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조 : Creation
이한영
구약 최종 문학형태의 히브리적 본질과 구조에서 서구논리의 틀을 가진 조직적 교리를 구성하고자 하는데 있어서는 적지 않은 해석학적 오류가 동반되지 않을 수 없다. 구약은 헤라의 논리구조가 아닌 고대 근동으로부터 전개되어 온 다양한 이야기 식 형태 (narrative form)로 그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안에 신학의 틀이 부재한 것은 아니다. 구약 각 권과 묶음에 고유적이고 수평적인 다양한 이야기들이 다양한 주재아래 평면적으론 서로 관계가 없어 보이는 산만한 의미들을 표명하고 있지만 구약본문의 자세히 읽기를 통하여 독자는 점진적으로 유기적인 신학 체제로 묶어 가는 역동적인 총괄적인 신학의 틀들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물론 그 중심적인 신학의 틀이 무엇이냐에 대한 논쟁은 계속되고 있다.
그동안 구약성경신학의 해석학적 틀에 대한 논쟁과 신학적 통일성을 추구하는 작업들은 많이 있었다. 그 중 Eichrodt, Walter Kaiser, Palmer Robertson은 언약( ) 개념을 구약 각 권의 신학을 묶는 핵심적 원리로 정립했다. 그러나 유사한 맥락에서 E. Selin은 -하나님의 거룩-이라는 주제를 그 핵심으로 삼았고, Bruce Waltke은 -하나님의 나라-를 구성 신학원리로 보았다. 더 나아가 이러한 단일적 핵심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J. L. Mackenzie는 구약성경신학을 일곱 대목의 틀로 구성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들은 모두 핵심과 틀에 초점을 맞추는 대신 구약 각 권과 각 묶음들이 가지고 있는 독자적이며 다양한 수평적 주제들을 우회하게 되었다. 이러한 과정에서 G. Hasel은 핵심적 틀과 각 권의 메시지가 구약신학을 하는데 있어 균형 있게 반영되어야 함을 강조하게 되었으나 구약신학을 하는데 있어 더욱더 난해한 것은 방법론의 선택이었다. 과연 구약의 의미를 역사와 본문과 독자 중 어떠한 틀에서 구성해야 되는가 하는 고민인 것이다.
이에 있어 정통적으로 이원법 접근을 고수하던 19세기의 역사비평학은 한 때 신학-문학-역사의 역동적인 대화보다는 양자선택을 요구하는 대조적이고 분리 적인 방향을 고집하기도 했다. 이러한 예로 Childs의 출애굽기 주석을 들 수 있다. 그는 같은 본문 (출애굽)을 가지고 역사비평학의 도구를 사용한 주석과 정경적 접근으로 구성한 신학을 2분화시켜 두 개의 신학을 한 책 속에 소개하기도 하였다. 이에, 본서는 구약신학을 함에 있어 통시적 접근을 상호보완적으로 적용하되 본문의 최종적 신학적 의미를 공시적 문맥에서 분석하여 구약 각 권의 다양한 큰 주제들을 오경의 큰 주제적 틀이라 할 수 있는 죄-심판-은혜라는 3부적 구조로 조명하는 divine narrative 해석 작업을 시도해보고자 한다.
먼저, 오경의 3부적 신학구조에 의한 주제를 논함에 있어 구약에서 일관성 있게 표명되고 있는 창조신학과 하나님의 사랑과의 관계를 다음과 같은 도표로 구성해보며 구약 각 권에서 창조, 죄, 심판, 은혜, 그리고 사랑의 신학적 메시지들을 정립해보고자 한다.
먼저, (오경)의 다양한 메시지에서 창출된 주요 신학주제들은 신약을 포함해 후기에 집필 및 편집된 성경 각 권에서 반영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 중, 특별히 창조는 오경의 3부적 구조에 있어 중심골격 (backbone)의 역할을 감당한다. 또한 계시에 있어 하나님에 의해 하나님 자신을 우리에게 나타내신 바 된 가장 근본적인 행위와 사건이며 구약신학에 있어 주요한 구성원리의 역할을 하고있다.
