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이비드 클락슨(David Clarkson, 1621-1686)에 대하여
-1621년 2월에 영국의 요크셔(Yorkshire)의 브래드포드(Bradford)에서 태어남.
-케임브리지의 클레어 홀(Clare Hall)에서 교육받았고, 1645년에 그 대학의 평의원 겸 교수가 됨.
-1651년 이후 서레이(Surrey)의 모트레이크(Mortlake) 교구 목사가 되어 1662년 통일령에 의해 추방될 때까지 봉직.
-이후 1682년, 존 오웬(John Owen) 박사의 런던 회중 교회의 동역자로 선택될 때까지, 은거하며 연구와 저술에 전념.
-그는 오웬과 존 하웨, 리차드 백스터와 토마스 굿윈 등 청교도 거성들에 이어, 스테판 차녹, 리차드 십스, 그리고 존 플라벨 등으로 이어지는 청교도 신학의 큰 축의 한 사람으로 인정.
-그는 매우 열정적이고도 고결한 인품 위에 광대하고도 다양한 지식을 쌓았고, 하나님의 영광과 그 영광을 위한 사람들의 선을 강조하는, 호소력이 뜨거운 능변과 필력의 소유자.
-1686년 6월 14일에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음.
-그의 품성에 관한 논문에 (참된 경건과 거룩의 소유자, 설교의 실천이었던 삶, 넘치는 신성한 지식, 겸손과 온화, 존경과 사랑이 넘치는 대화, 생명을 전달하는 기도, 성경에서 끌어냈던 설교, 하나님의 계시의 통로였던 언어)
◨ 이 책에 대하여 (박순용 목사의 추천의 글에서)
이 책 『구원 얻는 믿음』과 이어서 보게 될 『살아 역사하는 믿음』은 믿음에 관한 청교도의 대표적인 글이면서도 동시에 믿음에 관한 모든 것, 곧 구원 얻는 믿음에서부터 믿음으로 사는 것과 믿음과 기도, 그리고 믿음 안에서 죽는 것과 나그네로서 사는 것까지 그야말로 믿음의 처음과 나중을 총망라하고 있는 특징적인 글이다. 오늘날 믿음에 대한 왜곡된 이해로 인해서 혼합주의적인 신앙 태도와 삶을 가지고 있는 우리의 현실을 생각하면 이 책은 너무나 시대 적절하고도 가치가 있는 책이라고 할 수 있다.
참고로, 청교도들이 남긴 믿음에 관한 글들 중, ‘최고의 내용’으로 여겨지고 있는 것은 토마스 굿윈(Thomas Goodwin)이 쓴 『의롭다함을 얻는 믿음』이다. 그것은 클락슨이 강론한 것의 세 배 분량의 대작이다. 그 외에도 리차드 백스터(Rechard Baxter)의 『믿음의 삶』, 윌리엄 브릿지(William Bridge)와 토마스 만톤(Thomas Manton)이 믿음에 관해서 설교한 것들이 주목할 만하다.
제 1 장 무엇이 구원 얻는 믿음인가
1. 믿음의 본질
“믿고 세례를 받는 사람은 구원을 얻을 것이요 믿지 않는 사람은 정죄를 받으리라”(막16:16).
이 말씀은 사람들에게 전해진 말씀들 가운데 가장 주의 깊은 관심을 요구하는 말씀입니다. 왜냐하면 이 말씀은 바로 그리스도의 말씀이며, 하늘로 올라가시는 우리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의 마지막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기록된 것에 따르면 그 분께서는 이 말씀을 하신 이후에 더 이상 어떤 말씀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은 우리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말씀이며, 복음을 단 두 문장으로 요약한 복음의 정수입니다. 또한 이 말씀은 은혜 언약 그 자체입니다. 실제로 이 문장 속에는 복음의 내용이 그대로 함축되어 있다. 곧 삶과 죽음, 그리고 삶과 죽음의 조건, 영원한 행복과 불행의 조건이 들어 있습니다.
