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베소 교회는 요한 계시록을 통하여 주님이 아세아 일곱 교회에 보낸 서신 중에서 첫번 수신 교회입니다. 에베소는 소아시아 가이스텔 강 어구에 있습니다. 로마제국 시대에는 아시아도의 수도였습니다. 지중해 동부에는 안디옥과 알렉산드리아가 에베소와 함께 번창하고 있었습니다. 에베소는 이 도시들을 로마로 연결하는 육, 해로상의 교차로였습니다. 항구 도시로서 교통의 중심지였으니 얼마나 번창하고 화려 했던가를 짐작할만 합니다. 에베소에는 아데미 신전이 있었습니다. 지금도 에베소를 방문하는 여행객들은 장엄했던 아데미 신전의 폐허에 서서 옛 영화를 더듬느라고 발길을 돌리지 못한다고 합니다. 에베소는 정치 상업 면에서 뿐만 아니라 종교 면에서도 요충지였던 것입니다. 바울은 에베소에서 3년간이나 체류하면서 전도한 결과 에베소 여러 지방에 그리스도의 교회가 세워졌습니다.
▣본론
바울이 에베소 교회에 보낸 편지를 보면 어떤 서신보다도 사랑을 말합니다. 사랑의 교훈을 많이 받았습니다. 아마 사랑이 풍성했던 것 같습니다. 본문에서도 보면 사랑이 그 주제 입니다..-은혜목회정보- 97.11 ☞설교/박성규목사
1.에배소 교회의 장점
1)훌륭한 교회입니다. 주님이 나타내 보이시기를 “오른손에 일곱별을 붙잡고 일곱 금촛대 사이를 다니시는” 모습이셨습니다. 성경에서 오른손은 하나님의 권위를 나타냅니다. 장자 유업의 표이기도 합니다. 주님의 오른손에 붙잡혀 있는 에베소 교회는 모름지기 아세아 교회의 장자 교회요, 으뜸 교회였습니다. 주님은 아세아에서 일곱교회를 선정하여 편지를 보내십니다. 그 훌륭하고 위대한 교회들 중에서도 에베소 교회는 첫번졔 편지의 수신교회가 된것입니다. 계 1:20에 보면 일곱별은 일곱교회의 사자라고 합니다. 일곱은 단순한 숫자의 의미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완전성을 말합니다. 완전한 종, 사역자들을 말씀 하십니다. 에베소 교회는 바울이 개척했습니다. 요한이 늙어서 죽기까지 장로로서 시무했습니다. 요한의 제자 폴리캅이 순교 하기도 했습니다. 이런 것들로 보아 에베소 교회는 위대한 하나님의 종들이 시무했던 교회입니다. 일곱 금촛대는 일곱 교회라고 했습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완전하신 교회들입니다. 에베소 교회는 그 행위로 주님께 인정 받았습니다. 그들의 모든 수고와 인내는 주님이 속속들이 알고 계셨습니다. 완전한 교회였습니다.
2)악한 자들을 용납하지 않는 교회입니다. 수단과 방법을 쓰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자칭 사도라 하되 아닌 자들을 시험하여 그 거짓된 것을 가려 냈습니다. 진리에도 충만했던 교회였기에 이단사설을 받아 들이지 않았습니다.
3)어떠한 핍박에도 굴하지 않았는 교회입니다. 주님의 이름을 위하여 끝까지 견디었습니다. 그 대표적인 인물이 폴리캅입니다. 폴리캅은 로마의 군대가 예수의 이름을 저주하고 배반하면 그에게 영예와 권세를 주겠다고 유혹했습니다. 폴리캅은 86년동안 주님은 나에게 해를 끼치지 않으셨는데 내가 왜 주님의 이름을 배반하느냐면서 장작더미 위에서 굳굳하게 화형을 받았습니다. 에베소 교회는 위대한 신앙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행위와 수고와 인내가 주님께 인정을 받아 아세아 일곱교회 중에서도 일등교회였습니다. 모든 그리스도의 교회들은 본받아 에베소 교회와 같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2.문제점:그런데 이렇게 훌륭한 에베소 교회에 문제가 있습니다.
1)위대한 교회의 금촛대를 옮겨 버릴지도 모르는 위험이었습니다. 처음 사랑을 버린 것입니다. 에베소 교회는 모든 면에 훌륭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사랑이 없는 교회입니다. 교회는 교리적으로 완벽해야 합니다. 교리는 교회의 뼈대와 같고, 기둥과도 같습니다. 교리를 잘 지키는 것은 그만큼 하나님의 말씀에 잘 순종하는 것입니다. 교회는 행위가 있어야 합니다. 소망이 있어야 하고, 그 소망으로 인내해야 합니다. 핍박 가운데서도 끝까지 견디고, 악은 모양이라도 버려야 합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교회는 사랑이 있어야 합니다. 교리가 뼈대와 같다면, 사랑은 살과도 같습니다. 뼈대가 없을 수 없지만 뼉다귀만 엉성한 것도 있을 수 없습니다. 지나치게 살이쪄서 뚱뚱한 것도 보기 흉하지만, 바짝 말라 뼉다귀만 엉성한 것도 사랑받기 어렵습니다. 척 보기에 혐오감을 줍니다. 적당하게 살이 오르면 보기에 아름답습니다. 건강합니다. 사랑 받게 됩니다. 교회가 그렇습니다. 교회는 무엇보다도 사랑으로 충만해야 합니다.
그래서 바울은 에베소 교회를 향하여 에베소서 3장 17절에서 사랑을 토대로 하여 생활하라고 권합니다. 너희가 사랑 가운데서 뿌리가 박히고 터가 굳어져서 능히 모든 성도와 함께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라고 합니다. 나무는 뿌리가 수분을 섭취하여야 잎이 푸르러 집니다. 수목이 울창한 것은 수분섭취를 잘 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생활 속에도 사랑이 있어야 합니다. 사랑은 나무의 수분과 같아서 사람의 생활을 윤택하게 해주는 것입니다. 또 사랑의 넓이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사랑은 생활 속에 체험하지 않고는 알지 못합니다. 사랑은 자로 잴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저울로 달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오직 가슴으로 체험하여 아는 것입니다. 바울 사도는 빌립보서 1장 8절에서 “내가 예수 그리스도의 심장으로 너희 무리를 어떻게 사모하는지 하나님이 내 증인이시니라”하십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심장이 아니고서는 사랑이 무엇인지 알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만이 참 사랑을 알게 하시고 베풀어 주셨기 때문입니다. 바울 사도는 이런 사랑, 일반적인 원칙에 관한 뿐만 아니라 실제적 적용이 되는 사랑을 가지라고 합니다. 바꾸어 말하면 사랑을 지식으로만 가지지 말고 행함으로 나타내라는 것입니다. 입으로만 말하지 말고 몸으로 실천하라는 말입니다. 에베소 교회는 사랑의 교육을 철저하게 받은 만큼, 얼마나 사랑에 충만했겠습니까. 그런데 사랑을 잃어 버렸습니다. 주님이 불가불 편지를 써서 보내지 않으면 안될만큼 사랑이 식어져 버린 것입니다. 처음 사랑을 다시 회복하지 않으면 버림을 받아야 할만큼 위험한 지경에까지 놓인 것입니다.
처음 사랑이란 어떤 것일까요. “네 소년 때의 우의와 네 결혼 때의 사랑”이라고 말한 그 사랑입니다.(렘2:2) 신랑이 신부를 맞이 하려는 가슴 설레이는 순간의 기쁨을 아시겠습니까. 그것은 말로서 표현할 수 없습니다. 가슴과 가슴으로만 전달 되어지는 것입니다. 사랑은 손이나 발로하는 것이 아닙니다. 불타는 뜨거운 가슴만이 또 다른 가슴을 뜨거웁게 불태워 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복음을 듣고, 주님을 내 구주로 처음 모셔들일 때, 그 가슴 설레이게 하던 기쁨을 가진 적이 있습니까. 십자가 위에서 머리에 가시관 쓰시고, 두 손과 발에 쇠못이 박히고, 온 몸이 갈갈이 찢기어, 방울 방울 선지 피를 흘리며, 나의 모든 죄짐을 대신 짊어 지셨다는 소식을 들었을때, 코허리가 시큰해지는 감동을 가진 적이 있습니까. 주님이 나를 사랑하사 당신의 몸을 버리셨다는 말을 듣고, 회개의 눈물을 흘리며 주님 앞으로 나아가 내 모든 죄를 고백하면서 그렇게도 죄악이 더럽고 추해 보이던 기억을 가지고 있습니까. 그래서 뜨겁고 간절하게 주님을 사모해 보신 적이 있습니까. 이런 것들이 저의 첫사랑입니다. 저는 그 날의 감격, 주님께 대한 그 사랑스러움을 영원히 잊을 수 없습니다. 주님의 사랑이 감사해서 불타는 정열 다바쳐 주님을 섬겼습니다. 밥을 굶어도 배고픈 줄 몰랐습니다. 자지 못하여도 피곤한 줄 몰랐습니다. 먼길을 걸어도 싫지 않았습니다. 주님을 위하여서라면 생명을 내어 놓는 것쯤은 아무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리스도를 모신 후 제 인생은 새롭게 변했습니다. 끊임없이 뜨거운 열정이 솟아 올랐습니다. 주님의 말씀을 거리마다 만나는 사람마다 외장쳐 전했습니다. 저의 젊은 날은 입에 풀 칠하기도 어려운 시절이였지만, 벌어 먹기 위하여 일의 노예가 되지 않았습니다. 굶기를 밥먹듯 하면서도 그것이 더 고마웁고 감사할 뿐이었습니다. 돌이켜 보면 후회없는 삶이었습니다. 이 복음 위하여 자랑스럽게 말할 수 있는 것도 첫 사랑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에게 미쳤다고 수군대던 것이 싫지도 않고 부끄럽지도 않았습니다. 그런데 지금 저에게는 그 때, 그 처음 사랑의 진실이 없습니다. 그 감격도 시들어 가고, 그 기쁨도 없습니다. 진실로 그리스도를 사랑하고 있지 못합니다. 이 사실을 깨닫던 날, 저는 눈물을 흘리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야곱은 외삼촌 라반의 집에서 20년 머슴살이를 했습니다. 천날을 하루 같이 지냈습니다. 라반의 딸을 사랑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던 사람과의 결혼이 성사 되었습니다. 신방에 들었지만 실망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좋아하는 라헬보다 언니 레아와 먼저 결혼해야 하는 처지입니다. 그러나 실망하지 않습니다. 사랑에는 절망이라는 낱말이 없습니다. 희망의 샘입니다. 무한한 인내의 샘물을 솟게 합니다. 야곱은 사랑하는 라헬을 얻기 위하여 7년을 더 일합니다. 7년은 결코 짧은 세월이 아닙니다. 그 7년을 하루 같이 보낸 것은 사랑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사랑입니다. 사랑은 세월을 단축시켜 줍니다. 능치 못할 일이 없습니다. 어떤 시련도 이기게 해줍니다. 인내를 주고, 불평 불만을 없애 줍니다. 만사를 적극적으로 대처하게 해줍니다.
그러나 사랑은 무엇보다도 눈물을 줍니다. 사랑은 눈물의 씨앗이라는 유행가조의 눈물은 실패의 눈물입니다. 슬픈 눈물입니다. 진실하지 못한 사랑은 아픔만을 남기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사랑은 소망의 눈물을 줍니다. 감격의 눈물을 줍니다. 무엇보다도 연민의 눈물을 줍니다.