신약에서도, 예로 바울사도는 구약의 율법을 집중적으로 다루는 가운데 창조를 하나님의 보편적 계시로 설명하고 있다. 이는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게 되나니 그러므로 저희가 핑계치 못할찌니라"(롬1:20)는 바울사도의 창조-계시관에서 입증된다. 창조의 과정과 내용, 또 그 형태는 하나님의 주권과 속성을 반영하고 있으며 더 나아가 역사의 발단과 인간 존재의 기원적인 의미와 방향을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더 나아가 구원은 창조의 회복 적인 요소를 지니고 있다. 즉,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를 실제화 시키며 회복시킨 가장 현실적이며 중심적인 상황이다. 더 나아가, 창조는 구원과도 유기적인 관계를 가지고 있다. 이는 신약에서 재창조 (recreation)의 신학적 개념으로 명료하게 확립되며 N. Lohfink가 주장하듯 구약은 이미 오경에서 우주만물의 창조와 인간창조(구원)라는 두 개의 정황을 통해 구속신학의 기본 골격을 제공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창조를 부정하는 패러다임 속에서는 신의 존재를 이해할 수 없으며 인류와 역사는 무(無)에서 무(無)를 향한, 우연적이며 추상적인 현상에 불과하게 된다. 신이 자연에 구속된 것은 고대근동종교에 있어 공통된 신관이었다. 그러나, 구약의 여호와 하나님은 자연과 분별된 창조자로 차별되었으며 이에 자연의 그 무엇도 그를 표명할 수 없는 불변하시고 보이지 아니하시는 우주만물을 창조하시고 또한 타락에서부터 구원하시는 창조주 하나님이심을 성경은 밝히고 있다.
I - 구약성경에 나타난 창조의 원리
구약성경은 그 첫 구절을 다음과 같은 말씀으로 열고 있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창1:1) $r<a;h; taew] !yIm'V;h' tae !yhi=la> ar:B; tyviarEB]. 이 말씀은 무엇보다 첫째 성경이 하나님의 존재여부나 실존에 대해 그 어떠한 논쟁이나 철학적 변증도 하고 있지 아니하며 다만 하나님의 임재를 당연히 전제한 가운데 그의 속성을 말함에 있어 그는 모든 사물의 창조자임을 밝히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는 하나님에 대한 속성이 그의 창조를 통하여 중점적으로 계시되었고 또한 인식되어야 함을 의미하는 것이다. 더 나아가 계시적 창조가(revelational creation) 오경에서뿐만 아니라 구약전체에서 신학적 원리의 기능을 가지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예를 들어 창조의 신학적 원리는 창세기 외에도 구약 성경 여러 곳에서 다음과 같이 찾아 볼 수 있다.
1. 오경: 율법과 창조
출31:17은 안식일에 관하여 "여호와께서 엿새 동안에 천지를 창조하시고 제 칠 일에 쉬어 평안하였음"을 그의 백성들과 세운 영원한 표징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신4:32에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우상 만드는 것을 금하시며 그 이유를 "네가 있기 전 하나님이 사람을 세상에 창조하신 날부터 지금까지 지나간 날을 상고하여 보라 하늘 이 끝에서 저 끝까지 이런 큰 일이 있었느냐 이런 일을 들은 적이 있었느냐"라고 여호와가 그의 백성에게 행하신 기적들을 상고하며 그 기원을 "창조하신 날부터"로 조명하고 있다. 더 나아가 신31:28에서 하나님께서는 그의 법도를 수행하는데 있어서도 창조를 대표하는 "천지"를 증거물로 삼으신다, "너희 지파 모든 장로와 유사들을 내 앞에 모으라 내가 이 말씀을 그들의 귀에 들리고 그들에게 천지로 증거를 삼으리라". 이것은 오경의 율법이 그 시대의 고유적이며 보편적인 종교문학형태를 공유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기원적 신학적 본질에 있어서는 창조의 원리를 전제함으로 차별화하고 있음을 볼 수 있는 것이다. 예로, 함무라비 법전 (The Code of Hammurabi)의 비교연구를 통한 출애굽기 레위기 신명기의 규범들을 고려해 볼 때 그 유형과 내용이 여러 면에서 유사할 수 있으나 (예: 함무라비 1조항과 레5:20, 19:16-21, 출23:103) 이를 차별화 할 수 있는 것은 두 법전의 신관에 있다고 할 수 있다. 함무라비 법전에 권위를 부여하는 마르둑 신은 근본적으로 바빌론을 수호하는 신이나 고대 히브리인들은 그들에게 율법을 명한 여호와는 창조의 하나님이심을 강조했던 것이다.
