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선지서 소선지서 사사

[스크랩] ▣ 소선지서(김희보교수)

하나님아들 2018. 8. 21. 22:25

[[ 소선지서 서론  ]]

 

 

소선지서 서론

 

● 명칭: "소선지서"는 그 멧세지가 하나님의 예언 계획에 있어 대단히 중요하므로, 이사야나 예레미야, 에스겔, 다니엘보다 그 중요성에 있어서 결코 못한 것이 아니다. 히브리 성경은 이 책들을 모두 묶어서 "열둘"(The Twelve)이라고 불렀다. 이들 중 스가랴서는 짧거나 간략한 책은 아니지만, 성경학자들은 그 책들이 주로 간략하기 때문에 "소선지서"라고 명명하였다.

 

● 교훈: 각 선지서에서 우리는 세 가지 교훈을 발견할 것이다.

 

역사적인 교훈-각 선지자들은 백성들의 생활에 있어서의 직접적인 필요에 대처하기 위하여 썼다.

 

예언적인 교훈-각 선지자들은 이스라엘의 장래에 있을 심판과 회복에 대하여 무엇인가를 예증하거나 알렸다.

 

실천적인 교훈-그 당시 그 민족의 죄들은 오늘날 우리에게도 있으며 이 책들로부터 우리가 배워야 할 실천적인 교훈들이 많이 있다. 한 가지 예를 들자면, 호세아서에서 우리는 이스라엘의 타락과 앗수르에게 시달리며 징계를 받는 것과, 장차 정결함을 받고 회복되는 것을 본다. 우리는 또한 오늘날 주님께 불순종하여 세상을 따름으로써 "영적인 음행"을 범하는 신자들을 위한 교훈도 이 책에서 보게 된다.● 선지자 연표: 소선지자들(그리고 대선지자들)을 역사적으로 적절한 시기를 아는 데에 도움이 되도록 그들의 간단한 역대기를 여기 싣는다(모든 연대는 주전임).

 

북왕국                                 남왕국

요나:780-750                           요엘:835-795년

아모스:765-750                         이사야:750-680년

호세아:755-715                         미가:740-690년

 

-앗수르에게 멸망됨: 721년

나훔:630-610

예레미야:626-586

하박국:625-586

스바냐:625-610

오바댜:586년

 

-바벨론에게 멸망됨:606-586년

 

다니엘:606-534

에스겔:593-571

 

-유형에서 돌아옴:536년

 

스가랴:520-500

학개:520-516

말라기:450-400

 

-주(註):정확한 연대에 대해서는

학자들 간에 일치하지만은 않는다.  -선지자 시대의 종료:이 도표는 각 선지서들의 대략적    세례(침례) 요한이 오기까지

인 관계를 보이기 위한 것이다.      -마태복음 3장"

 

[[12 소선지서 연구]]


『12 소선지서』를 읽고

  하나님의 편에서 인간의 역사를 본다면 그 수준은 사사기의 테두리에서 벗어날 수 없는 수준일 것이다. 범죄한 인간들에 대한 하나님의 구속 경륜은 우리들을 감격하게 하고도 남음이 있다. 다른 선지서에서도 발견할 수 있지만 12소선지서에서 느낄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 그 자체일 것이다. 하나님의 심판과 은혜는 동시에 주어지지만 언제나 그의 택한 백성에게 신실한 은혜의 하나님을 선지서 전편을 통해서 발견하게 된다. 이 책을 읽는 동안 오늘날 우리 자신에게도 그 세세한 하나님의 헤세드(은혜)의 손길은 변함이 없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제 1 장  사랑의 선지자 호세아

1. 이름과 인격
  여호수아와 예수의 이름처럼 호세아란 이름도 같은 어근에서 파생한 것으로서 “구원”, “도움”, “구출”을 의미한다. 농부의 아들로서 그는 가정에서, 정원에서, 농장에서 그의 단순하면서도 매력적인 표상들을 이끌어 내고 있다. 요나가 외국에서 사역하였던 반면 호세아는 북이스라엘 본국에서 사역하였다. 그는 온화하고 우수에 찬 그리고 침울한 경향이 있는 사람이었으나 솔직하고 애정 깊고 가정적인 사람이었다. 예레미야가 보다 연구를 많이 한 사람이요 슬픔을 자각하며 산 사람인 반면 호세아는 보다 소박하고 열정적인 사람이었다. 예레미야는 보다 신학적이었고 호세아는 보다 시적인 인물이었다.

2. 그의 시대
  그의 사역 초창기 동안 사마리아의 통치자는 루이 14세 같은 여로보암 2세였다. 그는 거만한 군사 독재주의의 두목으로서 실질적인 예후의 후계자였다. 그 당시 국가는 군사적 번영의 최절정기에 있었으나 도덕적으로는 결정적인 몰락 상태에 있었다. 여호보암은 이스라엘의 최후의 강력한 왕이었고, 그의 후계자 여섯 왕들 가운데 오직 므나헴만이 자연사하였다.
  따라서 이러한 절망적 상황 가운데서 그들은 우선 한 가지 방법을 배웠는데, 결국 자기들의 독립성과 자치권을 잃어버리고 그 다음에는 자원과 에너지를 모두 탕진해 버릴 때까지 앗수르와 애굽을 옮겨 다니면서 조공을 드림으로써 외국의 힘을 의지하였으며, 결국에는 앗수르에서 비참한 봉신국가가 되도록 강요를 받았다.
  에브라임은 알지도 못하는 사이에 어려서 백발이 성성한 신세가 되었다. “백발”현상은 그 나라 곳곳 여기저기에 산재해 있었으나 그들은 그것을 깨닫지 못했다(7:9). 사회 각계각층이 타락되었다. 종교는 가장 육욕적인 우상숭배로 몰락해 갔다. 특히, 가정생활은 방탕한 상태가 되었다. 따라서 선지자는 그러한 죄에 대해 가장 무거운 기소를 하였다. 저들의 소망 없는 상태를 표현하기 위하여 그는 혐오스러운 단어 “음란”이란 말을 약 16번이나 사용하고 있다. 어디에서나 사람들은 서로 싸웠다. 장래의 가망은 없었다. 호세아가 예언을 마친 후 얼마 가지 않아서 B.C. 722년에 그들은 사르곤(Sargon)에 의하여 앗수르에 포로로 붙잡혀 가 버렸다(왕하 17장).

3. 호세아의 사역 기간
  호세아의 사역 기간을 북왕국의 마지막 왕인 호세아의 시대까지 내려 잡게 한다. 여기에 덧붙여 10:14에 있는 벧아벨이 살만에게 함락되었다는 암시는 그의 사역을 B.C. 725년에까지 이르게 만들어 주는데 그 이유는 아마도 살만에셀 4세가 벧아벨을 함락시킨 해일 수 있기 때문이다. 필자는 그의 사역 기간을 B. C. 750년과 725년 사이 기간으로 본다. 이 점에서 젤린도 동의한다.

4. 호세아의 소명(13장)
  호세아 자신이 여호와와 이스라엘과의 관계의 상징으로 해석하였던 호세아의 사생활 자체를 그의 가르침에 대한 만능 열쇠로 볼 수도 있을 것이다. 두 개의 생각들이 그의 영혼 속으로 파고들고 있는데 그것은 이스라엘을 향한 여호와의 사랑의 신실성과 여호와에 대한 이스라엘의 배은망덕한 불신실성이다. 그가 선택한 여인은 고멜이었는데 그는 두 아들과 딸 하나를 낳았다; 한 아들은 “이스르엘”로서 “보복”이란 뜻이며 딸 하나는 “로-루하마”로서 “긍휼을 받지 못한 자”란 뜻이며, 그리고 또 한 아들은 “로암미”로서 “내 백성이 아니다”는 뜻이다. 그들의 이름들은 예후 왕가 위에 필연적으로 임할 심판을 의미심장하게 지적해 주는 뜻을 가진 이름이다.
  고멜은 그녀의 결혼 서약에 대한 불신실성을 증명하였는데 바알과 아스다롯의 난잡한 주신제에 사로잡혀서 그녀의 남편을 떠나 간부를 따라갔고 육욕의 노예로 전락하고 말았다. 그러나 호세아는 은 열 다섯 개와 보리 한 호멜반으로 그녀를 속량하였다(3:2). 그러므로 자신의 가정 비극의 쓰라림으로부터 선지자는 여호와의 끊을 수 없는 사랑을 배우게 되었다.
  고멜을 향한 호세아의 열정은 강한 감정으로부터 나온 단순한 폭발적인 번쩍임 정도가 아니었다. 오히려 그것은 그의 뼈마디들 속에 자리잡고서 타오르는 하나의 불꽃이었으며 고멜의 불성실성이 약화시킬 수 없었고 선지자의 개인적 고이 끌 수 없는 것이었다. 호세아의 애정과 충성에 대한 그녀의 반역적인 거절을 통하여 그는 고통이 없는 진정한 사랑은 없다는 것과, 또한 그 반대로 사랑이 없는 진정한 고통은 있을 수 없다는 사실을 발견하였다. 그러므로 그는 “선지자들 중 음유시인”이라고 불리울 만하다.

5. 호세아의 메시지(4-14장)
  매우 적절하게 본서는 꺡毬だ?긴 열렬한 독백이면서도, 오열로 끊기어진“ 것으로 묘사되었으며 혹은 카우취가 표현한 대로 ”웅변보다 더 강한 흐느낌“으로 묘사되었다.
  다음과 같은 사항은 아주 분명하다: 즉 1-3장은 메신저 자신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 반면, 4-14장은 그의 메시지에 대해 말하고 있다. 첫 번째 부분은 일종의 영적 자서전이며, 반은 설화체로 반은 예언으로, confessio amantis(애인의 고백)로서, 모욕당한 인간의 사랑의 고뇌를 통하여 하나님의 사랑의 신비에로까지 도달하는 것으로서 하나의 인간으로부터 자아내진 것이다. 둘째 부분은 일련의 설교들과 단순한 경고와 약속들의 단편들로 구성되어 있는데 인위적인 명쾌한 구분이 없다. 하여간 우리가 호세아의 신학은 머리의 신학이라기보다는 가슴의 신학이라고 생각할 때, 예언적 진술들이 얼키설키 섞여 있고 산만한 것은 너무도 당연하다고 생각된다.
  사실상 그의 책 전체 가운데서 가장 두드러진 가르침은 불평, 정죄, 위로라는 세 단어로 요약될 수 있을 것이다. 오직 사상적 발전만이 (1)이스라엘의 죄로부터 시작하여 (2) 징벌에로 그리고 (3)마지막 회복에로 나아가고 있는 것으로 판별할 수 있는 것이다.
  (1) 지식의 결핍 - “내 백성이 지식이 없으므로 망하는도다”(4:6). 다시 말하면 머리가 모자란다는 것이다! 이것은 호세아의 근본적인 책망이다. 국가 전체가 하나님의 법에 대해 무지했다. 그러므로 선지자의 근본적인 책망은 지식적인 것이었다.
  (2) 교만 - “이스라엘의 교만이 그 얼굴에 증거가 되나니”(5:5); 다시 말하면 이스라엘은 마음에 질병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그들은 애국심의 강할 뿐 아니라 거만하였다. 국가적 명예는 국내의 음란과 동의어가 되고 있었다.
  이와 관련하여 하버드 대학교의 250주년 기념식에서 제임스 러셀로웰(James Russell Lowell)의 위협적인 말들이 생각나는데 그는 말하기를 “물질적인 성공은 좋은 것입니다만 그러나 보다 좋은 것들에 대한 예비적인 필요로서만 좋은 것입니다. 국가의 참된 성공의 양은 그것이 사상과 도덕적 에너지와 이지적인 행복, 영적인 소망 그리고 인류에 대한 위로에 기여하는 만큼의 양인 것입니다.“
  (3) 불안정 - “너희의 인애가 아침 구름이나 쉬 없어지는 이슬 같도다”(6:4). 다시 말하면 삶은 위선에 의해 질식되었고 제의적 인애는 그 가치를 잃어버렸다.
  (4) 세속성 - “에브라임이 열방에 혼잡 되니 저는 곧 뒤집지 않은 전병이로다”(7:8); 다시 말해서 국가의 정책이 나빴다는 것이다! 어리석은 비둘기처럼 에브라임은 지각없이 애굽과 앗수르와의 동맹을 추구하였고 그리하여 여호와는 잠깐 거들떠보는 식이 되었다. 어떤 사람은 지나치게 부유했고 다른 사람들은 지나치게 가난했다. 정책은 뜨거웠지만 종교적인 면은 냉담했다. 사회의 양극은 너무나 차이가 컸다!
  (5) 부패 - “저희는 기브아의 시대와 같이 심히 패쾨한지라”(9:9); 다시 말해서 그들의 종교가 썩었다는 것이다! 정치적 부패는 그래도 가망이 있었다. 그러나 종교적인 부패는 용서받을 수가 없다. 이스라엘은 종교라는 미명 아래서 창기 노릇을 하고 있었다: 즉 그들은 바알브올에게 갔던 것이다(9:10).
  (6) 타락 - “내 백성이 결심하고 내게 서 물러가니”(11:7); 다시 말해서 타락이 체질화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여호와께서는 여전히 이스라엘을 사랑하시고 그들을 구원하기를 원하신다.
  (7) 우상숭배 - “이제도 저희가 더욱 범죄하여 그 은으로 자기를 위하여 우상을 부어만들되 자기의 공교함을 따라 우상을 만들었으며”(13:2); 다시 말하면 그들은 완전한 방종의 죄를 지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본 호세아서는 사죄의 은총을 제시하지 않은 채 책을 마감하고 있지는 않다(14장). 이스라엘이 비록 여호와 앞에서 죄인들로서 있었을지라도 회개를 통하여 회복은 불가능한 것도 아니었다.
  호세아는 특히 은혜의 선지자이다. 그는 매우 실제적인 감각으로 갈보리를 예상하였고 그것을 준비하였다. 그는 호소한다. “돌아오라, 돌아오라, 만일 너희가 하나님께서 너희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알기만 했다면 너희는 돌아왔을 것이다. 너희는 말씀과 기도를 가지고 오라. 그리하면 하나님께서 은혜롭게 너희를 받으실 것이다.”

6. 우리에게 향한 호세아의 메시지
  국가 내에 있는 내적 부패가 그들의 외적인 적들보다 더 위험하다는 사실이다. 또 이것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는 같은 종류의 교훈은 곧 모든 애국자들 중 가장 진정한 애국자는 호세아와 같이 자신을 자기 백성과 동일시하고, 그들의 재난을 마치 자기 것처럼 비통해 하는 사람이며, 그 자신이 그 죄들을 스스로 떠맡은 사람처럼 그들의 죄를 회개하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고대 역사상에서 역사 하셨던 하나님은 현대사 가운데서 역사 하시는 하나님이시다. 모든 국가적인 사건들은 여전히 하나님의 장중에 있다. 이것이 바로 호세아에 의해서 가르쳐진 하나의 영구적인 가르침이다.  따라서 호세아는 정확하게 “사랑의 선지자”라고 불리울 만하다.

7. 호세아서에 있는 중요 구절들; 즉 위대한 본문, 되새김질 할 만한 구절, 농축된 구절, 기억되어야 할 구절들:
  (1) “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며”(6:6)
  (2) “에브라임이여 내가 어찌 너를 놓겠느냐? 이스라엘이여 내가 어찌 너를 버리겠느냐?”(11:8)
  (3) “그러므로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6:3)
  (4) “에브라임이 우상과 연합하였으니 버려 두라”(4:17)
  (5) “백발이 얼룩얼룩할지라도 깨닫지 못하는 도다”(7:9)
  (6) “저희가 바람을 심고 광풍을 거둘 것이라”(8:7)
  (7) “내가 저를 위하여 내 율법을 만 가지로 기록하였으나 저희가 관계없는 것으로 여기 도다”(8:12)
  (8) “여호와여 저희에게 주소서 무엇을 주시려나이까? 청컨대 배지 못하는 태와 젖 없는 유방을 주시옵소서”(9:14)
  (9) “그때에 저희가 작은 산더러 우리를 가리우라 할 것이요 작은 산더러 우리 위에 무너지라 하리라”(10:8)
  (10) “지금이 곧 여호와를 찾을 때니”(10:12)
  (11) “이는 내가 사람이 아니요 하나님이라 나는 네 가운데 거하는 거룩한 자니”(11:9)
  (12) “나 외에는 구원자가 없느니라”(13:4)
  (13) “누가 지혜가 있어 이런 일을 깨달으며 누가 총명이 있어 이런 일을 알겠느냐?”(14:9)
  (14) 또한 주목할 만한 경구: 백성이나 제사장이나 일반이라(4:9); 물위에 거품같이 멸망할 것이며(10:7); “사람의 줄 곧 사랑의 줄로 저희를 이끌었고”(11:4); “내가 이스라엘에게 이슬과 같으리니”(14:5); “에브라임이 열방에 혼잡 되니 저는 곧 뒤집지 않은 전병이로다”(7:8).
제 2 장
오순절의 선지자 요엘

1. 선지자의 인격
  우리는 그 선지자가 브두엘의 아들이란 사실을 듣게 되는데 그 이름은 “하나님의 설득을 받은 자”를 의미하는 것으로 생각된다.
  히브리어로 요엘인 그 이름은 “여호와는 하나님이시다”를 뜻하며 그러므로 “미가”의 이름처럼 그 이름 안에 짤막한 신앙고백을 소중히 간직하는 것으로 보이는데 이는 그의 경건한 부모의 경건심을 반영해 주고 있는 것이다.
  선지자는 유다 태생으로서, 아마도 예루살렘 시민이었을 가능성이 있다. 그가 성전에 관심을 기울인 점에서 그가 역시 제사장이었을 것이라는 사실이 추론된다(1:13-17)

2. 개요와 내용
  요엘서는 크게 두 부분으로만 나누어진다: (1) 1:2-2:17(총 37절), 여기서는 선지자가 말하고 잇는데 우선 한재를 동반한 메뚜기 재앙을 가장 생생하게 묘사하고 있다. 그리고 (2) 2:18-3:21(총 36절). 여기서는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는데 이스라엘의 대적들의 최후의 운명을 엄숙한 언어로 발표하고 나서 하나님의 백성의 영광스러운 승리에 대한 묘사와 함께 말을 맺는다.

3. 상황
  요엘은 분명히, 경우 따라서 국가적인 공포의 원인이 되었었던 일상적인 메뚜기들의 재앙을 본문으로 채택하고 그들의 파괴를 그 나라의 역사 가운데서 유례없는 사건으로 묘사하고 있다.
  고대 히브리인들에게 “메뚜기”란 이름 자체가 영어권에서 사용되는 “지독한 욕심쟁이 동물들”이란 의미의 총체적인 뜻을 가지고 있는데 그 모든 것은 가공할 만한 것이다. 윤기가 흐르는 노란색 몸을 가지고 있는 수컷은 훨씬 멋지고, 진갈색을 가진 암컷은 보다 몸체가 크다. 암컷은 어려움을 무릅쓰면서도 흙 속 4인치의 깊이에다 알을 낳아 저장한다. 벌레가 충분히 자랐을 때 그것들은 약 1.5-2인치의 길이가 되며 그들의 머리들은 말들과 같아진다. 그래서 독일인들은 “풀 말들”이라고 부르며 이탈리아인들은 “작은 말들”로 그리고 아랍인들은 “하나님의 군대”라고 부른다.

4. 1915년에 있었던 예루살렘의 메뚜기 재앙
  다음의 사실들은 1915년에 일어난 사건에 동반된 현상들이다. 메뚜기 떼들이 나타나기 전에 한 굉장한 폭음이 들려 왔다. 그것은 무수한 메뚜기 떼들의 날개들이 서로 부딪치면서 내는 소리였는데 마치 멀리서 들려 오는 파도 치는 소리와 유사했다. 태양이 갑자기 어두워졌다. 마치 쥐의 똥들과 같은 두껍고도 단단한 그들의 똥들이 빗발치듯 떨어져 내렸다. 그들이 날아가는 높이는 지상으로부터 몇 백 갑절 피트나 되었다. 1915년 4월 정부는 포고령을 발표했는데 16세에서 60세에 이르는 각 사람은 매일 11파운드의 메뚜기 알을 모아서 관공서에 가져오도록 하였다. 아랍인들이 “Abu Saad" 즉 ”행운의 황새“라고 부르는 황새들이 1915년 당시 팔레스타인 지역에 상당히 많았는데 무수한 골치 덩어리 메뚜기들을 닥치는 대로 먹어 치웠다.
  또 다른 증언자 가운데 한 사람인 아아론손씨는 증언하기를 그것들이 처음으로 나타난 지 불과 2개월도 안 지나셔 모든 푸른 잎사귀들이 갉아 먹혔을 뿐만 아니라 나무껍질 자체까지도 나무에서 벗겨져서 마치 해골처럼 희고도 앙상하게 서 있었다고 한다. 그는 말하기를 밭들은 벗겨져서 땅이 드러나 있었다고 한다. 심지어 어떤 나무 그늘 속에 엄마들에 의해 뉘어진 아랍의 어린 아기들까지도 그들의 얼굴들이 갉아 먹혔다.
5. 메뚜기 떼에 대한 해석
  보다 훨씬 뛰어난 해석은 역사적 또는 문자적 해석이다. 이 해석에 의하면 이 예언들은 다른 대부분의 예언서들처럼 선지자 당시의 상황에서부터 나온 예언들이다. 선지자가 허공에다 대고 마구잡이로 쏘아 대는 말을 하였다거나 멀리 떨어진 미래의 어떤 세대를 상대로 말을 하였다기보다도 당시의 실제 백성들에게 말하고 있었다고 생각하는 것이 훨씬 더 타당하다! 더욱이 선지자가 실제 군사들을 “군사들 같이”로 표현하였다거나 실제 기병을 “기병처럼”과 같은 표현으로 묘사했다는 사실은 도무지 불가능하다(2:4-9). 그런 까닭에 그가 실제 메뚜기 떼의 모습을 보고 거기서 실제 전사들에 대해 말하고 있었음에 틀림없다고 결론지을 수 있겠다.

