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

신학사

하나님아들 2020. 2. 11. 16:00

신학사



신학사

걁 - 91

벵트 헤그룬드 저

1) 다음을 설명 하시요

A. 교부시대의 변증 가들을 열거하고 그들의 특징을 말하시오.

교부 시대의 변증 가들로는 '져스틴(Justin)', '아리스티데스(Aristides)', '타티안(Tatian)', 아테나고라스, 테오필루스 등이 있다. 이들은 당시 희랍철학과 유대교 분파들로부터 생겨난 이단 사상들과 맞서서 기독교를 수호하려 했었으며 기독교만이 진정한 철학이었고 헬라철학과 유대 종교를 대신 해 줄 완벽한 대치 물이었다고 주장했다.

져스틴은 두 '변증문', '유대인 트리포와의 대화'등을 써서 기독교를 변증했다.

'유대인 트리포와의 대화'에서 기독교와 철학의 관계를 어떻게 인식했는가가 나타난다. 져스틴은 '철학의 목적은 하나님과 실존에 관한 진정한 지식을 제공해 줌으로써 인간들의 마음속에 행복감을 증진시켜 주는데 있다고 보았다. 그러나 져스틴은 스토아 철학, 아리스토 철학, 피타고라스 철학, 플라톤 철학등 철학을 통해서 이 목적이 달성 될 수 없으며 기독교를 통해서만 가능하다'고 했다.

그래서 기독교만이 진정한 철학이라고 했다. 왜냐하면 기독교만이 모든 철학적 문제들에 대해서 바른 해답을 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헬라인들에게 적극적 자세를 취함으로 진리가 호머, 소크라테스 같은 철인들 가운데서도 발견될 수 있음을 시사했다.

아테나고라스

그의 작품 '그리스도인을 위한 탄원서'에서 이교도들로부터 주요 공격의 대상이 되었던 무신론주의, 부자연스러운 관습, 국가에 대한 중요성들에 관하여 논박했다. 또 그는 '죽은 자들의 부활에 관하여'를 썼다.

아디스티데서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변증문'을 썼다.

타티안

헬라 문화에 직접적으로 대항하는 의미에서 '헬라인들에게 주는 글'을 썼다.

테오 필루스

테오필루스는 '오토리우스에게 주는 글들'을 썼다.

변증 가들은 기독교만이 진정한 철학이라고 했을 뿐이다. 그들은 신학을 철학적 용어로 설명을 시도했다는 점에서 공헌했다.

예를 들어서 로고스(logos) 개념은 당시의 스토아 철학에서 생겨난 것이다. 그러나 변증 가들은 그것을 그리스도와 성부 하나님과의 관계를 설명하는 방법으로 사용했다. 이 로고스 개념으로 '기독론' 설명을 시도했던 것이다.

교리의 역사적 발전이란 관점에서 볼 때 변증 가들이 남긴 주요공적은 그들이 기독교와 헬라의 학문을 결합시키려 한 점과, 그 중요한 표현 방법을 로고스 이론에서 찾았고 또한 이를 기독론에 적용 시키려고 시도했다는 사실이다.


B. 알렉산드리아 신학, 아리우스 주의, 단일신론 주의에 대하여 말하시오.

알렉산드리아 신학

알렉산드리아 신학자들은 기독교 전통을 충실하게 본존 하려는 의도에서 성경 위에 굳게 서 있었다. 알렉산드리아 신학자들로 대표 할만한 사람은 오리겐과 클레멘트이다.

오리겐과 그의 제자 플로티누스(Plotinus)와 암모니오스 삭크스(Ammonios Sakkos)라는 스승에게서 배웠다.

이들의 신학은 신 플라톤 주의를 도구로 삼고있다.

클레멘트

알렉산드리아 학파가 지닌 사상체계의 주요 면모들은 클레멘트에 의해서 발전되었지만 그것이 세상에 이름을 낸 것은 이 체계를 오리겐이 사용해서 비롯되었다.

클레멘트의 신학에서 두드러진 특징은 그가 주장한 하나님의 교육에 대한 사상이다. 이러한 사상은 클레멘트가 쓴 '헬라인들에게 주는 권면', '교사', '잡문집'등에 나타난다.

헬라인에게 철학이 주어진 것은 유대인에게 율법이 선포된 것과 같이 하나님의 교육에 있어서 하나의 교육적 단계였다.

클레멘트는 이처럼 기독교와 철학이 서로 상반되는 입장에 있다고 보지 않았다. 클레멘트는 신앙과 지성을 구분하였고 지식이 신앙보다 위에 선다고 보았다.

클레멘트는 영지주의의 거짓된 지식을 기독교의 진실하고 성서적인 지식으로 바꾸고자 하였다.

오리겐

오리겐은 방대한 양을 저술하였다. 오리겐의 가장 위대한 저작은 '헥사플라'이다. 오리겐의 신학적 견해는 그가 셀수스를 상대했던 저술적 투쟁서 '셀수스에 대항하여'가운데 가장 잘 나타난다.

터툴리안이 서방신학의 설립자였던 것과 마찬가지로 그는 동방 신학의 전통을 세운 자였다.

오리겐은 성경을 해석함에 있어서 플라톤 주의적 전통에서 빌려온 풍유적 해석방법을 사용한 결과 알렉산드리아 학파에서 발전된 범 세계관의 수용또한 용인하게 되었다.

오리겐의 신학 가운데 특징적 중심 사상은 신의 섭리를 통하여 타락한 이성적 피조물들을 교육시키는 문제와 연결되어 있다.

클레멘트가 그러했듯이 오리겐의 경우에도 하나님의 섭리적 교육사상은 그 신학체계의 기반이었다.

오리겐의 신학체계는 전형적인 플라톤 사상이 기독교의 전통과 결합된 것이다.

오리겐의 방법은 양대사상체계(기독교, 희랍)를 통일적이고 조직적인 사상 양식으로 발전시키는 것이었다.

단일신론(3세기)

단일 신론에서는 삼위 일체의 개념이 한 분 하나님에 대한 신앙에 상치된다는 주장으로 이를 부정하였다.

또 단일신론자들은 한 분이면서 스스로 성자, 성령의 모습으로 자기를 계시 하셨다는 '경륜'개념도 부정했다.

단일 신론자들의 신격의 삼위에 대한 부정은 '헬라적 신 개념' 의 영향으로 인한 것이었다. 단일신론이라는 용어는 당시에 나타났던 두 종류(역동적 단일 신론과 양태적 단일신론)의 사상적 주장의 특징을 나타낸 말이다.

역동적 단일신론

데오도투스라는 사람이 처음 주장했는데 그는 로고스 기독론을 반대하였으며 그리스도의 신성을 부인 하였다. 예수가 세례를 받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그 안에서 역사하기 시작하고 권능을 부여하였다. 그래서 '역동적'이라 부른다.

양태론적 단일신론

소아시아에 나타났던 것을 노에투스(Noetus)와 그의 제자들이 로마로 가져갔다.

노에투스에게는 성부만이 하나님이었다. 그는 신격의 세 위들을 구분하는데 반대했다.

양태적 단일신론에 체계적 형태를 부여한 사람으로는 사벨리우스였다. 성부, 성자, 성령은 하나인 동시에 동일본질에 속하기 때문에 그 이름으로써만 구별된다고 했다.

