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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위일체 신학과 언약 사상의 관점에서 본 Calvin의 신학 원리

하나님아들 2019. 9. 30. 22:18

삼위일체 신학과 언약 사상의 관점에서 본 Calvin의 신학 원리 
김윤태 박사 
(천안대학교 조직신학 교수) 

I. 서론 

Calvin의 신학 전체를 관통하는 어떤 신학 원리가 있는가? 또는 Calvin의 신학에 있어서 중심되는 어떤 교리가 있는가? 있다면 그것은 무엇인가? 하는 문제는 개혁 신학 내에서 오랜 동안 논의되어져 온 문제이다. 이와 관련해서 다양한 견해들이 제시되어져 왔는데, 예컨데 하나님의 주권이나 예정 교리, 기독론, 하나님에 대한 두 가지 지식, 언약사상, 그리고 삼위일체 교리 등이 그것들이다. 그러나 이렇게 많은 견해들이 제시되어져 왔음에도 불구하고 아직 통일된 공감대를 이룰만한 어떤 결론이 도출되지는 않은 것으로 보여진다. 이같은 사실자체는 Calvin 신학의 복잡성을 어느 정도 우리에게 드러내어 주고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Calvin의 신학에는 어떤 신학의 원리가 없으며 오히려 Calvin의 신학은 그 본질상 complexio oppositorum이라고 한 Herman Bauke의 말이 설득력을 가지게되는 것도 무리는 아니라고 보여진다. 한편 그런 가운데서도 한가지 의심할 바 없이 모든 사람이 인정하는 바는 Calvin의 성경중심주의(Biblicism)라 할 것이다. 

한편, Calvin의 신학 원리가 무엇인가 하는 질문은 최근 문제가 되고 있는 Calvin의 신학과 후대 Calvinist들의 신학 사이의 연속성과 불연속성의 문제와도 본질적인 관련을 갖고 있는 것으로 보여진다. Calvin의 신학과 Calvin 이후의 Calvinist들의 신학 사이의 관계 문제는 1966년 Basil Hall이 "Calvin against the Calvinists"이란 제목의 글을 발표한 이후로 논란이 계속되어 오던 중 이후 R. T. Kendall의 논쟁적인 논문과 이에 대한 Paul Helm의 반박으로 인하여 더욱 가중되었다. 이러한 논쟁 속에서 우리는 다시 한번 개혁 진영내의 해묵은 논란거리로서 'universal atonement'를 지지하는 입장과 'limited atonment'를 지지하는 입장 사이의 도저히 풀 수 없을 것 같이 보이는 긴장이 그 내면에 존재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과연 Calvin은 'universal atonement'를 가르쳤는가 아니면 'limited atonement'를 가르쳤는가? 아니면 둘 다를 가르쳤는가? 우리는 이러한 문제들과 관련해서 다시 한 번 Cavin의 신학 원리가 무엇인지를 살펴보는 것이 필요하리라 생각된다. 

본 글에서 필자는 Calvin의 신학을 그의 기독교 강요를 중심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기독교 강요는 Calvin 자신의 성경 주석 작업 위에 기초한 것으로서 그의 기독교 이해를 가장 조직적이고도 체계적인 형태로 드러내고 있는 것으로 이해되어진다. 저자는 이러한 Calvin의 기독교 강요를 중심으로 Calvin의 신학이 그의 삼위일체교리와 언약사상을 중심으로 형성되었음을 드러내고자 하며, 그러므로 이러한 Calvin의 신학은 '언약적 삼위일체 신학'이었음을 입증하고자 한다. 이러한 Calvin의 기독교 이해는 구원의 계시로서 성경이 가르치는 바를 따라 그가 이해한 구원의 신비를 풀어 설명한 것으로서 기독교 강요는 그러므로 그의 독자들이 이를 읽음으로 성경이 가르치는 바 구원의 신비를 보다 명료하게 이해할 수 있도록 제시하고자 하는 것이었다. 한편, Calvin은 그의 언약적 삼위일체 신학에서 근본적으로 구원을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관계에서 이해하고 있으며, 또한 이런 그의 언약적 삼위일체 신학적 구원이해에 있어서 그는 하나님의 주권과 인간의 책임 사이에 균형 잡힌 시각을 가지고 있었다. 이러한 Calvin의 신학의 원리에 대한 이해는 그를 따르는 후대 Calvinist들 사이에서 논란이 되고 있는 universal atonement와 limited atonement에 대하여서도 보다 균형 잡힌 시각을 가질 수 있도록 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고 하겠다. 


II. Calvin의 신학에 있어서 언약 사상 

Calvin은 성경의 가르침을 따라서 구원과 관련하여 이 땅 위에서 일어나는 모든 사건들을 근원적으로 하나님과의 관련 속에 두고 있다. 즉, 세상의 시작과 종말, 그리고 인간의 최종 운명에 이르기까지 이 모든 것의 시작과 끝을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Calvin에게 있어서 구원은 근본적으로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관계에서부터 이해되어 진다. 이러한 신-인 관계는 성경에서 언약적 관계로 묘사되어 진다. 

비록 Calvin은 그의 기독교 강요에서 언약과 관련하여 따로 독립된 항목을 두지 않았고, Bullinger가 그랬듯이 언약이라는 특정한 주제에 관한 어떤 독립된 글도 쓰지 않았지만, 그러나 언약 사상은 Calvin의 글들 속에서 광범위하게 나타나고 있다. 언약 사상은 Calvin의 가르침에 있어서 중요한 요소이며 또한 Calvin의 신학에 있어서 중요한 역할을 감당하고 있다. 언약 사상은 비록 Calvin의 신학에 있어서 어떤 분명한 조직적인 교리의 형태로 나타나고 있지는 않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는 Calvin의 많은 교리들 속에서 그것들과 함께 엮여져서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Calvin의 언약 사상을 이해하기 위해서 우리는 먼저 그의 언약 사상의 일반적인 배경으로서 재세례파와의 논쟁을 고려해야 할 것이다. 당시 그의 다른 동료 개혁자들과 마찬가지로 Calvin은 구약을 신약보다 열등한 것으로 여기고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을 하늘의 영생의 소망을 갖지 못한 '돼지들의 무리'로 보는 재세례파에 대항하여 신약과 구약의 통일성에 대해 강조하고자 하였는데, 이렇게 함에 있어서 그는 언약 사상을 사용하였다. 이러한 그의 언약 사상은 강요 10장과 11장에서 보다 집중적으로 나타난다. 여기서 Calvin은 언약사상에 기초하여 신구약이 하나님의 영원한 생명의 약속을 중심으로한 한 분 하나님의 하나의 언약이며, 그럼으로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들 또한 동일한 생명의 약속을 가졌음을 강조하고 있다. 

다음으로 Calvin의 언약 개념의 사용은 그의 구원에 대한 관심의 맥락에서부터 이해되어져야 할 것이다. Calvin에게 있어서 언약은 인간이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거울로서 그를 통하여 하나님은 자신을 인간에게 나타내 보이신다. 그리스도를 통하지 아니하고는 어떤 인간도 하나님과 하나님의 구원을 이해할 수 있는 길이 없다. 어떤 인간도 그리스도를 통하지 아니하고는 하나님과 타락한 인간 사이에 놓여져 있는 건널 수 없는 간격을 뛰어 넘어 건너갈 수 없는 것이다. 그리스도는 언약을 통하여 우리에게 알려지며, 바로 이 동일한 언약으로 말미암아 과거의 선조들 또한 우리와 마찬가지로 그리스도 안에서 영생을 얻기 위한 영적 지식을 얻을 수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지식은 단순히 상상으로 얻어진 추상적인 지식이 아닌 것은 하나님과 그의 구원은 구체적인 인간역사 속에서 하나님께서 인간과 관계를 맺으심 안에서 알려진 지식인 때문이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구원의 뜻은 언약관계로서의 신-인 관계 안에서 점진적으로 인간 역사 속에서 드러내어지고 진전되어진다. 이러한 점에서 그리스도와 언약은 구원과 구원 역사를 이해함에 불가분의 관계 속에 놓여지게 된다. 언약은 창조-타락-구속으로 이어지는 구속 역사에 있어서 중심에 놓여지는 것이다. 언약은 이러한 구속역사의 통일성과 연속성을 이어주는 연결체인 것이다. 

