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신경 강해설교 2
2, 천지 창조
“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은 위에 있고 하나님의 신은 수면에 운행하시니라”(창1:1-2).
“여호와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신 때에 천지의 창조된 대략이 이러하니라.
“여호와 하나님이 땅에 비를 내리지 아니하셨고 경작할 사람도 없었으므로 들에는 초목이 아직 없었고 밭에는 채소가 나지 아니하였으며 안개만 땅에서 올라와 온 지면을 적셨더라.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 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된지라.” (창2:4-7).
신문을 보시는 분들은 최근 신문에 미국에서 쏘아올린 ‘보이저 2호’가 토성을 탐사해서 보낸 사진들을 많이 보셨을 것입니다. 인간 과학의 또 하나의 위대한 업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 보이저 2호는 지구를 떠난 4년 동안 약 20억 km를 달렸습니다. 그리고 옛날에는 망원경으로만 볼 수 있었던 토성의 고리를 뚫고 들어가서 사진을 찍어 보냈습니다. 옛날에는 그 고리들이 무엇인가에 대해 많은 추측들을 했습니다. 지구의 달처럼 토성의 달이 아닌가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었고, 혹은 먼지들이 아닌가, 그리고 그것이 4개인지 8개인지 등등 여러 가지 설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지난 번에 보이저 1호가 가서 그 고리가 무수히 많다는 것을 발견했고, 이번에는 보이저 2호가 가서 그것이 아주 작은 얼음 덩어리로 구성되어 있는 띠라는 것을 발견했다고 합니다. 혹시 토성의 위성 중에는 생명체가 있지 않은가? 이런 생각을 해 왔는데, 온도가 영하 170도 이하가 되기 때문에 생명체가 전혀 없다는 것을 확인 했습니다. 그 뿐 아니라, 방송을 자세히 들으신 분은 보이저 2호가 그 고리를 뚫고 들어갈 때 얼음에 부딪혀서 나는 소리를 들어보았을 것입니다. 신문에 보니까 ‘천국의 교회 종소리’ 같이 들린다고 합니다. 하여튼 48초 동안 그 소리가 계속됐다고 하는데 그 소리가 직접 거기 있어서 보이저 2호가 녹음한 것은 아닐 것입니다. 아마 진동을 전파로 보내서 여기서 재생한 소리일 것입니다. 어떻게 기계를 땅 위에서 쏘아서 20억 km를 달려가게 하며, 또 거기서 전파를 계속해서 보내게 할 수 있을 것인가? 이것은 놀라운 성취가 아닐 수 없습니다.
이 굉장한 성취를 방송을 통해 들으면서 하나 느낀 것은, 인간의 위대한 지혜, 인간의 위대한 업적에 대해서는 이야기하면서도 그 오묘한 토성을 만드시고 토성의 고리들을 만드시고 이 우주를 조화있게 만드신 하나님에 대해서는 일언반구도 없더라는 것입니다. 오늘날 인간은 천문학자 라플라스(Laplace)가 말한 것처럼 ‘하나님’ 이라는 가정이 없이도 모든 원리를 설명할 수 있다는 자신감에 넘쳐 있습니다. 아주 우스꽝스러운 인간의 자신(自信)입니다.
보이저 2호가 성취한 것은 마치 ‘큰 바닷가의 조개’와 같습니다. 조개 하나를 발견하고서는 그 조개로 그 큰 대양을 다 퍼내겠다는 어리석은 사고방식입니다.
