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말이란!!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

[스크랩] 몰트만의 종말론과 역사이해

하나님아들 2012. 7. 25. 15:42

몰트만의 종말론과 역사이해

 

 

이 기 성

 


 

·목 차·

Ⅰ. 들어가는 말

Ⅱ. 몰트만 이전의 종말론과 역사이해

1. 20세기 까지의 종말론적 배경

2. O. Cullmann의 구속사적 종말론

3. R. Bultmann의 실존론적 종말론

4. K. Barth의 변증법적 종말론

5. W. Pannenberg의 선취된 종말론

Ⅲ. 몰트만의 종말론

1. 오시는 하나님

2. 희망의 종말론

3. 종말론과 역사

Ⅳ. 몰트만의 역사이해

1. 역사학과 역사철학 비판

2. 역사이해의 단서들

3. 역사이해와 미래

4. 하나님의 계시와 약속

5. 그리스도의 부활과 역사

Ⅴ. 맺는 말




I. 들어가는 말

한국교회는 교파와 신학자에 따라서 종말론을 다양하게 이해하여 왔다. 이해가 다양한 만큼 한국교회는 그때 그때 목소리가 높은 쪽으로 몰리면서 신앙인들을 혼란스럽게 하였다. 종말론을 단순히 말세에 있을 내용을 조감도처럼 보여 주는 것이라는 생각이 지배적으로 이해되고 있는 한국교회에게 종말론은 말세의 비밀이 담긴 판도라의 상자처럼 여겨지고 있다. 그러나 종말론의 진정한 의미는 그러한 미래의 일에 일차적인 관심이 있는 것이 아니라, 종말론적인 신앙을 소유한 교회와 그리스도인이 오늘을 진정한 그리스도인으로서, 하나님 나라를 앞당겨 이루는 희망적 존재로서, 역사와 사회에 책임적인 사람으로서 살게 하려는 데 목적이 있다고 하겠다. 종말에 대한 이해와 신앙에 따라서 그리스도인의 오늘의 삶과 역사를 대하는 태도가 달라지게 될 것이다.

이 소논문은 이러한 문제의식에서 오늘날 종말론을 재발견하며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에게 종말적 신앙안에서 희망적인 존재로서 역사에 책임을 다할 수 있도록 채찍질하는 몰트만(J.Moltmann)의 종말론과 이에 따른 역사이해를 살펴 보고자 한다. 이를 더욱 잘 살펴보기 위해서 우선은 몰트만 이전에 지배적인 영향을 미쳤던 종말론과 그에 따른 역사이해를 살펴보고, 다음으로 몰트만의 종말론을 정리한 뒤에 이 종말론적 신앙 또는 의식이 어떻게 역사를 이해케 하고 있는지를 살피려고 한다.

Ⅱ. 몰트만 이전의 종말론과 역사이해

1. 20세기 까지의 종말론적 배경

현대 개신교 신악에 있어서 의미심장한 사건 중의 하나가 예수의 교훈과 초대교회의 사상권내에서 종말론의 지배적 영향을 발견하게 되었다는 것이다.1) 19세기 신학자들은 주로 기독교와 문화를 종합시키려는 입장을 견지했다. 리츨(A.Ritschl)과 하르낙(A.Harnack)등은 하나님의 나라를 역사 안에서 사랑과 도덕적 행동을 통하여 점진적으로 완성시켜 가는 윤리적 나라라고 보았다. 즉 하나님의 나라는 인류의 도덕적 진보와 정신적 계발을 통해서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따라서 리츨과 하르낙에 의해 대변된 이러한 하나님 상과 하나님 나라에 대항하여 강력한 반발이 나타나게 된다. 바이스(J. Weiss)는 리츨이 예수의 말씀을 자세히 연구한 것이 아니라 19세기의 진화론적이고 비종말적인 사고경향에 근거를 둔 것이라고 비난하면서 예수는 자기 시대의 중요한 정점에 서 있고, 스스로를 종말론적으로 지향된 구원을 선포하는 전파자로 확신했다고 주장한다.2)

바이스는 예수의 가르침 속에서 미래 종말론이 중심을 이루고 있다는 데는 공헌을 하였으나 하나님의 나라는 미래적이며 결코 현재적이 될 수 없다고 주장한 것은 너무 지나친 듯하다. 슈바이쩌(A.Schweitzer)는 종말론적 개념들이 예수의 설교 뿐만아니라 그의 생애를 주관했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마태복음 27장 46절은 예수가 최후의 희망이 착각이었다는 것을 마지막으로 인정하는 언어라고 한다. 이런 종말론을 철저적 종말론이라고 한다.