사벨리우스는 세 위격간에 구분을 두지 않았음으로 그에게 삼위일체란 있을 수 없다.

역동 설에서는 예수님의 신성이 부인되었고 양태론에서는 위격들간의 구별을 반대하면서 성부, 성자, 성령을 동일시했다.

이 두 종류의 단일신론은 모두 기독론을 이성주의적 방법으로 변형시킨 자들이었다.

3세기 말엽의 교회는 단일신론을 대항함과 동시에 신학을 발전시켰다.

아리우스주의

단일신론의 도전은 제 4세계에 한층 첨예화된 양상으로 모습을 나타냈다. 4세기에 삼위일체 합의가 니케아 종교회의(A. D 325년)및 콘스탄티노플 회의(A. D 381년)에 있었다.

4세기에 가장 호전적인 이단 사상가는 아리우스(Arius)였다. 아리우스는 '철학적 신 개념'에 근거해서 자신의 신학을 구축했다.

아리우스는 그리스도가 하나님일 수 없으며 피조물에 불과하다고 했다. 그는 그리스도의 신성과 그의 영원전 탄생에 대한 가르침을 부인했다.

C. 아타나시우스의 삼위일체 교리에 대하여 설명하시오.

아타나시우스는 알렉산드리아의 감독이었다. 니케아 결정사항을 끈질기게 주장했던 까닭에 많은 박해를 받았다.

그의 공적으로 인하여 콘스탄티 노플 회의에서(A. D 381년) 니케아 신학이 최고의 승리를 거둘 수 있게 되었다.

아타나 시우스는 '이방인에 대항하여', '성육신에 관하여', '아리우스 주의자들을 논박하는 글들'등을 저술했다.

아타나시우스는 클레멘트나 오리겐과 달리 기독교 신앙을 폐쇄적인 철학체계속에 삽입시키려 하지 않았다. 그는 철학의 자료를 거부했다.

아타나시우스는 아리우스주의와 싸워 나가는 투쟁 속에서 교회의 삼위일체 및 로고스 교리를 발전시켰다.

아타나시우스에게 있어서 삼위일체 교리는 모든 신학의 핵심이었으며 성자가 성부와 같은 본질에 속함을 강조했다.

아타나시우스는 신격에서 '위격들'에 관해서는 언급을 하지 않고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를 특이한 방식으로 설명하였다.

그는 성부-성자의 개념, 하나님의 활동에 의해서 조건 지워진 양위간의 차이점에 대해서 말했다. 그는 성령도 '동일본질'에 속한다고 했다. 그리고 성부, 성자, 성령은 모두 함께 일을 하신다. 성령이 성부와 성자와 동일본질이라는 사상은 아타나시우스가 처음으로 발전시킨 것이다. 이 사상은 그가 신학에 남겨준 가장 위대하고 가장 독자적인 공헌들 가운데 하나로 기록되었다.

아타나시우스의 후계자로 큰 영향을 미친 사람들은 '3인의 갑바도기아인들-대바실(Basil the Great,), 닛사의 그레고리(Gregory of Nyssa), 나지안 주의(Gregory of Nazianzus)'이다. 이들은 동방신학으로 기울어졌다는 것은 아타나시우스의 신학적 경계를 넘어섰다는 것을 의미한다.

아타나시우스와 3인의 갑바도기아 인들이 발전시킨 동방신학은 서방신학에 영향을 주어 어그스틴이 결국 '삼위일체 교리에 관하여'를 쓰게되었다.

2) 다음 신학사상을 설명하시오

A 스콜라 신학(초기, 전성기, 후기 포함)

스콜라주의는 중세의 서방의 대학들을 통하여 형성된 신학으로서, 이것은 11세기 중엽에 시작하여 13세기에 그 전성기를 맞이하였고 중세의 후반기에 들어 쇠퇴하기 시작하여 마침내는 인문주의와 종교개혁에 의하여 거의 소멸되어 버린 신학이다.

스콜라 신학의 두드러진 특징은 그들이 철학적 방법론을 사용하였던 점이다. 이 신학은 단일 학파의 사상이 아니라 서로 다른 많은 학파들의 신학이다. 스콜라 주의는 본래의 형태에서 아주 복잡한 형태로, 그리고 여러 측면에서 중세 후기의 퇴행적 사색에 이르기까지 장기간에 걸친 다양한 발전을 경험했다.

당시의 '교회갱신운동'과 '철학교육'은 스콜라신학의 발전에 큰 공헌을 했다.

(1). 초기 스콜라 신학.

초기 스콜라 신학에서의 교리논쟁은 성만찬에 관한 논쟁의 연속이었다. 루트의 베렝가(Berenger of Tours)는 어그스틴의 입장을 따르면서 봉헌에 의해 성물들이 변화된다는 사상을 가진 르드 베르투스(Rad bertus)를 비판했다. 그러나 베렝가는 정죄 당하고 배척 당했다. 초기 스콜라 신학자들이 만들어 낸 화체설 교리는 곧 바로 1215년의 제 4차 라테란 회의에서 교황 인노센트 3세에 의하여 하나의 교리로 확립되었다.

유명론과 실재론의 논쟁

유명론의 대표자는 로스켈리누스(Roscellinus)였는데 유명론에서는 인간의 보편적 개념들이란 우리가 동일한 범주 내에서 속해있는 여러 객체들의 동일성을 식별하기 위하여 사용하는 말로된 이름에 지나지 않는다고 하였다.

실제론의 대표자는 안셀름(Anselm of Canterbury) 이었는데 실제론 에서는 비록 감각적으로는 감지 할 수는 없어도 인간의 이성적인 능력을 통하여 형성된 개념들을 실제로 존재하는 어떤 것들을 대표하는 것이며 이것은 오로지 이성으로만 이해 할 수 있는 갖가지 중요한 사물들의 실제라고 주장했다.

안셀름은 유명론이 삼위일체교리들에 심각한 악영향을 미친다고 보았다.

스콜라 신학은 '교리적 전통을' 독자적으로 철학의 도움을 받아 새로운 신학적 푠현을 한 것이다.

초기 스콜라 신학에 큰 영향을 준 인물은 켄트베리의 안셀름, 피터 아벨라드 등이었는데 아벨라드는 신학에 변증법적 방법을 도입했다.

피터 롬바르드(Peter Lombard)는 명상법과 변증법적 방법을 결합시켰다. 롬바르드는 '롬바르드의 조직신학'을 저술했는데 이것은 중세 신학교육에 대단히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신앙과 이성에 대하여 안셀름은 '이해하기 위하여 믿는다'라고 하였는데 그는 사7:9의 말씀에 기초한 것이었다.

안셀름은 자신의 이러한 견해를 '논설집', '나는 이해하기 위하여 믿는다'등에서 잘 나타낸다. 안셀름에게 있어서 신앙이란 계시된 진리에 대한 애정을 의미했다.

안셀름의 속죄이론 가운데 '만족설(죄에 대한 댓가 지불)'의 가르침은 우주론과 구원사에 그 배경을 두고있다. 또 안셀름의 속죄 이론은 법정적 개념을 발전시켰다.

초기 스콜라 신학의 은혜, 칭의 개념에 관한 해석은 어그스틴의 신학적 유산에 근거했다.

