율법과 복음과 언약!!

[스크랩] 복음과 윤리

하나님아들 2012. 9. 18. 23:34

<소논문> 복음과 윤리  

복음과 윤리

1. 시작하며
2. 인간과 윤리
   2.1. 철학적 윤리학 : “인간은 할 수 있다”
   2.2. 개혁주의 윤리학 : “인간은 윤리 수행 능력을 잃었다”
3. 율법과 윤리
   3.1. 기독교 윤리학과 ‘율법주의’와 ‘반율법주의’
   3.2. 율법은 윤리적 삶의 실천 규범
   3.3. 율법은 ‘모든 세대’ ‘모든 인간’을 향한 윤리 규범
4. 복음과 윤리
   4.1. 기독교 윤리의 시작으로서의 복음
   4.2. 윤리 실천을 위로하고 격려하는 복음
   4.3. 윤리 실천을 확장시키는 힘인 복음
   4.4. 복음 앞에서는 모두 평등!
5. 복음으로 변화된 기독교인의 생활 윤리
   5.1. 복음과 기독교 생활 윤리 : “출발과 정신인 복음”
   5.2. 복음과 개인 윤리 : “절제, 겸손, 진실”
   5.3. 복음과 사회(국가) 윤리
   5.4. 복음과 환경윤리
   5.5. 복음과 공동체 윤리
6. 맺으며 : “이웃사랑 정신이 그리스도의 형상을 이루기까지”



1. 시작하며

 세상은 다원화되며 급속히 변하고 있다. 급속한 변화는 세속화를, 다원화는 상대주의를 부추기고 있다. 삶에는 ‘절대적인’ 기준이 있다고 믿던 기독교인들도 이런 흐름 속에서 가치관의 혼란을 겪는다. 기독교인들은 윤리적 논쟁 앞에 설 때마다, 시대가 아무리 변해도 여전히 성경의 규범을 붙잡아야 할 것인지, 아니면 변하는 상황에 따라 탄력적으로 사고해야 할 것인지, 고민할 수밖에 없다. 특히 현대인의 윤리 인식을 보면, 반기독교적인 특성을 가질 때가 많아 기독교적인 삶을 유지하기가 더욱 어려워지고 있다(h 152). 분별력을 흐리게 하는 현대 사회에서, 기독교인은 어떤 기준을 가져야 하며 어떤 방향을 잡아야 할 것인가? 말씀과 신앙의 빛 안에서 수정할 것인가, 폐기할 것인가, 비판적으로 수용할 것인가, 전향적으로 수용할 것인가?(h 153). 판단과 결정을 바르게 하여 바른 윤리 생활을 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는 먼저 윤리적 행위를 하는 주체인 인간에 대해 고찰할 필요가 있다. 철학적 윤리학에서 말하는 인간관과 성경에서 말하는 인간관을 비교해 보고자 한다. 그 다음, 기독교인들의 윤리 규범이라고 할 수 있는 율법과 윤리는 어떤 관계가 있는가를 살펴 보겠다. 율법과 윤리에 대해 먼저 살펴 보는 이유는 복음으로 변화된 기독교인들에게 율법은 여전히 윤리적 삶에 있어서 신적 규범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복음으로 변화된 기독교인이 율법과 윤리의 관계를 바르게 알지 못하면 율법주의적인 윤리 생활에 빠질 수 있거나, 율법은 복음과 전혀 별개의 것이라며 반율법주의적 윤리 생활로 나갈 수 있기 때문에 율법과 윤리의 관계를 제대로 알 필요가 있다. 이어서 기독교인적인 윤리 생활의 출발이요 과정이며 결과인 ‘복음’과 윤리가 어떤 관계가 있는가를 정리하고자 한다. 마지막으로 복음으로 변화된 기독교인의 복음적인 윤리 생활을 분야별로 살펴보고 글을 정리하고자 한다. 본 글에서는, ‘복음’이 제시하는 ‘자비’와 ‘긍휼’과 ‘위로’에 기초한 ‘이웃사랑 실천’을 중심 주제로 잡고 논리를 전개하겠다.

2. 인간과 윤리

 인간은 의롭게 되려는 소원을 갖고 있다. 인간의 소망대로 의로운 존재가 될 수 있는가? 타락한 이후의 인간은 윤리적 목적을 수행하는 데 있어서 얼마만큼의 능력을 갖고 있는가? 여기서 칼빈과 철학적 윤리학의 입장이 크게 다르다.

