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화/ 장점 - 전화위복
주제 : 장점
▣ 10가지 장점
<천의 얼굴을 가진 사나이>라는 영화도 있었지만 영국의 전래동화 가운데에는 <두 얼굴을 가진 관리인>이란 것이 있다. 이 관리인은 두 얼굴의 사나이였는데, 그가 상전을 보는 얼굴은 언제나 친절하고 하인을 보는 얼굴은 사납고 근엄한 얼굴이라는 것이 그 요점이다.
미국의 각 교회의 교파를 표현하는 재미있는 이야기가 아래와 같다.
1) 감리교인에게서는 진실한 생활 태도를 배우라.
2) 침례교인에게서는 신앙간증을 들으라.
3) 루터교인에게서는 충성된 교인임을 배우라.
4) 성공회교인에게서는 교인의 긍지를 배우라.
5) 퀘거교인에게서는 청결한 믿음을 배우라
6) 유대교인에게서는 종교의 고결함을 배우라.
7) 장로교인에게서는 기도의 생활을 배우라.
8) 구세군에게서는 봉사의 생활을 배우라.
9) 천주교인에게서는 교인의 보편성을 배우라.
10) 그리고 흑인들에게서는 그 열성을 배우라.
이상의 열 가지를 다 배우면 얼마나 좋을까?
▣ 문제아 짐 클라크의 한가지 장점 -헬시온
컴퓨터 프로그램 넷스케이프를 개발한 짐 클라크는 원래 문제아였다. 그는 미국 텍사스주의 가난한 가정에서 태어났으며 학교생활에는 별 관심이 없었다. 그는 고등학교 2학년 때 퇴학을 당한 후 해군에 입대했다.
군대에서도 골치 아픈 병사로 취급당했다. 그러나 수학실력만은 특출해 전역 후 대학에 진학해 학위를 받았다. 그러나 클라크는 여전히 불행한 사람이었다. 결혼도 두 번이나 실패했고 건강도 좋지 않았다.
클라크는 4년 전 혈액색소 침착증을 보여 병원을 찾았다. 그는 환자와 의사들이 작성하는 복잡한 서류들을 보고 이를 간편하게 처리할 수 있는 인터넷을 개발했다. 이것이 바로 헬시온회사이다. 이 회사는 세계적인 기업으로 성장해 그의 재산은 현재 15억 달러에 이른다.
사람은 누구에게나 한 가지 장점은 있다. 다만 그것을 계발하지 못할 뿐이다. 사람은 가장 절망적인 상황에 처할 때 장점과 단점이 뚜렷하게 드러난다.
주제 : 재능
▣ 크라이슬러의 설득
어느 날 유명한 바이올리니스트인 프리즈 크라이슬러가 골동품 가게로 들어갔다. 가게 뒷편 어는 방에서 누군가가 바이올린을 연주하는 소리가 들려 왔다. 즉시 그는 바이올린을 볼 수 있느냐고 청했다. 면밀히 악기를 살펴 본 후 그는 사겠다고 제의했다. 크라이슬러씨는 어떤 대가를 치루고서라도 그 바이올린을 구입하리라고 결심했다. 그러나 가게 주인은 이미 한 수집가에게 팔려서 그의 박물관에 비치하기로 된 것이었기 때뮨에 팔 수가 없다고 거절했다. 결심이 대단한 크라이슬러씨는 그 수집가를 찾아 가서 설득하기 시작했다. 얼마나 졸라댔던지 수집가는 팔 수는 없으니 한 번 연주나 해 보라고 허락했다. 크라이슬러씨는 후에 죽음을 선고 받은 사람이 죄값을 치루기 위하여 연주하듯이 그 악기를 연주했다고 말했다. 왜냐하면 "그것이 진열장에만 놓을 수 있는 골동품이 아니라 세상 사람들에게 기쁨을 줄 수 있는 악기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연주가 끝나자 수집가는 말했다. "이것을 가질 권리가 내겐 없소. 이건 당신 거요. 가지고 가서 모든 사람이 이 악기의 소리를 들을 수 있게 해 주시오."
주제 : 재물
♠ 財物觀을 바꿔라
그러나 여기서 나의 관심은 소득이나 생활지수의 변화가 아니다. 생활 자체가 얼마나 행복한가 하는 것이다. 행복은 우리 헌법도 그 추구권을 인정한 국민의 기본권이지만, 행복의 정도가 생활지수에 반드시 비례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이를테면 소득이 많아 더 행복하고 소득이 적어 덜 행복하지는 않다는 뜻이다. '마음이 가난한 사람은 행복하다' (마태복음 5장3절) 고 한 예수님의 산상설교 행복론에서 깨닫는 바가 있어야 한다.
'재물을 땅에 쌓아두지 말라' (마태복음 5장19절) 고 설파하신 예수님 의 재물관에 우리 마음을 두어야 한다. 행복지수는 재물에 대한 우리 마음과 생각에 따라 오르기도 하고 내리기도 하는 것이다.
중요한 사실은 재물이 우리 인간에게 행복을 가져다주는 필수조건일 수 는 있으나 충분조건은 결코 아니라는 인식을 갖는 것이다.사실 우리들 한국 인은 가난해도 행복했던 기억을 간직한 사람들이 적지 않다.
'모든 것이 넉넉지 않았으나 아무 것도 모자라지 않았던' 초대 교회의 나눔공동체 (사도행전 2장43~47절 참조) 또한 행복지수가 높은 사회의 전 형이다.
현실이 정 고통스럽고 실의와 절망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사람들은 실직 자 쉼터나 노숙자 숙소를 찾아가 그곳의 생활모습을 통해 극복의지를 발견 하게 되기를 권하고 싶다.
고통을 탓하는 대신 고통을 받아들여 생활지수를 행복지수에 맞춰가는 이웃들이 그곳에 살고 있기 때문이다.
♠ 돈보다 중요한 것
"이 사람들은 물질적인 의미로 굶주리고 있는 것이 아니고 또 다른 의미로 굶주리고 있습니다. 그들은 돈보다 더 중요한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면서도 그것이 무엇인지 모릅니다" 고 했던 마더 테레사의 말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세계 최대 빈국의 하나인 방글라데시의 사람들이 느끼는 행복지수가 경제 협력개발기구 (OECD) 라는 선진국 클럽에 가입했다고 으스대던 한국인의 그것보다도 몇 배나 높았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우리는 이제 모처럼 제자리로 돌아오는 기회를 만난 것인지 모른다. 행복이 먼 곳에 있지 않음을 아는 사람들이다. 봄의 화창한 햇볕을 향해 문을 열고 나서기로 하자.
♠ 죄짐을 어떻게 할까
요즘 같은 세상에 은행 통장 개설법을 몰라 거액의 현금을 보자기에 싸 가지고 머리에 이고 다니던 70대 할머니가 계셔서 화제였다.
전북 익산 경찰서 신흥 파출소 박중렬 경장은 은행 이용 방법을 몰라서 외출할 때마다 늘 현금보따리를 머리에 이고 다니는 강모 할머니를 설득한 끝에 인근 은행에서 통장을 개설하도록 도와줬다고 것이다. 강 할머니는 20년 전 남편과 사별하고 혼자 살면서 한푼 두푼 모든 653만여 원을 도둑맞을까봐 외출할 때마다 보자기에 싸서 머리에 이고 다녔다고 한다. 어찌 이런 일이 지금 세상에 있을 수 있을까. 믿기지 않는 일이겠지만 그 할머니 역시 날마다 그 현금 뭉치를 이고 다니면서 얼마나 노심초사했을까? 이쯤 되면 할머니에게는 그것이 돈이 아니라 돌덩어리처럼 괴로운 짐이었을 것이다.
오늘날도 사람들은 염려와 불안과 스트레스의 짐을 스스로 지고 다닌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 11:28)고 하셨고, 친히 만인의 죄를 담당하시려고 자신을 단번에 십자가에서 제물로 드렸다(히 9:26). 하나님께서도 우리의 모든 죄를 어린양 예수께 담당시키셨다(사 53:6).
▣ 재물 (노블리스 오블리제) - 최부자 이야기
인류는 일찍 이런 리더십에 대한 백성들의 기대를 노블리스 오블리제(Noblesse oblige)라고 표현해 왔다. 우리는 이것을 ‘귀족의 의무’라고 번역해 왔다. 노불리스가 명예를 강조하는 말이라면 오블리제는 의무를 강조하는 말이다. 명예가 있는 만큼 의무를 다해야 한다는 뜻으로 이해하면 되리라고 믿는다. 본래 이 단어는 로마시대에 귀족들이 보여준 투철한 도덕의식과 솔선수범하는 공공정신을 높이는 데서 유래한 말이라고 한다. 그런데 최근 이 단어가 우리 사회에서 갑작스럽게 더 많이 인구에 회자되는 것은 우리 사회가 이제는 정말 존경받는 정치가 사업가 교육가등 이 사회 모든 계층에서 리더다운 리더의 리더십을 요구하는 간절한 기대 때문일 것이다. 치열한 역사의 격동기를 거쳐 민주화를 이루어 낸 우리 사회가 기다리는 다음 순서는 자연스럽게 삶의 질이 높아진 선진 사회에로의 진입일 것이다. 그러나 이런 성숙한 선진 사회의 실현을 위해 우리 사회가 기대하는 가장 큰 욕구는 성숙한 시민의식을 몸으로 보여주는 리더십의 출현인 것이다.
