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논문 소논문

정보사회에 대한 신학적 해석과 교회의 변화

하나님아들 2020. 1. 4. 10:25

정보사회에 대한 신학적 해석과 교회의 변화

 

감리교신학대학교 신학대학원 정 연 수 의

[정보화 사회의 도래와미래교회의 목회적 대응] 중에서 발췌

 

   현대교회는 좀더 빠르고 정확한 행정적 요구를 갖고 있다. 그 기대에 부응하기 위한 효과적인 도구로서 컴퓨터는 잘 활용한다면 목회의 좋은 동역자가 될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한가지 분명한 것은 자칫 잘못하면 목회행정이라는 것이 가질 수 있는 푸근함과 여유있음을 빼앗길 수 있다.

단순한 능률과 관리 차원을 넘어서서 영적 도구로서 활용될 수 있도록 목회행정가가 컴퓨터에 대한 정확한 이해를 가지고 접근해 간다면 우리가 원하고 기대하는 목적을 분명 성취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시대는 이미 그 물줄기가 정보화라는 바다로 흘러가고 있다. 시대적 대세에 맹목적으로 따라가는 차원에서의 전산화의 도입이라기 보다는 목회철학을 가진 시각을 가지고 정보화를 살펴보고 교회에 적용시켜 나가야 하겠다.

 

A. 신학적 이해

 

거대한 문명의 전환기에 선 교회와 신학은 과연 어떻게 이 시대를 보고 있는가? 아직까지 다가오는 세계에 대한 교회와 신학의 뚜렷한 신학적 통찰이 제시되고 있지는 않다. 하지만 우리나라에서도 이미 아카데미 하우스에서 대화 30주년 기념으로 “멀티미디어의 충격과 교회의 대응”이란 대화모임을 가진 바 있고, 대한성서공회에서는 창립 100주년을 기념으로 “멀티미디어 시대의 교회”라는 주제로 성대한 강좌를 개최하여 이에 대한 한국교회의 관심을 증폭 시키는데 큰 영향을 미쳤다. 또한 대한기독교서회에서는 미래사회에 대한 교회의 대응과 신학적 고찰을 주제로 삼는 “21세기 교회와 사회 세미나”를 매월 개최하여 목회자와 신학도에게 다가오는 세계에 대한 이해를 돕고 있다.

원자력의 위력적인 힘을 발명해 낸 과학자들이 자신들의 연구 성과를 발표한 후 ‘우린 이 원자력을 발명하였습니다. 하지만 이것을 어떻게 써야 할 것인가에 대하여는 교회가 답변해 주어야 합니다.’라고 말했다. 과학은 그 앞을 예측하지 않고 더 나은 기술개발과 성과물을 위해 돌진해 가고 있다. 이 과학적 성과물들이 하나님 나라 건설의 도구가 될 것인가? 아니면 인류를 위협하는 무기가 될 것인가는 교회에게 맡겨진 하나의 사명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최근의 정보통신혁명의 부산물로서 가장 거대한 망으로 전 세계를 뒤덮고 있는 인터넷을 포함한 몇가지 기술혁명과 신학과의 관계를 접목시켜 보고자 한다.

 

a. 바벨탑과 인터넷, 그리고 커뮤니케이션과 멀티미디어.

처음에 세상에는 언어가 하나뿐이어서, 모두가 같은 말을 썼다. 사람들이 동쪽으로 이동하여 오다가 시날 땅 한 들판에 이르러서, 거기에 자리를 잡았다. 그들은 서로 말하였다. "자, 벽돌을 빚어서, 단단히 구워내자" 사람들은 돌 대신에 벽돌을 쓰고, 흙 대신에 역청을 썼다. 그들은 또 말하였다. "자, 도시를 세우고, 그 안에 탑을 쌓고서, 탑 꼭대기가 하늘에 닿게 하여, 우리의 이름을 날리고, 온 땅 위에 흩어지지 않게 하자." 주께서는 사람들이 짓고 있는 도시와 탑을 보려고 내려오셨다. 주께서 말씀하셨다. "보아라, 만일 사람들이 같은 말을 쓰는 한 백성으로서, 이렇게 이런 일을 하기 시작하였으니 이제 그들은, 하고자 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하지 못할 일이 없을 것이다. 자, 우리가 내려가서 그들이 거기에서 하는 말을 뒤섞어서, 그들이 서로 알아듣지 못하게 하자." 주께서 거기에서 그들을 온 땅으로 흩으셨다. 그래서 그들은 도시 세우는 일을 그만두었다. 주께서 거기에서 온 세상의 말을 뒤섞으셨다고 하여, 사람들은 그 곳의 이름을 바벨이라고 한다. 주께서 거기에서 사람들을 온 땅에 흩으셨다(창 11:1-9, 표준새번역).

위에서 길게 인용한 성경구절은 인류 최초의 합동 사업이 어떻게 시작이 되었고, 어떻게 해서 그 대공사가 어이없이 끝나게 되었는지를 말해주고 있다. 또 이 이야기 속에는 인류가 그렇게도 많은 언어를 갖게 되었는가에 대해서, 커뮤니케이션의 다양함이 어떤 결과를 초래하게 되었는가에 대해서 말해주는 성서의 고대 설화이다.

인류는 에덴동산에서 나온 이래 하나님을 닮은 ‘창조성’으로 끊임없이 무엇인가를 창조하였고, 도구를 이용하여 기능을 개선해 왔다. 도구와 재료의 현저한 발전과 함께 인간은 새로운 꿈을 꾸게 되었고 결국 바벨탑이라는 것으로 상징되는 인류 최초의 거대한 연합적인 공사에 착수하였다. 벽돌을 만들어 견고히 구웠고, 돌은 벽돌로 대체 되었다. 진흙보다 좋은 접착력을 가진 역청이 건축재료로 쓰이게 되었다. 그러나 바벨탑을 세우는 교만한 인간들에게 하나님은 언어의 소통(疏通)에 혼란을 줌으로 그들의 무한한 욕망을 잠재우셨다.

