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양 철학 동양 철학

죽음에 이르는 병 키에르케고르

하나님아들 2020. 9. 3. 23:33

쇠렌 키에르케고르의 기독교적 실존주의

 

 

 

 

 

 

쇠렌 키에르케고르는 19세기 덴마크 철학자이다


죽음에 이르는 병  키에르케고르

 

 

 

1. <죽음에 이르는 병은 절망이다

2. 절망이 죽음에 이르는 병이라는것 

3. 이병 (절망)의 보편성 

4. 이병 (절망)의 형태들 

5. <절망은 죄다> 

6. 절망은 죄다 

7. 죄의 계속

 


 

서문

서론

제1부 죽음에 이르는 병은 절망이다

제1장 절망이 죽음에 이르는 병이라는 것

A. 절망은 정신에 있어서의 병, 자기에 있어서의 병으로 거기에는 세가지 경우가 있을 수 있다. 절망하고 있으면서 자기를 가지고 있음을 의식하고 있지 못하는 경우(비본래적인 절망), 절망하여 자기 자신이기를 욕망하지 않는 경우. 절망하여 자기 자신이기를 욕망하는 경우

B. 절망의 가능성과 현실성

C. 절망은 '죽음에 이르는 병'이다

 

제2장 이 병(절망)의 보편성

 

제3장 이 병(절망)의 여러 형태

A. 절망이 의식되어지고 있는지의 여부를 문제로 삼지 아니한 채 고찰된 경우의 절망. 따라서 여기서는 통합의 계기만을 문제로 삼는다. 

a. 유한성과 무한성의 규정하에서 고찰된 절망

α .무한성의 절망은 유한성의 결핍에 있다.

ß. 유한성의 절망은 무한성의 결핍에 있다.

b. 가능성과 필연성의 규정하에서 고찰된 절망 

α 가능성의 절망은 필연성의 결핍에 있다.

ß. 필연성의 절망은 가능성의 결핍에 있다.

B. 의식의 규정하에서 고찰된 절망

a. 자신이 절망이라고 하는 것을 알지 못하는 절망. 바꿔 말하면 자신이 자기를, 그것도 영원한 자기를 갖고 있음을 알지 못하고 있는 절망인 무지 

b. 자신이 절망이라는 것을 자각하고 있는 절망. 따라서 여기서는 사람이 자기를 - 어떤 영원한 것을 - 갖고 있음을 의식하고 있으며, 그 경우 절망하여 자기 자신이기를 욕구하지 않거나, 혹은 절망하여 자기 자신이기를 욕구하는 것 중의 어느 하나이다.

α. 절망하여 자기 자신이려고 욕구하지 않는 경우, 즉 취약함의 절망     

ß. 절망하여 자기 자신이려고 욕구하는 절망 - 반항 

 

제2부 절망은 죄다

제1장 절망은 죄다

A. 자기의식의 여러 단계(신 앞에라는 규정)

부론: 죄의 정의에는 분노의 가능성도 내포되어 있다는 것 - 분노에 대한 일반적 주의 

B.  죄에 대한 소크라테스적 정의

C. 죄는 소극적인 것이 아니라 적극적인 것

A의 부론: 죄는 어떤 의미에 있어서 극히 진귀한 것이 아닐까? - 도덕

 

제 2장 죄의 계속

A. 자신의 죄에 대하여 절망하는 죄

B. 죄의 용서에 대하여 절망하는 죄 - 분노

C. 기독교를 적극적으로 폐기하고, 그것을 허위라고 설명하는 죄

 

 

