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1106a 부산강의 : 조지 래드 [신학신약]-사도행전의 신학 (강의:이근호 목사)
오늘은 23과 [사도행전의 신학]에서부터 24과 [부활], 25과 [종말의 케리그마], 26과 [초대교회] 전체 다를 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사도행전을 이렇게 마태, 마가, 누가복음을 대하다가 사도행전 다음에 뭐죠? 로마서죠. 로마서를 대할 때 성경해석을 문자적으로 해선 안 된다. 그리고 마태, 마가, 누가, 요한복음도 문자적으로 해석하면 안 된다. 이렇게 이야기하면 사도행전에 들어와 버리면 영적 해석 다 날아가 버리고 문자적 해석에 아주 열광을 해요. 사람들이.
CF에 이런 게 있지요. 두 선수가 아이스링크를 타다가 쫘악 하는데 마지막 가서 맨 땅에 그냥 하지 못한 거 있지요. 영적 해석을 그렇게 주장하면서 영적, 영적 해석 쭉 오다가 갑자기 사도행전에 와서 추락을 해버려요. 사도행전에 와서는 이거는 맨 땅으로 가버려요. 마태, 마가, 누가, 요한에서는 묵시적으로 해석해야 된다. 역사적으로 해선 안 된다. 이래 하다가 그만 사도행전에 와서는 맨 땅에서 역사적 해석이 전부인 양 그렇게 돼버립니다.
이 맨 땅에서 사도행전, 이 맨 땅이라 하세요. 마태, 마가, 누가, 요한은 아이스링크라면 사도행전은 맨 땅 같아서 특별히 어떤 다른 설명이 필요 없을 정도로 같은 역사적 사실이기 때문에 역사적 사실은 이건 그냥 모방하면 여기서 동질화가 되겠지요.
교회를 어떻게 할 것인가? 마태, 마가, 누가, 요한 다 때려치우는 거예요. 예를 들면 마태복음 20장입니까? 거기 보면, 땅에 있는 지도자를 지도자라 하지 마라. 그거 마태복음 해석 어떻게 하겠어요? 아하, 목사가 지도자가 아니구나. 하늘에 계신 예수님만 지도자구나. 이렇게 나오다가 아이스링크 타다가 갑자기 사도행전 쑥 들어가면 봐, 집사 있잖아. 사도 있잖아. 장로 세우자. 이래 된다 말이죠. 영적인 해석하다가 갑자기 맨 땅으로 확 내려가 버렸어요.
여기서 교회냐, 교회 아니냐를 여기서 소급해요. 사도행전에서 소급 다 내버립니다. 모방은 동질화가 되죠. 이 사도행전 하는 그대로 모방해 버리죠. 여기서 하는 체제, 여기서 하는 기구, 조직, 여기서 하는 주장하는 거 그 용어를 그대로 사용해서 여기서 유사, 유사품이라 하지요. 가짜 명품을 만들어내요.
일단 여기서 다 만들어놓고 그 다음에 사도행전 끝나고 뭐가 나옵니까? 로마서 나오지요. 로마서에서 하는 이야기가 이쪽의 역사적 이런 해석, 문자적 해석을 공격한다는 사실을 생각 안 하고, 이미 구축해 놓은 이 모방한 교회에다가 그냥 로마서만 흉내 내는 거예요. 흉내 내다가 이게 지금 역사적 자기들의 모방한 교회에 로마서가 별 도움 안 된다 하면 로마서도 갖다 버려버려요.
[목적을 이끄는 삶] 이게 로마서를 대체해요. 로마서 같은 건 필요 없어. 목적을 이끄는 삶, 행복한 가정 만들기 그게 대신해 버려요. 왜냐하면 이거 유지한다고, 사도행전을 따라했던 교회 유지한다고 로마서고 뭐고 요한복음이고 다 갖다 버려요.
이 사도행전을 비록 역사적 모습 띠더라도 이걸 뭐로 해석해야 되느냐 하면, 성령에 의해서 성령에 의한 해석이 돼야 됩니다. 이게 영적 해석돼야 돼요. 마태, 마가, 누가, 요한을 영적 해석하듯이 로마서 영적 해석 하듯이. 예를 들면 이런 겁니다.
요한복음에서 오병이어 떡을 줬다. 오병이어 떡을 뗄 때 사람들이 왔잖아요. 그러면 사도행전에 그들이 서로 자기 것으로 여기지 않고 떡을 뗐지요. 자, 사도행전에서 서로 떡을 떼며 한 가족처럼 형제를 나누었다는 사실과 요한복음 6장에 예수님께서 오병이어를 행했다 할 때 어느 것도 주도권을 갖고 있는지 해 봅시다.
예수님께서 오병이어를 한 것은 떡을 먹고 배부르면 안 된다. 그게 교회가 아니라는 거예요. 그거는. 떡을 먹고 배불러서 쫓아온 놈들은 전부다 어디 간다? 다시 유턴해서 지 자리고 돌아가고, 아버지께로 오지 아니하면 아무도 올 수 없는 폐쇄된, 도저히 하나님이 따로 선택한 자의 모임에 그들의 그런 인식 가지고는 개입을 참여를 못한다는 것을 알려주기 위해서 오병이어를 했다 이 말이죠.
그런데 사도행전에 보면 떡을 떼고 서로 나눠주니까 교회가 서로 구제하고 도와주면 그게 교회인 줄 알고 있어요. 이미 인식은 뭐냐 하면, 사도행전하고 유사한 행태로 움직이면 이미 이거는 뭐가 해도 교회다. 라고 다짐을 한 상태에서 그 다음에 사도행전을 들먹여서 자기 존재를 자꾸 확인하려고 자기 존재의 정당성을 나타내려 한다니까.
그러니 교회냐, 교회 아니냐를 사도행전 안에 뭐가 들어 있느냐 하면, 사도 바울이 들어 있잖아요. 베드로가 들어있고. 그러면 사도행전의 해석은 사도 바울이 설교한 내용이 사도행전 전체를 주도권을 쥐고 이렇게 활동한다. 이래 봐야 됩니다. 로마서, 고린도서, 갈라디아서 이런 내용이 사도행전에도 동일하게 적용되는 걸로 봐야 돼요.
사도행전에서 그게 역사적으로 되어 있으니까 그대로 모방하는 하나님이 인정해준 사도행전과 똑같은 교회가 되리라. 하는 그 안일함. 그 안일함을 지금 저희가 공부하고 있습니다. 사도행전대로 해버리면 사도행전을 역사적 해석을 해버리면 거기에 뭐가 있느냐 하면, 새로운 종교단체가 등장하죠.