우리 한국 사회가 결코 이런 노블리스 오불리제의 본을 갖고 있지 못했던 것은 아니다. 흔히 한국적 노블리스 오블리제를 말할 때 가장 자주 언급되는 사람은 경주 만석꾼 최 부자이다. 그는 조선시대 최고의 부자로서 경주 첨성대 계림 숲 근처에 집을 갖고 살았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부자가 삼대를 가지 못한다는 속설을 깨고 이 분의 가솔은 무려 10대 동안 진사를 지냈고 12대 동안 만석꾼을 이어 나간 것으로 전해진다. 1600년대에서 1900년대 초까지 무려 300년동안 귀족의 의무를 다한 그의 가문의 영광은 최 부자의 유명한 6가지 교훈 때문이라고 알려져 있다.
그 여섯 가지 가훈은 첫째는, 과거를 보되 진사 이상의 벼슬을 하지 말 것, 둘째, 만석 이상의 재산은 사회에 환원할 것. 셋째, 흉년기에는 땅을 늘리지 말 것. 넷째, 과객을 후히 대접할 것. 다섯째, 최씨 가문 며느리들은 시집올 때 삼년동안 무명옷을 입을 것. 마지막으로, 자기 집 사방 백리 안에 굶어죽는 사람이 없게 할 것이다. 얼마나 자랑스러운 가훈인가. 특히 흉년기에 땅을 늘리지 않게 한 것은 그가 부당하게 부를 축적할 수 있는 기회를 거절한 모범을 보인 것이다. 우리 조상 가운데 이런 지도자가 있었다면 우리가 다시 한번 이런 리더십을 낳지 못할 이유는 없다.
▣ 부자 아빠와 가난한 아빠
'부자 아빠 가난한 아빠'의 저자로버트 기요사키가 제시한 부자가 되기 위한 5가지 습관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부자 아빠는 재테크 지식을 찾아다닌다. 가난한 아빠는 재테크 지식을 피해 다닌다. 부자 아빠들이 잘 가는 곳은 재테크 강의나 투자 설명회다.
둘째, 부자 아빠는 빚을 두려워하지 않으나 사치품이나 돈 안되는 자산을 사기 위한 빚은 겁낸다. 가난한 아빠는 빚을 겁내지만 사치품을 사기 위해 신용카드를 쓰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부자 아빠는 보석, 가구, 자동차, 콘도미니엄 등 사치성 물건은 맨 나중에 구입한다. 가난한 아빠는 이런 것들부터 빚을 내 먼저 구입하는 경우가 많다. 무엇을 위해 빚을 내느냐가 부자 아빠와 가난한 아빠를 구분 짓는다.
셋째, 부자 아빠는 의도적으로 부자 아빠와 어울리고, 가난한 아빠는 가난한 아빠끼리 모인다. 부자는 부자끼리 어울리면서 자연스레 돈, 투자, 재테크를 관심사로 떠올린다. 그만큼 유용한 정보를 얻을 수 있다. 가난한 아빠는 돈 이야기를 피하고 싶어 부자 아빠와 어울리기를 꺼린다. 부자 친구를 만나더라도 '나는 돈에는 관심이 없다'라고 말해 돈 이야기를 외면한다.
넷째, 부자 아빠는 적금을 중도에 깨지 않는다. 가난한 아빠는 적금을 중도에 깨기 일쑤이다.
부자 아빠는 적금을 여러 바구니에 나누어 담는다. 예컨대, 월 100만 원을 몽땅 1개의 적금통자에 붓지 않고 20만 원, 30만 원, 50만 원짜리로 나눠 가입하고 계약 기간도 1~3년으로 나눈다. 최악의 경우 예금을 중도에 찾아야 할 사정이 생기면 그중 가장 적당한 것을 골라 이자 손해를 덜 보며 해약한다. 가난한 아빠는 무턱대고 3년간, 월 100만 원 불입식으로 '굵고 긴 것'을 좋아한다. 그러다 몇 십, 몇 백만 원의 급전이 필요해지면 변변한 이자도 챙기지 못하고 적금을 깨고 만다.
다섯째, 돈을 잃었을 때 부자 아빠는 자신을 탓한다. 그러나 가난한 아빠는 세상을 탓한다.
부자 아빠는 돈을 벌면 세상의 흐름에 자신을 맞추는 데 성공했다고 자평한다. 돈을 잃으면 반대로 세상의 흐름에 못 맞춘 자신의 투자 방법을 바꿔야 한다고 생각한다.
▣ 참된 행복
1977년도는 미국의 최대 부호였던 두 사람이 세상을 떠난 해입니다. 그들 중 한 사람은 ‘하워드 휴즈(Howard Hughes)'이고, 또 한 사람은 석유의 제왕으로 불렸던 ’폴 게티(Paul Getty)'입니다.
하워드 휴즈는 젊은 나이에 엄청난 재산을 모아 주위 사람들의 부러움을 샀습니다. 요즘 세계적으로 명성을 날리고 있는 헐리우드 영화도 하워드 휴즈가 벌인 초창기 프로젝트 중의 하나였습니다. 또 최고의 인기를 누리고 있는 뉴욕 브로드웨이 연극과 뮤지컬 사업 역시 그에 의해 상업적인 성공을 거두게 된 분야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여기에 미국 최대의 텔레비전 방송국 가운데 하나인 ABC 방송국과 TWA 항공사의 지분까지 소유한 그는 가장 젊은 나이에, 그리고 가장 짧은 시간에 재벌로 급부상한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남긴 유산은 20억 달러로서 당시로서는 천문학적인 액수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죽기 전 10년 동안 가장 고독한 생활을 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 많은 재산을 소유하고 있으면서도 그는 누구보다 외롭게 살았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영양실조로 죽고 말았습니다. 이 어이없는 죽음에 사람들은 혀를 찼습니다. 그는 정신적인 고독과 공허감을 달래려고 방탕한 생활을 하다가 병을 얻어 자리에 누었습니다. 이때 그의 주위에 재산을 탐하는 자들이 몰려들었습니다. 어느 누구도 믿을 수 없던 그는 홀로 유폐된 생활 속에서 지냈고, 그로 인해 음식도 제대로 먹지 못해서 영양실조로 죽게 된 것입니다.
한때 그에게 어떤 기자가 찾아와서 물었습니다.
“사람이 행복해지려면 얼마나 돈을 벌어야 한다고 생각하십니까?”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무조건 지금보다 더 가져야 행복합니다.”
만족이 없던 그는 행복이 무어인지 모른 채 외롭게 죽었고, 그의 장례식에 참석한 사람의 숫자는 겨우 10명도 되지 않았습니다.
석유의 제왕이라 불리던 폴 게티 역시 불행한 삶을 살다 간 사람입니다. 그는 무려 40억 달러에 가까운 재산이 있었지만 일생동안 다섯 번 결혼했다가 다섯 번 모두 이혼하는 이력을 남겼습니다. 거기에다가 1959년에 막내아들이 폐렴으로 죽는 것을 지켜보아야 했고, 1973년에는 장남이 과음으로 자신보다 먼저 세상을 떠나는 것을 지켜보아야 했습니다.
그 당시 세계 최대의 부호였던 두 사람은 소유했던 재산만큼이나 똑같이 불행한 삶을 살았습니다.
주제 : 재판
▣ 재판
1892년 미국에서 있었던 일이다. 윌 피어비스란 남자는 은행 강도로서 도망을 치다가 은행 문지기를 쏘아 죽였다는 죄목으로 사형 언도를 받았다. 본인은 절대로 그런 일이 없다고 했으나 그가 사람을 죽이고 도만하는 것을 확실히 보았다는 증인이 있었다. 당시 정황으로 보아 이 사람이 진범이라고 단정한 7명의 배심원들은 그의 유죄를 선고했다. 이렇게 하여 사형이 집행되는 순간이다. 사형수는 목소리를 높여 단발마의 음성으로 부르짖었다.
나는 죽을 수 없다. 나는 무죄다. 죄 없는 사람에게 올가미를 씌워 죽이려는 이 배심원놈들아 나보다 네 놈들이 먼저 죽을테니 두고 보라고 발악을 했으나 그는 끝내 교수형을 당하고 말았다.
그런데 그는 죽지 않았다.
바로 그날 사형수의 시체를 확인하는 과정에서 그가 죽지 않고 있다는 사실이 판명된 것이다. 이에 법관은 그를 다시 죽이려고 했는데 그것을 강하게 반대하고 나선 사람이 있었다. 그 고장의 목사님이었다. 그는 이미 한 번 죽인 사람을 하나님이 되살려 놓았는데 인간이 어찌 주님의 뜻을 거스리고 다시 죽일 수 있느냐는 것이었다.
