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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개혁파 종교개혁자 Martin Bucer(1491-1551)에게서 구약과 신약의 관계

하나님아들 2018. 9. 6. 23:11


개혁파 종교개혁자 Martin Bucer(1491-1551)에게서 구약과 신약의 관계

 

최윤배(서울장신대학교 신학과 교수, 조직신학)


I. 서론

 

    16세기의 많은 종교개혁자들 가운데 특히 마르틴 부처 (Martin Bucer = Butzer, 1491-1551)는 얼마 전 까지도 세계신학계에 거의 잊혀진 역사적 인물이었다. 그러나, 1970년대를 기점으로 그에 대한 많은 관심과 함께 많은 연구물이 나와서 그의 생애와 신학은 Luther와 Calvin에 버금갈 만큼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이 같은 세계신학계의 동향과는 다르게 국내 신학계에는 아직도 교회사에서 '종교개혁 운동'이 다루어질 때 그의 이름 정도만 잠시 언급되어, 그의 신학은 말할 것도 없고 그의 이름조차도 우리에게 생소하게 들리는 것 같다.
    Bucer는 'Calvin의 영적인 아버지'로 불릴 정도로 Calvin에게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특히 Bucer는 Strasbourg를 중심으로 인근 도시들(Basel, Bern, Gen ve 등)을 도와 종교개혁을 주도했을 뿐만 아니라, Philipp von Hessen의 지방과 로마 카톨릭 교회의 K ln 교구에도 종교개혁적 도움을 주었고, 말년에는 영국으로 피난가서 Cambridge 대학의 명예교수로 재직하면서 에드워드 6세의 종교개혁 윈리를 제공했다.
    우리는 이 논문에서 Bucer의 구약과 신약 사이의 관계를 중심으로, 계약에 대한 정의, 두 계약 사이의 통일성과 차이점을 역사적 상황의 고려 없이 교리적 관점에서 먼저 언급한 뒤, 특히 Bucer와 재세례파 사이의 역사적 관계를 중심으로 두 계약을 날카롭게 분리한 재세례파들에 반대해서 Bucer는 후대로 갈수록 두 계약 사이의 통일성을 강조했다는 사실에 초점을 맞추어 논한 후에, 마지막으로 우리의 결론에 도달하고자 한다.

 

II. 본론

 