그러면 일반인들을 사도행전의 종교단체로 일단 가입시키고, 이 종교단체를 뭐로 만드느냐? 영적인 단체로 만들면 이것이 하나님이 원하는 교회가 된다. 이렇게 일반인을 종교단체로 일단 모아놨다가, 종교단체 형식이라 하는 것은, 서로 떡을 떼며 성령받기 위해서 충만케 위해서 모여 기도한다든지 그러면 선교 한다든지 그런 거 아닙니까? 종교 활동하지요. 일반인들은 종교 활동을 하고, 종교 활동을 영적으로 아마 하나님께서 간주할 것이라는 그러한 안일함이 사도행전을 보는 사람에게 누구나 있을 수 있어요.
그러나 방향을 보세요. 일반인을 종교단체로 하려면 뭐가 필요하냐 하면, 종교적 특수 용어, 특수 개념을 사용하면 되는 겁니다. 종교용어죠. 그러니 기도를 하지 않는 일반인에게 기도를 하라 하면, 이게 종교용어가 돼요.
교회라는 건 종교용어고 전도, 선교 종교용어죠. 교제하는 것도 종교용어고, 교회도 종교용어고. 부활, 그리고 십자가, 예수 전부다 이게 종교용어가 되는 겁니다. 그러니까 일반인들은 뭐냐 하면, 지금까지 자기가 알고 있던 용어에다 더하기, 플러스 뭐하느냐 하면, 종교단체에서 요구하는 종교 특수용어들, 이거는 특수한 종교용어들. 종교용어들을 추가해서 다 갖고 있어요. 일반용어에다가.
시장바닥에서 부활, 전도, 십자가 이야기 안 하잖아요. 시장바닥에서 쓰는 것은 뭐, 이거 깎아주세요. 그런 용어한단 말이죠. 그런데 기도하면서 하나님, 좀 깎아주세요. 이런 소리 안 하잖아요. 하나님이여, 주의 영광을 위해서. 이런 용어 한단 말이에요. 주의 영광은 특수 용어 아닙니까? 일반 시장바닥에서 찜질방에서 안 나오는 용어 아닙니까?
일반인이 특수용어를 사용해 버리면 일반인들은 자기가 쓰는 용어 더하기 특수용어를 사용하는 겁니다. 당회로부터 어린아이까지 축복해주옵소서. 축복도 마찬가지에요. 축복도 일반 용어잖아요. 그렇게 되면 그것이 하나님 보시기에 영적인 단체로 인정받는다. 이 수법을 사용할 수 있는 거예요. 사도행전 역사적 해석을 가미해버리면.
그래서 목사들은 뭐냐? 일반인들이 사용하던 종교단체, 종교용어를 사용하게 되면, 그것이 하나의 우리의 용어를 이해하는 저거들끼리의 특수집단화가 되면서 그것을 교회라고 쉽게 수용하는 그런 오류가 발생돼요. 그런 오류가.
지금 제 말에 무슨 뜻인지 모르는 사람은 바로 요한복음 6장 아까 예를 들어 보세요. 요한복음 6장에서 예수님께서 떡을 줬잖아요. 떡은 종교용어가 아닙니다. 내 살과 내 피를 마시라. 이건 종교용어가 아니에요. 종교용어가 아니니까 일반 용어를 쓰는 사람에게 영적용어가 바로 와버리니까 그들은 이해하지 못하니까 도로 자기 집으로 다 돌아가 버렸어. 예. 어렵도다. 이 말이 어렵도다.
우리가 하나님께 걸칠 수 있는 어떤 다른 용어를 한 단계 더 거쳐서 달라 이 말이에요. 그들이 요구하는 것은. 그들이 납득이 되는 용어 하나 거쳐서 그 납득되는 용어를 통해서 그걸 영적으로 더 다시 올라갈 수 있는 그런 바탕을 만들어 달라 이래 하는 거예요.
주님 쪽에서는 그 짓을 안 합니다. 왜 안 하느냐 하면, 너희들이 접근한다고 해서 구원되는 것이 아니고, 위쪽에서 접근해버려요. 그러니까 영이 종교단체라는 게 없이 영이 바로 일반용어로 와버려요. 실상으로 와버린다고.
박윤진 씨 글 보세요. 종교용어 있던가요? 거의 없지요. 일상을 박살내는 내용 아닙니까? 그렇지요. 여러분, 박윤진 씨 글을 딱 보게 되면 일반 목사 설교하고 뭔가 뭔지 모르지만 차이 나죠. 그 차이가 뭐겠어요? 박윤진 씨 글, 이걸 오늘 김대식 씨 글. 뭔가 설교는 아닌데 저런 식으로 설교하면 교인 한 명도 안 나올 건데. 박윤진 씨 글해서 설교해서 한 명도 나오겠어요? 한 명도 안 나와요.
아니지만 그것이 십자가를 표현하잖아요. 그럼 일반 목사하고 다르잖아요. 글이. 글 전체 뉘앙스가 스타일이. 뭐냐 하면, 중간 종교용어를 빼버린 거예요. 빼버리고 영적으로 일반과 같이 통합을 시켜놓은 겁니다. 영적으로 설명해 버린 겁니다. 그러니까 뭔가 달라도 달라 보이는 거예요.
일반 목사들이 설교하는 거, 기존 목사들이 설교하는 거 하고 다르잖아요. 일반 목사의 설교는 설교에 나오는 용어들 몇 가지 알면 마치 내가 거듭난 것처럼 착각하게 만들죠. 축복이란 용어를 알고, 부활 용어를 알면 거듭난 거로 하잖아요. 그런데 박윤진 씨 글은 부활이고 축복이고 다 때려 부셔버리죠.
사람들이 신을 향할 때 자기가 현재 쓰는 거와 탈피한 특수한 용어를 따로 설정해서 그 용어까지 앎으로 말미암아 마치 거듭난 사람인 양 행세한다는 것을 우리 주님이 아십니다. 그런데 거기에다가 사도행전에 갑자기 이렇게 마태, 마가, 누가, 요한 하다가 사도행전의 역사적 용어들이 튀어나오니까 역사적 사실 하니까 역사적 사실이 나오는 이러한 형태를 그대로 모방하면 그것이 참다운 교회의 표적인 양 그렇게 행세할 여지를 줘버린 겁니다.
