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단의 왕자 필립스 브룩스
19세기 미국 최고의 설교자 필립스 브룩스(Phillips Brooks, 1835-1893)는 생각보다 우리와 가까운 곳에 있다. 네 가지 이유에서다. 첫째, 기독교인이라면 한 번쯤 들었을 법한 주옥같은 신앙의 금언(金言)들이 그의 입을 통해서 나왔다.
“인격은 중요한 순간에 드러나지만, 인격이 형성되는 때는 평범한 순간이다”(Character may be manifested in the great moments, but it is made in the small ones).
“당신의 힘에 알맞은 일을 달라고 기도하지 마시오. 당신의 일에 맞는 힘을 달라고 기도하십시오. 나는 가벼운 짐을 달라고 기도하지 않겠소. 더 강한 등을 달라고 기도할거요”(Do not pray for tasks equal to your powers. Pray for power equal to your tasks. I do not pray for a lighter load, but for a stronger back).
둘째, 성탄절에 즐겨 부르는 찬송가 120장 <오 베들레헴 작은 골>(O Little Town of Bethlehem)이 그의 작사로 이루어졌고 셋째, “설교란 인격을 통해 전하는 진리”(Truth through Personality)라며 지금은 유명해진 설교에 대한 ‘정의’를 내린 장본인이다. 넷째, 설교자가 자주 인용하는 인물 중 ‘빛의 천사’라 불리는 헬렌 켈러(Helen Adams Keller, 1880-1968)가 소녀였을 때 신앙의 영향력을 준 인물이 바로 필립스 브룩스다.
브룩스는 스펄전(Charles H. Spurgeon, 1834-1892)과 무디(Dwight Lyman Moody, 1837~1899)와 동(同)시대 인물이며, 이들과 함께 설교의 황금기를 지상에 펼쳤다. 이에 따라 전 장신대 설교학 교수이자, 한일장신대 총장 정장복 교수는 스펄전이 ‘설교의 황태자’(Prince of Preachers)로 불린 것을 빗대어, ‘강단의 왕자’(Prince of Pulpit)로 부르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그 이유로, 스펄전의 모국(母國)인 영국 중심의 성공회 감독을 지냈고, 무디의 고향에서 목회한 브룩스는 분명히 두 복음의 용사들을 위압할 만한 왕자적인 힘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필립스 브룩스는 누구인가
필립스 브룩스는 제2차 대각성 운동(the 2nd Great Awakening, 1795-1835)의 열기가 막을 내리던 1835년 12월, ‘청교도의 도시’ 보스턴에서 6형제 중 둘째로 태어났다. 그의 부모는 매우 믿음이 좋았으며, 정결한 신앙생활을 매우 중요시하는 가풍을 세워놓았다. 그러나 이 시기, 보스턴 지역의 교회 상황은 이성과 양심을 강하게 내세우고 있었다. 이는 하버드 대학의 신학사조에 영향을 받은 까닭이었다. 이런 사조에 대한 반작용으로, 경건한 복음주의로 전환하려는 움직임도 여기저기서 나타났다. 브룩스 가정도 그들 가운데 하나였다.
그 무렵, 브룩스의 가정은 성공회를 찾게 된다. 이 기간 동안 그의 어머니는 자녀들에게 철저한 신앙교육을 시켰다. 저녁식사 후에는 반드시 성경을 읽고 기도하도록 보살펴 주었으며, 주일마다 찬송을 한 곡씩 외워 부르도록 가르쳤다. 매일 저녁 드리는 가정예배를 통해 그의 가족은 경건생활을 유지했다.
보스턴 라틴어 학교를 거쳐, 하버드 대학을 졸업한 브룩스는 라틴어 교사로 사회에 첫발을 내딛었다. 그러나 그는 이 직업에 별 흥미를 느끼지 못했다. 진로를 놓고 고심하던 브룩스는, 1855년 버지니아의 성공회신학교에 입학하여 사제로서의 꿈을 키워갔다.
브룩스의 초창기 설교는 별로 각광받지 못했다. 평생 계속된 수줍음과 불안한 모습 때문에 실패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신학교 교수들과 동료 신학생들의 격려로 브룩스의 설교는 나날이 발전하였고, 마침내 그의 명성이 점차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중요한 계기는 브룩스가 3년간의 필라델피아 강림교회(the Church of the Advent)를 거쳐, 1861년부터 6년 간 시무한 삼위일체교회(Trinity Church)에 부임한 이후였다.