 2.1. 철학적 윤리학 : “인간은 할 수 있다”
 철학적 윤리학에서는 인간은 선한 생활을 성취하기에 완전하고도 충분한 자질을 갖추고 있다고 주장한다(c 56). “이성은 거룩한 빛으로 가득차 있기 때문에 이성이 주는 권고는 최선의 것을 위한 것이며, 이성은 의지를 완전히 장악할 힘을 갖는다.”(c 56) 반면 감각은 그렇지 못하다. 우둔하고 근시안적이며 유혹에 약하다. “이 감각은 이성의 힘에 의해 길들여질 수 있고 점진적으로 굴복될 수 있다.”(c 56) 탐심의 경우, 인간의 탐심이 감각에 굴복하지 않고 인간의 이성에 순종할 때 바른 의지로 나타날 수 있다(c 56). 크리소스톰이나 제롬도 인간의 본성은 부패했지만 이성은 온전한 모습으로 남아 있고 거의 손상되지 않았다고 보았다(c 56).

 2.2. 개혁주의 윤리학 : “인간은 윤리 수행 능력을 잃었다”
 개혁주의적 윤리학은 도덕적 실천의 가능성에 대해 낙관적인 입장을 취했던 회랍의 고전철학의 비현실성을 비판하고, 이성이 선과 악올 분별했다 하더라도 인간의 의지는 선을 행할 능력을 상실했다는 데서 논의를 시작한다(c 72). 칼빈은 인간은 몸과 영혼으로 구성되었고 영혼은 지성과 의지로 구성되었는데, “지성은 선과 악, 정의와 불의, 따라야 할 것과 피해야 할 것을 분별한다”(c 55)고 말했다. “의지는 지성이 선하다고 선언하는 것을 선택하고 따르며 지성이 악하다고 선언하는 것을 거부하고 회피하는 역할을 한다. 그러나 의지는 어떤 방향으로도 기울어질 수 있는 것으로서 항구적인 견인성을 부여받지 못했다.”(c 55) 철학적 윤리학은 본성에 부합하여 살도록 촉구하지만, 칼빈의 개혁주의적 윤리학은 그리스도의 삶을 본받아 살 것을 요구한다(c 68).
 인간 본성에 대해 칼빈은 어거스틴의 인간론을 따르고 있다. 어거스틴은 “믿음, 하나님을 향한 사랑, 이웃을 향한 긍휼, 의와 거룩과 같은 영적인 은사들은 박탈당했고, 건전한 정신과 온전한 마음과 같은 자연적 은사들은 부패되었다”(c 57)고 했다. 선과 악을 판단하는 지성, 판단, 의지 등은 완전히 파괴되지는 않았으나 그 기능은 약화되고 부패되었다(c 57). 지성은 자신이 추구해야 할 지식이 무엇인가 조차도 분별해내지 못한다(c 58). 의지는 어떠한가? 이성에 의해서 선이 무엇인지 안다 할지라도 선을 추구하기 보다(c 60), 의도적으로 죄 속으로 빠져든다(c 59). 이처럼 인간은 종교적, 윤리적으로 철저히 타락했기 때문에 인간의 의로써는 바른 윤리 행위가 불가능한 것이다(b 98).
 타락 이후 인간에게 있던 거룩한 심성들인 “지혜, 의, 정의, 진리, 거룩성이 박탈당하고, 그 자리에 맹목, 무력, 헛됨, 불결, 불의가 자리를 잡았다.”(c 56) 본성은 선을 박탈당했고 모든 인류에게 전가되었다(b 105). 따라야 할 것과 피해야 할 것을 분별하는 지성이 제 기능을 하지 못하므로, 인간의 의지 역시 윤리적 방향으로 나가지 못하게 되었다. 윤리적 타락은 종교의 타락, 곧 인간이 하나님을 떠난 데서 출발하는 것이다(b 98).


3. 율법과 윤리

 3.1. 기독교 윤리학과 ‘율법주의’와 ‘반율법주의’
 바울은 인간은 스스로 윤리적으로 될 수 없고, 그렇기 때문에 법을 이행할 때 한계를 직면할 수밖에 없다고 한다(b 95). 바울이 보기에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율법을 자랑하기는 했지만, 그들 역시 타락한 인간들이고 타락의 정도가 너무 깊어서 하나님 앞에서 결코 의롭게 될 수 없었다(b 98). 그리스도인은 복음으로 변화되었기에 성화에 있어서 율법이 구속력을 행사하지 못한다(b 110). 윤리적 행위를 수행할 힘은 ‘복음’에서 나온다. 기독교인의 윤리적 삶은 구원의 근거로서가 아니라 이미 받은 구원에 대한 증거의 성격을 갖는다. 이런 면에서, 크렌츠와 같은 학자들이 ‘칼빈의 윤리학은 율법주의적인 윤리’이며, ‘율법은 그 시대에만 적용하는 것이 아니다’고 주장하는 것은 개혁주의 윤리학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결과다. 그러므로 윤리적 삶을 구원의 조건으로 받아들이는 율법주의(legalism)는 기독교 진리에 어긋난다. 한편, 기독교인은 율법을 묵상하고 실천하는 삶은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반율법주의(antinominaism)도 경계해야 한다(e 142).

