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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지래드-사도행전의 신학, 교회

하나님아들 2020. 1. 9. 21:10

조지래드-사도행전의 신학, 교회

 

 

http://media.woorich.net/신학강의/2007부산/부산071106a조지래드14신약신학-사도행전의신학.mp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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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1106a 부산강의 : 조지 래드 [신학신약]-사도행전의 신학
(강의:이근호 목사)

오늘은 23과 [사도행전의 신학]에서부터 24과 [부활], 25과 [종말의 케리그마], 26과 [초대교회] 전체 다를 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사도행전을 이렇게 마태, 마가, 누가복음을 대하다가 사도행전 다음에 뭐죠? 로마서죠. 로마서를 대할 때 성경해석을 문자적으로 해선 안 된다. 그리고 마태, 마가, 누가, 요한복음도 문자적으로 해석하면 안 된다. 이렇게 이야기하면 사도행전에 들어와 버리면 영적 해석 다 날아가 버리고 문자적 해석에 아주 열광을 해요. 사람들이.

CF에 이런 게 있지요. 두 선수가 아이스링크를 타다가 쫘악 하는데 마지막 가서 맨 땅에 그냥 하지 못한 거 있지요. 영적 해석을 그렇게 주장하면서 영적, 영적 해석 쭉 오다가 갑자기 사도행전에 와서 추락을 해버려요. 사도행전에 와서는 이거는 맨 땅으로 가버려요. 마태, 마가, 누가, 요한에서는 묵시적으로 해석해야 된다. 역사적으로 해선 안 된다. 이래 하다가 그만 사도행전에 와서는 맨 땅에서 역사적 해석이 전부인 양 그렇게 돼버립니다.

이 맨 땅에서 사도행전, 이 맨 땅이라 하세요. 마태, 마가, 누가, 요한은 아이스링크라면 사도행전은 맨 땅 같아서 특별히 어떤 다른 설명이 필요 없을 정도로 같은 역사적 사실이기 때문에 역사적 사실은 이건 그냥 모방하면 여기서 동질화가 되겠지요.

교회를 어떻게 할 것인가? 마태, 마가, 누가, 요한 다 때려치우는 거예요. 예를 들면 마태복음 20장입니까? 거기 보면, 땅에 있는 지도자를 지도자라 하지 마라. 그거 마태복음 해석 어떻게 하겠어요? 아하, 목사가 지도자가 아니구나. 하늘에 계신 예수님만 지도자구나. 이렇게 나오다가 아이스링크 타다가 갑자기 사도행전 쑥 들어가면 봐, 집사 있잖아. 사도 있잖아. 장로 세우자. 이래 된다 말이죠. 영적인 해석하다가 갑자기 맨 땅으로 확 내려가 버렸어요.

여기서 교회냐, 교회 아니냐를 여기서 소급해요. 사도행전에서 소급 다 내버립니다. 모방은 동질화가 되죠. 이 사도행전 하는 그대로 모방해 버리죠. 여기서 하는 체제, 여기서 하는 기구, 조직, 여기서 하는 주장하는 거 그 용어를 그대로 사용해서 여기서 유사, 유사품이라 하지요. 가짜 명품을 만들어내요.

일단 여기서 다 만들어놓고 그 다음에 사도행전 끝나고 뭐가 나옵니까? 로마서 나오지요. 로마서에서 하는 이야기가 이쪽의 역사적 이런 해석, 문자적 해석을 공격한다는 사실을 생각 안 하고, 이미 구축해 놓은 이 모방한 교회에다가 그냥 로마서만 흉내 내는 거예요. 흉내 내다가 이게 지금 역사적 자기들의 모방한 교회에 로마서가 별 도움 안 된다 하면 로마서도 갖다 버려버려요.

[목적을 이끄는 삶] 이게 로마서를 대체해요. 로마서 같은 건 필요 없어. 목적을 이끄는 삶, 행복한 가정 만들기 그게 대신해 버려요. 왜냐하면 이거 유지한다고, 사도행전을 따라했던 교회 유지한다고 로마서고 뭐고 요한복음이고 다 갖다 버려요.

이 사도행전을 비록 역사적 모습 띠더라도 이걸 뭐로 해석해야 되느냐 하면, 성령에 의해서 성령에 의한 해석이 돼야 됩니다. 이게 영적 해석돼야 돼요. 마태, 마가, 누가, 요한을 영적 해석하듯이 로마서 영적 해석 하듯이. 예를 들면 이런 겁니다.

요한복음에서 오병이어 떡을 줬다. 오병이어 떡을 뗄 때 사람들이 왔잖아요. 그러면 사도행전에 그들이 서로 자기 것으로 여기지 않고 떡을 뗐지요. 자, 사도행전에서 서로 떡을 떼며 한 가족처럼 형제를 나누었다는 사실과 요한복음 6장에 예수님께서 오병이어를 행했다 할 때 어느 것도 주도권을 갖고 있는지 해 봅시다.

예수님께서 오병이어를 한 것은 떡을 먹고 배부르면 안 된다. 그게 교회가 아니라는 거예요. 그거는. 떡을 먹고 배불러서 쫓아온 놈들은 전부다 어디 간다? 다시 유턴해서 지 자리고 돌아가고, 아버지께로 오지 아니하면 아무도 올 수 없는 폐쇄된, 도저히 하나님이 따로 선택한 자의 모임에 그들의 그런 인식 가지고는 개입을 참여를 못한다는 것을 알려주기 위해서 오병이어를 했다 이 말이죠.

그런데 사도행전에 보면 떡을 떼고 서로 나눠주니까 교회가 서로 구제하고 도와주면 그게 교회인 줄 알고 있어요. 이미 인식은 뭐냐 하면, 사도행전하고 유사한 행태로 움직이면 이미 이거는 뭐가 해도 교회다. 라고 다짐을 한 상태에서 그 다음에 사도행전을 들먹여서 자기 존재를 자꾸 확인하려고 자기 존재의 정당성을 나타내려 한다니까.

그러니 교회냐, 교회 아니냐를 사도행전 안에 뭐가 들어 있느냐 하면, 사도 바울이 들어 있잖아요. 베드로가 들어있고. 그러면 사도행전의 해석은 사도 바울이 설교한 내용이 사도행전 전체를 주도권을 쥐고 이렇게 활동한다. 이래 봐야 됩니다. 로마서, 고린도서, 갈라디아서 이런 내용이 사도행전에도 동일하게 적용되는 걸로 봐야 돼요.

사도행전에서 그게 역사적으로 되어 있으니까 그대로 모방하는 하나님이 인정해준 사도행전과 똑같은 교회가 되리라. 하는 그 안일함. 그 안일함을 지금 저희가 공부하고 있습니다. 사도행전대로 해버리면 사도행전을 역사적 해석을 해버리면 거기에 뭐가 있느냐 하면, 새로운 종교단체가 등장하죠.

그러면 일반인들을 사도행전의 종교단체로 일단 가입시키고, 이 종교단체를 뭐로 만드느냐? 영적인 단체로 만들면 이것이 하나님이 원하는 교회가 된다. 이렇게 일반인을 종교단체로 일단 모아놨다가, 종교단체 형식이라 하는 것은, 서로 떡을 떼며 성령받기 위해서 충만케 위해서 모여 기도한다든지 그러면 선교 한다든지 그런 거 아닙니까? 종교 활동하지요. 일반인들은 종교 활동을 하고, 종교 활동을 영적으로 아마 하나님께서 간주할 것이라는 그러한 안일함이 사도행전을 보는 사람에게 누구나 있을 수 있어요.

그러나 방향을 보세요. 일반인을 종교단체로 하려면 뭐가 필요하냐 하면, 종교적 특수 용어, 특수 개념을 사용하면 되는 겁니다. 종교용어죠. 그러니 기도를 하지 않는 일반인에게 기도를 하라 하면, 이게 종교용어가 돼요.

교회라는 건 종교용어고 전도, 선교 종교용어죠. 교제하는 것도 종교용어고, 교회도 종교용어고. 부활, 그리고 십자가, 예수 전부다 이게 종교용어가 되는 겁니다. 그러니까 일반인들은 뭐냐 하면, 지금까지 자기가 알고 있던 용어에다 더하기, 플러스 뭐하느냐 하면, 종교단체에서 요구하는 종교 특수용어들, 이거는 특수한 종교용어들. 종교용어들을 추가해서 다 갖고 있어요. 일반용어에다가.

시장바닥에서 부활, 전도, 십자가 이야기 안 하잖아요. 시장바닥에서 쓰는 것은 뭐, 이거 깎아주세요. 그런 용어한단 말이죠. 그런데 기도하면서 하나님, 좀 깎아주세요. 이런 소리 안 하잖아요. 하나님이여, 주의 영광을 위해서. 이런 용어 한단 말이에요. 주의 영광은 특수 용어 아닙니까? 일반 시장바닥에서 찜질방에서 안 나오는 용어 아닙니까?

일반인이 특수용어를 사용해 버리면 일반인들은 자기가 쓰는 용어 더하기 특수용어를 사용하는 겁니다. 당회로부터 어린아이까지 축복해주옵소서. 축복도 마찬가지에요. 축복도 일반 용어잖아요. 그렇게 되면 그것이 하나님 보시기에 영적인 단체로 인정받는다. 이 수법을 사용할 수 있는 거예요. 사도행전 역사적 해석을 가미해버리면.

그래서 목사들은 뭐냐? 일반인들이 사용하던 종교단체, 종교용어를 사용하게 되면, 그것이 하나의 우리의 용어를 이해하는 저거들끼리의 특수집단화가 되면서 그것을 교회라고 쉽게 수용하는 그런 오류가 발생돼요. 그런 오류가.

지금 제 말에 무슨 뜻인지 모르는 사람은 바로 요한복음 6장 아까 예를 들어 보세요. 요한복음 6장에서 예수님께서 떡을 줬잖아요. 떡은 종교용어가 아닙니다. 내 살과 내 피를 마시라. 이건 종교용어가 아니에요. 종교용어가 아니니까 일반 용어를 쓰는 사람에게 영적용어가 바로 와버리니까 그들은 이해하지 못하니까 도로 자기 집으로 다 돌아가 버렸어. 예. 어렵도다. 이 말이 어렵도다.

우리가 하나님께 걸칠 수 있는 어떤 다른 용어를 한 단계 더 거쳐서 달라 이 말이에요. 그들이 요구하는 것은. 그들이 납득이 되는 용어 하나 거쳐서 그 납득되는 용어를 통해서 그걸 영적으로 더 다시 올라갈 수 있는 그런 바탕을 만들어 달라 이래 하는 거예요.

주님 쪽에서는 그 짓을 안 합니다. 왜 안 하느냐 하면, 너희들이 접근한다고 해서 구원되는 것이 아니고, 위쪽에서 접근해버려요. 그러니까 영이 종교단체라는 게 없이 영이 바로 일반용어로 와버려요. 실상으로 와버린다고.

박윤진 씨 글 보세요. 종교용어 있던가요? 거의 없지요. 일상을 박살내는 내용 아닙니까? 그렇지요. 여러분, 박윤진 씨 글을 딱 보게 되면 일반 목사 설교하고 뭔가 뭔지 모르지만 차이 나죠. 그 차이가 뭐겠어요? 박윤진 씨 글, 이걸 오늘 김대식 씨 글. 뭔가 설교는 아닌데 저런 식으로 설교하면 교인 한 명도 안 나올 건데. 박윤진 씨 글해서 설교해서 한 명도 나오겠어요? 한 명도 안 나와요.

아니지만 그것이 십자가를 표현하잖아요. 그럼 일반 목사하고 다르잖아요. 글이. 글 전체 뉘앙스가 스타일이. 뭐냐 하면, 중간 종교용어를 빼버린 거예요. 빼버리고 영적으로 일반과 같이 통합을 시켜놓은 겁니다. 영적으로 설명해 버린 겁니다. 그러니까 뭔가 달라도 달라 보이는 거예요.

일반 목사들이 설교하는 거, 기존 목사들이 설교하는 거 하고 다르잖아요. 일반 목사의 설교는 설교에 나오는 용어들 몇 가지 알면 마치 내가 거듭난 것처럼 착각하게 만들죠. 축복이란 용어를 알고, 부활 용어를 알면 거듭난 거로 하잖아요. 그런데 박윤진 씨 글은 부활이고 축복이고 다 때려 부셔버리죠.

사람들이 신을 향할 때 자기가 현재 쓰는 거와 탈피한 특수한 용어를 따로 설정해서 그 용어까지 앎으로 말미암아 마치 거듭난 사람인 양 행세한다는 것을 우리 주님이 아십니다. 그런데 거기에다가 사도행전에 갑자기 이렇게 마태, 마가, 누가, 요한 하다가 사도행전의 역사적 용어들이 튀어나오니까 역사적 사실 하니까 역사적 사실이 나오는 이러한 형태를 그대로 모방하면 그것이 참다운 교회의 표적인 양 그렇게 행세할 여지를 줘버린 겁니다.

사실은 이러한 해석은 바로 무슨 해석이냐? 육적인 해석입니다. 그런데 제가 보기에는 사도행전 나온 책 중에서 영적인 책을 저는 본 적이 없습니다. 영적으로 해석한 사도행전 책을 본 적이 없어요. 이것도 마찬가지에요. 신학교수들이 기존 교회한테 알랑방귀 뀌려고 아부하려고, 로마서도 영적으로 해석해 놓고 사도행전에 와서는 그만 입이 쑥 들어가 버려요.

