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약총론
======= 목차 ==========
<서론>
제1장 하나님의 말씀으로서의 성경 --- 1쪽
<제1편 총론>
제2장 신약의 정경성 --- 4쪽
제3장 신약의 원본과 사본 및 역본 --- 5쪽
제4장 신약성경원문 비평의 원리 --- 19쪽
제5장 신구약 중간시대 --- 24쪽
제6장 로마제국 --- 30쪽
제7장 유대인 --- 40쪽
<제2편 각 론>
제8장 4복음서 --- 46
1.마태복음 --- 46
2.마가복음 --- 50
3.누가복음 --- 53
4.요한복음 --- 58
5.공관복음서문제 --- 61
제9장 예수그리스도의 사역 --- 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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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론>
제1장 하나님의 말씀으로서의 성경
1. 하나님 말씀으로서의 성경
"성경이 하나님의 말슴이다"라는 말은 무슨 뜻인가?
이말은
1)성경이 성령으로 말미암아 영감되어 기록된 책이라는 즉 저자가 하나님 이시라는 뜻
이며,
2)성경이 크리스챤 신앙과 생활의 유일한 표준이라는 말이다.(딤후3:16)
2. 성경의 저자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지만 인간 저자에 의해서 되어졌다. 하늘로 부터 덜어진 책이
아니다. 부분적으로 전체적으로 성경은 인간을 통하여 우리에게 온것이다. 기록된 말
씀은 인간의 말로 되어졌기 때문에 인간의 과오와 오류가 성경안에 있을 수 있지 않은
가? 우리 조상 아담이 타락한 후 인간 중에는 온전한 자가 없었다. 물론 거룩하시고
완전하신 그리고 죄와는 상관이 없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이 성경을 쓰셨다면 또 문
제는 달라질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성경을 쓰신적이 없다 . 그러면 성경이 어떻게
완전한 (틀림이 없는) 하나님의 말씀이 될 수 있는가?
예수님은 완전하신 하나님이시면서 동시에 완전한 인간으로 오셨다.성경도 완전하신
하나님 말씀이면서 인간의 말로완전히 나타났다. 하나님께서 인간의 몸을 통해 우리에
게 오시듯, 하나님의 말씀이 임간의 도구(언어)를 통해 우리에게 오신 것이다.
3. 성경의 무오성
성경을 하나님 말씀으로 믿는 근거가 무엇인가? 그것은 서경안에 상호충돌되는 사실
이 없이 논리성이 있기 때문이거나, 합리적인 체계가 세워져 잇기 때문에, 또는 그것
이 진리를 변호하기 때문이 아니다. 단지 근거는 "성경은 하나님이 말씀하신 것"이기
때문이다.
성경자신이 이 사실을 어떻게 증거하는지 부정적 측면과 긍정적 측면을 찾아보도록
하자.
1) 부정적 측면
(1)성경은 성경을 반대하는 비판하고 있지 않다. 서로 다른 저자들이 다른 책속에 과
오나 오류가 있다면 그 잘못을 지적했을 것이다. 그러나 66권 속에는 그런 말이 전혀
없다.
(2)성경은 역사속에 나타난 인간의 과오나 죄를 많이 지적하고 있다. 또한 어두움의
이야기들을 속직하게 대담하게 말하고 있다(아브라함, 모세, 다윗, 베드로의 과오도
기록).
(3)창3:4 "너는 결코 죽지 않을 것이다."라고 한 말은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고 뱀의
말이긴 하나 그뱀이 거짓말하고 있다는 자료를 우리에게 주고 있다는 말씀이다. 그리
고 주님은 요8:44에 "그는 처음부터 거짓말하는 자요"라는 해석을 하심으로 단순히 계
시의 기록을 넘어 계시자체가 된다. 죄와 오류를 저주하고 있는 성경자체의 신빙성을
주장하고 잇다.
(4)성경속에는 일시적이고 잠정적인 규칙이나 제도같은 것들도 있다. 예를들면 할례문
제에 대한 신약의 해석들이 그러한 것인데(갈5:2,롬4;11) 여기서도 구약의 기록을 공
박하는 것은 아니다.
(5)또한 성경속에는 같은 일을 서로 다르게 말하는 곳도 있다. 예를들어 구약 예레미
야 7:22-23의 기록은 이스라엘의 위선과 형식주의를 공격한 것으로 단순한 의식만으로
는 종교적 무가치성과 외식을 지적한 것이다.
2) 긍정적 측면
1)예수님 자신이 율법과 선지자를 폐하러 오신 것이 아니고 완전케 하러 오셨다고 했
다(마5:17-19).
2)율법의 일점일획도 천지가 없어지기 까지 변할 수 없다는 말은 율법에 구체적 오류
가 없으며 영구불변함을 보여주신 것이다. 마5:21-44의 기록은 전승의 적용의 오류를
공박 하신 것이지 율법자체를 공격하신것이 아니다.
4. 성경의 영감
성경영감(딤후3:16)은 하나님의 입으로 부터 나온 하나님의 말씀(God-breathed)입을
말해준다. 여기에서 성경의 전체 영감론(Plenary Inspiration)을 설명해 보자.
예수님과 사도들은 구약을 "성경"이라고 불렀다(요5:39,딤후3:15,16,벧후1:20).
구약의 기록이 "하나님의 뜻을 따라 성경의 나눠주신 것(히2:4)"을 말슴한 것이라고
하였다.
베드로(벧후3:15,16)는 바울서신의 기록이 영감된 것으로 "다른 성경과 같이 그것
도...(밸후3:16)라고 언급함으로 성경의 수준으로 취급하낟.
바울(딤후3:16)은 모든 성경은 영감된 것이라고 하였다.
경의 모든예언은 영감되었다(벧후1:20,21).
*성경영감의 의미
-모든 성경은 하나님으로 부터 나왔고(breathed-out) 신적권위가 잇는 하나님의 입에
서 뱉은 말씀이다.
-"성령의 감동함을 입은 자들이 하나님께 받아 말한 것(벧후1:21)"으로 신인간의 접촉
점이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창조적 호흡의 산물이라는 신적 기원과 성령으로 나온 것이라는 신적권위가
있어 과오가 없으며 그 내용뿐만 아니라 그 주신 말(단어)까지도 영감된 것으로 받아
야 할 것이다.
<연구문제>
1.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다"는 것은 무슨 듯인지 설명하라.
2. 인간에 의하여기록된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되는 이유를 약술하라.
3. 성경의 무오성에 대하여 성경이 말하는 바를 기록하라.
4. 성경이 전체적으로 영감되었는 것에 대하여 서술하라.
제1편 총론
제2장 신약의정경성
1. 정경화의 과정
복음서가 정경으로 된 것은 져스틴(Justin)과 이레냐우스(Irenaeus)시대 사이에서
최초로 받아진 것으로 알려져 있다(150-180 A.D)바울서신은 좀늦게 받아졌다. 325년
니케아회의까지 신약정경문제가 심각하게 다루어진 흔적은 없다. 367년 아아라나샤우
스가 그의 부활서신에서 27권의 책을 기록하고 잇다. 397년 칼라고회의에서 정경27권
을 완전히 하나님의 영감된 말씀으로 받아들였다.
2. 정경결정원리
성경27권을 정경으로 받아드린 표준은 무엇인가?
1)사도성: 저자가 사도이거나 아니면 사도와 관계를 가진이가 기록했다.
2)영감성: 성경의 영감으로 기록된 책이라는 증거가 보여야 한다.
3)보편성: 교회가 보편적으로 받아들였어야 한다.
4)내 용: 정경에 오를 만큼 영적 성격을 지녀야 한다.
3. 신약의 외경
신약의 외경은 다음과 같다.
1) 디다케 (The Didache) 혹 12사도의 교훈집(Teaching of the Twelve Apostles). 이
책은 예수님의 말씀 수록과 교회 예배의 실제를 위한 지시들을 모은 것이다. 12사도에
의해 썼다고 주장하나 진실이 아니다. 100-150년 사이 초기 유대 작품에서 왔는데 자
료의 대부분은 가치가 잇는 것으로 사복음서 특히 마태복음에서 왔다. 어떤 부분은 아
주 훌륭하나 다른 것들은 미숙하며, 널리 읽혀졌으나 애굽에서만 정경으로 간주하였으
며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트와 오리겐은 그렇게 보았다.
2) 바나바 서신 (The Epistle of Barnabas A.D. 100-130). 본서는 애굽인들에 의해 정
경으로 간주되었다. 클레멘트는 거의Hyptyposes에와 공동서신 주석에서 언급하였다.
오리겐은 이것을 보편적이라 불렀다. 본서는 신약 최대사본 알레프(?)사본에 들어 있
다.
3)클레멘트 1서 (The First Epistle of Clement)는 로마의 클레멘트에 의해 고린도 교
회로 보낸 서신으로 A.D. 96년에 기록되었다. 알렉산드리누스 사본, 혹은 A와 몇몇 그
리 주요하지 않은 사본에 나오고 있다. 이레니우스, 알레산드리아의 클레멘트와 오리
겐은 이것을 사용하였으나 정경작품으로 한 짝으로는 보지 않았다.
4)헐마스의목양자 (The Sheperd of Hermas) 로마에서 150년경에 기록되었는데 미래에
대한 많은교훈과 계시를 주기 위한 목적이다. 이래니우스, 터틀리안과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트 등이 다 사용했는데 정경으로 사용하였다. 그러나 잠시 후에 부도덕으로 공
격을 받아 권위가 부인되었고 그 이후 비정경서로 되었다.
5)베드로의 묵시 (The Apocalyopse of Peter) 2세기초의것으로 거짓으로 베드로가 썼
다고 하였다. 이 책은 미래에 대한 계시를 준다고 하여 천국과 지옥에 언급을 많이 하
는데 특히 지옥에 관해서 그렇다. 또 죄인들의 다른 정도에 따른 형벌에 대한 자세한
언급이 있다.
6) 바울의 행전 (The Acts of Paul A.d. 160) 바울을 존경하는 아시아인인 한 장로가
쓴 작품이다.터툴리안에 의하면 사기로 보았고 역사적 가치를 의심하였으나 오리엔과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트는 존중했다.제1세기의수리아교회는 높이 평가하였고 서방에
알려졌으나 정경서는 아니었다.
<연구문제>
1. 신약성경 정경화 과정을 개괄하라.
2. 정경결정원리를 약술하라.
3. 신약의 외경을 간략하게 설명하라.
제3장 신약의 원본과 사본
신약성경의 원본, 사본, 역본문제를 간략하게 논의 해보자. 우리에게는 성경의원본은
남아 있지 않다가. 그래서 그 원본에서 베낀 사본(manyscripts)과 초기 역본들(early
versions)을 연구하여 원문을 찾는 작업은 해야할 것이다.
옛날에는 책을 만들때 주로 파피루스(갈대)종이나 양피지(양 또는 송아지가죽)을
사용했다. 성경은 주로 파파루스에 쓰여졌다. 오늘날 약4,700개정도의 신약의 사본이
었는데 그둥 희랍어 대문자로 된 것이 240개 정도이고, 초서체의 소문자로 된 것이
2,500개나 된다.
1. 고대 서적의 제작
15세기의 이동식 인쇄술이 발견될 때까지 신약의 본문이나 모든 고대 기록물의 본문
은 글자 하나하나, 단어 하나하나를 애써 베낌으로서만 전달 될 수가 있었다. 그런고
로 사본의 전사나 제작의 과정 연구는 보통 고대 문화를 연구하는 역사가에게는 아주
중요하며 특별히 신약을 연구하는 학생에게 더욱 중요하다. 다음 절에서 우리는 신약
본문 비평에 관계되 헬라어 고문시학의 전시나 제작의 과정을 살펴보고자 한다.
1) 고대 서적의 재료
옛날에는 토판, 돌, 뼈, 나무, 가죽, 여러가지 금속, 질그릇 조작, 파피루스, 그리고
양피지 등이 글을 쓰는데 사용되었다. 이 여러가지 재료들 중에서 신약을 연구하는 학
생들에게는 마지막의 두가지가 대단히 흥미있다. 그 이유는 대부분의 신약사본들은 파
피루스나 양피지로 만들오졌기 때문이다.
파피루스의 제조는 애굽에서 번창한 사업이었다. 왜냐하면 피피루스 식물(갈대)은 나
일(Nile)강 델타(삼각주)의 얕은 물에서 많이 자랐기 때문이다(비교 욥8:11 "왕골이
진펄이 아니고 나겠으며 갈대가 물 없이 자라겠느냐?" 높이 약 12-15피-트<1피트=약
30cm>). 팔정도로 굵은 삼각형 모양의 이 식물의 줄기는 발 길이정도로 절단된다. 같
은 방향으로 뻗고 있는 모든 섬유질은 평평한 표면에 놓여짐으로 한 층을 이루고, 그
위에 오른 모에서 아래층으로 뻗는 섬유질을 놓음으로 다른 한층을 이루게 한다. 이
두 층은 한 구조(짜임)를 이룰 때까지 같이 압축된다.-- 이 구조는 지금 부서지기 쉬
우므로 종종 가루가 되기도 하지만 한 때는 좋은 종이와 같이 힘있는 것이었다.
글을 쓸 목적으로 만든 양피지(Parchment)의 제조에는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다. 로마
원로원 의원 프리니(Pliny the Elder: Gaius Plinius Secundus 23-79:로마의박물학자,
백과사전 편집자, 저술가)에 의하면 (그의 Natural History XIII.21이하), 양피지
를 예비하고 사용하게 한 사람은 소아시아의 미시아(Mysia)에있는 한도시 퍼가모
(Pergamum: 현재의 Bergama에 해당)의 유메네스(Eumenes)왕이었다고 한다. 이 지배자
((아마도 B.C.197년에서 159년까지 지배했던 유메네스 II)알렉산드리아(Alexandria)의
유명한 도서관에 필적할 만한 한 도서관을 그의 도시에 세울려고 계획했다.
이 희망은 애굽의 토레미왕(아마도 Ptolemy Epiphanes, 205-182 B.C.)의 비위를 상하
게 했으므로 그의 파피루스 항목들의 수출을 금지시켰다. 이 수출 금지가 유메네스왕
으로 하여금 벧룸(Vellum;송아지 가죽)을 생산케 하였고, 그 생산지의 이름을 따서 헬
라어로는 ??라 하고 영어로는 Parchment라 부르게 되었다. 실제적으로 가죽은 유메네
스왕 오래 전에도 책을 만드는데 사용되었으나, 질이 높은 양피지는 퍼가모에서 개발
되었고, 그 도시는 이러한 서적재료의제조와 수출로 유명하게 되었으며, 마침내 그 도
시 이름이 그 생산품에까지 붙게 되었다.
파취멘트 혹은 벧룸(Parchment or Vellum).(이 두 단어가 서로 교차적으로 사용되지
만 엄격한 저자들은 Vellum을 Parchment보다 질적으로 곱고 우수한 것으로 여긴다)은
가축 양, 염소, 영양 특히 이러한 동물의 새끼의 가죽으로 만들어졌다. 털을 민후 가
죽을 물로 씻고 경석으로 부드럽게 하고 호분을 칠한다. 사치스런 낭비를 싫어했던 성
제롬(S. Jerome)에 의하면 호화판은 심홍색으로 염색되고 금과 은 잉크로 쓰여진
Vellum으로 만들어졌다. 보통판은 검은 색이나 갈색 잉크로 쓰여졌고, 첫줄이나 첫글
자는 푸른 잉크나 누런 잉크로 장식되었다.
벧룸이나 파취멘트는 중세기까지 계속 사용되었다. 중세기에는 아라비아 무역상에 의
해 중국에서 구라파에 소개된 솜, 삼, 아마로서 만들어진 종이가 인기였고 다른 재료
를 대신하였다.
2) 고대 서적의 형태
헬라, 로마세계에서는 문서작품들은 관례적으로 파피루스나 양피지로 남들어진 두루
마리 형태로 출판되었다. 파피루스 권축(권축)이나 두루마리는 파피루스의 각 장의 끝
과 끝을 아교로 붙인 후 막대기에 긴 조각을 감은 다음에 한 권(Volume)을 만들었다.(
이 Volume이란 말은 '어떤 것을 감았다'는 라틴어 Volumen에서 나왔다). 이러한 파피
루스 두루마리의 길이는 그 두루마리를 취급하기에 편리하도록 제한되었다. 보통 헬라
어 문서 두루마리는 길이 35피트(1피트=30.48cm)를 넘지 않았다. 그런고로 고대 저자
들은 긴 문서작품을 몇 권의 책으로 나누었는데 그 각 책은 한 두루마리에 실을 수가
있었다. 누가복음이나 사도행전 같은 신약의 가장 긴 두책은 각각 깅이 31-42피트의
보통 파피루스 두루마리에 채워졌다.
의심없이 이것이 왜 누가복음이나 사도행전이 한 권이 되지 않고 두 권이 된 이유이
다. 이렇게 형성된 두루마리의 글은 넓이 각각 약 2-3인치(1인치=2.54cm)의 란의 연속
으로 짜여져 있다. 두루마리가 감겨져 있는 막대기와 평행된 란의 높이는 물론 원 파
피루스 종이의 높이와는 다르다. 종종 그러나 아주 드물게 두루마리는 종이의 높이와
다르다. 종종 그러나 아주 드물게 두루마리는 양면으로 다 쓰여졌는데(계5;1 참조) 이
것은 오피스토그라프(opisthograph)라고 불려졌다.
두루마리는 비교적 사용하기에 불편했다. 낭독자는 글을 읽을 때 두 손을 사용했는데
한 손으로는 두루마리를 풀고 다른 한 손으로는 감았다. 더우기 기독교 공동체는 그것
들이 두루마리 형태로 쓰여졌을 때 그 책에 있는 어떤 특별한 구절을 찾는 것이 얼마
나 수고스러운 일이라는 것을 곧 알게 되었다. 2세기 초 (혹 아마 1세기말경)에 사본
(codex) 혹은 책의 책장형태는 교회에서 광범위하게 사용되기 시작했다. 코덱코스 사
본은 파피루스 종이 한 가운데를 한번 혹은 여러번 접어 같이 깁음으로써 만들어 졌
다. 기록자들은 이 형태가 두루마리보다도 여러가지 면에서 유익하다는 것을 알게 되
었다.
1. 이것은 두루마리처럼 길지 않은 형태인 한 책에 4복음과 바울 서신을 다 넣어 묶을
수 있다.
2. 이것은 찾고 싶은 구절을 쉽게 참고할 수가 잇다.
3. 이것은 페이지 양면에 글을 씀으로서 생산가격을 낯출 수 있다.
유대교의 회당에서는 구약을 두루마리로 전달하는 것이 습관이 되어 있었던 것과는
달리 이방 기독교인들은 일찌기 두루마리 형태 대신 성경을 코덱크스 형태로 만들었다
는 것은 능히 짐작할 만하다.
책의 제작에 잇어서 파피루스가 양피지보다 유리하다는 것은 오늘 우리도 아는바다.
양피지는 부서지기 쉬운 파피루스보다 훨씬 더 든든하고 오래 계속되는 재료이다. 더
우기 양피지는 어려움없이 양면에 글을 쓸 수가 잇다. 그렇지만 파피루스의 반대 면
(뒷면)의 섬유질의 수직적 방향은 글쓰는 표면으로서의 다른 면보다 약간 재미가 없
다. 반면에 양피지도 역시 약점을 가지고 있다. 예를들면 양피지면의 모서리는 오므라
들기 쉽고 고르지 않다. 더우기 A.D.2세기의 유명한 헬라의 의사 가렌(Galen)의 고찰
에 의하면 빛나는 양피지는 빛을 많이 반사시키지 않는 파피루스보다 더 눈을 뜨게 했
다고 한다.
팔레스타인에 있는 가이사랴(Caesarea)의 저명한 기독교 학자 유세비우스(Eusebius)
는 그의 저서 콘스탄틴의 생애 (The life of Constantine)에 로마제국이 50권의 양
피지 사본을 요구한 요구에 관한 글을 싣고 있다. A.D.313년경 콘탄틴 황제가 콘스탄
티노플(Constantinople)에 세우도록한 새 교회들에 쓸 성경의 복사판을 구하려고 했을
때, 그는 유세비우스에게 아주 기술이 좋은 직업적 서기관( )에 의해 갖고 다
니기 편리한 모양으로, 또 읽기 쉬운 구하는 서한을 보냈다. 유세비우스는 계속해서
기록하기를 "이 요구는(명령) 즉시 실행되었고 삼중 사중형으로 잘 묶어진 책이 되어
그에게 보내졌다"라고 했다.
몇몇 학자들은 상상하기를 현존하는 성경의양피지 사본들 중 가장 오래된 것들 즉 바
티칸 사본(Codex Vaticanus)과 시내산 사본(Codex Sinaiticus)은 콘스탄틴 황제의 명
령에 의해 제작된 사본들 가운데 있었던 것이라고 하나다. '삼중 사중형으로 잘 묶어
진 책'이란 유세비우스의 이상한 표현은 이 두 사본이 각각 페이지에 세 란과 네 란을
가졌다는 사실과 일치한다는 것을 나타내고 있다. 그러나 바티칸 사본의 근원지가 애
굽이고 이두 사본의 본문의 형태가 유세비우스에 의해 사용된 것과는 같지 않다는 한
두 가지 표시가 있다.
2. 사본 분류 및 주요사본들
1) 지금까지 발견된 신약성경의 사본을 문류해 보면
A. 파피루스 67개
B. 가죽종이에 기록된 코덱스형 사본
a. 대문자 사본(Uncial) 241개
b. 소문자 사본(Minuscle) 2,533개
c. 성구집 (Lectionaries) 1,838개(공중예배시 쓰는 인용문으로 9C.까라는 대개
대문자였던 것을 그 후 소문자로 바꾸었다.)
2) 중요사본들
사본들은 서사자들의 실수에 의해 오류의 가능성이 전혀 없다고는 할 수 없다. 그러
나 고대로 부터 재현된 문서로서 신약성서 만큼 믿을 수 있는 것은 없다.
신약은 고대의 어떤 문서에 비해서 보다 그 본문을 재구성하기 위한 아주??은 자료들
이 있다. 신약본문의 재구성의 목적을 위해서 자료에 대한 다섯개의 다른 모형이 형태
유용한 것이다.
첫째로 가장 중요한 것은 고대로부터 보존되어 온 헬라 본문 사본이다. 여기에는 요
한의 레이랜드(Ryalnds) 단편이 있는데 이것은 1 인치의 파피루스의 단일조각이다.
또 체스테베티 파피리(The Chestar Beaty-Papyri)는 복음서, 사도행전, 바울서신과 계
시록의 어떤 부분을 포함하고 있으며 요한 의 보드멜(Bodmer) 파피루스는 제3세기나
혹은 그보다 더 이른 시기에 나온 것이다.
이 중에 가장 오래된 광범한 사본은 알레프( ), 혹은 시내산 사본인데 지금 대영 박
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이 사본에는 신약 전부를 포함하였고 그 밖에 바나바 서신과
헐마스의 목양서 일부가 들어있다. 이것은 제4세기에 기록된 것으로서 독일사람 티센
돌푸(Tisehendorf)가 시내산 수도원에서 발견한 것으로(1859) 베타식 사본( )자0 속하
는 믿을 수 있는 것이다.
이들 사본들은 네 가지( )로 구분하는데 알파( )식 사본은 수리아(Syrian)사본인
데 혼합식(안디옥을 중심하여 베껴 내려온 식)이고 베타( )식 사본은 중성사본
(Neutral)인데 원본적이어서 변동이 적고 권위가 있다.
델타( )식 사본은 서부사본(Western)인데 원본에서 변용된부분이며 감마( )식 사본은
알렉산드리아(Alexandria)사본인데 문학적이고 ??적인 미가 있다. 여기 시내산 사본은
?식 사본에 속한다.
