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적 교회론
[역대하6:2.18-42 7:11-22 마16:13-20 ]
1.복음서의 교회론 기준은 예수님의 교회론이다
교회는 예수님의 교회다. 마태복음 16장 13절에서 20절에 보면 예수님이 최초로 교회라는 말을 사용하신 것을 알 수 있다.
첫째, 신앙고백이 분명한 사람들의 공동체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고 물으셨을 때 베드로는 이렇게 말한다.“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베드로는 성령님의 도움을 받아 기막힌 고백을 한 것이다. 바로 그때 예수님은 이 고백 위에 나의 교회를 세우겠다고 하셨다. “바요나 시몬아 이것을 알게 한 것은 혈육이 아니라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다. 네 이름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라.” 여기에 교회의 비밀이 있다. 교회는 세상의 조직이나 단체가 아니다. 교회는 철저하게 신앙고백을 한 사람들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이다. 교회는 구원받은 사람들의 모임이다. 교회는 건물이 아니다. 교파도 아니다. 십자가를 높이 달았다고 해서 교회가 아니다. 진정한 교회는 성도 한 사람, 한 사람에게 구원의 고백과 감격이 있어야 한다. 고백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예수님이 하나님이 약속하신 그 메시아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고백이다. 일반적으로 교회가 교회답지 못하고 실패하는 이유는 빨리 성장하고 싶은 조급함 때문에 신앙고백이 불확실한 사람들에게 교회의 중요한 직책을 맡기는 탓이다. 교회에는 불신자도 올 수 있고, 믿음이 적은 사람도 있을 수 있다. 그러나 그들에게 교회의 운영을 맡기면 큰 위기를 만나게 된다. 특히 장로, 집사를 함부로 세우지 말아야 한다. 세우지 말아야 할 사람을 세우면 사고가 생긴다. 영적인 성숙과 리더십이 없는 사람이 장로가 되고 집사가 되면 교회는 힘들어진다. 자기 수준대로 하기 때문이다. 너무나 많은 교회가 구원의 확신을 안 가르치고, 점검도 안 하고 교인을 함부로 받아들인다.세례도 함부로 준다. 여기서 교회가 부패하기 시작하고, 교회의 순수성에 금이 가기 시작한다. 비록 두세 사람이라 할지라도 예수님의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기적이 일어난다.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마 16:16).” 이 고백 위에 예수님이 교회를 세우겠다고 하셨다.
교회 성장의 비결은 간단하다. 성도들을 신앙고백이 분명한 사람으로 만드는 것이다.
둘째, 예수님이 주인이신 공동체
교회의 주인은 누구인가? 예수님이다. 그러나 우리의 현실은 어떠한가? 교파가 주인인 교회가 있다. 어느 교회는 담임목사가 주인이다. 그래서 어떤 목사는 교회를 팔고 돈을 받고 떠나기도 한다. 내가 이만큼 투자했으니까 그만큼 받고 다른 데 간다는 것이다. 또 어느 교회의 주인은 장로들이다. 교회가 그들의 취향대로 흘러간다. 교회의 본질과 비본질을 가장 잘 알아차리는 사람은 초신자일 수 있다. 기성 신자들은 몇 년째 그렇게 살아와서 인식하지 못하는데, 초신자는 예민하게 느낀다. 교회의 주인은 예수님이어야 한다. 새신자들이 교회에와서 예수님을 느낄 수 있는 교회, 모두가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행동하는 교회 말이다. 이런 뜻에서 교회가 부흥하는 길은 간단하다.
교회에서 예수님을 느낄 수만 있으면, 목사님의 설교를 통해서건 성도들과의 만남 속에서건 주차장에서건 화장실에서건 예수님을 만날 수만 있으면,
은혜는 받게 되어있다. 교회에서 윤리 실천 운동을 할 필요가 없다.술.담배를 하지 말자. 세습하지 말자 등의 구호를 외칠 필요가 없다. 사람들이 이걸 몰라서가 아니라, 마음속에 예수님이 없어서 못하는 것이다. 교회에서는 예수님 얘기만 하면 된다. 그러면 술도 담배도 끊고 그런 것들이 저절로 없어진다. 교회는 예수님의 공동체이기 때문이다. 교회의 어느 구석이든지 거미줄이 있다는 것은 교회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증거가 아니겠는가? 휴지가 아무 데나 떨어져 있다? 이것은 교회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표시다. 앞은 번지르르하고 뒤에 가면 쓰레기가 있다? 이것도 교회가 아니다. 어떻게 사랑하는 공간을 그렇게 만들 수 있겠는가?하나님의 백성이 온다는데, 여기서 예배를 드리고 찬양을 드린다는데 적어도 내가 사는 집보다 교회가 좋아야 하지 않겠는가? 내 집보다는 교회가 좋아야 하고, 예배드리는 공간이 우리집 안방보다는 좋아야 하고, 내 집 화장실보다는 교회 화장실이 좋아야 하지 않겠는가? 정말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최고로 좋은 선물을 해주고 싶은 마음과 똑같은 것이다. 주님을 향한 우리의 사랑이, 그 열심히 예수님의 몸인 교회에서 보여야 하고 드러나야 한다.
