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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전선택설과 후선택설의 관계

하나님아들 2018. 6. 5. 21:16

 

전선택설과 후선택설의 관계| bic/wog/Reformed
이천우 조회 64 |추천 0 | 2004.12.01. 21:35

 

 

본 글은 죄(구원)의 문제에 대하여 전택설 입장과 후택설 입장을 비교하여, 더 풍성한 하나님의 계시의 비밀을 깨닫고자 하는 의미에서 작성된 것입니다. 현 한국교계의 신학의 입장에서는 후택설이 우위에 있으나, 박형룡박사님과 같은 몇몇분은 전택설 입장을 취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가는 곳까지 나도 가고, 말씀이 멈추는 곳에서 나도 멈춘다" 라고 하나님의 말씀을 대하는 성도는 겸손하고 신중하게 진리의 가르침에 순종하라고 믿음의 선배인 쟝 칼뱅(Calvin) 선생은 말씀하였습니다.

바라옵기는, 영원하신 하나님께서 그 분의 뜻가운데서 이 시대에 여러분을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으로 부르셨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예수로 말미암아(안에서)서 말입니다.

/ 글쓴이:김성주 목사 출처: keeper77 註

『주 하나님이 가라사대, 나는 알파와 오메가라 이제도 있고 전에도 있었고 장차 올 자요 전능(全能)한 자라 하시더라 』

하나님의 작정과 예정

하나님의 예정
(엡1:4-6, 3:11, 딤후1:9, 딛1:2, 롬16:25)

소요리 문답 7문은 12문까지 연결되어 나타나는 '하나님의 사역'의 첫 번째 부분입니다. 먼저 제 7문은 신학적으로 신적 작정(神的作定) 교리로 잘 알려진 부분에 관한 것입니다. 신적 작정이란, 하나님께서 장차 발생될 일체의 사건들을 미리 정하시는 그 분의 영원하신 계획, 혹은 목적을 말합니다. 하나님은 전지 전능하신 분이시기 때문에 능히 만물을 창조하시며 또한 섭리로서 만물을 능히 통치하시고 기뻐하시는 뜻대로 인도하시는 분입니다. 하나님은 만물에 대해 계획과 목적을 가지시니, 바로 이것이 하나님께서 당신의 뜻하신 바에 따라 정하신 영원한 계획과 목적으로서의 신적 작정인 것입니다. 또한 이 신적 작정은 하나님의 지혜에 기초합니다(엡1:11). 따라서 하나님께서 세우시는 계획은 당신의 지혜로부터 수립된 것임에 틀림없습니다.

구약 성경이 예정 혹은 작정이라는 단어를 직설적으로 사용하고 있지는 않으나, 하나님의 목적은 그 성취가 확실하게 보장되어 있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선포하고 있습니다(사43:13). 하나님께서는 무한한 능력을 가지신 창조주이시기 때문에, 그 지으신 목적에 따라 만물을 주관하시고 생명의 모든 면을 지배하십니다(잠16:4, 33). 전능자는 오직 하나님 한 분뿐이시므로 하나님께서 정하시고 이루어 나가시는 일을 방해할 수 있는 존재란 있을 수 없습니다(사14:24-27).

성경은 가끔 하나님께서 당신의 마음을 돌이키신 사실에 대해 보도하고 있습니다(렘18:8). 그렇지만 이것이 신적 작정 교리를 약화시키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와 같은 표현은 하나님의 인격성을 강조하는 데 중요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가리켜 신인동성동형론(神人同性同形論)적 표현이라고 부르는 바, 이런 표현이 신적 작정 교리에 위배된다고 볼 수는 없습니다. 이는 단지 하나님을 의인화시켜 표현한 기록 방식에 지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신적 작정은 특별히 구속의 영역에서 그 내용이 명확히 드러나는데, 이처럼 도덕적 피조물인 천사와 인간에 관한 하나님의 작정교리를 다룰 때에는 예정(豫定)이라는 용어를 교리적으로 사용하게 되며, 선택(選擇)과 유기(遺棄)의 두 부분을 다루게 됩니다. 유기란 하나님께서 죄인들이 받아야 할 마땅한 심판을 그냥 버려 두신 것을 가리키는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정당성을 훼손시키지 않습니다(마20:14-15, 롬9:14-15). 이 원리는 선택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여서 하나님은 자기의 죄 값을 지고 마땅히 심판 받아야 할 자들을 구원하시는 은혜를 베푸심으로 수혜자들에게 그 어떤 공로의 근거도 가지지 못하게 합니다. 결과적으로 유기는 하나님의 공의를 나타내고, 선택은 하나님의 은혜를 드러냅니다. 이는 후택설적 입장표명입니다. 그러나 같은 개혁주의 입장에서도 죄의 기원과 선택과 유기의 시점을 언제로 삼느냐에 따라서 전택설과 후택설이 현재까지도 공존해 오고 있습니다. 물론 어느 입장을 취한다 해도 하나님의 구속의 은혜는 반감되거나 상실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전택설과 후택설은 구속의 경륜상 배타적 관계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상호 보완적이고 의존적입니다. 다시 말해 창세 전 영원세계에서의 선(先) 계획과 작정이 피조세계에서 구체적으로 후(後) 적용되고 있는 것에 불과하다는 지적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두 개념은 상호 동질성을 띠고 있는 바 동일한 연장선상에서 진행되고 있음을 가리킨다고 하겠습니다.