사실은 이러한 해석은 바로 무슨 해석이냐? 육적인 해석입니다. 그런데 제가 보기에는 사도행전 나온 책 중에서 영적인 책을 저는 본 적이 없습니다. 영적으로 해석한 사도행전 책을 본 적이 없어요. 이것도 마찬가지에요. 신학교수들이 기존 교회한테 알랑방귀 뀌려고 아부하려고, 로마서도 영적으로 해석해 놓고 사도행전에 와서는 그만 입이 쑥 들어가 버려요.
사도행전 초대교회에서 이렇게 했기 때문에 우리도 이렇게 하면 교회 됩니다. 이런 것은 마태, 마가, 누가, 요한복음, 로마서 사상이 도대체 용납이 안 돼요. 사도행전 자체도 용납을 안 해 줍니다.
육과 영의 만남은 깨지고 깨는 관계에요. 근데 사도행전에 보면, 사도행전을 육적으로 해석해버리면 깨질 것은 없고 추가할 것만 있죠. 제 말 이해하시겠습니까? 아하, 교회 이런 모습으로 하면 되구나. 추가할 것만 있지, 구태여 깨질 게 뭐 있어요. 추가만 하면 되는데.
그러나 로마서나 갈라디아서 이런데 보면 영이 계속 뭘 공격합니까? 육을 공격하잖아요. 육을 공격한다고. 영이 육을 공격하잖아요. 죽어라. 세상의 끝 날에 완전히 구경거리다. 쓰레기 같은 취급 밖에 못 받는다. 공격한단 말이죠.
사도행전엔 그런 게 없습니까? 있습니다. 사도행전에 그런 게 나오는데 그게 눈에 안 띠는 거예요. 눈에 안 띠고 뭐냐 하면, 역사적으로 교회를 어떻게 만들면 교횔까? 지금 온통 관심사가 일반인들을 포섭해서 교회 만들기 위해서 일반인들에게 약간 추가적인 다른 용어들, 특수용어들을 익혀서 그걸 습관화시켜서 당신은 교회 맞습니다. 교회 오니까 거듭난, 이래서 우리는 교횝니다. 라고 이거 하는데 급급해서 진짜 사도행전에서 영적으로 육을 치는 그런 내용이 처음부터 끝까지 다 깔려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걸 끄집어낼 수가 없어. 끄집어내질 않습니다.
사도행전에 나오는 사도행전을 다루었던 모든 주석가나 신학자도 마찬가지 이 사람도 마찬가지고 사도행전을 영적으로 해석을 안 해요. 역사적으로 해석을 해버립니다. 잘 나가다가 마태, 마가, 누가, 요한 잘 나가다가 쑥 빠져버려요. 그리고 다시 끝나고 다음 로마서, 고린도전서 하는데 이런 경우 뭐냐 하면, 기존의 우리가 생각하는 교회 손대지 마라. 이거는 맞다는 거예요. 거기다가 내용 채우기. 이런 것을 역사적으로 교회 되었으니까 간판 걸었으니까 거기에다가 마태, 갈라디아서 그거 채우면 이제 교회 된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진짜 영적으로 해석해 버리면, 기존의 교회라는 그 교회를 로마서가 갈라디아서가 폭발해버리는 거예요. 작살내버려요. 특히 고린도전서 같은 경우에. 이런 인간들이 인식하는 교회를 아주 해체시켜버려요.
사도행전의 신학에서 빨리 교회, 현재 우리의 교회가 사도행전의 교회 맞나? 라는 것을 견주어 볼 그런 선입관부터 우린 버려야 돼요. 사도행전의 주제는 예수님이 주 되심이지 교회 만들기가 아닙니다. 물론 이 책에도 그런 뉘앙스는 아니지만 이 책에 보면 자기도 많이 공부했기 때문에 좋은 말 많이 나와요.
그 중에 뭐냐 하면, 그 중에 몇 가지되는데, 내가 이거 다 읽어보니 몇 가지되는데 그 중에 뭐냐? 교회는 여러 교회라는 것은 없다. 오직 교회는 유일하게 하나 교회 밖에 없다. 에클레시아는 하나 밖에 없다. 그래 놓고 그 근거를 제시 안 해요. 왜? 몰라요.
고린도교회 따로 있고, 다른 고린도 교회 말고 따로 없다. 전부다 한 교회 밖에 없다. 무슨 근거에서 그렇게 주장하느냐? 근거를 못 밝혀요. 만약에 그 근거를 밝히게 되면 이 래드라는 신학자는 기존 교회한테 욕 얻어먹습니다. 왜냐하면 교회는 경쟁 없이는 크질 않아요. 만약에 전체가 하나의 교회라면 미쳤다고 내가 큰 교회할 이유가 뭐가 있습니까? 옆에 수퍼나 이 수퍼나 같은 집이라 하는데 뭐하려고 손님 더 받으려고 합니까? 대충 하다가 그냥 살다 죽지.
내 교회만이 교회라고 해줘야 그게 경쟁이 된다니까. 그게 차별화 되고요. 지금 십자가마을 제일 초점 맞춰서 지금 칼 갈고, 뾰족하니 죽창 갈아서 공격하는 게 뭡니까? 십자가마을 공격하는 게. 너거들만 복음 알고, 너거들만 주의 종이고, 너거들만 교회냐? 이거 아닙니까. 그렇지요. 그렇잖아요.
십자가마을에서 이야기하는 것이 교회 이야기하지 않고 예수님 이야기했는데 그렇잖아요. 복음 이야기했는데 그들의 관심사가 복음에 관심 없고, 어디 관심 있다? 저놈의 교회가 진짜 교횐가, 우리 쪽이 교회가. 출발점이 교회에요. 출발점이 교회로 삼았다는 것은 저거들은 결국 육적인 것이 약간 늘어나면 그게 뭐 된다? 교회 된다는 말입니다. 이게. 인간의 육이, 인간의 종교적인 육성이 약간만 늘었다 싶으면 그게 전부다 교회 돼요.
왜냐하면 그 관심사 자체에서 탈출을 못하니까. 그 교회 누구 속해있다? 본인들이 속해 있어요. 그러니까 니 교회가 진짜가, 우리 교회가 진짜가? 이 말은 뭐냐 하면, 내가 진짜냐 이 말이거든요. 아무리 복음, 영적, 육적, 십자가 하지만 자기 부인이 안 돼. 자기 부인이 안 되는 거예요. 자기 육적인 거기서 한 발자국도 벗어나지 못하는 거예요.