2. 역사서: 하나님의 능력과 창조
우주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은 그 창조물을 창조하셨을 뿐만 아니라 지탱하시고 또한 그 창조물의 역사에 개입하신다. 구약의 역사서는 이러한 창조주 하나님의 속성을 지속적으로 암시하며 표명하고 있다.
앗수르 왕 산헤립이 그의 총사령관 중 히브리어와 아람어에 능통했던 랍사게 장군을 통해 유다왕 히스기야에게 예루살렘의 멸망을 예고하는 편지를 전했다. 히스기야 왕은 그 서신을 받아 보고 "여호와의 전에 올라가서 그 편지를 여호와 앞에 펴놓고 그 앞에서 기도하여 가로되 그룹들 위에 계신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여 주는 천하 만국에 홀로 하나님이시라 주께서 천지를 조성하셨나이다"(왕하19:14-15)라고 호소한다. 생사가 걸려있는 절박한 상황에서 히스기야 왕은 여호와의 도움을 간절히 간구하는데 있어 천지를 창조하신 능력의 하나님을 상기한다.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역사에 개입할 수 있는 능력자이시며 그 능력은 바로 그의 창조로 입증되는 것이다. 다윗왕은 하나님의 성전을 짓기 위해 모든 준비를 완성한 후 그의 하나님을 다음과 같이 고백하고 있다, "여호와여 광대하심과 권능과 영광과 이김과 위엄이 다 주께 속하였사오니 천지에 있는 것이 다 주의 것이로소이다 여호와여 주권도 주께 속하였사오니 주는 높으사 만유의 머리심이니이다"(대상29:19). 여호와의 영광과 위엄은 천지에 있는 모든 것이 다 그의 것이기 때문이며 이는 그가 그 모든 피조물의 창조자이심을 암시하고 있다.
다윗의 아들 솔론몬 왕의 성전건축을 도운 두로 왕 후람은 솔로몬에게 보낸 축전에서 "천지를 지으신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는 송축을 받으실지로다, 다윗 왕에게 지혜로운 아들을 주시고 명철과 총명을 품부하시사 능히 여호와를 위하여 전을 건축하고 자기 권영을 위하여 궁궐을 건축하게 하시도다"라고 말하고 있다(대하2:12). 이는 역사서가 이방의 왕도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를 다른 신들과 차별하는데 있어 그는 천지를 지으신 신임을 지적한 주요한 자료이다. 이렇게 창조신학은 창세기를 가로질러 역사서의 사료편찬에서도 반영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3. 시가서: 창조에서 나타난 하나님의 성결과 초월성
창조는 지혜서와 시가서 에서도 동일하게 그 신학적 기반을 형성하고 있다. 욥의 친구 엘리바스는 욥의 고난의 원인을 죄로 지적하며 욥4:17에서 "인생이 어찌 하나님보다 의롭겠느냐 사람이 어찌 그 창조하신 이보다 성결하겠느냐"라고 고소하고 있다. 여기서 엘리바스는 창조를 성결의 개념을 비교하는데 있어 궁극적인 준거로 삼고 있다. 즉, 하나님의 온전하신 성결이 창조에 내재하고 있다는 암시이다. 그런가 하면 시편기자는 시89:47에서 인간의 유한적 존재의 원인을 창조와 연관시키고 있다, "나의 때가 얼마나 단촉한지 기억하소서 주께서 모든 인생을 어찌 그리 허무하게 창조하셨는지요". 인간의 그 어떠한 속성을 평가하는데 있어 시가서 기자들은 창조를 참조점으로 삼았던 것이다.