생명의 조건은 이중적입니다. 하나는 필수적인 조건으로서의 믿음이고, 다른 하나는 부수적인 조건으로서의 세례입니다. 여기서 부수적인 것이라고 구분 짓는 이유는 이것이 믿음만큼이나 생명의 조건에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정죄를 받는 이유는 세례를 받지 않아서가 아니라, 믿음이 없어서 입니다. 아무리 세례를 받았다 할지라도, 믿지 않는다면 정죄를 받을 수밖에 없기에 믿음은 필수적인 것이라 하겠습니다.
♡교리♡ 구원과 정죄는 믿음과 불신에 달려 있다. 믿음이 없이는 구원도 없다. 불신에는 정죄만이 있을 뿐이다.
믿음은 구원 얻는 은혜에 있어서 가장 중요하며, 불신은 정죄 받는 죄에 있어서 가장 중요합니다. 불신이 없는 죄는 영벌을 받지 않을 수도 있지만, 불신은 다른 어떤 죄가 없어도 영벌을 받게 됩니다. 요한복음에서는 불신을 이미 ‘심판을 받은 것’이라고 합니다(요3:18 참고). 이미 지옥에 있는 것과 다름없습니다.
우리는 죽음의 증후를 가진 사람은 죽은 사람으로 여깁니다. 불신자들은 영원한 죽음의 증후를 가진 사람입니다. 이런 불신의 상태가 계속 지속되는 곳에 죽음 이외에 다른 것을 기대할 수 없습니다. 계속 불신을 고집한다면, 영원한 생명에 대한 소망이란 있을 수 없습니다. 비록 살아 있다 해도 이미 죽은 사람이며, 이 땅에 사는 동안에도 지옥에 있는 것입니다.
가장 위대한 영혼의 의사라도 계속해서 불신하는 사람에게 주어질 영원한 죽음을 막을 수는 없는 것입니다. 더욱 비참한 것은 거기에는 어떤 생명의 소망도 없고, 자비의 소망도 없다는 것입니다. 불신자들이 처해 있는 상황은 사형언도를 받아 죽음의 단두대가 이미 준비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2. 믿음의 구성
1) 지식
믿음은 지식에 의해서 표현됩니다(사53:11 참고). 지식이 곧 믿음이 될 수는 없지만, 그렇다고 지식이 없는 믿음 또한 있을 수 없습니다.
교황주의자들의 맹목적인 믿음은 그들을 구덩이로 인도하는 것밖에는 아무런 유익이 없었습니다. 그들의 무지는 광신의 어머니이며, 거짓의 아버지가 사용하는 중요한 원리 중의 하나였습니다. 또한 그것은 죄인들이 지옥으로 떨어지게끔 눈을 가리는 사탄의 머플러입니다.
회심의 첫걸음은 눈을 열어서 어둠을 흩어 버리는 것입니다(행26:18 참고). 하나님께서 만드신 최초의 것은 빛입니다. 태양이 떠오르기 전에는 미명이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지식의 미명은 의의 태양이 떠오르기 전에, 그리스도께서 믿음으로 우리 마음에 거하시기 이전에 나타납니다. 율법에서 나온 빛은 죄와 불행을 발견케 하고, 복음으로부터 나온 빛은 그리스도의 탁월함과 완전한 만족을 발견케 합니다. 복음으로부터의 빛은 그 신비에 대한 만족스러운 지식이 있으며, 불신의 상태에서 가졌던 지식보다 더 분명하고, 더 확실하며, 더 감동적인 지식이 있는 것입니다.
2)동의
기독교 교리의 중요한 원리에는 특별히 다음의 두 가지 진리에 대한 동의가 있어야 합니다. 첫째, 사람에게는 구세주가 필요하다는 사실과, 둘째는 예수 그리스도만이 모든 것을 충족시키는 구세주라는 사실입니다.