서문

이 논술의 형식은 많은 사람에게 기이하다고 생각되리라. 이것은 교화적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엄밀하고, 엄밀하게 학문적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교화적이라고 생각될 수도 있으리라. 후자에 대해서는 아무런 의의가 없으나, 전자에 관해서 나는 다른 의견을 가지고 있다. 만약 이 논술이 너무 엄밀하여 교화적일 수 없다면, 그것은 나의 생각으로는 실패를 의미한다. 그러나 이 논술이 모든 사람에게 교화적일 수는 없으리라. 왜냐하면 이 논슬은 전제를 구비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편 그것은 교화적인 성격을 띠고 있다. 기독교적으로 일컬으면, 즉 모든 것이 교화를 위하여 봉사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결코 교화적이일 수 없는 학문성은 바로 그 이유 때문에 비기독교적이다. 기독교적인 것의 모든 서술은 의사의 임상 강의와 비슷해야만 한다. 의학에 정통한 자만이 이 강의를 이해할 수 있다 하더라도, 그것이 환자의 병상 곁에서 행해져야 함을 결코 잊어서는 안 되는 것과 같다. 인생에 대한  기독교적인 것의 관계는 - 인생으로부터 학문적으로 눈을 멀리하는 것과는 반대로 - 바꿔 말하면 기독교적인 것의 윤리적인 측면은 바로 교화적인 것이다.  

이 서술법은 비록 다른 점에서 매우 엄밀하다 하더라도, 질적으로는 그 냉담한 학문성과 전혀 다르다. 그와 같은 학문의 초연한 영웅주의는 기독적인 견해로서는 전혀 영웅주의가 아닐 뿐더러, 도리어 비인간적인 단순한 호기심의 일종에 불과하다. 

기독교적인 영웅주의 - 그것은 다분히 다주 드물게 나타나는 것이지만 - 란 인간이 감히 자기 자신이 되려고 하는 것, 즉 단독의 인간이 특정한 단독의 인간이 되려고 하는 것이다. 외로이 신 앞에서, 이 거대한 노력으로 또 이 거대한 책임을 걸머지려는 인간이 되려고 하는 것이다. 그러나 '순결한' 인간을 형편없는 바보로 취급하거나 세계사의 진전에 대하여 경탄의 흉내를 내는 것은, 결코 기독교적인 영웅주의가 아니다. 기독교적인 인식은, 그 형식에 다른 면에서 아무리 엄밀하더라도 모두 관심되어진 것이 아니고서는 안 된다. 그러나 이 관심되어진 것이 교화적인 것이다. 

관심되어진 것이란 인생, 즉 인간적인 현실에 대한 관계이며 따라서 기독교적으로는 엄숙(Ernst)이라는 것이다. 냉담한 지식의 초연성은 - 기독교적으로 말하면 - 어떤 고차적인 엄숙을 뜻하지 않으며 - 기독교적으로 말하면 - 익살과 허영을 의미하고 있을 뿐이다. 그러나 엄숙함이라는 것은 또한 교화적인 것이다.

따라서 이 작은 저서는 어떤 의미로는 신학교의 1학년도 쓸수 있는 것이긴 하나, 다른 의미로는 대학 교수라도 쓸 수 없는 것이기도 하다. 

그러난 이 논문이 보는 바와 같은 체계를 갖고 있음은 여러 가지로 심사숙고한 후에 취해진 것이며, 그것은 또한 심리학적으로도 당연하다고 생각한다. 세상에는 격식뿐인 스타일도 있으나 너무 격식에 얽매이면 결국 그것이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 것인지 알수 없게 되며, 또한 거기에 너무 익숙하게 되면 곧 무의미한 것이 되기 쉽다. 그러나 이것은 말할 필요도 없는 군소리이긴 하나, 다만 한가지 덧붙이고 싶다. 표제가 말하고 있듯이, 절망은 이 저서 전체를 통하여 병으로서 이해되어지고 있지, 약으로 이해되어지고 있지 않음을 나는 특히 강조하고자 한다. 즉 절망은 그만큼 변증법적이다. 똑같이 기독교적 용어로서는, 죽음이라는 것도 최대의 정신적인 비참을 나타내는 말이다. 그러나 죽는 것 안에, 즉 서서히 죽어가는 것 안에 바로 구원이 존재하는 것이다.

