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복음서!!!

[스크랩] 요한복음 강해(주해)

하나님아들 2018. 9. 28. 22:06

요한복음 강해(주해)

 

 

 

서론 - 요한복음1장 -
 

김세윤박사(미국 플러신학대학원) 

 


 


요한복음 강해

 


서론

 


요한복음의 전반적인 서론은 요한신학 참조 바람.

 

 

 

본문주해

 


제 1장

 


요한복음 1장은 두 부분으로 나뉘어진다. 1:1-18절의 서시와 1:19-51절의 증언들. 이상 두 부분으로 나뉜다.

1:1-18절 서시는 요한의 공동체에서 찬송시로 쓰여졌다가 요한복음 마지막판에 서문으로 덧 붙여져서 헬라의 시고방식에 익숙한 헬라 유대인들이나 헬라 사람들에게 복음서를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복음서의 내용을 요약한 것으로서 서문역활을 하도록 덧붙여진 것이다.

6-8절과 15절은 세례요한에 대한 것으로서 원래 복음서의 첫판에 시작한 것인데 여기에 서문이 덧 붙여혀져서 이루어진 것이다. 6-8절과 15절을 괄호로 묶고 읽으면 세례요한의 증거로서 이것이 첫판에서는 요한복음의 시작이었던 것 같다.

서시의 구조의 분류에 대해서 학자들간에 논쟁이 많다. 서시의 주제와 요한복음 본문의 주제는 깊이 상관이 있다. 서시의 특징은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자로서의 사역을 하나님의 말씀이나 로고스라 지칭해서 사용한다. 로고스라는 말의 배경은 헬라철학, 스토아 철학의 중요한 개념이었다. 이것은 합리적인 생각, 생각의 표현인 말이었다. 스토아 철학은 온 우주의 합리성, 생명을 주는 원리가 바로 로고스이다. 이 로고스의 씨들이 우리 영혼속에 박혀 있어서 합리적으로 말하고 생각할 수 있고 우주와 일치감을 깨달을 수 있고 우주의 원칙들을 탐구할 수 있고 지식을 얻고 지식에 의해서 생명을 얻을 수 있는 것으로 발전했다. 이것이 요한복음 1장 1절의 로고스라는 말의 헬라사상적인 배경이다.

또 구약과 유대교적인 배경도 중요하다. 여호와의 말씀, 여호와의 지혜 사상이 배경을 이룬다. 여호와의 말씀을 선지자들이 받아서 전달했다. 여호와의 말씀은 하나님의 계시의 수단이다. 하나님의 창조의 수단이다. 말씀으로 창조하였다. 하나님의 구원의 수단이다. 말씀을 전할때 깨닫고 회개할때 구원이 일어난다. 여기서 하나님의 말씀은 창조, 계시, 구원의 수단이다. 지혜도 마찬가지이다. 지혜신학에서는 하나님의 지혜로 창조하시고 하나님의 뜻과 지혜를 계시하시고 계시에 따라사는 사람들이 지혜로운 사람들이고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의 구원에 이른다. 하나님의 말씀, 지혜가 창조, 계시와 구원이 되기 위한 전제조건은 선재해야 한다. 창조전부터 하나님의 말씀과 지혜가 존재한다.

이렇게 볼때 말씀과 지혜는 하나님의 속성들인데 질량을 가지고 있지 않는 추상적인 개념들인데 점차 이것을 물질화 했다. 더 나아가 인격화 했다. 하나님의 수단일 뿐 아니라 일꾼으로 규정한다. 하나님의 창조, 계시, 구원의 AGENT인 말씀과 계시를 통해서 하신다. 이렇게 물질화, 인격화하는 사상이 발전했다.

그것의 극치가 말씀은 하나님의 아들이고 지혜는 하나님의 딸로 지칭을 한다. 말씀은 남성명사 지혜는 여성명사이다. 하나님의 아들 딸로 지칭하는 것은 아들 딸의 개념은 하나님과 밀접한 관계를 갖고 전적으로 하나님께 속하고 하나님의 사랑의 대상이 되는 관계론적인 개념이다. 아들 딸의 개념의 근본적인 의미는 상속의 개념이다. 하나님의 부요함을 상속받아 피조물의 한계성을 극복한다. 이것이 구원이다. 하나님의 무한함에 참여하고 같이 나누는 자이다. 따라서 하나님의 창조, 계시, 구원의 일을 같이 할 수 있다. 이 사상은 신화적인 언어같다. 그러나 무엇을 표현하려고 하는 언어 수단인가? 를 살펴보아야 한다. 왜 이 사상이 발전했는가를 질문해야 한다. 이것은 창조주 하나님의, 초월자 하나님의 내재하심을 즉 하나님의 초월과 내재하심을 동시에 천명하고자 하는 언어 수단이다. 왜 동시에 천명해야 하는가? 하나님이 초월하셔야 우리를 구원하실 수 있다. 우주보다 커야 이 고장난 우주를 고칠 수 있다. 그래서 초월자임을 천명해야 한다. 하나님은 자신을 초월자로 계시하신다.

그런데 그 하나님이 초월로만 계시면 구원이 안 일어난다. 이 하나님이 이 세상에 오셔서 우리에게 스스로를 계시하시고 구원의 손길을 내 밀어야 구원이 일어난다. 하나님이 내재하시는 분이어야 실제로 우리를 구원한다. 하나님이 우리의 구원자이시기 위해서는 그는 초월하시며 동시에 내재하시는 하나님이어야 한다.

성경은 점진적인 계시 초월하시며 내재하시는 하나님이심을 보여준다. 이 초월하시며 내재하시는 하나님을 어떻게 표현하느냐? 구약과 유대교적인 범주에서는 이렇게 표현할 수 밖에 없다. 하나님은 하나님만이 계시하실 수 있다. 원숭이가 사람을 나타낼 수 없다. 즉 계시할 수 없다. 사람은 사람만이 나타낼 수 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이 하나님을 계시하실 수 있다. 교회사의 아리우스의 대논쟁이 여기에 있다. 아리우스가 예수가 하나님보다 조금 모자란다고 하였다. 그러면 계시, 구원이 안 일어난다. 계시가 없으면 구원도 없다. 이것은 잘못된 것이다.

 


어떻게 하나님이 자신을 나타내느냐? 유대교의 근본적인 신앙고백이 신명기 6:4절에 나타난다. 하나님은 한 분이시라는 유일신론이다. 그래서 유대교에서는 二位 개념 즉 하나님의 말씀이 아들로서, 지혜가 딸로서 그가 아들이고 딸이기에 하나님의 속성에 완전히 동참하기에 하나님을 완전히 동참 100% 하나님과 같은 자이기에 하나님의 말씀, 지혜는 세상에 내재하는 하나님의 표현인 것이다. 그래서 유대교에서는 이위일체론적인 신개념이 나타나게 한다. 이것이 이른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신계시 삼위일체 개념으로 점진적으로 나타나게 된다.

 


세상의 고등종교는 세 가지 유형이 있다.

 


(1) 이슬람교/ theism(理神론)

정밀한 시계공이 시계를 만들고 시계태엽을 한 번 감아 놓았다가 놓아둔 것과 같다. 하나님의 초월성을 강조한다. 하나님의 내재성이 없다시피 한다. 하나님은 너무 거룩해서 혼자 있고 자기가 창조한 세상은 버렸다. 자력구원, 숙명주의, 훈련, 금식해서 구원을 이룬다.

 


(2) 반면에 신의 내재는 있으나 초월을 부인하는 힌두교, 개혁힌두교인 불교 등이 있다. 초월자가 없으니까 구원은 자력구원이 된다. 범신론의 신관이다. 이신론이나 범신론은 자력구원으로 나갈 수 밖에 없다. 모든 종교들이 자기가 수양하고 묵상하고 선을 행해서 자신을 구원할 수 밖에 없다.

 


(3) 그러나 인간이 자기를 구원할 수는 없다. 성경의 하나님 아버지는 초월하시며 내재하시는 분이시다. 초월하시며 구원하시기 위해서 이 세상에 오시는 것이다. 언제 오셨는가? 예수 그리스도 자기 아들을 통해서 오셨다. 복음서들은 초월하신 하나님이 자기 아들을 통해서 이 세상에 오셨다고는 것을 기록한 것이다.

이 복음을 소개하기 위해서 요한은 로고스 개념을 빌려서 설명하고 있다. 이 로고스 개념이 기능을 훌륭히 수행하는 이유는 헬라적인 배경도 있고 유대교의 이위일체론적인 신계시를 표현하는 하나님의 지혜, 말씀을 훌륭히 나타내기 때문이다.

 


1절. “태초에 로고스가 있었다.” 태초라는 말은 창세기 1장 1절의 말씀을 상기 시킨다. 태초에 말씀으로 창조하셨다. 태초에 계신 하나님 말씀이 3절 부터 창조의 수단 일꾼으로 그려져 있다. 태초에는 창조 때부터가 아니라 창세 이전부터이다. 창 1:1절과 긴밀히 연결되고 있다.

이 말씀이 하나님을 향해, 하나님과 더불어 있었다고 번역할 수 있다. 이것은 하나님과 로고스와의 긴밀한 관계를 말하고 있다. 말씀과 하나님은 긴밀한 관계에 있으나 두 개체이다. “이 말씀은 하나님이셨다. ‘여호와의 증인은 관사가 없다고 한다. 따라서 하나님이 아니라고 한다. 그러나 헬라어 문맥에서는 보어가 주격일 때는 관사가 생략이 된다. 이것을 칼루이스 rule이라 한다.” 말씀이 하나님이셨다 “고 번역하기도 어렵고 ”말씀이 신적이었다“고 번역하면 좀 약하다. 이 문장의 의도는 1절 후반부의 로고스와 하나님과의 긴밀한 관계를 말하면서 분리한다. 두 가지 다 되는 것 같다. 1:1c를 넣는 이유는 둘로 생각을 하면 안 되고 하나이다. 삼위일체론의 모든 문제가 다 이 속에 들어있다. 두 부분이 하나 됨과 별다름을 동시에 표현하려고 하는 아주 예민한 언어 사용이다.

3절-5절은 로고스의 우주론적인 역할, 창조에서의 역할을 말한다. 모든 것, 온 우주가 다 그를 통해서 생성이 되었다. 로고스는 창조의 수단, agent 이다. 하나님은 창조주이며. 창조의 source이고 로고스는 창조의 수단이다. 신약성경에서는 하나님은 아버지이고 하나님의 아들의 역할 정기적으로 이렇게 구분한다. 예로 고전 8장 6절에 보면 “모든 것들이 하나님으로 부터 나왔고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창조되었다.”

 


고전 8:6 그러나 우리에게는 한 하나님 곧 아버지가 계시니 만물이 그에게서 났고 우리도 그를 위하며 또한 한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계시니 만물이 그로 말미암고 우리도 그로 말미암았느니라

 


그를 통하지 않고는 아무 것도 생성된 것이 없다. 여기는 구두점을 어디에 찍느냐?는 어려움이 발생한다. “그가 없이 아무 것도 생성된 것이 없다. 그 안에 생성된 것은 생명이었다.”고 번역할 수도 있고 “그가 없이 생성된 것 어떤 것도 생성된 것이 없다 그 안에 생명이 있었다.”로 번역할 수도 있다. 왜냐하면 원래 헬라어는 띄어 쓰기가 없었다. 중요한 것은 로고스를 통해서 만물이 창조되었고 그의 참여 없이 아무것도 창조된 것이 없다. 하나님께서 로고스를 통해서 세상을 창조했다는 것에서 세상이 로고스성을 띈다. 도자기는 만든 사람의 성격이 나타난다. 만든 사람을 계시한다. 세상은 하나님을 계시한다. 세상에는 창조주의 도장이 찍혀있다. 창조주의 성격, 능력, 합리성이 그 속에 나타나 있다. 그래서 이 세상에 질서가 있다. 세상은 하나님의 계시를 띄고 질서가 있다. 타락으로 많이 망가지고 희미하게 되었다. 이런 계시를 자연계시 일반계시라 한다.

 


4절. “그 안에 생명이 있었다.”와 “그 안에 생성된 것은 생명이었다.”로 둘로 번역할 수 있다. 5절에 “ 그 빛이 어두움에 비추었다”(현재형) “그러나 어두움이 극복하지 못했다, 터득하지 못했다”. 로고스가 생명을 주는 분이었다. 그를 통해서 생성된 것에 생명이 주어졌다. 생명은 피조물들이 산 것이 되었다. “그 생명은 인간들의 빛이었다” 빛이란 말은 요한복음에서 중요한 말이다. 4절은 창 1:1-3절 까지의 빛과 연결된다. 빛은 우리에게 활동하게 한다. 빛이 있어야 우리는 안심하게 된다. 빛이 없으면 캄캄함 속에서 불안하여 한다. 이것은 생명의 본질과 관계가 있다. 생명이 살아있는 상태를 가능하게 한다. 빛은 행복과 관계가 있다. 반대로 암흑은 죽음의 상태, 불행의 상태, 활동이 없는 상태를 나타낸다. 빛은 종말에 주어질 구원의 상징으로 쓰여진다. 종말에 우리가 근심과 불안에서 생명력이 넘치는 피조물로 된다. 우리를 제약하는 모든 요소가 없어진다. 빛은 지식과 관계가 있고 행동의 원칙을 제시한다.

“이 빛이 어두움 가운데 비친다.” 과거형을 쓰다가 갑자기 현재형을 쓰고 있다. 그 이유는 현재 비추고 있는 상태를 나타내기 위해서냐? 창조 때부터 하나님의 계시의 빛이 인간과 세상에 영원히 비추이고 있는 상태를 나타내는 말이냐? 후자이다. 영원한 현재성을 나타내기 위해서이다. 태초부터 암흑속에 있는 세상을 계속해서 비추어 왔다. 세상은 ① 하나님의 피조물이나 ② 하나님과 분리되고 하나님께 적대해서 암흑속에 있는 적대세력이다. 그래서 고난 속에 있고 구원의 대상이다. ③ 세상이 구원, 하나님의 사랑의 대상이다. 피조물을 사랑하시기에 하나님이 계속해서 빛을 비추어 오고 있다.

“어두움이 깨닫지 못하더라. ” καταλαμβανιν 이 말은 “붙잡는다”는 뜻이다. 그것이 긍정적으로 쓰였느냐? 부정적으로 쓰였느냐?에 따라 여러 가지로 해석이 될 수 있다. ① 부정적인 의미로 붙든다, 체포한다. 극복한다의 뜻이다. ② 긍정적인 의미로 붙든다, 환영한다, 받아들인다의 뜻이다. ③ 긍정적인 의미로 붙든다, 터득한다, 이해한다, 깨닫는다는 뜻이다. 그러면 ①, ②, ③의 의미 중에서 어느 의미로 쓰였느냐? ①의 의미로 쓰였다는 것도 말이 된다. 창세기 3장을 염두에 보면 어둠의 세력이 빛의 세력을 덮어 버리려고 했다. 어둠이 빛을 극복하려고 했다. 어둠, 사단의 세력이 창조의 목적을 완전히 좌절시키려고 했다. 아담과 이브를 꾐으로서 그러나 성공하지 못했다. 하나님께서 계속해서 계시하고 구원의 행위를 하시고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서 구원을 하셨다.

②도 말이 된다. 하나님께서 자기를 계시하시고 나타내셨으나 어둠의 세력이 깨닫지 못했다. 아담으로 부터 모세, 모세로부터 이스라엘의 역사가 그랬다. 대부분의 학자들은 요한복음의 기법중 하나가 이중, 삼중의 의미를 나타내는 것이 의도라고 한다. 이것도 부정적인 의미, 긍정적인 의미 둘 다를 포함한다. 여기서 긍정적인 세계관을 우리로 갖게 한다. 하나님의 빛의 궁극적인 승리를 천명하고 있다. 또 이 세상은 암흑 속에서 하나님을 적대하는 세력에 놓여 있다.

 


5절은 우리에게 세상은 하나님과 적대관계에 있으나 하나님은 이 세상을 사랑하셔서 계시하시고 빛을 비추신다. 그러나 세상은 깨닫지 못하고 암흑 속에 있으나 결국은 하나님의 빛이 승리할 것이다. 궁극적으로 긍정적인 세계관을 갖게 된다. 예를 들면 이 세상은 도둑질 잘 하는 사람이 잘 사는 것 같지만 그러나 하나님의 자녀가 승리한다. 하나님의 자녀가 승리할 수 밖에 없다.

