을 기억할 때 이 단어들이 아람어였다는 것에 대해 기록으로 제시할 것을 요청하는 것이 합리적이다. 고유한 아람어가 히브리어와 구별될 수 있는 어떤 언어적 특징이 있는 것이 이런 증빙자료를 제시하지 않아도 될 만큼 존재하는 것이 사실이다. 다시 말하면, 문제시된 단어가 일곱 개의 명백한 자음 중 하나라도 가지고 있던지, 동일한 어근이 다른 셈어에도 존재한다면 한 단어가 원래부터 아람어였다가 히브리 저자가 빌린 단어인지 아니지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제 11 장 전 선지자 시대와 선지자 시대의 히브리 역사에 대한 벨하우젠의 재구성
이스라엘 종교가 거대 근동 아시아에 있던 비 이스라엘인 국가들의 종교와 거의 유사하게 발전했다는 것을 전제하고 많은 유추를 해내었다. 그래서 애굽에서는 혼합주의의 과정 속에서 유사한 신들을 한 신의 여러 양상으로 보면서 애굽인들은 초기의 다양한 다신 숭배로부터 제 18왕조에 의해 단 일신 숭배에 아주 가까이 가게 되었다. 그 때 아몬―레(Amon-Re')는 최고 신이 되고 다른 모든 신들은 그의 휘하에 있게 되었다. 이것은 다시 애굽 종교의 전성기를 이룬 아크나톤 왕(King Akhnaton)의 유사 유일신론을 향한 길을 열어주었다. 바벨론에서는 마르둑 신이 최고의 자리로 올라가고 나머지 모든 신들이 그 아래에 굴복하는 유사한 발전과정을 보게 된다. 헬라에서는 호머의 화려한 다신론이 후대 크세노파네스와 플라톤의 유일신론적 철학으로 가는 길을 열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의 유일신앙도 다른 나라들과 같이 일반적인 진화과정을 통해 형성된 것이다.
그러나 비교종교학에 근거한 이 논리는 실제적인 자료를 추정해 볼 때 신빙성이 없는 것으로 판명된다. 역사적 판정은 이것이다. 이스라엘만이 국가적 차원에서 유일신론적 종교를 가졌다. 이것에 대한 합리적인 설명이 무엇인가? 이스라엘 종교가 다신론에서 나왔다고 주장하는 것은 문제를 해결해 주기보다 더 복잡하게 만드는 것이다. 어떻게 해서 오직 이스라엘에서만이 다신론이 유일신론에게 길을 비켜주었는가? 저자가 아는 바에 따르면 구약성경 자체가 말하고 있는 바 이 유일신앙이 하나님의 직접적 계시였다는 것 외에는 다른 어떤 합리적 설명이 있을 수 없다. 그것은 히브리 종교적 천재가 만들어낸 것이 아니다. 그들은 오히려 그릇된 종교적 배도로 백성을 이끌어갔음을 성경이 증거하고 있다. 고대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방 이웃들의 다신론을 쉽게 받아들이고 여호와와 맺은 언약 관계를 깨뜨리는 자연성을 가지고 있었다. 바벨론 포로가 되기까지(B.C. 587년) 북쪽의 열 지파가 먼저, 그리고 남쪽의 두 지파가 따라서 깊은 인근 나라의 신들을 깊이 섬겨가며 하나님의 계시된 말씀을 떠나려고 발버둥치고 있었음을 구약성경은 증거하고 있다. 그들이 영원히 거기에 빠져버리지 않았던 이유는 하나님께서 계속 은혜를 주시고 선지자들을 통해 그의 메시지를 전달하여 억제시켰기 때문이다.
1. 벨하우젠이 본 전 선지자 시대
비교종교학의 원리를 따라 문서설 건축가들은 이스라엘의 신앙에서 원시적인 면을 찾아냈다. 예로써, 야곱이 벧엘에서 돌을 베개로 삼고 잔 기사에서 희미하게 비친다고 한다. 돌을 섬긴 것은 야곱과 라반이 길르앗에서 세운 돌무더기 배후에도 깔려 있음이 틀림없다. 우상숭배에 잘 빠지는 이스라엘 사람들이 그들이 가나안인들로부터 신당을 취한 후에 동일한 의식을 따랐다는 사실은 그들이 분열왕조 시대 후반기까지도 돌을 섬겼다는 것을 증거해 준다.
아브라함은 나무를 숭배했다. 뇔디케 같은 비평가는 아브라함이 자기의 숙소를 "마므레 상수리 나무"에 짓는 것을 창세기 14:13에서 볼 수 있다고 말했다. 또한 모세 후 시대의 여선지자 드보라가 거룩한 종려나무 곁에 자기 막사를 짓는 것을 언급하고, 또다른 정령숭배의 흔적은 모세가 지
은 것으로 돌려진 율법에서 찾아볼 수 있다. 출 20:25에서 여호와께 세운 돌은 징으로 쪼갠 돌이어서는 안된다는 것을 볼 수 있다. 왜 안되는가? 그 제단에 제사의 상징을 그려 넣을 수 있는 가능성을 배제하기 위함인가?(징으로 쪼갠 돌을 사용하지 말라는 명령 직전에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라는 명령이 나타나므로 이렇게 생각하는 것이 자연스러워 보인다). 혹은 그 당시의 사람들이 돌은 그 원래의 상태 속에 신(daemon)을 간직하고 있다는 미신을 믿고 있었기 때문에 그것을 도말하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 아닌가? 물론 비교종교학자들은 둘째번 설명을 따르고 있다.
문서설이 히브리 역사를 재구성한 것에 따르면 이스라엘 종교 초기에는 우상숭배와 다신 숭배가 많이 있었다. 이들에 따르면 출애굽기 32장의 금송아지 숭배는 모세에 의해 용인된 것이라고 한다. 그 우상이 여호와 자신을 종교적으로 표현하는 것이었다면 더욱 그러하다. 그렇지 않았다면 이스라엘 여로보암 1세가 벧엘과 단에 황소 우상을 세웠을 때 강력한 반박이 있었을 것이다. 모세의 율법에 우상숭배를 금지하는 기록된 명령이 있었다면 결코 그가 송아지 우상을 만들지 못했을 것이다. 엘리야도 여로보암의 송아지에 대해 아무런 정죄를 하지 않았다(약 B.C. 860-850). 즉, 그는 우상을 빌려 여호와를 섬기는 것을 문제시하지 않았다는 것이다(엘리야가 외친 설교에 대한 기록이 남아 있지 않기 때문에 이런 주장을 하는 것은 정당하지 않다. 열왕기상 13장에 따르면 엘리야보다 앞서 살았던 한 무명의 유대 선지자가 벧엘에 있는 여로보암의 우상과 제단에 대해 단도직입적인 정죄를 하였음을 알 수 있다). 또한 그들은 아모스 선지자도 그 송아지에 대해 정죄를 하지 않았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 주장은 아모스 3:14에 있는 에브라임의 종교의식에 대한 심판의 선언과 충돌된다. "내가 이스라엘의 모든 죄를 보응하는 날에 벧엘의 단들을 벌하여 그 단의 뿔들을 꺾어 땅에 떨어뜨리리라." 모세의 놋뱀은 히스기야 시대까지 국보로 성소에 보전되어 왔는데(왕하 18:4), 벨하우젠 학파는 이것이 레위 지파의 보호자로 신봉된 우상이었다고 확신한다. 8세기에 들어와 선지자들의 유일신론이 유다에 퍼지고 지배적인 신앙이 됨으로써 히스기야가 그것을 부수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것은 아무런 객관적 증거도 없는 추측에 지나지 않는다.
이 비평가들에 따르면 초기의 이스라엘 백성들은 기록된 율법을 전혀 갖고 있지 않았다. 수메리아인, 바벨론인, 앗수르인, 힛타이트인들은 모세 때나 혹은 그 이전에 이미 그들의 법을 명문화시켰는 데도 이스라엘 인들만이 갖고 있지 않았다. 그리고 오경에 있는 규례 중 가장 오래된 것은 소위 J의 의식적 십계명으로 불리는 것이다(출 34:11-26). 이 단락이 십계로써 아무런 서론적 형식없이 시작한다는 것을 지적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그것은 열 가지 계명이 아니고 오직 여덟 가지뿐이며, 히브리인들이 850년까지 가장 중요한 법을 기록할 때 살인, 간음, 절도, 사기, 그리고 부모를 멸시하는 것에 대한 규례를 모두 빠뜨리고 있다는 것은 전혀 가능성이 없는 말이다. 이런 범죄에 대한 규례들이 베벨론의 함무라비 법전(약 B.C. 1700)과 힛타이트, 수메리아 법전에는 아주 상세하게 다 기록되어 있는데 여기에는 소위 십계라고 불려지는 것이 하나도 언급되어 있지 않다.