바티칸 사본 (B.Codex Vaticanas)은 로마에 있는 바디칸 도서관에 있다. 이 사본은
일명 비(B)사본이라고도 하는데 창 1:1-4,16:28, 시105:27, 130:, 7:6이 없고 또 히
9:14-13:25과 목회서신과 계시록이 빠져있다. 이것은 제2세기에 베낀 것으로 ?식 사본
의 첫째가는 것이다. 아마도 이 사본은 애굽에서 작성된 듯한데 그 이유로는 사히틱역
(Sahidic Version)과 같이 히브리서가 갈라디아서 사이에 들어있기 때문이다.
제2바티칸 사본 이사본은 일명 B2로 불려지기도 하는데 제4세기 경에 베낀 것 같다.
바티칸 사본에 빠진 계시록을 보증하였는데 바디칸 도서관에 잇다.
알렉산드리아 사본(A. Codex Alexandrius). 지금 대영 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이
사본은 신약 전부를 포함하엿는데 마25:6부터 있고,요6:50-8:52과 고후4;13-12:6이 빠
져 있다. 그리고 로마의 클레멘트1서와 고서 전부가 들어 있다. 이 사본은 제5세기 끝
에 작성되었고 감마( )식 사본의 머리가 된다.
에브라임 사본(Codex Ephrami Rescriptus). 일명 C라고 하는데 제5세기에 기록되었겠
다. 낡은 피지에 쓴 것은 지우고 다시 쓴 대용판이다 지금 파리 국립 도서관에 있다.
데살로니가 후서와 요한서가 없는데 그 밖에 것은 미완성이다. 이 사본은 성격상 식
도 식은 아닌 중간형이다.
베자 사본(D. Codex,Bezae). 일명 D라고 하는데 이 사본의 기원은 확실치 않다. 제네
바의 칼빈의 제자이며 후계자인 베자(Beza)가 1562년 리욘의 성 이레니우스 사원에서
얻어 1581년 켐부리지 대학에 기증하여 지금도 보관 중이다. 이 사본은 두 나라 말로
기록되어 있는데 왼쪽에는 희랍어 본문이 있고 오른쪽 페이지에는 라틴어 본문을 가지
고 있다. 복음서와 행 20:29 끝까지와 서신의 일부 예컨데 야고보서,베드로후서, 요한
I,II,III서,유다서가 들어 있다. 이 사본은 제6세기 경에 작성된 듯하다. 그리고 성격
상 감마( )식에 속한다.
워싱톤 사본(W. Codex Washingtonianus I). 이 사본은 1906년 애굽의 카이로에서 디
트로이트의 프리어(Mr.C.L.Freer)가 구입한 것으로 187면에 4복음서만 포함되어 있다.
아마도 4-5세기에 작성되었을 것이다.
이계층에 속하는 상술한 사본들은 언셜(The Uncials)로 알려졌는데 그 이유는 이런
사본들이 한 인치 크기로 보이는 큰 인쇄체의 글자로 기록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대
문자 사본으로 부르기도 한다. 어쨌든 이 사본들은 공적인 낭독을 위해 작성되었고 아
주 주의 깊게 베꼈으므로 가장신뢰할 수 있는 사본에 속한다. 위에서 언급한 외에는
대문자 사본에 속하는 사본이 많이 있는데 여기서는 그 이름만 소개하고 지나가기로
한다.
클라몬타누스 사본(D2 Codex Claromontanus). 헬라어와 라틴어로 되었고 데살로니가
전후서와 히브리서, 빌립보서가 빠져 있다. 제6세기 것으로는 불란서 파리 로얄
(Royal)도서관에 있다.
바실리엔스 사본(E. Codex Basilensis). 사복음서(누가복음은 일부)와 계시록의 일부
가 잇다. 제8세기 것으로 스위스의 바겔에 있다. ?식 사본이다.
라우디아누스 사본(E2,Codex Laudianus). 사도행전만 있고 제7세기 것으로 옥스포두
보드레안(Bodleian)은 도서관에 있다. ?식이다.
상겔마네시스 사본(E3,Codex Sargermanesis). 바울 서신만 있는 제9세기 것으로 파터
스벎에 있다.
보리앨리 사본(Codex Brieli). 복음서만 포함한 것으로 사9:1-요13:34까지 있는데 유
트레이트(Utrecht)대학 도서관에 잇고 제9세기 것으로 ?식이다.
레기우스 사본(L. Codex Borgianus). 희랍어와 사히딕(Sahidic)어등의 두말로 된 요
한복음과 누가복음의 179절을 포함하고 있다. 거의 전적으로 본문은 알렉산드리아 본
문이다. B사본과 ?사본 다음으로 중요하게 본다. 제5세기 작성된 듯하며 로마에 있다.
본문의 둘째 모형은 흘림체로 베낀 것으로 소문자 사본 또는 초서체(초서체)의 사본
에서 처럼 구별되게 쓴 대신에 합자로 연결된 체 이다. 대문자 사본이 공적인 낭독을
위해 만들어진데 대해 이들 사본들은 ??사본에서 온 것들로 대체로 제10세기에 시작되
어 유유럽에 인쇄술이 소개된 이후인 제1세기까지 있었다.
그리고 이들 소문자 사본들의 총수는 복음이 1420, 사도행전과 공동서신이 450, 바울
서신이520, 계시록이 194, 특선독본이 1372개이다.
또 대문자 사본, 소문자 사본, 그리고 특선 사본 1372로 그 합계는 4124개에 이른다.
물론 이밖에도 이상의 사본에 들지 않은 것도 있다.
스크리브너(Scribeber)씨의 번호대로 소서사본의 중요한 것들을 들면 아래와 같다.
Evan 1.(복음서 약칭)
Evan 2. 15세기의 것으로 바겔에 있다.
Evan 13. 69,124, 346, 12세기의 것인데 파리에 있다. 이것들을 가리켜 페라군사본
(Codex Ferrar)이라고 하는데 ?식이요 ??식도 있다.
Evan 18 (Act 113, Paul 132, Apoc 51). 14세기의 것인데 신약을 포함하였고 파리에
있다.
Evan 54, 56, 58,61. 옥스포드에 있고 14-15세기의 것이다.
Evan 131 (Act 70 Paul 77). 15세기 것으로 로마에 있다.
Evan 201 (Act 91 Paul 104 Apoc 94). 14세기의 것인데 영국 박물관에
*(*******20페이지 없음
둘째로 중요한 자료는 역본이다. 복음이 로마 제국의 라틴어를 말하는 지역으로 서향
(서향)하여 퍼진 것처럼 동방으로 중동의 아람어 거주자들 속으로 파고 들어갔다. 그
리하여 성경은 라틴어와 수리아어로 번역이 나왔다. 이 두개의 역본이 제2세기의 하반
에서 처럼 아주 일찍 구성되었고 결국은 재현된 어느것보다도 더 오래된 헬라어 사본
에 근거한 것이다. 물론 이런 번역본들은 원문에서 옮기기 어려운 점 때문에 안전하게
만족할 정도로 번역되었다고 하기에는 미흡한 점이 없지 않았지만 일반적인 순서와 그
것들의 주요한 본문의 내용에 대한 정확한 지식을 제공하여 준다.
제4세기에서 7세기까지 어떤 것들은 그후에 기록된 옛 라틴 사본이 많이 있다. 이것
들 가운데는 일치점이 적다. 사본들처럼 번역본도 많았다. 또 초기 사본 중에 제5세기
의 베자 사본(D)같이 2개국어로 되었다. 이것은 이것들을 사용하는 사람들이 헬라어와
라팅어에 친숙했음을 시사해 준다.
라틴역본의 증거는 교황 디마서스(Damasus A.D. 884)를 당황케하여 제롬(Jerome)으로
하여금 새로운 라틴 표준역을 내놓게 하였다. 그는 옛 헬라사본들을 수단으로 해서 라
틴 본문을 교정하였는데 아직도 로마교회의 표준성경인 벌겟Vulgate)역을 나오게 하였
다.
옛 수리아 역본은 주로 복음서의 두 사본들로 소개된다. 즉 큐레도리안 수리아 역인
데 이것은 큐레톤(William Cureton)이 발견한 것으로 대영박물관에 있는데 그중 어떤
사본들은 애굽의 니트리안(Nitrian)사막의 수도승에에게서 가져온 것이다.
그리고 시내산 수리아 역본(Sinaitic Syriac)이 있는데 이것은 레위스(Agnes Lewis)
와 깁슨(Margret Gibson) 두 자매에 의해 1892년에 시내산성가다리네(Gatherine)수도
원에서 발견한 것인데 제5세기의 것과 이것들의 문선의 다수는 옛 라틴 역본의 것과
아주 유사하게 닮은 것이다.
이런 것들과 함께 타티안(Tatian)의 디아테사론(Diatessaron)에 주의해야 할 것이다.
디아대사론은 4복음서에 대한 대조의 첫 조화로서 제2세기 늦게 기록되었다. 최근에
발견된 단편은 이것이 수리아에서 처럼 헬라어로 있었음을 보여주며, 수리아 사복음서
의 조화는 번역되었다.
그 후에 많은 다른 역본들이 나왔는데 어떤 것은 헬라 본문에서 어떤 것은 라틴역이
나 수리아 역에서 번역한 것이다. 그리고 새 아루메니아 역본이 나오기 전인 제17세기
초까지는 애굽 역본(Coptic Version)등이 읽혔다. 그러나 이들 역본은 라틴 역본이나
수리아 역본보다 중요하지는 않다.
여기서 위에 소개한 역본들을 구분하여 알기 쉽게 소개하기로 한다.
1. 수리아 역(The Syriac Version)
1) 타티안의 사복음서(The Diatessaron of Taian). A.D.170년 사복음대조를 저작하였
는데 수리아어로 쓴 것이다. 이 사본은 전해지지 않으며 그 역본(아라비아)2권만이 있
다. ?식의 것인데 초기의 것이어서 중요하게 형가되고 있다.
2) 고대 수리아역. 이 역본은 두가지 수리아역 곧 크레토리안 역본(5세기)시내산 역본
을 통록한 것이다. 이 두 문서는 다 ?식 사본에 속하는데 페쉬토역(Peshitto)보다 더
오랜 것으로 평가하고 있다.
3)페쉬토역(Peshitto). 구약 전체와 신약 베드로후서 요한 2,3서 유다서외의 전부를
포함하였는데 그 뜻은 평범이나 단순을 의미하며 수리아 교회의 보편적 사용을 위한
역본이다. 사본의 총수는 177에 달한다고 하며, 제5세기에 속한다고 본다. 그리고 성
격상 이것은 ?식과 ?식의 중간 성격을 가졌다고 한다.
4) 필록세리안과 하클레안역(The Philoxerian Harkleian Syriac). 이것은 마북(Mabug)
감독 필록세니안을 위하여 어떤 폴리캅이라는 사람이 번역한 것인데 후에 하켈
(Harkel)이 교정격을 냈다. 성격상 이 역본은 문자적이어서 본문 비평에 도움이 된다.
2. 아메니안 역(Amenian Version)
이 역본은 성 메스롭(St Mesrop 395-400 A.D.)과 성 사학(St,Sahck)이 냇다고 하는데
아마도 수리아 역문을 참고한것 같다. 이 역본으가가 고대 사본은 모스코에 있는데 주
후 877년에 베낀 거이라고 한다. 이 역본에는 마가복음 끝에 있는 12절을 기입한 사본
(기입되지 않은 사본도 있음)이 셋인데 '이것은 장로 아르스티온의 부기한 것이다'고
하였다. 위의 장로에 관하여 파피아스는 아리스티온은 예수님의 문도중 일인이었다고
하였다.
3. 애굽역(Coptic Versions)
애굽 특히 알렉산드리아에는 많은 유대인이 살고 있었다. 그리고 이 도시의 도서관에
는 실제적으로 휘랍의 모든 문헌을 다 갖추고 있었다고 한다. 이 도시에서 LXX역 (The
Septuagint)이 시작되었고 (285 B.C) 유명한 필로(Philo the Jew B.C. 30-A.D. 50)가
그의 대작을 내놓기도 한 곳이다.
이들 애굽역 본문은 그연대를 제2세기까지로 보는데 매우 중요한 역본들이다. 그 이
유로서는 1)일찌기 역술된 점. 2)원본대로 지켜 베껴서 전하였고, 3)주로 ?사식 사본
족에 속하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지금 우리에게 전수 되고 있는 방언의 서본은 3개이
다.
1) 사히딕 또는 데바익역(Tje Sahidic or Thebaic Version). 이 역본은 상부 애굽에서
나온 것이다. 몰간(J,Pierpont Morgan)은 마태복음, 마가복음, 요한복음, 바울의 13서
신, 히브리서, 베드로 전후서, 요한의 3서신의 완전한 복사를 가지고 있다 한다. 애굽
역본중 가장 오래된 것으로 약 A.D. 200년으로 생각하고 있다.
2) 보하릭 또는 멤피틱역(The Bohairic or Memphtic 애굽하부에서 유행한 것으로 제17
세기에 와서 알려진 것인데 지금 100개의 사본이 전해오고 있다. 보하릭은 애굽에서
가장 문학적인 방언이었다. 제3세기 전반의 것으로 본다.
3) 중애굽역(The Middle Egypitian Version). 이 역본은 중부에서 유행했던 언어로 번
역한 것이다.
4. 아라비아역
이 역본들은 연대가 너무 늦은 것과 사본의 성격들이 잡성이기 때문?? 문 비평상 그
리 중요하지가 않다.
5. 라틴역
1) 고대 라틴역(The Old Latin Version). 이 역본은 아프리카 교부들의 인용문과 본
역문이 합치하기 때문에 아프리카가 그 기원인 것 같다. 제2세기 경에 되었을 것인데
식이다.
2) 라틴 벧게잇역(The Current Version). 제롬(Jerom)이 제4세기경에 작성한 것인데
구약은 히브리어에서 직역하였고, 신약은 고대의 라틴역을 다소 교정한 것이다.
본역의 사본들은 많아서 제6세기 이후로 인쇄술이 발명에 이르기까지 많이 나왔다.
번역본은 인쇄술 발명 후 첫 인쇄서란 점에서 의의가 크다. 번역본의 가치는 본문 비
평보다 그 의미를 해석하는데 많은 도움을 주는데 있다.
초기이 본문지식을 위한 세번째의 중요한 자료는 신약의 언어를 사용하며 그들의설교
나 책에 자유로이 사용한 첫 6세기 동안의 기독교 지도자와 교사였던 초대교부들의 글
에 나타난다. 대부분의 경우에 그 언급들은 단지 암시 뿐이었고, 또 정확하지 못한 점
도 있었으나 일치되었다. 인용된 대부분이가 병행구절은 무엇이 원문이었음을 자세히
보여준다. 그리고 이런 암시와 인용 또한 다양한 사본들의 모형을 확립하는 데 값진
단서를 제공해 주었다.
컨데 A.D.260년경 북 아프리카에 살았던 설교가 키푸리안(Cyprian)은 라틴 역본에서
부터 광범하게 인용하였다.
주요 교부들의 신약인용 회수에 대한 도해는 아래와 같다.
+------------------+--------+----------+----------+----------+--------+--------+
|교부 \신약의 구분 | 복음서 | 사도행전 | 공동서신 | 바울서신 | 계시록 | 계 |
+------------------+--------+----------+----------+----------+--------+--------+
|저스틴 | 286 | 10 | 6 | 43 | 3 | 330 |
|이레니우스 | 1038 | 194 | 23 | 499 | 65 | 1819 |
|알렉산드리아의 | 1017 | 44 | 207 | 1127 | 11 | 2406 |
| 클레멘트 | | | | | | |
|오리겐 | 9231 | 392 | 399 | 7778 | 165 | 17922 |
|티툴리안 | 3822 | 502 | 120 | 2609 | 205 | 7258 |
|? | 743 | 42 | 27 | 387 | 188 | 1387 |
|유세비우스 | 3258 | 211 | 88 | 1592 | 27 | 5176 |
+------------------+--------+----------+----------+----------+--------+--------+
네째로 성구집(Lectionaries)들로 이는 교회의 공중 예배에서 사용된 인용문인데 어떤
계속적인 본문을 지니고 있지는 않으며 주로 '어떤 경우엔' 또는 "주께서 가라사대'라
는 두 공식적인 말이 있다. 그 내용중 어떤 것들은 복음서와 서신들로부터 나온 것이
지만 앞서 언급된 자료보다응 덜 중요한데 그 이유는 불완전한 것이됴, 9세기나 그 이
후에 나온 것이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흩어진 사본들이 토기(Ostraca)에 기록된 것이 발견되었는데 이것들은 메
모장과 같은 거승로서 아주 가난한 사람들이 사용한 부서진 도기 조각들에 기록된 것
으로 발견되엇다. 그것들의 성격과 저작의 양때문에 그것들에 다 새길수는 없었다. 그
래서 복음서 전체 나 서신을 이런 토기에 쓸수는 없었다. 그리하여 그 내용이 지극히
단편적이긴 하지만 그당시에 인기있는 인용 방법의 하나였겠다.
이렇게 첫 14세기 동안 신약은 사본 전통에 의해 보존되어 왔다. 그리고 이런 문서들
의 대부분은 큰 중심교회와 수도원의 소유였거나 부유한 개인의 도서관에 보존되엇다.
그러나 15세기에 와서 두 가지 사건이 일어났는데 신약의 배포에 크게 영향을 주었다.
1437년에 굿텐베르크(Gutenberg)에 의한 인쇄술의 발명돠 1453년에 터키에 의한 쿤스
탄틴 노플의 함락이다. 콘스탄틴노플의 함락은 그리스, 로마 문명의마지막 직접 유인
이었던 비잔틴 제국의 해체를 가져왔다. 그 결과 궁궐은 헬라지식의 중심이 되었고 그
도서관은 고전의 가장 훌륭한 문서 수집과 문명된 세계에 있던 성경적인 사본을 소유
하게 되었다. 이런 것들의 다수는 잃어버렸으나 많은 수가 소아시아 전역에도 흩어져
있던 수도원들에 전해졌다. 다른 것들은 그들이 서방교회의 학파들에게 헬라지식인 유
유럽으로 서쪽을 향해 도망한 학자들이 가져 갔다.
고전 헬라어에 대한 관심의 재생결과는 헬라어 성경에 대해 새로운 친밀감을 가져 왔
는데 이는 서방에서 라틴 역본으로 거의 완전하게 대치되넛다. 학자들은 수년간 등한
시 되었던 이런 사본들을 수집하고 연구하기 시작하였을 당시 소개한 곳도 그것들의
유익에 관하여 토의를 하였다.
독일의 마인쯔(Minz)에 있는 그의 출판사로부터 구텐베르크(Gutanberg)에 의해 출판
된 첫 책은 지금 유명한 마자린(mazarin) 혹은 굿텐베르크라티어 성경인데 1456년에
출간되었다.
인쇄술의 발명은 쉽게 다량의 성경을 출판하게 하였으며 값은 저렴하여 성경을 손쇱
게 소유할수 있게 되었다.
새로운 성경연구의 열이 루터와 칼빈, 그리고 19세기 그들의 동료들을 장려하였다.
터의 독일어 성경은 그의 국민을 깨우치고 계발하는데 힘있는 능력이 되었다.
6 . 연도별 신약의 영역표
+-----------+--------------------------+---------------------------------------+
| 연 대 | 번 역 혹은 판 | 비 고 |
+-----------+--------------------------+---------------------------------------+
| 1382-1388 | Wycliff와 Purvey | 1848년 출판됨 |
| 1525 | Tyndale | |
| 1535 | Coverdale | |
| 1537 | Matthew's Bible | |
| 1539 | Taverner's Bible | Matthew 판의 개정판 |
| 1539 | Cranmer-Coverdale | The great Bible |
| 1557 | Granmer-Coverdale | 청교도들에 의해 사용됨 |
| 1568 | Bishops' Bible | Great Bible의 개정 |
| 1582 | Douay 혹은Rheims | 카톨릭 번역 |
| 1611 | King James Version | 때로 Authorized로 부름 |
| 1769 | Revised King James | 위원회의 산물임 |
| 1745 | Whitton | |
| 1755 | Wesley | 주가 붙은 신약 |
| 1796 | Newcome | |
| 1823 | Kneecome | |
| 1830 | Palfrey | |
| 1870 | Alford | 저명한 영국학자들에 의한 King James판 |
| | | 의 사적 개정판 |
| 1881-1885 | Revised Version | 영국과 미국인 학자들에 의한 King James|
| | | 판의 개정 |
| 1898 | Spencer | 카톨릭 |
| 1899 | Ballentine | 미국의 일상어역 |
| 1899-1900 | Twentieth Century | 20멍의 익며의 학자들에 의해 번역됨 |
| | | |
| | | |
| | | |
| 1913 | Moffatt | |
| 1923 | Ballantyne | Riverside New Testament |
| 1923 | Goodspeed | 미국역 성경의 일부 |
| 1923 | Montgomery | 'Centenary Translation' |
| 1926 | Way | 바울서신과 히브리서의 번역. 6판 |
| 1895 | Fenton, Ferrar | |
| 1941 | Calliner-Rheims | Douay Version의 개정 |
| 1945 | Verkayl | Berkeley역 |
| 1956-1959 | Wuest | 희랍 신약성서의 상세한 역 |
| 1946 | Revised Standard Version | 위원회의 산물 |
| 1950 | Williams | |
| 1958 | Amplified New Testament | 설명의 석의 |
| 1958 | Phillips, The New Testa- | 자유로운 석의 |
| | ment in Modern English | |
| 1961 | The New English Bible | 공동위원회 산물의 |
| 1950-1960 | The New Worle Translation| 여호와의 증인에 의한 번역으로 그들 특 |
| | | 유의 본문에 대한 해석을 강조함 |
| 1955 | H.J.Schorfield의 The Aut-| 저명한 유대인 신약학자들의 산물인데 신|
| | hentic New Testament | 약의 유대적 배경을 강조함 |
| 1958 | J.B.Phills | 1972년에 다시 개정했다. 자유로운 번역 |
| | The New Testament in | |
| | Moder English | |
| 1959 | The Holy Bible The Berke-| 신약은 1인에 의해 구약은 20인의 미국 |
| | ley Version in Modern | 학자에 의한 번역이다. 번역에 정확성을 |
| | English | 기한 보수적인 것임. |
| 1966 | The Jerusalem Bible | 로마 카톨릭 학파아의 본문 연구에 근거 |
| | | 한 분명하고 정확한 학적 번역이다 |
| 1966 | Today's English Version | 미국 성서공회의 산물로 아주 새롭고 신 |
| | | 선한 것으로 평범하게 영어번역에 집착했|
| | | 다. |
| 1971 | Kenneth Taylor, | 구어체의 보수적인 번역으로 가정에서 읽|
| | The Living Bible | 고 또 평상인의 성경 이해를 위해 계획된|
| | | 것임. |
+-----------+--------------------------+---------------------------------------+
7. 한국역 성경
한국역은 본역이 헬라원문에 기초하였고 수정영역을 참고한 것이다. 최근의 역
은 1887년 선교사들로 구성된 번역회에서 나온 것인데 1900년에 처음 인쇄하였다.
이것이 1904년에 수정재판을 냈고 1906년에 수정3단이 나왓고, 1910년에는 구약까지
다 마쳤다.
둘째로 개역이 나왔는데,
1937년 5월에 구약이 개역되었고, 1937년 6월에 신약이 완성되었다.
셋째로, 1967년 12월 15일 발행된 새번역 신약이다. 이 번역은 앞선 번역을 참고한
것이 아니다.