가령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나라로 부르심을 입을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의 선택적 작정에 근거한 것이지 그들에게 어떤 공로가 있었기 때문이 아닙니다(신7:6-7, 9:4-5). 이처럼 소요리 문답 7문에서 제기하고 있는 예정의 의미는 특별히 선택의 개념을 고려할 때에 그 의미의 충분함에 이를 수 있지만, 이에서 더 나아가 '하나님의 예정은 그 뜻대로 하신 영원한 경륜인데, 이로 말미암아 자기의 영광을 위하여 모든 되어지는 일을 미리 작정하신 것입니다'라고 답변을 제시함으로서 '하나님의 절대 주권'을 부각시키는 독특한 방식을 사용합니다.

과연 하나님의 절대 주권은 신적 작정의 특성이며 이것은 특별히 구속의 영역에서 그 풍성함을 맛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구속사역을 완성하신 것은 이미 그러한 일이 있을 것이라고 예언되어오던 바의 성취였던 것입니다(마1:22-23, 행2:23, 갈3:8). 동일한 원리를 따라 성도들에게 베풀어지는 구속 역시 영원 전부터 선택을 입은 사실에 그 근거를 둡니다(엡1:4, 3:11, 딤후1:9, 딛1:2, 롬16:25). 하나님께서 교회를 통하여 세상을 구원하시는 것은 영원 전부터 가지신 목적과 계획의 일환입니다. 이 사실에 근거해서 성도들 개개인이 하나님의 구속의 경륜에 참여하게 됩니다(롬8:28). 적어도 이런 관점은 전택설적 입장의 표명입니다.

진실로 신적 작정이 성도들이 받는 구원의 근거입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이 성도들로부터 신앙을 낳는 것이 사실이지만, 그러나 성도들은 그들이 신앙으로 반응했다고 하는 공로 때문에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닙니다(딤후1:9). 신앙으로 반응하는 것이 구원의 근거라면 이것이 사람의 의지의 표현이라는 사실 때문에 구원 얻는 수단으로서의 공로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또 이렇게 공로가 된다면 그 자랑거리가 사람에게 있지, 하나님께 있지 아니할 것입니다. 성경은 구원의 공로가 사람에게 있지 않게 하려고 은혜의 방식으로 하나님의 구원이 임한다고 선포합니다. 진실로 성도들이 누리는 구원은 전 과정에 걸쳐서 하나님의 선물일 뿐입니다(엡2:8-9).

성경이 믿음을 말할 때, 의외로 많은 사람들이 오해하고 있듯이, 그 사람이 스스로 발휘해 내는 자의적 시인을 가리키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이 말하는 믿음이란 이미 과거의 역사 속에서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 안에서 자신을 구원하셨다고 하는 사실을 인식하고 받아들이는 것을 가리킵니다. 이러한 믿음의 방식이 아니고서는 하나님의 은혜는 진정한 의미에서 은혜가 되지 않을 것입니다(롬4:16). 이때 이 하나님의 은혜는 신적 작정 교리의 기반 위에서 성립하는 것인 까닭에 신적 작정 교리를 떠나서는 은혜의 의미를 이해할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와 같은 신적 작정 교리가 모든 사람들에게 한결같이 쉽게 받아들여져 왔던 것은 아닙니다. 특별히 죄의 문제와 관련하여 이 교리는 신비에 쌓이게 됩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은 거룩한 분이시며 도덕적 순결을 강조하시고 자신이 죄를 금하는 분이신 사실을 생각하면(시92:15, 전7:29, 합1:13, 골1:13, 요일1:5), 하나님께서 죄를 작정하지는 않으셨다는 것이 전통적인 개혁주의 입장입니다. 그러나 이런 관점에도 여전히 심사숙고의 여지가 없지 않습니다.