언약은 창조주로서의 하나님과 피조물로서의 인간 사이에 건널 수 없는 간격을 이어주는 다리와 같다. 언약을 통해서 하나님은 그의 창조물로서의 인간과 관계를 맺으신다. 하나님에 대한 지식은 이렇게 하나님께서 인간과 언약 관계를 맺으신 그 관계 안에서 알려진다. 하나님은 인간과 언약 관계를 맺으심을 통해서 그 자신과 그의 구원과 관계된 그의 뜻을 인간에게 계시하신다. 여기서 우리는 두 언약의 당사자가 나타남을 보게 된다. 즉, 하늘 높은 곳에 계신 하나님과 낮은 세상에 존재하는 인간이 그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아는 것과 인간 우리자신을 아는 것은 서로 긴밀히 연결되어 있으며, 이 두 가지 형태의 지식은 구원을 전체로서 이해함에 대단히 중요한 것이다. Calvin에게 있어서 전적으로 초월해 계셔서 하늘 저 위에 계신 하나님을 아는 참된 지식은 하나님 자신이 창조와 구속의 사역을 통해서 자신을 알리신 것을 고려함이 없이는 결코 얻을 수 없는 것이다. 또한 동시에 Calvin에게 있어서 우리 자신을 아는 참된 지식 또한 하늘에 계신 하나님을 묵상함이 없이는 얻을 수 없는 것이다. 이렇게 함으로 한편 하나님은 그 본질상 불가시적이고 불가해한 분이시지만, 그럼으로 그의 피조물로부터 초월해 계시는 분이시지만, 그러나 또 다른 한편으로 하나님은 그의 창조와 구속 사역을 통하여 자신을 볼 수 있도록, 그리고 이해할 수 있도록 나타내시는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언약은 하나님의 활동의 ad extra로서 하나님의 계시를 이해함에 중심이 되어지는 사상인 것이다. 

Calvin의 기독교 이해에 있어서 우리는 '위(above)로부터'의 시각과 '밑(below)으로부터'의 시각의 두 축이 있음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한편 Calvin은 이 두 축 사이에 긴장을 두고 있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Calvin에게 있어서 이 둘은 서로 역동적이고도 불가분의 관계로 연속성과 통일성을 가진다. Calvin의 이해에 있어서 천상적 영적 영역으로서 '위'의 영역에 계신 하나님과 지상적 창조된 영역으로서 '아래'의 영역에 있는 인간 사이에는 본질적인 긴장이 있다. 즉, 영원한 것과 시간적인 것 사이에, 그리고 무한한 것과 유한한 것 사이의 긴장인 것이다. 이는 다른 말로 표현한다면 창조되지 않은 '하나님 나라'의 영역과 창조된 '세상'의 영역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긴장은 성육신하신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에 의해서 중재되어지는데, 그리스도는 이 둘을 연결하는 'a middle term'인 것이다. Calvin에게 있어서 이 두 축을 연결하는 middle term으로서의 그리스도는 언약의 중재자인 동시에 언약의 중심에 서 있는 언약의 내용인 것이다. 그러므로 Calvin의 구원의 이해에 있어서 어떤 세 영역이 나타나는데, 곧 '위'의 영역과 '밑'의 영역, 그리고 그 둘을 잇는 '중간'영역이 그것이다. 저자는 이를 각기 '하나님 나라'의 영역, '세상'의 영역, 그리고 '교회'의 영역이라 부르고자 한다. 

이렇게 Cavin에게 있어서 구원은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언약 관계 속에서 이해되어지고 있는데, 이런 신-인 관계 속에서 구원을 볼 때 두 가지 서로 구별되는 시각이 존재하게 된다. 이는 곧 '위'의 영역 곧 영원하고 불변하고 절대적인 것이 속해 있는 영역으로부터의 시각과, 또 한편 '밑'의 영역 곧 시공의 제한 속에 있으면서 가변적이고 조건적인 것이 속해 있는 영역으로부터의 시각이 그것이다. Calvin은 인간의 이성이 인식할 수 있는 대상을 두 가지 영역에 속한 대상(two classes of objects)으로 나누어 구별하고 있다. 즉, 땅의 것들(earthly things)과 하늘의 것들(heavenly things), 열등한 것들(inferior objects)과 우등한 것들(superior objects)이 그것이다. 또한 그는 동시에 이 세상의 영역(the sphere of the present life)에 속한 것들과 이 세상을 넘어서는 영역(the sphere above the present life)에 속한 것들 사이에 구분을 두고 있다. 땅의 것들은 이 세상의 영역에 속하고, 하늘의 것들은 이 세상 위에 있는 영역에 속한다. 타락한 인간의 이성의 능력은 창조의 관계와 질서로서의 자연법에 의해 지배를 받는 이 세상의 영역에 속한 것들에 제한되어진다. 자연적 인간의 이성은 그러므로 성령으로 거듭나기 전에는 하늘에 속한 것들을 인식할 수 없다. 그러므로 자연적 이성으로는 어떤 인간도 이 세상 위의 영역에 속한 것들을 알 수 없다. 이런 점에서, 곧 타락한 인간의 이성의 측면에서 고려할 때 이 세상 위의 영역은 이 세상의 영역과 분리되어진다. '밑'으로부터의 시각에서 본다면 세상의 영역과 하늘의 영역 사이에는 근본적인 불연속성이 놓여지게 되는 것이다. 하늘에 속한 것들은 오로지 성령 안에서 중생한 신자들에 의해서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인식되어 질 수 있으며, 그러므로 이러한 신자들은 중간적 영역으로서 교회의 영역에 속하게 된다. 중생하지 못한, 그러므로 세상의 영역에 속한 인간의 이성으로는 하늘 영역에 속한 것으로서 하나님 자신 안에 있는 진리와 하나님께서 우리와의 관계를 맺으심 속에서 나타내신 영적 진리들을 분별할 수 없다. 그러므로 Calvin은 고린도전서 2장에 기초해서 하늘 아버지의 왕국과 이에 속한 것들(곧, 성부의 작정과 선택), 곧 하나님 나라의 영역에 속한 것들은 자연적 인간 이성과 세상의 지혜로는 분별할 수 없음을 논증하고 있는 것이다. Calvin에게 있어서 이러한 것들은 오로지 성령의 특별한 사역(곧, 중생케 하심과 조명)에 참여하는 신자들에 의해서만 인식되고 분별되는 것이다. 

이상에서 살펴본 바에 기초하여 우리는 Calvin은 성경이 가르치는 바 기독교의 진리를 조망하려 할 때 언약사상의 토대 위에서 '위'로부터의 시각과 '밑'으로부터의 시각을 동시에 가졌으며 아울러, 세 가지 영역 곧 '하나님 나라'의 영역과 '세상'의 영역 그리고 그 중간적 영역으로서 '교회'의 영역을 인식하였다고 말할 수 있겠다. Calvin에게 있어서 위에 있는 '하나님 나라'의 영역에 속한 것은 밑에 있는 '세상'의 영역에는 숨겨진다. 그러나 이 숨겨진 것이 세상에 나타내어지지 않은 것은 아니다. 숨겨진 것은 세상에 나타내어지지만, 그럼으로 이는 모든 나타난 것의 근원(source)이 되는 것이지만, 세상은 이를 알지 못한다. 이는 오직 교회의 영역에 주어지는 성령의 특별한 사역 속에 있는 신자들에게만 인식되어지는데, 이 신자들은 그리스도를 통한 신-인 언약 관계 안에 있는 자들인 것이다. 