6. 요엘서의 독창성
  요엘서는 독특한 개성을 지녔다. 진실로, 요엘서가 풍기는 일반적인 인상은 독창성이 없는 개작이라는 것보다는 사상이 매끄럽고 질서정연하다는 점이다.
  (1) 여호와의 날 - 요엘이 이 문구를 만들어 내었음에 틀림없다. 왜냐하면 그는 아모스와 후기 선지자들이 시작하는 그 지점에 그것을 남겨 놓고 있기 때문이다. 요엘의 마음속에 먼저 그것을 암시해 준 것은 바로 메뚜기 재앙의 침입이었다.
  (2) 문학적 독립성 - 두 개의 실례만 가지고서도 이 점을 드러내기에 충분할 것이다:   3:16에 있는 “나 여호와가 시온에서 부르짖고 예루살렘에서 목소리를 발하리니 하늘과 땅이 진동되리로다 그러나 나 여호와는 내 백성의 피난처, 이스라엘 자손의 산성이 되리로다”라는 사상은 아모스 1:2의 말씀 “저가 가로되 여호와께서 시온에서 부르짖으시며 예루살렘에서부터 음성을 발하시리니 목자의 초장이 애통하며 갈멜 산꼭대기가 마르리로다”보다 분명히 앞선다.   요엘서 3:10에서 여호와께서는 이방인을 권면하시기를 “너희는 보습을 쳐서 칼을 만들지어다”라고 하시는데 반해 이사야 2:4와 미가4:3에서는 이 후대의 선지자들이, 유대인들이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 시기를 예견하고 있다.
  (3) 성령의 부으심 - 요엘은 모든 육체에게 성령을 부으실 것을 다른 어느 누구보다도 명백히 예언하고 있다(욜2:28, 29). 이 예언은 그로 하여금 자주 “오순절의 선지자”로 불리도록 해준다.

7. 기록 연대
  히브리어 성경에서는 호세아, 요엘, 아모스, 오바댜, 요다, 미가 등의 순서로 되어 있고 70인경에서는 호세아, 아모스, 미가, 요엘, 오바댜, 요나 등의 순서로 되어 있다. 그러므로 고대의 랍비들은 분명히 요엘서를 초기 예언서들 중의 하나로 보았다는 것이다. 이 사실은 요엘서의 초기 연대성을 주장하게끔 강력한 가정을 하게 만들어 준다.
  12권의 책들 가운데 있는 요엘서의 순서 상의 위치로 돌아갈 필요가 있는데 이미 설명된 요엘서의 독창성에 근거하여 우리는 요엘서가 B. C. 9세기 말경 분리된 왕국의 초창기에 예언된 것이라고 결론을 지을 수 있게 된다.

8. 문체
  뷰어는 이러한 평가를 확정하고 요엘서의 문체를 평가하기를 명쾌함, 유창함, 아름다움이라고 표현하였다 이에 덧붙여서 “서정 시인으로서 그는 묘사, 간결함, 또한 엄청나게 효과적인 면에 있어서 구약의 최고의 위치에 서 있다”고 하였다. 모든 선지자들 중에서 가장 이른 시기의 선지자 가운데 한 사람인 아모스와 유사한 요엘은 성경에서 가장 순수하고도 가장 고전적인 히브리어 성경의 저자였다.  평행법의 사용 기술에 있어서나(1:10), 과장법에 있어서(2:30,31) 능숙함을 보이고 있다. 재담이나 어휘 채용, 그림 그리는 듯한 묘사나 보다 생생한 묘사를 함에 있어서 그는 이사야처럼 하고 있다(1:12, 15; 3:12).

9. 요엘서의 신앙적 가르침
  (1) 요엘서에 있는 영구적인 신앙적 가치에 대한 근본적인 가르침은 선지자의 분명하고도, 정확한, 그리고 우리가 생각했던 바와 같이, 독창적인 여호와의 날에 대한 개념이다. 또는 게벨라인이 표현한 대로 그날은 “여호와의 궁극적인 날, 두려움과 축복의 날, 보응의 날, 구 속의 해, 하나님의 의와 인간의 책임이라는 영원한 원리가 드러나는 날, 최후의 심판 날을 의미한다.
  (2) 이 첫 번째의 큰 가르침으로부터 다른 실천적인 특징들이 나왔는데 그것들 중의 하나가 “회개”였다(2:12:17).
  (3) 본서의 또 다른 위대한 가르침은 모든 육체에게 성령을 부어 주시리라는 것이다(2:28, 29). 그것은 반복되어 그리고 계속 증가하는 성취를 받도록 된 약속이다.

제 3 장
공의의 선지자 아모스
1. 인물
  엘리야와 루터와 그리고 다른 종교 개혁자들처럼 그는 그 시대의 산물이요 대표자였다. 엄격하고 두려움이 없고 말이 없고 강직한 사람인 그는 강한 마음을 지녔고 활기찬 상상력을 지녔으며 히브리 역사상 가장 인상적인 인물들 가운데 한 사람이다.

2. 그의 가정과 초창기 직업
  예루살렘 남방 12마일에 있는 드고아의 목자들 가운데서(1:1) 사막 끝 지점에서 자라난 그는 미가처럼 시골 출신이었으며 또한 그의 아버지의 이름이 그 어느 곳에도 언급이 안된 것 때문에 그는 가난하고 신분이 낮은 가문 출신인 것으로 추리된다. 그는 목자였으며 그래서 그는 타고난 설교자였다! 그는 자신을 “뽕나무를 배양하는 자”로도 소개하고 있다(7:14). 그러므로 그는 자연과 가까지 접촉하며 살았다.

3. 사역에의 부름
  여호와께서 그를 양을 따르는 데서 데려다가 “가서 내 백성 이스라엘에게 예언하라”(7:14, 15)고 말씀하셨던 것이다.
  시골의 개방적인 삶으로부터 도시의 열광적인 분위기에로 부르심을 받은 시골뜨기들이 종종 “정치에로의 진상과 신앙에로의 비전”을 그들에게 가져다주는 이른바 사회의 전문가가 되는 법이다. 그의 임무는 특별히 북이스라엘에 대한 것이었다.

4. 그의 사역 기간
  그의 예언서 내용에 붙여진 표제가 그의 사역 기간을 보여주고 있는데 “유다 왕 웃시야 시대 곧 이스라엘 요아스의 아들 여로보암의 시대의 지진 전 이 년에”라고 묘사하고 있다(1:1). 이러한 언급은 일반적으로 예언의 내용들과 완전히 일치한다(6:13; 7:11).

5. 그의 문학적 스타일
  그는 구약성경 전체를 통하여 가장 순수하고 가장 고전적인 히브리 문학의 저자이다.
  아모스는 웅변가였다. 그의 스타일은 진지하고도 신중하면서도 웅변적이다. 그는 간결하고도 복잡하지 않는 문장들을 사용하고 자주 질문, 생략 부호, 감탄사들 속에 푹 빠진다; 즉 그는 반복의 위력을 이해하고 있으며, 또한 다양한 비유적 표현들과 그가 줄곧 파묻혀서 열심히 그리고 계속해서 배워 왔던  그 대자연으로부터 나온 목가적인 표현들로써 그의 메시지를 풍성하게 하였다.
  그리고 그는 줄곧 시골 생활의 도구들을 비유들과 상징으로 채용하여 쓰고 있는데 예를 들면 타작기(1:3), 곡식 단을 가득 실은 수레(2:13), 밭 갊과 소(6:12), 여름 실과 광주리(8:12), 채질(9:9), 창애(the gin and the snare: gin과 snare는 둘 다 덫을 의미하지만 전자는 기계로 된 틀을 의미하고, snare는 보다 자연적 요소로 만든 올가미나 함정을 의미한 것 같다), 낚시(4:2) 등을 사용하고 있으며, 밭가는 자와 곡식 베는 자, 씨 뿌리는 자와 포도를 밟는 자(9:13), 동산과 포도원(4:9), 메뚜기와 지진(1:1; 7:1; 8:8; 9:5) 등에 대하여 말하기도 한다.

6. 그의 메시지의 진수
  아모스는 북이스라엘의 멸망을 선포한 첫 번째 선지자이다. 그는 어디에서나 도덕적 불건전성을 발견하였고 그래서 그는 여호와께서 자기를 당시의 도덕 교정 자로 임명하셨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그리고 압도적으로 확신하였다. 그러므로 그의 메시지는 하나의 복음이었는데 은혜의 복음이 아닌 율법의 복음이었다.

7. 아모스서의 분석과 내용
  (1) 1-2장, 이스라엘과 그 이웃 나라들에 대한 8개항의 공식적 심판: 모든 일련의 가르침들은 성경적 사회학의 근본적인 원리들인데 말하자면:   하나님의 우주적인 주권   잔학의 죄, 그리고   모든 인류에 대한 도덕적 책임이다. 아모스는 국제주의를 외친 점에서 히브리어 첫 번째 선지자였다. 즉 본서에는 국제적 원리와 같은 요소가 들어 있다.
  (2) 3-6장, 위협과 멸망에 대한 세 개의 담화들, 이들은 각기 “이 말을 들으라”(3:1; 4:1; 5:1)라는 권고와 함께 시작한다.
  (3) 7-9장, 일련의 다섯 개의 환상들이 나타나는데 벧엘의 제사장에 의해서 중단되었다가(7:10-17) 계속되며 희망과 위로의 후기와 더불어 마친다(9:7-15).
  아모스는 회복의 약속과 함께 끝마친다- 즉, 희망과 위로가 넘치는, 아주 뛰어나게 아름다운 문장으로 국가가 체로 걸러지고 궁극적으로 남은 자가 회복될 것이라고 이스라엘에게 확신을 주면서 끝마친다(9:7-15).

8. 그의 메시지가 우리에게 주는 영구적 가치
  (1)아모스는 하나님의 속성의 본질이 절대적으로 의로운 것임을 강조하면서 하나님의 도덕적 인격성을 변호하고 있다. 여호와를 의의 하나님으로 해석하는 것이 아모스의 사명이었다. 아모스의 하나님은 전능하시고 전세계의 하나님이실 뿐만 아니라 도덕적이고도 영적인 분이시다.
  (2) 아모스는 또한, 만일 거짓된 것이라면 가장 정성을 드린 예배라도 하나님께 모욕이 될 뿐이라고 가르쳤다. 그리고 하나님에게 받아들여지는 것은 번제 희생의 연기가 아니라 진실하고 충성된 마음의 향기라는 점을 가르쳤다.
  (3) 더 나아가서 그는 인간과 인간 사이에는 사회 정의가 반드시 있어야 한다는 점을 가르쳤다. 하나님의 요구들은 언제나 도덕적인 것이다. 도덕적 문제들이 역사의 과정을 결정한다.
  (4) 아모스에 의하여 가르쳐진 또 하나의 위대한 진리는, 특권은 책임을 포함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특권에로의 선택은 필연적으로 책임에로의 선택을 위한 또 다른 명칭일 뿐이다!
  (5) 그리고 또 다른 것은 재앙의 의미와 목적이다. 모든 재난은 회개에의 새로운 부름일 뿐이다.
  (6) 그리고 또 다른 것은 경고가 결코 쓸모 없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7) 그리고 또 하나의 교훈은 선지자에게 있는 개인적 확신의 필요성이다(7:14, 15).
  (8) 아모스서는 예언서들 중에서 가장 오래된 것이라는 데 대해 이의가 없는 것으로서 B. C. 8세기 동안 이스라엘에 유행하던 종교적 신념에 대해 중요한 증거가 되고 있다.


9. 관심을 끄는 특별한 구절들
  (1) “두 사람이 의합지 못하고야 어찌 동행하겠으며”(3:3)! 이 구절은 특별히 동양적이다.
  (2) “주 여호와께서는 자기의 비밀을 그 종 선지자들에게 보이지 아니하시고는 결코 행하심이 없으시리라”(3:7). 따라서 모든 참된 설교에는 비밀의 요소가 있다.
  (3) “이스라엘 족속아 너희가 사십 년 동안 광야에서 희생과 소제물을 내게 드렸느냐?”(5:25) “순종이 제사보다 낫다”는 선지자의 관점에서 본 이유 때문이다.
  (4) “화 있을진저 시온에서 안일한 자여....”(6:1).
  (5) “저희로 에돔의 남은 자와 내 이름으로 일컫는 만국을 기업으로 얻게 하리라”(9:12)
  (6) “보라 날이 이를지라 그때에 밭가는 자가 곡식 베는 자의 뒤를 이으며 포도를 밟는 자가 씨 뿌리는 자의 뒤를 이으며”(9:13).

제 4 장
조롱에 대한 비난자 오바댜
1. 오바댜서
  오바댜서의 표제는 “묵시”라고 기술되어 있고 에돔에 대한 것이라고 되어 있다.
 
2. 저자
  오바댜의 생애는 전혀 언급되어 있지 않고 다만 그의 이름이 “여호와를 경배하는 자”를 의미한다는 정도만 상상이 가능할 뿐이다.
 
3. 메시지
  오바댜서의 전체 메시지는 두 부분으로 요약될 수 있는데; 에돔의 멸망(1-16)과 이스라엘의 회복(17-21)이다. 그러나 선지자는 자신의 말을 에돔에 대한 경고로 보다는 이스라엘을 위한 메시지로 향하고 있다.

4. 기록 연대
  예루살렘의 재앙을 “재난, 환난, 멸망” 중의 하나로 묘사한 오바댜의 묘사를 적절히 설명해 주고 있다. 그렇다면 틀림없이 B. C. 8세기경에 예언의 탄생이 주어졌을 것이다.

5. 에돔
  세일(Seir) 산맥 사이에 깊이 위치한 그곳의 위치는 비할 데 없는 아름다움과 화려한 색깔들로 이루어진 바위들로 둘러싸여 있어서 그것은 “하나의 사막의 기적”이었다. 그러나 슬프도다! 지금은 그 어느 구석들을 보아도 폐허만이 그 안팎에 남아 있는데 오바댜의 경고와 예언이 무섭게 입증되었다.

6. 교훈들
  (1) 조롱에 대한 선지자의 경고(12절) - 조롱하는 것은 형제 사랑에 대한 결핍을 무심코 드러내는 것이다. 그것은 자주 진정한 미움의 증거가 된다. 에돔과 이스라엘은 전체 역사를 통하여 서로 경멸하고 미워하였다.
  (2) 엄중한 보응의 교리(10,15절) - 에돔의 교만한 지혜는 자신을 완전히 멸망시킬 것이다; 즉 그 나라의 지혜 있는 자들은 소경이 되어 자멸의 결과를 초래할 것이다.
  (3) 이스라엘에 다가올 황금기에 대한 소망을 확신시킴 - 기독교인들에게 종교적 기업이란 훨씬 더 큰 의미를 가진다. 왜냐하면 은혜의 통로들은 성경을 통하여 계속되어 내려갈수록 깊어진다.

제 5 장
보편성의 선지자 요나
  요나서는 주로 자서전적이다.
1. 요나라는 인간과 그의 이야기
  거의 모든 학자들이 “아밋대의 아들 요나”로 동일시하고 있는 요나는 역사적 인물인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그는 여로보암에게 이스라엘의 옛날 국경 지대들에까지 땅을 회복하리라고 예언하였던 인물이다(왕하 14:25).
  여호와에 의하여 니느웨에 가서 전파하라고 불리움을 받았을 때 그 임무는 그에게 너무나 모순된 것이어서, 여호와의 낯을 피하여 자기의 선지자로서의 사역을 포기하고 스페인의 남서쪽에 있는 다시스 즉 타르테쑤스(Tartessus)로 도망하였던 것이다(1:3, 10).
  선지의 주요 항구인 욥바로 내려가서 그는 먼 서쪽으로 멀리 항해하는 배 한 척을 발견하여 승선하고 배 삯을 지불하고는 배 밑창에 내려가서, 믿을 수 없는 야엘의 장막에서 시스라가 한 것처럼,(삿 4:21) 잠들었다.
  바다가 높이 파도쳤다. 선원들이 각자의 신에게 기도하였으나 풍랑은 계속되었다. 선장이 요나를 발견하고 그의 하나님께 기도하도록 명령하였다. 선원들도 그 배 안에 죄인이 타고 있다고 생각하고 찾기 위해 제비를 뽑았는데 그 제비는 요나에게 떨어졌다. 그러나 그는 그들을 구원하기 위하여 바다에 빠뜨려 주도록 자원하였을 때 스스로를 구원하였던 것이다.
  여호와께서는 큰 물고기를 준비하셔서 요나를 삼키게 하고 요나는 “3일 3야”를 물고기 뱃속에 있었다. 수리아의 해안에 있는 안디옥의 북쪽 알렉산드레타 근처에 있는 두 기둥들은, 아랍 전승에 의하면, 요나가 마른땅에 토해진 지점을 표시하고 있다.
  니느웨의 거리에 들어서면서 그는(아마도) 자기 나라 방언으로 외치기 시작하였다. “40일이 지나면 니느웨가 무너지리라”고 했는데 히브리어 원문으로는 오직 다섯 개의 단어밖에 안된다(3:4). 오직 다섯 단어 즉 심판의 말만을 하였는데 그 다섯 단어의 효과는 자극적이었다. 곧 니느웨는 회개하였다.
  여호와께서 악한 성에 심판을 내리심을 지체하시자 요나는 성이 났다. 요나는 니느웨 동편에 있는 태양이 작열하는 산언덕 위에서 일이 어떻게 되어 가는가를 지켜보면서 그 성이 멸망당하기를 기다렸다. 여호와께서는 이로울 것 없는 분노를 품고 있는 그를 충고하셨다.
  이제 요나서에 대한 우리의 평가가 어떤 것이든 그것의 가치가 쉽게 과대 평가될 수 없으며 요나 자신도 구약 선지자들의 모독에서 비교적 매우 낮은 위치에 서 있음이 인정되어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요나는 교만하고 자기 중심적 이기주의자, 즉 완고하고 성질 잘 내고 토라지기를 잘하고 심술궂은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동시에 아주 애국심이 많고 이스라엘을 충실히 사랑하는 사람이었다! 우리가 아는 한 요나는 복수심에 불탔고 피에 굶주린 애국적인 선지자 였고, 또 놀라운 성공을 보인 설교를 하였는데 아직까지도 그가 성공한 것을 볼 수 없을 정도로 놀라운 성공을 하였다.
  요나 안에서 자애의 정신은 애국심에 의해서 거의 질식되었는데 간단히 말해서 그의 신앙은 의지의 영역이 아니라 감정의 영역에 자리잡고 있었다. 이와 대조적으로 예수께서는 예루살렘을 바라보시면서 우셨다!

2. 선지자의 시대
  우리가 아는 대로 요나는 B. C. 790년부터 750년까지 통치하였다. 북이스라엘 왕 여로보암 2세의 통치 기간에 살았다. 여로보암은 그의 증조 할아버지인 예후 때 이후로 백성들이 끊임없이 앗수르에 조공을 바치도록 압력을 받아 왔었음으로 약한 나라를 지탱해 왔다.
  이와 반대로 앗수르의 일반적인 상황은 정반대였다: 즉 모든 것이 가장 최악의 상황이었고 앗수르는 그 바탕까지 흔들리고 있었다. 다시 말하면 이스라엘은 상승세에 있었고 앗수르는 기울어지고 있었다.

3. 분해
  본서는 자연스럽게 장별로 나뉘어져 있다.
  1장, 요나의 불순종; 하나님으로부터 동망(running away from God).
  2장, 그의 기도; 하나님에게로 달려감(running to God).
  3장, 니느웨를 향한 그의 설교; 하나님과 함께 달려감(running with God).
  4장, 그의 불평들; 하나님 앞서 달려감(running ahead of God).

4. 두 개의 큰 이적들
  (1)큰 물고기 - 요나 선지자 같은 작은 것을 삼킬 수 있을 뿐만 아니라 크게는 말까지도 삼킬 수 있는 catodon acrocephalus라고 알려진 거대한 백상어나 고래가 잡힌 적이 있다. 프린스텅의 맥클로스키(Macloskie) 교수는 요나와 같이 특별한 경우 그는 뱃속에 들어가서 질식당하지 아니하고 숨도 쉴 수 있는 고래의 후두부에 자리잡고 있었을 것이라고 상상하여 설명하였다.
  (2) 니느웨의 회개 - 이 점은 두 개의 이적 가운데 더욱 놀라운 점이다. 물고기 사건은 물리적인 것인 반면에 이 사건은 도덕적인 것이다.
  니느웨의 “하룻길을 행하면서” 요나가 강경한 어조로 회개하라는 은밀한 메시지를 외치기 시작하였을 때 즉시 전체적으로 공포 분위기가 조장되었다. 요나의 설교에 하나님의 경고의 천둥과 번개들이 무겁게 실려 있었다.
  요나의 엄중하고도 긴급한 경고가, 마치 베드로의 오순절에 했던 짧은 설교가 그러했던 것처럼, 찌르는 듯한 그리고 충격적인 심각한 억양으로 전달되었고, 잠자고 있던 니느웨 사람들의 양심을 일깨웠으며, 결국 그들은 임박한 재앙의 두려움으로 인하여 당황하게 되었고 그래서 그들은 금식하고 베옷을 입고, 하나님 - 여호와가 아님 -을 믿도록 선포하였다(3:5). 거리에서 일어나는 일을 왕이 들었을 때 그도 역시 떨었다. 그 역시 상황이 심상치 않음을 인식하였고 왕복을 벗고 - 권위의 포기-재 가운데 앉아서 사람들이나 가축이나 모두 금식하고 베옷을 입고 힘써 하나님께 부르짖도록 선포하였다(3:5-8).

5. 최선의 해석 방법
  (1) 신화적 해석 - 심슨(Simpson)은 요나서가 신화나 전설의 관점에서 연구되어져야 하며 “그러할 때에 모든 것이 간단하게 된다”고 주장한다.
  (2) 역사적 해석 - 이 해석에 의하면 요나의 이야기는 선지자가 실제로 체험한 사건들에 근거한 것으로서 역사적 사실이라는 것이다.

6. 우리 주님의 요나에 대한 언급
  공관복음서에서 예수께서는 두 번씩이나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로부터 자기들에게 표적을 보여주실 것을 요구받으셨다. 그리고 주님은 두 번 모두 요나 선지자와 니느웨에 대한 설교의 경우를 인용하시면서 대답하셨다(마 12:38-42; 16:4; 눅 11:29-32). 아마도 우리 주님께서 요나서를 사용하신 그것이 요나서를 해석하도록 우리를 도와줄 것이다.
  우리 주님의 답변은 아마도 다음과 간이 요약될 수 있을 것이다: “요나가 이방인을 포함한 모든 사람들에게 회개를 외친 것처럼 나 또한 그러할 것이며, 요나가 자기 사명을 완수함에 있어서 하나님께 사용되기 전에 죽어야 했던 것처럼 나 또한 그러할 것이며, 진정한 의미에서 그가 자기 백성을 위하여 대신 죽었던 것처럼 나도 그러해야 할 것인데, 니느웨 사람들이 회개하라는 그의 메시지에 대하여 반응하였지만 그러나 너희는 나의 메시지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고 있다. 그러므로 그들이 너희를 심판하러 일어나서 너희를 정죄할 것이니 이는 너희가 그들이 하였던 것보다 훨씬 더해서 회개의 문을 닫아 버렸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예수께서는 외적 증거를 강조하여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을 꾸짖었는데 주님은 외적 표시들이 종종 그들 자신들 속에 빛을 가지고 있지 않은 사람들임을 확인시켜 준다는 사실을 아셨던 것이다.