셋째,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는 공동체
주님이 주인인 교회는 능력이 있다. 어떤 능력인가?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는 능력이다. 세상의 조직이나 세상의 힘이나 세상의 어떤 것도 교회를 이길 수 없다. 두세 사람이 예수의 이름으로 모인 교회는 세상을 능히 이길 수 있다.세상의 힘에는 세 가지가 있다. 첫째는 사탄의 힘이요, 둘째는 세상의 힘이요, 셋째는 정욕의 힘이다. 교회는 세상이라는 바다 한가운데서 항해하는 배와 같다. 교회는 안전한 산 위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험한 세상의 한복판에 존재한다. 때로는 폭풍 때문에 흔들리고 방향을 잃을 수 있다.하지만 바닷물이 배 안으로만 들어오지 않으면 문제될 것이 없다. 안심하라. 음부의 권세는 예수님의 교회를 이길 수 없다고 하셨다. 음부의 권세란 교회를 파선하거나 가라앉게 하는 세력들이다. 교회 안에는 거룩한 힘이 있다. 이것은 예수님이 주시는 힘이다. 예수님께는 하나님이 주신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가 있다. 교회는 기도의 힘이 있다. 말씀의 힘이 있다. 그리고 십자가의 힘과 성령님의 힘이 있다. 교회의 가장 큰 힘은 사랑과 용서의 힘이다.
음부의 권세는 교회의 힘 앞에 아무 능력이 없다. 교회의 힘은 대단하다.
넷째, 천국 열쇠를 소유한 공동체
교회는 천국 열쇠를 소유하고 있다. “내가 천국 열쇠를 네게 주리니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마16:19)
이 얼마나 놀라운 특권인가! 세상의 어떤 세력도 감히 상상할 수 없는 특권이다. 그리스도인이 지치고 감격이 없는 이유가 무엇일까? 바로 이 특권을 사용하지 않게 때문이다. 목사나 선교사나 성도나 다 마찬가지다. 특권을 사용하면 사도행전적인 감격과 충만함이 있다. 교회는 세상에서 화해와 용서와 평화의 사도적 역할을 하게 되어 있다. 이것이 전도의 비밀이다. 전도를 하면 새로운 영혼들이 주님 앞으로 나아온다. 새로운 사람이 들어오면 교회는 감동하기 시작한다. 전도를 하는 몇 사람만 있어도 교회는 정말 흥분한다.
생동감이 넘친다. 교회가 살아난다. 우리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고 우리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인다. 이 얼마나 놀라운 특권인가? 이런 자부심을 가지고 교회 안에서 살아야 한다.
2. 사도행전적인 교회론
첫째, 성령님이 움직이시는 교회
교회는 성령님이 이끌어 가야 한다. 성령님이 움직이시는 교회가 성격적이다.성령님을 최우선 순위로 생각하는 곳이 교회라는 말이다. 그런면 어떤 모양으로든지 변화와 기적과 역사들이 나타나게 되어있다. 지식이 사람을 변화시키는 것이 아니고, 기술이 사람을 변화시키는 것이 아니다. 목사가 설교를 잘한다고 사람을 변화시키는 것도 아니다. 그 말씀에 성령님이 있으면 사람이 변하고 성령님이 없으면 안 변하는 것 뿐이다. 사람이 얼마만큼 하나님을 제한할까? 자기만큼 제한한다. 내가 못하면 하나님도 못하시는 것으로 알고, 내가 안 믿으면 어떤 일도 일어나지 않을 것으로 믿는다. 이것이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약점이다.
‘우리 교회가 성령님이 이끌어 가시는 교회인가’, ‘나는 성령 받은 사람인가’를 아는 방법은 간단하다. 누구한테 물어볼 필요가 없다. 조용히 생각해 보면 알 수 있다.지금 즉시 스스로에게 물어보라. 내가 지금 성령님을 생각하고 있으면 성령 받은 것이고, 성령님을 잊고 있다면 성령님이 계시지 않거나 받지 않은 것이다. 성령 받은 교회는 온 성도가 날마다 성령님을 생각한다.새벽에도 성령님을 생각하고, 찬송을 부를 때도 성령님을 생각하고, 길을 걸을 때도 성령님을 생각한다. 잠을 자면 꿈속에서도 성령님을 생각하고, 일을 하면 그 일 속에서도 성령님을 느낀다. 목사의 경우도 똑같다. 설교할 때도 성령님을 생각한다. 상담할 때도 성령님의 인도를 받고 기도할 때도 성령님의 인도를 받는다. 억지로 하는 게 아니다. 늘 성령님의 임재 가운데 있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성령님이 함께하시는 교회이다. 교회의 본질은 성령님이다. 오순절에 사람들에게 성령님이 임하셔서 교회가 탄생했는데, 이것이 바로 교회의 본질이다. 교회는 성령님이라는 것이다. 교회는 성령으로 잉태되었다. 교회의 출발은 성령님이시다. 성령사역이란 무슨 프로그램이 아니라 항상 성령님을 최우선으로 생각하는 것이다.