법관과 목사의 논쟁으로 8년동안이나 형 집행을 못하고 있었는데 사형수는 어느 날 무죄로 석방이 되었다. 그 이유는 조라는 이름을 가진 사형수가 사항열 당하면서 은행 문지기를 죽인 사람은 자신이라고 실토하였기 때문이다.
그 후의 일이다.
이상한 것은 윌 피어비스에게 유죄 판결을 내린 그 배심원들이 아무 이유 없이 차례로 죽어갔다는 것이다. 살아남은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었다. 그의 예언이 이루어진 것이다.
남의 생명을 예사로 빼앗는 일이 얼마나 무서운 일인가를 보여주고 있다.
주제 : 전도
♠ 한 여학생의 전도
조용기 목사님이 17세 때 폐결핵을 앓게 되었는데 6.25 동란이 끝난 직후라 당시의 의술로는 치료 불가능이라는 판결을 받았다. 의사의 말로는 병균이 너무 급속히 퍼져나가는 특이한 결핵이어서 막을 도리가 없다면서 3-4개월의 기간을 더 살 수 있을 것이라 했다.
절망 가운데 그는 불교의 영향아래 자랐기에 부처에게 살려 달라고 매일 기도했으나 병세는 점점 더 나빠지게 되어 기도를 포기, 하나님을 찾기 시작했다. 그러나 확신이 없는 중에 어느 날 한 여고생이 찾아와서 예수 그리스도를 전해 주었다. 그런데 그 전도의 내용이 처녀의 몸에서 나신 분이라든지 십자가의 죽음이나 부활 등이 너무 허황하게 들려 거부해버렸다. 그러나 그 다음날, 또 그 다음날, 귀찮아서 심하게 퇴박을 주었으나 계속 찾아와서 전도를 하는 것이었다.
하루는 자기를 위해 기도를 하는데 눈물을 흘리며 기도를 하기에 마음에 감동이 되어 마음 문이 열리게 되었다. “울지 마세요, 미안해요, 이제야 예수님의 사랑을 알겠어요. 내가 죽는 그 시간까지라도 학생이 좋다면 학생을 위해서 예수님을 믿을께요.” 라고 말했다. 그 학생은 기뻐하며 자기의 성경책을 주었다. (그 이름 모를 여학생이 이처럼 위대한 하나님의 종으로 서게 될 줄은 몰랐을 것이다.)
-조용기, (4차원의 영적 세계.P . 12-16 요약)
♥ 예수님의 사랑
불란서에 그림을 잘 그리는 화가가 있었다. 이 환자는 기독신자가 아니었지만 예수님에 관한 그림을 많이 그렸다. 특히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박히는 장면을 많이 그렸다. 그 이유는 그 당시 이그림이 잘 팔렸기 때문이었다.
어느날 화가가 열심히 그림을 그리고 있는데 이웃에 사는 어린 소년이 놀러 왔다. 화가가 열심히 그림 그리는 모습을 바라보던 소년이 물었다.
"아저씨 이 그림은 무슨 그림입니까?"
"응! 이 그림은 예수가 십자가에 못박혀 죽는 장면이지..."
"왜 이 사람은 이렇게 비참하게 죽어가는 것입니까?"
화가는 기독신자들에게서 들은대로 말했다.
"예수가 이렇게 비참하게 죽는 것은 우리 사람들의 죄를 위해서 죽는 거란다. 다시 말하면 너와 나의 죄를 위해서 죽은거지."
화가의 아무런 생각없이 한 이 말은 소년의 가슴에 깊은 감명을 주었다.
"우리의 죄를 위해 죽으셨다고요? 그럼 아저씨는 이 예수님을 사랑하시겠네요. 나는 지금까지 그것도 모르고 있었어요. 우리의 죄를 대신하여 죽어주신 분이 계신줄 정말 몰랐습니다."
소년은 눈물이 글썽글썽하여 무릎을 꿇고 조용히 말했다.
"예수님, 저는 지금까지 예수님을 몰랐습니다. 예수님께서 저를 사랑하시는 줄도 몰랐어요. 용서해 주세요."
그 순간 화가는 붓을 놓았다. 돈을 벌기 위하여 그림을 그렸고 많이 팔리는 것으로만 만족했던 자신의 모습을 소년의 말과 태도에서 느끼게 되었던 것이다. 그날부터 화가는 예수님을 믿기로 결심했다. 그리하여 교회당에 나가게 되었고, 그림 그리는 것도 그만 두었다. 화가의 마음은 예수님에 대한 사랑으로 뜨거워졌다. 나이가 많아 신학 공부는 할수 없었고 예수님의 사랑을 보답하기 위해 무슨 일이 없을까 생각하던 화가는 그림을 가지고 전도를 하기로 결심했다.
다시 붓을 들고 정성을 들여 예수님의 십자가를 그리면서 그는 자기의 죄를 생각하고 눈물을 흘렸다. 그림이 다 그려졌을 때 화가는 그림밑에 다음과 같은 글을 써 넣었다.
「너 위해 몸을 주건만 날 무엇 주느냐?」
그 그림은 성화가 되어 보는 사람들에게 깊은 감화를 주었다. 세월이 흘러 화가는 세상을 떠났고 그림은 유명한 박물관에 소장되었다. 진센 돌프 라는 어린 소년이 이 그림을 보고 눈물을 흘렸고 그는 아버지의 많은 유산을 예수님의 사업에 다 바쳐 예수님을 위해 살았다.
예수님을 바로 깨달아야 한다. 교회 오래 다닌 것이 자랑이 아니라 얼마나 예수님을 사랑하고 있는가가 문제인 것이다.
▣철학하는 스타킹
미국 소비자 단체에서는 10 년마다 중요 생활필수품 가운데 가장 값이 소폭으로 오른 품목을 여왕으로 삼아 저물가 축제(低物價 祝祭)를 벌인다. 대형화한 그 품목들을 높이 쳐들고 가장행진을 한다던데 본뜸직한 신나는 소비자 운동이랄 수 있겠다.
우리 나라에서 이 저물가의 여왕을 뽑는다면 그 영예는 어떤 품목이 차지할까. 근간 통계를 보니 단연 스타킹이었다. 한 켤레 풀어 보면 6 km나 되는 가느다란 실날이 36만 올이나 홀치고 얽혀 있는 초세공(超細工)이라는 데, 저물가로 일관돼 왔다는 것이 더욱 기특하다.
스타킹 축제가 벌어진다면 스타킹을 신긴 마네킹 다리를 쳐들고 시가행진을 하게 될 것이요, 고물가(高物價)에 시달린 시민들은 앞을 다투어 그 다리에 키스를 하려고 들 것이다. 칼라일이 `의상철학(衣裳哲學)'에서 예찬했듯이 `스타킹을 머리에 쓰고 모자를 발에 신고' 뛰어드는 영세민도 있을 것이다. 스타킹은 이처럼 저물가의 깃발일 뿐 아니라 우리 나라에 있어 평등사상(平等思想)의 깃발이기도 했다. 19 세기 초엽 천주교를 신봉하는 신자가 비신자를 믿게 끔 설득하는 데 있어 가장 컸던 고충은 양반 상놈, 적자 서자, 남녀 노유 같은 계급의식이었다 한다.
천당(天堂)은 좁고 입구도 바늘구멍 만하다 던데 어떻게 상놈이나 서자가-, 또 미천한 계집이 들어갈 틈이 있겠느냐는 것이 믿음을 외면하는 큰 이유였다. 이 난관을 극복하는 데 동원된 선교 도구(宣敎 道具)가 바로 프랑스 신부들이 신고 들어온 양말이었다.
“믿음이란 지극히 공평한 것으로 그 앞에서는 양반도 상놈도 지아비도 지어미도 또 어른도 아이도 없습니다. 그것은 마치 이 양말이 부드럽고 탄력이 있어 어느 누구의 발에도 신을 수 있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하고 양말을 신겨만 보이면 손쉽게 깨닫고 믿음에 들곤 했음이 1839 년에 순교(殉敎)한 베드로 신대보(神大輔)가 샤스탕 신부에게 부친 편지 가운데 적혀 있다.
한국에 있어 이렇게 약자 편에 서서 철학을 했던 스타킹이 여전히 약자 편에 서서 경제(經濟)를 하고 있으니 스타킹은 참 고맙다. 83/3/3
▣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미국의 부흥사요, 청년 지도자인 ‘토리 존슨’이라는 목사님이 계십니다. 그분이 시카고에서 오클라호마 주에 있는 털사까지 비행기를 타고 날아가고 있었습니다. 이 목사님은 어디를 가든지 틈만 나면 복음을 증거하고 전도하는 분이었습니다. 그래서 ‘누구를 전도할까?’하고 열심히 살피다가 얼굴에 수심이 가득찬 한 여자 승무원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 여인을 불렀습니다. 옆자리에 앉혀 놓고 복음을 전했습니다.
“예수님을 영접해야 영원히 살 수 있습니다.”