오늘날 대부분의 과학자들이 받아들이고 있는 가설은 이 우주의 모든 것은 진화론적으로 형성됐다는 것입니다. “오랜 세월 동안, 수 억년 간 진화론저긴 과정을 통해서 이렇게 결합되고 저렇게 결합되어서 결국 이렇게 된 것이다.” 이것이 오늘날 과학자들의 가설입니다. 예를 들어 설명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어떤 사람이 어느 바닷가에 가니까 아주 멋진 회중시계가 떨어져 있었습니다. 줄이 달려 있고 시계 침이 아주 정확하게 돌아갑니다. 그것을 보고서 “이 시계가 이루어진 것은 저 바위 속에 있는 철분이 오랜 세월동안 서로 깎이고 뭉쳐서, 즉 오랜 세월 동안 바다에 부딪혀서 동그랗게 깎이고, 오랜 세월동안 깎여서 침이 생기고, 아주 오랜 세월이 흘러서 여러 침이 서로 딱 들어맞고, 또 오랜 세월 동안 그 쇠들이 깎여서 톱니가 되고, 그리고 오랜 세월동안 바위 속의 유리성분이 합쳐저서 덮이고 그래서 시계가 생겼다.” 이렇게 생각하는 것과 똑같습니다. 이번에 기독실업인 협회 전국대회를 할 때에 ‘카이스트’(KAIST)에 계시는 김영길 박사는 아주 재미있는 강연을 하셨습니다. 이 우주에 있는 모든 생물체는 아미노산으로 되어 있다고 합니다. 아미노산이 단백질을 구성하기 위해서 우연히 합쳐져서 될 확률은 10의 130승 분의 1(1/10130)이라고 합니다. 그뿐 아니라, 이 아미노산과 단백질이 모두 합쳐서 하나의 가장 원시적인 생명체 즉, 아메바가 될 확률은 10의 1,676,260승 분의 1(1/101,676,260)이라고 합니다. 이 우주의 모든 물질이 수억 년 동안 움직이다가 10의 1,676,260 승 분의 1 확률로 생명체가 생긴다는 것은 도저히 불가능한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진화론을 주장하는 미국의 카플란 박사는 생명을 형성할 수 있는 확률이 이 정도라면 생명체를 제공하는 자, 즉 창조자 없이는 생명이 생길 수 없다고 말했습니다.
또한 김영길 박사는 다음과 같은 재미있는 이야기를 했습니다. 소위, 우리가 말하는 ‘쟈바인’, ‘뻬이징 원인’, ‘네안데르탈인’이라고 하는 것은 송곳이 두 개를 발견해서 그것으로 사람을 형성시킨 것입니다. 땅에서 발견된 것은 송곳니 두 개뿐입니다. 송곳니 두 개를 가지고 “‘네안데르탈인’은 이렇게 되어있다”고 말합니다. 과학자들의 상상력이라는 것이 그런 것을 만들어 낸다는 것입니다. 송곳니 두 개를 가지고 만들어 낸 유원인이 과학 교과서에 들어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 진화론이라는 것은 마치 절대적인 정설로 받아들여지고 있습니다. 최근, 미국 캘리포니아 주에서는 이번에 처음으로 주 헌법을 고쳐서 학교에서 진화론만 가르치지 못하게 했습니다. 짆롸론을 가르치려면 창조론도 동시에 가르쳐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어느 것도 진화론이든 창조론이든 우리의 눈으로 관찰 할 수 없습니다. 과학적으로 다시 실험해 볼 수 있도록 되어 있지 않습니다. 결국 믿는 것은 히브리서 11:2절에 “믿음으로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우리가 아나니,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 아니니라”고 하신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창조는 우리 기독교인의 고백이요, 신앙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는 예배를 시작할 때, “전능하사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 아버지를 내가 믿사오며”라고 고백합니다.
