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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예정론을 바르게 이해했을 때 / 김민호 목사

하나님아들 2018. 6. 5. 21:04
제목 : 예정론을 바르게 이해했을 때

출처: 회복의교회  http://www.hoebok.com/default/sub03/?type=brd&LxID=bbs_08&page=1&mpart=&wgrp=51&FD=sub03&category=&m=&&field=&keyword=&mode=read&uid=119

 

 

예정론을 바르게 이해했을 때...          

 

글쓴이:  김민호 목사

 


예정론은 성경의 신비이다.

예정론은 우리의 이성과 경험의 선을 넘어선다.

과연 어느 누가 창세 전에 이 세상의 모든 것을 미리 작정하시고 예정하셨다는 것을 이해할 수 있겠는가?

어떤 사람은 하나님의 예정을 미리 아시고 예정하신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이런 주장은 성경적이지 않다.

하나님은 미리 아시고 예정하신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행위에 의하여 영향을 받거나 끌려다니지 않으신다.

하나님은 이 세상의 모든 것을 당신의 뜻대로 완벽하게 작정하셨고,

세상은 하나님의 완전한 작정 안에서 움직여진다.

이렇게 말하게 될 때 사람들은 본성적으로 반감을 갖는다.

이에 대하여 다양한 반론을 제기하고 싶어진다.

그러나 이 글을 읽는 사람들이나 예정론으로 인해 고민하는 사람들은 반론을 제기하기 보다는

예정론을 주신 하나님의 뜻을 먼저 이해해야 한다.

 

이 쯤해서 예정론에 대한 칼빈의 말을 들어보자.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그의 지혜를 이해하기 원하시는 것이 아니다.

단지 그 지혜를 기리고 높이 받아들이기 바라신다.

그리하여 우리 속에 경이와 놀라움으로 가득 채우기를 바라신다."(기독교강요 3권 21.1)

칼빈보다 예정론을 더 먼저 가르쳤던 어거스틴의 말을 또 들어보자.

"그대는 나와 논쟁을 하려는가? 나와 함께 놀라며 '오, 깊도다!'하고 감탄하라.

우리 두 사람은 서로 두려운 마음으로 하나되어, 오류로 인해 멸망하지 않도록 하자."(기독교강요 3권 22.10)

그러면 어떻게 예정론을 접하는 우리에게 반감이 아니라 어거스틴이나 칼빈과 같은 태도를 견지할 수 있겠는가?

그것은 이해력을 통해서 믿음에 도달하려고 하기 보다는 믿음을 전제로 이해력에 도달하려고 할 때에 가능하다.

여기서 오해하지 말라.

기독교는 광신을 강요하는 것이 아니다.

기독교 신앙의 수 많은 영역은 설득이 가능하다.

또 합리성과 타당성을 근거로 믿음을 받아들이라고 한다.

그러나 예정론은 믿음을 전제로 하지 않으면 도무지 이해하거나 납득할 수 없다.

그러면 우리는 무엇에 대한 믿음인지 묻게 된다.

그것은 하나님의 거룩하신 속성에 대한 믿음을 말한다.

즉 하나님은 절대적으로 선하시고, 절대적으로 지혜로우시며, 전지전능하신 분이심을 믿어야 한다.

그리고 그 선하신 분이 모든 것을 작정하시고 예정하신 것이다.

우리같이 오류가 있거나, 선하지도,

지혜롭지도 못한 분이 예정을 하셨다면 정말로 불안하고 불합리하게 여겨질 것이다.

그러나 우리와는 전혀 다른 속성을 지니신 분이 모든 것을 당신의 선하신 뜻대로 예정하신 것이다.

여기서 예정론의 논리를 다 설명하지는 않게다.

그런 의도로 글을 쓴 것도 아니다.

단지 필자는 예정론을 믿음으로 받아들이고 바르게 받아들였을 때

어떤 현상이 나타나야만 하는지를 말하고 싶을 뿐이다.

그러면 예정론을 바르게 이해했을 때 우리에겐 어떤 현상이 나타나겠는가?

 

첫째는 수동적인 태도가 아니라 적극적인 태도이다.

상당수의 사람들이 예정론을 배운 후엔 지극히 수동적인 태도를 견지하게 된다.

모든 것이 예정되었다면 내가 아무리 애를 써도 소용이 없을 것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태도는 하나님의 거룩하신 속성을 전제로 예정론을 이해한 것이 아니다.

예정론을 바르게 이해했다면 우리에게 나타나야 할 태도는 하나님의 거룩한 형상의 참여다.

하나님은 예정론을 통해서 우리에게 이런 현상이 나타나길 바라지 않으신다.

우리가 예정론을 바르게 이해했다면 우리는 마치 농부가 최선을 다 해서 농사를 진 후에

선한 결과를 기대한 것과 같은 태도를 견지해야 한다.

예정론의 핵심은 하나님께서 당신의 지극히 선하신 뜻대로 모든 것을 이루실 것이라는 점이다.