 


6-8절은 세례요한의 기사이다.

요한은 “한 사람”이다. “났으니” 는 “생성이 되었으니” 즉 “피조물”이다. 이것은 로고스와 대조를 이룬다. 하나님으로 부터 사명을 위임받은 자이다. 빛에 대해서 증거하러 왔다. 모든 사람이 믿도록 하기 위해서이다(7절). “빛이 아니었다” “증거하러 왔다”가 세 번 나온다. 이러한 문구들은 어떤 학자들은 요한을 깍아 내리는 문구라고 한다. 즉 요한의 추종자들이 요한이 메시야이고 하나님의 계시자였다고 하였는데 그렇지 않고 예수가 메시야이고 하나님의 계시자였다는 것이다.

 

9절. 9절은 5절과 연결시켜 읽으면 의미가 명확히 통한다. 9절도 번역하기가 어렵다. 두 가지 가능성이 있다. ① “세상에 들어오는 모든 사람을 비추는 참 빛이었다.”고 변역할 수 있고 ② “모든 사람을 비추는 참 빛이 세상으로 들어와 있었다.”로도 번역할 수 있다. 후자가 요한복음적인 문법구조에 맞다. “참빛”이란 진짜 빛이라는 말이다. 하나님의 세계에 속하는 진짜 빛이 암흑의 세상에 들어오고 있었다. 이 세상의 빛은 참빛의 반영이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로고스의 빛이 이 세상으로 들어옴을 말하느냐? 예수이전의 구원사에서 시내산에서 하나님의 계시(율법)을 말하느냐? 의 시점이 문제가 된다. 예수 그리스도의 세상에 오심은 14절에서 말하고 있다. 여기서는(9-12) 선재한 로고스의 시내산 율법계시를 말하느냐? “모든 사람을 비춘다”는 말 14절의 말이 특별계시를 말한다면 그 전의 것은 일반계시를 말하느냐? 9-12절까지는 시내산에서 토라를 줌으로 해석을 하려는 사람들은 14절에서 비로서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이 나타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 전의 로고스의 계시활동을 성육신 전의 계시활동으로 보아야 한다. 자기 백성 이스라엘에게 시내산에서 토라를 주심으로 나타나셨으나 그의 백성이 영접치 않고 남은 자만 영접하였다. 이 로고스가 드디어 성육신했다. 그래서 우리 가운데 거해서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았다. 성육신한 로고스를 통한 하나님의 계시는 진리와 은혜가 가득한 것으로 모세를 통해서 계시된 율법보다 능가하는 것이다. 율법과 성육신을 통한 계시가 대조된 것을 보고 이렇게 언급한다. 즉 로고스의 성육신전 계시는 모세를 통한 토라의 계시이다. 로고스의 성육신을 통한 계시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다. 9-12절은 로고스의 이스라엘 역사 속에서의 활동을 말한다.

 


반면에 아니다. 여기서 부터 벌써 예수 그리스도의 활동을 말한다. 그 이유는 ① 6-8절에서 요한이 증거한 빛은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계시자라고 증거한 것이다. ② 11, 12절이 요한복음의 내용을 너무나 정확히 요약하고 있다. 요한복음은 두 권의 책으로 되어 있다. 첫째 표적들의 책)2-12장)에서 예수의 청중은 이스라엘 유대인들이다. 모든 유대인들에게 표적과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을 계시했으나 빛을 대부분이 거부하고 소수만 예수를 믿는 자들이었다. 둘째 13-20장의 수난과 영광의 책은 예수가 믿는 자들에게 자신을 계시한다(13:1).

11절은 첫 책을 요약하고 있다. 즉 예수가 자기 백성에게 왔으나 대부분이 영접하지 않고 소수만 영접했다. 12절은 두 번째 책을 요약한다. 믿는 자들에게 자신을 계시한다. 즉 이미 예수 그리스도 자신을 계시한다고 함. 그런데 이것도 요한복음의 기법중 하나이다. 요한복음의 이중 삼중의 의미를 갖는다. 요한이 보기에는 세상도 로고스의 것이고 특별한 이스라엘도 로고스의 것이다. 11절에 “그가 자기 것들 속으로 왔다. ”이 세상도 특별한 이스라엘도 로고스 것이다. 다시 말하면 이스라엘이 세상의 대표로서 이스라엘이 예수에게 한 것이 세상이 예수에게 한 것이다. 예수의 오심도 마찬가지이다. 이스라엘 역사 가운데 오심이다. 성육신 가운데 오심이나 같은 것이고 이스라엘의 반응도 똑같이 나타난다. 그래서 여기서 자기 것도 이중의 의미이다. 즉 이스라엘과 세상의 이중의미이다.

9-12절의 예수오심도 이중의미를 나타낸다. 즉 이스라엘 역사 가운데 오심과 동시에 성육신한 예수를 통한 오심의 이중의미이다. 왜냐하면 요한이 보기에는 이스라엘 역사 가운데 토라에 로고스가 왔을 때 대부분 이스라엘이 적대하고 거부하고 남은 자만 진정한 하나님의 백성이다. 성육신에 오실 때도 대부분이 거부하고 소수만 영접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 따라서 9-12절의 성육신전의 로고스 활동, 성육신후의 로고스 활동은 구분할 필요가 없다. 17절을 생각하면 성육신전을 그린 것 같고 세례요한의 증거와 요한의 구조를 생각하면 성육신 후를 그린 것 같은데 구분할 필요가 없다.

 


10절. “세상에 빛이 있었다”·····“알지 못했다”는 aorist인데 시점이 아니라 항상 알지 못했다. nomic aorist이다. 이스라엘의 구원사를 말할 수 있고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과 유대인들이 영접하지 않으므로 첫 책에서 보여준 것을 한 마디로 요약한 정도로 볼 수 있다.

11절. 토라를 통한 계시와 성육신의 계시를 영접치 않았다.

12절.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은 자연적으로 되는 것이 아니고 스스로의 노력으로도 아니고 로고스가 주는 것이다. 은혜의 사상이 들어있다. “하나님의 아들”을 요한복음에서는 예수에게만 적용했다. 자녀는 τεκνα를 쓴다. 우리가 예수를 통해서 하나님의 아들 됨에 참여하는 부차적인 의미이다. 어떤 사람에게 하나님의 아들 됨이 주어지느냐? 믿는 자들, 주 예수를 영접하는 자들에게 준다. 믿음의 근본 의미를 잘 정의하고 있다.

 

13절. 하나님의 자녀라는 것은 무엇이냐? 피, 혈통으로도 아니고 육신의 의지로도 아니고 남자의 의지로도 아니고 하나님으로부터 난자이다. 피와 육은 인간을 지칭하는 말이다. 전혀 인간의 방법에 의지하지 않고 자연적인 방법으로가 아니라 전적으로 하나님께로 말미암는 것을 강조한다.

14절. λογο?가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처를 취하시고·····. “로고스가 육신이 되었다. ” 창조와 계시의 수단이 되셨던 로고스가 육신이 되었다. 육신은 하나님께 적대하는 의미가 아니고 피조물이라는 하나님과 다른 존재로서의 인간, 영적인 존재와 분리된 존재로서의 인간을 말한다. 신적인 로고스가 우리와 같은 인간이 되셔서 인간의 모든 제약성을 나누게 되었다. “되었다.”는 aorist로 한 시점을 지칭한다. 이것은 역사적인 사건이다. 로고스가 시간 공간의 영역으로 들어오게 되었다. 창조의 중보자였던 로고스가 시공의 영역으로 들어왔다. 이것은 엄청난 역설을 내포하고 있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인격 즉 하나님이면서 동시에 인간인 그리스도의 인격의 역설을 한마디로 나타내고 있다. 여기서 배제해야할 오해는 2세기 말에 시작이 된 도케티즘이 배격이 된다. 어떻게 영적이고 신적인 존재가 물질적인 존재가 될 수 있느냐? 예수가 단지 결합해서 육신이 된 것처럼 보였을 뿐이다. 못박힐 때 영적인 예수는 떠나고 인간 예수가 못 박혔을 뿐이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인성은 부인하고 신성만을 강조하는 사상이다. 이 도케티즘적인 기독론은 진정한 계시를 불가능하게 한다. 계시는 두 가지 조건이 있어야 한다. 하나님은 하나님만이 계시할 수 있다. 예수의 신성이 천명될 때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을 계시하실 수 있다. 또 인간이 인간에게 완전하게 계시한다. 인간으로서만 하나님을 인간에게 완전히 보여줄 수 있다. 그래서 신성 인성 둘 중 하나가 약화되면 계시가 안 일어난다. 예수 그리스도의 로고스로서의 완전한 성육신이 완전한 계시자가 되어 하나님을 완전히 보여주고 인간이 되어 인간에게 하나님을 완전히 보여줄 수 있다. 인간 안에서 인간을 통해서 하나님을 계시한다는 사실은 하나님의 감추어진 계시의 성격을 잘 나타내 주고 있다. 하나님은 그가 계시되는 상황속에서 동시에 감추어져 있다. 계시되는 하나님은 감추어진 하나님이다. 인간을 통해서 계시되기 때문에 믿음이 있는 자에게만 하나님이 보인다. 믿음이 없는 자에게는 인간 예수만이 보인다. 성육신의 교리는 하나님의 계시를 말하며 감추어짐의 성격을 말하고 있다. 또 계시의 sacremental character를 나타내 준다. 하나님이 육신안에서 육신을 통해서 계시한다. 곧 인간 예수가 하는 것 말하는 것들이 하나님의 계시이다. 동시에 이것은 시공에서 일어나는 물질적인 물리적인 현상이다. 이 물질적인 형상들이 영원한 하나님을 계시하는 수단들이다. 영원한 하나님을 표징해 준다. 계시해 주는 물질적인 형상들을 sacrement라 한다. sign이다. 그래서 예수가 행하는 것들 말하는 것들은 영원한 로고스의 sign들로서 물질적인 것들이 하나님의 계시를 띄고 신성을 띈다.

 


“거하신다” σκηνοω라는 말은 텐트속에 거한다. 정착한다는 말이다. 이 말은 히브리어의 ???과 발음과 의미가 똑같다. 그래서 아마 요한복음의 저자가 이 단어를 취하지 않았나 생각한다. 왜냐하면 이 단어는 ????라는 명사를, 명사의 원천은 동사인데 이 말은 유대교에서 중요한 신학적인 언어였다. 하나님께서 출애굽 당시 이스라엘에 오셔서 이스라엘 백성과 함께 거하심을 나타내는 말이 ???, ????라는 말이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과 함께 거하심을 어떻게 아느냐? 하나님의 성막에 하나님께서 거하신다. 그의 임재하심(????)을 나타낼 때 어떤 외적인 현상이 나타나느냐? 구름과 빛의 현상이 나타난다. 그때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께서 자기들과 ???하고 성막에 ????(임재)하시고 구름과 빛으로 나타났다. 이것을 보고 ???(영광)이라 했다. 이 짧은 문장에 이런 뜻이 들어있다. 옛날 출애굽 당시 야웨가 그들 백성과 함께 거하시면서 그들의 성막에 임재하시면서 sign으로 빛이 내려 쬐고 구름을 보여주었듯이 그로 하여금 그의 백성들로 하여금 영광을 보도록 보여주셨는데 이제는 로고스가 육신이 되어서 우리들 가운데 ????했다. 그래서 그의 영광을 우리가 보게 되었다. 구약의 하나님의 나타나심, 자기 백성의 구원자로 나타나심의 theophany의 완성으로 예수의 성육신을 표현하고 있다. 하나님이 육신이 되어서 우리 가운데 거하신 사건은 하나님이 옛날 이스라엘 백성에게 나타내셔서 거하시고 나타나신 것과 같이 그 구원을 완성하는 사건이다.

 


“우리”라는 주어는 요한의 교회이다. 또는 기독교 교회전체이다.

“영광”이라는 말은 원래 헬라어로는 “좋은 의견” “좋은 영성”이라는 뜻이다. 성경에서는 특히 요한복음에서는 “하나님의 본질의 나타나심”이라는 뜻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본질이 인식됨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영광을 보았다는 말은 하나님의 본질이 계시되어서 우리가 하나님의 본질로 인식이 되었다는 말이다. 하나님의 본질, 창조자 되시고 구원자 되시고 구원주임을 알고 인정하는 것이 영광을 돌린다는 말이다. 로고스가 하나님의 영광의 본질을 나타내니까 우리가 하나님의 영광을 보았다. 구약성경에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나타나 임재하시면 그 표로 구름과 빛의 현상이 나타났다. 구름과 빛은 하나님의 임재하심을 나타내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구름과 빛을 ???라고 하고, 70인경에서는 δοξα라는 말로 나타낸다.

 


구약과 유대교에서는 하나님의 영광이 종말에 시온에 드러난다. 영광의 빛이 온 세상에 퍼지면 모든 민족들이 하나님의 영광의 빛을 보고 하나님의 본질을 알게 된다. 그러면 자기가 지금까지 섬기는 신들이 거짓임을 알고 우상을 버리고 시온에 와서 진짜 신인 야웨를 섬기게 된다. 이것이 선지자들과 묵시가들의 위대한 vision 이었다. 이방인들의 시온에 대한 종말론적인 순례라 한다. 선지자들의 vision이 예수의 하나님 나라의 근간을 이루고 바울의 신학의 근간을 이룬다. 하나님의 영광이 시온에 나타나는 것은 종말론적인 소망이다. 요한과 요한의 저자는 예수오심이 하나님의 영광이 시온에 나타난 현상이다. 우리가 그 영광을 보았다. 하나님의 본질이 나타나고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가능하게 된다.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우리를 구원하는 영생을 주는 것이다. 그래서 요한은 2장부터 예수안에서 그가 말하고 행한 것들을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는 것을 보여 줄 것이다. 예수의 이적을 통해서(2:11, 11:4, 40)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날 것이고 특히 예수의 십자가의 죽음을 통해서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날 것이다.

 


요 2:11 예수께서 이 처음 표적을 갈릴리 가나에서 행하여 그 영광을 나타내시매 제자들이 그를 믿으니라

요 11:4 예수께서 들으시고 가라사대 이 병은 죽을 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이요 하나님의 아들로 이를 인하여 영광을 얻게 하려 함이라 하시더라

요 11:40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 말이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하지 아니하였느냐 하신대

 


예수가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낼 수 있는 이유는 사람들은 자기의 영광을 취하나(5:44, 12:43) 예수는 하나님의 영광을 추구하므로(5:41, 7:18, 8:50)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낼 수 있다. 그래서 예수는 십자가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완전히 드러낼 것이다.

 


여기에 아주 심오한 사상이 있다. 예수가 하나님을 계시하기 위해서는 예수가 하나님과 같아야 한다. 동시에 하나님께 완전히 순종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하나님이 예수보다 커야 한다. 그러니까 본질적인 동등함과 기능적인 순종 복종의 상태의 두 가지가 예수가 하나님의 계시자이기 위한 조건이다. 하나님적인 로고스가 인간이 되어서 하나님을 보여줄 것이다. 예수는 하나님을 나타내려 한다. 예수의 하는 말과 행위를 통해서 하나님의 뜻이 드러난다. 왜냐하면 예수는 하나님의 말과 뜻만을 이행하니까 그렇다. 그래서 본질에서 뿐아니라 의지에서도 하나님과 하나 되었음으로 예수는 하나님의 계시자가 된 것이다. 어디에서 완성이 되느냐? 십자가에서 바로 하나님의 계시자로서 완성이 된다. 예수가 십자가에 못박힘은 하나님의 뜻에 완전히 순종하는 것이다. 그래서 십자가에서 하나님의 뜻(인류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만 나타난다. 십자가에 못박힌 예수는 하나님의 사랑, 하나님의 본질을 나타낸다. 사랑으로 하나님의 구원자이심을 나타낸다. 예수가 십자가에 달림은 하나님의 본질을 확연히 드러낸 것이다. 십자가에 죽음이 하나님의 본질을 드러냄이다.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냄이다. 그것은 동시에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는 자라는 것을 드러낸다. 역으로 말하면 예수가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분, 하나님의 계시자이다. 하나님만이 하나님을 계시할 수 있기 때문에 예수가 하나님을 사랑이심으로 나타내며, 하나님으로 자신을 나타내는 것이다. 따라서 예수의 십자가에 죽음이 고난 받으심이 아니라 예수의 영광 받으심이다. 예수의 본질이 드러남의 의미에서 그렇다. 하나님의 계시자, 하나님의 본질을 드러내는 자라는 의미에서 그렇다. 이런 역설적인 의미가 있다.