(예화) 사랑의 눈물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위대한 전도자 중의 한 분은 미국 시카고에서 목회하는 클락이라는 분입니다. 그는 매일밤 전도집회를 하는데 꾸준하게 회중이 모입니다. 그 회중의 대부분은 술주정꾼, 도둑놈, 소매치기, 투전꾼 등입니다. 그야말로 인간으로서 희망을 모두 잃어 버리고 사는 사람들입니다. 그의 설교는 형편 없습니다. 지루하고 싫증이 납니다. 느리고 흐리멍덩한 음성입니다. 그러나 매일밤 5-600여명의 회중이 모입니다. 무엇에 비틀어 매인 것처럼 열심히 설교를 듣습니다. 결신자들이 하루에도 수십명씩 나옵니다. 무슨 까닭일까요. 싫증이 나서 제대로 들을 수 조차 없는 설교가 무엇 때문에 그렇게 감동이 되는 것일까요. 이유는 없습니다. 단지 그곳에 모인 사람들은 클락의 진실된 사랑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랑처럼 사람의 마음을 깊이 찌르는 것은 없습니다. 클락의 눈에는 사랑의 눈물이 언제나 고여있씁니다. 지난 날, 클락이 이곳으로 처음 왔었을 때. 그는 그 불쌍한 회중들의 가련함을 알고 몹씨 운 적이 있었답니다. 그 후 그는 우는 것을 부끄럽게 생각 했습니다. 남에게 눈물을 보이지 않으려고 마음을 차겁게 가졌습니다. 그 결과 그의 노력은 성공 했으나 설교는 능력을 잃고 말았습니다. 그는 다시 하나님께 기도 했습니다. 하나님 내 눈에 눈물을 돌려 주시옵소서. 하나님은 그에게 눈물을 돌려 주셨을 뿐만 아니라 놀랄만한 능력도 주셨습니다. 진실한 사랑의 씨를 뿌리려면 눈물을 흘리지 않으면 안됩니다. 시편은 노래합니다.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단을 거두리라. 사랑에는 눈물이 있어야 합니다.
▣맺는말
에베소 교회는 훌륭했습니다. 그러나 처음 사랑을 버렸습니다. 에베소 교회의 금촛대는 영원히 옮기어 지고 말았습니다. 옛날 그 교회들의 전성기를 자랑하던 폐허에서 지금은 흔적마저도 채아 볼 수 없습니다. 한국교회는 외양은 훌륭하지만 속이 썩고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두려운 것은 사랑이 메말라 가는 현상입니다. 아니 처음부터 사랑으로 시작하지 아니하는 교회들이 너무도 많습니다. 은사의 경험은 많지만 사랑의 경험은 없습니다. 은사는 한국 교인들을 열심있게 하는 반면 교만하고 비뚤어지게 합니다. 사랑을 체험하는 성도들, 처음 사랑을 가지는 교회들이 되어야 합니다. 처음 사랑을 회복하지 않으면 주님은 그 자리에서 금촛대를 옮기실 것입니다.
서머나 교회:주인없는 면류관
- 계 2:8-11 -
▣들어가는 말
성경에는 우리가 본 받아야할 만한 몇몇 교회가 소개되어 있다. 이 교회들을 보면 몇가지 특징들이 있음을 쉽게 찾아볼 수 있는데 예루살렘교회는 성령이 충만한 교회로서 성령의 사역이 증거된 교회였다. 고린도 교회는 분쟁과 방언과 빈부로 인하여 멍들었던 교회였으나 바울의 끊임없는 노력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는 교회로 우리 가운데 전해지고 있다.
1.서머나 도시 항구도시로 아릅답기가 아시아의 제일이라고 일컬어지는 서머나는 동방의 문지기였다. 특히 유럽으로 가는 출구인 서머나는 에베소도시가 점차 쇠퇴하자, 가장 관심을 끄는 지역으로 급성장하여 갔다.
2.서머나교회의 복음 전도 요한계시록에 나타난 7교회 가운데 칭찬을 받은 교회는 서머나교회와 빌라델비아교회 뿐이다. 다른 교회들은 우리 주님에게서 꾸중을 들었으나 이 두 교회는 오히려 힘과 용기와 희망을 주는 위로를 받았다. 우리 주님께서는 선한 수고가 없이 아무 일도 하지 않는 신자에게 결코 칭찬을 주시지 않으셨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얼마나 충성되게 감당하며 애쓰며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선한 열매를 맺는가를 헤아려 보시고 칭찬하시는 것이다..-은혜목회정보- 97.11 ☞설교/박성규목사 칭찬받은 이유는 신앙으로 생기는 고난을 잘 참았고 장차 올 고난에 대하여서도 두려워하지 않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다. 서머나 교회는 역사가들도 칭찬한 교회였다. 당시 서머나 교회가 있었던 곳은 지금도 있으며 인구 약 20만이 살고 있는데 2000년이 지난 지금도 인구의 1/3이 신자인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교회는 이와 같이 주님께서도 칭찬하시고 또 세인들에게도 칭찬을 받을만한 교회가 되어야 한다. 주님께서는 이 교회를 향하여 좋은 상급을 준비하여 놓으셨다. [생명의 면류관] 이 바로 그것이다. 이 세상의 모든 경기에는 여러가지 모양의 상급이 준비되어 있다. 아마추어 경기에서는 우승 트로피 혹은 메달이 많고 프로경기에서는 거액의 상금까지 곁들여 있어서 선수들의 사기를 북돋운다. 이것들은 우승자가 누구인지 알고 준비한 것은 아니다. 그럴 수는 없다. 오직 우승하는 사람에게 주려고 준비한 것이다. 하나님께서 나를 위하여 예비하신 면류관이 천국의 진열대에 있다는 것을 매우 감격스러운 일이다. 우리들이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지 못하고 파멸의 깊은 수렁으로 곤두박질하고 있다면 나를 위하여 천국에 마련하신 생명의 면류관은 주인을 잃고 진열대에 외롭게 남아 있을 것이다. (우수작이 없을 경우) 하나님께서는 지옥에 떨어지는 영혼을 보고 마음 아파하실 것이며 주인 없이 놓여있는 수많은 면류관을 보고 더 마음 아파하실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 생명의 면류관을 씌워 주시기 위하여 예수님을 희생하시면서까지 상주시길 원합니다. 그러므로 서머나교회를 향하여 들려주신 하나님의 말씀이 여기 앉아계신 여러분들에게도 나타나 여러분 개인과 우리 교회를 위하여 마련해 주신 생명의 면류관이 결코 주인없는 면류관이 되지 않도록 해야 할 것이다. 서머나 교회의 칭찬이 곧 우리의 칭찬이 되고 우리가 그 빛나는 생명의 면류관을 받아 쓸 주인이 되자.
▣본론
I.환란과 궁핍을 살아 온 사람
우리 주님께서 성도들의 처지를 알고 계시다고 하는 말 처럼 힘과 용기와 소망 이 되는 것은 없다. 우리 인간은 두가지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다. ①나는 알지만 하나님은 모르기를 원하는 마음. ②나는 부족하게 알지만 하나님께서는 자세하게 알아 주시기를 원하는 마음. 하나님이 알고 계신 것은 궁핍과 환란이다. 하나님께서 알고 계시다는 것은 실상은 부요한 자이라고 한다. 당시 서머나는 과학과 의술이 발달하였다고 한다. 지금으로 현대과학과 의술이 가장 앞서있는 도시였다. 첨단 장비를 갖춘 저택에서 사는 사람들에게 너희의 환란과 궁핍을 안다하신 것이다. 하나님은 서머나교회의 교인들의 물질적인 궁핍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영혼의 부를 말씀하고 계시다. 우리 인생에 있어서 온갖 시련은 육체를 단련하기도 하지만 영혼을 단련하기도 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그들의 환란과 궁핍을 안다고 말씀하셨다. 하나님의 아신 바된 인생은 행복하다.
Ⅱ.장차 올 고난(Suffering)을 두려워 하지 않는 자
(V.10)“네가 장차 받을 고난을 두려워 하지말라"는 것은 그리스도를 위한 의인의 고난을 의미한다. 루마니아의 공산세계에 복음을 密輸出하던 범브렌트 목사는 옥중에서 성경을 읽으면서 “두려워 말라”는 말씀을 세어 보았더니 365번 기록되어 있더라고 하였다. 이 숫자는 1년 365 번에 꼭 하루씩 해당되는 수였다. 인간이 얼마나 두려움에 빠지기 쉬운 존재인가를 아시고 하나님께서 매일같이 권면하여 주시는 말씀이다. 주님은 환란과 두려움이 와도 처음이요 나중이신 내가 함께하고 있으니 투옥을 당하고 시험을 당하고 환란을 받더라도 두려워 하지말라고 미리 깨닫게하고 계신 것이다. 투옥은 면류관을 받을 성도들이 당하는 첫 관문이다. 요셉을 봅시다.(창 39:20) 삼손과 세례 요한 그리고 사도들 베드로와 요한과 함께 초대 교회 성도들이 겪은 투옥은 겨우 첫번째 관문이 것이다. 투옥은 우리를 파멸로 데려가는 것이 아니라 영원한 상급을 받게 하는 통로이다. 사단이 와서 여러 모양으로 유혹의 올가미를 씌워 넘어뜨리려 하여도 분명한 것은 그것이 영원한 것이 아니라 단지 열흘이라고 하는 짧은 시간이라는 점이다. 하나님의 의를 외치며 말씀대로 살다가 옥에 던지우고 빈곤의 늪을 헤매는 성도들은 지금도 우리 가운데 있다. 교회의 멸절을 위하여 사단은 교묘한 방법으로 음모를 꾸미고 있다. 그러나 시련들은 우리를 잠간동안 묶어놓을 뿐이지 영원히 결박할 수는 없다. 충성은 생명의 면류관을 받아 쓰게 한다. (예화) 추운 겨울에 여행하는 사람이 만난 한 여인은 아이를 업고 있었다. 허나 말에 태워 주었으나 엄마가 죽을 지경이 되자 말에서 내리게 하고 말을 달렸다. 아이를 찾으려는 여인이 악을 쓰며 달여왔고 숨이 턱에 찰만큼 달려온 여인에게 아이를 돌려 주었다. 모두 살았다. 하나님은 우리 모두가 살기를 바라신다.
콘스탄틴 황제가 기독교를 국교로 정한 주후 300년 동안 얼마나 많은 기독교인들이 희생을 당하였는지 우리는 다 헤아릴 수가 없다. 로마의 시가지 밑에 뚫려 있는 카타콤의 광대함은 당시의 상황이 얼마나 극심한 박해였는지를 말한다. 계산에 의하면 885Km 내지 1,207Km로 보고 거기에 매장된 시체의 수는 350만 에서 600만 명까지로 보고 있다. 하나님 나라의 확장을 막기 위하여 사단의 무리는 온갖 수단과 방법을 사용했지만 오히려 하나님의 일을 더욱 돕는 꼴이 되고 말았다.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참 성도의 신앙은 결코 말살해 버릴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여러가지 유혹의 올가미로 접근하여 온다고 하여도 고난의 종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생각하며 신앙의 충성을 드리자. 생명의 면류관의 주인이 될 것이다. (예화) 두 마리의 꿩이 사냥꾼이 쏜 총에 맞아 한 마리는 죽고 또 한 마리는 다리를 절며 살려고 도망간다면 사냥꾼은 어느 것을 잡겠습니까? 그야 물론 산 놈을 먼저 잡으러 갑니다. 이와같이 이미 그 靈이 죽은 사람에게는 시헙이 필요없다. 그러나 살아있는 이는 시험을 받습니다.
Ⅲ.말씀의 경청자가 주인이다.
성령이 교회들에게 주시는 말씀을 들을 수 있는 귀가 있어야 한다. 하나님께서 성도들의 기도를 귀 기울여 들으시는데 하물며 성도가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않아서야 되는가? 귀를 가졌지만 듣지 못한다는 것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하나님의 말씀이 들려져도 무슨 말씀인지 깨닫지 못하는 것은 귀가 어두워서 그렇다. 성령은 마치 우리가 학교에서 뵈어 온 자상한 선생님처럼 우리에게 말씀하신다. 우리가 하나님을 증거할 때에 어떻게 증거할 것인지 무엇을 말할 것인지 가르쳐 주시는 분이시다. 여러분은 성령을 통하여 들려주시는 말씀을 듣는가? 현대에 교회를 통하여 들려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경험하면서 살고 있는지 않는지 알 수 있는 방법은 일상생활에서 표현되는 말로서 알 수가 있다. 나누는 대화에서도 하나님이 함께 하시듯 하자. 어른들이 계시면 앉고 일어서는 것이며 음식을 나눌 때에 가져야 하는 예법이며, 나아가 어른들 앞에서 말씀을 경청하는 일에도 주의해야 한다. 어른들의 말씀이란 대개가 먼저 산 인생의 지혜가 대부분이다. 어른들의 지혜에 귀를 기울이지 않다가 마지막에 후회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가? 하물며 성령이 깨우쳐 주시는 말씀에 귀를 기울이지 아니하다가 영원한 형벌에 던지운다면 그것은 얼마나 서글픈 이야기인가? 겸허한 영혼이 되자. 서머나 교회는 모든 교인들이 환란과 궁핍 속에서 선한 일을 행하며 영혼의 부를 이룩한 교인들이었다. 옥에 던져도, 고난이 극심하여도, 서머나교인들은 이 시련이지나가면 모두가 생명의 면류관을 받아 쓸 영광의 승리자가 된다는 소망을 가지고 서로 격려하고 용기를 나누는 사랑의 교인들이었다.