그런데 성령이 임하니까 그 짧은 말 한 마디에 여인이 즉시 예수님을 영접했습니다. 그 순간 얼굴의 어두운 그림자가 사라졌습니다. 기쁨이 충만한 얼굴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영접 기도를 할 때는 너무나 감격스러워서 눈물까지 흘렸습니다.
목적지에 도착하자 그 승무원이 비행기에서 내리는 존슨 목사님에게 마지막 인사를 하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목사님, 앞으로 이 비행기에서 또다시 만나 뵙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다시 만나지 못한다면 저 천국에서 만나 뵐 것을 약속합니다.”
목사님은 행복한 마음으로 인사를 나누고 헤어졌습니다. 그런데 이튿날 존슨 목사님이 호텔에서 조간신문을 펼쳐 들었더니 신문 제1면에 큰 기사가 났습니다. 털사에서 포트워즈로 가는 비행기 한 대가 추락했다는 기사였습니다. 알고 봤더니 자기가 탔던 비행기였습니다. 승무원과 승객 전원이 사망했습니다. 그 사망자 명단을 죽 살펴보았더니 그 전날 비행기 안에서 주님을 영접했던 그 여자 승무원의 이름도 있었습니다.
목사님은 너무나 마음이 아팠습니다. 주르룩 눈물이 흘러내렸습니다. 그러나 한편으로 감사하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지옥으로 갈 뻔했던 한 영혼이 마지막 순간에 천국으로 자리를 옮겼기 때문입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요 1:12)
▣ 청소년 전도
윌버트 챠프만(Wilbert Chapman) 박사가 4,500명이 모인 집회에서 얻은 통계이다. 400명은 10살 이전에, 600명은 10-14살 사이에, 600명은 14-16살 사이에, 1,000명은 16-20살 사이에 예수를 영접하였고 겨우 24명 만이 36세 이후에 신앙을 가졌다는 것이다. 흥미를 느낀 챠프만 박사는 더 광범위하게 조사하여 다음과 같은 통계를 얻었다. 25세 이후에는 천명에 겨우 한 명, 35세 이후에는 5만 명에 겨우 한 명, 45세 이후에는 20만 명에 겨우 한 명, 55세 이후에는 30만 명에 겨우 한 명, 75세 이후에는 70만 명에 겨우 한 명 꼴로 예수를 영접했다는 것이다. 위대한 전도자들의 생애를 조사해 보면 어린 시절에 회심을 하고 큰 일꾼이 된 경우가 많다.
수십만 명을 주께로인도한 19세기 미국의 대 부흥 전도자 무디가 하루 한 사람에게 꼭 전도한다는 원칙을 세웠다. 그런데 하루는 아무에게도 전도 하지 못했다. 그날 밤 잠자리에 들었으나 책임을 완수하지 못한 자책 때문에 잠이 오질 않았다. 그는 다시 옷을 입고 거리로 나갔다. 밤중에 거리에 나가 전도대상을 찾는데 한 술주정뱅이를 만났다. 그는 다짜고짜로 "예수님을 아시나요?"라고 했다. 그 술주정뱅이는 화를 벌컥내는 것이었다. 무디는 쫓겨오다시피 하며 집으로 돌아왔는데 그 후 3개월이 지나 문을 노크하는소리가 들렸다. 나가서 문을열어보니 그 술주정뱅이였다. 그는 고백하기를 그날 밤 "예수님을 아시나요?" 하는 말을 듣고 화를 냈으나 그 후 그 말이 내내 귓전에서 떠나지 않아 예수를 믿기로 했다고 하는 것이었다. 하나님의 일을 완수하지 못한 근심이 한 심령을 회개하고 구원시켰던 것이다.
▣ 존 번연의 구원
레이 리치몬드(Leight Richmond)라는 사람이 길에 종교 관계의 소책자를 떨어뜨리고, 어떤 좋지못한 사람이 그것을 집어가지를 바랬다. 과연 어떤 한 좋지 못한 사람이 그것을 집어갔으며 그가 감옥에 들어갈 때 그 책을 갖고 들어가, 감옥 안에서 그것을 읽고 개종하게 되었다.
바로 그가 "천로역정(Pilgrim's Progress)을 써서 많은 사람들을 바른 길로 인도한 존 번연(John Bunyan)이다.
▣ 마음을 전달하는 방법
한 남자가 길을 가다가 큰 돌이 놓여져 있는 것을 보고 그 돌을 들어 다른 한적한 곳으로 옮겼다. 그런데 그가 다시 제자리로 돌아왔을 때 그는 자신이 치운 돌 밑에 살던 개미들이 서로 안전한 장소를 찾아 이리저리 흩어져가고 있는 것을 보았다. 그는 개미들을 해치려는 마음이 전혀 없었으므로 개미들에게 몹시 미안하였다. 그는 어떻게 하면 자신의 생각을 개미들에게 전할 수 있을까 생각했다. 그리고 잠시 후 그는 그의 마음을 개미들에게 전해지게 하려면 자신이 직접 개미가 되는 수밖에 없음을 깨달았다.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도 이와 같은 것에서 연유된 것이다.
▣ 거듭나야 한다
유명한 정치인인 챨스 콜슨이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1971년에 챨스 콜슨에게 어느 신문기자가 이런 평가를 했습니다. "이 사람은 대통령의 투사다."
이 말을 나쁜 말로 표현하자면 "살인 청부업자"라는 말로도 해석이 가능합니다. 대통령을 위해서라면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많은 사람들을 심한 곤경에 몰아 넣었던 유명한 정치인인 이 사람은 현재 미국 그리스도인들의 영웅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거듭나야 한다"는 유명한 책을 썼습니다. 이 사람이 얼마나 나쁜 사람인가에 대해서 이런 말들을 했습니다. "이 사람은 필요하다면 할머니의 등을 밟고서라도 지나갈 수가 있는 사람이다." 이 사람이 정치적인 문제와 경제적인 문제로 감옥에 들어갔을 때 그는 감옥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중생하게 되었습니다.
그 다음에 그는 감옥에서 받은 깊은 인상을 가지고 감옥 속에 있는 죄수들을 전도하는 일에 평생을 바치기로 결정합니다. 그래서 세계를 흔들었던 이유명한 정치인은 지금은 감옥마다 찾아다니며, 죄수들에게 전도하는 사랑의전도자로 변하고 말았습니다.
▣ 절도 상습범의 변화
일본 동경 근처에 자마라는 작은 도시가 있습니다. 그 곳 성결교회에 미하다 요시오라는 분이 계신데 자마시의 상공회의소 부회장이며 목재상을 경영하고 있습니다.
이 분은 신체적으로 완전치 못하여 딴 회사에서 채용하지 않는 사람들을 여러명 채용해서 칭송이 높고 한번은 그에 관한 얘기가 신문에 났다고 합니다. 그러자 편지 한 통이 날아 왔습니다. 내용은 "나는 반평생을 형무소에서살아온 전과21범인데 이번에 출소하면 나 같은 사람도 채용해 주시겠습니까?"라는 것이었다고 합니다.
가족이 모여 상의를 한 후 일단 찾아가 보기로 했습니다. 먼저 형무소 소장을 만났더니 고개를 옆으로 흔들며 그 자는 나갔다가 사흘이면 또 들어오는 절도 상습범인데 상관하지 않는 것이 좋겠다고 말했습니다. 그래도 미하다씨는 그 범인을 직접 만나고 출소하면 채용하겠다는 약속을 했습니다. 출소하는 날 형무소장은 "뜻은 대단히 귀한데 한 가지 부탁은 그 사람이 보이는 데에다 절대로 현금을 두지 말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전과21범은 미하다씨의 전도로 교회에 나갔는데 세상에서 천시와 학대를 받던 그가 성도들의 사랑에 감동하여 진실한 그리스도인이 되었을 뿐 아니라 미하다씨의 가장 신임을 받는 금전출납 회계가 되었다고 합니다. 그리스도는 세상에서 버린 인간을 새롭게 만들어 쓰시는 진리입니다.
▣ 구원의 길은 열려있는데
노련한 등산객이 많이 오르는 유명한 산이 있다. 그 상의 정상을 오르면 그곳에서는 다른 어느 곳에서도 볼 수 없는 아름다운 경관과 식물들이 있는 곳이었다. 하지만 그 산은 오르는 길은 가파르고 군데 군데 위험한 곳이 도사리고 있기도 한 그런 산이었다. 그 중에서도 중간 정도 오르면 거대한 바위 절벽들 사이로 좁은 길이 나 있는데 겨우 사람 하나도 지나가지 어려운 듯이 보이는 그런 길이었다. 그런데 그 좁은 길에 다음과 같은 말이 써 있다. "이 길은 좁다! 그러나 수 많은 사람들이 통과했다. 그러므로 당신도 갈 수 있다."
이 표지판에 씌여 있는 것처럼 좁고 위험한 길이지만 많은 사람들이 그곳을 통과했고 그 산의 진면목을 볼 수 있었다. 이와 같이 우리 주님이 우리를 준비하신 구원의 길도 항상 열려 있다. 이 길은 좁지만 들어오려고 하는 사람은 많지 않으며 들어가고자 하는 사람은 모두 들어갈 수 있는 것이다.