D. Eberhard Nestle, Novum Testamentum Grace 에서 번역하고, 1966년판 The Greek
New Testament (Bible Society Edition) 에 소제목을 그대로 사용하였다. 쉬운말로 번
역한 것이 특징이나 보수주의 학자들의 참여가 결여되어 번역상에 문제점은 있는 것으
로 보인다.
마지막으로 1971년 5월 10일에 발행된 공동번역 신약성서가 있다. 이 성경은 문학적
인 면에만 치중한 느낌이 있고 또 명성에 대한 구교의 채용으로 혼란을 야기 시킨다.
1. 고대 서적의 재료를 열거하고 간단하게 설명하라.
2. 고대 서적의 형태를 구분하고 특징을 열거하라.
3. 신약성경의 사본을 분류하라.
4. 사본형식을 네가지로 구분하고 약술하라.
5. 역본의 성격을 유형별로 간략하게 서술하라.
6. 신약성경 초기의 본문지식을 위한 중요한 자료 다섯 가지를 열거하라.
신약총론 2 (4-6장) (성경비평,신구약중간시대)
제4장. 신약성경 원문 비평원리.
철저한 기독교인 들이 신약성서 원문비평을 하는데 있어서 특히 강조해야할 것은
성서의 신적 보존설이다. 왜냐하면 바로 이 이론으로 부터 신약성서 원문역사의 중요
한 윤곽을 이끌어 낼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이론은 하나님이 관리하시는 섭리에 관한
성서의 일반적 원리에 근거를 두고 있다. "하나님 께서는 자의를 따라 모든일을 하신
다" 고 에베소서 1장1절에 말씀하신다.
하나님께서는 만물을 창조하셨을 뿐만 아니라 그 모든 피조물과 그 들의 행위를 영원
한 계획에 따라 지배하신다. 만물에 대한 하나님의 이 신적 지배는 우리 인간의 제한
된 마음으로는 충분히 이해할수 없는 신비다.
하나님께서 이 우주의 모든 활동과 운행을 지배하시고 인도 하시므로 신약성서가 모든
시대를 통해 내려오는 동안 그 성경에 있어서 가장 작은 변화 까지도 하나님의 특별한
돌보심과 배려의 대상이 된다.
1. 신약성서에 대한 신적 보존은 영감받은 그 원문의 무오성은 보존하는 것이 없
다.
지난 백년 동안 많은 고대 서적들의 원본은 여러세기 동안의 망각으로부터 구출되
었다. 애굽의 무덤에서 바벧론 언덕에서 고대 수도원의 시렁에서 이들 고대 문학작품
들이 발견되어 현대의 주목거리가 되었다. 그리고 이런 것은 하나님의 섭리를 따라 된
것이므로 어떤 점에서는 이 모든 고대서적들도 신적으로 보존되었다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신약성서에 대한 하나님의 신적 보존은 오랫동안 망각되었던 이를 고
서적들의 보존과는 매우 다른 것이다. 신약성서의 보존이란 그 목적이 원문 보존 뿐만
아니라 완전성의 보존까지도 말한다. 하나님께서 단순히 현존하는 사본 중의 어디엔가
그 원문이 있게끔 보존하시고 자기 백성들로 하여금 성서를 다해 그것을 발견해 내도
록 신약성서 원문을 보존하던 것이라면 무오성의 보존이란 불가능한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그들의 신약성서 사본들을 무오한 것으로 생각할 수 없다. 왜냐하
면 그들이 참된 원문을 발견했다고 확신할 수 없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단지 영감
을 받은 신약성서 원문을 보존하시는 그 이상의 일을 하심에 틀림 없다. 하나님께서는
틀림없이 공개적인 방법으로 그런일을 하신다. 하나님께서는 온 세상으로 하여금 원문
이 어디나 있으며 그것이 어떤 것인지 알 수 있는 그런 방법으로 보존하신다. 하나님
께서는 이 원문을 은밀한 방법으로 또는 수백년 동안 어떤 상자 속에다 넣어 두심으로
또는 어떤 도서관의 눈에 띄이지 않는 낡아빠진 시렁 위에다 두심으로 보존하신 것이
아니라 교회에서 끊임없이 사용되어 짐으로 모든 사람들이 볼 수 있는 그러한 공개적
인 방법으로 보존하신다. 성서 원문을 취급하는 어떠한 방법이든지 하나님께서 주신
방법 이외로는 하나님의 목적에 합치하지는 않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성서를 자기
백성들 앞에 그들의 행로의 지침과 동시에 신앙의 근거로 남겨 두셨다.
2. 신적 보존은 그 자체가 헬라어 신약성서 원문에 집중되었다.
헬라어 신약성서 원문을 보존하는 데 있어서 하나님의 섭리와 그 원문을 타국어로
번역하는 데 있어서 하나님의 섭리의 역사는 구별되어져야 한다. 헬라어 원문에 대한
하나님의 섭리는 전 시대를 통해 순수하게 보존하면서 직접적으로 역사하신다. 그러나
번역에 있어서는 간접적으로 역사하신다. 순수한 헬라어 신약성서 원문을 보존함으로
써 하나님께서는 세가지의 일을 행하신다. 첫째는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들로 하여금
번역에 있어서 필요한 사업을 수행하도록 격려하신다. 둘째는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들
이 이러한 사업을 수행하는데 필요한 수단들을 제공해 주신다. 세째는 하나님께서 자
기 백성들에게 어떤 표준을 주시어 그들로 하여금 대조도 해보게 하고 틀린 곳이 있으
면 정정도 하게 하신다.
어쨋든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번역이 과오나 심리에는 어떤 심각한 오류로부터 보호
된다고 약속치는 않으신다. 이러한 약속을 하신다는 것은 헬라어 원문을 불명예스럽게
만들 것이다. 왜냐하면 다른 언어로 번역된 원문들도 그 헬라어 원문과 똑같은 권위를
가질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신약성서에 대한 하나님의 신적 섭리는 그 자체가 특
별히 헬라어 원문에 집중되는 것이다. 다만 이 원문에 한해서 우리들은 그것이 전시대
를 통해 하나님에 의해 순수하게 보존되어 왔다고 말할 수 있다.
3. 신적 보존은 헬라교회권 내에서 작용한다.
신약성서에 대한 하나님의 신적 섭리는 헤라어 원문에 집중되었기 때문에 헬라어를
사용하는 교회권 내에서 작용하였다고 할 수 있다. 거기서는 헬라어 시약성서 사본들
이 읽혀졌고 복사되었다. 사실 하나님께서는 헬라어를 사용치 않는 다는 교회들에 관
해서는 별도의 역사를 하셨다. 그리하여 하나님이 인도하시는 섭리아래서 시리아,애집
트, 라틴 역본들이 시리아인, 애굽인 그리고 특히 서방교회들을 위해 준비되었다. 그
러나 이들 비헬라어 사용의 교회들이 헬라어 신약성서 원문이 보존된 속에서 하나님에
의해 신적으로 사용되어져야 한다는 것은 불가능하였다. 오직 헬라어판 사용이 교회속
에서만 하나님의 신적 배려가 역사하시는 지역이 발견된다. 다른 말로 하면 헬라어 사
용 교회는 헬라어 신약성서의 보존을 위해 하나님의 특별한 대리자로 선택되었다. 그
이유는 헬라교회의 이론들이 어떤 다른 교회들의 것보다 더 순수하다든지 그 권위가
더 커서가 아니고 헬라어를 사용한다는 그것이 단순히 하나님의 섭리의 역사를 위한
고유한 영역이 된다는 이유다.
4. 신적 보존은 성서의 증거를 통해 작용한다.
유명한 화란 신학자 아브라함 커이퍼(1874) 가 관찰했던 바와 같이 성서에 대한 성
령의 역사와 중생한 자의 영혼 속에서 하는 성령의 역사 사이에는 비슷하며 신적으로
이루어진 조화가 있다. 성서 속에서 성령은 그 조화와 그리고 그 최고의 궁극적 국면
을 통해 하나님에 관한 진리 (그 진리는 유일한 것이다)를 계시해 왔다. 그러나 중생
한자의 영혼 속에서는 이 궁극적 진리를 수용하고 파악할 수 있는 신앙의 기능 즉 하
나님이 주시는 능력은 재창조한다. 인간이 최초로 창조되었을때 이 능력을 가지고 있
었다. 그러나 죄로 인해 상실해 버리고 말았다.
그러므로 성령은 인간의 죄로 인해 생긴 모든 비정상적인 것들을 제거하시고 신앙
의 기능을 회복하신다. 그러면 비로소 하나님의 진리에 대한 인간영혼의 정상적인 반
응이 생긴다. 그때에야 비로서 마음문이 열리고 성서로 부터 비치는 하나님의 진리가
그 모든 영광의 충만함 속에서 빛을 발한다. 이렇듯 하나님의 진리에 대해 죄인의 마
음을 열어 거듭나게 해주는 성서의 역사를 신학자들은 성령의 증거라 부른다. 신자들
은 성령의 이러한 증거에 위해 성서에서 말하는 모든 생각들은 참될 뿐만 아니라 이러
한 생각들이 표현하는 말이 곧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확신을 갖게 된다. 이러한 사실은
바울의 다음과 같은 말 속에서 볼 수 있다. "만일 누구든지 자기를 선지자나 혹 신령
한자로 생각하거든 내가 너희에게 편지한 것이 주의 명령인줄 알라" (고전 14:37).
성령의 증거롤 통해 신자들은 성서가 하나님의 책인 줄로 깨닫게 되며 성서의 말씀
이 곧 하나님의 말씀임을 깨닫는다. 모든 기독교인들의 지난 여러 세대를 통하여 이러
한 심적 증거를 경험하였다. 그렇다고 모두 다 같은 확신이나 경험을 맛본 것은 아니
다. 신약성서에 나타난 성려의 증거는 희랍교회 지역 내에서는 특별한 능력으로 정확
히 나타났다. 이는 하나님의 진리가 신약성서를 통하여 역사하였기 때문이다. 희랍어
를 모르는 초대 기독교인들은 신약성서의 성령에 대한 증거에 뚜렷하지 못했다. 이것
은 그들이 직접 희랍어 성서를 대하지 못하고 번역된 성서를 보았기 때문이다. 시리아
어로, 콥트어로, 라틴어로 옮겨지면서 많은 오역이 있었으나 이러한 오역이 제거되지
아니 하였다.
희랍교회 지역 내에서는 성령의 증거가 계속 나타나고 일진월장하였다. 처음 3세기
동안에는 성령의 역사로 서방에 널려있던 신약의 단편책들을 모았고 권위있는 정경
형성에 성령의 역사가 나타났다. 4세기 중간에는 완성 단계에 이르러 교회가 신약성
서문제에 관심을 기울였고 성령의 지시로 교회가 이일을 담당하였다. 4세기 중반 부
터는 성령이 희랍어를 사용하는 교회에 역사하여 그 간의 거짓된 책들이 제거되고 참
성서가 이루어졌다. 이것은 하나님의 특별한 섭리로써 완성된 것이다. 이렇게 성령의
인도로 중세기 희랍교회는 떳떳하게 신약성서를 소유케 되었다.
신약은 성령의 역사하신 증거이므로 철저한 기독교인들은 절대 신뢰했다. 철저한
기독교인들은 신약성서를 읽고 지위를 구별할 줄 안다. 또한 역사상에 나타난 대로 성
령의 역사하심이 어떠했던가는 희랍교회가 사용한 이 신약으로 증거되는 것이다. 16세
기와 17세기에 이러난 신교는 사실상 희랍교회의 전통으로 같은 성령의 역사가 나타난
것이다. 그런데 18세기에는 합리주의가 머리를 들고 일어나서 오늘에 이르기까지 유해
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 현대의 성령에 대한 불신앙으로 인하여 이 성려의 확실한 증
거가 어두워지고 교회는 또 다시 신약정서(신약정서)에 관하여 혼란을 빚어내고 있다.
그러나 이 우주의 황혼이 다가오는 이때에도 성령의 증거는 T. E. 불곤(1813-1888)과
치체스터 대학장과 또한 다른 철저한 기독교 학자들에 의하여 환히 비치고 있으며 흠
정역 성서와 일찍 번역된 신교성경들을 믿는 수천의 신자들에 의하여 성령의 증거는
나타난다.
5. 대다수의 성경 사본들은 하난님의 섭리로 보존되고 공인된 성서이다. 하나님의 특
별하신 섭리는 희랍교회에서 성령의 증거를 통해서 세 가지 사실을 예비하셨다.
첫째, 믿을 만한 원문이 만들어 졌고, 둘째, 이 믿을 만한 원문이 읽혀졌으며 또한
재복사 되었고 세째, 믿지 못할 사본은 읽혀지거나 복사치 못하게 하여 비교적 짧은
기간에 망각하도록 하였다. 이렇게 하나님의 특별하신 섭리는 신약을 사본하는 필사자
들을 감독하고 조정하였으며 희랍어를 사용하는 기독교인들로 하여금 읽고 보존케 하
셨다. 필사자들의 과오는 희랍어를 사용하는 교회를 통하여 수정되는 하나님의 간섭이
있었다. 잘못된 사본들은 잠간 동안 비쳤던 것으로 그후 제거되고 사라지게 되었다.
믿을 만한 사본만이 모든 희랍교회 를 통하여 보존케 될 것이다. 그리고 이 믿을만한
사본만이 시대의 진전에 따라 증판되었으며 오늘날 우리가 확신하는 것은 대다수의 사
본들이 원문의 재판이라는 사실이다.그런고로 신약성서는 하나님의 섭리로 보존되고
공인된 것이며 정경에 하나님의 능력이 임하고 하나님이 친히 나타나 희랍교회를 섭리
하신 것이다.
또한 하나님의 신령한 허락이 임했다. 이 성서를 일반적으로 비잔틴 성서라 불리운다.
이것은 대부분의 비쟌틴 시대 (312-1453) 에 희랍교회 정경으로 사용되었기 때문이다.
이것은 방대한 신약 사본 속에 나타나 있는 것이요, 흠정역과 신교번역 성서의 원문이
었다.
6. 대다수의 사본성서는 표준성서이다.
많은 신약 사본 가운데서 발견된 비쟌틴 성서는 정경으로서 희랍어를 사용하는 교
회를 통하여 사용케 하였으며 성서에는 하나님의 허락하신 인장이 찍혀있다. 이것은
특출한 정경이다. 신약 사본들 어느것 보다도 정확하고 원본에 가깝다. 환언하면 비잔
틴 성서가 표준성서이다. 모든 신약성서 사본들이 이 비잔틴 성서를 따라야 하고 참고
해야 한다. 이 비잔틴 성서에 반돼되는 뜻이나 내용을 참고해서는 아니된다. 어떤귀절
은 비잔틴 이외의 성서들이 단어나 구나 절에 있어서 확실한 것이 있음도 사실이다.
그러나 이러한 것은 어떠한 영향보다는 뜻을 밝힐 뿐이요, 경건히 보존되고 공인된 성
서는 비잔틴 성서임을 항상 고수해야 한다.
1. 성경의 신적 보존설을 개략적으로 서술하라.
2. 성경의 원문과 번역에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섭리를 대조 설명하라.
3. 신약 성경을 보존하려는 희랍교회 지역 내에서의 성경의 역사를 기술하라.
4. 표준 성서에 대하여 상술하라.
제5장 신구약 중간시대
1. 중간시대
중간시대란 구약과 신약 사이의 시기를 말하는 것으로 BC424년으로 부터 기원전 5세기 까지의
기간을 말한다.
1) 파사시대 (성경의 바사, 페르시아)
BC536년 부터 BC331년 까지
2) 헬라시대
BC331년 - BC167년
(1) 헬라시대 BC331년 - 323년
(2) 애굽시대 BC323년 - 198년
(3) 수리아시대 BC198년 - 167년
3) 마카비시대
BC167년 - BC63년
4) 로마시대
BC63년 - BC5년
2. 파사시대
1) 영적쇠퇴기 : 학개와 말라기서에서 참조할 것.
2) 대제사장들이 정치 권력을 잡음.
3. 알렉산더 대왕
1) 알렉산더의 배경
(1) 마케돈의 필립은 희랍 도시국가를 통일한 후 그를 축하하다가 저격당함.
(2) 필립의 아들 알렉산더가 자기 아버지를 계승하여 왕이 된 후 그는 위대한 희랍
철학자 알리스토틀 밑에서 수학하여 희랍문화에 헌신함.
2) 알렉산더의 전과
(1) 그가 희랍 반도를 점령한 후 파사를 대항하여 소아시아 지방 으로 진격(334년
BC)
(2) BC333년에는 그는 잇수스에서 다리우스 왕을 만나 파사정복의 길을 얻어냄.
(3) 그는 애굽으로 계속하여 진격(332년 BC에는 드로를 점령함).
애굽에 들어간 알렉산더는 자기의 이름을 따라 알렉산드리아로 시를 건설하고 상업과
희랍문화의 중심지로 삼고 다리우스의 평화조약을 요청 받았으나 이를 거절하고 파사
를 점령함(331년BC)
(4) 이듬해 인도의 인디스강을 공격하였으나 군인들의 피로로 바빌론으로 회궁함.
(5) BC323년, 그의 나이 33세시에 말라리아와 음주 방탕한 결과로 죽음.
3) 알렉산더의 영향
(1) 그는 고대 세계에 희랍문화와 상업의 중심도시를 건설하고 그곳에 희랍인들을 이
주시킴. (약 70개 도시)
(2) 희랍문화는 알렉산더가 정복한 모든 곳에 침투하기를 시작함.
(3) 희랍어가 고대사회 전체에 확산 사용됨. (오늘날 우리가 갖고 있는 수천개의 파
피리가 모두 희랍어로 되어 있음)
(4) 기독교를 위한 두가지 중요한 준비작업
(까) 설교를 희랍어로 누구에게나 할 수 있음.
(Universal Preaehing)
(다) 누구나 읽을 수 있는 책이 가능함. (70인 여과 신약 희랍어 성경)
4.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와 마키비 혁명
1) 알렉산더 사망 이후 주전 301년 입수스(Ipsus) 전장터에서 희랍제국은 네 조각
으로 분열되었다. 애굽과 팔레스틴은 틀레미 소터 (Ptolemy Soter) 에게, 그리고 수리
아는 셀리우쿠스(Seleucus) 에게 통치 되었다.
2) 틀레미 왕조는 주전 198년까지, 셀리우쿠스 왕조가 유다를 수리아에 병합할 때
까지, 팔레스틴을 통치했다. (셀리우쿠스 왕조는 자기들을 희랍문화의 사도들이라고
까지 불렀다)
3) 팔레스틴을 점령한 셀리우쿠스 왕조의 지배자 안티오쿠스는 그의 아들 셀리우쿠
스 피로파터 (Selecus Philopater) 에게 대권을 넘겨주었다.
4) 그러나 셀리우쿠스 필로파터는 그의 아들 중 하나인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
(Antiochus Epiphanes) 에게 독살 당하고 말았다. (주전 175년)
5) 에피파네스라는 이름의 뜻은 신의 현현이라는 말이지만 그의 만행으로 인해 사
람들은 그를 에피마네스(Epimanes) 즉 '미친놈' 이라고 불렀다.
6) 당시 국수주의자 중 지도자로 있었던 대제사장 오니아스 3세(Onias III)와 그의
동생이며 헬레니스트로 알려진 야손(Jason) 사이에 무서운 암투가 있었다.
7) 야손은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에게 거액의 돈을 약속하고 자기 형의 대제사장직
을 취한 후 예루살렘을 헬라화하는 일에 박차를 가했다. 그는 예루살렘을 헬라 도시인
안디옥 시민으로 등록케 하고, 성전 지하실에는 희랍의 체육관을 건립하였다. 청년들
은 물론 제사장까지도 체육에 참여케 하고, 할례와 같은 유대 종교의 흔적을 제거하도
룐 노력하였다.
8) 안티오쿠스는 여러차례 애굽에 원정을 갔다. 그의 2차 원정시 팔레스틴에서는
그가 죽었다는 소문이 나돌자 많은 유대인들은 크게 기뻐하였다. 이 소식을 들은 안티
오쿠스는 하루 동안에 유대인 4만명을 학살하였다. 또한 수많은 유대인들은 노예로 팔
렸고, 성전은 약탈당했다.
9) 또 다시 애굽에 원정을 하던 중, 그는 로마군에 의해 회군하고 말았다. 그는 자
기가 당한 굴욕을 돌아오는 길에 예루살렘에다가 퍼 부었다.
10) 예루살렘은 더 이상 유대인의 중심지가 아니고 이제는 희랍문화의 요새지가 되
었다. 예루살렘이 당했던 가장 큰 목욕은 성전을 제우스신전으로 둔갑을 시킨 일이다.
주전 168년 12월 15일에는 소제를 드리는 제단 꼭대기에 제우스신에게 제사하는 제단
을 만들어 세웠다. 유대인들은 오늘까지도 이 날을 "황폐의 증오"라고 부른다. 그로부
터 10일 후 즉 12월 25일에는 돼지를 희생제물로 잡아 그 피를 거룩한 곳에 뿌리기도
했다. (I Macc 1:54, 59:Josephus, Ant. XII. 5, 4; 단 9:27, 11;31;12;11마24;15).
유대인들은 안티오쿠스의 이같은 죄를 더 이상 용서할 수가 없게 되었다.
11) 주전 167년경 예루살렘 서북쪽에 있는 모데인(Modein)의 제사장 마타티아스
(Mattathias) 가 일어난 안티오쿠스의 희랍화운동에 항거하는 운동을 일으키게 되었
다.
(1) 그는 이방 희랍신들에게 희생을 바치는 것을 거부했다.
(2) 그는 그같은 제물을 바치는 유대인 배신자들을 잡아 살해했다.
(3) 그는 모데인 지방에 와서 헬라화운동을 벌리고 있는 안티오쿠스의 하수인들
을 살해했다.
(4) 마타티아스는 그의 다섯 아들들과 함께 산으로 도망해 갔으나 열심있는 유대
인들이 그들을 따라 산중에 모여들었다.
(5) 팔레스틴을 헬라화하려는 시도에 대항하여 이들은 게릴라 작전으로 맞섰다.
(6) 배신자들은 살해 되었고, 이방신전은 파괴되었으며, 유대인의 의식은 다시
회복되었으며, 회당이 다시 열리게 되었다.
(7) 마타티아스는 주전 166년에 자기의 세째 아들인 유다 마카비(Judas
Maccabeus- 두드리는 망치라는 별명) 에게 자기의 자리를 물려주고 노사(로사) 하였
다. (I Macc. 2:50에 보면 마타티아스는 자기 아들들에게 "율법에 대하여는 열심을 다
하고, 우리 조상들의 계약을 지키기 위하여는 네 생명을 바치라" 고 명령하고 있다.)
12) 유다 마카비(166-161BC)의 공적은 유대 역사에 특기할 만하다.
(1) 안티오쿠스는 유다 마카비의 반란을 평정하기 위하여 6,000명의 군대를 두패
로 나누어 파견하였다. 그러나 유다는 두 전쟁에서 모두 승리를 거두었다.
(2) 안티오쿠스는 다시 60,000명의 군대를 파송하여 마카비 반란군 평정에 나섰
다. 당시 6,000명의 군대를 갖고 있던 마카비는 두려워 하는 이는 모두 집으로 돌려보
내고 300며의 정예군으로 야간에 수리아군을 기습 공격하여 도주하는 그들을 맹타하였
다.(BC166년)
(3) 유다는 예루살렘에 입성하여 성전을 청소하고 여호와께 다시 헌당하였다. 이
날이 BC165년 12월 25일로 요한복음 10장 22절에 나오는 수전절(Festival of
Hanukkah)이다. 이 때가 돼지로 제물을 바쳐 하나님을 모독한지 3년이 지난 후며, 유
다는 BC164년에 성전 재봉헌을 위한 헌당식을 성대히 거행하였다.(I Macc. 4:52-59;
Josephus, Ant. XII. 7.7; 요 10:22)
(4)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는 주전 164년 팔레스틴의 반란을 평정키 위해 원정을
오던 도중에서 죽었다.