    고대교회의 마르시온주의(Marcionisme)와 마니교(Manich sme)처럼 종교개혁 당시에 재세례파들은 구약과 신약 사이를 날카롭게 분리시켰다. 그들 모두는 구약과 신약을 상치시킴으로써, 구약을 완전히 무시했다. 하나님의 계시로서 신약과 구약으로 구성된 모든 성서가 교회와 사회의 구축을 위해서 규범적인 중요성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전적으로 부정하는 사상이 이 같은 이원론 속에 뿌리잡고 있다고 Bucer는 그들을 비판했다. 구약과 신약 사이 관계를 중심으로 Bucer는 구약과 신약을 상호 구별하면서도 상호 연관시키기를 원했다. 계(언)약의 본질과 내용에 관한 한, 구약과 신약 사이에 차이가 없고, 상호 일치만이 있을 뿐이다. 계약의 경륜의 방법과 형식에 관한 한, 구약과 신약 사이에 차이와 구별이 있지만, 이 두 계약 사이에 어떤 절대적인 상치와 분리는 존재하지 않는다. 두 계약 사이에 존재하는 차이점은 본질적인 측면에서가 아니라, 정도면에서 차이인데, Bucer가 이것을 묘사하는데 사용하는 표현들은 '비교급'으로 이루어졌다.
    시대마다 실제적으로 존재하던 교회의 일치성과 결속성의 본질은 무엇인가? Bucer는 옛 백성과 새 백성 사이에 존재하는 일치성의 의미에 대해 그의 《에베소서 주석》(1527)에서 언급한다. 여기서 Bucer는 'testamentum'의 의미에서가 아니라, 'foedus'의 의미에서 'diath k '(       )의 의미를 주장한다. 그의 《시편 주석》(1529)에서 Bucer는 구약과 신약의 연속성은 하나님의 선택하시는 은혜의 내용에 있다고 말한다. Bucer에 의하면, 신약성서 《히브리서》는 'berit'(    )와 'diath k '(       )를 'testamentum'으로 말하고 있을지라도, 'testamentum'이라는 용어보다는 'foedus'라는 용어를 더 선호하고 있다.
    Bucer는 그의 《로마서 주석》(1536)에서 '계약'이란 단어를 정의한다. Bucer에 의하면, 신약성서 "히브리서"에서 히브리어 'berit'(    )는 헬라어 'diath k '(       )로 번역될 수 있지만, 이렇게 할 경우, 원래의 뜻이 너무 축소될 수 있다. 그러므로, 가장 좋은 번역은 왕과 그의 백성 사이의 상호 동의를 표현할 수 있는 용어로서 'foedus' 또는 'pactum'이다. 하나님은 그의 백성을 자신의 것으로 삼으시고, 그의 백성은 그의 하나님을 주님으로 인정한다. 약속은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진다. 그러므로, 그의 'pollicitatio'와 'promissio'는 'foedus'와 'pactum'이다. 약속의 본질은 하나님께서 우리의 하나님이 되시고, 우리를 보호하시고, 우리에게 영생에 이르기까지 모든 구원을 주실 것이라는 내용이다. 이 같은 약속은 구약과 신약에서 정확하게 동일하다. 내용적으로 아무 것도 변화된 것이 없다. 계약의 일반적인 전제 조건인 죄의 용서가 이 약속 속에 포함되어 있다. 계약의 하나됨은 하나님의 하나되심 속에 있다.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한 분 하나님이 계시고, 한 분 중보자가 계신다. 이 중보자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신 분이시다. 이 한 분 중보자를 통해서 하나님은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들뿐만 아니라, 오늘날 우리들과 화해하시고, 계약을 맺으셨다. 그러므로, 계약의 일치성은 그 한 분 중보자와 그의 사역 속에 있다. 세상의 죄를 위한 오직 한 화목제물로서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이 있다. 구약의 아브라함은 그리스도의 보혈을 통한 속죄의 은혜에 참여하였고, 그 후에 많은 사람들은 칭의된 아브라함의 뒤를 좇아 믿음의 발자취를 따르게 된 것이다. 계약의 하나됨은 삼위일체 하나님의 사역의 연속성 속에, 하나님의 은혜의 효과적인 현존 속에, 하나님께서 영원토록 구원을 분배하시는 능력 속에 있다. 계약의 하나됨은 구원의 한 시혜 속에, 경건의 지식의 하나됨 속에 있다. 경건의 지식에서 중요한 것은 하나님과 이웃에 대한 사랑과 약속의 하나님에 대한 올바른 믿음과 신뢰이다. 계약의 본질과 관련해서 구약과 신약 사이에 상호 일치가 있고, 하나님의 경륜과 시혜의 방법과 관련해서 구약과 신약 사이에 차이가 존재한다.