이러한 개념을 우리가 이해한다면 우리는 최선을 다 한 후에 최고의 선을 기대하는 것이 타당하다.

만일 우리가 게으르고 나태한 태도를 견지하면서 최고의 선을 기대한다면 하나님을 오해한 것이 된다.

하나님은 게으른 자에게 부당한 혜택을 주시지 않는다.

또 우리가 만일 최선을 다했어도 최고의 선이 주어지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이것 또한 하나님의 선하심과 지혜와 전능성을 믿지 못하는 것이 된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최고이 선이란 우리가 원하는 선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선이다.

성도는 이 땅에서 최선을 내 뜻이 아닌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 짐으로 만족하는 사람들이다.

 
두 번째로 예정론을 바르게 이했을 때, 우리는 겸손해지게 된다.

칼빈의 말처럼 "긍휼을 구하는 자에게 긍휼이 임할 때 그 사람이 하나님의 거절을 당하지 않을 것이 분명"하다.

이것은 어찌보면 하나님의 예정과 충돌을 일으키는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내가 긍휼을 구했기 때문에' 구원을 얻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정론은 우리가 긍휼을 구하는 그 행위 자체도 하나님의 주권 안에 있다고 가르친다.

출애굽기 33장 19절의 말씀처럼 하나님은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히 여기고, 불쌍히 여길 자를 불쌍히" 여기신다.

따라서 어떤 사람이 구원을 받기 위해서 끊임없이 긍휼을 구한다는 것은 그가 이미 긍휼히 여김을 받고 있다는 점을 말해준다.

그렇다면 무엇이 은혜인가?

하나님께 날마다 '긍휼을 구하는 마음'이 지속되는 것이 은혜다.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해야 한다(고전10:12)

하나님은 "곤고한 백성은 구원하시고 교만한 자를 살피사 낮추시리이다"(삼하22:28)고 한 말씀을 잊지 말아야 한다.

고로 우리가 하나님의 예정 가운데 있는지 자신을 살피는 중요한 관점은 이것이다.

우리가 날마다 하나님의 긍휼을 바라보는 상태인가 아닌가가 바로 그것이다.


세 번째로 우리가 예정론을 바르게 이해하면 행위에 의존하기 보다는 은혜를 의존하게 된다.

우리가 잘 아는 야곱과 에서의 이야기는 예정론에서 자주 언급되는 화두이다.

야곱과 에서는 이란성 쌍둥이였다.

그런데 그들은 아직 태어나기도 전임에도 불구하고 이미 악이나 선을 행하기 이전에 택하심이 결정되었다.

바울은 이 사실을 로마서 9장 11-13절에서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다. 

"그 자식들이 아직 나지도 아니하고 무슨 선이나 악을 행하지 아니한 때에 택하심을 따라 되는

하나님의 뜻이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 오직 부르시는 이로 말미암아 서게 하려 하사

리브가에게 이르시되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 하셨나니

기록된 바 내가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였다 하심과 같으니라"

이 기록은 우리를 어리둥절하게 한다.

왜 그런가?

야곱과 에서는 모든 것이 동일한 조건에서 태어났다.

아니 에서는 장자로 태어났으니 구원을 받기에 더 좋은 조건에서 태어난 것이 틀림없다.

그런데 야곱은 받아들여지고 에서는 거절되었다고 한다.

에서가 장자라는 것 조차도 무시되고 장자의 권리가 차자에게 넘어갔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가?

운명론을 말하는가?

우리의 운명(구원과 유기)은 이미 결정되었으니 구원에 대하여 포기하고 살아야 된다는 말인가?

성경이 말하고자 하는 의도는 그것이 아니다.

행위로 구원을 얻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점을 강조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선택밖에는 구원 받을 방법이 없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한다는 것인가?

마냥 선택 받기만을 기다리라는 것인가?

아니다.

하나님께 긍휼을 구하라는 말이다.

누구든지 긍휼을 구하는 자는 결코 외면당하지 않는다.

고로 이 말은 우리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은혜를 의존해야 할 당위성을 깨닫게 한다.

우리가 은혜로만 살아가야 할 존재라는 점을 자각시켜 주신다.

그래서 예정론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리로 나가게 한다.

은혜가 없으면 살 수 없다는 것을 자각하게 될 때,

은혜를 주시는 분으로부터 은혜가 주어지지 않을 것을 두려워 하게 된다는 것이다.


고로 예정론을 바르게 이해하게 되었을 때 나타나는 네 번째 현상은

하나님께 대한 경외심이다.

경외심이야말로 예정론을 바르게 이해한 사람들에게 나타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경외심은 예정론을 바르게 이해한 사람들에게만 나타나는 것이 아니다.

경외심은 예정론을 바르게 이해하는 전제이기도 하다.

고로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혜와 지식의 근본이 된다.


출처 : 생명나무 쉼터
글쓴이 : 둥지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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