 3.2. 율법은 윤리적 삶의 실천 규범
 철학적 윤리학은 모두 자율적 윤리학(autonomous ethics)으로 윤리적 행위의 판단 기준을 이성에서(소크라테스나 플라톤), 실천이성에서(칸트), 쾌락을 추구하는 인간의 성향에서(공리주의), 개인의 주관적 직관이나 정서(emotion)에서, 사회 공동의 관습에서(공동체주의) 찾는다. 모두 인간의 내재적 차원에서 찾는다(e 140). 모든 철학적 윤리학은 상황윤리다(e 140). 인간의 내재적 구성요소는 모두 가변적이기에 거기서 도출한 규범은 상황적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e 140).
 그러나 개혁주의 윤리학은 마음의 율법은 죄로 인하여 부패되었고 또한 왜곡되어 있기 때문에 진정한 규범의 근거로는 불충분하다고 판단하고 일차적인 판단의 규범을 계시된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에서 찾는다(h 140). “성경은 외적이고 사회적인 사랑의 실천을 명령하고 있는 십계명과 내적인 덕의 계발을 강조하는 산상수훈을 기독교인들이 평생 유념해야 할 절대적이고 보편적인 규범으로 제시한다.”(h 140) 교만하고 우둔하여 행동을 올바르게 할 수 없는 인간을 위해 하나님께서는 율법을 주셨다(c 64). 율법에 대한 칼빈의 세 가지 기능 이론은 개혁주의 윤리학의 규범론의 기초가 된다(c 60). 첫째, 율법은 하나님의 의로움을 드러내어 인간이 얼마나 불의한가를 고발한다(c 62). 율법을 분명히 깨닫고 나면 죄에 대한 인식이 더욱 깊어진다(b 105). 죄에 대한 인식이 깊어질수록 의롭다고 선언해주신 하나님의 은혜가 얼마나 큰가를 깨닫게 된다(b 106). 인간이 의롭거나 공적을 쌓을 수 있다는 생각을 버리고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긍휼에 의존하여 행동한다(a 21, c 62). 둘째, 율법은 무절제한 행동에 대해 하나님의 심판이 주는 두려움을 심어서 그 행동을 규제하여 사회의 기본적인 질서를 유지하게 한다(a 21, c 63). 셋째, 율법은 신자들이 따라야 할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알게 하고, 율법을 묵상하는 가운데 하나님의 훈계하심을 깨닫게 한다. 의롭게 하는 기능을 갖고 있지는 않으나, 여전히 우리에게 존중을 받고 있다(c 64). 이와같이, 율법이 제시하는 삶은 기독교인의 삶을 바른 방향으로 인도해주는 등불과 같은 역할을 한다(e 143). 율법은 기독교인들의 윤리적 삶의 실천 규범으로 작용한다.

 3.3. 율법은 ‘모든 세대’ ‘모든 인간’을 향한 윤리 규범
 율법은 읽는 자에게 죄가 무엇인가를 알게 해 주기 때문에, 죄를 범하든지 선을 행하든지 그것은 마음의 문제지 율법 자체의 책임이 아니다(b 111). 그렇다면 죄란 무엇인가? 인간 행위의 결과로서의 죄와 영혼 깊은 곳에 자리 잡고 있는 무서운 세력으로서의 죄로 구분할 수 있다(b 112). 죄에 대해 올바로 인식하지 못하면 윤리적 삶을 살기는 어렵다. 어떻게 죄를 인식할 수 있는가? “이는 계명으로 말미암아 죄로 심히 죄되게 하려 함이니라” 계명의 역할을 죄에 대한 인식을 더 깊게 하는데 있다(b 113). 계명의 역할은 윤리의 기준이 되며 최소한의 기준이 된다.
 칼빈과 철학적 윤리학과의 대결은 규범론에서 심해진다. 칼빈에게 있어서 윤리적 판단과 실천을 위한 규범은 인간 안에 있는 어떤 구성요소로부터 발견되는 것이 아니라 철저하게 하나님이 계시한 율법에서 발견된다(c 73). 율법은 인간의 무절제한 욕망을 어느 정도라도 절제시킴으로써 사회의 질서와 평화를 유지하는 기능을 하며, 이웃을 향한 사랑의 규범으로서 작용한다(c 73). 칼빈의 견해는 인간의 자아 안에서 윤리적 규범을 도출하는 철학적 윤리학과 근본적으로 의견을 달리한다. 철학적 윤리학에서는 인간을 낙관적으로, 규범을 자아로부터 도출될 수 있는 것으로, 윤리 실천의 동기를 하나님과 이웃 사랑보다는 자기애에서 출발한다(c 73).
 십계명은 어느 시대든지 인간에게 순종을 요구한다(c 64). 십계명은 인간의 행위 뿐만 아니라 은밀한 생각까지도 밝혀 내어 윤리적 행위를 강화시킨다(c 65). 하나님을 마음에서부터 경외하고, 형제의 생명을 보존하며, 정결함과 순결을 유지하고, 행동의 정숙함으로 이웃을 유혹하지 않으며(c 65), 긍휼히 여기는 사람이 되도록 한다(c 66). 기독교 윤리는 율법적이거나 의무감에 의한 역할이 아니라 긍휼히 여기는 마음 자비의 마음이다.