    Bucer는 그의 《복음서 주석》(1536)에서 계약의 하나됨을 모든 선택된 자들을 감화시키시는 성령의 하나됨 속에서 찾았다. 요한복음 7장39절 "예수께서 아직 영광을 받지 못하신고로 성령이 아직 저희에게 계시지 아니하시더라"의 내용은 절대적인 의미에서 이해될 수 없다. 왜냐하면, 비록 성령이 충만하고, 풍성하고, 강력하지는 않았을 지라도, 세상의 시작부터 하나님을 믿었던 자들은 이미 성령을 가졌기 때문이다. Bucer는 그의 《에베소서 주석 서문》(1551)에서 'foedus'대신 'testamentum'을 사용하는 것은 경건한 오용이라고 말한다.
    원칙적으로 옛 경륜에서와 마찬가지로 새 경륜에서 하나님의 계약은 한 계약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하나의 동일한 내용으로서 살아 계시는 하나님과의 유대(연합)관계이다. 구약과 신약 사이에 존재하는 차이점에도 불구하고, 본질적인 내용은 항상 동일하게 남아 있다. Bucer는 구약과 신약 사이의 일치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사역의 연속성 속에, 하나님의 시혜 속에, 경건의 진리 속에 있음을 주장했다. 새 계약이 더욱 증가했다는 것은 계시가 더욱 명료해졌다는 뜻이며, 성령이 더욱 강력하게, 더욱 풍성하게 활동하신다는 뜻이다. 다시 말하면, 모든 것이 더욱 더 밝아졌고, 더욱 더 강력해졌다는 뜻이다. 여러 가지 방법과 장소에서 Bucer는 신약과 구약 사이의 근본적인 일치를 강조했다. 그리스도 이전과 이후에 성도들로 구성된 한 하나님의 백성이 존재한다. 성령을 통해서 그들은 모든 선한 일에 열매를 맺었다. 성령이 계시지 않을 경우 구약과 마찬가지로 신약도 문자에 불과하다. 성령이 계시는 경우 구약과 마찬가지로 신약도 영적이다. 두 계약 사이의 차이는 질적인 측면에서가 아니라, 다만 양적인 측면에서 나타난다. 성령은 지금 모든 백성들에게 더욱 더 풍성하게 되었고, 더욱 더 강력하게 활동하신다 옛 계약과 새 계약 속에서 본질적으로 동일한 내용이 성취될 것이다. 우리는 여기서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신뢰와 그리스도의 속죄의 능력과 성령의 인도하심과 참 경건과 하나님의 백성으로 특징지을 수 있는 모든 것을 생각하게 된다. 신약과 구약 속에는 다양한 방법으로 그리스도의 은혜가 선포되어지고, 다양한 방법으로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은혜에 참여하지만, Bucer는 신약과 구약 사이의 차이점을 형용사나 또는 부사의 비교급 용어들을 통해서 기술한다. 새 계약에서 보다 폭넓은 계시와 보다 강력하거나 풍성한 성령이 중요하다. 모든 것이 구약 보다 더욱 더 명료해졌고, 더욱 더 강력하게 작용하고, 더욱 더 폭넓게 확산된다. 계약의 약속은 복음 속에서 더욱 더 완전하게 약속되었고, 받아들여졌다. 경건의 교(진)리도 역시 더욱 더 엄격하게 주어졌고, 더욱 더 확실하게 이해되어졌다.
    Bucer는 신약과 구약 사이의 관계 문제를 중심으로 주로 두 종류의 논쟁자들, 즉 재세례파와 로마 카톨릭교회를 만났다. Bucer의 '세례' 개념은 세 시기를 거처서 발전했다. 첫 시기에 Bucer는 로마 카톨릭교회의 '자동주의적' (= 성례전주의적-의식주의적) 세례 개념에 반대해서 세례에서 성령의 자유를 강조했다. Bucer는 처음에는 당대의 사람들처럼 세례를 사랑과 모순되지 않으므로, 어린이들에게도 베풀어 줄 수 있는 외적 수단으로 간주했다. 이 같은 개념은 한편으로 재세례파와의 만남을 통해서, 다른 편으로 Luther의 긍정적인 영향을 통해서 발전했다. 이 같은 발전은 특별히 1530년대에 완성되었다. Bucer의 균형잡힌 신학사상이 《로마서 주석》(1536)과 《복음서 주석》(1536) 속에 잘 나타나고 있다.