이러한 신-인 언약 관계는 하나님께서 그의 약속을 인간에게 은혜로이 수여하심으로 시작된다. 하나님의 약속은 언약의 중심에 놓여진다. 하나님의 약속과 언약은 서로 불가분의 관계에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약속은 곧 언약으로 불려진다. Calvin에게 있어서 신약과 구약은 생명의 약속을 중심으로한 한 분 하나님의 동일한 약속으로 이해된다. 

Calvin에 따르면, 하나님은 세상을 창조하실 때에 목적 없이 창조하시지 않으셨다. 본래적 하나님의 창조의 목적, 곧 창조의 종국은 인간에게 하나님의 나라에서의 영원한 생명을 주시기 위함이었다. 하나님 나라에서의 영원한 생명은 창조의 목적이며 이는 창조시로부터 하나님의 약속으로 주어져왔다. 그러나 한편 이 영원한 생명의 약속은 하나님이 인간에게 이 약속을 주셔야만할 무슨 의무나 빚진 것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주권적인 의지에서부터 말미암아 주시는 선물로서 그러므로 인간에게는 이것과 관련하여 자만할만한 어떤 여지도 없는 것이다. 한편, 하나님은 그의 창조사역을 통해 창조된 세계 안에 이와 같은 영원한 생명의 약속을 드러내셨다. 이는 특별히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계 안에 있는 창조의 관계와 질서 속에서 드러내어 진다. 첫 사람 아담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았으며 그럼으로 그는 창조된 세상 안에 나타나 있는 이 하나님의 약속을 창조된 세상을 묵상함으로 알 수 있었으며 또한 이러한 묵상을 통하여 하나님의 약속을 아는 지식을 더욱 계발할 수 있었다. 생명의 나무는 이러한 영생의 약속의 symbol로서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약속을 보다 가시적인 형태로 드러내는 것이었다. 아담은 이 생명나무의 실과를 보고 만지고 함으로서 보이지 않는, 그의 창조의 목적으로서 종말적으로 성취될 하나님의 영원한 생명의 약속을 묵상하고 즐거워할 수 있었다. 그는 이러한 생명의 약속을 바라봄 안에서 이 생명의 약속을 성취하기 위한 조건으로서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거룩하고 또한 하나님을 향하여 곧은 삶을 추구하여야 하였던 것이다. 즉, 이러한 영원한 생명에 대한 소망 속에서 아담은 이 약속을 주신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그의 하나님을 향한 거룩한 삶을 통하여 입증하여야만 하였는데, 그것은 곧 하나님의 계명을 지킴으로서였던 것이다. 이러한 하나님의 계명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먹지 말라는 것이었으며, 이 계명에 순종함으로 아담은 하나님과 그의 약속에 대한 그의 믿음을 나타내 보여야 했던 것이다. 

이러한 Calvin의 이해에 있어서 하나님의 약속은 '위'의 영역에 속한 하나님의 절대 주권에서부터 나오는 것으로서 그러므로 이것은 선물이며 그러므로 인간에게 이와 관련하여 자신을 내세울 만한 어떤 여지도 남겨 놓지 않는다. 그러나 한편 하나님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인간에게 이러한 선물로서 하나님의 약속을 주심으로 그의 인격적인 책임 있는 반응을 요구하신다. 즉,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인간은 이러한 하나님의 약속을 분별하고 또 성취할 수 있는 능력을 가졌으며, '밑'의 영역에 있는 인간에게 있어서 이 약속의 성취는 인간의 책임에 달린 것이었던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이러한 신-인 언약 관계 안에서 하나님의 주권과 인간의 책임은 동시에 만나게 되는 것이다. 

Calvin에게 있어서 타락은 창조의 관계와 질서로서의 "전 자연 질서"(the whole order of nature)의 왜곡이다. 그에 따르면 그 중에서도 가장 의미심장한 왜곡은 하나님과 인간사이의 관계의 왜곡이다. 하나님은 원래 인간이 "영적 생명"(the spiritual life) 곧 "그의 창조주에게 연합하여지고 결합되어진"(united and bound to his Maker)상태 안에 머물러 있도록 하셨다. 따라서 아담의 타락이 의미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본래 수여해 주신 영원한 생명의 약속의 상실이었다. 이러한 아담의 타락의 결과는 그의 전 후손들에게까지 확장되어 진다.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그를 믿는 신자들의 대표자가 되듯이 아담이 인간의 대표자(fountain head)가 되기 때문이다. 아담 안에서 온 인류는 신-인 언약 관계가 깨어진 상태 아래에서 태어남으로 하나님의 저주아래 놓이게 되었으며 그러므로 하나님의 생명의 약속을 잃어버리게 되어진 것이다. 구속의 의미는 그러므로 이렇게 깨어진 신-인 관계가 구속주, 곧 그리스도를 통하여 다시 회복되어지는 것이며, 그러므로 그러한 구속주를 통하여 다시금 영원한 생명의 약속이 회복되어지는 것이다. 타락의 결과로부터의 회복은 오로지 그리스도를 통하여만 이루어진다. 

하나님께서는 죄를 없이 하시는 그리스도의 사역을 통하여 영원한 생명의 약속을 다시금 회복시키신다. 아담 안에서 잃어 버렸던 본래적 영원한 생명의 약속은 그리스도 안에서 다시금 회복되는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구원은 그리스도의 구속사역을 통하여 깨어진 신-인 관계를 회복하는 것이며 그럼으로 그와 같은 관계의 회복 안에서 다시금 잃어버렸던 영원한 생명의 약속을 회복받는 것으로 이해되어진다. 그리스도를 통해 세워지는 신-인 언약은 타락한 인간에게 하나님께서 은혜롭게 제공하시는 구원의 길이다. 이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의 언약은 시작부터 끝까지 다양한 역사의 과정 속에서 점진적으로 전개되어진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양한 역사의 과정 속에 나타나는 언약은 그리스도안에 있는 동일한 하나님의 하나의 약속을 중심으로 한 하나의 언약이다.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Calvin은 인간 역사 속에서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이 펼쳐지는 구원 역사를 이해함에 있어서 언약 사상을 중심으로 이해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즉, Calvin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약속을 중심으로한 언약은 구속역사의 전 과정을 통일성 있게 하는 기초로 인식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Calvin에세 있어서 언약 사상은 그가 구약과 신약의 연속성과 통일성을 주장함에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고 있는 것이다. 구약과 신약은 본질상 동일한 언약이다. 그러나 그 차이는 단지 the manner of dispensation(modus administrationis)의 차이인 것이다. 신약과 구약에 있어서 그리스도는 신-인 언약에 있어서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유일한 중개자(mediator)가 되시며, 그러므로 이 동일한 중개자 안에서 주어지는 하나님의 약속 또한 다르지 않은 동일한 약속인 것이다. 그러므로 Calvin에게 있어서 신약에서나 구약에서나 구원은 오로지 그리스도 안에서만 가능하다. 또한 동시에 Calvin은 구원역사의 연속성 속에서 언약의 점진적 진전을 말하고 있으며, 이러한 언약의 점진적 진전에 있어서 그리스도는 언약의 중심으로서 이 모든 과정의 결국이기도 하신 분이심을 말한다. 