▣ 개인적인 결단
무디 신학교의 학장이었던 죠지 스위팅은 이런 말을 했습니다. "하나님께는 자녀가 있을 뿐이지 손자는 없다." 이것은 개인적으로 예수를 믿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말입니다. 우리 아버지, 우리 어머니가 예수를 믿었기 때문에 내가 자동적으로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내 아버지가 "나의 하나님"이라고 부르는 그 하나님을 나도 "나의 하나님"으로 부를 수 있어야 합니다.
▣ 선교사가 된 안과의사
덴마크의 <윌리>는 세계적으로도 유명한 안과 의사였습니다. 그는 구세군 창설자 윌리엄 부스의 아내이며 빈민구제를 위하여 일생을 바친 캐서린 부스(1829-1890)의 전기를 읽고 감격하여 복음 전도를 위해 헌신할 것을 결심했습니다. 그의 재능을 아낀 주변 사람들이 매우 애석하게 여기며 만류했으나 그는 지위나 명예를 다 내던지고 런던으로 건
너가 신학을 공부했습니다. 졸업 후 선교부에서 "당신은 어디고 가고 싶은가요?"라고 묻자 그는 "세계에서 가장 힘든 곳으로 보내 주십시오."라고 대답했습니다. 마침내 그의 소원대로 그는 자바 섬에 보내졌습니다. 그곳은 눈병 환자가 매우 많은 곳으로, 인구의 5분의 1이 눈병으로 괴로워 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그 곳에 큰 안과 병원을 설립하
고 전도라는 목적 아래 토인들의 눈병을 치료했습니다. 그는 30년간을 봉사하고 노령으로 은퇴했습니다. 그는 사람들의 눈을 고치는 동시에 그들 마음의 눈을 열어 하나님을 보는 자녀로 만들었습니다. 네덜란드의 여왕은 최고 훈장을 그에게 내려주었습니다.
▣ 더욱 중요한 일
이른 아침, 런던의 다운닝가 10번지(영국수상관저)에서는 다급한 노크 소리가 요란하게 들렸습니다. 마침 의회에서 발표해야 하는 연설문을 작성하던 윌리암 크래드스톤(William E. Gladstone. 1809-1898수상취임)이 놀라 문을 열자 문 앞에는 한 소년이 서 있었습니다. 글래드스톤은 친절하게 왜 그러느냐고 이유를 물었습니다.
"글래드스톤 선생님, 나의 형이 죽어가고 있습니다. 제발 오셔서 천국에 이르는 길을 보여 주시지 않으시겠어요?"하고 소년은 애원했다. 어느 크리스찬이라도 할 수 있는 이 중요한 일을 위해 그는 자신의 중요한 일을 내버려둔 채 죽어가는 소년의 형에게로 갔습니다. 마침내 그 소년의 형은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하는 기쁨을 누렸습니다. 그는 서재에 돌아와서 그가 준비하고 있던 연설문의 맨 마지막 부분에다가 "오늘 나는 영국 런던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이다!"라고 썼습니다.
▣ 예수는 내가 믿고 복은 형님이
김익두 목사가 부흥회에 참석하려고 산길을 걷다가 너무 더워서 웃옷을벗어 놓고 시원한 바람에 땀을 식히고 있었다. 그 때 맞은편에서 술취한사람이 오더니 "너 왜 나보다 먼저 올라온거야?"라고말한 후 김 목사를 사정없이 때렸다. 김익두 목사는 아무런 저항도하지 않고 가만히 그 매를 맞았다. 그리고는 술취한 사람에게 "형님, 다 때렸습니까?"라고 묻자 그는 "다 때렸다"라고 대답했다. 그러자 김 목사는 "예수는 내가 믿고 복은 형님이 받으셨군요"라고 말했다. 그는 이 말이 무슨 말인 줄 모르고 어리둥절했다. 그래서 김 목사가 "내가 김익두입니다"라고 말했다. 김 목사의 이말을 듣자마자 그는 얼굴색이 하얗게 변하더니 "살려 주십시오"라고 빌었다. 김 목사는 그를 데리고 부흥회에 함께 참석했다. 그는 이 일을 계기로해서 예수를 진실하게 믿게 되었고 훗날 장로까지 되었다.
▣ 우편배달부의 확신
한 우편배달부는 자기는 우편물을 배달하는 자신의 일에 매우 큰 안도감을 느낀다고 나에게 말하였다. 그가 말하기를, "그 이유는 모든 정부 방침이 내가 일을 수행하는 것을 지원하기로 규정되어 있기 때문이다. 내 가방 속에 단지 한 장의 작은 우편엽서만이 들어있다고 하더라도 아무도 내가 그것을 배달하는 것을 감히 방해하지 못할 것이다. 만약 그 우편엽서를 안전히 배달하기 위해서 필요하다면 국가의 모든 연방 경찰력을 동원할 수도 있을 것이다."라고 했다. 이 이야기는 복음이 타오르는 진리를 전하기 위하여 있는 그대로의 우리의 생명, 인격, 장비를 지니고 당신과 내가 얼마나 확실하게 출발할 수 있나를 생각하게 하였다. 우리 주님의 말씀은 과거의 사도들에게 소중했던 만큼 오늘의 우리에게도 소중하다. 그분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가서...볼찌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마 28:18 -20)
▣ 종 번연의 구원
레이 리치몬드(Leight Richmond)라는 사람이 길에 종교 관계의 소책자를 떨어뜨고, 누구든지 그것을 집어 가기를 바랬다. 과연 어떤 사람이 그것을 집어갔으며 그가 감옥에 들어갈 때 그 책을 갖고 들어가, 감옥 안에서 그것을 읽고 개종하게 되었다.
바로 그가 "천로역정(Pilgrim's Progress)을 써서 많은 사람들을 바른길로 인도한 존 번연(John Bunyan)이다.
60년대초의 일이다.
그 당시 서울 고등법원 원장으로 재직했던 김홍섭 판사댁을 내가 아는분이 방문하고 돌아와서는 참으로 검소한 분이라고 극구 칭찬하면서 어느 성직자 보다도 더 고결한 삶의 태도를 보고 왔다고 했다.
집에 들어서니 찢어지게 가난한 모습이 역력했는데 방에는 군데군데 장판이 때워져 있고, 그 부인이 들고 나온 커피잔도 금이 가있을 정도였으며,김 판사의 옷도 남루했고 양복 하나 제대로 된 것이 없이 짜집기로 기워입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는 과거 수많은 정치적 사건 등 자유당 말기에 큰 세도를 부릴 수 있는여건을 가졌었고 소위 [김창룡 중장 암살사건]같은 큰 사건 등을 다룬 심판관이기도 하였다.
또한 고등법원의 월급이 그리 작지도 않는데 문자 그대로 청백리였다고한다. 물론 구두조차도 가죽구두가 아닌 비닐구두를 신고 다녔는데, 그가그렇게도 가난하게 산 이면에는 참으로 귀감이 될 만한 얘기가 있다.
그는 월급을 타기가 무섭게 우선 신앙서적과 성경을 구입할 돈과 교회헌금을 떼어 놓고서야 집으로 월급을 가져왔으니 가난할 수밖에...
그뿐만 아니라 많은 불우한 사람들이 법정으로 범법자가 되어 오는 경우꼭 도와야 될 사람은 경제적으로도 도와주었다고 한다. 또 그는 봉급날 때어놓은 돈으로 각종 신앙서적을 구입하고서는 교도소의 죄수들을찾아 다니면서 전도에 힘썼다고 한다.
얼마나 훌륭한 삶을 살았는가? 그러한 김판사에게 감동받고 예수를 믿게된 이들중엔 [허태영 대령]도 포함되어 있었다고 한다.
그는 과연 법관으로서의 양심과 자비와 사랑과 정의감을 가지고 몸소실천하면서 살아간 법조인의 귀감이자 신앙인의 모범이었다.
▣ 열성적인 전도
전당포주인이었다가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한 후 새로운 생활을 하게된 사람이 있었다.이 사람은 신앙생활을 하게 된 다음 주위 사람에게 전도했는데 하루는 술에 취한 사람에게 그리스도를 영접할 것을 권면했다. 그때 술 취한 사람이 빈정거리며 말했다.
『여보슈. 내가 정말 지옥과 천당이 있고 구원이 있다는 걸 확신한다면 당신처럼 이렇게 소신 없게 전도하지는 않겠소. 나는 더 열성적으로 전도할거요』
이 말에 충격을 받은 크리스천은 그 때부터 열렬하게 전도하며 구제활동을 폈다.
그가 1978년 구세군을 창설한 윌리암 부스다.
▣ 전도자를 보고 회개한 청년
1920년 일본 동경의 미도리마치(록정) 3정목에 있는 성결교회 청년들이 노방 전도하는 모습을 2층에서 내려다보며 눈물을 흘리고 있는 한 청년이 있었다.