문서주의자들은 전 선지자 시대에 종교적 발전이 있었음을 본다. 즉, 전 선지자 기간에는 족장 시대의 조잡한 다신론으로부터 히브리 지파들이 야웨에게 그들의 충성을 다 바쳐가는 단일신론으로 성장에게 그들의 충성을 다 바쳐가는 단일신론으로 성장해 간다. 야웨는 그들의 민족 신이 되었다. 이 신이 이미 여러 신들을 배경으로 깔고 있었음을 엘로힘(Elohim)에서 찾아볼 수 있다. 그 신의 복수 어미-im에 나타난다(그러나 이것은 위엄의 복수이다). 사사 시대에 입다가 암몬인들에게 이 용어로 말을 하고 있다(삿 11:24). "네 신 그모스가 네게 주어 얻게 한 땅을 네가 얻지 않겠느냐?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서 우리 앞에서 어떤 사람이던지 쫓아내시면 그 땅을 우리가 얻으리라"(여기에서 입다는 신학자로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외교관으로서 그들이 알아들을 수 있도록 공명정대하게 말하고 있다). 다윗 왕까지도 사무엘상 26:19에서 다른 신들의 존재를 인정하고 있다. "이는 그들이 이르기를 너는 가서 다른 신들을 섬기라 하고 오늘날 나를 쫓아내어 여호와의 기업에 불지 못하게 함이니이다"(그러나 이 표현은 "다른 깃발 아래서 일하라"는 것에 대한 고대의 표현일 뿐이다. 유일신론적 신명기학파 저자도 이런 식의 말을 한다. "여호와께서 너와 네가 세울 입금을 너와 네 열조가 알지 못하던 나라로 끌어가시리니 네가 거기서 목석으로 만든 다른 신들을 섬길 것이 나라로 끌어가시리니 네가 거기서 목석으로 만든 다른 신들을 섬길 것이라"(신 28:36). 여기서 다른 신들을 섬긴다는 것은 거짓된 이방 종교가 지배적인 땅에서 종으로 산다는 뜻이다).
벨하우젠 학파는 호세아 3:4에 있는 바 "이스라엘 자손들이 많은 날 동안 왕도 없고 군도 없고 제사도 없고 주상도 없고 에봇도 없고 드라빔도 없이 지낼 것이다"라는 것을 해석하면서 우상숭배와 연관된 주장들과 드라빔이 호세아 시대에는 합법적인 것으로 여겨졌다고 한다. 이는 왕과 제사와 기타 등등은 이 절에서 그것들과 함께 묶여 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문맥을 잘 살펴볼 때 이 절에 열거된 모든 의식들이 저자에 의해 불법적이며 하나님의 심판 하에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즉,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왕조를 세우지 않았으며, 레위인이 아닌 자를 제사장으로 세우고, 예루살렘 제단에서 규례를 따라 제물을 드리지 않고 다른 곳에서 자의대로 들린 것 등을 언급한다. 그 다음 절에서는 후일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들의 참 하나님과 참 왕인 다윗에게로 돌아오며 모든 성결과 거룩으로 예배를 드림으로 과거와 같은 범죄를 되풀이하지 않을 것을 진술하고 있으므로 이 절에서 그들이 주장하는 바는 정당하지 않다.
2. 벨하우젠이 본 선지자 시대
선지자들이 제사제도를 반대하였다는 것을 입증하기 위해 문서설의 건축가들은 몇 가지의 증빙 텍스트가 필요했고, 또 그것들을 문맥에서 벗어나 자기들 마음대로 해석하였다. 이리하여 8세기와 7세기의 위대한 선지자들이 피로써 희생을 드리는 것은 하나님께 바로 나아가는 길이라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주장하였고, 한 걸음 더 나아가서 그것이 모세의 인허에 의한 것이라는 사실도 부인하게 되었다. 이것을 입증해 주는 것으로 사용되는 네 가지의 자주 인용되는 구절이있다.
① 아모스 5:21-26
"내가 너희 절기를 미워하여 멸시하며 너희 성회들을 기뻐하지 아니하나니 너희가 내게 번제나 소제를 드릴지라도 내가 받지 아니할 것이요 너희 살진 희생의 화목제도 내가 돌아보지 아니하리라 네 노래 소리를 내 앞에서 그칠지어 다 네 비파 소리도 내가 듣지 아니하리라 오직 공법을 물같이, 정의를 하수 같이 흘릴 지로다 이스라엘 족속아 너희가 사십년 동안 광야에서 희생과 소제물을 내게 드렸느냐 너희가 너희 왕 식굿과 너희 우상 기윤 곧 너희가 너희를 위하 여 만들어서 신으로 삼은 별 형상을 지고 가리라"(식굿은 성막, 기윤은 성물로 번역 됨).
문서설주의자들은 이 구절을 해석핼 때 "출애굽 광야생활에서 한번도 하나님께 희생과 제물을 드리지 않았다"는 것을 암시하는 것으로 본다. 그러나 아모스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이런 것이었다. "너희가 그때 내게 희생을 드렸느냐? 그래 그랬지. 그러나 그것들이 얼마나 추하고 받을 수없는 것이었느냐(지금 너희들이 내게 바치는 곳과 똑같았다). 너희들도 모세 시대와 똑같이 우상을 몰래 섬기며 지고 다니지 않느냐!" 이것이 아모스가 이 장에서 전개해 가는 논리의 흐름에 잘 일치한다.
② 미가서 6:6-8
"내가 무엇을 가지고 여호와 앞에 나아가며… 내가 번제물 일년 된 송아지를 가지고 그 앞에 나아갈까 여호와께서 천천의 수 양이나 만만의 강수 같은 기름을 기뻐 하실 까… 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나니 여 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이 오직 공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히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
이것은 미가가 제사제도를 반박하고 우리가 구원을 얻을 수 있는 조건으로써 도덕적인 삶을 살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으로 여겨졌다. 그러나 이것은 옛 선지자들의 가르침에 현대 자유주의 사상을 억지로 집어넣는 것이다. 문맥을 살펴볼 때 미가는 그 당시 사람들이 불경건한 삶과 비도덕적인 생활을 하면서 종교적인 형식주의에 빠져 있는 문제를 다루고 있다. 아무리 값지고 풍부한 제물을 제단에 바친다 하더라도 마음으로 일상 생활에서 주의 뜻에 복종하려고 하며 진실되이 살지 않을 때 그것은 아무것도 아니다. 제물로써 순종이 없는 생활을 바꿀 수 없다. 하나님이 받으시는 예배는 주의 뜻에 우리를 바친 후에 나온다. 여기에서 우리는 제사제도를 반박한 것은 하나도 찾아볼 수 없고 오직 경건의 대용품으로서의 의식문제만을 다루고 있음을 보게된다.
③ 이사야(1:11-17)는 동일한 선상에 있는 또다른 하나의 선지자의 선포이다.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너희의 무수한 제물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뇨 나는 수 양의 번제와 짐승의 기름에 배불렀고 … 너희는 스스로 씻으며 스스로 깨끗케 하여 내 목전에서 너희 악업을 버리며 악행을 그치고 선행을 배우며 공의를 구하며 학대받는 자를 도와주며 고아를 위하여 신원하며 과부를 위하여 변호하라 하셨느니라."
벨하우젠 학파는 이것을 해석하기를 피의 제사는 헛된 것으로 제거되어야 하며 공적이 될 수 있는 선행을 행함으로 구원을 얻으라는 선언으로 본다(현대의 모범적인 자유주의자가 기대하는 바도 이것이다). 그러나 이 해석이 잘 못되었음을 15절에서 명백히 볼 수 있다. "너희가 손을 펼 때에 내가 눈을 가리우고 너희가 많이 기도할지라도 내가 듣지 아니하리니." 만약 이 앞 절에 있는 언급들이 피의 제사 그 자체를 금하는 것이라면 여기서는 기도 역시 그와 같은 것으로서 금지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똑같은 표현이 동시에 사용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가장 계몽된 현대의 자유주의자도 선지자 이사야가 기도를 금했다는 것에 대해서는 생각조차 하지 않을 것이다. 마음을 치료해주는 관점에서만 본다 하더라도 기도는 유익할 뿐 아니라 권장되어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④ 예레미야 7:22-23
"대저 내가 너의 열조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날에 번제나 희생에 대하여 말하지 아니하며 명하지 아니하고 오 직 내가 이것으로 그들에게 명하여 이르기를 너희는 내목소리를 들으라 그리하면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겠고 너희는 내 백성이 되리라 너희는 나의 명한 모든 길로 행하라 그리하면 복을 받으리라."