이러한 구원의 언약은 그 시작부터 교회와 더불어 만들어진다. 인간의 타락이후 하나님은 교회와 더불어 그의 언약을 세우신다. 교회는 창조의 관계와 질서의 왜곡을 회복하기 위해 하나님이 이 땅에 창조하신 '조직체'(organism)이다. 그러므로 Calvin은 교회 밖에는 구원의 길이 없음을 분명하게 인식하고 있는 것이다. Calvin에게 있어서 교회는 "우리를 낳고 그녀의 젖으로 양육하는" 어머니와도 같은 존재인 것이다. 그는 교회에 대한 그의 이해 속에서도 '위'로부터의 시각과 '밑'으로부터의 시각의 두 방향에서의 시각을 보여 주고 있는데, 그것은 곧 역사세계로부터의 시각과 선택으로부터의 시각이 그것이다. 엄격하게 말한다면 그는 창세기 17:7을 주석하면서 이 땅의 역사 속에 교회의 시작을 아브라함과 체결된 언약으로부터 찾고 있다. 그러나 그는 창 4:25의 주석에서 교회의 존재를 아브라함을 거슬러 올라가 아담의 시대로까지 확장하고 있다. 이러한 Calvin의 교회에 대한 개념은 선택의 교리와 긴밀히 연결되어진다. 이 땅에 존재하는 구원을 위한 조직체로서의 교회의 기원은 하나님의 자비와 그의 기쁘신 뜻, 곧 하나님의 선택으로까지 거슬러 올라가지는 것이다. 사실 Calvin에게 있어서 교회와 선택이라고 하는 두 단어는 언약이라는 말과 상호 교차적으로 사용되어질 수 있는 말이다. 언약이라고 하는 역사적인 형태를 통해서 하나님의 언약공동체로서, 하나님의 특별한 백성으로서 교회는 다른 이방나라 곧 세상과 구별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그의 언약의 백성을 이방 백성과 구분하시는 것으로서 이 땅에 나타난 방법(revealed way)은 세상에 구원의 약속을 거저 주시는 것으로부터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으로서 교회를 세상과 구별하시는 숨겨진 방법(the hidden way)은 그의 선택을 통해서이다. 그러므로 이 땅에 있는 교회의 회원이 되는 것은 실상은 하나님의 은혜로우신 선택의 결과이며, 이는 하나님의 자비롭고 기쁘신 뜻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한편, '위'로부터의 시각에서 보면 교회는 "하나님의 비밀한 선택"의 결과로서 보여진다. 이 선택은 교회의 숨겨진 기초인 것이다. 그러나 또 한편, '밑'으로부터의 시각에서 보면 교회는 세상 속에 가시적으로 존재하는 신자들의 공동체로서 보여지며, 이들은 하나님의 약속을 믿음으로 받아들임으로 교회에 속하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하나님의 약속을 믿음으로 받아들인 이 땅의 신자들은 하나님의 언약 백성으로 불려지며, 그러므로 이러한 신자들의 모임인 교회는 언약공동체로 불려지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언약은 하나님의 나라의 영역에 숨겨진 하나님의 비가시적이고 비밀한 선택이 세상의 영역 속에 가시적으로 드러내어지는 수단으로서 역사적, 세상적 형태(historical, worldly form)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Calvin의 이해에 있어서 교회는 '밑'에 있는 '세상'의 영역과 '위'에 있는 '하나님의 나라' 또는 선택의 영역 중간에 놓여지게 된다. 그러므로 교회는 '위'로부터의 시각과 '밑'으로부터의 시각에서 동시에 보여지고 이해되어진다. 교회는 세상에 존재하지만 세상에 속하지는 않는다. 동시에 교회는 하나님의 선택의 결과이지만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비밀한 숨겨진 선택 그 자체와 정확히 일치하는 것은 또한 아니다. Calvin은 "일반 선택"(general election)과 "특별선택"(particular election) 사이를 구별하고 있다. 만일 우리가 아브라함과 그의 후손의 선택을 교회의 선택으로 볼 수 있다면, 이는 기독교 강요 III, xxi, 5에서 Calvin은 일반선택에 관해 서술하고 있는 것으로 이해될 수 있다. 이렇게 볼 때 Calvin은 교회를 사람들 가운데 "일반선택"(general election of the people)으로 이해했음이 분명해 보인다. 반면에 기독교강요 III, xxi, 6에서 Calvin은 "보다 제한된 의미에서의 선택"(more limited degree of election), 곧 특별 선택을 서술하고 있다. 여기에서 Calvin은 구약 역사 속에서 하나님의 언약 백성 가운데서도 언약에서 떨어져 나가는 자들의 예를 취급하고 있다. 특히 기독교 강요 III, xxi, 7에서 그는 "there is a particular election of individuals which is to be distinguished from the choosing of a covenant people."라는 생각에까지 그의 생각을 확장시키고 있다. 

이러한 Calvin의 이해의 빛에서 볼 때, 비록 어떤 사람이 이 땅에 있는 하나님의 언약백성의 공동체로서 교회의 회원이라 사실이 그가 반드시 구원을 받는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닌 것이 된다. Calvin에게 있어서 어떤 사람이 교회의 회원이 되었다는 것은 단순히 그가 "일반 선택"의 무리에 속하게 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의미가 없지 않은 것은 이러한 일반 선택의 무리 가운데서 하나님의 특별 선택에 속하는 무리가 나오게 되기 때문인 것이다. 교회 안에는 "두 종류"(twofold classes)의 사람들이 섞여 있는데, 하나는 "합법적인 자녀"(the legitimate children) 또는 "약속의 자녀"(the children of the promise)이고 또 다른 하나는 "위선적인 자녀"(spurious children)가 그것인 것이다. 이러한 Calvin의 견해에 있어서 '밑'으로부터의 시각, 곧 세상역사 속에 나타난 것의 시각으로 볼 때, 교회는 세상 속에 가시적으로 주어진 하나님의 약속을 믿음으로 받아들인 사람들의 언약공동체로 보인다. 그러나 교회는 '위'로부터의 시각, 즉 하나님의 숨겨진 선택의 시각으로부터 볼 때 '참된'(the true) 언약 백성은 '위선적인'(spurious) 언약 백성과 구별되어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언약의 약속은 교회의 회원이 믿음으로 언약에 머물러 있는 한 그들에게 신실하고도 효과적인 것이 된다. 그러나 믿음을 떠나게 되면 이 약속은 더 이상 그들에게 유효하게 되지 않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선택의 시각에서 볼 때 이러한 자들은 참된 하나님의 언약백성 곧 선택된 자들이 아닌 것으로 드러나게 되며, 믿음에 남아 있는 자들은 하나님의 참된 선택자들인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나타난 결과는 결국 최종적으로 하나님의 선택의 결과에 따른 것으로 이해되는 것이다. 즉, 선택의 시각에서 볼 때 참된 언약의 백성들이 끝까지 믿음에 남아 있게되는 것은 하나님의 선택으로부터 말미암아 나오는 하나님의 특별하신 은혜, 곧 선택된 자에게 주어지는 내적인 성령의 사역(중생과 효과적인 견인)의 결과로 이해되는 것이다. 


