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 용어 사전

[스크랩] 예루살렘에 대하여

하나님아들 2017. 10. 23. 22:13
예루살렘에 대하여

 

 

 



1. 이스라엘에서 예루살렘의 위치


유대의 왕도가 있는 곳으로 성경지도를 보면 “유대 땅”은 아주 넓게 이스라엘 땅을 차지하고 있다.
사람에 따라서는 국토의 3분의 2를 점유하고 있는 것처럼 생각되리만큼 유다 지파는 광대한 남부
지역을 전부 점령하고 있다.

유대는 남북으로 길게 뻗어 내린 중앙산맥의 남단이므로 전체적으로의 지세는 남북으로 곧게 뻗어
내린 산악지대이며 대체로 해발 1천미터나 되는 고산지대이다.
이 유대지역을 세 부분으로 구분하면 중앙에 있는 산악지방(약 1 천 미터)과 그 서쪽의 경사지역
(세벨라:3-6백 미터), 동쪽의 유대광야지역이다. 유대 광야는 요단 계곡을 따라 내륙 깊숙히 발달
되어 있다.


 

2. 예루살렘 주변 조건

산들이 예루살렘을 두름과 같이 여호와께서 그 백성을 지금부터 영원까지 두르시리로다(시 125:2)

이 말씀은 주변 산들이 예루살렘을 안전하게 두르고 있음을 상기시킨다.
유대 백성들은 이러한 예루살렘의 안전성을 마음으로 느껴 하나님의 보호하심으로 노래하게 되었다.
예루살렘의 지세를 잘 알지 못할 때 시편 기자의 신앙적 찬가를 이해하기가 어려울 것이다.

예루살렘은 해발 850m의 높은 유대 산지에 위치한다. 유대산지는 이스라엘 국토의 중심을 남북으로
오직 한 산맥이 뻗어 있다.

①기드론 골짜기: 예루살렘 성을 감람 산과 동서로 분리시킴으로 천연방벽의 역할을 한다.
②힌놈의 골짜기: 서쪽과 남쪽에서 분리시켜 주변 산들로 천연방벽의 역할을 한다.
   이 두 골짜기는 예루살렘 성의 남쪽에서 합류하여 사해로 흐르고 있다.
③감람산(826, 814m): 맞은편의 예루살렘 성보다 높다.
④스코푸스 산(Scopus): 감람 산과 연결되어 북방의 방어를 담당한다.
⑤범죄산(mount of offence): 감람 산의 남쪽에 연결되어 동남쪽에서 예루살렘을 호위한다.
   솔로몬 왕 때 이방 여인들의 거처로 사용되었기에 죄악과 관계된 이름을 가졌다.
    이스라엘의 엄한 계율 때문에 왕도 이방 여인들을 성내로 끌어들이지 못했다.
⑥서산(Western Hill): 흰놈의 골짜기 서쪽에 있어 서쪽의 방어를 담당한다.
⑦나쁜 충고의 산(Hill of Evil Counsel): 흰놈의 골짜기 남쪽에 있어 남쪽의 방어를 담당.

이와 같이 예루살렘 성은 골짜기와 산들로 포위되어 있고 천연적인 요새를 이루고 있어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을 정복한 후에도 상당히 강력한 여부스 족의 요새를 점령하지 못했다.

시편 기자가 예루살렘 성이 주변에 있는 5개의 산으로 둘러 싸여 안전하게 호위되어 있음을 포착
하여 “하나님이 그 백성을 보호하심이 예루살렘과 같다”로 언급한 것은 당시 유대인이라면 그 지형
을 잘알기 때문에 공감이 갔으리라 생각된다.


3. 다윗 성

① 성의 실제 규모는 동서의 직선 길이가 150m정도, 남북의 길이는 대충 600m정도 밖에 되지 않는다.
② 가나안의 원주민인 여부스 족이 살고 있었다.
③ 아브라함도 이 땅을 방문하였다.
④ 철옹성과 같은 요새화된 성읍으로 여호수아의 군대나 사울 왕도 점령하지 못했다.
⑤ 다윗은 남방(헤브론)에서 왕이 되어 군사력을 배양한 후, 여부스 성을 공격하였다.