 


“그 영광이 아버지로 부터의 독생자의 영광이었다.” 영원한 로고스와 하나님과의 관계를 어떻게 설정할 것인가? 아들이라는 그림언어를 쓸 수 밖에 없다. μονογηνη?(독생자)라는 말은 하나 밖에 없는 아들, 독특성을 강조한다.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독생자의 영광이었다. 바로 이와 같은 아들의 근본 의미는 상속자이다. 그래서 아버지의 본질에 동참하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와 하나님과의 관계는 아버지와 아들과의 관계를 나타내는 것이다. 성육신하신 그가 하나님 아버지와 본질을 같이 하고 그로부터 나오는 독특한 아들이기 때문에 또한 순종한 자다. 완전한 순종을 아버지께 하는 자다. 아버지의 본질에 동참하며 동시에 완전히 순종하는 자이다. 그래서 계시의 두 조건을 만족시킬 수 있다. 그래서 그가 아버지의 영광을 우리에게 계시할 수 있는 분이다. 그 계시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한 것이다.

 


출 34:5 여호와께서 구름 가운데 강림하사 그와 함께 거기 서서 여호와의 이름을 반포하실새 6 여호와께서 그의 앞으로 지나시며 반포하시되 여호와로라 여호와로라 자비롭고 은혜롭고 노하기를 더디하고 인자와 진실이 많은 하나님이로라

 


“은혜와 진리”라는 말은 출애굽기 34장 5절 6절을 연상시키는 말이다. 하나님께서 그의 언약에 충실하심, 언약을 신실히 지킴을 뜻하는 말이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택해서 너희는 내 백성이고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다는 언약을 맺고 그들에게 하나님 노릇을 해주겠다고 약속을 했다. 이 말은 그들을 보호, 인도, 구원하겠다고, 사랑, 은혜를 베풀겠다고 약속했다. 이스라엘은 그의 보호, 인도, 은혜에 의존해서 살도록 그래서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며 살도록 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언약에 항상 신실하지 못했다. 이것이 죄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언약의 자기 쪽의 의무를 신실히 지키신다. 이스라엘이 불성실하고 죄를 범할 때에도 하나님은 언약에 신실하다. 이 신실하심이 죄의 용서와 구원의 사랑으로 나타난다. 하나님의 성실하심이 구원으로 나타난다. 이것을 하나님은 의롭다고 이야기한다. 하나님께서 언약에 신실하신 것을 하나님이 의롭다고 말한다. 하나님께 언약에 신실하심은 죄를 용서하시는 사랑과 이스라엘을 구원하는 사랑으로 나타난다. 그런 것을 여기서 나타내고 있다. 로고스가 성육신한 것은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 인류에게 그의 창조주로서의 언약을 지키심이다. 하나님께서 그의 피조물에게 창조주로서의 언약을 지키심이다. 하나님께서 특정한 이스라엘에게 신실하심은 온 피조물에게의 신실하심이다. 로고스의 성육신 사건은 언약의 백성 이스라엘에게 언약을 지킨 사건, 구원의 사건이다. 또 그것은 인류에게 창조주로서의 신실하심을 보이는 행위로서 인류를 구원하시는 구원의 사건이다. 그래서 그 성육신한 사건은 하나님의 본질을 드러내고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는 것이다. 하나님이 언약에 신실하심, 구원자로서 사랑이심을 나타내는 사건이다.

 


하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 인간으로 낮아짐은 은혜의 사건이고 그것은 하늘에서의 실재를 이 물질의 세계에 가져온 사건이다. 그래서 은혜와 진리이다. 진리라는 말은 헬라세계적인 사고로 말하면 진짜세계의 것이다. 가짜의 세계에 진짜의 세계가 온 것이다. 하나님의 세계가 가짜 세계 시공으로 들어온 것이다. 1:14절은 복음의 주제를 천명하는 말이다. 복음을 정의하면서 동시에 요한복음의 논지를 천명하는 것이다.

 

 

 

요 1:14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즉 성육신한 로고스이고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계시자로서 하나님의 본질 곧 하나님이 사랑이고 진리임을 우리에게 보여주는 분이다. 그래서 요한복음 2장부터는 예수의 삶과 가르침 사역이 기술될 것이다. 이 삶, 가르침, 사역은 한 인간의 사역이다. 곧 육신의 세계에 일어나는 육신의 활동들이다. 그런데 이 육신은 신적인 로고스의 성육신으로서의 육신이기 때문에 그의 삶, 가르침, 사역은 모두 하나님을 계시하는 사건이다. 나사렛 예수의 구체적인 사건들이 영원한 하나님의 계시의 사건들임을 보여줄 것이다.

 


요 1:8 그는 이 빛이 아니요 이 빛에 대하여 증거하러 온 자라

요 1:15 요한이 그에 대하여 증거하여 외쳐 가로되 내가 전에 말하기를 내 뒤에 오시는 이가 나보다 앞선 것은 나보다 먼저 계심이니라 한 것이 이 사람을 가리킴이라 하니라

 


15절. 8절에서 연결해서 읽어야 한다. 요한의 증거이다. “증거한다”는 말이 요한복음에서 중요한 말이다. 계시가 sign으로 오기 때문에 믿음으로 보여지기 때문에 증거가 중요하다. 세례요한이 첫 증거자로 나타난다. “그가 내 뒤에 오시는 자이다. ”시간적으로 뒤에 오는 자이다. “나보다 앞선 자이다. ” 이것은 시간적이긴 하지만 계급에 있어서 앞선 자이다. 로고스의 선재사상이 들어있다.

 


요 1:14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요 1:16 우리가 다 그의 충만한 데서 받으니 은혜 위에 은혜러라

 


16절. 14절과 연결시켜 읽을 때 이해가 된다. “우리가 그의 충만함으로부터 은혜위에 은혜를 받았다.” “그의 충만함으로부터”라는 말은 신성의 충만함을 말한다. “은혜위에 은혜러라”는 말은 번역하기가 어려운 말이다. “Χαριν αντι Χαριτο?”를 일반적으로 번역을 하면 “은혜에 대항하는 은혜”로서 반대적인 의미가 나타난다. 또 하나는 “은혜위에 또 은혜”로 번역할 수 있다. 세 번째는 “은혜에 상응하는 또 은혜”로 번역이 될 수 있다. 정확히 이해할 수 있는 것은 쉽지 않다. 17절을 읽고 16절을 읽어야 한다.

 


왜냐하면 17절은 율법은 모세를 통해서 주어졌다. 시내산에서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율법을 주셨다. 이 율법은 하나님의 언약의 표현으로서 언약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선택하시고 그들에게 구원을 약속하신 것이다. 곧 은혜를 베풀겠다고 약속한 것이다. 율법을 주신 행위가 은혜이다. 율법이 모세를 통해서 주어졌다. 그리고 아무 접속사가 없다. 은혜와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왔다고 이어서 쓰고 있다. 이것이 17절이다. 17절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느냐? 대조를 이루느냐? 연속성을 말하느냐? 모세의 율법도 은혜의 표시이고 사랑의 표시인데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계시가 완전히 드러난 것이냐? 루터파 신학은 복음과 율법의 불연속성을 강조한다. 칼빈주의자는 복음과 율법의 연속성을 강조한다. 곧 복음이 율법의 성취임을 강조한다. 복음과 율법의 신학은 바울신학에서 주로 바울의 가르침을 토대로 논의된다. 그런데 요한복음의 16, 17, 18절에서 바울신학의 율법과 복음의 연속성과 불연속성을 여기에 도입해야 하느냐는 것이 첫째문제이다. 루터파 신학의 입장은 은혜대신 은혜라고 해야한다. 기껏해야 그렇다. 개혁주의 입장에서는 구약의 율법을 주신 것도 은혜이고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은 더한 은혜이다고 이해한다.

 


18절. “누구도, 어디에서나, 어느 때에도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다. 하나님의 품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만 그 분을 나타냈다. ” 여기의 한마디 한마디가 재미있는 말이다. “아무도 어디서나 어느 때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다. ” 많은 학자들이 구약성경에서 모세를 두고 하는 말이라고 한다. 구약성경에서 하나님은 보이지 않는 분이다. 하나님은 감추어진 분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초월성을 말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절대 초월하셔야 우리를 구원하실 수 있다. 하나님이 우리의 이성으로 다 파악할 수 있는 존재이면 하나님은 인간보다 작은 존재, 이성보다 작은 존재이다. 결코 인간을 구원할 수 없다. 보이지 않아야, 초월하셔야 인간을 구원하실 수 있다.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을 아느냐? 보이기로 스스로 결정했을 때 자신을 계시하시기로 스스로 결정했을 때이다. 구약과 유대교의 구원사에서는 누가 하나님의 계시자인가? 모세이다. 모세에게 하나님께서 어떻게 보여주셨나? 그런데 요한복음 저자는 어느 때나 아무도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다고 이야기 하고 있다. 이것은 율법이 하나님을 완전히 계시하는 것으로는 부족한 것이다. 그렇다면 반대적인 의미가 더 많다. 예수가 성육신한 로고스로서 비로소 하나님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예수가 하나님 품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스스로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라고 논리가 전개된 것이다. 18절을 읽으면 반대쪽의 의미가 더 강하다. 그러나 구약성경 스스로가 하나님의 언약의 신실함을 가르쳐 주셨는데 그것은 성육신한 예수의 완전한 하나님의 빛의 계시의 빛 아래서 본다 하더라도 구약성경 자체를 무시할 수는 있느냐? 특히 요한복음에 있어서 중요한 주제가 예수 그리스도가 구약의 예언들을 성취한다는 사상이다. 그것은 구약의 예언을 궁극적으로 이해하는 것이다. 이렇게 생각을 하면 은혜위에 은혜로라고 해석을 할 수 있다. 이것은 점진적인 연속성을 강조한다. 그런데 요한복음 2장부터 보면 예수가 구약의 예언들을 성취할 뿐 아니라 폐지한다. 이것은 반대의 개념으로 들어온다. 즉 성취와 대치, 연속성과 불연속성의 변증법적인 균형을 이루고 있다. 그 긴장이 서문에서 벌써 나타나고 있다.

 


“아무도 어디에나 어느 때도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다.”는 말은 모세를 두고 하는 소리이나 보편적인 적용성이 있다. 모든 종교가 신을 논하고 하나님에 대한 지식 구원을 논하나 그것은 다 가짜라는 것을 선언하고 있다. 왜냐하면 아무도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보지 못했기 때문에 계시할 수도 없다. 그런데 아버지 품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만이 계시하셨다.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다. 이것을 어느 사본에는 θεο?로서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다. 어떤 사본에는 υιο?로서 나타난다. 독생하신 아들이 계시하고 있다. 요즘의 학자들은 θεο?로 보고 있다. μονογηνη?라는 말은 독생자라는 말이고 독생자 하나님이 계시하셨다는 말이다. 이것은 서시의 클라이맥스에서 언급하는 것이다.

 


요 20:28 도마가 대답하여 가로되 나의 주시며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

 


요한복음 20:28절의 요한복음 전체의 클라이맥스와 상응한다. 도마가 예수의 왕 되심을 인식하고 신앙고백함으로 클라이맥스를 이룬다. 요한복음의 결론은 예수가 하나님으로서 하나님을 계시하시는 분이라는 것이다. 그 요한복음의 전체내용을 로고스의 존재와 활동으로 요약하는 이 서시가 결론되는 곳에서 θεο?로 읽어야 전체 결론과 상응한다.

“아버지의 품속에 있는” 밀접한 관계와 사랑의 관계속에 있는 독생자이다. 아버지와 독특한 아들의 관계인데 하나님의 품 속에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본질에 참여하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의지에 있어 일치된 자이기 때문에 하나님을 나타낸다. 이 나타낸다는 말 즉 εξεγησατο는 말이 재미있다. 이 εξεγηοναι는 지도자로서 무리를 이끈다는 뜻이 있다. 신약성경에는 이 의미로는 안 쓰인다. 해석한다는 말로 쓰인다. 그러니까 아버지의 품속에 있는 본질에 참여하고 완전히 순종하는 독특한 아들 예수가 하나님을 우리에게 주셨다. 계시해주셨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의 빛을 우리에게 주셨다. 그 계시자는 요한복음에서는 로고스, 말씀이라 소개하고 있다. 말씀의 계시활동도 해석이다. 곧 계시의 말씀성, 예수가 우리에게 하나님을 계시했는데 그 계시는 무엇으로 왔는가? 말씀으로 왔다. 로고스의 찬송시와 잘 어울리는 동사로 예수의 활동을 한마디로 요약하고 있다. 기독교의 활동도 keryguma와 복음선포로 이루어진다.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그냥 귀신을 보듯이 보기를 갈망하나 성경에서는 중요시 하지 않는다. 바울이 고전후에서 그렇다. 말씀이 중요하다. 십자가의 도가 십자가가 중요하다고 한다. 그래서 롬 10장은 믿음은 들음에서 온다고 하고 있다. 기독교 계시체계 전체는 말씀선포와 들음으로 되어 있다.

1:19-51절은 증언들의 section이다.

 


세례요한의 증언(3일간에 걸쳐 일어나는)과 세례요한의 제자였다가 예수의 제자인 자들의 증언, 그리고 예수 스스로의 증언들로 이루어졌다.

세례요한의 증언은 3일에 걸쳐 일어난다. 첫날은 자신에 대한 주정의 증언들이다. 둘째 날은 예수에 대한 증언적인 증언들이다. 셋째 날은 그의 제자들이 예수의 제자로 이동하는 증언들로 되어 있다. 이들의 증언 속에 계속해서 구약과 유대교와 당시의 다양한 메시야 사상이 반영되어 있다. 여기서 보여주고자 하는 것은 진정으로 믿음 있는 자는 예수가 바로 이 다양한 유대교의 메시야 사상을 성취하는 메사야라는 것을 보여준다. 증언들의 section의 기능들은 2장부터 20장까지의 예수의 계시활동이 당연히 불러 일으켜져야할 믿음 그리고 그 계시 활동을 보고 깨달은 자들은 예수가 메시야 사상을 성취한 것을 믿고 고백하게 된다.

 


19-24절은 요한의 3일간의 증언이다.

19-28절은 첫째 날의 증언이다. 바리새인들로 부터 파견된(24) 제사장 레위인들이(19) 세례요한에게 와서 질문한다. “네가 그리스도냐?” 세례요한의 답은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다. ” 그 다음 질문 “누구냐? 엘리야냐?” “나는 아니다. ” 그 다음 질문 “그 선지자냐” “아니다”고 답이 줄어든다. 질문들은 그리스도냐? 선지자냐? 엘리야냐? 이것들이 예수 당시 메시야 사상을 반영하고 있다. 메시야 사상은 다양하다. 그 중에서 주된 메시야 사상은 나단의 신탁이었다. 나단의 신탁에 의거하여서 정치적 군사적인 메시야 사상이 민속 메시야 사상이었다. 대표단이 물은 이유는 세례요한이 종말론적인 회개운동을 하니까 메시야라고 주장하는가 보다하고 물었다.

아니라고 하니까 엘리야냐고 물었다. 엘리야는 말라기 3:23절에 의하면 메시야 보다 먼저 와서 메시야를 소개할 자로 되어 있다. 마11:14, 17:12절에서는 예수가 요한을 엘리야라고 한다. 말3:23절의 예언 대로 메시야인 자기를 소개하는 자로 이해를 하고 있다. 변화산에서 율법의 대표 모세와 선지자의 대표인 엘리야가 예수의 메시야 됨을 준비한 분으로 같이 나타난다.

 


말 3:1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보라 내가 내 사자를 보내리니 그가 내 앞에서 길을 예비할 것이요 또 너희의 구하는 바 주가 홀연히 그 전에 임하리니 곧 너희의 사모하는 바 언약의 사자가 임할 것이라

말 4:5 보라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 내가 선지 엘리야를 너희에게 보내리니 6 그가 아비의 마음을 자녀에게로 돌이키게 하고 자녀들의 마음을 그들의 아비에게로 돌이키게 하리라 돌이키지 아니하면 두렵건대 내가 와서 저주로 그 땅을 칠까 하노라 하시니라

 


마 11:14 만일 너희가 즐겨 받을진대 오리라 한 엘리야가 곧 이 사람이니라

마 17:12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엘리야가 이미 왔으되 사람들이 알지 못하고 임의로 대우하였도다 인자도 이와 같이 그들에게 고난을 받으리라 하시니

 


그런데 왜 요한복음 여기서는 요한이 자기를 엘리야가 아니라고 하는가? 얼핏 보기에 모순이 하나 생겼다. 아마 마태, 막에서는 예수가 세례요한이 엘리야의 기능을 성취한 것으로 엘리야라고 말한 것 같고 요한복음에서는 엘리야가 다시 살아나서 오는 것으로 믿는 유대 묵시문학적 엘리야가 아니라고 요한자신이 부인을 한 것 같다.