당시, 미국은 남북전쟁의 기운이 팽배했다. 이러한 위기의 시대에 강단에 선 그는 국가와 사회문제에 대한 강력한 관심을 표출하며 예언자적 설교를 시행했다. 브룩스는 특히 노예제도에 대해 신랄한 비난을 퍼부었고, 노예해방을 선언한 링컨(Abraham Lincoln, 1809-1865) 대통령을 열렬히 지지했다. 그는 흑인이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로 대접받고 살아야 할 것을 주장했으며, 실제로 게티스버그 전장에 나가 흑인 병사들을 위해 감명 깊은 설교를 했다.
브룩스는 또한, 청중의 삶 깊은 문제까지 파고 들어가 그들의 인격의 변화를 도모시키는 설교를 행했다. 그러자 그의 명성이 삽시간에 보스턴 전체로 퍼졌다. 게다가 거의 매일 심방을 통한 사랑의 접촉으로, 성도들과의 인격적 만남을 시도하는 목회에 수많은 사람들이 감동을 받았다. 그러자 브룩스를 초빙하는 곳이 줄을 이었다. 하지만 그는 보스턴삼위일체교회(Trinity Church in Boston)에서의 22년 목회사역을 감당하는 데만 전념했다.
브룩스는 1877년 예일 대학에서 설교학 강의를 맡아 기념비적인 특강을 남겼다. 그의 설교론은 당시 미국 교계에 상당한 파장을 일으켰고, 브룩스의 설교를 배우고자 여기저기서 강의 요청이 잇따랐다. 그러나 하버드 대학을 비롯한 신학교의 교수직 요청을 모두 사양했다. 미국 성공회는 브룩스를 매사추세츠 주 감독으로 선출하여 봉사를 맡겼고, 그는 이 직책을 섬기다가 병을 얻어 57세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
브룩스의 저서는 대부분 설교집이다. 대표적인 설교집으로 <하나님의 위로>(The Consolations of God: Great Sermons of Phillips Brooks), <영적인 진리>(Spiritual Truths: A Collection of Messages from Phillips Brooks, Received through Inspirational Writing」, <비전과 사역>(Vision and Tasks) 등이 있다. 그 밖에 브룩스 설교의 모든 것을 담아낸「필립스 브룩스 설교론」(Phillips Brooks on Preaching)은 현대 설교자들도 눈여겨보는 책 가운데 하나이다.
저작을 통해 본 필립스 브룩스의 설교론
<필립스 브룩스 설교론>(Phillips Brooks on Preaching, 이 책은 필립스 브룩스가 보스턴삼위일체교회에서 8년째 시무하면서 42세 되던 1877년 예일 대학에서 진행된 ‘라이만 비처의 설교학 강론’(Lyman Beecher Lectures on Preaching)을 엮은 것이다. 라이만 비처는 19세기 전반기 미국 강단의 중요한 인물 중 한 사람이다. 이 강좌는 후옇설교학 강론」(Lectures on Preaching)이라는 제목으로 출판되었다.)은 브룩스 설교의 알파요, 오메가다. 브룩스의 설교 목적은, 하나님과 관계하는 법을 사람들에게 보여줌으로써 그들의 믿음과 신앙을 고양시키려는 것이었다. 브룩스는 이 책에서, 하나님의 말씀의 영원한 진리가 사람에게 어떻게 관계하는지를 나타내려고 애쓰고 있다.
필립스 브룩스 설교를 말함에 있어 결코 간과할 수 없는 것이 있다. 그것은 당시 그 자신만이 가지고 있던 설교에 대한 독특한 개념이다. 그는 설교에서 두 가지 요소를 아주 중요하게 생각했다. 그것은 ‘설교자의 임무는 진리를 자기의 인격을 통해서 다른 사람에게 전달하는 것’이라는 깨달음과 ‘설교한다는 것은 한 사람을 통해서 여러 사람에게 진리를 전달하는 것’이란 개념이다. 이처럼 그의 관심은, ‘진리’와 ‘전하는 사람’ 모두를 중요하게 여기는 균형적인 시각을 갖고 있었다.