사도행전 초대교회에서 이렇게 했기 때문에 우리도 이렇게 하면 교회 됩니다. 이런 것은 마태, 마가, 누가, 요한복음, 로마서 사상이 도대체 용납이 안 돼요. 사도행전 자체도 용납을 안 해 줍니다.

육과 영의 만남은 깨지고 깨는 관계에요. 근데 사도행전에 보면, 사도행전을 육적으로 해석해버리면 깨질 것은 없고 추가할 것만 있죠. 제 말 이해하시겠습니까? 아하, 교회 이런 모습으로 하면 되구나. 추가할 것만 있지, 구태여 깨질 게 뭐 있어요. 추가만 하면 되는데.

그러나 로마서나 갈라디아서 이런데 보면 영이 계속 뭘 공격합니까? 육을 공격하잖아요. 육을 공격한다고. 영이 육을 공격하잖아요. 죽어라. 세상의 끝 날에 완전히 구경거리다. 쓰레기 같은 취급 밖에 못 받는다. 공격한단 말이죠.

사도행전엔 그런 게 없습니까? 있습니다. 사도행전에 그런 게 나오는데 그게 눈에 안 띠는 거예요. 눈에 안 띠고 뭐냐 하면, 역사적으로 교회를 어떻게 만들면 교횔까? 지금 온통 관심사가 일반인들을 포섭해서 교회 만들기 위해서 일반인들에게 약간 추가적인 다른 용어들, 특수용어들을 익혀서 그걸 습관화시켜서 당신은 교회 맞습니다. 교회 오니까 거듭난, 이래서 우리는 교횝니다. 라고 이거 하는데 급급해서 진짜 사도행전에서 영적으로 육을 치는 그런 내용이 처음부터 끝까지 다 깔려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걸 끄집어낼 수가 없어. 끄집어내질 않습니다.

사도행전에 나오는 사도행전을 다루었던 모든 주석가나 신학자도 마찬가지 이 사람도 마찬가지고 사도행전을 영적으로 해석을 안 해요. 역사적으로 해석을 해버립니다. 잘 나가다가 마태, 마가, 누가, 요한 잘 나가다가 쑥 빠져버려요. 그리고 다시 끝나고 다음 로마서, 고린도전서 하는데 이런 경우 뭐냐 하면, 기존의 우리가 생각하는 교회 손대지 마라. 이거는 맞다는 거예요. 거기다가 내용 채우기. 이런 것을 역사적으로 교회 되었으니까 간판 걸었으니까 거기에다가 마태, 갈라디아서 그거 채우면 이제 교회 된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진짜 영적으로 해석해 버리면, 기존의 교회라는 그 교회를 로마서가 갈라디아서가 폭발해버리는 거예요. 작살내버려요. 특히 고린도전서 같은 경우에. 이런 인간들이 인식하는 교회를 아주 해체시켜버려요. 

사도행전의 신학에서 빨리 교회, 현재 우리의 교회가 사도행전의 교회 맞나? 라는 것을 견주어 볼 그런 선입관부터 우린 버려야 돼요. 사도행전의 주제는 예수님이 주 되심이지 교회 만들기가 아닙니다. 물론 이 책에도 그런 뉘앙스는 아니지만 이 책에 보면 자기도 많이 공부했기 때문에 좋은 말 많이 나와요.

그 중에 뭐냐 하면, 그 중에 몇 가지되는데, 내가 이거 다 읽어보니 몇 가지되는데 그 중에 뭐냐? 교회는 여러 교회라는 것은 없다. 오직 교회는 유일하게 하나 교회 밖에 없다. 에클레시아는 하나 밖에 없다. 그래 놓고 그 근거를 제시 안 해요. 왜? 몰라요.

고린도교회 따로 있고, 다른 고린도 교회 말고 따로 없다. 전부다 한 교회 밖에 없다. 무슨 근거에서 그렇게 주장하느냐? 근거를 못 밝혀요. 만약에 그 근거를 밝히게 되면 이 래드라는 신학자는 기존 교회한테 욕 얻어먹습니다. 왜냐하면 교회는 경쟁 없이는 크질 않아요. 만약에 전체가 하나의 교회라면 미쳤다고 내가 큰 교회할 이유가 뭐가 있습니까? 옆에 수퍼나 이 수퍼나 같은 집이라 하는데 뭐하려고 손님 더 받으려고 합니까? 대충 하다가 그냥 살다 죽지.

내 교회만이 교회라고 해줘야 그게 경쟁이 된다니까. 그게 차별화 되고요. 지금 십자가마을 제일 초점 맞춰서 지금 칼 갈고, 뾰족하니 죽창 갈아서 공격하는 게 뭡니까? 십자가마을 공격하는 게. 너거들만 복음 알고, 너거들만 주의 종이고, 너거들만 교회냐? 이거 아닙니까. 그렇지요. 그렇잖아요.

십자가마을에서 이야기하는 것이 교회 이야기하지 않고 예수님 이야기했는데 그렇잖아요. 복음 이야기했는데 그들의 관심사가 복음에 관심 없고, 어디 관심 있다? 저놈의 교회가 진짜 교횐가, 우리 쪽이 교회가. 출발점이 교회에요. 출발점이 교회로 삼았다는 것은 저거들은 결국 육적인 것이 약간 늘어나면 그게 뭐 된다? 교회 된다는 말입니다. 이게. 인간의 육이,  인간의 종교적인 육성이 약간만 늘었다 싶으면 그게 전부다 교회 돼요.

왜냐하면 그 관심사 자체에서 탈출을 못하니까. 그 교회 누구 속해있다? 본인들이 속해 있어요. 그러니까 니 교회가 진짜가, 우리 교회가 진짜가? 이 말은 뭐냐 하면, 내가 진짜냐 이 말이거든요. 아무리 복음, 영적, 육적, 십자가 하지만 자기 부인이 안 돼. 자기 부인이 안 되는 거예요. 자기 육적인 거기서 한 발자국도 벗어나지 못하는 거예요.

그걸 사도행전을 보면서 오히려 정당화시키는 게 문젭니다. 사도행전이 어떻게 쓰여 있기에. 사도행전에 그러한 육적인 해석을 도모하는 곳이 아니잖아요. 그걸 옹호해 주는 게 아닌데. 도대체 사도행전을 어떤 안목으로 보기에 그게 되는가? 그러니까 사도행전 보니까 서로 모이고, 떡을 떼고, 성령세례 받고, 충만 받으면 그게 하나님께서 교회라고 해주더라 하는 거기에 그들은 흉내를 낸 겁니다. 이거는 언제든지 할 수 있는. 그래놓고 사도행전을 뭐로 해석? 역사적 해석을 하면 된다는 거예요. 끝이라는 거예요. 역사적 해석이 교회역사라는 겁니다.

이 래드한테 딱 단도직입적으로 이야기해요. ‘역사’가 의미가 뭔데? 답 못해요. 생각해 보세요. 역사의 의미를 알려면 무슨 의미를 해야 됩니까? 시간개념을 알아야 되거든요. 이 시간이 뭔지 아나? 몰라요. 그런 거 관심 없어요. 여러분, 시간이라 하는 것은 시간이나 역사라 하는 것은 뭐가 만들어지냐 하면, 내 몸이 만들어내요.

다시 해 봅시다. 역사라 하는 것은 그전에 뭐가 나왔다? 이야기해보세요. 역사라 하는 것은 깨보면 뭡니까? 시간이죠. 그런데 이 시간이 놀라운 것은 사람마다 다 달라요. 사람마다 시간이 다 다르지요. 시간과 공간은 누가 만들어요? 내 몸이 만들지요. 이해 안 되십니까?

각각 똑같은 공간에서 똑같은 다방에서 똑같은 환경에 있더라도 다방에 있는 1번 손님, 2번 테이블, 3번 테이블 있어도 사람들이 거기서 느끼는 그 상상하는 시간이 같아요, 달라요? 다 다르죠. 다 천태만태 다 다르죠. 그러면 각자의 다 다르다는 말은, 각자의 역사관이 다 같다는 말입니까, 다르다는 말입니까? 다 다르죠.

그러니까 역사라 하는 것은 뭘 정당화하느냐 하면, 내 존재를 정당화하는 거예요. 내 여기 있음을 정당화하는 거예요. 그럼 만약에 교회가 A라는 교회 있고, B라는 교회 있다. 각자 역사를 만들어내요. 그 역사가 똑같은 사건이 일어나도 A라는 교회는 자기 유리한 쪽으로 해석하겠지요. B라는 교회도 자기 유리한 쪽으로. 유리하다는 말은 뭔 뜻입니까? 역시 우리 교회는 무극, 영원토록 있어야 돼. 그거 하잖아요. 촛대 옮기면 안 된다. 라는 이 말 아닙니까?

지금 사도행전을 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역사로 해석해 버리면 남는 것은 뭐냐? 역시 우리 교회는 최고야. 이거만 달랑 남아요. 그럼 뭐가 안 남아요? 역사를 초월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부활이 안 나오지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부활 이야기하는 척하면서 끝에 보면 결국 뭡니까? 역시 우리 교회는 부흥되어야 돼. 이것만 남아요.

그 말은 무슨 뜻이냐 하면, 역시 부흥된 교회에 나오는 나는, 우리 가정을 행복해야 돼. 돈, 한 달 수입이 더 늘어나야 돼. 좀 더 나가면, 내 자식은 공부 잘해야 돼. 거기다 그걸 또 확대시키면 우리나라는 석유 나와야 돼. 올랐으니까. 우리나라 축구는 항상 이겨야 돼. 이게 사도행전을 아무리 큐티하고 아무리 연구해도 결국 나오는 것은 뭐냐? 신이시여, 나를 위한 신이 되기를 원하는 겁니다.

그래서 주일날 아침에 그런 예화를 들었습니다만 여러분, 배트맨 알지요. 배트맨이 건물 옥상에 있습니다. 건물 옥상에 조명이 있어서 조명발 배트맨 받아버리면 이 검은 창공에 뭐가 있어요? 배트맨 박쥐가 영상이 뜨지요. 이게 바로 신이라는 겁니다.

그러면 이 조명발 꺼버리면 배트맨 축소되면 신도 날아가 버리죠. 문제는 각 옥상마다 이런 배트맨이 자기만이 아니고, 한둘이 아니고 다 뜬다는 거예요. 이게 교회마다. 신이라 하는 것은 누가 만드느냐 하면, 내가 내 몸이 만드는 거예요. 신이라는 게.

그런데 개 같은 이방인들이 신을 섬기는데 전부 이런 식으로 섬기는 거예요. 그게 구약에서는 뭐라고 합니까? 그게 우상이라는 거예요. 우상을 분석해 보면, 누굴 위한 신이다? 나를 위한 신이에요. 나를 위한 신은 전부다 우상이에요. 나를 위한 신은, 나를 위한 하나님은. 전능하시고고 무슨 용어를 갖다 붙이든 나를 위한 신, 내 민족을 위한 신, 내 가족을 위한 신, 내 교회를 위한 신, 내 교단과 내 종교를 위한 신 전부다 우상이에요.

사도행전의 주제는 그것을 완전히 박살내는 게 주젭니다. 그래야 그게 영적인 해석이 돼요. 다시 이야기합니다. 역사적 해석을 해버리면, 결국은 중심이 누구한테 간다? 내 몸을 위한 내 몸이 잘되기 위한 그러한 성경말씀이 돼버려요. 이거는 엉터리 해석입니다.

십자가를 지고 십자가를 안다는 것은 자기를 부인하라 하는데 천하 자식이나 아내나 남편이나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합당치 않다 했는데, 그 말씀을 할 때는 마태복음에 나올 때는 영적으로 해석하다가 갑자기 사도행전에 쑥 꺼져 가서는 사도행전 가서는 떡을 떼며 서로 나누었으니까 우리 교회는 참된 교회입니다. 이런 식으로 참된 교회를 흉내 내고 있어요. 바자회 열면 참된 교횝니까, 선교사 보내면 참된 교회에요? 이건 전부다 역사적 해석 한 거예요. 사도행전 해석을 하면 영적인 해석을 해야 됩니다.

그러면 영적인 해석을 어떻게 하는가? 이 책에서 영적인 해석의 이 사람 나름대로의 근거가 뭐냐? 부활이었습니다. 24장 [부활]로 들어가 봅시다. 이 부활에 대해서. 조지 엘든 래드가 부활을 이야기할 때 뭔가 빠졌다는 느낌 안 듭니까? 부활을 이야기하면서 뭐가 빠졌어요? 십자가가 빠지지요. 이 사람 부활을 하면서 내가 부활 장을 쭉 읽어 보면서 유심히 봤어요. 이 사람이 사도 바울이

다시 이야기합시다. 사도행전에 사도 바울 나오지요. 사도 바울이 하는 이야기가 고린도전서에 나오지요. 그러면 고린도전서가 역사적 흐름을 봤을 때 사도행전 안에 들어있다고 봐도 괜찮지요. 그렇지요. 왜냐하면 사도행전에는 사도 바울의 활동한 게 나오니까. 그 사도행전엔 안 나오지만 그걸 세분화시키면, 그러니까 사도행전을 세분화시키면 여기서 뭐가 나오겠어요? 로마서 나오고, 갈라디아서 나오고, 고린도전후서 나오고, 베드로전후서 다 나오겠지요. 사도행전 안에 한 바구니에 달걀처럼 전부다 담겨있다고 볼 수 있지 않습니까?