   왕과 그 종자들이 예루살렘으로 가서 그 땅 거민 여부스 사람을 치려 하매 그 사람들이 다윗에게
   말하여 가로되 네가 이리로 들어오지 못하리라 소경과 절뚝발이라도 너를 물리치리라 하니 저희
   생각에는 다윗이 이리로 들어오지 못하리라 함이나(삼하 5:6)

⑥ 산성 바로 아래 끊임없이 솟아오르는 우물이 있음(기혼)
⑦ 다윗 성은 다윗 이후로도 줄곧 이스라엘의 정치적, 종교적, 경제적 중심이 되어 수도로서 명맥을
    이어오고 있다.

- 종교적 : 고대로부터 종교적 성역이었고
- 지형적 : 외부인의 시야가 닿지 않는 높은 산간지대에 있어 침략을 잘 받지 않았고
- 정치적 : 분열된 남북 지역을 융화, 통일할 수 있는 중심지역에 위치했다.


4. 모리아 산과 솔로몬 성전

아브라함이 브엘세바에 거할 때, 하나님은 그에게 아들 이삭을 번제로 드리라고 말씀하셨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이 지시하시는 곳 모리아 산으로 갔다. 이 모리아 산은 지금의 성전터이다.
지금은 산의 형체를 찾아볼 수 없는데 이는 솔로몬 왕이 성전을 건축하기 위하여 터를 닦을 때
깎아냈기 때문이다. 성전터 북쪽으로 모리아 산의 상당한 부분을 깎아낸 흔적이 있다.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서 내가 네게
지시하는 한 산 거기서 그를 번제로 드리라(창 22:2)
솔로몬이 예루살렘 모리아 산에 여호와의 전 건축하기를 시작하니 그 곳은 전에 여호와께서
그 아비 다윗에게 나타나신 곳이요 여부스 사람 오르난의 타작 마당에 다윗이 정한 곳이라(대하 3:1)


5. 기후

우기(11월부터 3월)와 건기(5월부터 9월)가 있고 4월과 10월은 환절기로 짧은 봄과 가을이 된다.
우기에는 비교적 비가 자주 내린다. 때로는 이슬비, 소나기, 폭풍우가 내리나 대체로 우기의 특징은
하늘을 덮고 있는 구름이다. 구름이 하늘을 덮어 열기를 막아 주기 때문에 대지는 갑자기 푸르러지며
생명은 생기 있게 약동한다.

건기에는 비가 오지 않아 모든 수목이 타 죽는다.
깡마른 땅과 말라죽은 풀들과 우유빛 같이 뿌연 들과 그리고 엷은 적갈색의 산야를 보면 가슴이
답답하고 목이 조이는 듯한 갈증과 몸이 움츠려지는 압박감을 받는다.
이 곳 사람들은 대개 오후1시부터 4시까지는 가게 문을 닫고 쉬기 위해 집으로 들어가는데 작열
하는 열기 때문일 것이다.

히스기야의 남은 사적과 그 모든 권력과 못과 수도를 만들어 물을 성중으로 인도하여 들인 일은
유다 왕 역대지략에 기록되지 아니하였느냐(왕하 20:20)
저녁때에 다윗이 그 침상에서 일어나 왕궁 지붕 위에서 거닐다가 그 곳에서 보니 한 여인이
목욕을 하는데 심히 아름다와 보이는지라(삼하 11:2)