 

23

인간은 정신이다. 정신이란 무엇인가? 정신이란 자기이다. 자기란 무엇인가? 자기란 자기 자신에 대한 하나의 관계이다. 바꿔말하면 관계가 자기 자신에게 관계한다고 하는 관계의 내부에 있는 자기를 뜻한다. 따라서 자기란, 관계를 뜻하지 않고, 관계가 그 자신에게 관계되는 것을 뜻한다. 인간은 무한성과 유한성의, 시간적인 것과 영원적인 것의, 자유와 필연의 종합이다. 요컨대 인간은 한 종합이다. 종합이란 양자 사이의 관계이다. 이 방법으로 고찰한다면, 인간은 아직 자기는 아니다. 양자 사이의 관계에 있ㅇ서는 관계 그 자체가 소극적인 통일로서의 제삼사를 뜻한다. 양자는 관계에 대해서, 또는 관계에 대한 관계 안에서 서로 관계하고 있다. 이와 같이 영혼의 규정에 있어서는 영혼과 육체와의 관계도 한 관계다. 그와 반대로 자기 자신에게 관계하게 되면, 이 관계는 적극적인 제삼자가 되며 이것이 바로 자기인 것이다.

 

73 지금 여기에 지하 일층, 이층으로 되어 있는 집 한 채가 있고 또 각 층의 거주자들 사이에는 신분의 차이가 있으며, 이 신분의 차이에 따라서 살 수 있도록 설비되어 있다고 하자. 그리고 인간이라는 것을 그런 집에 비교해 본다면, 대부분의 인간은 자기 집이면서도 일, 이층이 아니라 오히려 지하실에 살려고 하는 실로 슬프고도 우스꽝스러운 사실이 눈에 띄게 된다. 인간은 누구나 정신이어야 할 소질을 자고 만들어진 심신의 종합이다. 이것이 인간이라는 가옥의 구조인 것이다. 그러나 인간은 지하실에서 사는 것을, 즉 감성의 규정 안에서 사는 것을 즐기고 있다. 그것도 다만 지하실에서 즐겨 살려고 할 뿐만 아니라, 누군가가 그에게 이층이 비어 있어서 자유로이 사용할 수 있으니 이층으로 옮기는 것이 어떻겠냐, 또 자기 자신의 집에 살고 있으니까 하는 등의 이야기라도 듣게 되면 화를 낼 정도로 그는 지하실에 사는 것을 즐기고 있다.

 

 

 

쇠렌 키에르케고르의 기독교적 실존주의

 

 

 

 

 

 

쇠렌 키에르케고르는 19세기 덴마크 철학자이다.

이성주의의 기조아래 니체로 대표되는 구시대적 철학에 대한 저항이 강렬하던 시대,

구시대적 철학에 도전하면서 기독교적 가치를 고수한 특이한 철학을 추구했다.

 

그 시대 기독교적 기반을 바탕으로 둔 철학자는 헤겔이 가장 유명했는데,

키에르케고르는 헤겔을 정면으로 비판했다.

헤겔의 철학의 보편성을 반박하며 전체로서의 나에 대한 부정과 동시에

개인적 자아로서 나에 대한 성찰을 시작했던 사람이다.

 

그의 문제의식의 시작도 도대체 '나'는 무엇인가로 부터 출발한다.

그 유명한 '신 앞에 선 단독자'는 그런 출발점의 결론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꽤나 네거티브한 성격을 가지고 있었는지,

그의 모든 책은 본명을 사용하지 않았으며 결혼도 하지 않았다. 

40대 초반에 급사할때까지 평생을 철학적 사유와 교회 비판에 힘을쏟았던 것을 보면

특정한 목적의식 자체가 자아의 확립과

그를 바탕으로 한 신적 존재에 대한 성찰이라고 해도 무방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특히 '신 앞에 선 단독자'를 더 살펴보자면

절대적 유일신인 하나님 앞에서만 자신의 존재성이 실존성을 갖게 되며

그것이 존재의 이유이고 따라서 모든 개인과 자아는 독자적 객체성을 갖게 된다는 의미이다.

근대 철학이 대체로 '인간'에 대해서 탐구하다보니 인간이라는 존재의

욕망, 욕구, 이지, 판단 등을 종합적으로 접근한데 반해,

키에르케고르는 인간, 한 인간에 집중하였다.

사족이지만 그의 구원관도 그렇기에 한 인간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었다.

따라서 왜 사느냐보다는 어떻게 사느냐가 중요한 가치였다.

 

이러한 사상적 기반을 갖고 있었기에 그에게 있어서 무엇보다 중요한 문제는 구원이었다.

그가 생각하기에 이성주의 아래의 신앙은 절대적 의미를 상실한 것이었다.