브룩스에게 있어 설교는 사람을 끌어 모아 대중적 설교자가 되기 위한 단순한 도구가 아니다. “인격을 통해 진리가 전달되는 것”(Truth through Personality)으로 정의한다. 그는 또 설교를 행함에 있어, 사람들과의 인격적 관계성에 중점을 두었다.
결국 브룩스의 설교론은 사람, 특히 설교자와 청중의 인격을 떠나서는 정체성을 가질 수도, 진리로 전달될 수도 없다는 특징이 있다. 다시 말해, 설교자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자 할 때 그 말씀이 이미 자신의 인격 안에 경험되어야 하며 설교의 내용 역시 청중의 인격을 향하여 선포되어야 하는 것이다. 이러한 브룩스의 “인격을 통한 전달”이라는 설교 도식은, 지금 우리 시대의 설교자들도 귀담아 들어야 할 명언이 아닐 수 없다.
브룩스는 그가 설교하는 이유를 “사람의 영혼을 설득하고 움직여 구원받게 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 역시, 설교가 사람과 관계되는 것임을 다시 한 번 강조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이런 까닭에 브룩스는 교리를 주제로 한 설교를 행하는 것에 대해 스스럼없이 말하고 있다.
‘설교자’에 대한 이해에서, 브룩스는 인격을 통하여 진리를 전달하는 설교자만이 하나님 말씀을 전하는 메신저라고 강조한다.
설교자는 진리를 전달함에 있어 단순하게 입술로만 하는 것이라든지, 단순히 자기의 이해나 자기의 펜(pen)에서만 나와서는 안 됩니다. 그 진리는 참으로 인격을 통해서 나와야 하는데 설교자의 성품, 정서, 지성적이고 도덕적인 전 존재를 통해 나와야만 합니다(<필립스 브룩스 설교론> pp.18-19).
브룩스는 설교자의 특성을 △ 개인적으로 경건해야 한다 △ 비이기적인 성품을 가져라 △ 소망감이 있어야 한다 △ 건강하라 △ 타고난 기질이 있어야 한다 등 다섯 가지로 규정하고 있다. 이렇게 준비된 설교자는 설교를 살찌우기 위해 다방면의 자료들을 받아들여야 하고, 사람들과 대화하고 나누어야 함을 강조한다. 즉, 설교자의 열심에 대해 강조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는 설교자가 당연히 자신의 일을 철저하게 즐길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영혼을 구원하고자 하는 열망에서 생기는 기쁨을 느끼지 못하는 설교자는 죽은 목사라고까지 단호하게 말하고 있다. 이는 브룩스가 한 사람의 설교자로서 영혼 구원을 향한 열망으로 충만해 있음을 알 수 있게 해준다.
브룩스는 “설교자는 그 시대를 위한 사람”이라고 역설한다. 사람들을 흥분하게 하는 여러 사회문제에 철저하게 관여하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설교자는 이를 위해 시대를 뛰어넘는 하나님 말씀을 철저히 연구하고, 시대의 조류를 보여주는 여러 사건들과 징후들을 부단히 관찰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브룩스는 덧붙이기를, 진리와 시대성이 병존해야 온전한 설교자가 된다고 말한다. 양자의 순서는 진리가 먼저고, 그 다음이 시대성이다. 시대성이 먼저 앞서고, 진리가 뒤따라서는 결코 안 된다는 것이다. 저자는 여기서 당시의 시대 상황과 영적 상태에 대한 목회자적인 깊은 통찰과 예리한 비판을 가한다. 브룩스 당시에는 칼 마르크스의 사회주의, 찰스 다윈의 진화론, 자유주의적 성경비평학, 인본주의 사상, 알미니안주의 등 여러 세속주의가 범람하고 있었다.
필립스 브룩스의 설교 특징
1. 삼위 하나님을 설교
필립스 브룩스가 ‘강단의 왕자’가 된 것은 그의 천부적인 웅변술이나 재미있는 예화 사용, 설교 전달의 기교에 있었던 것이 아니다. 그는 삼위 하나님의 다양한 속성들을 성경에서 찾아내, 설교에서 풍성하게 담아내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브룩스는 ‘하나님의 위로’(The Consolation of God)라는 설교에서 욥기 15장 11절 말씀을 본문으로 위로자 되신 하나님을 설교한다. 그는 이 설교에서, 하나님이 위로자가 되시는 사실을 네 가지로 설명한다. 첫째, 하나님은 그 존재만으로도 사람의 위로자가 되시며 둘째, 하나님의 존재를 인식할 때 그 사실이 혼란과 슬픔을 위로하고 셋째, 하나님이 느끼신 긍휼을 통해 위로가 필요한 사람을 위로하시며 넷째, 하나님은 그분이 하신 일과 사람과의 교통 그리고 그분의 교훈으로 말미암아 위로하신다는 것이다.
