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 훈련
믿음이란 무엇인가?
크리스천의 삶은 믿음의 삶이다. 믿음이란 무엇인가? 구약에서 믿음은 하나님을 의지하고, 신뢰하고 하나님께 피하는 의미로 사용되었으며, 신약에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받아들이고 그를 신뢰하고 의지하는 것을 믿음이라고 말한다.
그러면 믿음의 요소는 무엇인가?
1. 믿음은 마음의 문제
믿음은 무엇보다도 마음의 문제이다. 예수를 마음으로 믿고 입으로 시인해야 구원을 얻는다.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롬 10:9; 눅 8:12; 마 15:8, 9 참조). 구원을 받았지만 잘 믿지 못하는 것도 마음의 문제이다(눅 16:14).
그러므로 믿음은 전인격적인 반응과 결단을 요구한다. 믿음이란 성령이 말씀을 통하여 우리의 지성을 조명시키고 우리의 의지를 선택과 결단과 확고부동한 신뢰에 이르게 하는 것이다. 마음에 감동을 주지 못하고 행동이 따르지 못하는 두뇌적인 지식만의 믿음은 쓸모 없는 것이다.
그러면 어떻게 믿는 것이 마음으로 믿는 것인가? 마음을 살펴보기 전에 먼저 몇 가지 용어를 살펴보자.
마음(heart)
사람은 마음(heart)으로 생각하고 추론하고 계획하고 이해하고 인식하고 의도하고 느낀다. 즉 마음은 지, 정, 의가 자리하는 보이지 않는 속사람 즉 보이는 육체와 대조되는 전인격을 말한다.
마음(mind)
사고와 생각을 강조하는 면으로 사용되지만 heart와 같이 보이지 않는 속사람을 말한다.
양심(conscience)
도덕적이고 윤리적인 표준이 되나 이도 마음과 같이 타락하여 오염되어 있다.
육, 육체, 육신(flesh)
몸을 말하기도 하지만 주로 그리스도의 뜻에 어긋나는 생각과 행동을 하는 죄로 물든 전인격, 또는 그러한 삶을 의미한다.
2. 믿음과 지, 정, 의의 관계
가. 지식(지성적인 측면)
먼저 믿음에는 지적인 요소가 있다. 우리는 모르는 것을 믿을 수 없다. 무엇에 대하여 아무 것도 모르면서 나는 그것(그 사람)을 믿는다고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잘 알기 때문에 믿는 것이다. 그러므로 믿기 위해서는 반드시 믿을 만한 충분한 지식이 있어야 한다. “이에 저희 마음을 열어 성경을 깨닫게 하시고”(눅 24:45).
바울이 아테네에 갔을 때 아테네인들은 자기들도 모르는 신을 섬기고 있었다, 이에 바울은 그들이 섬겨야 할 진정한 하나님은 누구시며 무엇을 하신 분인가를 가르쳐 주었다(행 17:23). 구원의 도를 알지 못하는 사람에게 알게 하는 것이 바로 전도이자 선교가 아닌가?
예수를 구세주로 믿기 위해서는, 인간은 누구나 죄인이며 오직 죄를 회개하고 내 대신 십자가에서 피 흘리고 돌아가신 예수를 구세주로 받아들여야만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해주는 것이 바로 복음의 말씀을 전파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구원을 얻는 믿음을 가지기 위해서는 먼저 구원에 관한 지식을 가져야 한다.
우리가 믿기 위해 필수적으로 가져야 하는 지식은 과학적이고 학문적인 지식과는 다르다. 믿음의 한 요소로서의 지식은 어떤 사실을 단순히 믿는 지적인 행위가 아니라 비록 눈으로 보지 못하고 보이지 않지만 확신 있게 받아들이는 것을 말한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히 11:1).
신앙 지식은 하나님의 말씀이 증거하는 것을 믿고 우리는 하나님의 진실성에 의지하여 이것을 확신하고 믿을만한 것으로 받아들인다. 이 믿음에 의해 그리스도인은 말씀 가운데 계시된 것은 어떤 것이든지 참되다고 믿는 것은 하나님 자신의 권위가 그것에서 말씀하기 때문이다.
인간의 학문들을 파악하는 데는 이해력과 기억력으로 충분하지만 복음의 말씀을 이해하고 신뢰하기 위해서는 이 복음의 전 영혼을 소유하는 마음의 깊숙한 곳에 확고하게 자리 잡아야 한다. 신앙적인 지식이란 확신이 따르는 지식을 말한다. 단순한 정보로서의 지식이 아니라 전 실존을 뒤흔드는 지식을 말한다. 신앙 지식은 머리로 이해하는 것보다는 그것을 전인격적으로 확신하는데 있다.
또한 신앙 지식은 “나와 그것”(I-it)과의 관계가 아니라 인격체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나와 그분”(I-Thou)의 관계이다. 지식이라고 하면 금방 두뇌적인 지식을 연상하는 것은 헬라 철학이 기독교에 아직도 깊숙이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헬라 철학은 사고력, 판단력과 같은 순수한 이성을 인간 지식의 최고의 수준에 놓았다. 그래서 성경 내용을 지식적으로 많이 알고 교리적인 지식을 많이 아는 것을 신앙생활 잘하는 것으로 착각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성경은 이러한 지식은 물론 관계적인 지식, 경험적인 지식을 아울러 강조한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이 3가지 종류의 지식 모두를 포함한다. 우리는 성경 말씀이나 이 말씀을 체계화한 교리를 통해 하나님에 대하여 배운다.
