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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신학과 철학과의 관계

하나님아들 2018. 8. 15. 14:36

 

신학과 철학의 관계

토마스 아퀴나스를 통해 본 신학과 철학의 관계

서론

현대는 이른바 포스트모더니즘 시대라고 말한다. 그러나 포스트 모더니즘의 시대로 현실을 정의 내리기까지 인류는 수많은 이론과 관념 속에서 논쟁하고 고뇌하고 사고하며 시간의 흐름 속에서 진행되어왔다.

하나님의 본성에 대한 교부들의 분석에 현저한 영향을 끼쳤던 고전적 그리스 철학이 있었고 토마스 아퀴나스의 하나님 존재에 대한 논증에 영향을 미친 아리스토텔레스의 이론이 있었으며, 헤겔로부터 19세기 일부 작가들의 기독론이 발전하는 등 철학적 제계가 신학의 발전 안에서 하나의 자원이 되었고 루터와 칼빈등의 종교 개혁 후 계몽주의와 낭만주의 합리주의 그리고 모더니즘과 현대의 삶을 정의하는 포스트 모더니즘까지 그렇게 수많은 학설과 이론과 철학과 그리고 신학이 인류의 삶 속에서 공존해왔다.

신학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해석이다. 그러나 지금까지 신학은 추상적 원리가 아니고 철학, 과학, 역사, 문학의 사고와 언어의 영역 속에 들어와 존재한다. 그렇기 때문에 신학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인간의 응답으로 유비적 성격을 가진 바, 즉 언어와 논리의 형태를 취한다. 신학은 그 언어와 논리에 있어서 절대적, 독립적이 아니며 일반적, 학문적 언어와 논리를 사용한다. 이런 면에서 신학은 독백이 될 수 없다. 즉 다른 학문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면서 동의 대립, 종함, 이용, 변혁의 방법을 통하여 신학 자체의 정당성과 가치를 옹호하고 견고케 하고 발전 시켰다.

[1] 그렇다면 구체적으로 신학은 학문 그 중에서도 철학과 어떠한 관계를 가지면서 정립되었는지 이에 관해 질문을 던지지 않을 수 없다. 하여 필자는 본 고를 통해 철학과 신학의 관계와 두 학문이 지향해야 할 모습을 고찰해보고 또한 그를 위해 철학과 신학의 관계의 예를 보여줄 수 있는 수많은 신학자들이 있지만 지면과 참고 문헌의 어려움을 이야기 하지 않을 수 없으므로 본 고의 범위 내에서 아리스토텔레스의 주석가로 알려진말없는 황소토마스아퀴나스에 집중할 것이고 그를 심층 분석하여 본 고의 주제인 철학과 신학의 관계를 연구해보기로 한다.

본론

하나. 신학과 철학의 여러 가지 관계유형

철학은 만물을 존재케 하는 긍극적 진리나 원리가 무엇인가를 추구하는 학문이다. 비록 터툴리안(Terulianus)은 “아테네가 예루살렘과 무슨 상관이 있는가? 아카데미가 교회와 무슨 상관이 있는가?”라고 문제를 제기하였지만 이미 교부 시대부터 플라톤의 이데아 이념이 하나님을 형이상학적 구도에서 설명하기 위한 도구로 채용되었듯이 기독교 신학은 지난 2천년 역사 안에서 끊임없이 철학과의 대화를 통해서 하나님과 그의 계시를 명확히 하고 심화시키려고 노력하였다.

비록 철학이 이 세상에 대한 어떤 대답을 주는 진리라고 명확히 말할 수는 없지만 대답을 찾아가는 과정에 대한 성찰이라는 점에서 신학에 있어서 필수적이며, 이 세상에 대한 대답을 하나님에게서 제시하는 기독교의 사유과정이 얼마나 보편적 진리인지 그에 대한 검증 또한 철학적 사고 안에서 검토될 수 있는 것이다. 즉 신학과 철학은 분명한 어떠한 관계성 안에서 공존하고 서로에게 영향을 주며 인류의 발전과 발걸음을 함께 해왔던 것이다.