“라디오 설교를 듣는 것과 교회에 나가서 설교를 듣는 것의 차이는 당신의 여 자 친구와 전화로대화하는 것과 그녀와 직접 만나서 저녁 시간을 보내는 것과 의 차이와 거의 비슷한 것이다.” == MOODY ==
병자에게 건강한 피를 수혈하는 것처럼, 교인의 교회 참석은 필수이다. 모든 성도들이 감격과 소망을 가지고 사는 가운데도 더러는 소외되고 무관심 속에 방치된 사람들이 있다. 이들은 정변이나 어지러운 시기엔 반드시 해를 끼치는 사람으로 돌변하기 쉽다. 이것은 6.25을 통하여 이미 경험한 바있다. 당시 서머나교회도 지배층이면서 세속 문화를 건설하기 위하여 앞장 섰던 유대인들이 가장 악랄하게 사단의 앞잡이로 성도들을 괴롭혔다. 그러므로 우리 주변에 소외받고 있는 분들을 사랑으로 감싸 안아서 사회가 결코 살벌한 곳만은 아님을 걔닫게 해 주어야 한다.
▣맺는말
하나님 앞에 주인없는 면류관을 두게할 수는 없다. 하나님께서 성도들에게 약속하신 이 생명의 면류관이 여러분 모두의 것이 되어야 한다. 이제 우리는 바울 선생이 남겨 주신 말씀을 귀 기울여 들어 보자.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 갈 길을 다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니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 에게니라(딤후 4:7-8)”
버가모 교회:사단의 位 에서
- 계 2:12-17 -
▣들어가는 말
1.皇都(royal city);버가모 공무원과 군인들로 가득차고 하국적인 지식인으로 가득 찬 대학교 의과 대학 부속 병원과 변질된 괴이한 종교들이 적잖게 있는 도시, 버가모시이다. 서머나 북쪽 56km지점에 있는 버가모는 일곱 도시 중 가장 북쪽에 위치하며 거대한 요새와 같은 언덕에 위치한 멋진 도시였다. 필레태루스가 리시마쿠스 왕과 맺은 동맹을 끊고 B.C.282년에 버가모 왕국을 설립하면서, 버가모는 그탁월함을 나타냈다. 요한이 이 편지를 보낼 당시 버가모는 한 로마 지방의 행정 중심지였고 아시아에서 가장 중요한 도시였다. ‘사데나 또는 에베소에서와 같이 불안전성이나 불확실성을 야기시킬 만한 것은 없고, 영구성과 강력함과 튼튼한 권세와 큰 규모라는 인상을 반드시 받게 된다.’
2.버가모의 종교
세계에서 신전으로 모여들었는데 그 곳은 환자 간호병실과 연구하려는 자들을 위한 의술학교가 있었다. 제우스라는 神과 아스클레피오스神을 ‘구세주’로 소개했는데, 그런 표현은 그리스도만을 메시야로 믿는로 그리스도인들을 거슬리게 하였다. 아스클레피오스는 뱀의 모습을 한 신이었고, 버가모에서 보았던 뱀은 거의 어느 곳에서든 찾아볼 수 있는 것이었다. 어떤 동전에는 황제 카라칼라가 뱀 앞에서 오른손을 치켜 들고 경의 표하는 모습이 새겨져 있다. 고대에서 오른손을 든다는것은 숭배한다는 제스추어이다. 모패트는 시 144편의 기도를 그 입술에다 거짓말을 두며 거짓 맹세로 오른팔을 치켜 든 이러한 이방의 대군으로부터 구출되기를 바라는 요청으로 번역한다(시 144:7-8) 길들인 뱀들을 신전 건물에서 키웠고 그 뱀들은 환자의 치유책과 연관되었다. 치료받기를 원하는 환자들은 캄캄한 시간에 뱀들중 한 마리가 옆으로 지나가다 스치기를 바라는 심정으로 신전에서 밤을 지새웠을 것이다. 뱀의 접촉은 아스클레피오스의 접촉이므로 즉시 치유가 뒤따라온다고 하였다. 그러나 뱀의 상징을 버가모가 사단의 위가 있는 곳이라고 하는 또 다른 이유였다고 상상할 필요는 없다..-은혜목회정보- 97.11 ☞설교/박성규목사
▣본론
1.사단의 위가 있는 곳 예수께서 버가모를 ‘사단의 위가 있는’(13절)곳이라고 묘사한 가장 분명한 이유은 제우스를 위한 제단 때문이다. 언덕 정상 가까이에 우뚝 솟은 바위에 세위진 놓이 6m, 사방 27m크기의 제단이었다. 뱀 꼬리를 단 억센 거인으로 묘사된 가울 인을 헬라 신들이 패배시킨 것을 보여주는 동상이었다. 고대 올림피아 인들이 한때 ‘제우스는 구세주이시다’라고 오만하게 주장했던 말은 기독교 시대에서는 분명히 신성 모독적인 것이었다.
2.‘네가 어디 사는 것을 내가 아노니’
신약성경은 세상에 사는 그리스도인의 생활을 나그네라고 하였다. 이 세상이 우리의 영구한 집이 아니라 다만 천성을 향해 그 길을 지나가는 순례자에 불과하다. ‘네가 어디 사는 것을 내가 아노니’(13절)라 엣 번역이 ‘거하다’(dwell)라고 표현했는데 마음대로 거주지를 옮길 수 없음과 버가모에 사는 그리스도인들이 다른 방법을 갖고 있지 않음을 말한다. 떠날 수 없는 삶의 터전을 잡은 곳이었다. 버가모에 분위기는 ‘지식은 힘이다’는 것이었다. 버가모 도서관은 20만 권이 넘는 장서를 소장했다. 세계 굴지의 도서관 중 하나로 간주되었고 유메네스는 알렉산드리아의 사서를 설득하여 버가모로 어떻게든 데려왔다. 그는 송아지 가죽을 이용하여 부드럽고 품위있게 가공처리 하여 요지를 만들었는데 내구력이 아주 좋아 ‘버가모 紙’하면 최고의 상품이었다. 영어에서 쓰고 있는 ‘양피지(파피루스)’라는 말이 여기에서 나왔다. 버가모 사람들은 도서관을 자랑했고 그것을 모든 지식의 보고로 생각했다. 버가모 시민들은 기독교의 계시 진리관을 반대하고 그들의 도서관을 내세웠을 것이다.
2.신앙을 지킨 버가모교회
1)하나님의 말씀이 그들의 지성을 사로 잡았다. 하나님의 말씀에 사로 잡히는 것이다. ‘네가 내 이름을 굳게 잡아서」(13절)라는 구절에서 그러한 표지를 볼 수 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자기 자신에 관해 계시하셨던 모든 것과 그가 행하신 모든 것을 내포한다. 우리는 규칙적으로 성경을 공부하여 계시의 부요함을 캐니야만 한다. 처음 성경을 대할 때는 그 보화의 풍부함을 살피기가 항상 쉬운 것은 아니다.
2)지성에서 마음으로 이기는 자에게 필요한 진리는, 냉랭한 추상적 개념으로 지성에만 머물러 있지 않고 즉시 삶에 적용된다. 그것이 바로 예수께서 ’나를 믿는 믿음을 저버리지 아니하였도다‘(13절)라고 계속 말씀한 이유이다. 진리는 우리의 지성만을 사로잡아서는 안 되고 우리의 삶을 사로잡는 데로 나아가야만 한다. 버가모와 같은 어려운 곳이든 또는 이에 상응하는 현대의 어려운 곳이든 상관하지 않는다.
3)충성된 증인 충성된 증인은 전하는 일을 성실히 한다. 예수님은 ’너희 성에서 죽임을 당했던‘(13절 NIV) 안디바의 날에도 일어났다고 말씀한다. 버가모에서 사는 충성된 자들 중에 ‘발람의 교훈’을 지키는 (14절)자들도 있었다. 여기에서 타협에 대한 고전적인 상황이 나타난다. 발람의 교활한 계획은 이방 음식과 이방 여인으로써 온 이스라엘의 온 정신을 침식시키는 것이었다(민 31:16). 발락에게 발람이 있었던 것처럼 버가모 사람들을 꾀어 우상의 제물을 먹게 하고 또 한 행음하게 하여 범죄케 한‘(14절) 거짓 교사들이 있었다. 니골라당의 교훈이 사실상 그와 같은 것이었다. ‘이와 같이 네게도 니골라 당의 교훈을 지키는 자들이 있도다’(15절) 대부분이 가장 무서운 이교 철학에 반대하여 굳게 서 있으면서도, 그들은 그들 가운데서 도덕적 표준을 낮게 잡는 것을 관용하는 소수의 무리들이 그들 가운데서 발전하도록 방치하여 두었다. 한편 기독교 진리를 받아들이면서도, 다른 한편 세상의 표준을 용인하는 것은 타협하는 것이다. 오늘날도 그것을 마주 대하고 때때로 타협의 원리는 논쟁점만 바꾸고 있다. 믿는 자들은 악이 너무 많아서 ‘사단의 위가 있는’곳으로 묘사될 수 있는 여러 도시에 살고 있다. 그래서 적당히 이해하고 눈 감고 살려는 방법을 택하는 교인들이 많이 있었다. 그러나 버가모 교인들은 그들의 환경을 받아들이기는 하되 동시에 그들은 예수를 ‘굳게 잡아야’만 하는 것이다(13절). 우리는 부패된 사회의 소금으로, 어두운 세상의 빛으로 불리는 자들이다.
3.타협하는 현대
우리가 삶에서 이중적 표준을 허용하면 타협으로 빠지고 만다. 우리가 하나님 과 안식일과 이웃에 관한 표준을 쉽게 타협하는 것을 본다. 예를 들면, 만약 우리가 도적질하지 않는다 해도 우리의 지출 액수를 속인다거나 늦게 출근한다거나 점심 시간을 길게 갖는다면 고용주에게 훔치고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어떤 것을 도적질한다것 - 누군가 다른이에게 가야 할 시간, 소유권, 사랑, 또는 칭찬 -은 미끄러운 타협의 비탈길에 서기 시작한 것이다.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일획이라도 반드시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마 5:18)고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우리는 율법주의자가 되어서는 안 되지만 동시에 율법의 문자뿐만 아니라 율법의 정신에 복종해야만 한다. 만약 우리가 이렇게 행하지 않는다면 발람 당이나 니골라 당보나 나을 것이 없다. 이런 차원에서 도움을 줄 실질적인 일차 단계는 각자가 오늘 순종해야 할 바로 느끼는 점을 적어 둘 노트를 가지고서 십계명(출 20:1-17)을 공부하는 것일 수도 있다.
예화) 1952년 7월 3일 한국에 출전한 미국의 공군대령 데오도어 헤리스는 비 29 기가 추락하여 벼밭으로 낙하했습니다. 벼밭은 온통 불바다가 되었습니다. 그는 곧 중공군에게 체포되었습니다. 중공군은 의약품의 투여도 없이 땅굴 속에 그를 가두어 두었습니다. 영하의 강추위를 막아주는 것이라곤 소량의 붕대밖에 없었습니다. 14개월동안 중공군은 무자비하게 그를 고문했습니다. 그가 강요받은 것은 미국이 한국전역에 세균을 퍼뜨렸다는 서류에 서명하라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사실과 전혀 달랐습니다. 그래서 그는 그 서류에 서명하지 않았습니다. 그 고문은 1953년 9월, 포로교환 때까지 계속되었습니다. 해리스 대령이 굳게 믿었던 것은 사실은 사실대로 알고 있었기 때문에 결코 그 사실을 부인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버가모 교회의 그리스도인들이 극심한 핍박을 겪었지만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분에 대한 믿음을 부인하지 않았습니다. 우리도 이 처럼 우리의 신앙의 절개를 지켜 하나님의 일을 빛나게하는 사람이 되자.