하지만 바벨탑의 저주를 인류는 세계를 묶는 의사소통 수단(global communication)인 인터넷으로 극복하고 있다. 전 세계적으로 인터넷은 엄청난 속도로 확장되고 있다. 국제망정보센터인 InterNIC(International Network Information Center)은 96년 7월 등록된 도메인 수가 468,000개라고 밝혔다. 이중 기업-상용 기관 도메인 명인 .com 이 89.6%인 419,360개로 압도적이며 비영리기관 도메인 .org가 6.2%인 28,839개, 네트워크 관리 도메인 .net 가 3.7%인 17,115개, 교육기관 도메인 .edu가 0.6% 인 2,686개로 나타났다.

우리나라의 인터넷 증가도 가히 폭발적이라 할 수 있다. KRNIC(KOREA Network Informaition Center)의 발표에 따르면 한국의 국가 도메인(domain)명인 .kr을 가진 곳이 1535개, 호스트 수는 58,350개로 나타났다. 이는 작년 말의 도메인 수 669개와 비교하면 130% 증가된 것이다. 세계적으로 보면 96년 상반기에 비해 96년 7월 현재 전체적으로는 139.1%인 272,250개가 증가했고 .com이 14,885개, .net가 98%인 8,472개, .edu가 18.8%인 425개 증가된 것으로 조사됐다.

정보화 시대는 바야흐로 글로벌 네트웍(global network)을 구축하였고 갖가지 전자, 정보통신 기술의 발전과 단말기의 보급으로 인하여 세계는 한 ‘마을’이 되어가고 있는 중이다. 인터넷과 정보통신 기술의 발전은 온 세계를 실시간(real time)으로 묶어내고 있다. 기존의 국제전화선을 무색하게 만든 ‘인터넷 폰(internet phone)'은 큰 호응을 일으키며 인터넷 사용자들로 하여금 전 세계인과 부담없이 이야기를 나눌 수 있도록 하고 있다. 위성통신 시설을 비롯한 막대한 금액의 장비가 있어야 가능했던 화상회의 시스템은 개발되어 상용화 되기도 전에 탁구공만한 카메라와 전화선, 모뎀만 있으면 지구 끝의 어느 누구와도 얼굴을 대면하며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인터넷 화상전화’에게 밀려나고 있는 실정이다. 이러한 신기술은 실용화(實用化) 단계를 넘어서서 범용화(汎用化) 단계로 접어들고 있다.

가히 이러한 인터넷의 발전은 ‘새로운 미디어의 창조’라는 말로 요약될 수 있을 것이다. ‘뉴 미디어’란 기존의 미디어보다 상대적으로 더 새롭고 진보된 미디어를 뜻할 수도 있고, 기존의 미디어와는 완전히 다른 혁신적인 미디어를 뜻할 수도 있다. 앞의 것이 진화론적인 미디어의 발전이라 한다면 후자는 창조적이고도 혁명적인, 완전히 기존의 미디어와는 독립적인 것을 말한다. 전자의 경우는 전화와 복사기 기능이 합쳐진 팩시밀리, 전화와 텔레비젼이 합쳐진 화상전화, 음향기기와 디지털 기술의 합성으로 나온 CD 음반 등을 들 수 있다면 오늘날 미디어 변화는 후자의 것에 가깝다. 라디오, TV, 비디오, 전화, 전축 등의 매체를 모두 하나의 매체에 수용하게 되었다. 다양한 매체로, 다양한 모습으로, 다양한 출력물로 미디어는 각 부문에서 발달되어 왔지만 오늘날 멀티미디어는 하나의 모니터 안에 모든 것을 묶어내는 신기술이다. 송신자와 수신자 사이에 영상, 문자, 음성 등의 정보를 쌍방향으로 교환할 뿐만 아니라 가공, 처리, 축적 등을 자유 자재로 할 수 있는 커뮤니케이션의 혁명이라 할 수 있다.

하나의 선, 하나의 미디어 매체로 모든 것을 표현할 수 있는 것, 그리고 모두에게 제약없이 전달되어 지는 것, 바로 그런 커뮤니케이션 수단이 현실화 된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생소한 질문을 던져 본다. ‘멀티미디어가 교회와 신학에 미치는 영향은 과연 무엇이겠는가?’ ‘인터넷으로 대표되는 정보기술이 과연 우리의 신앙에 어떤 영향을 미칠 것인가?’

앞으로 이런 물음은 더욱 깊게, 분화되어 제기될 것이다. 우리 인류가 직면했던 가장 난제였던 ‘대화의 통로를 무엇으로 극복할 것인가?’는 물음은 하나의 성령과 하나의 교회를 지향하는 우리 모두의 관심사가 아닐 수 없다.

더 나아가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새로운 질문을 던져 볼 수 있다. “멀티미디어를 통해 교회는 처음의 바벨탑과는 다른, 새로운 바벨탑을 건설할 수 있지 않을까?”라는 것이다.

주께서 말씀하셨다. "보아라, 만일 사람들이 같은 말을 쓰는 한 백성으로서, 이렇게 이런 일을 하기 시작하였으니 이제 그들은, 하고자 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하지 못할 일이 없을 것이다(창 11:6).