신앙은 이성적으로 논증하거나 이해의 대상이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말년의 키에르케고르는 이성주의적 교회, 

특히 교회에서 행하는 모든 의식을 철저하게 거부하며 비판했다.

죽기직전에 성찬도 거부한 것을 보면 그의 신념을 알 수 있을 것 같다.

 

그에게 있어서 신적 존재란 감히 논할수도 없는 그런 존재였기에,

아무렇지 않게 신의 뜻을 논하는 교회들이 꼴뵈기 싫었을 것이다.

 

키에르케고르의 실존주의는 '신 앞에서의 나' 

즉 인간의 도덕성과 윤리성에 기반한 전체 안에서의 실존적 자아가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의 구원 받은 '나'에 기반한다.

존재의 증명 자체가 오직 신으로부터 기반하는 것이다.

그렇기에 인간이 살아가면서 단체속에서 겪는 사회적 모든 갈등, 아픔, 절망, 좌절 등은 

사실 오직 한분 절대자 앞에서만 가능하다는 것이다. 

이 모든 아픔은 영원성 앞에서 영원하지 못한 인간이 겪는 괴리로 인한 갈등이다.

본인 자신이 이 괴리로 인해 매우 큰 정신적 고통을 겪었다.

 

개인적 실존이라는 측면에서 바라보면 키에르케고르의 사상은 인본주의적으로 읽힐 우려가 있다.

그러나 생각해보아야 할 것은 그가 단 한번도 인간중심적으로 사고를 한 적이 없다는 것이다.

그의 사고는 신본주의적 사고 안에서 이루어졌으며 

신본주의적 사고와 동시에 이성주의적 관점에서 해석되어야 한다.

개인적 실존이 인간들 안에서 이루어진 정의되어진 나로서가 아니라,

절대자 앞에서 도달할 수 없는 영원성에 가로막혀 구원을 찾는 나로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불멸자 앞에서 필멸자로서 이 괴리감을 어떻게 극복 해야하나

고민하고 때론 좌절하고 넘어지는 것이 인간이라는 것이다.

 

 

 

 

 

 

죽음도 '죽음에 이르는 병' 이 아니다

 

 "이 병은 죽음에 이르지 않는다."(요,11:4) 그럼에도 나사로는 죽었다. 그리스도가 제자들이 "우리 친구 나사로가 잠들어 있다. 그러나 내가 그를 깨우러 가겠다."(11:11)라고 한 말을 제자들이 바로 이해하지 못하자, 그는 제자들에게 직설적으로 말했다. "나사로는 죽었느니라."(11:4) 물론 나사로는 죽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병은 죽음에 이르지 않았다. 이제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당시의 사람들에게 "그들이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게 되었을 이적"(11:40)에 대해 생각했던 것을 알고 있다. 그리스도가 나사로를 죽음에서 일으키신 이적, 그러므로 이 병은 죽음에 이르지 않았을 뿐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미리 말씀하신 바처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이요, 하나님의 아들이 이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게 하기 위한(11:40) 그런 이적을 그리스도께서는 염두에 두셨다. 오오, 그러나 비록 그리스도가 나사로를 죽음에서 일으키지 않으셨다 하더라도, 이 병이 죽음 자체조차도 죽음에 이르는 것이 아니라는 점은 역시 참이 아닐까? 그리스도께서 무덤에 가 소리 높이 "나사로야 나오너라"(11:43)고 외치신 것으로 미루어, 이 병은 죽음에 이르는 병이 아니라는 것을 충분히 알 수 있다. 그러나 비록 그리스도께서 그런 말씀을 하지 않았을지라도 "부활이요 생명"(11:25)이신 그리스도가 단지 무덤에 가셨다는 사실 하나만이라도, 이 병은 죽음에 이르지 않는다는 것을 뜻하지 않을까? 그리스도가 거기에 계시다는 그 사실이 바로 이병은 죽음에 이르지 않는다는 것을 뜻하지 않을까? 또 나사로가 비록 죽음에서 살아났지만, 만일 그 소생이 결국에는 죽음의 고통을 겪으며 종말을 고해야만 한다면, 그것이 나사로에게 무슨 도움이 되었으랴. 그리스도께서 그를 믿는 모든 자들에게 부활이요 생명이 되는 분이 아니었더라면, 그런 소생이 나사로에게 무슨 도움이 되었으랴! 아니다. 나사로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났기 때문에 이 병은 죽음에 이르지 않은 것이 아니요. 그가 거기에 계시기 때문에 이 병은 죽음에 이르지 않은 것이다. 도대체가 인간에게 죽음은 일체의 최후요, 도 인간적으로 말한다면 생명이 있는 한에서만 희망이 있는 것이다. 그러나, 기독교적인 뜻에서 말할 때 죽음은 결코 일체의 것이 존재하고 있는 내부-즉, 영원한 생명의 내부에서의 하나의 작은 사건에 지나지 않는다. 기독교적인 의미에서 단순히 인간적으로 말해서 목숨이 있는 한에서만이 아니라, 또 그 생명이 건강과 힘에 넘쳐 있을 때에 있다는 희망보다도 훨씬 많은 희망이 죽음 속에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기독교적인 면에서의 죽음까지도 '죽음에 이르는 병'은 아니다. 이른바 지상적이며 세속적인 고뇌-즉 곤궁·질병·비참·가난·재난·고통·번민·비애·원한이라 불리워지는 모든 것도 '죽음에 이르는 병'은 아니다. 그 모든 것이 아무리 견디기 어렵고 고통에 가득찬 것이며, 우리 인간이나 고통을 받고 있는 당자들이 "죽음보다 괴롭다"고 아우성칠 정도라 할지라도, 그 모든 것은-설사 그것이 병이라 이를 수 있는 것일지라도-결코 기독교적인 의미에서 '죽음에 이르는 병'은 아닌 것이다.