7. 영원한 교훈
  요나서는 요나 시대에 가장 진보된 하나의 진리, 즉 인간들이 가슴을 가지고 있는 한 절대로 시대에 뒤떨어지지 않고 복음을 소중히 여기도록 하여줄 진리를 담고 있다.
  (1) 하나님의 은혜의 보편성 - 본서는 요한복음 3:16,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에 대한 구약 부분이다. 요나서 저자에게 하나님은 단순한 한 종족의 신은 아니셨다. 아브라함의 후손과 마찬가지로 이방인들 역시 하나님의 선택에 포함되어 있는 것이다.  본서는 성경의 핵심을 발견하는 것과 해외 선교를 위해 말없이 호소하고 있다.
  (2) 더 고차원적 애국심 - 요나는 과격한 애국주의자였지만 그는 동시에 질투심 많고 보복심이 강한 사람이었다. 그의 애국심은 일반적 형태의 것으로서 천박하고 수준 낮고 그래서 잘못된 것이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의 애국심도 사실 다를게 없다. 진정한 애국심, 즉 고차원적 애국심은 다른 나라들과 그 백성들까지 포함한다.
  (3) 예언의 잠정적 성격 - 특히 하나님의 경고에 대하여, 에발드는 이 점을 본서의 주목적이라고 하였다. 깨어 있는 양심은 본능적으로, 경고 자체가 하나님의 최종적인 말씀이 될 수 없고 그것이 실현되어질 필요도 없다는 것이 제시될 것임에 틀림없으며 회개를 통하여 심판이 구원으로 바뀌어질 수도 있다는 것을 느낀다.
  (4) 효과적인 설교의 비결 - 요나서는 설교자들을 위한 특별한 교훈을 가지고 있다. 요나서는 효과적인 설교자가 되기 위해서는 그가 먼저 요나처럼 죽고 다시 살아나야 한다는 사실을 가르치고 있다. 모든 진실된 설교자는 자기 마음속에 모든 인류를 품어야 한다.
  (5) 순종의 필요성 - 순종은 요나서의 가장 분명한 교훈이다. 요나는 여호와의 낯을 피하여 도망가려고 시도하였다. 그러나 인간은 하나님이 임명하신 운명으로부터 도망할 수 없으며 그들의 삶에서 하나님의 뜻을 회피할 수도 없다.

8. 정경성
  요나서의 정신과 가르침은 구약 선지서들 중 대부분의 책들이나 또는 가장 위대한 책들의 정신과 가르침에 비해서 동등하거나 훨씬 더 고상하다. 그러므로 본능적으로 편집자들은 요나서를 선지서들 가운데 포함시켜 배열시킨 것이다.

제 6 장
가난한 자들의 편에 선 선지자 미가
1. 이름
  소선지서들 중 여섯 번째인 미가서는 그 이름 자체에 하나의 신조를 가지고 있는데 아마도 보다 더 완전한 형태 또는 보다 오래된 형태의 이름은 “누가 여호와와 같은가?”를 의미하는 “미카야후”일 것이다(미 1:1; 7:18; 렘 26:18).

2. 가정
  그는 예루살렘의 남서쪽으로 20마일 떨어진 도시, 가드와 의존 관계에 있는 모레셋-가드에서 출생한(1:14) 사람으로서 “모레셋 사람”(1:1)이라고 불리웠다.

2. 인간성
  미가는 매우 돋보이는 인격을 가지고 있었음에 틀림없다. 그의 능력의 비결은 3:8에 기록되어 있다: “오직 나는 여호와의 신으로 말미암아 권능과 공의와 힘(개역성경의 ”재능“은 히브리어의 정확한 번역이 아니다. 그러므로 ”힘“으로 번역되어야 한다- 역자주)으로 채움을 얻고 야곱의 허물과 이스라엘의 죄를 그들에게 보이리라.”
  진정한 애국자요 설교자로서 그는 두려움이 없이 죄를 들추어내고 그리스도를 제시하였다. 그는 현저하게 가난한 자들의 편에 섰던 선지자였고 압제받는 자들의 친구였다.

4. 시대
  미가 3:12을 인용하는 예레미야 26:18에 의해서 충분히 확정이 된 시대인 “유다 열왕 요담과 아하스와 히스기야 시대에”(1:1) 예언하였다. 부에 대한 욕망이 각처에 유행하였다. 돈 있는 군주들은 재판을 비웃었다. 상업주의와 유물주의가 윤리적이고도 영적인 모든 것의 마지막 흔적까지 거의 다 밀어내고 있었다.
  이러한 위기 상황에서 미가가 나타나서 국가를 하나님과 그 의무에게로 되불러 일으키기 위해 힘썼다.

5. 메시지
  미가의 메시지는 이사야의 메시지를 보충하였다. 이사야는 정치가였고 미가는 복음 전도자요 사회주의자였다. 그는 백성의 선지자였다. 이사야는 시온의 보존을 가르쳤다. 그런데 미가는 그것의 멸망을 예고하였다(3:12). 그의 전체 메시지는 다음과 같은 한 문장으로 요약될 수 있을 것이다: 이기적이고 사치스러운 삶을 사는 사람들은, 비록 그들이 값비싼 희생제물을 드릴지라도, 하나님의 편에서 보면 가난한 자의 산 피를 빨아먹는 흡혈귀들이었다. 그의 말은 억누를 수 없는 감정으로 인해 떨리고 있었다.

6. 분석
  본서의 3개 주요 부분들을 소개하고 잇는 “너희는 들으라”(1:2; 3:1; 6:1)는 3중적인 반복형태가 있지만 주제별 특성을 따라서 본서를 가장 잘 분석해 본다면 그것은 다음과 같다: 1-3장, 심판; 4-5장, 위로; 6-7장, 구원의 길(Via salutis)로 나뉘어지는데 이것은 현대 설교에서도 표본이 될 만한 개요이다!

7. 미가서의 세 개의 위대한 본문들
  (1) 3:12 - “이러므로 너희로 인하여 시온은 밭같이 갊을 당하고 예루살렘은 무더기가 되고 선전의 산은 수풀의 높은 곳과 같게 되리라.” 선지자의 심판의 메시지의 요지가 되며 절정이 되는 이 본문은 한 세기 이상 기억되었고 또 글자 그대로 예레미야의 생명을 구원하는 도구가 되었다는 것 때문에 유명하다(렘 26:18).
  (2) 5:2 - “베들레헴 에브라다야 너는 유다 족속 주에 작을지라도 이스라엘을 다스릴 작 네게서 내게로 나올 것이라 그의 근본은 상고에, 태초에니라.” 무엇보다도 미가는 오시는 구속자이며 한 소작농의 출생지인 베들레헴에 인간들의 눈을 집중하도록 하는 선지자 였다. 미가는 가난한 자의 메시아를 미리 바라본 가난의 선지자인 것이다.
  (3) 6:8 - “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나니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이 오직 공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히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 본문은 진정한 모든 신앙 요소들 가운데 세 개의 주된 요구들을 포함하고 있으니 정의롭게 행함, 자비로운 사랑, 겸손히 행함이다.

8. 영속적인 교훈
  우리가 이미 살펴본 바와 같이 미가의 감화력은 일백 년 후 여호야김 통치 때에 느껴졌었다(렘 26:18). 그리고 그의 음성은 그 후 결코 잠잠해지지 않았다.
  (1) 베들레헴으로 돌아가자(5:2) - 이것은 주목할 만한 표어다! 선지자와 당대 사람들에게 그것은 국가의 원수들을 정복하고 평화를 이룩해 주었던 다윗에게로 돌아감을 의미했다.
  (2) 윤리적인 의에게로 돌아가자(6:8) - 호세아처럼 그 역시 신앙과 윤리가 분리될 수 없음을 가르쳤다(6:6). 그는 또한 이스라엘 국가를 범죄하고 회개해야 하는 하나의 거대한 인격체로 이해하였다. 그는 보다 가난한 계층의 사람들과 완전히 공감하였다.
  (3) 평화의 왕에게로 돌아가자! - 율법과 고의에 기초한 우주적인 평화는 구약성경의 사회적 이상이었다. 복음의 기초 위에서 그것은 형제 사랑의 표현이 되는 것이다.

9. 문체
  생동감, 강세법, 사회적인 오류들에 대한 분노의 번쩍임, 경고에서부터 인자에로의 급속한 반전, 격렬한 감정과 동정적인 부드러움, 웅변적인 힘, 때때로 고상하고도 장엄한 억양과 운율 - 이것들이 선지자의 두드러진 문학적 특성들 가운데 들어 있는 것들이다.

제 7 장
시인 나훔
1. 이름
  그가 지니고 있는 이름은 시사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는데 “위로자”라는 뜻이다.

2. 고향
  그는 엘소스 사람 나훔으로 소개되고 있는데 이 문구는 아마도 탈굼이 지적한 것처럼 그의 조상의 이름이라기보다는 그의 출생지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3. 시대
  나훔서의 시대는 3:8-10에 의해서 어는 정도 분명하게 암시되어 잇다. 본문은 노아몬, 즉 이미 설립되어 있었던 상애굽(Upper Egypt: 이곳은 애굽의 남부 지역으로서 나일 가의 상류 지역을 가리킨다 - 역자주)에 있는 데베스의 멸망과, 그 직후에 일어난 니느웨의 멸망을 다루고 있다. 전자는 B. C, 663년 앗수르바니팔에 의하여 함락되었고 후자는 B. C. 606년 또는 보다 최근에 발견된 사실에 의하면 B. C. 612년에 마보폴라살에 의하여 함락되었다. 따라서 선지자의 시대는 이 두 사건들 사이로 결정지을 수 있다.

4. 니느웨
  이 도성은 티그리스의 동편 즉 모술의 현대 도시 맞은편에 자리 잡고 있다. 이 도시는 바벨론의 니므롯에 의하여 설립되었고(창 10:11) 특히 이스타르 여신에게 바쳐졌었다. 그곳은 B. C. 1100년부터 880년까지 앗수르 왕들의 수도였고 B. C. 705년 왕이된 산헤림 이후로 또다시 수도가 되었는데 사실상 그 성은 제국에서 으뜸가는 도성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곳은 성벽, 해자, 보류와 탑들로 삼겹으로 요새화되어 있었는데 성벽은 경계선 안으로 7.5마일이나 되었고 너무나 넓어서 병거 세 대가 나란히 나아 갈 수 있을 정도였다. 니느웨는 가장 강력하고도 음란하고 잔인하며 전세계에 존재했던 인간들 가운데 가장 마귀적으로 악랄한 도시였다. 그들은 인간들을 괴롭히는 자들이었다; 그들은 항상 “공격하라, 공격하라, 공격하라”고 외쳤다. 그러나 나훔은 세계를 공격하는 자들이 결국 그들 스스로를 포위 공격하게 될 것이라(3:1이하)고 선포한다.
  나훔의 위협은 분명하게 성취되었다. 에살핫돈은 니느웨의 마지막 왕이었다. 바벨론인들과 스키다아인들과 함께 메대인들은 먼저 주변에 있는 성채들을 모두 파괴해 버렸다(3:12).

5. 내용
  나훔의 예언들은 쉽게 세 부분으로 나뉘어진다:
  (1) 1장, 니느웨의 임박한 멸망에 대한 승리의 노래: 전율의 송가!
  (2) 2장, 임박한 심판: 참패를 당한 “짐승의 소굴”인 그 성; 방어, 무익.
  (3) 3장, 그 성의 죄: 잔인성, 탐욕, 파렴치한 외교, 매춘행위, 배신.

6. 시적 형태
  시적 구조를 따라서 나훔서는 거의 같은 길이를 가진 여덟 개의 연으로 나뉘어진다. 이사야서를 제외한 모든 예언서들 중 그 어느 것도 나훔서처럼 대담하고 열정적이고 장엄하게 진술된 것은 없을 것이다. 그의 묘사는 아주 생생하면서도 격렬하다.
 
7. 메시지
  선지자는 1:7-9에서 그의 메시지를 요약하고 있다. 그는 특이하게 한 가지 사상-즉 니느웨에 임할 전쟁-을 가진 선지자이다.

8. 우리에게 주는 그의 메시지의 가치
  나훔에 의해 함축적으로 가르쳐진 세 개의 중요한 교훈들은 영속적인 교훈으로 남아 있다: (1) 하나님의 통치의 우주성, (2) 그것의 보응성 성격 그리고 (3) 그것의 주의 은혜의 계획에의 종속.
  그는 니느웨의 멸망이 변덕스러운 주권적 행사가 아니라 범죄 행위들에 대한 정당한 보수임을 분명히 보여 주었다. 나훔서에서 주고 있는 위대한 교훈은 하나님의 공장은 갈아서 “대단히 작은 가루”로 만든다는 것이다. 그리고 개인이나 국가에게서 “죄가 충분히 자랐을 때에 사망을 가져온다는 것”이다. 필자가 반복하여 말하는 것은 나훔의 기쁨은 단순히 멸망한 원수들에 대해 분노한 애국자가 가지는 단순한 인간적 환희가 아니라, 그 조상들의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확증을 얻었다는 데 대한 기쁨의 부르짖음인 것이다.

9. 주요 구절들
  (1) “여호와는 노하기를 더디 하시고 권능이 크시며 죄인을 결코 사하지 아니하시느니라”(1:3).
  (2) “여호와는 선하시며 환난 날에 산성이시라 그는 자기에게 의뢰하는 자들을 아시느니라”(1:7).
  (3) “볼지어다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고 화평을 전하는 자의 발이 산 위에 있도다(1:15).
  (4) “니느웨가 공허하였고 황무하였도다 거민이 낙담하여 그 무릎이 서로 부딪히며...”(2:10).

제 8 장
철학자 하박국
1. 이름과 인물
  루터는 이 후자의 어원적 설명을 받아들이고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하박국이 그의 직무상 옳은 이름이다. 하박국은 기운을 북돋아 주는 자를 의미하며 또한 다름 사람을, 마치 측은하게 우는 아이에게 그치라고 말하면서 달래는 사람처럼, 그의 가슴과 팔에 안는 사람을 의미한다.”
  진실로 그는 “선지자들 가운데 자유 사상가”였고 어떤 점에서는 “이스라엘의 신앙적 의심의 아버지”였다.

2. 목적
  본서의 유일한 목적은 갈대아인들의 멸망을 예고하고 그로 인하여 위기의 때에 유다에 용기를 주기 위해서였다.
 
 3. 기록 연대
  하박국의 예언 시기는 당시의 폭군이었던 갈대아인들의 시기, 보다 더 구체적인 연대를 정확하게 말한다면 그들이 정복자로서의 경력을 세워 놓았을 때와 같은 시기이다(1:6). 많은 권위 있는 학자들은 B. C. 604-603년경으로 동의하고 있다.

4. 분석과 내용
  본서는 여호와와 선지자 사이의 대화로부터 시작해서, 그 다음 인류의 난폭한 압제자에 대한 저주를 기록하고,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구원하실 것이라는 확신의 아름다운 시로 끝나고 있다.
  (1) 선지자의 불평(1:2-4) - 그의 근본적인 어려움은 왜 여호와께서 악을 허용하시는가 하는 것이다. 그는 하나님을 대항하여(against) 불평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게로(to) 불평하고 있는 것이다.
  (2) 여호와의 응답(1:5-11) - 그분은 자기 백성을 벌주기 위해서 갈대아인들을 일으키는 과격한 방법을 사용하시면서 “너희 생전에 내가 한 일을 행할 것이라”(5절)고 말씀하신다.
  (3) 선지자의 도덕적 문제(1:12-2:1) - 분명히 이러한 심판은 임시적일 뿐이다(17절). 하박국의 문제는 이스라엘의 체험과 역사의 도덕적 의미를 꿰뚫고 있다. 그것은 악한 자의 힘 대 의로운 자의 굴용의 문제이다.
  (4) 여호와의 최종적인 응답(2:2-4) - 갈대아인들은 이기적이므로 재앙을 당한다는 것이며, 의인은 하나님 중심이므로 영원히 존속한다는 것이다.
  (5) 일련의 다섯 개의 화(2:5-20) - 하박국의 기소는 니느웨에 대해 나훔이 하였던 저주들 중 하나를 생각나게 한다. 선지자는 , 치는 자가 스스로 쳐부숨을 당할 것이며 포악은 자멸이라는 것, 갈대아인들은 범죄자들이라는 것, 그리고 부정은 본래적으로, 필연적으로 멸망으로 기울어진다는 사실을 믿고 있다. 그러므로 황폐한 열국들을 위해 말하면서 그는 그들 위에 오중적인 조소와 빈정대는 독설을 퍼붓고 있다.
  (6) 송시 또는 서사시(3장) - 그것은 착상에 있어서 대담하고, 사상에 있어서 장엄하고, 어법에 있어서는 위엄이 있고, 운율에 있어서는 준수하다.

 5. 영속적인 교훈
  하박국은 하나의 위대한 진리를 발표하는 것으로 만족하였다. 그러나 너무나 위대한 진리이므로 그 후 그것은 유대주의의 좌우명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복음주의 기독교의 좌우명도 되었는데 곧 이신칭의의 교리(2:4)이다.

제 9 장
웅변가 스바냐
1. 이름과 계보
  어원적으로 그 이름은 “여호와께서 숨기신 자 또는 보호하신 자”(참고, 시 27:5)를 뜻하는데 이것은 그의 메시지에 특별히 잘 어울리는 의미이다.
  스바냐가 왕의 가문의 한 계열에 속했다는 사실은, 히스기야의 아들 므낫세가, 그의 아들 아몬이 태어났을 때 45세였기 때문에 연대기적으로 가능하다(왕하 21:1, 19).

2. 시기와 연대
  표제(1:1을 의미함-역자주)는 스바냐가 “요시아의 시대에”(B. C. 639-608) 예언하였다고 언급하고 있는데 이러한 언급은 본서의 취지와 완전히 일치한다.

3. 내용
  (1) 위협과 심판(1장); 여호와의 진노의 날을 선포하고 위협하면서 그것이 전 지구를 망라할 것이며 특히 유다와 예루살렘에 있는 우상숭재자들과 배교자들에게 임할 것임을 선포하고 있다.
  (2) 열국들에 대한 경고와 권면(2장); 블레셋, 모압, 암몬, 에디오피아, 앗수르 그리고 완고한 죄인들 위에 떨어지기로 결정이 된 재앙을 피하기 위하여 회개하도록 예루살렘에 대한 진지한 호소가 뒤따라오고 있다(3:1-7).
  (3) 격려와 약소(3:8-20); 회개한 자 특히 이스라엘의 남은 자에게 대한 구원을 말하고 있는데 그들은 여호와의 구원받은 자들로서 영원히 그의 존전에 거함으로 세계적인 명예를 누릴 것이다.

4. 주제
  스바냐서의 유일한 대주제는 주께서 악한 자는 심판하시고, 또 인간들 가운데 그의 위대한 구원의 목적을 실현하시면서 전세계에 그 자신을 충만히 나타내실, 다가올 “여호와의 날”이다. 따라서 그의 주제는 “세계의 역사의 완성” 바로 그것이다.

5. 가치
  (1) 경고의 지속적인 필요성(1:14-16) - 스바냐서는 현대의 모든 선지자들에게 인간들이 어떻게 도덕적 세계의 완고한 실상을 대해야 될 것인가에 대한 하나의 본보기를 설정해 놓고 있다.
  (2) 본서 전체에 스며 있는 상당히 진지한 도덕적 논조 - 스바냐는, 여호와로 하여금 백성들에게 연단과 심판으로 임하시도록 재촉케 하는 그 백성들의 죄들과 도덕적 결핍에 대해 매우 민감해 있다.
  (3) 하나님의 나라의 영적 성겨(3:14-20) - 스바냐서에서 가장 훌륭한 점이며, 두 개의 놀라운 약속들을 포함하고 있다:   “여호와께서 너의 가운데 계신다”(15,17절), 그리고   “너희로 천하 만민중에서 명성과 칭찬을 얻게 하리라”(20절). 이는 고난 후에 영광이 오기 때문이다. 유다는 구원을 받을 것이지만 그러나 불을 통과한 후에 받게 될 것이다.  가장 두드러진 점은 하늘나라에 대한 그의 개념이 모든 인류를 포함하고 있다는 것이다.
 
6. 문체
  스바냐서의 문체는 명령법적인 성격을 유지하는 것으로서 직설적이고도 힘이 있다. 스바냐서는 아마도 다른 대부분의 선지서들보다 덜 독창적일 것이다. 그는 선배들과 유사성을 보이고 있는데 특히 이사야의 문체와 유사하다. 그의 화법의 흐름은 유창하고도 장중하게 흐르고 있다.


제 10 장
성전 건축의 선지자 학개
1. 선지자 개인에 대한 역사
  그가 B. C. 536년에 바벨론으로부터 예루살렘에 돌아온 사람들이 새로 건립한 유대 식민지의 첫 번째 선지자였다는 사실 이외에 그에 관해서 알려진 것은 거의 없다. 본서에서와 에스라서 5;1에서 그는 “선지자 학개”라고 간략하게 소개되고 있다.

2. 그의 사역
  성전 재건은 학개가 선회하면서 전파한 모든 관심사의 핵심이다. 왜냐하면 예루살렘의 유대인들을 일으켜서, B. C. 586년에 느부갓네살이 파괴한 솔로몬의 성전을 재건축하는 것이 그의 최고의 사명이었기 때문이다.

3. 그의 시대와 상황
  학개의 모든 예언은(에스겔의 여러 예언들처럼), B. C. 520년으로 알려진 다리우스 제2년에 임한 것으로 되어 있다(1:1, 15; 2:10).  제2의 출애굽이 B. C. 536년에 어떻게 일어났는지를 말하고 있는데 그때 바사 왕 고레스는 유대인들로 하여금 예루살렘으로 돌아가도록 허락해 주었다(1:1-4). 그리고 공동체 시민의 우두머리인 스룹바벨과 성직자인 여호수아의 지도하에서 42,360명이 성지로 돌아와 예루살렘과 베들레헴의 인근 도시들, 벧엘, 아나돗, 기브온 그리고 기타 지역에 어떻게 정착하였는지를 알려주고 있다(2장). 사마리아인들이 성스러운 건물을 재건하는데 협력하겠다고 제안했으나 그들(유대인)이 단호히 거절함으로 그 사마리아인들의 질투로 인하여 성전 재건을 완성하는 일을 단념하도록 강요받았던 것이다. 결국 16년 동안이나 성전 재건의 사역은 중단 상태에 머무르게 되었다. 그러나 그로 인하여 흉년이 다가왔고 그때 학개는 그들에게 그러한 행위를 여호와께서 기뻐하지 않으신다고 상기시켜 준다(1:1-11).

