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 글은 한국설교학회(회장 장창균 교수)가 2011년 11월 9일 서울 잠실동 남포교회에서 개최한 제14회 학술대회의 발제논문입니다. ‘이단사상에 대응하는 설교론’을 주제로 열린 이날 학술대회에서는 정창균 합동신학대학원 교수가 ‘신천지 이단의 성경해석과 설교적 대응’을, 이승진 실천신학대학원 교수가 ‘현대 신비주의 운동과 설교적 대응’을 주제로 각각 논문을 발표했습니다. 신천지 이단 문제로 고민하는 독자들에게 많은 도움이 되리라 사료됩니다. <편집자주> |
- 정창균 교수 / 합동신학대학원
Ⅰ. 들어가는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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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창균 교수 |
신천지 이단(신천지예수교증거장막성전)은 근래에 한국교회에 가장 큰 물의를 일으키며 주의를 집중시키고 있는 집단의 하나이다. 이단 상담의 90%가 신천지 이단과 연루된 문제로 인한 상담이라는 이단문제 상담가들의 보고만 가지고도 신천지 이단이 교회 안에 얼마나 중대한 문제를 일으키고 있는 단체인가를 가늠할 수 있다. 신천지 이단이 그동안의 다른 이단운동들과 특이한 점은 단순히 교인 개개인을 포섭의 상대로 하는 데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소위 ‘산 옮기기’라는 이름 아래 개별교회들을 신천지가 접수하는 것을 목적으로 삼고 신천지의 확장을 시도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 논문은 신천지 이단에 대한 전반적인 문제를 다루는데 목적이 있지 않다. 이 논문은 신천지 이단의 성경해석 문제에 초점을 맞출 것이다. 그리고 그에 대하여 우리 설교자들이 수행할 설교적 대응이 무엇인가를 나름대로 제안할 것이다. 1)
신천지 이단을 그들의 성경해석에 초점을 맞추어 다루는 것이 필요한 이유는 그들이 다른 어떤 이단들보다도 성경을 내세우며 자기들의 성경적 정당성을 주장하기 때문이다. 자기들의 성경해석만이 바른 해석이라고 주장하면서 신천지야 말로 성경중심의 참된 교회라는 선전을 통하여 신자들을 혼란케 하고 있다. 이만희는 정통과 이단의 논란의 기준은 성경이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자기들의 성경해석을 내세운다. 이만희는 자기의 입장과 주장을 성경해석을 내세우며 정당화 하는 것이다. 그리고 신천지야말로 참 교회라고 주장한다. 그는 신천지를 이단으로 규정하려면 성경을 가지고 와서 합당한 이유를 밝혀야 한다며 자기들의 성경해석에 대하여 자신만만해 한다. 2)
그러므로 신천지를 다루기 위해서는 그들의 성경해석에 초점을 맞추어 살펴보는 것이 필요하다. 그들이 성경이 그렇게 말한다고 하면서 그들의 교리의 근거로 삼고 있는 성경해석의 핵심 원리가 무엇인지, 그것이 과연 정당한 해석인지, 그들은 자기들의 말처럼 실제로 성경을 해석하고 있는 것인지에 대한 점검이 필요한 것이다. 신천지 이단에 대한 대응을 설교적 대응이라는 관점에서 제안하고자 하는 것은 ① 한 번에 가장 많은 대상에게 공개적으로 메시지를 전달할 수 있다는 점에서 설교가 갖고 있는 효용성과 ② 신천지 이단이 한국교회에 이렇게 치명적인 영향력을 발휘하며 확산되게 된 데는 그동안 한국교회 설교가 말씀을 충실히 선포하고 가르치는 일을 소홀히 해온 것이 한몫을 했다는 자책감 ③ 신천지의 가르침에 대응하는 설교가 제대로 수행된다면 신천지로 말미암아 한국교회가 직면하고 있는 이러한 혼란을 예방, 극복, 회복하는 일에 상당한 정도의 긍정적 기여를 할 수 있다는 기대감 ④ 그리고 설교자들이 신천지로 말미암은 문제를 어떻게 설교로서도 대응할 것인가에 대하여 관심을 갖고 기여해야 한다는 당위성 때문이다.
Ⅱ. 펴는 글
1. 신천지의 핵심교리
위에서 밝힌 바와 같이 이 논문은 신천지의 교리를 전반적으로 다루고 비판하는 데에 의도가 맞추어져 있지 않다. 그러나 신천지가 내세우는 교리들의 핵심이 무엇인지를 파악하고 규명하는 것은 필요하다. 왜냐하면 우리가 다루고자하는 그들의 성경해석의 문제는 교리와 상관없는 별개의 독립된 작업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사실 그들의 성경해석은 그들이 내세우고 주장하는 교리들의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한 결정적인 수단일 뿐이다. 엄밀히 말하면 그들의 교리는 성경을 해석 해본 결과로 형성된 교리가 아니며, 그들의 성경해석은 그들이 내세운 교리를 정당화하기 위하여 동원된 수단이라고 할 수 있다.
신천지의 교리를 구원론 교회론 삼위일체론 등등 조직신학의 항목 분류를 따라 분석하고 비판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논문에서는 그들의 성경해석 방법과 원리 등을 부각시키고자 하는 이 논문의 필요에 따라 첫째, 교주 이만희에 대한 주장의 핵심이 무엇인가? 둘째, 정통교회에 대한 주장이 무엇인가? 셋째, 그들의 비유풀이 해석을 정당화하는 그들의 성경에 대한 주장은 무엇인가로 크게 세 분야로 분류하여 그들의 주장의 핵심을 요약하고자 한다.
1) 교주 이만희에 대한 주장 소위 총회장이라 불리는 그들의 교주 이만희를 신적 존재로 높이는 것이 신천지 교리의 핵심이다. 모든 이단들이 언제나 그렇듯이 신천지도 그들의 교리나 가르침은 하나 같이 결국 교주인 이만희 중심적이며 또한 이만희를 지향하고 있다. 그들의 성경해석은 결국 그들이 주장한 이만희를 성경도 이렇게 말하고 있다는 것을 증명하여 드러내기 위한 과정으로 존재한다. 그러므로 성경 본문의 해석으로 시작한 그들의 해석은 어느 단계에 이르면 그럴 듯한 알레고리나 밑도 끝도 없는 비약, 혹은 거침없는 자의적인 해석을 자행하면서 결국 이만희를 자기들이 주장한 인물로 부각시키는 데로 나아간다. 그리고 그것을 근거로 이만희가 이끄는 신천지 집단의 특수함을 주장하는 데로 나아간다. 때로는 직설적으로 이만희를 언급하기도 하지만, 때로는 전략상 넌지시 이만희를 암시하거나 함축하는 방식을 취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것이 결국 이만희를 말한다는 것은 다른 곳에서 이만희를 말한 맥락에 비추어 볼 때도 의심할 수 없이 분명하다.
(1) 이만희 중심의 교리 기독교의 특성이 “그리스도 중심성”에 있다고 한다면 신천지의 가장 중요한 특성은 “이만희 중심성”이다. 이만희만이 계시를 받은 유일한 한 목자이다. 그러므로 이만희만이 성경을 제대로 해석할 능력과 권위를 가졌으며, 그만이 참되고 유일한 성경의 해석자이다. 아래에서 신천지의 성경해석의 틀을 논하면서 언급하겠지만, 그들의 시대구분과 그 시대의 중심인물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이만희는 실질적으로 예수를 대체하는 존재이다. 이만희는 신천지의 홈페이지에 올린 글에서 자신에 대하여 이렇게 공공연히 선언한다.
“예수께서 열린 책의 말씀과 예언을 이룬 것을 오직 희(熙)에게만 보여 주고 지시하셨기에, 온 세계 중에서 희(熙)만이 신약의 성취에 대해 증거 할 수 있다(계 1:2, 22:16 참고). 이 시대가 연고 없이 그를 미워하고 핍박하겠으나, 만일 다른 목자가 와서 증거 하면 그들은 핍박하지 않고 받아들였을 것이다(요 15:23~25, 요 5:43 참고).” 3)
그는 참람하게도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말씀을 바로 자기 자신에게로 연결하여 적용하고 있다. 그는 또한 이렇게 말하기도 한다.
“영이신 하나님께서 초림 예수님과 함께 하셨듯이 영으로 오시는 재림 예수님은 사도 요한의 입장에 있는 목자와 함께 역사하신다. 그러므로 예수님께 권세 받고 예수님을 증거하며 예수님을 대신하여 행하는 목자를 찌르는 것은 재림 예수님을 찌르는 자가 된다.” 4)
여기서 “사도 요한의 입장에 있는 목자”는 다른 곳에서 “사도요한격 목자” 혹은 “새요한”이라고 칭하는 자로서 바로 이만희 자신을 가리키는 칭호이다. 그를 찌르는 자는 재림 예수님을 찌르는 자가 된다고 말하여 자기를 최소한 재림 예수격의 존재로 주장하는 셈이다. 이만희 중심적 교리는 곧 그가 이긴 자로서 창조한 12지파라고 주장하는 신천지 집단 중심성을 수반한다. 그는 신천지에만 구원이 있으며 신천지만이 참교회라고 주장한다. 신천지가 바로 계시록이 말하는 증거장막인 것이다. 그러므로 그는 이렇게 단호히 말한다.