‘믿음의 위대함’(The Greatness of Faith)이라는 설교에서는, 흉악한 귀신이 들려 고통 받는 딸을 둔 가나안 여인의 강청에 응답하신 긍휼이 풍성하신 그리스도를 설교한다. 위에서 살펴본 ‘위로의 목적과 사용’(The Purpose and Use of Comfort) 설교에서도 브룩스는 결국 죄인 된 인간과 하나님 사이에 중보자 되시는 그리스도에게서 나오는 위로를 사모하라고 촉구하고 있다. 요한복음 6장 5절을 본문으로 작성된 ‘인류’(Humanity)란 설교에서 브룩스는 개개인이나 집단이 사랑과 긍휼의 시선으로 인류를 바라보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구세주 되심을 인정해야 한다고 역설한다.
‘구속의 땅’(The Earth of the Redemption)이란 설교에서 브룩스는 땅 끝까지 이르러 증인이 되라는 복음전파를 명령하신 그리스도의 지상명령 및 해외선교의 당위성과 시급성을 말하고 있다. 그는 이 설교에서 그(그리스도)를 선포하는 것이야말로 하나님이 주신 땅을 만들어 가는 것이며, 그리스도의 주되심을 인정하는 것이라고 강조하고 있다.
고린도전서 2장 11절을 본문으로 삼은 ‘사람의 신비’(The Mystery of Man)라는 제목의 설교에서는 성령의 전지(全知)하심을 잘 드러내고 있다. 성령은 하나님의 깊은 것이라도 통달하셔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성취하신 하늘의 영적 정보를 거짓이나 가감 없이 정확하게 공개하시고 전달하시는 영이라는 것이다.
브룩스 설교는 ‘하나님 중심적’(God-centred) 설교에 심혈을 기울인 칼빈(John Calvin, 1509-1564)과 대별된다. 칼빈은 성경 저자의 의도를 찾기 위해 역사적, 문맥적, 문예적 연구를 통해 그 결과물을 내놓았지만, 브룩스는 단순히 성경 한 구절에 나타난 삼위 하나님의 속성을 본문에 나타난 몇몇 단어에서 유추했다는 데서 그 차이가 있다.
또한 브룩스의 설교의 대부분은 그리스도를 드러내고 있다. 그의 설교에서는 신구약 어느 본문에서도 예외 없이 예수 그리스도가 나타난다. 그리스도에 대해 혹은 그의 메시아 사역에 대해 직접 언급하고 있는 본문은 물론이거니와 예수 그리스도를 직접 언급하고 있지 않은 본문일지라도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 사역을 설명한다. 그러나 지나치게 논리적으로 비약하거나 때로는 억지로 끌어다 맞추는 식의 설교도 간혹 눈에 띈다.
2. 교리를 풍성하게 담은 제목설교
필립스 브룩스가 생존한 19세 중후반은 강해설교가 막 꽃을 피기 시작한 시기다. 특히, 16-17세기를 풍미한 청교도 시대가 막을 내렸고, 복음의 각성 시대가 열리면서 요한 웨슬리(John Wesley, 1703~1791), 조지 휫필드(George Whitefield, 1714-1770)의 제목설교가 청교도 설교를 대신하게 되었다. 그 뒤 19세기 후반 들어 영국과 미국에 여러 강해설교자들이 나왔는데 그 가운데 제임스 손웰(James H. Thornwell, 1812-1862)과 존 브로더스(John A. Broadus, 1827-1895)를 들 수 있다. 브로더스는 ‘강해설교의 왕’으로 불린다.