4. 분석
  (1) 1;1-11, 여섯째 달(9월) 첫째 날에 주어진 것; 여호와의 집에 대한 백성들의 무관심을 책망하고 그 일로 인하여 그들에게 오명을 뒤집어씌우고 있으며, 성전에 대한 그들의 무관심이 하나님으로 하여금 밭의 소산을 줄이게끔 역사하게 하신다고 경고하고(1:10; 참고. 2:16) 자기의 소위를 “살펴보라”고 권면하고 있다(1:5,7).
  (2) 2:1-19. 일곱째 달(10월 21일에 주어진 것; 성전 건립을 하고자 하는 야망을 가졌다가 이전의 솔로몬의 성전과 가치 면에서 비교하면서 실망할지도 모를 사람들에게 진정한 용기를 가질 것을 말하고 있다.
  (3) 2:10-19, 아홉째 달(12월) 24일에 주어진 것; 이는 건축 일이 재게 된 지 정확히 3개월이 되던 때인데, 첫 번째 담화처럼 그들의 타성 때문에, 그리고 성전에 대한 무관심이 전도덕적 삶을 더럽혔다는 확신 하에서 백성들을 꾸짖고 있다.
  (4) 2:20-23, 세 번째 담화와 같은 날에 주어진 것; “열국의 보좌”가 무너지고, 하나님의 명예를 얻고 대리자로서 위임받은 스룹바벨이 여호와의 손에 잇는 값진 인으로써 이스라엘의 애국주의적 소망의 대상인 다윗 왕조의 대표자로 세워지는, 다가올 대변혁의 때를 선포하고 있다(참고. 렘 22:24).

5. 영속적 교훈들
  38절밖에 되지 않는 학개의 메시지는 에스라가 증거한 대로 성전 건립에 효과적인 자극을 주었다(스 5:1; 6:14). 그의 설교의 결과는 하나의 위대한 승리였다.
  (1) 모든 성공적인 설교에 신적 기원 - 선지자는 여호와의 말씀이 그에게 임했다고 반복적으로 우리에게 말하고 잇다(2:1, 10, 20). 학개가 그의 백성들에게 “자기 소위를 살펴볼지니라”고 감히 권면한 것은 바로 이러한 절대적 확신에 근거한 것이었다(1:5, 7; 참고. 2:15, 18).
  (2) 지연(procrastination) 죄의 전염적 성격 - 그는 건강한 사람이 다른 사람을 만짐으로써 다른 사람에게 건강을 줄 수 없는 반면에 아픈 사람은 그의 주변 사람들에게 전염균을 쉽게 퍼뜨릴 수 있다고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그는 그들에게, 그들 가운데 “죽은 것”이 있는데 그것은 여호와의 집이 황폐하게 되었다는 사실로서(1:9; 2:13,14) 그들이 그것을 무관심하게 대함으로써 부정하게 되고 오염되었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3) 세계의 종교적 중심으로서의 교회 - 선지자는 성전에 대해 거의 신성한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
  (4) 메시아적 충성과 왕권 - 학개의 결론적인 약속의 말씀은 여호와께서 스룹바벨을 그의 “종”으로 취하여 그를 그가 택한 “인”으로 만들 것이라는 것이다(2:23).

6. 문체
  평이하고도 간소하기는 할지라도 그의 문체는 단순하고 평범하며, 가끔은 무겁고도 답답하기만 동사에 강경하고 힘이 있음을 알려주고 있다.

제 11 장
 선견자 스가랴
1. 계보와 임무
  책의 서문에서 스가랴는 “잇도의 손자, 베레갸의 아들”로 소개되어 있다(1:1, 7). 그는 학개와 동시대 언급되었는데 이는 그들의 사명이 일반적으로 같기 때문인데 말하자면 그것은 백성들로 하여금 성전을 재건하도록 권하는 것이었다.

2. 그의 책의 일반적 성격
  실제로 구약의 모든 예언적 작품들 가운데 스가랴의 환상과 신탁은 가장 메시야아적이고도 가장 어렵다고 인정되었는데 그것은 과장이 아니다.

3. 그의 시대
  스가랴가 사역했던 때의 상황과 조건은 학개의 때와 일반적으로 같았다. 왜냐하면 학개는 스가랴보다 꼭 2개월 먼저 설교하기 시작하였기 때문이다(참고. 학 1:1; 슥 1:1). 그때는 B. C. 520년이었다. 바사 제국의 전지역을 통해서 격변과 소요가 반복되었다.

4. 분석과 내용
  (1) 1-8장은 세 가지 다른 경우에 주어진 세 개의 독특한 메시지들로 구성되어 있다:
    1:1-6은 서론으로서, 다리우스 제2년 8월에 주어진 것이다(B. C. 520년).
    1:7-6:15는 일련의 여덟 개의 상징적인 밤 환상들이 나오고 즉위식 장면이 뒤따라온다. 이 여덟 개의 환상들은 예루살렘에 있는 포로 후기 식민 백성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집의 건축을 계속하여 완성하도록 용기를 주기 위하여 의도되었으며 그것들은 개별적으로 다음과 같은 교훈들을 가르치고 있다:
  ⓐ 하늘의 사자들(1:7-17); 자기 백성들을 위한 하나님의 특별하신 보호와 관심을 가르치고 있으며 “내 짐의 건축되리라”(16절)고 분명하게 증언하고 있다.
  ⓑ 네 뿔과 네 공장(1:18-21); 이스라엘의 대적들이 결국 전쟁으로 스스로 멸망하며 그래서 하나님의 집을 건축하는데 더 이상 방해가 없을 것임을 가르치고 있다.
  ⓒ 척량 줄을 손에 들고 있는 사람(2장); 하나님께서 예루살렘에 사람을 다시 살게 하고 보호하고 거주하게 하실 것과 그 도성이 벽이 없는 국제적 국가가 되기까지 확장될 것과 여호와 자신이 그들 가운데서 영광이 되시고 그 주위는 불 성벽으로 두르실 것을 가르치고 있다.
  ⓓ 대제상장 여호수아가 자기의 죄들과 그의 백성의 죄들을 가리키는 더러운 누더기 옷을 입음(3장); 제사직이 정화되고 계속되며 다가올 메시아-가지의 전형을 이루어서 그 메시아의 날에 그 땅의 모든 죄가 제거될 것이라는 사실을 가르치고 있다.
  ⓔ 금 촛대의 두 감람나무(4장); 영적인 것이 가시화될 것이며, “두 기름부음 받은 자” 즉 평신도인 스룹바벨과 성직자인 여호수아를 통하여 하나님의 성전의 빛을 찬란히 밝게 타오를 것이다.
  ⓕ 날아가는 두루마리(5:1-4); 하나님께서는 그의 율법에서 악에 대한 저주를 선포하셨으며 죄인들을 “끊어 버리려”고 하신다는 것을 가르치고 있다.
  ⓖ 에바(5:5-11); 인격화된 악, 그리고 멀리 시날 땅으로 옮겨 버리는 악을 묘사하고 있으며, 성전이 재건되었을 때 죄는 실제로 그 땅으로부터 치워지게 될 것임을 가르치고 있다.
  ⓗ 네 병거(6:1-8); 이들은 온 땅의 주 앞에 모셨다가 나가는 것으로서 하나님의 보호와 섭리가 그의 백성 위에, 그리고 비록 느혜미야가 그 성벽을 고쳐야 할 필요가 있기는 하지만, 그들의 성소 위에 있을 것임을 가르치고 있다.
    7-8장, B. C. 518년, 다리우스 제4년 9월 4일에 중진, 벧엘을 대표자에게 금식에 관해서 한 스가랴의 대답.
  (2) 9-14장은 본서의 두 번째 단락을 구성하며, 연대의 명시 없이 두 개의 “경고” 또는 신탁으로 이루어져 있다.
    9-11장, 새로운 신정정치에 대한 약속의 신탁, 일반적으로 이 단락은 거주할 땅, 추방으로부터의 귀환, 적대적인 세상, 권세에 대한 승리, 현세의 축복들과 국가적 세력 등에 대한 약속들을 담고 있으며 여호와와 그들의 목자에 대한 이스라엘의 거절로 말미암아 닥쳐왔던 심판의 비유로 끝마치고 있다.
    12-14장은 새로운 신정정치 국가의 승리와 다가올 여호와의 날을 묘사하는 신탁을 담고 있다.

5. 스가랴에 의해서 가르쳐진 영구적인 교훈들
  (1) 어떻게 한 공동체의 연약해져 가는 신앙이, 비록 천재는 아니라 할지라도 치솟는 신앙을 소유한, 친절하고도 진실한 선지자의 가르침을 통하여 부흥될 수 있는가를 보여준다.
  (2) 어떻게 스가랴 시대와 같은 초기에 이전의 선지서들이 이미 표준적이고도 권위 있는 것들로 인정받았었는지를 보여주고 있다.
  (3) 어떻게 유대인들이 그들의 첫 번째 귀환 때로부터 진정한 종교가 어느 날엔가 세계적 종교로 될 것임을 깨닫기 시작하였는가를 보여준다(2:11; 6:15).
  (4) 어떻게 여호와의 집에 재건이 보다 나은 시대의 필수 불가결한 조건이었는가를 보여준다(1:16).
  (5) 어떻게 이스라엘의 싸움이 사실상 인접해 있는 열국들보다 영적 원수인 사단과의 싸움인지를 보여준다(3:1).
  (6) 어떻게 소망 너머를 소망하는 것이 언제나 신자들의 의무인가를 보여준다.
  (7) 어떻게 금식이나 잔치가 그들 자신에게 무익한 것인지를 보여준다.
  (8) 어떻게 하나님이 자기의 무가치한 양을 기꺼이 목양하려 하시는가를 보여준다.
  (9) 어떻게 반역하는 무리가 자기들이 하나님과 대적하여 싸우고 있다는 것을 깨닫고 애통할 것인가를 보여준다.
  (10) 마지막으로 어떻게 선과 악의 투쟁이 이스라엘을 위한 한 영광의 날에 끝날 것인가를 보여준다.

제 12 장
강의자 말라기
1. 저자의 이름
  말라기라는 이름을 담고 있는 본서 이외에 그의 개인에 대해 알려진 것은 없다. 이 이름은 “나의 사자”를 의미하며 말라기 3:1(참고. 2:7)에 나타난 “나의 사자”와 형태 면에서 완전히 일치하는 단어이다. 어쨌든 저자는 강력하고도 열정적인 인격을 가진 사람이었다.
2. 말라기서의 기록 연대
  묘사된 사회의 상황은 의심할 여지도 없이 페르시아 당시의 것이다. 말라기서는 B. C. 465년부터 425년까지 다스렸던 페르시아 왕 아르타크세르세스(아닥사스다)의 통치 기간의 이스라엘 신앙의 역사에 중요한 이정표가 된다.

3. 저자의 문체
  그의 문체는 의심할 여지도 없이 어떤 포로 전 선지자들의 그것보다 못하다. 그러나 그는 그들이 간혹 간과해 버리는 활력과 힘을 소유하고 있다. 경우에 딸라 그는 그의 선배들의 훌륭한 선지자적인 상상력의 필치를 나타내고 있는데 시적 리듬과 대구법에서 그러하다(참고. 1:11; 3:1, 6, 10; 4:1). 그의 문체는 언제나 순수하고 아름답다(참고 1:6; 3:2. 3; 4:1-3).
  먼저 그는 책망 또는 비난을 한다. 그리고 어떤 일어날 수 있는 반대 의견을 상상해 낸다. 그리고 그 다음에 그의 본래 주장의 중요한 진리를 입증하면서 세부적으로 논박하는 데로 진행해 나아간다. 논쟁적인 강의와 같은 문체는 말라기의 독특한 특성이다. 그는 학파의 영향을 분명하게 보이고 있는데 탈무드 식이다.

4. 말라기서의 내용
  본서는 여호와께서 여전히 이스라엘을 사랑하신다는 선지자의 제일 주제에 대한 분명하고도 날카로운 선언으로 시작하고 있다(1:2-5). 그리고 모세의 율법을 기억하라는 진지한 권고의 말씀으로 끝마치고 있다(4:4-6).
 
5. 평가된 말라기의 메시지
  그의 당시 세대에게 주는 그의 메시지의 근본 목적은 학개와 스가랴가 했던 메시아 왕국에 관한 낙관적인 예언이 실현되지 않았다고 낙심한 백성을 격려하기 위한 것이었다.
  (1) 의식의 진정한 가치 - 그는 형식적이거나 냉담한 의식을 혐오하였다. 그는 백성들을 도덕과 종교적 진실성에로 초청하여 공적 예배에서의 순결과 정직을 강조하였다.
  (2) 이혼의 죄(2:10이하) - 말라기에게 부정한 이혼은 여호와의 사랑에 반역하는 죄요 인간애에도 반역하는 죄였다.
  (3) 메시야의 오심과 그의 왕국(3:1 이하) - 그는 하나님의 나라에 앞서서 정결케 되고 단련될 기회가 될 “여호와의 날”이 올 것이라고 가르쳤다. 여호와께서 친히 그것을 안내하실 것이다.
  (4) 율법의 영속적 규율(4:4-6) - 말라기는 모세의 율법을 지킬 필요성에 대해 최종적 강조를 하고 잇다. 그의 예언의 초기에 그는 율법의 수호자요 해설자인 제사장들이 많은 사람을 넘어지게 하는 원인 됨을 인하여 그들을 꾸짖었다(2:7, 8).


 

 

[[소선지서   김희보교수]]

 

북이스라엘의 여로보암은 3대 정책을 펼쳤는데 금송아지, 절기, 제사장에 대한 것이다.  

금송아지는 예루살렘에서만 예배하는 것이 아니라 그 어느 곳에서도 예배할 수가 있다는 상징

절기는 날과 달과 절기에 매이지 말라는 정신

제사장은 정해진 레위사람이 제사장이 아니라 만인 제사장의 정신

이것은 신약의 예수께서 하신 말씀인데 사탄은 이것은 미리 이용하였다.

르호보암의 아들 아비야는 역대기에 나오는 이름이고, 아비얌은 같은 이름으로 열왕기에 나타난다.

열왕기는 북이스라엘의 나쁜 행적만 기록했고, 역대기는 선한 왕들의 행적을 기록했다.  아비얌은 우상을 상징하는 이름이데 열왕기는 이 이름을 그대로 기록하고 있다.  

이스라엘 왕가

북이스라엘- 여로보암 왕가-나답          

            바아사 왕가- 엘라                      

            오므리 왕가- 아합, 요람, 아하시야        

남유다(다윗의 언약을 그대로 계승함)- 르호보암-아비야 - 아사 - 여호사밧

아사가 종교개혁을 하니 북에 잇는 사람들이 남 유다로 많이 넘어왔다. 동독에 있는 사람들이 서독으로 넘어온 것처럼.  남유다로 넘어오기 가장 좋은 지역은 라마였다.  라마는 베냐민의 땅이므로 국경선 남쪽땅이였다.  그래서 바아사가 성을 쌓고 넘어가지 못하도록 했고, 이 모습을 보고 아사가 그냥 두지 아니하고 전쟁을 일으켰는데 실수한 것은 바아사는 군대 장군 출신이라 당해 내기 힘들것같으니까 다메섹을 불러서 협조를 요청했다.  길르앗은 1)전쟁의 주요요세: 과거부터 길르앗 때문에 다메섹과 이스라엘은 계속 긴장 상태였다.  길르앗은 해발 1,000미터가 넘는 곳인데 이스라엘이 이곳을 빼앗기면 당해 내지 못하는 주요한 요새였다.  다윗이 도망다닐때에 이곳을 거친 것이다.   오늘날 이 지역은 골란 고원이다.  다메섹이 발전하기 위해서는 길르앗을 소유해야만이 근처의 나라를 침략하기가 좋은 곳이다.  2)또한 길르앗은 경제적인 지역 이였다.  특히 길르앗의 바산은 너무나 좋은 초장지라 목축에 있어서는 그보다 좋은 곳이 없다.  3) 또한 길르앗은 王道(실크로드)로 상업적으로 매우 적합한 곳이었다.  이 지역을 통해 홍해까지 이어지며 무역이 이루어지는 유명한 곳이다.  그러므로 다메섹이 길르앗을 점령해야 숨통이 터지는 곳이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시리아(수도는 다메섹이므로 수도가 그 나라를 상징하므로 다메섹이라고 하면 시리아를 칭한다.  백성을 칭할 때는 아람백성이라하는 데 이스라엘도 아람 사람에 속한다.)

다메섹은 과거부터 지금까지 南下政策(남쪽을 계속 침략하는 정책)이 그들의 기본 정책이다.  전쟁터는 길르앗이고,  아합이 길르앗에서 죽는다.  아사와 다메섹이 바아사를 침략하니 바아사가 견디지 못하고 패했으며, 아사가 북이 처 내려오지 못하도록 3성을 쌓았다.  하나님의 사람이 아사를 다메섹을 끌어들였다고 책망하니 아사가 기분이 언짢아졌고,  이것은 왕과 선지자와의 충돌이며,  왕과 선지자가 충돌하면 나라가 망하거나 위기에 처하게 된다. 왕이 다윗의 길을 걸었다는 것은 선지자의 명령을 그대로 지키는 것인데 이것은 그 나라와 그 의를 구하는 것이다.  다윗을 왜 성군이라고 하느냐면 그도 죄가 있었지만 그 나라와 그 의를 구했기 때문이다.  그는 이스라엘을 자신의 나라로 보지 않고 하나님의 나라로 보았다.  아사도 다윗의 길을 걸었지만 이때 삐딱해졌고, 선지자를 옥에 가두었으나 하나님이 치셔서 발병(피부암 종류)이 나서 1년만에 죽는다.

아사는 전쟁에 이겼으나 길르앗을 다메섹에 잃었다.  전쟁은 두 가지가 있는데 惡戰이 있고, 聖戰이 있는데 악전은 자신이 싸우는 것이고, 성전은 하나님께서 싸워 주신 것이다.  기업을 지키는 전쟁은 성전이고, 침략하는 것은 악전이라, 성전은 하나님께서 직접 싸워 주신다.

다윗이 인구조사하고 벌을 받았지만 모세는 광야에서 했던 인구조사는 벌을 받지 않았다.  

다윗의 인구조사는 이 나라를 통치하는 것은 군사의 힘으로 착각을 하여 했던 것이고, 모세의 인구조사는 기업을 쟁취하기 위한 것이다.  그래서 광야에서 나온 이스라엘을 여호와의 군대라고 표현했다.  

엘라가 왕이 되고, 2년이 못되어서 반란이 일어났다.  대개가 북은 왕자가 왕위를 계승할 때는 2년을 넘기지 못했다.  왜냐하면 군대 장군 출신이 반란을 일으켜서 왕이 되었을 때는 카리스마가 있는데 아들들은 거의 카리스마가 없다.  이스라엘의 年계수법은 2년이 1년이다.  북방을 담당하는 오므리가 불레셋과 전쟁을 하고(북과 블레셋은 전쟁에서 거의 게임이 안되는데 북은 높은 지역이고, 블레셋은 낮은 지역이다.  그러나 남은 블레셋과 같은 평지므로 광야에서 싸운다.), 시므리가 왕가를 이루지 못하고 오므리가 왕가를 이루었다.  우리가 구약을 잘 알려면 왕가를 잘 살펴보라. 남북의 왕들의 관계가 어떠했고, 어떠한 정책을 했는가등등.  오므리는 북 이스라엘의 수도(사마리아)를 건설한 왕이다.  이것은 대단히 강력하고, 위대한 왕으로 부각되는 것이다.  수도를 건설하기가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오므리의 성경 역사가 짧다.  그 이유는 세상 나라를 이루었기 때문이며,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한 왕의 기록은 길다.  국제적으로 이름을 떨친 왕은 오므리다.  오므리 왕조는 세상 나라를 이루었고, 아합왕이 왕위를 계승했다.  아합왕은 세상적으로 볼 때에 매우 위대한 왕이였다.  우리가 생각할 때에 이세벨의 치마폭에 놀아난 왕으로 생각하지만 실상 놀라운 왕이었다.  

 아합왕의 기본 목표가 있는데,  길르앗 탈환이었다.  이 목표를 이루기 위하여 정책을 세우는데 2가지 정책을 세운다.  다메섹을 능가할 수 있는 힘이 있어야 하는 데 베니게와 손을 잡는다.  베니게는 두로와 시돈 두 도성을 가지고 있는 약한 나라로 생각하고 있는데 역사에 나타난 페니키아라는 나라가 베니게다(두로왕 또는 시돈왕이라는 명칭은 모두 이 나라를 가르킨다). 고대 문화가 가장 발달한 나라가 페니키아인데 이 나라가 문화적으로, 경제적으로 세계를 지배했다.  솔로몬도 베니게와 손을 잡고, 성전 짓는 토목, 건축, 기술이 제공받고, 바다를 통하여 항해술이 베니게 사람들이고, 첨담과학적인 상품을 만들어 내는 사람들도 베니게 사람들이었다.  특히 물감이 유명하다.  지금도 물감의 원료가 무엇인지 모른다.  물감의 최초 만든 사람들이 베니게 사람들이다.  우리가 쓰는 비누도 베니게 사람들이 만들었다.  두로와 시돈인 베니게는 다음 성경(슥9:2)에 자세히 나타나 있다.  (슥9:2) 그 접경된 하맛에도 임하겠고 두로와 시돈은 넓은 지혜가 있으니 그들에게도 임하리라 (슥9:3) 두로는 자기를 위하여 보장을 건축하며 은을 티끌같이, 정금을 거리의 진흙같이 쌓았은즉 (슥9:4) 주께서 그를 쫓아내시며 그의 바다 권세를 치시리니 그가 불에 삼키울지라

지혜-솔로몬과 같은 지혜가 아니라 세상적 지혜.