비평가들이 볼 때는 하나님이 제사제도에 대해 모세에게 말한 바가 없다는 것을 예레미야보다 더 명백히 말한 자가 없다고 생각한다. 말할 여지도 없이 P의 자료들은 아직까지 J, E, 혹은 D에 첨가되지 않았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예레미야는 그와 같은 말을 결코 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만약 선지자가 여기에서 참으로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 분석해 본다면 그것이 출애굽기 19장에서 인용된 것임을 발견하게 된다.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율법을 처음으로 영포(令布)하기 전에, 십계명을 선언하기도 전에 이 말씀을 주셨다. "내가 그들을 애굽 땅에서 이끌어 낼 때."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희생이나 번제에 대해 아무런 말씀도 하시지 않았다(출애굽기 12장에 따르면 유월절 양도 제단에서 잡는 것이 아니었다). 먼저 그는 언약의 조건으로서 절대적이고 무조건 적인 순종을 요구하셨다. 그 후에 제사규례를 모세에게 제시하였다. 예레미야의 동시대인들은 참된 경건 대신에 의식을 대치시켰기 때문에 역사적으로 볼 때 하나님께서 희생의 제단에 피로써 죄를 속죄하는 대책을 주기 전에 그의 도덕법에 절대적인 순종을 요청했다는 사실을 상기시킬 필요가 있었다. 이와 동시에 예레미야는 그의 예언의 다른 부분에서 제사제도에 대해 열렬한 지지를 하고 있음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렘 17:19-27;31:14;33:11,18).
일반적으로 볼 때, 요시야의 종교개혁 이전에 지방 성소가 이스라엘의 여러 곳에 있었다는 그 역사적 사실이, 모세의 율법이 그것들을 금하지 않았다는 것을 적극적으로 증거 하는 것이라고 문서주의자들은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이런 논리는 요시야의 종교개혁이 B.C. 621년에 있은 후에도 우상숭배를 하는 산당이 유다에 계속 있었다는 부인할 수 없는 사실 앞에서 무기력함을 느낀다(참고, 겔 6:3).
제 12 장 벨하우젠이 재구성한 제사장 시대의 히브리 역사
벨하우젠의 가설에 따르면 유대 왕조가 몰락을 하면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포로로 잡혀간 후에 더 이상 정치적인 독립을 이룰 수가 없어서 그들의 종교적인 기구를 국가의 존속 기초로 생각하게 되었다고 한다. 바로 이 이유 때문에 레위 지파의 직업적 제사장 계급이 점차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고 그 의식들이 최종적으로 P문서에 수록이 되었다. 이 이론에 따르면 포로로 잡혀가기 전에는 모든 신자에게 어떤 표준적인 규칙들이 전혀 없었고, 단순하고 상황에 따라 융통성 있게 예배와 제사를 드렸다고 한다.
문서설에 따르면 제사장 계급을 아론의 가족에게 한정시키는데 있어서 발전의 흐름이 명백히 있었다고 한다. 처음에는 그 제사장이 모든 이스라엘인들에게 다 열려 있었다("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리라" 출 19:6, J-E 구절). 실제적으로 출애굽기 19:6은 이스라엘이 모든 이방인들과 이교도들에 대해 하나의 민족으로서 가진 역할을 말하고 있다. 이방인들은 유일하신 참 하나님을 배우기 위해 히브리인의 중보가 필요하였기 때문이다.
벨하우젠에 따르면 그 다음 단계는 신명기로 대표될 수 있다(B.C. 621). 신명기 27:12-14에는 레위 지파가 그리심산의 비탈에서 다른 지파와 함께 서 있으며 다른 여섯 지파는 에발산에 서 있었다. 그러나 그 두 그룹 사이에 있는 골짜기에 선택된 레위 그룹이 서 있었는데 그들은 "레위 제사장들"이었고(9절) 그들은 하나님이 쏟으시는 일련의 저주를 낭송하도록 되어 있었다. 이 골짜기에 구별된 구룹의 사람들이 아론계의 제사장들 같지는 않다. 이와 같이 열왕기상 8:4에서도 제사장들과 레위인 사이에 구별을 암시하고 있다. "여호와의 궤와 회막과 성막 안의 모든 거룩한 기구들을 메고 올라가되 제사장과 레위 사람이 그것들을 메고 올라가며"(쿠에넨은 이 절을 신명기적 문맥에서 잘라내어 P에게 돌리는 것이 잘못이라고 단호하게 말했다).
어쨌든 이 이론에 따르면 최종적으로 아론의 가문이 레위 지파 중에서 우월권을 갖게 되며 그 발전이 시작된 때는 바벨론 포로기였다. 이 이론은 아론 자신이 한 명의 가공의 인물로서 원래 모세와 출애굽의 전통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자였다는 주장으로 지지된다. 그러나 이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 이론의 이름이 나타나는 많은 J 구절들(예; 출 4:14-16,27-30)을 처리해야할 필요가 있었다. 이것들은 최소한 13곳에서 나타난다. 이것들을 하나하나 J의 문맥에서 끄집어내어 P가 삽입된 것이라고 이름 붙였다. 이와 같은 과정을 통해 "아론은 J에서 결코 언급되지 않았다"는 명제를 만들고 자축(自祝)을 하였다. 또한 제사장직을 포로 후기로 밀어내는 것은 포로 전 유대역사에 언급된 유명한 대제사장들, 즉 여호야다(왕하 12:9), 힐기야(왕하 22:4,8), 스라야(왕하 25:18)와 같은 사람들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런지에 대한 문제를 야기시킨다.
제사 문서가 후대의 것이라는 것을 지지하기 위해 그 규례들과 의식들 중 그 어느 것도 포로 이전의 작품에서 언급되지 않았다고 종종 주장한다. 포로 이전의 저자들은 전혀 그것을 모르고 있었던 것 같다. 그러므로 P 문서 안에 담긴 자료들은 예루살렘 멸망(B.C. 587) 후에 작성되었음이 틀림없다고 주장한다. 드라이버는 "포로 전기에서는 P가 있는 흔적이 없다"라고 말한다.
무엇보다 먼저 드라이버 자신이 신명기 14:3-20을 다루면서 방금 인용된 그 말을 좀더 다듬을 수밖에 없었다는 것을 지적해야겠다. "여기 신명기에 있는 긴 문단은 레위기에 있는 것에 관한 것과 거의 동일한 것이며 그것은 D가 P에서 빌려온 것이거나 혹은 제사장들의 정결규례의 묶음인 것이다. 그것은 P가 D에서 취한 것은 아니다. 이곳의 문체는 D보다는 P와 더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만약 그러하다면 P의 일부는 신명기가 쓰여질 때 이미 존재하고 있었다는 결론이 된다"
이런 것이 신명기에서 단 하나만 있는 것이 아니다. 신명기 15:1은 레위기 25:2-7에서 명한바와 같이 면제년의 규례를 말하고 있다. 신명기 24:8의 말씀, "너는 문둥병에 대하여 삼가서 레위 싸람 제사장들이 너희에게 가르치는 대로 네가 힘써 다 행하되 곧 네가 그들에게 명한대로 너희는 주의하여 행하라"는 제사장들에게 이미 주어졌던 모세법의 문둥병자에 대한 규례가 존재한고 있었음을 명백히 선언해 준다. 신명기에서 P의 법을 명백히 지적해 주는 또다른 구절들은(레위기 11, 13-15, 17-19장, 그리고 민수기 18:20-24이다. 만약 이것들이(드라이버가 제시한 바 대로) P를 정경화하기 전에 기존했던, 그야말로 오래된 법이라고 한다면 "이 옛 법들은 우리가 레위기에서 소유하고 있는 것과 너무나 흡사하기 때문에 그 차이점에 대해 논란할 여지가 없고 레위기의 법들이 포로 이전 시대에 있었다는 논증도 백지화 된다."
신명기에만 P 율법에 대한 이 언급들이 나타나는 것이 아니다. 아모스 2:11-12은 "또 너희 아들 중에서 선지자를, 너희 청년 중에서 나시르 사람들을 일으켰나니 이스라엘 자손들아 과연 그렇지 아니하냐 이는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그러나 너희가 나시르 사람으로 포도주를 마시게 하며 또 선지자에게 명하여 예언하지 말라 하였느니라." 이 구절은 민수기 6:1-21(P)에 대한 지식이 있었음을 암시한다. 이는 그것이 나실인의 제도에 대해 언급한 단 하나의 구약성경 구절이기 때문이다. 그들이 포도주를 마시는 것을 금한 것은 민수기 6:3(P)에서 발견된다. 또한 아모스 4:5에서는 레위기2:11(P)에 있는 제도를 명백히 암시하고 있는 "유교병의 제사를 드리는" 자들을 정죄하고 있다. 번제, 소제, 화목제와 같은 P의 특징적 용어들이 모두 아모스 5:22에 나타난다. 또한 우리는 낙헌제를 보며(참고, 레 7:16-18;22:18, 민 15:3―모두 P구절), 아모스 5:21에서는 성회를 보게 된다(레 23:36, 민 29:35).