성경은 다음의 세 가지를 근거로 하여 구세주의 절대적인 필요성을 선언합니다. 곧 자연인의 죄 많음, 그것으로 인한 인간의 비참한 상태, 그리고 그것으로부터 자기 스스로 벗어날 수 없는 무능력함을 들 수 있습니다. 바로 여기에 대한 완전한 동의와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3) 기댐, 즉 그리스도께로의 의존
구원을 얻기 위하여 오직 그리스도께만 의존하는 것이 믿음입니다. 믿음이란 그리스도께 단순히 신용을 주는 것이 아니라, 그분을 전적으로 의존하는 것입니다. 곧 그분을 신뢰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그분을 신뢰한다는 것은 단순히 그분을 믿는 것이나 그분의 말씀이 진실이라고 동의하는 것 그 이상입니다. 롬바르드(Lombard)가 말한 것처럼, 믿음은 그분께 달라붙고, 그분을 의지하며 그분께 의존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구원 얻는 믿음의 핵심이며, 바른 방식입니다.
지식과 동의가 없이 의롭다함을 얻게 하는 믿음이란 있을 수 없습니다. 사실 바른 믿음이 없는 지식과 동의는 얼마든지 가능합니다. 사탄과 위선자들은 더 많은 지식을 가지고, 더 확고하게 동의할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의존하는 행동은 사탄과 위선자들이 할 수도, 절대로 취할 수도 없는 행동입니다. 지식과 동의가 믿음의 몸이라면, 의존과 의탁은 믿음의 영혼과도 같은 것이기 때문에 이것이 없는 지식과 동의는 시체에 불과한 것입니다.
3. 믿음의 본질의 실례
1)그리스도께로 나아옴
믿는다는 것은 그리스도께로 나오는 것입니다. 신약에서 이처럼 표현된 것을 구약에서는 우리 자신들을 데리고 그분께로 나아가는 것이라고 표현합니다. 이러한 표현들은 모두 예수 그리스도를 의지하고 의존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를 들어 ‘나는 완전히 당신에게 의존합니다’라고 하는 것은 ‘나를 완전히 당신에게 데리고 갑니다’라는 것입니다. 요한복음에서 ‘가는 것’은 곧 ‘믿는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요6:35,64,65 참고).
잠30장 5절에서 ‘의지하다’로 사용되는 단어인 ‘하싸’는 ‘피하다’, ‘도피하다’라는 의미로 사용됩니다. “의인은 여호와를 인하여 즐거워하며 그에게 피하리니”(시64:10). 이 단어의 의미는 ‘안전한 장소로 자신을 데리고 가거나, 날아 서 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마치 병아리가 위험한 지경에서 암탉의 날개 아래로 날아드는 것처럼 말입니다. 룻기에서는 “그 날개 아래 보호를 받으러 온”(룻2:12)에서 ‘라하쏘트’(의뢰하기 위해)가 사용되었습니다. 매에게 쫓겨서 잡혀 먹힐 위험 속에 있는 속수무책의 아기 새는 그 어미의 날개 아래로 들어갑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죄인에게 나타나는 믿음의 첫 번째 역사는 자신이 진노와 심판에 의해서 쫓긴다는 것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즉 그 진노와 심판이 자기 자신을 회복이 없는 파멸로 데려간다는 것을 알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때에 그 죽어 가는 죄인을 구원하시기 위해 날개를 펴고 계신 그리스도를 보게 됩니다. 그리고 복음을 통하여 그리스도의 그늘 아래로 부르시는 그분의 초청을 듣게 됩니다. 그 얼마나 달콤한 목소리겠습니까! 그 소리를 듣고는 이제야 비로소 순종하고 안식을 얻기 위해 그리스도께로 달려갑니다.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은 산성이며 피난처이고 지성소인 그분께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이제 죄인에게 그리스도 외에는 다른 도피성이란 있을 수 없습니다. 도피성인 그리스도는 복음 안에서만이 발견할 수 있고, 복음 안에서 그 성은 열려 있으며, 그 안으로 들어가는 자만이 안전합니다. 그러므로 그 불쌍한 죄인은 서둘러서 자기 생명, 자기 영혼의 생명을 위해 그곳으로 날아가는 것입니다. 그는 자신이 날아가는 데 방해가 되는 죄의 무게를 벗어 버리고, 세상으로 눈을 돌리지 않고, 자신의 영혼이 가진 모든 힘을 다해 앞으로 나아가며, 모든 전력을 다해 그리스도께로 나아갑니다. 이와 같은 그리스도를 향한 영혼의 힘찬 움직임이 바로 믿음입니다.