하나의 매체, 하나의 언로로 통일화된 인간들의 엄청난 힘을 하나님께서 인정하신 대목이다. 같은 말을 쓰는 한 백성이 일을 시작한다면 하고자 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하지 못할 것이 없는 엄청난 힘을 지니게 되는 것이다. 인류의 시초에 ‘우리의 이름을 내자’는 목적으로 일을 시작하였다면 이제 통일된 미디어를 통해 ‘하나님의 이름을 내자’는 목적으로 일을 시작한다면 하나님 나라를 건설하는 선한 사역에 인터넷과 멀티미디어는 효과적인 수단이 될 것이 확실하다.

로마가 건설해 놓은 도로를 밟으며 바울은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전했다. 발전된 항해술과 선박기술은 지중해가 그의 선교의 무대가 될 수 있도록 도움을 주었다. 오늘날에도 정보 고속도로는 하나님의 말씀을 실어 나르는 효과적인 통로가 될 것이며, 멀티미디어는 교회학교의 교육에도 효과적으로 이용될 것이다.

이런 배경을 가지고 최인식 교수는, 교회 신학의 차원에서도 커다란 변화가 올 것을 전망하며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그 동안 인쇄문자 매체를 통해서 극도의 문자주의가 교회와 신학 전반에 만연되어 왔다. 이로 인하여 계시의 말씀에 대한 전환경적인 커뮤니케이션이 이루어지는데 늘 제약을 느껴 왔으며, 성서 문자주의로 인한 신앙생활의 피폐가 얼마나 컸었는지는 이미 경험한 바이다. 이러한 가운데 멀티미디어라는 신기술은 문자 중심의 신앙생활과 사고를 벗어버리게 하고 있다. 소리와 그림(Audio/Video) 중심의 커뮤니케이션으로 전환시키고 있는 것이다. 이에 따라 신학적 해석학에도 근본적인 파라다임의 변혁이 일어나지 않으면 안되는 상황을 맞이하고 있다. 신학은 ‘글’ 중심에서 오히려 ‘소리’와 ‘그림’을 적극적으로 이해하고 활용해야 하는 과제를 부여받게 되었다. 그동안 인체의 특정 감각기관에 제한되어 과부하가 걸려 마비상태까지 이르렀는데, 이제 멀티미디어를 통해 다양한 매체가 동시적으로 순기능을 할 수 있게 되었다. 이제 어떻게 하나님의 말씀을 멀티미디어가 구축해 놓은 다매체적 환경을 활용하여 효과있게 전할 것인가라는 과제가 교회에 주어진 것이다. 이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맡은 새 시대의 교회가 해야 할 일이 막중하다. 우리 교회가 다가오는 멀티미디어의 세계를 열린 자세로 바라볼 수만 있다면, 혹 멀티미디어로 인하여 부정적 현실이 노출된다고 하다라도 어떠한 충격적인 상황도 충분히 대처해 나갈 수 있다고 믿는다. 이 때에 교회는 더욱 적응과 개혁이라는 변증법적 창조의지를 가져야 한다. 그래서 멀티미디어 시대를 선도하는 주체가 될 때 ‘지구촌’의 복음화는 구호가 아닌 현실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위의 최인식 교수의 전망에 대해 깊이 공감하면서 앞으로 우리 교회와 신학이 인터넷 시대에 어떠한 모습으로 대처하고 변화되어갈 지에 대해 더 많이 연구하고 투자해야 할 것이다. 이미 영국성공회는 95년 7월 24일 인터넷에 사이버교회를 세우고 이곳에서 고해성사를 받기로 하고 사제의 설교 및 성경해설 검색등이 가능한 서비스를 개시하여 이를 실천하고 있다. 이는 기존 교회의 패러다임을 완전히 뒤집어 버리는 획기적인 발상이다. 전통적인 신앙의 시각으로 볼 때에는 위기로 볼 수 있지만 이 시대의 현대인들에게 가깝게 다가 가려는 영국교회의 참신한 시도로 받아들일 수 있다.

현재 한국교회 가운데서는 일부 교회가 인터넷에 홈페이지를 개설하거나 대형 통신망에 자체적으로 동호회 성격의 통신마당을 열어 놓고 있지만 우리나라 전체 교회의 숫자로 미루어 볼 때에 확률(%)을 내는 것이 무의미할 정도로 미약한 수준이다. 미연합감리교회의 예를 들면 현재(1996년 11월18일) 인터넷에 등록된 개교회의 숫자가 704교회이다. 하지만 현재 인터넷에 등록된 한국감리교회의 홈페이지는 서버를 갖고 있지 않은 개인적 홈페이지 수준인 홈페이지로서 5교회를 넘지 않고 있다. 국내 대표적인 인터넷 검색엔진인 ‘심마니’의 분류별 목록에서 등록된 개신교회는 총 22개 교회를 넘지 못하고 있다. 한국컴퓨터선교회(KCM)에서 링크(Link)해 놓은 교회의 숫자도 27개 교회에 머물고 있다. 앞으로 가상공간에서 통용되는 하나의 언어인 ‘인터넷’을 교회가 배우지 못한다면 무한한 선교의 영역을 상실하게 될 것이 분명하다.

우리에게 계속되는 목회적 도전과 질문은 이러한 정보화 시대의 대화통로인 전자통신망을 어떻게 효과적인 도구로 사용할 수 있을 것인가이다.

새로운 커뮤니케이션 속에서 자폐적이고, 현실도피적인 부정적 현상을 보이는 이들을 향하여 따뜻하고도 영혼을 시원케 하는 교회의 소리가 많이 울려 퍼지도록 해야 할 것이다. 예수께서 "이 물을 마시는 사람은 다시 목마를 것이다. 그러나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사람은 영원히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 내가 주는 물은 그 사람 속에서 영생에 이르게 하는 샘물이 될 것이다." 라고 말씀하신 것 같이 갈증에 갈증으로 연속되는 인간 관계의 단절 현장을 이어주는 대화의 고리로서 사이버교회(cyber church)에 거는 기대가 크다.