이스라엘 민족의 영원한 마음의 고향으로 지리적으로는 다윗 시대부터 도읍지로 지정된 도시를 말하며 영적으로는 천국을 말한다. 시편 기자는 "여호와께서 시온을 택하시고 자기 거처를 삼고자 하여 이르시기를 이는 나의 영원히 쉴 곳이라"(시 132:13-14)고 했다. "시온의 딸아 노래할찌어다 이스라엘아 기쁘게 부를찌어다 예루살렘 딸아 전심으로 기뻐하며 즐거워할찌어다"(습 3:14). 여기서 시온의 딸은 예루살렘을 여성에 비유하여 표현한 문학적 기법이다. 이는 예루살렘이 하나님에 의해 택하여진 특별한 곳이며 하나님 보시기에 기쁘고 즐거운 곳이었기 때문이다(습 3:14, 17; 슥 2:10). 이처럼 예루살렘은 하나님의 선택과 임재, 보호 그리고 영광의 장소인 동시에 또한 이스라엘 백성의 하나님께 대한 불성실과 불순종의 장소이기도 했다. 이러한 모습은 곧바로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을 가져오게 했다.

3대 종교의 성지: 이곳은 현재 유대교와 기독교, 그리고 이슬람교의 세 종교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도시로 여겨지고 있다. 이슬람교에서 이곳을 그들의 3대 성지(메카, 메디나, 예루살렘) 가운데 하나로 지정한 이유는 이슬람교의 창시자인 마호메트가 천사의 부름을 받아 마법의 말을 타고 하늘로 올라가 예루살렘까지 여행하고 현재의 '엘 아크사 사원'(Ael-Aksa Mosque)이 있는 자리에서 승천했다고 믿기 때문이다.

오늘날에도 예루살렘 시가지에는 유대교와 기독교, 이슬람교의 3대 종교가 공존하고 있으며, 더불어 유대인의 회당과 가톨릭의 성당과 이슬람교의 모스크가 각기 독특한 양식으로 어우러져 있다. 예루살렘의 안식일도 각각 다르다. 금요일은 이슬람교의 안식일, 토요일은 유대교의 안식일, 그리고 주일은 기독교의 안식일이다.

시가지는 성묘 교회를 중심으로 한 서북부는 기독교(여러 종파) 지역(Christian Quarter), 모스크를 중심으로 한 아랍 지역(Arab Quarter), 동남부의 유대인 지역(Jewish Quarter), 서남부의 아르메니아 지역(Armenian Quarter)으로 나누어져 있다. 이것은 세계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독특한 면이다.

명칭과 기원: 예루살렘의 정확한 의미와 기원은 분명하지 않다. 다만 고대 애굽의 저주 문서들이나 후기 앗수르 문서에서 이에 대한 언급을 찾아볼 수 있다. 예루살렘의 히브리어인 '예루살라임'(Jerushalayim)은 '터, 기초' 또는 '기초를 둠'의 뜻을 가진 '예루'와 히브리어의 '평화'에 해당하는 단어와 같은 어근을 가진, 그러면서도 가나안의 지방신 이름으로 보이는 '살렘'(Shalem)의 합성어이다. 따라서 원래 의미는 '살렘의 터'라는 의미였을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평화'(shalom)라는 의미가 지배적이 되면서 '평화의 도시', '평화의 터'라는 의미로 이해하게 되었다.

성경에서 예루살렘이라는 이름이 처음 나오는 곳은 아브라함이 살렘 왕이며 제사장인 멜기세덱을 만났다는 대목에서인데(창 14:17-20; 시 76:2), 이때의 살렘이 바로 지금의 예루살렘으로 보인다.

이스라엘은 여호수아가 가나안 땅을 정복하는 과정에서도 예루살렘에 거하고 있는 여부스 족속을 물리치지 못했다. 이곳이 다윗에 의해 점령된 후에야 비로소 '다윗 성' 또는 '예루살렘'으로 불렸으며, 그 이전에는 '여부스'라고 불렸다. 다윗이 이곳을 통치의 중심지로 삼았던 이유는 이스라엘이나 유다에 속하지 않으면서도 전략적으로 중요했기 때문이다.