시19편은 시가서 중 창조신학을 가장 명확하게 나타내는 시라 할 수 있다. "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궁창이 그 손으로 하신 일을 나타내는도다, 날은 날에게 말하고 밤은 밤에게 지식을 전하니 언어가 없고 들리는 소리도 없으나 그 소리가 온 땅에 통하고 그 말씀이 세계 끝까지 이르도다...". 이는 창조가 말씀 계시에 앞서 ("언어가 없고") 하나님의 속성을 나타내는데 제일차적 매체였음을 밝히고 있다. 그러므로 인간이 입을 다물어도 천지가 여호와를 찬송할 것이며 바다와 그 중의 모든 동물도 그리할 것이라고 시편기자는 증언하고 있다(시69:34). Artur Wiser는 시19편을 연구함에 있어 1-7절은 자연에 관한 시 (Nature psalm)이며 8-14절은 율법을 다룬 시 (Law psalm)일뿐만 아니라 이 둘의 내용, 의향, 언어, 운율은 서로 너무 달라 한 저자의 시가 될 수 없다는 문서설을 주장한다. 1-7절은 소박한 (homely simplicity) 스타일인 것에 비해 8-14절은 조직적인 문학유형을 보이고 있음을 또한 지적한다. 그러나 이는 이 시편의 저자가 유추법 (analogy)을 적용해 여호와는 자연 (Nature)의 질서를 통해서 말씀하시는 것과 같이 율법 (Law)에서 동일하게 자신을 계시하고 있음을 강조하는 가능성을 배제한 해석이 아닌가 생각해 볼 수 있다. 언어가 없고 들리는 소리도 없으나 그 소리가 온 땅에 통하고 그 말씀이 세계 끝까지 이름같이 (3-4절) 여호와의 율법은 완전하여 영혼을 소생시키신다는 것이다 (7절). 즉, 시19편의 저자는 창조를 자연과 율법을 접목하는 신학적 틀로 기용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또한 창조에 나타난 하나님의 속성은 부분적이며 그 창조의 한계를 초월하고 있음을 시편기자는 "천지는 없어지려니와 주는 영존 하시겠고"라고 표현하고 있다 (시102:26). 이는 하나님의 본질이 자연에 나타나지만 국한되어 있지는 않음을 뜻하며 자연의 보편성을 초월하시어 "창조하신 날부터"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보여주신 초자연적인 기적들을 행하시는(신4:32) 분임을 구약은 말하고 있다.
시가서에서 뿐만 아니라 창조의 신학적 원리는 지혜서에서도 중요한 신학적 기반을 구성하고 있다. 잠8장은 하나님의 지혜, 혹은 말씀이 창조의 핵심적인 역할을 감당했음을 암시하고 있다. 지혜를 문학적으로 인격화 시켜 일인칭 대명사로 암유하여 "내가(지혜의 말씀이) 그 곁에 있어서 창조자가 되어 날마다 그 기뻐하신 바가 되었으며 항상 그 앞에서 즐거워하였으며"라고 (잠8:30) 표현하고 있다. 신약에 가서 요한복음은 이를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요1:1-3)고 함으로 저자가 잠8장을 염두에 두고 기록했을 가능성을 완전히 배제할 수는 없을 것이다. 지혜서는 지혜를 천지를 창조한 말씀으로 묘사함으로 지혜를 삶의 가장 귀한 요소로, 또한 인생의 해결사로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
지혜서에 있어 잠언 뿐 아니라 전도서에서도 해 아래 모든 헛됨의 궁극적인 해결점을 창조신학과 연관시키고 있다. 전도자는 전도서 1장에서 11장까지 인생의 허무함을 여러 시각에서 서술한 후 다음과 같은 결론에 이른다, "너는 청년의 때 곧 곤고한 날이 이르기 전, 나는 아무 낙이 없다고 할 해가 가깝기 전에 너의 창조자를 기억하라"(전12:1). 본문에서 전도자는 의 명칭을 (너의 창조자)라 표현하며 인생의 근본적인 해결점이 바로 이 창조자의 말씀에 있음을 선포하고 있다. 그러므로 창조의 개념은 하나님의 속성, 능력, 역사, 그리고 삶의 지혜에 이르기까지 구약저자들의 신학적 이해의 근본적 틀이 되고있음을 알 수 있다.