(2) 전성기의 스콜라 신학

스콜라 신학의 발전은 13세기 동안에 그 절정을 이루었다. 파리 대학은 당시의 신학교육을 위한 세계적 본거지로 등장하면서, 12세기 동안에 그 전신의 역할을 맡아왔던 파리의 성당학교들을 퇴위시켰다. 또 두개의 탁발 수도회, 즉 도미니크파와 프란시스파도 학구적인 신학연구를 향상시키는데 기여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논리가 신학전반에 영향을 미쳤다.

전성기의 스콜라 신학은 특별한 철학적 견해들을 생산해 내지 못했다. 그럼에도 몇 가지 주요 사상적 경향은 찾아 볼 수 있다. 그러나 이런 것들은 어그스틴 주의와 아리스토텔레스 주의의 그늘에서 빛을 보지 못했다. 프란시스파 수도사들은 어그스틴적 신플라톤주의의 신학노선을 도미니크 수도회 신학자들은 아리스토텔레스 적이었으나 명확한 구분은 되지 않았다.

도미니크파 신학자들 가운데 뛰어난 자는 토마스 아퀴나스(Thomas aquinas)였는데 그는 어그스틴 주의와 아리스토텔레스 주의의 양측견해를 종합했다. 그러면서도 아리스토텔레스 주의에 기울어져 있었다.

어그스틴의 인식론은 이지적 지식이란 근본적으로 즉시적인 '조명'에서 파생한다는 것이었고, 아리스토텔레스의 인식론은 '인간의 인식의 주체는 지식을 밖으로부터 받아들인다'는 사상에 기초한다.

전성기의 스콜라주의를 실질적으로 일으킨 인물은 헤일즈의 알렉산더(Alexander of Hales)이다. 그는 프란시스파에 속했으며 최초로 가장 포괄적인 '신학총론'을 지었다.

그는 신학을 일종의 지혜로 정의하였고 어그스틴의 조명 이론을 받아들였다. 그의 후배인 보나벤투라(Bonaventura)는 알렉산드와, 어그스틴적 신학에 밀착했고 토마스 아퀴나스와 토마스 아퀴나스 주의자들의 주장을 반대하였다.

도미니크학파

대알버트(Abertus Magnus)는 방대한 저작물을 남겼으며 도미니크 학파의 대표적 인물이다. 그는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을 알리고 이를 과학에 이용하게 한 인물이다. 토마스 아퀴나스가 그의 제자였었다. 따라서 토마스 아퀴나스가 아리스토텔레스 주의에 기울어져 있었다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인간이 사물에 대한 인식은 사색과 연구결과로 가질 수 있으나 하나님에 관한 지식, 즉 하나님의 존재, 완전 등은 이미 인간에게 주어진 형태의 지식이라고 했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철학적 개념들은 사상체계 그 자체의 핵심적 구조를 세우도록 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토마스는 신학은 하나의 과학으로 이해했다. 그리고 그는 신학을 이성적 지식과 다르다고 보았다.

은혜교리 즉 '의롭다 함을 받을 수 있는 방법에 대한 답변에서 이들은 어그스틴적 견해가 아닌 ''공로''상급''반펠라기우스적' 경향으로 흘렀다.

전성기 스콜라신학과 카톨릭에서는 성례전까지 즉 세례(Baptism), 견신례(Confirmation), 주의성찬(The Lord's Supper), 고해(penance), 종부성사(extreme unction), 신품성사(Ordination) 그리고 혼배성사(marriage)등을 지켰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성례전이란 '물리적 표징'으로서 영적인 삶을 보호하고 그 질을 높이려는 목적에서 제정된 것으로 보았다.

콘스탄틴 회의(The Council of constanus)에서는 이상과 같은 성례 제도에 대하여 비판한 요한 후스(John Huss)와 요한 위클리크(John Wyclif)를 배격하였고 1439년의 플로렌스 회의(The council of Florence)에서는 스콜라 신학에 의하여 형태를 갖추게된 일곱가지 성례전의 전통을 공식적으로 채택하였다.

후기 스콜라신학

후기에 오캄 주의가 나타났다. 오캄 주의는 스콜라 신학적 사상에 대해 반대했다. 그러면서도 스콜라 신학적 전통을 영속화 시켰다. 이 학자의 대표자는 윌리엄 오캄(William of occam)이다. 그는 토마스 아퀴나스의 실제론을 배격하면서 유명론 자들의 견해를 소생시켰다. 오캄주의자들은 논리학을 기초과학으로 간주 한 반면 형이상학은 없어져야 할 학문으로 여겼다.

오캄 주의자들은 인간의 생각에 들어있는 '보편'을 실제로 부인했다. 따라서 하나님의 존재, 삼위일체에 대한 생각은 할 수 없게 만들었다. 그는 토마스 아퀴나스와 달리 신학을 과학으로 생각지 않는다.

중세 후기에는 교회 전통에 대한 반대가 일어났다. 오캄주의자는 유명론 자들이 교회의 권위 교리적 입장에 충실했었던 반면에 죤 위클리프(John Wyclif)와 죤 후스(John Hus)등이 나타나 교회전통을 비판했다.

B. 카롤링 시대의 신학.

카톨릭 시대는 교황 대 그레고리(Gregory the Great)의 시대와 스콜라 신학시대가 시작되는 중간시대(A. D 600-1050)를 말한다.

이 기간동안 알쿠인(Alcuin), 라바누스 마우루스(Rabanus Maurus), 라드베르투스(Radbertus), 라트람누스(Ratramnus), 라임스 힝크마르(Hincmar of Reims)같은 신학자들이 활동했다.

이 시대의 신학은 교부 시대와 고대의 유산을 보존함으로써 후대에서의 발전을 위한 기초를 마련해 주었다.

당시에 '양자설에 관한 논쟁', '필리오케논쟁', '성상논쟁', '서유럽 신학자들과 동방 신학자들간의 논쟁', '예정론에 관한 논쟁'등이 있었다.

C. 중세기의 신비주의

클레르보의 버나드(Bernard of Clairvaux)는 신비주의를 하나의 독특한 신학이론으로 발전시켰으며 인간 예수께서는 주님이신 동시에 왕이시라는 믿음 위에 자신의 신학을 세웠던 사람이기도 하다.

그는 그리스도를 영혼의 신랑으로 보는 개념으로부터 동기를 부여받았으며 이러한 개념은 아가서로부터 인용했다.

스콜라 신학에 신비주의를 삽입시킨 자들은 성빅토의 휴고와 성 빅토의 라차드이다.

신비주의와 스콜라 신학은 서로 통하는데가 있다.

후기 중세시대의 신비주의는 당시의 문화적 요소들의 영향을 받았다. 후기 중세시대의 신비주의는 독일 신비주의로 불리는 학파의 영향력아래 있었다.

신비주의가 지녔던 특징은 스콜라 신학에서보다는 신학에서의 주관적 문제를 더욱 제한시켰다. 신비주의자들은 신론, 천사, 인간의 영혼, 성례전, 예배행위의 의미 등이었다.

후기 중세의 신비주의자들 가운데 주요 인물로는 호크하안의 마이스터 에크하르트(Meister Eckhart of Hochheim), 요한네스 타울러(Yohanes Tauler)등이 있었다.