다드(C.H. Dodd)는 예수가 하나님 나라의 실체를 자기의 사역 속에서 이미 실현되었다고 가르쳤으며 따라서 예수의 종말론은 실현된 종말론이라고 주장한다. 예수의 사역을 통해서 구약의 선지자들이 예언했던 하나님의 나라가 도래했다는 것이다.3)

몰트만 신학에 있어서 종말론은 미래성을 상실당하고 있다. 자기 자신이 하나의 궁극적으로 의미있는 결단을 해야 하는 그 순간과 그 정황은 언제나 종말론적이라고 말할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바르트(K. Barth), 틸리히(P.Thillich)등은 변증법적 종말론을 주장하고 있다. 이렇게 종말론은 현대 신학에서 끊임없이 논쟁의 대상이 되고 있다. 이제 다음으로 다른 몇몇 학자들의 입장은 몰트만의 종말론을 이해하는데 좋은 비교점을 제시하고 있다.

2. O. Cullmann의 구속사적 종말로

쿨만은 구속사의 기원을 성경을 통해 일관성 있는 구원의 발생사에서 찾고 있다.4) 그는 성경의 시간관과 역사관을 제시하면서 성경의 다양한 사상들의 종합을 시도하는데 여기서 우리는 그의 종말론적 이해를 만나게 된다. 그리고 그의 종말론은 그가 이해하는 시간과 역사관과 깊은 연관이 있다.

초기 그리스도인들이 자신들이 속해 있는 역사를 그리스도의 부활사건과 관련하여 이미와 아직의 긴장으로 이해했다는 사실이 쿨만에게는 중요하다. 이런 이해의 배후에는 윤회적이 아닌 직선적, 선상적 시간관이 놓여 있다.

“신약에서는 엄격하게 곧은 선상적 시간개념은 희랍식 원형적 시간개념이나, 구원을 저 너머에 두는 모든 형이상학과 구별되어져야만 한다.”5)

쿨만은 성경적 시간관을 제시하기 위하여 신약의 두 용어에 중심한다. “카이로스”는 고정된 내용을 담은 한정적 시점을 나타내고 “에이온”은 연장적인 시간을 나타낸다. 특히 에이온은 얼마라고 잴 수도 밝힐 수도 없는 연장시간을 가리키기도 하는데 이 경우를 “영원”이라고 한다. 쿨만은 이 영원을 플라톤식으로 시간과는 질적으로 다른 무시간 상태로 이해하는 것과 구분해서 ‘끝없는 시간’으로 이해한다. 하나님의 속성으로서의 영원성도 동일한 관점 아래에서 취급한다.

쿨만에게 있어서 신약신자들이 살고있는 세대는 중앙점과 끝점 사이의 긴장으로 점절되어 있다.

“신약성경 속에 있는 새로운 요소는 종말론이 아니라, 결정적으로 ‘이미 성취된 것’과 ‘아직 완성되지 않은 것’, 즉 현재와 미래사이의 긴장이라고 부르는 것이 새로운 요소이다. 예수의 복음전파를 포함한 신약성경의 전체적 신학은 바로 이러한 긴장에 의해서 대별될 수 있다.”6)

이 구속사적 현재의 긴장구조에 있어서는 그리스도 중심에서 ‘이미’ 결정 내려지며, ‘이제’ 미래에 대한 기대는 이 ‘이미’에 대한 신앙에 정손되므로 ‘이미’가 ‘아직’보다 우위에 있다. 이런 시간관과 그리스도 중심적 역사관을 통해 쿨만의 종말론은 아직 성취되지 않은 미래적 요소와 아울러 이미 성취된 현재적 요소를 함께 포함하고 있다. 이상을 통하여서 쿨만은 하나님의 나라는 현재적이며 미래적이라 가르치고, 심판이 이미 일어났으며 또한 미래에 일어날 것이라고 주장한다.