역사적으로 볼 때 신학과 철학의 관계는 크게 네 가지 유형으로 분류할 수 있다. 첫째로는 신학과 철학은 전혀 어떤 관계도 없다는 유형이다. 즉 신학은 철학으로부터 분리되어 대립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 예로 터툴리안(Tertullian, 주 후 160~230)아테네와 예루살렘 사이에 무슨 공통점이 있는가? 아카데미와 교회 사이에 무슨 공통점이 있는가?” 라고 함으로써 그리스도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계시에 대해서는 신앙만이 의미가 있는 것으로 주장하였다.

그는 철학이 기독교 신학에 아무것도 공헌하지 못하는 것으로 간주한다. 이 견해는 중세 시대에 아베로에스주의자들(Averroists)의 사상 속에서 나타났는데, 그들은 실제로 이중의 진리가 있다는 개념, 즉 신학의 진리와 철학의 진리는 두 가지 전혀 다른 분리된 문제들이라고 가르쳤다.[2] 또한 마틴 루터는 토마스 아퀴나스의 스콜라주의적인 가톨릭 철학에 반대하면서 철학을 부인하는 경향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하나님께서 지명한대로, 철학을 자기의 한계 내에 남아 있게 하고 우리는 철학을 희극의 한 배역과 같이 이용하자고 말한다. 또한 바르트는 주장하기를 신학자와 철학자는 다같이 유일하고도 전체적인 진리를 대상으로 하지만 인식 작업의 순서에 있어서는 전혀 그 길이 다르다고 한다. 즉 신학자의 경우는 창조주에서 피조물에게로 하나님에게서 인간에게로의 위에서 아래로의 접근 방법을 취하지만, 철학자의 경우는 피조물에서 창조주에게로 인간에게서 하나님에게로 아래에서 위로의 접근 방법을 취한다는 것이다.[3]

두 번째로 역사 속에 나타난 입장은 신학과 철학을 동일화 하는 입장이다. 2세기의 변증 가 유스티누스는 플라톤 철학을 적용하여기독교야말로 유일하게 확실하고 유일한 철학이라고 하였고 초대 교부들은 대부분이 이러한 입장을 취했다. 교부들은 신앙 자체를 철학의 위치에 놓고 신앙을 지혜의 진정한 모습이라 해석한다. 교부들은 기독교 교리를 참 철학으로 파악한다.[4] 아리스티데스는 스스로를기독교 철학자로 소개했고 클레센스는자연 이성이 신앙 속으로 이식되어 참 감람 나무 뿌리의 진액을 함께 받는 자가 되었다라고 말하며 자연 이성도 하나님의 빛이므로 하나님은 이 이성을 통하여 철학자들을 진리를 향하여 인도하고 계셨다고 말한다. 또한 근대에 이르러 헤겔은 신학과 철학은 신이라는 동일 대상을 다루기 때문에 그 내용에 있어서도 동일하다고 보았고 20세기 신학자 파울 틸리히는 신학과 철학은 로고스라는 동일한 대상을 가지고 있어서 내용적으로도 일치한다고 하였다.

세 번째 유형은 신학을 철학 보다 위에 두는 유형이다. 중세의 토마스 아퀴나스에 의하면 자연과 초자연 사이, 철학과 신학 사이에는 어떠한 대립이나 모습이 있는 것이 아니라 초자연적 은혜가 인간의 본성을 성취한다. 따라서 철학적인 학과들은 신학에 의해서 보완 혹은 고양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감각적으로 경험할 수 없어 인과성을 따라 인식할 수 없는 초자연적인 것은 신앙의 빛에 조명을 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절차를 받아들인 아퀴나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생각을 따라 하나님을 인식하려면 이성의 본질적인 제한을 원칙적으로 넘어서야 한다고 했다. 그에 따르면 철학은자연적 이성의 빛’; 에 의해서 그러나 신학은신의 계시의 빛에 의해서 진리를 인식하기 때문에 철학과 신학이 나누어지는 것이다. 또한 아리스토텔레스의 본질-우연의 형이상학이 성찬에서의 그리스도의 실제적인 현존과 같은 어떤 핵심적인 교리들을 형성하기 위한 토대가 되듯이 신학은 때때로 철학에 의하여 확증되기도 한다.