마이스트 에크하르트는 신학적으로는 토마스 아퀴나스와 연관되어 있으면서도 그의 전통적인 기독교의 자료들을 신플라톤 주의적 신비주의와 결합시킨 동시에 신학적 계보를 따라 신비주의의 사상을 발전시켰다.

3단계, 즉 정화, 조명, 연합의 단계를 거쳐서 신과 연합되는 길로 자신을 진입시킴으로 구원 받는다고 했다.

마이스터 에크하르토의 신비주의는 클레르보의 버나드가 제의한 그것과는 다른 것으로서 기독교 교리와의 관계 보다는 신플라톤 주의적 사상에 의하여 깊은 영향을 받은 이론이었다. 신비주의자들의 작품가운데 '도이취 신학', '그리스도를 본받아'등이 있는데 '도이취 신학'은 루터에게 많은 영향을 미쳤고, '그리스도를 본받아'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읽혀졌다.

3) 다음 인물들을 설명 하시오

A 어거스틴

어스스틴은 교회사, 문화사 등에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그의 저술들은 신학, 철학, 문학, 교회정치 그리고 법률분야에 이르기까지 두루 영향을 미쳤다. 어그스틴은 마니교, 신플라톤 주의를 접했었으며 로마서 일부를 읽는 가운데 이런 것들로부터 돌아설 수 있었다.

그는 사람은 오직 믿음과 계시된 진리를 받아들임으로써만 진정으로 하나님을 알게 된다고 했다.

그는 구원이 하나님의 사역과, 그의 선행적 은혜와 그리고 그가 친히 그리스도의 성육신을 통하여 우리에게 내려오심으로써 결과되었다고 했으며 인간 속에 내재된 지고의 선에 대한 열망은 타락으로 방향이 잘못된 것으로부터 재 수정되어야 하며 그리스도인이 소유하는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만족을 얻게 해야한다고 했다.

어그스틴은 교회의 교리에 대해 키프리안(Cyprian)으로부터 유래된 서방의 전통을 계속 발전시켜 나갔다.

도나투스주의자들과의 논쟁을 통해서 '교회론'을 더욱 심화시킬 수 있었다. 도나투스 주의자들이 갱생신학이란 성례를 집전하는자의 거룩성에 성례의 유효성이 좌우된다는 것과 성직임명자의 거룩성에 임명받은 자의 성직의 유효가 달려있다는 것을 뜻한다.

어그스틴은 교회의 의미를 두 가지로 보았다. 첫째의 의미는 외적 조직으로서의 교회이고, 다른 하나는 성도들의 단체를 의미하는 교회가 그것이다. 어그스틴의 교회에 관한 교리는 '하나님의 도성'에서도 잘 나타난다.

어그스틴은 구원은 하나님 자신의 사역이므로 그것이 인간적인 것으로부터 유래하지 않는다는 주장을 하였다.

서방신학에서 죄와 은혜에 관한 교리는 교회에 관한 교리처럼 핵심적 관심의 대상이었다. 당시 이방인 페라기우스는 인간의 자유의지를 강조하였으며 '원죄'를 인정하지 않았다.

어그스틴은 타락 전에는 인간이 선악을 택할 자유의지가 있었으나 타락 후에는 인간이 선을 선택하는 자유를 상실했다고 했다.

어그스틴은 죄는 의지가 하나님으로부터 돌아서는 것을 말한다. 인간구원의 유일한 구원인 하나님의 은혜는 그리스도의 사역 가운데 드러나 있다. 그리스도의 중재 사역을 통하여 하나님과의 끊어졌던 교제는 회복되었다. 죄의 용서로 인해서 죄책은 제거되었으며, 인간은 자신의 타락으로 상실한 영적 생활을 되찾았다.

은혜는 죄의 제거, 인간의 갱생을 가져온다. 구원은 믿음에 의하여 이루어진다. 하나님의 사랑은 구원의 전제조건이다.

B 루터

우리는 루터 이전의 신학적 배경과 당시의 전통을 배경 막으로 하여 투영된 루터신학의 주요 면모들을 살펴볼 것이다.

루터는 에르쿠르트 대학의 인문과학을 공부했고 여기에서 유명론 자들의 전통에 따라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을 배웠다. 1505년 7월 2일 여름에 수도자의 길을 걷기로 결심하고 어거스틴 수도원에 들어갔다. 2년후 사제로 임명되었고 계속 신학을 공부했다. 루터가 오캄주의자들의 교리적 입장에 친숙하게 된 것은 바로 이 기간동안의 일이었다. 1510년 로마방문시 로마의 타락상을보고 몹시 실망했다. 죄 문제는 고행으로 극복될 수 없는 것이었으며 오캄 주의자들의 은혜 교리는 그에게 만족스런 해답이 되지 못했다.

루터는 자신의 고해 신부인 슈타우피트의 도움을 받아 새로운 신앙적 안목을 가지게 되었다. 루터는 인간이 성경을 이해 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그것을 종교적인 경험 혹은 좀더 정확히 말하면 신앙을 체험한 결과라고 하는 유리한 관점에서 바라보는 길 뿐이다고했다.

신학 사상적으로 루터는 어그스틴에게 많이 의존했다. 유명론 주의자들의 전통으로부터 유래된 개념들 가운데 상당수는 루터의 사상에 좀처럼 지워지지 않는 흔적을 남겨놓았다. 그러나 본질적인 문제에 있어서는 루터와 오캄주의자들 사이에 근본적으로 간격이 있다.

루터는 선한 일을 하기 위해서는 먼저 인간이 선해져야만 한다.

1518년 하이델베르크에서의 논쟁은 1517년의 95개 신조 문이 스콜라신학에 대항하는 것이었듯이 오캄주의의 신학과 철학에 반기를 드는 것이었다.

루터의 생애에서 로마서에 기록되어 있는 하나님의 의란 인간을 심판하고 그에게 강요하는 그런 의가 아니라, 은혜가운데 하나님에 의하여 주어지는 것이라는 사실이었다.

루터를 로마교회는 파문하고 그의 저작들은 불태우게 했으며 루트의 일로 1521년 4월 윔스(worms)회의가 열렸다. 이 웜스회의에서 루터가 카톨릭의 신학을 받아 들이는 것은 불가능함을 더욱 나타나게되었다.

루터와 신비주의자들간의 결정적인 차이점은 인간에 대한 신학적 관점에서 드러난다. 그리고 인간과 하나님과의 연합에 관해서도 달랐다. 루터의 신학은 '말씀의 신학'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신앙을 창조하는 동시, 신학을 이루는 초석으로서의 역할을 한다. 그리고 그리스도는 서역의 핵심에 위치한다. 말씀을 모든 사물의 중심에 위치시키고 이를 인간이 초자연적인 실재를 이해하는 통찰력의 근원으로 여길 뿐만 아니라 효과적이고 창조적이며 하나님께서 그것을 통하여 인간을 심판하시고 다시 일으켜 세우시는 생명을 부여하시는 말씀으로 인식하는 것은 종교개혁 신학의 특징으로 볼 수 있다.

율법이 복음을 떠나서는 결코 그 완성에 이룰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복음 또한 반드시 율법과 함께 선포되어야 한다. 그럼에도 양자는 구별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루터는 말했다.