그러면 고린도전서 1장에서 사도 바울이 하는 말이 뭡니까? 구원은 십자가만이 구원의 능력이라고 되어 있지요. 이게 지금 어디 있다? 사도행전에 들어있다고 봐야 될 것 아닙니까? 십자가만이 구원의 능력 아닙니까? 십자가만이 구원의 능력인데 이것을 이 사람은 사도행전을 보면서 십자가가 안 나오고 뭐가 나왔어요? 방금 한 뭐가 나옵니까? 부활이 나왔잖아요. 부활이 나왔다는 걸 증명하기 위해서 이 사람은 지금 사도행전의 부활을 다루면서도 고린도전서 15장에 나오는 부활에 나온 주제들을 채용하고 있지 않습니까?  

내가 이걸 보면서 상당히 기대했어요. 자, 이 사람이 구원의 능력은 부활이 아니고, 십자가에 있다고요. 구원의 능력이 부활에 있지 않고 십자가에 있다는 그 차이점이 뭘까요? 오늘 강의 첫 번째 제일 중요한 거 나옵니다. 구원의 능력이 부활에 있지 않고 어디 있다? 십자가에 있다. 라 하는 것과 부활에 있다는 것과 차이점이 뭐냐 이 말이죠.

구원의 능력이 1번, 십자가에 있다. 2번, 부활에 있다. 나는 부활에 있다고 본다. 나는 십자가에 있다고 본다. 그 둘의 차이점이 뭘까요? 자, 우선 부활부터 설명해야 됩니다. 이 사람 식으로 설명합니다. 이 사람이 볼 때에 부활이 있다는 거예요. 예수님이 죽었다가 부활했다는 사실은 현재 우리는 지금 살아있지요. 살아 있는 상태에서 추가적으로 제가 아까 강의 제일 처음 이야기한 거예요. 추가적으로 사람은 죽어도 다시 살 수 있구나. 예. 사람은 죽어도 다시 살 수 있다.

그 증거가 뭐냐? 예수님은 죽어도 다시 살았는데 그것은 예수님이 부활의 첫 열매고, 그 다음 열매는 그 다음 차례는 누구라고요? 우리가 그 다음 차례니까 우리는 가만있어도 무슨 지식 하나만 얻으면 돼요? 사람은 죽는 것이 절망이 아니고, 그것으로 낙담할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는 무엇이 기다린다? 부활이 기다린다. 따라서 추가적으로 부활이란 지식, 부활이란 그런 것을 소망, 더 추가하면 나에게 추가된 부활 지식이, 개념이 나를 구원할 수 있다는 것이 현재 나에게는 편하지요. 나에게는 수월하잖아요.

여기 지금 뭐고? 하늘보리죠. 이건 뭐고? 쌍화차란 말이죠. 자, 나는 쌍화잔데 하늘보리를 하나 더 추가적으로 잡사보세요. 구원됩니다. 이러면 얼마나 이게 추가만 하면 되니까 수월하잖아요. 그런데 십자가는 뭐예요? 방금 부활입니다. 십자가가 구원의 능력이 된다면, 거기에 뭐가 따라 옵니까? 내가 같이 죽어야 돼요. 왜? 갈라디아서 2장 20절에 뭡니까?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못 박혔나니 이제는” 그 다음에 여러분, 이야기해 보세요. 야, 그게 어렵다니까.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라니까 ‘산 것이 아니요’ 두 자로 하면 뭡니까? 나는 뭐다? 죽었다. 하나님이 나를 죽은 자로 간주한 자에게만 그것이 부활이고, 영생이 보장된다는 겁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어느 인간이 지가 죽기를 원하는 사람 누가 있습니까? 처자식 많은데. 아직 자기 벌여 논 사업이 있는데. 그 동안 살아 온 노력한 것이 얼마나 힘들게 살아왔는데 왜 이 자리에 죽어. 내 미쳤다고 죽어. 앞으로 더 잘 살아야지. 오래 살아야지. 오래, 오래. 병원에 호스 꽂고 오래 살아야지. 그래서 오래 살아서 내 손자, 외손자, 증손자 많이 봐야지. 나를 죽이다니 내 손 끝 하나 대봐라. 나는 대번 반항한다. 이게 인간의 타고난 육인데, 내가 산 것이 아니요, 나는 죽은 자로 이미 죽었다고 간주해야 된다. 하는 그 십자가를 어느 인간 좋아하겠습니까? 하늘보리 하나 더 마시라 이 말이죠. 그럼 구원받는다. 이걸 더 좋아하지.

교회 나오는 목적이 뭡니까? 교회 안 나오고 살만 하지만 교회 나옴으로 추가적으로 더 행운이 따라오면 손해 보는 장사 아니다 이 말이죠. 이득 보는 장사 아니냐 말이죠. 교회 온다는 노동의 대가를 얻으면 그 대가 있으면 보람 있잖아요. 자기 손해 보려고 손해 볼까봐서 교회 오지 않잖아요. 하나님을 알 때가 더 이득을 봐야 이득 본 그걸 노리고 교회 온다 말이죠. 사람들이. 사람들이 자기 행동에 있어서 손해 볼 짓은 안 하잖아요.

그러니까 교회 오기 전까지는 뭘 몰랐다? 부활을 몰랐는데 교회 오고 난 뒤에 소망 하나 더 건졌다. 무슨 소망? 죽어서도 다시 산다는 소망. 그래서 교회 와서 다닐 마음이 난다 이 말이에요.

그런데 그 이야기가 누구 이야기는 아니다? 사도 바울의 이야기는 아니다 말이죠. 그 이야기가. 사도 바울의 부활이란 말은 뭐냐 하면, 십자가를 본격적으로 적용시키는 그 힘을 부활이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쉽게 하면 이 말이죠. 못을 박는데 보통 사람 드라이버 가지고 하면 낑낑거리며 안 들어간다고. 힘들어 못을 꽉 조여 줘버리면 아무리 남자라도 안 들어간다고. 그땐 뭘 합니까? 그 드라이버를 기계를 도원하면 팽하고 돌죠. 팽하고 돌면 앞에 있는 뾰족한 그 드라이버가 빨리 돌면서 아무리 단단한 나사못도 다 뽑히지요. 그 팽하고 도는 게 뭐냐? 그게 부활의 힘이고. 그 뾰족한 게 뭡니까? 십자가에요.

그러니까 십자드라이버를 빨리 돌기 위해서 부활이 있는데, 이 사람들은 앞에 십자드라이버를 잘라 버린 거야. 십자드라이버는 나를 부인케 하기 때문에 이건 싫고, 앞에 팽~하고 도는 거만 하는 거예요. 그 뭉텅이 돌아봐야 무슨 소용 있습니까? 아무 소용없지. 

가슴을 파고들어야 돼요. 우리 육적인 죄를 파고들고, 죄를 파고들어야 되는데 이거는 소망 하나 건져가세요. 잘 오셨습니다. 죽어서 좋은데 천당 갑니다. 됐습니다. 돈 내시고 집에 가세요. 이런 식으로 하는 거예요. 그걸 어딜 근거해서? 놀랍게도 사도행전에 근거해서 하는 겁니다. 왜? 사도행전에 뭐만 교회다? 서로 떡 떼고 서로 형제여! 하면 교회인 줄 안단 말이죠. 이게 바로 육적인 해석 아닙니까? 성경을 해석할 때.

그렇지만 이 래드가 부활의 장에서 이야기한 것은 옳은 이야기가 많으니까 제가 부활에 대해서 전체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래드가 부활에 대해서 어떻게 봤느냐? 래드는 불트만, 보른캄이라는 그 제자들을 시비를 걸었어요. 뭐냐 하면, 지금 이 사람이 래드가 사도행전 하면서 왜 부활 장을 이렇게 길게 쓴 이유가 있어요. 사도행전을 뭐로 보느냐 하면, 사도행전을 실제적인 역사로 보고 싶어 하는 거예요.

그러면 역사로 보고 싶어 한다면, 그럼 사도행전의 실제적인 역사라면, 사도행전에 나오는 교회도 실제 한 교횝니까, 실제 한 교회 아닙니까? 실제로 있었던 교회지요. 실제로 있었던 교회라고 말해줘야 이거 약간 어렵습니다.

사도행전에 나오는 역사 속에 나오는 그 교회가 초대교회가 실제로 하나님 보시기에 진짜 교회라는 말을 해줘야 이 교회 그 뒤에 나오는 교회 1번이라면, 그 뒤에 교회 2번, 2001년도에 나오는 교회 3646번. 이것도 역사에 따라서 첫 번째 교회가 교회라면, 2007년도 11월 달에 교회도 뭐 된다? 교회된다. 이걸 잇고 싶어서. 역사적인 이걸 이어서 초대교회가 교회라면 지금의 교회도 교회 맞다는 것을 납득시키기 위해서 지금 이 작업에 나서는 겁니다.

아직 어려운 거 안 했어요. 이거 쉽지요. 그렇다면 초대교회가 교회 되게 했던 그 근거가 뭐냐 하면, 오순절 날 성령이 뭐 같이 왔습니까? 불 같이 왔지요. 성령이 불 같이 온 것도 초대교회가 역사적으로 합당하면 그럼 성령이 불 같이 온 것도 역사적으로 실제로 있었던 일이냐, 아니냐 이 말입니다. 그것도 있었던 일이죠. 그럼 성령이 온 것도 있었던 일이죠.

자, 보세요. 첫 번째 교회가 성령이 불 같이 내려서 첫 번째 교회가 됐다면 2007년도 11월 달 오늘날 있는 교회가 진짜 교회되려면 뭘 해야 돼요? 성령이 오게 되면 첫 번째 교회의 경우와 똑같은 법칙에 의해서 공식에 의해서 교회가 되겠지요. 

자, 그러면 지금 우리 교회, 성문교회 맞습니다. 하고 오는 사람들에게 확신을 하려면 여러분들이 뭘 받아야 됩니까? 성령을 받게 되면 초대교회가 확실한 교회인 것처럼 우리 성문교회도 확실한 교회입니다. 라는 것이 이게 설득력이 있지요. 사도행전에서.

그 다음에 성령이 확실히 되려면 성령을 누가 보내느냐? 래드 이야기에 의하면 부활, 승천하신 누가 보내요? 예수님이 보내죠. 그러면 역사적으로 확실한 교회가 되려면 성령이 오는 게 확실해야 되고, 성령이 오는 것이 확실하게 되면, 뭐가 (      ) 예수님이 부활, 승천하셔서 지금도 예수님이 살아계셔서 성령 보내주는 것이 역사적으로 실제 사건이 되어야 된다 말이죠.
지금 2007년도 11월 달에 교인들이 궁금한 게 있어요. 뭐냐 하면, 목사님, 성령 어떻게 받아요? 이게 문제 아닙니까? 성령 받아야 우리 교회가 하나님 보시기에 진짜 교회 되는데, 그럼 성령을 어떻게 받아요? 이게 궁금하다 말이죠. 성령을 어떻게 받는가? 초대교회 어떻게 받았어요? 예수님의 부활을 믿으니까 성령이 왔고, 성령이 오니까 진짜 교회 됐잖아요.

그럼 2007년도 11월 달 우리는 뭘 믿으면 됩니까? 예수님의 부활, 승천을 믿으면 된다 이 말이죠. 그러면 예수님의 부활 승천을 믿는다는 말은 다른 말로 하는 게 아니고, 이 사람의 주장에 의하면, 예수님은 진짜로 확실히 진짜, 진짜, 진짜로 예수님은 진짜로 부활 됐다. 라는 것을 역사적으로 인식하는 것, 그것만 딱 되면 그것이 바로 성령 받은 사람이고, 그래 되면 2007년 11월 달은 진짜 교회 맞다. 라는 논리를 펴고 싶어서 이 부활 장을 이렇게 길게 한 겁니다.

이 말, 이 주장 맞습니까? 이 사람이 지금 관심사가 어디 있어요? 역사적으로 교회가, 결국 이 사람의 관심사는 뭐냐 하면, 지금 있는 이 교회가 진짜 교회 맞느냐? 라는 것을 교회 관심이 내 교회 맞습니다. 라는 데 관심이 있죠. 내 교회 맞습니다. 라는 데 관심을 가질 때 이 사람은 어떤 유리한 게 있느냐 하면, 우리 교회에서 벌어지는 것은 전부다 성령님이 하신 일로 교인들이 수긍할 수 있는 근거를 장만할 수 있죠.

여러분, 우리 교회는 전부다 진짜 교회 맞지요. 옛날 초대교회처럼 우리 교회도 하나님이 인정하는 교회 맞지요. 그렇다면 이 교회에서 목사가 하는 말, 진짜 하나님 뜻 맞지요. 맞지요. 그런데 왜 목사 말 안 듣습니까? 이래 나오지요. 내가 헌금 내라 하면 헌금 내야지. 건축헌금 왜 안 하고. 자가용 바꾸고, 사택 지어주라 하면 지어줘야지. 왜 말 안 들어. 이게 되는 거예요.