이 모든 언급들(신명기에 암시된 것 포함)에서 합리적으로 추론해낼 수 있는 단 한 가지 사실은 이미 B.C. 755년에 P 뿐 아니라 D도 기록된 율법의 체계로 형성되어 있었다는 것이며, 선지자 자신에 의해 여호와의 율법으로 명명되었고(암2:4) 그의 청중들은 그것이 그들에게 구속력이 있는 권위 있는 율법의 체계로 수납되었다는 점이다. 아모스나 다른 어느 선지자 학파의 대표자들 중 그 어느 누구도 신학이나 제사의식에서 새로운 변혁이나 새 가르침을 시도하지 않았다. 파이퍼와 아이스펠트는 아모스에 있는 이 증거의 힘을 피하기 위해 이 모든 율법에 대한 암시들이 후대의 삽입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이것은 그라프, 쿠에넨, 벨하우젠이 자신 만만하게 주장한 것과 정반대가 되는 궁여지책임이 분명하다. 그들은 P의 규례가 그 어느 히브리 문학에서도 그 흔적을 찾아볼 수 없다고 하였다. 이 논리는 성경 본문의 증거에 기초한다고 주장하지만 본문이 그 주장을 반박할 때는 그것을 후대의 삽입이라고 호소하는 것 외에는 다른 대안이 없다.
이것과 연관되어 한 문서가 기록된 연대는 그 당시의 사회적, 정치적 상황에 대한 모든 언급들을 종합하여 확정하는 방법이 일반화되었다. 특히, 어떤 사건을 암시하는 듯한 것은 더욱 높이 평가되었다. 이 검정 방법을 "제사 문서"에 도입한 결과 그것이 포로기 보다 훨씬 이전에 작성되었다는 것에 놀라운 결론에 도달하게 되었다.
제 13 장. 오경의 고대성에 대한 고고학적 증거
벨하우젠의 가설이 구약성경에 대한 역사성을 판단할 때 19세기의 입수한 고고학적 자료에 근거했다고 한다. 그러나 그 자료들은 유감스럽게도 빈약했으며 그 당시의 무지에 근거하여 고고학적인 신빙성을 깎아 내렸다. 예로써, 이런 주장이 있었다. 모세 시대에는 팔레스타인에는 글씨가 없었으며, 그러므로 오경은 B.C. 10세기, 혹은 9세기까지 쓰여질 수 없다고 하였다. 역사적인 정확성이 결여된 것으로 여겨져 그 성경 문서가 후대에 쓰여진 것이며 저자가 가짜였다는 것으로 재천명이 되었고, 문서설 이론가들이 냉소하며 내린 판단들이 기초가 없는 것으로 판명되었다.
이 세대에서 미국의 고고학계를 대표하는 올브라잇(W.F. Albright)은 벨하우젠 학파에서 잔뼈가 굵었지만 1941년에 그는 말했다. "고고학적 자료와 비문에 기록된 자료들은 구약성경에서 헤아릴 수 없이 많은 구절들과 진술들의 역사성을 확립시켰다. 역사성이 부인되고 그 개연성의 의심을 받은 것보다 확증된 수가 수 십배 더 크다." 동일한 논문에서 그는 계속 말했다. "벨하우젠이 아직도 우리 눈에는 19세기의 최고 성경학자로 보이지만 그의 관점은 케케묵은 것이었고 이스라엘이 태어난 초기에 대해 그가 찍은 사진은 슬프게도 왜곡된 것이었다." 좀더 최근의 저자 존 웰더(John Elder)는 말한다. "고고학이 일어난 것은 역사가와 정통주의 신자 사이에 있는 교착상태를 부수었다고 아무리 강조해도 부족하다. 조금씩 조금씩, 한 도시에서 다른 도시로, 한 문명에서 또다른 문명으로, 한 문화에서 다른 문화로 고고학자들이 발굴해 나감에 따라 오직 성경 안에만 담겨 있던 그것들이 고대 역사 속에서 그들의 자리를 회복하게 되었다. 성경에 담긴 그 당시의 사건들에 대한 기록들이 발굴되었고 성경계시의 유일성이 새롭게 발견된 고대 민족들이 종교에 의해 대조와 비교의 방법으로 강조되었다. 고고학적 발굴이 성경은 역사적이라는 사실을 반박한 곳은 하나도 없다."
다음 몇 페이지에서 우리는 문서설을 신봉하는 자들이 오경의 정확성을 향해 총을 겨누었던 비평 자들에게 영향을 미친 가장 중요한 발견들을 제시하려고 한다.
가설 1 : 글씨가 다윗 왕조 전에는 이스라엘에 알려지지 않았다. 따라서 그들은 모세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는 기록은 가질 수가 없었다.
반박 : (1) 지금까지 발견된 것 중에서 가장 오래된 히브리어 문서는 B.C. 925 년에 쓰여진 게제르 월력(the Gexer Calendar)이다. 그러나 그것은 단순히 어느 학도의 습작이었기 때문에 오히려 그것은 10세기의 이스라엘에서는 서도(書道)가 너무나 잘 알려지고 널리 보급되어 어린 아이까지도 배우고 쓸 수 있었음을 보여주고 있음을 확증해 주었다.
(2) 우가릿 혹은 라스 샤므라 토판은 1929 년 새퍼(Schaeffer)가 발견한 것으로서 B.C. 1400 년의 것으로 추정된다. 그것은 30개의 알파벳으로 기록되었고 우리에게 알려진 것은 히브리어에 가까운 엘, 바알, 아낫, 아세라, 모트 등과 같은 신을 언급하고 있으며, 이스라엘이 가나안을 정복할 때 상황을 특징 지워 주는 타락한 다신론을 보여주고 있다.
(3) 다음은 B.C. 1500년 후반의 세라빗 엘카팀의 터키옥 채굴장에서 찾아낸 알파벳 비문이다. 이 비문을 쓴 사람은 애굽에 채용된 셉족 광부임이 틀림없다. 그러므로 우리가 내릴 수 있는 자연스러운 추론은 모세 이전의 셈족들이 글자를 널리 알고 있었기 때문에 가장 하층의 사람들도 읽고 쓸 수 있었다는 점이다. 좀더 최근에는 동일한 시내 반도계의 활자체로 쓰여진 항아리가 하조르에서 발견되었다. 이것은 대단히 흥미 있는 발견으로서 이 알파벳 체가 모세 시대에 팔레스타인까지 퍼져있음을 의미하게 되었다.
가설 2 : 창세기에 있는 아브라함과 그의 후손에 대한 기사는 신빙성이 없으며 종종 비역사적이다. 뇔드게(N ldeke)는 아브라함이 역사적 인물이었음을 부인하기까지 하였다.
반박 : (1) 남부 수메리아의 우르 시는 레오날드 울리가 철저하게 발굴하였다(1922-1934). 그는 아브라함 시대로 추정되는 B.C. 2000년의 높은 문화를 간직하고 있던 그 찬란했던 도시의 모습을 드러내어 주었다. 중류층의 시민들도 약 10개 내지 20개의 방을 가지고 있었다. 학교가 청년들의 교육을 위해 잘 유지되고 있었고 교과목으로서는 일기, 쓰기, 산수, 종교 등이 있었다. 최근에는 그 도시가 수메르의 우르인지에 대해 질문이 야기되고 있으나 좀더 북쪽에 동일한 도시가 있었다는 증거는 아직도 미약하다.
(2) 아브람(Abram)이란 이름이 B.C. 16세기 경의 토판에서 발견됐다. 악카드어 토판 B.C. 1554년 바벨론의 아미짜두카 11년에는 아바라마(Abarama)라는 농부가 소를 임대하고 있음을 기록하고 있다. 다른 두 토판도 이 동일한 사람을 아밤라마(Abamrama)로 부르고 있다.
(3) 아브라함이 팔레스타인으로 온 것에 대해 세겜과 벧엘에서의 발굴은 그 도시들이 아브라함 시대에 있었다는 것을 증명해 주었다. 9세기의 저자였다면 그 족장이 후대에는 유명하게 되었으나 B.C. 20세기에는 없었던 도시에 머물렀다고 하였을 것이다.