교회는 오랫동안 대중매체(신문, 출판, 라디오, 텔레비전, 영화 등)는 ‘하느님의 선물’로 여겨야 한다는 확신을 지녀왔다. 커뮤니케이션 매체로 이루어지는 그 ‘선물’의 목록은 계속하여 확장되어 왔다. 인공위성, 컴퓨터, 가정의 비디오와 계속 발전해 가는 정보전달 수단과 같은 현대의 이기들은 인류 가족의 재량에 맡겨져 있다. 하지만 아무리 그 형태를 바꾸고 새로운 기술로 진보를 이루더라도 이 새로운 선물들의 목적은 재래식 대중매체의 목적과 동일한 것이다. 그 목적이란 바로 형제애와 상호 이해 안에서 그리스도 안에 형제된 우리가 서로 가까워지게 하고 하느님께서 사랑하시는 자녀라는 인간 운명의 추구가 더욱 진보하도록 돕는 것이다. 그리스도교적 관점에서 커뮤니케이션 매체는 개인과 인류 가족 전체의 더욱 더 긴밀하고 원활한 관계를 이룩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섭리 아래서 인간에게 맡겨진 놀라운 도구이다.

 

b. 말씀(Logos)의 성육신과 정보화, 그리고 설교.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요1:1).

이 선언은 인류의 역사가 ‘정보의 역사’임을 선언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말씀, 곧 정보와 함께 하셨고 창조의 역사를 이루시는 근원도 말씀(정보)으로 이루셨다면 지나친 비약일까?

창세기의 창조 이야기에서도 신의 창조와 우주적, 역사적 주권은 말씀으로 이루어졌다. 하나님은 말씀으로 흑암과 혼돈의 억압적이고 획일적인 커뮤니케이션 체제를 극복하고 거부하셨다. 그 후로 하나님은 제사의식을 통해 자신과의 네트웍을 유지하기를 원하셨다. 제사장을 커뮤니케이션의 매개자로 하여 드리는 제사를 통해 하나님께서는 이 땅과의 화해를 이루시고 당신의 백성들과 교류하셨다. 그리고 완전한 커뮤니케이션의 회복을 위해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육신하셨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안에 거한다”(요한복음 1:14)는 말씀은 바로 인류를 향한 하나님의 커뮤니케이션의 극대화된 표현인 것이다. 그 말씀은 살아있는 운동력을 지닌 인격체로까지 묘사되었고, 육체가 된 로고스는 우리와 함께 거하시는 것이다.

오늘날 거대한 정보망인 인터넷과 현란한 멀티미디어를 타고 흘러 다니는 정보는 수없이 많다. 마치 창조 이전의 혼돈상태(Chaos)와 같다고 할 수 있겠다. 하지만 그 가운데에도 말씀(Logos)은 육신(Bit화)이 되어야 한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빌 2:6-7).

위의 말씀으로 미루어 볼 때 인간의 눈으로는 볼 수 없었던 신(神)이 세상에 현현(顯現)한 사건으로서의 성육신(成肉身)은 하나님께서 구체적인 커뮤니케이션의 매개체로서 예수를 이 땅에 보내신 사건 중의 사건이다.

사이버스페이스 시대인 오늘날 이 성육신 사건은 다시 한 번 나타나야 한다. 혼돈의 인간세상에 그리스도께서 육신의 몸을 입고 오셔서 구원의 복음을 선포하셨듯이 혼돈의 현대사회 속에 새로운 말씀으로 부활하셔야 한다. 오늘날 말씀의 성육신 사건은 정보화가 될 것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현대 정보사회가 구축하고 있는 정보는 대부분 교회 밖의 영역으로 제한되어 있다. 네트웍을 통해 유통되는 정보는 오직 자연적 지식이 주종을 이룰 뿐, 교회가 제공하는 것은 초자연적인 것으로 ‘지식의 게임’ 주변부로 밀려나 있는 상황이다.

 

우리가 보다 관심 갖는 바는 그가 ‘말을 했다’는 사실이다. 다시 말해서 당시의 대중적 커뮤니케이션 방법을 가장 아름답게 활용하셨다는 점이다. 물론 글도 써서 자신의 의사를 전달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것은 율법을 읽고 쓸 줄 아는 자들에게 제한적으로 사용했을 뿐이다. 귀 있는 자들은 다 들을 수 있도록 생명의 진리와 도를 그토록 아름다운 말로써 말씀하셨다는 사실이 감격스럽지 않은가. 그러나 정말 중요했던 것은 말 그 자체가 아니라, 말을 통해 전달되는 사랑의 인격이요, 정의로운 진리요, 하나님의 능력이었다. 그 분에게는 구전이 되었든 멀티미디어가 되었든 중요한 것은 주어진 대중의 미디어를 최대한대로 아름답게 활용하는 것이었다. 또한 말을 하되 말에 사로잡히지 않았듯이, 문자가 되었든지 아니면 소리나 영상이 되었든지 매체에 얽매이지 않는 자유가 중요하다고 말할 것이다.

교회는 아직도 ‘설교’가 유일한 정보전달 수단으로서 확고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말씀은 육신이 되어 가장 효과적인 하나님과의 매개체가 되었다. 그런데 오늘날의 설교와 하나님의 복음의 전달 매체에 대해서 우리가 생각해야 할 것이 있다. 그것은 정보화 사회의 길목에 서서 과연 ‘강단에서 선포되는 설교가 어떻게 성육화될 것인가?’ 라는 질문인 것이다.