    예배의식의 갱신을 위해서 Bucer는 로마 카톨릭교회에 반대하여, 육체적이며, 일시적인 구약과 영적이며, 영원한 신약 사이를 구별했다. 이 같은 Bucer의 입장은 특히 그의 초기 작품들 속에서 나타난다. 그의 《설교 요약》(1523)에서 우리는 Bucer에 대한 Luther의 영향을 발견할 수 있다. 그리스도께서 그의 몸을 주셨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약속은 '언약'으로 불릴 수 있다. 이를 통해서 새롭고 영원한 언약이 효력을 발휘하게 되었다. 이 언약은 아버지와 같이 부성적인 은혜와 죄의 용서를 포함하는 은사(선물)이다. 그러나, Bucer는 Luther에 머물지 않고 그를 훨씬 뛰어 넘어 발전했다. 성찬은 새 언약의 표적(징)이며, 영적인 양식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빵과 포도주에 대해서 문제삼아서는 안 된다. Bucer는 세례와 관련해서 "하나님의 은혜는 물에 종속되는 것은 아니다"라고 말했다. Bucer는 종교개혁에서 세례와 관련해서 무엇보다도 일차적으로 중요한 것은 외적 의식 자체보다 '내적 죄의 씻음'이라고 주장함으로써, 로마 카톨릭교회의 '자동주의적' 세례 개념을 비판하는 동시에, 세례식에서 모든 종류의 의식들을 무시하면서 '제3의 종교개혁'을 주장하는 재세례파들도 비판했다. 물세례는 외적인 문제로서 중요하므로, Bucer는 유아세례를 거부하는 재세례파들과 그들의 '제3의 종교개혁'에 반대했다. Bucer는 유아세례를 폐지해서는 안 된다고 강력하게 주장했다. "구약 시대 사람들의 경우 유아들이 할례를 받았듯이, 왜 우리는 유아들에게 세례를 베풀지 않는가? 우리들의 경우 세례는 유대인들의 경우 할례와 정확하게 동일하다."
    그러나, 1524년 경 Bucer가 유아세례를 주장할 수 있는 근거는 물세례는 외적인 일이라는 신학적 확신이다. 그 이후 1530년대에 발전한 그의 세례 개념처럼 여기서는 아직 세례의 근거로서 하나님의 은혜의 계약이라는 개념이 큰 강조점을 얻지 못하고 있다. 할례처럼 세례는 외적인 문제이다. 여기서 중요한 문제는 사랑과 교회의 일치성(통일성)이다. 재세례파 Treger와의 논쟁서, 《Handel mit Cunrat Treger》(1524)에서 Bucer는 구약에서 할례는 외적인 문제 뿐만 아니라, 참 신앙의 문제와도 연관되어져 있다. 바로 여기에 옛 계약과 새 계약 사이의 일치성과 통일성이 있다. 바로 이 점에서 신약과 구약 사이의 연속성이 존재한다. 이 두 계약에서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한 백성이다. 교회는 항상 있었는데, 이스라엘 중에서도 있었다. 이와 같이 신약과 구약을 상호 분리시킬 수 없는 연결성은 하나님의 말씀 속에 있다. 이미 1524년 여름에 C. Ziegler는 선택적 질문 형식을 통해서 유아세례를 설명했다: "우리는 유아세례를 베풀지 않아야만 하는가? 나는 예라고 말하지도 않고, 아니라고 말하지도 않는다. 그러나, 나는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신 '믿고 세례를 받는 사람은 구원을 얻을 것이요'(막16:16)라는 말씀을 말한다." 1524년 말경 Karlstadt는 Strasbourg에서 유아들에게 더 이상 세례를 베풀지 말도록 가르쳤다. 1524년 8월 31일에 Strasbourg 정부는 누구나 성례전, 특히 유아들에게 세례를 베풀도록 목회자들을 독려하는 공식적 결정을 내렸다. 1526년 2월 21일에 이 같은 결정이 다시 한 번 더 내려졌다. Strasbourg의 이 같은 상황은 Bucer로 하여금 유아세례의 철저한 시행을 위한 보다 더 강력한 신학적 근거와 기초를 필요로 하게 만들었다. 재세례파들은 더욱 더 강하게 일어났고, 타락의 표징들과 함께 재세례가 시행되었다. 우리는 《Apologia》(1526)와 《Praefatio》(1527) 속에서 Bucer가 그의 주석서들을 쓰기 이전 시대에 구약과 신약 사이의 관계를 어떻게 이해했는지 알 수가 있다. Bucer는 신약과 구약 속에 나타난 상징들을 상호 비교한 뒤에 양자 사이에 존재하는 상호 일치성을 발견했다. 다만 차이점이란 단순한 것이다. 다시 말하면, 구약과 비교해 볼 때, 신약 속에서 그리스도에 대한 지식이 더 많이 계시되었고, 더 분명하게 제공되었다. 구약 속에서 제공된 의식들(ceremonien)과 비교해 볼 때, 신약 속에서 성령이 더 풍성하게 제공되었다. Bucer는 《Praefatio》(1527) 속에서 하나님께서 구약의 사람들이 자기 자신을 하나님께 예배토록 하기 위해서 성령으로 그들에게 할례를 주셨다고 주장한다. 여기에 대한 근거와 기초는 외적인 의식 행위들 자체가 아니라, 구약의 할례와 희생제물들 속에서 그림자로 예표된 그리스도의 미래적 희생제물이다. 그러므로, 할례와 희생제물들은 그들이 지향하는 바가 있기 때문에, 할례는 하나님과 그의 백성 사이에서 맺어진 계약으로 불리고, 희생제물들은 하나님의 화목(속죄)으로 불린다.