 


그 다음 “그 선지자냐” 그 선지자란 신명기 18:15절에 근거해서 종말에 모세와 같은 선지자가 올 것으로 믿었다. 그래서 제 2의 출애굽을, 구원을 이룰 것으로 믿었다. 이것을 종말의 선지자가 한다. 거기에 대해 요한이 부인한다.

 


신 18:15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의 중 네 형제 중에서 나와 같은 선지자 하나를 너를 위하여 일으키시리니 너희는 그를 들을지니라

 


“네가 무엇이냐?” 하니까 이사야 40장 3절을 인용해서 “광야에서 주의 길을 곧게 하라고 부르짖는 목소리다”고 한다. 이것은 로고스와 대조를 이루고 있다. 즉 로고스인 예수는 하나님의 말씀인데 반해서 요한은 소리다. 그리고 예수는 빛인데 비해 요한은 등불이다고 대조를 이루고 있다. 26절에 “너희들 가운데 너희가 알지 못하는 한 분이 서 있다.”는 말도 당시 메시야 사상을 반영하는 것이다. 메시야는 아무도 모르는 곳에서 갑자기 나타난다는 사상이 있었다. 나중에 예수와 대적자들 가운데 이 사상으로 논쟁이 벌어진다. 우리는 메시야가 아무도 모르는 곳에서 갑자기 나타난다고 그랬는데 우리가 너를 잘 안다. 즉 나사렛에서 난 요셉의 아들인 줄을 잘 안다고 했다. 그런데 네가 어떻게 메시야가 될 수 있느냐? 그런데 세상적인 것만 보는 사람들은 예수를 잘 안다고 하지만 그래서 예수가 메시야 자격이 없다고 한다. 실제로는 예수는 위에서 하나님으로부터 온 사람이다. 실제로는 예수가 메시야 사상을 충족시키는 사람이다. 이것을 요한복음적인 메시야 비밀이라고 한다. 첫날은 자기에 대한 부정으로 끝났다.

 


사 40:3 외치는 자의 소리여 가로되 너희는 광야에서 여호와의 길을 예비하라 사막에서 우리 하나님의 대로를 평탄케 하라

 


29-34절은 둘째 날의 증언들이다.

예수에 대한 증거는 두 가지이다. ① 하나님의 어린양이다. ② 성령이 그 위에 머무는 자이다. 즉 성령으로 안수 받고 기름부음 받아서 성령으로 세례를 주는 자로 증거하고 있다.

① “하나님의 어린양”은 무슨 뜻이냐? 어떤 배경을 가지고 있느냐? C. H. Dodd는 계시록의 양을 의미한다. 양은 죄악의 세계를 정복하고 그의 백성으로부터 모든 죄악을 제하는 양을 말한다. 아람 말로 “팔리아” 라는 말이 있다. 이것은 양이라는 뜻도 된다. 이사야 53장의 주의 종이 ‘팔리아’로서 양이라는 뜻도 된다. 예수가 주의 고난 받는 종이라는 뜻이다. 사 53장의 주의 종을 두고 하는 소리이다. 왜냐하면 사 53장의 주의 종, 고난 받는 주의 종, 하나님의 백성을 위해서 대신적으로 고난 받는 주의 종을 하나님의 양이라고 그랬다. 70인경에는 ‘암노스’라고 되어 있다. 그런데 여기에는 ‘아르미’로 되어 있다. 예수가 주의 종으로서 자기 백성과 세상의 죄를 없앨 분으로 세례요한이 증거한 것이다.

 


또 하나의 해석은 유월절 어린양으로서 증거한 것이다. 요한복음에서는 유월절 만찬을 위해서 제사장들이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져온 양들을 성전에서 잡아 음식으로 준비하는 그 순간에 예수가 십자가에서 못 박힌다. 닛산 14일 날 못 박힌다. 이 날 유월절 만찬을 하고 typology를 완성하는 분으로 나타난다. 예수의 십자가의 못박힘을 그릴 때 유월절의 의미를 많이 부여한다. 예수의 십자가에 못 박힘을 새로운 출애굽을 위한 하나님의 구원의 사건으로 나타낸다. 바로 예수가 유월절 양이라는 해석이 있다. 그런데 문제는 유월절 양은 제사의 의미가 없다. 잔치에서 먹기 위해서 잡았다고 하며 어떤 학자들은 이 해석을 반대한다. 그러나 고전 5장 7절에 보면 “그리스도 우리의 유월절 양이 제사되었다.”고 말하고 있다. 바울에게 있어서는 유월절 양이 제사의 의미로 해석이 되었다. 이것은 원래 구약에서 성전에서 행하여지는 다양한 제사들이 각기 다양한 뜻들을 가지고 있었는데 예수 당시 제사의 의미가 섞여 버렸다. 그래서 원래 제사의 기능이 없던 유월절 양도 제사의 기능을 갖는 것으로 바울이 인식을 하게 된 것 같다. 이런 것을 보면 세례요한이 예수를 세상 죄를 져 없애 버리는 어린 양이 될 수 있겠다.

 


많은 학자들은 두 가지의 의미를 다 담고 있는 것으로 보고 있다. 세례요한이 예수를 유월절 양의 의미로, 주의 고난 받는 종의 역활을 감당하는 분으로 나타낸다. 예수의 구원의 사업은 하나님의 백성의 죄를 없애 버리고 하나님의 백성, 새로운 하나님의 백성으로 만드는 곧 출애굽의 구원의 역사를 새롭게 하는 분으로 나타내고 있다.

 


② 둘째 증거는 “성령이 그의 위에 머물고 그가 성령으로 세례를 준다.” 요한복음은 세례 주는 장면을 그리고 있지 않으나 32절에서 세례요한으로 부터 예수가 세례 받는 것을 전제하고 있다. 그리고 예수가 그때에 메시야로서 성령으로 안수 받음, 성령으로 기름부음받 음을 전제하고 그러기 때문에 예수가 성령으로 세례를 주시고 성령으로 전능한 능력으로 하나님의 일을 하고 하나님의 권능을 나타내고 하나님을 계시하는 분이라는 말이다. 31절에 보면 “나도 그 분을 몰랐으나 그 분을 이스라엘에게 ······”

 


35-42절. 여기는 요한복음의 특징 중 하나인 이중의미가 가득 들어 있다. 그래서 가령 36절의 하나님의 어린 양이라고 다시 증거함으로 두 제자가 예수를 따랐다. “따랐다.”는 말은 문자적으로 뒤따르다는 말이고 근본 의미는 제자가 된다는 의미이다. 44절, 8:12절, 10:4, 27절, 12:26절, 21:19절 이하, 22절 등에서 따르다는 의미로 제자가 된다는 말로 자주 나타난다.

 


요 8:12 예수께서 또 일러 가라사대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두움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

요 10:4 자기 양을 다 내어 놓은 후에 앞서 가면 양들이 그의 음성을 아는 고로 따라오되

요 10:27 내 양은 내 음성을 들으며 나는 저희를 알며 저희는 나를 따르느니라

요 12:26 사람이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르라 나 있는 곳에 나를 섬기는 자도 거기 있으리니 사람이 나를 섬기면 내 아버지께서 저를 귀히 여기시리라

요 21:19 이 말씀을 하심은 베드로가 어떠한 죽음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것을 가리키심이러라 이 말씀을 하시고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나를 따르라 하시니

요 21:22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올 때까지 그를 머물게 하고자 할지라도 네게 무슨 상관이냐 너는 나를 따르라 하시더라

 


38절 따르는 것을 보고 “무엇을 구하느냐?”고 물었다. 이 말도 표면적인 의미는 무엇을 찾고 있느냐? 무엇을 기대하고 오느냐? 는 말이나 “어디에서 왔으며 어느 세계에 속하는 분입니까?”라는 고백적인 의미가 있다. 예수는 하늘에서 온 로고스로서 하나님의 아들로서 이 세상에 성육신하신 분이다. 예수의 거하시는 곳은 하늘의 영의 세계이다. 그런데 “어디에 거한다”는 말은 요한복음의 독특한 어휘중 하나이다.

 


39절. “와보라.”도 이중의 의미가 있다. 예수에게로 오는 것은 신앙을 의미한다. 3:21, 5:40, 6:35, 37, 45, 7:37절 등에 믿음을 ‘예수에게 나아오는 행위’로 표현하고 있다. “본다.”는 말도 지식과 믿음을 나타내는 말이다. “와보라”도 문자적 표면적인 의미이나 예수께 믿음으로 나아와서 자기가 영원의 세계에서 온 구원자임을 와서 보라는 말이다. 제자들은 예수에게로 와서 예수를 보고 예수를 깨닫고 그와 함께 영원의 세계, 하늘의 세계에 머무는 자이다. 이들은 결국 그의 영광을 보게 될 것이며 그를 믿게 될 것이다(2:31)

 


그때가 한 십시 쯤 되었다. 유대인들은 해가 지는 때를 한 날의 시작으로 보았다. 따라서 10시는 오후 4시쯤 된다. 주석가들은 10시가 충만함을 나타내는 상징어냐? 금요일 10시는 안식일이 시작되는데 제자들이 예수와 더불어 안식에 참여하는 것을 상징하는 것이냐? 토론을 한다. 두 가지 가능성이 다 있다.

 


요한의 제자였다가 예수의 첫 제자들이 된 자들의 이름이 나오는데 첫째가 안드레였다. 시몬의 형제 안드레였다. 안드레는 헬라이름이다. 위의 빌립도 헬라이름이다. 이것은 헬라어가 예루살렘의 유대인에게도 널리 쓰이는 언어이며 헬라이름을 쓰는 것이 보통이었다. 또 하나의 제자도 이름을 밝히지 않으나 예수께서 사랑하시는 제자로서 세베대의 아들 요한자신이었을 것이다. 이들이 요한의 증거를 듣고 와서 확신하고 예수를 믿게 되고 예수에 대해서 증거하기 시작했다.

 


“우리가 메시야를 발견했다.”고 증거한다. 증거를 받은 자는 시몬인데 예수가 그에게 게바라는 이름을 준다. 게바는 헬라어로 반석이라는 말이다. 이것은 공관복음 전승과 마찬가지인데 요한은 게바라는 베드로의 이름을 강조해서 설명하지 않는다. 그냥 사실만 언급하고 넘어간다. 구약에서 보면 하나님의 구원사에서 중요한 역활을 할 사람에게 역활을 상징하는 새로운 이름을 주는 일이 있다. 그래서 예수께서 시몬에게 바위라는 이름을 준 것은 예수가 새롭게 시작하는 하나님 나라의 구원사에서 바위와 같은 역활을 할 사람이라는 뜻이다. 이것을 공관복음에서는 강조하며 다루나 요한복음에서는 그 사실만 기록하고 있다.

그 다음에 또 이튿날 예수가 갈릴리로 가려고 할 때에 빌립을 발견하고 예수가 그에게 “나를 따르라”고 하였다. “따르라”는 문자적인 의미가 있는 동시에 내 제자가 되라는 이중의 의미가 있다. 빌립이 베드로 안드레와 동향 사람이었는데 빌립이 예수의 제자가 되었고 또 나다나엘에게 “모세가 율법에 쓰고 또 선지자들이 쓴 그 사람을 내가 발견했다”고 증거하고 있다. 모세가 율법에 기록했다는 말은 아마 신 18:15절에 나오는 “모세와 같은 선지자”를 약속했는데 그 선지자가 종말에 제 2의 출애굽의 구원을 이룰 종말의 선지자로 그려졌다. 안드레는 “그리스도 메시야”라고 증거했다. 또 “선지자들이 쓴 분이다”는 말은 선지자는 엘리야이다. 모세가 율법의 대표였다면 엘리야는 선지자의 대표이다. 엘리야가 다시 살아와서 하나님의 구원을 예비한다는 사상이 있었는데 이 빌립은 예수에 대해서 종말의 선지자라고도 하고 다시 올 엘리야라고도 증거하고 있다.

지금까지 예수의 제자 된 자들의 예수에 대한 증거는 세례요한이 자신이 그리스도도 아니고 엘리야도 아니고 선지자도 아니라 한 것과 같다. 이 section은 예수의 메시야 됨에 대한 증언들의 section이다. 이것이 주된 제목이라고 하면 제자도에 대해서도 나타나 있다. 제자는 예수를 따르는 자들이다. 제자는 예수께 와서 예수가 구약의 선지자들의 예언의 성취자임을 보고 알고 믿고 증거해야 한다. 제자도를 전형적으로 나타내고 있는 모본을 보여준다. 제자들은 와서 보고 믿고 함께 거하고 그에 대해서 증거한다는 것은 부제로 나타난다.

 


**** 나다나엘과의 대화 ****

증거하니까 처음에는 조금 부정적으로 반응한다. 나사렛에서 무슨 메시야가 나겠느냐? 구약에는 나사렛에서 메시야나 선지자가 난다는 말이 없다. 베들레헴에서 메시야가 나온다고 기록이 되어 있다. 예수를 진짜로 아는 사람들은 예수가 구약의 메시야의 고향을 충족시키는 줄을 안다. 나다나엘 처럼 피상적으로 아는 사람들은 모르나 진짜로 아는 사람들은 예수가 베들레헴에서 실제로 나셨고 실제로는 하늘에서 오신 메시야인 줄을 안다. 이 대화에서 이런 것이 나타난다. 예수가 나다나엘을 보고 “보라 이는 참 이스라엘 사람이고 그 속에 간사한 것이 없다”고 하셨다. 그 속에 꾀가 들어있지 않은 진짜 이스라엘 사람이다고 지칭한다. 이에 대해서 나다나엘이 “나를 어떻게 아십니까?”하니까 예수가 대답하시기를 “빌립이 너를 부르기 전에 무화과나무 아래서 보았다”고 하셨다. 이에 대해 나다나엘이 예수에 대해서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요 당신은 이스라엘의 임금이다”고 고백한다. 그러니까 예수가 나다나엘에게 말하면서 나다나엘을 통해서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천사들이 인자위에 오르락 내리락 하는 것을 너희들이 볼 것이다“고 말씀하신다.

 


여기서 구약의 세 개의 중요한 구절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① 삼하 7:12-16절의 나단의 신탁이다. 나단의 신탁을 보면 선지자 나단을 다윗에게 보내서 신탁을 준다. 네 수가 다하면 네 씨(다윗의 씨)를 택해서 네 다음 왕위에 앉히고 그를 하나님의 아들로 선언하겠다. 그래서 너의 아들이 나의 백성 이스라엘 백성위에 하나님 대신 합법적으로 통치하고 왕을 삼겠다. 그리고 너의 가문(집)을 세우겠다. 그리고 그로 하여금 하나님의 야웨의 집(성전)을 짓게 하겠다는 약속을 했다. 다윗의 아들이 다윗의 왕위에 오르고 이스라엘의 진정한 왕은 하나님이신데 하나님 대신에 그의 백성을 합법적으로 통치할 수 있는 의미로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선포한다. 그래서 가령 시2:7절을 보면 이스라엘의 왕의 등극시에 다윗의 자손으로 다윗의 왕위에 오를 때마다 너는 하나님의 아들이다 너는 나의 아들이다고 선언이 되었다. 이 말은 하나님 대신에 하나님의 백성위에 합법적으로 군림한다. 나단의 신탁은 다윗왕조를 건설하는 것이고 다윗의 자손이 이스라엘 백성을 통치할 수 있는 합법성을 부여하는 것이었는데 이스라엘 역사 속에서 이방민족의 오랜 지배와 바벨론 포로의 과정에서 이것이 메시야적으로 메시야적인 예언으로 이해되었다. 종말에 다윗의 씨 다윗의 가지를 하나님께서 일으켜서 자기 아들로 선언하고 다윗의 왕좌에 앉힌다. 다윗왕조를 재건하고 성군의 통치와 이방민족을 정복해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태평성대를 가져오리라는 메시야 사상의 중요한 뿌리가 여기서 나온다. 예수 당시 메시야적 칭호는 “다윗의 아들”“다윗의 가지”등이었다. 메시야 이름이 다윗이었다.