4. 예언서: 하나님의 다양한 속성들
이사야서에 나타난 하나님은 자신을 "...거룩한 자요, 이스라엘의 창조자요 너희 왕이니라"고 (사43:15) 밝히신다. 하나님의 거룩성, 능력, 그리고 주권적 다스리심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 세 가지 속성은 독립적인 것이 아니라 유기적인 것이다. 그리고 이 유기적인 상호연관성이 창조라는 원리에 묶여있다고 말 할 수 있다. 즉, 창조에서 그의 거룩성과 능력과 주권적 다스리심을 다 볼 수 있는 것이다. 흔히 예언서를 예측의 기능 면에서만 이해하려는 해석학적 오류를 쉽게 범하는데 이는 예언서에 중심을 이루고 있는 하나님의 계시를 배제해서는 아니 되고 또 한 그의 능력의 영화로움이 창조와 연관됨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러므로 이사야 선지자는 예루살렘을 구원하실 하나님을 누구와 같다 하겠느냐고 질문한 후 "너희는 눈을 높이 들어 누가 이 모든 것을 창조하였나 보라 주께서는 수효대로 만상을 이끌어 내시고 각각 그 이름을 부르시나니 그의 권세가 크고 그의 능력이 강하므로 하나도 빠짐이 없느니라"(사40:26)라고 선포하고 있다. 선지자들은 하나님의 능력을 증빙하는데 있어 창조를 지적했던 것이다. 땅 끝까지 창조하신 하나님은 피곤치 아니하시며 곤비치 아니하시며 명철이 한이 없으시며 피곤한 자에게는 능력을 주시며 무능한 자에게는 힘을 더하시는 자임을 이사야 선지자는 말하고 있다 (사40:28-29). 하나님의 능력과 명철과 은혜를 창조에 기원한 것이다. 궁극적으로는 그의 창조에 하나님의 의로움과 구원(사45:8)이 기쁨과 즐거움(사65:18)으로 나타나며 영원한 메시아 왕국의 도래까지(사65:17) 암시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예레미야 선지자는 렘31장에서 이스라엘과 유다를 회복하시며 그들과 새 언약을 세우시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을 대변한다 (렘31:31). 그 새 언약의 내용은 전무후무한 새로운 창조이다. "...곧 내가 나의 법을 그들의 속에 두며 그 마음에 기록하여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될 것이라, 그들이 다시는 각기 이웃과 형제를 가리켜 이르기를 너는 여호와를 알라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작은 자로부터 큰 자까지 다 나를 앎이니라 내가 그들의 죄악을 사하고 다시는 그 죄를 기억지 아니하리라 여호와의 말이니라"(렘31:33-34). 이 새 언약의 성취가 후에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으로 이루어짐을 누가는 기록하고 있다 (눅 22:20,"저녁 먹은 후에 잔도 이와 같이 하여 가라사대 이 잔은 내 피로 세우는 새 언약이니 곧 너희를 위하여 붓는 것이라").