(참고) : 왜냐하면 죄의 작정과 죄의 혐오는 별개의 문제일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필요악의 원리에 의해서 말입니다. 선악과 금령법도 이런 원리와 결코 무관하지 만은 않습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의 선하신 목적을 위해 하나님은 무엇이라도 창조하실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창조주의 절대주권에 따른 영원하신 목적과 무관하게 스스로 존재하는 만사와 만물의 기원은 절대적으로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만물이 그에게서 나오고 그로 말미암고 그에게로 돌아간다"고 말씀합니다(롬11:36). 여기 만물이라 함은 피조세계에 존재하는 모든 것을 포함합니다. 따라서 그 기원에 있어서 예외적으로 존재하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는 것을 명백히 천명합니다. 비록 그것이 악하고 죄악 된 것이라 할지라도 말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하나님의 절대주권은 제한적으로 발휘된다는 것을 의미하게 될 뿐입니다. 그럴 수 없습니다. 이런 사실로 인해 하나님의 절대주권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만사와 만물은 존재할 수 없습니다.

이와 관련해서 역사적 개혁주의 신학은 인간의 범죄 행위와 하나님의 절대 주권의 관계를 설명하면서 '허용적 작정'이라는 개념을 도입해 사용합니다. 즉 하나님의 작정은 죄와 관련하여서는 '허용적 작정'의 형식을 취한다는 의미로서 인간의 범죄에 하나님의 책임은 전혀 개입되지 않는다는 내용입니다.

(참고) : 그러나 모든 것을 합력해 선을 이루시며 만사와 만물의 진행을 당신의 기뻐하시는 뜻을 좇아서 섭리적으로 주관하시는 창조자의 절대주권적 행위에 대해 인간이 책임소재 운운하는 것은 어불성설입니다. 성경이 이를 명백히 증거합니다. 롬9:14입니다.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한 사실"에 대해 바울은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하리요 하나님께 불의가 있느뇨"라고 질문합니다. 이는 그럴 수 없다는 사실이 문맥 속에 분명히 함의돼 있습니다. 나아가 20절에서 "이 사람아 네가 뉘기에 감히 하나님을 힐문하느뇨?"라고 반문합니다. 다시 말해 설령 하나님의 처사가 피조 된 인간들에게 편파적이고 편향적인 행동으로 비쳐진다 할지라도 창조자의 주권적인 특권상 책임을 물을 수 없다는 지적입니다. 아니 하나님의 행동은 어떤 경우라도 책임을 지실만한 법적 당위성이 적용될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왜냐하면 모든 일을 당신님의 기뻐하시는 뜻을 좇아서 행하시는 전능하신 분이시며 이런 전제로 인해 그 분이 행하시는 모든 일이 선하기 때문입니다. 만일 하나님의 공의적 시행에 일말의 불의와 편견이 작용할 수 있다면 하나님은 창조자와 구원자 그리고 심판주로서의 적법성과 정당성이 성립될 수 없을 것입니다.

이와 관련해 잠언 기자는 여호와께서 온갖 것을 그 씌움에 적당하게 지으셨나니 악인도 악한 날에 적당하게 하셨느니라"(잠16:4)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는 죄의 근원인 악함까지도(창2:17) 하나님의 절대주권적인 창조적 섭리로부터 예외일 수 없음을 강력히 시사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모든 사람을 순종치 아니하는 <불순종의 죄>가운데 가두어 두심은 모든 사람에게 긍휼을 베풀려 하심"(롬11:32)이란 말씀이 이를 뒷받침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사실은 아담을 머리로 한 모든 인간의 범죄행위의 배후에는 하나님의 신묘막측하신 절대주권의 섭리적 손길이 깊이 개입해 있음을 시사하는 내용입니다. 물론 "오묘한 일은 하나님께 속한 것"(신29:29)이기에 하나님의 신비를 인간이 적나라하게 해명할 수는 없다는 지적 한계를 인정할 필요가 있음에도 말입니다.