4.검으로 심판함
’내 입의 검‘이라는 묘사로 인해 우리는 다시 모든 문제에 있어서 최종적인 권위를 가지신 예수에게로 초점을 돌리게 된다. 그런데 검은 이제 의례상의 용도로서가 아니라 심판하는 데 휘둘러지고 있다. 예수께서는 이미 요한을 통하여 이런 주제를 말씀하신 바 있었다. “나를 저버리고 내 말을 받지 아니하는 자를 심판할 이가 있으니 곧 나의 한 그 말이 마지막 날에 저를 심판하리라(요 12:48)” 만일 교회가 말씀하신 바를 주의하지 않는다면, 일찍이 오래전 타협자 발람이 그러했듯이 심판의 검에 의해 죽임당할 것이다.
▣맺는말
1.많은 교회는 교회의 정체성을 분명히 하라.
현대 세계는 버가모의 상황과 아주 비슷하다. 그리스도인이 되기에 용이한 곳이 없다. 주님은 현대의 교회들이 비록 사단의 힘이 있는 곳에 자리잡게 될 수도 있으나, 신앙의 표준을 지켜나가는 충성된 증인들이 되기를 원하신다. 신앙과 행동 모든 면에서 견해를 분명히 하는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한다. 버가모 교회의 그리스도인들이 했던 것처럼 그리스도의 이름을 높이 치켜 들었다. 교회가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생활을 하는 방법으로서 세상이 우리로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살고 행동하도록 요구하는 이 시대에 그리스도인들은 달라야 한다. 여러분이 그리스도인임을 죄인이 알게 하는 유일한 방법은 메시아의 삶을 닮아가는 생을 살므로써 죄인과 다른 삶을 사는 것이다. 신앙에 유해한 불의에 관하여서는자기가 지지하거나 거절하는 태도를 분명히 하라.
예화) 어느날 어린 소년이 아버지가 지붕을 고치기 위해서 집 꼭대기에 계신 것 을 보았습니다. 소년은 자기도 지붕에 올려 달라고 아버지에게 부탁했습니다. 「좋아, 그럼 사다리를 타고 올라 오너라. 나만 똑바로 쳐다보면서 올라와야 된다. 그러면 잘 될거다」라고 아버지는 말했습니다. 어린 소년은 사다리를 타고 오르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반쯤 올라 왔을 때 얼마큼이나 올라왔나 보려고 아래를 내려다 보았습니다. 소년은 무서워서 그만 울음 을 터뜨렸습니다. 「애야, 아래를 내려다 보아선 안돼, 그냥 위만 쳐다보고 올라와야지!」 아버지가 이렇게 소리치자 소년은 아버지의 얼굴만 똑바로 쳐다보며 기어 올랐습니다. 마침내 소년은 무사히 아버지의 손을 붙잡았습니다. 우리는 마치 이 어린 아이와 같지 않습니까? 어려움들이 우리를 휩쌀 때 우리는 하나님을 바라보지 못하고 고난만을 내려다 봅니다. 그러나 여러분, 그는 우리의 모든 고난보다도 훨씬 크십니다. 그러므로 위만 쳐다보고 올라 가십시요. 그러면 여러분과 예수님은 마침내 승리하게 될 것입니다.
2.교회에게 주시는 말씀
‘그러므로 회개하라!’(16절) 온 교회는 이 힘찬 명령의 말씀을 진해 듣는다. 그들이 기꺼이 거짓 교사를 관대하게 묵인한 사실에 대해 그들 모두가 책임이 있는 것이다. 경계심 이상의 어던 것이 필요하였다. 즉 오직 회개해야 했다. 그들은 진리가 요구하는 것보다 더 낮은 표준들을 받아들였던 점에서 자신을 깨끗하게 할 필요가 있었다. 교회는 즉각 이에 순종해야 한다. 그리하지 아니하면‘예수께서 ‘내가 네게 속히 임하여 내 입의 검으로 그들과 싸우리라’(16절)고 말씀하신다. 이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멸시하다 결국 ‘여호와의 사자가 손에 칼을 빼어 들고 길에 선(민 22:31)’ 까닭에 길을 멈추지 않을 수 없었던 발람의 경우보다 한층 더한 말씀이다. 한편, 문제의 결과이었을 회개가 있었으면 하였는데 발람은 경고를 받고도 그만두지 않았으므로 그의 비극적 종말은 이렇게 전해진다.‘또 브올의 아들 발람을 칼로 죽였더라(민 31:8)’
3.이기는 자에게 주는 약속
예수께서는 신속히 그의 말씀을 모든 사람이 유의해야 한다고 경고하신다.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 지어다(17절)’ 그리고 그는 이 편지를 이기는 자들에 대한 약속들로써 결론 짓는다. 승리자들은 만족게 될 것이다. 17절에서 우리는 백성을 배교의 길로 인도하려 했던 발람의 시도와 연관시켜 앞에서 언급한 바 있는 이스라엘 광야 여행의 시기로 되돌아가게 된다. 이 시기의 강조점은 하나님께서 만나를 예비하신 데 있다. 만나를 담은 금항아리를 언약궤 속에 둠으로써(출 16:33;히 9:4)백성들은 하나님께서 사막에서라도 그들을 만족게 하셨다는 사실을 결코 잊지 않았을 것이다. 이기는 자들에 대한 예수의 약속은, 만약 그들이 스스로 우상에게 바쳤었던 달콤한 것들을 받지 않겠다고 거절한다면 그가 숨겨 두신 만나로써 그들을 만족게 하실 것이라고 한다. 그들은 다윗이 ‘하늘 양식’또는 ‘천사의 떡’(한글 개역 성경은 ‘권세 있는 자의 떡’; 시 7:24-25)이라고 칭한 것을 먹게 되었다. 분명히 그들은 참 만나이신 예수님 그분으로써 만족하게 되었다(참 요 16:51)
두아디라 교회:이세벨의 흉계
- 계 2:18-29 -
▣들어가는 말
Ⅰ.두아디라 지역
1)보잘것없는 지역 저명한 저술가도 없고 어떤 분야에서도 두아디라를 자기 출생지라고 밝힌 유명인사는 없었다. 어떤 도시도 하나의 요새로서 위풍이나 그 견고함에 있어서 자연적으로 두아디라보다 못한 곳은 없었다. 두아디라는 앞이 훤히 트인 골짜기에 위치하며, 완만히 경사진 언덕과 접해 있었다. 그러나 그 골짜기를 그늘지게 하고도 남았다.‘그런 상황잉 주는 전체적 인상은 연약하고 종속적이며 의존적이다.’
2)수비대 주둔지역 두아디라가 존재하는 이유는 버가모에 이르는 카이쿠스 강 유역 입구를 방어하는 제일차방어선이라는 수비대 역할에 두고 있다. 그 도시에서 사용한 동전들은 군인처럼 무장한 여인이 새겨 있다.
3)자주 장사 두아디라산 자주 옷감과 의복을 파는 산업이 융성했다. 자주색 상품과 의복이 고대 세계에서 가장 값비싼 염료는 페니키아와 스파르타 해안 근해에서 잡히는 무렉스(Murex)라는 조개의 주둥이에서 취한 것이었고, 그 다음은 두아디라에서 나는 염료가 종종 ‘터기 레드(Turkey red)의 뿌리에서 채취되었는데, 그것은 담쟁이처럼 기어오르는 초록색 식물로서 두아디라 성 근처 여러 계곡에 무성히 자라는 식물이었다. 그리고 工業人組合이 있어서 활발한 연합활동을 하였다. 이들은 서로 상당한 영향을 주는 단체로서 종교에서 깊숙히 관여하였다..-은혜목회정보- 97.11 ☞설교/박성규목사
Ⅱ.두아디라 교회의 모습
1.사업과 사랑과 믿음과 섬김과 인내
1)사업 두아디라 교회는 교회가 해야할 사업들 즉, 구제와 보사와 선교 등의 일을 성실히 수행하였다. 옛날에 어떤 사람이 길을 가다가 길가에 누워있는 세 사람의 게으름뱅이를 만났습니다. 이 사람은 이 세 사람 중에서 가장 게으른 자에게 15센트짜리 동전을 주겠노라고 제안했습니다. 첫번째 게으름뱅이가 펄쩍 일어나더니 자기가 다른 두 사람보다도 더 게으른 자라고 하면서 동전을 달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첫번째 게으름뱅이는 끝내 동전을 얻지 못했습니다. 두번째 게으름뱅이는 누워있는 채 로 몸을 돌리더니 자기가 제일 게으른 사람이라고 주장하면서 그 상을 달라고 했습니다. 두번째 게으름뱅이에게도 그 동전은 돌아가지 못했습니다. 세번째 게으름쟁이는 그대로 움직이지도 않은채 「그 동전을 내 호주머니 속에 집어 넣으시오」라고 말했습니다. 그가 가장 게으른 자였습니다. 여러분, 사업이나 스포츠나 어떤 회합이라면 그토록 부지런한 신자가 주님의 일이라면 솔직히 말씀드려 게으른 사람이 우리 교회 안에는 너무나 많습니다. 그러나 두아디라 교회는 일하는 교회였습니다. 그 교회는 사교 장소가 아니었고, 서로 칭찬만 해대는 사람들의 모임도 아니고 병약한 종교인만 수용하는 병원도 아니었습니다. 그 교회는 능동적으로 일하는데 힘이 넘치는 교인들이 있는 교회였습니다.
2)사랑과 믿음과 인내의 순서 “사랑”이 첫 머리에 놓은 것을 보면, 이 교회는 사랑에 부요한듯하다. 그러나 여기 나온 語順으로 보아 사랑 다음에 “믿음”이 놓였으니, 이 교회의 경건이 순리대로는 자라지 못했다는 의미가 포함된 듯하다(살전 1:3,3:6,5:8 참조) 사랑은 , 마땅히 믿음을 근본으로 하고 나와야 하나님 중심이다. 먼저 계시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거기서 나타나는 결실로서 사랑이 와야 할 것이다. 그러나 두아디라 교회는, 소위 “사랑”을 앞 세우다가 “믿음”(하나님의 말씀대로 믿는 믿음)을 둘째로 여긴 듯하다. 따라서 그 교회는 진리를 기본으로 지키지 않고, 포옹주의 사랑만 위주하다가 비진리 곧, 이세벨 이단같은 것을 포용하게 된 듯하다. 그것은 우선순위를 바로 정립하지 못한 잘 못으로 생긴 결과이다.
3)일의 발전을 칭찬 받는 교회 나중 행위가 처음 행위보다 훨씬 휼륭한 교회로 칭찬받았다. 쓸모있는 교회로 성장하고 있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활동을 넓어가고 깊어가는 교회였다. 교인 한사람, 한 사람이 모여서 처음 구원을 얻었을 때 보다 더욱 신앙의 발전이 있는 교인으로 성장해 가고 있었다. 이 사실은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일이었다.
2.두아디라 교회의 문제//이세벨 여인을 용납하는 잘못
①사랑과 믿음과 섬김과 인내의 행위가 알려진 작은 무리(19,26) ②자칭 선지라는 하는 이세벨에 의해 좌우되는 자들(20)
1)구약의이세벨과 두아디라교회의 이세벨의 관계성 이세벨은 이스라엘의 하나님께 대한 예배를 우상숭배로 바꾸려고 끊임없이 시도한 여인이었다. 구약성경의 이세벨은 시돈 왕 옛바알의 딸이었고 바알의 철저한 추종자였다.(왕상16:31). 그냐는 바알의 여대제사장이었고 종교적 음행과 술수를 이스라엘에 들여오는 것을 책임졌던 인물이다. 결혼에 의해 성립된 시돈과의 거래로 이스라엘은 갑작스럽게 번영과 큰 富를 안게 되었다. 아합 왕과 그 백성이 이세벨에 의해 매료당하게 되었다. 그녀는 그들에게 강한 충동을 느끼게 하여 그들을 바알 우상 앞에 무릎을 끓게 하였다. 두아디라의 이세벨 또한 특권을 가진 위치에 있었다.아합 왕후는 이스라엘의 모든 일에 관계하였고, 새 이세벨은 두아디라 교회에 관계하였다. 우리는 이세벨이 어떤 인물이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대단한 매력과 정열을 가지고 교회를 배교의 길로 이끌었음을 알게 된다. 그 교회는 거룩성에 대한 감각을 잃었으며,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믿음의 중심에서 떠나가셨고 영적생활의 붕괴가 일어났다.