4. 복음과 윤리

 4.1. 기독교 윤리의 시작으로서의 복음
 바울과 어거스틴과 칼빈의 견해처럼 모든 인간의 지성과 의지와 감정은 제 기능을 상실하여 윤리 수행의 능력을 잃었다. 종교적으로 타락하여 하나님과의 관계성이 파괴되었기 때문에 윤리적으로 바른 행동을 할 수 없다. 그러므로 하나님과의 관계성에서 새로운 변화가 일어나야만 한다. 어떻게 신분의 변화가 가능한가? 죄를 전가받은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을 통해 그리스도의 완전한 의로움을 성도들에게 전가시켜서 율법을 완전히 지키도록 요구하는 하나님의 요구를 충족시킨다(b 111). 이 방법으로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성이 회복되고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을 믿는 사람들은 신분 변화를 경험한다. 이 신분의 변화는 심연의 변화요(b 108), 종의 신분에서 의인의 신분으로의 변화다(b 109). 심연의 변화가 일어나면 죄가 의식의 세계(겉사람)를 지배하지 못한다(b 108). 기독교인의 윤리는 하나님으로부터 얼마나 큰 은혜와 사랑을 받은 존재인가를 기억하고 묵상하는데서부터 시작된다(b 119). 복음에 대한 깊은 인식은 성도의 윤리적 삶을 격려하고 고난에 처한 성도를 격려한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신분이 변화되었다는 것이 복음이므로, 복음을 반복해야 한다. 복음을 반복, 신분을 반복하는 데서 기독교 윤리가 시작된다(b 11).

 4.2. 윤리 실천을 위로하고 격려하는 복음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윤리적 행위는 의무적인가 자발적인가? 전가 법칙에 의해 새로운 신분이 되었기 때문에 기독교인들은 감사하고 자발적인 마음으로 윤리를 실천할 수 있다(b 104). 윤리 실천의 과정에서, 올바로 실천하려고 애쓸 때, 조나단 에드워드에 의하면, 애쓰는 과정은 그리스도께서 능력으로 도우시는 순간이다(d 91). 기독교인들이 이웃 사랑을 실천할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도 용서와 긍휼이 필요한 것을 아시고 우리를 위로하신다(d 91). 조나단 에드워드는 그의 덕의 윤리를 통해서, 기독교 윤리의 목적이 단순한 의무의 수행이나 쾌락의 획득, 자유의 실현에 머무르지 않으려고 애쓸 때 하나님의 위로와 격려가 함께 하기 때문에, 기독교인의 윤리적 실천은 결코 지고가기 어려운 짐이 아니라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가벼운 짐이자 쉬운 멍에’요 즐겁고 가벼운 마음으로 지고 갈 수 있다고 했다(d 91). 하나님의 위로와 격려가 있기에, 복음은 기독교인의 윤리 실천을 자발적으로 만든다.

 4.3. 윤리 실천을 확장시키는 힘인 복음
 윤리적인 삶을 살려고 애쓰다가 실패했을 때는 어떻게 되는가? 심연의 변화와 윤리 실천의 동기를 실패가 흔들 수 없다(b 114). 하박국이 말한 것처럼,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고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고, 볕에 식물이 없고 외양간에 소가 없어 절망적인 상황에 빠졌더라도 의롭다고 하시는 하나님을 의지할 때 “의인은 그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합 2:4)게 된다(a 106). 여기서 말하는 믿음이란 하나님의 긍휼에 대한 믿음이다(a 107). 하나님의 긍휼에 대해 감사할수록 윤리적 행위는 더 확산된다. 하나님께서 정죄로부터 해방하시고 용기를 주시고, 오히려 좌절을 통해서 새로운 도전 의지를 심어 주신다(b 115). 기독교인들은 윤리적 삶을 실천했다고 해도 그 삶은 하나님의 긍휼에 대한 감사의 표현임을 알게 한다(b 111).