    신약과 구약 사이에 존재하는 일치점과 차이점이 Bucer의 《복음서 주석》(1527)과 《요한 복음 주석》(1528) 속에서 발전적으로 나타나고 있다. 두 주석서들은 두 계약 사이에 존재하는 본질적인 일치성을 확증한다. 구약 시대에 살던 사람들도 동일한 아버지, 동일한 아들, 동일한 성령을 가졌다. 《복음서 주석》(1527)에서 Bucer는 이와 같은 관점에서 신약과 구약 사이에 존재하는 일치성과 차이점을 말한다. Strasbourg에서 종교개혁의 충실한 동료들 중에 한 사람이었던 W. Capito가 재세례파에 빠졌을 때, Bucer는 그를 설득하여 다시 종교개혁 진영으로 돌아오도록 변증하는 내용이 그의 《요한 복음 주석》(1528)에 나타나고 있다. 이 주석서에서 Bucer는 구속사를 세 가지 시대(aetas)로 나누면서, 이 세 가지 다른 시대 속에 있는 모든 성도들은 하나님의 한 백성을 형성한다고 말한다. 하나님의 백성의 하나됨을 Bucer는 계속적으로 계약의 하나됨 속에 있다고 주장한다. Bucer의 《에베소서 주석》(1527) 속에 재세례파들에 대한 비판이 나타나고 있다. 하나님은 영원한 현재를 아신다. 왜냐하면, 모든 것이 하나님에게는 현재와 연루되어 있기 때문이다. 세계 시작부터 하나님을 알았거나, 앞으로 알 자들은 모두 영원한 말씀으로서 그리스도에 의해서 성령으로 감동되었다. Bucer는 옛 백성과 새 백성 사이에 존재하는 일치성의 의미를 광범위하게 기술한다.
    1520년대와 1530년대 초에 Bucer가 유아세례 문제로 논쟁한 재세례파들 중에 전형적인 사람이 P. Marbeck이다. Marbeck의 요구에 응하여 Bucer는 유아세례에 대한 간단한 변증서를 썼다. Bucer는 그를 아주 '완고한 이단자'(gantz hartnickiger hereticus)로 불렀다. 드디어 1532년 1월에 그가 Strasbourg로부터 추방당하자, Bucer는 이 소식을 환영했다. Marbeck는 구약과 신약을 상호 철저하게 대립시켰다. Bucer는 Marbeck의 이 같은 주장을 반박하기 위해서 구약과 신약 사이의 밀접한 관계를 강조하여, 두 계약 사이의 일치성에서부터 출발했다. 따라서, 모든 신자들은 아브라함에게 약속된 동일한 축복에 참여한다. 이 계약은 하나님께서 자신이 우리의 하나님이 되어주시며, 그의 자녀들의 하나님이 되어 주실 것이라는 약속 안에 존재한다. 지금 우리는 구약 시대 사람들 보다 이 같은 사실을 더 적게가 아니라, 더 많이 고백하고, 증언하고, 자랑해야한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계약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더 분명하게 계시되었고, 거룩한 사도 바울은 세례와 할례를 동일한 것으로 간주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같은 입장에 반대해서 Marbeck는 유아들에게 아브라함의 약속과 다른 그리스도의 약속을 가지고 있다고 주장했다. Marbeck에 의하면, 믿는 모든 사람들에게 영생을 가질 수 있기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 속에서 비로소 자신을 계시하셨다. Strasbourg에서 종교개혁의 철저한 수행을 위한 가장 중요한 조건들 중에 하나가 구약과 신약 사이의 철저한 분리라는 Marbeck의 주장은 Bucer에 의해서 결정적으로 거부되었다. Bucer에 의하면, 영생은 아버지와 아들을 아는데 있다. 구약의 사람들 역시 이 지식을 어느 정도 가졌다. 하나님께서 그의 자녀들에게 주신 가장 풍성한 약속은 하나님께서 그들의 하나님이 되어주실 것이라는 사실이다. 주님께서 자신이 인정하신 그들의 하나님이시며, 그들은 그의 백성이라는 사실이 성서가 언급하고 있는 모든 계약들 중에서 가장 중요하다. 이 같은 내용은 또한 예레미야가 말한 계약 속에서도 발견된다. 그러나, 광야에서 이스라엘과 채결한 계약의 방법과 범위와 지금 예레미야가 말하는 새 계약 사이의 구별은 다음의 사실에 있다. 그리스도 계시 이후 이 새 계약은 구약에서 유대인과 채결한 계약처럼 더 이상 깨어지지 아니하고, 영원히 존재한다. 