네 번째 유형은 철학을 신학보다 위에 두는 입장이다. 즉 신학은 철학에 의하여 판단될 수도 있다고 생각하며 신학이 받아들여지기 위해서는 철학에 의하여 입증되어야 한다는 논리적인 새로운 개념이 나타난 것이다. 계몽주의 시대에 있어서는 이성의 자율의 원리가 강조되어 자연적 이성과 계시의 관계 철학과 신학의 관계가 역전되었다. 그 결과 이성이 계시를 판단하는 권위를 갖게 되었다. 즉 철학에 의한 자연적 신인식이 신학의 상위에 위치하는 개념이 되었던 것이다. 이처럼 철학을 신학의 위에 두는 경향은 이신론이나 칸트의 이론 속에서 더욱 구체화되었다

물론 저자는 크게 네 가지 유형으로 나누어 본 고를 진행하고 있지만 신학과 철학의 관계는 이상과 같은 유형들에만 국한시킬 수 없는 것이다. 신학과 철학 사이에는 단순한 융합이나 대립 또는 어느 쪽의 의존 상태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신학과 철학은 각기 독립적으로 존재하면서도 서로 긴밀하게 얽혀 있어서 서로에게 깊은 영향을 주고 있는 것이다. 다음 본론에서는 철학이 신학에 어떠한 영향을 주었는지 구체적인 답을 구하기 전에 본 고의 논지를 증명하기 위한 예인 토마스 아퀴나스를 먼저 간략히 연구해보고 논지를 진행하도록 한다.

. 토마스 아퀴나스와 철학이 신학에 미친 영향

토마스 아퀴나스는 이태리 남부의 아퀴노라는 마을 근처에서 1225년경에 귀족의 아들로 태어났다. 뛰어난 지적인 성숙을 보였던 토마스는 이미 14세에 인근 나폴리 대학에 입학하였고 이 대학에서 다른 많은 대학에서 금지되어 있던 아리스토텔레스를 정식 교과목으로 채택하여 가르치고 있었기에 토마스는 자신의 학문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게 될 이 철학자를 먼저 접하여 배울 기회를 가졌다. 그는 13세기 스콜라 주의 신학자들 가운데 가장 위대한 인물이며 신학과 철학 양 방면에 걸쳐 명성을 떨쳤다.[5]

13세기의 가장 큰 문제는 당시에 재발견된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상을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 문제였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이론에 아랍 주석 가들이 해설을 붙여놓으면서 세계의 영원성과 모든 사람을 대신하는 한 사람의 지식인 의 존재와 같은, 반 기독교적 견해들이 문제가 되어 어떤 신학자들은 아리스토텔레스를 전면 배격함으로 대응하였고 어떤 신학자들은 철학에서 참인 것이 신학에서도 반드시 참이라는 보장이 없다고 주장하면서 비판하지 않는 자세를 취하기도 하였다.

이들과는 달리 아퀴나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상 가운데 받아들여야 한다고 판단이 선 것은 받아들여 적용하였고 부적절하거나 그릇 되다고 판단되는 것들은 개정하였다. 그는 모든 진리는 다 하나님께로부터 나오기 때문에 진리는 하나라고 생각했다. 세계의 영원성에 관해서 아퀴나스는 이성으로 세계의 영원함을 증명할 수는 없지만 세계가 시작이 있었고 끝이 있을 것이라는 사실이 계시에 의해 알려진다고 주장하였다. 개인의 불멸성에 관해서 아퀴나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심리학을 발전시켜 인간이 어떻게 형상과 질료로 구성된 단 일체이면서도 그의 형상이 비 질료적이고 따라서 불면한다를 논증했다.