성경에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셨다” 고 했을 때 ‘창조했다’는 말은 ‘낳았다’는 뜻이 아닙니다. 즉, 하나님께서 마치 닭이 달걀을 낳듯이 세계를 낳았다는 뜻이 아닙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성경 이외의 모든 창조설은 다 낳은 것으로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나라 단군신화도 비슷한 이야기입니다. 하늘에서 환웅이 땅에 내려와서 곰이 변해서 된 여자와 결혼해서 단군을 낳았고, 그로부터 한국 사람들이 났다고 되어 있습니다. 희랍 신화에 보면 ‘우라노스’(Ouranos) 곧 하늘이라는 뜻의 말과 ‘게이’(Ge) 곧 땅이라는 뜻의 말이 있습니다. 그것들이 서로 결혼래서 우주가 나왔다고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Mother earth' 라고 하지 않습니까? ’대지(大地)‘를 영어로는 ‘Mother earth’라 해서 ‘어머니 땅’ 이라고 합니다. 하늘은 아버지이고 땅은 어머니라고 해서, 그것들로 부터 모든 것이 태어났다고 합니다. 이것은 모든 신화의 창조설에 들어있습니다. 우리 기독교는 이것을 전적으로 배격합니다. 만일 하나님께서 이 우주를 낳았다면 하나님과 이 우주는 동질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소가 송아지를 낳았으면 어미 소와 송아지는 동질입니다. 하나님과 인간 사이는 아무것도 공유하고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근본적으로 우리와 다른 존재입니다. 만약에 하나님과 인간이 동질인 것으로 생각한다면 그것을 ‘범신론(汎神論)’이라 합니다. 범신론이란 신과 피조물은 동질이며 따라서 모든 피조물도 신의 일부라는 이론입니다. 따라서 동양의 모든 종교는 범신론입니다. 그래서 중국에서는 황제를 ‘천자(天子)라 합니다. 하늘의 아들이란 뜻입니다. ‘수신제가(修身齊家)치국평천하(治國平天下)’라 했을 때에도 ‘평천하’ 위에는 신이 있습니다. 하나의 작은 단위, 큰 단위 그리고 더 큰 단위가 되어도 궁극적으로 다 동질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모든 신비주의는 이러한 범신론적인 요소를 가지고 있습니다. 모든 낭만주의도 범신론적인 요소를 가지고 있습니다. 낭만주의는 독일 사람들이 말한대로 자연에의 향수라 합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자연의 일부니까 자연으로 다시 돌아가고자 하는 본능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거기서 소위 ‘낭만주의’라고 하는 것이 나왔다고 합니다. 한국 사람들이 매우 낭만주의적인 이유는 한국의 고대 종교가 범신론적인 것이기 때문입니다.
너무나 복잡합니다만, 우리가 분명히 기억해야 할 것은 하나님은 아무것도 없는 것에서 인간을 만드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는 동질성이 없습니다. 목수가 연장을 만드는 것과 닭이 달걀을 낳는 것은 아주 다릅니다. 그것을 영어로는 generate(낳는다)와 fabricate(제작한다)로 구별합니다.
그 다음에 우리가 조심해야 할 것은 재료 문제입니다. 대개 목수가 집을 지을 때에는 나무가 있어야 하지 않습니까? 재료가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천지를 만드실 때 재료가 이디 있습니까? 귻이 문제입니다. 희랍신화에는 재료가 있습니다. 플라톤의 철학에 보면 ‘데미우르고스’(Demiurgos)라는 신이 본래 있던 물질과 본래 있던 형을 맞춰서 세계를 만들었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 성경에는 하나님께서 ‘말씀으로써’, ‘아무 것도 없는 데서’ 우주를 창조했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성경이 말하는 창조설은 세계의 어느 신화에도 나와 있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 세계의 많은 학자들이 기독교를 희랍적으로 설명하려고 합니다. 그래서 창세기 1:2 후반의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위에 있고 하나님의 신은 수명에 운행하시니라” 하는 말씀을 희랍 신화와 같이 해석하려고 합니다. “땅이 혼돈하고”에서 ‘혼돈’ 이란 말은 영어로 ‘케이오스’ (chaos)라 하는데, 희랍어의 ‘카오스’에서 나왔습니다. ‘카오스’라는 말은 희랍 사람들이 생각하고 있는 원 물질입니다. 우주라는 것은 희랍말로 ‘코스모스’(kosmos)라 하는데 그것은 ‘질서가 있는 세계’를 뜻합니다. 그래서 희랍신화에서는 본래 카오스뿐이었는데, 거기서 코스모스가 나왔다고 가르칩니다. 그래서 여기 창세기 1:2을 들어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위에 있고...’라고 하지 않았는가? 이것이 바로 카오스다. 여기서 하나님이 질서가 잡힌 우주를 만들었다. 그러니까 희랍의 신화가 기독교의 창졸론이나 아무 차이가 없지 않느냐?” 이렇게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것은 성경에다가 철학사상을 집어넣는 어리석은 것입니다. 히브리 사상에는 카오스와 코스모스의 구별이 전혀 없습니다.