3. R. Bultmann의 실존론적 종말론

몰트만의 역사이해는 종말론적이고 그리하여 그의 종말론 이해는 그의 역사이해를 의미한다고 하겠다. 그에게는 종말론과 역사이해가 분리된 영역에 속한 것이 아니라 “역사는 종말론 안으로 삼킨바” 되었다는 의미에서 양자는 불가분리의 관계에 있다.7)

몰트만은 이제 미래에 대한 신약성서의 개념들의 ‘실존론적 해석’의 필요를 느낀다. 이 실존론적 해석을 수행하는 데 있어서, 몰트만은 ‘사실적인 것’과 ‘역사적인 것’을 구별해 사용하면서 예수의 구속사건이 지니는 사실성을 신화론적 표상으로 간주하고, 역사성을 실존론적 의미성으로 드러낸다.8) 몰트만은 이를 위해 ‘비신화화’라는 도구를 사용하였다.

몰트만은 신약성서 설교의 주제인 구속사건은 신화론적 세계관을 전제하였으며, 따라서 신약성서의 구속사건과 종말론은 모두 신화적이라고 한다.9) 예수의 설교에서 전제되어 있는 세계이해도 신화론적이라고 한다. 따라서 신약성서의 구속신화는 신화론적 종말론과 밀접히 관계되었음은 분명하다. 신학의 과제는 이러한 신화적인 틀에서 케리그마를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것이다. 이것이 ‘비신화화’ 작업이다.

다시 말해서 그에게 있어서 종말론이란 종말역사를 의미하지 않고 현재를 최종의 결단시각으로 해석함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종말론이란 우주적 종말이다. 재난을 동반한 역사과정의 종국이 아니라, 실존적인 결단이 요구되는 현재의 시각을 말한다. 그러므로 이런 종말론을 현재적 종말론이라고 한다.

이러한 종말론에서 볼때 기독교의 실존은 곧 종말론적 실존이다. 인간은 항상 미래에 존재해 있다. 이 때문에 ‘미래성’은 인간 현존재의 구조적 계기로서 ‘역사성’과 ‘시간성’에 속한다. ‘미래성’이란 인간이 아직 이루어지지 않은 어떤 것을 기대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은 그의 현 실존에서 미래에 의해, 즉 그에게 부딪혀 오는 것에 의해 규정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몰트만의 종말론은 역사를 인간 실존안으로 끌어 들임으로써 역사를 잃어 버리게 했다고 할 수 있다. 그의 실존론적 종말론은 역사의 목표로서의 그의 의미를 완전히 상실하였으며, 신실에 있어서 개인적 존재의 목표로 이해되고 있다. 따라서 실존론적 종말론은 역사 전체의 의미와 통일성에 대하여 아무런 얘기도 할 수 없다.

4. K. Barth의 변증법적 종말론

빠르트의 종말론은 그의 시간이해와 그리스도 해석에서 출발한다. 그는 영원한 시간이란 인간의 시간과 구별되면서도 인간의 시간의 근원이라고 본다.

즉, 영원한 시간이란 예수 그리스도의 사건 곧 말씀이 육신이 된 사건의 시간성을 말한다. 이러한 전제 아래서 바르트는 자유주의 신학의 추상화되고 관념화된 내재적 하나님 대신 절대 타자로서의 초월적 하나님을 말하고 있으며,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서 실현된 종말을 말하며, 인간이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는 수직선적 종말을 말하고 있다. 이와같은 바르트의 종말의 특성은 다음과 같다.10)

첫째, 하나님과 인간, 영원과 시간 사이의 질적인 절대적 구별에서 출발하여 초월적 하나님을 강조한다. 그러나 바르트의 후기 사상에서는 하나님의 심판과 부정, 하나님과 인간과의 대립관계가 예수 안에서의 하나님과 인간의 연합, 용서와 긍정, 부정을 극복한 화해의 강조로 수정된다.