이러한 새 언약을 말함에 있어 이는 메시아의 속죄로 하나님과 그의 백성들간의 새로운 관계가 재창조됨을 말하고 있다, "...여호와가 새 일을 세상에 창조하였나니 곧 여자가 남자를 안으리라"(렘31:22), 즉 부자관계에서(20절) 남녀의 친밀한 부부관계로 표시하여 그 의미를 새롭게 부각시키고 있는 것이다. 창조의 개념은 예언서에 이렇게 하나님과 그의 백성들의 관계가 새롭게 회복되는 궁극적인 구원을 암시하는데 사용되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왜냐하면 오직 "대저 산들을 지으며 바람을 창조하며 자기 뜻을 사람에게 보이며 아침을 어둡게 하며 땅의 높은 데를 밟는...만군의 하나님 여호와"(암4:13)만이 그의 백성을 구원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창조의 원리는 구원과 밀접한 연관을 가지고 있다. 창조의 회복이 구원적 요소를 지니고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구원을 "새 하늘과 새 땅"을 지으시는 것으로 표현하신다.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나의 지을 새 하늘과 새 땅이 내 앞에 항상 있을 것같이 너희 자손과 너희 이름이 항상 있으리라"(사66:22). 후에 사도 요한은 계시록에서 "새 하늘과 새 땅"으로 보여진 구원의 재창조 적 장면을 목격하게된다 (계21:1).
II- 창세기 속에 창조신학
창세기는 인간 존재의 기원을 창조에 두고 있다. 동시, 그 창조는 인간에게 하나님의 존재를 확인시켜 준다. 창조라는 상황 속에서 창조 전에 영원 전부터 존재하신 (요1:1) 하나님과 창조로 인해 탄생한 인간과의 역사가 시작하는 것이다. 이 사건을 창세기는 1-2:2과 2:5-25에서 다루고 있는데 비평학적 주장은 이 두 문장들을 J(9세기)와 P(5세기) 문서의 후기편집물로 설명하나 편집비평과 문학구조의 분석은 이러한 분리의 가능성에 대해 많은 논쟁의 여지를 남기고 있으며, 창세기 1-3장의 문학적 통일성이 연구됨에 따라 이는 창조에 대한 단편의 문서로서 각 장의 강조점이 다를 뿐임을 (different emphasis)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1. 태초의 의미
먼저 이 창조의 연대 (chronology)에 있어 태초 ( )를 육일동안 진행된 창조의 첫날로 해석하기도 하나(출 20:11) 1:1은 창조이야기의 대목(title)으로써 이를 혼돈에서 질서를 향한 창조 첫 째날 (1:3)과 구별해야 "땅이 혼동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2절)있던 시기를 허락할 수 있다. 즉, 창1:1-3은 태초에 시작된 창조는 그 과정에 있어 혼돈 (2절)과 질서(3절 이후)의 과정이 있었음을 암시하고 있다. 물론 이 "태초"( )는 요1:1의 "태초"( ajrch)와는 문맥적르로 다른 뉘앙스를 가지고 있다. 후자의 태초는 로고스의 속성과 연관된 영원전의 태초를 의미함으로 사실상 시간의 개념과는 아무 관계가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창세기에 있어 하나님의 천지창조는 시간적 태초에서 출발한다. 그리고 여기서 그의 창조하심이란 (to create, ) 유에서 유를 만드는, 혹은 혼돈에서 질서를 설립해 가는 행위가 아니고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creatio ex-nihilo임을 본문 문맥에서의 태초라는 용어와 출20:11, 골1:16; 히11:3과 관련하여 가정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이제 2:3에서부터 시작되는 혼돈에서 질서의 창조 첫 날인 (욤)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
먼저, 창조의 각 날을 지칭하는 히브리어 단어 은 구약 성경에서 크게 세 가지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 예로, 빛의 12시간 (창1:5, 14, 16, 18; 8:22); 하루 24시간 (창1:5; 출20:8-11); 그리고 그 어느 한 때를 가리킨다 (창2:4; 레14:2, 9-10). 이러한 의 다양한 의미는 창조의 각 날을 오로지 24시간으로 국한시키는데 있어 문제를 제의케 한다. 예를 들어 첫날 창조된 빛은 (1:3-5) 햇빛이 아니었다. 그러므로 첫 을 주관한 빛은 12시간의 빛이 아니었음을 생각할 수 있다. 물론 중요한 것은, 이 이 24시간이든 아니든 태초에 무에서 유를 창조하신 하나님의 초월적 속성에서는 모든 것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나아가 창세기는 창조에 대한 현대언어에 의한 과학적 서술이 아님을 명시할 필요가 있다. 창세기의 주요 모티브는 신학적 시각에서 구성되었음을 최종본문이 암시하고 있다. 즉, 은 기수 (cardinal)를 가리키기보다는 혼돈으로부터 질서로 진행되고 있는 창조의 서수 (ordinal)를 기술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으며 이는 창조-타락-심판-은혜라는 구조적 메시지의 서론적 역할을 하기 위함이라고 말할 수 있다.