 

c. 보혜사 성령과 네트웍

하나님과 인간의 역사는 계속해서 대화(communication)과 함께 발전되어 간다. 인간을 부르시는 하나님께 응답하는 ‘주고 받음’은 때로는 ‘율법’으로 때로는 ‘복음’으로 그 옷을 갈아입었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계시로 인하여 하나님은 인간과의 더욱 확실한 정보교류의 중재자를 가지게 되었다. 예수께서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로 말미암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로 올 사람이 없다.”(요14:6)고 말씀하신대로 하나님과 인간과의 관계를 회복하고 커뮤니케이션의 통로를 여신 이는 역사적 예수, 그리스도였다.

역사적 예수의 시대가 지난 후 예수는 ‘보혜사’라는 선물을 약속하시고 승천하셨다.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께서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쳐 주시고, 또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실 것이다(요14:26)".라는 예언은 그가 승천한 후에 약속대로 성취되었다. 그리스도의 영으로서의 성령은 이 세계를 새로운 눈으로 보게 하고 우리가 알지 못하는 전혀 새로운 시대를 맞게 할 것이라는 것이다. 그리하여 우리는 오늘의 시대를 성령의 시대라 부른다.

박종천 교수는 21세기를 대비하는 신학을 제3신학이라 부르고 신본주의 신학이 인류 문명의 첫 번째 물결인 농경시대의 산물이고, 인본주의적 신학이 산업 문명이라는 제2의 물결을 타고 나타났다면 제3의 신학은 신과 인간의 경쟁적 상호 관계 또는 상극 관계를 뛰어넘어 우주적, 역사적 차원에서 양자간의 상호 참여 또는 상생관계에 의거한 영의 신학이라고 정의하고 이 시대는 제3의 신학, 즉 성령이 중심되는 신학이 주가 될 것을 말하였다.

이 변화의 물결은 그동안 그리스도론에 관심을 가져왔던 세계교회협의회가 1991년 WCC 제7차 총회의 주제로 “성령이여 오소서. 만물을 새롭게 하소서!”라는 주제를 채택함으로 사회의 변화와 교회의 신학적 변화에 대한 관심을 대변하였다.

박종천 교수는 계속하여 제3신학의 패러다임을 신-인 참여의 구조로 해석하며 하나님의 영과 사람의 영과의 상호관계로 보았다. 여기서의 성령은 서구적 구조의 삼위일체의 하나님의 성령의 개념보다 더 포괄적 개념이다. 하나님의 영은 역사와 우주에 보편적으로 존재하는 힘으로 보았다. 이러한 성령의 힘은 별개의 것이 아닌 하나됨의 역사를 이뤄 내는 힘이다. 성령의 하나됨은 막힘없이 교류됨을 전제로 요구하게 된다. 여기서 신-인 참여의 연합적 개념은 이사야 65장 24절의 “그들이 부르기 전에 내가 응답하겠고 그들이 말을 마치기 전에 내가 들을 것이며”란 표현대로 하나님과 인간의 완전한 의사소통이 되는 세상에서 완성될 수 있다.

오늘날 세상은 거미줄과 같은 커뮤니케이션 매개물로 연결되어 있다. 가부장적인 신관이 지배하던 교회의 구조가 무너져 가고 이젠 온라인(On-line)과 네트웍(Network)로 대표되는 수평적 통로의 확장이 사회 전반에서 이뤄 지면서 교회에까지 영향을 미치고 있다. 앞으로의 목회는 제1의 신학이 지배하던 신본주의에서 벗어나 성령의 교통하심이 지배하는 제3신학으로 빠르게 이동되는 것이다. 이사야 선지자가 상상했던 완전한 성령의 교통하심의 완성이 다가오고 있다. 바로 제3신학의 현실화가 전산화와 정보화의 외피(外皮)를 입고 오는 것이다.

기존 신본주의인 가부장적 형태의 교회는 목회자의 권위와 일방통행적인 목회가 효력을 발휘하여 이끌어 가는 목회형태를 가졌으나 이제는 수평적 관계에 익숙해 진 평신도와의 상호 네트웍을 형성하여 참여적이고 민주적인 목회형태를 가진 교회가 성장할 것이다. 또한 교회 이기주의, 교파주의가 극복되어 모든 교회가 에큐메니칼의 입장에 서서 성령의 교통하심을 경험하며 실천하도록 요청 받게 될 것이다.

‘오직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는 것, 성령이 주는 생명력은 정보화 시대의 모든 가치관을 뛰어 넘어 인간을 참된 인격으로서의 ‘하나님 형상’으로 변화시키며, 뿐만 아니라 대중 단절의 문화, 가면의 문화, 이익추구 사회를 참된 인격의 코이노니아가 살아 있는 ‘하나님 나라’ 공동체로 바꿀 수 있다.

 

B. 정보화 사회의 교회의 변화

 

역사적으로 교회는 사회의 변화에 때로는 적응으로, 때로는 거부로 반응을 보이며 공존공생해 왔다. 새로운 사회의 도래에 대해서 앞으로 교회는 어떻게 이 변화를 수용할 것인가가 우리의 관심을 모으고 있다. 미래 교회는 어떻게 오늘의 변화를 수용할 것인가?