엘리야가 이여자를 두고 예언하기를, (1)개가 그 죽은 시체를 핥으리라고 하였는데(왕상 21:23), 과연 그대로 성취 되어 예후로 말미암아 창문에서 내려 던지움이 되어 떨어져 죽었고(왕하 9:33), (2)그 자녀들에 관하여 예언하기를, 하나님께서 그들을 다 멸망시키리라고 하였 는데(왕상21:21), 과연 그대로 성취되었다.(왕하 9:6-37). (3)이세벨의 상에서 먹는 바알 선지 450인을 죽였다(왕상 19:40)위의 세 큰 사건은 계 2:22,23의 세 큰 위협과 부합한다.
계시록에 이세벨에게 대하여 보이신 세 큰 위협은 ①그 여자 자신을 병상에 던져 죽일 것(22절), ②그와 음행하는 자, 그의 교훈과 타협하면서 교역하는 자들을 환난 중에 던점, ③그의 자년 곧, 완전히 그에게로 귀속한 자들을 죽임이다. 그러므로 두아디라 교회의 이세벨은 외래의 이교 인물로서 자기의 사상을 가지고 복음을 변경시킨 자이다.
2)교회에성의 여성의 위치 이세벨이 여인이기 때문에 정죄받는것이 아니라 많은 사람들을 배교의 길로 이끌었던 그 사역의 마귀적 성질에 있다. 교회에서 여성의 위치에 관해 알아야 한다. 예수께서는 여성에 대한 태도에서 혁명적이었다. 예수께서는 유대 랍비적 전통에 따라 여성에게 부가된 제한성을 인정하셨지만 여성의 신분에 어던 훼손이 가는 것을 극구 반대하시고, 그를 따르는 제자가 되도록 용기를 불어넣어 주셨다. 초대 교회는 여인들의 사역을 통해서(롬 16:13-5,6,12,15) 대단한 유익을 얻었을 뿐만 아니라, 그들의 기도를 통해서(행 16:13;고전 11:13)와 손 접대 및 교회의 모임 장소와 가르침을 위해 그들의 집을 내어 준 사실을 통해서(행 16:15, 40;18:1-3, 24-26; 롬16:3-5; 고전16:19) 적지않은 유익을 받았음에 틀림없다. 그들의 영적은사가 인정받게 되었고(행 21:9) 심지어 공적 예배에서 까지 발휘되였다.(고전11:5) 우리는 적어도 뵈뵈가 집사라는 공적 칭호를 받은 것으로 안다 (롬 16:1). 우리 임의대로 그들이 활약하고 있었던 모든 것을 신약성경에서 방치할 수 없는 것은, 두 구절(고전 14:34, 딤전 2:12)에 대한 올바른 해석을 아직 모르고 있기 때문이다.
3)교우들의 자기 진단 초기 주석가들 중에서 되풀이된 한 주제는 이세벨이 사도행전에 나오는 루디아(행16:14)와 일치하는 여인이라고 한 점이다. 이것이 사실이라는 어떤 확실한 증거는 없다. 그러나, 만약 사실이라 한다면, 그것은 초기의 영적 생활에 아주 큰 위험을 안고 있었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 될 것이며 그리고는 성경적 진리로부터 떠내려 간 것으로 말해야 할 것이다. 그것은 족히 두아디라 교회에 보내는 이 편지의 주요한 요점에 대한 묘사일 수도 있다.
Ⅲ.오늘의 우리에게 주시는 교훈
1.주님은 그 마음을 보신다
’마음을 아는 자‘란 신약성경에서 하나님께 사용된 칭호이다(행1:24;15:8). 예수께서 말씀하시기를, ’나는 사람의 뜻과 마음을 살피는 자이다‘(23절)라고 하기 때문에 족히 예수를 가리킬 수 없는 칭호이다. 사람은 외모에 너무나 쉽게 속을 수 있기 때문에 “나의 보는 것은 사람과 같지 아니하니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삼상16:7). 예수는 마음을 아는 분이시다. 그는 항상 사물의 단순한 외모보다는 더 깊은 데를 들여다 보신다. (예화) 한 사진작가 아름답고 젊은 여성의 사진을 찍었습니다. 그녀의 얼굴빛은 분명한 것처럼 보였지만 필름을 현상해 보았을 때 그녀의 얼굴에 선명하면서도 이상한 반점이 나타나 보였습니다. 이 사진작가는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행여 카메라에 무슨 이상이 없는가를 조사해 보았습니다. 그러나 후에 그 여성의 어머니를 만났는데 딸이 어렸을 때 홍역을 앓았다고 말해 주는 것이었습니다. 인간의 눈으로 볼 수 없었던 것을 카메라의 면밀한 눈은 그것을 놓치지 않았습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 우리를 내려다 보실때, 누구도 볼 수 없는 것들을 보실 수 있습니다. 우리의 삶들을 망치게 하는 것들을 단 하나도 놓치지 않습니다.
2.내가 너희 각 사람에게 갚아 주리라 ’내가 너희 각 사람의 행위대로 갚아주리라‘(23절)는 말씀은 이세벨을 따른는 자들에 대한 심판의 최종적인 말씀이다. 결국 그들에게 갑자기 임한 형벌은 그들의 죄와 그 추문만큼이나 널리 알려졌을 것이다. 왜냐하면 ’모든교회‘(23절)가 드디어, 예수의 감찰하시는 눈은 마음을 속속들이 들어다볼 수 있는 눈이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너희 각 사람‘이라는 짧은 구절은 심판이 개개인에게 내려질 것이라는 의미였다. 우리는 두아디라에 일어났던 사건이 무엇인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그것은 대단히 관심을 끌 만한 것이지만, 성경이나 역사 모두 이세벨과 그 추종자들에게 갑자기 내린 형벌에 대해서는 언급하고 있지 않다. 우리는 오로지 타협자들에 대한 엄중한 경고에 눈을 돌려야 합니다. (예화) 어떤 아프리카 선교사가 원주민들에게 「주께서는 빛 가운데서나 어두움 가운데서나 우리를 보시는 도다」라는 말씀을 읽어 주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하나님께서는 어두움 속에서도 우리를 보실 수 있다고 그들에게 설명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웃으면서 「웃기지 마시요, 우리가 밤에 방안에 있으면 얼마나 컴컴한테 누가 들여다 볼 수 있단 말이요」라고 말했습니다. 이 불쌍한 아프리카 토인은 우리가 무슨 일이든지 할 수 있으며 하나님의 눈을 피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잘못을 우리처럼 범하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두아디라교회의 죄인을 보셨듯이 오늘 우리를 보고 계십니다.
3.현재의 심판과 장차 임할 심판
예수께서는 그의 교회를 감독하시기도 하고 심판도 게을리하지 않으신다. 성경이 말하는 심판이란 계속되는 과정으로서의 심판과 최종적 사건으로서의 심판 양자를 말한다. 우리가 이미 에베소 교회에 대한 보고에서 살펴본 대로 ‘촛대’는 회중에게서 다른데로 옮겨질 수도 있다(계2:5). 촛대는 예수께서 말씀하신 모든 것에 대해 완고하게 불순종하면 옮겨지고 만다. 만일 우리가 습관적으로 불순종하지만 않는다면 전혀 두려울 것은 없다.
사데교회:죽은 사실을 모르는 교회
- 계 3:1-6 -
▣들어가는 말
1.사데 市 사데는 트몰루스山의 한 봉우리 위에 세워졌는데, 삼면이 450m나 되는 깎아지른 듯한 벼랑으로 되어 있어서 트몰루스 산맥과 연결하는 남쪽에 위치하는 협로를 통해서만 접근 가능한 난공 불락의 요새였다. 고대 왕국 루디아의 도읍이었으며 접근 불가능한 돌출 바위턱 높은 곳에 위치한 유명한 도시로서 소동하던 소아시아의 초기에도 사데는 안전했다. 사데가 헬라어로 복수 명사가 되었는데 이는 산 아래에 신시가지가 생겼기 때문인데 성경에서는 깍아지른 듯한 절벽 위에 세워진 성읍 언급한다.
2.전설적인 부
1)농산물 교역 루디아 왕들은 비옥한 헤르무스 유역의 농산물을 교역하여 엄청난 부를 얻었다.루디아 왕 중 가장 유명한 왕 크로에수스는 거부의 대명사로서, 그의 이름을 능가한 자는 아무도 없다. 아시아에서 최초로 주조된 동전을 크로에수스 통치할 떄 사데에서 만들어진 것이다. 세련되지 못했지만 현대적인 금속화폐로는 최초의 것이다..-은혜목회정보- 97.11 ☞설교/박성규목사
2)사금(砂金) 당시 헤르무스 유역에서 위로 높이 치솟은 곳에 위치한 사데 성읍 주위를 흐르는헤로도투스江은 트몰루스 산 꼭대기에서 발원하여 북쪽으로 흘러 헤르무스 유역으로 흘러 내리는데 그 강은 사금을 많이 실어 내렸다. 이 도시는 고대인에게 많은 양의 금을 제공했는데 적은 수의 성읍이 평온하면서 더욱 부요해졌다.
▣본론
1.이기는 자가 모두를 취한다.(히로에아데스의 이야기 이해를 위하여)
크로에수스 왕은 든든한 재력으로 막강한 군대를 일으키고 小아시아의 많은 곳을 차지하자 교만해져서, 전세계를 연일 하나하나 정복하고 있던 고레스라는 페르시아의 강력한 왕에 관해 과소 편가하기 시작했다. 고레스와 임전중에 그가 델피 신전에서 어떻게 전쟁해야 하는지를 묻자, 아폴로는 “만일 네가 하릴스 강을 건너기만 하면 대제국을 멸망시킬 것이다”
그래서 크로에수스는 군대를 할리스 강을 도하하도록 하였는데 여기에서 실패하여 자기 제국을 멸망의 자리에 몰아 넣고 말았다. 최후의 방어지로 안전하다고 판단한 요새인 자기 성읍으로 퇴각한 후, 장기간의 포위 공격을 견디어 내었다. 음식물이 풍부하였고 파크톨루스 강이 물을 공급하여 주었다. 포위 공격을 당하고 있었으나매일이 그 병사들에게는 힘을 회복하는 특별한 날이 되었을 것이다. 크로에수스는 병법의 천재 고레스 왕에게 떠오를 어떤 착상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자기 계획을 세웠다. 고레스는 사데로 들어가는 길을 찾는 자에게 상급을 주겠다고 약속했다. 히로에아데스라는 병사가 사데 성읍을 두르고 있는 깎아지른 듯한 절벽을 살피던 중, 보초병들이 아주 자만에 빠져 거의 자기 직무를 성실히 이행하지 않고 있어서 방위가 허술하다는 것을 알아냈다. 히로에아데스는 그 병사가 야생 염소가 다니는 길로 내려와 그 투구를 주워 가지고 성벽으로 쉽게 기어오르는 것을 보았다. 그는 절벽이 보이는 것 처럼 가파르지 않아서 기어오를 수 있는 것임을 보게 되었다. 그 날 밤 히로에아데스는 몇 명의 병사를 이끌어 절벽을 타고 성안으로 들어가 쉽게 사데 성읍을 점령하였다. 페르시아는 B.C.549년 사데를 점령하였고, 300년 동안 그곳을 아시아 총독 본부로 사용하였다. 그후 B.C 218년 안티오쿠스 대제에 의해서도 점령되었는데, 그때도 병사 중 하나가 히로에아데스의 방법을 되풀이 하여 점령했다.