성경에다가 희랍적인 사고방식을 집어넣으려는 학자들이 우리 나라에도 많습니다. 소위 현대신학자들, 아주 똑똑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입니다. 자기들은 희랍 철학을 잘 한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히브리 사람들이 전혀 생각하지 못했던 일이고, 성경의 사상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것입니다. 성경에서는 여러 곳에서 하나님은 아무것도 없는 것에서 있는 것을 창조하셨다고 합니다. 말씀으로 창조하셨다고 합니다.
우리가 조심해야 할 것은 하나님을 너무 인간적으로 생각하는 일입니다. 희랍의 유명한 철학자 ‘제노파네스’(Xenophanes)가 “만약에 말(馬)이 손을 가지고 있어서 신을 그린다면 말 같은 신을 그릴 것이다. 다리가 네 개이고 꼬리가 달린 신을 그릴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그럴 것 같지요? 에디오피아 사람들은 코가 납작하고 얼굴이 시커먼 신을 그릴 것이고, 트라키아 사람들은 눈이 파랗고 머리가 곱슬곱슬한 신을 그릴 것입니다. 그럴 뜻하지 않습니까? 예수님 그림을 보면 머리가 전부 금발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에게는 금발이 없습니다. 예수님의 머리는 본래 새까만데 금발로 그렸습니다. 로마사람들이 그렸기 때문입니다. 중국 사람들의 크리스마스카드에 보면 마리아가 중국옷을 입고 있으며, 한국의 크리스마스카드를 보면 요셉이 갓을 쓰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상상 할 때도 대개 그렇습니다. 제가 어릴 때는 하나님을 우리 할아버지처럼 생각했습니다. 수염이 하얗고 용상에 앉아서 “어흠!” 하는 할아버지 말입니다. 이것은 불가피합니다. 어떻게 할 도리가 없습니다. 인간의 상상력이란 것은 더 이상 갈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의 상상력을 초월하시는 위대하시고 영광스러운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 인가느이 지혜와 능력이 뛰어나면 뛰어날수록 그것을 지으신 하나님을 기억하고 창얀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참으로 감사한 것은 이와 같이 온 천지 만물을 지으신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바로 우리의 아버지가 되신다는 사실입니다. 얼마나 놀랍고 감사한 일입니까? 그러므로 우리는 어려운 일을 당할 때든지 무슨 일을 만나든지 우리 아버지 하나님께 기도하고 도우심을 청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모든 걱정 근심을 하나님 아버지께 아뢰고 우리의 모든 장래문제를 하나님 아버지께 의탁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좋으신 하나님을 모시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우리가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지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하나님을 슬프게 해드리고 하나님 앞에 죄를 범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천지를 지으신 전능하신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지하고 그분의 사랑 가운데서 순종하는 삶을 살아야 하겠습니다.
3, 그 외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사오니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거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요한이 그에 대하여 증거하여 외쳐 가로되 내가 전에 말하기를 내 뒤에 오시는 이가 나보다 앞선 것은 나보다 먼저 계심이니라 한 것이 이 사람을 가리킴이라 하니라. 우리가 다 그의 충만한 데서 받으니 은혜위에 은혜러라. 율법은 모세로 말미암아 주신 것이요. 은혜와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온 것이라.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요1:1-4, 14-18).