보장-건축물

베니게 사람들은 돌섬에다 이들은 성을 쌓는데 바다 밑에서부터 지었다.  그래서 원수들이 꼼짝을 하지 못했다.  이것을 기원전 3세기에 알렉산더 대왕이 점령했다.  점령해 보니까 그 안에 아무것도 없었다.  모두 가지고 도망했다.  바다 밑에서부터 쌓았는데 어떻게 쌓았는지 모른다.  이처럼 토목 건축에 매우 기술이 좋았다.  솔로몬이 이들의 도움을 받아서 성전을 건축했다.  베니게를 역사에서 찾아보라.  백과사전에 여러 장에 걸쳐서 나타날 것이다.  베니게의 조상은 7족속중 가나안 족속이다.  이들은 장사를 잘하는 족속이다.  이들은 저울을 속이는 사람들인데 저울을 속이므로 죄인이며, 죄인의 명칭은 가나안이다.  이 가나안은 죄인의 통칭 적인 것이지 실재 가나안 사람들을 가르키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스가랴뒷장에 보면 (슥14:21) 예루살렘과 유다의 모든 솥이 만군의 여호와의 성물이 될 것인즉 제사 드리는 자가 와서 이 솥을 취하여 그 가운데 고기를 삶으리라 그 날에는 만군의 여호와의 전에 가나안 사람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라

아합왕은 베니게와 화친을 하고많은 경제적인 원조와 기술과 재료를 가져왔고, 공주를 데려다가 아내로 삼았다.  베니게에서 이세벨을 데려왔고, 이 베니게의 종교가 바알이었다.  이세벨은 바알 선지자를 키웠다.  아합왕은 그것을 포용하고, 베니게와 화친을 지속했다.  금송아지와 바알과 여호와의 종교가  혼합이 되어 버려서 북이스라엘의 종교는 혼합 종교가 되어 버렸다.  이러한 혼합 종교가 호세아, 아모스 엘리야선지자 등의 공격대상이엇다.  아합왕이 다메섹 때문에 망하는 것이 아니고, 바알 때문에 망한 것이다.   아합왕은 하나님을 공경하는 자였다.  아들의 이름을 아하시야라 지었는데 여로와의 이름이 사람 이름 앞에 오면 "여"가 되고 끝에 오면 "야"가 된다.  아들의 이름을 여로와의 이름을 집어넣은 것을 보면 하나님을 섬기는 자임을 추측해 볼 수 있고, 나봇의 포도원을 팔지 않으므로 근심하여 잠을 못 이룬 것은 그냥 무력을 빼앗으면 되지만 아합왕은 기업에 대한 법을 알고 있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이세벨은 이것을 빼앗아 아합왕에게 주었다.  

아사의 아들 여호사밧은

아합에게 자신의 딸을 아합의 아들 요람에게 주는데 그녀의 이름은 아달랴다.  

다음 시간엔 여호사밧의 가정이 망하며,  여호야다의 혁명이 일어나는 데 이것이 요엘서 2장에 나오는데 그것을 읽어오라.

 

1995. 9. 25

 

오늘은 요엘에 대한 메시지를 다루도록 한다.

우리에게 역사가 남아 있어야 한다.  

 북이스라엘  남 유다

1.여로보암(1세)왕가(남하 정책) 르호보암

 나답  아비야「얌」

 

2.바아사 왕가(전쟁) 아사

 엘라

 

3.시므리 여호사밧

 

4.오므리 왕가(남북 화친) 여호람(아달랴를 아내로 삼았다) 아합 여호아하스(=아하시야) 아하시야 『아달랴 정권』 요람 ***다메섹(=수리아)은 북의 원수고, 에돔은 남의 원수다(에돔의 세일 산은 중요 요세다).

 

여호사밧은 매우 선한 왕이었는데 아달랴가 궁정을 휘젓고 다녔고, 여호사밧은 살아 있을 때 왕위를 물려준 특출한 왕이었다.  아들들에게 재산을 물려주고, 여호람을 왕으로 세웠으나 여호람은 다른 형제 7인들을 죽이고, 다른 것을 다 차지했다.

여호람이 죽고 여호아하스가 죽고나자, 그의 모친 아달랴가 정권을 잡았는데 이것은 유다역사의 위기이다.  왜냐하면 다윗의 언약을 계승한 사람이 왕이 되야 하는데 그녀는 관계가 없는 사람이었다.  아달랴는 다윗의 언약을 알았기 때문에 왕자들을 다 죽였다.  이것은 사탄의 궤계로 그리스도가 오시기 위한 방해 공작이었다.

이 때 제사장을 통하여 3개월된 요아스가 도망을 가고 후일에 6살된 요아스가 왕권을 다시 차지한다.  대 제사장 여호야다가 요아스를 도와서 유다를 통치하게 되었다  사실 6살난 요아스가 단독으로 무슨 일을 하겠는가? 그러므로 .  이것은 대제사장이  통치한 일은 역사 이래로 없던 일이었다.  대제사장이 통치하게 되었을 때 백성이 매우 기뻐했는데 그 이유는 모세 때부터 준 언약인 "너희가 즐겨 순종하면 대제사장 나라가 되게 해 주겠다"는 것이다.  제사장 나라라는 것은 제사장이 다스리는 나라라는 것이다.  원래 제사장은 나라를 통치하지 못하게 되었는데 제사장이 나라를 다스린다는 것은 하나님의 나라가 된다는 의미이다.  그러나 여기서 말씀하셨던 대제사장의 나라라는 것은 영원한 대제사장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의미한다. 

여호야다의 반정을 배경으로 해서 요엘서가 쓰여졌다.  이 내용에는 왕이나 방백에 대한 책망이 없는데 이것을 가지고 자유주의 신학자들은 요엘이 말라기 다음에 나오는 시대라고 하지만 여호야다가 통치했던 시대는 왕이 없던 시대고, 제사장이 활동했던 시기므로 요엘이 제사장과 방백들에게 외쳤던 말씀이다.  그러므로 요엘서에는 장로들과 제사장들에게 외친 말씀만이 있고 왕에게 외친 말씀이 없었던 것이다.

이제 요엘서의 말씀을 보자.      

 예수님의 멸망 초림 성령강림 재림이 다 포함 되어있는 것이 요엘서다.  

(욜1:1) 여호와께서 브두엘의 아들 요엘에게 이르신 말씀이라

                                      = 임하신 말씀이다.-이 메세지는 말씀의 생동력,활동성

2절: 늙은자들아 = 장로들아      이런 일이 있었느냐= 재앙의 날의 모든일

4절: 팟종이, 메뚜기, 늣, 황충이 = 역대로 이것에 대한 해것이 구구하다.  어떤이는 이것은 이스라엘을 멸한 원수들인 앗수르, 바벨론, 파사, 로마인 원수라고 하는데 그것이 아니라 4라는 숫자는 사면에서 공격한다는 것이고, 4라는 숫자는 원수로 인하여 완전한 파괴를 의미한다.

팟종이=씹는다, 곡식을 짜른다.        메뚜기= 많다는 어원의 뜻

늣    =함아먹는다,                   황충이= 끝장낸다는 뜻

이러한 의미가 있기 때문에 완전한 이스라엘의 멸망을 의미한다.  

이것이 역사적 사건이냐, 비유냐, 환상이냐는 것이 문제다.

 역사적으로 보는 사람들은 실제로 앞으로 오는 심판을 예고하기 위하여 이러한 곤충을 하나님께서 보내신 것으로 주장(박윤선목사등)

이것을 환상으로 보는 사람들이 있는데 에드워드 영같은 사람들은 환상내지는 비유로 본다.  저는 그 쪽입니다.  김희보 교수는 환상으로 본다.  환상으로 보는 이유는 메뚜기가 하나의 곤충으로 보지않고, 1:6에 한 이족(=원수)이 올라온다, 그 이빨이라고 한 것으로 보아 환상이다.

(욜2:4) 그 모양은 말 같고 그 달리는 것은 기병 같으며 - 이 말씀을 통하여 곤충이 아니고 원수를 의미하는 환상과 같은 것이다.  이 내용은 다음과 같은 계시록과 통한다.  

= (계9:7) 황충들의 모양은 전쟁을 위하여 예비한 말들 같고 그 머리에 금 같은 면류관 비슷한 것을 썼으며 그 얼굴은 사람의 얼굴 같고 (계9:8) 또 여자의 머리털 같은 머리털이 있고 그 이는 사자의 이 같으며

그래서 요엘서를 요엘의 계시록이라고도 한다. 이것을 말세론적으로 본다.

요엘1:8-너희들은(=2절의 늙은자들=제사장들)애곡하기를 과 9절의 제사장들아 슬퍼할지어다라고 하느 ㄴ말씀은 제사를 드리지 못하고, 제물이 끊어졌을 때 = 이것은 제물이 끊어진 것은 하나님의 징계로서 이스라엘이 망하는 것을 의미함. 즉, 제단에 불이 꺼졌다는 것은 제물된 짐승과 곡식과 모든 것이 없어진다는 의미이므로 소망이 없는 것이다.

(욜1:8) 너희는 애곡하기를 처녀가 어렸을 때에 약혼한 남편을 인하여 굵은 베로 동이고 애곡함같이 할지어다 (욜1:9) 소제와 전제가 여호와의 전에 끊어졌고 여호와께 수종드는 제사장은 슬퍼하도다                       =헌물, 기름(예루살렘 바이블이 기름으로 번역이 잘되어있다.)

캠브리지 대학과 카톨릭을 중심으로 만든 것. (원문에 아주 가깝게 번역된 것)

번역성경을 비교한다는 것은 주것을 본다는 것보다 낫다.  여기서 다른 해석이 될 때에는 렉시콘을 살펴보면 여러분들의 자료가 된다.  그러므로 여러 번역성경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욜1:11) 농부들아 너희는 부끄러워할지어다(=(Joe1:11) Despair, you farmers,)

(욜1:13)너희는  와서 굵은 베를 입고 밤이 맡도록 누울지어다(=떠나지 말지어다라는 뜻) 

이것은 이 요엘서의 주제다.

(욜1:15) 오호라 그 날이여 여호와의 날이 가까웠나니 곧 멸망같이 전능자에게로서 이르리로다

                         =심판(암5:18) 화 있을진저 여호와의 날을 사모하는 자여 너희가 어찌하여 여호와의 날을 사모하느뇨 그 날은 어두움이요 빛이 아니라 (암5:19) 마치 사람이 사자를 피하다가 곰을 만나거나 혹 집에 들어가서 손을 벽에 대었다가 뱀에게 물림 같도다

회개하지 않는 무리들에게는 여호와의 날이 심판의 날이고 회개하는 자들에게는 구원의 날이다.

(욜1:16) 식물이 우리 목전에 끊어지지 아니하였느냐 기쁨과 즐거움이 우리 하나님의 전에 끊어지지 아니하였느냐

-여기에서 끊어졌다는 단어는 과거인데 앞으로 끊어진다는 내용을 미래로 쓰지 아니하고 애 과거로 썼는가? 이것은 선지자들이 독특한 문체-미래형으로 쓰지 아니하고 과거형으로 쓴다.  그 이유는 지나간 과거처럼 확실하게 된다는 것이고, 선지자는 미래를 확실하게 믿고 있으므로 과거형을 썼다.   선지자들에게는 시간이 없다.  마치 그림을 보는 것과 같이 먼곳과 가까운 것을 동시에 본는 것이다.  이것을 Prophetical Past라고 한다.  그래서 선지자는 먼 미래를 보고 눈물을 흘린다.  

이사야가 환란중에 죽여주소서라고 했지만 사도 바울은 고난중에 즐거워하라고 했다.

구약의 선지자들은 환란중에 죽여주소서라고 했고 신약의 사람들은 소망을 갖고 즐거워하라고 했는데 그 이유는 부활과 성령강림 때문이다.  예수께서는 근심하는 제자들을 위로하지 못했다.  이것을 분명히 알아야 한다.  너희들이 지금은 근심하나 다시 나를 볼 때에는 너희가 기뻐하리로다.  이 기쁨은 부활하신 주님이 주신다.   이것이 구약과 신약과 차이다.  십자가없이 예수님도 제자들을 위로하실 수가 없었다.  그러나 구약 사람들은 구원을 멀리 바라보면서 기뻐했다.  장차 나타날 주님, 성령을 바라볼 주님을 바라보고 기뻐하라는 것이다.  우리는 벌써 성령을 받고 구원을 받았으니 구약의 사람들보다 더 기뻐할 자들이고, 행복한 자들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늘 예수, 십자가, 부활을 밑에 깔아놓고 설교해야 한다.  기독교의 핵심은 그리스도의 부활과 성령강림이야.   이것이 신구약 성도들의 소망이야.  성도들의 케리그마고. 십자가와 부활 그리고 성령!!!

 

 

1995. 10. 2

 

 길르앗은 전쟁과 좋은 초장지와 상업의 주요 장소로 이어지기 때문에 이 장소 때문에 많은 전쟁이 일어났다.  다윗의 길을 걸었다는 것은 그 나라와 그 의를 구했다는 것이다.  

구약을 공부하는 사람들은 지리를 알아야 한다.  지중해는 평지이고 이스라엘은 산지다.  가나안은 산지(북 이스라엘),  평지(블레셋), 남방(=황무지, 광야)로 나뉘이는데 세일 산에 거하는 에돔에게 남 유다는 항상 불리한 지역에 위치해 있었다.  즉, 산지와 평지의 싸움은 아이와 어른의 싸움이다.  남 유다는 평지에 위치해 있었으나 산지가 약간 있었다.  산지에 거하는 북과 블레셋과의 싸움은 북이 항상 유리했다.  그러나 평지에 있는 남은 블레셋과 싸울 때 항상 전투가 치열했다.

아합은 건축술이 크게 발달한 베니키아와(=두로와 시돈)의 외교 정책과 바산 골란을 점령하는 것이다.  남의 원수는 에돔이다.  그러므로 다윗 시대에는 에돔을 점령한 사람을 왕으로 세웠다.     유다의 큰원수는 바벨론이 아니라 에돔이고,  북의 큰 원수는 수리아다.    

 

 이제 북에 관하여 공부한다.   아합의 집을 아합의 군대장관 예후가 여호와의 이름으로 멸한다.  즉, 바알을 숙청한다.  바알 선지 450명, 아세라 선지400명을 모이게 한 후 일제히 다 죽이고, 큰 바알 성전을 변소로 만들었다.  그러나 예후가 여로보암의 3대 정책(제사장을 아무나, 단과 벧엘의 금송아지, 절기를 바꾼것)을 그대로 따라했다.  하나님은 예후에게 4대 까지 왕권을 유지하게 해주셨고, 여로보암의 길을 따라 갔기 때문에 4대 후에는 왕권을 잘라버리셨다.  왕궁을 지키는 보병과 마병을 제외하고는 군인을 전부 무장해제시겼다.  그러니 아람이 출입을 했다.  예후는 성격이 과격해서 이방신을 섬기는 모든 사람을 전부 죽여서 나라에서 일할 사람이 모자라게 되었다.  사실 이러한 사실도 나라를 망치는 일이다.  이 떼 활동한 사람이 엘리사다.  엘리사의 활동이 매우 컸다.  북이 다메섹에 속해있었지만 엘리사 때문에 어쩌지 못했다.  요아스는 다메섹을 원수로 여겼는데 엘리사는 다메섹을 왜 원수로 여기지 아니하고 잡히면 살려보내고, 나아만 같은 사람을 고쳐주었는가?  -- 엘리사의 눈에는 원수가 다메섹이 아니고 네 자신(=이스라엘)이라는 것을 깨닫게 하기 위한 것이다.  엘리사가 요아스에게 죽기전에 활로 땅을 치라고 했다.  그러나 요아스는 땅을 3번만 쳤다.  이것은 선지자의 말을 하나님의 말로 여기지 아니한 것이다.  그러므로 다메섹을 3번만 치게 될 것이다.  죽을 병으로 죽은 엘리사의 뼈에 죽은 사람의 시체가 닿으니 죽은 사람의 시체가 살아났다.  이것은 이적을 배푸신 분이 엘리야가 아니고 하나님임을 입증해 주는 것이다.  

 

(왕하13:5) 여호와께서 이에 구원자를 이스라엘에게 주시매 이스라엘 자손이 아람 사람의 손에서 벗어나 전과 같이 자기 장막에 거하였으나 :이것은 세상 역사도 하나님의 섭리 안에 있다는 것이다.  앗수르가 구원자라니 무슨 말인가?   그 당시 다메섹이 북과 원수 였는데 앗수르가 다메섹을 치고 회군했다(이 회군한 내용은 세계역사에 나오고 성경에는 안 나온다).  회군한 이유는   아라랏이 쳐들어 왔기 때문에 북을 계속치지 못하고 앗수르가 아라랏과 싸웠지만 패배하였다.  아라랏이 앗수르를 침략시키고 북을 치지 아니하고 돌아갔는데 그 이유는 아무도 모른다.  (김희보교수저 이스라엘 역사책 p150 각주에 나오는 월식을 일식으로 고치라)    일신을 섬기는 앗수르는 패배에 기근에 일식(일식현상을 우리의 신이 죽었다고 생각함)이 일어나자 니뉘웨가 크게 소동하게 되었을 때 요나가 회개하라고 외쳤다.  그런 이유가 있으므로 앗수르의 니뉘웨는 회개 할 수 밖에 없는 배경이 있었다.  후일에 이스라엘이 앗수르로 잡혀가서 자유를 얻게 되었다.  

여로보암 2세 때에는 원수가 없었고, 솔로몬 때와 같이 번창해졌다. 하마에서부터 홍해에 이르기 까지 여로보암 2세의 손에 들어 갔다.  그러니 이 여로보암 2세 때 북 이스라엘이 최고의 번창기에 있었는데 여로보암 2세가 바알을 다시 끌어들였다.  이것은 세상나라를 발전시키는 나라가 어느 나라냐? 그것은 베니게다.  그러므로 베니게와 손을 잡으면 당연히 베니게의 신인 바알을 끌여들이게 된 것이다.  이것은 이스라엘이 우상을 섬기는 마음이 있었던 것이 아니라 정치적인 이유 때문이다.  여호와께 제사지내고 이어서 바알에게 제사지내는 혼합종교다.   이 바알을 크게 꾸짖은 선지자가  호세아, 스가랴(신약성경에 나오는 사가랴의 피까지라는 내용이 요아스가 죽인 스가랴임)다.

다음 시간에는 역사얘기는 필요할 때마다 하고 요엘 2장에서 메시야 예언과 성령강림 그리고 호세아서로 돌아가겠다.  

 

1995. 10. 9

 

 요엘서는 왕과 방백에 대한 기록이 없는 것이 특징이다.  

요아스 왕이 바알을 끌여들이는데 이 왕을 꾸짖은 선지자는 스가랴다.  그러자 요아스 왕은 스가랴를 꾸짖었다.  스가랴의 순교는 아벨의 순교와 버금가는 것이다(물론 이 스가랴란 이름이 학자들간에 논란이 있지만 주석을 보면서 정리하도록하라).

아마샤는 등극하자마자 자기 부왕을 죽인 사람을 찾아서 죽였다.  이 아마샤왕이 등극한 후에 에돔과 암몬이 쳐들어왔다.  그 때 아마샤가 선지자의 충고를 잘 들어서 전쟁에 크게 승리하였다.  승리하기 전에 북에 용병을 요청하였다(10만명).  그러자 선지자가 어찌하여 용병을 사는가?  다시 돌려보내고 전쟁에서 크게 승리했다.  선지자가 왜 돈까지 다 지불한 아먀샤에게 다시 돌려보내라고 했는가?  기업을 파수하는 전쟁은 여호와의 손에 달려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구약에 나타난 철저한 신학이.    의로운 전쟁은 하나님의 전쟁이다.  구약에 나타난 전쟁관을 논문으로 쓸 수가 있다.  전쟁에 승리한 아마샤가 감사하지 아니하고 에돔의 우상을 섬기게 되었다.  에돔에게 승리한후 그 나라의 신을 가져다가 우리를 도우라는 의미에서 우상을 가져다가 섬기는 습관이 있었다.  에돔과의 전쟁에서 승리한 아마샤는 교만해져서 북과 전쟁을 하다가 전쟁에서 포로가 되었다.  그러나 북은 포로로 두지 아니하고 말을 잘 들을 것을 서약을 하고 풀어주었다.   여로보암2세는 남을 완전히 장악하고  큰 판도를 장악을 하였다.  이 여로보암2세 때 호세아, 아모스, 요나라는 선지자 3명이 나타났다.  이제부터(여로보암2세) 이스라엘은 망하는 시기가 된 것이다.  그러므로 호세아와 아모스가 이스라엘의 멸망을 예언하기 시작하였다.  여로보암2세가 죽고 스가랴가 등극을 하지만 6개월만에 물러나게 된다.  이 예후 왕가가 4대만에 끝나는 하나님의 말씀이 이루어졌다.  이것이 기원전 8세기에 아모스가 활약한 시기이다.  이 때 앗수르느 다시 힘을 얻기 시작한다.   한 나라의 흥망성쇄는 30-50년정도이다.  나라가 망한 후 30년정도 있다가 다시 일어나게 되고 다시 일어나지 못하면 영원히 일어나지 못한다.  개인은 10년차로 탈바꿈을 한다.  

앗수르왕에게 금송아지를 예물로 보내는 것이 호세아서에 나타난다.  

베가는 혁며을 일으킨다.   베가가 왕위에 오른 다음에는 다메섹과 처음으로 화친을 하는데 군사동맹이다.  이것은 역사적으로 전에도 없었고, 후에도 없었던 일이다.  그런후에 남의 아하스왕에게 군사동맹을 맺기를 원했다.  그래서 3국동맹을 해서 앗수르를 물리칠려고 했는데 앗수르는 원친근공(遠親近攻-먼 나라와는 친하고 가까운 나라를 침략하는 정책)의 정책을 취했다.  이사야가 아하스에게 조언을 하자 아하스가 듣지 않았다.  그래서 이사야는 7장에서 이세상에는 소망이 없고, 메시야가 태어나셔야 소망이 있다는 것을 말한다.   결국 북은 아수르에 공격을 받아서 자체적으로 반란이 일어나고 호세아가 베가를 죽이고 호세아가 앗수르에게 붙고 그 후에 애굽에 붙으니 앗수르가 호세아를 멸해버린다.  북은 처음부터 끝까지 군사반란이 계속 일어났다. - 군사혁명은 곧 하나님의 진노다.  

남이 웃시야가 왕이 되면서 북의 여로보암2세가 죽는다.   웃시야가 경제정책을 펴서 농산물을 많이 확장해 놓았다.  웃시야는 하나님을 잘 섬겼고, 남은 부흥이 이루어지고 있덩다.  그러나 부흥과 더불어 어둠이 나타나게 되었다.  왕이 카리스마가 세지면 나타나는 현상은 방백들이 왕의힘을 사용하게 된다.  즉, 방백들이 왕의 비위는 맞추지만 백성에게는 착취를 하게 된다.  그래서 웃시야 왕국은 강해지면서 속으로 부패가 심해진다.  이 내용이 사9장에 나타난 말씀이다.  