이러한 지식은 살아 계신 인격체이신 예수님을 아는 관문에 지나지 않는다. 우리가 유명인사에 대하여 아무리 많이 알아도 직접 그 사람과 교제한 경험이 없다면 그 사람에 대하여 안다고 할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그 사람을 직접 안다고 할 수는 없다.
예수님은 이러한 사람들의 두뇌적이고 피상적인 신앙 지식을 경고하신다. 비록 예수 이름으로 기사와 이적을 행했지만 예수님은 그들을 모른다고 말씀하신다(마 7:23). 신랑 예수를 만나러 간 열 처녀 중 기름을 미리 예비한 다섯 처녀만 잔치에 참석하고 나머지 다섯은 참석하지 못했다. 이들은 예수님께 입장을 간청하지만 그들은 매정하게 거부당한다. “대답하야 가로되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내가 너희를 알지 못하노라 하였느니라”(마 25:12).
인격체인 배우자나 형제를 알기 위해 수학 공식을 외우고 시험 공부를 하는 사람은 없다. 시간을 두고 서로 사귀면서 공통적인 관심사를 이야기하고 교제하는 동안 서로를 잘 알게 된다.
신앙지식도 마찬가지다. 신앙지식이란 내 삶 전체를 통하여 그분이 나의 구세주이실 뿐만 아니라 나의 모든 것을 주관하시고 인도하시고 보호하시는 분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이고 그분이 말씀을 통하여 가르치시는 대로 순종하고 실천해나갈 때 얻어지는 체험적이고 관계적인 지식을 말한다. 그러한 지식을 가진 사람이 구원에 이르는 믿음을 가진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라”(요 17:3).
예수를 믿는 것은 곧 예수를 아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만큼 이 세상에서 고상한 지식은 없다(빌 3:8-9상). 예수 그리스도가 어떤 분이며 나에게 무엇을 해주시는 분이라는 사실을 제대로 알기만 하면, 자기의 전 재산을 팔아서 예수란 감추인 보화를 산 농부나 상인처럼 나의 모든 것을―그것도 강요가 아니라 기쁘고 즐거운 마음으로―다 바쳐서 그분을 섬기지 않을 수 없다(마 13:44, 45).
존 칼뱅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 관해 이렇게 말했다. “하나님을 아는 것과 우리와 무슨 상관이 있는가?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통해 우리는 무엇보다도 먼저 하나님을 경외하고 공경하게 된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우리들의 안내자이자 선생으로 사용하여서 하나님으로부터 모든 좋은 것을 구하고 또한 그것을 하나님의 영광으로 돌려야 한다. 하나님은 아는 지식을 가진 사람은 하나님은 창조주이시고 우리는 그의 피조물이라는 사실을 절감하여서 무엇을 계획하거나 행할 때 모든 것을 하나님께 돌린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들의 삶은 사악하기 그지없다는 자각을 하게 된다. 이것이야말로 순수하고 실질적인 종교이다. 하나님에 대한 진실한 경외심과 합쳐진 믿음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을 섬기고 예배하게 된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가진 사람은 이렇게 생각하고 행동한다.”
나. 감정(감정적인 측면)
하나님의 말씀이 사실이라는 것을 머리로만 아니라 전인격적으로 동의하여 수용하는 것을 말한다. 그러므로 때로는 사람의 감정적인 반응을 요구한다. 전통적인 보수신앙에서는 믿음의 지적인 요소를 지나치게 강조한 나머지 감정적인 반응으로서의 믿음을 소홀히 취급하였다.
이것은 아마 종교개혁 당시 헬라 철학의 부흥을 바탕으로 한 인문주의의 영향을 심하게 받는 것으로 추정된다. 헬라 철학은 이성을 중시하고 감정을 경시하였으며 이러한 경향이 종교개혁기를 거쳐 17세기의 개신교 스콜라주의의 영향으로 지성을 숭상하는 경향은 더욱 심해졌다. 더군다나 역사적으로 수많은 열광주의자들이 기록된 계시인 성경의 권위에 도전하고 지성적인 교리보다는 감정과 체험을 중시하였기 때문에 기성보수교회는 감정에 대해 비판적이고 부정적인 견해를 고수해 왔다.
이러한 전통의 결과 구원에 이르는 믿음을 가지지 위해서는 복음의 말씀에 대해 지적으로 동의하기만 하면 된다는 주장을 서슴지 않고 하는 보수주의 학자들도 생겨났다. 이들은 구원에 이르는 믿음과 회개는 죄에 대한 슬픔이나 미운 감정은 필요 없고 단순히 마음 (생각) 만 변화시키면 되는 것이며 믿음 또한 지적인 동의가 주요 요소라고 주장한다. 이처럼 보수주의자들은 감정에 대해 지나친 편견을 가지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그 결과 믿음은 성경 내용의 가르침에 대해 지식적으로 동의하여 행동으로 나타내는 것이라고 강조하여 감정적인 요소를 무시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실례를 들어보자. 어느 유력한 성경공부 책에 기록된 말이다.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그들이 구원 받는 것을 감정으로 측정하는 잘못을 범하고 있습니다. 이런 비극적인 잘못을 저지르지 마십시오. 하나님을 믿으십시오.”
이 말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면 말씀에 의지하지 않고 자기 기분에 의해 믿는 것을 비판하는 말이 되겠지만 인간의 고유한 감정과 일시적인 기분을 구분하지 않고 통틀어 감정이라고 표현하여서 순진한 신자들로 하여금 무엇인가를 느끼는 것은 무조건 잘못된 것이라는 인상을 주기가 쉽다.