그 청년은 "아버님, 어머님은 오늘도 나를 위하여 기도하실텐데 나는...."하며 소리를 내어 울었다. 그 때에 "황 군 왜 우는거야?" 하고신문지국장의 부인이 물었다. "저것 보십시오. 저청년들의 전도하는 것을. 나도 전엔 기독교 신자였는데, 지금은 이렇게 타락했습니다. 우리 부모님은 지금도 나를 위해서 기도하실텐데...
..."하며 말끝을 흐렸다. 그러자 그 부인은 아주 우습다는 듯이,"예수 믿어 무엇하게요. 황군 단념하세요"라고 했다. 청년은 아무말없이 일어나서 옷을 입고 전도하는 청년들이 있는 곳으로 나가려 하자 부인은 아래층으로 내려가더니 신문배달부들에게 그 청년을 놀리며 떠들어 댔다. 그러나 그 청년은 아랑곳하지 않고 밖으로 나가서 그들의 전도를 들었다.
그 청년은 21세의 나이로 학문의 높은 뜻을 품고 동경에 왔으나 학비를 벌기 위하여 신문배달을 하면서 고향에서 영접한 예수를 잊고 살았던 황철도 목사였다.
주제 : 전쟁
▣ 우주에 드리워진 전쟁의 그림자2007/01/22 02:29
지난 금요일 오전 9시쯤. 조선닷컴에 쓴 속보 하나가 국내에 놀라움을 안겨주기 시작했습니다. '중국, 미사일로 자국 위성격추 실험 파문'이란 제목으로 쓴 기사입니다. 전날 새벽, 에비에이션위크 엔 스페이스 테크놀로지(Aviation Week&Space Technology)란 미국의 한 잡지가 홈페이지를 통해 이를 최초로 보도했고, 내용을 확인한 뒤 이를 받아서 오전 일과 시작과 동시에 이를 온라인에서 먼저 보도했습니다. 뉴욕타임스와 워싱턴포스트, BBC 등 주요 외신들도 일제히 자사 웹사이트를 통해 동일한 보도를 내보냈습니다.
지상에서 쏘아올린 미사일로 850~870km 상공에 있는 위성을 맞춘다는 것. 머리 속으로만 상상해봐도 보통 기술이 아닙니다. 일단 그 높이까지 올라갈 수 있는 미사일(또는 로켓)이 필요하고, 거기에 탑재된 탄두나 충돌체가 문제없이 분리돼 정확히 목표 위성을 맞출 수 있어야 합니다. 중국이 이를 성공적으로 수행했다는 건 그만큼의 우주과학기술과 능력을 갖췄음을 보여준 증거인 동시에, 향후 지구상에 위성을 운영하고 있는 많은 국가들에겐 '잠재적 위협'이 될 수 있다는 뜻이 됩니다. 당연히 우리나라를 비롯한 미국, 일본, 호주, 캐나다 등 각국에서 비판 또는 우려의 목소리가 끊이지 않고 있습니다.
이번 실험과 관련, "중국이 군사력을 과시해 보인 것" "앞으로 우주공간은 또 하나의 전장(戰場)이 될 것" "경쟁에 부담을 느낀 각국이 이 참에 우주공간을 군사적 목적으로 사용하는 것을 금지하는 조약을 체결할 수도 있다" 등 다양한 분석이 나오고 있습니다. 일단 새로운 조약 체결은 쉽지 않아 보입니다. 미국 정부는 작년 10월 우주공간에서 자국이 자유롭게 활동할 권리를 강조한 신(新)우주정책을 대체할 새로운 조약을 체결할 뜻이 없음을 밝히고 있습니다. 이런 분위기 탓에, 자칫 '스타워즈(Star Wars, 별들의 전쟁)'이 또 다시 촉발되는 건 아닌가 하는 우려가 커지고 있습니다.
'스타워즈'란 표현의 유래는 미국 로널드 레이건 전 대통령 시절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1983년 3월, 레이건 전 대통령은 적(敵)의 대륙간 탄도미사일(ICBM,inter-continental ballictic missile)을 발사 초기 단계에서부터 탐지한 뒤 추적해 격파한다는 내용의 SDI(전략적 방위구상,Strategic Defence Initiative)계획을 세웠습니다. 자국으로 날아오는 ICBM을 공격하기 위해 미사일은 물론, 우주상 위성에서 발사된 레이저 빔까지 이용하겠다는 구상이 담긴 결과 '스타워즈'란 별칭을 얻게 된 것입니다.
공상과학 영화에서나 나올 법한 이 구상은 진행이 순탄치 못했습니다. 실현가능성과 거액의 비용 등을 놓고 국내외에서 반발 여론이 잇따랐고, 예산이 삭감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미국은 1989년 4월 레이저무기 '알파'의 고출력 시험에 성공했고, 컴퓨터로 열추적 미사일을 조종하는 프로젝트를 일컫는 브릴리언트 페블스(Brilliant Pebbles) 실험도 성공적으로 수행하는 등 나름대로 성과를 올려왔습니다.
국제관계학에선 1980년대부터 경제난에 시달려온 구(舊)소련이 이에 '주눅'이 들어서 "더 이상 맞서기 힘들다"며 경쟁을 포기하기에 이르렀고, 결과적으로 냉전의 붕괴까지 초래했다고 보는 게 일반적 견해입니다.
막강한 경쟁자가 무너졌지만, 미국의 '스타워즈' 구상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습니다. 클린턴 정부 시절에도 소리없이 진행됐고, 부시 정권에 이르러선 오히려 한층 더 집착하고 있습니다. 작년 가을, 의회예산 심의과정에서 지대공(地對空) 레이저 무기개발 계획이 추진되고 있음이 드러나 논란을 일으킨 사실이 이를 잘 보여줍니다.
무수한 신기술들이 하루하루 우리를 놀라게 하는 세상임을 감안하면, 언젠가는 우주상에서 공격형 위성들이 서로 간에는 물론 지상에 있는 특정 목표물에까지 레이저를 발사하며 전쟁을 벌이는 시대가 올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문득 듭니다. 하지만, 이 같은 생각이 그저 한낱 공상에 그쳤으면 합니다. 영화 소재로는 볼만한 우주전쟁, 현실이 돼도 과연 그렇게 볼만할까요.
주제 : 전통
▣ 혁명준비와 사랑 속삭였던 자유터전 '파리 카페'
예술가들이 많이 찾는 생 제르망 데프레 거리에는 파리의 ‘전설적인 카페’ 두 곳, ‘카페 레 되 마고’(Caf Les Deux Magots)와 ‘카페 드 플로르’(Caf de Flore)가 있다. ‘두 개의 중국산 도자기 인형’을 뜻하는 카페 레 되 마고는 1885년에 문을 열었다. 이 카페가 있던 자리에 원래 중국산 비단을 파는 가게가 있어서, 실크의 원산지 중국을 상징하는 뜻에서 중국 인형이 놓이게 됐다고 전해진다.
지난 7월 22일 점심, 중국 인형 두개가 바로 보이는 자리를 잡고 앉았다. 자리에 메뉴판이 없다고 하자, 검은 나비 넥타이를 메고 검은 조끼를 입은 노인 웨이터가 가슴팍에서 얼른 메뉴판을 꺼내줬다. 갖가지 케?과 파이를 놓은 은쟁반을 든 여자는, 테이블마다 다니며 “디저트를 즉석에서 고르라”고 했다. 머리가 희끗희끗한 노인 웨이터들은 숙련된 솜씨로 서비스를 했다. 언뜻 보면 평범하기 그지 없는 이곳도 발자취를 남긴 인사들의 이름을 대자면 끝이 없다. 우리에게 친근한 피카소, 생 텍쥐베리, 자코메티도 이집 단골이었고, 2차 대전 후 사르트르와 보봐르는 거의 매일 두시간씩 이곳에 죽치고 앉아 글을 썼다고 한다. 문학 예술인들의 ‘사랑방’으로 자리잡으면서 1933년부터 아예 문학상을 제정, 신예 작가들을 매년 뽑아 후원하고 있단다.
1890년 문을 열었다는 ‘카페 드 플로르’엔 사르트르, 시몬 드 보봐르, 알베르 카뮈, 자크 프레베르 등이 자주 모습을 드러냈다고 한다. 몇년 전 카페 주인이 바뀌면서 거래된 금액이 약 200억원 가까이 됐다고 하는데, 누군가 카페의 ‘100여년 역사’를 그 가격에 구입한 셈이다. 이곳 맞은편 길 건너에 있는 ‘리프’ (Lipp)카페는 바로 헤밍웨이가 ‘무기여, 잘 있거라’를 탈고한 곳이다.