 

1. 최인식 교수의 주장을 중심으로. (ISDN적(的) 교회)

 

역사적으로 교회는 변화에 수동적이었다. 아마도 전통의 줄에 자신을 가장 꽉 붙들어 매 놓는 공동체가 교회일 것이다. 흔히들 의사, 법조인, 성직자들과 같이 가운을 입고 일하는 집단이 보수적이라 말한다. 그러나 밀려오는 파도를 막을 수 없듯이, 다가오는 문명의 파도 또한 피할 수 없는 법이다. 교회가 아무리 기존의 전통, 가치, 및 교리를 고수하기 위해 버틸지라도 엄습하는 물결을 비켜 지나갈 수 없다. 단지 하나의 선택만이 있을 뿐이다. 즉, 밀려오는 파도에 난파되지 않기 위해 파도타기를 하는 것이다. ‘파도를 타는 교회’가 되는 것 그것이다. 그리고 역설적이지만, 전통적 가치를 유지하는 길은 교회가 시대의 파도를 잘 타고 넘어가는 것 이외에는 없다는 것이다.

위의 전제를 바탕으로 최인식 교수는 그의 저서 ࡔ멀티미디어와 새로운 교회ࡕ에서 변화될 교회의 모습을 정보통신의 새 주역이 될 ISDN(통합 서비스 디지털망 ; Integrated Service Digital Network)을 예로 들어 다음과 같이 예측하고 있다.

 

첫째로, 통합적 네트워크형 교회(integrated network church) 즉, 간(間)교파적 교회(Inter-church)가 나타날 것을 예상하였다.우선 여기에서의 ‘통합’이라는 말은 종전의 단일화 개념과는 다르다. 중앙집권식 피라미드 구조의 획일적 통합이 아닌 다원적 조화와 협력의 관계성(corelationship)을 의미한다. 더욱 구체적으로 말하면, 교회간의 연대를 추구하는 것을 말한다. 이제 더 이상 교파간의 신학적, 성례적, 문화적 차별성이 교회간의 연대를 저해하는 요인으로 작용하는 시대는 지나갔다. 따라서 다른 전통들을 존중하는 가운데 서로간 유통하는 일이 요구된다. 각 교파마다 내세우는 슬로건이나 교회적 특징들이 있다. 그러한 것들은 ‘교환 가치’가 있는 것들이다. 이러한 개 교회적 전통들을 정보화해야 한다. 다시 말해서 개 교회들이 잠재적으로 가지고 있는 역량을 공개함으로써 정보를 공유할 뿐만 아니라 활용함을 의미한다. 커뮤니케이션에서는 이미 글, 소리, 그림 및 동영상까지도 통합적으로 주고 받을 수 있는 멀티미디어의 세계를 열어 놓았다. 그런데 이러한 멀티미디어 시대에도 여전히 교파간, 종파간 대화와 교류의 필요성 조차 못느낀다면, 이 모든 것이 자유롭게 개방되어 있는 인터넷 시대에 교회는 마침내 선교의 원심적 능력을 잃는 때가 올 것이다. 뿐만 아니라 “정보화 사회의 주도적인 잠재 인력인 네티즌에게는 전혀 영향력도 줄 수 없고, 그들을 복음화하는 절호의 기회도 놓치는 우(愚)를 범하게 된다. 인터넷 시대란 온 세계가 네트워크상으로 하나의 지구 촌락을 경험하는 시대다. 더 이상 자기를 공개하지 않고 배타적으로 닫아 놓게 되면 고(高) 엔트로피(entropy) 현상을 피할 수 없게 된다. 파도를 타기는 커녕 오히려 그 밑에 깔리게 되어 교회의 본질적 사명을 감당하지 못하게 될 것이다.

두 번째로는, 봉사적 디지털형 교회(service digital church) 즉 평신도 중심의 교회가 될 전망이다.인터넷 시대는 다른 말로 수용자 중심의 사회다. 수용자가 공급자를 움직인다. 이 때의 수용자는 대중이 아닌 주체적 개인이다. 이러한 개인은 계층적 문화를 거부하게 마련이다. 그동안 전통 교회는 성직자 중심의 교권적 계층(hierarchy) 문화를 암암리에 형성해 왔다. 이러한 문화에 대항하여 인터넷 시대의 교회는 성직자 중심으로부터 ‘평신도’ 중심의 신학과 제도로 전환시키지 않으면 안되는 상황에 직면하고 있다. 이미 평신도 신학의 필요성에 대해서는 오래전부터 이야기되어 왔었으나 미진한 상태였는데, 미래 교회의 중요 모티브로 평신도 사역의 극대화를 위한 목회구조의 ‘대변혁’에 대한 논의가 가시화되고 있다. 무엇보다도 성직자 중심의 교회는 인터넷 시대의 교회가 될 수 없다. 인터넷 시대는 수도꼭지에서 물나오듯이 하향식 전달이 아닌, 쌍방향적 커뮤니케이션 시대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목회자 자신의 신학이나 특정 교단의 전통을 전면에 내세우기 보다는 신자들의 영적이며 실제적 요구에 부응할 수 있는 다양한 신학적 처방을 내려 주고자 하는 유연성이 필요하다. 아날로그 형식에서 디지털로 기술 방식이 전환됨으로 따라 오는 변화는 생각보다 광범위하다. 특히 쌍방향 커뮤니케이션을 가능케 함으로써 수신자가 동시에 발신자가 될 수 있는 상황의 변화가 그중의 하나다. 이것은 평신도 중심의 교회 신학 수립을 더욱 가속화하는 계기가 된다. 이제 신학이 목회자만의 전유물인 시대는 지나간다. 성경에 대한 전문적 주석도 목회자만이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온갖 신학적 정보가, 그동안 수동적으로 듣고 따라가기도 바빴던 신자들의 손끝에까지 와 있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자신이 가진 전문적 정보나 목회에 대한 개인적 의견들을 목회자에게 발신함으로써 목회에 참여하는 ‘평신도 시대’가 도래하고 있는 것이다. 목회자나 당회는 더 이상 컨트롤러(controller)가 아닌, 서버(server)가 되어야 한다.