 키에르케고르 soren Aabye Kierkegaard ; Krankheitzum Tode에서

 

이해와 감상

키에르케고르는 자기의 체험으로부터 한 걸음도 밖으로 나간 일이 없는 사상가이다. 그의 저작은, 거의 전부 자기의 체험에 근거하고 있으며, 혹은 그 체험을 그대로 고백하기도 하고, 혹은 분석하고 혹은 비판하고 혹은 순화하고 있다. 이 책 '죽음에 이르는 병'도 예외는 아니다. 1848년 부활절 직전에 그는 제2의 회심이라고 할 수 있는 변용을 체험한다. '나의 인간 전체가 변하였다. 나의 은폐성과 폐쇄성은 파괴되었다.―나는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다'라고 일기에 쓰고 있다. 이 체험을 근거로 하여, 그는 가장 큰 문제였던 '죄와 그 속죄'에 관한 것과 함께 '고르자르'(코펜하겐의 유력한 풍자신문의 이름이요, 키에르케고르가 편집했음) 사건 이래, 자기의 사명으로 여겨왔던 '기독교계에 기독교를 도입할'의도를 포함한 대저서의 집필을 진행하였다.

  '나는 요즘 곧 죽게 될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러므로 사후에 출판되었으면 하고 기대하면서, 계속 쓰고 있습니다.' 이와 같이 죽음에 직면하여, 죽음을 응시하면서 아마도 최후의 것이 될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썼다. 이 책이 바로 '죽음에 이르는 병'이며 그의 속편이 '기독교의 수련'이다.

  '죽음에 이르는 병'은 키에르케고르가 묘사하는 기독교도의 이상형으로부터 키에르케고르 자신도 포함하는 현실의 기독교계를 비판하고, 절망이라고 하는 병의 증상에 대한 모든 형태를 분석하고, 그 진단을 제시하여 치유에의 길을 가르치고 있다.

  오늘날의 실존주의는 이 책에서 가장 많이 힘입고 있다. 하이데거와 야스퍼스의 실존개념도 이 책에서 얻은 바가 컸으며, 사르트르나 카뮈가 말하는 '부조리한 것'의 체험이나 그의 긍정도, 절망의 한 형태로서 나타난 것이다. '절망'이라는 말은, 여기서는 보통의 용어와는 달리, '인간이 신을 떠나서, 신을 상실하고 있는 상태'를 의미하고 있다. 일반적으로 말하면 그것은 인간의 자기 소외의 상태이다. 이 상태를 철저히 규명하고, 현대인에게 두려움을 주는 병에 대하여 진단을 내리고 각성을 촉구하는 데에 이 책의 의의가 있다.