루터는 외적인 의와 내적인 의로 두 종류의 의로 구분했는데 외적인 것은 행위를 통한 것이나 외적인 것은 순결성과 마음의 완전성으로 이루어진다고 했다. 이 의는 그리스도의 수난과 사망으로 주어지는 것으로서 인간의 공로나 가치와 상관없는 믿음에 기인한것이다고하였다. 인간의 자유의지에 관한 루터의 사상은 반드시 그의 칭의 교리에 비추어 고찰 되어야한다. 루터는 '의지의 굴레에 관하여'에서 인간에게는 전혀 자유의지가 없으며 그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특성이고 오직 하나님께만 속할 수 있다는 성질의 것이라고 했다. 그리고 성경에서 자유의지 개념을 뒷받침할만한 근거를 도저히 찾아볼 수 없음을 지적했다. 구원은 전적으로 전능하신 하나님의 은혜의 의지에 달려있다.

은혜와 하나님의 전능성의 결합은 루터의 예정 개념을 형성하는 기초를 제공했다.

루터의 소명 개념에는 두 가지 의미가 있다. 그 첫째 의미는 각 사람이 가지고 있는 신분이나 직업은 개인에게 내려진 하나님의 명령으로서 그 안에서 인간은 마땅히 하나님의 도움을 구해야 하며 그 분의 뜻에 순종해야 하는 것으로 간주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두 번째 의미로 인간 사회는 본시 사람끼리의 상호봉사에 의하여 형성 되도록 되어 있으며 이러한 사회 안에서 사람들은 서로가 서로를 섬기고 각자가 자기에게 부여된 일들을 완수함으로써 그들의 이웃에게 하나님의 은사들을 가져다 준다는 것이다.

루터는 종교적 영역과 비종교적 영역을 구분하였으며 하나님의 통치권 행사는 부분적으로는 말씀과 성례전을 통하여 또 한편으로는 여러 권위들과 세속적인 질서를 통해서 행사되었다. 루터는 교회의 예배생활 개혁을 하는데 있어서 한편으로는 로마교회 다른 한편으로는 열광주의자들의 과격한 개혁 열에 대해서도 맞서야 했다. 루터는 미사와 희생적 의미를 비판했음에도 희생(제물)의 예배의식 가운데 본질적 요소라고 했다.

루터는 그의 저서 '교회의 바벨론 포로에 관하여'에서 로마교회의 성례제도에 대하여 반기를 들었다. 성례전에서 효력이 있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지 결코 인간의 행위와 같은 것이 아니라고 했다. 성찬에 대하여 루터는 화체설을 부인, 배격하고 공제설을 언급했다.

루터는 '교회'를 "기독교인들의 회중"이라는 용어로 표현했다. 루터는 베드로에게 하신 주님의 말씀 "내가 이 반석 위에 교회를 세우리니"가 로마교황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베드로가 고백했던 믿음을 가리키는 말씀인 것으로 믿었다.

그리고 루터는 신분(stand)과 직임(amt)을 구분하였다. 신분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공통적으로 주어졌으나 직임은 그것을 위하여 특정의 사람들이 피택되어 그 사람들이 말씀을 선포하고 성례를 집전하는 책임을 수행하는 것이라 했다. 감독, 교사 등은 다 같은 직임에 속하는 것으로 생각했다.

C. 밀랑톤

필립 멜랑히톤(philipp melanchthon)은 루터의 으뜸가는 제자이고 동역 자였을 뿐 아니라 종교개혁 신학에서 독자적으로 다양성을 창조해낸 인물이다.

그는 개신교의 교육에서 신학은 물론 철학분야에까지 걸쳐 그 기초를 딱아놓은 인물이다. 그는 루터의 뒤를 이어 독일의 종교개혁을 이끄는 주요한 지도자였다. 멜랑히톤은 아우그스부르크 신앙고백을 쓴 실제의 인물이다. 그리고 '변명','교황의 권능과 우위성에 관한 논문'을 저술했다. 그리고 '철학적 윤리학', '심리학에 관하여'를 발간했다. 그는 회심의 세 가지 요소, 즉 말씀, 성령, 인간의 의지가 있다고 했다.

멜랑히톤은 칭의 교리에 관하여 개신교 측의 정확한 체계적 진술을 제공하였다. 교회가 세속적 권력과 가지는 관계에 대한 멜랑히톤의 진술은 또한 후대를 위한 원형을 제공해 주었다. 그는 국가가 교회를 후원하고 보호해야 할 책임을 지고 있음은 물론 교회에 대하여 권력 기능과 외형적인 통치기능 모두를 가지고 있는 것이라고 했다. 멜랑히톤에게는 심오한 인문 주의적 경향이 있었다. 그의 신학에서 철학적 가정은 중요한 역할을 했다.

멜랑히톤은 루터의 뒤를 이어 종교개혁을 이끌어 갔으나 모든 면에서 루터와 같지는 않았다. 그것은 멜랑히톤 생존시에도 그의 지지자들인 필립파와 그를 반대하는 루터파가 있었다는 것을 보아 알 수 있다.

D 쯔빙글리

스위스의 종교개혁가 울리히 쯔빙글리(Ulich Zwingli)는 신학사에 그렇게 많은 공헌을 하지는 못했다. 쯔빙글리는 1516년 루테르담의 에라스무스와 친숙하게 되었으며 그의 저작물들을 통하여 심대한 영향을 받았다.

그러나 1519년에서 1520년 사이에 쯔빙글리의 신학적 입장은 달라졌다. 그는 에라스무스에게서 발견한 펠라기우스적 사상을 논박하는 한편 인간은 전적으로 부패한 존재임을 가르쳤다. 따라서 인간이 의롭다함을 입을 수 있는 길은 오로지 그리스도의 변화시키는 능력을 통해서 뿐이다. 쯔빙글리의 생애에 영향을 준 것은 어그스틴의 책들이었다. 또 1519년 전염병에서 놓임을 받은 사실이다.

쯔빙글리의 개혁계획이 가지는 주요 특징은 엄격한 윤리와 신정적 통치형태였다. 쯔빙글리의 신학에서 기초적인 사항은 영혼과 물질 사이의 형이상학적인 대조이다.

쯔빙글리는 '참 종교와 거짓 종교에 관한 주석', '주의 만찬에 대한 명료한 교훈', '우정어린 주석'등이 있다.

그는 취리히와 베른이 중심이 되는 스위스의 통일돈 복음주의 국가의 형성을 위하여 열성적으로 일하였다. 이 일을 위해 무력도 불사했으며 1531년 카켈전투에서 전사하였다. 그의 정치적이고 국가주의적인 요소에 대해서는 루터가 취했던 태도와는 다르다.

E 칼빈

칼빈의 신학은 전체 개혁파 전통에서 결정적인 위치를 차지한다. 1538년에서 1541년 사이에 스트라스부르그에 머물면서 부셔의 신학과 교회정치에 의하여 깊은 감명을 받았다.

칼빈은 독학으로 복음주의 신학을 익혔고 루터의 저작을 통해서 루터의 사상에 친숙했다. 1530년에 '기독교 강요'를 지었고 '제네바'에서 종교개혁 추진의 책임을 맡아 일하다가 1564년 제네바에서 사망했다. 칼빈은 '기독교 강요'를 제 3판까지 개정해서 출판하였다. 그 외에 많은 설교문, 서한문 계시록을 제외한 성경주석 등을 제작했다.