웃시야의 아들 요담, 아하스는 별 볼일이 없다.  이 때는 미가가 나타난다.  이 미가는 이사야선지의 제자다.  소 선지를 잘 읽으면 구약 전체가 쉬워진다.  이 아하스가 다메섹과 싸울 때에 앗수르에 도움을 받고 승리한 후 다메섹의 우상을 가져다가 성전의 모든 것을 뜯어버리고 그 곳에 갖다두었다.  남 유다는 3대째가면 반드시 선한 왕이 나타나는데 이것이 하나님의 축복이다.  메시지가 제일 강한 선지자가 미가이다 .

(미3:1) 내가 또 이르노니 야곱의 두령들과 이스라엘 족 속의 치리자들아 청컨대 들으라 공의는 너희의 알 것이 아니냐 (미3:2) 너희가 선을 미워하고 악을 좋아하여 내 백성의 가죽을 벗기고 그 뼈에서 살을 뜯어 (미3:3) 그들의 살을 먹으며 그 가죽을 벗기며 그 뼈를 꺾어 다지기를 남비와 솥 가운데 담을 고기처럼 하는도다

(미3:12) 이러므로 너희로 인하여 시온은 밭같이 갊을 당하고 예루살렘은 무더기가 되고 성전의 산은 수풀의 높은 곳과 같게 되리라- 이것은 성전모독죄다.

미가는 예레미야 선지자와 똑 같은 메시지를 전했다(렘26:18).

  (렘26:18) 유다 왕 히스기야 시대에 모레셋 사람 미가가 유다 모든 백성에게 예언하여 가로되 만군의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시온은 밭같이 경작함을 당하며 예루살렘은 무더기가 되며 이 전의 산은 수풀의 높은 곳들같이 되리라 하였으나

므낫세는 히스기야왕의 모든 선한 사람들을 죽였다.  이 때 많은 사람들이 죽었는데 이사야가 이 때 순교했다.  아몬도 악한 왕으로 나타나고

최후의 선한 왕인 요시야가 나타난다.  그가 우상을 멸한다.  북으로 올라가서 금송아지 우상을 다 멸하며 가나안의 모든 땅을 여호와의 성지로 만든다.  성전을 청소하다가 제사장이 율법책을 찾아서 왕에게 갖다주니 요시야가 울며 통곡을 한다.  여호와 하나님만 섬기는 왕이 되었다.  그러나 국제 정세가 매우 미묘한데 북은 망했고, 새로운 바벨론(=갈대아-바벨론의 한 지방의 이름이었는데 나중에는 국가의 이름으로 나타난다)이 등장한다.  이런 때에 전쟁이 일어나는데 바벨론을 치기 위하여 애굽왕 바로느고가 올라왔다고 했는데 이것은 잘못된 표현이고 치기위해올라온 것이 아니고 돕고자 올라온 것이다.  이 번역을 돕고자로 해야한다.  (왕하23:29) 요시야 당시에 애굽 왕 바로느고가 앗수르 왕을 치고자하여(=돕고자하여) 유브라데 하수로 올라가므로 요시야 왕이 나가서 방비하더니 애굽 왕이 요시야를 므깃도에서 만나 본 후에 죽인지라

여기에서 요시야가 죽는다.  그러니까 이것이 큰 비극이지.  그래서 성경에 큰 비극을 말할 때 라헬이 울었다는 말을 예수님 시대에 어린아이들이 죽은 것(라헬의 통곡)과 므깃도의 통곡이라는 말은 바로 이 요시야가 죽은 것을 말하는거야.  그러나 요시야의 죽음은 허망한 끔찍한 멸망을 보게 하지 않게 하실려는 하나님의 축복이다.  이사야와 예레미야(나를 위하여 울지말고 너희 자녀들을 위하여 울라)가 이것을 예언 했다.  

나라가 망할 때 정치는 살아야 된다.  포로로 끌려갈 때에 남는 것은 여호와를 찾는 신앙이다.  에스겔, 다니엘, 에스라, 느혜미야, 학개이런 사람들은 포로 시대의 선지자들이다.  어디에서 이들이 신앙을 배웠겠는가?  이것은 다 요시야왕의 부흥의 여파였다.  이것이 새 예루살렘을 건설하는 데 주춧돌이 된 것이다.  그러므로 요시야 왕의 부흥은 헛된 부흥이 아니다.  

요시야가 죽고 첫 아들 엘리야김이 왕이 되지 않고, 여호아하스가(요시야의 장남이 아니고 차남이다 둘째아들.) 등극을 하고 다음으로 여호야김(본래는 엘리야김인데 애굽의 바로가 지어준 것이다.  이것은 이름을 지어짐으로서 너는 내 말을 들으라는 의미이다), 여호야긴, 시드기야 순이다.   이 때에 나타난 선지자가 예레미야와 하박국이다.  이 당시에는 이스라엘이 망할 때가 되어서 이제 예루살렘을 위하여 기도하지 말하고 하시고 예레미야는 기도하지 아니하고 마냥 통곡만한다.  그러므로 예레미야는 눈물의 선지자라고 한다.  예레미야의 핵심 메시지는 다음과 같다. (렘3:16)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너희가 이 땅에서 번성하여 많아질 때에는(예루살렘에 사람이 많아진다는 것은 신약시대를 지칭한다. 즉, 메시야의 나라 영적 예루살렘이다.) 사람 사람이 여호와의 언약궤를 다시는 말하지 아니할 것이요 생각지 아니할 것이요 기억지 아니할 것이요 찾지 아니할 것이요 만들지 아니할 것이며(이것은 법궤가 완전히 없어지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법궤시대가 지났다는 것이다.  하박국은 고민이 있는 메시지이다.  왜 의인이 죽고 악인이 득세합니까?라고 하는 대항적인 질문을 하는 것이다.  (합2:1) 내가 내 파수하는 곳에 서며 성루에 서리라 그가 내게 무엇이라 말씀하실는지 기다리고 바라보며 나의 질문에 대하여 어떻게 대답하실는지 보리라 그리하였더니              =나로 어떻게 대답하게 하실는지(나 스스로 대답을 하는 것을의미함.)

여기에서 하박국이 음성을 듣는다.  (합2:2) "여호와께서 내게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는 이 묵시를 기록하여 판에 명백히 새기되 달려가면서도 읽을 수 있게 하라"(합2:3) "이 묵시는 정한 때가 있나니 그 종말이 속히 이르겠고 결코 거짓되지 아니하리라 비록 더딜지라도 기다리라 지체되지 않고 정녕 응하리라"  이 말씀이 히브리서에 인용이 된다. (히10:37) "잠시 잠깐 후면 오실 이가 오시리니 지체하지 아니하시리라"   그러므로 하박국은 이와 같이 노래를 한다.  (합3:18) "나는 여호와를 인하여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을 인하여 기뻐하리로다"  루터는 이 하박국서에서 얼마나 감동을 받았던지 주석을 두 권이나 썼다.  바울의 로마서와 갈라디아서와 히브리서의 신학이 모두 하박국에서 나온 것이다.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믿음에 의해서 의로운 자는 살고, 믿음에 의한 삶은 의롭게 된다는 것이다.  (Hab2:4) but the righteous will live by his faith--  (Rom1:17)  "The righteous will live by faith."(Gal3:11) "The righteous will live by faith."

요시야가 부흥을 시켰던 경건한 일들은 모두 들음으로서 전해졌다.  이 요시야의 경건은 스바냐에 의해서 생긴 것이다.  요시야와 스바냐와의 관계는 형제관계다.  요시야는 스바냐보다 나이가 어리지만 삼촌벌된다.  (습1:1) 아몬의 아들 유다 왕 요시아의 시대에 스바냐에게 임한 여호와의 말씀이라 스바냐는 히스기야의 현손이요 아마랴의 증손이요 그다랴의 손자요 구시의 아들이었더라 - 그러므로 스바냐는 왕족이다.  이 어린 왕을 교육시킬 선지자는 스바냐밖에 없었다.  이 스바냐의 선포는 심판이다.  이 메시지에 깊은 실천을 한 왕이 요시야왕이었다.  

여호야긴 왕이 포로로 끌러가고 시드기야가 왕이 되지만 이 때에고 여호야긴이 살아있을 당시다.  그러므로 마태복음의 족보를 보면 시드기야가 아니라 여호야긴으로 기록되었다.  이 때 활동한 선지자는 학개 스가랴다.  

다음 시간에는 요엘서 주석을 가지고 오세요.  

 

1995. 10. 16   요엘서 주석

 

 베니게와 손잡지 아니하면 나라를 부강케 할 수가 없다는 것 때문에 바알종교를 받아들이게 되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나라와 세상나라인 베니게와의 전투이다.  솔로몬도 시돈왕의 딸을 데려와서 아내로 삼은것도 이런 이유이다.  즉, 자기 나라를 많이 번영케 하기 위해서 펼친 평화 정책이다.  백성들은 바알이 축복의 신이니까 좋아하지만 지도자들은 나라를 부강시킬 목적으로 바알의 종교를 받아들이게 되었다.  요아스가 스가랴의 피를 흘린다.  스가랴가 마태복음에서는 베레갸의 아들로 나온다.  그러므로 여호야다의 아들 스가랴가 아니라면 누구인가?  그러나 역사적으로 볼 때에 스가랴가 여호야다의 아들외에는 이렇게 순교자로 나올 만한 다른 스가랴가 없다는 것이다.  히스기야가 산당을 다 멸하지 아니하고 몇 개 남겨 놓는데 그 이유는 산당에서 여호와께 제사를 드렸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산당은 혼합종교의 산실이다.  그러나 요시야 왕때에 한 장소에서만 제사를 드리도록 하였다.  그는 모든 산당을 다 멸하였다.  이것은 250년전에 여로보암에게 예언한 선지자의 예언이 성취된 것이다.  남북을 통틀어서 우상을 완전히 멸하고 역사이래 없던 종교개혁은 바로 요시야 왕때이다.  구약의 선지자에게 말씀하신 것은 to me가 아니라 in me이다.  즉, 하나님께서 나에게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나의 속에 말씀을 하시는 것이다.  

 아브라함이 갈대아 우르에서 떠났다고 했는데 이스라엘은 갈대아 우르로 끌려간다.  다윗의 언약은 어떻게 되는가?  이것은 영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다.  이렇게 하여서 다 끌려가지 않고 남은 사람들이 있었는데 그 중에 그달랴로 총독으로 삼았다.  예레미야가 그다랴를 통하여 다시 이스라엘을 세울려고 했는데 이스마엘이 와서 그달랴를 죽였다.  죽인 후에 이스마엘은 도망갔다. 남은 사람들은 그달랴를 죽인 죄목을 쓸 것같아서 애굽으로 들어간다.  이것을 통해서 무엇을 알 수가 았는가?  다윗의 언약과 출애굽도 다 허탕이며 영적인 문제로 돌입하게 된다.  즉, 유다나라도 실상은 세상나라이고 오직 하나님의 나라만이 진정한 나라이다.  

포로로 돌아와서 학개와 스가랴 말라기가 나타나게 된다.  오바댜는 유다왕국의 가장 큰 원수는 에돔인데 이 에돔을 하나님께서 가장 미워하셨다.  출애굽에서부터 에돔이 길을 막았다.  이 에돔의 멸망을 선포한 것이 오바댜이다.  나훔서는 앗수르의 멸망을 선포한 것인데 이 앗수르는 애굽보다 더 악한 일을 더 많이 행했다.  그러므로 앗수르나 에돔에 대하여 잘 알려면 에돔과 나훔서를 보라.  바벨론과 앗수르와의 전쟁인데 앗수르와 느고와 갈그미스(앗수르의 땅)에서 전쟁을 하고 애굽은 연약한 나라로 남고, 앗수르와 바벨론은 멸망을 했다.  왜냐하면 이 애굽은 이스라엘이 번영한 곳이었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애굽으로 피신을 가셨던 것으로서 구속 역사에서 애굽이 동참한 공로이다.  (사19:23) 그 날에 애굽에서 앗수르로 통하는 대로가 있어 앗수르 사람은 애굽으로 가겠고 애굽 사람은 앗수르로 갈 것이며 애굽 사람이 앗수르 사람과 함께 경배하리라 (사19:24) 그 날에 (이것은 아브라함의 언약이 성취되는 날인데, (창12:2)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지라(창12:3)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하여 복을 얻을 것이니라 하신지라.  땅의 모든 백성이 복을 받는다는 것은 신약시대인 그리스도를 통하여 성취된다.(출12:37) 이스라엘 자손이 라암셋에서 발행하여 숙곳에 이르니 유아 외에 보행하는 장정이 육십만 가량이요(출12:38) 중다한 잡족(이 잡족들은 순수한 이스라엘 사람들이 아니라 다른 나라 사람들인데 수가 얼마나 되는지 알지 못한다. 이 잡족에 대하여 스데반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행7:38) 시내 산에서 말하던 그 천사와 및 우리 조상들과 함께 광야 교회에 있었고 또 생명의 도를 받아 우리에게 주던 자가 이 사람이라.  즉 광야교회라고 했다)과 양과 소와 심히 많은 생축이 그들과 함께 하였으며) 이스라엘이 애굽과 앗수르로 더불어 셋이 세계 중에 복이 되리니 (사19:25) 이는 만군의 여호와께서 복을 주어 가라사대 나의 백성 애굽이여, 나의 손으로 지은 앗수르여, 나의 산업 이스라엘이여, 복이 있을지어다 하실 것임이니라)

(암9:12) 저희로 에돔의 남은 자와 내 이름으로 일컫는 만국을 기업으로 얻게 하리라 이는 이를 행하시는 여호와의 말씀이니라여, 나의 손으로 지은 앗수르여, 나의 산업 이스라엘이여, 복이 있을지어다 하실 것임이니라

 

 1995. 10. 23

 

 왕과 방백에 대한 기록이 없는 것이 요엘서이다.  또한 특징적인 것은 여호와의 날인데 이것은 심판의 날이다.  회개하는 자에게는 여호와의 날이 구원의 날이나 회개하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큰 심판의 날이다.  

1장 1절부터 검토해 본다.  

 요엘이란: 여호와는 하나님이시다.  주제: 여호와의 날.   요엘서는 완전한 예언된 책이다.

(욜1:2) 늙은 자들아 너희는 이것을 들을지어다 땅의 모든 거민아 너희는 귀를 기울일지어다 너희의 날에나 너희 열조의 날에 이런 일이 있었느냐 : 여기에서 늙은 자들이라는 말은 장로들을 의미.

(욜1:4) 팟종이가 남긴 것을 메뚜기가 먹고 메뚜기가 남긴 것을 늣이 먹고 늣이 남긴 것을 황충이 먹었도다 : 네가지의 곤충이 가나안의 곡식을 삼킨 것을 가리키느냐, 아니면 비유내지는 환상이냐는 것이다.  즉, 역사적 사건이냐, 요엘이 본 환상이냐하는 것이다.  또한 이 네가지 곤충은 이스라엘을 침범한 이웃나라를 가리키느냐(앗수르 바벨론 파사, 헬라), 아니면, 4라는 의미를 완전한수가 넘치는 수를 말한다는 것이다.  즉, 건질 수 없는 환란의 날을 가리키는 것이란 견해가 있다.  팟종이란: 자른다는 어원의 의미가 있고, 메뚜기는 많다. 늣이라는 것은 다 함아먹는다는 뜻이고, 황충이란: 다 끝냈다는 의미가 있다.  - 즉, 완전한 파멸을 의미한다고 봄이 가장 적합한 것이다. 이것을 역사적 사건으로 보는 사람들은 요엘서에 나오는 동사들: (욜1:12) 포도나무가 시들었고 무화과나무가 말랐으며 석류나무와 대추나무와 사과나무와 및 밭의 모든 나무가 다 시들었으니 이러므로 인간의 희락이 말랐도다 (욜1:16) 식물이 우리 목전에 끊어지지 아니하였느냐 기쁨과 즐거움이 우리 하나님의 전에 끊어지지 아니하였느냐 : 이런 동사들은 모두 과거로 나타난다. 과거로 나타나기 때문에 역사적 사건으로 보는 사람들이 많다.  그러나 역사적 사건으로 보기가 어려운 것은 이 메뚜기 재난을 6절에서는 한 이족이 올라왔다는 말을 통해서 알 수가 있다 -  (욜1:6) 한 이족이 내 땅에 올라왔음이로다 그들은 강하고 무수하며 그 이는 사자의 이 같고 그 어금니는 암사자의 어금니 같도다.  (욜2:4) 그 모양은 말 같고 그 달리는 것은 기병 같으며 (욜2:5) 그들의 산꼭대기에서 뛰는 소리가 병거 소리와도 같고 불꽃이 초개를 사르는 소리와도 같으며 강한 군사가 항오를 벌이고 싸우는 것 같으니 :  이런한 것이 계9:3에 나타나는 것과 비교한다면 환상으로 볼 수가 있지만 계시록에 나타난 것은 환상이라고 말을 했으므로 환상으로 봄이 좋다.   (욜1:16) 식물이 우리 목전에 끊어지지 아니하였느냐 기쁨과 즐거움이 우리 하나님의 전에 끊어지지 아니하였느냐

- 이 내용을 김희보교수는 환상으로 본다.  

(욜1:9) 소제와 전제가 여호와의 전에 끊어졌고 여호와께 수종드는 제사장은 슬퍼하도다 :

-성경에 많이 나오는 내용이므로 주의해서 봐야 한다.  제사장들이 슬퍼한다라고 하는 말은 제물이 끊어졌기 때문인데, 이스라엘 사람들에게는 최고의 가치가 바로 제사이다.  이 제사가 바로 순종과 연결되는데 순종이 제사보다 낳다고 하는 사무엘에 와서 제사보다 순종이 더 선행한다는 것으로 바뀌었다.  그런데 구약의 이스라엘 사람들의 사상은 제사가 최고로 삼아서 하나님께서는 아무리 진노하셔도 당신이 드실 제물만큼은 남겨놓는다는 것인데 제물이 없어졌으므로 제사장들이 슬퍼할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제사장과 선지자가 충돌하는 이유가 순종과 제사에 있다.  

(욜1:11) 농부들아 너희는 부끄러워할지어다 포도원을 다스리는 자들아 곡할지어다 이는 밀과 보리의 연고라 밭의 소산이 다 없어졌음이로다

-이것은 너희는 놀랄지어다. 소망이 끊어졌다는 의미이다.  

(욜1:12) 포도나무가 시들었고 무화과나무가 말랐으며 석류나무와 대추나무와 사과나무와 및 밭의 모든 나무가 다 시들었으니 이러므로 인간의 희락이 말랐도다

-여호와의 날에 있을 재난의 예고다.  이것은 바로 과거로 사용했지만 선지자는 미래를 체험하며 살기 때문에 과거를 사용한 것이다.  

(욜1:15) 오호라 그 날이여 여호와의 날이 가까웠나니 곧 멸망같이 전능자에게로서 이르리로다

-이 여호와의 날이 요엘서의 주제이다.  

14절-"너희 하나님", 16절-"우리 하나님"이라는 단어에 매우 주의하라.  징벌이 있어도 너희의 하나님, 그리고 우리 하나님이시다는 것이다.  

*참조: 성경을 판독을 할 때에 우리 성경을 가지고만 하면 안되고 원문을 가지고 여러 가지 주석을 참조하여 보아야 한다.  그리고 나서 이해를 해야 한다.  즉, 뜻을 확대시켜서 이해하고, 그 다음 단계가 묵상이다.  그리고 일반적으로 적용으로 들어간다.  그러나 설교자에게는 그 다음의 단계는 이 본문이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가라는 성경의 본문을 부셔야 한다.  부셔서 현실에 맞도록 재구성을 한다.  현실에 맞도록 성경 본문을 재구성한 후에 설교에 적용해야 한다.  

주석도 3개이상을 보고 번역성경도 여러개 보아서 비교하고 왜 이렇게 서로 다르게 번역이 되었는가하는 이유를 원문을 보고 확인하라.  

(욜1:17) 씨가 흙덩이 아래서 썩어졌고 창고가 비었고 곳간이 무너졌으니 이는 곡식이 시들었음이로다                  ( = 아주 심한 가뭄엔 씨가 썩지않고 마른다. 그러므로 이단어는 마름                               으로 해석해야 바르다.)

(욜1:19) 여호와여 내가 주께 부르짖으오니 불이 거친 들의 풀을 살랐고 불꽃이 밭의 모든 나무를 살랐음이니이다

- 이런 환상은 아모스에도 나타난다.  (암7:1) 주 여호와께서 내게 보이신 것이 이러하니라 왕이 풀을 벤 후 풀이 다시 움돋기 시작할 때에 주께서 황충을 지으시매 (암7:2) 황충이 땅의 풀을 다 먹은 지라 내가 가로되 주 여호와여 청컨대 사하소서 야곱이 미약하오니 어떻게 서리이까 하매 (암7:4) 주 여호와께서 또 내게 보이신 것이 이러하니라 주 여호와께서 명하여 불로 징벌하게 하시니 불이 큰 바다를 삼키고 육지까지 먹으려 하는지라

1장에서 메뚜기 재앙의 큰 재앙은 불의 심판이다.  

(욜2:2) 곧 어둡고 캄캄한 날이요 빽빽한 구름이 끼인 날이라 새벽 빛이 산꼭대기에 덮인 것과 같으니 (=산 꼭대기에 메뚜기 떼가 햇볕을 위에서 받으므로 환하게 보임을 표현한 것이다.) 이는 많고 강한 백성(=메뚜기를 상징)이 이르렀음이라 이같은 것이 자고 이래로 없었고 이후 세세에 없으리로다

(욜2:6) 그 앞에서 만민이 송구하여 하며 무리의 낯빛이 하얘졌도다 (킹 제임스 번역은 새까매졌도다.-히브리어는 두 단어 모두 사용하므로 별차이가 없다. )

(욜2:12) 여호와의 말씀에 너희는 이제라도 ( = 이 단어가 강조되고 있다.  지금도 기회가 있다는 말이다.)금식하며 울며 애통하고 마음을 다하여 내게로(=방향 뿐아니라 목적까지도 내게로) 돌아오라 하셨나니

(욜2:13) 너희는 옷을 찢지 말고 마음을 찢고(=애통을 말함)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로 돌아올지어다(왜냐하면) 그는 은혜로우시며 자비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인애가 크시사 뜻을 돌이켜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나니  :

-여기에서 뜻을 돌이킨다는 말은 예정론을 믿는 우리가 오해하지 말아야 한 것은 사람이 기도하므로 뜻이 돌이켜지는 사람의 의지로 하나님이 계획이 변한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푸실 때는 아주 즉시 베푸신다.  회개하면 즉시 은혜를 베푸신다.  "여호와를 찾으라 그리하면 살리라."-이것은 히브리 문법에는 논리적으로 나누어져 있지만 사실 동시적으로 임하는 것이다.  그러나 영문법과 헬라문법은 순차적으로 이루어 진다.  여기에서 뜻을 돌이킨다는 것은 심판을 참으신다는 것이다.  