이 새 계약에서 중요한 것은 하나님에 대한 보다 더 높은 지식이며, 보다 더 적은 의식들(ceremonien)의 짐이 부과되는 보다 더 자유로운 신앙이다. 비록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은 구약의 백성들에게는 미래에 일어날 사건이었지만, 그들 역시 그리스도의 죽음의 능력으로부터 살았다. 왜냐하면, 하나님께는 미래와 과거가 현재이기 때문이다. "신앙과 사랑은 구약의 율법과 동시에 신약의 율법에도 존재하듯이, 구약의 경건인 동시에 신약의 경건이다. 다만, 신약 속에서 경건은 구약 속에서 보다 더 능력이 많아졌고, 더 자유롭고, 더 자발적이 되었다. 그러나, 신약의 경건은 구약과 다른 경건이 아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동일한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다."
    구약과 신약 사이에 존재하는 차이점과 관련해서 《4대 도시 신앙고백서》(Confessio Tetrapolitana, 1530)에는 성령이 구약에서 보다 오늘날 우리에서 더 풍성히 넘치게 부어졌다고 기록하고 있다. 구약과 신약은 본질적으로 동일하다는 사실은 《Schweinfurt Confession》(1532)에서 더욱 확고해진다. Bucer는 《Quid de baptismate》(1533)에서 하나님의 약속으로서 계약 개념으로부터 출발한다. 이 약속 속에서 하나님은 자기 자신을 아브라함과 그의 자손의 하나님으로 나타나신다. 이 같은 하나님의 약속의 근거와 원천은 그리스도의 공로 속에 있다. 이 구속의 은혜는 구약의 성례들 속에서 그림자로 예표되었고, 신약의 성례들 속에서는 분명하게 드러났다. 따라서, 세례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께 접붙혀지는 표적으로서 우리에게 약속으로 주어졌다. 우리의 약속을 통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을 통해서 이 같은 상징들과 표징들이 성취되어진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구원의 계시를 통해서 보다 더 자유로운 정신을 갖게 되고, 우리는 성령을 통해서 더욱 더 성숙해진다. 그러므로, 비록 구약의 사람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의 백성이었을지라도, 우리는 구약의 사람들의 발자취를 따라갈 뿐만 아니라, 오히려 우리는 그들을 훨씬 더 능가한다.
    B. Rothmann과 그의 추종자들은 재세례파들에 의해서 일어났던 M nster의 비극적 사건을 옹호하기 위해서 Marburg의 신학자들을 비판한 논쟁들에 대한 언급으로부터 그의 작품, 《Bericht》(1534)를 Bucer는 시작한다. Rothmann은 새 계약은 영적인 일과 관계되지만, 옛 계약과 할례는 육적인 일과 관계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Bucer는 신약과 구약을 영적인 것과 육적인 것으로 이분법적으로 상호 대치시켰던 Rothmann을 비판했다. Rothmann에게는 어떤 계약이냐가 관건이다. 그러나, Bucer에 의하면, 하나님께서 자기 자신을 주시는 계약은 영원한 계약이다. 우리가 이것을 어떻게 감히 일시적이고, 시대적인 것이라고 부를 수 있는가? '나는 너희에게 하나님이 되실 것이다'라는 사실은 영원한 구원의 약속이고, 신적인 도움의 약속이고, 경건과 복의 약속이다. 가나안 땅에 대한 선물은 이 같은 계약에 대한 하나님의 인정하심의 표적인 동시에 성취였다. Bucer에 의하면, 세례와 관련해서 재세례파들의 실수의 가장 큰 원인은 옛 백성과 새 백성 사이의 구분에 대한 잘못된 개념과 하나님의 언약에 대한 잘못된 개념에 기인한다. Bucer에 의하면, 우리는 더 이상 몽학 선생 밑에 있지 않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더 자유로운 성령을 약속하셨다. 그러나, 우리는 옛 백성이 새 백성 속에 가입된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반대로 우리가 옛 백성 속에 가입되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에 대해서 말할 때, 세상의 시초부터 세상 끝날 까지 하나님의 모든 선택된 자들로 구성된 한 백성, 한 몸이라는 사실이 중요하다. 비록 구약의 사람들에게는 신약의 사람들에게서 보다 더 어두웠고, 덜 자유스러웠고, 외적인 의식들에 의해서 더 강하게 얽매었을지라도, 그들 모두 역시 한 성령에 의해서, 한 신앙에 의해서 인도되었다. 비록 새 계약의 백성에게 성령이 더 풍성할지라도, 새 백성에게도 중요한 것은 동일한 복이다. 비록 새 계약은 더 멀리까지 확장되고 더 많이 계시되었을지라도, 새 계약 역시 하나의 은혜 계약이다.