(4) 옛날 학자들은 창세기 13장이 비역사적이라고 공박했다. 그 근거는 요단 계곡에는 아브라함 시대에 사람들이 별로 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넬슨 글룩은 최근에 요단 계곡에서 70개 이상의 유적지를 발견해 내었고 그 중 어떤 것은 B.C. 3000년의 것이었다.
(5) 창세기 14장은 ⓐ 메소포타미아 왕들의 꾸며낸 것이며, ⓑ 아브라함 시대에 메소포타미아에서 팔레스타인까지 먼 원정이 있을 수 없었으며 ⓒ 요단 강 동편으로 진군할 수 있는 도로가 없다는 것에 근거하여 뇔르게가 역사성을 부인하였다.
ⓐ에 대해 엘람 왕 그돌라 오멜이 존재했을 가능성이 확인되었다. 후에 발견된 바에 따르면 엘람 왕조가 수메르와 악카드를 일시적으로 지배하고 있었고, 이 왕들 중 어떤 자들은 "쿠드르"(Kudur, 종)란 이름으로 시작이 되며 엘람의 여신 중 라가마르로(Lagamar)로 명명된 자가 있었다. 그러므로 쿠드르―라가마르라는 왕이 이때에 침략해 왔을 가능성이 있다.
이 모든 고고학적 발견들을 통해 궁겔, 올브라잇 기타 많은 학자들은 창세기 14장의 기사가 B.C. 20세기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는 진정한 전통에 기초하고 있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되었다. 올브라잇은 결론을 짓는다. "이 장이 어떤 역사적인 상황에서 쓰여졌는지 확증할 수는 없지만 그 내용으로 보아 아주 고대의 것임은 분명하다. 성경 외에서는 찾아볼 수 없었던 몇 개의 단어들과 표현들이 있었지만 이제는 그것들이 제 2세기에 속한 것으로 알려졌다."
가설 3 : 제사 법전을 만든 것은 이스라엘 종교에서 가장 후대의 것이며, 포로 후기의 것임을 나타내는 것이다. 이와 같은 성격의 율법이 B.C. 5세기까지 결코 만들어질 수가 없다.
반박 : (1) 1901년 수사에서 드 몰간(De Morgan)과 쉐일(Scheil)이 발견한 바벨론의 함무라비 법전은 범죄에 대한 심판과 계약 위반에 대한 손해 배상에 있어서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에 있는 법규들과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유사성들을 지니고 있다. 이 유사한 법들 중 많은 것들이 많은 것들이 벨하우젠에 의해 P로 분류되었다. 일반적으로 말하자면 이스라엘의 mi p m 에서 그 유사성이 발견된다.
(a) 레위기 19:23-25은 과수원을 심을 때 그 주인은 5년이 되기까지 그 과실을 먹을 수없도록 되어 있다. 함무라비 법전 #60도 과수원을 심은 소작농은 제 5년이 되기까지 그 실과를 먹을 수없게 되어 있다(그 동안 그는 그 소유주로 하여금 추수의 반 이상을 갖도록 해야 한다).
(b) 레위기 20:10은 간음한 남자와 여자를 둘 다 죽이도록 하였다. 함무라비 #129는 간음한 쌍방이 왕의 용서를 받든지 혹은 남편에 의해 그 부인이 용서를 받기 전에는 물에 빠뜨리게 되어 있다.
(c) 민수기 5:11-28은 남편에 의해 그 순결을 의심받는 아내가 정죄를 받든 무죄를 받든 간에 그 절차를 소개하고 있다. 그녀는 "쓴 물"을 마셔 만약에 범행을 했을 때는 저주를 받게 되어 있다. 함무라비 #132는 간음이 드러나지 않았지만 아내가 한 것으로 의심을 받을 때 강에 던져져 가라앉으면 죄가 있고 떠오르면 무죄하게 되었다.
(d) 레위기 20:12은 한 남자가 그의 며느리와 간음을 하게 될 때 둘 다 사형을 받게 되어 있다. 함무라비 #155는 이 경우에 그 시아버지만 사형을 당한다. 아마 그 며느리는 가족의 머리되는 사람을 감히 거절할 수 없었을 것을 고려했기 때문인 것 같다.
(e) 레위기 24:19-20은 남의 몸을 상했을 때는 동일한 상처를 가해자에게 주라고 한다(눈에는 눈으로, 이에는 이로). 함무라비 196, 197, 200은 사회 계층이 동일할 때는 쌍방에게 동일한 형벌을, 피하자가 하층 계급일 때는 단지 돈으로 배상할 것을 요구한다.
이와 같이 유사성이 너무나 명백하기 때문에 P형태의 법이 모세 시대에는 어울리지 않는다고 말을 할 수가 없다. 모세 이전 수세기 전에 이미 그런 법들이 바벨론에 성행했기 때문이다.
바벨론의 법전과 언약의 책(출 21-23장) 사이에 가장 많은 유사점이 있다. 출 21:2-11 과 #117 ; 출 21:15과 #195 ; 출 21:16 과 #14 ; 출 21:22-25 과 #209-213 ; 출 21:28-36 과 #250-252; 출 22:7-9 과 #120 ; 출 22:9 과 #267 ; 출 23:1-3 과 #1-4. 이 증거들은 물론 이 규례들이 B.C. 800 년에 생긴 것보다 모세 시대에 생겼을 가능성을 더 지지해 준다.
(2) 모세의 율법이 비평가들에 의해 후대로 여겨진 이 문제에 대해 브로우스(Millar Burrows)는 이렇게 말했다. "모세에게 돌려진 율법들의 사회적, 도덕적 수준이 그 시대에 비해 너무 높은 것이라고 학자들이 종종 생각해 왔다. 그러나 바벨론, 앗수르, 힛타이트와 애굽의 사자의서(Book of the Dead)에, 그리고 애굽의 초기 지혜문학에도 높은 수준이 있음을 보게 된다."라고 말했다.
가설 4 : 민수기와 여호수아에 기록되어 있는 요단 동편과 팔레스타인 정복기사는 조잡할 정도로 비역사적이며 2000년대 후반의 지배적인 상황과 전혀 조화를 이룰 수 없다.
반박 : (1) 애굽 제 12왕조 저주문 텍스트는 오경과 여호수아서에 있는 팔레스타인의 정치적 상황이 역사성을 띠고 있음을 확증해 준다. 이것을 크게 둘로 나눌 수가 있다. 첫째 것은 B.C. 1920년의 것으로서(지금 베를린 박물관에 있으며) 1926년 세트(Sethe)가 발견한 그릇들이다. 그 그릇 안에는 여러 가지 글들이 인각되었다. 둘째 것은 B.C. 1820년의 것으로서(지금 브루셀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으며) 포세너(Posener)가 1940년 발견한 인각된 동상 그룹들이다. 이 물건들에는 팔레스타인의 도시들과 나라들의 이름이 새겨져 있는데 그것들은 애굽에 충성을 다하기로 맹세하였다.
(2) 1887년 텔 엘―아마르나에서 발견된 텔 엘―아마르나 토판은 B.C. 1400-1370년의 것으로서 팔레스타인과 수리아의 왕들이 애굽 왕실에 악카드어 쐐기문자로 편지를 보낸 뭉치이다. 이 편지들은 그 당시 무서운 침략자들이 약탈하고 있음을 알리면서 애굽의 군대가 한시 바삐 도착해 줄 것을 요청하고 있다. 이것은 민수기 21:1-3에 따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처음으로 정복한 지역이다. 아마르나 편지에 대한 더 상세한 내용은 19장에서 다룰 것이다. 이렇듯 이 토판들은 1400-1380년의 가나안 정복의 상황을 가나안인들 자신들 입장에서 기록한 것이다.
(3) 1896년 테베에서 페트리가 발견한 메르ㅤㅌㅔㅍ타(Merneptah) 왕의 이스라엘 기념비는 B.C. 1229년의 것이다. 그것은 히브리 나라를 "이스라엘"로 언급한 것으로서는 유일하게 현존하고 있는 애굽의 비문이다. 애굽의 왕(대 라암세스의 아들)을 칭송하면서 여러 나라들과 지방이 그 비문의 끝에 수록되었다. 그 나라들은 메르ㅤㅌㅔㅍ타의 무적 군대에 의해 정복을 당했거나, 블레셋의 아스글론, 아얄론 골짜기 가까이에 있는 게제르, 팔레스타인 북부 끝(라이스-단 가까이), 야노암, 이스라엘(한 종족을 가리킴), 그리고 호리 족속의 땅이 수록되어 있다. 만약 메르ㅤㄴㅓㅍ타가 이스라엘 백성들이 팔레스틴 북부까지 소유하고 있었음을 알았다면 이미 이스라엘은 B.C. 1229년에 그 땅을 차지하고 있었음이 명백해진다. 이 결론을 피할 수있는 유일한 길은 창세기의 기록과는 대조적으로 몇 이스라엘인이 야곱의 나머지 가족들과 함께 애굽으로 결코 이주하지 않았다고 가정하는 것이다.