 

이상의 주장을 통하여 최인식 교수는 미래사회와 교회에 정보화와 멀티미디어의 영향력이 클 것으로 확신하면서 교회 내에서의 목회자와 평신도의 관계를 관계형 구조, 즉 네트웍형 구조로 파악하고 수평적 네트웍이 강조된 통합된 교회, 협력적 교회에 대한 전망을 분명히 한 것은 본 연구자의 의도와 일치되는 것이다. 하지만 그의 주장 가운데는 정보화에 따른 네트웍 구조 자체를 교회로 그대로 옮겨다 놓음으로 인하여 지나치게 단순화된 도식으로 미래에 대해 단언하고 있다는 우려를 갖게 한다.

 

2. 이성희 목사의 주장을 중심으로(미래 교회 메가트렌드)

 

이성희 목사는 그의 저서 ࡔ미래사회와 미래교회ࡕ 제5장에서 미래교회의 변화의 모습을 11가지로 제시하고 있다.

첫째로, 개교회주의가 퇴조될 것이다.한국교회의 개교회주의는 교회성장이라는 교회의 대명제 때문에 한국교회의 한 특징이 되어 왔고 개교회주의는 대형교회를 양산하게 되었다. 개교회주의에 바탕한 교회성장은 교회폐쇄주의와 상호견제, 경쟁, 교회와 교파의 분리라는 외적 미숙을 가지게 되었다. 그러나 근래에 와서 이러한 교회의 외적성장은 오히려 사회의 도전 대상이 되었고 많은 젊은이들이 교회를 외면하게 되었다. 미래사회의 도래와 함께 오5는 사회 현상 중에 하나인 일회성(disposability)은 앞으로 교회를 소유개념이 아닌 임대개념으로 변화시키어 개교회주의를 후퇴시키며 교회연합운동을 증대시킬 것이다. 또 하나의 변수로 ‘이동성(moblility)'이 있다. 미래사회의 이동성의 증대는 교인들로 하여금 거리개념을 희박하게 하고 흩어지게 할 것이다.

둘째로는, 평신도 사역의 극대화이다.전 세대는 목회자 한 사람의 역량에 따라 교회가 특징지어지고 교회 성장도 한 사람에게 절대 의존적이었다. 목회자의 개성이 교회의 개성을 뚜렷하게 하는 요인으로는 목회자와 평신도의 관계에 있다. 이전의 목회에서는 목회자와 평신도가 종속적 관계에서 협력관계였으나 미래 목회에서는 목회자와의 대등한 관계에서의 동역자가 될 것이다. 미래교회를 연구하는 학자들은 한결같이 미래 목회를 대중적 카리스마적 목회가 아니라 소그룹을 통한 평신도 중심의 목회라고 한다. 흩어지는 교회에서의 평신도의 사명은 하나의 작은 교회로서의 사명이다. 흩어지는 교회가 교회의 참 모습이라고 볼 때에 교회의 주체는 성직자가 아니라 오히려 평신도이며 삶의 현장에서의 평신도의 자리는 중요한 자리가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평신도를 동력화하고 평신도를 인적 자원으로 개발하여 목회에 참여하게 하는 새로운 목회구조가 요구될 것이다.

셋째로, 교회 정치의 민주화가 빠르게 정착될 것이다.그 동안의 교회정치는 관료적이고 계급적인 구약의 제도를 닮았었다. 모세라는 카리스마적 존재가 있었다. 하지만 신약시대에 와서 사도들은 기능적 존재로서 일곱집사를 세웠다. 사도들과 일곱집사 사이에는 계급적 차이가 없었다. 단지 기능의 차이만이 존재한다. 정치제도의 민주화와 더불어 교회 정치의 민주화도 한층 더 가속화 될 전망이다.

넷째로, 교회의 일치와 에큐메니즘의 활성화가 이루어질 것이다.교회연합을 의미하는 ‘에큐메니칼’운동은 90년대에 들어오면서 관심의 중심으로 떠오르기 시작했다. 1948년 세계교회협의회(WCC)가 창설되면서부터 본격적으로 등장한 교회연합운동은 제3의 물결에서 제4의 물결로의 진입을 타고 가속화될 전망이다. 그 세계관을 요약하면,

제2의 물결 : 우리는 분리되어 있으며 경쟁하지 않을 수 없다.

제3의 물결 : 우리는 연결되어 있으며 협력하지 않을 수 없다.

제4의 물결 : 우리는 하나이며 공동 창조를 선택한다.

이러한 세계관의 변화로 볼 때에 한국사회는 제2의 물결에서 제3의 물결로 변천하는 과정이 있다고 볼 수 있다. 이는 제4의 물결의 특징인 ‘다양성의 포용’으로 나아가는 시작인 것이다. 이미 1908년 회중교회, 감리교회, 장로교회가 연합하여 남인도연합교회가 탄생했으며, 1925년에는 캐나다의 회중교회, 감리교회, 장로교회가 연합하여 캐나다연합교회를 이루게 되었다.

이러한 변화로 말미암아 목회 구조는 대변혁을 겪게 될 것이다. 현대와 같은 심방조직은 미래사회에 적합치 못한 목회구조가 될 것이다. 왜냐하면 미래형 인간은 통제를 싫어한다. 제3의 물결을 타고 사람들은 공장이나 사무실에 묶이지 않고 가정에 머물게 되고 정보화의 발달로 인한 완벽한 전자민주주의의 출현으로 자유를 누리게 된다. 그리하여 미래교인은 조직교회를 상대적으로 외면하고 조직이 미비한 교회를 선호하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미래교회에 적응되는 목회의 구조는 어떤 것일까?