2.죽은 교회
예수은 ‘하나님의 일곱 영과 일곱 별을 가진 이가 가라사대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죽은 자로다’(3:1).라고 했다. 주님은 이 성읍에 사는 그리스도인들을 자세히 살피셨다. 주께서 도덕법의 위반이나 부도덕성, 혹은 발람 당과 니골라 당과 같은 그런 분파와 관련된 어떤 것도 그들에게서 보지 못했고 이세벨과 같은 어떤 거짓 선지자도 없었다. 마찬가지로 외부로부터의 어떤 핍박도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유대인들의 핍박과 고발도 없었다. 만약 우리가 이 교회를 외형으로 본다면 아주 잘 활동하고 있었다는 결론을 내렸을 것이다. 사데 교회는 좋은 회중을 가졌고 활기 있는 예배를 드렸으며 적합한 교훈을 받았음에도 틀림없었다. 사데교회가 좋은 주일학교 프로그램을 갖고 있므며 환상적인 건축물을 설계하고 선교 헌금을 약정하는 등 많은 활동을 하였다. 그 어떤 것도 최상으로 하는 교회였다. 그러나 그것은 단지 생명의 껍데기일 뿐이었고, 실상은 죽은 교회였다. 우리는 활동을 생명과 혼동해서는 안 된다. 교회는 무엇보다도 하나님을 사랑하고 섬기고 예배하고 그 교훈에 복종하고자 하는 믿는 자들의 무리이다. 참된 교회의 중심에는 하나님께서 말씀가운데 나타내신 모든 뜻을 깨달으며 하나님 앞에서 겸손이 걷고자 하는 사람들의 무리이다. (예화) 박물관에 가서 여러 종류의 짐승들과 조류들을 본 적이 있습니다. 모두 다 똑바로 서 있고 더할 나위 없는 포즈를 취하고 있었습니다. 그 눈들은 외견상으로 광채가 번득이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중에 어떤 것 하나도 생명의 흔적은 전혀 찾아 볼 수 없었습니다. 그것들은 죽은 짐승들과 새들의 박제에 불과했습니다. 몇몇 교회들이 이처럼 보기와는 딴판인 것이 많습니다.
3.죽은 교회를 살리시는 주님.
예수은 세 사람을 살리셨다. 1)마르다와 마리아의 오라버니이자 주님의 친구였던 나사로일 것이다. 장례가 끝나 시체가 땅에 묻혀 있는 상태에서 주님은 나사로를 다시 살리시겠다 하자, 시체가 ‘나홀’(요 11:17)동안이나 땅에 묻혀 있었다는 것과 ‘악취’(요11:39)가 날 것이라는 말을 했다. K.J.V.에는 ‘지금쯤은 그가 코를 찌를 듯한 냄새를 풍길 것입니다’라고 마르다의 말을 표현하고 있다. 죽은악취가 난다. 2)나인成 과부의 아들을 살리시기도 하셨다(눅 7:11-15). 예수은 장례 행렬에 가까이 접근하여 낙망한 여인과 생명이 없는 싸늘한 시체를 보셨다. 죽은 교회는 복음 진리를 왜곡하지는 않을지라도 죽은 상태나 다름없는 성장과 성숙이 정지된 상태의 시체같은 교회들도 있다. 3)야이로의 딸이었다.(눅 8:40-42,49-56). 예수께서 마치 잠자고 있는듯, 어리고 귀엽게 보기는 하지만 죽은 상태로 눕혀있는 아이를 보신다. 죽은 교회이라도 생명이 없는 것처럼 보이지는 않는다. 그 외형은 매력이 있고 따뜻해 보일 수 있지만 하나님께서 주신 생명이 없으므로 죽은 교회인 것이다. ‘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한편 ‘죽은’(3:1)상태이기가 십상이다.
1)깨어나라!
‘만일 일깨지 아니하면 내가 도적같이 이르리니 어느 시에 네게 임할는지 네가 알지 못하리라’(3절). 사데는 제일 믿었던 곳 때문에 방어에 실패했었다. 패주한 크로에수스 왕은 요새로 성으로 퇴각하고는 안전하다고 느꼈고 어떤 포위 공략을 취해도 끝까지 버틸 수 있다고 보았다.크로에수스 왕이 믿었으나 절벽을 기어오를 수 있는 그의 능력이 전혀 고려되지 않았다. 히로에아데스는 전혀 예기치 않은 순간에 도적같이 왔다. 그렇게 안전하다고 믿었던 성읍은 쉽게 무너지고 말았다. 예수께서 사데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에게 ‘만일 일깨지 아니하면 내가 너를 심판하려고 이처럼 네게 임할 것이다’(3절)라고 말씀하신다. 겨우 유지하는 신앙을 부등켜 안고 지탱하고 있으면 ‘내가 네게 너의 패망을 가져다 주겠다’(3절)는 말씀을 겸손히 들어야 한다. 가장 자랑스럽게 여기는 곳을 조심해야 한다. 자신을 점검하고 작은 것일지라도 셈세히 살피지 않는 그런 교회를 향해 ‘깨어나라’(2절)고 명하신다.취약한 곳만이 공격받는 것이 아니라 사데처럼, 강하고 안전하다 느끼는 지점에서 패할 수 있다. 우리가 강하다고 마음을 가다듬지 않을 때, 패배하고 만다. 사단의 공격을 대적할 수 있을 때는 오직 크게 깨어 있을 때 뿐이다. 보석 가게는 대부분이 도난 경보기를 설치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루비나 다이어몬드를 도적에게 도적맞이 않기 위해서였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인들도 항상 지키고 있어야 합니다. 죄와 세상이 그리스도인 속에 기어들어 와서 영적인 능력을 도적맞지 않기 위해서입니다. 우리의 靈이 중요하다면 사단이 시험하지 못하도록 매일 경건 훈련을 하여야 한다.
##깨어있지 않으면## 오늘날 사데는 야생풀의 광야로 변해 버렸다. 그곳의 유일한 주민이라고는 파크톨루스 강변 저지대의 키벨레 신전 근처에 있는 몇 개의 오두막에 사는 유루크 유목민 뿐이다.사데가 한때 장악했던 헤르무스 평야에는 몇 개의 마을이 산재하여 있는데 그 주민들은 명목상 이슬람 교도들이기는 하지만 분명히 어떤 관습에 의해 주변 터키 사람과는 구별된다. 그것은 예수께서 ‘촛대를 그 자리에서’(계2:5) 옮기실 때 일어날 수 있는 바를 정확히 보여 준다. 너무 늦기 전에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듣는’(3:6)것은 아주 중요하다.
2)기도의 불꽃에 부채질 하라. ‘그 남은 바 죽게 된 것을 굳게 하라’(2절). 사그라져 가고 있는 영적 생명을 다시 살리기 위해서는 전적으로 하나님의 도우심이 필요하다. 성령께서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의 사랑에 녹아져서 하나님의 불가항력적 은혜에 꺽어질 때, 가능하다. 교회는 꺼져 가는 잔화를 함께 모을 수 있도록 기도의 작은 불꽃에 부채질하여 불길을 활활 타오르게해야 한다. 문제는 오늘날 우리가 하나님이 원하시는 교회다운 교회를 만들겠다는 결단과 노력을 하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3)생각한바를 지키라(순종하라) ‘네가 어떻게 받았으며 어떻게 들었는지 생각하라’(3절). 교회 안에서 생명을 재창조하기 시작하는 방식은 죄인들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회상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베푸셨던 은혜를 다시 회상하고 순종으로 이어져야 한다. 순종없이 하나님의 자비들을 회상하여 보는 것은 더 소멸시키는 결과를 낳을 것이다. 하나님은 복종을 요구하시는 주인이시다. 우리 하나님은 단지 경이로워서 한번 흘끗 쳐다볼 대상이 아니시다. 교회 안에서 생명의 재발견을 위한 최종 단계는 ‘회개’이다(3절) 우리가 하나님의 길로 똑바로 돌아서는 직접적인 응답이 있어야 한다. 20세기에서 소멸하여 가는 교회에 생명의 잔화가 다시 한 번 불 붙으려 한다면 진정한 회개 이외의 다른 방도는 있을 수가없다.
5.살아 있는 작은 무리 사데교회가 명성에도 불구하고 ‘죽어’ 있었으나 이 범주에 들지 아니한 ‘몇 사람’(4절)이 있었고 그들은 보이는 것과는 무관하게 거룩함에 의해 구별되었다. 여하튼 이 이기는 자들의 소그룹은 삶을 파괴하는 일반적인 더러움을 어떻게든 피하려고 힘을 썼다. 실로, 그들의 경건은 여실히 눈에 띄여 ‘그 옷을 더럽히지 아니한’(4절) 자들이라는 말을 들을 수 있다.
1)그들의 상급 ‘흰 옷을 입고 나와 함께 다니리니 그들은 합당한 자인 연고라’(4절). 이기는 자에게 줄 최고의 상급은 그들이 하나님과 동행하는 특권이다. 궁정 뜰에서 왕과 함께 거닐도록 허락된 것을 페르시아에서는 정원의 친구들’라고 불렀다. 예수게서 이기는 자들은 낙원에서 하나님의 친구가 될 것이라고 말씀한다. 그들은 에녹과 노아가 그러했던 것처럼(창 5:24;6:9) 그와 함께 동행할 것이다. 이러한 특권 때문에 그들은 흰 옷을 입을 것이라고 묘사되었다. 흰 색은 항상 하나님의 영원한 나라 거민들과 관련된 색깔인 것이다. 변화산상에서 제자들이 능력으로 임할 그 나라의 모습을 잠깐 보았을 때, 예수님에 대한 그들은 표현은 ‘그의 옷이 빛과 같이 희어졌더라’(마17:2)라고 했다. 부활의 아침에 무덤에 있던 천사는 ‘눈같이 흰’(마 28:3) ‘흰 옷을 입고’(막 16:5) 있었다. 주님 승천 하실 때, 천사도 ‘흰 옷 입었던’(행 1:10)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 하늘에 있는 구속 받는 자의 모습 중 하나는 그들이 흰 옷을 입을 것이라는 점이다(계 6:11) 흰 옷은 정결과 화려함과 승리를 나타내는 것이라고 지적한다. 승리한 신자들이 하나님과 거닐고 있을 때, 하늘의 ‘기쁨’ (시 100:2)으로 충만케 되고 승리의 면류관을 쓰고 더럽혀질 어떤 것에서도 완전히 해방될 것이다.
2)생명책에 기록된 이름 ‘이기는 자는 흰 옷을 입을 것이요 내가 그 이름을 생명책에서 반드시 흐리지 아니라하리라’(5절). 이스라엘은 호적부에서 기록이 되려면 거룩한 존재가 되어야 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 백성의 약속들에 참여한 자가 되어야 한다(참고 사4:3-4). 생명책에서 흐려진다는 것은 이 축복을 잃게 된다는 뜻이다(시 69:28).
빌라델피아교회:형제를 사랑하는 곳
- 계 3:7-13 -
▣들어가는 말
1)지역 코가미스 계곡에 자리잡은 필아델피아는 동쪽 지역으로 가는 통로로서 통신이 집결된 곳이기도 했다. 필라델피아의 최고신이 포도주 신인 디오니시우스라는 거만 보아도 아주 비옥하여 포도재배와 포도주 생산의 주산지였음을 알게 된다. 몇일 전 터키에서 지진이나서 4000명이 죽었는데 다음날 계속된 지진으로 6000여명이 생명을 잃어다고 보도되었다. 당시에도 지진이 많은 그 땅에 A.D. 17년 화산과 지진으로 용암의 검은 돌가루와 돌덩이로 바뀌고 말았다. 그 날 인근의 12개도시가 파괴되었는데 그 후 경미한 진동에도 건물이 붕괴될른지 모른다는 두려움에 사로잡혀 도시밖으로 도피하곤 했다. 따라서 지진에 견딜수 있도록 안전장치를 다양하게 하고 벽과 청장을 견고하게 하였다.
2)지명 7도시 중에서 가장 역사가 짧은 도시이다. 이 도시는 B.C. 140년 버가모의 왕 아탈루스 필라텔푸스가 헬라문화를 전파하기 위하여 건설했다. 그리고 자신의 이름을 따서 “형제사랑”을 의미하는 필아델피아(Philadelpia)로 명명했다. 이 도시의 이름은 의미가 좋아서 오늘날도 쓰이고 있으며 아직까지도 터키에는 필아델피아 교회가 이슬람교도들이 있는 그곳에 교회가 남아있는 유일한 곳이다.