“신약성경에 약속한 성전은 만국이 가서 경배해야 할 증거장막 성전이다. 이 성전 또한 시대적인 시각으로 볼 때는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없어진 후 창조되는 새 하늘과 새땅(신천지)으로, 교명으로 말할 때는 장막성전에서 있었던 일을 증거하는 증거장막성전으로, 하나님 나라로 부를 때는 영적 이스라엘이 끝난 후에 창조하는 영적 새 이스라엘 12지파로, 예수님이 강림하실 곳으로는 영계의 시온인 새 예루살렘 성이 임하는 시온산 또는 어린양의 혼인 잔칫집이라고 한다. 계시록이 응할 때 이 모든 이름을 가지게 된 목자와 교회가 바로 하나님의 이름과 새 예루살렘 성의 이름과 예수님의 새 이름을 기록 받고 예수님의 보좌에 앉아 만국을 다스리는 약속한 목자와 그가 인도하는 성전이다. 이것이 실상으로 이루어졌다면 가히 사람이 만들어낼 수 없는 성령의 은사가 아니겠는가!” 5)
신천지의 홈페이지 “진짜 바로알자 신천지”사이트의 글 가운데 “각 교단의 주장과 믿음”이라는 제목으로 올려진 글은 여기서 말한 것이 구체적으로는 과천, 신천지 증거장막성전, 그리고 교주 이만희를 염두에 두고 한 말이라는 것을 짐작케 한다. 이 글은 각 교단이라는 이름으로 신천지 이외의 교회를 비판한 다음, “회개하고 성경이 말한 약속의 목자 이긴 자와 그의 교단 증거장막성전의 12지파를 찾아 새 노래를 배워야 한다”고 결론짓고 있다. 6)
(2) 이만희에 대한 칭호들 신천지 이단의 이만희 중심성은 이만희에게 붙여진 칭호들에 명백히 드러나 있다. 이만희는 다양한 칭호를 자신에게 붙인다. 다른 보혜사, 이기는 자, 언약의 목자, 예수의 새 이름을 받은 자, 책 받아먹은 자, 언약의 목자, 예수님의 새 이름을 받은 자, 사도 요한격 선지자, 새 요한 등등이 그것이다. 사도요한격 선지자나 새 요한과 같은 칭호는 성경에도 없는 엉뚱한 칭호이지만 이만희가 자신을 높이고 자신의 특별한 역할을 강조하려는 의도로 만들어낸 칭호이다. 어떤 이는 신천지에서 이만희를 지칭하는 것으로 보이는 칭호 31개를 선별하여 제시하기도 하였다. 7)
이만희는 성경에 있는 특별한 칭호들을 빌어오거나 혹은 특정의 상황을 묘사한 칭호를 만들어 자신이 바로 그 존재라는 것을 주장하기 위하여 자신의 칭호로 사용한다. 그런가하면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사도 요한격 선지자나 새 요한 등 성경에도 없는 새로운 용어를 만들어 붙여서 성경적 칭호인 것처럼 사용하기도 한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신천지에서 이만희는 진리의 전달과정에 있어서 그를 통하여만 진리를 알 수 있는 자요(사도 요한격 선지자), 그를 통하여만 구원에 이를 수 있는 자요(이긴 자), 신약시대에 모두 예수님의 말씀을 들어야 했듯이 재림을 앞둔 시대에는 모두가 그의 말을 듣고 순종해야 되는 자요(보혜사), 14만 4천명을 뽑는 자요, 보좌에 앉은 자요, 구원을 받기 위하여 사람들이 영접해야 할 자이다. 그는 모든 권세를 손에 쥔 신적 존재인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신천지에서는 “천하만국은 요한계시록 10장에 기록한 열린 책을 받아먹은 약속한 목자 앞으로 나아와 진리의 말씀을 배우고 소성 받아 하나님과 예수님께 감사와 영광을 돌려드려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존재이다.
여기서 말하는 “열린 책을 받아먹은 약속한 목자”는 바로 이만희를 지칭하는 것임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또한 신천지의 한 집회 동영상에서는 인도자가 “이 시대에 보낸 언약의 목자 우리 총회장님을 영접하지 못했으면 어쩔 뻔 했어요? 큰일 날 뻔 했지요? 아무리 믿어도 헛된 믿음이지요?”하고 외치고, 청중은 큰소리로 아멘을 부르짖으며 열광함으로 총회장인 이만희가 구원을 얻기 위하여 영접해야 되는 믿음의 대상으로 높여지고 있다. 또한 “예수님을 이전에는 못 뵈었지만 우리는 선생님을 통해 이렇게 뵙고 있습니다. 예수님 영광을 위해 육으로 오신 우리 총회장님. 영원한 보혜사로 우리를 끝까지 이끌어 주실 줄 믿습니다”라고 이만희를 육신으로 온 예수님, 영원한 보혜사로 높이며 찬양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일이 되고 있다. 8)
2) 정통교회에 대한 주장 신천지에서는 다양한 이미지를 동원하여 정통교회에 대한 자기들의 입장을 표현하는데 그것들은 크게 두 가지 비유적 표현으로 대표된다. 하나는 “영적 바벨론”이라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두 종류의 씨앗이 뿌려져 있는 밭”이라는 것이다.
(1) 영적 바벨론 신천지의 정통 교회에 대한 입장은 매우 분명하고 단호하다. 정통교회는 영적 바벨론 혹은 이방 바벨론이라는 것이다. 이것을 때로는 귀신의 나라, 마귀의 조종을 받는 자, 배교자라고 바꾸어 말하기도 하는데, 이러한 비유적 표현을 통하여 그들이 강조하고자 하는 바는 정통교회는 진정한 교회가 아니며, 그곳에는 계시가 주어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들이 정통교회를 이런 점에서 특히 강조하는 의도는, 그러므로 정통교회에는 구원이 없다는 것과, 정통교회는 성경을 제대로 해석할 능력도 근거도 없으며 정통교회의 성경해석은 모두 참된 해석이 아니라는 것을 강조하는 근거를 삼기 위함이다. 그들은 정통교회는 계시를 받은 적이 없기 때문에 성경을 제대로 해석할 수 없다고 단언한다.
“국내외 목자들의 성경에 대한 해설(주장)이 잘못이라 하더라고 그것이 당연하게 여겨지는 것은 계시를 받지 못한 상태에서 해설한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인봉된 책을 열어주지 않았으므로 그들은 사람의 계명으로 말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9)
정통교회는 사단의 지배를 받고 있으며, 마귀의 영에게 조종을 받는다고 주장한다. 그러면서 신천지에만 계시가 주어졌고 이만희가 바로 그 계시를 받은 유일한 한 목자라고 주장한다. 그리고 그것을 신천지의 성경해석만이 참된 해석이라고 주장하는 근거로 제시하는 것이다. 신천지 총회교육부에서 발행한 내부 교육용 책자에서는 신약의 계시 곧 계시록에 대한 증거는 계시를 받은 이 한 목자만이 알게 되고 증거할 수 있다고 하면서, 계시를 받은 약속의 목자가 아닌 목자들이 계시록을 증거한다는 것은 잘못된 것이며, 그 증거가 맞지 않으며, 가라지 씨를 뿌리는 것이 되며, 선악과 곧 음행의 포도주를 먹이는 행위가 될 것이라고 한다. 그리고 성도는 말세에 이방 바벨론에서 나와 계시의 말씀에 대한 증거를 받아 구원에 이르러야 된다고 주장한다. 10)
이만희는 그들의 해석을 따르지 않는 것은 마귀의 조종을 받기 때문이라고 단언한다. 그는 아래와 같이 단언한다. 그가 여기서 말하는 “만국”이란 신천지를 따르지 않는 정통교회를 말하는 것이다. 그리고 계시록에 약속한 이긴 자 혹은 열린 책을 받아먹은 약속한 목자란 이만희를 지칭하는 것이다.
“오늘날 만국은 사단의 역사로 홀연히 미혹되어 부패하였으며 성경과는 다른 배도의 길을 가고 있다. 그 원인은 성도뿐 아니라, 성도를 가르치는 목자와 목자를 가르치는 신학교에 진리의 말씀이 없기 때문이다” 11)
“계시록이 응하고 있는 오늘 날은 계시록에 약속한 이긴 자(계 2~3장, 21:7)를 통하지 않고는 구원이 없다. 이를 부인하는 사람은 예수님과 그 말씀을 믿지 않는 자이며 마귀의 영에게 조종을 받는 자이다. 천하만국은 계시록 10장에 기록한 열린 책을 받아먹은 약속한 목자 앞으로 나아와 진리의 말씀을 배우고 소성 받아 하나님과 예수님께 감사와 영광을 돌려드려야 한다.” 12)
(2) 두 종류의 씨앗이 뿌려져 있는 밭 그들은 정통교회를 가라지와 알곡의 두 종류의 씨앗이 뿌려져 있는 밭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므로 그 밭에서 알곡을 추수해야 하며, 그것이 열두지파로 창조된 신천지의 사명이라고 주장한다. 이만희가 말하는 열두지파란 니골라당과 싸워 이긴 목자가(계 2~3장, 12장) 동서남북에서 성도들을 모아 창조한 영적 새 이스라엘을 말하는 것으로, 여기서 그들이 말하는 이기는 목자는 이만희를 말하며, 영적 새 이스라엘이라는 열두지파는 이만희가 만든 신천지를 말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단호하게 말한다.
“계시록이 성취되는 추수 때(계14장)는 교회와 목자와 성도가 다 끝이 나기에 오직 천국 곳간인 시온산으로 추수되어 가야 한다. 이때 추수 되어 가지 않고 자기 교회에 남아있는 자는 가라지 단에 묶여 있는 자이다. 가라지 단에 묶여 있는 자는 목자든 성도든 다 구원받지 못한다.” 13)
교회를 영적 바벨론으로 단정 짓는 것이 신천지에만 구원이 있다는 배타성과 신천지만이 성경을 참되게 해석할 수 있다는 성경해석의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한 것이라면, 두 종류의 씨앗이 뿌려진 밭으로 보는 이것은 그들이 정통교회 안에 있는 신자들을 미혹하여 신천지로 이끌어내며, 또한 산옮기기라는 이름으로 자행하는 정통 교회에 대한 미혹과 공격을 정당화하는 근거를 확보하기 위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그들에게 기존 교회의 신자들을 신천지로 빼오는 것과 기존의 교회들을 무너뜨리고 신천지로 옮기는 것은 죄책감이나 떳떳치 못한 일이 아니라, 진정으로 구원받은 14만 4천명을 채우는 사명 수행의 일이 되는 것이다.
3) 성경에 대한 주장 (1) 성경은 비유다 해석의 대상으로서 성경에 대한 이만희의 입장은 “비유풀이”라는 한 마디에 잘 표현되어 있다. 성경의 해석은 곧 비유풀이의 작업이라고 그는 보고 있다. 그가 말하는 비유풀이는 예수님이 베푸신 비유를 비롯한 성경의 이곳저곳에 등장하는 비유들을 해석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성경이 곧 비유라는 의미이다. 이것은 그러므로 그의 성경관을 말하는 것이기도 하다. 성경이 비유로 말하는 방식을 취하고 있어서 성경을 해석한다는 것은 곧 비유를 푸는 것이라는 의미이다. 그러므로 그는 이렇게 말한다.