 4.4. 복음 앞에서는 모두 평등!
 비윤리적 행위 판단을 받을 때, 복음 앞에서는 모두 평등하다. 행위가 아니라 오직 복음으로만 의인의 신분을 갖게 되었는데, 행위로는 모두 죄인이라는 사실을 반증한다. 복음은 인간의 죄를 전가받아 십자가에서 피 흘려 죽으심으로 우리를 의롭다고 하신 소식이다(c 57, 롬 98, 롬 105). 그리스도의 복음 앞에 선 인간은 어떤 존재인가? 모두 죄인이므로 윤리 행위를 판단 받는 데 있어서 모두 평등하다. 복음 앞에서 평등하다는 논리는 대단히 중요하다. 신앙 경륜이 있다고 비윤리적 행동을 한 것에서 결코 자유로울 수 없다.
 그리고 복음 때문에 죄인인 인간이 값없이 의롭게 되었으므로, 윤리 행위를 따져 볼 때 사람들 앞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보아야 한다. 복음 앞에서는 업적, 지위, 경력 등을 내세울 가치가 없으므로, 모두 겸허한 마음으로 윤리적 삶을 실천해야 하는 것이다.

5. 복음으로 변화된 기독교인의 생활 윤리

 현대에는 다원화된 사상들이 윤리 기준을 뒤흔들고 있다. 프란시스 쉐퍼가 미국의 생명의료현실을 보면서 지적한 ‘유물론’은, 유전자 조작을 통하여 인간의 성격을 조절할 수 있고 지금보다 더 우월한 인종을 제작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h 152). ‘기계론적 사고’는 사회를 하나의 기계로 보고 인간은 자신이 가진 기능의 능력에 따라서 부품처럼 교체될 수 있는 존재로 본다(h 152). ‘공리주의’는 윤리적 행동을 판단할 때 얼마나 많은 효용, 행복, 쾌락을 추구하느냐를 기준으로 삼는다(h 153). ‘개인주의’는 윤리적 행동의 판단 기준을 개인으로 삼는다(h 152). 이러한 시대에서, 복음으로 변화된 기독교인이 가져야할 생활 윤리의 자세는 어떠해야 하는가?

 5.1. 복음과 기독교 생활 윤리 : “출발과 정신인 복음”
 기독교 생활 윤리의 출발은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다. 바울은 “오직 사랑으로 행하라”면서 기독교인의 윤리적 삶의 실천 동기와 이유는 사랑이라고 했다. 사랑은 자원하는 마음이며, 자발적인 마음이며, 자유다. 의무를 수행하는 의미를 넘어서 하나님이 베푸신 은혜에 감사하고 감격하는 마음을 가질 때 자발적으로 형성되는 하나님과 이웃을 향한 사랑의 마음이다(a 188). 기독교인의 윤리적 삶은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고 그 사랑에 대한 반응으로 나타난다. 조나단 에드워드는 “참된 덕은 보편적 존재를 향한 사랑인데, 곧 하나님을 향한 조건없는 사랑이다”(d 75, 78)고 했다. 바울은 기독교 윤리는 구원의 문제와 관련된다고 보았다. 인간을 사랑하셔서 구원해 주신 은혜에 대한 감사, 곧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살아 있을 때 기독교인의 삶은 윤리적 삶으로 나타난다(a 151).
 기독교 윤리의 원리는 ‘이웃 사랑과 고난의 삶’이다. 그리스도인의 윤리는 흔히 ‘이웃 사랑’으로 알려져 있다(c 69). 이웃 사랑이 실천되기 위해서는 ‘자기 부인’이 요구된다(c 70). 살아계신 하나님을 지향하지 않는 모든 철학적 윤리학은 본질적으로 자기애적 성격을 넘어설 수 없지만(d 90), 기독교 윤리는 고난의 삶을 강조한다. 고난의 삶에서 기독교 윤리가 나온다. 이웃 사랑을 위해서는 자신의 욕망과 영광을 추구하려는 마음을 버려야 하는데, 이것이 자기 부인의 삶이다. 자기 부인의 한 형식은 십자가를 지는 삶이다(c 70). 십자가의 길은 인내와 고난의 생활이다(c 71). 기독교의 윤리행위는 세상 사람들이 자선사업이 아니다(b 121). 십자가를 지면서 아픔을 느낄 때, 우리는 역설적으로 영적인 즐거움을 느끼며 감사가 나오게 되며, 밖으로는 이웃 사랑이 실천된다(c 70). ‘이웃사랑’은 타락한 인간 본성의 힘으로는 지속적으로 이룰 수 없기에(a 191)., 복음에 대한 지속적인 깨달음이 요구된다.