그러나 브룩스는 시대적 흐름을 좇아 강해설교의 영향을 받지 않고, 독자적인 설교 노선을 구축해 갔다. 이는 설교의 모방에 대해 그가 갖고 있던 편견 때문인 것으로 추측된다. 브룩스는 설교 모방에 있어 적극적인 것과 소극적인 두 가지 위험성을 지적했다. 적극적인 위험성은, 모방하고자 하는 설교자로부터 좋지 않은 것을 얻으면서도 자기 자신에게 있는 장점을 상실할 위험이 있다는 것이요, 소극적인 위험성은, 대부분의 설교 모방이 자기보다 못한 사람을 모방한다는 것이다. 그는 다른 사람의 것을 그대로 모사하는 것은 ‘눈먼 짓’이며, 대신 모방하고자 하는 설교자의 정신을 본받으라고 강조한다.
이렇게 모방을 철저하게 배격한 브룩스도, 정작 교리를 담아낸 제목설교를 하였다는 점에서 대각성 운동을 이끈 설교자들의 영향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그의 설교는 웨슬리와 휫필드처럼 전형적인 제목설교 형태를 띠고 있다.
브룩스는 ‘생명 찾기’(Seeking Life)란 아모스 5장 4절 설교에서 제목설교의 특징을 잘 드러내고 있다. 이 구약말씀은 신약을 예상하고 준비하는 말씀이라고 전제하고, 과거 아브라함에게 주셨고 이스라엘 역사에 지속적으로 전해진 “순종하면 네가 살리라”는 약속이 본문 말씀에서 적용된 첫 신체적 보호의 적용이라는 것이다. 이 말씀은 신약에서 그리스도에 의해 육체적, 정신적, 영적인 영역에서 생명을 구하는 것으로 확대되었다고 말한다.
결국,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만 제한된 생명이 아닌,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다고 설교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 사역이 영적인 것에만 머무르지 않고 전인적인 것임을 교리적으로 잘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제목설교가 미리 정해진 주제에 성경의 여러 가지 근거와 구절들을 가져다가 예증하는 방식을 취한다고 보면, ‘생명 찾기’란 설교는 ‘오직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이라는 제목설교임에 틀림없다.
브룩스는 또한 ‘성탄절’(Christmas Day)라는 제목의 설교에서 요한복음 1장 14절 말씀을 본문으로, 그리스도의 탄생은 말씀이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신 ‘성육신’(Incarnation) 사건임을 시종일관 설명하고 있다. 그는 이 설교에서 예수 그리스도 탄생 정황을 설명하지 않는다. 따라서 동방박사나 동정녀 탄생을 언급하지 않는다. 대신, 성육신의 의미를 논리적으로 충분히 설명한 다음 성탄절에 성육신의 영광이 풍성하게 성도들에게 전해져 기쁨과 사랑으로 그것을 수용할 것을 권면하고 있다.
이와 같이 그의 설교는 하나의 주제(theme)를 중심으로 설교문의 전체 전개가 이루어지고 있다. 주제는 계속 반복되고, 그에 대한 예를 제시하고, 다시 반복되다가 문제의 해결을 제시하여 설득한 후, 구체적인 결단을 유도하면서 종결을 짓는 형태를 띤다. 이렇게 하나의 주제를 가지고 전개했던 그의 설교는 오래도록 사람들의 기억에 남아 있는 장점을 가졌다고 할 수 있다.
3. 사회 변혁적 설교
존 스토트(John Stott)는 “참된 설교는 성경의 세계와 현실 세계 사이에 다리를 놓는 것”이라고 말했다. 스토트의 이 말은, 설교에 상황화가 필요하다는 의미다. 설교의 상황화는 시대의 흐름 앞에 교인들이 무엇 때문에 고민하는지, 그들의 관심사가 무엇인지를 아는 것이다. 그리고 예언자적 관점으로 시대의 죄악을 지적하고 대안을 제시하는 것이다. 그럴 때 진정으로 청중에게 도움이 되는 메시지를 외칠 수 있다. 교인들의 내적 상태를 알면 지혜로운 접근을 할 수 있고, 그럼으로써 설득력 있게 메시지를 전할 수 있다.