(5) 그리하여 유다는 예루살렘에서 전권을 잡고 주전163년에는 팔레스틴의 치리
자(governor)로서 인정을 받게 되었다.
(6) 그후 주전 160년에는 유다와 그형제들이 완전 독립을 위해서 계속 투쟁을 벌
였으나, 유다가 죽고, 그 동생 요나단(대제사장인 Jonathan)이 군대를 지휘하게 되었
다. 이 때 수리아에는 내분이 있어, 유대인들은 이 기간동안 평화를 유지할 수가 있었
으며, 요나단은 로마와 스팔타와의 동맹을 맺어서 외세의 보호까지 받게 되었다. 그러
나 주전 142년 트리포의 수리아 장군에게 요나단이 살해되므로 마지막 남은 동생 시몬
(Simon)에게 지도권이 넘어갔다. 그해 수리아 왕 디메트리우스 2세 (Demetrius II) 는
유대민족에게 완전 독립을 허락했다.
5. 헤롯대왕
1) 유다 마카비의 형제 요나단과 시몬의 지도하에 주전 63년 까지 즉 로마세력이
들어오기까지, 팔레스틴은 마카비 가족의 치리하에 있었다(약 80년간 국가적 자유가
지속 되었음).
2) 이같은 세상 권세잡은 이가 종교적 지도권까지 겸하게 되므로 자연히 마카비 가
문의 영적 타락상이 노출되기 시작했다.
3) 마카비 통치 후기에 안티파터(Antipater)라는 이의 이름이 중요하게 등장한다.
그는 이두메인으로 로마정부 하에서 자기 세력을 확장시키려고 노력을 한 사람이다.
4) 그가 유다의 행정관으로 있을때, 자기 아들 헤롯을 갈릴리 지방의 영주
(tetrarch)로 임명하였다. 이 때 헤롯은 갈릴리 지방의 백성들을 괴롭히던 도적떼들을
소탕해 냄으로 그의 실력을 입증해 냈다.
5) 주전 40년 안티파퍼가 죽은 후 헤롯은 유다의 왕으로 거의 지명을 받게 되었다.
주전 37년까지 그는 유대인들의 반대를 거의 무마시키고 사실상 왕이 되었다.
6) 헤롯의 33년 통치기간을 3등분하여 설명하면 대략 다음과 같다(Fairweather,
FETA, p. 194).
(1) 처음 12년간 (37-25BC)은 자기 권력을 안정키 위해 힘을 사용하였다.
(2) 다음 12년간 (25-13BC)은 그의 통치 기간중 황금기라고 할 수 있다.
(3) 마지막 9년간 (13-4BC)은 비인간적 처사로 잔인하고 난폭한 생활을 보여준
다. 그는 자기의 두 아들을 돼지처럼 죽이기까지 한 폭군이 되었다.
7) 헤롯의 치적을 살펴 간추려 보면 다음과 같다.
(1) 그는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처럼 희랍화운동을 하였지만 안티오쿠스보다는
기술적으로 일을 처리함으로써 비교적 성공한 예가 많다.
(2) 그는 전람회, 운동회, 원형극장 건립, 그리고 헤롯을 따르는 청년들을 따로
조직하는 일까지 했다.
(3) 그는 예루살렘에 안토니아라고 부르는 요새를 확장시켰다.(행21:34 참조)
(4) 그는 스룹바벧의 성전을 재건하였다. 유대인들은 처음부터 그의 계획에 회의
적이었기 때문에, 헤롯도 아주 조심스럽게 그들을 해하지 않으려고 애를 썼다. 성전은
주전 20년 또는 19년에 시작 되었다. 18개월 동안에 성전의 본전은 완성되었지만, 주
후64년까지 성전 전체의 완공은 되지 않았다. 요2:20에서 유대인들은 이 성전이 46년
간 지어졌다고 말하고 있다.(그 당시가 주후26년 또는 27년)
8) 헤롯은 그리스도의 출생시 팔레스타인의 통치자로 있었다.
(1) 헤롯과 동방 박사 (마2:1-12)
(2) 헤롯의 베들레헴 유아살해(마 2:16-18)
9) 신약 성경에는 헤롯이라는 이름을 가진 인물들이 여럿이 나온다. 다음은 헤롯
족보를 보여주는 도표이다
헤롯 대왕 (마 2장)
(a) (b) (c) (d)
| | | |
+------------+ +-----------+ | +--+
빌립 아리스토블르스 빌립 +-------+-------+
(눅3장) | (마14장) | |
+------+---------------------------+ 헤롯안티파스 아켈라오
| | (눅3장) (마2:22)
헤롯 아그립바1세 헤로디아
(행 12장) |
+-----------------+----------+ 실로매
헤롯 아그립바2세 버니게 | (마14장)
(행25장) (행25:13,26:30) |
|
드루실라
(행24:14)
<도표설명>
* 통치자의 위에 오른자의 이름 아래에는 줄을 그었음.
** 두줄을 그은 것은 결혼 관계를 가리킨다.
*** 헤롯 대왕의 열명의 아내중 성경과 연관된 네 여인의 이름은 다음과 같다.
(a) 예루살렘의 클레오파트라
(b) 죤힐카누스의 손녀 미리암네
(c) 대제사장 시므온의 딸 미리암네
(d) 사마리아 여인 말타스
10) 헤롯 대왕의 치리로부터
유다-로마 전쟁까지 팔레스틴의 통치권자의 개요는 다음과 같다.
--+--------------------------------------------------------------------------+--
| 37BC 37BC |
| 헤롯대왕이 팔레스틴 전역을 왕으로 통치 |
| 4BC ------------------+------------------------+------------------ 4BC |
| 유다 | 이두레아 | 갈릴리 |
| 사마리아 | 트라코니티스 | 베뢰아 |
| 이두메 | | (헤롯 안티파스가 |
| (아케라우스가 | (빌립이 이 지방 | 이 지방의 영주로 |
| 이지역의 치리자) | 의 영주로 다스림) | 다스림) |
| |
+-------- AD 6년 -------+ | |
| +---------AD 34년--------+ |
| 로마총독의 통치 |
| +---------AD 37년 -------+ |
+----------AD 41년-------+ +------- AD 39년 --------+
| 헤롯 아그립바 1세 |
+----------AD 44년---------------------------------------- AD 44년 |
| 로마 총독의 통치 |
| +----------AD 53년-------+ AD 56년 또는 |
| | 헤롯 아그립바2세 +------AD 61년-----------+
| | 아그립바 2세하에 |
| | 부분적 통치 |
AD 66년 AD 66년
1. 중간 시대를 연대별로 개관하라
2. 알렉산더의 영향에 대하여 약술하라
3.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의 희랍화 운동에 항거하는 측면에서 마카비 혁명을 묘사하
라.
4. 헤롯 대왕의 치적을 열거하라
제6장 로마제국
신약성경이 씌어질 당시 전 문명세계는 별로 알려지지 않은 극동의 몇몇 나라를 제
외하고는 모두 로마의 지배 아래 있었다. 당시 로마제국은 서쪽으로는 대서양에서 부
터 동쪽으로는 유프라테스강과 홍해까지, 북쪽으로는 론(Rhone)강, 다뉴브(Danube)강,
흑해와 코카서스(Caucasus) 산맥으로 부터 남쪽으로는 사하라 사막에 이르기까지 하나
의 거대한 제국을 형성하고 있었으며, 신약 성경에서 "왕"(벧전 2:17), 혹은 "아구스
도"(눅 2:1)라고 기록하고 있는 황제에 의해 실제로 통치하고 있었다.
로마라는 이름은 이탈리아의 수도의 명칭을 그대로 따온 것인데, 로마제국은 바로
그곳에서 일어났다. B.C.753년 그들이 처음으로 창건 되었을때, 그들은 인접한 작은
마을들의 연합체로 이루어져 한 왕의 지배를 받던 공동체에 지난지 않았다. 5세기 초
엽부터는 공화정의 체제 아래 점차적으로 견고한 정치적 조직을 이루게 되었다. 주변
에 위치한 동맹체들과의 동맹과, 북쪽의 에트루리안족, 남쪽의 여러 다른 부족들과의
계속되는 전쟁의 승리로 로마는 B.C. 265년에 이르러서는 이탈리아 반도의 종주국이
되었다. 정복된 민족들은 평화조약으로 묶여있다가 점차로 로마의 지배아래 흡수되었
다.
그후 로마는 2세기 동안 지중해 서쪽의 주된 해상세력인 카르타고와 큰 싸움을 치
렀다. 카르타고는 원래 페니키아(Phoenicia)의 속령이었으나 알렉산더 대왕에 의해 종
주국이 붕괴되자, 독자적으로 처신할 수 있게 되었다.
페니키아의 본을 따라서 카르타고는 부유하고 강력한 나라가 되었다. 그들의 배는
지중해의 무역품들을 운송하였다. 그들의 문화는 성격상 동양적이었고 그들의 사회는
용병에 의해 유지되는 과두정치체제였으며 독재법에 의해 다스려지고 있었다. 로마가
팽창해감에 따라 그들은 자연히 카르타고 제국의 전진기지들과 충돌을 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두 개의 문명이 그 종족의 기원이나 정치이론에 있어서 서로 상이하다는
사실을 차치하고서라도 한 영토에서 두 세력이 공존할 여지가 없었으며 따라서 필연코
어느 하나가 물러서야만 했다. 그들 사이의 전쟁은 B.C. 146년 로마장군 스키피오 에
이밀리아누스(Seipio Aemilianus)가 카르타고의 수도를 정복하고 초토화한 후 끝이 났
다. 그 결과 로마는 스페인과 북 아프리카까지 지배하게 되었으며 그와 동시에 마게도
니아가 로마의 영토가 되었고 같은 해 (B.C.146) 고린도의 점령으로 아가야(Achaia)가
로마의 지배 아래 들어왔다.
B.C.133년에는 버가멈(Pergamum)의 왕 아탈루스 3세 (Attalus III) 가 죽으면서 자
기의 영토를 로마에 넘겨주었다. 그때로부터 로마는 아시아를 조직했다. 소아시아 동
부지역에서의 전쟁은 폼페이 장군이 본도(Pontus)와 코카서스(Caucasus)의 정복을 마
칠 때까지 계속되었다.
B.C 63년에 그는 시리아를 로마의 속령으로 만들었고, 유대를 합병했다. B.C.58년
과 57년에 가이사(Caesar)는 그 유명한 골 (Gaul)지방 원정을 감행하여 그곳을 로마제
국으로 만들었다. 이와같이 하여 거의 500년 간 계속된 전쟁을 통하여 티베르(Tiber)
강가의 이름없는 한 부족에서 시작된 로마는 세계의 대제국이 되었다.
이렇듯 급격한 영토의 확장은 로마인들의 생활에 큰 변화를 가져다 주었다. 권력의
맛을 알게 된 군대의 지도자들이 군대를 이용하여 외국을 정복하였을 뿐만 아니라, 국
내에서 자신들의 정치적인 지위를 강화하는 데도 사용하였다.
카르타고와 그리이스의 정복, 그리고 줄리어스 시이저의 죽음 사이에 거쳐 흘러간
한 세기는 계속적인 내란으로 점철되었다. 마리우스(Marius), 술라(Sulla), 시이저
(Ceasar), 안토니(Antony), 그리고 옥타비안(Octavian) 등은 계속해서 자신이 로마제
국의 주인의 자리를 유지하기 위하여 투쟁했으나 결국 원로원에 위해 아구스도
(Augustus)라고 불리운 옥타비안이 B.C.30년에 그의 정적들을 물리치고 첫 황제가 되
었다.
1. 아구스도 (Augustus 27 B.C.- A.D.14)
그의 통치 아래 로마의 주권(imperium)이 완전히 확립되었다. 전쟁에 지친 시민들
은 평화를 갈망하였다. 아구스도는 제국내에서 첫번째 시민인 princeps가 되었다. 그
는 현명하고 어질게 통치했다. 정치적으로 새로이 등장한 참 주제는 옛날의 공화제와
줄리어스 시이저가 옹호했던 독재체제를 절충한 것이었다. 원로원(Senate)은 이론상의
통치기관으로 존속되었다. B.C.27년에 원로원은 아구스도에게 제국 군대의 원수직을
수여하였다.
B.C.23년에 그는 또한 호민관의 직위를 부여 받았는데, 그것은 그가 평민들을 다스
릴 권한이 있으며 백성들의 영원한 대표자가 된다는 뜻이었다. 그에게는 원로원에서
첫 회의의 주제발언을 할 수 있는 특권과 함께 회의를 소집할 수 있는 권한이 주어졌
다. 그의 모든 권리들은 권력의 비호아래 된 것이라기 보다는 모두 법적 근거 위에서
주어진 것이었다.
아구스도의 통치기간 동안 많은 개혁이 있었다. 원로원에서 필요없는 인원들이 제
거되었다. 대부분의 군대가 해산되었고 제복을 벗은 무관들은 속국이나 매수한 지역에
정착시켰다. 그런 후에 하나의 정식 전문 군대가 조직되었는데 그것이 시민들을 위한
학교가 되었다. 직위해제를 당한 군인들에게는 상여금을 주어서 속국의 영토에 정착케
했고 그들은 그곳에서 편안히 살면서 로마에 충성하는 공동체의 지도자들이 될 수 있
었다.
아구스도는 또한 사람들의 도덕수준을 높이려고 했다. 그는 국가 종교를 부흥시켰
고 많은 사원들을 짓게 했다. 제국숭배. 즉 국가로서의 로마에 대한 숭배는 속령들에
도 도입되었다. 제국내의 여러 지역에서 그의 의사와는 관계없이 황제 자신이 "주와
신"(Dominus et Deus)으로 숭배되었다. 주전 18. 19세기의 쥴리안 법은 결혼을 장려하
고 가정을 이루게 함으로써 가족생활을 회복시키려 하였다.
제국 전체를 견고케 하기 위해 그는 군대를 모집하였고, 세금을 거두기 위한 근거
로써 인구와 재산 조사를 실시했다. 스페인과 골, 알프스 지역들이 정복되었다. 그는
변방의 방어를 강화하였다. 그러나 튜트버그(Teutoberg) 숲속에서 그의 군대가 독일인
들의 손에 의해 참패를 당하기도 했다. 아구스도는 로마에 경찰과 소방소를 조직했고
곡물의 공급을 감독하는 감독관을 임명하였다.
아구스도에게 있어 또 한가지의 업적은 그가 로마라는 벽돌을 발견하여 그것을 대
리석으로 만들어 놓았다는 것이다. 41년 간에 걸친 그의 통치기간 동안에 그는 혼돈
가운데서 질서를 이루어 놓았다. 그는 정부에 대한 신뢰감을 회복시켰고, 재정을 튼튼
히 했으며 능률적인 공공기관들을 새로이 창설하여 평화와 번영을 증진시켰다.
2. 디베료 (Tiberius A.D.14 - 37)
아구도스가 죽자 그의 양자 디베료가 그의 자리를 물려받게 되었다. 아구스도가 헌
법에 의해 제한된 기간 동안 위임받았던 권세(imperium)를 디베료는 평생동안 누릴 수
있었다. 그가 권력을 승계받았을 때 그의 나이는 56세였으며 그 이전에도 계속 국가의
공직에 몸 담고 있었으므로 정치에 있어서 그는 결코 초년병이 아니었다. 불행하게도
아구스도가 그에게 평소 사랑했던 아내와 이혼할 것을 권고하여, 그는 공개적으로 방
탕한 생활을 하던 아구스도의 딸 쥴리아와 결혼하게 되었다. 이때 그가 겪었던 쓰라린
체험은 그의 기질을 영영 비뚤어지게 하였다. 그는 냉담하고 오만하고 의심이 많고 성
미가 급했다. 그가 비록 정치에 있어서는 편협하지 않았고 현명했지만, 다른 여러가지
면에서 그는 두려움을 주는 존재였고 존경을 받지 못한 황제였다.
그의 통치기간 동안 로마의 군대는 독일에서 역전을 당했으며 그 결과 라인강까지
후퇴하게 되었다. 그외에도 국내적 문제들로 인해 그의 말년은 어두웠다. 그러자 그는
A.D.26년에 정부를 시지사(city prefect) 의 손에 맡기고 카프리섬으로 은퇴하였다.
디베료가 없는 것을 기회로 그의 친위대장이었던 에일리우스 세쟈누스(Aelius
Sejanus) 가 참주권을 차지하기 위한 모의를 감행하였다. 그의 계획들은 거의 완벽하
게 진행되었으나 A.D.31년 디베료가 그 사실을 알게 되었고 세쟈누스가 처형됨으로 모
의는 끝이 났다. 그러나 그것이 디베료에게 미친 영향은 결정적인 것이었다. 그는 한
층 더 의심이 많아졌고 잔인해져서, 조그마한 혐의만 있어도 누구든지 죽음을 감수해
야 했다. A.D.37년 그가 죽자 원로원은 다시 자유롭게 숨을 쉴 수 있었다.
3.갈리굴라(Caligula A.D. 37-41)
군대의 애칭으로 "작은신발" 이라고 불리우기도 했던 가이어스 갈리굴라가 원로원
에 의해 디베료의 후계자로 지목되었다. 그는 디베료와는 달리 출발부터 인기가 좋았
다. 그는 정치범들을 사면하여 주었고 세금을 인하했으나 공공유락 시설을 마련하였고
대중에게 호의를 베풀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오래지 않아서 그는 그의 심약함을 드러
내기 시작했다. 그는 신으로 숭앙받기를 요구했는데 이것이 그의 영토내에 있는 유대
인들을 자극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헤롯 아그립바(Herod Agrippa) 가 알렉산드리아를 방문하였을때 그곳의 시민들은
그와 그의 수행원들에게 풍자문을 써서 공개적으로 모욕을 주었다. 그러자 유대인들에
게 가이어스의 상(Statue)을 예배하도록 강요하려 했다.
유대인들은 황제에게 탄원했다. 그러나 황제는 그들의 말에 귀기울이지도 않았을
뿐만 아니라, 시리아의 지방총독에게 예루살렘 성전에 자기의 상을 세우도록 명령했
다. 그총독은 현명하게도 무장 봉기의 위험을 감안하여 명령의 수행을 연기했다. 그리
고 A.D.41년 갈리굴라의 죽음으로 위기를 넘길 수 있었다. 어떤 이들은 마가복음에
기록된 "멸망의 가증한 것"(abomination of desolation) 이 바로 예루살렘 성전에 들
어 앉으려 하는 황제의 상을 말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막 13:14)
아구도스와 디베료가 그처럼 힘들여 모아 놓았던 자금을 갈리굴라가 흥청망청 써버
려 국고는 금방 바닥이 나버렸다. 그것을 다시 채우기 위해 그는 폭력적인 수단을 사
용하여 사유재산의 압수 유산 탈취 및 갖가지의 착취행위 등을 서슴지 않았다. 그의
독재가 극에 달하게 되었을 때, 그는 황실 경호대장에 의해 살해되었다.
4. 글라우디오(Claudius A.D. 41-54)
갈리굴라가 죽자 원로원은 공화정의 부활을 논의했다. 그러나 친위대가 디베료 글
라우디오 게르마니쿠스(Tiberius Claudius Germanicus)를 황제로 내 세우자 그 문제는
종식되었다. 그는 디베료나 갈리굴라의 치세 때에는 별로 이름이 없던 인물이었다. 더
군다나 그는 정치활동에 참여하지도 않았다. 소아마비로 추측되는 어린 시절의 질병으
로 인해 그의 외모는 매우 유약해 보였으며 흐느적거리는 몸놀림과 단정치 못한 모습
은 황제로서의 위엄을 갖추기에는 너무나도 우스꽝스러운 모습이었다. 그러나 열등감
같은 것은 없었다. 왜냐하면 그는 훌륭한 학자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그 시대의
사람들의 기대 이상으로 더 유능한 통치자로서 활동하였다.
영토가 급격히 확장되면서 좀 더 능률적인 새로운 형태의 정부가 요구되었다. 글라
우디오 치하에서 로마는 위원회와 각료들에 의해 다스려지는 관료국가가 되었다. 그는
로마의 시민권을 자국 외의 영토민들에게까지 확장시켰다. 그의 장군들은 영국에 까지
진출하는데 성공하였으며 북으로 템즈강까지 정복하였다. 또한 이무렵에 로마의 동맹
국이었던 트라키아(Thrace: 발칸반도 동부에 있던 고대국가, 역자주)가 왕자의 죽음과
함께 로마의 통치령이 되었다.
글라우디오는 고대 로마의 종교를 사회속에 재건시키기 위해 결정적인 시도들을
했다. 그러했던 만큼 그는 이방종교에 대해서는 상당한 적대감을 갖고 있었다. 역사가
수에토니어스(Suetonius) 는 글라우디오 치하에서 일단의 유대인들이 크레스투스
(Chrestus) 라는 사람의 선동에 의해 벌어진 폭동들 때문에 로마에서 추방되었다고 기
록하였다.
수에토니어스가 크리스투스(Christus)를 크레스투스로 오해하였는지, 그리고 그가
말한 사건이 그리스도로서의 예수에 대한 전파로 인해 유대인들 사이에 일어난 소요를
가리키고 있는지, 혹은 크레스투스가 실제로 반란의 주동자였는지는 확실치 않다. 어
쨋든, 그 추방령으로 인해서 아굴라와 브리스길라(Aquila and Priscilla)가 로마로 옮
겨온 것은 사실이었다. (행 18:2)
그의 자유인들 중의 하나였던 발라스(Pallas)의 영향을 받아 글라우디오는 그의 조
카 아그립비나(Agrippina)를 네번째 아내로 맞아들였다. 그녀는 전남편에게서 난 아들
도미티우스(Domitius)를 위해 계승권을 획득하려고 결심했다. 도미티우스는 네로 글라
우디오 가이사(Nero Claudius Caesar)라는 이름으로 글라우디오의 정식 양자가 되었
다. A.D.53년에 네로는 글라우디오의 딸 옥타비아와 결혼하였다. 일년 후에 글라우디
오는 죽었으며 황제의 자리는 네로에게 이어졌다.
5. 네로 (Nero A.D.54-68)
네로 치하에서의 첫 5년은 평화스럽고 성공적인 나날들이었다. 친위대장 아프라니
어스 부루스(Afranius Burrus)와 철학자이자 저술가인 안네우스 세네카(L. Annaeus
Seneca)를 그의 조언자로 삼고 네로는 그의 천하를 매우 잘 다스려 나갔다. 그러나 아
그립비나는 그와 그의 충고자를 시기하여 그에 대한 우월권을 유지하려고 노력했다.
A.D.59년에는 그는 그의 어머니를 살해했다. 그리고는 자신이 통치의 전권을 장악하였
다.
네로는 기질상 행정가라기보다는 예술가였다. 그는 행정에서 뛰어나려 하기 보다는
예술가로서 처신하려 하였다. 그는 방탕과 사치로 인해 국고를 탕진하였다. 그리고 그
것을 충당하기 위해 갈리굴라처럼 억압과 폭력에 의존했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는 원
로원의 미움을 샀다. 원로원의 의원들은 네로가 언제 자기들을 죽이고 자기들의 재산
을 몰수할지 몰랐으므로 그를 두려워했다.
A.D.64년 도시의 많은 부분을 태워버린 대화제가 로마에 발생했다. 이때에 네로는
자기의 새로운 황금집 (Golden House)을 짓기 위하여 고의적으로 불을 지르게 했다는
의혹을 사게 되었다.