둘째, 바르트의 종말론은 ‘원역사’라는 말과 관련되어 있다. 즉 예수 그리스도의 사건이 역사에 대한 심판이며, 동시에 구원이 된다는 것이다.

셋째, 바르트의 종말론은 구속사에 대해 비판적이다. 즉 하나님의 계시 사건자체는 이러한 특수 종교역사가 아니라는 것이며, 구속사는 세계역사의 위기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넷째, 바르트는 계시와 이성, 신앙과 이성의 절대적 대립관계를 주장하며, 계시와 신앙을 강조한다.

다섯째, 바르트의 종말론은 미래에 발생하게 될 어떤 사건들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종말론이란 우리가 그리스도를 직면하는 순간 순간마다 믿음과 회개를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포용하는 것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이상과 같은 바르트로 대표되는 변증법적 종말론은 하나님의 초월성을 강조하는 장점이 있으나 종말론의 무게중심이 개인적 종말론에 기울어지고 있어서 그리스도와 역사의 참된 미래를 시간과 영원의 변증법으로 붕괴시키고 있는 문제를 갖고 있다. 또 하나는 절대 타자로서의 하나님을 강조함으로써 하나님을 세계 밖으로 몰아내며, 현 역사를 경시하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5. W.Pannenberg의 선취된 종말론

판넨베르크의 종말론은 한마디로 ‘선취된 종말론’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여기서 그는 예수의 부활에서 역사의 종말이 현재한 것으로 보면서도 나머지 인간의 부활을 위해서 미래를 논하는 구조를 취하고 있다. 다시 말해서 그는 예수의 현재와 인류의 미래에서 역사의 종말을 보고 이를 ‘선취된 종말론’으로 발전시키고 있다.11)

판넨베르크에 의하면 예수의 운명안에서 역사의 마지막은 하나의 선취로서 미리 경험되어졌다. 또 예수의 지상적 선포는 다가오는 하나님 나라의 예기(Antizipation)이고, 그의 죽은 자 가운데서의 부활은 세계 종말에 있을 죽은 자들의 부활의 선취(Prolepse)행위이다.12) 즉 우리에게는 아직 소망의 대상인 종말론적 사건들이 예수 그리스도에게서는 이미 죽은자 가운데서의 부활을 통해 선취되었다는 것이다.

우리에게는 여전히 오고 있는 모든 역사의 종말은 죽은 자로부터의 부활을 통해 예수에게서 이미 일어났기 때문에 예수는 예수는 이스라엘의 하나님의 결정적인 자기 계시로 간주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예수는 예기된 종말이며 역사의 중간은 아니다.13)

판넨베르크에게 있어서 ‘종말’은 철저히 역사적 사건이다. 그에 대한 증명으로서 그는 종말의 선취사건인 예수의 부활이 철저히 역사적인 사건임을 지적한다. 이 개념은 그의 역사이해 전체를 관통하고 있는 실재적인 개념이다. 예수의 사건은 철저히 시간적, 공간적으로 일어난 사건이다. 그리고 그것은 틀림없는 역사적 사건이라고 하면서, 이 역사적 사건이 종말에 대한 실재적인 선취라고 한다면 종말 역시도 역사적으로 일어나는 사건임에 틀림없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이러한 주장 뒤엔 판넨베르크는 종말론과 하나님의 통치를 연관시킨다. 종말론적 구원의 중심된 내용은 하나님 자신과 그의 통치라는 것이다. 이것이 판넨베르크가 보는 종말론과 역사이해의 관계이다.

Ⅲ. 몰트만의 종말론

1. 오시는 하나님

몰트만에 의하면 파루시아는 예수의 길의 완성이다. 즉 그 분의 구원사역이 완성된 것을 의미한다.14) 십자가에 달리셨던 그리스도가 이 땅에 다시 오심으로서 땅위의 모든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시고 하나님의 의를 온전히 이룸으로 비로소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 사역이 완성되는 것이다. 몰트만에게 있어서 종말은 예수 그리스도의 다시 오심으로 말미암은 것이요, 예수 그리스도의 다시 오심은 이 세상 시간의 고통하는 본질을 종말에 이르게 하고 그의 영원한 나라의 영광 속으로 이끌어 들이는 참된 희망인 것이다.