여러분께서 신분을 보시면, 요즈음 한국과 일본 관계가 아주 긴장되어 있는 것을 아실 것입니다. 한일 각료회의의 공동성명서 작성에 있어서 의견의 차이로 어려운 문제가 된 것 같습니다. 외교에 대해 아부것도 모르는 우리 같은 사람들은 그까짓 말이야 무슨 소용 있느냐고 생각할 것 같습니다. 그러나 외교에 있어서는 언어, 특히 성명서의 말이 매우 중요하다고 합니다. 그러나 성명서의 말의 표현이 아무리 중요하다고 해도 우리 기독교 역사상 예수님에 대한 교리의 표현만큼 더 중요한 것도 없습니다.
지금 우리가 사도신경을 공부하고 있는데, 사도신경의 두 번 째 고백인 “그 외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사오니”라는 구절을 공부하겠습니다. 그런데, 이 간단한 구절로 인하여 역사상 굉장한 우여곡절이 있어왔고, 많은 싸움이 벌어졌고, 많은 회의가 소집되었고, 또 전(全) 로마제국이 들썩거린 일이 있습니다.
우리가 사도신경을 자세히 보면, 예수님에 대한 고백이 사도신경 전체의 반 이상을 차지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사도신경은 하나님에 대해서 고백하고, 예수님에 대해 고백하고, 성령에 대해 고백하며, 교회에 대해 고백하고, 부활에 대해 고백하고, 영생에 대해 고백하고, 그리고 성도의 교제에 대해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중에서 예수님에 대한 고백이 왜 반 이상을 차지하느냐 하는 데 대해서는 물론 우리 기독교가 예수님을 가장 중요시하기 때문이라 고 말할 수 있습니다. 또 한편으로는, 예수님에 대한 고백이 우리의 지식, 우리의 논리로 볼 때 문제가 많기 때문에 그만한 고백이 필요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 외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사오니” 이 구절에서 우선 문제가 되는 것은 “그 외아들” 이란 말입니다. 물론 여기서 “그”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을 가리키는 것이고, 따라서 예수님은 하나님의 외아들이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얼른 생각하기에, “아, 하나님은 복도 없다. 어떻게 아들이 하나뿐 인가?” 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실재로 이슬람 교도들이 기독교를 비판할 때 바로 이렇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어디 결혼을 했나? 만약 하나님에게 아들이 있다면 하나님의 아내는 누구냐?” 그들은 이런 식으로 기독교를 완전히 만화로 만들어버립니다. 이슬람 교도들 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무의식적으로 위와 같이 이해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첫째로 조심해야 할 것은, 외아들의 ‘외’라는 것은 둘이 아닌 하나라는 뜻이 아닙니다. 여기의 ‘외’란 ‘독특한’ 이란 뜻입니다. 그래서 얘수님이 하나님의 외아들이라는 말은 보통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처럼 그런 정상적인 관계가 아니라, 독특한 관계에 있는 아들이란 뜻입니다.
둘째로, ‘외아들’ 이란 말 속에 ‘태어난’ 이란 말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우리말 번역에는 그저 ‘외아들; 이라고 되어 있는데, 영어 번역에만 보아도 ’only begotten' 이라고 되어 있고, 또 요한복음 1:14에 ‘독생자’ 라고 해서 ‘생(生)’자가 들어있습니다. 즉, 하나님께서 독특하게 ‘낳으신’ 아들이란 뜻입니다. ‘낳으신’ 이라고 하니까, ‘어머니가 아들을 낳듯이 낳은’ 이란 어감을 풍겨줍니다. 그러나 이것은 성경이 의도하고 있는 뜻과 전혀 다릅니다. 하나님께서는 육체를 가지고 계시지 않는데 어떻게 아들을 낳습니까? 그러므로 여기서 ‘낳는다’ 하는 말은 생물학적인 뜻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어떻게 태어났으며 그것은 무슨 뜻입니까?