파리의 ‘전설적인’ 카페들은 메뉴판 앞 뒤쪽에 유명 작가들 이름을 나열해놓고 ‘우리의 단골 손님’ 이었음을 내심 자랑한다. 과거의 흔적을 중시 여기는 문화의 표식일까? 아니면 순수한 상술에서일까? 어쨌든 관광객들은 자신이 마치 역사 속의 인물들과 마주 앉아 커피를 마시기라도 하는 듯, 행복해들 한다. 다만 이곳들에서 발길을 돌리는 사람들은 파리지앵들이다. 그들은 ‘나 만의 자리’가 있는 ‘집 같은’ 카페를 또 찾아 나선다. 하지만 또 모를 일이다. 50년이 흐르고 100년이 흐른 뒤, 무명(無名)의 카페들이 그곳의 ‘단골 손님’들 덕분에 주가를 높여 관광 책자에 소개되고, 거액을 들여 보수 공사한 뒤 관광객을 맞이할 수도 있으니 말이다.
주제 : 전화위복
♠ 절망감(실패)의 유익
미국 일간지에 보도된 사건, 태풍으로 배가 난파 당했지만 유일하게 살아 남은 한 남자에 관한 기사.
무인도에 홀로 던져진 그는 먼저 어설프게나마 오두막 집을 지었다. 그리고 그는 매일 수평선을 바라보며 자신을 구조해 줄 배를 기다렸다. 그러던 어느날 그가 가까스로 먹을 것을 구해 초라한 오두막 집에 돌아와 보니, 자신의 집이 불에 타고 있었다. 불에 타 주저앉아 버린 시커먼 잿더미를 바라보며, 그는 절망감에 빠져 이제 구조될 것이라는 희망가지 모두 타버린 듯 다가올 죽음만 생각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 다음날 이른 아침 배 한척이 그 섬에 닻을 내렸고, 그 남자는 무사히 구조 되었다.
배의 선장이 그 남자를 처음 보고 한 말이 “어제 당신이 불을 피워 올린 연기신호를 보았소” 라는 것이었다.
- 월트 L. 언드우드 - (하나님 내 영혼이 아파요 P.166)
▣ 신 발 /
1930년대에는 모든 광산지대와 공장지대의 마을들이 정말로 살기가 어려웠다. 서부 펜실베니아에 있는 내 고향 마을도 수천명의 남자들이 일자리를 찾아 거리를 배회할 정도였다. 우리 형들도 그들 중의 하나였다. 가족이 굶고 있을 만큼은 아니었지만 우린 별로 먹을 게 많지 않았다.
나는 대가족의 막내아들로 태어났기 때문에 내가 입는 모든 옷들은 위에서부터 대물림한 것들이었다. 펜티는 너무 길어서 무릎에서 펄럭였고, 짧은 바지들은 다른 천을 덧대 이어 붙여서 입어야 했다. 셔츠들도 수선한 것이 전부였다. 하지만 신발은, 신발의 경우는 이야기가 달랐다. 신발은 다들 완전
히 누더기가 될 때까지 신고 다녔다. 문자 그대로 너덜너덜해져서 발가락이 가죽을 뚫고 옆으로 삐져나올 때라야 비로소 폐기 처분되었다.
그 옥스퍼드 신발을 신기 전에 내가 신고 다닌 신발은 너무 낡아서 옆이 벌어지고 밑창 앞부분이 분리되었다. 그래서 걸을 때마다 밑창이 펄럭이며 박수치는 것 같은 소리를 냈다. 나는 낡은 자전거 튜브를 두 조각 잘라다가 한쪽 끝은 밑창에 붙이고 다른쪽 끝은 발가락 사이에 끼워서 걸을 때 소리
가 안 나도록 만들었다.
그런데 나한테는 누나가 한 명 있었다. 누나와 매형은 결혼 직후에 서부로 가서 콜로라도 주에 정착했다. 살림이 조금씩 퍼지자 누나는 자신들이 입던 옷을 우리에게 보냄으로써 조금이라도 친정에 보탬이 되고자 했다.
추수감사절 바로 전날, 우리는 누나로부터 그런 물건이 담긴 소포 상자 하나를 받았다. 우리 모두는 상자 주위에 모였다. 상자 구석에 그 신발이 있었다. 나는 당시는 그것이 어떤 신발인지 알지 못했다. 엄마도 몰랐고, 아버지나 다른 형제들도 몰랐다. 우리는 다만 그것이 누나가 신었던 신발인가 보다고 생각할 따름이었다.
엄마는 낡은 신발 옆으로 삐져나온 내 발가락들을 내려다보더니 상자 안으로 몸을 숙여 그 신발을 꺼내 내게 주었다. 나는 손을 뒤로 감추고서 빙 둘러선 가족들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나도 모르게 눈물이 솟았다. 다른 때와 달리 형들이 나를 놀리지도 않고 또 울보라고 부르지도 않는 게 이상했다.
30년이 지났지만 지금 생각해도 그것은 고통스런 순간이었다. 엄마는 나를 옆에 앉히더니 미안하다고 하시고서, 하지만 내가 신을 만한 마땅한 신발이 없고 또 겨울이 다가오고 있기도 하니 그 신발을 신어야만 한다고 말씀하셨다. 아빠는 내 등을 두들겨 줄 뿐 아무 말씀도 없으셨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형 마이크는 내 머리를 쑤석거리면서 모든게 다 잘 될 거라면서 안심을 시켰다.
마침내 모두 물러가고 나 혼자 남게 되었을 때 나는 누나의 신발을 신었다.
그것은 색깔도 노란색에다, 발가락 있는 앞부분이 뾰족했으며, 하이힐처럼 높은 굽이 달려 있었다. 누가 봐도 여자들이 신는 예쁘장한 구두였다. 나는 그 자리에 주저앉아서 눈물 사이로 그 구두를 바라보면서 조용히 흐느껴 울었다.
이튿날 아침 학교에 갈 시간이 다가왔을 때 나는 최대한으로 꾸물거렸다.
그 신발을 맨 나중에 신기 위해서였다. 다시 눈물이 쏟아지려고 했지만 끝까지 울음을 참았다. 마침내 나는 학교에 등교해야만 했다. 나는 뒷길로 해서 갔으며, 학교 운동장에 들어갈 때까지도 누구도 앞지르지 않으려고 조심했다. 학교 운동장에 도착했을 때 그곳에 나와 마찬가지로 밀러 여선생님의 반에 소속된, 나보다 나이가 많고 키가 큰 나의 유일한 적 티미 오툴이 서 있었다.
티미 오툴은 내가 신은 누나의 신발을 한 번 쳐다보더니 내 팔을 붙잡고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다.
"에반이 여자 신발을 신었대요! 여러분, 에반이 여자 신발을 신었어요.!"
아, 내가 그 녀석을 늘씬하게 두들겨 팰 수만 있었어도! 하지만 그는 나보다 훨씬 덩치가 크고 힘이 셌다. 두들겨 패는 건 둘째치고 그의 손아귀에서 빠져나올 수도 없었다. 그는 아이들이 빙 둘러쌀 때까지 나를 놓아주지 않았다 .내가 무엇을 어떻게 했는지는 모르지만, 그때 갑자기 올맨 웨버 교장이 그곳에 나타나셨다. 교장 선생님은 말씀하셨다.
"어서들 교실로 들어가라. 수업 시작종이 울릴 시간이다."
나는 티미 오툴이 더 이상 나를 괴롭히기 전에 쏜살같이 학교 건물 안으로 달려가 교실로 들어갔다.
조용히 자리에 앉은 나는 눈을 내리깔고서 다리를 엉덩이 밑에 감추려고 애를 썻다 .하지만 그것도 허사였다. 그 원수 같은 티미 오툴이 포기하지 않고 자꾸만 내 신발을 들거렸다. 그는 몇 번 내 책상으로 다가와 춤을 추면서 내가 신은 누나의 신발을 놀려댔다. 그리고 한 술 더 떠서 나를 에드나라는 여자 이름으로 불렀다.
오전 수업이 절반쯤 흘렀을 때 우리는 서부 개척자들에 대해 배우고 있었다. 밀러 여선생님은 우리에게 캔자스, 콜로라도, 텍사스 주와 그 밖의 여러 지역에서 활약한 선구자들에 대해 많은 역사적인 이야기를 들려 주었다. 이때 올맨 웨버 교장 선생님이 우리 교실을 들어오시더니 조용히 문가에 서서 수업을 지켜보셨다.
그 아침 전가지만 해도 나는 다른 아이들과 마찬가지였다. 다시 말해 올맨 웨버 교장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그는 정말 야비한 사람이었다. 그는 성질이 나빴다. 또 그는 여자아이들만 좋아했다.
그는 우리 교실에 들어와 문가에 가만히 서 있었다. 그런데 밀러 선생님을 제외하고는 우리는 올맨 웨버 교장이 한때 오클라호마(미국 중남부에 있는 주) 목장에서 살았었다는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 밀러 선생님은 교장을 향해 우리의 수업에 함께 참여해 주시지 않겠느냐고 정중히 요청했다.
뜻밖에도 그는 그렇게 하겠다고 수락했다. 그런데 일반적인 교과 내용을 이야기하지 않고 올맨 웨버 교장은 카우보이들의 생활과 인디언들에 대한 이야기들을 우리에게 들려 주기 시작했다. 심지어 카우보이들이 부르는 노래를 두어 곡씩 부르기까지 했다. 그런 식으로 교장 선생님은 40분 동안 수업을 이끌어 갔다.