이스라엘의 역사 속에서 생성된 메시야 희망은 이스라엘이 고난과 역경속에 있으면서 더욱 구체화 되어 갔다. 그들은 메시야의 오심 속에서 하나님 자심의 오심이 나타나는 것으로 이해했다.15) 메시야 희망은 곧 하나님의 온전한 통치에 관한 희망이다. 하나님의 온전한 통치가 이루어지는 그 때를 기다리는 것이 메시야 사상이라고 할 것 같으면 메시야 사상은 곧 종말론적 사상이며 메시야를 기다리는 것은 종말론적 의를 기다리는 것이다.

몰트만에게 있어서 종말론적이라는 말은 장차 올 세계 구원, 곧 모든 민족들의 메시야적 평화가 실현되고 하나님의 창조가 영광의 나라로 완성됨으로써 오게되는 세계 구원을 가리친다. 몰트만에 의하면 메시야가 올 때 메시야는 두 가지를 모두 구원할 것이라고 한다. 첫째로 메시야는 파괴의 세력들을 인간으로부터 추방할 것이며, 둘째 그는 이 파괴의 세력들 자체를 파괴의 기능에서 구원하여 다시 창조자를 위하여 봉사하도록 바로 세울 것이라는 것이다.16)

이와 관련하여 몰트만은 오시는 이(Der Kommende)에 대하여 말하고 있다.17) 첫째, ‘오시는 이’라는 표현은 우선 구약에서는 하나님 자신에 대한 하나의 암호로 본다. 이는 하나님의 도래에 대한 희망과 연결되어 있다. 둘째, 바로 주님이신 그리스도가 그의 백성들이 기다리는 분이라고 한다. 셋째, 이스라엘의 메시야인 예수는 메시야의 날에 나타나시고 하나님의 백성을 구원하실 것이라는 것이다. 넷째, 인자이신 예수는 인자의 날에 산자와 죽은 자를 심판해서 그의 나라의 새로운 인간이 되게 하기 위하여 나타난다. 다섯째, 몰트만은 영광의 왕국에서 모든 사물이 새롭게 창조된다는 관점에서 창조의 중재자인 ‘영’과 ‘말씀’의 파루시아 역시 기다릴 수 있다고 본다. 창조주가 종국에 가서 “보라 내가 만물을 새롭게 하노라”라고 선언한다면 창조의 말씀 역시 창조의 영 안에서 그 곳에 함께 있음이 틀림없다는 것이다.18)

2. 희망의 종말론

몰트만의 종말론의 가장 큰 기여는 무엇보다도 종말론을 기독론 안으로 끌어들였을 뿐 아니라 기독론의 모든 내용을 종말론적인 관점에서 재조명하고 그 종말론을 희망의 종말론이 되게 하였다는 데 있다. 그의 종말론의 특징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19)

첫째, 몰트만의 종말론은 현재를 살아가고 있는 모든 사람에게 밝은 소망을 비춰주고 있다. 메시야인 예수 그리스도가 주인이 되어진 희망이야말로 참 희망이며, 이 시대를 구원할 유일한 길임을 몰트만은 우리에게 확실히 보여주고 있다.

둘째, 몰트만은 이 희망은 배고픈 사람들, 실직자들, 병자들, 고난을 당하는 자들을 포함하는 집합개념인 가난한 사람들의 것이라고 말한다. 또한 그는 하나님 나라가 온전히 임할 그리스도의 파루시아는 불의한 자들에게 임할 대 보복의 말이 아니라 하나님의 온전하신 의가 이루어지는 평화의 날, 축복의 날, 기다려지는 날이라는 것이다.

셋째, 몰트만은 그리스도의 모든 사역을 그의 부활은 물론이려니와 그의 생애도, 그의 고난도 그리스도의 파루시아를 향한 묵시적 사역으로 본다. 몰트만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속에서 이 땅의 모든 소망을 발견하며 이 부활은 바로 마지막 날의 모든 사람들이 부활할 전조라고 이해하며 그의 종말론 속에는 빼놓을 수 없는 사건으로서 부활을 중요한 종말론적 사건으로 파악하고 있다.