(욜2:14) 주께서 혹시(이 단어는 원문에는 나타나 있지 않으며, "반드시"라는 뜻으로 이해하면 된다.) 마음과 뜻을 돌이키시고 그 뒤에 복을 끼치사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 소제와 전제를 드리게 하지 아니하실는지 누가 알겠느냐

-킹 제임스번역은 맛소라 사본을 완전히 따랐고, 뉴 킹 제임스 번역은 현대어로 맛소라 사본을 번역한 것이다.  RSV는 70인경을 많이 인용했다.  그러므로 이것은 많은 부분에서 맛소라 사본을 따라 번역한 킹 제임스 성경보다 약하다.  또한 RSV는 자유주의 영향을 받았고, 우리 개역 성경도 이 RSV처럼 자유주의 영향을 받았다.  그리고 NASV는 NEV는 옥스포드학자들이 중심으로 만든 성경이지만 원문에서 많이 탈선하여 우리에게는 약하지만 영국에서는 많이 사용되고 있고, 예루살렘 성경은 캠브리지 학자들이 중심으로 만들어 졌으며, 카톨릭과 함께 공동작업을 하여서 많이 학적이지만 절수를 바꿔치기를 문장에 맞도록 실행하였다.  

주석을 보는 것보다 영어번역성경을 비교해 보는 것이 좋다.  라틴 벌게이트성경은 맛소라보다 먼저 나온 것이다.  또한 수리아 성경이 있는데 이것은 2세기에 된 성경으로 수리아는 아람말의 방언이다.  이것은 기원전 250년이후에 만들어진 70인경하고 아주 다르고 쉽게 번역을 해놓았다.  동방교회는 이 수리아 성경을 사용한다.  영문으로 이것들을 다 읽을 수 있으니 주석보다 먼저 사야 하는 것이 바로 이와 같은 영문 성경이다.  

(욜2:15) 너희는(-장로들을 가리킴) 시온에서 나팔을 불어 거룩한 금식일을 정하고 성회를 선고하고

2:17-낭실과 단사이: 제사장과 회중의 사이. 즉, 방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욜2:18) 그 때에 (매우 중요한 단어므로 줄을 칠것)여호와께서 자기 땅을 위하여 중심이 뜨거우시며 그 백성을 긍휼히 여기실 것이라    =긍휼히 여기실 때는 지체하지 아니하신다.

(욜2:20) 내가 북편 군대(바벨론)를 너희에게서 멀리 떠나게하여 메마르고 적막한 땅으로 쫓아내리니 그 전군은 동해로(사해), 그 후군은 서해(지중해)로 들어갈 것이라 상한 냄새가 일어나고 악취가 오르리니 이는 큰 일을 행하였음이니라 하시리라

-히브리 개념에서는 바다와 호수의 개념이 같다.

 

지금부터 요엘서를 공부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20절이 큰 일은 심판이고,  21절의 큰 일은 메시야 언약이다.  

(욜2:23) 시온의 자녀들아 너희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로 인하여 기뻐하며 즐거워할지어다 그가 너희를 위하여 비를 내리시되 (=원문의 뜻은 "의의 교사를 주시고"뜻)이른 비를 너희에게 적당하게 주시리니 이른 비와 늦은 비가 전과 같을 것이라

(욜2:28) 그 후에 내가 내 신을 만민에게 부어 주리니 너희 자녀들이 장래 일을 말할 것이며 너희 늙은이는 꿈을 꾸며 너희 젊은이는 이상을 볼 것이며

-이것은 23절과 28절을 이어서 보아야 하는데 이것을 이어서 보면 너희에게 의의 교사를 주고 성령을 주신다는 것.  이 내용과 비슷하게 번역한 것은 NIV이다.  칼빈도 이것을 번역을 못했는데 루터가 그렇게 번역을 하였다.  일반 성도들까지 바르게 번역된 내용을 알고 있는 사람들은 화란교회이다.  

 

1995. 10. 30

 

 구약성경에서 "기뻐하라". "기뻐하라"는 내용이 나오면 메시야 강림을 말하는 것임을 주의하라.

요엘서 주석 173페이지

2:28-장래일을 말할 것이요: "내 신을 만민에게 부어주리니 장래일을 말할 것이요(이것은 "예언 할 것이요"라고 번역하는 것이 더 좋다)"라고 하신 말씀중에서 '장래일'은 앞으로 다가올 미래를 말하는 것만이 아니라 (암3:7-주 여호와께서 그 종 선지자들에게 보이심이 없이는 결코 행하심이 없으리라.) 이제는 선지자의 시대가 지나갔다는 말이다.  즉, 시간개념이 아니라 장소개념이다.  성령을 받은 사람은 누구나 다 예언한다는 의미가 아니다.  

(히1:1) 옛적에 선지자들로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이 (히1:2) 이 모든 날 마지막에 아들로 우리에게 말씀하셨으니 이 아들을 만유의 후사로 세우시고 또 저로 말미암아 모든 세계를 지으셨느니라

(행3:24) 또한 사무엘 때부터 옴으로 말한 모든 선지자도 이 때(=성령 강림의 때)를 가리켜 말하였느니라

(욜2:29) 그 때에 내가 또 내 신으로 남종과 여종에게 부어 줄 것이며 : 성령을 주시는 것은 남녀의 차별이 없음을 말씀하신 것이다.  

구약시대에도 꿈으로 많이 나타났지만 오순절이후 시대부터는 꿈에 대한 내용이 없다.  비몽사몽이라는 단어가 있어도 꿈이라는 것으로는 나타나지 아니하였다.  

또한 오순절시대로 부터 하나님의 말씀이 완성될 때까지(요한계시록)를 과도기라고 한다.  

과도기에 대하여 우리는 별반 이해가 없어서 오해를 많이 하고 있다.  심지어는 신학교에서 조차.

(고전14:26) 그런즉 형제들아 어찌할꼬 너희가 모일 때에 각각 찬송시도 있으며 가르치는 말씀도 있으며 계시(과도기에 나타난것)도 있으며 방언도 있으며 통역함도 있나니 모든 것을 덕을 세우기 위하여 하라(고전14:30) 만일 곁에 앉은 다른 이에게 계시가 있거든 먼저 하던 자는 잠잠할지니라 (고전14:31) 너희는 다 모든 사람으로 배우게 하고 모든 사람으로 권면을 받게 하기 위하여 하나씩 하나씩 예언할 수 있느니라 (고전14:32) 예언하는 자들의 영이 예언하는 자들에게 제재를 받나니 - 이것은 과도기적인 선지자들이 하는 예언인데 이 과도기적인 선지자들이 하는 말을 믿을 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두 세사람이 있어야 되기 때문이다.  

(고전12:28) 하나님이 교회 중에 몇을 세우셨으니 첫째는 사도요 둘째는 선지자요(이것은 구약의 선지자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신약의 과도기적인 선지자이며, 사도보다 밑에 있다.) 셋째는 교사요 그 다음은 능력이요 그 다음은 병 고치는 은사와 서로 돕는 것과 다스리는 것과 각종 방언을 하는 것이라

(행21:8) 이튿날 떠나 가이사랴에 이르러 일곱 집사 중 하나인 전도자 빌립의 집에 들어가서 유하니라 (행21:9) 그에게 딸 넷이 있으니 처녀로 예언하는 자라 (행21:10) 여러 날 있더니 한 선지자 아가보라 (과도기적인 선지자다)하는 이가 유대로부터 내려와

(행21:4) 제자들을 찾아 거기서 이레를 머물더니 그 제자들이 성령의 감동으로 바울더러 예루살렘에 들어가지 말라 하더라 - 이것도 과도기적인 감동인데 사도바울은 예루살렘으로 들어간다.

(행20:22) 보라 이제 나는 심령에 매임을 받아 예루살렘으로 가는데 저기서 무슨 일을 만날는지 알지 못하노라 (행20:23) 오직 성령이 각 성에서 내게 증거하여 결박과 환난이 나를 기다린다 하시나 (행20:24) 나의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 증거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 바울에게도 성령이 환란이 있을 것이라고 일러주지만 결국 예루살렘으로 들어가기를 결심한다.

 이러한 과도기적인 선지자들이 성경이 완성되고 나서 모두 없어졌다.  

하나님은 당신의 뜻을 보여주실 때에 지도와 같이 세밀하게 가르쳐 주시는 것이 아니라 나침반 같이 가르쳐 주신다.  그러므로 깊이 생각하고 나침반인 성경을 보면서 해결을 받아야 된다.  "너는 지금 어느 병원에 가서 어느 약을 먹어라"라고 가르쳐 주는 것이 아니다.  

(욜2:29) 그 때에 내가 또 내 신으로 남종과 여종에게 부어 줄 것이며 (이것은 성령의 끊임없는 사역을 말함)

(욜2:30) 내가 이적(=징조)을 하늘과 땅에 베풀리니 곧 피와 불과 연기 기둥이라

(욜2:32) 누구든지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니 이는 나 여호와의 말대로 시온 산과 예루살렘(=그리스도의 교회)에서 피할 자(=남은자)가 있을 것임이요 남은 자 중에 나 여호와의 부름을 받을 자가 있을 것임이니라

(롬11:26) 그리하여 온 이스라엘이(=영적 이스라엘) 구원을 얻으리라 기록된 바 구원자가 시온에서 오사 야곱에게서 경건치 않은 것을 돌이키시겠고

3장은 스스로 읽어보면 안다.

 

지금부터는 호세아서로 들어간다.  

호세아서는 여로보암2세부터 망할 때까지의 내용인데 50년이상이다. 남 유다왕은 다 기록이 되어있다.  웃시야- 요담- 아하스- 히스기야

호세아는 북방사람인데 연대는 남쪽 유다에 대한 것만 기록하고 북 이스라엘은 생략하여 약간만 기록했다.  왜 남은 소중히 여기고 북은 소홀했는가?  여기에 호세아의 신학이 있다.  이것은 다윗의 언약속에서 메시야의 대망을 기다리며 나타난 것이기 때문이다.  (호13:11) 내가 분노하므로 네게 왕을 주고 진노하므로 폐하였노라 - 이것은 호세아서에서 대단히 중요한 기록이다.  북의 정권들은 하나님의 심판속에 있는 정권이다.  그러므로 호세아는 북에 대하여 관심이 없을 수밖에  없었다.

 (호8:4) 저희가 왕들을 세웠으나 내게서 말미암지 아니하였고 저희가 방백들을 세웠으나 나의 모르는 바며 저희가 또 그 은, 금으로 자기를 위하여 우상을 만들었나니 파멸을 이루리라

(호4:15) 이스라엘아 너는 행음하여도 유다는 죄를 범치 말아야 할 것이라 (이것은 호세아의 관심이 북에 있지아니하고 남에 있으며 메시야를 내다보는 구속사를 볼 수가 있다.  초점을 그리스도에게 맞추고 있다.)

구속사적으로 1장에 나타난 연대를 가지고 나타난 호세아의 신학을 말해보라.

(호1:2) 여호와께서 비로소 호세아로 말씀하시니라 여호와께서 호세아에게 이르시되 너는 가서 음란한 아내를 취하여 음란한 자식들을 낳으라 이 나라가 여호와를 떠나 크게 행음함이니라 - 어떻게 하나님께서 선지자에게 이렇게 말씀을 하실 수가 있었겠는가? 하나님께서 첫 번째 주신 말씀속에서 이 내용을 직접 이루어진 것이 아니고 환상으로 보는 견해가 있으나 이것은 환상으로 보기에는 너무나 어렵다.  고멜이라는 여인도 환상적이며, 고멜의 아버지의 이름이 나오므로 환상으로 보기는 어렵고 역사성을 띄고 있다.  

호세아는 하나님을 말하고 고멜은 이스라엘을 예표하고 있는 것이다.  공의는 범죄한 자는 반드시 죽으리라.  이것을 볼 때에 이스라엘이 죽지 않고 오히려 사랑을 받는 아내가 되었다고 한다면 공의가 어긋난 것이다.  공의가 사랑이 입맞추는 것은 바로 십자가다.  공의는 심판이고 사랑은 용서인데 이것은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를 통하여 이루어 진다.  아마도 호세아는 백성들에게 많은 비난을 받았겠지만 본문에서는 하나도 나타나지 않았다.  그러나 우리는 이 고난속에 있는 호세아를 보아야 한다.   이와 같이 하나님은 역설적이시다.  하나님이 우리 죄인을 사랑한다는 것은 십자가다.  참 사랑은 고통이 동반하는 것이다.  원칙적으로 사랑은 아픈 것이다.  사랑에는 많은 희생을 동반하는 것이다.  헬라에 애로스 신이 어떤 모습을 한 줄 아세요?  미인이 아니라 난장이입니다.  난쟁이가, 거기다가 활을 가지고 다녀요.  활을 가지고 다니면서 활을 쏘기만한다는 것인데 많은 사람에게 활을 쏴서 피를 흘리는 고통을 주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왜 이렇게 호세아에게 고통을 주셨는가?  그것은 "너는 나의 사람이다.  네가 많은 고통을 받아봐야 나의 메시지를 바로 전할 수가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고통을 알아야 바로 메시지를 전할 수가 있다.  진정한 십자가의 고통을 알아야 참 사랑을 전할 수가 있다.  

이스르엘-로루하마-로암미라는 자식을 낳았다.  

*이스르엘: 호세아는 이 이름을 1장과 2장에서 세가지 뜻으로 사용하였다.  1) 저주의 땅  2) 하나님께서 흩어 뿌리시리라.  3) 하나님이 심으시리라

예후의 집이 망한 다는 것은 북 이스라엘이 망한다는 것이고 그 아래에 다섯 왕이 있었지만 그것은 망하는 순서에 놓인 것이다.  

(호1:5) 그 날에 내가 이스르엘 골짜기에서 이스라엘의 활을 꺾으리라 하시니라

(호2:22) 땅은 곡식과 포도주와 기름에 응하고 또 이것들은 이스르엘(하나님이 심으시리라는 뜻의 내용)에 응하리라

이스르엘의 날이 클 것이다(=하나님이 흩어 뿌리시리라는 뜻으로 교수님은 보신다.)

 

1995. 11. 6.

 

 호세아의 신학은 북은 소홀하게 다루었지만 남은 자세하게 다루었다.  호세아가 북쪽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남을 자세히 다루었던 까닭은 유다 왕통을 통하여 이스라엘의 메시야 대망을 바랐기 때문이다.  호세아의 가족들을 환상으로 본 사람들이 많으나 고멜과 그녀의 아버지의 이름이 자세히 나오는 것을 보면 역사적인 사건으로 보아야 한다.  그러나 제사장의 아내는 끼끗한 처녀여야 하는데 음탕한 여자라고 할 때에  역사적이 아니라 환상으로 보아야 하지 않는가라고 말하지만 이것을 하나님의 십자가의 사랑으로 보아야 한다.  이스르엘은 아주 좋은 땅이었지만 나중에는 저주의 땅이 되었다.  

딸 로루하마-긍휼히 여기지 않는다.  

(호1:7) 그러나 내가 유다 족속을 긍휼히 여겨 저희 하나님 여호와로 구원하겠고 활과 칼이나 전쟁이나 말과 마병으로 구원하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 아마도 이것은 히스기야를 통하여 구원하신다는 말일 것이다.

(호1:9)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그 이름을 로암미라 하라 너희는 내 백성이 아니요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지 아니할 것임이니라 - 3번째 낳은 자식인데 아들이었다.  사도바울에 의하면 북은 이방의 맏아들이다.  이것은 북이 이방화될 것이다는 말이다.

(호1:10) 그러나 이스라엘 자손의 수가 바닷가의 모래같이 되어서 측량할 수도 없고 셀 수도 없을 것이며(=북을 통하여 아브라함의 언약이 신약에서 그리스도를 통하여 성취될 것을 말한 것이다. 즉,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하여 복을 받을 것이다"  구약은 아브라함의 언약의 성취과정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스라엘이 출애굽을 할 때에 "중다한 잡족"이 함께 나온다.  이스라엘은 혈통+잡족이므로 교회라고 한다.  구약 이스라엘의 역사를 교회의 역사라고 한다.  그러므로 구약을 구속사적으로 본다.) 전에 저희에게 이르기를 너희는 내 백성이 아니라 한 그 곳(=장소가 아니라 아닌 것을 강조한 것)에서 저희에게 이르기를 너희는 사신 하나님의 자녀라 할 것이라

(호1:11) "이에 유다 자손과 이스라엘 자손이 함께 모여 한 두목(=메시야를 뜻한다.  이 메시야를 통하여 남과 북 즉 이스라엘과 이방이 하나가 된다는 것)을 세우고 그 땅에서부터 올라오리니(=포로지에서 하나님께로 돌아온다는 말이다(공간적이고 지리적인 이동이 아니고). 이것은 교회의 성취이다.  이것은 현실적으로 예루살렘으로 올라온다는 것이 아니다.  예루살렘으로 올라온다는 것으로 잘못 알기 때문에 시온이즘과 세대주의가 나타났다.  올라온다는 것은 하나님께로 돌아온다는 회개를 의미한다.  구약의 예언의 성취는 지금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신약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러나 현재 목회자들이 이것을 설교를 할 때에 지금 이스라엘로 돌아온다고 한다.  아무리 가르쳐줘도 소용이 없다.  구속사를 모르면 그렇게 된다.  구약은 약속이고 신약은 성취다. ) 이스르엘의 날이클 것임이로다."  (= "이스르엘의 날"에 대하여 호세아가 이스르엘이라는 말을 3가지로 사용하는데, 1. 저주받은 땅이름  2. 하나님께서 흩으시리라「흩으시다」  3. 하나님이 심으시리라「심으시다」 : 여기서는 흩으시리라는 뜻으로 사용된것임.

(호2:21)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그 날(=메시야의 날)에 내가 응하리라 나는 하늘에 응하고 하늘은 땅에 응하고 (호2:22) 땅은 곡식과 포도주와 기름에 응하고 또 이것들은 이스르엘(=심으시리라)에 응하리라

(호2:15) 거기서 (=포로지)비로소 저의 포도원(=가장 좋은 기업을 상징)을 저에게 주고 아골 골짜기로 소망의 문을 삼아 주리니 저가 거기서 응대하기를(=하나님을 찬송하기를) 어렸을 때와 애굽 땅에서 올라오던 날과 같이 (=새 출애굽= 죄악 세상에서 돌아오는 것이다.)하리라

 

 신명기 26장 1-10까지를 이스라엘의 "원시 신앙 고백"이라고 한다.  이것은 하나님께 경배하기 전에 암송하는 것인데 지금도 행하고 있는 것이다.  - 시험에 나올 확률이 많으니 주의하라.  하나님께서 어떻게 우리를 구원하셨는가라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가르치신 교훈이 신앙고백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신 것이 신앙고백이 된다.  하나님이 가르치신 말씀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하신 일이 중요한 것이다.  

십계명이 왜 중요한가?  이것은 십계명 앞에 있는 내용과 같이 구속이 있었기 때문이다.  

(출20:2) 나는 너를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 낸 너의 하나님 여호와로라 (출20:3)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있게 말지니라

*우리의 신앙고백은 달라졌다.  우리의 신앙고백은 예레미야 23장 5절이하이다.  

(렘23:6) 그의 날에 유다는 구원을 얻겠고 이스라엘(=이방인을 의미함)은 평안히 거할 것이며 그 이름은 여호와 우리의 의라 일컬음을 받으리라 (렘23:7) 그러므로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보라 날이 이르리니 그들이 다시는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신 여호와의 사심으로 맹세하지 아니하고 (렘23:8) 이스라엘 집 자손을 북방 땅(=죄악 세상, 바벨론의 땅), 그 모든 쫓겨났던 나라에서 인도하여 내신 여호와의 사심으로 맹세할 것이며 그들이 자기 땅에 거하리라 하시니라

- 우리는 옛언약이 아니고 새언약을 가지고 신앙고백을 하는 것이다.

 

다시 본문으로 돌아가자.  

(호2:23) "내가 나를 위하여 이 땅(=거친들)에 심고(=우리는 예루살렘으로 돌아가지 않고 지금 있는 곳에서 심는다) 긍휼히 여김을 받지 못하였던 자를 긍휼히 여기며 내 백성 아니었던 자에게 향하여 이르기를 너는 내 백성이라 하리니 저희는 이르기를 주는 내 하나님이시라 하리라."

롬9:25-26절에서 사도바울이 이 내용을 가지고 어떻게 말을 했는지 보자고. (롬9:24) 이 그릇은 우리니 곧 유대인 중에서 뿐 아니라 이방인 중에서도 부르신 자니라 (롬9:25) 호세아 글에도 이르기를 내가 내 백성 아닌 자를 내 백성이라, 사랑치 아니한 자를 사랑한 자라 부르리라 (롬9:26) 너희는 내 백성이 아니라 한 그 곳에서 저희가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 부름을 얻으리라 함과 같으니라

호세아 22장 3절에 나오는 "이 땅"은 두 가지 뜻이 있는데 1. earth 2. land 이다.  이것을 어떻게 번역을 할 것인가?  this land가 아니라 this earth이다. NIV에는 this land로 나와 있고, King James는 this earth로 나와있다.  그러므로 킹 제임스 번역이 잘 번역이 된 것이다.  

(호3:5) 그 후에 저희가 돌아와서 그 하나님 여호와와 그 왕 다윗(=예수 그리스도를 의미)을 구하고 말일에는 경외함으로 여호와께로 와 그 은총으로 나아가리라

구약에서 이스라엘이 돌아온다는 말을 시온으로 돌아간다는 말로 이해하지 말고 하나님께로 돌아와서 회개하여 구원을 받는다는 구약의 예언이 신약에서 성취된다는 것으로 이해하라.  이것은 반드시 시험에 나온다. 