그걸 사도행전을 보면서 오히려 정당화시키는 게 문젭니다. 사도행전이 어떻게 쓰여 있기에. 사도행전에 그러한 육적인 해석을 도모하는 곳이 아니잖아요. 그걸 옹호해 주는 게 아닌데. 도대체 사도행전을 어떤 안목으로 보기에 그게 되는가? 그러니까 사도행전 보니까 서로 모이고, 떡을 떼고, 성령세례 받고, 충만 받으면 그게 하나님께서 교회라고 해주더라 하는 거기에 그들은 흉내를 낸 겁니다. 이거는 언제든지 할 수 있는. 그래놓고 사도행전을 뭐로 해석? 역사적 해석을 하면 된다는 거예요. 끝이라는 거예요. 역사적 해석이 교회역사라는 겁니다.
이 래드한테 딱 단도직입적으로 이야기해요. ‘역사’가 의미가 뭔데? 답 못해요. 생각해 보세요. 역사의 의미를 알려면 무슨 의미를 해야 됩니까? 시간개념을 알아야 되거든요. 이 시간이 뭔지 아나? 몰라요. 그런 거 관심 없어요. 여러분, 시간이라 하는 것은 시간이나 역사라 하는 것은 뭐가 만들어지냐 하면, 내 몸이 만들어내요.
다시 해 봅시다. 역사라 하는 것은 그전에 뭐가 나왔다? 이야기해보세요. 역사라 하는 것은 깨보면 뭡니까? 시간이죠. 그런데 이 시간이 놀라운 것은 사람마다 다 달라요. 사람마다 시간이 다 다르지요. 시간과 공간은 누가 만들어요? 내 몸이 만들지요. 이해 안 되십니까?
각각 똑같은 공간에서 똑같은 다방에서 똑같은 환경에 있더라도 다방에 있는 1번 손님, 2번 테이블, 3번 테이블 있어도 사람들이 거기서 느끼는 그 상상하는 시간이 같아요, 달라요? 다 다르죠. 다 천태만태 다 다르죠. 그러면 각자의 다 다르다는 말은, 각자의 역사관이 다 같다는 말입니까, 다르다는 말입니까? 다 다르죠.
그러니까 역사라 하는 것은 뭘 정당화하느냐 하면, 내 존재를 정당화하는 거예요. 내 여기 있음을 정당화하는 거예요. 그럼 만약에 교회가 A라는 교회 있고, B라는 교회 있다. 각자 역사를 만들어내요. 그 역사가 똑같은 사건이 일어나도 A라는 교회는 자기 유리한 쪽으로 해석하겠지요. B라는 교회도 자기 유리한 쪽으로. 유리하다는 말은 뭔 뜻입니까? 역시 우리 교회는 무극, 영원토록 있어야 돼. 그거 하잖아요. 촛대 옮기면 안 된다. 라는 이 말 아닙니까?
지금 사도행전을 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역사로 해석해 버리면 남는 것은 뭐냐? 역시 우리 교회는 최고야. 이거만 달랑 남아요. 그럼 뭐가 안 남아요? 역사를 초월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부활이 안 나오지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부활 이야기하는 척하면서 끝에 보면 결국 뭡니까? 역시 우리 교회는 부흥되어야 돼. 이것만 남아요.
그 말은 무슨 뜻이냐 하면, 역시 부흥된 교회에 나오는 나는, 우리 가정을 행복해야 돼. 돈, 한 달 수입이 더 늘어나야 돼. 좀 더 나가면, 내 자식은 공부 잘해야 돼. 거기다 그걸 또 확대시키면 우리나라는 석유 나와야 돼. 올랐으니까. 우리나라 축구는 항상 이겨야 돼. 이게 사도행전을 아무리 큐티하고 아무리 연구해도 결국 나오는 것은 뭐냐? 신이시여, 나를 위한 신이 되기를 원하는 겁니다.
그래서 주일날 아침에 그런 예화를 들었습니다만 여러분, 배트맨 알지요. 배트맨이 건물 옥상에 있습니다. 건물 옥상에 조명이 있어서 조명발 배트맨 받아버리면 이 검은 창공에 뭐가 있어요? 배트맨 박쥐가 영상이 뜨지요. 이게 바로 신이라는 겁니다.
그러면 이 조명발 꺼버리면 배트맨 축소되면 신도 날아가 버리죠. 문제는 각 옥상마다 이런 배트맨이 자기만이 아니고, 한둘이 아니고 다 뜬다는 거예요. 이게 교회마다. 신이라 하는 것은 누가 만드느냐 하면, 내가 내 몸이 만드는 거예요. 신이라는 게.
그런데 개 같은 이방인들이 신을 섬기는데 전부 이런 식으로 섬기는 거예요. 그게 구약에서는 뭐라고 합니까? 그게 우상이라는 거예요. 우상을 분석해 보면, 누굴 위한 신이다? 나를 위한 신이에요. 나를 위한 신은 전부다 우상이에요. 나를 위한 신은, 나를 위한 하나님은. 전능하시고고 무슨 용어를 갖다 붙이든 나를 위한 신, 내 민족을 위한 신, 내 가족을 위한 신, 내 교회를 위한 신, 내 교단과 내 종교를 위한 신 전부다 우상이에요.
사도행전의 주제는 그것을 완전히 박살내는 게 주젭니다. 그래야 그게 영적인 해석이 돼요. 다시 이야기합니다. 역사적 해석을 해버리면, 결국은 중심이 누구한테 간다? 내 몸을 위한 내 몸이 잘되기 위한 그러한 성경말씀이 돼버려요. 이거는 엉터리 해석입니다.
십자가를 지고 십자가를 안다는 것은 자기를 부인하라 하는데 천하 자식이나 아내나 남편이나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합당치 않다 했는데, 그 말씀을 할 때는 마태복음에 나올 때는 영적으로 해석하다가 갑자기 사도행전에 쑥 꺼져 가서는 사도행전 가서는 떡을 떼며 서로 나누었으니까 우리 교회는 참된 교회입니다. 이런 식으로 참된 교회를 흉내 내고 있어요. 바자회 열면 참된 교횝니까, 선교사 보내면 참된 교회에요? 이건 전부다 역사적 해석 한 거예요. 사도행전 해석을 하면 영적인 해석을 해야 됩니다.