“성경의 하나님 말씀은 육적인 것처럼 보이나 비유를 베푼 것인데, 사람들이 문자에 매여 육적으로 해석하므로 하나님을 모른다.”14)
성경은 비유이며 성경을 해석한다는 것은 곧 비유를 풀이하는 것이라는 입장을 취함으로써 이만희는 본문을 언제나 영적으로 무엇을 말하는가, 육적으로 무엇을 말하는가를 묻는 방식으로 풀어나간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온갖 알레고리 해석과 비약과 극도의 자의적 해석들을 거리낌 없이 행한다. 문자적 해석이 본문해석의 가장 기본적이며 본문해석의 기초 상식임에도 그는 그것을 육적인 해석으로 치부하며 황당한 본문 해석을 일삼는다. 그에게 그것이 가능하도록 정당성을 부여하는 것이 성경은 비유를 베푼 것이라는 그의 성경에 대한 입장이다. 비유풀이를 위하여 사용하는 방법이 소위 말씀의 짝짓기 해석이며, 그는 말씀의 짝을 찾아서 푸는 것이 성경적이라는 근거로 이사야 34장 16절을 제시한다. 그러나 다음에 비유풀이에서 자세히 살피듯이 그의 이러한 근거는 그야말로 무식에서 온 전혀 근거 없는 주장이다. 이사야 34장 16절은 말씀이 아니라, 짐승의 짝을 가리켜 말한 것이기 때문이다.
(2) 예언과 실상론(환상계시와 실상계시) 이만희는 성경(계시록)은 장래 이루어질 일을 미리 알려준 기록된 예언 혹은 환상으로 주어진 계시인데, 그것은 그 예언 혹은 환상계시가 실제로 이루어졌을 때에 그 실상을 보기 전까지는 해석을 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그는 성경을 예언과 실상 혹은 환상계시와 실상계시로 구분한다. 그가 이렇게 구분하는 의도는 실상계시를 본 자 혹은 실상계시를 받은 자라야 성경을 해석할 수 있다는 이것을 주장하려는데 있다. 그리하여 이만희야말로 실상계시를 받은 유일한 자이고, 따라서 이만희만 성경을 참되게 해석할 수 있는 유일한 자라는 주장으로 나아가기 위한 것이다. 다음과 같은 그의 말은 계시를 이렇게 구분하는 궁극적 목적이 어디에 있는가를 명백하게 드러내 보여주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를 기록한 요한계시록은 장래 이룰 일을 미리 알린 예언서이므로 그 성취 때 약속한 말씀대로 나타날 실상을 입증하는 증거서류와도 같다. …계시록의 말씀은 기록한 실상이 나타나지 않았기 때문에 그동안 어느 누구도 참뜻을 해석하지 못했다. 그러나 이제 성취 때가 되어 계시록의 예언이 홀연히 이루어졌으므로 필자는 그 실상을 직접 보고 성령에게 설명 들은 대로 낱낱이 증거하려 한다.” 15)
그는 그가 쓴 책 <천국의 비밀 요한계시록의 실상> 머리말 초두에 이렇게 선언하고 있다.
“약 이천년 전 사도 요한은 당시 터키 밧모섬에서 예수님의 계시를 ‘환상’으로 보고 요한계시록을 기록하였고 오늘 날 필자는 주께서 약속하신 예언이 ‘실상’으로 응한 것을 보고 ‘성령에게 설명 들은 대로’ 본서에 기록하였다. 그러므로 이 책의 해석과 실상이 참임을 증거하는 바이다.” 16)
그는 사도 요한은 환상계시를 받았고, 자기는 실상계시를 받아서 사도요한이 알 수 없었던 것을 드디어 이만희 자신이 밝히는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위와 같은 주장을 근거로 신천지 총회 교육부에서 발행한 <성경에 대한 계시와 주석>이라는 책은 요한계시록 본문에 대한 다양한 주석들의 해석을 모아놓고 그 옆에 신천지의 바른 증거라는 이름으로 이만희의 해석을 대조시키는 방식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만희 이외의 다른 모든 학자나 목회자들의 요한계시록 해석은 “주석”일 뿐이고, 이만희의 해석은 “계시”이며, 그렇게 때문에 이만희의 해석만이 유일한 바른 해석이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2. 신천지 이단의 성경해석의 궁극적 목적
앞에서 이미 언급한 바와 같이 신천지의 성경해석은 궁극적으로 이만희를 부각시키는 데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우리는 이 전제를 기억하고 신천지의 교리나 성경해석을 대할 필요가 있다. 때로는 매우 간접적이고 또 암시적인 방식을 취하면서 직접 이만희를 언급하지 않는 전략적인 방식을 취하지만 그것이 이만희를 가리키고 있다는 것은 의심할 수 없이 분명하다. 예를 들어 이긴 자, 사도 요한격의 목자, 언약한 목자, 펼쳐진 책 받아먹은 자 등을 힘주어 강조하면서 그것이 이만희라고 직접 말하는 적은 거의 없다. 그러나 그가 말하는 맥락이나 다른 곳에서의 주장 등을 염두에 두고 대할 때 그는 지금 이만희를 염두에 두고 그러한 주장을 하고 있다는 것이 명백해진다.
그러므로 신천지 이단의 성경해석의 궁극적 목적은 신천지의 교주인 이만희 중심적 교리 혹은 신적존재로서의 이만희에 대한 주장을 정당화 하는데 맞추어져 있다. 아무리 처음에는 정통교회와 별다름이 없는 진술과 정통교회에서 해온 것과 같은 말로 성경에 대한 진술로 시작하였다 하여도 결국 도착하는 결론은 이만희가 누구인가, 왜 이만희가 옳은가, 왜 이만희를 따라야만 하는가, 왜 그가 창설한 집단을 따라야만 하는가 등 자기들의 이만희 중심 교리를 정당화 하는 데로 나아가는 것이다. 이것을 위하여 그들이 취하고 있는 성경해석의 기본적인 틀과 구체적인 성경해석 방식, 그리고 그들이 구사하는 해석적 전략을 아래에서 살펴보고자 한다.
3. 신천지의 성경해석의 기본 틀과 해석 방법
1) 시대 구분을 통한 예수님과 이만희 사이의 유비적 해석 신천지는 시대별로 구원자가 있으며 지금 이 시대는 이만희를 믿어야 구원을 받는다고 주장한다. 그는 이렇게 주장한다.
“신구약 성경은 하나님께서 시대마다 한 목자를 세워 대언자로 삼으시는 것과 한 세대가 가고 다른 한 세대가 오는 것을 말하고 있다. 초림 예수님 때 육적 이스라엘이 끝나고 영적 이스라엘이 창조되었듯 세상 끝인 오늘날은 영적 이스라엘이 종말을 맞고 영적 새 이스라엘이 시작되었다. 계시록은 예수님 초림 이후의 세계가 끝이 나고 도래한 영적 새 이스라엘 곧 신천지 세계를 알린다.” 17)
위에서 본 바와 같이 이만희는 역사를 세 시대로 구분한다. 구약과 신약 그리고 재림의 때이다. 물론 구약시대와 신약시대 그리고 재림으로 대표되는 종말의 시대로 역사를 구분하는 것은 정통교회의 보편적인 시대 구분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가 시대를 이렇게 구분하는 목적은 역시 이만희 중심의 역사관을 확립하기 위함이다. 그는 구약은 그리스도 한 분에 대하여 증거 한다고 한다. 이러한 주장은 예수님의 말씀 곧 “모세와 선지자 곧 구약이 나를 증거한다”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에 근거한다. 그러면서 예수님이 오심으로 그 구약이 성취되었다고 한다. 즉 구약은 예수님을 가리켰고, 그래서 예수님이 오셨다. 그래서 신약이 시작되었다. 그렇게 오신 예수님 곧 신약은 재림을 예언하였다고 한다. 이러한 주장은 성경과 일치하는 것으로 문제가 없다.
그러나 이만희는 이 대목에서 곁길로 나아간다. 신약은 재림 때 올 약속의 목자 한 분을 증거한다고 슬쩍 다른 길을 택하는 것이다. 신약의 예수님이 재림의 때를 향하여 증거 한 것은 약속의 목자라 불리는 어느 한 존재가 아니고, 예수님 자신에 대한 증거인 것이다. 그 예수님이 오시고 그 예수님이 심판하시고, 그 예수님이 역사를 다스리시는 것이다. 그러나 이만희는 예수님은 오셔서 약속한 목자와 하나가 되시고, 재림 때의 모든 사역은 약속의 목자라 불린 그 사람이 수행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이만희라고 주장하려는 것이다. 예수님의 초림 사건과 오셔서 행한 사역과 당하신 핍박 등을 부각시키는 것은 재림 때를 위하여 예언된 언약의 목자인 이만희가 어떻게 예수님과 같은 존재인가를 설득력 있게 보여주는 유비로서 동원되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의구심을 갖게 한다.
이만희는 자기가 정통교회들에게 받는 비판 등을 의도적으로 예수님이 오셔서 받은 핍박과 동일화하곤 한다. 신천지 이단의 가장 중요한 교본이라고 할 수 있는 <요한계시록의 실상>에서 이만희는 “구약성경 39권이 구원자이신 예수님 한 분을 증거하는 것이라면 신약 성경 27권은 니골라당과 싸워 이기는 자 한 사람을 알리는 것”이라고 단정한다(36쪽). 그가 이기는 자에게 이렇게 비중을 두어 강조하는 것은 “이기는 자를 통하지 않고는 영생도 천국도 얻을 수 없고 예수님께 올 수도 없다”는 말을 하기 위해서이다(36쪽).
그는 심지어 이렇게 말하기도 한다.