  이 책 '죽음에 이르는 병'은 크게 2편으로 나누어 서술되고 있다. 제1편에서는 '죽음에 이르는 병은 절망이다'라는 제목 아래, '절망'을 분석한다. 절망이 죽음에 이르는 병이라고 한다. 절망은 정신에 있어서의 병이요, 자기에게 있어서의 병이며, 거기에는 세 개의 경우가 있을 수 있다. 절망하고 있으면서 자기를 가지고 있음을 의식하고 있지 못하는 경우 (비본래적인 절망), 절망하여 자기 자신이기를 욕망하지 않는 경우, 절망하여 자기 자신이기를 욕망하는 경우다. 여기서 '자기'란 무엇인가? 키에르케고르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자기란 자기 자신에 대한 하나의 관계이다. 바꾸어 말하면 관계가 자기 자신에게 관계한다고 하는 관계의 내부에 있는 자기를 뜻한다. 따라서 자기란, 관계를 뜻하지 않고, 관계가 그 자신에게 관계되는 것을 뜻한다'라고, 다음에 그는, 절망의 가능성과 현실성을, 또 절망의 보편성을 논하고, 마지막으로 절망의 형태들을 고찰한다.

  제2편에서는 '절망은 죄이다'라고 하고, 죄의 정의와 죄의 계속에 대하여 논한다. 죄의 정의에서는 특히 죄의 소크라테스적 정의, 즉 '죄는 무지이다'가 주목된다. 죄의 계속에서는, 다음과 같은 죄의 용서에 대하여 절망하는 죄, 그리고 기독교를 적극적으로 폐기하고 그것을 거짓이라고 설명하는 죄.

  키에르케고르는, 오늘날 우리가 체험하고 있는 인간의 자기 소외의 과정을 이 책에서는 절망으로서 깊은 분석의 메스를 가하고, 이 절망으로부터 탈출하는 길을, 즉 인간의 자기 회복의 길을 제시한다. 그 길은 신(神)을 믿고, 인간 각자가 신 앞에 서는 것이다. 그는 이같이 절망으로부터의 탈출의 길을 설명하면서도, 자신은 최후까지 신앙을 갖지 못하는 불행을 한탄하였다고 한다.

  키에르케고르는 절망을 남성적인 것과 여성적인 것 두 가지로 나누고 있다. 예를 들어, 나는 왕위에 오르고 싶다. 그러나 왕위에 오를 수가 없었다. 나는 왕위에 오르지 못했다는 사실에 절망한 것이 아니요, 왕위에 오르지 못한 자기 자신의 약함에 절망한다. 이것을 키에르케고르는 여성적인 절망이라 불렀다. 남성적인 절망이란 왕위에 오르지 못했지만 끝까지 해 보려는 데서 오는 절망이다. 그는 그 약함을 이겨내려 하지만, 그것은 바로 약함의 오만에 지나지 않는다. 이런 상태의 그가 지니는 것은 구원 없는 고독이든가 끝까지 고집부리는 악마적인 광포뿐이다. 그러나 그 속에서도 죽음은 점점 다가오고 있지 않은가. 그런데 구원의 가능성은 보이지 않는다. 어떻게 하면 좋은가? 

 이 절망의 병을 안고 제삼자-즉, 신 앞에 설 때 절망은 죄가 되고, 그 절망의 죄의식을 초월하려는 고뇌 밑에서 비로소 믿음이 생긴다. 이 변증법적 삶 속에 인간의 구원이 있다. 

 

참고 자료

키르케고르(1813∼1855)

 덴마크의 철학자로 코펜하겐 출생. 아버지는 비천한 신분에서 입신한 모직물 상인으로 경건한 그리스도교인이었고, 어머니는 그의 하녀에서 후처가 된 여인이었다. 7형제의 막내로, 태어날 때부터 허약한 체질이었으나, 비범한 정신적 재능은 특출하였으며 이것이 특이한 교육으로 배양되어 풍부한 상상력과 날카로운 변중(辨證)의 재능이 되었다. 소년시절부터 아버지에게 그리스도교의 엄한 수련을 받았고, 청년시절에는 코펜하겐대학에서 신학과 철학을 연구하여 1841년에 논문 《이로니의 개념에 대하여》로 학위를 받았다.