그러면 영적인 해석을 어떻게 하는가? 이 책에서 영적인 해석의 이 사람 나름대로의 근거가 뭐냐? 부활이었습니다. 24장 [부활]로 들어가 봅시다. 이 부활에 대해서. 조지 엘든 래드가 부활을 이야기할 때 뭔가 빠졌다는 느낌 안 듭니까? 부활을 이야기하면서 뭐가 빠졌어요? 십자가가 빠지지요. 이 사람 부활을 하면서 내가 부활 장을 쭉 읽어 보면서 유심히 봤어요. 이 사람이 사도 바울이
다시 이야기합시다. 사도행전에 사도 바울 나오지요. 사도 바울이 하는 이야기가 고린도전서에 나오지요. 그러면 고린도전서가 역사적 흐름을 봤을 때 사도행전 안에 들어있다고 봐도 괜찮지요. 그렇지요. 왜냐하면 사도행전에는 사도 바울의 활동한 게 나오니까. 그 사도행전엔 안 나오지만 그걸 세분화시키면, 그러니까 사도행전을 세분화시키면 여기서 뭐가 나오겠어요? 로마서 나오고, 갈라디아서 나오고, 고린도전후서 나오고, 베드로전후서 다 나오겠지요. 사도행전 안에 한 바구니에 달걀처럼 전부다 담겨있다고 볼 수 있지 않습니까?
그러면 고린도전서 1장에서 사도 바울이 하는 말이 뭡니까? 구원은 십자가만이 구원의 능력이라고 되어 있지요. 이게 지금 어디 있다? 사도행전에 들어있다고 봐야 될 것 아닙니까? 십자가만이 구원의 능력 아닙니까? 십자가만이 구원의 능력인데 이것을 이 사람은 사도행전을 보면서 십자가가 안 나오고 뭐가 나왔어요? 방금 한 뭐가 나옵니까? 부활이 나왔잖아요. 부활이 나왔다는 걸 증명하기 위해서 이 사람은 지금 사도행전의 부활을 다루면서도 고린도전서 15장에 나오는 부활에 나온 주제들을 채용하고 있지 않습니까?
내가 이걸 보면서 상당히 기대했어요. 자, 이 사람이 구원의 능력은 부활이 아니고, 십자가에 있다고요. 구원의 능력이 부활에 있지 않고 십자가에 있다는 그 차이점이 뭘까요? 오늘 강의 첫 번째 제일 중요한 거 나옵니다. 구원의 능력이 부활에 있지 않고 어디 있다? 십자가에 있다. 라 하는 것과 부활에 있다는 것과 차이점이 뭐냐 이 말이죠.
구원의 능력이 1번, 십자가에 있다. 2번, 부활에 있다. 나는 부활에 있다고 본다. 나는 십자가에 있다고 본다. 그 둘의 차이점이 뭘까요? 자, 우선 부활부터 설명해야 됩니다. 이 사람 식으로 설명합니다. 이 사람이 볼 때에 부활이 있다는 거예요. 예수님이 죽었다가 부활했다는 사실은 현재 우리는 지금 살아있지요. 살아 있는 상태에서 추가적으로 제가 아까 강의 제일 처음 이야기한 거예요. 추가적으로 사람은 죽어도 다시 살 수 있구나. 예. 사람은 죽어도 다시 살 수 있다.
그 증거가 뭐냐? 예수님은 죽어도 다시 살았는데 그것은 예수님이 부활의 첫 열매고, 그 다음 열매는 그 다음 차례는 누구라고요? 우리가 그 다음 차례니까 우리는 가만있어도 무슨 지식 하나만 얻으면 돼요? 사람은 죽는 것이 절망이 아니고, 그것으로 낙담할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는 무엇이 기다린다? 부활이 기다린다. 따라서 추가적으로 부활이란 지식, 부활이란 그런 것을 소망, 더 추가하면 나에게 추가된 부활 지식이, 개념이 나를 구원할 수 있다는 것이 현재 나에게는 편하지요. 나에게는 수월하잖아요.
여기 지금 뭐고? 하늘보리죠. 이건 뭐고? 쌍화차란 말이죠. 자, 나는 쌍화잔데 하늘보리를 하나 더 추가적으로 잡사보세요. 구원됩니다. 이러면 얼마나 이게 추가만 하면 되니까 수월하잖아요. 그런데 십자가는 뭐예요? 방금 부활입니다. 십자가가 구원의 능력이 된다면, 거기에 뭐가 따라 옵니까? 내가 같이 죽어야 돼요. 왜? 갈라디아서 2장 20절에 뭡니까?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못 박혔나니 이제는” 그 다음에 여러분, 이야기해 보세요. 야, 그게 어렵다니까.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라니까 ‘산 것이 아니요’ 두 자로 하면 뭡니까? 나는 뭐다? 죽었다. 하나님이 나를 죽은 자로 간주한 자에게만 그것이 부활이고, 영생이 보장된다는 겁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어느 인간이 지가 죽기를 원하는 사람 누가 있습니까? 처자식 많은데. 아직 자기 벌여 논 사업이 있는데. 그 동안 살아 온 노력한 것이 얼마나 힘들게 살아왔는데 왜 이 자리에 죽어. 내 미쳤다고 죽어. 앞으로 더 잘 살아야지. 오래 살아야지. 오래, 오래. 병원에 호스 꽂고 오래 살아야지. 그래서 오래 살아서 내 손자, 외손자, 증손자 많이 봐야지. 나를 죽이다니 내 손 끝 하나 대봐라. 나는 대번 반항한다. 이게 인간의 타고난 육인데, 내가 산 것이 아니요, 나는 죽은 자로 이미 죽었다고 간주해야 된다. 하는 그 십자가를 어느 인간 좋아하겠습니까? 하늘보리 하나 더 마시라 이 말이죠. 그럼 구원받는다. 이걸 더 좋아하지.
교회 나오는 목적이 뭡니까? 교회 안 나오고 살만 하지만 교회 나옴으로 추가적으로 더 행운이 따라오면 손해 보는 장사 아니다 이 말이죠. 이득 보는 장사 아니냐 말이죠. 교회 온다는 노동의 대가를 얻으면 그 대가 있으면 보람 있잖아요. 자기 손해 보려고 손해 볼까봐서 교회 오지 않잖아요. 하나님을 알 때가 더 이득을 봐야 이득 본 그걸 노리고 교회 온다 말이죠. 사람들이. 사람들이 자기 행동에 있어서 손해 볼 짓은 안 하잖아요.