    Philipp von Hessen은 Bucer가 재세례파 지도자들과 논쟁하도록 하기 위해서 Bucer를 1538년에 Marburg로 초청했다. 10월 30일부터 11월 3일까지 Bucer와 재세례파 사이의 대화가 계속되었다. Bucer의 재세례파들과의 대화는 성공을 거두어 많은 재세례파들이 그의 설득으로 인해서 종교개혁 진영으로 돌아왔다. Bucer는 교회 치리에 대한 열망을 복음과 일치되는 합법적인 요구로 파악했다. 이를 통해서 Bucer는 옛 계약에 더 많은 관심을 기울이게 되었다. 그리스도께서는 그의 은혜 계약을 이방인들에게까지 확장시키셨다. 여기에 근거하여 우리는 아이들도 하나님의 은혜 계약에 속할 수 있다고 말해도 좋다. 그러므로, 할례와 세례는 같은 선상에 서 있다. 자기의 백성들로 하여금 행동하게 하시는 분이 바로 하나님이시다. 이스라엘에서처럼 아이들도 하나님의 백성에 속한다. 우리는 아이들에게 신실하게 요리문답을 가르치고, 주님께서 약속하신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해야한다.
    우리는 Bucer의 후대 작품들 속에서도 구약과 신약 사이의 관계에 대한 이 같은 이해가 본질적으로 동일하게 지속됨을 알 수 있다. Interim의 결과로 Bucer는 더 이상 Strasbourg에 머물지 못하고, 1549년 망명자로 영국을 향하여 Strasbourg를 떠나기 4 주전에도 옛 계약과 새 계약 사이의 일치성(통일성)을 논증했다. 신약과 구약 사이의 일치성의 근거는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라는 약속 속에 있다. 이 일치성의 근거는 사랑 속에서 나타나는 이 약속에 대한 믿음 속에 있다.
    계약에 대한 Bucer의 개념은 그의 성례론 뿐만 아니라, 그의 해석학을 위해서도 중요하다. 그의 계약 개념은 그의 신학 전체의 원천 및 형태와 본질적으로 연관되어져 있다. 구약적 경륜은 그리스도가 없는 경륜이거나 성령이 없는 경륜이 아니다. 하나의 은혜 계약만이 있을 뿐이다. 그리스도는 계약의 머리가 아니라, 중보자이시다. Calvin은 Bucer의 계약 개념을 이어받아 나름대로 발전시켰지만, 여기에 본질적으로 더 새로운 것을 첨가하지는 않았다. Calvin에 의하면, 구약에서도 역시 그리스도는 하나님께서 자신의 백성과 맺으신 계약의 기초('fundamentum')이실 뿐만 아니라, 완성('complementum')이시다. Bucer가 구약에 부여하고 있는 적극적이고 긍정적인 가치는 현대성서 비평학을 통해서 구약 성서와 신약 성서를 과도하게 분리하여 구약성서의 가치를 부정하거나 약화시키는 일부 신학자들에게는 생소하게 들릴 것이다. Bucer의 계약 개념은 단순히 구약성서와 신약성서라는 두 권의 책을 상호 꿰매려는 단순한 시도로 파악하거나 사실적인 역사에서 찾아 볼 수 없는 시도로 파악해서는 안 된다. 비록 성육신 이전의 영원한 말씀으로서의 그리스도와 성육신하신 그리스도가 상호 분리될 수 없지만, Bucer의 입장은 처음부터, 일차적으로 영원한 말씀으로서 그리스도가 아니라, 성육신하신 그리스도와 그의 죽음과 밀접하게 연관되어져 있다. 구약의 성도들은 신약의 성도들 보다 하나님의 은혜로 덜 충만했을지라도, 구약의 성도들도 그리스도께도 참여했고, 성령께도 참여했다. 구약의 성도들이 성령을 가졌다는 뜻은 말 그대로 그들도 성령을 가졌고, 생명으로 인도함을 받았다는 사실에 대한 단순한 증거이며, 성서에 의하면, 생명은 성령의 임재성을 가리킨다고 말한다. Bucer는 "구원 자체가 역사의 과정에 따라서 발전하는 것으로 이해하는 다양한 형태의 계약신학(verbondstheologie: = the Federal Theology)을 알지 못할 뿐만 아니라, 구원이 기독교 교회 내에서 자명한 현실성으로 파악되는 화석과 같이 굳고, 교리주의적인 계약 개념을 전혀 알지 못한다."