3. 종말론과 역사

몰트만은 일반 역사신학자들의 신학이 종말론적 성격을 지닌 것은 사실이나 그 신은 에피파니(Epiphanie)의 신이 될 위험이 있다고 보고, 그는 희망의 종말론을 이야기 했다. 여기서는 종말은 없는 것도 아니며 역사 저편에 있는 것도 아니다. 역사의 종말은 아직 오지 아니하였으나 종말의 힘이 지금 작용하고 있다는 것이다. 역사신학자들이 전체 현실을 역사로 보고 보편사를 계시로 보는 데 반해 몰트만은 역사의 본래적 범주는 미래라고 보고, 아직 아닌 현실을 역사로 보고, 약속을 계시로 파악한다.

따라서 몰트만은 종말을 역사속에 전적으로 새로운 것의 도래를 의미하는 강림(Adventus)과 미래(Futurum)로 구분하고 후자를 희망의 종말론을 위한 용어로 채택하며 이 미래를 역사 한 가군데로 끌어 들이고 있다.20)

Ⅳ. 몰트만의 역사이해

1. 역사학과 역사철학 비판

몰트만은 역사적이라는 말과 말과 사적이라는 말을 엄격히 구별한다. 사적이해란 유비적 이해이며, 이에 따라 모든 사건은 기본적으로 유사하다는 것을 전제하고 또 그렇게 되기를 요청하는 일정한 세계관에 기초해 있다고 하였다. 역사가는 사적 방법에 의해 역사를 탐구하며 역사를 파악하려고 한다. 그런데 변화하는 역사를 파악하려는 역사가는 그 변화속에 있는 내재적 로고스를 찾으려고 하고 그 로고스를 찾았다고 믿는 순간 역사는 파악되지만 그 역사는 이미 역사가 되기를 중지한다. 이러한 역사철학은 결국 역사를 정지시키고 멸절시킨다고 비판한다.

“역사학과 역사철학으로부터 나온 시도는 역사의 정의와 파악과 이해인 바 이들은 불가피하게 역사를 중지, 부정, 멸절이 되어버리는 결과를 초래한다. 역사의 기원과 본질과 실체에 대한 주도적 질문은 역사가 만드는 구체적 운동, 변화, 위기, 혁명, 불변하는 것, 생존하는 것, 모든 세대에 타당한 것과 관계시킨다.”고 한다.21)

역사는 움직임이며 변화이다. 그런데 그것을 파악하려는 역사학과 역사철학은 결국 역사로 하여금 역사이기를 그치게 하는 시도라는 것이다. 이러한 탐구방식은 헬라적 사고에서 온 것이므로 몰트만은 이러한 역사탐구 방식을 비판하고 있다.

2. 역사이해의 단서들

몰트만은 역사이해를 위한 단서들을 그의 저서 곳곳에서 나름대로 드러내 보이고 있다.

첫째, 역사는 세계의 창조와 함께 시작되었다. 창조된 세계는 그 자체속에 폐쇄될 수 없으며 오히려 하나님과 미래를 위하여 열려있는 역사이다.

“태초의 창조를 시간적으로 이해하고자 시도하였으며, 따라서 역사와 미래에 대하여 개방되어 있는 체계로 이해하고자 시도하였다. 이제 ‘완성가운데 있는 창조’를 이해하기 위하여 시간적 창조로부터 영원한 창조로의 전이를 생각할 수 밖에 없다.”22)

둘째, 역사는 종말론적 계시의 술어이다. 역사의 의미가 신의 십자가와 부활 사건의 종말론적인 연관에 의해서 말해진다면 일반역사는 단순한 내재적 사건의 인과관계로 이해되지 않고 신의 종말론적 계시사건의 술어로서 이해되어지는 것이다. 따라서 역사의 의미는 과거, 현재, 미래로서 일반 연대기적 문서에 의해서 결정되지 않고 오히려 역으로 미래로부터 현재를 통해서 과거로 그 의미가 밝혀진다.