그러니까 교회 오기 전까지는 뭘 몰랐다? 부활을 몰랐는데 교회 오고 난 뒤에 소망 하나 더 건졌다. 무슨 소망? 죽어서도 다시 산다는 소망. 그래서 교회 와서 다닐 마음이 난다 이 말이에요.
그런데 그 이야기가 누구 이야기는 아니다? 사도 바울의 이야기는 아니다 말이죠. 그 이야기가. 사도 바울의 부활이란 말은 뭐냐 하면, 십자가를 본격적으로 적용시키는 그 힘을 부활이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쉽게 하면 이 말이죠. 못을 박는데 보통 사람 드라이버 가지고 하면 낑낑거리며 안 들어간다고. 힘들어 못을 꽉 조여 줘버리면 아무리 남자라도 안 들어간다고. 그땐 뭘 합니까? 그 드라이버를 기계를 도원하면 팽하고 돌죠. 팽하고 돌면 앞에 있는 뾰족한 그 드라이버가 빨리 돌면서 아무리 단단한 나사못도 다 뽑히지요. 그 팽하고 도는 게 뭐냐? 그게 부활의 힘이고. 그 뾰족한 게 뭡니까? 십자가에요.
그러니까 십자드라이버를 빨리 돌기 위해서 부활이 있는데, 이 사람들은 앞에 십자드라이버를 잘라 버린 거야. 십자드라이버는 나를 부인케 하기 때문에 이건 싫고, 앞에 팽~하고 도는 거만 하는 거예요. 그 뭉텅이 돌아봐야 무슨 소용 있습니까? 아무 소용없지.
가슴을 파고들어야 돼요. 우리 육적인 죄를 파고들고, 죄를 파고들어야 되는데 이거는 소망 하나 건져가세요. 잘 오셨습니다. 죽어서 좋은데 천당 갑니다. 됐습니다. 돈 내시고 집에 가세요. 이런 식으로 하는 거예요. 그걸 어딜 근거해서? 놀랍게도 사도행전에 근거해서 하는 겁니다. 왜? 사도행전에 뭐만 교회다? 서로 떡 떼고 서로 형제여! 하면 교회인 줄 안단 말이죠. 이게 바로 육적인 해석 아닙니까? 성경을 해석할 때.
그렇지만 이 래드가 부활의 장에서 이야기한 것은 옳은 이야기가 많으니까 제가 부활에 대해서 전체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래드가 부활에 대해서 어떻게 봤느냐? 래드는 불트만, 보른캄이라는 그 제자들을 시비를 걸었어요. 뭐냐 하면, 지금 이 사람이 래드가 사도행전 하면서 왜 부활 장을 이렇게 길게 쓴 이유가 있어요. 사도행전을 뭐로 보느냐 하면, 사도행전을 실제적인 역사로 보고 싶어 하는 거예요.
그러면 역사로 보고 싶어 한다면, 그럼 사도행전의 실제적인 역사라면, 사도행전에 나오는 교회도 실제 한 교횝니까, 실제 한 교회 아닙니까? 실제로 있었던 교회지요. 실제로 있었던 교회라고 말해줘야 이거 약간 어렵습니다.
사도행전에 나오는 역사 속에 나오는 그 교회가 초대교회가 실제로 하나님 보시기에 진짜 교회라는 말을 해줘야 이 교회 그 뒤에 나오는 교회 1번이라면, 그 뒤에 교회 2번, 2001년도에 나오는 교회 3646번. 이것도 역사에 따라서 첫 번째 교회가 교회라면, 2007년도 11월 달에 교회도 뭐 된다? 교회된다. 이걸 잇고 싶어서. 역사적인 이걸 이어서 초대교회가 교회라면 지금의 교회도 교회 맞다는 것을 납득시키기 위해서 지금 이 작업에 나서는 겁니다.
아직 어려운 거 안 했어요. 이거 쉽지요. 그렇다면 초대교회가 교회 되게 했던 그 근거가 뭐냐 하면, 오순절 날 성령이 뭐 같이 왔습니까? 불 같이 왔지요. 성령이 불 같이 온 것도 초대교회가 역사적으로 합당하면 그럼 성령이 불 같이 온 것도 역사적으로 실제로 있었던 일이냐, 아니냐 이 말입니다. 그것도 있었던 일이죠. 그럼 성령이 온 것도 있었던 일이죠.
자, 보세요. 첫 번째 교회가 성령이 불 같이 내려서 첫 번째 교회가 됐다면 2007년도 11월 달 오늘날 있는 교회가 진짜 교회되려면 뭘 해야 돼요? 성령이 오게 되면 첫 번째 교회의 경우와 똑같은 법칙에 의해서 공식에 의해서 교회가 되겠지요.
자, 그러면 지금 우리 교회, 성문교회 맞습니다. 하고 오는 사람들에게 확신을 하려면 여러분들이 뭘 받아야 됩니까? 성령을 받게 되면 초대교회가 확실한 교회인 것처럼 우리 성문교회도 확실한 교회입니다. 라는 것이 이게 설득력이 있지요. 사도행전에서.
그 다음에 성령이 확실히 되려면 성령을 누가 보내느냐? 래드 이야기에 의하면 부활, 승천하신 누가 보내요? 예수님이 보내죠. 그러면 역사적으로 확실한 교회가 되려면 성령이 오는 게 확실해야 되고, 성령이 오는 것이 확실하게 되면, 뭐가 ( ) 예수님이 부활, 승천하셔서 지금도 예수님이 살아계셔서 성령 보내주는 것이 역사적으로 실제 사건이 되어야 된다 말이죠. 지금 2007년도 11월 달에 교인들이 궁금한 게 있어요. 뭐냐 하면, 목사님, 성령 어떻게 받아요? 이게 문제 아닙니까? 성령 받아야 우리 교회가 하나님 보시기에 진짜 교회 되는데, 그럼 성령을 어떻게 받아요? 이게 궁금하다 말이죠. 성령을 어떻게 받는가? 초대교회 어떻게 받았어요? 예수님의 부활을 믿으니까 성령이 왔고, 성령이 오니까 진짜 교회 됐잖아요.