하나님의 작정 교리와 인간의 자유 의지와의 조화 문제에 대한 이견은 항상 있어왔습니다. 작정 교리와 자유 의지 간의 적절한 조화를 시도하는 신학자들에 의해서 예지(豫知)라고 하는 이상한 설명도 나타나게 되었습니다. 예지론(豫知論)의 핵심인 즉은 하나님께서 어떤 일을 작정하심에 있어서 그것이 장차 일어날 것을 미리 예지 하셨기 때문에 그렇게 작정하실 수 있게 되었다고 하는 주장입니다. 예지론을 구원 개념과 관련하여 설명해 보자면 하나님께서 어떤 사람을 영생으로 예정하신 것은 그가 하나님을 믿을 것을 미리 예견(豫見)하셨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주장은 예정을 예지에 종속시키는 결과를 내기 때문에 결코 수납할 수 없는 주장입니다. 만일 예정을 예지에 종속시키면 사실상 하나님의 작정교리는 무너져 버립니다. 그렇지만 하나님께서 이 시대 성도들의 믿음을 예지하시는 것은 오직 하나님께서 그를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선택하신 예정 때문에 가능한 것입니다.

진실로 기독교의 탁월한 특성인 선택교리(選擇敎理)에 대해서 논쟁을 일삼는 것은 전혀 무익합니다. 왜냐하면 성경은 이를 분명히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선택은 현재의 과정을 통해서 그 성취를 보게 됩니다. 성경이 말하는 분명한 사실은 하나님께서는 창세 전에 택한 자들을 오늘의 역사 속에서 부르실 때에 보편적으로 복음을 듣게 하시는 방식을 통하여 구원을 얻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선택론은 신구약 성경의 일관된 가르침이요 모든 믿음의 자녀들로 하여금 더욱 더 하나님께 감사 드릴 것을 요구합니다. 선택 교리의 목적이 이에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 교리를 하나님의 구속의 경륜을 배제하고 단순히 지적으로 이해하려는 시도처럼 어리석은 일은 없는 법입니다. 이는 인간의 지적인 이해 수준을 월등히 초월하는 하나님의 지혜의 일환이기 때문입니다.

비근한 실례를 들어보자면 당시 사도 바울의 여행 범위는 무척 광범위했습니다. 그의 앞에는 온 세계가 복음을 전해야 되는 어장이었습니다. 한편, 빌립보에는 루디아라 이름하는 선택된 하나님의 백성이 있었으니, 하나님께서는 이미 예정하셨던 경륜에 따라 이제 그녀에게 복음을 들려주심으로서 구원하고자 하셨습니다. 이 계획에 따라 하나님께서는 '무시아'에서 '비두니아'로 가고자 하는 바울의 자의적인 발걸음을 막으시고 대신 이곳 빌립보로 이끄셨습니다. 하나님의 섭리는 사람의 발걸음까지도 주도하시는 것으로서의 절대적 능력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에게 있어서는 그 걸음을 지도함이 걷는 자에게 있지 아니한 법입니다(렘10:23, 욥23:10). 그 결과 루디아가 복음을 들을 수 있었고, 이때 하나님은 그녀의 마음을 열어 성령을 통한 믿음을 부여하셨습니다(행16:6-15).

하나님은 우리로 하여금 믿음을 가지게 하시기 위해서 복음을 들려주시고 그처럼 듣게 하시기 위해서 전파할 자를 또한 보내십니다(롬10:13-15). 복음이 들려질 때에 그것을 듣는 사람의 마음속에 그것을 믿는 믿음이 역사하게 되는 것은 이미 그 사람이 중생(重生)한 결과로 말미암는 것입니다. 이를 통해 신자는 자신이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를 받은 것으로 인식하게 됩니다. 그런데 이것이 신자 자신의 '믿고자 하는 의지'를 통해서 그렇게 믿어진 것으로 느껴지게 되는 것은 이러한 인식이 신자 자신의 자아(自我)를 통해서 되어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때 이를 가능케 한 주체로서의 자아는 죄와 허물로 죽은 옛사람의 자아가 아닌(엡2:1), 곧 거듭난 새로운 피조물로서의 새사람의 자아인 것입니다. 그러기에 이때의 믿음의 고백은 바로 이렇게 거듭난 새사람의 자아로부터 나와진 새로운 피조물로서의 자의지적 고백이 됩니다. 곧 성령의 간섭하심으로 되어진 새 사람적 믿음의 고백이란 말입니다. 이 점을 혼동해서는 안됩니다. 이렇게 성령이 주도하신 일련의 내적 변화를 인식하지 못하고 외적으로 나타난 부분만을 고려하게 되면, 구원의 도리에 대한 믿음의 고백이 옛사람의 의지에서 나와진 것인지, 아니면 거듭난 새사람의 의지인지를 분간하는 일에 혼란을 초래하게 됩니다. 그러나 우리의 옛사람의 성향은 죄로 인해 근본적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고(히11:6), 하나님을 마음에 두기조차 싫어하며(롬1:28), 더 더욱 하나님을 자원해 찾는 자가 하나도 없다(롬3:11)는 성경의 증언을 감안한다면, 복음에 대한 신앙적 고백의 주체가 내가 아닌 내 안에 내주 하시는 성령의 역사인 것을 확인하게 됩니다(고전12:3). 곧 거듭난 새사람의 변화된 인격이란 말입니다.