“그러므로 구약 39권은 초림의 약속한 목자 예수님 한 분을 증거한 것이며 신약 27권은 재림의 약속한 목자 곧 이긴 자 한 사람을 증거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초림 때 예수님이 하나님과 함께 구약성경을 들어 자기 자신을 증거했듯(요 8:16~18) 재림 때 약속한 목자는 예수님의 영과 하나가 되어 신약 성경에 여러 모양으로 예언된 자기 자신을 증거한다.”(500).
그는 심지어 “계시록이 응하고 있는 오늘 날은 계시록에 약속한 이긴 자를 통하지 않고는 구원이 없다. 이를 부인하는 사람은 예수님과 그 말씀을 믿지 않는 자이며 마귀의 영에게 조종을 받는 자”라고 단정 짓는다(37쪽). 그리고 그가 이기는 자와 그의 권세를 이렇게 강조하는 것은 이만희가 바로 이 이기는 자라는 결론으로 사람들을 끌고 가려는 목적 때문이다. “이기는 자”는 신천지에서 가장 중요하게 그리고 반복적으로 강조하는 이만희의 칭호 가운데 하나이다. 이것은 요한계시록이 말하는 이긴 자인 이만희를 통하지 않고는 영생도 천국도 없다는 것을 주장하기 위해서이다.
“이기는 자”는 결국 이만희 자신을 지칭하는 것이다. “구약성경은 예수님을 증거하고 신약성경은 이기는 자 한 사람을 증거한다.”는 그의 전제는 물론 터무니없는 자의적 주장이다. 구약성경도 예수님 한분을 증거하고 있고, 신약성경도 역시 예수님 한분을 증거하고 있다. 그리고 일곱 교회에 보내는 편지들이 강조하고 있는 계시록 2~3장의 이기는 자가 특정의 한 개인을 말하는 것도 아니라는 것은 본문을 얼핏만 살펴보아도 알 수 있는 사실이다. 그럼에도 신천지는 이만희를 신적인 차원으로 끌어올려 높이기 위하여 성경을 왜곡하고 있는 것이다. 이만희가 재림 때 약속한 목자라는 근거를 예수님이 그에게 오셔서 하나가 된다는 것으로 삼고 있는데 재림 때 예수님은 어느 특정의 개인을 향하여 오시지 않는다는 것은 성경의 기초만 알아도 확실해지는 사실이다.
“초림 때 약속한 하나님은 빠른 구름을 타고 예수님에게 오시어 하나 되고, 예수님은 하나님께 받은 계시를 약속대로 이방에게 사로잡힌 이스라엘에게 전하셨다. 이와 같이 재림 때는 예수님이 구름을 타고 약속의 목자에게 오시어 하나가 되고, 그 목자는 예수님께 받은 계시를 약속한대로 이방신에게 사로잡힌 영적 이스라엘에게 전한다. 이 때 이방신에게 속한 목자는 초림 때와 같이 또 약속의 목자를 핍박한다.” 18)
이 진술의 의도는 명백하다. 약속의 목자는 물론 이만희를 가리키는 것이고, 이방신에게 사로잡힌 영적 이스라엘과 이방신에게 사로잡힌 목자는 정통교회를 가리키는 것이다. 초림 때 약속한 목자는 예수님이고 재림 때 약속한 목자는 이만희이다. 초림 때 예수님이 오셔서 핍박을 받았는데, 이만희도 지금 이방신에게 속한 목자에게 핍박을 받는다. 그러므로 재림 때의 약속한 목자(이만희)는 초림 때 오신 예수님과 모든 면에서 같은 신분, 같은 역할을 하는 자이다.
이 논리대로 하면 이만희는 실질적으로는 예수님을 대체하는 자가 된다. 구약이 증거하던 한 분으로 오신 예수님은 초림으로 오셔서 재림 때 올 약속의 목자 한 분을 증거 한 것이고, 그 한 분이 바로 이만희이다. 예수님은 구름타고 약속의 목자에게 오셔서 하나가 된다. 예수님이 이만희가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만희는 예수님을 대체하는 자이다. 예수님은 구약과 그리고 이만희 사이에서만 그 역할이 있는 셈이다. 그러나 재림 때 예수님은 어느 한 사람을 향하여 오시지 않는다.
2) 환상계시와 실상계시론 이만희는 계시를 두 종류로 구분하면서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계시는 두 가지로 구분한다. 하나는 장래 이룰 일을 이상으로 미리 보여주는 ‘환상계시’이며 다른 하나는 약속한 예언을 실물로 이루어서 보여주는 ‘실상계시’이다. 환상계시는 이룰 실상에 대해 증거하기 위해 필요한 청사진과 같다. 약 이천년 전 사도 요한이 밧모섬에서 본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는 환상계시이다. 당시 요한은 성령에 감동되어 환상으로 예수님의 계시를 받아 기록했지만 그 예언이 언제 이루어지는지, 실체가 무엇인지는 몰랐다. 다만, 예수님께서 환상으로 보여주신 계시를 기록했을 뿐이다. 그러나 정한 때가 되면 비유와 비사로 감추어둔 예언 속의 인물과 사건이 이 땅에 실상으로 나타난다. 그 때 예수님께서는 예언대로 나타난 실상을 보여주시고 들려주시니 이것이 바로 실상 계시이다. 이와 같이 실상 계시는 예언이 응할 때 나타난다. 그러므로 계시록이 응할 때에는 이미 죽은 지 오래인 사도 요한이 이 땅에 살아나서 자신이 기록한 말씀과 그 실상을 전하는 것이 아니라, ‘사도 요한과 같은 입장의 목자’가 나타나 실상 계시를 듣고 증거 하게 된다. 계시록 성취 때 필요한 계시는 계시록 전장에 약속한 말씀대로 나타난 사건을 증거하고 알려주는 실상계시이지 환상계시가 아니다. 그러므로 계시록 성취 때에는 모든 성도가 사도 요한의 입장으로 오는 대언의 목자에게 계시록의 실상을 증거 받아야 한다.” 19)
이만희가 이렇게 주장하는 일차적인 목적은 사도 요한의 입장으로 오는 대언의 목자에게 계시록의 실상을 증거 받아야만 계시록을 알 수 있다는 말을 하려는 데 있다. 그리고 사도 요한격의 대언의 목자는 실상계시를 받은 단 한사람뿐인데, 그가 바로 이만희라는 것이 이들이 이르고자 하는 결론인 것이다. 계시를 환상계시와 실상계시 혹은 예언과 실상 등으로 구분하는 것은 성경 어디에도 없는 자의적인 구분으로 이만희가 자신만의 독특성을 주장하기 위하여 만들어낸 인위적이고 자의적인 구분인 것은 물론이다. 실제로 이만희는 이 주장을 근거로 정통교회는 실상계시를 받지 못하였으므로 그들은 계시를 해석할 수 없고, 그들의 해석은 거짓이고 틀린 것이며, 오직 실상계시를 받은 이만희와 그가 이긴 자로서 창조한 열두지파인 신천지에만 참된 해석과 구원이 있다는 주장을 펴는 것이다.
3) 비유풀이 (1) 비유풀이의 전제와 의미 이미 지적한 바와 같이 신천지는 성경은 비유를 베풀어 놓은 것이라고 전제한다. 그러므로 신천지가 말하는 비유풀이란 예수님의 비유 등 성경에 나타난 문학적 장르로서의 비유들을 해석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들에게는 성경을 해석한다는 것은 곧 비유를 풀이하는 것이 된다. 성경은 비유를 베풀어 놓은 책이라는 전제에 입각하여 그들의 성경해석에 있어서 핵심이 되는 두 가지 틀을 구축한다.
첫째, 비유를 해석할 수 있는 사람이 오직 한 사람 이만희라는 주장이다. 그들은 성경은 비유라고 전제하고, 이렇게 비유로 베풀어 놓은 것은 사람들로 하여금 알 수 없도록 하기 위해서라는 주장으로 나아간다. 이것은 예수님이 씨 뿌리는 비유를 하신 다음 제자들에게 “천국의 비밀을 아는 것이 너희에게는 허락되었으나 저희에게는 아니 되었나니…”라고 하신 말씀을 자기들의 필요대로 끌어 붙여서 작성한 주장이다. 이로부터 그들은 성경의 모든 말씀은 비유인데 성경의 말씀이 비유라는 것은 그 뜻이 봉함되어 있다는 것이며, 그러므로 그 봉함된 것을 풀어주어야만 알 수 있다는 것으로 논리를 전개한다. 그리고는 그것을 풀어줄 수 있는 자는 그 실상 혹은 실체를 받은 자만이 할 수 있다고 하며, 그렇게 할 수 있는 사람은 한 사람 뿐이라고 주장하여, 이만희를 내세우고, 이만희가 창설한 신천지에서만 봉함되어 있는 그 비유가 풀린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신천지 이외의 다른 모든 해석들은 실상을 보거나 받거나 먹지 않은 자들이 한 것으로서 거짓이라고 하여 정통교회들의 성경해석을 부정한다. 성경은 비유라는 전제도, 비유에 대한 예수님의 말씀은 성경의 모든 내용이 모두에게 봉함되어 있다는 의미라는 확대 해석도, 봉함되어진 성경을 풀어줄 수 있는 한 사람이 있어서 그 한 사람을 통해서만 성경의 진리를 밝히 알 수 있다는 주장도 전혀 근거 없는 자기주장일 뿐이다.
성경은 비유라는 전제를 내세우면서 그로부터 신천지가 구축해내는 두 번째 해석의 틀은 그들이 영적인 해석이라는 미명아래 행하는 모든 자의적, 풍유적 해석들을 정당화 하는 것이다. 그들은 성경은 비유를 베풀어 놓은 것이라는 전제를 내세워 문자적인 성경해석을 배격한다. 문자적으로 성경을 해석하는 것을 오히려 성경을 육적으로 해석하는 것이며 그렇게 해서는 하나님을 모른다고 주장한다. “성경의 하나님 말씀은 육적인 것처럼 보이나 비유를 베푼 것인데, 사람들이 문자에 매여 육적으로 해석하므로 하나님을 모른다.”<(성도와 천국>, p.26)고 주장한다. 이러한 그들의 주장은 성경을 영적인 해석이라는 미명아래 얼마든지 알레고리로 혹은 자의적으로 해석하여 성경의 의미를 왜곡하는 것을 정당화하는 터전을 마련하는 역할을 한다.