그럼 2007년도 11월 달 우리는 뭘 믿으면 됩니까? 예수님의 부활, 승천을 믿으면 된다 이 말이죠. 그러면 예수님의 부활 승천을 믿는다는 말은 다른 말로 하는 게 아니고, 이 사람의 주장에 의하면, 예수님은 진짜로 확실히 진짜, 진짜, 진짜로 예수님은 진짜로 부활 됐다. 라는 것을 역사적으로 인식하는 것, 그것만 딱 되면 그것이 바로 성령 받은 사람이고, 그래 되면 2007년 11월 달은 진짜 교회 맞다. 라는 논리를 펴고 싶어서 이 부활 장을 이렇게 길게 한 겁니다.
이 말, 이 주장 맞습니까? 이 사람이 지금 관심사가 어디 있어요? 역사적으로 교회가, 결국 이 사람의 관심사는 뭐냐 하면, 지금 있는 이 교회가 진짜 교회 맞느냐? 라는 것을 교회 관심이 내 교회 맞습니다. 라는 데 관심이 있죠. 내 교회 맞습니다. 라는 데 관심을 가질 때 이 사람은 어떤 유리한 게 있느냐 하면, 우리 교회에서 벌어지는 것은 전부다 성령님이 하신 일로 교인들이 수긍할 수 있는 근거를 장만할 수 있죠.
여러분, 우리 교회는 전부다 진짜 교회 맞지요. 옛날 초대교회처럼 우리 교회도 하나님이 인정하는 교회 맞지요. 그렇다면 이 교회에서 목사가 하는 말, 진짜 하나님 뜻 맞지요. 맞지요. 그런데 왜 목사 말 안 듣습니까? 이래 나오지요. 내가 헌금 내라 하면 헌금 내야지. 건축헌금 왜 안 하고. 자가용 바꾸고, 사택 지어주라 하면 지어줘야지. 왜 말 안 들어. 이게 되는 거예요.
그러면 좀 유식한 교인들 뭐라 합니까? 목사님, 성경적 근거를 대세요. 할 거 아닙니까? 성경적 근거 대지요. 그런 소리 할 줄 알고 근거를 대니까. 해서 이래 나온다 말이죠. 그럼 목사님 역시 성경 전문가구나. 우리 아마추어가 뭘 알겠나, 프로가 알지. 하고 입이 쑥 들어가 버려.
그러니까 결국 뭐냐? 이 교회라고 내가 세운 교회, 성문교회가 내가 세운 교회가 진짜 교회고, 그 교회에 있는 목사가 진짜 하나님이 인정하는 진짜 목산데 이 목사 말 안 들으면 결국 뭐 받아요? 저주 받아요. 논리가. 고린도전서에 그래 되었든가요? 고린도전서 방금 한 대로 그런 거 가르치던가요? 고린도전서가. 갈라디아서 1장 8절에 뭐라 했든가요? 사도 바울이 했던 말이. “내가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뭘 받는다? ‘저주’를 받는다 했지요.
그러면 이 사람들은 아까 래드도 마찬가지지만. 이 사람은 지금 부활에 관심을 두는 진짜로 부활됐다. 되게 믿음 좋아 보이지요. 그런데 관심은 뭐에 관심이 없어요? 교회에 관심이 있지, 뭐에 관심이 없습니까? 복음에는 관심이 없는 거예요. 복음 앞에 뭐가 붙어야 됩니까? 무슨 복음? [십자가의 복음] 십자가의 복음에는 관심이 없어요.
지금 역사적으로 뭐만 남한테 설득력 있게 하려 합니까? 우리 교회는 천하 뭐라 해도 우리 교회는 진짜배기 이 지구상에서 남아있는 진짜 교회 맞습니다. 우리 교회는 진짜 교회 맞습니다를 증거하려해요. 지금 십자가 복음이 십자가로 여러분이 구원 받습니다. 이게 아니라 이 교회가 진짜 교회 맞습니다를 증거 하려한다니까. 십자가 복음이 아니고.
이 래드의 책을 읽어보면서 사람들이 래드가 예수의 부활한 진짜 육체적 부활, 그것 따라 하니까 래드는 정말 신학자고 진짜 믿음 좋다고 그렇게 하겠지요. 제가 다시 아까 박윤진 씨고 김대식 씨 하고 글들을 보면 관심사가 어디 있느냐 하면, 복음에 관심이 있지요. 근데 복음에 관심이 있기 때문에 뭐가 없어요? 종교용어가 별로 안 띠잖아요. 종교용어가. 그냥 실질 용어 가지고 복음을 설명하지 않습니까?
왜 김대식 씨와 박윤진 씨는 왜 종교용어를 사용 않습니까? 그 사람은 뭐가 아니기 때문에? 목사가 아니잖아요. 목사가 아니고 우리 일상생활 가운데 영적으로 어떻게 활동하고 주님께서 십자가로 복음을 어떻게 활동하나 그거에 관심이 있다 말이죠.
그런데 목사가 되면 생각을 두 개 해야 되는 거예요. 뭐냐 하면, 영적으로 활동하되 그것이 어디에 한데 결집되어야 합니까? 내 교회, 그것도 남의 교회 말고 내가 있는 내 교회에 와야 그게 돈이 되니까. 내 교회 교인 돼야 초점을 맞추어서 하니까 자꾸 종교용어를 사용해서 이 용어 쓰시면 우리 팀이라는 종교용어를 사용하는 거예요.
개혁이란 것도 종교용어 아닙니까. 개혁이란 말. 개혁이 복음이 아니거든요. 그런데 개혁이란 말 왜 사용합니까? 개혁이란 말 사용하는 우리 교회는 이미 개혁된 괜찮은 교회니까 오셔도 방문하셔도 괜찮습니다. 이런 자기선전하고 있는 거예요. 주님이 다가가는 게 아니라 그들이 찾아오도록 하는 거예요. 찾아오게 되면 교회를 거쳐서 천당 가는 게 돼요. 진짜 주님이 각 사람에게 다가가는 게 아니라.
래드의 부활관은 뭘 거부하느냐? 래드가 불트만을 지금 오해하고 있어요. 제가 글 보니까 불트만을 공격했잖아요. 불트만은 뭘 안 믿는다? 실제적인 예수 육체의 부활을 믿지 않는다. 지금 래드가 불트만만큼 실력이 없는지, 안 그러면 공부를 덜 했는지, 안 그러면 진짜 알면서도 의도적으로 그렇게 욕을 하고 있는지 모르겠는데 불트만의 생각을 완전히 곡해하고 있습니다. 뭐냐 하면, 불트만이란 학자는 뭐라 했느냐 하면, 예수님의 부활은 역사적 용어로 설명이 안 된다 했어요.