제 14 장. 창 세 기(1)
창세기(Genesis: 헬라어로 시작이라는 뜻)는 70인역이 이 책에 붙인 이름이다. 히브리어로는 베레쉬트( : 태초에)라고 한다. 창세기란 시작, 기원이란 어원이다.
저자는 모세이다. 신약성경 요한복음 7:23에는 "모세의 율법"이라는 언급이 있다. 창세기는 약속의 책이라고 할 수 있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주어진 약속이 기록되어 있고, 그 약속이 출애굽의 사건과 가나안 정복으로 성취되었음을 언급하고 있다. 모세가 처해 있던 그 독특한 상황 역시 그의 저작권을 옹호해 준다. 그는 약속의 땅에서 수립될 신정정치에 대한 헌법을 써야 했다. 그런 상황 아래 이스라엘 백성들의 민족성 통일성이 절대적으로 필요했고 그것을 위해 아브라함의 후손으로서의 족보와 하나님께서 맺은 언약을 정확하게 기록해야만 했다. 모세가 이 책을 만드는데 사용한 자료들은 5,6세기 전의 것으로서 야곱이 애굽에 오기 전의 것이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모세는 성령의 지배를 받은 편집자로서 일을 하였다.
1. 창세기 개관
Ⅰ. 인류의 시작(1:1-11:32)
A. 천지창조(1:1-2:3)
B. 세상에서 인간의 위치(2:4-25)
C. 죄의 침입과 그 결과적 타락(3:1-4) : 은혜언약의 제정
D. 홍수 전 족속들과 족장들(아담에서 노아까지, 5:1-32)
E. 죄악 세상의 홍수심판(6:1-9:29)
F. 노아의 후손과 근동 아시아의 초기 족속들(10:1-11:32)
Ⅱ. 아브라함의 생애(12:1-25:18)
A. 아브라함의 소명과 믿음으로 언약을 수납함(12:1-14:24)
B. 언약의 갱신과 확증(15:1-17:27)
C. 소돔에서 롯을 구출함(18:19:38)
D. 아브라함과 아비멜렉(20:1-18)
E. 약속의 아들 이삭의 출생과 결혼(21:1-24:67)
F. 아브라함의 후손(25:1-18)
Ⅲ. 이삭의 생애와 그의 가족(25:19-26:35)
A. 에서와 야곱의 탄생(25:19-28)
B. 에서가 야곱에게 장자권을 팔아 넘김(25:29-34)
C. 이삭과 아비멜렉 2세(26:1-16)
D. 브엘세바의 논쟁(26:17-33)
E. 에서의 결혼(26:34, 35)
Ⅳ. 야곱의 생애(27:1-37:1)
A. 부친의 슬하에 있는 야곱(27:1-46)
B. 야곱의 유랑생활과 여행(28:1-22)
C. 수리아에서의 야곱과 라반(29:1-33:15)
D. 약속의 땅으로 돌아오는 야곱(33:16-35:20)
E. 야곱과 에서의 후예(35:21-37:1)
Ⅴ. 요셉의 생애(37:2-50:26)
A. 요셉의 소년(37:2-36)
B. 유다와 다말(38:1-30)
C. 애굽에서의 요셉의 출세(39:1-41:57)
D. 요셉과 그의 형제들(42:1-45:15)
E. 애굽에서 부자상봉(45:16-47:26)
F. 야곱의 마지막 날과 유언적 예언(47:27-50:14)
G. 완전한 용서를 형제들에게 확증하는 요셉(50:15-26)
개요를 보고 느끼는 것은 창세기의 저자가 얼마나 세심하고 체계 있게 전 족장시대를 다루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2. 창세기 1장과 현대의 과학적 증거
⑴ 제6일 창조와 세계의 연대
창세기 1장을 읽고 보면 창조의 과정이 24시간을 하루로 하는 6일만에 이루어졌다는 인상을 받게 된다. 그러나 최근에 개발되고 있는 핵물리학은 방사능 광물질들이 부식되고 있는 것들을 통해 지구의 연대가 헤아릴 수 없을 만큼 오래 되었음을 확증하는 듯이 보인다. 물리학자들의 계산에 따르면 우라늄 238은 45억년을 거쳐야 16번의 중간상태를 거쳐 안정된 광물로써 더 이상 방사능 작용에도 분해가 되지 않는 206까지 온다는 것이다.
도대체 균일 설에 의하면 50억 년도 더되는 이 지구의 나이와 창세기 1장에 있는 창조가 조화를 이룰 수 있는가? 이것은 히브리어 욤( , y m<날>)을 어떻게 이해하는가에 달려 있다. 이 "날들"에 대해 세 가지의 이론이 성경학자들에 의해 제시되고 있다.
① 첫째 학설은, 욤을 문자 그대로 24시간을 하루로 보는 것이다. 따라서 창세기 1:3-2:3은 하나님께서 우주적 파멸을 당한(아마 사단과 그를 추종하는 천사들이 하나님의 목전에서 쫓겨남으로 생긴 것임) 우주를 그 혼돈에서부터 창조로(창 1:1에 기록됨) 완전히 회복한 완전한 1주일을 기록한 것이 된다. 이 해석에 대한 근거는 이사야 45:18에 있다고 주장된다. 거기에 보면 하나님께서 지구를 "헛되이"(혹은 "공허하게" : 히브리어 보후< , b h >가 사용되었는데 이것은 창세기 1:2의 "공허함"과 똑같은 단어이다.
② 욤은 계시적 하루를 말한다. 문자 그대로 6일 동안에(혹은 전창조의 드라마가 모세에게 환상가운데 6일의 환상적 날로 주어졌을 가능성이 있음) 하나님께서 그의 선지자에게 자신이 어떻게 창조를 하셨으며 그 과정이 어떠했는지 그 신비를 묘사했다는 것이다. 이 과정은 엄격하게 연대적으로 묘사되었다고 만 말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하늘에 문체들을 만든 것이 제 4일까지 연기되었을 뿐 아니라 햇빛이 있어서 살 수 채소를 만든 후에 창조되었기 때문이다. 창조의 여러 단계와 양상들이 지구상에 살고 있는 인간 관찰자가 볼 때 논리적으로 소개되었다는 것이다. 따라서 지구에 빛을 주고 계절을 관장하는 태양과 달을 소개하기 전에 관찰자가 서 있는 땅의 표면을 먼저 기술하는 것이 더 논리적이란 뜻이다.
③ 욤은 창조적 과정에 있어서의 지질학적 연대나 혹은 한 무대를 뜻한다. 이것은 19세기의 지질학자로서 성경의 권위를 존중하는 자들, 특히 도손(J.W. Dawson)과 다나(James Dana)에 의해 제시된 설명이다. 이들에 따르면 욤이란 용어는 문자적 24시간의 하루가 아니고 한 "무대"와 동일한 것이다. 종종 욤은 이런 뜻으로 사용될 수가 없고 히브리어의 용법에 따르면 문자적 하루를 뜻하는 것이라고 주장되기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내적 증거에 기초하여 창세기 1장의 욤은 단순한 문자 그대로의 24시간 하루를 뜻하지 않는 것임을 확신한다.
첫째로, 욤은 창세기 2:4에서 방금 창세기 1장에서 묘사된 엿새 동안의 모든 창조적 과정을 언급하는데 쓰여진 것이 분명하다. 즉, "여호와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실 때(욤)에 천지의 대략이 이러하니라." 하늘과 땅을 창조한 단계가 방금 기록되었기 때문에 여기에 있는 "날"은 첫 날부터 여섯째 날까지의 전 과정을 뜻하는 것으로 추론하는 것은 타당하다.
둘째로, 창세기 1:27에 보면 하나님께서 제 6일에 모든 땅의 동물을 창조하신 후에 남자와 여자를 만드셨다고 한다. 그리고 나서 창세기 2장에서는 하나님께서 아담을 먼저 만드시고 그가 고독을 느끼기까지 에덴 동산을 관리하는 책임을 주었다고 한다. 또한 하나님은 그에게 모든 땅의 짐승들을 함께 교제를 나루 수 있도록 하였을 뿐 아니라 그들 모두에게 이름을 붙여주도록 하였다는 기록을 읽을 수가 있다. 그 후에 하나님은 아담이 외로워하시는 것을 보시고 그로 하여금 "깊이 잠들게" 한 후 갈빗대를 뽑아 인간 아내를 만드셨다고 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그는 이브를 아담에게 데려와 그의 새로운 인생의 배필로 주었다고 한다. 어떻게 이 모든 기사들이 제 엿새 째의 24시간 동안에 일어났다고 생각할 수 있겠는가? 그렇지만 창세기 1:27은 아담과 이브가 창조의 마지박 날 끝에 지음을 받았다고 진술하고 있다. 창세기 1장의 "날들"은 날자적 24시간의 하루들이 아니라 구체적으로 명시되지 않은 기간의 단계를 묘사하는 것이 분명하다.