2) 그리스도를 의뢰함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은 그분께 의지하며, 그분께 의탁하며, 그분께 의뢰하는 것입니다. ‘솨안’이란 단어는 사무엘하 1장 6절에서 사울이 그의 창을 의지한 것에 사용되고 있습니다. (시18:18, 사10:20, 대하14:11). 또한 ‘미쉬엔’은 우리를 지탱해 주는 지지대 혹은 믿고 의지할 수 있는 대상을 의미합니다. 잠3:5, 사50:10에서 사용된 ‘바타흐’는 ‘솨안’과 같은 뜻으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싸마크’라는 단어는 ‘기대며 의지하는 것’의 의미로 사용되고 있습니다(사48:1-2, 사26:3, 왕하18:21). 이처럼 이러한 단어들은 무엇이 구원 얻는 믿음의 행동인지를 분별할 수 있는 빛을 비춰 줍니다.
3) 그리스도께 밀착함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은 그분께 붙어 있고, 그분과 함께 결합하고, 그분께로 밀착하는 것입니다. 민수기 21장 15절에서 ‘기울어지고’, ‘닿았도다’의 두 단어는 아주 가까이 붙어 있는 것을 의미합니다. 배가 난파되어 파도에 실려 다니는 사람에게 붙들 수 있는 것이라고는 오직 판자와 돛단배의 기둥뿐이라면, 그 사람은 그것을 어떻게 붙들겠습니까? 얼마나 신속하게 그것을 붙잡으려 하겠습니까? 분명히 그는 그것을 자신의 생명과도 같이 붙들 것입니다(왕하18:5, 신6:4 참고).
이처럼 주님께서 죄인에게 믿음의 역사를 시작하시면, 그 죄인은 자신이 바다 깊은 곳에 있다는 것을 비로소 알게 되고, 따라서 유일한 판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자신의 영혼의 온 힘을 다해 붙들게 됩니다.
4) 그리스도께로 굴러 나아감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은 그분께로 굴러 가는 것이며, 우리 자신들을 그분께 내던지는 것입니다. 시편의 “저가 여호와께 의탁하니”(시22:8)에서 믿는다는 것으로 표현된 ‘가랄’은 자기 자신을 굴려서 여호와께 나아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너의 길을 여호와께 맡기라”(시37:5)라는 구절의 의미는 주께로 당신의 길을 굴려 가라는 뜻입니다. 또한 그것은 그 다음 단어인 ‘바타흐(의지하다)’, 즉 그를 신뢰하는 것입니다. “너희 행사를 여호와께 맡기라”(잠16:3). “네 짐을 여호와께 맡기라”(시55:22).
죄인이 그리스도를 초청하기만 한다면 죄인의 짐을 그리스도 자신이 지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죄인은 기쁜 소식으로 인해 그리스도께로 더 가까이 나아갑니다. 그리고 자신의 영혼의 그 무거운 짐을 그분께 맡깁니다. 그리고 믿게 됩니다. 이처럼 죄의 무게를 느끼게 된 죄인이 자신을 굴려서 그리스도께로 나아가는 것,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를 믿는 것입니다.