필립스 브룩스는 시대를 읽는 눈이 당대의 어떤 설교자보다 탁월했다. 그는 당시 미국사회에서 가장 뜨거운 감자였던 노예제도에 대해 강력하게 비판했다. 노예제도야말로 미국의 가장 큰 죄악임을 지적하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내가 오늘 말씀을 드리는 이 순간, 우리 국민을 다스렸던 대통령의 유해가 여기 오늘 국민의 존경과 애도를 받으며 조용히 누워 있습니다. 이렇게 신성한 자리에서 강단을 맡아 평범한 주제를 정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일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나는 우리의 대통령 故 아브라함 링컨에 대해서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 어느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의 피부 색깔을 보고서 나보다 열등하다고 생각하며, 법을 관여할 수 없으나 하나님이 미워하시는 그러한 편견과 행동이 남과 북에 서로 물들어 있으며 우리 국민들 마음속에 옛 불법의 정신이 살아 있다면, 아직까지도 노예제도의 정신은 사라지지 않은 것입니다(정장복, <인물로 본 설교의 역사 하권>, p.91).
아쉽게도 브룩스가 노예제도 이외에 사회적인 관심을 보여준 설교 기록은 거의 남아 있지 않다. 그러나 그가 가진 사회변혁에 대한 갈망은 미국 최대의 자원봉사센터인 하버드대 필립스 브룩스 하우스(Phillips Brooks House)라는 자원봉사 단체를 통해 지금도 지속되고 있다.
4. 짧은 본문을 선택했다
브룩스가 다루는 설교 본문은 매우 짧다. 일반적으로 브룩스는 한 설교에 성경 본문을 한 절 정도 선택하고 있다. ‘부상당한 발뒤꿈치를 지닌 거인’(The Giant with the Wounded Heel)의 설교는 창세기 3장 15절을, ‘제자와 사도’(Disciples and Apostles)는 누가복음 6장 13절, ‘영혼의 피난처인 하나님’(The Soul’s Refuge in God)은 시편 31편 20절을 선택했다.
그러나 반드시 이런 원칙이 지켜지는 것은 아니다. ‘마음을 다한 하나님 사랑’(The Mind's Love for God)에서는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 마음을 다하고 …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마 22:37)처럼 부분적으로 발췌하여 본문으로 삼았다.
브룩스는 또한, 이처럼 짧은 본문에서 제공되는 단어를 통해 설교제목으로 삼기도 한다. “밝으매 그 제자들을 부르사 그 중에서 열둘을 택하여 사도라 칭하셨으니”(눅 6:13) 말씀에서 ‘제자와 사도’를, 마태복음 6장 23절 “네게 있는 빛이 어두우면 그 어두움이 얼마나 하겠느뇨” 말씀에서 ‘어둠에서 빛으로’(Light from Darkness)라는 제목을 뽑아냈다.
필립스 브룩스 설교의 21세기 적용
필립스 브룩스는 우리보다 한 세기 반 앞선 인물로서 직접 대면할 수 없는 설교자다. 그는 이성과 양심으로 대변되는 그 당시 자유주의 물결에 맞서 경건을 설교하는 설교자였다. 브룩스는 그 누구보다 영혼 구원을 갈망했다. 그는 설교자가 당연히 자신의 일을 철저하게 즐길 수 있어야 하며, 영혼을 구원하고자 하는 열망에서 생기는 기쁨을 느끼지 못하는 설교자는 ‘죽은 목사’라고까지 단호하게 말하고 있다. 그 자신이 한 사람의 설교자로서 영혼 구원을 향한 열망으로 충만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몇 가지 지적하고 싶은 아쉬운 점 또한 없지 않다.
첫째, 브룩스 설교는 전형적인 제목설교로서 성경 본문과 상당히 동떨어져 있다. 앞에서 지적했듯이, 그의 설교는 본문이 말씀하는 것을 전하지 않는다. 본문에 등장하는 특정 단어나 구절을 통해 드러나는 두드러진 특징을 잡아 주제를 선정하고 논리적으로 청중을 설득해간다. 그는 본문을 선택하지만, 그 본문은 단순히 테마를 포함하고 있는 단락이라는 것 외에는 별 의미가 없어 보인다.
이러한 설교 방법은 선택된 주제에 대해서는 분명한 성경적 사상을 전할 수 있는 장점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설교자가 선호하는 이슈들에 치중될 가능성이 많으며, 따라서 청중들에게 영적 양식을 고르게 공급하지 못할 위험성이 있다. 따라서 브룩스 설교의 실제적인 본문은 전체 성경이라고 할 수 있다.