 5.2. 복음과 개인 윤리 : “절제, 겸손, 진실”
 문제 많은 사회에서, 복음으로 변화된 기독교인은 어디에서부터 사회 변화의 주체로 역할을 해야 하는가? “하나님 앞에서 선하고 바른 인격과 덕성을 갖추고 바른 결단과 행동을 관습화되기까지 훈련하는 일은 기독교윤리의 출발점이자 종착점이다."(f 144) ‘절제’의 덕을 쌓은 기독교인은 현실 문제를 극복할 수 있는 대안이 될 수 있다(f 144). 절제는 이웃 사랑의 실천 방식이다. 십계명 전체의 정신인 아가페의 사랑은 “자기애나 자기완성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기애를 향한 마음을 제어하면서 하나님과 이웃을 향하여 자기를 희생할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하는 태도를 의미한다.”(f 145) 하나님 한 분만을 섬기는 절제있는 경배생활을 하고, 일주일에 하루 정도 노동을 절제하고, 부모의 가르침을 따라서 생활의 절제를 행하며, 생명을 해치는 행동의 절제를 행하고, 성생활의 절제, 소유의 절제, 말의 절제, 탐욕의 절제를 십계명은 가르치고 있다(f 145). 현대 사회에서는 무절제한 성생활, 무절제한 난개발, 무절제한 경제적 이익 추구, 부의 축적을 향한 욕망의 절제가 절실히 요구된다(f 145,146). 절제함이 없이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할 수 없다(f 146). 기독교인은 이런 절제를 경건 훈련으로 기를 수 있다(f 146).
 절제와 함께 기독교인으로서 가져야할 윤리는 약한 것을 자랑할 줄 아는 ‘겸손’이다(a 15). 부족하지만 윤리적 삶을 행하는 자신을 통해서 주님의 능력이 나타나는 것을 기뻐하고, 자신은 지극히 작은 자임을 자랑할 때, 그런 사람에게서부터 사회의 변화는 시작된다(a 15).
 세 번째로 가져야 할 개인 윤리는 ‘진실’이다. 권위를 위해서 거짓말을 하거나 침묵하는 사람들로 인해 우리의 사회의 문제는 개선의 희망이 보이지 않는다. 기독교인들 중에도 많은 덕을 끼쳤던 사람들이 자신의 욕심을 위해서 진실을 외면한다(a 37). 다윗의 위대함은 간음 죄 이후 하나님과 사람들 앞에서 죄 고백한 그의 진실함에 있다. 모든 인간은 항상 죄인이기에 예수님은 지금도 구주가 되신다. 이 예수님 앞에 바르게 서 있는 사람은 진실을 외면할 수 없다. 진실에 대한 절대적인 기준이 사라지고 있는 혼탁한 사회에서 복음의 깨달음이 주는 ‘진실’은 개인 윤리의 희망이다.

 5.3. 복음과 사회(국가) 윤리
 사회적 제도가 개인의 삶에 끼치는 영향이 크기 때문에 기독교인들은 사회 윤리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 복음으로 변화된 기독교인들이 증가할수록 사회가 변화할 가능성은 높아지지만 능동적 참여가 없으면 아무런 변화를 기대할 수 없다(g 148). 바울은 “선한 일을 행하는 자를 보호하고 악한 일을 하는 자를 벌하는 공정한 정부가 사법권과 징세권을 행사할 때는 순종하라”(b 126)고 했다. 국가는 사회 안에 생기는 충돌을 공정한 법 집행으로 사회의 법을 유지해야 한다(g 149). 국가는 사회에서 낮은 계층이나 소외된 사람들을 가장 먼저 돌봐 주어야 한다(g 149). 국가는 사회의 법적 질서와 유지를 위해 필요한 재정 지원을 세금으로 요구한다(g 149). 만일 국가가 위의 임무를 제대로 수행하면 교회는 교인들이 기독교정신에 입각한 사회인으로 살아가도록 가르친다(g 149). 반대로 국가가 제 기능을 수행하지 못하고 위의 기능을 역으로 행한다면, 교회는 국가의 공권력 남용에 대하여 교단의 이름으로 경고해야 하고(g 149), 같은 목적을 지향하는 별도의 시민단체에의 참여 또는 결성을 통하여 할 수 있다.”(g 149) 경제 체제에 있어서는, 이익 추구에만 마음을 쏟아 높은 가치를 돈 버는 수단으로 전락시키는 사회(신미국주의 모델, g 150)보다는 높은 가치를 위해서 이익 추구를 수단으로 여기는 사회(라인란트 모델, g 150)가 건실하다. 기독교인들은 마 6:33에 나타난 예수님의 말씀이 경제체제와 경제활동에도 적용되는 진리임을 확신하고 이 사회에 사람을 존중하고 정의가 실현되도록 애써야 할 것이다(g 151). 자기 희생으로 사랑을 ‘나타내 보여 주신’ 그리스도의 복음을 아는 사람은 마음 속에 있는 감동이 ‘이웃 사랑’으로, 강도 만난 이웃을 위해 위험을 감수하여 보호해준 ‘선한 사마리아인’의 행동으로 나타내야 한다. “교리 또는 복음을 바르게 알면 거기서 강력한 사회윤리가 자연스럽게 나온다.”(b 131)