 


삼하7장12-16

삼하 7:12 네 수한이 차서 네 조상들과 함께 잘 때에 내가 네 몸에서 날 자식을 네 뒤에 세워 그 나라를 견고케 하리라 13 저는 내 이름을 위하여 집을 건축할 것이요 나는 그 나라 위를 영원히 견고케 하리라 14 나는 그 아비가 되고 그는 내 아들이 되리니 저가 만일 죄를 범하면 내가 사람 막대기와 인생 채찍으로 징계하려니와 15 내가 네 앞에서 폐한 사울에게서 내 은총을 빼앗은 것같이 그에게서는 빼앗지 아니하리라

16 네 집과 네 나라가 네 앞에서 영원히 보전되고 네 위가 영원히 견고하리라 하셨다 하라

 


나다나엘과 예수와의 대화에서 나다나엘이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로 고백한 것을 예수가 다윗의 신탁을 성취할 메시야로서 다윗왕국을 재건할 사람이다. 즉 메시야라고 고백하고 있다. 예수는 유대인들이 (여기서 유대인과 이스라엘은 정 반대의 의미를 갖는다. )예수 안에서 예수를 통해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을 선택한 목적, 하나님의 구원사가 성취될 것을 믿는 사람들이 이스라엘이고 육신적으로 아브라함과 야곱과 이삭의 후손들이지만 구약의 예언을 성취한 것을 깨닫지 못하고 반대한 사람이 유대인들이다. 유대인들은 세상의 대표이다. 유대인들이 가령 요6장에서 오병이어의 사건으로서 제2의 모세로 예수를 정치적인 왕으로 만들려고 하자 예수가 도망을 갔다. 예수가 예루살렘에 입성할 때 이스라엘 왕으로 사람들이 환영을 했다. 빌라도와의 토론에서 세상적인 왕이 아님을 예수가 밝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대인의 왕이라는 칭호아래 십자가에 못박힌다. 실제로 요한복음이 보여준 것은 예수가 유대인의 왕이 아니라 이스라엘의 왕이다. 이스라엘은 육신적인 유대인이 아니고 예수를 믿어 하늘에 속한 영적으로 새롭게 창조된 공동체가 이스라엘이다. 민족주의적인 개념, 물리적인 개념의 왕이 아니라 영적인 그들의 주로서 왕임을 보여주고 있다. 나다나엘이 나단의 신탁을 성취하는 분으로 예수를 고백한다. 이에 예수가 나다나엘에게 튼 것을 보여 주겠다고 약속한다. 완전한 계시를 약속한다.

 


② 하나님의 나타남에 대한 비젼을 본 것이다. 9절에 어좌들이(복수) 놓여있고 “옛적부터 계신 이”(하나님)이 어좌에 등극하고 책이 펴지고 심판을 베풀고 13절에 그리고 내가 보니 또 “한 사람의 아들 같은 이(인자)”가 하나님 앞에 구름을 타고 나아와서 14절에 하나님으로 부터 왕권과 영광을 받는 것을 보았다. “왕권을 받았다”하는 말은 하나님 대신에 통치권을 받았다는 말이다. 구약의 언어를 빌리면 하나님과 하나님으로 왕권을 부여받아 하나님 대신에 통치할 수 있는 분은 누구냐? 하나님 아버지와 하나님의 아들로 표현을 해야 한다. 실제로 다나엘이 본 것은 하나님이 등극하시고 그의 아들이 그 앞에 나와 하나님으로부터 대권을 받아 통치하신 것을 보았다. 그 아들이 한 사람의 아들 같은 이 같이 생겼다. 사람의 아들이란 셈족어에서 사람이라는 뜻이다. 구름을 타고 하나님 같이 나타났지만 동시에 사람 같이 생겼다. 이것이 다니엘이 본 환상이다. 이 환상이 의미하는 것을 18···, 22···, 26···에서 천사가 설명을 해준다. 그 비젼의 뜻이 무엇이냐 하면 종말에 하나님의 백성이(지극히 높으신 이의 성도들이) 하나님의 나라를 받는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해석한다. 이 그림에서 한 사람의 아들 같은 이가 하나님으로 부터 왕권을 받는다는 의미를 하나님의 백성이 종말에 하나님의 나라를 받는 다고 해석을 하고 있다. 그러니까 여기 한 사람의 아들 같은 이 곧 하나님의 아들은 하나님의 백성이다. 여기는 개인이고 여기는 복수다. 종말에 하나님의 백성의 대표로 체현으로 이해를 하고 있다.

 


단 7:13 내가 또 밤 이상 중에 보았는데 인자 같은 이가 하늘 구름을 타고 와서 옛적부터 항상 계신 자에게 나아와 그 앞에 인도되매

14 그에게 권세와 영광과 나라를 주고 모든 백성과 나라들과 각 방언하는 자로 그를 섬기게 하였으니 그 권세는 영원한 권세라 옮기지 아니할 것이요 그 나라는 폐하지 아니할 것이니라

 


다니엘서의 이 환상은 묵시 문학의 특성상 종말에 지상에서 실재가 될 하나님의 구원의 게획을 계시한 것이다. 하나님의 구원의 게획이 이미 하늘에 짜여있다. 이 게획을 하나님의 선지자들이나 묵시가들을 통해서 미리 내 보내신 것이다. 하나님의 백성으로 하여금 절망적인 상황에서 절망하지 말고 타락한 세상에서 같이 타락을 하지 말고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이 종말에 실재가 될 것을 바라며 하나님의 언약에 충실히 거할 것을 권면하는 것이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선민으로 하나님의 축복의 대상이다. 역사적인 현실은 바벨론, 알렉산드리아가 헬라군대와 로마군대 등에 짓밝힘을 당하고 있다. 이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 다니엘을 통해서 약속(언약)을 지킬 것이라고 이야기 하고 있다. 약속을 신실히 지켜 종말에 백성에게 하나님 나라를 구원을 주시겠다는 계시이다.

 


③ 창세기 28장 12절

에서의 장자권을 빼앗은 야곱이 어머니의 고향으로 도망을 가는 도중에 벧엘에서 잠을 잤다. 그때 꿈을 꾸었는데 사다리가 자기 몸에서 하늘 끝까지 놓여지고 천사들이 오르내리고 있었다. 벧엘이라고 야곱이 그 곳의 이름을 불렀다. 이 이야기가 유대신학자들에게는 엄청난 중요성을 갖는 것이다. 탈굼의 여러 판들이 일관되게 이 이야기를 확대시킨다. 또 랍비들의 창세기 주석에도 길게 서술이 되어 있다. 거기에 야곱이 그의 형을 속이고 어머니의 고향으로 도망을 갈 때 천사들이 동행해서 보호하고 있다. 벧엘에 이르러서 야곱이 잠이 드니까 천사들이 하늘에 올라가서 다른 천사들에게 빨리 내려와서 보아라. 그래서 자고 있는 야곱의 얼굴을 보라고 했다. 그래서 자고 있는 야곱의 얼굴을 보았다. 왜 이럴 필요가 있느냐? 하늘의 궁전 하나님의 어좌에 야곱이 앉아 있다. 천사들이 야곱을 보기를 원했으나 보지 못했다. 지상에 잠자고 있는 야곱은 천상의 야곱의 모형이다. 그래서 야곱의 얼굴을 보기 위해서 저녁 내내 오르락 내리락했다. 이 이야기는 황당무개한 이야기 같으나 어떤 신학적인 진리를 표현하려고 하느냐?를 물어야 한다. 야곱은 이스라엘 민족의 내포적인 대표이다. 야곱은 개인이면서 동시에 이스라엘 민족이다. 야곱 이스라엘의 언약의 백성으로서의 숙명은 하나님의 어좌에 높힘을 받아서 하나님의 자녀로 하나님의 영광에 참여하는 것이다. 그러나 현실은 자기 형에게 쫓기는 신세로 방황하고 있다. 로마 사람, 바벨론 사람에게 짓밟히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현실은 이방민족으로 부터 짓밟히고 살지만 종말에 하나님의 어좌에 높힘 받아서 그와 교제하고 그의 영광에 참여하고 영생에 참여하는 이스라엘의 숙명을 나타내고 있다. 그래서 신앙을 북 돋우려고 하고 있다.

 


예수가 중요한 유대신학적인 용어와 이 신학적인 용어를 확장해서 말하고 있다. 더 이상 야곱 이스라엘이 아니라 인자위에 오르락 내리락 한다고 했다. 예수도 자신이 인자여서 옛 하나님 백성의 조상이며 옛 하나님의 내포적 대표인 야곱과 대치해서 자기에게 소속되는 새로운 하나님의 백성을 위해서 하나님의 백성으로 하늘에 속하게 하는 자인 것을 나타내려는 것이다. 인자에게, 속한 새로운 하나님의 백성은 나다나엘처럼 그 속에 간사한 것이 없는 진짜 이스라엘이다. 진짜 이스라엘은 그 속에 간사한 것이나 꾀가 없다. 옛 이스라엘 백성은 그 속에 야곱의 잔꾀 간사함이 들어 있다. 진짜 이스라엘 됨은 나다나엘과 같이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요 이스라엘의 왕이라고 신앙고백함으로서 나타낼 것이다. 이들을 요한복음에서 이스라엘이라고 말하고 있다. 이 51절 말씀은 창세기 28:12절 말씀을 해석한 것을 이어 받고 있지만 그것은 동시에 예수가 인자로 대치함으로서 다니엘에게 계시된 단 7장의 구원의 약속을 성취한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종말에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의 어좌에 높힘을 받는다고 예언을 하고 있다. 이렇게 함으로 지상에 사는 인간들이 예수 인자를 통해서 하나님의 세상 하나님의 영광에 참여하게 된다. 이런 것을 영생이라고 한다. 이 구원을 나다나엘에게 약속하고 그것을 성취하는 것을 볼 것이라고 약속하고 있다. 1: 51절은 서론의 결론이다. 서론을 전체적으로 결론지으면서 요한복음의 본론을 한마디로 요약하고 있다.

 


창28:12

창 28:12 꿈에 본즉 사닥다리가 땅 위에 섰는데 그 꼭대기가 하늘에 닿았고 또 본즉 하나님의 사자가 그 위에서 오르락내리락하고

 


요 1:51 또 가라사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사자들이 인자 위에 오르락내리락하는 것을 보리라 하시니라

 

 

 


요한복음 주해 요 2-4장

 


김세윤 박사

 


요한복음 본론 2-4장

 


본론(2장-20장)은 이 51절의 예수의 약속을 펼칠 것이다. 예수가 어떻게 약속을 성취하느냐? 예수가 인자로서 대속과 새 언약의 죽음을 당하시므로 그 결과로 하나님의 백성이 창조된다. 하나님의 자녀들로서 이들이 하나님의 영광에 참여하게 한다. 하나님 나라의 실재를 계시하고 어떻게 십자가의 죽음으로서 모든 사람을 자기에게 이끌어서(12:32) 그가 하늘로 올라가서 그들로 자기 있는 곳에 있게 한다. (14:3, 3:13)시공의 제한성 속에 사는 인간은 위엣 세상 무한에 참여해야 만이 구원이 가능하다. 이 구원은 하늘에서 온 인자가 대속의 제사로서 십자가의 죽음으로 하나님과 연합시켜 그래서 하나님의 생명에 참여하게 하고 하늘로 높인다. 하나님의 보좌 위에 높인다. 그래서 하나님의 무한함과 영광 생명에 참여하게 한다. 이것을 본론에서 보여준다.

요 12:32 내가 땅에서 들리면 모든 사람을 내게로 이끌겠노라 하시니

요 14:3 가서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

요 3:13 하늘에서 내려온 자 곧 인자 외에는 하늘에 올라간 자가 없느니라

 

 

 

제 1부 2:1-4:42

 


이 부분은 두 개의 이야기와 두 개의 설교로 구성이 되어 있다.

2:1-11 물을 포도주로 변화시킨 첫 표적에 대한 이야기

2:12-19 예수의 성전 소란

3:1-21 니고데모와의 대화와 긴 설교

4:1-42 사마리아 여인과의 대화와 예수의 설교

 


이 두 가지의 설교들은 두 가지 의미의 표적들의 의미를 설명한 것이다. 니고데모와의 대화는 첫 표적과 더 많이 관계가 있다. (성전소란과도 관계가 있지만) 사마리아 여인과의 대화도 첫 표적과 관계가 있으나 성전소란과 더 관계가 있다. 그런데 표적들이 나타내는 것은 예수가 새 시대 새로운 구원의 시대를 열음이다. 요한복음에 처음부터 끝까지 흐르는 성취, 예수가 구약과 유대교를 성취한다. 성취함으로서 능가해서 완전히 대치하는 주제가 흐른다. 이것이 집약적으로 있는 곳이 제 1부이다. 어떤 때는 성취가 강조되어 있고 연속성이 강조되어 있고 어떤 때는 대치가 강조되어 있다. 강조점이 어디 있느냐에 따라 섬세한 해석이 필요하다.

 


2:1-11 가나 혼인 찬치

“잔치”는 종말에서의 메시야 왕국에서의 하나님의 축복을 나타내기 위해서 즐겨 쓰고 있다. 잔치는 하나님이 대표요 하나님이 source이다 우리는 그의 손님이다. 잔치에 가면 풍요함이 있다. 배부르면 만족하고 기쁨이 있다. 잔치라는 것은 모든 것이 사랑의 상황에서 이루어진다. 하나님 나라에서는 구원의 실재를 잔치로 비유할 때는 인간의 실존을 결핍성으로 제약성으로 설명한다. 모든 죄가 이 결핍성에서 온다. 결핍성에서 욕구불만 채워질 수 없는 욕구불만이 있고 배고품 기쁨이 없고 사랑이 없고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이 있다. 이런 상황에 있는 인간에게 예수께서 구원을 약속한다. 이 구원을 어떻게 표현하는가? 풍성한 기쁨이 있다. 이유는? 무한하신 하나님이 베푸는 잔치이기 때문이다. 구약 유대교에서 종말에서 잔치는 메시야 왕국의 소망 하나님 나라의 그림이었다.

이 잔치에 포도주가 떨어졌다. 이것은 이 잔치는 풍성한 잔치가 아니다 결핍성의 잔치이다. 흥이 깨지고 기쁨이 사라지고 생명력이 깨뜨려져 버렸다. 이 잔치에 커다란 유대 정결의 예를 갖추기 위한 물동이들만 앉아 있다. 유대교의 정결의 예(레위기)를 다 갖출 수 있는 물동이가 흥이 깨진 잔치에 아주 소용이 없다. 이것은 맥빠진 유대교를 상징한다. 여기에 예수가 나타나서 아무 쓸모없는 정결의 예의 물독을 제일로 맛있는 포도주로 만들었다. 다시 생명력이 넘치는 잔치로 바꾸었다. 이것을 요한은 표적이라고 한다. 예수가 물을 포도주로 만들었다. 이것을 표적으로 더 깊은 하늘의 진리를 나타내 주고 있는 것이다. 이 이적의 표적성을 깨달았다. 그래서 그들이 진정한 본질을 영광을 깨닫고 믿게 되었다. 진정한 본질은 예수가 구약과 유대교를 성취하고 능가하고 대치하는 새로운 구원의 시대를 여는 것으로 깨달았다. 하늘에서 오는 우리에게 풍성한 잔치를 베푸심으로 결핍성으로 부터 우리를 구원해 내셔서 하늘의 기쁨과 생명력에 참여하게 할 시대를 여셨다.