5) 그리스도를 먹고 마심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은 그분을 먹고 마시는 것입니다. 이것은 내면의 깊은 섭취로서, 마치 굶주림으로 쇠잔해지고, 목마름으로 허덕이는 사람이 고기를 먹고 음료수를 마시는 것과 같습니다. 요한복음에서는 믿음이 먹는 것이라 표현되고 있습니다(요6:48-58 참고). 이는 어떤 사람들이 오해하는 것처럼, 성찬에서의 먹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는 영적으로 먹는 것, 즉 믿음을 말합니다. 요한복음 6장 35절에서 ‘먹는 것’은 ‘오는 것’, 즉 신앙적으로 오는 것을 말합니다. 또한 ‘마신다는 것’은 ‘믿는다는 것’입니다.
6) 그리스도를 받아들임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은 그분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요1:12 참고). 그분을 받아들였다는 것은 그분을 믿는다는 것입니다(골2:6-7 참고). 때로는 그리스도를 믿는 것을 그분의 의로우심을 받아들이는 것이나 죄의 사면을 받아들이는 것이라고 표현하기도 합니다.
죄인들은 하나님께 빚진 사람들이라는 비유(마6:12)에서 그 빚은 반드시 상환되어야 깊은 감옥에서 나올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애석한 일은 그 빚은 그가 절대로 갚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때 그리스도께서 그의 모든 빚을 탕감해 준다는 제안이 주어졌을 때 그는 그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겠습니까? 받는 것이 믿는 것입니다.
7) 그리스도를 껴안음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은 그분을 붙드는 것이며, 그분을 든든히 붙잡고 그분을 껴안는 것입니다. 로마서 9장 30절의 ‘의를 얻었으니’에서 붙드는 것으로서 믿음의 의, 다시 말해 우리 주님이시며 의롭게 하는 믿음의 대상인 그리스도를 든든히 붙잡고 있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의를 붙든다는 것은 우리의 의가 되시는 그리스도를 붙드는 것입니다(롬9:33 참고). 그래서 그분을 믿는 것과 그분의 의를 붙드는 것은 모두 같은 것입니다.
히브리서 11장 13절은 그리스도를 껴안는 것을 의미합니다. 본문에서 그들은 아직 그 약속들을 받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그들에게 약속하셨으므로 그들은 그분을 껴안았습니다. 다시 말해 그분을 믿었습니다. 아가서 3장 4절에서도 믿음이 그를 붙잡는 것이라 말하는데, 마치 가파른 곳에서 떨어져서 산산조각 날 지경에 있는 사람이 추락하는 도중에 나뭇가지를 붙잡는 것과 같습니다. 그리스도를 붙잡는 것은 자신이 지옥과 영원한 파멸로 떨어지는 것을 알게 된 사람이 자신을 지킬 수 있는 유일한 방법입니다. 이처럼 껴안는 것은 바로 생명과 영광과 행복을 껴안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4. 믿음 이전의 증거
1) 고통의 인식
믿음은 고통의 지각을 전제로 합니다. 주님께서 죄인을 믿게 하실 때, 죄와 허물로 인하여 비참한 상태에 있다는 것을 완전히 깨닫게 하십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는 이를 인정할 뿐만 아니라, 그 고통을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이전에는 죄의 위험과 무게에 대하여 듣기만 했지만 이제는 그것을 느낍니다. 또한 이전에 하나님의 진노가 얼마나 무서운지에 대하여 들어왔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그 진노의 열기를 느낍니다. 그 진노가 자신을 조준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리고 그런 일들이 자신에게는 일어나지 않으리라는 과거의 자신의 어리석었음에 놀라게 됩니다.
이렇게 고통의 지각이 없이는 그리스도께 나아가지 않으며, 그분을 믿지 않습니다. 롯도 도시가 모두 불길에 휩싸이지 않았다면, 산으로 도망가지 않았을 것입니다(창19:28, 30 참고). 고통의 지각이 그리스도께 관심을 갖게 만드는 것입니다.