 5.4. 복음과 환경윤리
 최근 환경 호로몬의 문제는 매우 심각하다. 비를 맞아 흘러나온 PCB(인공합성화합물질)는 바다로 흘러들어가 마지막 단계인 생선에게, 결국에는 식탁에서 인간의 생명을 위협하는 원인물질이 된다(i 168). 인간은 모든 사물을 자신의 유익과 행복과 목적을 위해(인간중심주의, anthropocentrism)는 창조질서를 아랑곳하지 않고 마음대로 조작한다(i 169). 과학기술에 의지한 창조질서의 인위적 조작은 인간의 생명을 살리는 기능을 하기 보다 위협하고 있다(i 169). 조절되지 않는 인간의 탐욕과 창조주에 대한 교만은 장기적인 책임을 회피한 채 마음대로 창조물을 조작하고 있다.
 기독교인의 자세는 어떠해야 하는가? 그리스도의 희생인 복음은 인간으로 하여금 이웃 사랑의 마음을 갖도록 한다. 복음의 가치를 아는 사람은 세상의 미래에 대해 남다른 생각을 갖게 된다. 창조주 하나님께서 베풀어 주신 환경을 함께 공유할 후손들에 대한 사랑과 다음 세대 이웃에 대한 배려를 갖게 된다. 환경의 문제가 너무 심각하여 전지구적인 위험에 직면에 있는 지금은 복음으로 변화된 기독교인의 윤리관이 더욱 중요하고 귀하다. 이런 정신에 따라서, 기독교인들은 네덜란드의 기독교윤리학자 헤리트 마넨스케인(Gerrit Manenschijn)의 견해를 따라 “하나님의 질서를 어기는 행동은 반드시 거기에 상응하는 대가를 치루게 된다”(i 171)는 사실을 명심하고 생태 환경과 공존을 도모하는 방향을 선택해야 한다(i 171). 그러나 명심해야 할 것은 “기독교윤리가 아무리 중요해도 윤리로부터 기독교의 본질을 찾는다든지, 윤리를 승격시켜 신학화 한다든지, 생태계의 생명을 신격화하게 되면 범신론이라는 비평을 피할 수 없다.”(h 141)는 사실이다.

 5.5. 복음과 공동체 윤리
 윤리는 공동체 안에서, 공동체의 상황과 함께 고려되어야 한다. 어떤 행위가 그 자체로는 하나님 앞에서 아무런 흠이 없는 행위라 하더라도, 공동체 안에서 그 행위가 믿음이 연약한 다른 사람의 신앙성장에 방해가 된다면 그것은 그 공동체의 상황에서는 죄요, 따라서 절제하는 것이 좋다는 것이다. 이런 행위를 기독교윤리학에서는 ‘아디아포라’ 문제라고 한다. ‘아디아포라’ 문제는 그 자체는 아무런 문제가 없는데 상황에 따라서 죄가 될 수도 있고 죄가 되지 않을 수도 있는 문제를 뜻한다. 바울은 롬 13:1-15:13에서 고기 먹는 문제로 논쟁하던 로마 교회에게 다른 성도들의 입장을 존중하고 배려하는 사랑의 실천훈련을 함으로써 공동체의 화평을 도모하라고 권고한다. 바울의 권고처럼, 공동체 윤리에서는 특히 상대방을 향한 ‘배려’와 ‘친절’이 필요하다(b 131). 연약한 사람들을 위해 더 신중하게 행동하고 먼저 양보하는 자세가 공동체 윤리에 요구된다. 복음 앞에 서게 되면, 하나님께서 부족하고 연약한 인간을 얼마나 불쌍히 여기셨는가, 사랑의 손길로 연약함을 감당해 준 사람들의 배려를 깨닫게 된다. 복음이 준 은혜를 깊이 깨닫는 사람일수록 공동체 속에 있는 연약한 사람들을 위해 긍휼과 자비를 베풀게 된다. 이처럼 복음은 공동체가 공동체 되게 하는 힘이며 희망이다.
 