그러면 좀 유식한 교인들 뭐라 합니까? 목사님, 성경적 근거를 대세요. 할 거 아닙니까? 성경적 근거 대지요. 그런 소리 할 줄 알고 근거를 대니까. 해서 이래 나온다 말이죠. 그럼 목사님 역시 성경 전문가구나. 우리 아마추어가 뭘 알겠나, 프로가 알지. 하고 입이 쑥 들어가 버려.

그러니까 결국 뭐냐? 이 교회라고 내가 세운 교회, 성문교회가 내가 세운 교회가 진짜 교회고, 그 교회에 있는 목사가 진짜 하나님이 인정하는 진짜 목산데 이 목사 말 안 들으면 결국 뭐 받아요? 저주 받아요. 논리가. 고린도전서에 그래 되었든가요? 고린도전서 방금 한 대로 그런 거 가르치던가요? 고린도전서가. 갈라디아서 1장 8절에 뭐라 했든가요? 사도 바울이 했던 말이. “내가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뭘 받는다? ‘저주’를 받는다 했지요. 

그러면 이 사람들은 아까 래드도 마찬가지지만. 이 사람은 지금 부활에 관심을 두는 진짜로 부활됐다. 되게 믿음 좋아 보이지요. 그런데 관심은 뭐에 관심이 없어요? 교회에 관심이 있지, 뭐에 관심이 없습니까? 복음에는 관심이 없는 거예요. 복음 앞에 뭐가 붙어야 됩니까? 무슨 복음? [십자가의 복음] 십자가의 복음에는 관심이 없어요.

지금 역사적으로 뭐만 남한테 설득력 있게 하려 합니까? 우리 교회는 천하 뭐라 해도 우리 교회는 진짜배기 이 지구상에서 남아있는 진짜 교회 맞습니다. 우리 교회는 진짜 교회 맞습니다를 증거하려해요. 지금 십자가 복음이 십자가로 여러분이 구원 받습니다. 이게 아니라 이 교회가 진짜 교회 맞습니다를 증거 하려한다니까. 십자가 복음이 아니고.

이 래드의 책을 읽어보면서 사람들이 래드가 예수의 부활한 진짜 육체적 부활, 그것 따라 하니까 래드는 정말 신학자고 진짜 믿음 좋다고 그렇게 하겠지요. 제가 다시 아까 박윤진 씨고 김대식 씨 하고 글들을 보면 관심사가 어디 있느냐 하면, 복음에 관심이 있지요. 근데 복음에 관심이 있기 때문에 뭐가 없어요? 종교용어가 별로 안 띠잖아요. 종교용어가. 그냥 실질 용어 가지고 복음을 설명하지 않습니까?

왜 김대식 씨와 박윤진 씨는 왜 종교용어를 사용 않습니까? 그 사람은 뭐가 아니기 때문에? 목사가 아니잖아요. 목사가 아니고 우리 일상생활 가운데 영적으로 어떻게 활동하고 주님께서 십자가로 복음을 어떻게 활동하나 그거에 관심이 있다 말이죠.

그런데 목사가 되면 생각을 두 개 해야 되는 거예요. 뭐냐 하면, 영적으로 활동하되 그것이 어디에 한데 결집되어야 합니까? 내 교회, 그것도 남의 교회 말고 내가 있는 내 교회에 와야 그게 돈이 되니까. 내 교회 교인 돼야 초점을 맞추어서 하니까 자꾸 종교용어를 사용해서 이 용어 쓰시면 우리 팀이라는 종교용어를 사용하는 거예요.

개혁이란 것도 종교용어 아닙니까. 개혁이란 말. 개혁이 복음이 아니거든요. 그런데 개혁이란 말 왜 사용합니까? 개혁이란 말 사용하는 우리 교회는 이미 개혁된 괜찮은 교회니까 오셔도 방문하셔도 괜찮습니다. 이런 자기선전하고 있는 거예요. 주님이 다가가는 게 아니라 그들이 찾아오도록 하는 거예요. 찾아오게 되면 교회를 거쳐서 천당 가는 게 돼요. 진짜 주님이 각 사람에게 다가가는 게 아니라.

래드의 부활관은 뭘 거부하느냐? 래드가 불트만을 지금 오해하고 있어요. 제가 글 보니까 불트만을 공격했잖아요. 불트만은 뭘 안 믿는다? 실제적인 예수 육체의 부활을 믿지 않는다. 지금 래드가 불트만만큼 실력이 없는지, 안 그러면 공부를 덜 했는지, 안 그러면 진짜 알면서도 의도적으로 그렇게 욕을 하고 있는지 모르겠는데 불트만의 생각을 완전히 곡해하고 있습니다. 뭐냐 하면, 불트만이란 학자는 뭐라 했느냐 하면, 예수님의 부활은 역사적 용어로 설명이 안 된다 했어요.

만약에 예수님의 부활은 영적 아닙니까? 영적인 것을 역사적인데 역사적이죠. ‘역사적’을 다른 말로 육적이죠. 만약에 영적인 사건을 육적으로 해 놓으면 여기서 어떤 현상이 일어나느냐 하면, 진짜 영적인 인간과 육적인 인간이 동일한 고백을 한다는 거예요. 지옥 갈 사람과 천당 갈 사람이 똑같이 고백하는 거예요.

이 말은 뭐냐? 예수님의 부활 사건이 사람을 지옥 보내고, 천당 보내는 기준이 될 수 없다는 것이 불트만의 생각입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합니까? 지금 예수님의 부활을 불트만은 예수님의 부활을 예수님이 하신 케리그마, 그게 뭐예요? 약속의 연속성으로 보잔 말이에요. 나는 죽었다가 사흘 만에 부활한다. 할 때 국립과학수사연구소에서 와서 예수님 붙들어서 당신 진짜 부활한지 조사해보자. 부활은 조사할 문제가 아니라니까요.

예를 들어서 나는 저 꽃을 보고 아름답습니다. 이 목사, 당신은 이걸 아름답다 봤는데 왜 아름다운데? 그걸 어떻게 설명합니까? 내가 아름답다는데 지가 뭔데. 내가 그 여자 좋아한다는데 왜 다른 사람은 그 여자 볼 것도 없는데 왜 좋아하느냐? 이건 시비 거리가 아니잖아요. 다른 사람은 안 믿어도 난 예수님이 죽었다가 사흘 만에 부활하고, 그분이 구름 타고 오시고, 그분이 바로 심판주고, 그분 나라에 영생나라에 들어간다. 라고 약속을 믿어버리면, 그 약속을 다른 사람이 역사적으로 그걸 분해해서 나도 같이 믿을란다. 역사적으로 믿을란다가 성립 될 수 없다.

역사적으로 믿을란다가 성립 안 되고, 아이고, 이 목사님. 저도 그렇게 믿는데요. 십자가 피가 우리 죄를 용서하고. 나도 그게 믿어지는데요. 이유는? 하면, 당신이 이유 댈 수 없듯이 나도 이유 없어요. 근데 우리는 같은 고백을 하고 있는데. 이래 돼야 돼요. 이렇게 돼야 된다 말이죠.

그런데 나는 역사적으로 따져 보니까 예수님의 빈 무덤이 있으니까 빈 무덤이 있는 걸 봐서 분명히 이거는 예수님이 죽었다가 살아난 것 맞다. 그걸 역사적인 증거를 갖다 대서 십자가 부활을 믿으면 구원받습니다. 이거는 복음이 아니에요. 오히려 갈라디아서에서 뭐라 합니까? 갈라디아서에나 고린도전서에서 뭐라 합니까? 예수님의 복음은 육적인 사람들에게 어리석게 보이죠.

그런데 사람이 죽었다가 산다는 게 어리석은 겁니까? 이거는 모든 종교의 모든 인간의 공통점인데? 사람이 죽어서 이 땅에 살다가 다른 나라에 가 더 살고 싶은 게 인간의 본성인데. 세상에 부활 싫어하는 사람 누가 있어요? 다 좋아하지. 십자가는 싫어해도 부활은 다 좋아하잖아요.

예수님께서 고린도전서 15장에서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는 말은 부활하셨다가 복음이 아니라, 이제 진짜 복음인 십자가는 헛된 약속이 아니고, 진짜 십자가의 피가 여러분 죄를 용서하고 영생 줍니다. 라는 것을 증거로 삼기 위해서 십자가에서 사흘 만에 부활한 거예요.

지금 예수님께서 부활해서 십자가 말을 하니까 입을 막고, 당신 부활했잖아. 그거 믿어줄게. 이러고 있단 말이죠. 그래서 그게 무슨 성돕니까? 십자가를 막아버리니 복음을 막아놓고, 당신 부활한 거 인정해 줄게. 왜 인정하는데? 나도 같이 부활 될 걸 믿으니까. 그건 당신 욕망이죠. 예수님 부활되니까 나도 부활된다. 이건 자기 욕심 아닙니까? 기본 육적인 욕심 아닙니까.

그게 아니고 부활하신 주님께서 사도에게 어떤 복음을 전했는가? 십자가 복음만 전했다. 그게 십자가가 중요하지 부활은 거기 힘이 될 뿐이에요. 그런데 이 사람은 부활을 엄청나게 길게 했는데 그 긴 내용이 하나 밖에 없어요. 뭐냐 하면, 예수님은 진짜로 뭐 했다는 거예요? 진짜로 살아났다는 거예요. 그리고 한 마디 더한다면, 진짜로 살아났기 때문에 우리도 진짜로 되살아난다는 겁니다.

그 사람은 요한복음 5장 28절을 몰라요. 모든 인간은 다 부활됩니다. 어떤 사람은 심판의 부활로, 어떤 사람은 선한 부활로, 의의 부활로. 모든 인간은 니가 부활 되고, 안 되고 다 나와요. 그래서 마지막에는 선인이든 악인이든 다 부활된 채로 심판받게 돼있습니다. 한 쪽은 저주받기 위해서 부활되게 돼있어요. 소멸되지 않습니다.

왜 이 사람이 이런 관심 갖느냐 하면, 다시 이야기할게요. 관심사가 초대교회와 똑같은 고백을 하면 오늘날 우리 교회도 똑같은 초대교회처럼 인정받는 교회되지 않을까? 하는 그러한 욕심 때문에 그런 현상이 벌어지는 겁니다.


한 10분간 쉽시다.


-래드도 부활은 역사적인 원인을 가지지 않는, 그 말은 뭡니까?

했는데 래드가 실력이 없다는 말이, 역사관과 역사적을 혼동하는 거예요. 그 둘 뜻이 무슨 뜻인지 모르는 거예요. 왜 모르느냐 하면, 래드는 시간론을 공부 안 한 거예요. 시간은 세 종류의 시간이 있습니다. 시간론을 공부 안 했어요. 시간 자체를 보는 것과 시간을 생각하는 인간의 의식을 보는 것과 시간을 만들어내는 인간의 몸을 보는 것과 시간이 다 달라요. 그런 복잡한 것을 래드는 몰라요. 실력이 없어서 몰라요. 하여튼 관심은 시간에 관심. 시간이 우릴 구원하는 건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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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071106b조지래드14신약신학-교회

20071106b 부산강의 : 조지 래드 [신학신약]-교회
(강의:이근호 목사)

두 번째 시간은 사도행전 1장 한번 봅시다. 첫 번째 지난 시간에 이야기한 강조는 지난 시간에 방금 한 시간에 한 것 요약해드리면, 마태, 마가, 누가, 요한 할 때 영적으로 해석하다가 갑자기 사도행전에 와서 역사적으로 바뀌는 그런 반칙을 해서는 안 된다는 겁니다. 사도행전은 영적으로 해석해야 되는데 다시 육적으로 해석해놓고 다시 로마서, 고린도전서 또 영적으로 해석하고 이래서는 안 된다는 거죠. 그것은 음흉한 노림수 때문에 그래요.

교회란 이 사람 말 그 대로 교회라 하는 것은 두 개도 아니고 세 개도 아닙니다. 몸도 하나요, 주도 하나에요. 교회는 오직 하나뿐이에요. 에베소에 있는 교회지, 에베소 교회가 아니죠. 에베소 교회 있고, 고린도 교회 있는데 에베소에 있는 교회, 고린도에 있는 교회 그렇게 되는 겁니다.

그런데 그 공간성, 에베소란 공간성, 고린도란 공간성이라 하는 것은 바로 우연적이에요. 우연적이라 하는 것은 필연적으로 그 자리에 있어야 될 이유가 없다. 그리고 구성원도 마찬가지입니다. 김 집사, 박 집사 필연적으로 내 교회 나올 이유가 없어요. 그게 의미가 없어요. 왜냐하면 몸은 하나요, 지체는 여럿이기 때문에.

이걸 가지고 이 사람은 더 어려운 말로 뭐라고 하느냐 하면, 통일성과 그 다음에 뭐라고 돼있지요? 다양성. 통일성과 다양성으로 표현하고 있다 말이죠. 통일성과 다양성이란 말보다도 우연적이란 말이 더 좋아요. 왜냐하면 통일성이 있고 다양성이 있다면 이것 자체가 유기체가 되는 거예요.