이는 “성경 전체의 문맥에 비추어서 파악된 본문의 실제적이고 본질적인 의미를 분명하게 밝히라”는 시드니 그레이다누스(Sidney Greidanus)나 “성경을 해석할 때 설교의 대지와 소지를 모두 본문에서 이끌어 내야 한다”는 브라이언 채플(Bryan Chapell)의 강해설교 개념과는 사뭇 다르다.
이와 함께 브룩스가 제시한 대지 역시 본문의 의미와 별로 상관성이 없다.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그가 제시하는 대지는 철저하게 적용을 염두에 두고 이루어진다. 결국, 본문과 상관없는 대지는 본문과 상관없는 적용으로 이어지는 오류를 낳고 말았다.
둘째, 예화 사용에 있어 매우 인색하다. 브룩스는 오직 성경을 통해 성경을 설명한다. 설교는 단순히 전파되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청중들을 변화시키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다. 예화가 청중을 변화시키는 데 의미 있는 역할을 할 수 있다면, 예화는 더 이상 설교자에게 선택사항이 아니라 필수적인 것이다. 토마스 롱(Thomas Long)은 “예화가 ‘말씀의 창문’이 될 수 있지만 그러나 그것들이 또한 말씀과 대면하고, 말씀을 분별하고, 발견하고, 경험하는 무대가 될 수도 있다”고 했다. 즉 청중이 말씀을 ‘마음으로’ 해석하고 ‘마음으로’ 받아들이게 하는 것이 예화인데, 브룩스는 이런 예화의 중요성을 간과하고 말았다.
셋째, 지나치게 의도적으로 그리스도 중심적인 설교를 하고 있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다. 브룩스는 본문의 내용과는 상관없이 모든 설교 속에 예수님을 출현시키려고 노력하고 있다. 본문의 내용이나 목적은 전혀 개의치 않고, 예수님의 성육신과 구속 사역을 직접 언급하려고 한다. 이는 성경 전체의 기록이 유기적인 특성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한 것이라고 판단된다.
넷째, 설교 전달에 있어 한계가 명확하고 많은 약점을 노출시키고 있어 우리를 놀라게 한다. 그를 아는 사람들은 천부적으로 화려한 설교의 재질을 타고난 사람은 아니었다고 평가한다. 효과적으로 설교를 전달하기 위해서는 음성, 발음, 어조와 같은 언어적 커뮤니케이션이 필수적이다. 그러나 브룩스는 대부분 원고설교를 했는데 대부분 만연체에다 원고가 무척 길었다. 설교 원고를 읽을 때 발음이 불명확한 대목도 있었고, 가끔 단어를 빼놓고 읽어 혼돈을 주는 경우가 있었다고 한다.
이와 함께 효과적인 설교 전달을 위해 표정, 시선, 몸짓 등과 같은 비언어적 커뮤니케이션의 요소도 매우 중요하다. 브룩스는 19세기 설교자들이 보물처럼 간직하고 있던 기교나 수사에 약했고, 강단을 휩쓸던 웅변술에도 결코 능하지 못했다. 지혜와 총명을 갖췄으면서도 수줍음을 잘 타는 그의 성격적 특성 때문에 커뮤니케이션은 대부분 완벽하지 못했다. 회중과의 시선 교환 역시 부자연스럽고 제스처도 매우 서툰 편이라는 것이 그에 대한 종합적인 평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브룩스가 위대한 설교자의 반열에 올랐다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고서는 도저히 해석할 방법이 없는 독특한 매력을 갖춘 설교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브룩스의 삶과 설교에는 우리 시대의 설교자에게도 적용하고 싶은 경종을 울릴 만한 귀중한 가르침들이 녹아 있다. 그 중 몇 가지를 소개하고자 한다.
첫째, 브룩스는 오직 설교 사역에만 전념한 ‘열정의 설교자’라는 점이다. 그는 평생 독신으로 살면서 건강을 돌보기보다는 설교 사역을 위해 자신을 바치기를 더욱 좋아했다. 자신의 자녀들이 없는 반면, 어린이들을 너무나도 사랑하였다. 브룩스는 가족에게 쏟을 관심과 인애를, 설교와 교인들을 위해 모두 바쳤다.