지형적인 위치: 예루살렘은 북위 31도 52분, 동경 35도 13분에 위치하고 있다(북위 33도인 제주도의 서귀포보다 조금 남쪽임). 이곳은 지중해로부터 약 52km 정도, 사해 북쪽으로부터는 약 22km 정도 떨어진 곳으로, 해발 약 800m의 유다 구릉지 복판에 자리잡고 있다. 북쪽의 사마리아 지방과 남쪽의 헤브론을 연결하는 남북 간선 도로와 동쪽 요단 계곡의 여리고에서 서쪽의 지중해안의 욥바와 가이사랴를 연결하는 동서 간선 도로가 교차하는 교통의 요충지이자 전략적 거점 도시이다.

시편 125:2의 "산들이 예루살렘을 두름과 같이 여호와께서 그 백성을 지금부터 영원까지 두르리로다"라는 말씀처럼 예루살렘은 높은 산들에 의해 둘러싸여 있다.

예루살렘 동쪽에는 해발 830m의 감람 산이 남북으로 자리하고 있으며, 북쪽을 제외하고는 예루살렘 성으로 진입하는 모든 길들이 세 개의 깊은 골짜기에 의해 모두 차단되고 있다. 그 세 개의 골짜기는 예루살렘 성과 감람 산 사이에 있는 기드론 골짜기와 예루살렘 성 서쪽에서 시작해 남쪽으로 굽어 기드론 골짜기와 만나는 힌놈 골짜기, 그리고 성의 남북으로 길게 뻗어 있는 티로포에온(Tyropoeon) 골짜기이다. 이와 같은 지형으로 인해 예루살렘은 외적을 방어하는 데도 유리했다. 그러나 3면(동, 서, 남)은 산지였으나 북쪽은 터져 있고 중앙 산맥으로 계속 이어져 있기 때문에 예루살렘이 공격을 받을 때는 대부분 북쪽을 통해서였다.

기후: 예루살렘은 지중해성 기후 지대의 남단부에 속하는 아열대성 기후 지대이다. 1월 평균 기온은 섭씨 5-12., 8월 평균 기온은 19-28.이다. 여름이라 해도 나무 그늘이나 실내는 조금 서늘할 정도이다. 예루살렘에 비가 내리는 것은 9월부터 5월까지이며, 연 평균 강수량은 500mm 가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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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루살렘의 역사

초기 역사: 예루살렘에서 발견된 가장 초기의 증거는 르바임(Rephaim) 골짜기에서 발견된 구석기 및 중석기 시대의 부싯돌이다. 그리고 성 서편과 동편 오벨(Ophel) 지역에서 발견된 성벽 유물들은 청동기 중기 시대(BC 2100-1550)의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애굽의 저주 문서(Execration Texts)나 엘 아마르나(El-Amarna) 서판에 예루살렘에 대한 언급이 있는데, 이때는 아마도 산지 요새에 지나지 않았을 것이다. 모세 오경에서 이곳이 언급되고 있는 곳은 창세기 14:18('살렘')과 22:2('모리아 땅'에 있는 '한 산')이다. 아마도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이었던 멜기세덱이 이곳을 다스리고 있었을 것이다(창 14:18).

후기 청동기 시대: 여호수아가 가나안 땅에 들어가기 전까지는 여부스 족속의 아도니세덱에 의해 다스려지고 있었다. 이스라엘에 의해 아이 성이 무너지고 기브온마저 항복하자 아도니세덱은 다른 네 왕과 동맹하여 기브온을 공략했다(수 10:1-5). 그러나 그 동맹군은 패하고 예루살렘 왕은 다른 왕들과 함께 죽었으나 예루살렘은 함락되지 않았다(수 10:6-43)

사사 시대: 사사기 1:8과 1:21을 보면 유다 지파가 성벽 밖에 있는 그 도시의 일부를 점령했고, 베냐민 지파는 이 지역을 물려받아 성 안에 있는 여부스 족속들과 평화롭게 생활했음을 알 수 있다. 사사기 19:10-12에는 레위 사람과 그의 첩이 베들레헴에서 돌아오던 길에 황혼 무렵에 '여부스 맞은편'에 당도했다는 기록이 있다. 이때까지도 예루살렘은 여부스로 불렸던 것이다.