▣본론
1.칭 찬
1)적은 능력만 지닌 교회
8절을 보면 ”네가 적은 능력을 가지고도 내말을 지키며 내 이름을 배반하지 아니하였도다“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적다」는 헬라어는 미크란이라는 형용사인데 축소된, 가장 작은 것을 의미합니다. 마이크로버스는 작은 버스, 마이크로그램은 100분1그램 마이크로필름은 가장작은 축소된 필름을 말합니다. 빌라델비아 교회는 눈에 보이지도 않는 적은 힘을 가지고 큰 일을 해 낸 교회였습니다. 교인들의 신분이나 지위나 재산등이 자랑하거나 내세울 것이 없었습니다.우리들은 큰 것이나 큰 힘을 가져야 주의 일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할 때가 있습니다..-은혜목회정보- 97.11 ☞설교/박성규목사 그러나 기독교 여사를 보면 결코 큰 사람들이 큰 일을 했던 경우는 별로 많지 않습니다. 예수님 자신부터가 갈릴리 나사렛 동네에서 목수 생활을 하던 사람이었고 그의 제자들은 거의가 다 갈릴리의 어부들이었습니다. 옛말에 천리길도 한걸음부터라고 했다. 그리고 티끌모아 태산, 눈물모아 한강이라고도 했다. 이 속담은 지극히 작고 적은 것이라도 이것에 정성이 담기고 인내와 열심이 담기면 위대한 결과를 맺을 수 있다는 것이다. 가난하고 병든 자들을 돌보는 인도의 테레사 수녀는 이렇게 말했다. "밝은 미소, 정다운 태도, 단 한마디의 따뜻한 말이 지친 인간의 마음에 생기를 불어 넣어 주느니" 이러므로 작은 일, 적은 성의라고 해서 결코 무시해서는 안된다. 보다 위대한 이들이다 그 시초에는 지극히 작고 적은 것들에서 시작하기 때문이다.
2)말씀을 지킨 일입니다.
말씀을 지켰다는 것은 어려운 여건에도 불구하고 말씀을 순종했고 그 말씀을 실천했다는 것입니다. 8절에서는 ”내 말을 지켰다“고 칭찬했고 10절에서는 ”네가 나의 인내의 말씀을 지켰다“고 칭찬했습니다. 교회 생활에서 주님의 말씀대로 살고 순종하기를 힘쓰고 노력하는 사람들은 대개가 신앙 경륜이 오래되지 않는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오랜 세월동안 교회를 들락거리는 사람이나 교회 물을 많이 먹은 사람일 수록 연륜만 내세우고 자랑할 뿐 순종하고 실천하는 의지는 약하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결코 좋은 현상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진실로 원하시고 요구하는 사람은 적은 능력의 소유자라도 주의 말씀을 아멘으로 받고 순종하는 사람입니다. 「아멘」하는 태도도 그 사람의 성격과 깊이 관계되어 있습니다. 마치 맛있는 음식을 담숨에 입에 넣고 삼키듯이 빨리 아멘하는 사람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아멘이 무척 힘들고 인색한 사람도 있습니다. 할 것인가 말것인가 소리를 낼 것인가를 사색하고 명상하고 연구하고난 뒤에 결정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주의 말씀을 지킵시다. 읽으라면 읽고, 외우라면 외우고, 쓰라면 쓰고, 행하라면 행합시다. 그 사람에게 복이 임하는 것입니다.
3)주님의 이름을 배반치 않았습니다.
필아델피아는 로마의 통치를 받고 있었습니다. 로마는 황제 예배를 내세워 300년이나 기독교를 박해했습니다. 박해가 계속되자 두려워 교회를 등지고 그리스도이신 주님을 떠나는가 하면, 이교도와 타협하는 사람이 생기는가 하면 아예 타락하여 세상으로 나가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그러한 어려움 속에서 빌라델비아 교회 교인들은 힘도 권력도 재산도 명예도 가진것이 없지만, 적은 능력으로 주님을 배반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빌라델비아 교회가 직면했던 도전은 밖에서 오는 박해만은 아니었습니다. 자체 안에서 일어나는 이단의 도전도 있었습니다. (V.9) ”사단의 회 곧 자칭 유대인“이라고 했습니다. 유대인 임을 내세우는 교만으로 교회를 파괴하려는 사단의 역사가 교회 안에서 일어났던 것입니다. 사단의 회가 구체적으로 교회 안에서 어떤 일을 벌였는가하는 것은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만 자기네 패거리를 만들고 교회의 잘못을 들춰내기 위해 혈안이 되고 남을 비난하고 교회 성장을 가로막기 위해 온갖 수단을 동원했을 것입니다. 오늘도 그러한 사단의 역사는 계속되고 있습니다. 처절한 박해 때문에 예수를 배반하는 것보다 유혹이나 풍요대문에 예수를 배반하는 것은 더 큰 잘못입니다. 빌라델비아 교회는 적은 능력으로 큰 일을 해낸 교회였습니다. 우리 역시 적은 능력의 소유자들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그 적은 능력으로 큰 일을 해낼 때 축복을 받게 된다는 사실을 중시해야 합니다. 1993년 새해와 함께 한국이 당면한 문제들과 해결해야할 과제들이 수를 셀 수 없을 만큼 터져 나오고 있습니다.
첫째는 정치입니다. 총선으로 어수선한 전국, 얼마 후 실시될 대선으로 정치권은 때를 만난듯 흥청거리는 정치판도는 걱정스럽습니다. 금년, 내년으로 연속되는 선거들이 아니라 정치사에 어떤 선을 긋게 될지는 두고 보아야 하겠습니다만 돈선거, 타락선거, 지방색선거, 협잡선거가 되풀이 되고 있으니 이 나라 정치는 불신과 퇴조의 수렁에 빠지게 될 것입니다. 그런면에서 정치가나 지망생들의 책임이 큽니다.
둘째는 경제입니다. 물가는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멋대로 뛰어오르고 있습니다. 개방압력은 가속되고 있습니다. 저임금시대의 막은 이미 내린지 오래고, 고임금 시대와 함께 구인난 시대에 접어들었습니다. 전문가들의 말에 의하면 모든 생산제조업체들은 20-30%의 인력난을 격고 있다는 것입니다. 한국 노동연구원의 여론조사에 의하면 응답자의 62%는 물가불안과 투기심리의 만연 때문에 근로의욕이 감퇴된다고 했고, 55%가 열심히 저축해도 내집을 마련할 수 없다고 했습니다. 놀라운 것은 우리나라가 경제활동 인구의 87%가 무력감에 빠져있다는 것입니다. 유태인보다 일본인보다 더 부지런하고 일 잘하는 사람들로 칭송받던 우리가 어쩌다가 이렇게 되었는지 안타깝기 그지없습니다.
세째는 사회안정입니다. 사회불안이 가시지 않으면 사회발전이 안되는 것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각계 각층에서 자기 몫을 다해야 합니다. 정치가는 정치권에서 경제인은 경제권에서 교육자는 교육계에서 공무원은 공무일선에서 소금이되고 빛이 되어야 합니다. 작은 것이지만 자기에게 주어진 현장에서 열심히 일해야 합니다.
2.필아델피아 교회에 주신 축복
1)내가 너를 지켜 주시겠다고 했습니다.(10절) 주님께서 지켜주시겠다는 약속은 영원불변의 약속입니다. 믿을 수 있고 든든한 약속입니다. *작고 적은 것으로 위대한 결과를 가져온 일들이 있습니다. (1)기드온의 작은 군대//32,000명중 불과 300명만 선택하여 적군을 멸하셨다. (2) 사렙다 과부 - 밀가루 한웅큼, 기름 조금가지고 몇개 구어 엘리야에게 대접한 결과 기름독에 기름이, 가르가 마르지 않았다. (3) 5병 2어의 기적//500명이 먹고 12광주리 남았다. (4) 12명의 제자로 세계를 변화시킬 꿈 그중 한명은 선생을 팔았고 남은 11명도 오늘날 신학교 입학규정에 따르면 모두 자격 미달자들이지만 세계 선교위임.
2)하나님 성전의 기둥이 되게 해주신다고 했습니다(12절) 기둥은 되게 해 준다는 것은 기둥처럼 필요한 사람, 중요한 사람, 든든한 사람이 되게 해준다는 뜻입니다. 여러분 모두가 현재 그 자리, 그의치, 그 현장에서 기둥같은 사람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3)이름을 써 주신다고 했습니다.(12절) 보증서를 써주신다고 했습니다. 자필서명된 백지수표를 주신다는 뜻으로 이해하면 됩니다. 순종과 믿음 (Talent 비유)// 평범한 신앙생활중에서 작고 적은 것에 순종하고 믿을 때 하나님의 큰 축복이 함께 해주십니다.
▣맺는말
능력 탓하지 말고 힘써 일합시다. 빌라델비아 교회는 적은 능력으로 힘써 일했습니다. 시간 탓하지 말고 일합시다. 시간이란 쓰기에 따라 가치가 달라지는 것입니다. 환경이나 여건 탓하지 말고 힘써 일합시다. 어려워도 일하면 어려움이 물러가지만 환경 탓하느라 일하지 않으면 그 환경이 더 어려워지는 공식을 깨달아야 합니다. 맹장수술 환자가 수술직후 걷는 것은 20년전만해도 금물이었습니다. 바로 걸으면 내장이 터져 나온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바로 걸어야 건강회복이 빠르다고 합니다. 아파도 일하고 힘들어도 일하고 피곤해도 일하고 사업이 잘되어도 일하고 안되더라도 일해야 합니다. 아이가 대학에 들어갔더라도 일하고, 들어가지 못했더라도 일해야 합니다. 내가 잠자는 시간에도 내 신체의 모든 기능은 쉬지 않고 동작하고 있지 않습니까? 바울은 일하기 싫거든 먹지도 말라고 했습니다. 힘써 일하는 사람이 건강하고 성공하고 승리하고 하나님의 복을 받는다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작은 개미구멍이 큰 방축을 무너뜨린다. 이것쯤이야 하는 작은 불순종과 불신앙의 행동이 나중에 신앙을 파탄에 이르게 하고 만다. 그에 반해 작은 순종과 믿음의 행위가 하나님의 손길에 얹혀지면 그 결과로 엄청난 열매를 맺게 되는 것이다.
라오디게아교회:구토하게 하는 교회 - 계 3:14-22 -
▣들어가는 말
1.라오디게야 市
1.위치 빌라델비야 동남쪽 68KM 지점, 골로새로 가는 길에 있다. 그 도시는 편지쓰기 35년전인 AD62년에 지진으로 파괴되었을 때 사람들은 자신들의 자금으로 도시를 쉽사리 재건하겠다고 선포하면서 황제와 국가의 도움을 거절했습니다. 라오디게아는 소아시아에서 가장 부유하고 번창하는 도시중 하나였습니다. 그 도시는 전지역에서 주요한 금융 중심지였으며, 자신의 부를 자랑하고 있었습니다.
2.眼科 의학의 융성 유명한 의학교가 이름나 있었으며, 고대 세계전역을 통해 안질의 치료로 유명했습니다. 여기에 그들의 眼科學으로는 도저히 치료할 수 없는 눈병치료를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3.쾌락의 경기장 소아시아에 있는 대부분의 도시들처럼, 그 도시도 쾌락에 미쳐 있었습니다. 3개의 극장과 3,000명을 수용할 수 있는 경기장은 라디오게아 사람들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라기 보다는 쾌락을 사랑하는 자들이라는 것을 나타냅니다. 그리고 물론, 강력하고 힘있는 교회가 거기 생겨났는데, 그 교회는 후에 우리가 살펴본 이 구절에서 두려운 용어로 묘사되어야만 했습니다..-은혜목회정보- 97.11 ☞설교/박성규목사
▣본론
1.책망만 있는 교회(15-16) 라오디게야 교회는 칭찬거리가 하나도 없는 교회였다. 예수님이 가장 협오하여 구토가 나는 교회였다. 왜 그러했는지 알아보자.
1.미지근한 교회
고대 사람들은 종교적인 희생제사에서나 연회에서 뜨겁거나 차거운 술은 먹지 않았습니다. 라오디게아는 물 사정이 좋지 못하여서 히에라폴리스에서 수 십리를 공급하여서 먹기 때문에 물이 도착할 때에는 미지근해 있었다. 여행객들이 까끔 그곳에 와서 물을 먹고서는 구토를 하였다고 한다. 물은 맑았지만 미지근 했기 때문이다. 술이나 물은 미지근한 것을 싫어 하면서도 신앙은미지근한 그 상태로 있었다. 이 미지근한 상태는 일시적인 것이 아니라 오랬동안 되어온 것이 었다.