⑵ 성경의 창조설과 현대의 진화론
다윈의 이론은 "창조"의 과정에 있어서 의미 깊은 신적 활동에 대해 아무런 여지를 남겨 놓지 않았다. 그는 단지 태초의 기본 재료만을 공급하는 자로서의 하나님을 본 것이다. 사실 그에 자연적 선택 이론에 따르면, 창조라는 것은 없고 다만 발전만 있을 뿐이다. 이것은 창세기 1장과 전적으로 배치되는 견해이다. 그러나 다윈의 이론이 증거에 일치하지 않으며 그것이 너무 심각한 문제를 안고 있기 때문에, 그것을 과학적 철학 역사에 있어서 지나가는 현상으로 일축해 버릴 수 있는 몇 가지 점을 지적해야 겠다. 우리는 다음 네 가지의 관점에서 약점들을 다루려고 한다.
① 유전학의 관점에서 볼 때, 자연적 선택설의 기본적 가장들이 증거와 정반대가 된다. 수십년동안의 힘든 연구의 결과가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은 한 종(種) 안에서 개인들은 약간씩 서로 다르지만 이 차이점들이 그 다음 세대에 구체적으로 유전될 수 있다는 것은 틀린 말이다. 멘델(Gregor J. Mendel)의 방대한 연구가 제시한 점은, 한 종(種) 안에서 가능한 변화의 범위는 엄격하게 제한되며 새로운 종들의 발전을 향한 어떤 과정도 허락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따라서 순종의 키가 큰 완두콩들의 종이 그 키에 있어서는 개체에 따라 다를지라도 큰 것의 후손은 작은 것의 후손보다 일반적으로 크지 않다는 것이다. 사실 선택적인 품종개량에 의해 한 종 안에서 어떤 특징을 특별한 종족으로 만들 수 있지만 어떤 품종개량가도 넘어갈 수 없는 엄격하게 제한된 영역이 있다. 다르게 말한다면, 그는 결코 새로운 종을 만들 수 없다는 것이다. 멘델의 작업은 다윈의 자신의 이론을 산더미처럼 쌓아놓은 "우연한 변종"이 결코 있을 수 없음을 결정적으로 증명하였다.
② 발생학(혹은 태생학)의 자료에 근거한 다윈의 논증은 명백한 오류임이 판명되었다. 그는 모태 안에서 태아가 자라갈 때 그 진화된 과거를 다 재현하여 수태된 난자가 커지면서 점점 더 복잡한 기관과 지체를 만들어 간다고 주장하였다. 예를 들자면, 인간 태아기의 내장 대상부(袋狀部)는 고기의 아가미와 본질적으로 동일하기 때문에 인간은 고기의 형태로부터 진화해 왔다고 한다. 그러나 이와 같은 류(類)의 추론은 인간의 내장기관이 그 어떤 태아기의 단계에서도 아가미와 같은 기능을 발휘하지 않음에 대해 전혀 외면을 하고 있다. 사실 반복이론이 태아 안에서의 실제적 발전과정과 일치하고 있는지 알아내기가 힘이 든다. 예를 들자면, 호흡기관은 모태 안에서 태아가 형성되기 시작한지 상당한 시간이 지나서 발달해 간다. 그러나 전(前) 인간적 상태에서 추정적 조상이 전혀 호흡기관이 없이 살았다고 생각조차 할 수 없다. 또한 태아의 머리 크기는 신체의 다른 부분과 비교해 볼 때 상당히 큰 비중을 차지한다. 그러나 소위 전 인간적 조상들로 추정이
되는 자들의 머리는 다른 부분에 비교할 때 상당히 작다. 또한 태아의 단순 기관들이 점차적으로 복잡하게 되어간다는 말도 사실이 아니다. 예를 들자면 눈은 몇 가지 서로 다른 부분들이 마지막으로 결정된 것이다. 처음에는 그 몇 가지의 서로 다른 부분들이 마지막으로 결합된 것이다.
태생학의 자료들 중 그 어느 것도 기계론적인 자연적 선택에 의해서가 아니라 절대적으로 지혜로운 창조주에 의해 의도된 계획과 목적이 있음을 드러내지 않는 것이 없다고 말하는 것이 안전하다. 태아의 성장에 있어서 성장의 관정이 잘못되어 보이는 경우가 종종 있다. 또한 전적으로 새로운 기관이 생겨 바람직한 구조를 가지는 것이 발견된다. 때로는 이 "이중적 확증"(double assurance)의 기관들 중 두 서너 개가 질서 있게 움직여서 태아에게 적절한 발전을 보장해 준다. 그러나 설명도 할 수 없을 정도로 극히 드물기 때문에 그것들을 "적자생존"의 법칙으로 돌릴 수가 없다. 오히려 신적 지혜의 개입으로 보는 것이 더 나을 것이다. 이것은 물론 어떤 태아가 적절하지 않게 발전하여 생존할 수도 없거나 정상적인 기능을 발휘할 수 없어 결함이 있는 표본이 된다는 것을 부인하는 것은 아니다. 인간의 경우에 있어서는 그 결과가 아주 비극적이고 설명하기 어렵다. 그러나 다윈 파의 전제에 따르면 이 악성 목적론(dysteleology)의 느낌조차 설명할 도리가 없다. 철저한 다윈주의자는 그의 어깨를 으쓱하며 "이런 것들이 더 없는 것이 이상한 일이다"라고 말할 뿐이다.
③ 다윈의 생물학의 자료에 대한 이론은 창세기 1장에 있는 그 숭고하고 단호한 선언과 비교할 가치가 없다. 창세기에 따르면, 모든 동식물은 전능하시고 전지 하신 하나님의 창조적 뜻을 따라 형성되고 그 모든 시대에 있어서 그들의 모든 발전은 그의 계획에 지배를 받는 것이다. 모든 구조적 유사성(예를 들자면, 인간과 하등 순위의 척추동물 사이에 있는 유전관계를 시사하는데 자주 인용되는 골조적 유사성 등)은 살아 있는 조직으로부터 기계적으로 작동하여서라기 보다 밖으로부터(혹은 위에서) 역사 하는 직접적인 힘에 의한 것으로 설명하는 것이 더 만족스러운 것 같다. 인간의 척추 끝에 있는 미저골(coccyx)과 같은 명백히 쓸모 없는 퇴하부분에 있어서까지도 우리는 그 어떤 꼬리를 가지고 다니던 유인원(類人猿)으로 그 계보를 ㅤㅎㅡㄾ어갈 증거를 가지고 있지 않다. 이와 같은 퇴화 품들은 수많은 척추동물 종족들을 만든 창조적 힘(혹은 하나님의 지성)에 의해 만들어진 일반적, 혹은 기본적 계획을 입증해 줄뿐이다.
④ 모든 생명의 부류들과 질서들이 점진적인 과정을 통해 기계적으로 진화되어 갔다는 다윈의 이론을 현대의 과학자들이 포기해 버리면서 새로운 타입의 진화론, 즉 급속한 진화의 양자이론을 다 따르고 있다. 그러나 급속한 진화는 실험실에서 쓰는 방법론이나 설명과 같이 엄격한 기계론적 원칙들로써 증명을 도무지 할 수 없는 철학적 카테고리 안에나 끼워질 수 있는 급격한 변화와 돌연변이의 요소를 포함하는 것이다. 다윈 시대만 해도 사람들은 지질학이나 생물학적 연구를 꾸준히 수 십 년만 하게 되면 수많은 종류에 목(目)과 문(門) 사이에 있는 그 갭(gab)을 메울 수 있는 인간상태의 생명형태를 발견할 수 있다고 굳게 믿고 있었다. 그러나 20세기를 사는 대부분의 과학자들은 이 연구에 대해서 완전히 포기를 해버리고 말았다.
이와 같은 문제점에도 불구하고 많은 기독교인들이 유신론적인 기초 위에서 진화론을 받아들이려고 한다. 즉, 다윈의 공식을 따라 자연적인 선택의 기계론적 과정을 받아들이든지, 혹은 새로운 진화론인 돌연 출현설에 집착을 한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물질은 영원하지 않으며(무신론자들이 가정하고 있는 바와 같이)그것은 하나님에 의해 무에서(ex nihilo) 창조되었다고 생각한다. 더구나 그들은 모든 진화의 과정을 하나님께서 지배하시고 계획하신 것으로 본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과학으로는 완전히 설명할 수 없는 어떤 신비로운 힘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으로 보지 않는다.