이들이 감정을 경시하는 주된 이유는 감정은 믿을 수가 없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개혁보수주의가 주장하는 완전타락의 교리에 어긋난다. 사람은 죄로 인해 지, 정, 의가 골고루 타락하였다. 타락한 인간의 감정은 물론 지성이나 의지 모두가 골고루 타락되었다는 말이다.
비록 우리들이 무오한 성경을 바탕으로 하여 지적인 작업을 통해 교리를 확립하지만 수많은 교단이 난무하는 것 자체가 바로 인간의 지성 또한 정확한 잣대가 될 수 없다는 사실을 웅변적으로 증거하는 것이 아닌가?
더군다나 같은 교단내의 사람들에게도 어떤 특정한 구절을 해석하라고 해 보라. 모두가 조금씩 다른 견해를 제시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들은 지성은 타락되지 않았다고 확신할 수 있는가?
하나님의 복음의 말씀을 듣고 감정적인 반응이 없는 것은 믿음이라기보다는 지식적인 동의에 불과하다. 마틴 로이드 존스 목사는 이러한 태도를 신랄하게 비판한다. 사람들은 “이 말씀을 믿으시오”라고만 하면 그 말씀을 실제로 체험하고 확신하는 것은 당연히 따라 오는 것으로 잘못 생각한다. 그러나 아무 것도 느끼지 못하는 것은 지적인 동의에 불과한 것이지 믿음이 아니다.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감정을 두려워하여 성령을 소멸하는 잘못을 저지르고 있다고 한다. 그 결과 지성적인 교리는 바르지만 신앙생활은 활기나 생동력이 결여되어 바른 체험이나 바른 행동이 따르지 못하는 메마른 정통, 죽은 정통을 양산하고 있다고 로이드 존스 목사는 경고한다.
예수님은 교리적인 잘못을 저지른 교회는 물론 열심과 뜨거움을 상실한 교회를 많이 책망하셨다. 첫 사랑의 뜨거움과 헌신을 버리고(에베소교회), 교리는 바르나 바른 행동이 따르지 못하며(사데교회), 차지도 않고 덥지도 않은 미지근한 신앙을 가진 교회(라오디게아 교회)가 바로 오늘날의 정통교회가 아닌가? 그 이유는 무엇인가? 지성을 숭상하고 감정을 무시했기 때문이 아닌가? 감정에 대해서는 성령충만과 종교적인 감정에서 보다 자세히 살필 예정이다.
다. 신뢰(의지적인 측면)
말씀의 내용을 알고 그 말씀을 감정적으로 반응하여 수용하여서 내 삶 속에서 실천해야 한다. 예수님이 나의 구세주라는 신앙고백, 예수님의 나의 죄를 용서하여 주셨다는 크신 은혜에 대한 감사와 기쁨이 내 삶 속에서 하나하나 구체화되어야 한다.
예수님은 나의 구세주라는 사실을 알고, 감사하는 마음으로 받아 들여서 그분만을 의지하고 신뢰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이 셋이 합쳐져야 성경이 말하는 온전한 믿음을 가졌다고 할 수 있다.
성경에 대한 바른 지식이 없는 감정적인 반응과 신뢰는 맹신에 불과하다. 이방 종교에도 감정적인 반응과 의지적인 행동이 따르지만 성경이 말하는 믿음을 가졌다고는 할 수 없다. 그들이 섬기는 믿음의 대상이 성경이 말하는 우리들의 구세주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바른 교리는 우리들의 신앙의 지표이기 때문에 상당히 중요하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 머리로 아는 것을 나의 전 실존 (지성, 감정, 의지) 를 통해 받아들이고 실제로 체험해야 한다. 또한 머리로 알고 실제로 체험한 것을 실생활에서 적용해야 한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구세주이자 나의 모든 것이라고 고백하고 받아들이면서도 실생활에서는 그렇지 못할 때가 너무나 많다.
물론 지식적으로 알고 감정적으로 체험했지만 말과 같이 실생활에서 제대로 실천하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다. 그것은 평생을 통해 해야 할 일이다. 그러나 어렵다고 하여 편법으로 쉬운 길만을 택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참 제자라고 할 수 없다. 예수를 구세주로 고백하기만 하면 구원을 받는다는 고백주의신앙은 “값싼 은혜”를 전파하여 행동이 따르지 않는 신앙인을 양산하였다.
야고보는 이러한 위험을 경고한다. 행위가 따르지 않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다(약 2:26). 신앙은 삶 속에서 증거되는 것이지 입술로 논하는 것이 아니다. 전도도 마찬가지다. 말로 하는 전도도 중요하지만 행함으로 삶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보다 확실한 전도이다. 우리가 비록 믿음으로 구원을 받지만 그 믿음의 진정한 믿음이라면 반드시 선한 행위가 뒤따르기 때문이다.
믿음에도 종류가 있는가? 분명히 있다, 약한 믿음이 있고 강한 믿음이 있으며 구원에 이르는 믿음도 있고 구원에 이르지 못하는 믿음도 있다.
성경이 말하는 “믿음, 믿는다”가 무엇인지 자세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 비록 같은 단어를 사용하지만 문맥에 따라 여러 가지 다양한 뜻으로 사용되기 때문이다.
헬라어 피스튜오(동사), 피스토스(형용사). 피스티스(동사)인 믿음, 믿는, 믿는다는 말의 문자적인 의미는 “. . .에 대해 확신을 가지다” “. . .을 신뢰하다”는 뜻이다.