(2) 비유를 푸는 구체적인 방법-짝 찾기 이만희가 비유풀이를 행하는 구체적인 방법은 각 단어의 짝을 찾아 그 짝에 의하여 풀어나가는 소위 짝짓기에 의한 풀이(해석)이다. 그리하여 성경의 주요 낱말마다 그 낱말이 가리키는 실체가 짝으로 정해져 있고, 그 단어는 언제나 그것을 가리키는 것으로 풀이를 한다. 예를 들어 계시록 풀이에서도 “계시록의 예언은 신구약 성경의 인명과 지명, 동물과 식물, 하늘과 땅 등을 비유하여 기록되었으므로 그 실체가 무엇인지” 알아야 해석을 할 수 있다고 전제한다. 그리하여 각 명칭이 가리키는 실체를 확정해둔다.
예를 들어 해·달·소·말·문·나팔·인·대접은 목자와 전도자가 그 실체이며, 별·신부·그릇·나무·양·풀·곡식·열매는 성도를 말한다. 그리고 하늘·배·산·섬은 교회가 그 실체이므로 그 단어가 등장하면 그것은 교회를 말하는 것으로 풀어야 한다는 것이다. 물·포도주·떡·만나·과실·불·우박·금·은·진주·보석 등은 말씀을 가리키며, 신랑은 영, 신부는 육, 세마포는 옳은 행실, 두루마기는 마음, 짐승은 사단의 목자, 금잔은 거짓 목자의 주석, 영적 새 이스라엘 열두지파나 시온산은 하나님의 나라를, 새 노래는 새 말씀을 말한다고 주장한다. 20)
(3) 짝 짓기 비유풀이의 근거 이들은 성경의 단어들은 비유로 쓰였으며 그 단어들이 실제로 가리키는 실체들이 있다고 주장한다. 그리하여 특정의 단어들을 1:1로 대입할 실체들을 짝이라고 이해하는 것이다. 결국 그들이 비유를 푼다는 말은 곧 그 말이 가리키는 실체를 그 단어에 대입하는 작업을 말한다. 그리하여 결국 그들의 비유풀이란 이미 결정해놓은 소위 짝을 찾아 기계적 혹은 획일적으로 대입하는 방식이다. 이러한 성경 해석은 최악의 알레고리적 해석보다도 더 심각하게 성경을 왜곡할 수 있는 위험하고도 어이없는 본문 해석 방법이다. 그것은 엄밀히 말하면 본문 해석 방법이 아니라, 본문 왜곡, 본문 이탈 방법이라고 하는 것이 더 적합할 것이다.
신천지가 이렇게 말씀의 짝을 찾아서 성경을 풀어내는 것이 성경적이라는 근거로 내세우는 것은 이사야 34장 16절이다. “너희는 여호와의 책에서 찾아 읽어보라. 이것들 가운데서 빠진 것이 하나도 없고 제 짝이 없는 것이 없으리니 이는 여호와의 입이 이를 명하셨고 그의 영이 이것들을 모으셨음이라”, “제 짝이 없는 것이 없다”는 말씀이 이들의 짝짓기 비유풀이의 정당성의 근거가 된 것이다. 그러나 이 말씀은 말씀의 짝을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본문은 지금 앞 13절에서부터 계속 짐승에 대한 이야기를 해오고 있는 중이며, 16절에서 말하는 짝도 그 맥락에서 한 말씀인 것이다. 즉, 모든 짐승이 짝이 있다는 말씀인 것이다. 그런데 이만희와 신천지는 이 말씀을 본문의 의미와 전혀 다르게 자의적으로 이용하고 있는 것이다.
(4) 짝 짓기 비유풀이의 실제 그러므로 이만희와 신천지에서 본문을 해석하는 과정은 거의 도식화 되어 있는데, 본문의 문맥이나 전체 단락이 의미하는 것을 찾는 방식이 아니라, 본문 가운데의 몇 가지 단어에 초점을 맞추고 그 단어가 무엇을 말하는가를 묻는 질문을 던진 후, 그 단어의 짝이라고 정해놓은 것을 그 단어의 실체라는 것을 내세워 대입하는 방식이다. 그리고는 거의 언제나 그 실체를 육적인 것과 영적인 것으로 이분화 하여 육적인 것은 무엇이고, 영적인 것은 무엇이라는 단정을 내린 다음 자의적으로 결론을 내리는 풀이를 하는 방식으로 진행을 한다. 그리고 육적인 것, 사단적인 것 등으로 결론지어지는 실질적인 대상은 대부분 정통교회와 정통교회의 목회자들을 지칭하는 것으로 단정을 한다.
그러므로 비유풀이의 결론은 신천지에 속하지 않은 자들(목자, 교단 등으로 언급되는)에 대한 정죄와 신천지로 암시되는 자들의 정당함을 주장하는 것으로 마무리되곤 한다. 다시 말하면 신천지의 성경해석은 어떻게 기존의 정통교회가 잘못되었고, 어떻게 신천지가 옳은가를 말하는 것으로 귀결되는 것이다. 이와 같은 원리에 따라 성경을 해석한 실례는 그들이 작성한 글의 수만큼 많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들의 거의 모든 성경해석이 위와 같은 원리에 입각하여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신천지 홈페이지의 “진짜 바로알자 신천지”라는 사이트에 올려져 있는 300여개의 게시 글 가운데서 성경을 해석한 글들은 거의 예외 없이 위와 같은 방식으로 성경을 해석하고 있다.
예를 들면, 계시록 18장 3절을 해석하기 위하여 던지는 질문은, “만국을 무너뜨린 음행의 진노의 포도주는 무엇인가?”이다. 그리고 대답은 “무너진 만국은 모든 교회를 말하고, 음행의 포도주는 사단과 교제한 교리를 말하며, 진노는 노하심을 뜻한다.”고 단정하는 식이다. 21)
계시록 6장의 해·달·별은 이스라엘, 하늘은 선민장막, 땅은 육체, 굴과 산과 바위는 이방사교집단이라고 주저함 없이 황당한 해석을 한다. 계시록 18장 17~19절을 해석하면서는 바다는 세상, 배는 교회, 선장은 목자, 선원은 안내하는 전도자, 선객은 교인, 바다에서 일하는 자는 교회의 각 부서장들을 말한 것이라고 하면서 “이들은 하나같이 귀신의 나라 영적 바벨론의 상품 곧 교리로 전도(말씀장사)를 한 것인데, 하나님이 그 정체를 밝혀 심판을 함으로 다시는 그 상품 곧 바벨론이 교법과 교리를 사는 사람이 없게 되는 것을 말한다.”고 해석한다.
그러면서 그는 이 말씀을 이렇게 요약한다. “영적 바벨론(귀신의 나라)이 있고, 이 바벨론에 소속된 자들로서 그 사치의 세력(교권)에 의해 바벨론의 교법과 교리로 치부한 자들이 있다. 이들이 바다에 있는 배들(바벨론 교회)이며 선장(왕들 곧 목자들)과 상고(전도자)들이다.” 22)
계시록 22장 15절의 “개들과 술객들과 행음자들과 살인자들과 우상숭배자들과 및 거짓말을 좋아하며 지어내는 자마다 성 밖에 있으리라”는 말씀을 다음과 같이 풀어내면서 그것을 “바른 증거”라고 하고 있다. 23) 이들이 소위 “짝짓기 비유풀이”라는 이름 아래 행하는 성경 해석이 얼마나 터무니없으며 황당한 것인가는 다른 설명이 필요 없이 그냥 읽기만 하여도 확인이 될 정도이다. 이만희의 소위 “바른 증거”의 내용은 이렇다.
“이 ‘개들’ 은 예수님께서 ‘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지 말라’ 한 ‘개’요(마 7:6), 빌립보서 3장 2절에 ‘개들을 삼가라’ 고 한 그 ‘개’이다. 개는 베드로후서 2장 19~22절에 본바 배도한 목자였다. 또 이사야 56장 9~12절에서 개(벙어리 개)는 말씀을 모르고 탐욕이 심하며 자기 사명을 다하지 못하는 몰각한 목자이다. 또 이 개는 성 안에 들어가지를 못한다고 하셨다. ‘행음자’ 들은 하나님을 버리고 하와와 같이 마귀 신을 받아 마귀 목자와 하나가 된 자들이다. ‘살인자’ 들은 짐승의 무리 멸망자들을 가리키는 것이다. ‘우상 숭배자’들은 계시록 13장의 우상들에게 경배한 자들이다. ‘거짓말하는 자’ 들은 보지도 듣지도 아니하였으면서 계시록에 대해서 이러니저러니 자의적 거짓 증거를 하는 목자들이다. 이 글을 본 자는 자기 행위에 비추어 보고 그들의 무리에 해당되는지 안 되는지 알아야 한다. 해당되면 회개하고 다시 나야 한다(요 3:5). 거짓말을 먹이는 자는 가라지 씨를 뿌리는 목자요, 선악과를 먹이는 선악나무이다. 계시록 전장을 보고 들은 사도 요한이 이들에게 뭐라고 말하겠는가? 또 예수님도 이들에게 뭐라고 말씀하실 것인지 이들은 알 것이다. 회개하라!”
사복음서 요약풀이 가운데 누가복음 23장 28~31절을 “복 있는 배와 젖과 덮는 산과 나무”라는 제목 아래 풀어놓은 것은 참으로 이만희의 성경해석이 얼마나 터무니없는 황당한 자의적 해석인가를 잘 드러내준다. 몇 단락을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24)
눅 23:28~31 복 있는 배와 젖과 덮는 산과 나무 예수께서 돌이켜 그들을 향하여 가라사대 예루살렘의 딸들아 나를 위하여 울지 말고 너희와 너희 자녀를 위하여 울라 보라 날이 이르면 사람이 말하기를 수태 못하는 이와 해산 하지 못한 배와 먹이지 못한 젖이 복이 있다 하 리라 그 때에 사람이 산들을 대하여 우리 위에 무너지라 하며 작은 산들을 대하여 우리를 덮으라 하리라 푸른 나 무에도 이같이 하거든 마른 나무에는 어떻게 되리요 하시니라
1) 예수께서는 왜 십자가를 지고 가는 자신을 위해 울지 말고 예루살렘 백성들을 위해 울라고 하셨는가? 2) 또한 왜 날이 이르면 '수태 못하는 이'와 '해산하지 못한 배'와 '먹이지 못한 젖'이 복이 있다고 하셨는가? 3) 본문의 '그들'은 어떤 이를 가리키는 말인가? 4) 그날에 '사람을 덮는 산'과 '푸른 나무'와 '마른 나무'는 각각 무엇을 말하는가? 그날은 언제인가?