2.미지근한 교회의 네가지 특징
하나님께서는 열심있는 남자, 열심있는 여자를 원하십니다. 그것은 정상적인 크리스챤의 삶인데, 라오디게아 교회는 그 열정을 상실했습니다. 17절에서 매우 분명하게 미지근함의 네가지 특징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1)자만과 물질주의 성도는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는’ 사람들이라곳 성경은 말합니다. 오늘과 같은 시대, 즉 수백만 달러짜리 건물을 마치 텐트 하나 치는 것처럼 서둘러 지으면서도, 성경을 달라고, 문서를 달라고 절규하는 지역에 사는 한번도 복음을 듣지 못한 수백만의 사람들에게 하나님이 주신 것중 단지 조금만을 보내주는 시대에는 다소 당혹스러운 것입니다. 이러한 자비심의 결여와 이 영역에서의 현실감의 결여는 필연적으로 우리가 라오디게 교회라는 표시는 아니라도 라오디게아주의가 교회에 몰래 스며들어 표시라고 생각합니다.
2)자급자족 미지근함은 재산이 증가되면 될수록 커졌습니다. 자급자족-그것은 현대인의 증명서 입니다. 바로 이 때문에 사도행전에서 볼 수 있는 교제와 공동체의 실체가 우리 가운데 그다지도 적은 것입니다. 보험증서 및 슬며시 다가오는 사회주의로 인해 우리는 모두 자급자족하고 있으며 아무에게도 의지하지 않고, 누구에게든지 의지하는 것을 당혹스럽게 생각합니다. 그것은 우리의 자만심을 상하게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에 그렇게도 강조되고 있는 교제로부터 떠나 떠돌아 다니는 것입니다. 부자들이 잠더 자자 좀더 쉬자 하는 날 주님께서 도적같이 임하신다는 말씀에 관심을 가집시다.
3)안심 성도는 靈的戰鬪를 치루고 있다는 것을 상기할 필요가 있습니다. 사람들이 어떤 것을 어떠한 술어를 사용하건간에 성도의 신앙생활은 신병훈련, 사훈련캠프라 불리는 것과 비교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심지어 영적전투로부터 휴일은 우리에게 없습니다. 우리는 항상 방아쇠를 당기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때로는 연료를 보급합니다. 때로 성경공부나 구역예배를 통하여 연료를 보급하고는 성령의 검과 믿음의 방패로 무장을 하고 전쟁터로 되돌아 갑니다.
4)가련한 것 *가난한 것 *눈먼 것 *벌거벗은 것 라오디게아 교회의 진정한 모습은 가련하고 가난하며 눈멀었고 벌거벗었습니다.그러한 상태에 있지는 않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이러한 것들이 우리 삶에 스며들어올 때 우리는 점점 더 그러한 상태에 가까이 가며, 이러한 교훈들을 따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2.권면(18-19)
1.뜨거워 져야 한다.
오늘날에도 라오디게아 교회와 같은 교회가 있으며, 라오디게아 크리스챤들 같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보다도 그것이 내게도 일어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바울은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기가 도리어 버림이 될까 두려워 함이로라’(고전 9:27). 빌리 그래함 목사는 1967년에 열린 대집회에서 말하기를 “예배나 수련회에서 만일 우리가 훈련된 삶을 기꺼이 배우고자 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결코 그리스도를 위해 살지 않을 것이다”고 했습니다. 우리 마음에 메시지를 갖고 실행에 옮기고자 하는 매일의 훈련을 취하게 도시길 바랍니다. 이 본문을 읽을 때마다 나는 (히 12:29)을 떠울립니다. ‘우리 하나님은 소멸하는 분이심이라.’ 여러분은 성경에 나오는 ‘불’이라는 단어에 대해 흥미로운 연구를 할 수 있습니다. 우리 교회에서 부족한 것은 열정이 아닐까요? 열정이 결어되어 있을 때에 널리 퍼지지 못합니다. 우리의 신앙은 가르침을 받고 실천에 옮길 때, 사로잡힘이 되어 열정에 묻히게 됩니다. 그런 성도는 말씀을 전하건 안전하건 간에 증인 됩니다. 사무엘 프링글은 열정에 대해 다음과 같은 결정을 내렸습니다. ‘그것은 사랑이다. 그것은 믿음이다, 그것은 소망이다. 그것은 정열이다. 그것은 목적이며 결심이다. 그것은 완전한 헌신이다. 그것은 형식에 구애받는 것, 형식주의, 미지근함, 무관심, 협잠, 소란, 과시, 영적 죽음에 대한 신적 불만이다...그것은 겸손하고, 경건하며, 신실한 사람 안에서 그를 통해 불타고 있는 성령 하나님이시다. 그것이 바로 정상적인 크리스챤의 삶입니다. 누구나 이러한 사람은 일종의 종교적인 유물-아마도 그는 군사 동원등에 참가해야 하며 보통의 교회 또는 보통의 사회에서는 정말로 마음 편하게 느끼지 못하게 될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으로 가득차 있는 사람, 하나님을 위해 열심을 내고 있는 사람은 정말로 약간 이상한 사람이며, 그 나머지 우리들이 정상적인 크리스챤들이라고 생각하도록 속아왔던 것이 아닐까요? 사랑하는 여러분! 내 생각에는 악한 자가 널리 뿌러놓은 속임수가 있는데 그것은 수많은 사람들을 미지근 형태, 이런 성도는는 분명 주님께 구토를 나타낼 것입니다. 나는 성령충만한 생활-열심에 사로잡힌 남녀들-이 정상적인 크리스챤의 삶이라고 확신합니다.
우리가 모두 꼭같은 상태가 되어야 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그러나 그 분이 우리의 개성을 소멸시키고자 애쓰시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통해 일하신다는 사실 등이 있지 않다면 우리는 결코 성장하지 않으리라는 것을 진심으로 느낍니다. 우리는 결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바대로의 사람이 될 수 없을 것입니다.
2.횐옷과 안약을 사라
고통을 지불하지 않고는 아무 것도 얻을 수 없습니다. 오늘날 우리에게 필요한 깨끗게 함은 때로 우리가 보는 것처럼 괴로운 것이 될 것입니다. 영적 뜨거움을 위하여 우리가 매일 성경을 꾸준히 공부하는 것을 대체시킬 수는 없습니다. 성도들 중에는 ‘네, 하지만 나는 성경이 매우 무미건하게 느껴져요’하는 부들도 있습니다. 용서하십시오! 저 자신도 종종 성경이 매우 무미건조하다고 느껴질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느껴질 때가 성경이 더욱 더 필요한 상태입니다. 이럴떄 마다 나는 회개하고 하나님께 내 마음에 불을 밝혀달라고 구합니다. 그리고 그렇게 되면 하나님의 말씀도 또한 타오릅니다.
본문은 흰 옷과 안약을 사라고 합니다. 아름다운 옷을 입는 것 처럼, 영적 벌거벗음을 가리워줄 의의 상징인 횐옷을 입어여 합니다. 라오디게야 사람들은 육신의 눈에는 상당한 관심이 있어서 안약 연구에 몰두하여 의술아 발달해 있었습니다. 심지어는 「눈의 신」(Ascepius)을 섬기는 본 고장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영적인 눈을 뜨지 못하여 자신들의 모습을 바로 보지 못한채 신앙생활을 하는 라오디게야 교회에게 영의 눈을 ㄸ기 위하여 막대한 댓가를 지불하고라도 발라야 한다고 권면하십니다.
그리고는 ‘내가 사랑하는 자를 책망하여 징계하노니 그러므로 네가 열심을 내라, 회개하라’고 말합니다. 신자는 우리가 죄의 심각성을 알아야 합니다. 성도의 첫재 목표는 죄를 범치 않는 것입니다. 완전주의라는 비난을 받지 않고 경건과 그리스도의 주되심에 대해 설교하기는 어렵습니다. 그것이 20세기 복음주의적 교회의 가장 큰 문제는 될 수 없습니다. 하지만 그리스도 안에서의 경험을 실제적인 현실과 매일의 경건으로 만드는 것이 우리의 목표입니다. 비록 나는 수없이 실패했지만 그것이 나의 삶의 목표입니다.
무디의 결심 설교의 실패
18721년 10월 8일 드와잇 엘 무디(Dwight L.Moody)는 "그리스도라 불리우는 예수와 나는 무엇을 할 것인가 ?"라는 주제로 설교하였습니다.이 설교가 거의 끝날즈음에 그는 수많은 청중들에게 "집으로 가서 이 중여한 일을 신중히 생각하여 보고 다음 시간에 와서 그리스도께 여러분의 결심을 하십시요 !"라고 말하였습니다. 수시간 후 온 도시가 소방차의 요란한 소리로 온통 소란하였습니다.그런데 다음날 아침 "시카고"는 온통 잿더미 속에 놓이게 되었습니다. 이 대화재로 인하여 집회에 참석하였던 사람중 절반 가까이 되는 사람이 불에 타 죽었습니다. 무디는 이일이 일평생 동안 마음에 걸리어 괴롭게 생각하옜습니다. 무디는 말하기를 "나는 큰 교훈을 배웠다에게 그리스도께 오늘 결심하도록 초청하고 강권하겠다"라고 하였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들이시여 ! 우리는 우리의 한치 앞도 내다 볼 수 없습니다.예수님께서는 여러분들이 다른 설교를 듣기전에 오실런지 모릅니다.여러분은 그분께 무엇을 하실 것입니까 ? 지금 이시간 에수님을 모셔들이고 거듭난 생활을 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3.약 속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은 실제적인 경외함입니다. 그것은 강단에서와 마찬가지로 부엌에서도 타오르는 것입니다. 그것은 또한 어려움에서도 불타오르는 것입니다. 바로 이러한 이유로해서 그것은 전쟁이며, 우리는 함께 모여 우리의 삶을 재언약하며 십자가를 끌어안고서 ‘주 예수님, 제 삶을 드립니다. 나를 당신의 성령과 불로 채워주소서’하고 말해야 한는 것입니다. 화가 홀먼 헌트가 단단히 잠겨진 문밖에 서서 안으로 들여 보내 달라고 간청하며 문을 두두리는 그리스도의 그림을 막 완성하였을 때였습니다. 한 친구가 그림을 보고 나서 “여보게 그림을 잘 못 그렸네. 몬고리가 없지 아노는가?” “나는 그림을 잘 못 그린 것이 아닐세. 문고리는 안쪽에 있네”라고 했답니다. 우리가 그 문고리를 조정합니다. 예수께서 오늘날 많은 교회의 문밖에 또는 아마도 우리 마음 문 밖에 서 계십니다.(V.20) 그 분은 우리를 그 분과 더욱 깊이 동행하는 삶으로, 기도의 능력으로, 증거로, 관계에 있어서의 실체로 데리고 가기를 갈망하고 계십니다. 그리고 그 분은 계속해서 문을 두드리십니다. 아마도 여기 있는 분 중 어떤 사람의 경우에는 예수님께서 매우 오랫동안 문을 두드려 오셨을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문을 엽시다. 문을 열기만 라면 풍성한 축복을 누릴수 있습니다. 왜 굶주립니까?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주님은 들고 주시길 원하십니다. (스워덴에서 밤 중에 찾아 온 왕자님의 이야기)
▣맺는말
이제 예수님께 문을 열어 드립시다! 일련의 교리나 원리, 각자 자기 위치를 갖고 있는 -에가 아니라 예수님께로 문을 엽시다. 그리고 그 분을 우리 삶의 주님과 왕으로 모셔들여 더 이상 우리가 예전과 같은 존재로 남아있지 않도록 합시다. 우리 하나님은 소멸하는 분이십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은 열심을 내고 있으십니까? 기도와 증거와 관계, 열심,동정 등을 생생하게 체험하고 있으십니까? 그것이 바로 정상적인 크리스챤의 삶입니다. 그것을 날마다 유지하기 위해서는 삶에 있어 가장 큰 전쟁을 치루게 된다 할지라도, 그것을 소유할 때까지는 떠나지 맙시다. 하지만 우리가 먼저 소유하지 않은 것은 유지할 수도 없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