1. 믿음의 종류
가. 지식적인 동의로서의 믿음
어떤 사실이 진실임을 믿지만 그것에 대한 신뢰나 의지를 불러일으키지 않는 경우를 말한다. 귀신은 하나님이 한 분이라는 사실 그 자체는 “믿지만” 그렇다고 하나님을 구세주로 믿고 신뢰하고 의지하지는 않는다. “네가 하나님은 한 분이신 줄을 믿느냐 잘하는도다 귀신들도 믿고 떠느니라 아아 허탄한 사람아 행함이 없는 믿음이 헛 것인줄 알고자 하느냐(약 2:19-20).
이것은 하나님이 한 분이신 줄 알고 누구라는 사실을 입술로 고백은 했지만 그에 합당한 믿음의 행위 즉 의지하고 신뢰하는 행위가 따르지 않는 명목상의 신앙인들을 책망하는 말이다.
성경 내용 많이 알고 신앙생활 오래 한 경우 이런 지식적인 동의로서의 믿음은 많이 가졌더라도 실 생활에 적용되는 산 믿음은 약할 수 있다.
믿음은 두뇌의 문제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전인격적인 마음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존경하되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마 15:8).
나. 구원 얻는 믿음(saving faith)
이 믿음은 예수 그리스도가 어떤 분이신가를 알뿐만 아니라 그분을 나의 개인적인 구세주로 받아들이고 신뢰하는 믿음을 말한다. 사람은 누구나 이런 믿음을 가져야 구원을 받는다.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요 20:31).
“우리는 뒤로 물러가 침륜에 빠질 자가 아니요 오직 영혼을 구원함에 이르는 믿음을 가진 자니라”(히 10:39).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함이니라”(엡 2:8-9).
“믿음의 결국 곧 영혼의 구원을 받음이라”(벧전 1:9).
-우리에게 향한 신적 자비의 견고하고 확실한 지식이니 그 지식은 그리스도 안에 값없이 주는 약속의 진리에 기초한 것으로 성령에 의하여 우리의 마음에 계시되며 확인되는 것이다. -칼빈.
-그리스도인의 신앙은 성경에 기록된 사실들과 교리들의 진실성을 하나님의 증언에 의해 확신하는 것이다. -찰스 핫지.
-구원에 이르는 믿음은 성령이 마음에 역사하신 결과 복음의 진리에 대해 가지는 견고한 확신과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약속을 성심적으로 의뢰하는 것이다. -루이스 뻘콥.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은 곧 구원 얻는 은혜인데 이로 말미암아 복음 중에 -우리에게 주신대로 구원을 얻기 위하여 우리가 예수를 영접하고 그에게만 의지하는 것이다. –소요리 문답 제86.
이와 같이 구원에 이르는 믿음이란 말씀에 의지하여 그리스도를 나의 개인적인 구세주로 받아들이는 믿음을 말한다.
그러나 이 믿음은 정적인 것이 아니고 동적인 것이며 한 순간 가졌다고 끝나는 것이 아니라 끝까지 지켜야 한다. 중간에 믿음을 저버리면 파선한 믿음이 되어 구원을 잃어버릴 수도 있다. “믿음과 착한 양심을 가지라 어떤 이들이 이 양심을 버렸고 그 믿음에 관하여는 파선하였느니라 그 가운데 후메내오와 알렉산더가 있으니 내가 사단에게 내어준 것은 저희로 징계를 받아 훼방하지 말게 하려 함이니라”(딤전 1:19-20). “그러나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마 24:13).
다. 신자가 가지는 일반적인 믿음
구원 받은 신자들이 하나님을 섬기는 삶을 살기 위해 필요한 일반적인 믿음을 말한다. 구원 얻는 믿음을 가진 사람 중에서도 신앙의 성숙 여부에 따라 강한 믿음과 연약한 믿음이 있다(롬 14장).
연약한 믿음을 가진 자는 의심이 많고 강한 믿음을 가진 자는 그렇지 못한 사람을 업신여기기 쉬우므로 늘 자신을 낮추고 겸손해야 한다. 이 믿음은 정지하는 것이 아니라 계속 자라가야 하고 성숙되어야 한다. “너희 믿음이 더욱 자라고”(살후 1:3).
라. 열매로서의 믿음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갈 5:22-23).
한글 성경에는 충성으로 번역되었지만 원어는 피스티스이다. 대부분의 경우 이 단어는 믿음으로 번역되었지만 때로는 하나님에 대한 신실한 태도를 말한다. 그러나 여기에서는 문맥으로 보아 이웃에 대한 신실성을 말한다고도 할 수 있다.
마. 은사로서의 믿음
“다른 이에게는 같은 성령으로 믿음을”(고전 12:9). 은사로서의 믿음은 신자라고 해서 모두 다 가지는 것이 아니라 특정한 상황이나 필요에 처했을 때 초자연적인 담대한 확신으로 상황이나 필요를 보지 않고 주님이 확실하게 주장하고 계신다는 사실을 믿고 신뢰하는 것을 말한다.
예를 들어 어떤 어려운 환경을 믿음으로 이겨낸다든가 사람이 감당하기 힘든 질병이나 문제를 기도를 통해 해결하는 것과 같은 믿음을 말한다.
믿음장인 히브리서 12장에 기록된 신앙의 선배들이나 기도로 수천명의 고아을 양육한 조지 뮐러 같은 사람은 특별한 믿음의 은사를 가진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다.