셋째, 역사의 본래적 범주는 미래이다. 몰트만이 바라보는 인간의 세계는 미완성의 상태이다. 따라서 미래의 관심을 지향할 수 밖에 없다. 이 세계의 모든 것은 미래의 완성을 향한 “도상의 존재”이다. 현재의 상태속에 있는 부정적인 것을 부정하고 하나님의 미래를 향하여 끊임없이 변화되고 건설적으로 개혁되며 추진해야 될 존재이다. 따라서 이 세계의 모든 존재자의 기본적인 성격은 미래성에 있다. 이 미래를 향한 과정을 우리는 역사라고 부르고 그 역사의 본래적 범주를 미래라고 한다.

3. 역사이해와 미래

몰트만은 청조와 더불어 시작된 세계는 창조의 완성과 함께 종말을 이룬다고 보았다.

“시간적 창조의 완성은 인격적 종말론에서는 시간적 삶으로부터 영원한 삶으로의 전이이고, 역사적 종말론에서는 역사로부터 영원한 하나님 나라로의 전이이며, 우주적 종말론에서는 시간적 창조로부터 영원한 신격화된 세계의 새 창조로의 전이이다.”23)

“땅위의 시간은 그의 구성적 가능성들에서 약속의 시간이다. 그의 시간의 본질은 시간의 시작이 미래였던 것처럼 미래성이다.”24)

이러한 시간성에 대한 이해에서 볼트만은 미래에 정초된 역사이해를 말하고 있다. 시간의 원천은 미래에 있을 수 밖에 없다고 하면서 “회상되는 과거 - 기다려지는 미래”라는 역설적 의미로 역사의 본질을 밝히고 있다. “역사는 고난당하며 행동하는 인간의 경험들과 기다림들에 의하여 구성” 25)되기 때문이다.

4. 하나님의 계시와 약속

앞에서 살핀 것처럼 하나님의 약속의 형식 속에 그리고 약속에 의해 특징지워지는 역사 속에 자기 자신을 계시하신다. 이처럼 몰트만은 ‘계시’가 본질적으로 그리고 근본적으로 약속의 성격을 가지고 있다고 말한다. 그리고 이 약속은 동시에 종말론적 개방성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이해된다. 왜냐하면 약속은 앞을 지시하고 앞을 향하여 인도하는 ‘열린 계시’와 관계가 있기 때문이다. 계시가 열려 있다고 하는 것은 계시가 인간의 세계 경험을, 자신 안에 갇힌 신성의 우주적 형상이 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역사에 대하여 열어 놓게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계시가 약속으로 이해될 때 이것은 종말론적 개방성을 얻게 된다. 그것은 미래의 목표와 하나님 나라의 성취의 약속 속에서 앞을 지시하고 앞을 향하여 인도하는 계시가 되며, 성취와 아직 아님의 긴장 속에서 현실 속의 부정과 모슨을 경험하면서 인간과 그 세계 현실을 역사적이 되게 한다.26)

몰트만은 이러한 변증법적 사고를 통해서 약속된 일치와 외화의 구별 속에 있는 인간의 모습과 약속된 하나님의 나라와 현실 사이의 모순을 설명하는 가운데, 계시의 약속의 성격이 미래를 제시하며 세계를 역사로서 경험하게 해준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다시 말해서 주어진 약속의 회상은 하나님의 계시를 종말론적으로 미래를 향해 열어주며 인간과 세계의 현실을 역사적이 되도록 개방시키고 있다.

더 나아가서 미래적 전망과 목표의식을 지닌 역사이해는 단지 역사 이해에만 머물지 않고 현실을 변혁시키는 정치적 해석학으로 나아간다. 따라서 그는 몰트만과 바르트의 주관성의 신학을 극복하고 세계와 역사와 인간 존재를 공히 수용하는 역사관을 수립할 수 있었다고 하겠다.

5. 그리스도의 부활과 역사

예수 그리스도의 운명은 십자가와 부활로써 완결된 것이 아니라, 아직 미래를 가지고 있다. 그런데 그리스도의 미래는 십자가와 부활의 사건을 회상함으로써 예기된다고 한다. 몰트만은 그리스도의 부활을 사적 사실이 아니라 역사적 현상으로 이해한다고 말한다. 부활은 그것이 소위 역사라고 하는 것에 속해 있기 때문이 아니라 그것이 미래적 사건에게 길을 지시하여 줌으로써 역사를 열어주기 때문에 역사적이라고 한다.27) 몰트만은 이 그리스도 사건에서 약속되고 기대되는 미래의 역사를 세 가지로 말한다.