첫째, 성장구조에서 성숙구조로 변화되어야 한다.현재의 교회구조는 성장구조를 택하고 있다. 자연히 교회조직의 중심은 속회이고 목회의 중심은 심방이다. 하지만 이제 미래 교회는 성장 위주의 구조가 아니라 성숙 위주의 교회로 개혁되어야 한다.

둘째, 개인목회에서 팀목회로 전환되어야 한다.미래사회의 또 다른 변화 가운데 하나는 다양성이다. 교회는 다양성을 포용해 주어야 함과 동시에 통일성을 추구해야 하는 이중성을 지니게 된다. 그러므로 급격한 사회적 요구에 맞는 목회 형태가 바로 팀 목회(team in ministry, group ministry)이다. 팀 목회는 목회를 수평적 구조에서 이해하는 것을 의미한다. 수평적 구조란 목회의 직무를 기능적으로 이해하는 것을 의미하며 계급적이지 않다는 것을 의미한다.

셋째, 블록화 조직으로 변화되어야 한다.정보화 시대의 인간의 사고 구조는 정보로 변하고 지역화 시대를 맞아 인간의 사고도 지역화 될 것이다. 세계화의 시대는 곧 지역화의 시대이다. 지역화 시대의 가장 큰 특징은 다양한 블록의 설정이다. 유럽공동체(EU),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APEC)등 크고 작은 블록들이 다양한 목적을 위해 생겨나고 있다. 이것은 세계화 시대를 위한 새로운 생존 방식이다. 그러므로 교회의 조직도 블록화를 시도하여 기존의 구역제도 외에도 취미, 직업, 봉사 등의 동호인 블록을 다양화 하는 것이 필요할 것이다. 사람들은 서로 연결되어 있기를 원한다. 상호 보조적 관계에서 다른 사람과 연합되기를 바라며 정보교환을 통하여 당면한 문제의 해답을 얻으려는 본능을 가진다. 네트워크란 협동체제는 과학적인 개념만은 아니다. 조직보다는 융통성이 있고 자유로운 네트워크화된 교회 조직은 다양하게 발전될 것이다.

넷째, 교회구조의 중앙집권에서 지방분권으로 변화되어야 한다.1995년 6월 지방화 시대가 열리면서 중앙집권이라는 전 세대의 구조가 퇴조하고 지방분권이라는 새 구조가 생겨나게 되었다. 앞으로는 교회 내의 자치 단체들이나 기관들이 상회 기관의 일방적 결정이나 지시를 기피하는 현상이 많아질 것이며 자치적으로 결정할 수 있는 지방분권적 구조를 선호하게 될 것이다. 미래교회도 이에 맞게 계급적 구조를 탈피하고 기능적이고 보조적인 구조를 가져야 미래 사회에 적응할 수 있을 것이다.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다가오는 정보화 사회에 적응하는 교회는 다양한 변화를 요구받고 있다. 이 변화의 요구에 응답할 수 있는 동력은 교회의 최고 관리자로서의 목회자의 훈련과 양성이며, 평신도의 이해이다. 지금 한국교회는 기존 교회의 모습에 차츰 지루함을 느끼는 성도들이 증가되고 있는 추세이며, 일부 특수적인 지역에서는 기존 교회의 틀을 깨뜨린 교회로 성도들이 모여들고 있다. 기존 예배 형식을 깨뜨리는 새로운 찬양과 경배의 도입, 평신도 사역자 양성, 방임적 교회조직 등의 변화로 새로운 모습을 교인들에게 보여주고 있다. 하지만 아직도 대부분의 교회에서는 새로운 시도가 기존 세대의 고정 관념에 부딪혀 실천되지 못하고 있거나, 아예 새로운 시도 자체를 포기하게 만들고 있기도 하다.

분명한 것은 미래 사회의 미래 교회는 준비되지 않은 교회에 절대 긍정적 모습으로 다가오지 않을 것이라는 것이다.

이성희는 그의 저서 ࡔ미래사회와 미래교회ࡕ의 결론 부분에서 다음과 같이 역설한다.

이제 한국교회는 미래 연구가 더 활발해져서 다가 올 교회의 미래 현상을 미리 예견하고, 이에 따른 미래 교회의 목회 패러다임을 정립해 가는 선견지명이 절실히 요구된다. 예수께서는 “너희 가운데서 누가 망대를 세우려고 하면, 그것을 완성할 만한 비용이 자기에게 있는지를, 먼저 앉아서 셈하여 보아야 하지 않겠느냐?”고 하셨다. 작은 망대도 준공할 때까지 모든 기획을 통하여 목적 성취가 가능한데 하물며 불확실한 미래 사회에 적응하고 미래 현상을 극복하려는 미래교회가 아무런 예비 없이 목적을 성취할 수는 없다.

위의 연구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사회는 물론 교회에도 변화의 물결은 밀려오고 있다. 앞서 교회의 대응방안에 대한 제안이 제시되기는 했지만 아직까지 현실적으로, 또한 체감적으로 다가오지 않는 미래사회와 미래교회의 전망은 교회로 하여금 과감히 미래의 모습으로 전환할 것을 꺼리게 한다.

아직도 한국교회의 목회현장은 가부장적이고도 봉건적이며, 교회의 시설은 산업혁명시대에 의존하고 있다. 물론 정보화 시대에 대한 대비만이 한국교회의 미래에 대한 밝은 전망을 보장해 준다고는 할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이미 세계의 교회가, 그리고 한국의 교회 안에서 이러한 변화의 모습을 감지하고 이에 대응하려는 움직임을 서서히 보이고 있다는 것은 미래교회에 밝은 신호를 보여주고 있는 것이라 생각된다.

 



출처: https://lectio.tistory.com/707?category=272946 [Lectio Divin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