III. Calvin의 신학에 있어서 삼위일체 교리 

그의 피조물과 관계를 맺으시는 하나님은 삼위하나님이시다. 언약 관계는 삼위하나님의 활동(ad extra)이시다. Philip Walker Butin에 따르면 삼위하나님께서 그의 구원과 관련하여 어떻게 인간과 관계를 맺으시는가 하는 것은 Calvin에게 있어서 그의 기독교 강요를 구성해감에 있어서 강요전체에 걸쳐 면면히 흐르는 실제적 관심이었다. 그러므로 Butin은 Calvin의 전 신학에 있어서 삼위일체 신학은 그의 신-인 관계 이해에 있어서 본질적(intrinsic)이고 통합적(integrating)인 paradigm이었다고 결론짓고 있다. 그런 점에서 신-인 관계를 삼위일체 신학의 관점에서 이해하는 것은 Calvin에게 있어서 그의 신학 전반(예컨에, 계시와 구속, 그리스도인의 삶, 교회 그리고 성례 등에 이르기까지)을 구성함에 기본적인 locus였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기독교강요를 통해 보여지는 Calvin의 신학은 그러므로 구원의 신비를 이해하고자하는 그리고 그것을 다른 사람들에게 알리고자 하는 그의 열정에서부터 말미암는 것으로서 Calvin은 이러한 구원의 신비를 이해함에 있어서 근본적으로 이를 하나님과 사람사이의 언약 관계의 맥락 속에서, 그리고 다시 그 언약관계는 삼위일체신학의 빛 아래서 살피고자 하였던 것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 

Calvin에게 있어서 삼위 하나님에 대한 지식은 삼위 하나님의 활동을 묵상함으로부터 얻을 수 있는 것이었다. 이러한 삼위 하나님의 활동을 이해함에 있어서도 Calvin은 '위'로부터의 시각과 '밑'으로부터의 시각을 동시에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Calvin은 삼위 하나님의 활동을 이해함에 있어서 '위'의 영역으로부터 시작하기보다는 '밑'의 영역으로부터 삼위 하나님의 활동에 대한 이해를 시작하고 있다. 즉, opera ad intra에서부터 시작하기보다는 opera ad extra에서부터, Immanent Trinity에서부터 시작하기보다는 Economic Trinity에서부터 시작하고 있는 것이다. Calvin에게 있어서 하나님을 아는 지식과 관련하여 피조물인 인간은 '위'의 영역으로부터 시작할 수 없는 것이었다. Calvin에게 있어서 이러한 시도는 단순히 speculative한 시도일 뿐인 것이며 그러므로 무위로 끝날 수 밖에 없는 것으로 이해되었다. 그러므로 Calvin에게 있어서 우리의 하나님에 대한 지식은 하나님께서 그의 밖으로 드러내시는 활동(opera ad extra)으로서 '밑'의 영역에 나타내신 것을 묵상함을 통하여 '위'의 영역에 숨겨진 것, 곧 하나님 자신 안에(God in se) 숨겨진 것으로 올라가야 하는 것이었다. 즉, 말하자면 Calvin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행위로서 창조와 구속에서 자신을 나타내신 것을 통하지 아니하고는 하나님을 알 수 있는 길은 없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창조와 구속의 사역을 통하여 자신을 나타내신 것이 계시이며, 계시 또한 그러므로 하나님의 opera ad extra인 것이다. 하나님의 이러한 창조와 구속의 행위는 삼위로서의 행위이며 그러므로 하나님은 이러한 창조와 구속의 행위 속에서 자신을 삼위하나님으로 계시하신다. 이러한 점에서 Butin은 말하기를 Calvin의 이해에 있어서 하나님에 대한 이해는 "economic-trinitarian"이었다고 말한다. 그에 따르면, 하나님에 대한 이러한 경륜적 삼위일체적(economic-trinitarian) 이해는 Calvin이 신-인 관계의 맥락 속에서 전포괄적으로 기독교의 진리를 이해함에 있어서 "the basis, pattern, and dynamic"이었다. 

삼위일체 교리를 이해함에 있어서 Calvin의 이상과 같은 접근 태도는 최소한 삼위일체 교리와 관련하여서는 Calvin이 서방 신학의 전통보다는 동방 신학의 전통을 따른 것으로 이해되어진다. 즉, Calvin은 Immanent Trinity (Opera trinitatis in se)에서부터 보다는 Economic Trinity(Opera trinitatis ad extra)에서부터 그의 삼위일체 교리의 이해를 시작하고 있는 것이다. Calvin에게 있어서 신-인 언약은 하나님께서 그 자신 밖으로 드러내시는 사역이며, 이러한 사역 속에서 하나님은 삼위로서 사역하심으로 자신을 삼위하나님으로 나타내고 계시는 것으로 이해되어 진다. Calvin은 삼위하나님의 신적 본질의 통일성을 말함에 있어서도 어떤 철학적 상상을 통해서 말하기보다는 성경의 증거에서부터 출발하고 있는데, 즉, 성자의 외적 사역과 성령의 외적 사역에서 드러난 신적 본질에 근거해서 삼위하나님의 신적 본질의 통일성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Calvin의 inductive한 방법은 갑바도기아 교부들 중 한 사람인 Basil이 그의 책 on the Holy Spirit에서 하고 있는 것과 유사란 것으로 보여진다. 이점에 대해서 Torrance는 다음과 같이 평가하고 있다. 

The fact that the Being of God is intrinsically incomprehensible renders all our attempts to grasp the "essence" or "quiddity" of God as no more than cold and empty speculations (Inst., 1.3.1; 1.5.1, 9; 1.13.1,21). Hence Calvin rejects the theological method of the Latin schoolmen that begins with the abstract question "What is God?" (quid sit Deus) and puts in its place the concrete question "What kind of God is he?" (qualis sit Deus), a question about what accords with the nature of God. That is to say, we may know God onl   y in accordance with what he is in his activity towards us and what he has revealed to us of his nature through Christ, who as mediator has come to reconcile us to himself (Inst., 1.2.1; 1.6.4). 

그러므로 우리는 최소한 그의 삼위일체 교리 이해에 있어서 Calvin은 동방 전통에서와 같이 한 분 하나님의 통일성보다는 삼위 하나님의 구별성에서부터 그의 이해를 시작하고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말하자면, Calvin은 삼위의 독특한 위격적 속성과 이에 따른 삼위의 구별되는 행위(ad extra)에서부터 시작하여 삼위하나님의 내적 존재와 통일성(in se)으로 옮겨가고 있는 것이다. Butin에 따르면 이러한 Calvin의 삼위일체교리를 이해함에 있어서 "economic-trinitarian"한 강조는 그의 구원론적 관심의 맥락에서 이해되어 질 수 있는 것이다. 

Calvin은 삼위일체 교리의 신비를 설명함에 있어서 인간적인 언어의 불충분성과 교부들에 의해 사용된 용어들의 어려움을 솔직히 시인하고 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삼위사이의 구별을 말함에 있어서 헬라어 hypostasis란 용어를 받아 들인다. 그러나 삼위의 구별을 말하는 것이 Calvin에게 있어서 그러므로 곧 "하나님은 삼중적으로 존재하신다"(God is threefold)라고 말하거나 또는 "하나님의 본질이 세 위격에게 각각 찢어져 나누어진다"(God's simple essence to be torn into three persons)라고 말하고자 하는 것은 아니다. Calvin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성자는 성부가 아니시며 또한 성령도 아니시라는 것이다. 성자는 그 본질(ousia, essence)에 있어서 하나님이시지만 그러나 성자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성부나 성령과는 그 위격(hypostasis, person)에 있어서 구별되는 분이시다. 즉, "...성부와 성자와 성령은 한 분 하나님이시지만, 그러나 성자는 성부도 성령도 아니시며 이 삼위는 고유한 특성에 의해 서로 구분되어 진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삼위하나님은 그 신적 본질(ousia)에 있어서는 나뉘어지지 않는 한 분이시지만,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한 분 하나님 안에 세 위격들(hypostases)이 계시며 이들은 신적 본질의 통일성 안에서 각기의 고유한 속성에 따라 구별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삼위의 신적 위격의 고유한 속성과 관련하여 Calvin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Nevertheless, it is not fitting to suppress the distinction that we observe to be expressed in Scripture. It is this: to the Father is attributed the beginning of activity, and the fountain and wellspring of all things; to the Son, wisdom, counsel, and the ordered disposition of all things; but to the Spirit is assigned the power and efficacy of that activity. 