유기체가 돼버리면 유기체 자체가 이게 신봉의 대상이 돼버려요. 유기체 자체가. 예수님을 봐야 될 걸 유기체를 믿을 수가 있어요. 예수님을 믿는 게 아니라 유기체를 믿을 수 있어요. 좀 어렵지요. 예수님을 믿어야 될 건데 그러니까 예수님이 하신 일을 믿어야 될 건데 유기체를 믿어버린다고.

예를 들어서 화투치는 고스톱 치는 저 사람 누구고? 우리 엄마다. 우리 엄마 좋~데이. 왜? 우리 엄마, 나 밥해주고, 빨래해주고 좋데이. 고스톱 치고 도박하는 저건데. 우리 엄마는 나를 밥해주고 빨래해주기 때문에 좋은데, 그 좋은 엄마가 친구들 모여서 고스톱 쳐서 재산 한 이천만원 날려도 좋은 엄마기 때문에 여전히 뭐가 돼버려요? 좋은 엄마가 돼버려요. 그러니까 좋은 엄마기 때문에 그 좋은 엄마가 무슨 짓을 해도 그 한 짓이 뭐가 돼요? 좋은 일이 돼버리죠.

교회를 믿어버리면, 우리 교회 좋데이. 우리 교회 오면 예배 마치고나면 점심을 먹는데 좋데이. 그런데 그 교회가 딴 짓해도 나한테 점심 줬다는 이유 때문에 교회 자체가 그만 신봉 대상이 되서 그 교회가 무슨 짓을 해도 뭐 돼요? 좋은 교회 돼버려요. 이거 문제 크지요. 예수님을 믿어야 되는데 주 예수를 믿어야 되는데 예수 믿는다고 우기는 교회를 믿어버리면 이런 현상이 일어나는 겁니다.

어떤 목사는 교회 교인들 없어지니까 지가 알아서 오지 말라고 전화 연락하는 사람 있어요. 그런 짓하면 안 되거든요. 왜냐하면 평소에 교회 오는 것도 목사가 오라 해서 오는 게 아니고, 주께서 뒤에서 떠밀어서 왔는데 그 오라 하는 교인을 지가 전화해서 오지 마라할 권한이 없어요. 주께서 보내셨구나. 또 가면 주께 가게 하셨구나. 이러면 되는데 목사 본인이 예수를 믿어야 되는데 목사 본인 교회를 믿어버려요. 지가 세운 교회를 믿는다고.

그것이 나중에 보면 그 교회 유기체라 하죠. 사실은 자기 몸이 교회와 협착이 되서 교회가 자기를 대체하면 되니까 이런 현상이 나오는 겁니다. 자기를 신봉하는 그 대신에 동일하게 자기 있는 교회를 신봉하는 경우가 됐습니다.

사도행전 1장 6절에 그런 내용이 나옵니다. “저희가 모였을 때에 예수께 묻자와 가로되 주께서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심이 이 때니이까” 보세요. 이스라엘이 현재 누구 나라입니까? 제자들 자기 나라죠. 관심사가 뭐예요? 자기가 소속된 이스라엘이 언제쯤 로마에서 벗어나서 구약처럼 메시아왕국이 되어서 모든 나라가 우리나라에 와서 복을 받는 그런 때가 오겠습니까? 한 거예요.

그때 주님께서 뭡니까? “때가 기한은 너희가 알 바 아니요” 이것은 래드가 이런 것까지 아마 고려하고 글 썼다고 내가 좋게 이야기하면 이렇습니다. 래드가 부활을 이야기하면서 그 다음에 이야기한 게 뭐냐 하면, 종말론적 현상이라고 했어요. 여기 나온 게. 종말론적 케리그마. 그냥 종말론적 현상.

여기서 제목 자체가 그렇지요. 그럼 ‘종말론적’과 ‘종말’의 차이점이 있어요. 어떤 차이가 나냐? 종말이라 하는 것은 끝을 이야기합니다. 종말이란 뭐냐? 끝을 이야기하고, 종말론적이란 끝이 드리우는 그림자. 전봇대 있잖아요. 전봇대는 전봇대죠. 그럼 전봇대 밑에 있는 그림자는 뭡니까? ‘전봇대적’이겠죠. 뭔 뜻인지 이해하겠습니까? 종말이 없으면 이런 그림자가 없겠지요. 이미 끝이 있기 때문에 끝이 되어야 나타나는 현상들이 이미 우리 머리 위에 이 시대에 드리워져 있는 겁니다. 그림자처럼.

이 사람은 그런 것은 이야기 잘 해요. 학자니까. 그 종말론적 현상 가운데 제일 특징이 뭐냐? 그게 뭐냐? 교회의 등장이라는 겁니다. 하~ 이 사람이 이런 소리하면서 이런 이야기를 여기 적어 있으면서 이게 얼마나 중요한지 본인은 잘 모르는 것 같아. 이 말은 뭡니까? 교회 안에는 뭐만 있어야 된다? 끝이다. 라는 말만 해야 된다니까.

다시 합니다. 끝은 종말이고, 종말론적에선 끝에서 나와 있는 드리워진 긴 그림자가 종말론적이라 했습니다. 그렇다면 그 종말론적 현상, 그림자 속에 제일 중요하게 튀어나온 게 뭐라고요? 교회의 등장이죠.

그러면 교회는 뭡니까? 교회는 그 종말의 그림자죠. 교회는 종말의 그림자니까 교회를 탁 깨보면 그 안에 무슨 소리가 나와야 돼요? 끝났다, 끝났다, 끝났다, 끝났다가 거기서 교회에서 울려 나와야 종말론적이 살아있는 참된 교회라고 할 수 있습니다. 끝났다, 끝났다. 세상에 대한 미련을 버리자 이 말이죠. 세상에서 미련을 버리자고 말하면, 세상에서 출세하고, 성공하고, 복 받고, 잘 먹고, 잘 살자는 그 모든 것도 어떻게 하자? 그것도 포기하자. 그런 집착과 미련도 포기하자.

그럼 뭐하냐? 초대교회 인사가 뭐라고요? 마라나타. 주께서 어서 오십니다. 왜냐하면 그림자는 본체와 끊어지지 않으니까. 그림자를 따라가면 뭐와 만나요? 전봇대 만나죠. 전봇대 그림자 밟아 가면 뭐 만납니까? 전봇대 만나죠. 교회에 다니면서 뭐 만나요? 실체, 본체 되신 예수님의 재림과 만나죠. 예수님의 심판주, 주되심과 만납니다.

그래서 여기 그림자 A라는 지점에서 진짜 본체 되는 B라는 본체까지 걸어가면서 그들은 뭘 하느냐 하면, 나는 믿습니다. 주 예수를. 나는 믿습니다. 주 예수를. 이렇게 되는 거예요. 나이가 스물 살이든 서른 살이든 오십이든 관계없이 주예수를 나는 주의 이름을 부릅니다. 이건 뭐냐? 나는 본체에게 다가 갑니다도 될 수 있지만 더 정확히 말해서 끌려갑니다. 끌려 당깁니다.

나는 이 본체, 주님의 부활의 능력, 여기서 성령이 나오니까. 부활의 능력 다른 말로 하면, 성령의 능력. 성령의 능력이 현재 이 지점에 있는 나를 본체에 있는 전봇대로 지금도 끌어당기면서 내 입에서 뭣이 터져 나오느냐 하면, 나의 주는 그리스도십니다. 예수 그리스도 나의 줍니다. 나는 주 예수를 믿습니다. 나는 주님의 약속을 인정합니다. 라는 고백이 나오지요.

요 끌려 다니는 요 관계를 가지고 뭐라고 하느냐 하면, 이걸 가지고 ‘성령세례’라 합니다. 이런 이야기는 래드가 하나도 안 하고 있어요. 못 하고 있어요. 래드는 성령세례를 받아 챙기는 걸로 간주해요. 왜 그렇게 했느냐? 사도행전을 보면 성령세례 보면서 그것을 역사적 현상으로 보기 때문에 그래요. 하나의 사건을 보는 거예요.

지금 제가 사건이 아니고, 관계로 보지요. 말을 너무 어렵게 한다. 이해되시죠. 지금 본체 있고, 현재 본체가 날 잡아당길 때 그게 뭐라 했습니까? 성령의 관계며 이걸 관계성이라. 관계며 이것은 바로 성령세례죠. 성령세례 안에서는 뭐가 나오느냐 하면, 모든 성경의 율법이 성령세례 안에서는 단 두 자로 다 표현됩니다. 두 자가 뭐냐? ‘사랑’ 그렇죠.

그러니까 신약성경에서 사도 바울이 말하는 사랑, 사랑, 사랑이 뭐예요? 주께서 나를 끌어당김. 다른 말로 하면 나 같은 죄인을 끌어당김. 나 같은 죄인을 불쌍히 여겨서 버리지 않고 계속 끌어당김. 이게 성령세례 안에서의 사랑입니다. 끌어당기는 거죠. 내가 다가가는 게 아니라 주께서 끌어당기죠. 성령에 의해서.

그래서 로마서 8장에 뭐라 그럽니까? 환란이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그 어떤 경우라도 주님의 사랑에서 끊어지지 않는다. 내 수술 받든지 간에. 심지어 길메리 병원에 602호실에 있든 말든 뇌수술 받든 말든 환란이나 곤고나 핍박이 온다 한들 주의 사랑에서 끊어지지 않는데 이거 시기하는 놈들이 있어요? 그게 누굽니까? 마귀들이죠.  

마귀들은 뭡니까? 시기할 때 어떻게 시기해요? 마귀들이? 말씀 가지고 고소하죠. 재는요 이 말씀 안 지켰어요. 재는 간음했다 이 말씀 안 지켰고, 재는요 자기 티끌 못 보고 봤어요. 산상설교 하나도 못 지켰어요. 이것 가지고 재는요 먹는 것, 입는 것만 생각하고. 이런 식으로 마귀고 계속 뭐 합니까? 말씀을 가지고 지금 성령세례 받은 사람을 끌고 가는 사람은 고발하죠.

그럴 때 주께서 뭐 합니까? 알고, 죄 짓는 걸 알고 끌고 간다 이렇게 돼요. 그 사람이 완벽해서 끌고 가는 게 아니고, 이 성경말씀 하나도 못 지킨 걸 알고, 그를 대신하여 누가 죽었다고? 그를 대신하여 예수님이 죽으심에 근거해서 그를 끌고 가기 때문에 누가 너를 송사하리요. 누가 너를 고소하리요. 그를 위해서 죽으신 분은 누구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기 때문에 누가 그에 사랑에 끊으리오.

이게 종말이 되면 사람의 능력은 이미 무능으로 발각되었어요. 인간은 아무리 애써도 이 성경 한 말씀 못 지킵니다. 자력으로 못 지킵니다. 아무리 애를 써도.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다. 어느 놈이 지킵니까? 목사 지도 돈 좋아하는데. 아무도 지킬 수가 없어요.

근데 끌려가면서 우린 뭡니까? 이것이 못 지킴을 알고, 죄가 많은 곳에 은혜가 넘친다는 은혜를 바라보면서 주님이 하신 공로로만 생각하면서 가는 거예요. 목회 성공하면 천당 보내줄게. 우린 다 끝났어. 우린 지옥 갑니다. 그런 거 없습니다. 목회 성공 그런 거.

그런데 마귀는 계속해서 매일같이 우리에게 뭐라 합니까? 니, 목회 성공했나? 매일같이 묻는 게 그거에요. 니, 목회 성공했나? 니, 교인 하나 또 잘랐지. 목회 성공했나? 심방해서 말 잘못해서 삐져서 딴 데 갔잖아. 니, 목회 성공했나? 에라이, 나가 죽어라. 이놈아. 니가 왜 사냐? 니, 목회 성공했나?

매일같이 들이쑤시는 게 마귀가 와서 쑤시는 게 뭐냐 하면, 그리스도 보지 않고 내 행동, 내 행동의 완벽성, 내가 부족성 이것 가지고 우리를 낙담케 하는 우리로 하여금 예수님 증거 못하게 만들어요. 교인도 없는 목회 미쳤다고 하나. 때려치워라. 전화 걸어서 교회 오지 마세요. 나, 목회 자신 없습니다. 목사가 전화해서. 그래 전화하려면 성문교회 벌써 전화했다.

목사는 자기 교회 없어야 됩니다. 주님의 교회에 그냥 봉사하는 일꾼이지, 자기 교회 있으면 큰일 납니다. 그거는 자기가 신이 돼요. 자기가 우상이 됩니다. 교인들로 하여금 자기 팬클럽 만들어요. 자기 팬으로 만들어요. 조용필 팬처럼. 나훈아 알지요. 아줌마들 팬 안 많습니까? 

스타의식, 이런 거. 죄인이 무슨 스타의식을 가져요. 죄인인데. 성령세례 받아서 구원받은 주제에. 그래서 성령세례 받으니까 여기서 누가 반발합니까? 유대인들이 반발하죠. 뭐냐 하면, 유대인들 보세요. 참 중요합니다. 사도행전에서 지금 유대인 쪽에 속한 사도와 지금 헬라인 쪽 속한 이방인들 쪽 속한 사도와 사도행전 15장에서 대판 싸웠는데 뭐냐 하면, 하나님께서 구약 율법을 통해서 말씀을 줬고, 그 율법의 완성이 예수 그리스도라는 겁니다. 이 말 맞아요? 아멘 할 수 있겠죠. 하나님이 율법을 줬고, 율법이 예수 그리스도라는 거예요.