선택 교리는 영아( 兒)와 유아(幼兒)들의 구원과 기타 복음을 들어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큰 희망을 가져다줍니다. 만일 구원이 자기 자신의 믿고자 하는 의지에 달려 있다고 한다면 이처럼 불행한 것도 없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인간이 스스로 자기의 구원을 위해서 하나님께로 나아온다는 것은 전혀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이는 이미 우리의 양심조차도 증거하는 바입니다. 그리스도인들 가운데 과연 어느 누가 스스로의 의지와 결단만으로 그처럼 회심의 삶을 살 수 있게 되었다고 장담할 수 있겠습니까? 구원은 은혜로 임하는 것이기 때문에 전적으로 하나님의 선물입니다(마16:17, 요1:13, 엡2:8).

그러면 이상 살펴본 하나님의 작정의 궁극적 목적은 무엇일까요? 소요리 문답은 이에 대해 '자기의 영광을 위하여'라고 분명하게 대답합니다. 이것은 달리 말하자면 하나님께서 신적 작정을 능히 주관하는 분이신 사실을 통해서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신다거나, 혹은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는 것에 대한 한결 같은 성경적 진술은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이 당신의 백성들에게 받아들여질 때에 이루어진다고 말합니다. 곧 성도가 하나님의 말씀과 계시에 적극적으로 순종하는 것을 통해서 하나님의 영광은 극대화되어 나타난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인류를 구속하시는 목적의 궁극적 관심은 당신께서 영광을 받으시려는 데 있습니다(엡1:6, 13-14). 사실 우리가 받는 구원은 이 사실에 종속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영광이 온전히 드러날 수 있기 위해서는 하나님께서 행하신 구속의 큰 일의 원리와 내용이 수혜자들에게 잘 이해되어지는 것이 우선되어져야 합니다.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인정하는 바로 거기에 하나님께서 최상의 영광을 받으시는 일이 나타나게 됩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작정 교리를 순전히 받아들임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드릴 수 있게 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만물을 작정하시는 것은 당신께서 영광 받으시기 위한 수단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할 때에 교회는 하나님을 믿는 믿음을 더욱 견고하게 세워나갈 수 있게 됩니다. 곧 하나님께 대한 신뢰가 상승되는 효과가 수반됩니다. 하나님의 작정 교리를 받아들이는 것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며, 동시에 그 하나님께 대한 자신의 신뢰를 강화시키는 결과를 내기도 합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를 바르게 알고, 그 인식한 신관(神觀)을 자기에게 구체적이고 적극적으로 적용시켜 나가는 것이 성경이 말하는 믿음의 정체성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 있어서 그것이 의미하는 바를 자신에게 적용함으로 순종해 나가는 방식이 믿음의 본질이요, 또한 그렇게 함으로써 보다 성숙한 믿음의 단계로 나아가게 됩니다. 그리고 바로 여기에 하나님을 영화롭게 해드린 실질이 존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반대로 갑자기 어떤 충동적인 생각이 들어서 자기를 암시시키는 방식이나, 혹은 스스로를 최면 시키듯이 하면서 하나님의 이름을 빌어 어떤 신념을 자의적으로 짜내는 것은 성경이 말하는 바의 참된 믿음이 되지 않습니다. 이런 방식으로는 하나님은 영광을 받으실 수도, 받으시지도 않습니다. 왜냐하면 이런 것은 하나님께서 행하신 객관적인 일, 곧 구원의 사역을 신뢰하는 행위가 아니며, 단지 기독교적 종교심에 의해 발동된 주관적인 자기 신념의 발휘이기 때문입니다. 자의적 종교행위 말입니다. 따라서 일체의 성경적 믿음과 기독교적 행위는 하나님의 구속의 경륜의 대 주제인 '하나님 나라의 건설'이라는 사상과 연관됨이 없이는 일개 자의적 숭배 신앙에 불과할 뿐입니다. 곧 미신적(迷信的) 신앙이란 말입니다. 이는 하나님 나라와는 아무런 관계도 분깃도 없는 우상 숭배적 신앙관일 뿐입니다.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 또는 베풀어주신 구원의 역사를 신뢰하는 방식으로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인정하는 방식이 아니고서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드릴 수 있는 다른 방식이 성립될 수 없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인식할 필요가 있습니다. 기독교가 진리의 체계로 이루어져 있다는 사실이 이에서 나와집니다. 하나님께서 제공해 주신 말씀의 원리에 의존하지 않고서는 하나님을 유일하신 하나님으로 바르게 섬길 수 없는 이유가 이에 있습니다. 기독교가 계시 의존적(啓示依存的) 신앙인 이유가 이에서 성립됩니다. 여기서 하나의 구체적인 예증으로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이 믿음에 견고해 짐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 방식을 생각해 보겠습니다. 바울은 아브라함이 하나님께로부터 이삭의 출생을 약속 받게 되었을 때,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치 않고 믿음에 견고히 서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고 말합니다. 그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었던 일차적이며 핵심적인 수단은 하나님의 섭리적 역사를 순전하게 받아들인 사실에 기초합니다.