▶ 해산하지 못한 배와 먹이지 못한 젖 예수께서는 본문에 수태하지 못하는 이와 해산하지 못한 배와 먹이지 못한 배에 복이 있다고 하셨고 마태복음 24장 19절에서는 아이 밴 자와 젖 먹이는 자에게 화가 있다고 말씀하셨다. 그렇다면 심판 때에 처녀는 복을 받고 유부녀는 화를 당한다는 말인가? 성경에는 육적인 여자와 영적인 여자가 있다. 육적인 여자는 사람의 씨를 받아 아이를 낳고 젖을 먹이는 자요, 영적인 여자는 신의 씨인 말(씀)을 받아 사람을 전도하고 양육하는 목자이다. 영적인 여자는 하나님의 목자와 사단의 목자로 나누어진다. 하나님의 목자는 성령의 씨인 진리로 성도를 낳아서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게 하는 반면(요3:3~6), 사단의 목자는 마귀의 씨인 비진리로 악령의 자식을 낳아 사단의 모양과 형상으로 창조한다. …그러므로 본문에 기록된 수태하지 못하는 이와 해산하지 못한 배와 먹이지 못한 젖은 목자 아닌 자를 가리킨다. 심판 때에는 아이 밴 자와 젖 먹이는 자 곧 목자들에게는 화가 있고(마 24:19), 오히려 젖을 먹이지 못한 평신도에게는 복이 있다는 뜻이다.
초림 때에 영적 이방인인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모세(구원자)의 자리에 앉아 예루살렘을 다스렸다(마 23:2). 그런데 예수님이 오신 후 예루살렘에 있던 목자들은 화를 당하였고 많은 평신도들이 예수님을 따르고 구원의 복을 받았다. 재림 때에는 그때와 마찬가지로 하나님과 언약한 일곱 금 촛대 교회(계 1:12~20)에 멸망자들이 올라와서 자신들의 표를 하고 다스린다(계 13). 이 일로 인하여 그 장막의 목자들은 화를 당하고 오히려 믿음을 지킨 평신도가 복을 받게 된다.
▶ 산과 푸른 나무와 마른 나무 ‘그 날'은 심판 때인 재림 때이다, 산은 범죄한 목자가 속한 교단이고, 푸른 나무는 생명나무인 예수님이며(요 14:6, 15:1) 마른 나무는 범죄 하여 영적으로 죽어있는 육체뿐인 사람들이다. 산과 나무에게 자신들을 덮으라고 하는 사람들은 젖 먹이는 여자 곧 범죄한 목자들이다.
본문 31절에 기록된 '푸른 나무에도 이같이 하거든 마른 나무에는 어떻게 되리요'라는 말은 당시 예수와 같은 의인이 십자가를 진다면 심판 때에 예루살렘 사람들과 같은 죄인들이 받을 형벌은 어떠하겠느냐는 것이다. 즉 죄인에게는 반드시 하나님의 심판이 임한다는 뜻이다(벧전 4:18 참고). 이처럼 심판 때 불법을 행한 목자들은 자신들이 속한 교단과 성도들에게 자신들의 허물을 덮어달라고 구하겠지만, 그들은 아무런 도움도 받지 못한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심판하시기 때문이다. 본문은 유전된 습관처럼 하나님께서 보내신 자들을 이단이라고 핍박하고 말씀을 멸시하며 하나님의 역사를 방해하는 목자들이 받을 형벌을 비유로 알린 말씀이다. 하늘의 신문고에서는 오늘날이 바로 그 심판의 때임을 알리는 바이다.
이미 밝힌 바와 같이 여기서도 “본문의 ‘그들’은 어떤 이를 가리키는 말인가?, “그날에 ‘사람을 덮는 산’과 ‘푸른 나무’와 ‘마른 나무’는 각각 무엇을 말하는가? 그날은 언제인가?”하는 질문이 해석을 위한 실마리 역할을 한다. 그리고는 여자를 영적인 여자와 육적인 여자로 이분화하고, 육적인 여자는 사람의 씨를 받아 아이를 낳고 젖을 먹이는 자를 가리키고 영적인 여자는 신의 씨인 말씀을 받아 사람을 전도하고 양육하는 목자라고 소위 비유풀이를 한다. 그리고 본문의 수태하지 못하는 이와 해산하지 못한 배와 먹이지 못한 젖은 목자가 아닌 평신도들을 가리킨다고 황당한 해석을 한다. 그리고는 심판 때에는 아이 밴 자와 젖 먹이는 자 곧 목자들에게 화가 있고, 오히려 젖을 먹이지 못한 평신도에게는 복이 있다는 뜻이라고 결론을 내린다. 그러나 이곳의 여자는 목자와 평신도를 가리키는 비유로 쓰인 것이 아니라, 그 상태 그대로 실제의 여자를 가리킨 것이다.
이 본문의 초점은 이 여자들이 누구를 가리키는가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이러한 상태의 여자가 오히려 복이 있는 처지로 여겨질 만큼 그 상황이 처절하다는 사실을 드러내려는 데에 있다. 산은 범죄한 목자가 속한 교단이고, 푸른 나무는 생명나무인 예수님이며, 마른 나무는 범죄하여 영적으로 죽어있는 육체뿐인 사람들이며, 산과 나무에게 자신을 덮으라고 하는 사람들은 젖 먹이는 여자 곧 범죄한 목자들이라는 짝짓기 풀이는 얼마나 황당한가!
“사람들이 산들을 대하여 우리 위에 무너지라 하며 작은 산들을 대하여 우리를 덮으라 하리라”는 말씀은, (신천지 이외의)교회의 목자들이 자신들이 속한 교단과 성도들에게 자신들의 허물을 덮어달라고 구하는 것이라는 해석은 얼마나 황당한가! 본문의 결론을, “유전된 습관처럼 하나님께서 보내신 자들을 이단이 라고 핍박하고 말씀을 멸시하며 하나님의 역사를 방해하는 목자들이 받을 형벌을 비유로 알린 말씀”이라고 하여, 은연중에 신천지에 속하지 않은 목회자들과 신천지를 대조시켜서 신천지가 옳고 다른 목회자나 교회는 형벌을 받을 자들이라는 말씀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얼마나 황당한가! 결국 이만희가 주장하는 짝짓기 비유풀이는 성경에 대한 제약 없는 자의적인 해석을 만들어내는 수단 외에 아무 것도 아닌 것이다.
또한 신천지 이단은 같은 단어이면 모두가 같은 것을 지칭하는 것으로 간주하고 그 단어들이 어디에 어떻게 쓰였는가와 상관없이 단어와 단어를 서로 연결하여 다룬다. 그러나 단어가 동일하다 하여 언제나 동일한 의미를 갖는 것은 아니라는 것은 굳이 성경 본문을 연구하지 않는다 할지라도 우리의 일상생활에서도 얼마든지 확인할 수 있는 상식적인 일이다. 예를 들어 신천지에서는 “씨”는 언제나 “말씀”을 의미하는 것으로 못박아놓고 있다. 그러나 성경 안에서도 씨는 말씀이라는 의미 외에도 다양한 다른 의미로 쓰이고 있다.
하나님의 말씀이나 혹은 후손 등을 말하기 위하여 비유적으로 쓰인 경우도 있지만 말 그대로 씨앗을 가리키기 위하여 사용된 경우도 많이 있다. 그런데도 이만희는 씨는 언제나 말씀을 말하는 것으로 못 박아 놓고 씨라는 단어가 나오면 기계적으로 말씀을 그것에 대입시킨다. 그리고 영적인 씨와 육적인 씨로 이분법적으로 분리시켜서 육적인 씨는 비진리 곧 신천지 이외의 자들의 말이고, 영적인 씨는 진리를 말하는 것이라고 하는 것이다. 실제의 씨를 지칭하여 말하고 있는 데도 그것을 말씀이라고 결정해버리고, 그것을 다시 육적인 씨와 영적인 씨로 분류하여 육적인 씨는 비진리이고 영적인 씨는 진리를 말하는 것으로 해석하여 풀어버리는 것은 터무니없는 해석인 것이다. 실제로 아이를 밴 여자를 가리켜 말했는데, 자기들의 규칙에 따라 아이를 밴 여자는 범죄한 교회의 목자이고, 아이를 배지 않은 여인은 평신도를 가리킨다고 해버리는 것은 얼마나 어이없는 해석인 것인가!
4) 착시 유발 전략 신천지 이단이 구사하는 성경풀이에는 기존 신자들을 끌어들이려는 치밀한 전략이 깃들여 있다. 그것은 신천지도 정통교회와 크게 다르지 않다는 인상을 먼저 심어주어 그들로 하여금 신천지에 대하여 신뢰와 안심을 하게 하는 것이다. 분별력이 약한 사람들을 속이기 위하여 혹은 신천지를 의심하거나 비판하는 이들에게 신천지도 성경적이며 일반 교회에서 하는 말과 똑같은 말을 한다는 신뢰를 획득하기 위한 안전장치를 위하여 전략상 매우 성경적인 진술과 정통교회에서 해오고 있는 말들을 하는 것으로 시작하는 것이다. 다음 어느 단계에서 슬며시 신천지의 이단적인 주장을 내세우는 것이다.