정오가 다가오고 우리가 집으로 점심을 먹으러 갈 시간이 되었는데도 올맨 웨버 교장은 아직도 이야기를 계속하면서 내가 앉아 있는 복도 쪽으로 걸어오기 시작했다. 갑자기 그는 내 책상 근처에서 걸음을 멈추더니 말을 중단했다. 나는 그의 얼굴을 쳐다보고서 그가 내 책상 밑을 바라보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는 내가 신은 누나의 신발을 뚫어져라 응시하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얼굴이 빨개지면서 얼른 발을 엉덩이 밑으로 감추었다. 하지만 내가 그것들을 미처 감추기도 전에 그가 속삭이듯 탄성을 내질렀다.
"카우보이 옥스퍼드 신발이다."
내가 물었다. "지금 뭐라고 하셨죠?"
그러자 그가 다시 말했다. "진짜 카우보이 옥스퍼드 신발이야!"
다른 아이들이 잔뜩 고개를 빼고서 교장이 대체 무엇을 바라보고 있는지, 그리고 그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알아들으려고 하는 사이에 올맨 웨버 교장은 또다시 기쁨에 넘친 소리로 탄성을 지르며 말했다. "에반, 도대체 어디서 그 진짜 카우보이 옥스퍼드 신발을 구했지?"
순식간에 교실 안의 모든 사람들이 교장 선생님과 내 곁으로 모여들었다.
밀러 선생님까지도 궁금한 표정으로 우리들 곁으로 다가오셨다. 그리고 모두가 합창하듯이 말하기 시작했다. "에반이 진짜 카우보이 옥스퍼드 신발을 신었대!"
순식간에 그것은 내 생애에서 가장 행복한 순간으로 돌변했다.
어쨌든 시간이 별로 많이 남지 않았기 때문에 올맨 웨버 교장은 밀러 선생님에게 나만 허락한다면 남학생과 여학생들 모두에게 내가 신은 카우보이 옥스퍼드 신발을 자세히 구경할 기회를 주는 것이 좋겠다고 말했다 . 그래서 티미 오툴을 포함해 모든 학생이 일렬로 서서 내 책상 옆을 지나가면서 내가 신은 멋진 신발을 자세히 구경했다. 나는 어깨가 으쓱해졌지만, 엄마가 항상 자랑은 금물이라고 가르치셨기 때문에 너무 잘난 체하지 않으려고 애쓰면서 자리에 앉아 있었다.
마침내 점심시간이 되었다. 나는 교실 밖으로 나가기도 힘들었다. 모두가 내 곁에서 걷고 싶어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모두가 내 신발을 꼭 한 번만 신게 해달라고 졸랐다 . 내 진짜 카우보이 옥스퍼드 신발을 말이다. 난 생각해 봐야겠다고 대답했다.
그날 오후 수업 시간에 나는 올맨 웨버 교장에게 학생들 모두에게 내 카우보이 옥스퍼드 신발을 한 번씩 신게 해 보면 어떻겠느냐고 물었다. 교장은 그것에 대해 생각에 생각을 거듭하는 표정이었다. 마침내 그는 남학생들에게는 그것을 신게 해보는 것이 아무 문제가 아니지만 분명히 여학생들에게는 신게 하지 말아야할 것이라고 말했다. 어쨌든 여학생들이 카우보이 옥스퍼드 신발을 신는다는 건 말도 되지 않는다. 나도 그렇게 생각했는 데 올맨 웨버 교장도 그렇게 생각했다는 것이이 무척 재미있었다.
그래서 나는 우리반의 모든 남학생들에게 내 신발을 한 번씩 신어 보게 했다. 티미 오툴에게도 신어 보도록 허락했다. 하지만 나는 그 애를 맨 나중에 신어 보게 했다. 그리고 그는 그 신발이 맞지 않는 유일한 학생이었다. 티미 오툴은 우리 누나에게 편지를 보내 또 한 켤레를 보내 달라고 부탁하면 안되느냐고 졸랐다. 하지만 나는 절대 누나에게 그런 편지를 보내지 않았다.
나는 그 마을에서 카우보이 옥스퍼드 신발을 신은 유일한 사람이었고, 난 정말로 그게 자랑스러웠으니까.
- 폴 E. 모하이니
다른 사람의 삶에서 고통을 덜어 주려고 노력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과연 무엇 때문에 살고 있단 말인가?- 조지 엘리어트
♠ : 지혜로운 개선/ 성구 : 눅 5:5
1930년대 초 샌프란시스코에는 많은 양의 황금이 쏟아져 나왔다. 자연히 황금을 캐려고 모여드는 서부의 사나이로 이른바 골드러시를 이루었고,이에 따라 전지역이 천막촌으로 변해 갔다. 천막 천을 제조하던 스트라우스는 이 와중에서 밀려드는 주문으로 톡톡히 재미을 보고 있었다. 어느날 그에게 군납 알선업자가 찾아와 대형천막 10만여개 분량의 천막천을 납품하도록 주선하겠다고 제의한다. 뜻박의 행운을 잡은 그는 즉시 빚을 내 생산에 들어갔다. 밤낮으로 생산에 몰두해 3개월 만에 주문 받은 전량을 만들었을 무렵, 뜻하지 않는 문제가 발생했다.모든 희망을 걸었던 군납의 길이 막혀버린 것이다.
산더미 만한 분량의 천막 천이 방치된 채 빛독촉이 심해지고 직원들도 월급을 내놓으라고 아우성이었다. 헐값에라도 팔아 밀린 빚과 직원들의 월급만이라도 해결하고 싶었으나 엄청난 양을 한꺼번에 사줄 사람도 나서지 않았다.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고 있던 어느날 스트라우스는 홧김에 술이라도 실컷 마셔볼 요량으로 주점에 들렀다가 금광촌 광부들이 옹기종기 모여 앉아 해진 바지를 꿰매고 있는장면을 보게되었다.
ꡒ쯧쯧, 바지 천이 모두 닳았군. 질긴 천막천을 쓰면 좀처럼 떨어지지 않을 텐데...ꡓ
스스로 무심코 내뱉은 말 속에 바로 정답이 들어 있었던 것이다. 1주일후 스트라우스의 골칫거리었던 천막 천은 산뜻한 바지로 탈바꿈돼 시장에 첫선을 보였다. 푸른색의 잘 닳지 않는 바지, 이름하여 청바지는 뛰어난 실용성을 인정받아 광부 뿐 아니라 일반인들에게도 불티나게 팔려 나갔다. ꡐ1년 판매량 2천만개, 순이익 6천만달러ꡑ. 당시 전 산업분야에 걸쳐 단일 품목중 가장많이 팔리고 가장 큰 순이익을 올린 것으로 기록돼 있다. 세상에 나온지 3년만에 스트라우스의 청바지는 지구촌 곳곳에 탄탄히 뿌리를 내렸고, 스트라우스는 그야말로 평생을 황금방석 위에서 살 수 있었다
사람이 살다보면 사업이 안되고 일이 어렵게 꼬여지는 경우를 가끔 경험한다. 이럴때 우리는 자포자기 하거나 쉽게 낙담한다. 그러나 우리 눈에는 절망적으로 보이는 사건이라도 오히려 그것이 더 나은 길을 향한 지름길이 될 수도 있다는 열린 자세가 필요하다. 쓸모없어진 천막천을 청바지로 바꾸어 낼 수 있었던 사고의 개선이 결국 스트라우스가 성공한 비결이듯이 우리들도 막혀진 현실 그 자체가 오히려 미래의 소망의 차안이 됨을 명심해야 한다.
♠ 전화위복
우리 교회에서 파나이섬에 파송되어 선교하는 강요한 선교사 이야기입니다. 11년동안 한 곳에 머무르면서 107개 교회를 세웠습니다. 집에서 예배를 드릴 때면 집안으로 돌이 빈번하게 날아들었습니다. 그렇다고 예배를 중단할 수는 없었습니다.
지난번에는 교회 세울 돈을 가지고 가다가 강탈당하였습니다. 아무래도 마피아단 소행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강선교사는 마피아단 두목을 찾아가서 말했습니다. ꡒ당신 부하가 내게서 강탈한 돈은 하나님의 집을 지을 돈입니다. 잘못 사용하면 큰일납니다ꡓ
이 말을 들은 단장은 집에 가서 기다리라고 하였습니다. 이튿날 두목은 부하들과 오픈카를 타고 강선교사 집을 방문하였습니다. 동네 사람들에게 화제가 되었습니다. 그 다음날부터 예배를 드려도 돌이 날아오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하십니다.
강문호 목사(갈보리선교교회)
출처: https://lectio.tistory.com/541 [Lectio Divina]
'예화' 카테고리의 다른 글
성철승려의 마지막 유언 (0) | 2019.12.08 |
---|---|
교회는 구원의 방주 (0) | 2019.12.07 |
복을 주시는 하나님 / 우상 (0) | 2019.11.01 |
현대인의 우상 (0) | 2019.11.01 |
바로 지금(只今) (0) | 2019.11.0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