1. 강한 믿음과 약한 믿음 구원을 얻는 믿음을 가진 사람들 중에서도 믿음이 강한 사람이 있고 약한 사람이 있다(롬 14-1장 참조). 신앙생활을 오래하여 말씀으로 연단을 받아서 단단한 식물을 먹을 수 있는 성숙한 신앙인은 믿음이 강한 사람이다. 그러나 갓 태어나서 아직 젖이나 채소만을 먹는 어린신앙인을 믿음이 연약한 자이다. 믿음이 연약한 자는 말씀과 기도와 삶 속에서의 연단을 통해 믿음을 강하게 키워나가야 한다. 믿음은 정지하는 것이 아니라 자라는 것이다. “너희 믿음이 자라고”(살후 1:3중).
교회에는 항상 이 두 부류의 사람들이 있으며 서로가 신앙의 성숙도가 다르기 때문에 사물을 보고 판단하는 안목도 달라서 말썽을 일으키는 경우가 많다. 그러므로 믿음이 강한 자는 믿음이 연약한 자를 업신여기지 말고 믿음이 연약한 자는 믿음이 강한 자를 판단하지 말아야 한다(롬 14:3). 서로가 사랑으로 허물을 덮어 주고 서로를 이해하여 관용을 베풀어야 한다(롬 14:19). 서로 사랑으로 행하여서 형제에게 거칠 것이나 부딪칠 것을 두지 않는 배려가 필요하다. 보수주의자들은 은사주의자들을 비판하고 정죄하기 이전에 형제로서 사랑의 동기로 가르치고 권면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은사주의자들은 보수주의자들의 체험과 생동감 부족을 업신여기기 전에 먼저 자신의 잘못을 살피는 겸손한 자세가 필요하다. 우리의 적은 혈과 육을 가진 형제가 아니라 마귀와 그의 사자들이 아닌가?
2. 믿음과 행위와의 관계 우리가 구원을 받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통해서이다. 행위로 구원 받을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러면 과연 믿음은 행위를 배제하는가? 아니다. 그리스도와 그의 의를 받아들이고 의존함에 있어서 믿음은 칭의의 유일한 방편이다. 그렇지만 믿음은 의롭다 함을 받은 사람 안에서 단독으로 있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모든 다른 구원의 은사를 수반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죽은 믿음이 아니라 사랑으로 역사하는 믿음이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는 할례나 무할례가 효력이 없되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 뿐이니라”(갈 5:6).
바꾸어 말하면 구원은 믿음으로 받지만 그 믿음이 진짜라면 반드시 그에 합당한 행위의 열매를 맺어야 한다는 말이다. 행위가 따르지 않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다(약 2:20-26). “20 아아 허탄한 사람아 행함이 없는 믿음이 헛 것인줄 알고자 하느냐 21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그 아들 이삭을 제단에 드릴 때에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 22 네가 보거니와 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일하고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케 되었느니라 23 이에 경에 이른바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니 이것을 의로 여기셨다는 말씀이 응하였고 그는 하나님의 벗이라 칭함을 받았나니 24 이로 보건대 사람이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고 믿음으로만 아니니라 25 또 이와 같이 기생 라합이 사자를 접대하여 다른 길로 나가게 할 때에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 26 영혼 없는 몸이 죽은것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약 2:20-26).
문자 그대로 아브라함이 행함으로 의롭다 함을 받았는가? 아니다. 아브라함을 자신의 믿음이 진짜라는 것을 행위를 통해 증명해 보인 것이다. 믿는다고 하면서 그에 합당한 행위의 열매가 없다면 (눈에 보이지 않는) 그 믿음을 어떻게 증명할 수 있단 말인가? 과실나무가 때가 되면 과실을 내듯 믿음이 진짜라면 반드시 그에 합당한 행위의 열매를 맺어야 하는 것이다. 믿음의 결과 반드시 그에 상응하는 행위가 따르듯 회개도 진정한 회개하면 반드시 그에 합당한 열매를 맺어야 한다. 어떤 교리를 입술로 시인하고 말로만 회개하고 머리로 믿는다고 해서 하나님 나라에 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본 훼퍼는 입술로 시인하기만 하면 구원 받는다는 ‘값싼 은혜’(cheap grace)를 배격한다. 반드시 그에 합당한 열매를 맺는 사람만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 회개와 믿음이 진짜라면 반드시 그에 합당한 열매를 맺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고. . .이미 도끼가 나무 뿌리에 놓였으니 좋은 열매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어 불에 던지우리라”(마 3:8).
3. 믿음의 열매 그러면 어떤 열매를 맺어야 하는가? 성경에서 가르치는 모든 열매를 맺어야 한다. 그러나 성경에서 구체적으로 열매와 직 간접으로 관련된 내용들을 간단히 살펴보자.
말씀에 순종하는 열매를 맺어야 한다. 마태복음 7장에 보면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사와 이적을 행하지만 말씀에 순종하는 삶을 살지 않고 불법을 저질렀다. 그러므로 말씀에 순종하는 삶을 사는 사람이 아름다운 열매를 맺어 천국에 간다. 순종은 “하지 말라는 것 하지 않는 것”은 물론 “하라는 것 하는 것”도 순종이다.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 모두 하나님의 명령의 말씀이다. 내가 저지른 죄를 회개할 뿐만 아니라 나에게 상처 준 사람을 용서해 줄 수 있어야 한다. 이것이 바로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다. 이런 것이 없이 예수 이름으로 능력만 나타낸다고 해서 천국 가는 것은 아니다. 말씀에 순종하는 열매를 맺는 사람이 천국에 간다.