그런데 가만히 보니까 뭐냐 하면, 이런 율법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 율법을 가지고 왔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를 이해하는데 있어서는 반드시 뭘 먼저 알아야 예수님을 이해한다? 절차가 이러니까 율법을 먼저 배워서 율법의 완성인 그리스도가 와야 된다. 라는 것이 바로 유대인 그리스도인들 주장이에요.

예를 들면 십일조죠. 십일조, 그 다음에 할례 세 가집니다. 유대인들. 안식일. 십일조는 돈에 재정 도움되니까 하는 거고, 할례, 안식일. 사실은 두 가진데 십일조까지 더 보태서 세 가지. 이거는 목사들 생계 때문에 하는 거예요. 세 가지 딱 주장해서 요거는 어떤 경우라도 빠뜨리면 안 된다 이래 보는 겁니다.

요새 한국교회는 할례를 빼버리고, 귀찮으니까. 돈 되는 십일조하고 광고를 해야 되니까 주일성수 두 개해서 이거 안 하면 지옥 간다 하지요. 이거 안 하면 복 못 받는다 하지요. 복 못 받든지 안 그러면 하늘나라 상급 없든지. 그런 식으로 해요. 기가 찰 이야기에요.

그러니까 사도가 하는 말이 그렇다면 당신한테 따져보자. 따져봐라. 그러면 율법 모르는 사람한텐 지옥 가겠네. 그렇지. 그러니까 사도바울의 이야기가 율법을 모르는 이방인들에게 성령세례 왔는데. 예수 그리스도가 뭘 보냅니까? 성령세례 보내지요. 그들은 율법을 알고 그 다음에 예수님을 알아야 성령세례 온다고 했는데, 율법을 모르고 예수님의 성령세례 왔다는 말은, 사도 바울이 해석하기를 하나님의 의는 의를 받으면 주면 의인되는 기라. 이래요. 하나님의 의되신 분이 의를 주면 성령세례, 의를 주면 그 즉시로 의가 되는 거다. 그러니까 유대인들이 왜? 하니까, 모든 사람은 죄인이기 때문에.

죄인이기 때문에 율법을 통해서 죄를 아는 것하고, 죄를 알기 위해서 율법을 보는 것하고, 그래야 구원받는 것하고 완전히 말이 다르죠. 너희들 보기에 이미 이방인들은 개다. 그런데 개 같은 인간을 의를 줬다고 한다는 것은 율법이란 절차를 생략하고 바로 그리스도의 은혜를 줬다는 말은 뭔 뜻이냐 하면, 우리가 이런 거 어느 정도 해놔야 그래야 예수 복을 받는다는 게 아니라 우리가 어떤 행한 것도 없이 예수님이 찾아온 즉시로 그것이 구원받는 영생 얻는 사람이 된다. 이것이 바로 종말론적 현상이라는 겁니다.

왜? 모든 인간은 종말에 저주받아 지옥 갈 인간 밖에 안 되기 때문에 주께서 전봇대가 자기 그림자를 드리워주면 그 전봇대를 근거해서 그 그림자가 구원받는 겁니다. 율법과 상관없이 주님이 그냥 성령 주면 그 즉시로 믿음이 생기고, 믿음 생기면 그 사람은 행함으로 구원 받는 것이 아니고, 믿음으로 구원 받는 겁니다. 그게 로마서에 나오잖아요.

그럼 로마서가 어디 들어있다? 아까 처음에 사도행전에 들어 있잖아요. 그러면 사도행전 설명할 때 역사적으로 해야 됩니까, 로마서를 거쳐서 해석해야 돼요? 로마서의 영적인 해석을 거쳐서 안에 들어있는 사도 바울의 설교를 해석해야 될 것 아닙니까? 그걸 잘 안 한다니까. 사람들은. 관심사가 딴 데 교회냐, 아니냐? 그거 관심 있어서.

사도행전 1장 7절에 “가라사대 때와 기한은 아버지께서 자기의 권한에 두셨다” 이 말은 이제부터 너희들이 어떻게 하면 어떻게 구원된다는 시기는 끝났고, 지금은 종말론적이기 때문에 때와 기한은 누구 손에 있다. 아버지 손에 있다 이 말이죠. 그러면 이제부터 때와 기한을 잘 들어보세요. 때와 기한을 생각지 아니하는 새로운 인물들의 등장은 누구의 솜씨? 주님의 솜씨. 이것이 바로 사도행전입니다.

지금 제자들은 예수님 부활 좀 봤다고 이제 까불까불 대면서 제자들이 무슨 주의 일 할 것처럼 여기는 거예요. 그래서 그들은 뭘 몰라요 지금? 때와 기한을 모를 뿐이지 예수님 부활한 거 알잖아요. 그러니까 자기 힘으로 된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예수님이 하는 말이 때와 기한은 너희들이 알 필요 없다 이래 되거든요.

그 말은 무슨 뜻이냐 하면, 너희들이 하늘나라 전파하는 게 아니다 말이죠. 종말에는 인간들이 하늘나라 전하는 게 아니에요. 흔히 교회에서 기도할 때 하나님나라가 확장되게 하라 하는데, 세상에 하늘나라가 확장되는 게 아닙니다. 지가 구마고속도로도 아니고. 뭘 확장해요. 위에서 덮쳐버리는데 뭘 확장해요. 새삼스럽게 확장할 게 뭐 있는데요. 그게 뭐냐? 숫자 채우라는 이야기거든요. 숫자 채운다는 것은 의미 없어요.

여름에 부부가 떨어져서 자는 이유가 뭡니까? 붙어 있으면 더워. 혼자 있어도 구원 받는데, 뭐 한다 해서 더 좋은 거 없어요. 지금 뭐고? 쌍화탕으로 배불렀는데 여기다가 하늘보리 잡수라고 주면 귀찮아. 이거. 사도 바울이 전도 못해서 환장한 사람이 아닙니다. 자기는 이미 배불러서 소원이 있었어요. 뭡니까? 빨리 죽어서 주님과 함께 영원히 거하는 거 그게 소원이었지, 실적, 실적. 지가 보험회사 사원도 아니고 실적 올려서 뭐 할 건데.

주께서 시켜요. 주께서 로마에 가! 가야 되는 거예요. 니는 이번에 고린도 가! 가야 되는 거예요. 그냥. 에베소 가! 그럼 가는 거예요. 가면서 그리스도께서 보냈다는 걸 증거하면 되지, 지가 나서면 안 돼요. 사도 바울의 손수건을 가기고 얹으니까 어떻게 됐다? 죽은 자가 살아났지요. 그때부터 사도 바울표 손수건 생산했습니까? 이거 손수건 찍어냈습니까? 이거 찍어낸 사람 있어요. 손수건 찍어낸 사람 있어요. 요새. 누굽니까? 이재룡. 손수건 찍어내잖아요. 기가 찰 일 아닙니까?

사도 바울 손수건하고 사도 바울하고 아무 관계없어요. 단 관계있다면 전에 사도 바울의 손수건이었다 그것뿐이지 관계없어요. 사도 바울의 손수건 누구 손수건이냐? 주님의 손수건입니다.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 앉은뱅이 나았을 때 누가 낫게 했습니까? 보이지 않는 분이 낫게 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베드로, 요한 하니까 야, 재주 있지. 무슨 재주가 있어. 왜 우리를 주목하느냐? 보이지 않는 분을 주목해라 말이죠. 보이지 않는 분을 주목할 리가 있습니까 그 사람들이.

자, 좀 어렵지요. 다시 해봅시다. 때와 기한을 모른 그런 인간들을 주께서 만들어냅니다. 뭘 통해서? 성령세례를 통해서. 만약에 때와 기한을 안다고 하면 자기가 목회해요. 지가 돗대고, 자기 아니면 주의 일 안 되고, 자기가 나서야 주의 일이 확정되는 것처럼 그렇게 착각하는 그것은 종말이 안 될 때는 이해해요. 세례요한 때까지는.

이해되는데 종말이 돼버리면 종말 때는 누가 혼자 한다? 예수님이 혼자 하기 때문에 인간들이 이런 걸 알 필요조차 없어요. 그냥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혭니다. 라고 고린도전서 15장 10절의 말씀처럼 사도 바울이 하는 것처럼 내가 사도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지, 사도 바울이 언제 주님 만나기 전 기도한 적 언제 있습니까? 그냥 다메섹에서 그냥 찾아왔잖아요. 주께서 찾아가서 베드로한테 뭐라고 했습니까? 니는 고기 낚는 어부가 되지 말고 사람 낚는 어부가 되라. 라고 그 말만 했습니까, 능력도 따라왔습니까? 그 능력이 무슨 능력입니까? 오순절 성령세례. 불이거든요.

이제부터 오순절 불이 무슨 불인지 봅시다. 오순절 불은 사도들이 새삼스럽게 구원받았다는 이야기가 아니에요. 그리고 사도들이 뭔가 챙겼다는 이야기도 아닙니다. 뭔가 소유했다는 이야기도 아니에요. 이제부터 주도권이 사도에게 있지 않고, 잘 들어보세요. 주도권이 성령에게 주도권이 있는 그런 시대에 돌입했다는 이야깁니다. 성령을 소유하면 안 돼요. 소유하면 지가 돗대 돼요. 지가 주의 종이라고 설쳐대면 사람 여럿 죽습니다. 그 사람한테.

이제는 사도 바울이 로마 가는 계획은 누구 아이디어입니까? 그거는 주께서 붙여줬습니다. 바울아. 예. 니는 로마에 가야 돼. 니는 두려워하지 말라. 니는 로마에 가야만 돼. 주께서 꿈에 나타나사 사도 바울 한 거예요.

사도 바울과 베드로와 요한을 옥에서 이끌어낸 자가 누굽니까? 그 당시 교인들이었어요? 천사가 와서 옥문을 흔들었지요. 그런데 오늘날 한국교회는 뭘 합니까? 교인들이 그렇게 했다. 교인들의 뭐가? 교인들의 기도회가. 세상에. 교인들의 기도회가 사도의 옥문을 연 게 아닙니다. 교인들은 기도를 해도 베드로가 나타나니까 로데라는 아가씨가 뭐라 했습니까? 이야기하니까 뭐라 합니까? 니가 미쳤다.

기도할 때는 그냥 답답해서 한 거예요. 관계없어요. 옥문 흔드는 아이디어는 주님 아이디어지, 기도할 때 주여, 기도할 때 옥문 각도 35도로 흔들어주옵소서. 그런 기도한 적 없어요. 옥문 확 뿌리 채 뽑게 해. 기도내용에 그런 게 없었어요. 주여, 우리를 그냥 두면 안 되잖아요. 어떻게 해주세요. 이렇게 했을 뿐이지. 세상에 주께서 살아있다는 걸 모르고, 기도한 자기만 자꾸 돗대처럼 여기면 안 됩니다. 그건 자기가 기도한 본인이 우상 돼요. 기도 못한 사람을 얕잡아 보고.

그럼 뭐가 깨집니까? 사랑이 깨지지요. 아까 했던 거 또 잊어버렸지요. 다시 합시다. 전봇대 이야기. 전봇대에 뭐가 있다? 그림자 있다. 당길 때 당기는 관계를 무슨 관계? 성령세례 관계. 성령 관계 당길 때 모든 율법 완성된 걸 두 자로 뭐라고 합니까? 이게 사랑 아닙니까.

그러니까 진짜 성도 같으면 나 기도했다 까불대지 않고, 기도하지 못한 사람까지라도 사랑하고 있음을 알지 사랑으로 표현되지요. 그게 성령의 온유와 화평과 자선과 양해, 성령의 열매잖아요. 육체의 열매는 뭡니까? 사랑으로 내가 돗대다 하니까 편당이 생기고, 시기와 질투가 생기고 생기잖아요. 그걸 무슨 열매? 육체의 소욕.

성령이 오게 되면 성령은 모든 율법을 완료된 상황으로써 주어지기 때문에 그 완료된 사랑을 받게 되면 사랑이 안 생길 수가 없어요. 내가 못 먹어도 천당 가니까. 죽어도 좋아. 죽어도 좋은데 저 사람하고 기도 싸움 할 이유가 없잖아요. 새벽 기도할 때 아직까지 안 깨. 좋다. 누가 이기나 보자. 밥도 안 하고 두 시간 동안. 이렇게 이거는 되도 않은 자존심 경쟁 밖에 안 되잖아요.

사랑이 오게 되면 기도 5초만 해도 천당 간다니까. 5초만 하면 천당 가는데 뭘 자꾸 두 시간 반합니까? 그럴 이유가 없다고. 그만큼 완료된 상황을 모르고 지가 완료된 상황을 억지로 만들려 하니까 뭐든지 해도 억지가 되니까 그게 백날 해봐야 그게 육체의 소욕 밖에 안 되죠. 시기와 질투와 미움과 투쟁과 쟁투와 다툼과. 그런 것은 성령이 없기 때문에 완료된 상황을 안 봤기 때문에 다른 말로 하면 미완료에 대한 결핍을 느끼기 때문에 그래요. 이게 우울증이에요. 결핍증, 우울증.