만약에 예수님의 부활은 영적 아닙니까? 영적인 것을 역사적인데 역사적이죠. ‘역사적’을 다른 말로 육적이죠. 만약에 영적인 사건을 육적으로 해 놓으면 여기서 어떤 현상이 일어나느냐 하면, 진짜 영적인 인간과 육적인 인간이 동일한 고백을 한다는 거예요. 지옥 갈 사람과 천당 갈 사람이 똑같이 고백하는 거예요.
이 말은 뭐냐? 예수님의 부활 사건이 사람을 지옥 보내고, 천당 보내는 기준이 될 수 없다는 것이 불트만의 생각입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합니까? 지금 예수님의 부활을 불트만은 예수님의 부활을 예수님이 하신 케리그마, 그게 뭐예요? 약속의 연속성으로 보잔 말이에요. 나는 죽었다가 사흘 만에 부활한다. 할 때 국립과학수사연구소에서 와서 예수님 붙들어서 당신 진짜 부활한지 조사해보자. 부활은 조사할 문제가 아니라니까요.
예를 들어서 나는 저 꽃을 보고 아름답습니다. 이 목사, 당신은 이걸 아름답다 봤는데 왜 아름다운데? 그걸 어떻게 설명합니까? 내가 아름답다는데 지가 뭔데. 내가 그 여자 좋아한다는데 왜 다른 사람은 그 여자 볼 것도 없는데 왜 좋아하느냐? 이건 시비 거리가 아니잖아요. 다른 사람은 안 믿어도 난 예수님이 죽었다가 사흘 만에 부활하고, 그분이 구름 타고 오시고, 그분이 바로 심판주고, 그분 나라에 영생나라에 들어간다. 라고 약속을 믿어버리면, 그 약속을 다른 사람이 역사적으로 그걸 분해해서 나도 같이 믿을란다. 역사적으로 믿을란다가 성립 될 수 없다.
역사적으로 믿을란다가 성립 안 되고, 아이고, 이 목사님. 저도 그렇게 믿는데요. 십자가 피가 우리 죄를 용서하고. 나도 그게 믿어지는데요. 이유는? 하면, 당신이 이유 댈 수 없듯이 나도 이유 없어요. 근데 우리는 같은 고백을 하고 있는데. 이래 돼야 돼요. 이렇게 돼야 된다 말이죠.
그런데 나는 역사적으로 따져 보니까 예수님의 빈 무덤이 있으니까 빈 무덤이 있는 걸 봐서 분명히 이거는 예수님이 죽었다가 살아난 것 맞다. 그걸 역사적인 증거를 갖다 대서 십자가 부활을 믿으면 구원받습니다. 이거는 복음이 아니에요. 오히려 갈라디아서에서 뭐라 합니까? 갈라디아서에나 고린도전서에서 뭐라 합니까? 예수님의 복음은 육적인 사람들에게 어리석게 보이죠.
그런데 사람이 죽었다가 산다는 게 어리석은 겁니까? 이거는 모든 종교의 모든 인간의 공통점인데? 사람이 죽어서 이 땅에 살다가 다른 나라에 가 더 살고 싶은 게 인간의 본성인데. 세상에 부활 싫어하는 사람 누가 있어요? 다 좋아하지. 십자가는 싫어해도 부활은 다 좋아하잖아요.
예수님께서 고린도전서 15장에서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는 말은 부활하셨다가 복음이 아니라, 이제 진짜 복음인 십자가는 헛된 약속이 아니고, 진짜 십자가의 피가 여러분 죄를 용서하고 영생 줍니다. 라는 것을 증거로 삼기 위해서 십자가에서 사흘 만에 부활한 거예요.
지금 예수님께서 부활해서 십자가 말을 하니까 입을 막고, 당신 부활했잖아. 그거 믿어줄게. 이러고 있단 말이죠. 그래서 그게 무슨 성돕니까? 십자가를 막아버리니 복음을 막아놓고, 당신 부활한 거 인정해 줄게. 왜 인정하는데? 나도 같이 부활 될 걸 믿으니까. 그건 당신 욕망이죠. 예수님 부활되니까 나도 부활된다. 이건 자기 욕심 아닙니까? 기본 육적인 욕심 아닙니까.
그게 아니고 부활하신 주님께서 사도에게 어떤 복음을 전했는가? 십자가 복음만 전했다. 그게 십자가가 중요하지 부활은 거기 힘이 될 뿐이에요. 그런데 이 사람은 부활을 엄청나게 길게 했는데 그 긴 내용이 하나 밖에 없어요. 뭐냐 하면, 예수님은 진짜로 뭐 했다는 거예요? 진짜로 살아났다는 거예요. 그리고 한 마디 더한다면, 진짜로 살아났기 때문에 우리도 진짜로 되살아난다는 겁니다.
그 사람은 요한복음 5장 28절을 몰라요. 모든 인간은 다 부활됩니다. 어떤 사람은 심판의 부활로, 어떤 사람은 선한 부활로, 의의 부활로. 모든 인간은 니가 부활 되고, 안 되고 다 나와요. 그래서 마지막에는 선인이든 악인이든 다 부활된 채로 심판받게 돼있습니다. 한 쪽은 저주받기 위해서 부활되게 돼있어요. 소멸되지 않습니다.
왜 이 사람이 이런 관심 갖느냐 하면, 다시 이야기할게요. 관심사가 초대교회와 똑같은 고백을 하면 오늘날 우리 교회도 똑같은 초대교회처럼 인정받는 교회되지 않을까? 하는 그러한 욕심 때문에 그런 현상이 벌어지는 겁니다.
한 10분간 쉽시다.
-래드도 부활은 역사적인 원인을 가지지 않는, 그 말은 뭡니까?
했는데 래드가 실력이 없다는 말이, 역사관과 역사적을 혼동하는 거예요. 그 둘 뜻이 무슨 뜻인지 모르는 거예요. 왜 모르느냐 하면, 래드는 시간론을 공부 안 한 거예요. 시간은 세 종류의 시간이 있습니다. 시간론을 공부 안 했어요. 시간 자체를 보는 것과 시간을 생각하는 인간의 의식을 보는 것과 시간을 만들어내는 인간의 몸을 보는 것과 시간이 다 달라요. 그런 복잡한 것을 래드는 몰라요. 실력이 없어서 몰라요. 하여튼 관심은 시간에 관심. 시간이 우릴 구원하는 건 아닙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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