역사적으로 볼 때, 이 문제를 제일 먼저 들고 나온 사람은 3세기의 유명한 교부 오리겐(Origen)입니다. 오리겐은 희랍 철학에 능통한 사람이요, 플라톤을 매우 열심히 공부한 기독교인입니다. 그래서 그는 플라톤, 곧 희랍 철학을 가지고 기독교를 해석하려고 해서, 소위 유출설(流出說)을 이야기했습니다. ‘유출’ 이란 말은 양동이에 물을 부으면 물이 넘쳐 흐르듯이 ‘넘쳐흐른다’는 뜻입니다. 오리겐은 예수님이 하나님으로부터 유출된 분이라고 가르쳤습니다. 즉 하나님이 충만해서, 마치 양동이에서 물이 흘러나오듯이 흘러 나온 것이 예수님이라고 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오리겐은 온 우주가 다 하나님으로부터 유출된 것이라고 했습니다. 즉, 제일 먼저 유출된 것이 예수님이고, 그 다음에 유출된 것이 우주라고 설명했습니다. 그리고는 예수님을 ‘로고스’(Logos)라고 불렀습니다. 로고스란 ‘말씀’이란 뜻인데, 바로 요한복음 1:1절에 있는 ‘말씀’을 가리킵니다. 그는 이 로고스 완전한 하나님도 아니요 완전한 피조물도 아니요 중간쯤 되는 하나님이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반신(半神)’이라고 불렀습니다. 이런 이론들이 퍼지니까 초대 교부들이 이래서는 안 되겠다고 해서 반대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렇게 논쟁이 격화되니까 그 당시 로마 제국의 황제 콘스탄틴(Constantine) 대제가 회의를 소집했습니다. 콘스탄틴 대제는 외교 전술을 써서 뜻이 분명치 못한 용어를 사용했습니다. 그것은 ‘호모우시오스’(homoousios)란 희랍 단어인데, ‘본질이 같은’이란 뜻입니다. 하나님과 예수님은 본질이 같다. 이 말은 듣는 사람에 띠라서 다르게 해석될 수 있는 말이었습니다. 오리겐 학파에서는 이것을 유출설에 맞추어서 이해했습니다. 그리고 또 오리겐을 반대하는 사람들은 요한복음 1:1의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라”는 말씀과 또 빌립보2:6의 “예수님은 하나님의 본체시다”라는 말씀에 맞추어서 이해했습니다. 이렇게 해서 콘스탄틴 대제의 지혜로 인하여 잠시 동안 문제가 해결된 듯했습니다만 오래 가지를 못했습니다.
그 후에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에서 아리우스(Arius)라는 사람이 나타났습니다. 그는 알렉산드리아 도시에 있는 한 교회의 장로였는데 또한 유명한 철학자였습니다. 아리우스는 다음과 같이 주장했습니다. “예수님이 하나님과 동일하다고 하면 말이 안 된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둘이든지 아니면 예수님이 하나님이 아니든지 해야지, ‘하나님 아버지’도 아니고 그렇다고 피조물도 아니면 예수님은 도대체 뭐냐? 아예 성부와 성자의 구별없이 하나님은 한 분이라고 하든지 아니면 예수님은 사람이라고 해야지, 이것도 아니고 본체가 같다니 말이 안 된다” 이렇게 주장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아리우스의 이론은 하나도 틀린데가 없는 것 같습니다. 아주 훌륭한 이론 같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생각해도 우리의 작은 두뇌로서는 예수님이 하나님이면서 또한 하나님과 다른 분이라는 것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이것을 논리적으로 깨끗하게 해결하려고 한 사람이 곧 아리우스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아리우스는 “예수님은 피조물이다. 그러나 특별히 피조 되었기 때문에 아들이라고 부를 수 있다” 고 주장했던 것입니다.
이것은 논리에 아주 들어맞는 이론입니다. 그러나 아리우스의 주장은 그의 상관이라고 할 수 있는 알렉산드리아의 주교 알렉산더(Alexander)와는 의견이 달랐습니다. 알렉산더는 아주 열심히 공부하는 학자였습니다. 그가 보기에는 아리우스의 이론이 복음을 파괴시키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아리우스와 알렉산더 사이에 충돌이 생겼습니다. 그런데 동로마 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노풀의 주교였던 유세비우스(Eusebius) 란 사람은 아리우스의 의견에 동조했습니다. 그는 그 당시 콘스탄티노풀에 살고 있던 콘탄틴의 아들 콘스탄티우스(Constantius) 황제에게 잘 보여서 알렉산드리아의 주교인 알렉산더를 파면시켰습니다. 그리고는 다시 하나님과 예수님과의 관계를 ‘호모이오스’ (homoios)라고 했는데, 이제는 ‘호모이오스’(homoios)라고 해서 하나님과 예수님은 비슷하다고 고쳐버렸으니 완전히 아리우스파의 승리로 끝나고 말았습니다.