인격과 행실의 열매를 맺어야 한다 마태복음 22장에 보면 천국의 혼인 잔치가 비유가 나온다. 많은 사람들이 혼인잔치에 참석했는데 예복을 입지 않고 참석한 사람들이 있었다. 하나님은 예복을 입지 않은 사람의 수족을 결박하여 바깥 어두운 데로 던져 버리셨다. 예복은 성도들의 옳은 행실이다(계 19:7). 즉 삶 속에서 회개와 믿음에 합당한 옳은 행실을 보이지 못하는 사람은 예복을 입지 않은 사람이다. 삶 속에서 신앙인격의 열매를 맺지 못한 사람들이다. 이런 사람들은 바깥 어두운 곳 즉 지옥으로 던져진다.
주어진 재능을 최대한 활용해야 한다 마태복음 25장에 보면, 주인이 종들에게 그 재능대로 금 5, 2, 1 달란트를 맡겼다. 주인이 나중에 와서 회계를 할 때, 5 달란트 받는 자는 5 달란트를, 2 달란트를 받은 자는 2 달란트를 남겨서,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예할지어다”라는 칭찬을 받았다. 그러나 1 달란트 받는 자는 남긴 것이 없다. 게으름을 부린 것이다. 그래서 주인은 이 종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이 무익한 종을 바깥 어두운 데를 내어 좇으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 무익한 종이 믿음이 있었다면 과연 그런 게으름을 피웠을까? 진정한 믿음의 없었기 때문에 게으름을 피운 것이다.
전도의 열매를 맺어야 한다 누가복음에는 한 사람 당 한 므나씩 나누어 주셨다. 이것은 전도의 사명을 말한다. 어떤 사람은 1 므나를 사용하여 10 므나를 남겼고 어떤 사람은 5 므나를 남겨서 “착한 종”이라고 칭찬을 받았다. 그러나 1 므나도 남기지 못한 종에게, 예수님은 “악한 종”이라고 책망하신 후 벌을 내리셨다. 나를 죄악에서 구원해 주신 예수님의 은혜에 감격하는 사람이라면 어떻게 죽어 가는 영혼을 그냥 내버려둘 수 있단 말인가? 칭찬 받고 천국에 간 사람은 그들의 행위로 천국에 간 것이 아니다. 그들의 믿음이 진정한 믿음이라면 반드시 이러한 행위의 열매가 나타나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행위의 열매를 맺지 못한 자들은 참 믿음이 없었기 때문이다. 나의 모든 죄를 짊어지고 십자가에서 피 흘리고 돌아가신 예수님, 부활 승천하셔서 나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신 예수님을 내 마음속에 받아들인 사람이라면 반드시, (1) 말씀에 순종하는 열매, (2) 옳은 행실의 열매, (3) 내가 가진 모든 것을 다 바쳐 하나님을 섬기고 (4) 예수를 모르고 죽어 가는 영혼에게 구원의 복음을 전하는 행위의 열매를 맺게 되어 있다는 말씀이다. | |
1. 정의
믿음의 은사는 어떤 주어진 상황에서 하나님이 일반적으로 어떤 일을 하실 것이며 또한 실제로 성취하실 때까지 신뢰하는 것을 말한다. 이 은사는, 비록 어떤 상황에서 하나님이 하실 수 있고 또 하실 것이라는 비전에 대한 단순한 믿음이기도 하지만, 대부분의 경우 하나님께 대한 기도 (즉 믿음의 기도)를 통해 드러난다.
그러나 믿음의 은사와 신앙 성숙으로 인한 믿음 사이에 어떤 분명한 선을 긋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신앙 성숙에 따라 믿음은 자라가는 것이기 때문에 신앙이 성숙한 자는 그렇지 못한 자도 보다 믿음의 은사 더 강하게 역사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신자라면 누구나 어는 정도 믿음의 은사가 있으므로 계속 개발해 가는 것이 중요하다.
아들을 주신다는 약속을 25년간이나 지켜 마침내 아들 이삭을 얻은 아브라함의 믿음은 그의 믿음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후대의 신앙인들에 대한 좋은 본이 되었다. “또한 할례자의 조상이 되었나니 곧 할례 받을 자에게 뿐아니라 우리 조상 아브라함의 무할례시에 가졌던 믿음의 자취를 좇는 자들에게도니라”(롬 4:12).
“그러므로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는 믿음이 있는 아브라함과 함께 복을 받느니라”(갈 3:9).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순종하여 장래 기업으로 받을 땅에 나갈쌔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갔으며”(히 11:8).
2. 성경의 예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끝까지 붙드는 믿음
-120년 동안 사람들의 무관심과 조소에도 불구하고 홍수에 대비하여 방주를 지은 노아(히 11:7).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25년 만에 아들을 낳은 아브라함.
초자연적인 보호에 대한 믿음
-사자굴 속에서 살아남은 다니엘(단 6:16-17, 19-23).
-까마귀를 통해 음식을 공급 받은 엘리야(왕상 17:2-6).
-엘리사의 말을 듣고 기름 담을 그릇을 많이 준비한 선지자 생도의 아내(왕하 4:3, 4).
핍박과 고통을 이겨내는 믿음(히 11:36-40)
믿음이 있다고 해서 모든 문제가 다 해결 받는 것이 아니라 어려움과 고통을 이겨내는 믿음이 있다. 이런 믿음의 연단을 통해 우리의 믿음은 순수해진다.
“너희 믿음의 시련이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하려 함이라”(벧전 1:7).
“나의 가는 길을 오직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정금 같이 나오리라”(욥 23:10).