[6] 여기서 보면 토마스 아퀴나스는 존재를 더욱 더 해명하기 위해 질료와 형상 인과관계와 목적 이라는 개념들로 되어 있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네 가지의 실체의 원리를 이어 받은 것이다. 그 밖에도 플라톤적 아우쿠스티누스적인 사고로부터 원형이라는 개념도 이어받았다. 토마스가 자기 자신의 체계를 수립함에 있어서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을 이용했다는 것은 개혁 반대주의자의 행동과는 너무나 다른 것이다. 그는 금기 시 되던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을 이용함으로써 그리스도교 사상에 더할 수 없는 공헌을 한 것이다.

그는신학대전에서 신의 존재에 관한 다섯 가지 증명들 또는 그가 부른 대로 표기한다면다섯 가지의 길들을 제시했다. 신의 존재에 관한 아퀴나스의 다섯 가지 논증을 포함한 전통적인 증명들은 오늘날 종교 철학에서 언급되고 있는 바의 표현을 쓴다면 무엇보다도 잠세태의 현실화 라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운동 개념에 의존하고 있었다.

아퀴나스의 신 존재 증명의 첫 번째 방식은 결론적으로 순수 현실태에 이른 존재의 우선성을 드러내 주고 있다. 이 존재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최초의 부동의 동자와 유사하며 사실상 아퀴나스는 적어도 순수 현실태의 존재를 위한 아리스토텔레스의 논증을 채택한 것이다. 그뿐 아니라 아퀴나스의 신 존재 증명의 두 번째 방식은 아리스토텔레스보다 더욱 앞서 나아갔다고 볼 수 있다[7].

육중한 몸집으로 인해말없는 황소라는 별명이 있었으나 훗날 연구 영역 면에서나 규모 면에서 방대하기 만한 그의 저술들로 인해천사 같은 학자라는 칭호를 받았던 토마스 아퀴나스, 그의 영향력이 너무나 크기 때문에 최근 그는 가톨릭 교회의만물 박사로 불려 왔다. 아퀴나스의 독특성은 자기 나름의 어떤 새 안목을 가지고 있다는 점보다는 그 이전까지의 사유에 대한 탁월한 종합을 수립해낸 그의 능력에 있다. 그의 사상은 성경의 가르침과 교회의 전통 그리고 철학, 특별히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을 종합한 것이라 볼 수 있다.[8]

비단 토마스 아퀴나스만이 철학의 영향을 받은 것은 아니다. 그리스도교의 신학의 터전을 놓았다는 아우그스티누스의 신학은 플라톤의 철학을 그 바탕으로 하여 이루어졌으며 유한과 무한의 단절을 제시한 칸트의 철학은 바르트를 비롯한 프로테스탄트의 신학을 세우는 밑바탕이 되었고 하이데거의 실존론적 분석은 불트만의 성서 해석의 가능 근거가 되었다. 희망의 신학은 에른스트 블로프의희망의 원리에 뿌리 박고 있으며 화이트 헤드의 과정 철학은 과정 신학의 기초가 되었다. 또한 틸리히의 신학은철학적 신학이라고 부를 만큼 신학을 철학화 하고 있다. 이 모든 것은 철학과 신학이 밀접한 관계가 있으며 커다란 영향을 주는 관계임을 증명하고 있다.

결론

지금까지 본 고를 통해 철학과 신학의 관계와 영향을 살펴 보았다. 결론적으로 필자가 논증하고싶은 바는 철학은 세계에는 모든 인류가 따라야 할 보편적 원리가 있다는 것을 알게 해주고, 하나님을 알기 위한 적절한 방법을 신학에 제공하며 여러 가지 면으로 신학에 많은 도움을 주고 있다는 것이다. 철학이 발견한 긍극적 진리가 비록 신학이 말하는 것과는 다르다 해도 그러한 진리가 있음을 철학 나름대로 발견함으로써 인류는 그 궁극적 진리를 탐구해야 하는 당위성을 말해준다. 하여 기독교 교부들과 지난 2천 년간의 기독교 신학자들이 철학과의 대화를 포기하지않은 이유는 물론 오늘 우리도 여전히 그러한 전통을 유지하여야 하는 이유는 기독교의 도그마가 보편적 진리로서 손색이 없다는 사실과 아울러 그런 보편적 진리의 지평을 확보하기 위해서 가장 적절한 도구가 바로 철학이라는 사실을 이해할 수 있다.