칼빈의 신학에서 핵심적 위치를 차지하는 것은 하나님의 영광에 대한 사상이다. 그는 인간행위, 세상과 구원에 관한 하나님의 모든 계획은 하나님 자신의 영광을 위한 것이라 보았다. 이와 깊은 관련이 있는 것은 하나님의 섭리교리이다.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은 하나님의 전능하신 뜻과 그의 적극적인 협력에 의하여 추진된다는 것이다.

칼빈은 인간의 구원과 저주가 다 예정되어 있다고 했다. 이러한 예정이 구원에 대한 확신을 더욱 강하게 해준다.

칼빈의 예정개념은 인간이 의롭다고 생각하는 모든 것을 초월하는 신적 공의를 전재로 한다. 유기는 하나님의 의와 공의와도 관계된다. 칼빈은 구약에서 모세의 율법 가운데 의식적인 면은 그리스도의 나타내심에서 폐지되었다고 보았다. 칼빈은 모세의 법내에 있는 도덕적 율법은 항구적이라고 보았다.

그렇다고 인간의 하나님 앞에서의 의는 율법의 행위를 이루어지는 칼빈은 성화를 칭의의 목적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칼빈주의적 경건의 특징은 개인에게 주어진 소명가운데서의 엄격한 절제와 고된 노력을 들 수 있다. 칼빈은 교회를 가시적인 교회와 불 가시적인 교회로 나누었다. 불 가시적인 교회는 선택된 자들로 세워지는데 반하여 가시적인 교회는 말씀, 성례, 교회의 치리로 구성된다.

칼빈주의와 루터주의 사이에 예정론 다름으로 가장 치열하게 논쟁의 대상이 되어 온 문제는 성찬교리였다.

칼빈은 성찬이 단순한 기념이라 하지 않고 이 예식에 참여함으로 성령께서 신실한 신자들을 중재하여 주님의 살과 피에 참여하게 한다고 했다. 단지 주님의 영적 임재가 있을 뿐이라고 했다.

4) 다음을 설명하시오

A. 도르트 종교 회의

도르트 종교회의는 당시 야코부스 알미니우스(Jacobus Arminius)의 지도아래 점증하고 있었던 칼빈주의의 예정론에 대한 반대의 문제를 다루기위해 소집되었다.

도르트 종교회의(The Synod of Dort, 1618-19)에서 합의된 결정 사항들은 대부분의 개혁교회의 규범이 되다시피 했으며, 도르트 종교회의에서 엄격한 칼빈주의의 견해가 압승을 거두었다. 이 결정 사항중에 특정수의 인간이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에 이르도록 선택되었으며 이 선택은 오로지 하나님의 선하신 뜻에 근거하여 결정되었다는 것이다.

선택되었다는 것은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하나님에 대한 어린아이와 같은 사랑, 죄로인한 슬픔, 의에 대한 갈망 등을 통해서 알 수 있다.

B. 콘코드 신조

콘코드 신조는 루터파 교회들을 하나로 묶고자 시도된 것으로서 복음주의적 제후들이 이 일에 참여했으며 이 신조는 대부분 루터파 교회들에 의하여 받아 들여졌다. 이 합의문의 진술은 루터파의 견해와 칼빈주의 간의 대조를 극명하게 제시하였다.

콘코드 신조의 대부분이 종교개혁에 대한 멜랑톤의 해석에 기초해서 작성되었다. 튜빈겐의 야곱 안드레야(Jakob Andrea of Tübingen)에 의해 기록된 1574년의 '쉬바아벤 합의'가 그 기초를 제공했다.

콘코드 신조의 목적은 루터파 내에서 일었던 여러 교리 논쟁을 종식시키기 위함이었다.

이 신조에서 오시안더의 칭의교리 및 암스도르프의 반율법 주의적 선행 개념과 율법의 제3의 용도, 원죄에 대한 펠라기우스적 견해가 부인되었다.

루터파의 신앙고백선집으로서의 '콘포드 신조서'의 중요성은 심지어 독일 루터주의 밖에서도 점차적으로 인정을 받기에 이르렀다. 콘코드 신조에서 성경은 모든 교리문제에 마땅히 사용되어야 할 일율의 규범이요 규칙적으로 언급되었다.

C 경건주의

경건주의는 당시 교회 생활이 지닌 취약성에 대한 반응이었다기 보다는 오히려 새로운 실재 개념에 기초를 둔 하나의 새로운 신학적 입장으로서 그 자체 속에 근대적 관점의 씨앗을 배태하고 있다.

경건주의의 주요한 신학자이면서 경건주의를 루터파내에 세운 사람은 베를린 대학의 학장을 역임했던 필립야콥 스페너(Philipp Jakob Spener)이다.

스패너는 '경건과 소원'에서 당시교회의 부패상을 다루면서 성경연구의 대중화를 역설했다. 스패너는 경험은 자연적 차원과 계시의 차원이라는 양자의 경우에서 모든 확실성의 근거가 된다. 그는 지식을 육신적인것과 영적인 것으로 나누었다. 경건 주의자들의 주요 강조 점은 중생에 두어졌으며 스페너는 이것을 새로운 삶의 수여로 생각하였다. 칭의는 중생의 소산이다. 그래서 전가의 교리는 칭의와 성화가 일치를 이룬다는 사상으로 대치되었다.

경건주의 신학은 구원의 문제에 집중적인 노력을 기울였다. 스패너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에 비판적이었고 이것은 신학에 사용하는 것도 반대했다.

구약을 신약보다 열등하며 심지어 구약의 특정부분은 도덕에 어긋나는 내용이라고 비판하기 시작했다.

경건주의자들은 주관적인 의미에서 일어난 일들은 신학의 출발점으로 삼았다. 경건주의는 개인의 경험을 기초로 출발하였고 또한 그것을 신앙적인 지식이나 식견에 대하여 기본적 사항이 되는 것으로 간주하였다. 경건주의의 발전에 할레대학이 큰 역할을 감당했다. 할레에서의 신학활동은 실제적이고 영감적인 목표를 이루기 위한 목적의 성경 연구가 그 주종을 이루고 있다. 성경 구절에 삼중적으로 개념이 부여되었다. 상대적으로 교의학 연구의 중요성은 줄어들게 되었다.

스패너를 위시한 보수적 경건주의는 나중에 급진적 경건주의로 이어졌다. 천년왕국론을 주장한 요한 빌헬름 피터슨(Johann Wilhelm Petersen), '비 종파적 교회와 이교의 역사'를 저술한 고트프리드 아놀드(Gottfried Arnold), 속죄에 관한 정통교리를 비판한 요한콘라드 디펠(Johann Konrad Dippel)등이 급진주의적 경건주의에 속한다. 급진주의적 경건주의와는 달리 니콜라우스 폰 진센도르프 백작(Count Nikolaus Von Zinzendorf)에 의하여 설립된 '보헤미안 형제단'은 영구적인 단체로 발전해 나갔다.