그때 알렉산드리아의 알렉산더 후임으로 들어온 주교가 유명한 학자 “아타나시우스”(Athanasius)여습니다. 그는 이러한 결정에 반대하여 일어났습니다. 아무리 황제가 주장한 것이라도 그것은 복음의 근본적인 파괴라고 반항하였습니다. 그러자 콘스탄티우스 황제는 화가 나서 아타나시우스를 파면시키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아타나시우스는 숨어 피해 다니면서 계속해서 팜플렛을 써냈습니다. 성경의 가르침에 의하면 예수님은 하나님과 비슷한 분이 아니라 예수님은 곧 하나님이라고 계속해서 주장했습니다.
마침내 콘스탄틴의 아들 콘스탄티우스가 물러가고 데오도시우스(Theodosius) 대제가 로마 황제로 등극했습니다. 그가 황제가 되자 제1회 공의회를 소집했습니다. 주후 379년에 콘스탄티노플에서 신학자 150명이 모인 이 종교회의에서 다시 예수님과 하나님과의 관계를 재정립하는 신앙고백을 채택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오늘날까지 남아있는 ‘니케아 신앙고백’으로 오늘날의 사도신경보다 훨씬 깁니다. 그런데 그 중에서 특별히 예수님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 하나님의 독생자시오 모든 시간 이전에 아버지로부터 독생하시고, 빛으로부터 온 빛이요. 참 하나님으로부터 오신 참 하나님이시며...”
379년에 모여진 콘스탄티노플의 공의회는 약 60 여 년간 끌어오던 하나님과 예수님과의 관계에 대한 논란을 끝냈습니다. 이 신앙고백은 오늘날 기독교의 정통교리로 카톨릭과 개신교가 다 같이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이 교리를 통하여 하나님의 교회는 그 이후 1,600여년 동안 존재해 왔습니다. 우리가 이 사실을 가만히 생각해 볼 때, 이것은 하나님의 계시가 인간의 논리에 대하여 승리한 하나의 큰 승리입니다. 인간의 논리로 따져 볼 때에 예수님과 하나님은 다르면서 또 같은 하나님이라고 하는 것은 말이 안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교회는 그 후 1,600여년 동안 말이 안 되는, 논리에 맞지 않는 교리 위에 서 있었으며 그것을 통하여 수십억의 사람들이 구원을 받았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지혜가 인간의 지혜를 이기고 승리한 것을 나타냅니다.
다음에 우리가 생각해야 할 것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우리 말 신앙고백에는 ‘우리 주’란 말이 먼저 나옵니다. 원문에는 ‘우리 주’란 말이 ‘예수 그리스도’란 말 뒤에 나옵니다. 원문에는 ‘우리 주’란 말이 ‘예수 그리스도’란 말 뒤에 나옵니다. 예수 그리스도란 말도 우리가 생각하기엔 간단한 것 같지만 그러나 그렇게 간단하지 않습니다. 요한복음 20:31에 보면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예수란 말은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시고 나사렛에서 자라시고 예루살렘으로 갔다가 로마 군인들에 의하여 십자가에 못박혀 죽은 사람을 뜻합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는 누구인가? 그리스도는 구약 성경이 말하는 메시야를 말합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둘 다 믿었습니다. 예수가 있었다는 것을 누가 안 믿겠습니까? 그리스도는 구약 성경이 분명히 오실 것이라고 하고 있으니까 그것도 유대인들이 믿습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이 못 믿는 것은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것입니다. 나사렛 사람 예수가 구약 성경이 가리키는 메시야라는 사실을 못 믿는다는 것입니다. 여기에 기독교와 유대교의 근본적인 차이가 있습니다.