첫째, 의의 약속, 즉 십자가와 부활 속에 계시된 하나님과의 화해와 삶의 의인을 말한다.

둘째, 죽은 자들 가운데 부활하심으로 되는 명의 약속이다.

셋째, 신의 나라의 약속, 그것은 존재의 새로운 전체성 가운데 하나님이 모든 것의 모든 것이 되는 나라이다.

세계의 역사는 그 자체 “되어가는 하나님”이다. 하나님은 모든 것 안에 있으며, 일어나는 모든 것은 하나님 안에 있다. 하나님과 세계는 서로의 삼투속에서 서로 안에 스며든다. 그러므로 하나님만이 모든 사건 속에 작용하는 것이 아니라 거꾸로 모든 사건이 하나님에게 작용하기도 한다. 이러한 의미에서 ‘공동체의 영’은 ‘부활의 영’으로서의 영광의 선수금일 뿐이지, 이 영광 자체는 아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세계를 그 자신과 화해시키는 하나님은 그의 나라 안에 있는 그의 영광과 세계의 새창조를 향한 도상에 있는 하나님이다.28)

“그리스도의 부활로 말미암아 기쁨은 온 우주의 구원에 대한 우주적이며 종말론적 전망들을 전개한다. 무엇을 위한 구원인가? 영원한 기쁨의 잔치 속에서 모든 피조물과 모든 창조의 사귐은 하나님에게 찬송과 찬양을 드릴 것이다. …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기뻐하는 사람들의 찬송과 찬양은 그들 자신의 이해에 따라 우주적 예배의식과 하늘의 찬양의 작은 반향이요, 모든 다른 생물의 표현된 현존의 기쁨의 작은 반향이다.”29)

Ⅴ. 맺는 말

몰트만에 따르면 기독교 신학은 하나님을 ‘희망의 하나님’내지는 ‘미래를 존재방식으로 가지는 하나님’이시며, ‘오시는 하나님’으로 인식된다. 몰트만의 사상에 있어서 하나님의 모든 계시들은 본질적으로 약속들이다. 구약과 신약의 모든 계시는 일차적으로 약속의 용어들이다. 그러나 이러한 약속들은 어떤 사건 속에도 완전히 용해되지 않고 언제나 넘쳐나서 미래를 가리킨다. 이와같은 몰트만의 확신한 바에 따르면, 하나님은 약속의 형식 속에, 그리고 약속에 의해 특징지어지는 역사 속에 자기 자신을 계시하신다.

이 역사속에 계시된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를 보고 무조건 현실의 고난을 참으라고 하시는 분이 아니라 그의 생애와 죽음과 부활의 통해서 죄악과 고통 속에서 현재를 살아가고 있는 이들을 향하여 참된 희망으로서의 파루시아를 가져와 주시는 분이라고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님 오심을 기다리면서 현실 세계로 말미암아서가 아니라 주님으로 말미아아서 참된 소망과 생명이 우리에게 임할 것을 믿고 오늘을 살아가는 것이다.

여기에서 몰트만의 ‘희망의 종말론’이 현실세계의 사람들에게 주는 힘이 있고, 역사를 긍정적으로 보고 강한 책임의식속에서 살아가게 하는 요소가 있다. 몰트만은 현실을 긍정도 부정도 않는다. 다만 현실을 그대로 인정하고 있다. 왜냐하면 그에게 있어서 중요한 것은 현재가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 있는 참된 희망이기 때문이다. 희망은 여기 현재에 속한 것이 아니라 미래에 속한 것이며 그리스도에 속한 것이지만 그것은 우리와 상관없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모든 삶 속에 침투하여 우리 삶의 원동력이 된다고 확신차게 말하고 있다.

출처 : 주사랑
글쓴이 : 항공모함 원글보기
메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