2) 거절
다른 의존이나 도움을 거절하는 것은 곧 그리스도만을 의존하며 의지하는 것입니다. 죄인이 자신의 안전을 위하여 자기 안에 있는 것이나, 자신 이외의 다른 어떤 것을 의존할 때에는 그리스도를 온전히 믿을 수 없습니다. 노아가 밖으로 내보낸 비둘기가 발을 딛고 쉴 만한 장소를 찾았다면 방주로 다시 돌아오지 않았을 것입니다(창8:12 참고). 마찬가지로 죄인이 자신의 친구들이나 자신의 편의, 세상의 직업과 같은 것을 의지한다면, 그 비둘기처럼 그리스도께로 돌아오지 않을 것입니다.
호세아서에서 에브라임에게 믿음이 역사하는 것을 보십시오. 그는 외국의 모든 도움을 거절했습니다(호14:3). 또한 그는 의존할 수 있는 모든 것을 거절했습니다(호14:3). 뿐만 아니라 그는 이전에 우상으로 삼았던 것과 의존하였던 것을 다 거절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자비를 받을 수 있는 가장 빠른 길임을 알았던 것입니다.
3) 순종
믿음은 매우 순종적인 은혜입니다. 죄와 진노가 너무 무겁기 때문에 영혼은 하나님의 뜻을 따를 수밖에 없습니다. 그분께서 물으시면 겸손한 죄인은 말하고, 그분이 보시기에 좋은 대로 자신을 다루시게 합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시면 두려움 가운데 떨면서 복종합니다.
4) 결단
계속해서 그분께 의존하겠다고 결단하는 것은 어떤 일이 일어나더라도 자신이 붙잡은 것을 지키겠다는 단호한 의존을 말합니다. 하나님의 진노로부터 도망칠 길이 없음과 오직 자기 자신을 그리스도께 맡기는 것 말고는 다른 방법이 없음을 알게 된 죄인은 그리스도께 자신을 맡기기로 결심합니다. 이것은 마치 에스더가 유대인을 위해서 일을 추진할 때 말했던 것과 같습니다. “왕에게 나아가리니 죽으면 죽으리라”(에4:16).
5) 지탱
지탱은 의존을 확립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믿고 의지하는 마음이 어느 정도가 되면 정착되고, 더욱 굳건히 세워집니다. “여호와를 의뢰하고 그 마음을 굳게 정하였도다”(시112:7)처럼 마음이 확립되는 것입니다. 곧 ‘믿고 기댄다’는 의미입니다.
6) 동의
자신의 말로 그리스도를 받아들이겠다고 동의하는 것은 그리스도께로 가는 것과 그분을 받아들이는 것, 그리고 믿음으로 일상생활 가운데 표현하는 것을 모두 포함합니다. 그리스도께로 가는 것을 영혼의 움직임이 아닌 단순한 육체의 움직임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의지는 영혼을 움직이는 능력이며, 신체는 영혼의 움직임에 의해서 움직입니다. 영혼의 움직임에 동의함으로써 어떤 대상으로 나아가며, 반대함으로써 어떤 대상에서 멀어지는 것입니다. 영혼이 그리스도를 받아들이고자 동의할 때, 그 신체가 그분께로 나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그리스도를 받아들인다는 것을 포함하는 표현입니다. 왜냐하면 이것 역시 영혼의 행동이기 때문입니다. 의지는 영혼의 받아들이는 힘입니다. 신체는 영혼의 손과 같아서, 이의를 가지면 손을 움츠리고, 동의를 하면 손을 펼칩니다.
그런데 이 의지는 본능적으로 그리스도께 손을 움츠리고 있습니다. 이때 동의는 그 의지의 손을 열게끔 합니다. 그래서 의지가 그리스도를 받아들이기 위해 손을 펼칠 때, 항상 그리스도를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의지가 손을 펼칠 때 동의하고, 동의할 때 받아들입니다. 이것이 바로 믿는 것입니다.
출처 자기 부인 / 바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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