이로 보건데, Calvin은 삼위일체교리의 신비를 생각함에 있어서 경륜적 삼위일체(Economic Trinity) 곧 각기 구별되는 삼위로서 나타나는 '삼위 하나님의 밖으로의 사역'(Opera trinitatis ad extra)에 관한 성경의 진술을 그의 생각의 출발점으로 삼고 거기서부터 한 분 하나님 안의 삼위의 내적 관계(Deus in se) 곧 내재적 삼위일체(Immanent Trinity)로 생각을 옮겨가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는 이렇게 경륜적 삼위일체의 시각에서부터 내재적 삼위일체를 올려 보는 즉시 다시 내재적 삼위일체의 시각에서 경륜적 삼위일체를 내려본다. 이렇게 함으로서 Calvin은 그의 삼위일체교리의 이해에 있어서 겉으로 드러나는 삼위사이의 구별과 내적 통일성의 관계를 분리하지 않고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곧, Calvin에게 있어서 삼위는 서로 구분되지만 나뉘어지지 않으며(distinguished but not separated), 서로 관계되어 지지만 서로 섞이지는 않는(related but not mixed) 것이다. 다른 말로 하면 내재적 삼위일체는 경륜적 삼위일체 안에서 보여지고, 다시 경륜적 삼위일체는 내재적 삼위일체 안에서 보여지는 것이다. 이 점에 대하여 Calvin은 다시금 갑바도기아 교부중 한 사람인 Nazianzuz의 말을 인용함으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Again, Scripture sets forth a distinction of the Father from the Word, and of the Word from the Spirit. Yet the greatness of the mystery warns us how much reverence and sobriety we ought to use in investigating this. And that passage in Gregory of Nazianzus vastly delights me: "I cannot think on the one    without quickly being encircled by the splendor of the three; nor can I discern the three without being straightway carried back to the one   ." Let us not, then, be led to imagine a trinity of persons that keeps our thoughts distracted and does not at onc   e lead them back to that unity. 

Cavin은 먼저 삼위사이의 구별을 살핀 후 곧 바로 그들 사이의 통일성으로 옮겨가지만, 그러나 그렇게 하는 가운데서도 그는 삼위 사이의 구별을 강조하기를 결코 중단하지 않는다: 

Furthermore, this distinction is so far from contravening the utterly simple unity of God as to permit us to prove from it that the Son is one    God with the Father because he shares with the Father one    and the same Spirit; and that the Spirit is not something other than the Father and different from the Son, because he is the Spirit of the Father and the Son. For in each hypostasis the whole divine nature is understood, with this qualification-that to each belongs his own peculiar quality.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Calvin의 삼위일체 교리 이해에 있어서도 그는 두 방향에서의 시각, 곧 '위'로부터의 시각과 '밑'으로부터의 시각을 동시에 가졌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그가 삼위일체 교리를 이해함에 있어서 출발점은 '밑'의 영역에 나타난 삼위하나님의 사역으로부터 출발하여 '위'의 영역에 숨겨진 삼위하나님의 내적 관계로 나아가는 것이었다. 그에게 있어서 '밑'에 나타난 삼위 하나님의 사역을 묵상함 없이 '위'에 숨겨진 삼위하나님 사이의 내적 관계를 추상적으로 상상함으로부터 '밑'에 나타난 삼위하나님의 사역을 생각하는 것으로 나아가는 것은 있을 생각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그는 또한 동시에 그렇게 함으로서 다시금 '위'의 영역에서부터의 시각에서부터 '밑'의 영역에 나타난 삼위하나님의 사역을 살핌도 또한 동시에 견지하고 있다. 이렇게 함으로서 Calvin에게 있어서 Economic Trinity와 Immanent Trinity는 서로 불가분의 관계에 놓여지게 되는 것이지만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둘 사이에는 어떤 구별이 또한 놓여지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삼위 하나님의 사역으로서 창조와 구속의 사역을 통하여 밖으로 나타내어지는 것은 하나님 자신 안에 숨겨진 것과 본질적으로 다르거나 충돌하지 않으나,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둘 사이에는 어떤 구별이 유지되는 것이다. 이러한 바탕 위에서 Calvin은 숨겨진 하나님의 뜻(작정, 예정, 선택과 유기)과 나타난 하나님의 뜻(조건적인 약속을 중심으로한 언약)을 구별하면서도 둘 사이의 통일성과 연속성을 이야기할 수 있게 되는 것이며, 이점은 이후에 다시 살피게 될 것이다. 

이미 위에서 인용하였던 바와 같이 Calvin에게 있어서 삼위의 위격적 사역의 원칙(principle)은 성부는 모든 신적 사역의 기원이요 근원이시다. 그러므로 성부의 뜻은 모든 존재하는 것들의 유일한 근원이 되는 것으로서 이것은 창조와 구속에서 나타나는 모든 것들의 유일한 근원이다. 성자는 신적 지혜로서 보이지 않는 성부의 뜻을 따라 모든 것을 그의 지혜로 질서 있게 design하시며 존재 속으로 이끌어 내신다. 그렇게 함으로 성자는 보이지 않는 성부와 성부의 뜻을 나타내 보이신다. 그러므로 보이는 것이나 보이지 않는 것이든 존재하는 모든 것들과 그것들 속에 있는 질서는 성부의 뜻에 따른 성자의 사역의 결과인 것이다. 한편, 성령은 모든 신적 사역을 그의 능력으로 효과 있게 하신다. 성자의 사역이 실제로 실행되어 나타나게 되는 것은 그러므로 성령의 효과 있게 하시는 능력으로 말미암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삼위의 각기 구별되는 위격적 사역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관적으로(phesichoretically) 연합되어진다. 즉, 한 위격의 사역을 보는 순간 그 위격과 그 위격의 사역 안에서 다른 두 위격과 사역이 동시에 보여진다는 것이다. 그렇게함으로서 각기 구별되는 삼위의 사역은 나누어지거나 섞여짐 없이 상관적으로 연합되어 지는 것이다. Calvin에게 있어서 하나님에 대한 지식은 이러한 하나님의 삼위로서의 ad extra의 사역을 살펴봄으로 얻어질 수 있는 것이었다. 이와같은 하나님의 ad extra로서의 사역을 묵상함을 통해 인간은 보이지 않고 숨겨진 하나님의 본질(in se)에 대한 지식을 얻을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창조는 이러한 삼위 하나님의 사역이며 그러므로 창조된 세상은 삼위일체 하나님의 신비와 영광을 드러내고 있다. 모든 신적 활동의 기원이신 성부는 그 속성상 보이지 않고 숨겨지신다. 그러나 성령의 사역 안에서 성자의 사역을 통하여 성부는 보여지고 알려진다. 신적 지혜로서 성자는 창조의 사역을 통하여 보이지 않는 성부의 신성을 가시적으로 드러내신다. 성자는 신적 말씀(Word)으로서 창조 전부터 계시는 분이시며 세상의 창조에 있어서 성자의 사역은 중계적(intermediary)인 사역이다. 창조에 있어서 모든 존재하게되어진 것은 성자의 사역의 결과로서, 성자는 그의 지혜로 성부의 뜻을 따라 design하신다. 창조된 세상가운데 있는 질서 곧 자연법(the law of nature)는 성자의 사역의 결과로서 성자의 의를 나타내고 있을 뿐 아니라 이렇게 나타난 성자의 의를 통하여 보이지 않는 성부의 의를 드러내고 있다. 그러므로 측량할 수 없는 성부 하나님의 영광이 보이지 않는 성부의 image로서 성자의 이러한 사역을 통하여 드러내어 지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성자의 신적 사역을 실제로 효과 있게 하시는 분은 성령이시다. 성령은 생명을 주시는 그의 능력으로서 모든 살아있는 생물들을 살아 움직이게 하신다. 이러한 삼위하나님의 창조와 관련하여 Louis Berkhof는 다음과 같이 정리하여 말한다: "All things are at onc   e out of the Father, through the Son, and in the Holy Spirit. In general it may be said that being is out of the Father, thought or the idea out of the Son, and life out of the Holy Spirit." 그러므로 이러한 창조된 세상 안에서 '섭리'(providence)는 성부에게로, '자연의 질서'(natural order)는 성자에게로, 그리고 '생명을 주시는 능력'(life giving power)는 성령에게로 각기 돌려진다고 말할 수 있다. 