실제로 그는 에스킬라인 언덕에 찬란한 왕궁을 세웠다. 자신에 대한 혐의의 화살을
피하기 위해 그는 그 화재를 기독교인들의 소행으로 덮어씌었다. 이방인들에 대한 기
독교인들의 배타적인 태도와, 언젠가는 세상이 불로 심판당하리라는 그들의 말 때문에
그러한 모함은 쉽게 먹혀들어갔다. 많은 기독교인들이 잡혀 고문을 당하고 죽었다. 전
승에 따르면 베드로와 바울도 국가가 주동이 된 이 첫번째 박해의 희생물이 되었다고
한다.
이때의 핍박의 규모가 어느 정도였는지에 대해서는 거의 알려지지 않고 있다. 아마
그것이 로마의 영토 밖에까지는 미치지 않았다 할지라도 그의 통치령들이 위협을 받았
던 것은 사실일 것이다.(벧전 4:12-19)
그러는 동안 네로는 이렇게 지나친 행동들로 인해 점점 신임을 잃어갔다. 그에 대
한 몇 번의 반역은 실패로 끝났고 그의 정적들은 처형되었다. 그러나 결국은 골과 스
페인 지방의 군대와 총독들의 봉기가 성공하였다. 네로는 로마에서 도망쳤다. 그리고
그는 체포되기 전에 스스로 자신의 목숨을 끊어버렸다.
6. 갈바(Galba A.D.68)
군단의 봉기로 인해 제국의 실질적인 운명이 군대에 의해 좌우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왜냐하면 군대는 원로원의 상의없이도 후보자를 지명할 수 있었고 등극시킬 수
있었기 때문이다. 네로의 후계자인 갈바는 군단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고 지명된 것은
아니었다. 갈바가 자기의 후계자로 후시어스 갈버니어스 피소를 양자로 삼자, 한때 자
신이 황제가 될 희망을 안고 갈바를 지지했던 오토(Otho)는 친위대를 설득하여 갈바를
죽이게 하고 자신이 황제의 자리에 올라섰다.
7. 오토(Otho A.D.69)
오토의 통치기간은 짧았다. 원로원은 그를 후계자로 지목하는데 의견의 일치를 보
았다. 그러나 독일의 지방총독이었던 비텔리우스(Vitellius)가 그의 군대를 이끌고 로
마로 들어왔을 때, 오토는 싸움에서 사망하고 비텔리우스가 그의 자리를 차지하였다.
8. 비텔리우스(Vitellius A.D.69)
비텔리우스는 원로원에 의해 인준을 받았으나 군대를 제어할 능력도 없었고 그렇다
고 안정된 정부도 이루지 못했다. 동방에 주둔하였던 부대가 국사에 관여했고 급기야
는 그들의 장군인 베스파시안을 황제로 삼았다. 베스파시안은 나라 일을 자기 아들 디
도(Titus)에게 맡기고 이집트로 행군하여 그지역을 장악하고 로마에 대한 식량공급을
중단시켰다. 그리고 그는 보조관인 무치아누스(Mucianus)를 이탈리아로 보냈다. 비텔
리우스 군단의 완강한 저항에도 불구하고 베스파시안의 군대는 로마를 점령하여버렸
다. 비텔리우스는 살해되었고 베스파시안이 통치자로 선포되었다.
9. 베스파시안(Vespasian A.D. 69-79)
베스파시안은 평범한 노병이었다. 그는 소박한 편이었으나, 행정에 있어서는 활발
한 사람이었다. 그는 바타비아와 골 지방의 봉기를 진압하였고 그의 아들 디도는 예루
살렘 함락을 마무리지었다. 예루살렘은 완전히 파괴되었고 그 지역은 군총독의 지배
아래 놓이게 되었다. 그는 종속국의 주권자들 (dependent principalities)을 지방총독
으로 격하시킴으로써 변방을 튼튼히 했다.
긴축경제와 새로운 세금의 부과정책으로 인해 국고는 회복되었다. 그는 아직까지도
유적으로서 명성을 가진 원형경기장인 콜롯세움(Colosseum)을 지었다. 그는 A.D.79년
에 죽었으며 디도가 그의 자리를 계승하였다. 그는 그의 아들들인 디도와 도미티안을
포함하는 플라비안(Flavian)왕조의 태조가 되었다.
10. 디도 (Titus A.D.79-81)
그의 통치기간은 어떤 특별한 일을 성취할 만한 여유가 없을 정도로 아주 짧았다.
이러한 핸디캡에도 불구하고 그는 역대 로마의 황제 중에서 가장 많은 인기를 누렸던
황제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그가 권장했던 궁중오락의 규모나 그가 베풀었던 개인적
관용은 혹시라도 그가 그의 아버지와 같은 독재자가 되지 않을까 하는 원로원의 우려
를 깨끗이 해결해주었다.
그의 치세 동안에 베스비어스 화산의 폭발로 인해 나폴리안 연안의 두 도시 폼페이
와 헤르쿨라네움(Herculaneum)이 재해를 당하였다. 디도는 위원회를 소집하여 될 수있
는 한 희생자를 줄이려고 최선을 다했다. 몇 달 후에 로마는 새로운 시청과 판데온(만
신전) 그리고 아그립바 온천장등을 태워버린 대화재로 고통을 받았다. 그는 자기의 개
인 장구까지 팔아서 구제금에 보태었다. 그는 원형극장(amphitheater)을 포함한 새로
운 건물들을 건축하였다.
신약총론 3
11. 도미티안(Domitian A.D. 81-96)
디도는 A.D.81년에 아들이 없이 죽었으므로, 원로원은 황제의 직위를 그의 동생 도
미티안에게 수여했다. 도미티안은 철저한 독재자였다. 그는 급격히 타락하고 있던 로
마인들의 무대의 예술에 제동을 걸었으며 공창(public prostitution)을 제안함으로써
로마사회의 도덕적 수준을 높이려 했다.
옛 신들의 신전들이 재건축되었고 외래 종교들 특히 개종자들을 얻으려하는 종교들
에 대해서는 억압정책을 썼다. 그는 기독교인들을 박해하였는데 박해를 위한 어떤 정
책이나 구체적 행동의 증거는 별로 남아있지 않다. 그는 자신을 숭배하기를 요구했고
'주와 신' (Dominus et Deus) 으로 찬양받기를 원했다. 경제학자로서의 그는 훌륭한
경영자 였으며 국가의 경제정책은 그의 신하들에 의해 효과적으로 이루어졌다.
도미티안은 성격이 거친 사람이었으며 라이벌에 대해서는 의혹이 많은 사람이었다.
형 디도의 온화함을 갖지 못한 그는 수많은 정적을 만들었다. 모략이 들어날 경우에는
철저히 복수를 했다. 그의 통치기간의 마지막 해는 원로원에게 마치 악몽과도 같았다.
그들은 스파이들과 제보자들의 테러로 인해 끊임없이 괴롭힘을 당했으며 가족들의 안
전도 보장할 수 없었다. 결국 그들은 자체방어상 황제를 암살하지 않을 수 없었다.
12. 네르바(Nerva A.D. 96-98)
원로원은 도미티안의 후계자로 네르바를 선출하였다. 그는 나이가 지긋하고 온화한
성격의 소유자로서, 원로원의 입장에서 보면 그는 '안전한' 후보로 여겨졌을 것이다.
그의 관용정책은 당시 사회 내부에 잠재해 있던 긴장들로 부터의 해방을 가져왔다. 군
부는 도미티안의 암살을 거절했다. 당시 플라비안가는 군부의 지지를 받고 있었기 때
문이었다.
그러나 네르바는 자기의 후계자로서 군대를 다스릴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으며
동시에 강력한 권력으로 행정을 펼쳐 나갈 수 있는 트라얀(Trajan)을 세울 만큼 기민
한 사람이었다.
13. 트라얀(Trajan A.D.98-117)
네르바는 A.D.98년에 죽었다. 그리고 트라얀이 그의 뒤를 이었다. 그는 직업군인으
로서 스페인 태생이었는데 활동적이고 공격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다뉴브강
북방의 다키아(Dacia)를 합병하였고, 아르메니아, 앗시리아, 메소포타미아 등의 정복
으로 인하여 동방지역을 확장해나갔다. 근동에서 발생한 유대인들의 봉기가 A.D.115년
에 진압되었다. 그러나 아프리카, 영국, 그리고 다뉴브변방에서 발생하였던 새로운 봉
기들로 인하여 로마에 돌아오게 되었다. A.D.117년 그는 길리기아의 시청으로 돌아오
는 길에 죽었다.
이렇게 로마제국이 확장되어가고 있는 배경하에서 기독교는 이름없는 유대교의 한
분파에서 시작되어 급기야는 세계적인 종교로 성장했다. 예수는 아구스도의 치세에 태
어났다(눅2:1). 그의 공생애의 사역과 죽음은 디베료 황제시대에 있었다(3:1). 선교의
위대한 확장시기는 글라우디오 황제(행18:2)와 네로황제 시대였다(25:11, 12). 전승에
의하면 요한계시록은 도미티안의 치세에 씌어졌다고 하며 거기에 언급된 제국의 권세
와 정부의 독재에 대한 언급은 그 당시의 상황을 반영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신약성경 내용 중에서 그 당시의 로마세계에서 일어난 바 있는 현행 사건들에 대한
언급이 적은 것은 그리 놀라운 일이 아니다. 주로 역사적인 내용을 많이 담고 있는 복
음서들과 사도행전의 주된 관심은 로마보다는 유대교에 있었다. 더우기 신약의 메시지
는 독자들의 외적인 환경보다는 그들의 내면적 삶을 향한 것이었다. 정치적인 것 보다
는 영적인 것. 일시적인 것보다는 영원한 것이 더 강조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
다수의 경우에 있어서 신약성경은 제 1세기의 정치적 상황들과 연관을 가지고 있으며
그 역사적 중요성은 그러한 맥락에서 해석되어야 할 것이다.
1. 로마제국의 발전 과정을 서술하라.
2. 아구스도 통치기간의 업적을 제시하라.
3. 글라우디오의 종교정책을 설명하라.
4. 네로와 로마의 대화재에 대하여 약술하라.
5. 도미티안의 종교정책을 설명하라.
6. 신약성경이 1세기의 정치적 상황을 자세히 묘사하지 않는 이유는?
제7장 유대인
1. 유대인의 분산
1) 국가적 분산
(1) 722 BC 북이스라엘은 앗수르에 포로되어감
(2) 586 BC 남유다는 바벧론에 포로되어감.
(3) 그 기간동안 많은 유대인들이 예레미아와 함께 애굽으로 피신함.
2) 애굽에서 유대인 운동
(1) 알렉산더 대왕이 많은 유대인을 애굽으로 이주시킴
(2) Antiochus-Epiphanes의 박해시 많은 유대인들이 애굽으로 피신함 (BC20-AD54
에 애굽에는 약1백만 유대인들이 거주함)
(3) 애굽으로 부터 북아프리카 해안지역에 유대인들이 흩어져 살다.
3) Seleucidus 통치하에서 유대인들이 흩어짐
4) 로마로 유대인들이 이주해감.
(1) BC63년경 폼페이는 유대인들을 로마로 사로잡아감.
(2) Julius Caesar 통치하에서 유대인들은 급격히 늘어나 로마에는 유대인 지역이
형성됨.
(3) 바울이 죄수로서 로마에 갔을때 로마에는 상당수의 유대인이 있었음(행28:17)
(4) 많은 유대인들이 로마에서 상업을 경영
5) 분단이 주는 의미 ( , Dispersion)
(1) 하르낙인(Harnack)은 그당시 400-500만의 유대인이 국외에 살고 있었다고 추측함.
(2) 이는 하나님의 특별한 섭리로서 복음의 씨앗이 뿌리우기전 묘판을 만드는 것과 같다.
2. 일상어의 변화
1) 722BC, 586BC의 포로생활으로 히브리어를 사용하던 유대인들이 아람어를 사용케
되었다. (아람어는 Ura 에서 아브라함이 사용하던 언어임)
(1) 왕하18:26에 보여준대로 아람어는 전에 유대인들의 공식어로 알려져있었다.
(2) 포로생활로 부터 귀순한 후 아람어는 유대인들의 일상어가 되었다.
2) 알렉산더 대왕의 정복이후 많은 유대인들은 헬라어를 말할 필요가 있었다.
(1) LXX은 헬라어를 말하는 유대인을 위한 것이다.
(2) 예수님 당시 대부분의 유대인들은 아람어와 헬라어를 공용했다.
3. 회당
586BC 포로시대 이후 성전예배는 중단 되었으므로 회당이 생김
1) 회당은 유대인들이 예배와 교육을 위해 지방 집회장소로 사용되었으며, 주님이
계시던 기간동안 유대인 교육기관으로 가장 중요하게 사용되었다.
2) 회당은 두부분으로 나뉘어져 있다. 한부분에는 율법서를 담은 법궤가 있고, 그
밑 부분은 예배자들을 위한 곳으로 되어있다.
회당의 중앙에는 단이 있고, 성경을 읽는 이는 서서 읽고, 가르칠 때는 앉아서 했
다. 좌석은 단을 중심으로 사방에 있되 남여좌석이 구별되어있었다.
3) 회당의 직원들은 다음과 같다.
(1) 회당장(ruler of the Synagogue)
*당회의 사회를 주관
* 예배를 주관
* 회원의 제명권을 갖는다.
(2) 쉘리아크(The Sheliach)
*예배시 공적인도자가 된다.
*율법과 기도문을 읽는 책임을 가진다.
(3) 챠찬(The Chazzan)
*회당의 관리책임을 가진이다.
(4) 메들지만(The Methurgeman)
*성경이 히브리어로 읽혀지므로 통역하는 직(아람어로)
(5) 바트라님(Batlanim)
*예배에 참여자중 대표자 10명을 택하여 구제물을 거두는 직분을 맡은자.
4) 회당의 예배순서
(1) 기도와 찬송(신6:4-9 참조)으로 시작
(2) 챠챤이 법괴로 부터 율법책을 가져온다
(3) 쉘리아크가 일어나 이미 지정해 놓은 성경의 부분을 읽는다
(4) 메툴지만이 아람어로 통역
(5) 장로중 한사람이 앉아서 권면의 말씀을 준다.
(6) 율법책은 다시 돌아가고 기도로 예배를 마친다.
5) 이같은 회당은 유대인들이 거주하는 동리마다 있었다.
(1) 예루살렘에도 480여의 회당이 있었다.
(2) 유대인들이 거주하는 곳에 영향력있는 유대인 지도자 10명이 되지 못할 경우
회당대신 기도처(행16:15)를 세우기도 했다.
4. 유대인 종파들
1) 바리새파
신약시대에 가장 크고 영향력 있는 분파는 바리새파였다. 이들의 이름은 동사 파라쉬(Parash) 즉 '분리한다'에서 왔다. 이들은 분리주의자들이나 유대주의의 청교도들
이었다. 즉 종교적인 순결주의자들로 모든 악한 사귐에서 떠나고 구전이나 기록된 율
법의 모든 교훈에 완전히 순종하기를 추구하였다. 이들은 마카비시대 바로 후에 분리
집단으로 기원된 것인데 B.C.135년에 유대주의에서 잘 확립되었다. 대부분의 서기관들
은 이 파에 속해 있었다.
이들의 신학은 모세의 율법이나 토라, 그리고 선지서나 문헌들을 포함하고 있는
구약의 전 성경에 근거하였다.
이들은 성경의 해석에서 비유적인 방법을 채택하였으며, 주전 율법에 큰 가치를 부
여했고 전통은 빈틈없이 지켰다. 이들은 천사와 영의 존재를 믿고 영의 불멸과 몸의
부활을 믿었다. 또 의식적인 기도와 정한 날에 금식을 했고 십일조를 바쳤다(마
23:23, 눅 11:42). 음식을 먹을 경우 이들은 11조를 내지않는 바리새인들과는 식사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사랑과 자비에 앞서 정확한 의식 준수만을 고집했던 이들은 메마
른 형식주의자들로 흘러 이런 교만은 결국 예수님과 적대감 내지는 싸움으로 인도되었
다. 이들은 다 안식일을 엄격히 준수하여 병자의 치유까지 금했으며 길가에서 이삭을
잘라먹는 것도 금했다.(마 12:1,2).
켈러(Kehler)는 극단적인 바리새인의 7가지 모형을 제시하였다.
(1) 어깨 바리새인, 어깨에 휘장( )과 같이 사람 앞에서 그의 선해을 과시하
는 자.
(2) 잠시 기다리라는 바리새인, 그가 선행을 하는 동안 그를 기다리도록 누구에게
요구하는 자.
(3) 소경 바리새인, 여인 보는 것을 피하기 위해서 눈을 감기 때문에 벽으로 걸어
가다 이마에 타박상을 입는 자.
(4) 공이(Pestle)바리새인, 유혹하는 시험을 주시하기 보다 차라리 머리를 매달고
걸어가는 자.
(5) 항상 셈하는 바리새인, 항상 그의 선한 행실을 셈하고 있는 자.
(6) 하나님을 두려워 하는 바리새인, 욥과 같은 자고 참으로 의로운 자.
(7) 하나님을 사랑하는 바리새인, 아브라함과 같은 인물(Kaufmann Kehler;
{jarisees, in Jewish Encyclopedia, IX, 661-666)
물론 바리새인 중에는 외식자가 많은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덕스러운 진실한 사람
도 많이 있었다. 다 위선자는 아니었다. 주님의 초기 전도 생활중에 주님을 진실하게
찾은 니고데모, 예수님의 시체를 달라하여 자기의 무덤에 장사한 아리마대 요셉은 다
바리새인들이었다.
다소의 사울, 후에 그리스도의 대 사도가 된 바울 역시 바리새인이었다(행23:6).
그는 율법을 지키는데는 흠이 없었다고 자랑할만 했다(빌3:6).
바리새주의의 도덕적이고 영적인 표준은 자의를 향하는 경향이 있어 결국 위선으로
향하여 나갔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 시대의 일반인에 비해 아주 고상하고 높은
것이었다.
유대주의의 제 분파중에는 이 바리새주의만이 재생되었다, 이것은 현대 정통 유대
주위의 기초가 되었는데 바리새적인 도덕, 의식주의, 그리고 율법주의의 모형을 따른
다.
2) 사두개파
전통에 따르면 이 파는 그들의 이름을 다윗과 솔로몬 시대의 대제사장이었던 사독
의 아들들로 부터 왔다고 하는데, 사독의 아들들은 포로시대에 제사장 계급이었다.(대
하31:10, 겔40:46, 44:15, 48:11). 그리고 분명히 이 이름은 그리스도 시대에 제사장
파의 명칭으로 존속되었다.
사두개파는 비록 그들의 영향력을 상실하기는 하였으나 예수님 당시에 또 다른 중
요한 당파의 하나였다. 이들은 초기에는 지주들로 부터 형성되었다.
정치적인 조작을 잘한 이들은 지배적인 지위를 얻는데 성공하였다. 또한 수가 많은
바리새인들과 함께 산헤드린(유대최고회의)에서 대등한 비율의 의석으로 지배 하였다
(행23:6~10). 대제사장의 대부분이 사두개인이거나 그들과 밀접하게 일하는 자들이었
다. 이들의 종교적 입장은 보수적이었다. 그리하여 모세의 오경 이외에는 어떤 계시든
받기를 거절하였다. 그들은 후대에 나온 종교적인 사상을 배격하였다. 예컨데 불멸,
부활, 천사와 귀신의 존재 등이다. 그러나 바리새인들은 이것을 다 믿었다(막 12:18,
행 23:8). 정치적으로 이들은 기회주의자들이었고, 만일 그렇게 해서 그들이 특권과
영향력을 유지 할 수만 있다면 지배권력과 언제든지 결탁할 준비가 갖추어져 있었다.
이 파는 바르새파와는 다르게 결국 예루살렘 멸망 후에는 존속하지 않았다.
3) 에쎄네파 (The Essenes)
이 파의 금욕적인 경향은 초대 기독교회에서 성장하던 수도원 제도와 많은 국면에
서 비교한다. 이들의 교훈 중에 얼마는 이방인 사상과의 접속에서 온 것이었다.(자세
에서 스토아주의와 흡사함). 또 복음서에 대한 언급은 전혀 없다. 혹자는 세례 요한과
예수님이 에쎄네파에 속했다고 추측하기도 한다.
그래서 기독교는 결국 이 에쎄네파의 결과라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엄격한 계율주의를
강조하는 이 파와 은혜를 강조하는 기독교는 차이가 현저하다.
이 파의 역사의 새로운 장은 최초의 쿰란의 동굴에 의해 전개되었다. 이 곳은 여리
고 남쪽 7마일 떨어진 사해의 높은 지역에 위치하였다. 처음 이들의 건물은 로마의 유
격대의 전진기지의 멸망으로만 생각하여 왔다.
1942년 초 여름어 어떤 베두인(Bedovin)목동들이 쿰란 근처의 동굴에서 고대 사본
이 들어있는 8개의 큰 항아리를 발견했다. 이 사본 중에 세개는 예루살렘에 있는 성
마가 수리아 정통 언약의 소유로 들어갔으며, 이들 사본들은 그들의 문체로 보아 그리
스도 전후 제1세기에 속하는 것으로 추정된다. 그 이래로 이들 지역의 동굴방문의 결
과는 많은 사본의 자료를 제공해 주어 이들을 이해하는데 큰 빛을 발견한 셈이다. 사
본의 저장물들을 볼때 이들은 포로와 파멸의 위험에서부터 사본들을 보존하기 위해 동
굴에 숨어 있었으며, 이 시기는 A.D.66-70년의 유대의 첫 반란 때 이곳으로 은거한 것
같다.
1951년 쿰란의 멸망이 발굴 되었다. 이 답사는 그들이 원래 로마인의 성채로 지어
지지 않았음을 증명하였다. 그들은 그안에 공동 식당, 공동 침실, 물통, 그리고 사자
(사자실)을 가지고 있는 주거의 큰 지역이었다. 모든 물적인 증거는 이 단체가 A.D.70
년 예루살렘의 파멸 바로 앞선 시대에 번성하였던 것을 지적해 주었다.
훈련의 입문서(The Manual of Discipline), 다메섹 문서 (The Damascus Document),
추수감사의 송(The Thanksgiving Hymn),그리고 전투의 명령(The Order of Warfare) 등
은 이들의 제사문서로 쿰란지역 사회의 주의규범을 구체화하고 있다. 이런 문서들로
부터 우리는 이들이 먹고 살, 그리고 공동기초에서 함께 일한 것을 더듬어 알 수 있
다. 이들은 공적 유대주의에서 은거하였고, 광야에서 수도원적인 생활을 했다. 이 공
동체의 조직은 율법의 중계자로서 일한 회중의 회장에게 종속되었는데 이는 전체 집단
의 훈련자요, 전쟁의 경우는 군대의 사령관이 되기도 하였다. 이들 회중은 남녀와 어
린아이들을 포함하였다.
이 공동체에 들어오면 수 개월간 계속되는 시험을 거쳐 마침내 입문 의식인 세례와
정결의식을 행한다. 이 공동체 안에는 끊임없는 도덕과 영적 훈련이 있었다. 그리고
다른 모든 운동에서 완전히 독립적이었다.
쿰란분파의 신학은 실제적으로는 유대주의의 것과 거의 같앗다. 한분 창조주 하나
님이 계신데, 그가 세상에 인간을 두셨고 그에 대해 인간은 그 행동의 책임을 진다.