2. 창조에 반영된 하나님의 속성과 계획
이제 창조에서 나타난 하나님의 속성과 섭리를 창조의 질서와 목적에 의해 논의하고자 한다. 먼저, 창조를 시간적인 시각에서만 분석하려하는 경향을 벗어나 창조를 질서의 개념으로 조명하고자함은 창세기 1장의 본문이 분명히 창조는 혼돈으로부터 질서(1:2 vs. 1:31), 혹은 모자람으로부터 완성(2:18)의 과정으로 표명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창조의 질서를 통해 우리는 창조주 하나님은 질서의 하나님이심을 간접적으로 추측할 수 있다. 그러나 더 나아가 그는 그 질서 안에 구속된 분이 아니시며 그 질서를 주관하시는 분이시다. 이러한 질서의 개념은 성경신학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예로 에덴 동산 한 가운데 심어진 선악과와 생명나무는 다른 모든 나무들로부터 구별되어 하나님과 인간의 영역의 질서를 세운다. 그러므로 타락은 질서를 파괴하고 선은 질서를 세운다. 신약의 예로, 성령의 은사로 인한 고린도교회의 혼란에 대한 바울사도의 권고도, "모든 것을 적당하게 하고 질서대로 하라" (고전14:40), 그 신학적 기원을 질서의 하나님에 대한 신앙에서 찾아볼 수 있다 (히5:10).
창조의 질서는 그 과정에서 잘 나타난다. 첫날에 지어진 것은 둘째 날에 필요한 것들이요, 둘째 날에 지어진 것은 셋째 날을 위함이었음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사람을 마지막 날 창조하심은 사람이 살 수 있는 모든 환경적 기반을 먼저 조성해야 했기 때문이다.
질서를 나타내는 하나님의 속성 외에도 우리는 창조의 과정을 통하여 그 창조의 목적을 추측할 수 있다. 창조의 시작과정과 그 절정에서 그 목적이 암시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과연 창조의 클라이맥스가 무엇인지를 말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만약 창조의 절정을 인간창조에 두면 만물이 인간을 위해 지어졌다는 결론으로 창조의 목적을 요약하게 된다. 물론 상대적으로 창1-2장은 구체적인 인간창조를 중심적으로 기록하고 있다. 육일동안의 창조작업은 인간을 창조함으로 막을 내린다. 그리고 그 창조된 인간은 유일한 속성과 의무를 지니게 된다.
첫째는, 하나님의 형상 (imago Dei)으로 지음을 입었다는 것이다. 이는 인간은 독립된 자체존재나 신격존재가 아니며 하나님의 형상을 입어 지음 받은 피조물임을 강조한다. 즉, 창조론은 창조의 절정인, 하나님을 신뢰하며 살아가는 인간에 대한 고 시각적인 (high view) 개념을 말하고, 진화론은 인간 존재가 궁극적으로 무의미함을 전제하게 한다. 진화론의 몸부림침엔 진화를 통해 인간본질의 개선이 신적으로 변화하는 절정에 이루게 될 것이라는 논리가 암시되어있다. 그러나 사람은 그 존재가 하나님의 창조적 행함에 있다 (창 1:27). 그리고 그 존재는 하나님의 창조의 절정에서 온 것이다. 이는 사람은 일반적인 모든 창조에서 구별되어야 하는데 그 이유는 하나님의 형상되로 창조되었기 때문이다 (Gen 1:26-27, imago Dei). 그러므로 사람은 영성, 이성, 윤리성을 갖춘 영적 존재이다. 이러한 속성은 그로 하여금 하나님과의 관계를 형성할 수 있도록 되어 있고 하나님은 그의 자신을 사람과 계시를 통하여 교통할 수 있는 것이다.