6. 맺으며 : “이웃사랑 정신이 그리스도의 형상을 이루기까지”

 우리는 이상에서 윤리적 행위를 수행하는 인간에 대해, 율법과 윤리에 대해, 복음과 윤리에 대해, 복음으로 변화된 기독교인의 윤리적 삶에 대해 살펴 보았다. 인간은 성경과 개혁주의 윤리학에서 말하는 것처럼 윤리적 행위를 수행할 능력이 없다. 절대적인 규범을 정하지 않을 때 인간이 어디까지 타락할 수 있는가를 역사는 말해 준다. 계시된 절대 규범은 성경에서 찾을 수 있다.
 기독교인의 윤리 실천은 ‘복음’에 기초하고 있지만 성경에서 발견되는 율법은 여전히 윤리적 삶의 규범이다. 한 시대만을 위한 규범이 아니라 모든 세대, 모든 인간을 향한 윤리 규범이다. 이 시대에는 율법이 더 이상 효력을 갖지 못한다고 하는 ‘반율법주의’도 잘못이지만, 율법이 시대를 오가는 절대 규범이라고 해서 율법주의에 얽매인 윤리적 삶도 제거되어야 한다.
 기독교인들은 윤리 실천의 시작과 과정과 평가에서 그 근거를 복음에서 찾는다. 복음에서 윤리가 시작되며, 이 복음은 선한 행위를 하다 지친 사람들의 마음을 ‘위로’하며 변함없이 윤리적 행위를 수행하도록 격려한다. 하나님의 자비의 마음을 풍성하게 깨닫게 하여 윤리 실천을 확장시킨다. 복음은 모든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자격없는 죄인임을 인식시켜 줌으로써, 직임 여부에 상관없이 윤리적 행위의 평가 대상에서 모두 평등함을 강조한다. 높은 자리에 있다고 해서 넘어가는 것을 복음적 윤리는 허용하지 않는다.
 기독교인들의 생활 윤리는 복음에서 출발하고 그 원리는 자기 희생을 통한 ‘이웃 사랑’에서 발견된다. 자기 고난을 통한 이웃 사랑의 정신은 ‘개인 윤리’에서는 ‘절제’, ‘겸손’, ‘진실’로 나타난다. 이웃 사랑은 사회(국가) 윤리, 환경 윤리, 공동체 윤리에서 기독교인들이 행해야 할 태도와 행동의 방향을 설정해 준다.
 그런데, 위에서 살펴 본 것과 같은 기독교의 “교리는 가슴속에 주업되어야 하며, 행위 안으로 옮겨져야 하고, 우리를 변형시켜 그 안에 몰입시켜야 하며, 열매로 증명되어야 한다.”(c 67) 기독교 윤리는 의무론적인 법칙주의에 머물지 않고,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반응으로 강도만난 이웃을 보고 “불쌍히 여기는 감정적 움직임”에서 시작된다(눅 10:25-37). 이웃을 향하여 고난을 감수하면서 그리스도처럼 희생하는, 생명력이 충만한 자비와 긍휼의 윤리다(d 91).  사도 바울도 기독교인의 믿음이란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 뿐”이라고 했다(갈 5:6). 복음에 담긴 이웃 사랑은 병자들과 죄인들을 불쌍히 여기신 예수님의 긍휼처럼, 이웃을 향해 실천되는 감정적 움직임이다. 이 사랑은 ‘자비의 마음’이며, ‘뜨거운 가슴’이며, ‘긍휼히 여기는 마음’이며, ‘배려와 친절’이다. 이웃에 대한 뜨거운 사랑이, 강도 만난 이웃을 위해 몸 바쳐 피흘리신 그리스도의 형상이 삶의 전 영역에서 이루어지기까지 실천되어 나타나야 한다(a 157). 여기에 개인과 공동체와 인류의 희망이 있다.

a : 이상원, [갈라디아서 강해집]
b : 이상원, "로마서 약해"
c : 이상원, "칼빈의 윤리학"
d : 이상원, "조나단 에드워드의 윤리학"
e : 이상원, "개혁주의 윤리학"
f  : 이상원, "개인윤리"
g : 이상원, "환경윤리"
h : 이상원, "급변하는 시대의 문턱에 서서"

출처 : 설교와 예화 모음
글쓴이 : 시원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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