둘째, 평신도가 능동적으로 사역하는 교회
교회는 성도들의 공동체이다. 세상을 변화시킬 주역은 성령을 받은 교인들(평신도)이다. 평신도가 능동적으로 이끌어 갈 수 있는 교회가 성경적인 교회이다. 그런 구조, 그런 시스템이 교회에 있어야 한다.‘성도들이 움직이는 교회’라고 할 때 조심해야 할 것이 하나 있다. 무조건 평신도가 능동적으로 움직이는 교회라고 정의하면 시험에 들고 사고 날 확률이 높다. 여기에서 말하는 평신도는 성령을 받고 헌신한 평신도다. 성도들이 움직이는 교회는 성령 충만한 평신도들이 헌신하여 이끌어 가는 교회다. 그런데 인본주의적인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교회 주도권을 가지면 교회를 하나의‘운동’으로 끌고 가려 한다.그러면 목사와 싸우게 되고 교회는 시끄러워진다. 이것은 성직자주의만큼 위험한 평신도주의다. 사도행전 6장에 보면 초대교회에 갈등이 일어나기 시작했을 때 베드로는 성도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말씀 전하는 것과 기도하는 것에 전무하겠다.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고, 존경받고,
은사가 있는 사람들 중에 소수 정예를 평신도 리더십으로 세워서 그들에게 여러 가지 직무를 맡겨라‘(행6:3-4 참조). 갈등은 교회가 성장하는 과정에서 생기는 자연적인 현상이다. 이를 잘 극복하려면 각자의 역할을 잘해야 한다.’하라(Do)'와 ‘하지 마라(Don't)'가 분명해야 한다. 목사로서, 평신도로서 해야 할 일과 해서는 안 될 일을 구분해야 한다. 평신도가 해야 할 일을 목사가 해서도 안 되고, 목사가 해야 할 일을 평신도가 하겠다고 나서도 안 된다.목회자는 성도의 영역을 지켜주고 존중해 주어야 한다. 목사와 평신도는 서로 갈등하는 관계가 아니라 서로 협력해서 팀워크를 이루는 관계다.
마치 코치와 운동선수와 같이 서로 신뢰하고 존경하고 사랑하면서도 자기 역할이 분명하게 있어야 한다. 운동선수가 아무리 능력이 있어도 코치나 감독의 말을 무시하면 게임에서 패배하고 만다. 또 게임의 흐름을 잘 안다고 해서 코치가 직접 경기를 뛸 수는 없는 법이다. 교회의 위기는 목사가 주인공이 되는 데 있다. 모든 것을 목사 중심으로 하다 보면 평신도들은 수행자에 머물 뿐이다.목회자는 평신도들이 사역의 주인공이 되게 하고, 평신도를 사역의 스타로 만들어야 한다. 평신도 목사,평신도 목자를 만들어서 그들이 세상과 직장을 변화시키는 비전을 갖게 해야 한다.중요한 것은 목회자와 평신도가 어떻게 환상적인 팀을 이루느냐는 것이다. 사람이 많이 있는 것보다 얼마나 같은 생각을 하느냐가 더 중요하다. 생각이 같지 않으면 힘이 되지 않는다. 오히려 사람이 많으면 더 불편하고 복잡할 수 있다. 그래서 작은 교회일수록 팀워크를 만들기가 더 좋은 것이다.
1, 교회론이 같아야 한다.
2, 비전과 목회철학과 성령 체험이 같아야 한다. 목사는 이런 생각을 하고 장로들은 저런 생각을 하면 교회가 깨지기 마련이다. 제일 어려운 것이 평신도들은 성령님을 체험했는데 목사가 성령님을 체험하지 못했을 때가.
반대로 목사는 성령님을 체험했는데 평신도들이 성령님을 체험하지 못했을 때도 힘들다. 영적인 체험이 다르기 때문이다.