브룩스는 설교 준비에 온갖 정열을 쏟아냈다. 커뮤니케이션이 원활하지 못했던 브룩스는 그만큼 설교 준비에 온갖 열정을 쏟을 수밖에 없었다. 실제로 그의 설교 준비는 매우 철저하였다고 한다. 주초부터 다음 주의 설교 주제를 생각해 놓았다가 수요일이 되면 모아진 아이디어 가운데 선별 작업을 실시했다. 그 후 다시 재배열시켜 목요일과 금요일에 확장시켜 기술하였다. 어느 때든지, 무엇을 하든지 브룩스는 설교를 위한 노력을 주의 깊게 기울인 말씀의 화신이었다.
둘째, “설교는 인격을 통해 전하는 것”이란 진리를 알게 해 준 설교자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연설에서 수사학적 세 가지 요소를 지적하면서 로고스(Logos), 파토스(Pathos) 그리고 에토스(Ethos)를 들었다. 하나의 사상이 연사를 통하여 전달될 때 세 가지 요소가 모두 중요하지만, 아리스토텔레스는 그 중에 에토스를 가장 중요한 것으로 지적하였다. 아무리 논리 정연한 말씀으로 청중을 감동시킨다 할지라도, 그 메시지를 실어 나르는 연사의 인격이 청중에게 거부된다면 그 메시지는 청중에게 아무런 영향을 줄 수 없다.
셋째, 시대정신에 민감하고 정의를 선포한 예언자다. 브룩스는 강단에 서 있을 때 그의 온 정신은 하나님을 향하여 모아지고 진리를 향하여 빠른 속도로 질주했다. 그러나 강단에서 내려오면 빈부귀천이나 흑백의 차별 없이 누구든지 친구처럼 만났다. 이는 노예제도가 아직 폐기되지 않은 시대에 혁명적인 사건이었다. 그는 이처럼 오직 성경에 비추어 정의를 외친 설교자였다.
21세기는 모든 것이 상대화된 포스트모더니즘 시대다. 이런 시대에 브룩스가 청중에 대한 분석이나 목회자가 시대를 읽는 눈이 있어야 하는 것을 강조하는 대목은, 설교가 ‘인간을 대상으로 한 인간의 과제’라는 생각을 갖게 한다. ‘진리를 어떻게 전할까?’에 대한 목회적 고민과 설교자의 인격에 모든 것이 달려 있다는 말에서 선배 설교자의 몸부림을 보는 듯하다.
넷째, 우리 시대에도 교리설교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일깨워주고 있다. 오늘날 많은 설교자들이 신학을 교회성장에 방해거리가 되는 것으로 생각하며 신학무용론을 주장한다. 또한 중요한 교리를 설교하면 회중들에게 환영받지 못할 것으로 생각하며 교리를 다루는 것을 회피하고, 대신 성공의 원리나 재미있는 체험담 혹은 적극적인 사고방식을 설교하고 있다.
이러한 현대 설교자들과는 달리 마르쿼트(Edward F. Markguart)는 “설교에는 설교자의 성경을 해석하는 신학적 전제와 편견이 반드시 반영되고 있기에 신학이 필요 없다고 생각하는 설교자는 신학무용론이 바로 그의 신학이 된다”고 말했다. 모든 설교자는 자기 나름대로 신학을 가지고 있고, 또 그것이 설교에 반영되기 때문에 중요한 것은 설교자가 어떤 신학을 가지고 있느냐이다. 따라서 설교자는 개혁주의적인 신학을 자기 것으로 완전히 이해하고 소유하고 있어야만 회중의 신앙 여정을 올바로 인도할 수 있다.
오늘날 성도들은 물론, 심지어 설교자들 가운데도 예수님만 열심히 사랑하고 믿으면 그만이지 교리와 신학이 무슨 소용이 있느냐고 반문하는 사람들이 있다. 우리가 예수를 뜨겁게 그리고 열심히 믿는 것도 중요하지만, 올바로 믿는 것 또한 중요하다. 예수님은 가이사랴 빌립보에서 제자들에게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고 물으셨다. 즉, 제자들이 자신을 참되게 믿는지 알기 원하셨던 것이다. 시몬 베드로가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마 16:16)라고 대답했을 때 주님은 참되게 그리고 올바르게 믿는 자가 복이 있다고 말씀하셨다.
현대 설교자들은 교리적인 설교를 하면 청중이 지루해하고 잘 받아들이지 않는 것으로 생각하는데, 그렇지 않을 수도 있음이 브룩스의 설교사역을 통해 증명되었다.
/출처ⓒ† : http://cafe.daum.net/cgsbo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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