하나님이 역사의 진로를 결정하시며, 모든 지혜와 능력을 소유하신 그의 의로부터 죄
의 용서가 오며 그의 안에 모든 인간 생명이 있다. 하나님께 종속하는 것이 선인이며,
생활을 제어하는것이 악한 원리들이다. 그들의 영향 아래 있는 사람들은 빛의 아들들
과 어두움의 아들들로 나뉘었다. 이런 서로 싸우는 세력 때문에 생의 두 길이 있는데
하나는 의의길로 이 길은 개인적인 행복에서 끝난다. 다른 하나는 악의 길인데 이는
부끄러움과 파멸로 끝난다.
4) 열심파(The Zealots)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이 로마 통치의 최선함을 이루어 보려고 노력하는 반면에
쿰란의 사람들은 그들을 구원해 주실 하나님의 능려과 간섭을 꿈꾸고 있었다. 그리고
많은 유대인들 보다 더 실제적인 구원을 추구하였다. 후대에 그렇게 부르게 된 열심파
는 자유의 투사들로서 유대민족의 반란자들이었다. 이들은 로마로부터의 자유의 수단
으로서 폭력을 고무하는 광적인 민족주의자들의 그룹이엇다. 이것이 결국 주후 70년
예루살렘의 로마인 파멸로 이끈 대 반란을 일으키게 하였다. 예수님 당시에 유대의 반
란이 이미 일어났었다(행 5:36-37. 아마도 바나바). 그리고 이름은 혁명적인 선전을
위해 무르익어 있었다. 열심파는 로마에 복종하는 것은 이스라엘의 참 왕이신 하나님
께 반역하는 죄라고 호소함으로 그들의 입장을 세웠다. 우리는 적어도 사도 중에 한
사랄미 이 파에 속했을 것으로 생각한다 (눅 6:15, 행1:13 셀롯이라는 시몬 열심당
원).
* 바리새파와 사두개파의 비교
----------------------------------------+---------------------------------------
바 리 새 파 | 사 두 개 파
----------------------------------------+------------------------------------
|
(1) 종교적 학문적 귀족주의자들의 모임 | (1) 제사적 정치적 사회적 귀족주의자들의 모임
(2) 영혼불멸, 육체부활, 미래의 상벌을 | (2) 부활도 없고 미래도 상벌도 없는 현
가르침. | 의 생활을 가르침.
(3) 천사와 영적 존재들. 선악의 실존을 | (3) 천사도 영도 없다고 주장함.
믿음. |
(4) 예정론자들로 그러나 인간은 자유의 | (4) 인간의지의 절대 자유를 강조함
지를 가지고 있으면서 도덕적책임이 |
있다고 주장함. |
(5) 신앙과 행위의 규범으로 전승과율법 | (5) 신앙과 행위의 유일한 규범은 구약
을 말함. | 성경이라고 주장함.
(6) 전통적 유대주의를 주장함. | (6) 전통적 유대주의를 깨트리고 헬라주
| 의로 대치함.
(7) 행위구원을 말하며 종교적 선행을 강| (7) 이 세상만을 위하여 살 것을 주장
조함 | 함
(8) 회당중심의 활동을 함. | (8) 성전 중심의 활동을 함
----------------------------------------+------------------------------------
1. 유대인 분산의 과정과 의미에 대하여 설명 하라.
2. 유대인의 회당에 대하여 약술하라
3. 바리새인들의 생활태도를 서술하라
4. 사두개인들의 종교적 입장을 상술하라
5. 엥쎄네파의 기원과 그들의 신학적 입장을 기술하라
6. 열심파의 정치적활동을 서술하라
<제 3 편 각 론 >
제8장 4 복 음 서
I. 마태복음
1. 기록자
(1) 초대교회로 부터 지금까지 저자가 사도 마태라고 하는데는 아무런 의심도 없
다.
(2) 그러나 현대 자유주의적 성경 비평연구가들에 의하여 마태의 저작설이 계속 부
인 되어왔다.
(3) 마태 저작설의 외적 증거
a. Papias(80-155 AD)는 말하기를 "마태는 히브리어 방언으로 된 어록(Logia)을
지어 내었다. 그리고 그가 할 수 있는한 모든 것을 해석했다"고 한다.
(Eusebius, Ecclesiastical History, XXXIX, 16)
이 해석에 대해서는 Thiesseh 의 Intr. to N.T.)
PP. 133-134를 참고하라.
Papias 가 말한 Logia는 히랍어로된 마태복음은 아닌것 같다. 그 이유는 희
랍어로 된 마태복음은 번역 되어진 것으로 보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후기 볼트만학파에 속한 이들은 현존의 복음서는 아람어에서 번역된 것으로
간주하고 아람어로 재 번역하려는 시도를 하고 있다.
Papias 가 말한것은 예수의 말씀을 먼저 수집한 것을 말하며, 마태는 그후
희랍어로 예수의 생애를 기록했을 것으로 본다.
b. Irehaeus (140-203 AD)는 마태는 자기들이 사용하고 있던 히브리 방언 가운
데서 기록된 복음서를 유출했다" 고 말한다.
(Against Heresies, III, 1. 1)
이레니우스는 사도요한의 제자인 Polycarp의 제자였다.
c. 마태복음은 마태에 의해 기록되었다고 Origen(185-253 AD)과 후기 많은 교부
들에 의해서 증거되었다.
(4) 마태 외작설의 내적증거
a. 저자는 분명히 유태인 크리스챤이었다.
b. 마태복음은 유대적 특징을 갖고 있다.
i) 구약성경의 직접 인용이 43회 나타남.
ii) 유대인들의 표현인 "천국"(Kingdom of Heaven)이 33회나 나타남
iii) 구약을 인용할때 "이루려 하심이니라" 하는 표현을 10회나 표현.
iv) 다윗의 아들 이라는 표현이 8회.
c. 예수에 대한 태도에 있어서 신중을 기하는 모습(마9:10, 눅5:29)
d. 돈에 대한 말이 다른 복음서보다 많이 나옴(마22:19, 막12:15)
e. 마태는 누구인가?
i) 그의 부친은 알패오(막2:14), 그러나 그는 야고보의 형제는 아니다(마
10:3).
ii) 그는 레위라고 불렸고(막2:14, 눅5:27), 마태(히브리어로 선물이라는뜻)F
라는 이름은 크리스챤이 된 이후의 이름이다.
iii) 그는 가버나움 근처에서 세금거두는 일을 했다.
iv) 세리로서 마태는 헬라어와 아람어를 잘 알았고, 약간의 교육도 받은 사람
이다.
v) 그가 회개한 후 다른 세리들을 불러 잔치를 베풀었고 예수님과 그의 제자
들도 초대한 바 있다.(마9:9-13, 막2:15)
2. 기록 연대 및 장소
(1) 저자는 헬라어를 말하는 지역에서 살았고, 유대인둥 헬라어를 말하는 크리스챤
들에게 기록한 것이 분명하다. 마태복음의 수신자가 쿰란지역에서 온 사람들이란 근거
는 없다.
(2) 대부분의 학자들은 Streeter의 의견을 쫓아 인디옥 또는 좀 더 넓게는 수리아
에서 기록된 것으로 본다. 뵈니게설(Kilpatrick, Blair)도 있으나 증거가 약하다.
(3) 11C.의 Theophylact는 기록연대를 그리스도 승천후 8년만에, 9C. U.
Nicephorus는 15년후에 기록 되었다는 초기기록설을 주장했다. 그러나 이같은 주장은
초기 교부들의 주장과는 거리가 멀다 복음서 자체의 언급에 의하면 그리스도 사역과
기록시기 사이에는 상당한 시간적 거리가 있는 것으로본다.(27:7-8, 28:15)
(4) 마태가 마가복음을 사용한 것을 인정할 경우, 마가는 예루살렘 멸망직전에 기
록된 (막13:14, 마24:15) 것으로 보아 마태는 예루살렘 멸망이후로 볼수 있다.
(5) 28:19의 성부 성자 성령의 이름으로 침례를 베풀라는 삼위일체는 후기에 조
성된 것이다.
(6) 두자료설 (Q+Mk)을 받아드리는 Cartledge는 마태를 60년 마가를 50년으로 본
다.
(7) 일반적으로 많은 학자들은 80AD로 부터 100AD 사이에 기록된 것으로 보나 아무
도 구체적인 연대를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
Heard 는 80 - 100 AD, Sparts 70 - 100 AD,
Mcneille 80 - 85 AD, Hunter 85 AD
Ignatius 만은 110 AD.
아담이 이록설을 주장하는 Thiessen 은 50 AD.
마태복음을 먼저 놓은 것은 초대교회의 주류가 이방인들이 아니고 유대인들이었기
때문인 것으로본다.
3. 마태복음의 특성
(1) 유태인 복음이다
a. 다른 복음서에 나오는 "하나님의 나라" 가 아닌 "천국"이라는 표현이 33회
b. 구약을 33회 직접 인용
c. 그리스도를 "다윗의 아들" 이라고 8회나 부름
(2) 일반적으로 역사적 순서를 따르고 있으나 그보다도 어떤 주제별 그룹을 형성하
여 모아놓았다.
(3) 교훈적 요소가 많다.
a. 인용된 구약을 성취된 것으로본다(1:22, 2:15, 17, 23:8등)
b. 1장에서 열네파(2 7)의 구분은 다분히 교훈적이다.
(4) 6개의 위대한 설교가 있다.
a. 산상교훈 (5 - 7 장)
b. 12제자에게 주신 말씀(10장)
c. 7개의 천국 비유 (13장)
d. 겸손과 용서에 대한 토론 (18장)
e. 바리새인 들에 대한 규탄 (23장)
f. 감람산 설교 (24, 25장)
4. 마태복음 내용 요약
(1) 그리스도의 족보와 출생 (1 - 2 장)
a. 그의 족보 (1 : 1-17)
b. 그의 출생 (1 : 18 - 2 : 12)
c. 그의 애굽에로의 피신 (2 : 13 - 23)
(2) 그리스도의 공생애를 위한 준비 (3:1 - 4:11)
a. 그의 예고와 침례 요한 (3:1 - 12)
b. 그의 침례 (3:13 - 17)
c. 그의 시험 (4:1 - 11)
(3) 그리스도의 갈릴리 사역 (4:12 - 13:58)
a. 갈릴리 운동의 시작 (4:12 - 25)
b. 산상수훈 (5 - 7 장)
c. 이적들 (8 - 9 장)
d. 그의 두번째 갈릴리 여행(10 - 12 장)
e. 천국 비유들 (13장)
(4) 갈릴리로 부터 철수하신 기간 (14:1 - 18:35)
a. 갈릴리 해변 동편으로 (14장)
b. 두로와 시돈으로 (15:1-28)
c. 데가볼리로(15:29-39)
d. 가이사랴 빌립보로 (16:1-17:21)
e. 갈릴리에서 마지막 전도 (17:22- 18:35)
(5)갈릴리로 부터 예루살렘으로 마지막 여행(19-20장)
(6)수난주간(21-27장)
a. 승리의 입성(21:1-11)
b. 성전을 두번째 청결케 함(21:12-17)
c. 유대인의 지도자들과 마지막 논쟁(2:18-23:39)
d. 감람산 설교(24,25장)
e. 그리스도의 말기 두번째 기름부음(26:1-13)
f. 체포, 재판 그리고 그리스도의 죽음(26:14-27:66)
(7)그리스도의 부활
1. 마태복음의 유대적 특징을 상술하라.
2. 마태복음의 기록 년대를 학생 자신의 말로 기록하라.
3. 마태복음의 특성을 설명하라.
4. 마태복음의 내용을 6가지로 요약하라.
II. 마가복음
1. 기록자
(1)초대교회는 마가복음의 저자는 마가라고 한다.(외적증거)
(2)소위 Papias(125AD),Hierapolis의 단편들이 Eusebius(Historia Ecclesiae,III
39,15) 에 의해 인용된것을 보면 "마가는 베드로의 전도여행 동반자요 통역자가 없다.
마가는 베드로 사후 그가 가르쳤던 모든 것, 즉 그리스도의 청록과 교훈운 기억속에서
찾아내 기록했다" 고 한다.
2. Irenaeus (175AD)는 베드로의 제자요 동역자인 마가가 베드로가 행한 설교를 기
록으로 우리에게 전수해주었다"고 한다.
3. Clement of Alexandria, 190AD)는 "베드로 설교를 자료로하여 마가가 그의복음
서를 기록했다" 고 한다.
4. Tertallian, Origen, Eusebius 같은 이들도 두번째 복음서의 저자는 마가라고
한다.
5. 사본증 가장 오래된 것들은 이 복음서 서두에 (according to Mark)
이라 하여 즉 "마가에 의한" 이란 제목을 붙이고 있다.
(2) 내적 증거
a. 예수 체포시 그곳에서 도망을간 한 청년에 의해 마가복음에만 언급이 있는데
이는 마가다.(막14:51,52)
b. 최후 만찬을 베푼 다락방에 대해 구체적 묘사가 있는 것은 (막14:12하) 그곳
이 마가의 모친집에 있었던 것을 보여준다. (행12:12)
c. 저자는 팔레스틴을 잘 알고있었으며, 특히 예루살렘에 대해 잘알고 있었
다.(11:1), 동시에 팔레스틴의 언어인 아람어를 잘알고 있었으며,(5:41,7:34) 유대인
의 제도와 습관에 대해서도 친밀하였다.(1:21,2:14,16,7:2-4) 이같은 증거는 모두가
마가가 팔레스틴 유대인이 이 저자임을 보여주는 것이다.
d. 본서의 구체적 묘사는 목격자 진술임을 증거 (예) 베드로 - 막2:1 하)
f. 마가복음은 베드로가 제자로 부름을 받는 부터 얘기가 전개된다.
(3) 마가는 누구인가?
a. 그의 부친은 말해지지 않고, 모친은 예루살렘에 집을 가졌던 마리아다(행
12:12)
b. 그의 이름은 요한 마가로 알려져있었다. 요한은 히브리이름이고, 마가는 라
틴어이름이다.
c. 그는 바나바의 생질(골4:10)
d. 바울과 바나바의 제1차 선교여행시 마가는 동행했으나 버가에서 예루살렘으
로 돌아갔다.(행13:5,13)
e. 이같은 마가의 행동때문에 바울은 바나바와 헤어지고 실라와 동행했다.(행
15:36-41)
f. 17년후 마가는 바울의 사랑을 다시 회복하였다(딤후4:11)
g. 바울의 제1차 로마감옥시절에 바울과 함께 있었다(골4:10)
h. 그는 베드로의 제자로서 바울과 디모데의 관계처럼 베드로의 사랑받는 아들
로서 네로황제 핍박시 베드로와 함께 로마감옥에 있었다(벵전5:13) 아마 바울의 제2차
로마감옥 시절에도 로마에 있었을 것이다.(딤후4:11)
2. 기록연대 및 장소 d. 그리스도를 "말씀의 사람" 으로 보다는 "행동의 사람"
으로 나타낸 것은 로마인들의 행동적, 능률적 그리고 결단적인 특성과도 조화가 된다.
4. 본서의 특징
(1) 본서는 설교라기 보다는 행동의 복음이다.
a. 복음서안에 70개의 비유들중 마가복음에는 18개만 기록되어 있고, 그것도 대
부분이 한줄정도의 짧은 비유들이다.
b. 그러나 35개의 이적중 마가복음에는 18개가 기록된 것은 다른 복음서에 비해
많은 것이다.
c. 마가복음은 에너지와 행동을 보여주는 복음이다(1:21,29)
d. "즉시"(euthus-straigtway)라는 단어가 42회 나타난다.
(2) 능력적이고 생생한 신문형식의 기록이다
a. 역사적현재시상이 154회 나타난다(1:12,21,30,2:5,18,17,25 3:4,34,etc)
b. 미완료 시상이 크게 확대 되어있다.(1:21,32,35,5:18,7:17,12:41)
c. 비정상적인 힘찬 용어들이 있다(1:12의 몰아내다는 마4:1,눅4:1의 인도되다
와 대조적, 1:36,5:5)
d. 푸른잔디(6:40)와 같은 생생한 표현은 목격자의 기록임을 보여준다.
(3) 본서는 목격자의 기록임이 분명하다.
a. 베드로의 집이 구체적이로 묘사(2:1하)
b. 다락방이 구체적으로 묘사(14:12하)
c. X의 모습과 느낌을 섬세하게 묘사(3:5)
(4) 본서에는 X족보, 출생,기사,유년시절 얘기가 기록되지 않음.
(5) 그 순서에 있어서 역대기적 특징이 있다
(6) 본서만 "베드로의 복음서" 또는 "베드로의 회고록" 이라고도 불리어진다
(Justin Martyr)
(7) 마태와 누가에 없는 부분은 모두 합쳐 23절 뿐이다.
(8) 구약은 16번만 인용하고 있다
(9) 마가복음의 마지막 부분에 대해서 많은 논쟁이 있다.
@16:9-20에 대해 사본들은 3가지 가능성을 보여준다.
[1] 8절에서 본서가 끝난 것으로 보는 견해
시내산 사본, 바티칸사본, fanrily , 시내산 수리아역, 유세비우스
[2] 원본에 있는것은 아니지만 중재적어미를 주장하는 견해
a. RSV. 만
b. L.Psi,579,K. 그리고 Harklean Syriac 이 이를 뒷바침한다.
c. Streeter 에 의하면 이는 초기 편집자에 의해 삽입된 것으로 본다.
[3] AV에서는 막16:9-20이 전체 나타난다.
a. A.C.E.F.G.H.K.M.S.V,V.X와 같은 사본들의 지지를 받는다.
b. 그러나 이 부분은 마가의 문체와는 다르다
c. 많은 학자들에 의하면 본래 원문이 끝부분이 잃어버려진 것을 어떤이가
자기가 기억할 수있는 모든 기억을 동원하여 재생시킨 것이 현재의 끝 부분이라고 주장.
5. 마가복음의 개요
(1) X의 공생애 사역을 위한 준비(1:1-13)
a. 그의 예비자(1:1-8)
b. 그의 침례(1:9-11)
c. 그의 시험(1:12.13)
(2) 중시된 X의 갈릴리 사역(1:14-6:30)
a. 초기(1:14-3:12)
(1) 회당제자들을 부르심(1:14-20)
(2) 가버나움에서의 이적들(1:21-34)
(3) 갈릴리에로 첫번째여행(1:35-2:22)
(4) 안식일 논쟁(2:23-3:12)
b. 후기(3:13-6:30)
(1) 12제자 선택 (3:13-35)
(2) 하나님의 나라의 비유들(4:1-34)
(3) 갈릴리 바다를 건너가심(4:35-5:20)
(4) 갈릴리에로 세번째 여행(5:21-6:30)
(3) 종되신 그리스도의 퇴거(6:31-9:50)
a. 갈릴리바다 동편으로(6:31-51)
가 b. 두로와 시돈 지방으로(7:1-30)
c. 데가볼리 지방으로(7:31-8:9)
d. 가이사랴 빌립보 지방으로(8:10- 9:29)
e. 갈릴리 최후사역(9:30,50)
(4) 갈릴리로 부터 예루살렘으로 종되신 X의 마지막 여행(10장)
(5) 종되신 X의 수난(11-15장)
a. 승리의 입성(11:1-11)
b. 성전의 두번째 청결(11:12-26)
c. 유대지도자들과 논쟁(11:27-12:44)
d. 감람산 설교(13장)
e. 두번째 기름 부음 받으심(14:1-9)
f. X의 체포, 재판, 죽음(14:10-15:47)
(6) 종되신 X의 부활(16장)
1. 마가복음의 기록자 마가에 대하여 설명하라.
2. 마가복음의 기록 목적은 무엇인가?
3. 마가복음의 특징을 개괄적으로 서술하라.
III. 누가복음
1. 기록자
(1) 누가복음의 저자가 누가라고 하는 외적 증거는 충분하다.
a. Plummer (A Critical and Exegetical Commentary on the Gospel of ST.Luke,
I.C.C. P XVi)에 의하면 "세번째 복음서가 2c 중엽이전에 이미 기독교 세계에 공언되
었다는 사실과 그 저자가 누가 임을 부인할 사람은 없다" 고 주장한다.
b. 이 책을 누가의 것으로 공인한 최초의 것중 하나는 Muratorian Fragment, e.
170AD)이다.
c. Anti-Marcionlte Prologue, 160-180AD 역시 누가 저작권을 확인.
. Irenaeus (140-203AD), Tertulliah(150-222AD), Clement of
Alexandria(155-215AD)와 같은 교부들이 누가 저작권을 뒷받침.
e. 이외 많은 이들이 본서를 누가의 것으로 받아드림.
(Tatian, Celsus, Marcion, Justin Martyr, etc)
(2) 누가 저작설의 내적 증거
a. 사도행전의 저자가 누가 임을 증명함으로써 제3복음서의 저자가 누가임을 알
수있다.
(1) 두책이 모두 동일인 즉 데오빌로에게 보내진것.
(2) 사도행전에서 "먼저쓴글" 이 있음은 저자가 밝히고 있는 바 이는 누가복음
을 말한다.
(3) 두 책의 언어와 문체가 비슷하다.
(4) 두책의 관심이 같다.
b. 저자가 바울의 동반자였다는 증거를 통해 본서의 저자가 누가임을 알수있다.
사도행전에는 (16:10-17, 20:5-15, 21:1-18, 27:1-28:16)에는 "we" section이 있는데
이는 저자가 목격자 임을 알수있고 그는 바울선교 여행시 동행했을 것으로 본다.
c. 사도행전과 누가복음에는 의학용어가 있고, 헬라어가 뛰어나며, 여자나 아이
들 그리고 병자에 대한 관심이 두드러진 것으로 보아 누가 저작설이 분명하다.
(3) 누가는 누구인가?
a. 누가라고 하는 이름은 복음서에는 없다. 바울이 그를 사랑하는 의사(골4:14)
라고 그의 서신에서 언급.
b. 그는 이방인으로서 (골4:10-14)아마 헬라인이었을 것이다.
c. 그는 잘가꾸어진 교양인이며, 역사의식을 가진이다.
d. 그는 바울의 제2차 전도여행시 드로아에서 바울을 만났다. 그러나 바울이 3
차 여행서 돌아올때까지 빌립보에 머물러 있었다.
e. 그것은 행16:10-17, 20:1-6의 "we"dhk "they" 용어에서 얻어진 결론이다.
f. 모학자들은 빌립보에 누가의 집이 있었든지 혹은 여성도 루디아집에 유한것
(행16:40)으로 루디아와 결혼했을 가능성도 배제할수 없다.
g. 유력한 전승으로는 그가 수리아의 안디옥에서 왔을것이라는 것이다(Jerome,
Anti-Morcionite P)
h. 바울이 제3차 전도여행으로 부터 예루살렘으로 돌아왔을때 누가는 바울과 합세.
i. 바울이 가이샤라 감옥생활 2년동안 거기에 남아있었다.
j. 아마 누가복음은 이 기간동안에 기록되기 시작했을 것이다.
k. 바울이 로마로 배탈때 같이 등선했다.(행27:1)
l. 바스의 2년간 로마감옥시절에도 함께있었다. (행28:16, 골4:14. 24).
m. 바울의 2차 감옥시절에도 같이 있었다.(딤후4:11)
n. 초대교회 교부들은 누가를 다음과 같이 묘사.
(1) Tertullian : 바울은 누가의 발랑체
(2) Irenaeus: 누가는 바울이 설교한 복음을 전수해 주었다.
(3) Origen : 누가복음은 바울의 명령으로 되어진 것
2. 누가복음의 기록연대
(1) 본서는 대부분 히람어 사본과 수리아 사본들에서 찾아볼 수있다.
a. 이들 사본중 누가복음을 제일앞에 놓은 것은 없다.
b. 몇개의 사본들은 누가복음을 둘째복음에 놓고있다.