두 번째로는 특별한 의무이다. 하나님의 특별하신 인간창조에 의해 사람에겐 동물의 세계와 땅을 정복하며 다스리는 신적 권위가 허락되었다 (창 1:28).
문맥상 우리는 히브리 문장 을 "정복하며 다스리라"보다는 "섬기며 돌보아라" (serve and watch over it)로 번역할 수 있다. 사람은 지구의 청지기인 것이다 (steward). 지구와 자원을 무책임하게 착취하는 것은 타락의 치명적인 결과이다. 이러한 의무는 창조력 있는 문화의 창출을 또한 의미하고 있다. 거룩한 번성을 통하여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시키며 섬기는 영물의 사역이 부여된 것이다. 그러나 과연 창조의 궁극적인 목적이 하나님의 형상을 입은 인간을 창조하여 그들로 하여금 번성하여 사물을 다스리며 섬기며 문화를 창조해 나가는데 있는 것일까?
창조의 궁극적인 목적을 우리는 창조의 마지막 날인 제 칠일에서 찾아볼 필요가 있다. 창2:1-3은 창조의 절정을 장식하고 있다, "하나님의 지으시던 일이 일곱째 날이 이를 때에 마치니 그 지으시던 일이 다하므로 일곱째 날에 안식하시니라, 하나님이 일곱째 날을 복 주사 거룩하게 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그 창조하시며 만드시던 모든 일을 마치시고 이날에 안식하셨음이더라". 창조는 하나님의 안식으로 그 전체 과정을 완수한다. 즉, 창조의 일곱째 날은 하나님의 가 창조의 궁극적인 목적임을 암시한다. 우주 만물의 창조가 인간을 위해 지어지고 이제 그 인간이 온전한 에덴동산의 환경에서 하나님과의 안식을 취하며 교제하는 목적이 창조에서 반영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히 지키라"(출20:8)라는 율법의 핵심적인 메시지는 안식일의 시간적 유형 (토요일)을 우상화하라는 것이 아니오 안식일이 지니고 있는 신학적 본질, 즉, 하나님과의 관계를 중요시하는 것이다. 레 19:3에서는 인간의 도리로써 횡적이고 종적인 율법의 총괄적인 두 계명을 "너희 각 사람은 부모를 경외하고 나의 안식일을 지키라 나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니라"로 종결하고 있다. 이는 안식일과 부모경외를 통한 하나님과 인간과의 관계를 병행적으로 묘사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창조의 절정인 안식일은 하나님 자신을 기억케 하시기 위해 하나님이 주신 것이며(출16:29), 노예들을 규칙적으로 쉬게 함으로 자비를 베푸는, 인간을 위한 제도이기도 하다(신5:14이하). 그러므로 안식법은 구약 율법에 필수적인 부분이며(레19:3,30), 그것을 범하는 자에게는 사형이 선고될 정도로 중요하게 여겨졌다(민15:32이하). 선지자들은 안식일을 올바로 준수할 것을 요구했으며(예. 사 56:2이하; 58:13) 그것을 악용하는 자들을 정죄했다(호2:11). 그들은 또한 하나님의 날은 하나님이 정하신 방법으로 지켜야 한다고 강조했다. 포로 생활에서 귀환한 후 느헤미야는 안식일에 장사하는 것을 철저히 금지했다(느10:31; 13:15이하; 참고. 암 8:5). 신구약 중간기에 유대인들은 창조에 기원한 안식일의 본질에서 좀더 벗어나 안식일의 유형적이며 외식 적인 법들을 보다더 변질시켰으며, 예수님은 그러한 율법을 우회적으로 정죄하시며 안식일은 근본적으로 사람을 위해서 있는 것이오 또한 예수 그리스도 그 자신이 바로 안식일의 주인이심을 천명하셨다(막 2:23이하). 이는 창조의 클라이맥스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과 그의 백성들의 안식임을 의미한다. 이것은 곧 구원의 완성이요 영원한 안식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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