 


2:12-19 성전 소란 사건이야기

전통적으로 이것을 성전 청결이라고 했다. 성전 뜰이 얼마나 크냐 하면 가로 300미터 세로 475미터이다. 성전 뜰 여인의 뜰 남자의 뜰 제사장 제단 지성소 등이 있다. 로마 군대가 약 5-6백 명이 주둔하고 있었다. 감시하고 있었다. 중요한 순례절기에는 민족해방운동이 자주 일어나기 때문에 로마 군대가 주둔하고 있었다. 여기에 장사가 이루어지고 있었다. 여기에 와서 예수가 상을 뒤업고 소란을 피웠다. 전통적으로 이것을 성전청결이라고 한다. 성전의 거룩성을 회복해서 하나님께 헌당했다는 뜻으로 해석을 했다. 이방인의 뜰은 요즘 사람들이 만든 뜰이고 원래 없었다. 막11:16절에 근거해서 성전이 유대인의 전유물로 전락했다고 많은 사람들이 이야기한다. 원래 성전은 모든 사람 이방인들 까지 포함한 기도의 처소였는데 이방인들이 기도하는 것 마저도 유대인들이 막아서 예수가 싹쓸이 해서 이방인들로 하여금 기도처를 되찾게 했다. 그래서 이방인들을 위한 모든 사람들을 위한 기도처로 했다는 의미로 예수의 성전에서 소란피우는 사건을 해석하는 사람들도 있다. 요새 와서는 정치신학 해방신학자들은 혁명적으로 당시 성전 제사장들의 부패 타락상을 말하는 것이고 가난한 유대인 디아스포라로 부터 오는 민중들을 착취하는 것을 상징했기 때문에 폭력을 사용했다고 해석을 한다. 이런 것들은 별 의미가 없다.

사실 성전 소란 사건이 큰 사건이 아니었다. 큰 사건이었다면 성전경찰에게 잡혔다. 성전소란은 혁명적인 엄청난 사건이 아니라 장사치 몇 명에게 상징적으로 상 몇 개를 뒤엎은 사건이다. 이것은 구약에서 보는 선지자적 시위 싱징적인 데모이다. 행위자체에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고 상징적 행위를 통해 전달하는 메세지가 있다.

 


여기서 논쟁이 벌어진다. 네가 성전에서 소란을 피우고 있는 이유가 무엇이냐? 표적을 내봐라. 메시야로서의 권세를 증명해라. 이에 대해 예수가 이 성전을 허물라 그러면 사흘 만에 내가 세우겠다고 한다. 이 말은 요한복음의 유명한 기법이 나오기 시작한다. 곧 오해(disunderstensing), 지도자들은 문자 그대로 해석을 한다. 시공의 물리적인 의미로 해석을 하고 그것의 영적인 진리 하늘의 진리 표적성을 보지 못한다. 46년 동안 걸렸는데 3일 만에 짓는다고. 그들은 에수의 표적성을 깨닫지 못했다. 요한은 이 표적성을 자기 몸을 가리키는 것으로 해석한다. 심지어 제자들도 예수의 부활 후에야 깨달았다. 부활의 빛 아래 되돌아 보았을 때 깨달았다. 이 말은 예수의 대속과 십자가의 죽음이 새 언약의 제사이다.

 


3장 4장은 두개의 이야기가 나온다. 첫 이야기는 대표적인 유대인이라 할 수 있는 니고데모와의 대화이고 사마리아 여인과의 대화이다. 니고데모는 바리새인으로 유대인의 관원으로 아마 산헤드린 공회의원 이었을 것이다. 10절에 보면 이스라엘의 선생이다. 유대교의 대표적인 유대인이다. 유대교의 심오하고 성결하고 좋은 부분을 대표하는 자이다. 이 사람이 밤에 예수께 찾아 왔다. 밤은 진리와 거리가 먼 혼돈의 질서 속에서 이 세상의 혼돈과 고난을 상징해서 하나님과 진리의 세계와 반대의 세계를 말한다.

 


이 때 니고데모가 빛이신 예수께로 나아온다. 요한복음에서 밤은 9:4, 11:10, 13:10절 등에서 상징적인 의미로 몇 번 쓰인다. 3장 19, 21절에서 빛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예수가 세상의 빛으로서 이 세상에 하나님을 계시하고 그 계시에 부정적으로 응답하는 자들에게 심판을 내리시는데 2절의 밤은 그 빛과 대조적인 현상이다.

니고데모가 와서 랍비여 당신이 하나님께로 부터 온 그 선생임 줄 우리가 아나이다. 우리가 라고 복수로 말하는데 여기 니고데모도 2:23절에 언급된 예수의 첫 표적들을 보고 예수에 대해 열려진 태도를 보이기 시작한 자들을 대표해서 말하는 것 같다. 그래서 3절에 예수가 하나님으로 부터 보냄을 받은 자이고 하나님이 함께 하시고 하나님의 능력으로 표적들을 행한다고 시초적인 신앙들을 가지고 있다. 그런 태도로 거기서 더 깨우침을 받고자 밤에 찾아 온 것이다.

예수가 아멘 아멘 아노센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을 볼 수 없느니라. 여기에 재미있는 것이 많습니다. 첫째는 아멘 아멘 이라는 말은 유대교에서는 당시 하나님의 말씀선포 끝이나 기도 끝에 썼다. 그것이 진리 됨과 신실함을 천명하는 것으로 썼다. 예수는 항상 아멘을 먼저 쓰고 중요한 선언을 했다. 이것을 예수의 독특한 아멘 사용법이라 한다. 여기서 예수가 스스로 선포한 말이 아멘 됨 진리 됨을 보장하는 예수의 하나님의 계시자로서의 권위주장을 깨달을 수 있다. 가령 선지자들은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했다. 고 말함으로 청중들의 관심을 자기에게서 여호와께로 돌려서 자기 말의 진리 됨과 신적인 권위를 보장받으려고 했는데 예수는 정반대로 아멘 그리고 내가 말한다고 말함으로 청중들의 관심을 자기에게로 돌리고 자기가 중요한 말씀을 하는데 그것이 아멘으로 보장한다고 해서 선지자들보다 더 직접적인 하나님의 절대 계시자로서의 자기 주장을 했다. 공관복음에는 아멘이 한 번 나오는데 요한복음에서는 아멘이 두 번 나온다. 우리 말은 진실로 진실로라고 번역을 해서 이 말이 얼마나 독특한지를 알지 못한다. 그것을 번역을 하지 말고 그냥 아멘 아멘으로 두었어야 했다. 예수가 하나님의 계시자로서 선지자 보다 더 권위 있는 자라고 니고데모에게 말하는 것이다.

그 다음에 아노센 거듭난다. 는 말이 중요하다. 번역을 하지 않고 그냥 쓰는 이유는 두 가지 이유가 있다. 하나는 위로부터 라는 의미가 있다. 둘째는 다시의 의미가 있다. 요한은 둘 다의 의미로 쓰고 있다. 위로부터는 헬라의 이원론적인 틀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위는 하나님의 영의 세상이고 아래는 육의 세상 물질의 시간의 세상이다. 아래 있는 사람이 위로부터 나야 한다. 아래 있는 사람은 하나님을 볼 수 없고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 그래서 하나님 나라의 풍성한 영생에 들어갈 수 없다. 하나님 나라의 풍성한 삶 영생에 참여할 수 없다. 왜? 육으로 난 것은 육이고 이 세상에 속하는 존재로서 죽음에 얽매여 있는 자들이다. 그래서 하나님 나라의 영생에 동참하려면 위로부터 나야 한다. 이미 난자가 나야 하니까 다시 나는 것이다. 육으로 난 자가 위로부터 나야 하니까 다시 나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중생이란 예수를 믿음과 세례를 통해 새롭게 된 것으로서 다시난다. 거듭난다는 개념이다. 1:12 11:52 요일2:29 3:9 4:7 5:1, 4, 18 등에 다시난다는 그림언어가 똑같이 나온다. 이것은 요한이 절대적으로 쓰는 그림언어이다. 믿음과 세례로 그리스도인이 됨이 다시남이다.

 


요 1:12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요일 3:9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죄를 짓지 아니하나니 이는 하나님의 씨가 그의 속에 거함이요 저도 범죄치 못하는 것은 하나님께로서 났음이라

요일 4:7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께로 나서 하나님을 알고

요일 5:1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믿는 자마다 하나님께로서 난 자니 또한 내신 이를 사랑하는 자마다 그에게 난 자를 사랑하느니라

요일 5:4 대저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기느니라 세상을 이긴 이김은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

요일 5:18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범죄치 아니하는 줄을 우리가 아노라 하나님께로서 나신 자가 저를 지키시매 악한 자가 저를 만지지도 못하느니라

 


그외 벧전 1:3, 23 딛 3:5 등에도 그림언어가 비슷하게 쓰이고 있다. 바울은 더 적극적이고 포괄적인 의미로 “새창조” “새피조물(고후5:17)”로 표현한다. “거듭난다”는 것이나 “새창조”가 나타내려는 reality는 다 똑같은 것이다. 육의 상태에 있는 자녀가 하나님의 자녀로 새롭게 되었음을 나타내는 그림언어이다. 죄와 죽음에 얽매여 있던 존재가 하나님 나라에 참여하는 존재로 새롭게 변화되었음을 나타내는 그림언어이다. 요한적인 그림언어가 벤전 디도서에도 사용되고 있다. 이것이 “위로부터” 난다는 의미가 첫째 의미이고 “다시” 난다는 것은 부차적인 의미이다.

 


벧전 1:3 찬송하리로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이 그 많으신 긍휼대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

벧전 1:23 너희가 거듭난 것이 썩어질 씨로 된 것이 아니요 썩지 아니할 씨로 된 것이니 하나님의 살아 있고 항상 있는 말씀으로 되었느니라

딛 3:5 우리를 구원하시되 우리의 행한 바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지 아니하고 오직 그의 긍휼하심을 좇아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 하셨나니

고후 5:17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4절 니고데모가 “어떻게 다시 날 수 있는 가?” 하고 질문한다. 여기서 유명한 오해가 발생한다. 니고데모는 유대인의 대표이고 예수에 대해서 조금 눈이 띄인 상태이지만 영의 세계 진리의 세계에 참여하지 않는 자로 육의 세계에 속하기 때문에 윗세상의 진리를 알리가 없다. 육의 사고방식으로 밑의 세상으로 인식을 할려고 하면 예수의 말씀을 오해할 수 밖에 없다.

 


5절 예수가 다시 말한다. “물과 상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 ” 5절은 3절을 되풀이 하고 있다. 병행구절이다. 5절과 3절을 똑같은 말이다. 3절의 “아노센”을 “물과 성령으로” 나야한다고 5절은 풀어서 쓰고 있다. 세례의 물은 성령의 상징어이다. 성령의 힘이 역사하는 세례는 물로 일어난다. 물로 깨끗이 씻김을 받고 육에 속한 삶을 끝맺고 위의 세상 하나님 나라에 동참하는 존재로 다시 나는 일이 없이는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다. 예수가 이 말을 유대인의 대표인 니고데모에게 말하고 있다. 여기서는 유대교도 유대인의 가장 심오한 것도 이 땅에 속한 것이다. 유대교에서 자연적으로 하나님 나라로 갈 수 없고 거기에는 과격한 단절이 있어야 한다. 이 단절은 예수께서 가져오는 성령에 의해서 새로 나야한다. 이것은 인간의 종교적인 수양과 열심과 지혜가 아무리 심오하더라도 또 고귀하더라도 인간적인 가능성의 최상에서도 하나님 나라로 가는 것이 아니다. 인간의 모든 종교 도덕 이런 것에 대한 강력한 평가가 이 속에 숨어 있다.

가장 고귀한 지식 종교성도 우리 인간을 하나님 나라 영생 하나님의 세상으로 인도할 수 없다. 그 구원은 “위로부터” “성령으로부터”나야한다. 성령은 예수 그리스도가 가져온다. 그러니까 니고데모을 예로 들어 인간의 모든 종교성에 대한 평가를 말하고 있다. 지혜, 과학의 발달, 도덕성 함양, 교육을 잘 시키면 하나님 나라를 이루는 것이 아니다. 19세기의 자유주의, 낙관론적인 사상, 진화론적인 사상이 그랬었다.

과격한 새로남 새창조가 있어야 한다. 이것은 위에서 오는 영에 의해서만 가능하다. 요한복음에서 두고 두고 2중 3중의 의미를 가진 말을 많이 접할 것이다.

6절 7절에 이것을 설명하고 있다. 육에서 난 것은 육일 수 밖에 없고 성령으로 난 것만이 영이다. 육적인 가능성을 아무리 개발해도 육이다. 하나님의 세계 하나님의 reality에 참여할 수 없다. 영으로 난 것만이 영이다.

 


7절에 위로부터 나야한다는 것을 기이히 여기지 말라. 놀라지 말라.

8절은 첫째 인간으로 부터는 꿰뚫어 볼 수 없는 하나님의 영의 자유함과 심오함을 말한다. 인간의 의지로서는 control할 수 없는 하나님의 영의 자유함과 심오함을 말한다. 둘째 반면에 영의 역사의 결과가 분명히 나타남을 말한다. “푸뉴마”에 해당하는 히브리어의 “영”이란 말은 “숨”이라는 말에서 나왔다. 이 말은 “영”이라는 뜻도 있고 “바람”이라는 뜻도 있다. 예수가 영의 역사함을 바람에 비유하고 있다. 예수의 그림은 바람의 주권자적인 자유로움에 비유해서 인간이 control할 수 없는 영의 자유로움을 표현하고 있다. 인간의 지혜로 헤아릴 수 없다. 그러나 그 영의 역사의 결과는 알 수 있다. 마찬가지로 영이 역사된 곳에 거듭남의 결과는 있다. 위로부터 남의 결과는 있다.

 


9절 통 못 알아 듣겠습니다.

10절 예수가 핀잔을 준다. 유대교의 한계성을 말해주고 있다.

11절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나타난 계시 전체를 두고 하는 말이다. 우리가 아는 것 우리가 본 것을 증거한다. 그러나 너희가 받아들이지 않는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성령의 역사로 하나님의 아들이 되고 하나님 나라의 영생에 참여함을 체험하고 우리가 그것을 증거하는데 니고데모로 대표되는 너희들 유대인들이 받아들이지 않고 있다.

왜 유대인들이 받아들이지 않고 있느냐? 그들은 이 세상에 속한 자 땅에 속한 자들이기 때문이다.

12절에 우리가 땅에 속한 일을 말해도 너희가 믿지 않는다. 그런데 하늘에 속한 일을 말하면 너희가 믿겠느냐? T. K. Barret의 설명이 옳은 것 같다. “땅에 속한 일”은 이 물리적인 세상 육신적인 세상의 사건들로서 예컨데 태어남. 바람이 분다 등의 사건들로서 그리스도와 그 안에 역사하시는 하나님에 대해서 비유 역활을 하는 것들을 말한다. 그러니까 니고데모에게 예수는 난다, 태어난다, 바람이 분다는 땅의 현상을 비유로 들어 하늘의 현상을 설명했다. 그런데 니고데모가 못 알아 듣고 예수를 믿지을 못했다. 그런 상황속에서 하늘의 것은 하늘의 질서는 이 땅의 비유와 연결시키지 않고 그냥 직설적으로 말하는 것들이다. 이것을 말하면 어찌 믿겠느냐? 무슨 소용이 있느냐? 즉 땅의 것인 태어남 바람부는 현상으로 땅위에 속하는 물리적 현상으로 하늘에 속한 진리의 비유로 쓰이는 것들 하늘의 진리를 땅위에 있는 현상으로 비유해서 설명해도 못 알아 듣는데 비유하지 않고 하늘의 진리를 직접 말하고 선포하면 어떻게 믿겠느냐? 는 말이다.

 


13절 하늘에서 내려온 인자 외에는 하늘에 올라간 자가 없다.

유대교에서는 지금까지 세상에 하나님을 계시를 뜻을 계시하는 자가 쭉 있었다. 선지자들이 있었다. 그 선지자들의 계시를 유대인들이 성경으로 묶어서 연구하고 하나님을 터득한다고 보았다. 그런데 그 선지자들의 계시를 가장 잘 터득한 사람이 바로 니고데모이다. 이스라엘의 선생이고 유대관원이고 바리새인이다. 제일 열심 있는 연구가이다. 그도 한계가 있다. 하늘의 진리를 못 알아 듣는다. 심지어 비유해서 설명을 해도 못 알아 듣는다. 이것이 유대교의 한계이다. 왜 유대교에 이 한계가 있느냐? 선지자 자신들이 이 세상에 속한 자들로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서 이 세상에 그 말씀 하나님을 계시했기 때문에 그들 자신들이 제한적이었다. 반면에 예수는 누굽니까? 예수는 어떤 사람이냐? 하늘에서 내려온 사람으로서 하늘에 올라간 사람이다. 곧 위와 아래 세상에 속해서 다리를 놓은 사람이다. 하늘의 진리를 몸체로 이 세상에 나타내 주는 분이다. 예수 인자는 하늘에서 내려온 자로서 다시 올라가는 자로서 계시의 새 시대가 열리는 것이다. 유대교의 계시 방법은 간접적인 방법이다. 반면에 여기에는 성육신 하신 로고스가 하나님의 진리를 직접적으로 계시한 것이다. 이렇게 계시의 역사에 있어서 전혀 새로운 국면이 열리는 것이다는 것을 말한다. 그래서 선지자 시대에 속하는 대표적인 존재로서 계속 파고 파서 연구해서 하나님의 계시에 도달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완전한 계시를 받아야 한다. 그것은 위에서부터 새로남의 방식이다. 여기서 암시하는 것은 인자가 위세상과 아래 세상을 다리 놓는 분이고 아래 세상에 속하는 우리가 인자인 예수를 통해 윗세상에 영생에 참여하게 하는 분이다.