 

III. 결론

 

    구약과 신약 사이 관계를 중심으로 Bucer는 이 양자를 상호 구별하면서도, 상호 분리시키지 않고, 상호의 통일성을 통해서 밀접하게 연관시켰다. 계약의 본질과 내용에 관한 한, 구약과 신약 사이에 차이가 없다. 왜냐하면, 구약과 신약 속에 동일한 삼위일체 한 하나님, 동일한 그리스도, 동일한 성령, 동일한 믿음, 동일한 경건, 동일한 은혜, 동일한 백성 등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계약의 방법과 경륜에 관한 한, 구약과 신약 사이의 구별과 차이가 있지만, 이 차이는 양적인 차이로서 Bucer는 비교급을 사용한다. 따라서, 고대 교회의 마르시온주의자나 마니교도들이 주장한 것처럼 구약과 신약 사이에 상호 대치나 상치가 Bucer에게는 허락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이 같은 주장을 한 그의 당시의 재세례파들에 대한 Bucer의 비판은 점점 더 증가했다.
    Bucer는 초기에 로마 카톨릭 교회의 유대주의적, 율법주의 경향과 자동주의적, 성례주의적 경향에 반대하여, 새 계약의 영적 특성을 강조했다. Bucer의 신학은 Luther 등의 영향으로 1536년경에 균형을 이룬 신학에 도달한다. 그는 후대로 갈수록 재세례파들과의 논쟁을 통해서 구약과 신약 사이의 통일성과 일치성을 강조했다. 현대 일부 성서 신학자들이 주장한 구약과 신약의 분리를 Bucer는 도무지 알지 못했다. 그러나, 오늘날 교회에서 구약과 신약 사이의 관계를 중심으로 바람직하지 못한 두 가지 극단적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하나는 구약의 영적이고, 기독교적인 성격을 무시하고, 구약을 유대주의적으로, 율법주의적으로 이해하여, 교회에서 다시 구약의 성막 제사를 원형 그대로 회복하려는 운동이 있는가 하면, 신약보다도 구약의 분량이 훨씬 많음에도 불구하고, 교회의 설교에서 구약에 대한 설교가 절대적으로 적다는 사실이다. 전자의 경향은 자주 교회와 신학에서 율법주의 형태로 나타났고, 후자의 경향은 자주 교회와 신학에서 마르시온주의 형태로 나타났다. 여기에 반대해서 오늘날의 교회와 신학은 구약과 신약 사이의 본질상 일치와 경륜상 차이점을 균형 있게 강조한 Bucer로부터 배워야할 것이다.


 The relationship between the old covenant and the new covenant as seen by the reformed reformer Martin Bucer(1491-1551).

 

    Choi, Yoon-Bae
    Full-Time Lecturer
    Seoul Jangsin University and Theological Seminary
    Gwangju-gun, Korea

 

This thesis treats of the relationship between the old covenant and the new covenant as seen by the reformed reformer Martin Bucer(1491-1551). Bucer is of the opinion that there is an essential unity between the old and new covenants. It is a Trinitarian unity between the old and new covenants or a Christological-Pneumatological unity between the two covenants, which is related to the same God, the same Christ, the same Mediator, the same Spirit, the same covenant of grace, the same faith, the same hope, the same teachings, the same church, the same piety, the same salvation, etc. When, describing the differences this reformer does so in terms of the comparative.
    The relationship between the old and new covenants lies, with Bucer, under pressure from two sides. The conflict with Roman Catholic Church forced him to put all the emphasis on the spiritual character of the new covenant in comparison to the old covenant. In 1524 Bucer can still maintain the baptism of children because it is only something external. Here the covenant of God is not yet functioning as the ground for baptism as it will do later years. The conflict with the Anabaptists forced Bucer to put the emphasis on the unity of two covenants. Bucer roundly rejected the Marcionism and Manicheism of the Old Church, which made a sharp distinction between the old covenant and the new covena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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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대한 에스라 성서 연구원
글쓴이 : 장기용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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