(2) 본서는 사도행전 이전에 기록된 것이 분명하다.(행1:1)
a. 가장빠른 년대는 52AD 까지 생각할 수있다.
그이유는 그때 누가가 바울을 만났기 때문이다.
b. 본서는 늦어도 사도행전기록 이전에 쓰여졌다.
c. 그런고로 51AD 이후 사도행전기록 이전에 기록된것이 분명하다.
d. 많은 학자들은 59AD 설을 주장한다.(Robertson, Godet, Harnack, Lange,
Thiessen) 왜냐하면 바울의 가이사가 구금이 58260AD로 추산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기
간 바울의 설교를 연구 정리할수 있는 기회로 보기때문이다.
e. 희랍어를 말하는 세계에 이 복음서가 저해진 것은 초기기록설을 뒷받침해준다(1c의 책)
(3) 어떤 학자들은 본서의 기록 연대를 늦게 잡고있다.
a. h.c. Bauer 와 다른 Tubingen 학파 에서는 2C 것으로 본다.
b. Marxen 은 90 AD
c. J.C. O'Neill은 115-135AD.
d. Kummel은 70-90AD
* 이들은 눅21:20-24 이하는 묵시적 예언으로 해석
3. 누가복음의 기록목적
(1) 데오빌로로 하여금 X의 생애에 개한 확실한 지식을 갖게하려고 기곡(1:1-4)
(2) 희랍정신을 가진 이들에게 X를 선포하려고 기록.
a. 저자는 유대인 관습법을 설명(4:31, 8:26, 22:1, 24:13)
b. 저자는 인자 사상을 통해 X를 이상적인 우주적 인물로 묘사하므로 희랍인들이
추구하던 이상적 인물임을 간접적으로 보여준다.
c. 본 서의 문화는 희랍인들에게 호소력이 있다.
d. Origen, Gregory Naziahzen 은 누가복음이 헬라인을 위한 복음서라고 주장.
4. 누가복음의 특성
(1) 복음서 중에 가장 긴 책으로 다른 복음서에서 찾을 수 없는 많은 사건을 기록하
있다.
A. 본서의 1/3이상이 누가복음에만 나타난다
B. 눅 9:51-18:14(후기 유리전도와 베뢰아 사역)은 누가복음에만 기록
(2) 다른 복음서보다 더 역사적이고 전기적인 성격이 있다.
저자는 본서의 기록을 위해 목격자들의 증언을 자세히 연구한 것을 보아 알 수
있다. (눅1:1-4)
(3) 본서는 다분히 문맥적이고 예술적인 작품이다.
(4) 침례요한의 워생으로부터 예수그리스도 승천까지 총괄적인 내용을 담고 있다.
(5) 의홱용어가 등장
(6) 예수그리스도의 완전한 인간성이 강조된다.
(7) 여자, 아이들 그리고 사회생활에 대한 관심과 동정심이 깃들인 복음서이다.
(8) 바울의 영향을 받은 복음서의 흔적 (은혜, 침의, 용서)
5. 누가복음의 내용 요약
(1) 서론(1:1-4)
(2) 인자의 오심(1:5-2:52)
A. 예고(1:5-56)
B. 침례요한의 출생(1:57-80)
C. 예수님의 탄생과 소년시절(2:1-52)
(3) 공생애를 위한 인자의 준비
A. 그의 선구자(3:1-20)
B. 그의 침례(3:21,22)
C. 그의 족보(3:23-38)
D. 그의 시성(4:1-13)
(4) 인자의 갈릴리 전도(4:14-9:6)
A. 제 1 기(4:14-6:11)
a. 갈릴리 전도 시작(4:14-41)
b. 갈릴리 처음여행(4:42-5:39)
c. 안식일 논쟁(6:1-11)
B. 제 2 기(6:12-9:6)
a. 12제자 선택(6:12-16)
b. 평지 설교(6:17-29)
c. 가버나움과 나인에서의 이국(7:1-18)
d. 침례요한의 질문(7:19-29)
e. 예수와 바리새인(7:30-50)
f. 갈릴리 두번째 여행(8:1-3)
g. 하나님 나라의 비유들(8:4-21)
h. 갈릴리 바다를 건너감(8:22-39)
i. 갈릴리 세번째 여행(8:40-9:6)
(5) 인자께서 갈릴리로부터 퇴거하심(9:7-62)
A. 갈릴리 바다 동편으로(9:7-17)
B. 가이샤라 빌립보로(9:18-43)
C. 갈릴리로 돌아오심(9:44-50)
D. 사마리아를 거쳐 유다로 가시다(9:51-62)
(6) 인자의 후기 유대전도(10:1-13:21)
A. 70인 전도 파송(10:1-24)
B. 율법사와 선한 사마리아인 비유(10:25-37)
C. 마리아와 마르다와 형제 베다니에 계신 주님(10:38-42)
D. 유대에서 가르침(11:1-13:21)
(7) 인자의 베뢰아 전도(13:22-17:10)
(8) 사마리아, 갈릴리 그리고 베뢰아를 거쳐 예루사렘으로 가시다(17:11-19:28)
(9) 인자의 수난(19:29-23:56)
A. 승리의 입성(19:29-44)
B. 성전을 두번째 청결케 하심(19:45-48)
C. 유대인 지도자들과 마지막 논쟁(20)
D. 인자의 체포, 재난, 죽음(22-23)
(10) 인자의 부활(24)
A. 부활사건(24:1-12)
B. 부활후 사건(24:13-49)
C. 예수그리스도의 승천(24:50-53)
1. 누가저작설의 왜적 증거를 제시하라.
2. 누가복음의 기록목적을 열거하라.
3. 누가복음의 특성을 나열하라.
4. 누가복음의 내용을 10가지로 구분하라.
신약총론 4 (성경각권)(복음서)
IV. 요한복음
(1) 기록자
본서가 사도요한의 저작임을 증명하는 외적 증거들
A. 요한이 저자임을 말한 이들
a. Theophilus of Antioch 170AD
b. Muratoria Canon 170AD
c. Zrenaeus 140-203AD
d. Tertullian 200AD
e. Clement of Alexandria 155-215AD
f. Origen 220AD
g. Hippolytus 225AD
B. 요한저작설을 부인하는 이들
a. Alogoi라고 알려진 집단은 제 4 복음서와 계시록은 이단자 Grinthus의
저술로 주장
b. Gaius of Rome 210AD도 이 두책을 Grinthus의 것으로 보았다.
c. 현대 신학자들중 제4복음서의 저자가 사도요한이 아닌 장로요한이라고 보는
이들도 있다. 그러나 사도임과 동시에 자신이 장로이기 때문(벧전5:1)
(2) 사도요한 저작설의 내적증거(Westcott이올)
A. 저자는 유대인으로 히브리식 문체로 유대적 사담을 기록(1:19-28, 4:9,25)
B. 저자는 ????에 대해 상세히 알고 있었다.
(1:44, 3:23, 5:2,10, 7:21-23, 9:14이하, 11:49, 18:13)
C. 저자는 목격자 중 한사람(1:14, 19: 35, 21:24)
D. 그는 사도 요한이었다.(13:23-25, 21:20-24)
(3) 요한은 누구인가?
A. 그는 침례요한이 아니다
B. 그는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우뢰의 아들)의 형제로 그들의 부친처럼 어부였다
(막1:19, 20:3-17)
C. 예수님께 가까운 제자중 하나
D. 그는 예루살렘 교회 초기에 베드로와 함께 잡혔다. (창3:1,11,12, 4:1-3)
E. 예루살렘 멸망시 에베소에 ?? 것이다
F. ??만 황제에 의해 밧모섬에 유형을 갔다가 다시 돌아왔다.
G. 아마 100AD경에 사망(Zrenaeus)
2) 요한복음의 기록연대
(1) 다른 세복음서가 기록된후 기록되었다(배열순서)
(2) Irenaeus는 에베소에서 기롤되었다고 함
A. 70AD 이전에는 오지 않았으므로 기록연대를 70AD 이전으로 보기 어렵다
B. 70AD 이후에 기록됨으로 예루사렘 ?에 기록이 없다.(10-15년 이후 기록)
(3) 본서의 저작년대에 많은 계산이 있다.
A. Zgnatius(115AD)는 그의 서신속에 본서를 인용하고 있다(115AD이전 기록)
B. John Rylands Papyrus P52의 발견은 100AD전후한 연대를 연상케 한다.
(4) 고로 본서는 70-115AD사이에 기록
A. 초기전승에 의하면 ????황제때 기록한 것으로 되어있다.
B. 사도요한이 에베소에서 85-90AD에 기록이 있다.
3) 요한복음의 목적
(1) 목적은 20:30, 31에 기록
(2) Clement of Alexanclria는 "최후로 요한도 다른 복음서에 예수그리스도의 몸과
활동에 관해 기록된 것을 관찰한 후 그의 친구들의 권유를 받고 또한 성령으로
감동되어 영적 복음서를 기록하게 되었다."
(3) 이같은 말은 본서는 다른 복음서를 보충하기 위한 것
공관복음서가 미처 못다 밝힌 부분을 ???이 추가하는 형식이다.
4) 요한복음의 특징
(1) 타복음서들보다 신학적이며 해석적인 성격이 많다
(2) 성격상 보수적인 입장을 갖는다
A. 본서는 초기 유대전도의 모든 사건을 기록(2:13-3:36)
B. 본서에 기록된 8개의 기록중 2개를 제외하고는 요한복음에만 있다.
(3) X의 신성을 특히 강조
a. 2:11,23,3:2,4:54,9:3을 20:30,31와 비교
b. "표적(Sings)"과 "이적(Miracles)"은 서로 바꾸어 쓰면서같은 뜻으로 사용-신성
을 증명.
(4) 본서는 대부분을 주님의 마지막 20일 되어진 일에 전승시키고 있다. (본서의 2/5
가 수난주간사건)
(5) 예수에게 많은 칭호를 붙여 준다.(말씀, 하나님의 양, 세상의 빛, 선한 목자, 문)
(6) 저자는 개인적 영감과 설교를 중요시 취급.
(7) 요한복음만이 가진 비유는 없다.
5) 요한복음 내용요약
(1) 서론(1:1-18)
(2) 하나님의 아들의 공생애를 위한 준비(1:19-2:12)
a. 그의 선구자의 사역(1:19-34)
b. 그의 미래 제자들에게 소개되심(1:35-51)
c. 물로 포도주를 만든 최초의 이적(2:1-12)
(3) 하나님의 아들의 초기 유대전도(2:13-4:42)
a. 첫번째 유월절과 성전을 처음 청결케 하심
b. 니고데모와의 대화(3:1-21)
c. 침례요한과 동일한 사역을 하심(3:22-4:4)
d. 사마리아를 거쳐 갈릴리로 가시다(4:5-42)
(4) 하나님의 아들의 갈릴리 전도(4:43-5:47)
a. 3?의 아들이 병든 것을 고치심(4:43-54)
b. 유대인 명절을 위해 예루살렘에 가시다(5장)
(5) 하나님의 아들이 퇴거하심(6장)
a. 갈릴리 바다 동편으로 가심(6:1-21)
b. 생명의 떡에 관하여 가버나움에서 설교하심(6:22-71)
(6) 후기 유대 전도(7:1-10:39)
a. 초막절에(7:1-8:59)
b. 나면서 장님된 자를 고치심(9장)
c. 선한 목자의 비유(10:1-21)
d. 수전절에(10:22-39)
(7) 하나님의 아들의 베뢰아 전도(10:40-12:11)
a. 베뢰아에서 설고(10:40-42)
b. 나사로의 죽음과 회생(11:1-53)
c. 에브라임으로 북항함(11:54-57)
d. 베다니로 돌아옴(12:1-11)
(8) 하나님의 아들의 수난)12:12-19:42)
a. 승리의 입성(12:12-19)
b. 희랍인들의 방문에 대한 예수의 반응(12:20-50)
c. 최후 유월절을 다락방에서 잡수시며 가르치시다
d. 겟세마네로 가는 도중에 가르치심(15-16장)
e. 그리스도의 중보기도(17장)
f. 그리스도의 배신자 체포(18:1-12)
g. 예수의 재판(18:13-19:15)
h. 십자가와 예수의 무덤(19:16-42)
(9) 하나님의 아들의 부활(20-21장)
a. 부활사건(20:1-10)
b. 부활후 사건(20:11-21:25)
1. 요한복음의 기자인 요한에 대하여 설명하라.
2. 요한복음의 목적을 열거하라.
3. 요한복음의 특징을 제시하라.
4. 요한복음의 내용을 9가지로 분류하고 서사문으로 작성하라.
5. 공관복음서 문제
1) 공관복음서(Synoptic Gospels)라는 말은 독일의 그리스바하(Griesbach, 1745-1812)
가 1789년 처음으로 사용한 용어로서 희랍어의 (together with)과
(to see)의 합성어로 (Viewed together, 또는 a seeing together)라는 말
에서 나왔다. 마태, 마가, 누가복음을 가리켜 공관복음서라 부른다.
2) 공관복음서의 순서문제도 여러 학자들이 이견을 보여줌으로 난해한 문제로 알려져
있다.
. 마태, 마가, 누가의 순서를 주장하는 이들(Grotius, Mill, Wetstein, Hug,
Greswell)
. 마태, 누가, 마가의 순서를 주장하는 이들(Griesbach, Fritzsche, Meyer, De
Wette, Baur)
. 마가, 마태, 누가의 순서를 주장하는 이들(Storr, Weisse, Wilke)
. 누가, 마가, 마태의 순서를 주장하는 이들(Hitzig, Bruno, Bauer, Volkmar)
. 누가, 마태, 마가의 순서를 주장하는 이들(Evanson)
. 누가, 마가, 마태의 순서를 주장하는 이들(Vogel)
3) 공관복음의 기원 문제
(1) 마태, 마가, 누가가 각각 저자라고 보는 전통적 입장이 있으나, 그럼에도 불구하
고 공관복음서의 기원 문제는 난제로 남아 있다.
(2) 세 복음서의 공통점을 찾아보면 아래와 같다. (Thompson)
a. 마태, 마가, 누가복음 가운데 4부분이 동일하다.
b. 마태, 마가복음 가운데 12부분이 동일하다.
c. 마태, 누가복음 가운데 14부분이 동일하다.
d. 마가, 누가복음 가운데 5부분이 동일하다.
(3) 세 복음서의 상이점을 찾아보면 다음과 같다. (Westcott)
+--------------+--------------------+---------------------+
| | 특수한 부분 | 일치하는 부분 |
| | (Peculiarities) | (Concordances) |
+--------------+--------------------+---------------------+
| 마 태 | 42% | 58% |
+--------------+--------------------+---------------------+
| 마 가 | 7% | 93% |
+--------------+--------------------+---------------------+
| 누 가 | 59% | 41% |
+--------------+--------------------+---------------------+
| 요 한 | 92% | 8% |
+--------------+--------------------+---------------------+
4) 다음과 같은 문제가 공관복음서 기원 문제에서 야기된다.
(1) 만일 세 복음서의 자료가 각각 완전히 독립적이라면 단어나 그 표현에 있어서 정
확하게 일치하는 부분들이 어떻게 설명할까?
(2) 만일 세 복음서가 완전히 서로 의존되어 있거나, 공통된 자료를 사용하였다면,
서로 다른 상이점은 어떻게 설명되어질 수 있을까?
(3) 마가복음은 어째서 다른 복음서와 더 많은 공통점을 갖고 있는가?
(4) 각 복음서에 서로 빠진 부분을 우리는 어데게 설명할까?
(5) 각 복음서에 타나난 사건의 순서로 서로 다른 것을 우리는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5) 이상과 같은 문제에 대한 대답은 여러가지로 나타났다.
(1) 원복음설(The Urevangelium Theory)
(2) 상호의존설(The Interdependence Theory)
(3) 단편설(The Fragmentary Theory)
(4) 구설전승설(The Oral tradition Theory)
6) 여기서 우리는 최근 많은 학자들에 의해 토의되고 두 자료설(Two Document)과 양식
사비판(From Criticism) 이혼에 대한 역사적 배경을 연구해 보기로 하자.
(1) 초기 교회들은 마가복음을 다른 복음서와 같이 중요한 책으로 간주하지를 않았
다. 오히려 마태복음을 더 중요한 책으로 보면서, 어거스틴은 마가복음을 마태복음
의 단축형으로 읽어야 한다고 주장하므로 마태와 마가의 유사성을 설명하려고 했다.
그는 마가복음이 목격자로서의 베드로에 의한 것이라 주장했다.
(2) 그러나 초기 교회들은 공관복음서의 우열을 말하지 않고 오히려 동일하게 그 중
요성을 강조하면서 어떻게 서로 조화할 수 있는지를 주로 문제로 삼았다.
(3) 그러나 1778년에 써서 1784년에 출판한 레씽(G.E.Lessing)의 저서는 복음서 비판
주의 운동의 효시가 되었다. 그에 의하면 예수가 죽은 후 사도들의 구전에 기초하여
아람어로 기록된 추상적 복음서가 있었다는 가설을 제시했다. 이같은 가설은 공관복
음서의 상이점을 현상적으로 설명할 수가 있었으며, 곧 그리스바하(Griesbach)에 의해
서 받아졌다. 사실 라이마루스(H.S.Reimarus, 1694-1768)에 의해서 이미 복음서 기록
이 종교신앙의 방편을 위한 기록이기 때문에 역사적 가치가 없는 것이라고 지적됨으로
복음서를 통해서는 역사적 옛를 찾을 수 없다는 회의적 결론이 당시 신학계의 이단사
상으로 퍼져 나가고 있었다. 레씽은 라이마루스의 이같은 사상을 널리 전하는 사역
을 한 사람이다.
(4) 1835년에 라크만(K.Lachmann)은 "공관복음서에 타나탄 사건 설화의 순서"라는 제
목으로 책을 출판하면서 소위 "두 자료설에 대한 가설"을 주장했다. 그는 여기서 최초
로 소위 마가복음 우선(Mark's priority)문제를 언급하고 있다. 그는 마태와 누가가
마가와 병행구를 갖고 있을 때, 두 복음서에 있는 사견의 순서는 일치하고 있다고 지
적했다. 그러나 거기에 마가와의 병행구가 없을 경우엔 같은 사건을 놓고 서로 갈라
서 있다고 본다. 라크만은 이런 경우 마태와 누가가 마가에서부터 왔다고 결론짓지는
않는다. 그는 공관복음서에서부터 나온 것을 주장하는데, 이 원복음서는 후기의 전도
자들(마태, 누가)보다 더 가깝게 따랐던 마가가 갖고 있었던 것이라고 한다. 이같은
생각은 후일 복음서 비판연구에 커다란 역할을 해 왔다.
(5) 1835년 스트라우스(D.F.Strauss, 1808-1874)가 예수전을 출판해 냄으로써 신약학
계는 다시 한번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그는 복음서의 역사적 가치를 부인하고 복음
서는 마태나 마가 그리고 누가에 의한 책이 아니고, 그 당시 교회의 산물이라고 주장
했다. 스트라우스는 성경에 사실적 역사가 있다는 합리주의자들의 입장을 부인하면
서, 기독교의 초자연적 신앙을 거부하였다. 그는 이처럼 초자연주의자나 합리주의자
들과는 달리 성경을 신화적 입장에서(Mythological view point)발전되어진 문헌으로
이해하였다. 스트라우스에 의하면 복음서에는 두가지 종류의 신화가 있다고 한다.
a. 순수신화(Pure Myths)- 예수 당시 유대인들의 마음에 있었던 메시야 개념이나
메시야 기대 속에서 신화적 자료를 찾아낼 수 있다고 본다. 즉 예수의 개인적 품격
이나 활동 그리고 그의 생애 속에서 특별히 인상적으로 남겨진 일들을 통해 신화적 자
료로 찾았다(변화산의 이야기 또는 성전의 휘장이 찢어진 이야기 등).
b. 역사적 신화(Historical Myths)- 기독론 사상으로부터 끌어낸 개념을 중심으로,
거기에 종교적 열심을 더해 만들어진 개인적 사건들을 역사적 신화라 한다(사람낚는
어부들, 저주받은 무화과나무 등). 스트랑스는 복음서가 이처럼 역사적 책이 아니고
신화적인 것으로 채워져 있다면 어떻게 성도들의 신앙 요청에 응할 수 있었을까를 질
문하면서 그는 비판주의자들이 버렸던 신앙적 교리 재건을 다시금 해야 한다고 주장했
다. 그러기 위해서는 역사적 예수를 중심한 사사은 버려야 하고, 거기에 신적인성의
개념을 가진 그리스도 개념으로 대치시켜야 한도고 주장한다. 고로 신앙의 그리스도
를 역사적 예수와 구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스트라우스는 복음서 기록 배후에 있는
역사적 예수는 신앙을 위해서는 아무것도 아니라고 했다. 스트라우스의 관심은 오직
복음서 안에 있는 신화였다. 그리고 그 신화의 원인을 설명하려고 했다. 그의 설명
에 의하면 원시교회 안에 있었던 창조적 신화적 정신(Creative Mythological
Mentaiity)이라고 본 것이다. 역사 감각을 갖고 있던 스트라우스는 저자의 의도를
이해하기 위해 저자의 마음 속에 동정적으로 침투하려고 노력을 하였다. 오늘날 편
집사학파(Redaction Criticism) 연구방법이 실은 이미 스트라우스로부터 시도되었다고
볼 수가 있다. 그는저자가 기록하고 있는 사건보다는 오히려 보음서를 산출하게 된
심리적 과정(Psychological Process)에 더 관심을 가졌다. 그는 복음서가 시작될 때
교회가 가졌던 정신태도부터 연구하기 시작했다. 그런 각도에서 복음서를 역사적 자
료로서 읽으려고 애를 썼다. 그러나 스트라우스의 복음서 연구는 교리적 연구라기보다
는 심리학적 연구(Psychological approch)이며, 신화적 관심이 역사적 사실에 대한 관
심을 지배하였다고 본다.
(6) 1851년 브루노 바우어(Bruno Bauer)는 "복음서 역사의 비판"이라는 책 속에서 스
트라우스의 회의주의적 결론에 동의를 해주었다. 그는 복음서에서는 역사적 예수가
전혀 발견되지 않으며 마가복음이 기록된 최초의 복음서라는 이론을 증명하려고 노력
하였다.
(7) 1901년에는 두 사람의 이름이 중요하게 나타난다.
a. 버나드 바이스(Bernard Weiss)는 복음서의 제 2 의 자료로 마태나 누가에 과농
되어 있으면서도 마가에는 없는 것을 Q(=Quelle-Sourse)라고 부르면서, 마태와 누가가
마가를 자료로 사용했다는 라크만의 입장을 받아들여 소위 마가복음 가설(Markan
Hypothesis)을 최초로 주장하므로, 마가와 Q(또는 Logia)자료설의 가설을 세웠다.
b. 1863년에 이미 호츠만(Holtzmann)이 마가복음 가설을 주장했지만 그는 바이스
의 견해를 통해 자기의 입장을 재확인하였다. 그러나 홀츠만은 마태나 누가복음에
있는 소위 비 마가복음(non-Marcan)요소들만 Q라고 제한을 했다. 이들 두 사람을 우
리는 두 자료설(Two Document Hypothesis)의 창시자들이라고 부른다. 이 두 자료설
의 결과 마가복음이 마태나 누가복음보다 더 역사적이고 확실성이 있다고 보는 소위
마가복음 가설(Markan Hypothesis)이 신약학계를 크게 자극한 것은 사실이다.