병 낫고 귀신을 쫓아내는 믿음
-병이 나은 중풍환자(마 9:2).
-혈루병이 나은 여인(마 9:20-22)
-흉악한 귀신 들린 딸을 고친 여인(마 15:22-28)
-하인의 중풍병을 낫게 한 백부장(마 8:5-10)
3. “건강축복복음,” “번영복음”을 전하는 믿음 운동
미국에서 믿음 운동이 한창 일 때 일부에서는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이름을 대고 청구하라, 그러면 받는다”(You name it, You claim it)라는 구호가 나돌았다.
성경에 보면 하나님이 믿음만 있으면 병도 고치시고 가난한 자도 부자로 만드셨기 때문에 믿음으로 청구만 하면 모든 복을 받을 수 있다고 주장했다. 이런 주장이 당시 인기를 끈 적극적인 사고방식과 교묘하게 결합되어 유행을 타기 시작했고 한국에도 건너와서 기복신앙이라는 지탄을 받고있다.
물론 이런 주장의 긍정적인 측면도 있다. 사실 너무나 많은 신자들이 하나님의 자녀에게 약속하신 축복을 청구하지 않아서 받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다. 병이 나거나 가난해도 이것은 나의 팔자 문제이지 하나님이 해결해 주신다고 생각해 본 적은 없다.
그런데 믿음 운동 주창자들은 성경에 기록된 대로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는 단순한 믿음을 가지고 많은 사람들의 병이 낫고 가난에서 벗어나서 긍정적인 삶을 살게 되었다. 그러나 이것이 지나쳐서 병 낫지 않고 부유하지 않은 사람은 믿음이 없는 사람으로 간주되는 역효과를 초래하고 말았다.
이것은 신앙 성숙의 문제라고 생각한다. 어린 아이가 아프고 배고파서 울면 부모는 당연히 먹을 것을 주고 아픈 곳을 고쳐준다. 그러나 그 아이가 그 수준에 머물고 더 이상 성장하지 않으면 문제라도 보통 문제가 아니다.
믿음 운동도 마찬가지다. 많은 경우 신자들은 믿음으로 구하는 것이 무엇인지 몰라서 이미 주어진 것도 찾아먹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제 그들도 성숙하기를 원하신다. 하나님도 이제 그런 자녀들이 “아빠, 돈” “아빠, 건강” 한다고 해서 무작정 주시지 않기 때문이다. 병 낫고 문제 해결 받는 믿음에서 변화 받는 믿음,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믿음으로 자라가야 한다. 또한 비록 환경이 속이고 일이 형통하지 않더라도 하나님을 의지하고 끝까지 지켜나가는 믿음의 성숙도 중요하다. 하나님은 오늘날 이런 믿음을 더 원하실 것이다.
크리스천의 삶은 믿음 생활, 신앙 생활이라고 불릴 만큼 믿음이야 말로 신앙 생활의 핵심이다. 믿음의 다른 측면인 회개는 죄로부터 멀어지는 것을 강조하고 믿음은 하나님쪽으로 가까이 가는 것을 말한다. 그러므로 믿음 생활은 곧 회개 생활이면 회개를 잘 하는 사람이 믿음 생활을 잘하느 사람이고 믿음에 바로 선 사람은 또한 회개를 잘 한다. 그러면 어떻게 믿음을 키울 것인가? 먼저 믿음은 하나님의 선물이자 나의 노력에 좌우된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이 중요하다.
1. 믿음은 하나님의 선물이자 사람의 노력 믿음은 하나님의 선물 “그 이름을 믿으므로 그 이름이 너희 보고 아는 이 사람을 성하게 하였나니 예수로 말미암아 난 믿음이 너희 모든 사람 앞에서 이같이 완전히 낫게 하였느니라”(행 3:16). “이르러 교회를 모아 하나님이 함께 행하신 모든 일과 이방인들에게 믿음의 문을 여신 것을 고하고”(행 14:27).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엡 2:8). (*이것은 구원도 되지만 믿음도 된다) “다른 이에게는 같은 성령으로 믿음을”(고전 12:9).
믿음은 사람의 노력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롬 1:17). “예수께서 저에게 이르시되 보아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하시매”(눅 18:42). “예수께서 저희 믿음을 보시고 이르시되 이 사람아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시니”(눅 5:20). 하나님의 주권적인 은혜로 인한 선물인 믿음과 사람의 노력으로 인한 믿음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하나님의 주권과 사람의 자유의지가 신비로운 관계인 것처럼 믿음 또한 하나님의 선물이자 사람의 노력에 달려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100%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의 뜻 안에서 100% 우리의 노력을 게을리하지 말아야 한다.
2. 믿음을 키우는 방법. 어떻게 믿음을 키울 것인가? 믿음은 하나님의 선물이자 사람의 노력에 좌우되는 것이므로 우리는 하나님이 허락하신 은혜의 방편--말씀, 기도, 봉사, 전도 등--을 최대한 사용하여 믿음을 키워갈 수 있다.
말씀을 많이 듣고 읽어야 한다.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롬 10:17).
기도 생활을 잘 해야 한다. 듣고 읽은 말씀을 제대로 실천하기 위해서는 그에 상응하는 기도가 뒤따라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로 거룩하여짐이니라”(딤전 4:5).