이러한 하나님의 세상의 창조는 그러므로 보이지 아니하는 영역에 있는 하나님의 뜻에 따른 것이며, 이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뜻을 보이는 영역에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이 하나님의 뜻은 곧 세상을 창조하신 목적인 것이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신 목적은 창조된 세상 속에 드러나는 하나님의 영광을 묵상함으로 인간으로 하여금 하나님을 찾도록 할뿐만 아니라, 그럼으로 하나님 나라에서의 영원한 생명의 약속을 찾아 구하게 함이다. 

'밑'으로부터의 시각에서 볼 때 하나님과 하나님의 약속을 구해야하고 또 이 약속의 성취를 위하여 요구하시는 하나님의 계명을 지켜 순종해야하는 것은 인간의 책임이다. 하나님의 약속을 상속받기 위해서 인간은 하나님의 계명을 지킴으로 의로울 것을 요구받고 있는 것이다. 창조된 세상 안에 있는 natural law는 이러한 하나님의 의를 드러내고 있으며 이러한 하나님의 의는 영생을 상속받기 위한 조건으로서 인간에게 제시되고 있는 것이다. 즉, 하늘 나라에서의 영생과 축복은 인간의 책임에 조건화되어져 있는 것이며, 이러한 약속과 조건은 창조된 세상 속에 나타나 알려진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아담은 삼위 하나님의 사역으로 창조된 세상을 묵상함으로 창조된 세상 속에 드러내어져 있는 이와 같은 약속과 조건을 알 수 있는 존재로 지음 받았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나라에서의 영원한 생명의 약속을 추구함으로 계명을 지키는 것은 그의 의무인 것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위'로부터의 시각에서 볼 때 인간의 믿음과 의는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수여해 주시는 초자연적 선물로 여겨진다. 이것은 영적 선물이지만 오로지 인간이 하나님의 계명을 지킴으로 그의 믿음을 실행하고 있는 한에 있어서, 곧 그의 믿음 안에서만 이것은 영적 선물로 인식되는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타락은 인간의 책임으로 돌려진다. 타락의 결과로 창조된 세상을 묵상함으로 하나님의 약속과 조건을 알 수 있었던 자연적 선물은 부패하게되어졌고, 영적 선물 또한 거두어져 버렸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창조된 세상은 여전히 하나님의 존재와 영광을 증거하고 있으며, 그럼으로 이에 대한 인간의 무지에 대해 핑계할 수 없게 한다. 인간의 이러한 무지의 원인은 그러므로 하나님 편에 돌려지지 않고 타락한 인간 자신의 교만함에 돌려진다. 타락한 인간은 창조된 세상에 드러나는 하나님의 존재와 영광을 보면서도 그 자신의 교만함으로 인하여 이를 알려고 하지 않고 인정하려 하지 않는다. 타락한 인간이 하나님에 대한 지식과 그러므로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지식을 회복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성육신하신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리스도를 통해서, 그리고 타락한 인간을 그리스도에게로 이끌어 그리스도안에 있는 하나님의 약속을 보게 하시는 성령의 특별한 사역으로 말미암아서 가능하게 된다. 

그러므로 Calvin에게 있어서 구원 또한 삼위 하나님의 사역으로 인식된다. 타락한 인간이 성부에게로 나올 수 있는 것은 오로지 보이지 아니하는 성부 하나님의 보이는 형상이신 성자 그리스도를 통해서이며, 또한 타락한 인간은 성령에 의해서만 그리스도에게로 이끌려 나오게 된다. 이러한 면에서 구원은 삼위하나님의 사역의 결과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Calvin의 구원의 이해 속에서 인간의 책임 또한 배제되지는 않는다. 즉, 구원은 복음의 약속을 믿음으로 되는 것인데, 이 믿음의 기초는 죄와 죄의 결과들로부터 인간을 구속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지식인 것이다. 이 때 이러한 지식은 참으로 '밑'으로부터의 시각에서 볼 때 인간이 가져야하는 인간의 지식이지 하나님 편에서 가져야하는 것은 아닌 것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위'로부터의 시각으로 볼 때 이러한 인간의 지식은 또 한편 삼위 하나님의 사역의 결과인 것이다. 

구속주로서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선포된 복음 안에 나타내어지는 데, 이 복음은 삼위하나님의 사역으로서의 구속사역에 관한 것이다. 복음 안에서 인간의 구원을 위한 성부의 뜻이 선포되어진다. 신적 활동의 기원으로서 성부의 뜻은 구속의 시작이다. 믿음의 근본적인 토대가 되는 것으로서 인간의 지식은 인간 구원과 관련한 성부의 뜻을 아는 것이다. 성부의 뜻은 보이지 않고 숨겨진다. 그러나 이는 그리스도 안에서 나타내어진다. 그러므로 Calvin의 이해에 있어서 하나님의 숨겨진 뜻과 나타난 뜻 사이에 구별이 두어진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뜻은 서로 나누어지지 않는 하나의 뜻이다. 숨겨진 하나님의 뜻은 절대적이고 영원하고 초월적인 뜻으로서 이는 인간의 연약함으로 인하여 인간의 이해의 한계 밖에 있다. 그러나 이러한 하나님의 숨겨진 뜻은 타락한 인간이 알 수 있도록 나타내어진다. 

성부의 숨은 구원의 뜻(곧 선택)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복음 안에 나타내어지며, 나타난 뜻의 기원이 된다. 영원하고 불변하고 절대적인 '위'의 영역에 있는 성부의 숨은 뜻이 시간과 공간의 역사성의 한계 속에 있는 '밑'의 영역에 나타날 때 이는 복음의 약속으로 나타나는데, 이 복음의 약속은 영원하고 불변하고 절대적인 뜻으로서가 아니라 조건적인 약속으로 나타난다. 구원과 관련한 성부의 숨겨진 뜻은 믿음을 조건으로 한 복음의 약속으로 온 세상에 나타내어진다. 이 때 이 복음을 믿음으로 받아들여야 하는 것은 인간의 책임인 것이다. 인간은 복음의 약속이 주어짐을 통해서 그리스도에게로 인도되어지며 그럼으로 성부에게로 나아갈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타락한 인간은 그 스스로는 복음의 약속을 믿음으로 받아들임으로 그리스도에게로 나아갈 수가 없다. 인간이 믿음으로 그리스도에게 나아 갈 수 있는 것은 오로지 성령께서 그들의 마음을 열어 그리스도 안에 있는 복음의 약속을 깨닫게 하시고 그럼으로 그리스도에게 나아오도록 이끌어 주셔야만 하는 것이다.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아무도 그리스도에게로 나아올 수 없고 그리스도에게로 나아오지 아니하고는 아무도 성부에게로 나아갈 수 없는 것이다. 