교회 다니는데 우울증 많아요. 기도 40일 금식했는데 아들 대학 떨어져버렸어. 미치지요. 40일 금식 기도 대학 떨어져버렸다고. 미치죠. 그런데 미칠 것도 없고 아무것도 없다고요. 결혼 성사 다 됐는데 마지막에 혼수 때문에 깨졌을 때 돌아버린다고, 그죠? 시아버지 양복 해주느냐, 마냐? 그것 때문에 깨져. 그것 때문에 깨질 때 교회 백날 다녀도 나중에 주여, 하고 나자빠져서 교회도 안 나오고.

성령에 당기는 것은 이미 완료된 상황입니다. 이 완료된 상황에서는 누가 안 중요하냐 하면, 내가 안 중요해요. 내가 안 중요하다에서 오는 기쁨을 느껴야 됩니다. 사람이 제일 힘든 것이 내가 중요하다, 나는 중요하다 이러니까 지가 불행을 몰고 와요. 저주와 슬픔을 지가 몰고 다닌다고. 꼭 깡통 단 것 같아. 탕탕탕. 뭐 보니까 나는 중요하다, 나는 중요하다 하니까 그렇게 깡통이 달려 있는데

이미 완료된 것이 나 때문에 완료가 아니고, 예수님의 십자가 피로 완료 됐기 때문에 죄가 많은 곳에 은혜가 더욱 남치기 때문에 쓸데없이 내가 더 노력한다고 해서 내가 천당 더 빨리 가는 것도 아니고, 애쓰는 것도 아니고, 상을 더 받는 것도 아니에요. 주님의 공롭니다. 지금 이 시대가 종말론적 상황이에요. 끝을 장악하신 분이 끝에 장악했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우연적으로 그때그때마다 우리에게 은혜를 주십니다.

그럴 때 우리는 그 사람이 주님한테 장악된 사람이라서 그걸 사도행전에 보면 그걸 뭐라고 하느냐 하면, 그걸 그리스도 그 다음에 뭡니까? 인. 그걸 그리스도인이라 하는 겁니다. 물론 놀리는 투지만. 이걸 그리스도인, 그리스도하는 데 미친놈들, 그리스도한테 사로잡혔다고 우기는 놈들. 이 차이죠. 내가 만들어가는 나가 아니라 그리스도가 만들어가는 나.

이걸 사도행전에서는 이걸 성령의 불같은 것을 통해서 그 다음에 불 왔습니까, 안 왔습니까? 불 안 왔어요. 왜? 그 다음부터 계속 불 안 왔지요. 처음이자 끝이죠. 왜냐하면 한번 사건이 일어나고 그 다음 안 일어난다는 것은 이미 시대를 누가 장악했다? 성령께서 이미 접수한 거예요. 조폭들이 나이트 접수하듯이 이미 접수한 거예요. 시대 전체를 성령께서 접수했기 때문에 이제는 영생 주기로 작정한 사람에겐 반드시 성령이 오게 되고, 안 그런 사람 백날 빌어도 안 오게 되고. 이거는 성령, 오야 마음대로 된다. 이 시대는 말이죠.

그래서 저는 종말론적 상황을 그림으로 할 때 케이크 위에 초콜릿 점박이. 케이크가 이래 있으면 거기 군데군데 뭐가 있습니까? 케이크 위에 과자 위에 초콜릿처럼 군데군데 있는 거예요. 군데군데 있으니까 어느 것이 오야 교회가 될지, 어느 것이 1등 교회라고 게 없지요. 왜냐하면 주님께서 일곱 교회를 주님 손에 있기 때문에 크다고 해서 큰 교회가 아니고, 작다고 해서 작은 교회가 아닙니다. 다 같이 주님 손에 있다는 관계 속에서 동일한 교회가 되는 거예요.

그런데 천주교회는 이걸 뭐로 바꿨습니까? 로마교회가 제일 오야되는 제일 우두머리 교회고, 나머지는 로마교회 목회자가 전체 교횔 지배한다는 것을 정당화시켜요. 그것은 이미 교회가 정치와 결합되어서 정치를 하는 수단으로 방편으로 이미 넘어졌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그래서 그걸 사설 교회라 하는데 지금도 만약에 백석대학교나 어떤 기독교단체 있다면 기독교단체에서 서무 과장하려면 반드시 뭐 해야 돼요? 교회 집사나 장로처럼 직분을 가져야 서무 과장된다. 그렇게 되면 아무 믿음 없어도 돈 갖다 들이밀어서 뭐하려 합니까? 장로 따려고 하겠죠. 장로 따야 지가 백석대학교 서무 과장할 수 있지요.

이게 뭐예요? 이미 세상 정치와 권력과 교회가 결탁이 돼있어요. 이거는 종말론적 현상이 아니죠. 세상에 대한 미련이 그대로 남아있죠. 세상 출세, 영광에 미련이 남아있죠. 자본주의사회에서 교회가 살아남기 위해선 돈 밖에 모릅니다. 그런 식으로 교회는 몫 돈 챙기고, 그 사람은 그 사람대로 취직 되고, 누이 좋고 매부 좋고, 꿩 먹고 알 먹고, 다같이 지옥 가는 거예요.

그 다음에 1장 8절 유명한 말씀 봅시다. 사도행전 1장 8절, 맞지요.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그 다음에 뭡니까? 내 증인 되어라가 아니고 뭡니까? “되리라” 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니는 거기서 못 빠져나온다. 내가 주겠다는데 너희들이 안 받고 할 수 없단 말이죠. 내가 주겠다는데. 저, 안 받거든요. 그럴 수가 없어요. 내가 거부해서 안 받는 성령은 애초부터 성령이 아닙니다. 지 상상력이지. 지 상상이고 공상이지 성령이 안 받으려야 안 받을 수가 없어요.

그래서 래드는 사도행전 나오는 이걸 가지고 뜨겁다 하는데, 다 뜨거운 게 아니에요. 뜨거운 것만 아니에요. 몰라. 지가 기도 많이 해서 열나서 뜨거운 줄 모르겠지만.

오순절 날 성령은 뭐냐? 전 예루살렘과 사마리아 땅 끝까지 이 약속이 완료된 상황에서부터 실시될 것이다. 야, 중요한 말이다. 어떻게 실시한다고요? 미완료에서 완료로 가는 것이 아니고, 이미 완료된 상황에서 완료되었음을 알려주는 그러한 흔적으로써 우리에게 성령이 온다 이 말이죠.

아, 니, 이미 구원받았어. 예수를 주라 하는 사람은 성령을 받지 않고서야 예수를 주라 할 수 없어. 고린도전서 12장 1절에서 3절. 성령이 아니고서야 누구든지 예수를 주라 할 수 없다. “주 예수를 믿으라 그럼 너와 네 집이 이미 구원을 받았느니라” 이미 받은 거예요.

이거는 바로 사도행전 속에 에베소서가 들어있지요. 에베소서 2장에 뭐라 되어 있습니까? 은혜가 임하면 이미 하늘의 앉을 것이라가 아니라 이미 하늘에 앉히시고. 그게 에베소서 2장에 있다는 말은, 에베소서 2장이 어디 들어있다? 사도행전에 안에 들어있다. 그런 에베소서 2장의 내용을 증거하는 것이 가끔가끔 터지는 뭡니까? 사도들에 의한 기적들입니다.

기적은 역사적 사실이 아니라 약속의 실현. 그 사건 연구해서 믿으라는 말이 아니라 사건을 믿으라는 말이 아니라 그 사건을 사건 되게 나타나게 만들었던 진짜 약속된 복음의 약속이 뭐냐? 그걸 한꺼번에 믿어버리면 그런 기적이 나타나든 안 나타나든, 방언이 있든 없든 구원받은 사람이에요.

그럼 목사님, 그러면 당신이 사도행전에 말하는 구원받은 사람의 특징이 뭡니까? 사도행전에 보면 서로 떡 떼고 하는데 그 떡 떼는 게 그게 아닙니까? 또 헌금할 때 속이고 한 놈 죽었는데 안 속이고 헌금한 게 성도의 표본이고, 그래 보이는데 그럼 그게 아니라면 뭡니까? 그게 사도행전에서의 성도의 모습은 이미 구원되었음을 예수님의 공로로 돌리는 사람의 특징입니다.

왜냐하면 그러면 기적은 인간 자체가 예수의 증인되었음이란 기적보다 더 위대한 기적은 사도행전에 없습니다. 내가 예수의 증인되었음, 증인되리라에 해당되었음보다 더 큰 기적은 없어요. 손수건 가지고 뭘 하든 그건 짜투리입니다. 그건 하나님 필요에 따라 한 거고. 진짜 뭐 하느냐 하면, 환란과 곤고가 오더라도 나, 예수의 사람 되었음. 왜? 주님만 공로만 믿기 때문에. 그것보다 더 위대한 기적은 사도행전에 없습니다. 사도행전 이러면 이해 다 된 거예요. 놀랍게도.

그런데 이런 식으로 안 보게 되면, 사도행전 따라하기. 사도행전 따라하기가 뭐냐? 집사 세우기 그 다음에 장로 세우기. 집사 세워 놓으면 교횝니까? 집사 세우면 교회에요? 그런 것은 이스람교에도 다 있어요. 어떤 직분 맡으면 교횝니까? 직분, 장로 세우면 그거 교횝니까? 아닙니다. 목사 있으면 교회에요? 아니에요. 그거는 필요충분조건이 아닙니다. 요건이 될 수 없어요. 떡을 떼면 교횝니까? 그런 것은 공산당이 잘해.

자꾸 교회 따라잡기 하면 안 돼요. 사도행전 주제는 예수의 증인되리라 한 대로 이것은 내 힘이 아니고, 내 기도 능력이 아니라 성령께서 오셔서 예수 증인되었습니다. 그걸로 모든 기적은 종결돼버렸어요.

그러면 사도행전 2장에 들어가서 이제 좀 어렵습니다. 2장에 들어와서 베드로가 종말론적 현상을 어떻게 보는가 보세요. 내가 질문 드렸습니다. 질문이 베드로가 종말론적 현상. 종말론적 현상 또 모르겠지요. 다시 하면 종말론적이라 하는 것은, 이미 끝이 있는데 그 끝에 긴 그림자가 미리 앞당겨서 드리워져서 그 드리워진 그 속에서는 끝이 아닌데도 불구하고 마치 끝에 서있는 사람처럼 그렇게 행세하는 사람들이 일군의 일단의 사람들이 있는데 그들을 가지고 크리스천 다른 말로 하면 교회라고 하는 성도라고 나타났단 말입니다.

그러니까 베드로가 말하는 종말론적 현상을 베드로가 어떻게 봤느냐? 그게 설교에 나옵니다. 모든 사람이여, 구원받으라가 아니라 여러분 가운데 구약에 의하면 종말론에 구원받게 될 사람이 있을 건데 그 사람들만 내 설교를 이해할 것입니다. 이해한 사람만이 성령받은 사람이란 조로 설교해요. 왜? 육에 속한 사람은 이 성경말씀을 뭔 뜻인지 모르기 때문에.

2장 17절 봅시다. “말세에 내가 내 영으로 모든 육체에게 부어 주리니” 요게 구약에 어디 나오죠? 요엘 2장에 나오죠. 요엘 2장에 나온 것은 예언은 예언입니다. 종말이 아니에요. 아닌데 이게 성취 되면 뭐예요? 언제 성취 돼요? 종말이 되어야 성취 됩니다. 요엘서가 성취 됩니다. 그런데 이미 성취 됐습니까, 안 됐습니까? 성취 되었지요. 그러니까 지금이 벌써 종말이 시작되었다 이래 봅니다.

래드가 여기 강의한 중에서 제대로 한 게 뭐냐 하면, 말라기 이후에 세례요한까지 뭐가 없어요? 예언이 끊어졌어요. 예언이 끊어졌다는 말은 이 래드가 아주 잘 이야기했는데, 예언이 끊어졌다는 말은 옛날 해석을 새로 해석한단 뜻이 아니고, 추가되는 예언이 없다는 뜻입니다. 이 말은 말라기 이후에 무조건 뭐다? 종말이란 뜻이다 이 말이죠. 왜? 더 이상 추가될 예언이 필요 없기 때문에.

자, 여기 엘리베이터 있는데 처음부터 캠프가 일곱 개의 캠프가 있다. 그런데 오다 보니까 캠프1, 캠프2, 캠프3 계속 올라와요. 근데 여기 보니까 캠프6 있어요. 그러면 더 이상 캠프 있어요, 없어요? 캠프가 캠프6 있고 그 다음에 캠프7이 정상이라면, 캠프6 있고 그 다음에 캠프 있어야 돼요, 없어야 돼요? 없어야 돼요. 왜? 마지막 정상이 뭐냐? 캠프7이기 때문에. 완료되었기 때문에.

마태복음 16장에 보면 변화산 나오지요. 거기에 누가 모입니까? 모세 모여 있고 엘리야 모여 있죠. 캠프1, 2에 있는 사람 다 모여 있어요. 그 말은 뭐냐? 캠프7에서 이미 캠프1을 완료된 상황에서 이미 여기서 맛보기로 다 보여준 거예요. 이게 뭐냐? 역으로 흘러가는 시간이에요.