기도 없는 말씀은 지식적 동의에 불과하며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능력은 없는 신앙은 양산하며 말씀 없는 기도는 신비적 경향을 낳기 쉽다. 기도를 통해 믿음을 더해 달라고 간구할 때 믿음이 더해진다.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있어 기도하라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 하시고”(마 26:41). “곧 그 아이의 아비가 소리를 질러 가로되 내가 믿나이다 나의 믿음 없는 것을 도와 주소서하더라”(막 9:24). “사도들이 주께 여짜오되 우리에게 믿음을 더하소서 하니”(눅 17:5). “그러나 내가 너를 위하여 네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하였노니 너는 돌이킨 후에 네 형제를 굳게 하라”(눅 22:32).
말씀에 순종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믿음은 곧 순종을 동반한다. 순종 없는 믿음은 지식적인 동의이자 죽은 믿음에 불과하다. “아들을 믿는 자는 영생이 있고 아들을 순종치 아니하는 자는 영생을 보지 못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진노가 그 위에 머물러 있느니라”(요 3:36).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은혜와 사도의 직분을 받아 그 이름을 위하여 모든 이방인 중에서 믿어 순종케 하나니”(롬 1:5). “그러나 저희가 다 복음을 순종치 아니하였도다 이사야가 가로되 주여 우리의 전하는 바를 누가 믿었나이까 하였으니”(롬 10:16). “이제는 나타내신바 되었으며 영원하신 하나님의 명을 좇아 선지자들의 글로 말미암아 모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순종하여 장래 기업으로 받을 땅에 나갈쌔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갔으며”(히 11:8). “믿음으로 기생 라합은 정탐군을 평안히 영접하였으므로 순종치 아니한 자와 함께 멸망치 아니하였도다”(히 11:31).
그러므로 신자라고 하면서 말씀에 순종하는 삶을 살지 못하는 사람은 진정한 신자라고 할 수 없다. 교회 출석, 헌금, 예배 참석은 하지만 많은 신자들의 믿음이 성숙하지 못하는 이유는 순종하는 삶을 살지 않기 때문이다. 말씀을 실제의 삶에 적용할 때 믿음이 성장한다. “대저 젖을 먹는 자마다 어린 아이니 의의 말씀을 경험하지 못한 자요 단단한 식물은 장성한 자의 것이니 저희는 지각을 사용하므로 연단을 받아 선악을 분변하는 자들이니라(히 5:13-14).
믿음의 교제를 잘 해야 한다. 믿음은 혼자 도를 닦는다고 자라는 것이 아니라 삶 속에서 성도들과 믿음의 교제를 통해 성장한다. “오직 오늘이라 일컫는 동안에 매일 피차 권면하여 너희 중에 누구든지 죄의 유혹으로 강퍅케 됨을 면하라”(히 3:13). “몸이 하나이요 성령이 하나이니 이와 같이 너희가 부르심의 한 소망 안에서 부르심을 입었느니라”(엡 4:4). “철이 철을 날카롭게 하는 것 같이 사람이 그 친구의 얼굴을 빛나게 하느니라”(잠 27;17).
말씀에 제대로 순종하기 위해서는 회개 생활을 잘해야 한다. 아무리 믿음 생활을 잘하려고 해도 죄를 회개하지 않으면 죄와 마귀의 종이 되어 믿음 생활이 어렵게 된다. “너희 자신을 종으로 드려 누구에게 순종하든지 그 순종함을 받는 자의 종이 되는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혹은 죄의 종으로 사망에 이르고 혹은 순종의 종으로 의에 이르느니라”(롬 6:16). “저희 중에 남의 집에 가만히 들어가 어리석은 여자를 유인하는 자들이 있으니 그 여자는 죄를 중히 지고 여러 가지 욕심에 끌린 바 되어”(딤후 3:6).
마음의 상처를 치유해야 한다 용서 못함, 증오심과 같은 상처의 쓴 뿌리를 치유해야 한다. 이런 것들을 치유하지 않으면 믿음의 성장에 걸림돌이 된다.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며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고 마귀로 틈을 타지 못하게 하라”(엡 4:26-27). “너희가 무슨 일이든지 뉘게 용서하면 나도 그리하고 내가 만일 용서한 일이 있으면 용서한 그것은 너희를 위하여 그리스도 앞에서 한 것이니 이는 우리로 사단에게 속지 않게 하려 함이라 우리가 그 궤계를 알지 못하는 바가 아니로라”(고후 2:10-11) “너희는 돌아보아 하나님 은혜에 이르지 못하는 자가 있는가 두려워하고 또 쓴 뿌리가 나서 괴롭게 하고 많은 사람이 이로 말미암아 더러움을 입을까 두려워하고”(히 12:15).
육신적이고 세상적인 욕심을 버려야 한다.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치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롬 8:6-7).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 좇아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 좇아 온 것이라”(요일 2:16). “간음하는 여자들이여 세상과 벗된 것이 하나님의 원수임을 알지 못하느뇨 그런즉 누구든지 세상과 벗이 되고자 하는 자는 스스로 하나님과 원수 되게 하는 것이니라”(약 4:4). “오직 각 사람이 시험을 받는 것은 자기 욕심에 끌려 미혹됨이니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약 1:14-15).
세상 염려와 근심을 주님께 맡겨야 한다.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천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 6:31-33).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겨 버리라 이는 저가 너희를 권고하심이니라”(벧전 5:7). “가시떨기에 떨어졌다는 것은 말씀을 들은 자니 지내는 중 이생의 염려와 재리와 일락에 기운이 막혀 온전히 결실치 못하는 자요”(눅 8:14).
하나님의 뜻을 알고 행해야 한다.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롬 12:2).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치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속에 있지 아니하니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 좇아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 좇아 온 것이라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이는 영원히 거하느니라”(요일 2:15-17).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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