이들은 교회를 호의적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진센돌프는 '십자가에 대한 묵상을 통하여 성취되는 그리스도와의 교제의 감정'이 신학의 중심이었다. 하나님에 관한 지식은 오로지 십자가에 달리신 이로부터만 오는 것이며 그 외의 모든 것은 이교도적 사색에 불과하다. 신앙의 핵심에 '그리스도의 대속적 수난과 그에 의한 죄로부터의 구속'이었다.

정통신학자에 의해 성경주의가 비판당했는데 그 내용은 "경건 주의자들에게 가해진 비판의 내용은 이들이 신앙교리적 특징을 무시하므로 말미암아 모든 이단사상을 위한 자양분이 이에서 공급되며 그 결과 순수한 교리를 혼탁하게 만든다는 점이었다.

경건주의 자와 정통주의적 견해간의 가장 치열했던 대결은 발렌틴 에른스터 뢰셔(Valentin Ernst Löscher)와 할레대학의 신학자인 요아킴 랑게 사이의 교리 논쟁이었다.

경건주의의 주관적이고 인간론 중심적인 태도는 초기의 스콜라 철학과 정통 루터파의 신학 가운데 표현되어 있는 그대로의 객관적인 실재의 개념을 분해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5) 19세기 이후의 신학 발전과 그 경향을 논하시오.

19세기 이후의 신학 발전과 그 경향에 대해서 언급하고자 한다. 우리는 이를 위해 프리드리히 슈라이어마허(Fridelich Schleiermacher), 헤겔과 사변철학, 복구신학, 중재신학, 엘랑겐학파, 키에르케고르, 리츨과 그의 제자들, 19세기의 영국신학, 19세기의 로마카톨릭 신학, 19세기의 부흥운동을 간략하게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그리고 20세기의, 하르낙, 캘러, 빌링, 종교사학파, 변증신학, 폴 틸리히, 루돌프 불트만 등에 대해서 간략하게 살펴봐야 하겠다.

슐라이어 막허

프리드리히 슐라이어 막허(Friedrich Schleiermacher)가 신학사에 남긴 공백 가운데 하나는 그가 종교의 독특성을 인간 영혼의 기능으로 설명하려고 시도했다는 점이다.

종교란 지적, 도덕적 요소들로 구성되는 것이 아니라 영적 생활에서의 한 독립적인 영역과 관계된 것이라고 했다. 그래서 종교란 우주에 대한 직관이라고 했다. 슐라이어 막허의 '종교론'에 보면 범신론적인 경향이 있다. 그의 관점은 일원론적인 것으로서 하나님에 대한 적대적인 마귀. 악령 등에 대해 인정하지 않았다. 슐라이막허의 사상은 성경과 일치하지 않는다. 예를 들어 '죄'란 하나님의 율법을 범한 것이 아니라 영에 반대되는 육이라고 했고, 구원이란 보다 높은 신 의식에로의 변화를 묘사했고, 그리스도는 인간성이 향상된 자일뿐이며, 그리스도의 죽음, 부활등 복음을 재 해석했다. 그는 삼위 일체론을 부정했고 구약의 정경성을 부정했다. 그는 성경의 권위는 믿음에 대한 기초로서의 구실을 못한다고 했다.

이러한 슐라이어막허의 이론은 광범위하게 확산되어갔고 오늘날까지 영향을 미치고 있다.

헤겔철학.

빌헬름 프리드리히 헤겔(Geortg Wilhelm Friedrich Hegel)은 독일 관렴론의 가장 영향력 있는 철학자였다.

헤겔은 슐라이막허와 달리 종교는 인간의 사상이나 관념의 형태로 나타난다고 했다. 헤겔에 의하면 관념적 실재란 플라톤의 정적인 이데아의 세계를 말하는 것이 아니고 공간적 실제와 역사적인 진보를 아울러 포함하고 있는 것을 의미한다고 했다. 헤겔의 변증법은 교회사와 일반사의 저술에 영향을 주었다.

복구신학

1830년대와 40년대에는 사회적으로 급격한 변화의 시기였다. 사회주의, 유물주의, 산업주의 등이 이때 나타났다. 이 시기에 두 가지 현상이 일어났는데 하나는 초기 전통으로 돌아가서 '교회교리'를 지켜야 한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자유신학'의 태도였다.

19세기초의 대각성 운동은 복구신학운동으로 분류될 수 있다.

이 시기에 반복신학자의 대변자로 이른스트 빌헬름헹스텐베르크(Ernst Wilhelm Hengstenberg)와 프리드리히 아돌프 필립피(Friedrich Adolf philippi)등이 있었다.

반복신학은 교회 생활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으며 초기의 전통을 활기 있고 살아있는 것으로 만들려는 그들의 노력은 당시의 교회와 신학 양자 모두에게 유익한 것이었다. 헹스텐 베르크는 교회생활 가운데서 구약성경을 그 본래의 위치로 복귀시키기 위하여 노력을 했다. 그 외 덴마크의 그룬트비히 운동 등이 복구신학에 속한다고 하겠다.

중재신학 - 슐라이어막허와 더불어 시작된 전통은 중재신학으로 일컬어지는 경향을 띠고 계속 이어져 갔다. 이 신학자들은 그리스도의 신성은 인성이 점진적으로 발전하여 성부와 연합을 이루었다고 했다.

이들은 그리스도의 독립적 신성을 부인한 것이다. 엘랑겐학파-아돌프하르네스(Adolf Harles)가 세운 학파로서 루터 연구의 결과에 기초하고 있다.

엘랑겐 학파는 초기의 전통에 견고하게 기반을 둔 보수적인 입장을 취하였다. 이들은 콘코드 신조 신학을 모든 신학적 발전의 푯대라고 했다.

키에르 키로르

죄렌 키에르케고르(SØren Kierkegaard)는 낭만주의와 헤겔철학등은 인생의 참으로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 언급하지 않았다면서 비판하였다.

키에르케고르는 인생의 태도에 대해 심미적 단계, 윤리적 단계, 종교적 단계로 나누었다.

리츨과 그의 제자들

자유주의 신학자들은 신학에 역사 비평적 방법을 적용했다. 자유주의 신학자들 중에 독특한 신학을 한자는 알브레히트 리츨이었다. 리츨에게 있어서 윤리적 측면에서의 생각은 결정적으로 중요하다. 아돌프 폰 하르낙은 리츨의 추종자들 가운데 한 사람이다.

19세기의 영국신학

19세기동안 영국신학에 영향을 준 것은 옥스퍼더 운동, 철학고유의 전통, 점증하는 역사비평등 세 가지이다.

옥스퍼더 운동을 통해 이들은 '자유주의'적 의회정치를 신랄하게 비판하였다. 성직자의 직임이 사도적 계승임을 말하였고 교회와 성례도 로마교회와 일치하게 설명하였다. 이 운동은 근대영국 교회 생활과 신학에 결정적인 영향력을 끼쳤다.

콜릿지는 영국신학에 큰 영향을 미쳤다. 그는 자연신론에 반대하는 한편, 신학과 철학의 종합을 이루어 내었다. 콜릿지는 성경에 대한 역사적 비평을 영국신학에 도입시켰다. 그는 성경을 보통의 책과 같이 연구할 것을 권장하였다.

프레데릭 데니슨 모리스(Frederick Denison Maurice)는 영국신학에 대한 플라톤 철학화의 작업을 계속해 나갔다.