분별이 약한 신자들은 신천지 이단이 처음에 말하는 내용을 보며 신천지도 기존의 정통교회들과 똑같이 성경을 강조하고, 그간 다니던 정통교회에서 들었던 말들과 별반 다르지 않는 내용을 가르친다는 인상을 갖게 된다. 그리고는 신천지에서 가르치는 내용들을 별 거부감이나 의심 없이 받아들이기 시작하는 것이다. 그러나 신천지는 어느 단계에 이르면 자기들의 이단적인 교리나 주장으로 슬며시 나가기 시작하고 그 시점을 분별하지 못한 신자들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신천지의 이단 교리를 확신하는 단계로 이끌려 가는 것이다. 이렇게 일단 신천지도 정통 교회들과 똑같이 성경을 바르게 말한다는 인상을 심어놓고 그 인상을 이용하여 슬며시 이단의 교리를 도입하여 분별하지 못하게 하는 단계를 필자는 착시유발 전략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신천지의 주장은 그러므로 대개의 경우 3단계의 과정을 거치며 진행된다. 처음에는 성경을 믿는 정통교회들의 가르침과 구별이 되지 않는 고백적 선언 등으로 시작한다. 그러다가 어느 단계에 이르면 자기들의 교리를 도입하는 발언으로 진행해나간다. 그리고는 어느 경우에는 노골적으로 다음 단계로 나가서 직설적으로 이만희나 신천지를 언급하면서 결론을 밝히기도 하고, 많은 경우에는 직접적으로 지칭하지는 않지만 누가 보아도 이만희나 신천지 집단을 염두에 두고 하는 말인 것이 분명하도록 암시적인 방식으로 넌지시 결론을 내리기도 한다.
예를 들면 이만희는 구약은 한 사람을 가리켜 증거한다는 말로 시작한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예수님이라고 하면서 신약의 말씀을 그대로 인용하면서 그 사실을 강조한다. 그러면서 그러므로 예수님은 하나님의 이름으로 오시는 하나님이라고 강조한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하나님이며, 모두가 예수의 말을 들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그러면서 그런데 예수님 당시에 예수님의 말을 듣지 않고 오히려 예수님을 핍박한 세력들이 있었음을 부각시키면서 그들이 얼마나 잘못된 당시의 종교 세력가들이었는지를 강조한다. 그리고는 구약이 예수님 한분을 예언하였듯이 예수님이 오심으로 이루어진 신약은 재림을 향하여 언약의 목자 한 분을 증거 한다는 주장으로 나아간다.
여기서부터 이만희는 제2단계로 나아가기 시작한다. 즉 신약은 재림에 대하여 여전히 예수님을 다시 오실 분으로 증거하고 있음에도 그 말을 슬며시 바꾸어 언약의 목자 “한 사람”을 증거한다고 한 다음, 예수님이 영으로 오셔서 그 한 사람에게 들어가고 그 한 사람이 예수의 대언자요 그 한 사람이 예언된 그 분이며, 그러므로 그를 보는 것이 예수를 보는 것이고, 그이 말을 들어야 된다고 강조한다. 그러면서 예수님이 처음 오셨을 때 당시의 종교 세력가들이 예수님의 말을 듣지 않고 오히려 핍박했듯이 재림의 시대에 오실 사람으로 약속되어 온 자에게도 똑같은 일이 벌어지고 있다고 강조한다. 그리하여 이 한 사람을 극도로 높이고 강조하면서 은연중에 그게 바로 이만희라는 생각을 자연스럽게 하도록 이끌고 가는 것이다. 분별력이 약한 교인은 처음부터 끝까지 성경의 있는 말씀을 제대로 말하고 있다고 느낄 뿐 어느 대목에서 길을 달리하기 시작하였는지 감지하지 못한 채 신천지가 이끄는 대로 다른 길에 들어서서 계속 따라가게 되는 것이다.
4. 설교적 대응 방안 1) 설교자의 반성 위에서 지적한 바와 같은 신천지 이단의 황당한 본문 해석과 이만희 중심의 어이없는 교리 주장에도 기존의 정통교회의 교인들이 끌려들어갈 뿐만 아니라, 오히려 신천지에서 들은 내용을 가지고 기존의 정통교회에서는 들어 보지 못한 심오하고 깊이 있고 철저하게 성경중심적인 설교라고 하면서 빠져들어 가는 이유가 무엇인가? 교회 예배와 봉사에 열심히 참석하던 교인들이 어느 날 갑자기 신천지 이단에 모든 것을 바치며 헌신하는 데로 가버리는 현실이 정통교회의 설교와 설교자에게 던지는 도전이 무엇인가? 신자들이 어느 가르침이 성경적인지 반성경적인지를 분별할 수 없는 허약한 체질이 되어버린 근본적인 원인은 어디에 있는 것인가? 그들의 개인적인 무책임과 무지함 보다 더 근본적인 문제는 그들이 기존의 강단으로부터 교회와 신자의 정체성을 확립하여 어떤 가르침이나 주장에 대한 신학적, 성경적 분별력을 행사할 수 있을 정도로 자라가게 하는 설교를 듣지 못하며 교인 생활을 해온 데에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그것은 전적으로 기존 교회의 설교와 설교자들의 책임이다.
그러므로 신천지 이단에 대한 대응은 설교자들이 성경을 제대로 설교하며, 교회와 신자의 정체성을 확립하는 데에 목적을 둔 설교를 소홀히 해왔다는 반성으로부터 시작해야 할 것이다. 이만희가 그렇게 황당한 알레고리 해석과 억지 해석 그리고 말도 안 되는 자의적 해석을 일삼는데도 오랫동안 신앙생활한 정통교회의 신자가 아무런 이질감을 느끼지 않으면서 오히려 그것을 기존 교회 목사에게서는 들어보지 못한 심오한 성경중심 설교라고 좋아하는 것은, 아마도 그들이 기존 교회에서 그러한 알레고리 해석과 자의적 해석 등에 익숙해 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2) 성경을 해석하고 선포하는 설교의 회복 사실 그동안의 설교들은 신자와 교회의 정체성을 강조하고 가르치기 보다는 위로와 격려와 축복과 성공 등 소위 부와 건강의 복음을 선포하는 데 힘을 쏟아왔다는 비판을 면하기 어렵다. 교회에 대한 강조도 교회의 본질에 관한 교리적인 가르침보다는 주로 교회의 기능이나 실용성 등 교회의 기능적 정체성에 초점을 맞추어 설교를 해온 것이 사실이다. 재미있는 설교, 편안한 설교, 축복이 넘치는 설교를 지향해왔고, 그런 와중에 설교는 점점 본문을 이탈한 설교로 변질하게 되었다. 신천지 이단의 파장이 이렇게 크게 나타날 수 있는 것은 성경에서 멀어져서 성경적이고 신학적인 분별을 갖추지 못한 신자가 많아진 현실이 만들어낸 결과라고 해도 지나친 과장이 아닐 것이다.
이만희 자신도 신천지가 성경에 의한 참된 교회임을 주장하기 위하여 정통교회의 이 점을 비난한다. “요즘의 교회는 모두 사람에 의한 사람을 위한 교회로 변질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교회에서는 천국복음을 가르쳐야 하는데도 세상 이야기나 하며 성도의 수를 불리는데 주력하고 있으니 세상 교회가 아니라 하겠습니까?” <요한계시록의 실상>, 23쪽. 이만희는 이 점을 간파하여 성경해석을 주 무기로 들고 나오면서 자신들이야 말로 성경을 제대로 풀어준다고 속이며 교인들을 미혹하는 것이고 그 전략이 통하여 지금과 같이 큰 파괴력을 한국교회 안에 행사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계속하여 성공과 축복과 위로와 격려와 간증, 그리고 우스운 이야기 등을 설교에서 들어온 사람들이 성경을 근거한 심오한 가르침이라면서 다가온 내용들을 놓고 그것이 성경적인 것인지, 성경을 제대로 해석하고 있는 것인지, 그리고 그들이 성경을 펴놓고 하는 그 말이 과연 신자나 교회에 대하여 맞게 말하고 있는 것인지 분별을 할 수 없다는 것은 당연한 일이 아닌가? 그러므로 신자들이 이단의 가르침에 현혹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라도 성경을 설교하고 신자와 교회의 정체성을 확고하게 해주는 설교를 회복해야 할 것이다.
3) 신천지 이단의 문제를 다루는 설교의 수행 설교는 전교인을 대상으로 시행되므로 일시에 가장 많은 사람을 대상으로 한 교회 안의 유일한 전달 통로라는 점에서도 설교를 통하여 신천지와 같은 이단을 다루는 것이 필요하다. 더욱이 신천지와 같이 교회 안의 신자들을 표적으로 삼고, 교회 안에서 은밀하게 진행되는 이단 운동에 대하여는 설교를 통한 공개적이고 대중적인 대응이 무엇보다도 효과적이다. 물론 소그룹 성경공부나 혹은 한시적 특강 등이 집중력과 전문성 있는 전달에서는 더 효과적이기는 하지만, 특정의 소수 교인들만이 참석한다는 약점을 보완하기 위해서는 설교를 통한 공개적 대응이 더 효과적이다. 이단 문제는 일회성 초청 간증이나 혹은 이단문제전문가의 일회성 특강에만 맡겨버리지 말고, 그 교회를 목회하는 목회자의 설교를 통하여 성경적인 근거와 신학적인 체계를 갖고 깊이 있게 다루어 단순한 경각심을 갖게 하는 데서 나아가 스스로 분별력을 갖게 하는 것이 필요하다. 이를 위해서는 설교자들이 신천지 이단의 핵심교리와 근본적인 오류 그리고 전략 등에 대하여 확실하게 파악하는 것이 필요하다.
4) 교리 설교의 회복 설교자가 설교에서 이단문제를 다루는 방식은 두 가지를 겸하여야 한다. 첫째는 앞 단락에서 제안한 바와 같이, 신천지 이단의 잘못된 교리나 혹은 잘못된 성경해석을 직접적으로 설교에서 비판적으로 다루며 올바른 가르침을 베푸는 것이다. 그러나 강단에서 너무 자주 이단을 거론하며 비판하는 설교를 수행하게 되면 그것 자체가 또 다른 부작용을 유발할 수도 있다. 교인들이 너무 자주 같은 주제로 설교를 행하는 것에 식상하거나 반감을 가질 우려도 있고, 또 비판적이고 공격적이며 논쟁적인 설교가 반복되는 것이 교회의 분위기에도 부정적인 분위기를 암암리에 만들어낼 염려도 있다는 점을 고려하면서 설교를 수행해야 할 것이다.