우리 지상에서는 시간이 과거에서 미래로 흘러가지만 하늘나라에서는 미래에서 거꾸로 현재에 침범해버려요. 그래서 예수님이 뭐라 합니까? 침노하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 사실은 침노당하는 자는 구원을 받아요. 미래의 시간으로부터. 미래의 소년 코난. 미래 소년 코난부터 침략당해야 구원받습니다.

이걸 가지고 고린도후서 2장에서는 그걸 보증금이라. 보증금 줬다고 입주 안 됩니다. 그죠? 입주는 이제 보증금이죠. 근데 보증금을 가지고 두 자로 뭡니까? ‘성령’이에요. 하나님께서 보증금으로 우리 안에 뭘 줬다? 성령을 줘서 안에서 보증금이 있으면 천당, 마지막 심판 때 구원, 보증금 없으면 지옥이에요. 행동을 얼마나 개차반 했느냐 그걸 묻는 게 아니고, 내가 준 것, 하나님이 준 게 있느냐 말이죠. 니가 뭘 이루었느냐가 아니라 니가 얼마나 교회에 충성, 봉사했느냐가 아니라 헌금했느냐 그걸 묻는 게 아니고 내가 준 것, 그건 성령이죠.

성령이 임하면 죽은 자도 주께서 죽은 자를 살리신 영이 너희 속에 임하면 죽은 너희들도 살리시리라. 로마서 8장 11절에 나오죠. 성령이 보증금으로 하나의 신용카드 칩처럼 박혀있으면, 성령보고 우릴 구원합니다. 이건 왜냐? 미래 소년 코난처럼 미래의 시간이 미리 앞당겨서 우리 속에 들어오면 우리는 종말론적 사람으로 달라집니다. 이걸 가지고 그리스도의 증인이라 해요. 사도행전에서. 성령세례 받으면 우리는 내 중심이 아니고, 누구 중심? 그리스도 중심으로 돌아갑니다. 모든 이 세상의 원형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그를 위하여 만들어졌다. 모든 것이 예수님으로 해석 다 해버려요.

어제 대구 강의할 때 했는데 우리 인생이 변화가 많잖아요. 변화가 무상하게 올라갔다, 내려갔다 변화가 많은데 위에서 보면 변화가 고정돼있어요. 뭐냐? 와류, 소용돌이죠. 에베소서 1장 10절에 뭐라 돼있습니까? 세상, 전 세계 모든 것은 예수님 안에 통일되죠.

예수님이 가운데 있고 우리는 A라는 이 지점에 있어요. 우리는 물결에 저 혼자 인생을 살면서 팔십 살 살면서 올라갔다, 내려갔다 망했다 하지만 이게 말려들어요. 어디에? 예수 그리스도의 물결에 그렇게 온갖 고생하면서 결국에는 뭡니까? 세탁기의 세탁조에 물 빨아 당기듯이 결국은 예수 그리스도 빨려 들어가면서 골로새서 1장 16절, 모든 세상 말로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위하여 만들어졌다. 처음부터 말려들어갔다. 예수님의 공의와 예수님의 긍휼하심과 공의를 보여주기 위해서 말려들었다.

그래 우리는 인생역전하면서 여러 번 왔다갔다해도 이거 주께 신경 안 씁니다. 니 방향이  뭐냐? 니 방향이 어디냐? 니 가는 방향이 그리스도 세계냐, 아니면 지옥이냐? 그걸 보지, 방향이 문제지 지금 내가 곗돈 깨졌다. 계 깨져서 얼마 망했다. 이런 거 별 중요한 거 아닙니다. 종말론적 현상에서는 그걸 방향을 보여주는 그런 기적들이 있지요. 조금만 하고 마치겠습니다.

지금 사도행전 2장에서 “모든 육체에 부어 주리니 너희의 자녀들은 예언할 것이요 너희의 젊은이들은 환상을 보고 너희의 늙은이들은 꿈을 꾸리라” 자, 여기 용어보세요. 환상 나오고, 예언 나오고, 꿈이 나오죠. 이 용어는 어디 용어냐? 종말 되기 전에 구약 때 쓰는 용업니다. 이 용어가 실제로 신약에 와서 보니까 환상, 방언, 예언, 꿈 이 모든 것이 단 한 마디에 모여져요. 뭐냐? 뒤에 보면,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자, 그렇다면 구약에서 꿈과 환상, 예언 이 모든 것이 송두리 쳐서 어디 들어갑니까? 지가 어떤 개차반 같은 인간도 주 예수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여기에 초점이 있습니다. 다른 말로 하면, 니, 누구 공로로 구원받노? 나, 예수님의 공로로 구원받습니다. 여기 초점이 있어요.

다른 이름으로? 니 이름으로 구원받나? 다른 말로 하면, 니 행함으로 구원받나? 아닙니다. 니 이름 아니라면 누구 이름이지? 이 세상에 다른 이름으로 구원 준 적이 없습니다. 그 이름이 누군데? 예수 이름으로 구원받습니다. 예수 이름이라 하는 것은 다른 말로 하면, 예수님의 능력으로, 예수님의 공로로. 그 이름이라 하는 것은 그 이름을 지닌 분이 하신 일이거든요. 예수님이 하신 일로 구원받습니다.

그런데 세상에 어느 인간이 날 때부터 지 밖에 모르는데 나는 이장우 목사 때문에 구원받습니다. 이런 말을 울컥, 구역질나서 하지 못하죠. 그게 예의상 하겠지만 실제론 꿍꿍이는 자기가 챙기잖아요. 진짜 자기 포기하고 예수님 공로라 하는 사람은 진짜 거기 나사로나 안 그러면 창녀나 그런 인간들 강도나 그런 인간들 할 수 있지, 정상인 같으면 못 합니다.

왜? 지도 한 가닥 하거든요. 지도 한 기도할 줄 알고, 십일조 많이 했고, 목사라 해서 설교 좀 했고, 강의 좀 했다 돌아다녔다 까불러대는데 나는 아무 소용없습니다. 주께서 하십니다. 이게 말이 성령 아니면 나올 수 없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것은 뭐냐? 예언이란 영을 받아야 되고, 환상이란 영을 받아야 되는데 그게 뭐냐? 나를 죽이는 영이여. 성령은 나를 박살내고 그리스도의 살아있다는 걸 보여줍니다. 나는 십자가와 함께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고, 이제 내가 사는 것은 내 안에 그리스도라는 것을 드러내는 사람만이 이런 예언과 환상과 꿈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소릴 듣습니다.

근데 이 구약용언데 이 구약용어를 종말론적으로 보면 오직 그리스도를 고백으로 나타나야 되는데, 세상에 이 용어를 신약용어로 끌어당겨서 나는 꿈속에서 뭘 봤다 이래 나오는 사람 있어요. 그건 베드로가 구약용어를 종말론적으로 사용할 때는 어떻게 사용하느냐를 몰라서 그렇게 문자적 해석 그거 잡아당겨서 역사적 해석으로 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럼 우리가 뭐냐? 성령세례 받았다하니까 성령세례 받은 것도 똑같이 사용해요. 성령세례 뭔가 불이 와야 된다는 거예요. 난로 옆에서 기도해 보세요. 불 받지. 뜨거워서. 난로 옆에 안 뜨거울 수 있어요. 벌건데. 여기서 한 10분만 기도해보세요. 벌겋게 되서 불 받아서 얼굴 벌겋게 돼요. 난로 없다면 손바닥 쳐요. 손바닥 두드려보세요. 열 받지. 성령 받지. 뜨겁잖아요. 뜨거우니까 언어가 안 되니까 언어가 방언이 튀어나와요. 랄랄라~ 룰루~랄라~ 뜨거우니까. 전부다 엉터리잖아요.

구약의 방언은 신약의 뭐라고요? 똑똑하게 말하는 겁니다. 통역을 해서라도. 뭐냐? 예수님의 공로로 구원받았습니다. 똑똑하게, 이성적으로, 아무 하자 없이, 분명하게 이야기해야 돼요. 우리 구세주는 누구다? 예수님. 나사렛 예수다. 어디 고린도전서, 갈라디아서 보세요. 사도 바울이 똑똑하게 이야기합니다. 너희 눈앞에 십자가가 보이거늘 누가 너를 꾀더냐? 아주 명확하게 명백하게 십자가, 분명히 이야기합니다.

십자가 외에는 십자가는 십자가 구원의 능력으로 구원받고, 십자가는 사람들에게 어리석게 보이지만 구원받는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지혜다. 이 십자가를 인간의 힘으로는 알지 못하고, 하나님의 깊은 곳을 알지 못할 때 성령을 통해서 은혜가 올 때 비로소 그 사람은 십자가를 안다. 고린도전서 도처에 뭐 불명확한 게 없어요. 너무나 명확해요. 십자가. 나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못 박힌 것 외에는 알지 않기를 원하노라. 갈라디아서 6장에 나는 십자가 안에서 세상은 죽고, 세상은 십자가 밖에서 죽었다.

이게 우물 아닙니까? 사도 바울 우물 속에 들어가 있는 거예요. 십자가는 우물이에요. 세상은 십자가에서 보니까 죽은 놈들이고, 자기 안에는 살았고, 세상에서는 우물 속에 들어가 있으니까 빠져 죽은 놈이고, 자기는 살았고. 이 우물이 십자가니까 이건 뭐냐? 죽음이에요. 죽음 속에 있는 자만이 산 자가 되는 거예요. 자기가 죄로 말미암아 죽은 자가 될 때 그 사람이 십자가 안에서 이미 의인이요, 산 자가 돼요. 로마서 6장에 이미 그리스도와 함께 있다는 이유로 산자가 되는 거예요.

그 다음에 2장 25절. 이것만 하고 마치겠습니다. “내가 항상 내 앞에 계신 주를 뵈웠음이여 나로 요동치 아니하고” 이게 어디 나오죠? 시편에 나오지요. 시편에 나오는데 보세요. 구약에 나오는 시편이 종말론적으로 해석을 하니까 이 주가 누구에요? 예수 그리스도가 주 됐어요. 구약 때는 이게 누구냐? 여호와인데 전부다 예수님으로 다 바꿔야 돼.

왜냐하면 그때에는 희미한 거울이 면이 보이질 않아서 몰라. 뭐가 있는데 뭔지 모르는데 신약에 와서 말끔하게 치워보니까 그분이 예수님이라. 예수님이 구약 때 미리 작업 들어가서 신약의 나타날 예수님이 구약에서부터 미리 가서 작업을 걸은 거예요. 그래서 아브라함이 누굴 보기를 원했습니까? 예수님 보기를 원했다가 아브라함이 누굴 만났습니까? 예수님 보고 기뻐했잖아요.

누가복음 16장에 보면 아브라함이 어디 가 있어요? 천국 가 있어요. 누구 작업 때문에 그렇습니까? 장차 오실 예수님의 십자가 공로를 그 완료된 상황이 미리 앞당겨서 아브라함에게 오니까 아브라함은 지 때를 살면서 용서를 미리 앞당겨 받은 거예요. 용서를 지상의 시간대로 보면 앞당겨 받고, 하늘나라 보면 나중에 되지만. 미리 앞당겨 받아서 아브라함은 약속에 의해서 의인 된 채 천국에 가 있어요. 거지 나사로와 함께. 십자가 이후에 우리는 지금 예수님과 더불어 함께 영이 임할 때 이미 용서 받고, 장차 우리 몸은 예수님처럼 변화되고.

그러니까 내가 끝으로 래드 하는 이야기를 중요히 여기면서 하고 싶어요. 지금 세상 사람들 차타고 하면서 왔다갔다하잖아요. 예수님이 살아났습니다. 이것은 삼성의 비자금을 폭로하는 변호사가 삼성이 이런 비자금해서 이런 뇌물 줬다는 그 폭로하는 그 소식 그거는 내가 우리가 살 수 있고 내가 우리가 살아났다 하는 예수님 부활했다는 소식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런데 그 옆에 누가 있습니까? 천주교 신부들. 천주교 신부가 그 앉을 자리가 아니에요. 그들은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을 증거할 자리지, 그 변호사 옆에 앉을 자리가 아닙니다. 그런데 이 성문교회에서 예수님 부활 증거하는 것은 신문 나지도 않고, 되도 않은 삼성그룹 비자금 챙겼다는 그거는 신문에 대문짝하게 나고. 그러니 이 세상은 포기해도 괜찮을 세상이에요.

그 이유가 뭐냐? 사실은 우리도 변호사 옆에 앉아서 출세하는 그것이 더 원하지만 웬 은혜인지 웬 축복인지 전봇대 그림자가 드리워져서 장차 될 주 되심이 미리 내 마음속에 들어왔다는 잘못이라면 그 잘못이지요. 첫 열매가 예수님이고, 그 다음 열매가 우리라는 걸 알게 된 그 열매 때문에 우리는 불가불 그리스도의 증인을 땅 끝까지 전파해야 되는 겁니다. 땅 끝까지 예수님 증인으로 살 수밖에 없어요. 주께서 그렇게 만들어 주실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사도행전을 육적인 해석으로 해서 모방한다고 교회되는 게 아니라 아예 교회 자체 생각하지 말고 주님 생각하면서 주님 만날 날을 손꼽아 기다리는 그 사람이 바로 진정한 교인이요, 성도요, 그리스도 몸인 것을 저희들이 전파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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