신학은 창조주인 하나님을 알고자 하는 노력이며 질문이며 대답이다. 신앙은 철학을 필요로 하지 않지만 학문으로서의 신앙의 학문인 신학은 철학을 필요로 한다. 토마스 아퀴나스가 만일 금기 시 되어 있던 아리스토텔레스의 이론을 그저 적대시 하기만 하였다면 신학 대전에 이르는 그의 업적은 이 세상에 남아 있지 않을 것이다. 철학의 영향을 단 한부분도 받은바 없다고 주장 할 수 잇는 신학자는 사실 오늘날 까지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철학은 사고를 담는 그릇과 도구가 되어 우리의 사고속에서 잠재되어 왔고 우리의 신학과 수많은 관념들을 이루는 뼈대가 되어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철학은 사람에 관한 학문이라면 신학은 하나님을 향한 학문이다. 그 중심을 잡고 철학과 신학의 나아갈 방향을 숙고해야할 필요성이 분명하게 요구된다. 긍정적 자세는 무조건적인 받아들임이 아니라 옳고 그름을 판단하여 긍정적인 영향력을 끌어 올리는데 있다.

과학, 문학, 철학 수많은 학문들을 배타적인 걔념으로 적대시 하는것보다 좋은 점은 취하여 신배우고 조화를 이루는 자세가 필요하다. 신학을 하는 신앙인으로서의 자세는 서론에서 말한바 와 같이 포스트모더니즘 시대로 불려지는 현 시대를 살면서 철학과 관념과 문화의 영향을 받는 현실 속에서 조화와 개정과 개혁을 이루어 보다 발전적인 흐름을 이루어 가는데 있다.

참고 도서

황 승룡. 「신학 서론」 한국 장로교 출판사, 서울: 2003

밀라드 J 에릭슨. 「복음주의 조직신학 상」 신 경수 역. 크리스천다이제스트, 경기도: 2000

최홍덕. 「신학과 철학의 관계」 목회자 신문 제 440, 2005

싱클레어 B 퍼거슨, 데이비드 F 라이트. 「아가페 신학 사전」 이 길상 역. 주 아가페 출판사,

: 2001

디오게네스 알렌.「신학을 이해하기 위한 철학」정재현역. 대한 기독교 서회, 서울: 1996

콜린 부라운.「철학과 기독교 신앙」문 석호 역. 기독교 문서 선교회, 서울: 1989

[1] 황 승룡, 「신학 서론」, (한국 장로교 출판사, 서울: 2003), 75p

[2] 밀라드 J 에릭슨, 「복음주의 조직신학 상」, 신 경수 역, (크리스천다이제스트, 경기도: 2000), 48p

[3] 최홍덕, 「신학과 철학의 관계」, (목회자 신문 제 440, 2005), 2p

[4] 황 승룡, 79p

[5] 싱클레어 B 퍼거슨, 데이비드 F 라이트, 「아가페 신학 사전」, 이 길상 역, (주 아가페 출판사, 서울: 2001), 1

040p

[6] 싱클레어 B 퍼거슨, 1041p

[7] 디오게네스 알렌, 「신학을 이해하기 위한 철학」, 정재현역, (대한 기독교 서회, 서울: 1996). 223~224p

[8] 콜린 부라운, 「철학과 기독교 신앙」, 문 석호 역, (기독교 문서 선교회, 서울: 1989), 37~39p

 

출처 : 차한잔
글쓴이 : 보혈의피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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