"그가 백 세나 되어 자기 몸의 죽은 것 같음과 사라의 태의 죽은 것 같음을 알고도 믿음이 약하여지지 아니하고 믿음이 없어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치 않고 믿음에 견고하여져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약속하신 그것을 또한 능히 이루실 줄을 확신하였으니 그러므로 이것을 저에게 의로 여기셨느니라"(롬4:19-22).

여기서 아브라함에게 일어난 신앙적 움직임의 내용은 과연 무엇입니까? 그것은 하나님은 인간처럼 변하거나 무능력한 인생이 아니시고 불변하시는 여호와요, 창조주로서의 전능자이신 사실을 붙잡음으로 그와 같은 약속을 주신 하나님을 굳게 신뢰하는 마음이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확신의 믿음은 이미 아브라함을 가나안이라는 땅으로 선(先) 인도하신 언약(창12:1)의 성취를 통해서, 남은 자손 언약의 성취를 의심 없이 받아들일 수 있게 한 결정적인 동인으로 작용했던 것입니다. 동시에 그런 식으로 역사하신 사실을 아브라함으로 하여금 믿음으로 수납하게 하심으로 영광 받으시기 위하여 일하시는 하나님의 목적이 달성되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역의 절정은 복음을 통해 나타났고 따라서 하나님은 복음을 받아들인 자들로부터 복음을 베푸신 당신의 사역을 인정받으심으로 최종적으로 영광을 받으시게 됩니다. 이 의미를 좀더 구체적으로 설명해 보겠습니다. 복음은 그 성격에 있어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죄인들을 사랑하신 하나님의 주권적인 은혜라고 하는 개념으로 나타납니다. 복음이 간직하고 있는 이 탁월하고도 독특한 성격을 통하여 하나님의 영광이 계시(啓示)되었고, 또한 현시(顯示)되었습니다. 따라서 교회가 하나님께로부터 입은 은혜를 진정으로 감사해 하고 그래서 기꺼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려 한다면, 마땅히 다른 무엇에 앞서서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에 대한 인정과 감사로서 그렇게 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곧 복음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작정 교리의 수납(收納)이요, 인정(認定)이며, 고백(告白)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신이신 까닭에 그 행하시는 모든 역사는 원칙적으로 인간이 이해할 수 있는 능력과 범위에 제한되지 않습니다(롬11:33-34). 가령 신적 작정 교리보다도 조금은 이해하기 쉬운 듯이(?) 보이는 교리들을 생각해 봅시다. 그렇지만 이러한 것들조차도 원칙적으로 하나님께서 그 사실을 계시해주셨다고 하는 전제가 있기 때문에 이해하고 있는 것일 뿐입니다(고전2:14). 따라서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들을 순전히 받아들이는 믿음에 있는 것이며, 그 알려주시는 구원의 방식들에 대해서 경외하는 마음으로 겸손히 수용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성경에 의하면 신적 작정 교리는 하나님께서 친히 행사하신 주권적인 역사인 까닭에 '은혜라고 하는 복음'을 그 결과로 가져오게 되었다고 분명하게 선포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제 이 은혜를 입은 교회는 이 사실을 의심 없이 받아들이고 그것이 의미하는 바에 자신을 적용함으로 믿음을 더욱 견고케 하며 이런 방식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드릴 수 있어야 합니다.

출처 : 생명나무 쉼터
글쓴이 : 둥지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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