 


14절 15절 우선 13절에서 아무도 하늘에 올라간 자가 없다의 “올라간다”는 말과 14절 “높임 받는다”는 말은 동의어이다. 예수가 하늘에서 내려온 분이고 하늘로 올라간다. 따라서 “높임받음”과 “올라감”은 동의어이다. 어떻게 올라가느냐?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과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한다. 여기서 “높인다”는 말은 이중의미가 있다. 첫째 문자 그대로 예수가 십자가에 달려서 지상에서 들린다는 말이다. 둘째 그것은 동시에 지표에서 들림은 예수의 영광 받음이다. 영광 받음이란 예수의 본질이 드러남이다. 요한복음 13-20장 까지가 예수의 십자가에 못 박힘의 수난과 죽음에 대한 기록이다. 영광의 책이라 한다.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과 같이 예수의 십자가에 들림이 비교가 되고 있다. 비교점은 무엇인가? 랍비들의 해석은 쳐다본 자는 살고 보지 않는 자는 죽는다. 구리뱀의 구원의 힘은 놋 뱀을 쳐다본 자는 위에 계시는 하나님 아버지께 신뢰하고 그를 의지했다. 하나님 아버지를 바라보았다. 하나님 아버지에 대한 신뢰와 하나님을 앎 이것이 구원의 힘이 있었다고 해석을 한다. 이 예수는 눈으로 보는 사람은 거기서 바로 하나님을 발견한다. 그 하나님께 의존하게 된다. 그런 사람은 구원을 받게 된다. 예수의 십자가는 하나님의 아들을 내어주신 사건이다.

 


요 3:13 하늘에서 내려온 자 곧 인자 외에는 하늘에 올라간 자가 없느니라

14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15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16절 왜냐하면 하나님이 이 세상을 사랑하사 아들을 주셨다. 이것이 내어줌의 형식(giving a formular)이다. 하나님이 주어이고 하나님의 아들이 목적어인데 목적어를 내어 주셨다. 무엇하기 위해서 내어주셨는가?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서이다. 내어줌의 형식은 항상 하나님의 사랑을 나타내 준다. 내어줌의 형식의 대표적인 구절은 요3:16절이다. 또 롬 8:32 갈2:20 요일 4장에도 나온다. 나올 때마다의 강조된 의미는 하나님의 사랑이다. 요 3:16절에서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했다. 사랑을 한 증거는 그의 아들을 내어 주셨다. 무엇하기 위해서?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도록 하기 위해서다. 자기에게 반역한 이 세상 자기의 피조물이나 계속해서 자기에게 반역하는 존재. 요한복음에서 세상은 심오하다. 세상을 쭉 찾아보고 종합해 보라. 하나님의 피조물이고 하나님께 대항하고 반역하고 하나님으로부터 소외되고 하나님과 적대하는 관계 사단의 권세아래 암흑에 속해 있고 거짓 아래 있는 것이 세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하나님의 사랑의 대상이다. 어느 정도 사랑하느냐? 아들을 내어줌이다. 그의 아들을 내어줌은 그리스도 사건 전체이다. 성육신에서부터 십자가에 죽으심까지가 하나님께서 그의 아들을 주신 사건이다. 그러나 그것의 절정은 어디서 일어났느냐? 십자가에 죽으심이다. 예수의 십자가에서 하나님의 사랑이 드러났다. 요한일서 4장 8절의 하나님은 사랑이시다는 명제가 나타났다. 십자가에 달린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의 사랑이 계시되었다. 예수는 하나님의 사랑의 계시자이다. 예수는 하나님이 사랑이심을 계시하는 자다.

계시의 첫 원칙은 하나님은 하나님만이 계시할 수 있다. 예수가 하나님의 본질을 계시하는 것은 예수가 하나님과 같기 때문이다. 십자가의 예수는 하나님의 사랑 하나님의 본질을 나타내는 분으로서 그의 하나님 됨을 나타냄이다. 그 사건이 수난인데 그것이 예수를 하나님 됨의 본질을 나타냈다. 십자가 사건으로 비로소 예수를 하나님으로 고백한다. 예를 들면 도마의 신앙고백이다. 따라서 십자가 사건이 예수의 영광 받음 사건이다. 놋뱀 사건이 위를 쳐다봄으로 세상의 가치들의 가능성을 신뢰하지 않고 위로부터 오는 위에 계시면서 자신들을 구원하시는 언약의 하나님의 계획을 신뢰하고 보게 되었다. 마찬가지로 세상에 속한 자들이 육의 세상에서 자기들의 구원의 가능성을 찾으려 하고 행복의 조건을 찾으려 하고 돈 지식 명예 등을 추구하는 자는 구원을 못 받는다. 들림 받은 예수를 바라봄으로 하나님을 알게 되고 하나님의 사랑을 신뢰하고 하나님을 바라보는 자들이 구원받는다. 들림 받은 사건은 아들이 십자가에 못박히는 사건인데 그 사건은 하나님의 계시로서 하나님이 인류를 사랑함을 계시함으로 동시에 예수가 하나님의 계시자임을 스스로 나타내는 것이다. 예수를 보는 것은 하나님을 보는 것이고 우리가 하나님을 알고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세상에 참여하는 것이다.

 


안다는 것은 지식이 아니라 관계적인 의미이다. 하나님의 구원에 참여하게 되어 영원한 생명을 받게 된다. 영생은 신적인 삶이다. 종말론적인 의미이다. 이 시대의 삶이 아니고 오는 세대의 삶이다. 시간적인 이원론으로 표시했을 때 이 세대의 삶이 아니라 오는 세대의 구원의 세대의 삶이다. 헬라적인 공관적인 이원론으로 한다면 이 세대의 삶은 물질의 삶 오는 세대의 삶은 하나님의 세계의 삶 영생의 삶이다. 하나님의 무한한 부요함에 참여하는 삶이다. 이 세대의 삶은 육신적인 제한된 자원으로서의 삶이다. 이 삶은 고난과 두려움으로 가득 찬 삶이다. 우리가 불안한 이유는 시간의 제약 때문이다. 이 세대의 삶은 결핍 가난한 삶 고난으로 가득 찬 삶이다. 이것은 죽음의 증상들이다. 우리가 죽음 병에 걸린 것이다. 죽음 병의 증상들이다. 죽음이 우리 가운데 이미 시작이 되었다. 죽음의 세력에 붙잡혀 있다. 감기가 걸리면 증상을 나타내듯이 영생은 생명이라고도 한다. 이 영생은 하나님의 무한한 부요함에 참여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모든 지혜 질들로 만들어진 삶 신적인 삶이다. 여기에는 고난 결핍이 없다. 이것이 생명이다. 이 삶은 이 세대의 삶과 전혀 다른 것이다. 질적인 근본 차이가 있다. 우리는 이미 영생을 얻는 것이다. 아직 완성이 안 되었지만.

 


17절 하나님이 아들을 보내신 것은 심판이 아니라 구원하려 함이다. 16절에 내어줌의 형식이 있다. 17절은 보냄의 형식(sending formular)이다. 하나님께서 그의 아들을 보냈다. 그리스도라는 칭호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이름이다 보냄의 형식에는 아들이라는 칭호가 쓰인다. 보낸다는 말은 유대의 미쉬나의 대하코트 5장 5절에 보면 보냄을 받은 자는 보낸 자와 같다. 사자는 보낸 주인의 전권대사이다. 주인의 전권을 행사하는 자이다. 이런 보냄(사자)에 대한 이야기가 이 속에 숨어 있다. 특히 지혜의 신학이 배경을 이룬다. 지혜가 하나님의 딸로서 하나님으로 보냄을 받아서 하나님을 계시하고 하나님의 agent 실행자 일꾼 노릇을 한다. 요한복음 서문에서 유대 지헤의 신학의 배경으로 로고스라는 천명이 이루어 졌다. 예수가 하나님의 지혜로 말씀으로 구약시대에는 초월하신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 어떻게 역사하셨느냐? 그의 말씀 지혜를 통해서 역사하셨다고 점진적인 계시의 초보단계에서 깨달았는데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더 확실한 하나님의 계시를 통해서 보니 하나님의 아들 예수의 활약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로서 하나님의 전권대사이다. 아들이 보냄을 받았다. 아들은 상속자라는 의미가 있다.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말은 하나님의 상속자이다. 하나님의 모든 것에 참여하는 자, 하나님의 본질과 하나님의 전능함, 하나님의 모든 속성, 하나님의 부요함에 참여하는 자이다. 하나님의 전권을 위임받은 자라는 소리이다.

 


요 3:17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저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

 


목적은 즉 예수를 보낸 목적은 하나님의 계시와 구원을 위해서이다. 하나님을 계시해서 그를 믿는 자마다 구원을 받게 하기 위함이다. 예수가 하나님의 전권대사로서 하나님의 일 하나님의 구원의 행위를 하신 것이다. 하나님의 구원의 행위를 예수가 담당했다. 이 목적이 십자가에서 일어났다. 이것이 들림 받은 사건이다. 예수가 십자가에서 들림 받음을 보고 믿는 자들은 하나님께서 주시고자 하는 구원 영생에 도달한다. 그것을 말하기 위해서 여기서 부정적으로 말하기를 예수는 심판하러 오신 분이 아니라고 한다. 심판은 정죄 벌준다는 말이다. 그것이 아니고 구원을 받게 하려 왔다. 그런데 그 다음절에 금방 예수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않고 정죄 받지 않고 구원받고 영생에 참여한다. 그런데 믿지 않는 자는 이미 심판을 받아 버렸다 하고 몇 절에서 이 말을 부연한다. 이 말은 무슨 말이냐 하면 예수의 십자가를 예수 당시 예수의 십자가 복음이 선포될 때 예수의 십자가를 믿음으로 쳐다보고 여기서 하나님의 사랑과 구원의 뜻을 헤아려서 하나님의 구원을 믿는 자가 있는가하면 예수가 죄인이라고 예수를 정죄하는 자가 있다.

로마의 관원 제사장 유대인 빌라도는 예수를 죄인이라고 정죄하고 십자가에 사형에 처한다. 이들은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로서 하나님을 이 세상에 계시하고 하나님의 사랑을 계시하고 하나님의 구원을 위해서 이 세상에 보낸 자라는 것을 깨닫지 못하고 즉 예수의 계시를 안 받았다. 터득하지 못하고 도리어 예수가 죄인이라고 정죄하고 사형에 처했다. 예수가 빛으로 곧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가져 다 주는 빛으로 오셨다. 그 빛이 십자가에 나타났다. 그런데 소수 몇 사람은 그 빛을 깨닫고 하나님의 사랑을 알고 구원을 덧입었다.

이런 현상은 항상 일어난다. 예수의 십자가의 복음이 선포되는 곳에는 항상 어떤 사람은 예수가 하나님의 계시자라는 사실을 깨닫고 구원을 덧입고 어떤 사람은 그것은 아무것도 아니다. 어리석음이다. 미련함이다. 걸림돌이다고 정죄한다. 그래서 가룟유다 같은 사람은 예수가 이 세상에 오신 것은 구원하러 오셨는데 항상 무엇이 발생하느냐면 갈라짐이다. 이 갈라짐 갈음은 심판의 의미이다. 거짓과 참을, 옳은 것과 그른 것을 가른다. 두 번째 의미는 거짓과 그른 것이 잘못되었다고 정죄하고 밝히는 것이다. 이것이 심판이다. 그런데 예수가 오신 것은 사실은 구원하러 오신 것이다. 그런데 필연적으로 구원받은 무리와 그 계시를 반대해서 그 구원에 참여하지 않겠다고 스스로 거절하는 가름이 나타난다. 하나님의 백성과 세상의 백성의 가름이 나타난다. 세상의 백성은 하나님의 백성으로 하나님의 구원에 참여하지 못할 자로 스스로를 밝힌다.

어떻게? 예수의 메세지와 십자가에 대한 자기들의 반응으로 밝힌다. 자기들이 세상의 백성으로서 세상과 함께 멸망해가는 자로 스스로를 드러내는 것이다. 이런 자를 두고 여기서 심판을 이미 받았다고 말한다. 예수가 심판한 것이 아니라 사실은 자기가 스스로를 심판한 것이다. 그러니까 예수는 심판하러 오심 것이 아니라 구원하러 오셨다. 그러나 필연적으로 일어나는 현상은 일부에게는 구원이 일어나고 일부에게서는 심판이 일어난다.

추상화를 전시하는 화랑에 갔다. 우리가 그림에 대해서 잘 모른다고 합시다. 60년대에 구소련이 개방화 정책을 할 때 피카소 그림 전시회를 열었는데 후르시초프가 당나귀 꼬리를 몇 번 흔들어서 만든 그림 같다고 했다. 결국 그가 이 그림을 평가했다. 정죄했다. 그런데 실제로 피카소 그림에 대한 평가로 후르시초프 자신이 평가를 받은 것이다. 그림의 세계에 대한 무식을 폭로한 것이다. 구조가 이렇게 되어 있다.

 


예수가 빛의 세상에 왔다. 빛을 받는 자는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고 하나님의 구원에 참여한다. 빛을 정죄하고 빛을 거짓이고 죄인이라고 정죄하는 자들은 그 거부하는 행위로 내가 빛과 관계 없는 자 자신이 암흑의 세계에 속한자라고 스스로를 드러내는 것이다. 이것이 심판이고 정죄이다. 이것이 19-21절 까지의 설명이다.

 


22-30절 까지는 예수와 요한의 세례가 비교되어 있는데 그것은 니고데모 유대교의 대표에게 예수가 무엇을 말했느냐? 유대교의 최고의 표현도 하나님의 나라의 영생으로 자동으로 발전할 수 없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 하늘에서 온자 하나님의 계시자 그가 주는 영으로 새롭게 남으로 하나님의 나라의 영생에 참여 할 수 있는 것이다고 했다. 그것이 세례(물과 성령)를 통해서 이루어진다. 이 세례 성령을 전달하는 예수의 세례와 물세례만을 주는 요한의 세례가 대조된다. 요한의 세례는 유대교의 최고의 가능성 니고데모와 비슷한 것이다. 그것만 가지고는 안 된다. 성령의 세례를 통해서이다.

 


요 3:22 이 후에 예수께서 제자들과 유대 땅으로 가서 거기 함께 유하시며 세례를 주시더라 23 요한도 살렘 가까운 애논에서 세례를 주니 거기 물들이 많음이라 사람들이 와서 세례를 받더라 24 요한이 아직 옥에 갇히지 아니하였더라 25 이에 요한의 제자 중에서 한 유대인으로 더불어 결례에 대하여 변론이 되었더니 26 저희가 요한에게 와서 가로되 랍비여 선생님과 함께 요단 강 저편에 있던 자 곧 선생님이 증거하시던 자가 세례를 주매 사람이 다 그에게로 가더이다 27 요한이 대답하여 가로되 만일 하늘에서 주신 바 아니면 사람이 아무것도 받을 수 없느니라 28 나의 말한 바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요 그의 앞에 보내심을 받은 자라고 한 것을 증거할 자는 너희니라 29 신부를 취하는 자는 신랑이나 서서 신랑의 음성을 듣는 친구가 크게 기뻐하나니 나는 이러한 기쁨이 충만하였노라 30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 하니라

 

 

 

31-36절 까지

앞의 3:1-21절 까지의 내용들이 다시 한 번 요약되어 나타난다. 3장의 이야기는 2장에 대한 해설이다. 2장에서의 두 가지 이야기 즉 청결의 예의 물로 포도주를 만들고, 성전을 청결케함의 사건이다. 이 두 이야기는 표적이다. 이 두 개의 표적성을 해설한 것이 3장이다. 청결의 예의 물과 성전은 유대교이다. 이 유대교의 가장 고상한 표현인 니고데모도 포도주 떨어진 잔치와 같다. 더 이상 구원의 힘이 없다. 기쁨이 없다. 타락한 성전에서의 예배 등은 하나님의 사랑이 전달되지 않는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그가 주신 성령 윗세상의 힘에 의해서 유대교도 가장 고상한 유대교의 대표도 새로 나야 한다. 포도주가 상징하는 기쁨 축복 새성전으로서의 하나님과의 새로운 관계, 새로운 예배가 이루어진다. 어떻게 예수가 이것을 가능케 하느냐? 하늘에서 온 자이기 때문에 하늘에 것을 계시할 수 있고 하나님의 아들이기 때문에 하나님을 계시할 수 있고 하나님의 십자가에서 내어 주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계시해서 그를 통해서 이 세상의 사람이 하늘로 올라간다. 요한복음 4장도 마찬가지로 이것에 대한 해설이 계속된다. 3장은 가장 고상한 유대교 우리 인간지성의 가장 고상함, 우리 인간 종교성의 가장 고상함 등으로 인간 가능성의 최대한 발휘로는 신적인 삶 하나님의 영생에 참여할 수 없다. 인간 낙관론과 휴머니즘에 대한 부정의 표현이다.