고어의 영향을 받아서 영국 고교회파의 신학적 경향은 새롭고 보다 근대적인 노선을 따라 발전해 나갔으며, 고어는 자유주의적 고교회파로 불려진 이 분파의 지도자가 되었다.

19세기의 로마 카톨릭 신학

19세기의 여명과 함께 교회와 신학에서의 새로운 관심사에 눈이 뜨이게 되었다. 튀빙겐 학파의 신학자들이 로마 신학의 변화에 관여되었다. 19세기 동안에 전통주의, 존재론이 서로 대조적으로 나타났으며 교회는 이 둘 다를 배척하였다.

이성과 계시에 관하여 신 스콜라주의가 나타났다. 교회와 근대주의와의 싸움이 있었다. 성경에 대한 비평이 근본적으로 배격되었음에도 성경에 대한 과학적인 접근 방식만큼은 허용되었다.

트렌트 회의 이후의 신학에서 전통은 성경과 대등한 계시의 근원으로, 그리고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사도적 증거와는 다르지만 그에 대하여 보완적인 것으로 이해되었다.

19세기의 부흥운동

19세기의 후반기 동안에는 광범위한 부흥운동이 앵글로 색슨계 국가들과 스칸디나비아 제국 안에서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스웨덴의 샤르타우 운동, 노르웨이의 하우거 운동, 독일의 부흥운동, 루터란 부흥운동 등을 들 수 있다.

19세기 부흥운동의 또 다른 지류는 영국 감리교의 영향력 하에서 발전하였고, 또한 이 교파 출신의 사람들에 의하여 지지되었다.

19세기 미국에서의 부흥운동은 1734년 당시의 뛰어난 신학자이면서 설교가였던 죠나단 에드워드의 지도하에 시작된 "대 각성운동"으로부터 출발했다.

19세기 부흥 운동의 지도자들 가운데는 찰스 그랜디슨 피니, 드와이트 라이먼 무디(Dwight Lyman Moody,1899년 사망)가 있었다.

정력적인 침례교 설교가 찰스 해든 스펄젼이 있다. 19세기 중엽에 북유럽에 처음으로 침례교회가 생겼다.

20세기초의 신학과 오늘날의 경향

아돌프 폰 하르낙(Adolf von Harnack, 1930년 사망)은 교의사를 가장 중요시하였던 교회사가였다. 하르낙이 가진 기독교의 개념 속에 변증론에 대한 강한 관심이 드러나 있다.

1892년 마틴 켈러(Martin Kähler)는 '소위 역사적 예수와 초역사상의 성경적인 예수'를 저술했다. 그는 자유주의 신학자들이 역사적 예수의 상을 그려내고자 하는 시도들에 대하여 비판적이었다. 복음서들의 저술 목적은 한 인물에 관하여 학문적인 기술을 공여하는데 있었던 것이 아니라 교회를 설립하고 믿음을 창조해 내는 등의 선교를 촉진시키는 데 있었다.

켈러의 저서는 '양식비평', 칼 바르트와 그의 제자들의 '케리그마 신학'의 기본 사상에 기틀을 마련해 주었다.

종교사학파(The History of Religions)

요하네스 바이스(Johannes Weiss)는 순전히 성서해석학적인 방법을 통하여, 하나님의 왕국에 관한 예수의 가르침은 이미 임박한 현 시대의 종말에 이르러 하나의 현실로 나타나게 되어 있는, 종말론적인 하나님의 통치를 마음속에 그린 것이라고 했다.

이것은 자유주의 학파(리츨등)에 대한 중대한 도전이었다. 이들은 초기 기독교에서의 동방 적이고 후기 유대교적인 요소들을 지적해 냈다. 종교의 역사적 배경에 대한 관심이 이때부터 일기 시작했으며, 기독교는 그것이 부분적으로는 고대 동방의 종교로부터 그리고 또 한편으로는 헬라화된 유대교의 종교 역사로부터 초래된 발전 가운데서 양자를 이어 주는 연결 고리로 간주되기에 이르렀다. 종교 사학파는 기독교의 독특성을 밝혀주는 것으로서 신학사에 공헌하였다.

변증신학(Dialectical Theology)

1차 세계 대전이 끝난 직후인 1919년에 칼 바르트(Karl Barth)는 로마서 주석을 출간하였다. 1922년에 재판이 나왔는데 이 일을 계기로 변증 신학이라는 학파가 형성되었다. 바르트와 함께 에두아르트 투르나이젠(Eduard Thurne ysem), 에밀 브룬너(Emil Brunner), 프리드리히 고르가르텐(Friedrich Gorgarten)등이 일하였다. 하지만 이들이 나중에 각자의 길을 갔음으로 변증신학을 어떤 단일화된 실체로 보기는 어렵다.

변증신학은 제 1차 세계대전의 종전에 뒤따른 문화적 위기가 초래한 여러 결과들 가운데 하나로서, 이 신학 속에는 무엇보다도 종교 역사학파의 신학에 대한 반격이 포함되어 있었다.

신학사(History of Theology)의 저자인 벵트 헤그룬트(Bengt Hägglund)는 여기에서(p. 557)에서 칼 바르트를 개혁주의 신학자로 분류하고 있다. 그러나 그는 결코 개혁주의자로 분류해서는 안된다고 본다

폴 틸리히(Paul Tillich)

폴 틸리히는 그의 영향력을 미국에서 발휘했다. 그가 제기한 중요한 문제들은 신학과 철학, 계시와 경험론적 실재, 그리고 신학과 문화사이 등의 관계에 관한 것이었다. 틸리히의 체계는 일종의 존재론에 기초를 둔 것이며, 이 존재론은 인간들이 그들의 하나님과 소원 관계로 인하여 제기하는 여러 의문에 대하여 절대적인 해답을 제공해 주는 것으로 생각되고 있다.

루돌프 불트만:케리그마와 역사에 관한 논쟁

불트만은 1941년에 '신약성경과 신화'라는 소책자를 발간하였다. 이 속에서 그는 신약 성서적인 세계관과 또한 신약성경에 바탕을 둔 여러 개념들, 즉 마귀들과 초자연적인 행위들, 여러 형태의 기적들, 예수의 선재, 종말시대의 대격변 등에 관한 개념들은 현대인간의 실재개념과는 양립될 수 없는 것이라고 단언하였다. 이러한 것들을 그는 '신화적인'것이라 했다.

나아가 그는 신화란 외부의 사건이나 어떤 일들에 있어서의 사실을 묘사하기 위한 목적으로 만들어진 것이기보다는 인간의 실존에 관한 어떤 것을 말하기 위한 것이므로 신화를 비신화화 해야 한다고 했다. 불트만 신학은 실존신학이다.

불트만 신학에 대한 대안으로 제 2차세계대전 후에 오스카 쿨만(Oscar Cullmann)의 '그리스도와 시간'이라는 책자가 나왔다. 쿨만이 내린 결론은 불트만 학파에 의하여 권고된 성경의 해석과는 전적으로 상반되는 내용일 수밖에 없었다.

'신학' 카테고리의 다른 글

신학개론(Introduction to Theology)   (0) 2020.02.11
세계 교회사  (0) 2020.02.11
역사신학 총론  (0) 2020.02.11
신학서론  (0) 2020.01.31
성경의 줄거리 창조 타락 구속  (0) 2020.01.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