오늘날에도 많은 신학자들이 예수가 그리스도임을 믿지 않습니다. 우리나라에도 어떤 신학자가 최근에 외국에 나가서 공부를 많이 하고 돌아와서는 뭐라고 하는고 하니, “그리스도는 사랑을 의미한다. 사랑이 있는 곳에는 항상 그리스도가 있다.” 고 합니다. 그러니까 그리스도는 나사렛 예수와 아무 상관이 없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렇게 가르치지 않습니다. 우리의 신앙고백에는 그렇게 말하고 있지 않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그는 하나님의 독생하신 자시오. 사람의 몸으로 태어나서 갈릴리에서 활동하시고 예루살렘에서 고난을 받으시고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부활하신 분입니다. 그가 바로 구약 성경에서 예언한 메시야 곧 우리의 구세주 그리스도인 것입니다. 이것이 성경이 가르치는 바이고 신앙고백에서 말하고 있는 바입니다.
다음에는 ‘우리 주’에 대해서 생각해 보겠습니다. 이것은 요한복음에서 분명하게 말해주고 있습니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 이시니라”(요1:1). 예수님은 곧 하나님이시라고 말해줍니다. 그 다음 절에 보면,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모든 것은 예수님을 통해서 창조되었고 따라서 우리도 예수님의 피조물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그는 ‘우리 주’입니다.
그리고 12절에 보면,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라고 했습니다. 이전에도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창조하셨고 또 사람을 창조하셨으니까 원칙적으로 모두 다 하나님의 자녀이지만 이제는 좀 특별한 관계에서 예수님을 영접하는 자는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도 마음대로 되는 것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13절에 보니까,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이니라”고 했습니다. 무슨 말인고 하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은 사람이 육정으로 되는 것이 아니고 사람의 의도로 되는 것도 아니고 하나님께서 전적으로 우리를 자기의 배성으로 만드신다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100% 하나님의 종이 된 것이요 하나님은 우리의 주가 되시며 예수님은 우리의 구주가 되시는 것입니다.
이 신앙고백 없이는 기독교인이 될 수 없습니다. “그 외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이것은 우리 기독교인의 신앙고백 중에서 가장 핵심적인 것입니다. 이 핵심적인 교리를 받아 들이지 아니하면 기독교인이라 할 수 없습니다. 어떤 사람이 교회에 나가서 은혜로운 설교, 굉장한 기적, 감동되는 교훈을 아무리 많이 보고 들어도 이 핵심적인 교리를 모르면 기독교와는 관계가 없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우리가 지금 가지고 있는 고백이 그렇게 간단히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예수께서 부활하신 이후 주후 370년까지 많은 투쟁을 거쳐서 많은 사람이 희생되고 많은 회의가 소집되었습니다. 많은 책들이 나오고 많은 토론회가 벌어졌습니다. 황제가 개입되고 정치가 개입되었습니다. 온 지중해 연안이 들끓었습니다. 그런데 신비스럽게도 가장 비논리적인 이 교리가 교회의 공적 교리로 채택되고 이것이 그 후 오늘날까지 정통 교회의 교리로 받아들여졌습니다. 이것은 정말 신비가 아닐 수 없습니다. 성령께서 이 고백을 형성하는데 역사하셨음을 우리는 고백해야 합니다. 우리는 위대한 전통 속에 있습니다. 우리 교회는 비 온 후에 갑자기 솟아난 버섯처럼 그렇게 세워진 교회가 아닙니다. 선지 사도가 터를 닦은 전통 속에서 많은 교부들이 투쟁하고 많은 순교자들이 피를 흘린 그 전통 속에 우리가 지금 속해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회의 공적 교리라는 것은 무서운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회의 공적 교리라는 것은 무서운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감히 팽개칠 수 없고 무서워할 수 없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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