이와 같은 입장을 가진 사람에게 말하고 싶은 바는, 다윈의 주장과 같이 태초에 진화를 시작하게 하였을 지도 모른다는 주장은 기독교적 계시를 완전히 부인해 버린 것이라는 것을 알아야 할 것이다. 철학적 세계관으로서의 진화론은 영적 실체를 정면으로 부인하는 데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인격적 하나님의 존재까지 반박해 버린다. 그 모든 주도적 사상가들은 결코 불확실치 않은 용어들을 구사해 왔다.
⑶ 인류의 고대성
유사 이전 인간의 화석과 유적들(古器物)을 1850년대 처음으로 발견한 후부터 인류는 성경의 기록보다 훨씬 오래 되었다는 이론이 창세기 기록과 조화를 이루는데 문제가 된다는 주장들이 나왔다. 소위 스완스콤 인간(Swanscombe man, 영국), 피세칸스포로스(Pithecanthropus, 자뱌), 시난스포로스(Sinanthropus, 중국) 등 은 약 200,000년 전으로부터 500,000년 전에 이르기까지 살았다고 한다. 이들은 모두 인류(Homo sapiens)와는 괄목할 만한 차이를 가지고 있어서 어떤 고생물 학자들은 주장하기를, "두개골과 치아의 차이들이…… 고릴라와 침판치 사이에 있는 유전인자의 차이를 구분하는데 일반적으로 수납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분명하게 나타난다."
일반적으로 50,000년에는 100,000년 전으로 추정되는 네안델타인(the Neandertal)에 대해서도 클락은 말하기를, "호모 사피엔스(Homo sapiens)와의 골격의 차이는 너무나 분명하며 그것은 다른 그룹의 영장류(靈長類)와 비슷한 점을 가지고 있다." 이 초기의 인간들은 그들의 생각구조에 넣어서 단순히 원숭이와 같다고 일축해 버릴 수가 없다. 왜냐하면 그들은 석기, 예를 들면 돌 화살촉이나, 돌도끼 머리를 가지고 살았을 뿐 아니라 숯이 남아있는 것을 보면, 식사를 위해 불을 사용했음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베즈웰(Buswell)은 말하기를 "인간이 얼마나 오래 전에 창조되었는지에 대해 성경이 시사하는 바는 없다." 이 평가는 지나치다. 우리가 창세기 5장과 10장에 있는 연대표에 수많은 갭을 허락해 준다 하더라도 수 백세대가 여기에서 생략되어 있는 것보다 없는 것이 더 많다고 보는 것은 비합리적이다(그래도 이것은 아담이 B.C. 200,000년에 있을 수 있었겠다 는 것을 가정해 주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가 마태복음 1:2-17에 있는데, 모두 42번의 계보 중(아담으로부터 그리스도까지 약 2000년 동안) 오직 일곱 개의 가능한 고리가 빠져 있을 뿐이다. 혹은 비율로 따지자면, 약 1/6정도이다. 아담과 아브라함 사이에는 원래 1,980세대가 있었는데, 그 중 오직 19 혹은 20세대만이 기록되었다고 주장하는 이론은 그 기초가 너무나 약하다. 그러므로 아담이 B.C. 200,000년에 있었던 것으로 보는 것은 창세기의 기록을 지극히 의심스럽게 볼뿐이다.
① 『웨스터 민스터 성경사전』은 창세기 5장과 10장의 족보에 대한 세 가지 가능성을 열거하고 있다. 만약 그것이 아무런 갭도 없는 문자 그대로의 세대를 말하는 것이라면, 아담으로부터 홍수까지는 총 1,656년이며, 홍수에서 아브라함의 탄생까지는 290년이다. 이것을 합하면 총 1946년이 된다(아담에서 아브라함까지). 이 해석은 모호하다. 이는 총계를 텍스트 자체가 언급하지 않으며, 홍수 이전 세대를 10세대로 그룹을 짓고 홍수 이후 세대도 그렇게 한 것을 보면, 마태복음 1장의 세 번의 14대를 만든 것같이 의도적으로 체계화한 것처럼 보인다(마태복음 1장에서도 여섯개 혹은 일곱 개의 고리가 빠져 있다). 더구나 누가복음 3:36에 있는 아박삿의 아들 가이난은 창세기 10:24에는 빠져 있다.
② 그 족보는 단지 아브라함의 조상들 중 가장 뛰어난 인물들만을 기록하고 실제로 기록된 사람들 보다 더 많은 수가 빠진 것 같지는 않지만 상당수가 빠져 있다. 공식 "A가 B를 낳았다"는 것은 B자신이, 혹은 B의 조상 중 이름이 기록되지 않은 어떤 사람이 태어났다는 것을 뜻하는데, 이것은 할아버지가 종종 손자를 낳았다고 말하는 히브리적 어투에서 충분히 허락이 된다. 빌하의 손자들이 그녀의 아들들이라고 역대상 7:13은 말하고 있다. 수세기를 살았던(약 900년, 혹은 그 이상) 족장들의 나이들은 그 개인들이 실제로 살았던 햇수로 보아야 한다. 이 견해는 아담에서 아브람까지를, 물론 어느 정도 고리가 빠져 있는가에 따라 결정되겠지만 어림잡아 5000년 혹은 6000년 정도로 본다.
③ 혹은 창세기 5장에 기록된 이름들을 한 개인과 장자법을 따를 그 직계로 보는 것이다. 이것은 여기에 있는 모든 사람의 생애를 계속 더해 가기 때문에 아담의 탄생에서부터 홍수까지가 총 8,227년이 된다. 예를 들자면 아담이 930년을 살았다고 할 때 그것은 아담과 그 직계가 선두에 서서 총 930년을 살았음을 의미한다. 이 때가 끝날 때쯤 셋의 가문과 아담의 가문이 대체되면서 셋의 직계를 통해 912년을 다스리게 된다(창 5:8). 따라서 아담이 태어난 후부터 에로스가 지도력을 갖게 될 때까지는 1,842년이 된다. 이 이론에 있어서 하나의 문제점은 추방된 가인을 제외한
다면 셋이 아담의 직계 중 장남으로 소위 셋의 방계가족이 실권을 잡기 전에 아담의 직계가 어떻게 계승되어 왔는지 추측을 할 수 없게 된다.
전체적으로 볼 때 두 번째 해석이 셋 중 가장 바람직한 듯하다. 첫 번째 해석은 물론 명백한 애굽의 역사와도 상치된다. 애굽은 최소한 B.C. 3500년에까지 거슬러 가며 그것도 홍수 후부터이다.
피세칸스토포스, 스완스콤인, 네안델탈인, 그리고 나머지들(크레마뇽인)의 문제로 되돌아가서 생각해 볼 때, 이 모든 인류들을 아담 시대 이전의 종족들로 보며 아담의 언약에 동참하지 않은 자들로 보는 것이 타당해 보인다. 문화적 유적들을 고려해 볼 때, 이 아담 이전의 피조물들이 영혼을 가지고 있었는지(삼분법에 따르자면 영을 가졌는지)에 대해 계속적인 문제가 생기게 된다. 그러나 창세기 1:26이 암시해 주는 것은 하나님께서 아담을 만드실 때 질적으로 다른 존재를 창조하셨다는 것이다(창세기 1:26-27에 있는 "사람"으로 번역된 것이 히브리 원어로 'Adam임을 주의하라). 아담은 유일하게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았다. 오직 아담과 그의 후손들만이 하나님의 생기를 부여받았고 하나님 자신과 같은 영적 속성을 물려받았다. 로마서 5:12-21은 모든 인류가 아담 이후에 생겨났으며 최소한 문자 그대로 그로부터 태어났다고 한다. 이는 그가 모든 인류의 대표로서 하나님과 안약관계에 들어갔기 때문이다. 이것은 아담과(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첫 인간)아담 이전의 인류와는 아무런 유전 관계가 없음을 사사해 주는 것이다. 예를 들자면, 크로마ㅤㅁㅛㅇ인의 골격이 호모 사피엔스에 아무리 가깝다 할지라도 이 동굴의 인간들이 참으로 인간의 영혼과 인격을 소유하고 있었던 것 같지가 않다. 그들은 현재 인류의 원조가 되는 인간을 창조하기 전에 어떤 알 수 없는 이유지만 하나님에 의해 멸종되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아담은 창세기 1:26-27대로 하나님의 영적 형상으로 지음 받은 첫 인간이며 과학은 이것을 부인할 아무런 증거도 없다.
/출처ⓒ† : http://cafe.daum.net/cgsbo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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