 그 동안에, 1837년경 그가 스스로 ‘대지진(大地震)’이라고 부른 심각한 체험을 하였다. 그 내용은 아버지가 소년시절에 유틀란트의 광야에서 너무나 허기지고 추운 나머지 하느님을 저주한 사실이 있었다는 것과, 바로 자기자신이 결혼 전에 아이를 밴 어머니의 아들이라는 것 등을 안 사실로 죄의식이 심화되었고, 인생을 보는 눈과 그리스도교를 보는 눈에 근본적인 변혁이 생겼다.

 한편, 1837년 당시 14세의 소녀 레기네 올센을 알게 되자, 곧 사랑의 포로가 되어 약혼까지 하였으나, 애정의 상극과 내면의 죄의식 때문에 1841년 가을에 약혼을 파기하였다. 이른바 레기네 사건이며, 이 때에 체험한 정신적인 갈등이 훗날 미적 저작의 주제가 되었다. 그 후 한때 베를린에 나가 당시 명성을 떨치던 철학자 F.W.셸링의 강의를 듣기도 하고, 《돈 죠반니》 《파우스트》 등 많은 오페라를 관람하기도 하다가 이듬해인 1842년에 귀국하여 저술을 시작하였다.

 그의 활동은 활발하여 1843~1846년의 짧은 기간에 《이것이냐 저것이냐 Enten-Eller》(1843) 《반복 Gjentagelsen》(1843) 《공포와 전율 Frygt og Baeven》(1843) 《불안의 개념 Begrebet Angest》(1844) 《인생행로의 여러 단계 Stadier paa Livets vei》(1845) 등과 같은 이른바 미적 저작과 《철학적 단편 Philosophiske Smuler》(1844) 《철학적 단편을 위한 결말의 비학문적 후서(非學問的後書) Afsulttende uvidenskabelig Efterskrift til de Philosophiske Smuler》(1846) 등의 철학적 저작을 모두 익명으로 출판하였고,이 밖에도 그리스도교에 관한 많은 교화적인 강화(講話)를 발표하였다.

 그 후 저술에 싫증이 난 그는 시골의 목사가 되어 조용한 생활을 보내고 싶어하였다. 그러나 이 때에 풍자신문 《코르사르》에 그의 작품과 인물에 대하여 오해에 찬 비평이 실려, 그것을 둘러싸고 격렬하게 논쟁하는 사이에, 또 다시 그리스도교도로서의 새로운 정신활동과 저술을 향한 의욕이 용솟음쳤다. 그는 신문의 무책임한 비평과 세간의 비웃음에도 굴복하지 않고, 한편에서는 대중의 비자주성과 위선적 신앙을 엄하게 비판하였으며, 다른 한편에서는 절망의 구렁텅이에서 단독자(單獨者)로서의 신(神)을 탐구하는 종교적 실존의 존재방식을 《죽음에 이르는 병 Sygdommen ti1 D詰den》(1849) 《그리스도교의 수련 Indoevelse i Christendom》(1850) 가운데에서 추구하였다.

 그는 기성 그리스도교와 교회까지도 비판하였으며 《순간》 등의 팸플릿을 통한 공격은 매우 격렬하였다. 그런 와중인 1855년 10월 갑자기 노상에서 졸도한 후 다음달 병원에서 죽었다. G.W.F.헤겔의 범논리주의를 배제하여 불안과 절망 속에 개인의 주체적 진리를 탐구한 그의 사상은 20세기에 들어설 때까지 국외에는 거의 알려지지 않았으나, 1909년부터 독일에서 C.슈램프가 키르케고르의 번역집을 내어 당시 신진이었던 P.바르트, J.H.하이데거, K.야스퍼스 등의 변증법 신학자와 실존주의자에게 커다란 영향을 주었고, 그로부터 그의 명성은 현대 그리스도교 사상과 실존사상의 선구자로서 세계에 알려졌다. 1995년 기독교한국루터회가 뽑은 ‘세계를 빛낸 10인의 루터란’의 한 사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