(롬11:25) 형제들아 너희가 스스로 지혜 있다 함을 면키 위하여 이 비밀을 너희가 모르기를 내가 원치 아니하노니 이 비밀은 이방인의 충만한 수가 들어오기까지 이스라엘(=혈통적인 이스라엘)의 더러는 완악하게 된 것이라 (롬11:26) 그리하여 온 이스라엘(= 혈통적이고 영적인 이스라엘, 유대+이방인인 택한 백성모두를 의미한다.)이 구원을 얻으리라 기록된 바 구원자가 시온에서 오사 야곱에게서 경건치 않은 것을 돌이키시겠고

시오니즘과 우리, 세대주이와 우리를 단절할려고 이 말을 할려는 것이댜.  왜냐하면  우리나라에서는 세대주의를 통하여 너무 많이 영향을 받고 있거든.

(호2:2) 너희(= 선지서에서는 이 대명사가 대단히 어려운데 여기에서 고멜을 상징하는 공통체적인 이스라엘 백성을 말한다.)어미와 쟁론하고 쟁론하라(=법정에서 쓰는 법적인 용어이다.  판결하기 위하여 검사와 변호사가 논쟁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쟁론이라는 것은 무죄를 선고받을 수 있는 가능성이 있는 단어이다.) 저는 내 아내가 아니요 나는 저의 남편이 아니라 저로 그 얼굴에서 음란을 제하게 하고 그 유방 사이에서 음행을 제하게 하라 (얼굴-재앙의 표현, 유방-죄악의 숨은 죄)  

(호2:5) 저희의 어미는 행음하였고 저희를 배었던 자가 부끄러운 일을 행하였나니 대저 저가 이르기를 나는 나를(=여기에서 나는 이스라엘을 의미한다.) 연애하는 자들을(=바알을 의미함. 여로보암 2세가 바알을 끌여들였다.  북이스라엘은 바알을 끌여들여서 망했다.  바알을 끌여들인 것은 베니게를 통하여 도움을 받기 위함이었다.) 따르리니 저희가 내 떡과 내 물과 내 양털과 내 삼과 내 기름과 내 술들을 내게 준다( =여기에서 내라는 말은 우상을 섬기는 것은 언제든지 이기심이다.  그러므로 탐심은 곧 우상숭배라고 하였다.) 하였느니라

 열왕들의 역사를 4권으로 쓴 것이 나왔다.  - 「김 홍 전」 언약교회를 시무하고 있음.  이 책은 여러분들에게 대단히 도움이 될 것이다.  거이 독학으로 공부하여 리치몬드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그런데 아쉬운 것이 하나 있었다.  그것은 베니게가 그의 책에서 하나도 안나오는데 베니게를 전혀 모른다는 것이다.  열왕들에 대하여 설교를 할려면 이 책들이 대단이 도움이 된다.  여기에 여러분은 베니게를 삽입을 시키라.  

(호2:7) 저가 그 연애하는 자를 따라 갈지라도 미치지 못하며 저희를 찾을지라도 만나지 못할 것이라 (=하나님께서 길을 막는데 이 징계도 하나님의 사랑이다.)그제야 저가 이르기를 내가 본남편에게로 돌아가리니 그 때의 내 형편이 지금보다 나았음이라 하리라 (=하나님의 심판은 남은 자를 구원하시고 구원받을 수 없는 자는 더욱 더 완악해져서 심판을 받는다.)

(호2:8) 곡식과 새 포도주와 기름은 내가 저에게 준 것이요 저희가 바알을 위하여 쓴 은과 금도 내가 저에게 더하여 준 것이어늘 저가 알지(=히브리어에서는 '아니"라는 말이 강조되고 있다.) 못하도다  -  설교하는 사람은 강조하는 것을 조심하고 주의깊게 살펴서 묵상하여 설교하여야 한다.  "그러므로"라는 단어가 2장에 3번이나 나온다.  

9절에나오는 "나"는 하나님을 가르킨다.  신약에 나오는 부자가 큰 곡간을 지어놓고 "내 영혼아 평안히 먹고 마시고...."라는 내용이 나오는데 모든 것은 사람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것임을 밝히 가르쳐 주시는 것이다.  

(호2:10) 이제 내가 그 수치를 그 연애하는 자의 눈 앞에 드러내리니 저를 내 손에서 건져낼 사람이 없으리라 - 하나님의 심판을 가르치다.

2장 5절의 "따라간다"와 8절의 "알지 못한다"라는 술어동사를 주의하라.

 

1995. 11. 13.

 

 1:10-11,. 2: 14-15, 21-23을 성경에 박스를 쳐놓아라.  이 구절들을 여러분이 아주 명심해서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다시 한 번 정리해 드립니다.  여기에서 하나님께서 호세아에게 아들을 낳으니 이스르엘이라 했습니다.  딸을 낳으니 로르하마, 아들을 낳으니 로암미라했는데 네가 이스르엘처럼 멸망한 것처럼 너희가 멸망할 것이라.  북은 멸망할 것이나 유다족속은 건지리라.

(호3:5) 그 후에 저희가 돌아와서 그 하나님 여호와와 그 왕 다윗(=메시야)을 구하고 말일에는 경외함으로 여호와께로 와 그 은총으로 나아가리라

남쪽이 구원받아 북에도 큰 소망이 되는 것은 메시야가 남에 태어나서 북도 구원을 받게 되기 때문이다.  아브라함에게 언약을 맺으실 때에 아브라함의 언약에 액센트가 있는 것은 "모든 족속이 너로 인하여 복을 받을 것임이라."이것은 신약에서 메시야를 통하여 성취된다.  다윗의 언약은 아브라함의 언약에 대한 계승이다.  유다자손과 이스라엘자손이 함께모인다는 것은 모든 백성을 말한다.  유다자손은 순수한 이스라엘 사람을 가리키고 이스라엘 자손은 이방인을 가리킨다.  그러므로 모든 백성이 구원을 받는 다는 것이다.  이스르엘이 영화로와 질것이라는 말에 이스르엘은 바로 우리 모든 사람들도 포함이 된다는 것이다.  이것이 구약의 구속사적인 내용이야.  이것이 공동체적인 이야기야.  

(호2:14) 그러므로(6, 9, 14절에 그러므로가 4회나온다.  첫 번 그러므로는 네가 연애하는 자 바알신을 따라간다.  그러므로 네가 형통하지 못한다.  6절의 그러므로는 내가 너희에게 먹을 것을 주었으나 너희들이 내가 준것인줄 알지 못한다.  그러므로 내가 모든 것을 빼앗아 모든 것을 네게서 없애버려 징벌하겠다는 내용이고 14절은 위의 모든 것을 포함한 그러므로다.  성경에 그러므로는 두가지가 잇다.  접속사 그러므로가 있고 위의 모든 것을 포함한 폭히 큰 그러므로가 있다.) 내가(=히브리 말에는 내가라는 말에 액센트가 있다.  히브리어에는 동사나 술어에 주어가 포함되어 있으나 독립적으로 주어가 나오는 경우는 대단히 중요한 액센트가 있는 내용이다.) 저를 개유(=양떼나 소떼를 문을 열어 내놓는 것을 의미)하여 거친 들(=포로지 즉 앗수르나라)로 데리고 가서 말로 위로하고(=마음의 말로하고-구약의 선지자들에게 계시를 주실 때에 to..라고 하지만 대부분  in him이라고 한다.  번역을 할 때에는 누구누구에게 라고 번역을 한다.  선지자시대에는 다른 일반사람들에게 말하지 않고 선지자를 통하여 말한다.)   (호2:15) 거기서(=포로지) 비로소 저의 포도원(=기업을 주는데 가장 좋은 포도원이다.  원래 이스라엘의 기업은 가나안인데 이제 거친 들에서 기업을 받는다.  그러므로 남쪽은 돌아갔지만 북은 영원히 돌아가지 않는다.)을 저에게(=이스라엘) 주고 아골 골짜기로 소망의 문을 삼아 주리니 저가 거기서(=거친들) 응대(=구속에 대한 응답으로 감사하며 노래하는 것)하기를 어렸을 때와 애굽 땅에서 올라오던 날(=하나님께 돌온다)과 같이 하리라(=출애굽시 미리암과 이스라엘사람들이 거친들에서 감사를 했다.  이것은 구약이 아니고 신약이다.  제2출애굽, 즉 제2구속을 말하는 것이다.  이것이 신약적인 약속이다.  그러니까 거친 들에서 포도원을 기업으로 주겠다는 것은 이스르엘, 이방인을 포함한 이스라엘에게 주겠다는 것이다.  이것은 흩어진 이스라엘 뿐아니라 이방인을 포함한 것인데 여기에 근거한 내용이 롬9:25-26이야.  여기에서 사도바울이 이방구속에 대한 말씀을 하고 있는 것이야.  구속사적인 바울의 성경관이야. - "(롬9:24) 이 그릇은 우리니 곧 유대인 중에서 뿐 아니라 이방인 중에서도 부르신 자니라 (롬9:25) 호세아 글에도 이르기를 내가 내 백성 아닌 자를 내 백성이라, 사랑치 아니한 자를 사랑한 자라 부르리라."  구약의 역사를 구속사적으로 보아야 하는 것이야.  구속사를 공부하는 사람들은 바로 이점을 봐야 하는 것이야.  이스라엘이 출애굽을 할 때에 모든 잡족들도 나오는데 우리는 바로 이 잡족에 속한다.  이것이 바로 잡족신학이야.  그러므로 이것을 광야교회라고해.  스데반이 이것을 가리쳐서 광야교회라고 했다.  

이스라엘이 팔레스틴으로 돌아간다는 것을 사람들은 하나님의 약속이 이루어지는 것이라고 하는데 그것은 소위 시오니즘이라고 하는 세속적인 것이고 돌아간다고 하는 것은 바로 하나님께로 영적으로 이스라엘 즉 이방인이 돌아온다는 것이다.  

(호2:21)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그 날에(=메시야의 날, 은혜의 날) 내가 응하리라 나는 하늘에 응하고 하늘은 땅에 응하고 (호2:22) 땅은 곡식과 포도주와 기름에 응하고 또 이것들은 이스르엘(=여기에서 이스르엘은 흩어진다는 뜻이 아니고 심는다는 의미야.  심어진 곡식에 비를 주신 다는 것이야.)에 응하리라 (호2:23) 내가 나를 위하여 이 땅에 심고 긍휼히 여김을 받지 못하였던 자를 긍휼히 여기며 내 백성 아니었던 자에게 향하여 이르기를 너는 내 백성이라 하리니 저희는(=이스라엘 + 이방인=영적 이스라엘) 이르기를 주는 내 하나님이시라 하리라

언약이란

1. 현재성 - 영원한 오늘이다. everlasting today

2. 영원성- 여기, 지금이다.hear and now

3. 복수성- 아브라함이나 야곱에게 언약을 세웠지만 우리라는 복수를 사용한다.  

1:10-11, 2:15, 2:21-23 깊은 뜻을 파악하고 기억하라. - 사도 바울은 롬9:25과 26절에 이방인  구원은 바로 영적 구원으로 보았다.  호세아서를 문자적으로 보면 대단히 위험하다.  영적으로 보아라.  그러므로 사도바울은 이방구원에 관하여 호세아서를 해석하였다.   성경에 박스를 쳐놓으라.  여러 선지서를 읽는데 도움이 된다.  결코 다윗과 이스라엘 사람에게 맺으신 언약은 이스라엘 사람과만 맺은 언약이 아니고 이방 잡족과도 맺으신 언약이다.  이사야 19:23-25을 참조하라.

(사19:23) 그 날에(=메시야의 날에) 애굽에서 앗수르로 통하는 대로가 있어 앗수르 사람은 애굽으로 가겠고 애굽 사람은 앗수르로 갈 것이며 애굽 사람이 앗수르 사람과 함께 경배하리라 (사19:24) 그 날에 이스라엘이 애굽과 앗수르로 더불어 셋이 세계 중에 복이 되리니 (사19:25) 이는 만군의 여호와께서 복을 주어 가라사대 나의 백성 애굽이여, 나의 손으로 지은 앗수르여, 나의 산업 이스라엘이여, 복이 있을지어다 하실 것임이니라 - 이것은 영적인 이스라엘을 의미하는 것이므로 꼭 기억하라.

 구약의 말씀을 모두 영적으로 이해하라.

(암9:9) 내가 명령하여 이스라엘 족속을 만국 중에 체질하기를 곡식을 체질함같이 하려니와 그 한 알갱이도(=남은 자) 땅에 떨어지지 아니하리라 (암9:10) 내 백성 중에서 말하기를 화가 우리에게 미치지 아니하며 임하지 아니하리라 하는 모든 죄인은 칼에 죽으리라 (암9:11) 그 날에(=메시야가 오시는 때에) 내가 다윗의 무너진 천막을 일으키고 그 틈을 막으며(=완전한 회복) 그 퇴락한 것을 일으키고 옛적과 같이 세우고 (암9:12) 저희로 에돔의 남은 자와 내 이름으로 일컫는 만국을 기업으로 얻게 하리라 이는 이를 행하시는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이 말씀을 사도 바울이 인용을 한다.  

(행15:17) 이는 그 남은 사람들(=에돔의 남은 자가 아니라 이제는 남은 모든 사람을 가리킨다)과 내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모든 이방인들로 주를 찾게 하려 함이라 하셨으니

성경에서 기업을 주신다고 하는 것은 땅을 주신다는 것이 아니고 그곳에 대한 선교의 사명을 말하는 것이다.  왜 하나님께서 많은 땅이 있는데 왜 가나안을 이스라엘 자손에게 주었는가?  그 이유는 가나안에 많은 족속이 있었기 때문이고, 그 지역이 동서양 민족의 중심지이기 때문에 아브라함에게 주셨던 약속인 "너로 인하여 모든 민족이 복을 얻을 것이라"고 하는 말씀을 성취하시기 위한 것이다.  

 

 

 

1995. 11. 23

 

오늘이 총정리 시간이니까 중요합니다.  시험을 잘 칠려면 앞으로 나오세요.  

조금 강의를 하고 뒤에서 정리를 해주겠습니다.  호세아서를 펴세요.  

호세아 1-3장까지 신학과 연관되는 것을 강의했다.  아브라함의 언약을 구속사적으로 보아야 한다.  모든 민족이 너로 인하여 복을 받을 것이다라는 말씀을 바로 이방민족까지 포함하는 것으로 "모든 족속"이라는 단어에 액센트를 주는 것이다.  아브람이 아브라함으로 바뀐것도 바로 이러한 견지에서 된 것이다.  우리는 성경을 이러한 견지에서 보아나아가야 한다.  스데반이 광야교회라고 말을 했는데 이것을 구속사적으로 본 것이다.  성경을 구속사적으로 보지 아니하면 쓸모가 없다.  구약에서 그리스도와 그 교회를 발견해야 한다.  루터와 칼빈은 구약에서 그리스도와 그 교회를 발견하게 되는 것은 더할 수 없는 기쁨이라고 했다.  

이제 호세아 3장을 보자.

(호3:1)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이스라엘 자손이 다른 신을 섬기고 건포도 떡을 즐길지라도 여호와가 저희를 사랑하나니(=사랑하는 것같이) 너는 또(=그리고의 뜻이 아니라 고멜의 음란을 말하는 계속성을 지칭한다.) 가서 타인에게 연애를 받아 음부된 그 여인을 사랑하라 하시기로

게세니우스의 사전-히브리어 사전으로서 원어적으로 성경을 깊이 보고자하는 사람들이 봐야함.

(호3:2) 내가 은 열다섯 개(=15세겔, 앞에 은이라는 단어가 붙으면 세겔이라는 단어가 붙지 않는다.  이것은 한 여인의 하급의 가치없는 가격이다.  )와 보리 한 호멜 반으로 나를 위하여 저를 사고 (호3:3) 저에게 이르기를 너는 많은 날 동안 나와 함께 지내고 (=이것은 나를 향하여 있고의 뜻이다.  몸은 떨어져 있어도 마음은 나를 바라보는 것이다.  고멜을 사서 같이 사는 것이 아니라 회개기간을 주고 서로 떨어져 사는 것이다.  이것은 하나의 모형적인 비유이다.  이스라엘 사람들을 멀리 포로로 보내서 하나님만을 바라보고 살게 하신다는 것이다.) 행음하지 말며 다른 남자를 좇지 말라 나도 네게 그리하리라 하였노라

(호3:4) 이스라엘 자손들이 많은 날 동안 왕도 없고 군도 없고 제사도 없고 주상도 없고 에봇도 없고 드라빔도 없이 지내다가 (호3:5) 그 후에 저희가 돌아와서 (=가나안으로 돌아온 것이 아니라 마음의 회개상태를 말하는 것이다.  공간적인 위치가 아니다. )그 하나님 여호와와 그 왕 다윗(=메시야)을 구하고 말일에는 경외함으로 여호와께로 와 그 은총으로 나아가리라 (=이방구원과 연결이 되는 것이다.  이것을 영해라고 하는데 알레고리해석이 아니고 영적인 해석이라는 것이다.  즉 모형적인 것이다.  예를 들자면 구리뱀을 든 것은 예수그리스도의 모형이다.)

(호3:5) 그 후에 저희가(=영적 이스라엘) 돌아와서 그 하나님 여호와와 그 왕 다윗을 구하고 말일에는 경외함으로 여호와께로 와 그 은총으로 나아가리라

4-14장까지는 이스라엘 사람들이 큰 징계를 받아 포로생활 하는 것에 대한 이유가 나오는 것이다.  첫째 중요한 것이 4장 1절에 내 백성이 지식이 없어서 망한다는 것이야.  지식이라는 단어는  이다.  아모스 3장2절 "알았나니"-선택을 말하는 것이다.  창18장 19절-"그를 택하였나니", 사42: 1-"나의 택한 사람을 보라"  솔로몬의 이름 여디디야라는 이름은 바로 에서 온 것이다.  즉 이것은 선택이라는 말이다.  혈통으로 시작하지만 영적이스라엘은 선택으로 이루어지는 것이야.  언약의 성취는 혈통이 아니라 선택이야.  

(호4:6) 내 백성이 지식이 없으므로 망하는도다 네가 (=제사장들을 말함)지식을 버렸으니 나도 너를 버려 내 제사장이 되지 못하게 할 것이요 네가 네 하나님의 율법을 잊었으니 나도 네 자녀들(=제사장의 자녀들)을 잊어버리리라 - 백성들이 지식이 없는 것은 제사장의 책임이 크다.  그러므로 신6장의 쉐마장(=가르침)이 중요하다.  (호5:4) 저희의 행위가 저희로 자기 하나님에게 돌아가지 못하게 하나니 이는 음란한 마음이 그 속에 있어 여호와를 알지 못하는 까닭이라

(호6:1)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여호와께서 우리를 찢으셨으나 도로 낫게 하실 것이요 우리를 치셨으나 싸매어 주실 것임이라 (호6:2) 여호와께서 이틀 후에 우리를 살리시며 제 삼 일에 우리를 일으키시리니 우리가 그 앞에서 살리라 :"이틀, 삼일"-이것은 참을 수 있는 기한이다.

칼빈은 그리스도의 부활은 우리의 생애의 거울이라고 했다.  우리들의 얼굴을 그리스도의 부활 앞에서 단장해야 한다.  "제 삼일에 우리를 살리시리니"라는 말씀을 가지고 세대주의자들이 단적으로 생각한다.  세대주의 자들은 한 때, 두 때, 세 때라고 하는 것을 가리켜 한 때는 곧 1,000년이요, 구약이며, 두 때는 신약을 가리키며 세 때는 천년왕국을 말한다고 한다.  

그에게 돌아가서 힘써 알아야 한다.  (호6:6) 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며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노라

한글 성경을 하나 수정할 것이 있다.  

(호8:1) 나팔을 네 입에 댈지어다 대적이 독수리처럼 여호와의 집(=이것은 무조건 성전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공동체"를 말하는 것이다.)에 덮치리니 이는 무리가 내 언약을 어기며 내 율법을 범함이로다

유월절 양을 먹고 그것을 집 밖으로 내지 말라.에서 이것도 역시 공동체를 의미한다.

(호6:10) 내가 이스라엘 집(=이스라엘의 공동체)에서 가증한 일을 보았나니 거기서 에브라임은 행음하였고 이스라엘은 더럽혔느니라

(슥2:7) 바벨론 성에 거하는 시온아(=이것은 "건물"이 아니라 사람을 가리친다) 이제 너는 피할지니라

이와 같이 성경을 문자적으로 보지 말라.  

 

(호8:2) 저희가 장차 내게 부르짖기를 나의 하나님이여 우리 이스라엘이 주를 아나이다 (=소용이 없는 것은 벌써 지나갔기 때문이다.  아는 것도 때가 있는 것이다.)하리라

(호6:6) 나는 인애를(=이 '인애'라는 말은 '-하나님의 심히 폭좁은 사랑'을 말한다.즉 특별히 택한 백성에게 배푸는 특수한 사랑)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며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노라 :  이 를 몇가지로 번역이 되는데, mercies, steadfas love, grace, faithfullness, piety, kindness, royalty.  이 중에서 steadfas love, faithfullness, piety, royalty.를 돌려드려야 된다.  

(호6:7) 저희는 아담처럼 언약을 어기고 거기서 내게 패역을 행하였느니라  - 이것과 관계해서,

 (수3:16) 곧 위에서부터 흘러내리던 물이 그쳐서 심히 멀리 사르단에 가까운 아담 읍 변방에 일어나   - 이것을 볼 때에 아담은 사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장소를 가리키는 것이 아닌가?  

(호6:10) 내가 이스라엘 집=공동체

유다와 대립된 백성은?  영적 이스라엘이다.  

시험은 이렇게 칩니다.  특별히 소선지서를 읽기 위해서는 구약의 역사를 알아야해.  구약의 역사를 설명하는데 여로보암 1세의 3대정책과 그 아들 나답 그리고 유다의 가문이 계속 전투기록이야.  그리고 마침내 나답이 혁명으로 죽고 바아사가 나타나고 유다는 아사왕이 나타나고 그들은 계속 전투하고 아사가 승리하고,  아사왕은 다메섹을 끌여들여 전쟁에 승리하였지만 발에 병이 들어 죽고, 엘라가 1년후 주고, 시므리가 죽고, 오므리가 등국, 그리고 오므리의 아들 아합과 남의 여호사밧과 화해를 하고, 여호사밧은 베니게의 영향을 받고, 아합의 두 아들 요아스, 요람이 다 예후에게 죽고, 여호사밧의 아들 요람이 죽은 후에 아달랴가 통치, 여호야다가 반정을 하고 요아스가 왕이 되고, 이 때에 요엘 선지자가 나타난다.  예후의 셋째 손자인 여로보암 2세가 나타나는데 강성한 이유는 구원자가 왔기 때문이다.  그것은 앗수르이다.  요엘서, 호세아서 오늘 배운데 까지.  

출처 : | 글쓴이 : 주오시리 | 원글보기

출처 : 열두 광주리
글쓴이 : 송아지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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