 


4장 사마리아 여인.

사마리아 사람들은 유대인들이 볼 때에는 이방인과 마찬가지이다. 어쩌면 이방인들 보다 더 나쁜 부류이다. 그중에서도 여인이다. 즉 정통 유대교의 대표자와 남편이 6명이나 있는 이방여인이 대조된다. 이것은 무엇을 두고 하는 말이냐 하면 유대인들은 사마리아 종교를 이방인들의 우상종교의 혼합종교로 보았다. 이방인들은 우상을 “주”로 “남편”으로 말한다. 우상을 남편으로 주로 섬기는 종교를 말한다. 유대인들은 모세가 계시한 율법에 따라 정통 여호와 하나님만을 섬겼는데 사마리아인들은 이방인들과 섞여서 더럽혀서 이방인들의 신들을 다 섬기는 창녀와 같은 존재들이다. 혼합종교이다. 사마리아교를 혼합종교로 보았다. 그런 구조로 종교의 대표자인 사마리아 여자를 들어서 설명한다.

이들에게도 예수는 구원자이다. 4장 42절에 사마리아인들의 입에서 “이는 그가 참으로 세상의 구주신줄 앎이니라” 는 신앙고백이 나온다. 그래서 예수가 온 세상의 구원자인 줄을 앎이니라.

어떻게 전개하느냐면 두 가지의 그림을 통해서이다. 하나는 야곱의 우물과 하나는 성전이다. 한 구절은 예수가 생수를 주시는 분이다. 이것은 우리에게 생명을 주는 성령을 주시는 분이다는 것을 나타내는 것이 한 구절이다. 또 한 구절은 예수께서 하나님에 대한 진정한 예배를 가능케 하는 분이다는 것이 한 구절이다. 영이신 하나님을 영으로 진리로 예배케 하시는 분이라는 주제가 요한복음 4장에 나오는 주제이다. 그래서 이 두 주제는 2장의 두 사건(표적)들과 연결 되고 3장과도 연결이 되어 있다. 그래서 2-4장까지가 한 단위를 이루는 예수께서 구원의 새로운 장을 여는 분이라는 것을 나타내고 있다.

 


1-9절 까지는 예수가 본론에 들어가기 위한 주변 정황을 상당히 자세하게 설명한다. 예수의 선교활동 중에 있음직한 한 에피소드를 말하기 위해서 주변 정황을 자세히 말하고 있다.

10절에서 예수께서 네가 하나님의 선물과 네게 마실 것을 달라고 한 자가 누구인줄 알았으면 너는 그에게 요구할 것이고 그는 너에게 생수를 줄 것이라고 예수가 사마리아 여인에게 말을 한다. 그런데 여자는 이 말을 못 알아 듣는다. “생수”는 두 가지 의미가 있다. 하나는 샘에서 솟아나서 흐르는 활수, 흐르는 물이다는 뜻이다. 생수라는 뜻이다. 그러나 더 깊은 의미는 “영생을 주는 물”이라는 뜻이다. 그런데 사마리아 여인은 아래 세상에 사는 보이는 것 만족할 수 있는 것 물질의 세계에 사는 존재이기 때문에 “활수”로서의 의미 밖에 보지 못한다. 세상적인 의미로 가치판단을 하기 때문에 항상 예수가 의미하는 영의 세계 진리의 세계 높은 세상의 의미를 터득하지 못한다.

 


그래서 이 우물은 깊은데 당신이 어떻게 떠올 수 있느냐? 고 질문한다. 즉 오해가 일어난다. 게다가 이 여인은 12절에 우리 조상 야곱이 이 샘을 우리에게 주었고 그도 이 샘으로 마시고 그 자손들도 이 샘으로 마셨는데 당신이 야곱보다 더 위대하냐?고 한다. 즉 야곱과 비교하는 좋은 대화의 전환점이 생겼다. 야곱은 이스라엘과 사마리아인들이 자기들의 조상이라고 주장하는 사람으로서 야곱의 우물이 이스라엘 백성을 지금까지 목을 축인 것은 사실이나 이 물은 마셔도 다시 마셔야 하는 물이다. 영생을 주는 물이 아니다. 이 물은 토라 율법을 상징한다. 토라 율법 모세율법이 하나님의 계시체로서 그 토라를 배우면 우리가 하나님을 알게 되고 그 하나님의 구원을 힘입는다는 의미에서 우리가 그 물이라는 것은 생명에 꼭 필요한 것이다. 물의 상징성 물은 빛과 마찬가지로 보편적인 상징어로서 유대교에서는 토라가 물이다.

 


야곱의 물은 토라로 상징된다. 이것은 부족하다. 어떤 의미에서 부족하냐? 영원히 결핍이 없는 그런 삶을 허락하는 것이 아니고 이 세상에서 조금 도움을 주는 정도의 것이다. 반면에 예수가 주는 물은 그와 반대로 영생을 주는 물이다. 그래서 이 물을 마시면 목마름, 부족함, 결핍 등이 없다. 위에서 오는 생명의 물이다. 그러니까 이 말도 여인은 못알아 듣고 활수로서의 의미만 부여한다.

 


그러면 그 물을 달라고 예수께 부탁한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러니까 예수가 자기가 제공하겠다는 그 물은 성령을 두고 말함을 가리키고 있다. 성령이 바라는 사람들에게 영생을 하락하는 것임을 깨우치고 있다.

 


여기서 우리는 대조를 발견한다. 토라와 예수의 계시가 대조되어 있다. 토라가 가져다 주는 축복(생명)과 성령이 가져다주는 축복(생명)이 대조되어 있다. 잠시적인 축복과 영원한 축복이 대조되어 있다. 야곱과 예수가 대조되어 있다. 요한복음 1:51절에 야곱과 예수가 대조되어 있다. 야곱이 옛 하나님의 자녀의 조상이었듯이 인자이신 예수가 새로운 하나님의 백성의 조상으로 대조된다. 야곱으로 시작된 옛 역사가 종결되어 지고 인자이신 예수를 통한 새로운 하나님의 백성이 탄생하는 것을 약속하는 것으로 요한복음 1장이 결론으로 끝나고 있다. 여기서 옛 야곱이 대표되는 이스라엘의 종교나 또는 마찬가지로 야곱이 자신의 조상이라고 주장하는 사마리아 종교는 그것이 하나님의 계시를 비록 가졌다 할지라도 그것이 겨우 마시면 다시 목마르는 잠깐 문제를 해결하는 것에 불과하다. 반면에 예수는 위에서 오시는 분으로서 우리에게 성령을 가져다 주는 분으로서 영생을 주시는 분이다. 예수가 야곱의 역사를 완성하면서 능가하고 대치하셔서 전혀 새로운 구원의 시대를 여는 것을 우리에게 말해 주고 있다.

이 여인은 계속해서 말귀를 못알아 듣는다. 그래서 16-18절 까지에는 이 여자의 불결한 삶을 지칭한다. 남편이 여섯 명이나 있었다고 한다. 유대교 쪽에서 보았을 때 사마리아교를 이방우상들을 섬기는 혼합종교로 여러 남편을 섬기는 창녀와 같이 깍아 내리고 있다는 것을 나타낸다. 예수가 여인에게 분명히 구원은 유대인들로부터 이다고 하며 이와 같이 여인이 남편이 여럿 있는 것과 같이 사마리아교가 우상을 섬기는 혼합종교 우상종교라고 은근히 나타냄으로 해서 유대교가 야곱라인의 정통임을 예수가 분명히 하고 있다. 이것은 신약성경 전체의 증언과 같다. 구원은 유대인으로부터 나는 것이고 유대인들이 그들의 모든 죄악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구원역사를 정통적으로 이루어 온 민족이고 유대교가 그 종교이다. 거기에 반해서 사마리아 종교는 자기들이 정통종교이고 모세율법을 따른다고 하지만 그렇지 않다는 말이다. 그러나 예수가 보여주고자 하는 것은 그것은 중요하지 않다. 유대교나 사마리아교나 서로 야곱라인의 정통 후계자이고 모세율법의 정통 계승자라고 주장을 하는데 둘 다 중요하지 않다. 이들의 라인은 어디에서 첨예하게 나타나느냐? 하면 예루살렘에서 예배해야 하느냐? 그리심산에서 예배해야 하느냐? 로 대표되는데 예수가 주장하는 것은 둘 다이다. 예루살렘에서의 예배도 그리심산에서의 예배도 이 세상에 속하는 물질의 세계에 속하는 것으로서 이제 예수에 의해서 완전히 능가하는 새로운 예배의 시대가 열림으로 말미암아 완전히 대치되는 것을 말하고 있다.

 


그래서 예수께서 23-24절에 때가온다. 지금이 바로 그때이다. 진리에 속한 자들은 진정한 아버지를 성령과 진리로 예배해야 한다. 왜? 아버지께서 이렇게 예배하는 자를 찾으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영이시다. 그러므로 영과 진리로 예배해야 한다고 말한다.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그리심산에서도 말고 영과 진리로 예배해야 한다. 이것은 요한복음 2장의 성전에서의 표적에 대한 주석이다. 예수께서 성전에서 제사하는 행위를 방해하는 표적을 했다. 이 표적의 의미를 해석하는 곳이 바로 여기이다. 혼합종교는 말할 것도 없이 예루살렘 성전도 이 세상의 물질의 세계에 속하는 것으로서 거기서 드려지는 짐승의 피로 드려지는 제사도 물질적인 것으로서 그런 시대는 이미 다 지났다. 예수가 새로운 성령의 영의 시대를 가져온다. 그때가 임할 것이다. “때가 임한다”는 말이 5장에서부터 자주 나온다. 그리고 곧장 지금이 벌써 그때이다.

예수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 재림을 통해서 이와 같이 완전한 하나님을 진리와 영으로 예배하는 시대가 도래 할 것인데 이것이 종말론적인 미래인데 벌써 예수가 그 시대를 지금 벌써 시작했다. 미래와 현재성이 아주 강도 높은 긴장을 이루고 있는 문장이다. 예수가 물질적인 성전의 의미를 대치해서 진리와 영으로 하는 예배의 시대를 연다. 그렇게 예수께서 주장하고 있다.

 


도대체 그런데 “진리와 영으로 하나님을 예배한다”는 말이 무슨 의미냐? 우선 왜 진리와 영으로 하나님을 예배해야 하느냐면 24절 처음에 하나님이 영이시다. 그렇기 때문이다. 예배하는 자들은 진리와 영으로 하나님을 예배해야 하는 것이다라고 되어 있다. 하나님은 영이시다는 말은 하나님에 대한 정의가 아니고 하나님의 거룩성 하나님의 초월성 하나님의 물질 시간의 세계를 초월한 이 세계와 다른 저 높은 영원의 세계의 존재임을 나타내고 있는 말이다. 하나님이 영원의 세계 영의 세계에 속하는 분이기 때문에 육신적으로 나서 물질의 세계에 속하는 자들은 변화와 죽음의 세계에 속하는 자들은 하늘의 영적인 세계에 속하는 하나님께 나아갈 수 없다. 그는 이 새로운 거듭남 위로부터 거듭남이 있어야 한다. 성령으로 거듭나서 영적 존재가 되어야 비로소 하나님을 예배할 수 있다. 영으로 예배한다는 말은 3장을 전제하고 있다.

 


진리로 라는 말은 무엇이냐? 이데아의 세계 실재의 세계를 지칭하는 말이다. 물질의 세계 육의 세계는 가짜의 세계인데 반해서. 그래서 여기서 영과 진리로 예배해야한다는 말은 예루살렘과 그리심산에서의 물질적인 세상에 속하는 예배로는 하나님과 교제할 수 없다. 사마리아는 말할 것도 없고 유대교도 가능치가 않다. 예수가 가능케 한다. 예수가 진리를 계시하고 성령을 주셔서 우리로 하여금 위로부터 새로 태어나게 하셔서 이 세상에 있으나 전혀 새로운 인간이 되게 하신다. 이런 거듭난 사람이 되었을 때 비로소 우리가 하나님과 교제하고 하나님께 예배할 수 있다. 다시 말하면 예수 그리스도가 주시는 계시와 예수 그리스도가 주시는 영에 의해서 새로 된 자로서 하나님을 예배할 수 있다.

영과 진리로 예배할 수 있다는 말은 예배의식의 드라마를 상당히 물질화 시키는데 반해서 개신교는 물질화시키는 것을 그치고 마음과 내면적인 예배로 이해를 했는데 그 말이 아니다. 지금 여기서 영과 진리의 예배와 반대되는 것은 외형적인 예배의식의 문제가 아니고 세상적인 예배이다. 하나님으로 부터 오는 진리와 성령에 의해서 새로 난 자에 의한 예배이다. 새로 난 자들에게 하나님은 아버지이다. 그러니까 아버지를 예배한다. 1:12절에 보면 누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가? 로고스에 의해서 새로 난 자가 자녀들인데 이를 연상케 하고 3장의 니고데모와의 대화 즉 성령에 의해서 새롭게 난자를 연상케 한다. 영과 진리로 예배한다는 말은 내면적인 갱신 예배의 의미가 아니고 예수의 자신의 계시와 성령에 의해 하나님의 자녀들이 된 자로서 하나님 아버지를 예배하는 것이다.

 


27-42절 까지는 아주 극적인 전개의 수단으로 앞에서는 예수의 제자들과의 대화이고 뒤에서는 여자와 여자의 동네 사람들과 대화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예수와 제자들과의 대화에서 주제는 예수께서 하나님의 뜻을 행하셔서 하나님을 계시하고 하나님의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서 하나님의 구원을 힘 있게 하는 것이 자기의 음식 자기의 삶을 지탱하는 것이라고 이렇게 말하고 있다. 반면에 여자와 동네 사람과의 대화의 주제는 예수의 메시야성 여자가 예수의 메세야 됨을 터득했는데 그것은 이 세상적인 기초적인 것에 불과하다. 유대교에서 메시야가 오면 모든 것을 밝히리라고 했는데 예수는 그런 의미에서만 메시야가 아니고 영생을 가져다주는 메시야임을 나타내고 있다.

 


2-42절의 큰 흐름을 보면 2장의 두 개의 표적은 3장 4장에서 이 표적들의 의미를 나타냈다. 물이라는 것으로 3장과 4장이 연결이 되어 있다. 또 예배를 예수가 가능케 한 분으로 성전청결의 표적을 주석한 것이다. 3장 4장에 동원된 인간은 대표적인 인간이다. 하나는 대표적인 고상한 이스라엘의 선생이다. 하나는 이방신들을 많이 섬기는 사마리아인 여자 이방인과 다름없는 자다. 예수는 유대교도 사마리아교도 능가하고 대치해서 새로운 시대 새생명의 시대 영생의 시대 새로운 예배의 시대를 여는 분이다. 이것은 유대인에게도 사마리아인으로 대표되는 이방인에게도 계시이고 즉 구약과 유대교의 구원사를 완성해서 하나님의 구원사에서 새로운 장을 여는 분이다. 영생 새로운 예배를 가능하게 하는 분이다.


 

 

 

 

 

 

 

 

 

 

 

 

 

 

 

 

 

출처 : 창골산 봉서방
글쓴이 : 봉서방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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