3, 서로 은사를 존중하고 인정해야 한다. 이럴 때 교회는 정말 하나가 된다. 여기서 뒷받침 되어야 할 것이 훈련과 양육이다. 교회에서 처음부터 끝까지 강조할 것은 말씀과 성령님이다. 말씀에 근거를 두고 성령님의 기름 부으심이 있다면 이런 가치들을 서로 인정할 수 있다.어떤 성도에게 직분을 임명하기 전에 그가 정말 하나님 앞에 기름 부으심을 받은 영적 경험이 있는지 확인하라. 목회자나 평신도나 할 것 없이 성도들 모두가 이러한 영적인 경험이 있을 때, 교회는 능동적이고 아주 강력한 힘으로 성장하며 성숙할 수 있다.
셋째, 비전이 이끄는 교회
어떤 교회가 이상적인 교회이며, 성경적인 교회일까? 첫째는 평신도가 이끌어가는 교회요,
둘째는 성령이 이끌어 가는 교회라고 한다면,셋째는 비전이 이끌어 가는 교회다.
1, 비전이 있어야 한다.
비전이 없는 민족은 망한다. 교회는 하나님이 주시는 꿈,그 비전에 계속 이끌려 움직여야 한다. 한 목회자가 한 교회에서 영원히 목회할 수 없다.
목회자는 계속 바뀔 것이다. 목회자가 바뀔 때마다 교회가 변한다면 성도들은 얼마나 혼돈스러울 것인가? 하지만 비전이 이끌어 간다면 문제는 달라진다. 사람이 끌고 가는 교회가 아니라 비전이 이끌고 가는 교회라면, 사람이 바뀔수록 교회는 더욱 다양해지고 깊어지고 풍성해질 것이다. 교회는 영원하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꿈이 그 중심을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2, 내 비전이 아니라 하나님의 비전을 생각하라.
‘비전이 이끌어 가는 교회’를 이야기 할 때 제일 먼저 생각할 것은 , 그 비전은 내 비전이 아니라 하나님의 비전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의 비전과 하나님의 비전이 일치해야 한다. 그래야 진정한 비전이다. 하나님의 비전이 무엇인가? 하나님 나라의 실현이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꿈이다. 하나님은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무엇을 하셨는가? 하나님의 아들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세상에 보내서 십자가를 지고 보혈의 피를 흘리심으로 우리 죄를 대속하게 하셨다. 그리고 부활하게 하심으로 구원을 완성하시고 온 인류에게 구원을 주셨다. 이런 하나님의 꿈이 내 꿈이 되어야 한다. 하나님의 목적이 내 목적이 되어야 한다.
3, 예수님의 비전 세 가지
첫째, 예수님의 비전은 하나님의 꿈을 이루어 드리기 위해 ‘십자가를 지는 것’ 이었다.
예수님의 생애,33년이라는 그 분의 모든 삶은 십자가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그분은 죽으러 오셨다. 많은 유혹이 있었지만 다 뿌리치고 십자가를 향해 걸어가셨다.
둘째, 예수님의 또 하나의 꿈은 교회를 세우시는 것이었다. 예수님이 살아 계실 때는 이 땅에 교회가 없었다. 십자가는 지셨지만 교회가 탄생하지는 않았다. 십자가가 온 인류의 구원이 되기 위해서는 교회가 필요했다. 교회는 십자가 위에 있는 것이다. 십자가가 없는 교회는 교회가 아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피 흘려 죽으시고 부활 승천하신 다음 성령님이 오셨을 때 교회가 비로소 탄생했다.
셋째, 예수님의 세 번째 비전은 성령님을 우리에게 보내시는 것이었다. 그러면 성령님의 비전은 무엇인가? 전도하고 교회를 세우시는 것이다. 성령님의 역사는 전도와 교회다. 거기에 성령님의 초점이 있다. 그래서 성령님을 다른 쪽으로 너무 오용하면 안 된다.성령님은 은사와 능력과 충만함이다. 하지만 아주 핵심적인 성령님의 비전은 모든 영혼을 십자가로 말미암아 구원하고, 교회를 세우고, 이끌어가고, 완성하시는 데 있다. 교회의 비전은 결국 영혼 구원이다. 그러면 교회의 비전은 무엇인가? 예수님은 왜 교회를 세우셨는가? 성령님은 왜 교회를 탄생시키고 양육시키고 완성하시는가? 바로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해서이다. 따라서 교회의 비전은 명확하고 분명하다. 우리의 할 일도 아주 분명하고 확실하다. 교회의 초점은 잃어버린 한 영혼을 구원하는 하나님의 비전에 맞춰져 있어야 한다. 교회의 비전은 예수님이 교회를 세우신 이유와 마찬가지로 잃어버린 한 영혼을 찾는 것이다. 죽어가는 한 영혼, 잃어버린 한 영혼, 버려진 한 영혼을 예수님 몸의 한 지체로서 영접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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