(8)그러나 이같은 가설은 1901년 브레데(William Wrede)에 의해 크게 도전을 받게 되
었다.
a. 브레데는 마가복음도 예수의 진상을 보여주지는 못하였다고 지적하고, 마가복
으믄 단순히 구전에 기초한 여러가지 얘기들을 주워 모든 것에 지나지 않는 것이라고
보았다.
b. 브레데는 마가복음도 마태나 누가처럼 자기의 자료들을 자유롭게 뜯어맞춘 작
품이라고 바았다. 그런고로 마가복음은 역사적 사실이라기보다는 기독교 공동체의 신
앙을 나타낸 것이라고 해석한다.
c. 브레데는 마가복음의 전체 구조를 지배한 것은 소위 "메시야 비밀" 이론이라고
주장한다)막8:27-30;9:9). 그에 의하면 이 메시야 비밀설은 부활 이후 교회가 산출
해낸 사상으로 보았다. 이런 그의 견해는 양식사 비판연구 결과로도 알려졌다.
(9) 1903년 율리우스 벧하우젠(Julius Wellhausen)의 마가복음이 출판되었다.
a. 그는 Q자료 역시 교회의 산물이며, 마가복음보다 더 신빙성이 있다고주장할 수
가 없다고 보았다.
b. 마가는 처음엔 독립된 존재로 되어 있던 작은 부분들이었으나, 그것들을 수집
하여 하나로 만든 책이라고 보았다.
c. 마가는 초대교회의 신앙과 환경에 대한 지식을 제공해 준다고 보았다.
(10) 양식사 비판연구의 제기
a. 1919년부터 1921년 사이에 독일에서 3권의 책이 비슷하게 출판되었다.
a) Dibelius, From-History of the Gospel(1919)
b) Bultmann, The History of the Synoptic Tradition(1921)
c) Schmidt, The frame of the story of Jesus(1919)
b. 영국에서도 두 사람의 이름이 이 연구에 알려졌다.
a) R.H. Lightfoot, History and Interpretation in the Gospels(1934)
b) Vincent Taylor, The Formation of the Gospel Tradition(1033)
c. 미국에서도 이 분야에 연구한 이들이 있다.
a) Burton Scott Easton, The gosple before the Gospels(1928)
b) F.C.Gramnt, From Criticism(1934)
(11) 양식사 비판 연구란 복음 전승이 문체로 형성되기 이전(가디가따까바교) 즉 구
전으로 전승된 자료를 연구하는 방볍이다. 이들 양식사 비판 연구가들에 의하면 복음
서 저자들은, 저자가 아니고 자료의 수집가(collector)이며, 동시에 편집자(editor)로
서, 이미 도립적으로 어떤 형식을 갖춘 자료를 얻어, 복음서를 형성했다고 한다. 이
들에 의하면
a. 공관복음서는 민속문학의 한 종류로 취급하면서 희랍의 전설이나 랍비 전승과
비교하여 거기서 발전되어 온 것들이라고 설명하기도 한다.
b. 공관복음서는 역사적 예수에 의해서가 아니고, 그것을 만들어낸 원시 기독교인
의 신앙을 묘사한 것이라고 본다. 그런고로 전승의 자료는 전기적, 역대기적 또는 지
리적 가치가 없는 것으로 간주한다. 그리고 목격자의 증거임을 부인한다.
c. 공관복음서는 독립된 전승의 인위적인 수집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므로, 이들
자료를 연결시킨 내용에 어떤 역사적인 가치를 인정할 수 없다고 본다.
d. 그 문장의 단위마다 우리가 구분할 수 있는 어떤 특정한 문학형식을 갖고 있었
다고 본다.
a) Paradigms- 예수의 말씀을 중심하고 설명되어진 설고(예 : 조공세). 불트
만은 이것을 Apothegms라고 하고, 테일러는 Pronouncement Stories라고 한다.
b) Tales- 기적을 중심하여 만들어진 이야기로서 개종자들에게 들려주기 위한
얘기들(예 : 5000명을 먹이심)
c) Myths - 신화적, 비인간(격)적 요소가 담긴 얘기들(예 : 예수의 세례, 시
험, 변화산의 이야기)
d) Sayings - 교육적인 목적을 위해 수집된 것들
e) Passion Story - 연결된 설화중 가장 오래되고 진실성이 있는 것들.
이상과 같은 문학형식은 소위 Sitz im leben(생의 정황)이라는 사회적 정황 속에서 이
루어졌다. 디벧리우스는 그것을 설교의 정황 속에서, 불트만은 교회의 논쟁 속에서
찾았다.
(12) 양식사 비판 연구의 오류들
a. 이들은 교회 교부들(이레니우스,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트와 오리겐 등)의 역사
적 증언 즉 공관복음서의 저자, 또는 저작경위와 목적 등을 부인하고 있다.
b. 이들은 전설이나 민속 얘기들을 산출해 낼 수 있는 필요한 시간적 길이를 간과
하고 있다.
a) McGinley에 의하면 전설이나 민속 얘기가 형성되기 위해서는 적어도 100년은
지나야 한다는 주장이다.
b) Talmud는 300년 내지 400년이 걸렸다.
c) Epidauros의 전승은 200년 이상이 걸렀다.
d) 그러나 양식 비판 학자들은 불과 40년(30년-70년 AD) 이내에 이같은 전승이
생겼다고 본다. 바울이 52년경 그의 최초 서신을 기록했다고 보면 갈보리 사건후 불
과 20년이 겨우 넘은 짧은 시간 내에 어떻게, 전설이 형성될 수 있겠는가?
e) 복음서 연구의 모든 방법들은 예수에 대해서 더 많이 그리고 더 확실히 알기
위한 목적을 갖는 것이 성서연구의 방향이라면, 양식 비판 연구는 이것과도 거리가 멀
다.
- 불토만은 그의 예수전(1926)에서 복음서의 역사적 가치를 양식사 비판 연구 결과
완전히 부인했다.
- 불트만에 의하면, 우리는 예수의 메시지 이외에 그의 생애에 대해서는 아는 바가
전혀 없으며, 그 메시지도 그당시 공공단체에 의해서 제공되어진 것뿐이며, 공동단체
의 관심과 배치되는 모든 것은 제외되었다고 본다.
- 라이트 후트는 하늘의 그리스도가 아닌 지상의 예수는 우리에게서완전히 감추어졌
다고 본다.
d) 양식사 비판 연구는 아직도 확인되지 못한 두 자료설 가설에 의존되어 있다.
e) 이들은 여러 종류의 자료들을 편집하기 위해 문체를 단순화하려는 과오를 범
했다.
f) 그들은 공동체의 창조물 또는 수집물로서 복음서를 보았다.
E.F.Scott(Validity of the Gospel Record)는 공동체란 항상 보수적인 것인데, 그런
보수성을 가진 공동체가 즉 일정한 수의 사람들이 한가지 원리나 이상에 어떻게 같은
헌신을 할 수 있었을까를 자문하고 있다. 그러나 양식 비판 학자들은 초대 교회 공
동체가 이같은 전승을 창조해 냈다고 주장한다.
g) 생의 정황(sitz im leben)이 가장 중요한 예수의 생애를 알기 위해서는 제
외되고, 그밖의 원시 크리스챤 생활의 모든 국면의 것은 찾아졌다.
h) 복음서 기록이 초자연적 내용 때문에 역사적 가치를 상실했다는 편견을 주
장하고 있다.
i) 양식 비판 연구는 생의 정황을 통하여 복음서 기원문제를 연구하고 그것이
현재의 형태로 되어진 과정을 찾고자 한다. 그러나 현대 과학의 연구방법은 현재의
틀에서 기원 문제로 찾아가는 방법을 사용하는 것이 상례인데, 소위 과학적 연구 방법
을 성경에 도입했던 이들의 방법론은 그와는 반대로 하고 있다.
j) 양식사 비판 연구는 객관적 역사 비판주의와 주관적 역사적 판단과 혼동하
고 있다. 그들은 종종 자신의 판단을 저들의 앙식의 틀과는 상관없이 하고 있다.
k) 저들은 분명한 목격자의 현존을 무시하고 있다.
A.M.Hunter(Interpreting the N.T, pp.39-40)는 양식사 비판 연구가들에 의
하면 예수에 대한 모든 목격자들은 깊은 잠에 빠져 있거나 아니면 안전하게 피해 있는
상태에 있었을 것이라고 비꼬고 있다.
l) 저들은 유대 랍비들의 세심한 기억력과 전승을 전래하는 과정에서 용의주도
한 유대인 습관을 간과하고 있다.
m) 그들에 의하면 문학형식이 내용의 진실성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고 보았
다.
n) 문학 형성의 불확실성이 그들의 또 하나의 약점으로 아직도 남아 있다.
(13) 결론
복음서 기원의 문제에 대해 우리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제시할 수 있다.
a. 목격자의 증언
a) 마태의 증언
b) 마가에 의해 기록된 것으로 된 베드로의 증언
c) 누가는 목격자의 자료를 인용하고 있다.(눅1:1-4)
b. 기록된 단편들
a) 누가가 기록된 단편들을 언급(눅1:1-4)
b) 누가에 있는 출생과 소년 시절의 기록은 아마도 아람어 기록을 누가가
번역한 것같다(1,2장)
c. 복음서 저자간의 개인적 접촉
a) 저자들이 함께 있었을 때 저들의 노트를 피차 비교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골4:10,14; 빌1:24).
b) 복음서 안에 공통점을 이런 각도에서 설명할 수 있다.
d. 구전
a) 유대인들의 기억, 습관이나 또는 쓰기를 두려워하는 유대인들에 의해 아마
도 만들어졌을 것이다.
b) 그리스도의 생애에 대한 사건을 초대 교회가 소유했던 것을 말로 전수시킨것.
e. 교회 회합
a) 초대 교회는 회당식 예배형태를 따른 것으로 볼 수 있다.
b) 구약을 읽은 후, 그리스도사건에서 그것과 맞추어 암송하기도 했다.
f. 저자 개인의 인격과 견해에 따라 차이점이 있다고보는 입장도 있다. 계시의
점진성을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g. 성령의 전체 영감설
하나님께서 성경기록 과정 전체를 지배하셨다는 것이다.
* 6. 예수전 연구의 자료들
"역사적 예수"를 만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자료 문제가 가장 중요한 것이다.
우리는 두가지 종류의 자료를 갖고 있는데 크리스챤들에 의해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과 불신자들에 의해 기록된 책들이었다. 지금까지 우리 공관복음서에 나타난 그
자료를 통해 그들이 예수를 무엇이라고 했는지를 알아보자.
A. 유대인들의 자료들
1) 요세푸스(Flavius Josephus) : AD37(또는 38)년에 하시모니안 왕조와 친척관계
라고 하는 마티아스(Matthias) 유대인 제사장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나이 19세때
그는 바리새파에 들어가서 그가 A.D.100년경 죽을 때까지 비록 명목상이긴 했지만, 바
리새인으로 살았던 것이다.
요세푸스의 책들은 신약성경 연구에 대단히 중요한 것들이다.
. History of the Jewish War against the Romans, 77AD
. Antigvities of the Jewish People, 93AD
. Against Apion, 99AD
요세푸스는 그의 Antiguities에서두 차례 예수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다.
XXIII,iii,3........"예루살렘에 수로를 건설하기 위하여 성전 기금을 사용하눈 문
제를 놓고 빌라도와 유대인들 사이에 논쟁이 있었던 무렵, 현자-만일 그를 하나의 인
간으로 부를 수 있다면-예수가 일어났다. 그는 놀라운 행동을 하였으며 진리를 받기
를 기뻐한 사람들의 선생이기도 했다. 그는 유대인뿐만 아니라 이방인들에게도 인기
를 끌었다. 그는 그리스도였다. 우리 중에 있는 많은 지도자들의 고소장에 의하
면, 빌라도가 그를 십자가에 저주했을 때, 그를 처음에 사랑했던 사름들이 그렇게 하
도록 쉬지 않았다. 그는 삼일만에 그들에게 살아나 나타났다. -경건한 예언자들은 이
일을 이미 예언했으며, 그에 관한 일만개의 다른 놀라운 기사들이 나타났다. 심지어
오늘날까지 그의 이름을 따라 명명한 크리스챤들은 죽지 않고 계속 살아 있다."
XX,ix,1..........산헤드린 앞에서, 크리스챤들의 지도자인 야곱의재판에 대해 언급
하는 중에, 요세푸스는 야고보를 소위 그리스도라고 하는 예수의 형제 야고보라 빠마
렀다.
2) 바벧론의 탈무드(Babylonian Talmud) : 비록 5세기의 글이기는 하지만 초기의 많
은 자료들이 축재되어 있다. 그중의 어떤 것들은 1세기의 것까지 언급하고 있다.
(1) 벤 판다라(판다라의 아들)이라는 이름을 가진 예수는 그의 모친이 판다라라고
이름하는 정부에 의하여, 정조를 유린 당하여 결혼생활로부터 출생된 사람으로 알려져
왔다.
(2) 그는 애굽에서 마술을 배웠으며 그런고로 그는 많은 사람들을 속이기 위하여수
많은 놀라운 일들을 수행했다.
(3) 그는 자기 자신을 하나님이라고 불렀다.
(4) 그는 속이는 자로서 그리고 배교자의 스스으로서 산헤드린에 의하여 재판을 받
았다.
(5) 그는 유월절 전야에 십자가에 못박혔거나 아니면 돌에 맞아 죽은 것을 매달아
처형을 당하였다.
(6) 그는 다섯명의 제자들이 있었는데 그들의 이름은 맛다이(Matthai), 네카이
(Negai),넷처(Netzer), 부니(Buni) 그리고 토다(Thodah)였다.
B. 이방인들이 갖고 있는 자료들
1) 프리니(Pliny the Younger, C.A.D. 62-C.113) : 그리스도에 대해 언급한 최초의
라틴 저자로서 그는 소아시아에 있는 로마 영토인 비드니아(Bithynia)의 치리자
(Governor)였다. 그는 자기 영역 내에서 계속 증가일로에 있는 크리스챤들을 어떻게
취급할 것인가에 대해 트라얀(Trajan) 황제의 자문을 받았다. 그는 A.D.112년경 트
라얀 황제에게 씌 편지 속에서(Epist x96)프리니는 말하기를, "크리스챤들은 정한 날
에 규칙적으로 함께모이는데 저들은 마치 신에게 하듯 그리스도에게 응답적 찬송을 부
른다"(Carmen Christo quasi deo dicere Secum invicem)고 했다.
2) 타시투스(Tacitus, C.A.D. 55- C. 117) : 로마의 역사가인 그는 A.D.115년경 자
기의 연대기(Annals) 속에서 분명하고 야무진 작품을 정리해 내면서, 로마에서 크리스
챤들의 박해를 묘사하고 있다. "그들의 이름은 디베리우스(Tiberius)황제시대에 살았
던 크리스투스(Christus)에게서부터 왔는데, 그는 본디오 빌라도 총독에게 사형선고의
저주를 받은 이였다."(Annals, xv, 44)
3) 수에토니우스(Suetonius, C.A.D.10-C.160) : 하드리안(Hadrian)황제의 비서였기
때문에, 그는 정부 고관과 쉽게 접촉할 수가 있었다. 수에토니우스는 A.D.120년에 유
명한 역사책을 한권 썼는데, 그 책명은 12황제들의 생활(The Lives of the twelve
Caesars)이다. 그는 네로(Nero)를 다루는 부분(xvi)에서 네로는 "새로운 그리고 유
해한 미신을 표방한 종파(Sect) 중 하나인 크리스챤을 박해하므로 크게 해를 입었다"
고 한다. 크라우디스(Claudius)황제에 관한 부분에서는(xxv) "크레스토(Chrestus)의
영향 하에 계속적으로 문제를 일으킨" 유대인들이 로마에서부터 추방되는 일을 언급하
고 있다.
1. 공관복음서(Synoptic Gospels)를 정의하라.
2. 양식사 비판 연구에 대하여 설명하라.
3. 복음서 기원 문제를 800자 내외로 논증하라.
4. "역사적 예수"에 필요한 자료를 열거하라.
제 9 장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
1. 탄생과 예비단계
1) 복음서 서론
(1) 마태복음(1:1-17):족보
(2) 마가복음(1:1) :그리스도에 관한 복음의 시작
(3) 누가복음(1:1-4) : 역사적 서론
(4) 요한복음(1:1-18) : 신학적 서론
2) 요한과 예수의 출생 예고 및 초기 생애
(1) 사가랴에게 예고(눅1:5-25)
(2) 마리아에게 예고(눅1:26-38)
(3) 요셉에게 예고(마1:18-25)
(4) 요한의 출생(눅1:57-80)
(5) 예수의 탄생(눅2:1-20)
(6) 예수의 할례와 마가아의 성결(눅2:21-38)
(7) 동방박사들의 방문(마2:1-12)
(8) 애굽에서 피신 나사렛에 돌아옴
(9) 12세때 성전방문(눅2:41-52)
(10) 침례요한의 활동(마3:1-12, 눅3:1-20)
(11) 예수의 침례(마3:13-17)
(12) 예수의 시험(마4:1-11, 눅4:1-13)
2. 예수그리스도의 공생애
1) 공생애 초기
(1) 침례로부터 첫 유월절
(2) 침례요한과 예수의 첫 등장
(3) 일어난 사건들
a. 예수의 침례(마3;13-17)
b. 예수의 시험(마4:1-11)
c. 처음 제자들을 부르심(요1:29-51) : 요한, 안드레, 베드로, 빌립, 나다나엘
d. 갈릴리 가나에서 첫 이적을 행하심(요2:1-11)
e. 가버나움의 여행(요2;12)
2) 초기 유대 전도(요2;13-4:42)
(1) 장소: 예루살렘과 유다
(2) 때 : AD26년 유월절부터 수개월, AD26년부터 29년까지 4차례 유월절(요2:13,
5:1, 6:4, 12:1)
(3) 일어난 사건들
a. 성전을 청결케 함(요2:13-22)
b. 니고데모와 대화(요3:1-22)
c. 사마리아를 통하여 유대에서 갈릴리로(요4:5-42)
3) 갈릴리 전도
(1) 장소 : 갈릴리 지방(북팔레스타인)
(2) 때 : AD26년 가을부터 AD28년 봄(1년반 정도)
(3) 사건들
a. 전기(막1:14-3:12) : 갈릴리 도착(AD26년 가을)부터 12제자 선택(AD27년 초
여름)까지 약 6개월간
a) 나사렛에서 거절당하시고 가버나움에 본부(베드로집)을 정하심(눅4;14-30
; 막1:21-34)
b) 네명의 어부들과 갈릴리 첫번째 여행, 돌아오는 길에 마태를 부르심(막
1:35-2:22)
c) 예루살렘과 갈릴리에서 안식일 논쟁(요5:1-18; 막2;23-3:5)
b. 후기 : 12제자 선택(AD27년 초여름)으로 부터 첫변째 갈릴리를 떠나시기까지
(AD28년 유월절까지) 약 10개월(막3:13-6:31)
a) 12제자 선택과 산상 설고(막3;13-19)
b) 제 2 차 선택과 여행(눅7:11-8:3)
c) 천국 비유를 주심(마13장)
d) 제 3 차 갈릴리 여행(막6:7-31) 이때 헤롯 안티파스가 침례요한을 살해
4) 갈릴리 떠나심
(1) 장소 : 갈릴리 주변
(2) 때 : AD 28년 봄(5000명 먹이심)으로 부터 AD 28 가을(예루살렘으로 가심)까지
약 6개월(요6:4-7:2)
(3) 사건 : 네차례 갈릴리 떠나심
a. 갈릴리 동편 해안지역으로 떠나심(막6:32-52)
a) 5000명을 먹이심(요6장)
b) 가버나움으로 오시는 중 생명의 떡 강론(요6:24-59)
b. 두로와 시돈지역으로 또나심(막7:24-30)
a) 스로보니게 여인의 딸을고치심
c. 베니게를 통하여 북쪽으로 가서 다시 데가볼리의 남쪽으로 가심(막7;31-8:9)
a) 데가볼리 지역에서 사천명을 먹이심(막8:1-9)
d. 가이사랴 빌립보로 북향(막3;27-9:50)
a) 베드로의 신앙고백(마16:13-20)
b) 자기 죽음을 예고(막8:32)
c) 가이사랴 빌립보 근처에서 변화산상 경험(막9:1-29)
5) 후기 유대 전도
(1) 장소 : 예루사렘과 유디 지역
(2) 때 : AD 28년 10월(초막절)로부터 AD 28년 수전절까지(요7-10장)
(3) 사건들
a. 예루살렘에서
a) 초막절(요7:11-52)
b) 간음한 여인(요7:53-8:11)
c) 바리새인과 논쟁(요8:12-59)
d) 나면서 소경된자 고침(요9장)
e) 선한 목자에 대한 강론(요10:1-21)
b. 유대 주변에서
a) 70인 제자를 파송(눅10:1-24)
b) 유대에서 가르치심(눅10:25-13:21)
c. 다시 예루살렘에서 : 수전절(요10:22-39)
6) 베뢰아 전도(눅13:22-19:28)
(1) 장소 : 헤롯 안티파스 통치하에 요단강 저편
(2) 때 : AD 28년 12월(수전절)-AD 29년 봄(예루살렘으로 마지막 여행)까지 수주간
(3) 일어난 사건들
마리아와 마르다의 초청에 응하시고 베다니에 가서 나사로를 살리심(요11:1-46)
7) 수난주간
(1) 장소 : 베다니와 예루살렘
(2) 때 : 종려주일로 부터 부활절까지(AD 29)
(3) 사건들
a. 승리의 입성(일요일)막11:1-11
b. 성전을 두번째 청결케 하심(월) 막11:15-26
c. 유대인들과 마지막 논쟁(화) 막11:27-12;40 예수의 공생애 마지막 날
d. 감람산에서 예언적 강론(화, 오후) 마24, 25장
e. 예수의 발에 두번째 기름부음(화, 저녁) 막14:10,11
f. 가롯유다가 유대인들과 흥정(화, 밤) 막14:10-11
g. 베다니에서 휴식(수)(복음서 기록 없음)
h. 유월절 준비와 만찬(목, 오후) 막14;12-31
i. 예수가 겟세마네에서 체포(목, 밤) 막14:32-52
j. 증경 대 제사장 안나스 앞에 야간 재판(금,새벽까지) 요 18:12-13
k. 대제사장 가야바 앞에서 재판(금,새벽까지) 막14:53-72
l. 산헤드린에서 아침 재판 눅22:66-71
m. 빌라도 앞(금, 오전) 눅23:1-5
n. 온 갈릴리 지역의 헤롯 안티파스알 (금,오전) 눅23:6-12
o. 빌라도 앞에 두전째 (금, 오전) 눅 23:13-25
p. 십자가(금, 오전9-오후3시) 막15:16-41
q. 무덤에 매장(금, 오후6시 이전) 막15:42-47
r. 무덤에 지내다(토)
s. 부활하시다(주일 새벽) 막16:1-8
8) 부활
(1) 장소 : 예루살렘, 엠마오, 갈릴리, 베다니
(2) 때 : 부활로부터 승천까지 40일간(AD 29)
(3) 사건 : 부활을 나타내시다
a. 주일(당일)에
a) 무덤에서 마달라 마리아에게(요20:11-18)
b) 무덤에서 돌아온 다른 여인들에게(마28:8-10)
c) 베드로에게(눅24:34)
d)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에게(눅24:13-32)
e) 주일 저녁 예루살렘에 모여있던 10제자들에게 도마가 빠짐(요20:19-25)
b. 후일에
a) 11제자들에게(도마포함) 아마 예루살렘에서(요2:26-29)
b) 갈릴리 바다에서 가제자들에게(요21)
c) 갈릴리에서 500여 형제에게(고전15:6,마28:16-20)
d) 주의 형제 야고보에게(고전15:7)
e) 예루살렘에서 11사람에게(눅24:50-53): 승천
f) 사울(바울)에게 (행9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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