온 세상에 차별 없이 주어지는 복음에는 구원과 관련한 하나님의 뜻(revealed will of God)이 나타나 있다. 그러나 복음이 모든 사람에게 주어지지만 모든 사람이 믿음으로 나아오지 않는다는 사실은 우리로 하여금 우리의 눈을 높이 들어 숨겨진 하나님의 선택(hidden will of God)을 바라보도록 한다. 믿음과 중생은 성령의 특별한 사역으로서 이와 같은 성령의 사역으로 말미암아 인간은 복음의 부르심을 받아들일 수 있게 되며, 이 복음의 부르심은 성자를 통하여 성부께서 부르시는 부르심인 것이다. 믿는 신자에게 있어서 성령은 그들로 하여금 그리스도의 복음 안에 제시된 성부의 구원의 뜻을 믿음으로 받아들이게 하는 특별한 능력이 되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믿음을 갖게된 신자는 믿음이 자신의 공로나 자랑거리가 되지 못하고 하나님의 선물로서 성령의 특별한 은혜로우신 사역의 결과임을 자신의 믿음 안에서 인식하게 되는 것이다. 이런 신자의 믿음의 참된 기원은 그러므로 하나님의 선택에서부터 나오는 것이다. 또한 하나님의 선택은 복음의 기원이 되는 것이다. 복음 안에서 숨겨진 하나님의 뜻(선택)은 시, 공간의 제약이 있는 역사 세계 속에 나타내어질 때 복음의 약속으로 나타내어진다. 구원에 있어서 삼위 하나님의 사역을 우리가 요약해서 말한다면, 성부는 cause of the election (general election)이시다. 이 성부의 선택은 그리스도 안에서 나타내어진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는 manifestation of the election이시다. 한편, 성령은 그의 능력으로 인간을 그리스도에게 이끄심으로 성부의 선택을 깨닫게 하신다. 이런 점에서 성령은 appropriation of election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 

우리가 다시 한 번 이 땅의 모든 신자가 최종 구원에 이르지 않는다는 사실을 고려할 때, 즉 신자들 중 어떤 이들은 끝까지 믿음을 지키나 어떤 이들은 중간에 믿음에서 탈락한다는 사실을 고려할 때 우리는 이제 하나님의 가장 높은 단계의 선택을 올려다보게 된다. 즉, 시간이전의 영원하고 절대적이고 불변한 영역에 속한 하나님의 예정을 바라보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비밀한 선택은 숨겨져 있지만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자의 믿음 안에서 인식되어 진다. 이러한 하나님의 비밀한 선택을 말할 때 믿음 밖에 있는 자들에게 이것은 단순히 "something to carp, rail, bark, or scoff at"한 것이 되고 만다. 또한 이 비밀한 선택이 비록 신자의 믿음 안에서 인식이 되어진다 할지라도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어떤 부분은 설명이 되어지지 않은 채로 숨겨진다. 즉, 여전히 하나님의 나라의 영역에 들어가기 전 까지는 숨겨진 부분으로 남아 있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교회의 영역에서도 Calvin은 여전히 '위'로부터의 시각과 '밑'으로부터의 시각을 동시에 견지하고 있는 것이다. '밑'으로부터의 시각에서 볼 때, 믿음을 계속해서 유지해야 할 책임은 인간에게 있다. 인간은 자신의 믿음 안에서 보여지는 하나님의 선택, 곧 그의 자비하신 선택을 신뢰함으로 끝까지 인내해야할 책임이 있는 것이다. 여기에 실패할 때 그것은 그들의 책임이지 하나님께 책임을 돌릴 수 없다. 그러므로 그들이 그들의 믿음에서 떠나게 될 때 하나님의 선택은 그들에게 더 이상 인식되지 않으며, 그러므로 그들은 하나님의 비밀한 선택을 그들의 불신앙의 원인으로 핑계할 수 없다. 그러나 '위'로부터의 시각에서 볼 때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신자의 견인은 전혀 하나님의 비밀한 선택에서부터 나오는 무조건적이고 자비하신 은혜의 결과인 것이다. 여기서 비밀한 선택 또한 삼위하나님의 사역이다. 하나님의 secret counsel에서 성부는 선택자의 머리이신 그리스도 안에서 선택자들을 택하신다. 

그리고 성령은 이 선택자들을 그리스도와 불가분의 관계로 묶으신다. 이렇게 하심으로 성부는 the cause of special election이 되시며, 성자는 the mediator of the elect, 그리고 성령은 the perseverance of the elect가 되신다. 한편, 신자가 자신의 믿음안에서 인식하는 이와 같은 비밀한 선택은 신자로 하여금 전혀 하나님의 자유롭고 자비하신 주권적 선택만을 자신의 구원의 확실한 소망으로 바라보게 하며 그럼으로 자신의 믿음에 대해서도 그것이 자신의 어떤 공로나 자랑거리로 생각할 수 없게 한다. 이러한 인식은 신자로 하여금 자신의 구원의 보증을 하나님의 자비하시고 주권적인 선택에 두게 하며, 그럼으로 이 선택이 반드시 이루어짐을 믿음으로 끝까지 인내하게 하는 동인이 된다. Calvin에게 있어서 이와 같은 비밀한 선택의 인식이 없이 사는 신자의 삶은 마치 길을 벗어나서 캄캄한 어둠 속에 다니는 자와 같은 것으로 여겨지며, 그러므로 그런 신자는 반드시 거듭 거듭 방황하며 미끄러지고 걸려 넘어지는 삶을 살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Calvin에게 있어서 개인의 구원의 확신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 곧 좀 더 구체적으로는 그의 구원의 뜻을 아는 것과 불가분의 관계에 놓여진다고 할 수 있다: "Faith rests not on ignorance, but on knowledge. And this is, indeed, knowledge not onl   y of God but of the divine will. We do not obtain salvation either because we are prepared to embrace as true whatever the church has prescribed, or because we turn over to it the task of inquiring and knowing. But we do so when we know that God is our merciful Father ..." 


IV. 결론 

결론적으로 삼위일체교리와 언약사상은 Calvin의 신학을 구성함에 있어서 불가분의 관계속에서 엮여져 있으며, 이러한 Calvin의 신학은 그러므로 삼위일체 신학적-언약적 신학(a trinitarian-covenantal theology)이라고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와 같은 Calvin의 성경의 진리에 대한 삼위일체 신학적-언약적 이해 속에는 '위'로부터의 시각과 '밑'으로부터의 시각이 동시에 나타나며 또한 서로 구별되지만 그러나 연속성 속에 있는 세 영역, 곧 '세상', '교회', 그리고 '하나님의 나라'라고 하는 세 영역이 나타난다. 이 세 영역은 각기 하나님께서 온 세상과 맺으시는 관계와 신자(이 땅위에서 가시적으로 복음의 약속을 받아들임으로 교회의 회원이 된 자)와 맺으시는 관계 그리고 선택자와 맺으시는 관계를 의미한다. 이러한 하나님의 구원과 관련한 그의 피조물과의 3중적 관계는 서로 구별되지만 분리되거나 섞이지 아니한다. 즉, 하나님께서 온 세상과 맺으시는 관계가 교회와 맺으시는 관계와 같지 않지만 그러난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는 서로 연관성 속에 놓여지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 교회와 맺으시는 관계는 선택자와 맺으시는 관계와 동일한 것이 아니지만 이는 또한 서로 뗄 수 없는 연관성 속에 있는 것이다. 이렇게 서로 구별되는 세 영역 속에서 하나님은 삼위하나님으로서 관계를 맺으시고 사역하신다. Calvin에게 있어서 구원은 삼위하나님과 그의 피조물 사이에 맺어지는 삼중적 관계로서 이러한 서로 구별되는 세 영역 속에서, 한편 위로부터의 시각과 또 한편 '밑'으로부터의 시각에서 살펴지고 이해되어지고 있다. 이러한 Calvin의 삼위일체 신학적-언약적 구원 이해의 특징은 ex post facto explanation이라는 말로 표현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