둘째는 교리를 설교하는 것이다. 사실 한국교회는 교리 설교를 잃어버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교리 설교를 하지 않는 것이 대세가 되어버린 감이 있다. 교리 설교를 신학교의 조직신학 강의와 같은 것으로 여기거나, 교리 설교는 딱딱하고 어려워서 재미도 감동도 호감도 얻기 힘든 설교라는 등 교리 설교에 대한 편견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나타난 현상이기도 하다. 그러나 교리 설교도 얼마든지 재미있게 그리고 현실 적용력 있게 그리고 다른 형식의 설교처럼 부담 없는 방식으로 할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교리 설교는 신학 설교가 아니고, 성경이 말하는 기독교의 중요한 주제들을 설교하는 것이다. 교리 설교는 교인들이 잘못된 가르침이나 교리 혹은 성경 왜곡에 대한 분별력을 배양하게 하는 것이다. 한 개인을 놓고 그 사람만이 성경의 계시를 바로 해석할 수 있다거나, 그 사람을 통해서만 구원을 받을 수 있다거나, 그 사람이 바로 보혜사라고 하며, 심지어 그 사람이 생명책에 구원받을 사람을 기록하는 사람이라고 하는 말들이 아무렇지 않게 믿어지는 어이없는 일이 벌어지는 일차적인 책임은 물론 본인들에게 있을 것이지만, 그러나 우리의 설교가 상당부분의 책임을 져야 할 것이다. 그리고 그 책임의 내용은 성경이 말씀하는 기독교의 기본 교리들을 설교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교리 설교는 신자와 교회의 정체성을 분명하게 해주는 역할을 한다.
5) 요한계시록 설교의 수행 신천지 이단이 자기들의 교리와 주장의 정당성을 역설하기 위하여 주로 사용하는 성경은 요한계시록이다. 그러나 정통교회에서는 막연하게 요한계시록을 설교하는 것에 대하여 어려움이나 혹은 두려움에 가까운 선입견을 갖고 있는 설교자들이 많아서 실제로 요한계시록 설교를 기피하는 현상이 있어온 것이 사실이다. 이제 설교자들이 요한계시록을 깊이 연구하고 묵상할 뿐만 아니라, 올바른 해석에 근거하여 요한계시록을 처음부터 차근차근 제대로 설교하는 것이 필요하다. 요한계시록은 이단의 전유물인 것처럼 방치해서도 안 되고, 요한계시록을 설교하는 것은 자칫하면 이상한 곳으로 빠질 가능성이 있는 위험한 일이라는 생각에서 벗어나 정당하게 하나님의 말씀으로 성도들에게 설교하는 것이 이단에 대한 대비를 하는 차원에서도 필요하다.
6) 성경의 난해구절, 혹은 확실한 답을 제시할 수 없는 신앙적, 신학적 주제들을 당당하게 설교하기 신천지 이단이나 신천지의 추종자로 돌변해버린 신자들이 정통교회를 향하여 마치 비웃기라도 하듯이 내놓는 말 가운데 하나는 정통교회는 답이 없는데 신천지에서는 확실한 답을 말해준다는 것이다. 앞에서 보았듯이 신천지는 이만희가 실상계시를 받은 자요, 성령께 직접 설명을 들은 자 곧 책을 받아먹은 자라는 황당한 교리를 내세워 무엇이나 자기 마음대로 말할 수 있는 자의 위치를 확보해놓고 있다. 그러나 성경에는 우리가 명확히 해석할 수 없는 난해한 구절들이 있다. 또한 우리가 납득하거나 확인할 수 없는 신앙적, 신학적 주제들이 있다.
정통교회가 확실한 답을 주지 않는데 신천지는 터무니없는 해석일지라도 확실한 답을 주어 대조가 되는 난해한 구절들을 모아서 더 연구하고 고민하여 성경적인 입장을 분명히 표명하는 작업이 필요하다. 하나의 확실한 답을 내리는 것이 불가능한 난해구절들에 대하여 그 사실을 확고하게 교인들에게 알려주는 것도 그 자체로 일종의 확실한 대답이 될 것이다. 확실한 답을 하는 것이 불가능한 신앙이나 신학적 주제들에 대하여도 자신 없어하며 얼버무리고 넘어갈 것이 아니라, 그것은 인간으로서 확실한 답을 할 수가 없는 문제라는 것을 분명히 밝히는 것도 일종의 확실한 답이 될 것이다.
Ⅲ. 나가는 글
신천지 이단이 한국교회에 끼치고 있는 폐해는 그간의 어느 이단이 끼친 것보다도 더 치명적이라고 할 수 있다. 이글에서는 주제에 따라 설교적 대응에 초점을 맞추어 몇 가지 방안을 제안하였다. 그러나 신천지 이단에 대한 대응은 설교는 물론 목회의 전 영역에서 이루어져야 할 것은 당연한 일이다. 우선 각 교회 지도자들에게 신천지의 정체와 잘못된 점들을 교육하여 신천지에 대한 지식을 갖게 하고, 그리하여 신천지 이단에 대한 대응에 자신감을 갖게 하는 것이 필요하다.
어느 교회에서는 장로님이나 구역장 등 교회의 지도자들이 혹시라도 교인들이 신천지에 대하여 질문을 할까봐 겁이 나서 신천지 이단을 주제로 대화가 시작되면 피하거나 말꼬리를 다른 곳으로 돌린다고 하면서 담임 목사님에게 신천지에 대하여 교육을 해달라는 건의를 했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그런가 하면 목회자들이 이단에 대한 체계적인 지식과 또 대처 방안들을 익힐 수 있도록 신학교에 이단에 대한 정규 강좌를 개설하는 것도 하나의 방안이 될 것이다. 또한 성경공부에 대한 관심과 욕구를 가지고 있는 교인들이 그 욕구를 채우기 위하여 교회 밖의 다른 곳으로 가지 않도록 해야 한다. 그런데 그것은 교회 밖의 성경공부 모임에 가지 말라는 경고만이 아니라, 실제로 그들이 욕구를 충족시키고 교리와 성경에 대한 공부를 깊이 있고 흥미롭게 교회 안에서 할 수 있는 프로그램을 마련하는 것도 하나의 대응방안일 수 있다.
<미주>
1) 신천지 이단의 체제와 교리 등 전반적인 항목들을 체계적이고 종합적으로 비판한 문헌으로서는 이덕술 목사가 2010년에 Grace Theological Seminary에 선교학 박사 논문으로 제출한 “선교학적 시각으로 조망한 한국교회 이단운동에 대한 분석적 비판과 개혁주의 신학적 준거에 의한 전략적 접근-신천지 교주 이만희를 중심으로”를 참조하라. 그의 논문은 “신천지 포교전략과 교리에 대한 신학적 비평”이라는 제목으로 교회와 신앙에 2011년 7월부터 9회에 걸쳐 연제되었음. 또한 이만희의 요한계시록 해석서인 <천국의 비밀 요한계시록의 실상>에 대한 심도 있는 비판 자료로서는 장운철 목사-<교회와신앙> 편집장-가 9회에 걸쳐 비판한 내용을 참조하라. 위 두 자료 모두 <교회와신앙> 인터넷 사이트에 올려져 있음. 2) 보혜사 이만희, <천국비밀 요한계시록의 실상-요한계시록의 예언과 성취>, (서울: 신천지, 2005), 22-23. 3) 신천지 홈페이지(http://www.shinchonji.kr)의 “진짜 바로 알자 신천지”에는 그들의 주장과 선전을 담은 글을 계속 올리고 있는데, 2011년 10월4일 현재 300여개의 글을 게시하고 있으며 이 글은 게시번호 160번, “신천지, 희의 사명과 맹세”라는 글에서 인용한 것임.
4) 앞의 책, 32. 5) 보혜사 이만희, <천국비밀 요한계시록의 실상>, 500. 6) 신천지 홈페이지, “진짜 바로알자 신천지”사이트, 각 교단의 주장과 믿음, 게시번호 149. 7) 1. 만유의 대주제 2. 또 다른 보혜사 3.약속의 목자 4. 기름부음 받은 자 5. 이긴 자 6. 하나님 예수님과 같이 보좌에 앉아 계시는 분 7. 예수님의 새 이름을 받은 자 8. 예수님의 모든 소유를 받은 자 9. 책 받아먹은 자 10. 두 증인 중의 한 분 11, 예수님이 보낸 사자 12. 보고 들은 자 13. 해를 입은 여자가 낳은 아들 14. 사데 교회에서 나온 자 15. 성령 곧 예수님의 신부 16. 총회장 17. 선생님 18. 사도 요한격 선지자 19. 어린양의 순결함이 드러나시는 분 20. 만천하가 와서 경배 받으실 분 21. 영광의 본체시나 낮아지심으로 섬김의 본을 보이신 분 22. 만국 소성 시키실 분 23. 만왕의 왕 만군의 주 24. 백마 탄 자 25. 생명록에 녹명하는 자 26. 성경박사 27. 철장권세를 가진 자 28. 144,000 인치는 자 29.이희재 30. 이충진 31. 이만희 http://serviceapi.nmv.naver.com/flash/NFPlayer.swf?vid 8) http://serviceapi.nmv.naver.com/flash/NFPlayer.swf?vid
9) <사명자 교육용 성경에 대한 계시와 주석>(서울: 신천지, 2009), 2. 10) 앞의 책, 3. 11) <계시록의 실상>, 36. 12) 앞의 책, 37. 13) 앞의 책, 36. 14) <성도와 천국>, 26. 15) <계시록의 실상, 35. 16) 앞의 책, 27.
17) <계시록의 실상>, 36. 18) <성경에 대한 계시와 주석>, 3. 19) <계시록의 실상>, 45-46. 20) <요한계시록의 실상>, 39. 21) 신천지 홈페이지 “진짜 바로알자 신천지” 사이트 게시글, 게시번호 136. 22) 신천지 홈페이지, “진짜 바로알자 신천지” 사이트 게시번호 139. 23) <성경에 대한 계시와 주석>, 337. 24) 신현욱의 강의안에서 재인용.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