다윗과 솔로몬 시대: 다윗은 약 8년 간에 걸친 헤브론 통치 시기를 마무리하고 앞으로 정치적, 종교적 중심이 될 도시로 예루살렘을 지목했다. 이곳은 남쪽 지파와 북쪽 지파 그 어느 편에도 속해 있지 않았으므로, 예루살렘은 통일 왕국에 큰 기여를 할 수 있었다. 당시 여부스 족속들은 성안에 있으면 안전할 것으로 생각했으나 결국 다윗에 의해 무너지고 말았다(삼하 5:6-8). 그 후 다윗은 방비를 강화하기 위해 밀로의 성벽을 개수하고(삼하 5:9), 왕궁을 세우는 한편(삼하 5:11) 북쪽 오르난 타작 마당에 성막과 언약궤를 안치시킴으로써 예루살렘이 그 왕국의 종교 중심지가 되게 했다(삼하 5:5-6; 6:1-15; 24:8:-9; 18-25; 대상 22:1; 대하 3:1). 다윗은 자신의 왕궁을 지은 뒤 하나님의 전을 짓고자 했으나 그 일은 솔로몬에게 넘어갔다(삼하 7장).

솔로몬의 가장 위대한 업적 가운데 하나는 무엇보다 성전 건축이다. 이 건물의 구조는 뵈니게의 영향을 받아 정교하고 방이 많았다(왕상 6-8장; 대하 2-4장). 솔로몬은 자신의 궁을 짓고 예루살렘 성벽을 쌓아올렸으며(왕상 3:1; 9:15), 그 밖의 다른 곳에 많은 건축물을 남기기도 했다(왕상 9:17, 19, 24).

분열왕국 시대: 유다의 르호보암 왕 5년에 애굽의 시삭 왕에 의해 예루살렘의 성전과 궁전은 모두 약탈당했다(왕상 14:25-26). 아마샤 통치 때에는 북왕국 왕 요아스와의 싸움으로 인해 예루살렘 성벽 일부가 무너지고 다시 성전과 왕궁이 약탈당했다(왕하 14:13-14). 아마샤의 아들 웃시야(아사랴)는 예루살렘의 성 모퉁이 문과 골짜기 문과 성벽 굽이에 망대를 세워 성을 견고하게 했다(대하 26:9). 그의 아들 요담의 유일한 공적은 '여호와의 전의 윗문과 오벨 성을 많이 증축했다'는 것이다(대하 27:3). 히스기야에 의해 성전이 정결하게 되었으며(대하 29:3-19), 예루살렘의 성벽과 문들과 망대들이 건축되어 더 요새화되었다(대하 32:5). 그는 무엇보다 예루살렘이 포위되었을 때에도 성안에 물을 공급할 수 있는 수로를 만들기도 했다(왕하 20:20; 대하 32:2-4). 이러한 히스기야의 예방조치들이 앗수르의 침입을 막는 데에는 큰 도움이 되지 못했으며 오히려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기적적인 구원을 받았다(왕하 19:20-37). 히스기야의 아들 므낫세 때에는 '무죄한 피를 심히 많이 흘려 예루살렘 이 끝에서 저 끝까지 가득 채웠을 정도였다'(왕하 21:16). 이러한 그의 범죄로 인해 하나님은 "사람이 그릇을 씻어 엎음같이 예루살렘을 씻어 버릴지라"(왕하 21:13)고 하셨다. 이 말씀은 BC 586년 바벨론의 느부갓네살에 의해 성취되었다. 예루살렘 성전과 대부분의 건물들은 파괴되고 성벽들도 많이 훼손되었으며 남은 주민들은 추방되었다(왕하 25:11-12, 21; 렘 52:28-30).

예루살렘 멸망 이후: 바벨론 포로 귀환 후, 곧 에스라와 느헤미야에 의해 재건축되기 전까지

<비전성경사전>

/출처ⓒ† : http://cafe.daum.net/cgsbong


출처 : 창골산 봉서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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